소설리스트

제34장 (35/129)

제34장. 혼동(混同)-너는 누구냐?

천천히 마당으로 나선 혈존의 시선에 군병들이 쏘아올린 쇠뇌로 가득 찬 하늘을 유유히 헤치고 내려오는 이가 들어왔다.

“제법이로구나.”

갑작스런 음성에 흑면조장의 시선이 그 음성의 주인을 찾았다.

“너, 너는!”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하자 혈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아는 모양이로구나.”

혈존의 말에 흑면조장은 짧은 휘파람을 불었다.

삐익-

그 휘파람에 호응하듯 사방에서 연속적으로 휘파람을 불며 순식간에 복면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이들을 둥글게 군병들이 둘러쌌다.

“혼자는 자신이 없던 모양이로구나.”

“이번엔 그쪽이 자신이 없겠군.”

“뭐, 별로. 난 지원군이 많잖아.”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을 뽑아든 무장들이 우르르 혈존의 곁으로 나섰다.

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린 흑면조장의 명이 수하들에게 떨어졌다.

“쳐라!”

순간 복면인들이 일제히 짓쳐들었다.

그들 속에 섞인 흑면조장이 흑면 일호, 그리고 청면 일호와 함께 혈존에게 달려들었다.

셋의 합공을 혈검으로 간단히 걷어 올린 혈존이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쿵-

진각에 주변의 기가 흔들린다.

순간, 외공을 익힌 무장들과 달리 내공을 사용하는 복면인들이 주춤거렸다.

그것을 기회로 선공을 빼앗긴 무장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 모습에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인 혈존의 혈검이 자신을 노려보는 흑면조장을 위시한 세 복면인에게 향했다.

“오라!”

혈존의 도발에 흑면조장을 비롯한 세 복면인이 노성과 함께 달려들었다.

붉은 검신이 점에서 선으로, 그리고 면으로 바뀌며 공간을 채웠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변화에 다급히 신형을 세워봤지만, 이미 붉은 강기의 권역에 들어간 몸은 갈라져 나가고 있었다.

“크윽.”

간신히 뒤로 물러선 흑면조장과 달리 흑면 일호와 청면 일호는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재빠른 친구로군. 자- 이젠 혼자니 어쩔 텐가?”

혈존의 물음에 주변을 훑어보는 흑면조장의 눈에 절망감이 깃들었다.

다른 이들은 무술을 제대로 익힌 무장들의 조직적인 견제 속에서 병사들이 날린 쇠뇌에 하나둘씩 거꾸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빠져나가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생각을 한 흑면조장이 검병을 부서져라 잡았다.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짓쳐드는 흑면조장의 검을 걷어 올린 혈존의 검이 사각으로 파고들었다.

스걱-

황급히 몸을 돌린다고 돌렸는데, 옆구리를 베고 지나가는 검을 완전히 피해내지 못했다.

붉게 물들어가는 옆구리의 혈도를 눌러 출혈을 막은 흑면조장이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 후. 어렵지 않게 공격을 흘린 혈존의 검이 흑면조장의 목을 휩쓸어갔다.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검을 당겨 자신의 가슴 어림을 보호한 혈존의 앞에서 불똥이 튀었다.

깡-

맑은 쇳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단검에서 시선을 돌린 혈존의 앞에 붉은 복면에 혈포를 걸친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 봉공!”

“미련한 놈. 예서 다 죽을 생각이었더냐?”

“소, 송구합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흑면조장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노려보던 봉공이 고함을 질렀다.

“물러나라!”

봉공의 고함에 장수들과 뒤엉켜 있던 복면인들 중 살아남은 대여섯이 재빠르게 봉공의 곁으로 물러났다.

“누구지?”

자신과 같은 혈포를 입은 상대에게 혈존은 알 수 없는 떨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혈존에게 봉공의 차가운 음성이 날아들었다.

“너희 혈가 놈들이 버린 반쪽.”

“뭐?”

“흥, 벌써 잊었던 모양이군. 하긴 자신들이 살기 위해 들판에 버려둔 반쪽을 기억할 리 없겠지.”

싸늘한 눈빛으로 곧바로 달려들 것 같았던 봉공은 저 멀리 전각으로 시선을 주더니 차갑게 내뱉었다.

“너와는 나중에 계산을 다시 하지. 돌아가자!”

봉공의 명에 복면인들은 군병들의 쇠뇌의 빗속을 유유히 뚫고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뒤, 봉공의 시선이 향했던 곳을 바라본 혈존의 눈엔 전각 앞에 나와 서 있는 고덕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제야 혈존은 봉공이라 불린 혈포인이 조용히 돌아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직 검마가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싸늘하게 전해져 오던 봉공의 기세를 떠올리며 혈존은 그것이 다행인지 아니면 아쉬운 기회였는지 좀처럼 확신할 수 없었다.

* * *

위기를 느낀 도지휘사는 주변에 주둔 중이던 향방군 오천을 추가로 불러들여 경비 병력을 늘렸다.

거기에 고덕의 기별을 받은 소흥 왕부에서 혈마가 월야와 함중을 이끌고 달려왔다.

“오랜만이오.”

혈마의 인사에 혈존도 답례를 했다.

“오랜만이오, 부교주.”

“한데 어찌 두 분이 함께…….”

“내 생명의 은인이야.”

고덕의 말에 혈마가 그게 무슨 가당치도 않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예?”

“함정에 빠져서 조금 위험했다.”

“패주께서 말씀입니까?”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혈마의 음성에 고덕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래.”

“혹 상대가 무극검이나 북천무제, 아니면 대범라마였습니까?”

같은 천하오존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는지, 혈마가 거론한 이들은 모조리 천하오존들의 이름뿐이었다.

“아니다.”

“하면……?”

“쓸데없는데 말은 그만하지.”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이 위기에 처했던 이야길 하는 걸 원치 않는다. 그것은 고덕도 마찬가지였다.

노성이 묻어나는 고덕의 핀잔에 마지못한 듯 혈마가 입을 다물었다.

“아, 예…….”

그런 혈마에게서 시선을 돌린 고덕이 월야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고덕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직감한 월야의 눈에 뿌연 습막이 차올랐다.

“제, 제대로 죽은 겁니까?”

“내 배가 아플 정도로 멋지게 갔다.”

“그럼 되었습니다.”

애써 눈물을 감추는 월야에게서 시선을 돌린 고덕이 이번엔 함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국중경도입니까?”

“내 이름으로 왕야께 장군으로 추서를 올려 달라 이르게. 그의 희생 덕에 군주가 살았다고.”

“흐흑… 예, 대협.”

별난 성향들 탓에 평생의 숙원이었던 군문에서도 쫓겨나고, 가문에 먹칠했다는 오명을 쓰고 가문에서도 축출된 이후 함께 모여 서로를 의지하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가 먼저 돌아갔다는 말에 함중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런 이들을 놓아둔 고덕이 군주가 치료 중인 전각으로 들었다.

“멈추시오!”

도지휘사가 직접 골라 배치한 무장들의 제지에 고덕이 조용히 말했다.

“군주마마의 개인 경호 무사요. 상태를 보았으면 하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지휘사 영감의 명이 계셨으니 돌아가시오.”

장수의 말에 발끈하려는 고덕의 귀로 문정 군주의 가냘픈 음성이 들려왔다.

“안으로 뫼셔라.”

군주의 명에 마지못해 장수들이 물러났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는 고덕의 시선에 힘없이 기대어 앉아 있는 문정 군주의 모습이 들어왔다.

“괘, 괜찮으십니까?”

“예. 그리 나쁘지 않아요. 고 무인은 어떤가요?”

“예.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면 다행입니다. 한데, 다른 두 사람은……?”

문정 군주의 물음에 고덕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은 문정 군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모두 저 때문이군요.”

“군주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임무일 뿐이지요.”

“아니에요. 제가 괜한 일을 만들지만 않았더라도…….”

“그런 일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단지 그날이 선택되었을 따름이지요.”

고덕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문정 군주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런 군주를 바라보는 고덕의 마음은 잘게 부서지는 것 같았다.

문정 군주를 방문하고 돌아 나온 고덕은 다시 혈존, 혈마 등과 함께 자리했다.

“그럼 정천맹이 혈교의 잔당을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단 말이야?”

고덕의 물음에 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해서 우리도 움직이게 된 것이오.”

“신교에선 누가 나왔나?”

“아무도…….”

혈존의 답에 고덕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혈교의 일이 공론화되었는데 신교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단 말이야?”

“솔직히 나도 그 점이 이해가 가지 않소.”

혈존의 답에 고덕의 시선이 혈마에게 향했다.

“문제가 있거나 하지 않았나?”

고덕의 물음에 혈마가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그럼 특별하지 않은 건?”

“요사이 교주께서 연공을 위한 폐관이 잦다는 것 외엔…….”

“폐관? 교주가 폐관을 해?”

“예. 처음엔 저희도 놀랐습니다만, 지금은 자주 그러십니다.”

교주는 폐관을 지독히도 싫어한다.

마교의 고수 대부분이 그렇듯이 어린 시절에 팔려 와 마교의 교육기관에서 거의 갇혀 살았던 기억 때문이었다.

그런 교주가 뜬금없이 폐관을 즐긴다는 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고덕의 신경을 건드렸다.

“다른 변화는 없었나?”

“예? 다른 변화요?”

“그래. 예전엔 하지 않았던 짓을 한다던지 하는.”

“그게… 새로 영입한 고수들의 수가 많이 늘었습니다.”

“고수를 새로 들여? 설마 교주가?”

“예.”

외부 고수의 영입을 가장 반대하던 이가 바로 교주다.

이유는 신교의 정신을 흐린다는 것이었지만, 속내를 놓고 보면 밖에서 들어온 고덕으로 인해 항상 자신의 위치를 위협받던 교주의 방어 심리 같은 것이었다.

그랬던 교주가 외부 고수를 영입하는 데 앞장선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뭔가 있어. 교주가 그럴 인사가 아닌 것을…….”

“하지만 그 외엔 언행이 그다지 달라지신 것은 없습니다.”

“다른 건 달라진 게 없는데 그런 점이 달라졌다면 더 수상한 거야.”

고덕의 말에 혈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사람이 행동이 바뀌게 되려면 먼저 생각이 바뀌어야 해. 그러다 보면 자연히 다른 행동들도 바뀌기 나름이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둘 중 하나야.”

“둘 중 하나요?”

“그래.”

“그게 뭡니까?”

“미쳤거나 사람이 바뀐 거지.”

“예에! 설마요. 그 두 가지 경우 다 아닙니다.”

“어찌 그리 장담하지?”

“저야 속아 넘어갔다고 쳐도 친위 무사들이 그런 점을 놓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교의 친위 무사들은 경호만 맡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침입도 경계하기 때문에 자신이 경호를 맡은 이의 행동도 관찰하도록 되어 있었다.

외부의 누군가가 침입해 교의 중요 인사를 바꿔치기했다면 가장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는 게 제일 가까이서 보필하는 친위 무사들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친위 무사가 아니라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마누라도 모르게 바꿔치기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게 바로 세상이니까.”

그 말에 혈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만에 하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신교는 백척간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 하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가봐야겠지.”

고덕의 말에 혈마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패주께서 돌아오신다면 어떤 문제라도 정리가 될 것입니다.”

은연중 패주를 따르는 무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신교였다.

하긴 신교를 지키는 무사들의 우두머리가 원래 패주였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것을 교주가 그다지 반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혈존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뭐가 어떻게 되던 지금은 우선 몸부터 추스르는 게 선행되어야 할 거요.”

틀린 말이 아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고덕의 몸은 여전히 예전 능력의 절반밖에 회복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야겠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고덕의 음성에 실린 각오가 무거웠다.

* * *

고덕이 몸을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은 한 달을 조금 넘긴 시점이었다.

그동안 문정 군주의 몸도 거의 다 나아서, 운신하는 데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 시간 동안 강호는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혈교의 잔당을 찾아 나섰던 정천맹의 고수들이 의문의 죽임을 당했는가 하면, 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무사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탓에 정천맹은 잔뜩 긴장한 채 만약에 대비해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관부는 관부대로 소란스러웠다.

광서성에서 일어난 안창의 반란군이 결국 금사 왕부가 위치한 귀주성까지 세력을 확대한 까닭이었다.

당황한 황군은 금사 왕부를 구출하기 위해 무리한 공격을 감행했다가 십만의 정병을 잃는 대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 어수선한 시기에 고덕의 호위 아래 문정 군주가 소흥 왕부로 귀환했다.

왕부로 돌아온 고덕은 곧바로 마교로 가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그가 자리를 비워도 안심할 수 있을 만큼 왕부의 경비력을 끌어올려 놔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던 고덕에게 생각지 못한 서찰이 전해졌다.

“뭐가 왔다구요?”

부상에서 회복되어 복직한 이첨은 되묻는 고덕에게 다시 말했다.

“황상의 밀지가 도착했소.”

“밀지? 그런 건 관인이 받는 거 아니오?”

“대명의 백성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 속히 예를 취하고 받아 뫼시시오.”

이첨의 말에 고덕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예는 무슨… 서찰이나 주시오.”

“어허, 예를 갖추지 못하겠소!”

여전히 고리타분한 이첨의 호통에 고덕이 짜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 싫으면 관둡시다. 나도 별로 받아 보고픈 생각이 없으니.”

그리 말한 고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얼굴이 벌겋게 변한 이첨이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던 밀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선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 나가버렸다.

“성질머리하곤…….”

구시렁거리던 고덕이 밀지를 펼쳐 들자, 넓은 종이에 덩그러니 네 글자만 쓰여 있었다.

“약속 이행, 척살 반적? 뭐야, 이게. 결국 나보고 자객질을 하란 말이잖아.”

그 일이 지겨워 신교를 나온 고덕이었기에 황제가 내린 밀지는 더없이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나저나 반적이면 안창인가 하는 자를 말하는 건가?”

반군의 수장이다. 아무리 일성의 최고위자일 뿐이었다 해도 황군도 어쩌지 못하고 전전긍긍할 정도로 커버린 자라면 쉽게 볼 수 없을 위인은 분명했다.

“약속을 했으니 피할 수도 없고, 결국 일을 해야 한단 말인데…….”

구시렁거리면서도 고덕은 자신이 구할 수 있는 한 안창에 대해 최대한의 자료를 수집하느라 열심이었다.

모아둔 자료를 살펴보던 고덕은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자료대로라면 반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광서성 순무(巡撫) 안창은 천고의 충신이었던 것이다.

“이런 인간이 배신을 했다라……? 뭔가 석연치 않아.”

“뭘 그리 중얼거리는 겁니까?”

오랜만에 찾아온 호철랑을 고덕은 반갑게 맞았다.

“오랜만이오.”

“예. 소흥부에 일이 있어 외부로 돌았더니 그리되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반군에 가담하라는 격문이 나돌아 그를 수사하라는 왕명이 내려와 조금 분주했었지요.”

“아니, 광서의 반군에 가담하라는 격문이 예까지 나돈단 말입니까?”

“절강뿐이 아니라 중원 전역에서 난리도 아니랍니다. 그 탓에 판관들만 죽어나는 거지요.”

“아니, 격문이 나도는데 판관들이 왜요?”

“잡아들이지 못한다는 질책 때문이지요.”

“그거야 안찰사들의 일이 아니오?”

“하지만 잡아들인 용의자들 중에 범인을 가려내는 건 우리 판관들의 몫이니까요.”

“그 말은 안찰사들이 무턱대고 잡아들인다는 소리요?”

“그들도 웃전의 추상같은 명에 어쩔 수 없는 게지요.”

“아무리 그렇다고…….”

“그러니 판관들의 일이 많아진 거지요. 아무나 죄를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헐게 조사를 벌일 수도 없으니 일이 많아질 밖에요.”

“허허, 답답한 일이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고 무인께선 무슨 걱정으로 그리 복잡한 표정이었습니까?”

호철랑의 물음에 고덕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게, 안창이란 인물 때문이라오.”

“반란 수괴인 안창 말씀입니까?”

“맞소.”

“고 무인께서 그 때문에 심란하다니 의외로군요.”

“왕부에 몸을 담고 있으니 알고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니겠소.”

“그건 그렇군요.”

“그래서 조사를 하다 보니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오.”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자료들만 보면 이건 천하의 충신이니 하는 말이 아니겠소?”

“하하, 그렇지요. 그는 반란을 일으키기 전까진 모든 신하들의 귀감으로 삼을 정도로 그 충성심이 곧고 깊은 자였지요.”

“한데, 그런 자가 어찌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단 말이오.”

“그러니 인면수심의 인사가 아니겠습니까?”

호철랑의 말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자료가 사실이라면 그런 사람으로 보기엔 어렵기에 하는 말이외다.”

“어떤 점 때문에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육 년 전 그가 산동성 순무일 때 벌인 일을 보면 가뭄에 지친 백성들을 위해 사재를 털었더이다.”

“그야 관리들 사이에선 종종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이자처럼 아예 가진 걸 몽땅 털어낸 이는 없을 게 아니겠소.”

“하하하, 그렇긴 하지요.”

“그뿐이 아니라 이자가 군문에도 뛰어나 보이더구려.”

“왜구 토벌을 말씀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렇소. 사 년 전에 벌어진 왜구 토벌에서 꽤나 인상적인 전과를 세웠더이다.”

“예. 저도 기억하고 있지요. 아마 이천의 병사들로 칠천의 왜구를 베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맞소. 그렇다고 특별한 군대를 동원한 것도 아니고, 기록대로라면 전술이 뛰어난 듯하던데…….”

“맞습니다. 나름 기발한 작전이었지요.”

“그런데 그 전과를 모두 황제의 명을 좇은 것이라 했더구려.”

“상투적인 아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당시 황제는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으니, 잘 보여 봐야 득세하던 왕부들의 견제밖에 받을 것이 없던 시절이라는 게 문제라는 게요.”

고덕의 말에 호철랑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생각 외로 깊게 보셨습니다.”

“깊게 보고 안 보고가 아니라 그냥 보이는 일들이 아니오?”

“그 그냥 보이는 일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으니 답답한 게지요.”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좀 청합시다.”

고덕의 물음에 호철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선 살 구멍부터 파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라는 걸 말씀드립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으니 이야기나 해보시오.”

“먼저, 일단의 사람들은 안창이 황제를 압박하는 왕부들을 치기 위해 친위 반정을 꾀하고 있다는 의견입니다.”

“친위 반정이라…….”

“예. 그 증거들로 안창이 압박한 곳이 가장 권력이 강했던 금사 왕부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점령당했다는 곳 말이오?”

“예. 왕부들 중에서는 가장 세력이 크고, 사병도 많았지요.”

“그런 곳을 쳐서 이겼다.”

“그러니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한데, 친위 반정이라면 금사 왕부를 구하기 위해 황군이 동원된 것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겠소?”

“출병했던 황군은 금사 왕부의 세력권이던 귀주성과 호남성의 향방군이었습니다. 그들이 출병하는 데 일 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걸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출병을 늦추었단 말이오?”

“아마도 그들은 황상에게 출병을 청하는 상소를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올렸을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출병을 허락하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니겠소?”

“아마도 더 이상 그들의 출병을 지연시킬 명분이 없으셨던 게지요.”

“글쎄올시다…….”

정말 친위 반정이라면 황제가 자신에게 보낸 밀지의 의미는 대단히 복잡해진다.

그 탓에 고덕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천생이 머리 아픈 건 질색인 고덕이었던지라 뭔가를 아는 것 같은 호철랑에게 넌지시 사안을 던져 주기로 했다.

“만에 하나 말이오. 황제가 누군가에게 약속 이행, 척살 반적이란 밀지를 내렸다고 칩시다. 그럼 그게 누굴 죽이란 말 같소?”

고덕의 물음에 이채를 띤 호철랑이 잠시 그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만에 하나 누군가에게 그 밀지를 내렸고, 그 밀지를 받은 이가 정말로 믿을 만한 이였다면 황상은 그를 안창에게 보내려는 것일 겁니다.”

“왜? 친위 반정이라면서 이젠 소용이 없어 죽이려는 거란 말이오?”

“그건 아닐 겁니다. 황상이 믿는 이는 그리 허술한 이가 아니겠지요. 아마도 황상은 밀지를 받은 이가 이 일에 의구심을 품고 결국엔 안창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길 원했을 것입니다.”

“제길. 그럼 그렇게 쓰지, 헛갈리게…….”

대놓고 투덜거리는 고덕을 바라보며 호철랑이 미소를 지었다.

“부럽습니다.”

“뭐가 말이오?”

“누군가에게 그런 신뢰를 받는다는 것이 말입니다.”

“아! 그거 나 아니오.”

“알고 있습니다. 전 단지 밀지를 받은 그가 부럽다는 말이지요.”

알 듯 말 듯 묘한 미소를 짓는 호철랑을 바라보던 고덕이 물었다.

“혹시 요새 시간 낼 수 있겠소?”

“바쁘긴 합니다만, 고 무인이 원한다면 잠시 짬을 내보지요.”

“좋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나랑 어디 좀 갑시다.”

“지금 바로 말입니까?”

“그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소. 누구도 내가 어디에 가는지 모르고, 그 어떤 사람도 호 판관이 날 따라간 줄 모를 테니 말이외다.”

“흠… 그도 그렇군요. 좋습니다. 가시지요.”

호철랑의 수긍에 피식 웃어 보인 고덕이 그를 옆구리에 끼곤 다짜고짜 창문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까마득한 상공으로 솟아오른 탓에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호철랑은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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