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추적(追跡)-뒤를 밟히다
절강성 천목산 기슭의 버려진 사당.
혈포의 봉공 앞에 고개를 늘어트린 흑면조장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하면, 네 말은 그 모든 작전이 검마의 등장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 말이냐?”
“바로 그러합니다.”
“검마의 능력이 과연 그 모든 것을 알아내고 해결하러 다닐 정도가 된다고 보는 게야?”
“답은 그렇습니다. 실제로 각 사건들의 현장마다 결정적인 순간이면 검마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면, 뭐야? 검마의 뒤에 배후 세력이 있다?”
“맞습니다. 나타난 상황들을 놓고 보았을 때 검마 혼자 활동해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이는 그것이 가능하도록 지원하는 배후 세력의 존재를 강력하게 제시한다 하겠습니다.”
“글쎄… 들어보면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아도 마교를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검마가 어디 딴 곳에 소속되었다는 것도 그렇고, 우리의 촉각에 걸리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조직이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렵네.”
“하오면 봉공의 판단은 무엇입니까?”
“우연.”
“예?”
“우연인 게지. 각 사건의 연결 시점을 보면 이전 지역에서 검마가 이동할 만한 특이점이 발견된다. 하니, 그 특이점을 따라 이동한 결과가 우리의 작전들과 일치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번은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그건 의도적으로 연출된 상황일 확률이 훨씬 높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정말 마지막 기회입니다. 제게 암군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이미 칠백을 잃은 후야. 더 이상의 손해가 발생한다면 내가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목숨으로 완수해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지금 상황에서 흑면조장의 목을 베면 그 휘하의 흑면조는 물론이고 청면조에서도 과실을 가려 한두 명은 무사할 수 없다.
그런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봉공은 흑면조장에게 마지막 기회를 부여했다.
자신의 지휘하에 놓여 있던 암군 이천의 지휘권을 모조리 흑면조장에게 넘겨준 것이다.
개개인이 일류 고수를 넘은 이천의 암군을 확보한 흑면조장은 제일 먼저 검마의 위치를 확인한 후, 그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리고 검마가 왕부를 나서는 순간 총력을 기울였다.
흑면조장의 움직임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봉공은 그가 움직이자 곧바로 적면조를 투입했다.
마지막 기회를 그냥 놓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 *
소흥 왕부의 마차 안.
별안간 결정된 소풍은 단출하게 꾸려졌다.
마부석에 앉은 일주와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르는 국중경, 그리고 마차 안의 문정 군주와 시녀 하나, 그 지붕 위에 앉은 고덕뿐이었다.
그 마차를 향해 주변이 일제히 몰려드는 것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이천의 암군이 주축이 된 공격이 시작되자, 고덕은 곧바로 마차를 통째로 부수어버렸다.
마차를 지키고 문정 군주를 보호하는 것보다는 문정 군주 개인을 들쳐 업고서 돌파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선두로 나선 일주가 문정 군주를 업은 고덕과 시녀를 업은 국중경에 앞서 달리며 쇠도리깨를 휘둘러 길을 열었다.
퍼버버버벅-
끔찍한 소음과 함께 신체 일부가 짓터져 나간 복면인들이 흩어지는 곳을 길로 삼아 필사적인 도주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주변 일대 전체에 걸쳐져 구성된 죽음의 함정은 그들을 고이 놓아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쐐에에에액-
기다란 소성을 이끌고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비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국중경은 자신의 등에서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시녀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뿐,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살인에 대한 저항은 그를 순식간에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밀어내기에 바쁜 국중경의 약점을 잡은 복면인들이 사생결단의 자세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위기에 봉착한 국중경을 돕기 위해 선두에 섰던 일주가 타원형을 그리며 뒤로 돌았다.
퍼버버벅.
주변을 피떡으로 만들며 위기에 빠졌던 국중경은 구해냈지만, 조밀하게 짜인 원진 안에 갇혀 버린 탓에 탈출로는 완전히 막혀 버렸다.
스걱-
죽자고 달려든 복면인을 차마 베어버리지 못한 국중경의 공간을 지난 복면인의 검이 그를 등지고 싸우던 일주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헉-”
“대, 대형!”
제법 깊은 상처를 입었는지 다량의 피가 흘러내렸지만, 쇠도리깨를 정신없이 내쳐야 하는 일주는 지혈할 시간마저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또 하나의 검이 국중경의 공간을 지났다.
스걱-
또다시 파육음이 일고, 등을 길게 베인 일주의 신형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런 일주를 향한 검이 국중경의 공간으로 쇄도했다.
퍼걱!
국중경의 넓은 도에 검과 함께 날아간 복면인의 팔이 바닥에서 펄떡거렸다.
그리고 이후,
스걱-
그 상태에서도 공격의 의지를 늦추지 않는 복면인의 머리를 날려 버린 국중경의 도가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등 뒤가 굳건해지자 일주에게 여유가 생겼다.
그 짧은 여유를 이용해 상처를 지혈한 일주의 움직임이 거칠게 변했다.
쇠도리깨가 부수고 대도가 공간을 갈랐다.
피떡으로 짓이겨진 시신이 사방에 널브러졌고, 날카롭게 벼려진 도날에 잘려진 시신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질펀한 혈향, 순식간에 늘어나는 시신들 속에 또 하나의 참경이 벌어졌다.
팡, 팡, 팡, 팡.
허공에 작은 폭발이 일어날 때마다 근처에 있던 사람이 함께 폭발했다.
피가 뿌려지고 육편이 허공에서 쏟아져 내렸다.
홀로 사방을 정신없이 휘저으며 이동하는 고덕의 신위는 가히 전신 그 자체였다.
문제라면 등에 업은 문정 군주였다.
등 전체에 대한 공격을 일체 허용하지 않기 위해 고덕의 움직임이 과도해졌고, 그만큼 동작이 만들어내는 공간도 커졌다.
그렇게 동작 간 공간이 벌어지자, 방어해야 할 지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그 공간의 일부를 붉은 복면을 뒤집어쓴 이들이 찢고 들어왔다.
스걱-
“아합.”
가냘픈 소성.
자신이 아니라 문정 군주의 입에서 터진 신음이다.
주륵-
무언가 흘러내려 옆구리를 적시는 탓에 손을 스쳐 확인하니 손바닥이 온통 붉다.
“군주!”
“괘, 괜찮아요.”
음성이 가늘고 희미하다.
순간 고덕의 눈에 폭발적인 광기가 일어났다.
끼아아아악-
고덕의 허리 어림에서 시작된 귀곡성이 파랗게 일어서는 강기를 이끌고 십여 장을 달렸다.
푸스스스-
고덕의 전면에 가득하던 적이 걸레처럼 찢어져서 흩어졌다.
그 피 보라를 뚫고 달린 고덕의 신형이 격전을 치르던 일주와 국중경의 곁으로 다가섰다.
“맡아.”
이미 깊은 상처로 기식이 엄엄한 일주를 대신해 군주를 받아드는 국중경을 확인한 고덕의 신형이 빛이 되었다.
끼아아아악-
다시금 일어서는 귀곡성과 파랗게 일어서는 강기의 파도…….
피 보라가 자욱하게 일어서는 주변으로 목불인견의 참상이 펼쳐졌다.
검이 갈리고, 옷이 흩어지고, 사람이 조각처럼 부서져 내렸다.
순식간에 다량의 피가 공중에 비처럼 휘날리며 온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나무가 피 꽃을 피워 가지에 걸었고, 들이 붉게 물들어 윤기를 내었다.
내가 핏물을 흘려보냈고, 바람이 혈향으로 가득 찼다.
사방 수십 장이 피, 피, 피뿐이었다.
그 아수라 지옥도의 끝에 고덕의 신형이 우뚝 섰다.
살아남은 적은 전무. 이천이 넘는 적이 대부분 허공에 피를 뿌리고 잘게 다져진 육편이 되어 들과 숲에 뿌려졌다.
휘청-
몸을 휘청인 고덕의 입가로 선혈이 타고 흘렀다.
과도한 진기의 운영이 천하의 검마에게 내상을 가져온 것이다.
더 이상은 불가능. 추가적인 적의 도발을 피해 군주를 등에 업은 고덕과 일주를 부축한 국중경이 피로 물든 대지를 황급히 떠났다.
흑면조원과 청면조원들을 이끌고 뒤늦게 현장에 나타난 흑면조장은 눈앞에 펼쳐진 참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 이게 사람이 만든 모습이란 말입니까?”
흑면 일호의 경악성에 다른 이들조차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놀라고 있는 것도 잠시. 추적에 일가견이 있는 흑면 이호가 땅을 뒤지다 말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피, 내상입니다.”
“뭐?”
“속에서 죽은피가 방울져 흘렀습니다. 놈이 내상을 입었습니다.”
흑면 이호의 말에 복면인들의 기세가 일변했다.
상대가 흉포한 호랑이에서 상처투성이인 도망자로 변했다.
범접하지 못할 괴물에서 도전해볼 만한 사냥감으로 뒤바뀐 셈이었다.
“찾아라! 반드시 죽인다!”
흑면조장의 명에 흑면조원들과 청면조원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 * *
미리 추적에 대비해 급격한 이동을 보인 고덕과 일행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내상이 깊은 고덕도 문제였지만, 중상을 입은 일주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거기에 온통 상처로 도배하다시피 한 국중경의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특히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문정 군주의 상태는 시시각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간 모두 잡힙니다.”
일주의 말에 고덕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고덕의 시선에 씨익 웃어 보인 일주가 쇠도리깨를 지팡이 삼아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가볍지만 작은 진동, 추적이 붙었습니다. 적어도 오 리. 이렇게 가다간 이각 안에 따라 잡힙니다.”
“안다.”
“제가 남겠습니다. 가십시오.”
“널 구하러 올 수 없다.”
“압니다.”
“덧없는 죽음이 될 거다.”
“어차피 지은 죄도 적지 않으니 이런 결말도 나쁘지 않습니다.”
일주의 말에 문정 군주를 다시 고쳐 업은 고덕이 등을 돌렸다.
“잊지 않으마.”
“지옥에서 좋은 자리 맡아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이번엔 말고 다음에 오십시오.”
“가능하다면…….”
짧은 답을 남겨 놓은 고덕의 신형이 빠르게 달려 나갔다.
“대형…….”
“시간이 없다. 가라.”
일주가 입은 치명상의 대부분이 자신이 적을 베지 못했을 때 생긴 상처다.
국중경 자신이 조금만 빨리 틀을 깼어도 상황은 많이 변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미치도록 후회스럽게 만들었다.
그런 자신을 밀어내는 일주의 재촉에 국중경의 무거운 발걸음이 고덕의 뒤를 따랐다.
멀어져 가는 동료의 뒷모습이 무섭게 다가오는 추적자들의 기파와 엇갈렸다.
퍼벅-
추적자보다 먼저 도착한 강기를 쇠도리깨로 막아낸 일주가 피로 물든 이를 드러냈다.
“이거 생각보다 화끈한걸…….”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복면인들의 시선이 흑면 이호에게 몰렸다.
“저놈의 후방으로 이어집니다.”
“그럼……?”
“이놈은 버려진 말입니다.”
흑면 이호의 평가에 흑면조장의 명이 떨어졌다.
“흑면 팔호와 청면 사호가 처리하고 따르라. 나머진 추적을 재개해라!”
흑면조장의 명에 모조리 날아오르는 이들의 전면으로 광폭한 기세가 휘둘렸다.
부아아아앙-
심상치 않은 기세에 몸을 뽑아 올렸던 이들 모두가 뒤로 물러섰다.
“크크크, 버려진 말이라며. 그 말을 주저앉히기 전엔 어림없어.”
붉은 이를 드러내고 웃음 짓는 일주의 신형에서 기세가 폭발적으로 뻗어 나왔다.
“선천진기! 피해!”
흑면조장의 경고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흑면 오호의 머리가 쇠도리깨에 강타당해 짓터졌다.
“이노- 옴, 죽인다!”
분노에 휩싸인 흑면조장의 공격을 일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화경에 이른 흑면조장의 공격을 이제 초극의 극의를 밟은 일주가 받아넘기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은, 일주가 자신이 가진 모든 공력을 쥐어짜 잠들어 있던 선천진기를 깨웠기 때문이다.
선천진기는 하늘과 연결된 기운.
그 광대함과 광포함은 화경이라 해도 함부로 하지 못할 만큼 커다랗다.
사람들이 그 무서운 힘을 알면서도 깨우지 못하는 것은 뒤를 따르는 혹독한 대가 탓이었다.
근 십여 초를 무서운 힘으로 흑면조장과 맞서고 또 자신을 넘어서려는 복면인들을 막아서던 일주의 칠공에서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선천진기를 깨운 대가 중 하나다.
온몸의 피가 칠공을 통해 모조리 빠져나간다.
그리고 몸에 대한 통제를 상실한 채 천천히 죽어간다.
일설에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칠 일이 걸린다고도 했다.
잠시 후, 힘없이 무너진 일주를 향해 짓쳐드는 흑면 이호를 흑면조장이 제지했다.
“그냥 둬라. 그게 이놈의 고통을 늘려 줄 것이다. 가자!”
흑면조장의 명에 복면인들이 자리를 뜨자, 뒤에 남겨진 일주의 신형이 푸들거리며 신음이 흘렀다.
* * *
일주를 뒤에 남겨 둔 채 무서운 속도로 달리던 고덕은 뒤따르던 국중경이 뒤처지는 걸 느끼며 발걸음을 세웠다.
“지금 쉬면 잡힌다.”
“먼저 가십시오.”
“뭐?”
고덕의 반문에 국중경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무장으로 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중경!”
“가십시오. 숲이 흔들리는 걸로 보아선 대형도 그다지 긴 시간을 벌진 못한 모양입니다.”
국중경의 말대로 숲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걸로 보아 추적자들이 지척으로 접근한 것 같았다.
“전할 말이라도 있나?”
고덕의 물음에 국중경이 미소를 지었다.
“왕부에 전해 장군이라도 달아주십시오.”
“국중경…….”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살아주십시오. 대협!”
국중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고덕의 신형이 다시 질주를 시작했다.
멀어지는 고덕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추적자들이 들이닥쳤다.
“흐압!”
강력한 기합과 함께 휘돌린 대도가 복면인들을 갈랐다.
추팡-
일격은 실패. 대신 기다란 자상을 국중경의 옆구리에 남겨 놓았다.
하지만 인상조차 찡그리지 않은 국중경의 대도가 수평으로 날았다.
스걱-
옆구리를 베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흑면 칠호의 팔꿈치가 잘려 나가며 피를 뿌렸다.
퍽-
흑면 칠호를 구하기 위해 청면 삼호가 내지른 권격이 뒤늦게 국중경의 가슴을 쳤다.
주르륵.
단박에 신형이 반 장이나 밀렸다.
하지만 입가에 흐른 피를 닦은 국중경이 미소와 함께 자세를 잡았다.
“이런 잡놈이!”
분노가 극에 달한 흑면 삼호의 권장이 국중경의 머리를 단박에 부수었다.
퍼석, 푹-
한데 소음이 이상하다.
복면인들의 시선이 쏠린 흑면 삼호의 신형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사, 삼호!”
흑면조장의 경악성 앞에 드러난 것은 복부 깊이 틀어박힌 대도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떠는 흑면 삼호의 모습이었다.
머리가 날아간 상태에서 도를 찔러 넣은 믿기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허무한 눈빛으로 흑면조장을 바라보다 쓰러진 흑면 삼호의 신형은 이내 떨림을 멈추었다.
울화가 터진 흑면조장은 이미 머리가 사라진 국중경의 시신을 잘게 다져 놓았다.
“가자.”
시신에 대한 화풀이로 지체되었던 추적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 * *
모처럼 세가 밖으로 나온 혈존은 몇몇 세가의 무인들과 함께 길게 이어진 산맥의 구릉을 타고 이동 중이었다.
그렇게 이동하던 혈존의 손이 불현듯 허공으로 들렸다.
순간, 뒤를 따르던 단목세가의 무사들이 그림처럼 정지했다.
“피 냄새다. 주변을 살펴보거라. 아니, 서. 이쪽으로 온다.”
혈존의 말에 만약에 대비하는 무사들의 시야로 피투성이가 된 고덕이 불쑥 튀어나왔다.
“대, 대협!”
자신을 알아본 혈존의 경악성에 고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어쩐지 낯익은 기파라 했어…….”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추적자가 붙었어.”
그 말에 뒤를 향해 시선을 던졌던 혈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구려. 한데, 이건…….”
“화경이 있어. 나머지도 위험하고.”
고덕의 말에 상대의 위험성을 직감한 혈존의 명이 무사들에게 떨어졌다.
“물러난다. 대협을 뫼셔라.”
혈존의 음성을 확인한 고덕의 의식이 사라졌다.
“이런!”
“드, 등에 여인을 업고 있습니다.”
겉옷을 벗어 단단히 조여 놓은 것이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인 듯했다.
“함께 데려간다. 서둘러라.”
혈존의 명에 무사들이 재빨리 서둘렀다.
그 뒤에 혈존은 검을 크게 휘둘러 주변의 나무 한 그루를 베어냈다.
그렇게 그들이 사라진 지 반 각 후, 흑면 이호를 선두에 세운 복면인들이 들이닥쳤다.
“이건!”
“왜?”
“조력자입니다.”
“조력자?”
“예. 더구나 이걸 보십시오.”
흑면 이호가 가리키는 잘려진 나무를 바라보던 흑면조장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화경…….”
그것도 분명 자신의 경지를 뛰어넘는 자의 솜씨였다.
보란 듯이 남겨 놓은 것은 뒤를 쫓으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엄포와 같았다.
“쫓을까요?”
“아무리 상처를 입었다 하나 이자와 검마가 합쳐지면…….”
순간 흑면 이호의 입이 다물렸다.
누구보다 검마의 능력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던 복면인들이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그렇다고 추적을 포기한다면 봉공의 치죄를 받아야 할 겁니다.”
청면 일호의 말에 흑면조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다. 어차피 이판사판, 쫓는다!”
흑면조장의 명에 복면인들이 추격을 재개했다.
그 시각, 산을 따라 정신없이 움직이던 단목세가의 무사들이 혈존의 명에 방향을 바꿨다.
그렇게 달려가는 단목세가 무사들의 시선에 어렴풋이 항주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추적에 속도를 올리던 복면인들은 저 멀리 항주가 바라보이는 산자락에서 발길을 멈추어야 했다.
“놈들이 항주로 향했습니다.”
흑면 이호의 말에 흑면조장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도시로 들어간 이상 우리가 드러내고 추적하긴 어려워졌다. 주변을 차단하고 날이 저물길 기다린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흔적은 엷어질 것입니다.”
“어차피 부상자가 있으니 의원들을 뒤지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놈들이 항주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명!”
우렁차게 답한 복면인들이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그들은 각자 흩어져 항주성을 포위하듯이 둘러쌀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날이 저물자, 그렇게 흩어졌던 복면인들이 일제히 성벽을 넘었다.
수백의 군병들이 성벽을 지키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들의 움직임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성벽을 넘어 들어온 복면인들은 사전에 약조라도 있었던 듯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의원들을 뒤진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뒤를 캐라.”
“예.”
조용한 음성으로 답한 복면인들이 제각기 흩어져 시내로 스며들자, 흑면조장도 자신이 맡은 지역의 의원을 찾아 움직였다.
* * *
항주의 중심에 위치한 절강성 도지휘사사.
한밤임에도 불구하고 도지휘사사는 곳곳에 놓인 화톳불로 대낮처럼 밝혀져 있었다.
거기에 중무장한 군병 수천이 이중 삼중으로 둘러싼 탓에 철옹성처럼 변해 있었다.
그 내부의 한 객사에 머물게 된 혈존과 단목세가의 무인들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협은 여전하냐?”
혈존의 물음에 방 한쪽 침상을 지켜보던 무사가 공손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태상가주님.”
“흠… 의원의 말대로면 지금쯤은 깨어나야 할 텐데.”
그 말이라도 기다렸던 것인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침상에 누워 있던 고덕이 정신을 차렸다.
“끄응……”
“아! 정신을 차리시는 모양입니다.”
고덕을 살피던 무사의 음성에 황급히 침상으로 다가선 혈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신이 드시오?”
천천히 눈을 뜬 고덕이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여긴……?”
“절강성 도지휘사사라오.”
“어떻게 이곳으로……?”
“함께 있었던 여인이 관부 사람이었던 모양이더이다. 치료하던 의원의 연통을 받은 관병들이 들이닥친 탓에… 불편한 관계라면 지금이라도 떠나면 되오만…….”
혈존의 걱정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차라리 잘되었어. 그나저나 빚을 졌군.”
“빚은 무슨……. 한데 도대체 누구이기에 천하의 검마가 이 꼴인 게요?”
혈존의 말에 방 안에 있던 단목세가의 무사들이 경악 어린 표정이 되었다.
그들은 지금껏 고덕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던 탓이다.
그런 무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여인은 어디에 있지?”
“도대체 그 여인이 누구요? 누구이기에 도지휘사의 아내가 직접 간병을 하는지 모르겠소.”
“그건 나중에 말해주지. 한데 어디에 있지?”
“이 옆 건물에 있소. 장수들이 지붕이며 주위를 완벽하게 둘러싸고 있으니 위험하진 않을 것이오.”
“흐음…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쫓기던 게요?”
“몰라.”
“정말이오?”
“알면서 속일 만큼 옹졸하진 않아.”
“흠… 도대체 누가 천하의 검마를 이 지경으로 몰아붙였는지 감도 잡히지 않소이다.”
“지켜야 할 사람만 아니었다면 이런 꼴은 애초에 당하지도 않았어.”
자존심이 상했는지 으르렁대는 고덕을 바라보며 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거라 생각은 했소. 한데, 추적이 이어질 가능성도 있는 거요?”
혈존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지금처럼 몰아붙인 것이 처음이니, 끝장을 보려 할 공산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기파는 그들이겠구려.”
혈존의 말에도 불구하고 고덕은 별다른 기파를 느끼지 못했다. 아직 몸이 정상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이리라.
하지만 혈존의 말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밖이 소란스러워지며 고함이 사방에서 울려 왔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가봐야겠소.”
“도와주리까?”
“가능하겠나?”
“아군이 지금처럼 많다면 충분할 거요.”
하긴 화경의 극의를 달리는 혈존이다.
지금처럼 많은 군병의 도움이라면 제아무리 화경과 다수의 초극으로 이루어진 조합일지라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부탁하지.”
고덕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혈존이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협을 잘 뫼셔라.”
혈존의 명에 단목세가의 무사들이 일제히 복명했다.
“명!”
수하들의 복명을 받은 혈존이 나가자 고덕도 침상에서 일어섰다.
“여인이 있다는 곳으로 가지.”
고덕의 말에 무사들이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