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극복(克復)-위기를 떨쳐 내다
걸괴를 통해 위기를 직감한 팔대세가의 신속한 움직임에 사태는 최악의 상황을 맞지 않은 채 해결되었다.
하지만 사태를 해결한 세가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침통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특히 사태의 해결 과정에서 드러난 치부로 인해 수뇌들이 모조리 모여들었다.
“이것이 정말로 우리 남궁이 벌였던 일이란 말인가?”
평소와 달리 직접 나선 검존의 창노한 음성에 남궁세가의 수뇌들은 꿀 먹은 벙어리인 양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만 있었다.
그런 이들을 훑어보던 검존의 질타가 이어졌다.
“이런 부끄러운 일들을 벌여 놓고서야 어찌 협의를 말하고 백도라 자처한단 말인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그건 마도에도 들지 못함이야. 이건 사도란 말이다. 사도!”
“소, 송구합니다. 아버님.”
가주인 남궁창천이 고개를 조아렸지만 검존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다.
“도대체 이 죄를 어찌 갚을 생각이더냐?”
“연관된 이들이 모두 죽고, 남은 이들도 이번 추적에서 대부분 죽임을 당한 터라…….”
“하면, 이대로 덮자는 말이더냐?”
“굳이 끝난 일을 들춰내 소문을 낼 필요야…….”
“그따위 썩어빠진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게야! 잘못했으면 드러내고 고개를 숙이고 자숙할 생각을 해야지, 덮고 감추려고만 드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이냐!”
“하오나 이 일이 드러나면 세가의 위신이…….”
“그 위신이 거짓과 위선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없느니만 못함일 터!”
“하, 하면 이 일을 드러내란 말씀이십니까?”
“감추어둘 생각이었더냐? 이 일을 만든 위선자들처럼!”
검존의 창노한 음성에 남궁창천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오나 이 일을 들추어내면 연관된 세가의 식구들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할 터.”
“하오나 아버님, 피 값입니다. 피 값에 대한 벌은 오로지 피뿐입니다.”
“당연한 일.”
“하오면 지난 일로 세가 식솔들의 목을 베란 말씀이십니까?”
“깨끗한 일, 좋은 일, 아름다운 일만 하려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더냐?”
“아, 아버님.”
“세가에서 가장 더러운 일, 가장 나쁜 일, 형편없이 추한 일을 하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니라. 그게 가주고, 남궁의 이름을 짊어지고 가는 자리인 게야. 그걸 아직도 모른단 말이더냐!”
검존의 노성에 남궁창천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아들을 내려다보던 검존이 담담한 음성을 토했다.
“이 일을 공개하고 관련자들은 남김없이 베어라. 그리고 그 죄를 짊어지고 내가 은퇴를 할 것이니라.”
“아, 아버님!”
현 남궁세가 최고수는 누가 뭐라 해도 십대고수인 검존 남궁호군이다.
그가 은퇴하면 남궁세가는 가장 강력한 검을 잃게 되고, 팔대세가의 수좌도 지킬 수 없게 된다.
경쟁 상대인 팽가에 강호십대고수인 도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생각하십시오, 태상가주.”
“재고해주십시오, 태상가주.”
여기저기서 수뇌들이 만류하고 나섰지만, 검존의 결심은 이미 세워진 후였다.
그 뒤, 충격적인 소식이 강호를 흔들었다.
백도의 중추인 팔대세가, 그중에서 협행의 표본이라 했던 남궁세가가 한때 이권이 걸린 상단 하나를 무너트리며 식솔들을 도륙한 사건을 공개했던 것이다.
그 사건에 관련된 남궁세가의 식솔 열셋의 목이 베였고, 피해자인 상단의 고인들을 기리는 사당을 크게 지었다.
그리고 사죄하는 의미로 남궁세가의 태상가주인 검존 남궁호군의 은퇴가 전격적으로 발표되었다.
십오 년 전에 벌어졌던 사건 하나를 처리하는 남궁세가의 태도가 강호에 준 의미는 생각 이상으로 커다랬다.
팔대세가 중 두 곳이 연이어 비슷한 과거를 발표하고 정중히 강호 동도들에게 사과를 표했던 것이다.
그 일로 황보세가와 제갈세가는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신뢰를 얻었다.
팔대세가의 허리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두 세가는 강호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곤두박질치리라 생각했던 남궁세가의 이름도 더욱 드높아졌다.
사람들은 정직과 협행을 말할 때 여전히 남궁의 이름을 가장 앞에 놓았다.
그런 상황 속에 남궁세가에서 강호의 제 문파들에게 배첩을 돌렸다.
그 배첩의 앞면엔 붉은 주사로 금분세수라 쓰여 있었다.
* * *
왕부의 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고덕은 예상외의 손님을 맞았다.
“대협.”
“아니, 팔아, 네가 어찌 여길……?”
“전해드릴 서찰이 있어서요. 그리고 아버님, 어머님의 걱정이 크십니다.”
왕팔의 말에 고덕이 얼굴에 그리움이 떠올랐다.
“형님과 형수님은 편안하시더냐?”
“예. 오히려 건강은 더 좋아지시는 것 같아요.”
아마도 자신이 가르쳐 준 호흡법 덕을 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한데, 전해줄 서찰이라니?”
고덕의 물음에 왕팔이 서둘러 서찰을 꺼내 내밀었다.
“흠… 이건…….”
“남궁세가에서 보내왔더군요. 외총관인 호천검 남궁단 대협이 꼭 참석해 달랬다는 전언이 딸려 왔었습니다.”
“그랬더냐?”
“예. 그런데 왜 왕부에……. 혹시 아직도 못 잊고 계신 겁니까?”
“무얼 말이냐?”
“사모님이요. 설마 이곳을 통해 사모님이 있는 왕부로 가시려는 겁니까?”
왕팔이 아직 문정 군주가 된 연화가 이곳 소흥 왕부에 머문다는 걸 모르는 탓에 하는 말이다.
“아니다.”
“하면 이곳에 왜 계신 겁니까? 그냥 집으로 가시죠.”
집. 그 그리움의 냄새가 진한 향기를 풍겨 왔다.
그때였다.
“고 무인, 있나요?”
문이 열리며 들어서는 여인을 확인한 왕팔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사, 사…….”
사 자만 연발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왕팔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문정 군주가 고덕에게 물었다.
“손님이 계셨군요.”
“예. 집에서 소식이 와서…….”
“아! 그럼 산책은 어렵겠군요?”
“아닙니다. 가시지요.”
자리에서 일어서는 고덕과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서는 문정 군주를 번갈아 바라보는 왕팔에게 고덕이 주의를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단,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형님과 형수님께 걱정을 끼치진 마라.”
“대, 대협.”
“쉿! 아무 소리도 말고 가거라.”
그 말을 남기곤 곧바로 문정 군주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고덕의 뒷모습을 왕팔은 슬픈 눈으로 지켜보았다.
정원을 천천히 거닐던 문정 군주가 고덕에게 물었다.
“집에서 소식이 온 모양이군요.”
“예.”
“좋은 소식인가요?”
“예. 형님 내외분이 건강하다는 소식이니 좋은 소식인 셈이지요.”
“형님 내외분이 계신가 보군요.”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문정 군주의 물음에 고덕의 음성에서 힘이 빠졌다.
“예.”
“그런데 좋은 소식이라면서 왜 기운이 그리 없으신 거죠?”
“잠시 다녀올 곳이 생긴 터라 생각이 많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또 왕부를 나간단 말이에요?”
“잠시뿐입니다.”
고덕의 답에 문정 군주는 왠지 불안해지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고덕이라는 야인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이상하게 심란했던 것이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안휘에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군요.”
“먼 거리도 아니지요.”
“오래 걸릴까요?”
“십여 일 안짝이면 돌아올 것입니다.”
“역시 길군요.”
문정 군주의 음성에 고덕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원하시면 가지 않겠습니다.”
고덕의 말에 문정 군주는 당황했다. 지금 나누는 대화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임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다.
“아, 아닙니다. 고 무인의 일을 제가 방해할 수 없지요. 다녀오세요.”
“알겠습니다.”
답하는 고덕의 눈매가 어느새 처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멀리서 고덕과 함께 정원을 거니는 문정 군주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흥왕이 고개를 저었다.
“염홍.”
“하명하소서.”
“폐하께 문정 군주의 성혼 자리를 찾아봐달라는 서찰을 보내야겠다.”
“고 무인 때문이옵니까?”
“그래.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지만, 결코 있어선 아니 되는 일은 막아야 하니까.”
“설마 군주께서 흔들리실 리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니까……. 처음 만났던 왕비도 그런 이는 아니었듯이 말이야.”
쓸쓸한 소흥왕의 음성에 염홍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리우십니까?”
“그립냐고?”
“예.”
“그립지. 변하기 전 그녀의 모습이라면…….”
유난히 쓸쓸한 소흥왕의 음성에 염홍이 말을 이었다.
“왕비 간택을 진행해보심이…….”
“허허, 부질없는 짓일세. 이 나이에 무슨…….”
“하나, 외로움은 다른 이로 채워 넣는 방법 외엔 없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러던가?”
“그저 사람들이…….”
“하하하, 다 쓸데없는 말일세. 간혹은 새로운 사람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있는 법이니…….”
“왕야…….”
“다른 말은 말고, 내 전갈이나 적어 황상께 보내주게.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다른 왕부의 견제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견제뿐이라면 상관없겠지.”
“암습이라면 고 무인이 막아주지 않겠습니까?”
“조만간 떠날 사람일세.”
“예?”
“고 무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알 수 없는 소흥왕의 말에 염홍은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
고덕은 이번엔 대치와 가극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반밖에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아예 짧게 잘라버린 대치의 분위기는 처음보다 많이 밝아져 있었다.
“그런데 안휘엔 왜 가시는 겁니까?”
대치의 물음에 고덕이 물었다.
“왜 궁금한데?”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알아야 제대로 모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덕의 정체를 알고 난 이후 대치는 그에게 깍듯했다. 하지만 기질은 어쩌지 못해서인지 말투나 행동이 거친 것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물론 그것을 고덕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네가 신경 쓸 일은 없어. 그저 너희 둘을 데려가라는 목려송의 성화에 데려왔을 뿐이니까.”
“그래도 무언가 소용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그때가 되어봐야 알겠지. 참, 가극의 버릇은 어때?”
“대협께 당하고 난 이후엔 별다른 사고를 쳤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야 상처가 아문 게 얼마 전이니까. 문제는 이제부터겠지. 제대로 관리해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전 둘이 한 여자를 품는 건 싫으니까요.”
“그래. 잘해봐.”
이 말 저 말 하며 천천히 움직였음에도 고덕은 삼 일 만에 안휘의 황산에 도착했다.
물론 부실한 경공 실력으로 인해 헉헉대며 쫓아오느라 진이 빠져 버린 가극의 생각은 달랐지만 말이다.
“대협!”
수문 위사들에게 연통을 받았는지, 안내를 받아 객사로 향하는 길목에서 급히 나오는 남궁단과 마주쳤다.
“오랜만이군.”
“지난 은혜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그나저나 큰 결단을 내렸더군.”
“태상가주님의 의중이 확고하셔서……. 세가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가는 좋은 계기가 된 듯합니다.”
“그런 것 같더군. 절강까지도 남궁의 이름이 드높았으니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하온데 여전히 절강에 계셨습니까?”
“그곳에 일이 좀 있어서.”
고덕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남궁단이 뒤에 서 있는 이들을 발견하곤 물었다.
“함께 오신 분들은 소개해주시지 않는 겁니까?”
“아, 인사하지. 이쪽은 당분간 내가 맡고 있는 사람들일세.”
고덕의 소개에 놀란 표정의 남궁단이 포권을 취했다.
“남궁세가의 외총관을 맡고 있는 남궁단이라 합니다.”
“대치라 하오.”
“가극이오.”
대치는 워낙에 거친 성격 탓에, 가극은 관부인 특유의 거만함에 둘 다 뻣뻣한 인사를 건넸다.
그에 고덕의 미간이 구겨졌다.
“쯔, 이해하게. 워낙 배운 것들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고덕의 사과에 남궁단이 미소를 지었다.
“대협의 일행이라고 말씀하실 때부터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습니다. 자, 이리로 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남궁단의 안내를 받아 객사로 들어가는 고덕과 일행에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꽤나 상급의 객사를 배정한 듯 그들에게 배정된 방은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그나저나 사람이 많군.”
“아무래도 태상가주님의 금분세수이다 보니…….”
“보증인은 누가 서나?”
금분세수의 보증인.
이른바 은퇴를 보증하는 사람이다.
막말로 말만 은퇴라 하고 강호행을 하지 않도록 감시자 역할을 맡는 것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금분세수로 모든 은원이 정리된 후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은원을 따져 묻는 이에게 대신 대가를 치르는 자리이니 그만큼 이름이 높고,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맹주께서 하기로 하셨습니다.”
남궁단의 답에 고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맹주라면 무극검?”
“예, 대협.”
“흐음… 언제 온다던가?”
“이미 오셔서 쉬시는 중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뵙기를 원하시던데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네.”
“아닙니다. 어려운 것도 아닌 것을요.”
천하오존을 만나는 자리다.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원할 자리이기에 고덕이 부담을 느낀다고 착각한 남궁단은 자신의 배려에 스스로 흐뭇해했다.
잠시 대화를 나누던 남궁단이 다른 귀빈을 맞기 위해 자리를 뜨자, 대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무극검과 안면이 있으십니까?”
“그건 왜?”
“대협의 정체를 알면 그냥 있진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백도의 잔치에 마도의 고수가, 그것도 천하오존이 자리한 셈이니 무사히 지나간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기에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고덕의 답은 대치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냥 있지 않으면 어쩔 건데?”
“예? 그, 그래도 여긴 백도 한복판이고, 주변에 온통 백도 놈들뿐인데…….”
“상관없으니 신경 꺼.”
당사자가 신경 끄라는데 달리 할 말이 있을 수 없었다. 그 탓에 대치가 할 수 있는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남궁단의 전갈을 받은 고덕이 연회에 초청되었다.
그 자리엔 팔대세가의 가주들과 구파의 문주들은 물론이고 몇몇 명망 있는 고수들이 함께 자리를 하고 있었다.
고덕의 출현에 단리세가의 가주와 협가의 가주가 인사를 건넸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다른 이들의 눈이 있기에 서로가 적당한 선에서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 연회의 주인공인 검존이 친우인 도존, 그리고 무극검과 함께 들어섰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사람들이 분분히 일어나 포권을 취할 때도 고덕은 따분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니 외모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새파랗게 젊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앉은 고덕의 행동에 저마다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물론 심장이 멈출 뻔할 만큼 놀란 사람도 있었지만…….
[왜, 왜 그대가 이곳에…….]
무극검의 심어에 고덕도 심어로 답했다.
화경에 이른 이들이 다수인 탓에 전음은 누수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네놈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서, 설마 이곳에 있는 이들을 모조리 죽일 생각이시오?]
[미친놈. 내가 살인귀더냐?]
[하, 하면 왜?]
[네놈처럼 초대받았다.]
[서, 설마 검존과 알고 지내는 사이시오?]
[저 고리타분한 늙다리완 상관없어.]
[그럼 누가……?]
[그냥 신경 꺼라. 나도 네 일에 신경 안 쓸 테니.]
그 말을 끝으로 고덕은 줄기찬 무극검의 심어에 일언반구 답을 하지 않았다.
[저, 정말이오?]
[이보시오?]
[어허, 이보시오, 검마!]
그렇게 만인의 눈총과 시끄러운 무극검의 심어에 시달리던 연회가 끝나자, 고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객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황급히 달려온 남궁단에 의해 다시금 내원으로 돌려져야 했다.
내원으로 들어서자 자신을 청했다는 검존이 그를 정중히 맞았다.
“남궁호군이 은인께 뒤늦게 인사드리외다.”
“고덕이오.”
“너는 물러가거라.”
자신의 명에 남궁단이 조심스럽게 물러가자, 검존이 고덕에게 시선을 돌렸다.
“단의 말을 들으니 나와 연배가 비슷하다 들었소이다.”
“얼추 그렇소.”
고덕의 답에 남궁호군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럽구려.”
“뭐 그리 부러울 것도 없소. 매번 설명하는 귀찮음도 있고, 버릇없는 애들하고 씨름해야 하는 일도 잦으니.”
“하하하, 그렇기도 하겠구려.”
“그나저나 늘그막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뜨인 것 같으니 축하할 일이외다.”
“이번 일을 말씀하시는 모양이구려.”
“뭐, 겸사겸사.”
“다 삭아빠진 몸으로 죄를 덮고 가니 그것으로도 만족한 일이라오.”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고덕에게 검존이 물었다.
“내 부탁이 있어 뵙자고 하였소.”
“부탁이라면 무슨……?”
“내 증인이 좀 되어주시구려.”
예상외의 말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 막중한 자리를 맡기엔 능력이 모자라오이다.”
“천하에 그대가 능력이 없다면 누가 있겠소?”
의미심장한 검존의 말에 고덕의 음성이 대번에 낮아졌다.
“무슨 뜻이지?”
“요사이 심어가 가끔 들리기도 한다오.”
그 말은 검존이 화경과 현경의 사이에 위치한다는 뜻이었다.
축하할 만한 일이었으나 고덕으로서는 그렇게 한가한 입장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결국 무극검과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고약한 취미를 가졌구나.”
“그 덕에 천하의 검마를 눈앞에서 보는 호사를 누리지 않소이까.”
“이제 현경의 초입을 들여다본 주제에 간이 너무 크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그간의 행적을 보아하니 살인멸구를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용기를 가져 보았다오.”
“지랄…….”
말은 거칠어도 결국 이쪽을 인정하는 셈이니, 검존은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다.
“어떻게, 부탁 좀 합시다.”
“날 세워 얻고자 하는 게 뭔가?”
“정보론 혈마가 날 노리고 온다 하더이다.”
“혈마? 곡가 놈이 나왔단 말이오?”
“그렇다고 하더이다.”
“교주가 미치지 않고서야 곡가를 단신으로 보내진 않았을 터. 하면 전쟁을……!”
“나도 맨 처음엔 그것을 생각했으나, 정보로는 그가 홀로 움직인다 하더이다.”
“곡가가 혼자 움직인다?”
“그렇다고 들었소.”
이건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마교의 부교주가 홀로 백도인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온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사람을 끔찍이도 애지중지하는 교주의 성격과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하니, 나보고 방패가 되어 달라?”
“검마가 증인인데 혈마가 설마 검을 들이대진 않지 않겠소?”
“그거 너무 믿지 마.”
“무슨 말이오?”
“집 나간 사람은 적보다 못할 때가 더 많은 법이니까.”
“설마 지금 내게 마교, 험험… 천마신교를 나왔다 말하는 것이오?”
“그래. 나온 지 좀 됐어. 그러니 내가 방패의 역할로는 부족하다는 걸 이젠 알겠지?”
고덕의 말에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검존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부탁합시다.”
“뭐야? 안 믿는 거야?”
“믿소.”
“믿는데 왜 내가 필요한데?”
“천하의 검마가 증인이라면 마도에서 누가 검을 들어 내 노후를 위협하리까?”
“워워워, 난 내가 검마라 광고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으니 앞서 가지 말자고.”
“뭐, 상관은 없소. 그대가 내 증인이 되어준다면 혈마가 알아서 소문을 내줄 테니까.”
“내가 거절한다면?”
“불어버릴 거요.”
“그 전에 네 목을 딴다면?”
“그도 나쁘지 않겠구려. 내 필생의 목표가 바로 마제나 검마 그대와의 대결이었으니 말이외다.”
“빌어먹을……. 하지만 증인은 안 돼. 단, 혈마는 책임지고 막아주지.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한발 물러서는 고덕의 말에 검존이 미소를 그렸다.
“말해보시구려.”
“우선 내 정체는 함구해. 그냥 초야에 묻힌 초극의 극의에 이른 고수 정도가 좋아.”
“상관없소.”
“그리고 내 손녀딸 좀 봐줘.”
“그게 무슨 소리요?”
“내 손녀딸이 네 집 자식을 좋아한다니 가능한 맺어주었으면 한단 말이야.”
“흠… 검마의 손녀와 남궁가의 자제가 성혼을 한다?”
“왜, 출신 성분이 마음에 안 드나?”
“그럴 리가 있겠소?”
“한데 왜 그런 표정이지?”
“그야 아이들이 걱정이니 그렇소.”
“아이들이 왜 걱정이야?”
“혹여 백마전쟁이라도 벌어졌다고 칩시다. 하면 그 애들은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 게요?”
“그, 그거야……. 아아, 백마전쟁 같은 거 안 일어나니까 쓸데없는 말은 말아.”
“뭐 검마가 그리 말한다면야…….”
한마디로 그렇게 되게 만들라는 의미이리라…….
“빌어먹을 인사.”
“개방의 방주가 입에 달고 다닐 땐 모르겠더니, 이렇게 들으니 나름 쓸 만한 말이구려.”
“됐으니, 나중에 딴소리 나오지 않게 확실히 해.”
“내 약속하리다.”
“그럼 됐어.”
그 말과 함께 미련 없이 등을 돌리는 고덕에게 검존이 물었다.
“그냥 가실 생각이시오?”
“그럼 너랑 여기서 소꿉장난이라도 하리?”
“술은 한잔 낼 수 있소만.”
“됐어. 그 술은 벽장 안에 숨어서 숨도 못 쉬고 있는 빌어먹을 인사하고나 마셔.”
그렇게 고덕이 사라지자, 병풍 뒤가 열리며 무극검이 걸어 나왔다.
“내 혈마 때문에 검존의 뜻을 좇기는 하였지만, 가슴이 떨려 혼났소이다.”
“도무지 저자의 어디에서 그리 강력한 힘이 나온다는 건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이 낫소. 소름 돋는 흉포함, 그 치 떨리는 광기……. 다시 마주 설까 두려운 마음이라면 이해하시겠소?”
백도 최강의 고수가 하는 말에도 검존은 도무지 검마라는 이의 크기를 재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