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0장 (31/129)

제30장. 복수(復讐)-내 상처, 남의 상처

고덕의 객사에 모인 목려송과 협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들을 왜 저리 다루시는 겁니까?”

“하자를 고쳐야 하니까.”

“저리 다룬다고 고쳐지겠습니까?”

“두고 보면 알겠지.”

“한데, 고쳐진다고 해도 제대로 쓸 수나 있을까요?”

“그것도 두고 보면 알겠지.”

태평해 보이는 고덕의 말투에서 자신감을 읽은 두 사람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적어도 고덕이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낀 까닭이었다.

“참, 요즘 왕부가 소란스럽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중원 전역의 강호인과 일반인 사이에서 사건이 터져 나오고 있답니다.”

“도대체 어떤 문제기에 왕부가 소란스러울 정도인 거지?”

“팔대세가의 고수들이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고 다닌다는 풍문이 가득합니다.”

협련의 말에 고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혹시 그 안에 안휘협가의 이름도 있던가?”

“이곳 절강과 가까운 탓인지 안휘에 둥지를 틀고 있는 남궁, 단리, 협가 세 곳의 소식이 가장 자주 들립니다. 그중에서 안휘협가가 연결된 소식이 유달리 많구요.”

“내 참, 하필 이럴 때…….”

“왜 그러십니까? 혹, 안휘협가에 인연이 있으십니까?”

“조카 손녀가 그 집으로 시집을 갔지.”

“예에?”

“안 되겠어. 잠시 안휘에 다녀오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고덕의 발걸음을 협련이 잡았다.

“안휘까지 가실 것도 없습니다. 요사이 안휘협가에서 일단의 무사들이 이곳 절강으로 들어섰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으니까요.”

“어디에 있다던가?”

“등려 인근에서 살겁을 일으킨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등려는 절강성의 서북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소흥 왕부가 들어선 소흥에선 말로 달려 이틀 거리였다.

“내 다녀오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잘 부탁함세.”

“혼자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소식을 전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누구를 데려가시지요.”

목려송의 권유에 고덕이 잠시의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월야와 함중을 데려가지.”

“준비시켜 두겠습니다.”

“바로 출발할 거야.”

“예, 대협.”

목려송의 전갈을 받은 월야와 함중이 나서자, 그들을 대동한 고덕이 곧바로 등려를 향해 달렸다.

* * *

등려의 외곽, 함투산이라 불리는 야산을 끼고 일단의 사람들이 쫓고 쫓기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지겨운 놈들. 지치지도 않는군.”

“저놈들의 비리를 알고 있으니 죽여 입막음을 하려는 게 아니겠나.”

“그런데 안평과 덕출은 무사할까?”

“글쎄… 소가주가 이끄는 주력이 우리를 쫓고 있으니 빠져나갈 가능성이 더 높겠지.”

“그래야 할 텐데……. 한데, 세가에서 어찌 알았을까?”

“꼬리가 길었으니까.”

“하긴 너무 시간이 길었어.”

“그나저나 작전은 실패겠지?”

“알아차렸으니 그렇게 되겠지.”

“그래도 억울함은 조금이나마 풀었으니까…….”

“풀긴. 저놈들을 다 갈아 마시지 않고서야 어찌 억울하게 죽어간 우리 형제의 피 값을 받아내었다 하겠나.”

“협가가 망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솔직히 그건 생각지도 않았어.”

“그거야…….”

삐익-

기다란 호각 소리에 두 사람의 대화가 중단되었다.

추적자들이 가깝게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기정, 다시 움직여야겠어.”

“나는 두고 가게. 마송.”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야. 이 꼴을 보라고. 이미 다리를 움직일 수조차 없어.”

기정이 내보이는 상처투성이인 다리는 하얗게 변해 있었다. 큰 혈관을 다쳐 피가 통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기정!”

“가! 가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살아남아서 협가 놈들의 비열한 짓거리를 천하에 알려 주라고.”

기정의 떠밂에 비척대며 일어선 마송은 주변을 가득 메우며 다가오는 인기척에 눈물을 머금고 자리를 벗어났다.

마송이 떠나가자마자 협가의 소가주인 협가검이 이끄는 협무단이 들이닥쳤다.

“나머진 어디 있나?”

멱살을 틀어쥔 협가검의 윽박에 기정이 비틀린 웃음을 베어 물었다.

“퉤- 인면수심의 더러운 잡종 놈.”

“이 자식이!”

짝-

협가검의 거친 손길이 스친 기정의 뺨이 터지며 붉은 피가 흘렀다.

“말해! 말하란 말이야. 다른 놈들은 어디에 있냔 말이다?”

“네 마누라랑 뒹굴고 있겠지.”

“이익!”

퍽-

“우웩.”

협가검의 주먹질에 기정은 검은 피를 토해냈다. 이미 깊은 내상을 입고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그런 기정을 거칠게 흔드는 협가검에게 무사 한 명이 다가왔다.

“흔적을 찾았습니다.”

“쫓아.”

자신의 명에 무사들이 움직이자, 협가검도 뒤에 서 있던 무사에게 명을 내리곤 급히 달려갔다.

“베어라!”

명을 내리고 저만치 달려가는 협가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무사가 기정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왜 그런 건가?”

“말하면 믿겠나?”

“미안하네. 잘 가게.”

기정과 동기였던 무사가 두 눈을 질끈 감고 검을 휘둘렀다.

스걱-

무언가 잘려 나가는 소음만 들은 무사는 상태는 확인도 하지 않고 멀어져 가는 일행을 따라 달렸다.

그렇게 협가의 무사들이 사라진 곳으로 고덕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목을 베여 피가래가 올라오는 기정을 바라보던 고덕이 발길을 옮기려 들자, 무언가가 그 발을 잡았다.

천천히 내려다보는 고덕의 시선에 사력을 다해 그의 발을 잡은 기정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 살려… 내 도, 동료… 부탁… 으, 은혜…….”

잘게 끊어지는 말 몇 마디만을 필사적으로 남긴 기정의 목이 꺾였다.

그 모습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고덕의 신형이 협가의 무사들이 향한 북쪽을 향해 쏘아졌다.

* * *

고덕의 명에 따로 떨어져 움직이던 월야와 함중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이런 불쌍한…….”

널브러진 시체를 발견한 월야가 다가가자 함중이 중얼거렸다.

“피가 응고되지 않은 걸 보니 죽은 지 반 각도 지나지 않았겠구려.”

“그렇지, 반 각. 반 각 전엔 살아 있었으니 살결도 부드러울 테고…….”

천천히 시신에 소도를 들이대는 월야의 행동에 이곳으로 떠나기 전 자신을 불러 세운 목려송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식인의 습관이 있는 녀석이야. 짝이니 월야가 식인을 하면 너도 뭘 해야 하는 진 알겠지.’

월야가 무얼 하려는지 짐작한 함중이 이미 시신의 살을 도려내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뭐, 뭐하는 거유?”

“동생은 모르지. 내 오늘 천상의 맛을 보여 주지.”

“미, 미쳤수? 이건 고기가 아니라 사람이란 말이오. 사람!”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흐리멍덩하게 변해버린 눈으로 시신을 훑으며 월야가 답했다.

“맞아. 사람이지. 그러니 먹는 게야. 사람 고기가 얼마나 야들야들한데…….”

“사형! 이러다 걸리면!”

“걸려? 누구에게?”

“검마! 고 대협 말이오.”

“누구? 검마… 흐헙!”

흐리멍덩하던 눈동자가 대번에 또렷해졌다. 그리고 주변을 휘둘러본 월야가 물었다.

“없지? 어, 없는 거지?”

“아직은 없수. 하지만 걸리면?”

“걸리면 죽는다. 아니, 죽고 싶어질 거야. 가자, 가!”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월야를 따라 일어서던 함중의 시선이 시신에 닿았다.

“우웩-”

반쯤 도려내진 시신의 복부에서 빠져나온 내장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잠시 토악질을 하던 함중은 시신엔 시선도 돌리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정신없이 자리를 이동하던 월야와 함중은 숲길을 벗어난 곳에 세워진 작은 객잔을 발견했다.

하지만 함중은 객잔 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고소한 음식 냄새가 풍겨 나왔지만, 앞서 가는 월야의 허리춤에 매인 소도에 묻은 피를 보는 순간 식욕이 씻은 듯이 날아간 탓이었다.

그렇게 숲을 따라 움직이던 월야와 함중은 고덕이 가로막고 있으라 명했던 지점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대체 누굴 막으라는 거요?”

“그걸 내가 어찌 알아. 까라니 까는 거지.”

“그러다 상대가 강하면 어쩔 거요?”

“어쩌긴. 대협이 올 동안 끌고 도망 다녀야지.”

“그렇다 골로 가면 어쩌려고 끌고 다닌단 말이오?”

“어차피 시킨 일을 마무리 못해도 골로 가는 거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거면 그래도 가능성이 높은 쪽에 걸어볼 밖에.”

“그런데 정말 그렇게 강하오?”

“누구?”

“검마 말이오.”

“미친놈.”

“왜요?”

“그건 강한 게 아니야.”

“그럼 뭐란 말이오?”

“강함도 그 정도면 진리가 되는 거야. 진리.”

“진리?”

“그래, 진리. 불필요한 듯 보이는 손짓 하나까지, 작은 기침까지 진기가 실리고 자연이 순응해. 그러니 모두가 다 진리라 할 밖에.”

“설마…….”

“설마 따윈 없어. 내게 세상에 신이 있다고 믿느냐 물으면 난 주저 없이 있다고 대답할 거야. 그리고 그 신이 누구냐고 물으면 검마라 답해줄 거고.”

“신이라니. 맙소사. 사형은 검마가 그리 무섭소?”

“무서워? 풋- 이건 무서운 게 아니야. 범접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지.”

“무거운 게 두려운 거 아니오?”

“달라. 두렵다는 건 생각하기도 전부터 솜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그 묘한 느낌을 말하는 것이니까……. 언젠가 네가 이 느낌을 알게 된다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겠지. 물론 자살하지 않고 버텨 낸다면 말이지만.”

월야의 말을 함중은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월야와 함중에 의해 심도 있게 논의되던 검마는 협가의 무사들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의 시선에 절벽 끝에 몰린 마송의 모습이 들어왔다.

“순순히 포박을 받아라.”

협가검의 호통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마송이 고개를 저었다.

“더러운 놈. 그 더러운 입으로 감히 내게 명을 하지 마라.”

“뭐라! 네놈이 감히!”

“감히? 하하하! 세상은 몰라도 하늘과 땅, 그리고 내가 안다. 네놈이 칠 년 전에 벌인 그 잔혹한 일을!”

“이, 이놈이 무슨 헛소리를.”

“왜, 수하들 앞에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우냐?”

“미친놈…….”

“잘 들어라. 네놈들의 소가주란 놈은…….”

“이익-!”

퍽-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힌 검을 내려다보던 마송의 신형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자신의 애검을 던져 낸 협가검이 절벽 끝으로 달려갔지만, 절벽 아래를 흐르는 강물은 아무것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찾아라. 시신이라도 찾아서 내 앞에 가져와!”

협가검의 명에 협가의 무사들이 일제히 절벽 아래로 향하는 길을 찾아 몸을 날렸다.

“빌어먹을… 그때 생존자가 있었다니…….”

인상을 잔뜩 구긴 협가검의 음성에선 짙은 불안감이 풍겨 왔다.

* * *

축축한 공기, 딱딱한 느낌…….

천천히 눈을 뜨던 마송은 가슴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상처가 깊어. 반 치만 옆으로 빗겨 갔어도 심장이 갈라졌을 거야.”

갑작스런 음성에 놀란 마송의 시선이 음성의 주인을 찾았다.

“서두르지 마. 서둘러봐야 상처 터지고 네 몸만 축나는 거야. 어차피 살려 둔 사람이니 널 해치진 않을 거 아니겠어.”

음성의 주인이 예상보다 어리다는 걸 확인한 마송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고, 고맙소.”

“내게 고마울 건 없어. 널 살리고 싶어 했던 동료의 염원이 날 이리로 이끈 거니까.”

“동료…….”

“네가 기정이라 부르던 이.”

“아- 기, 기정…….”

“일단 자. 자다 보면 상처는 아무는 법이니.”

음성에 깃든 힘일까, 아니면 깊은 상처 탓일까?

마송은 항거할 수 없는 수면의 욕구에 빠져들었다.

수혈을 눌러 마송을 재운 고덕이 동굴 한쪽에 피워놓은 모닥불에 나무를 던져 넣었다.

그때, 동굴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무언가를 들쳐 멘 월야와 함중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리 굼떠?”

“약도가 너무 자세해서요.”

“뭐?”

“세상에 산 두 개가 만나는 협곡에 나무 두 그루가 얽혀 있는 곳 아래. 이게 약도입니까?”

월야의 투덜거림에 고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정도면 됐지! 얼마나 자세하라고.”

“예, 예. 엄청 자세해서 그것과 유사한 곳만 여덟 곳을 뒤지다 온 겁니다.”

“제 놈이 미련해서 헤맨 걸 어디다 전가하는 거야.”

“예, 제가 미련해서 그렇습니다.”

“쓰읍…….”

고덕의 눈썹 끝이 올라가자, 자신이 지금 누구 앞에서 강짜를 부렸는지를 상기한 월야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여, 여기 가져왔습니다.”

슬쩍 내려놓는 것은 정신을 잃은 장년의 사내였다.

“왜 하나야?”

“그게… 혼자던데요.”

“나머지 하난?”

“이미 죽어 나자빠진 것 같던데요.”

“너 설마……?”

가늘게 좁힌 고덕의 시선에 월야가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입에도 안 댔습니다. 정말입니다.”

맹렬한 부정에도 고덕의 눈길이 좀처럼 떠나지 않자 월야의 음성이 누그러졌다.

“저, 정말입니다. 살짝, 그냥 살짝 살점만 떼려다 말았다고요. 정말이에요. 여기 함중이 증인입니다. 정말입니다요, 대협.”

월야의 말에 고덕의 시선이 함중에게 향했다.

“사실이야?”

“예, 사실입니다.”

“한데 죽어 있던 놈이 일행인 건 어찌 알았는데?”

“저자를 쫓던 이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럼 그들은?”

“따돌렸습니다.”

“확실하겠지?”

“확실합니다.”

함중의 답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사내를 바라보던 고덕이 물었다.

“근데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그게, 수혈을 짚는다는 게 평소 버릇이 나와서…….”

월야가 사람을 산 채로 잡은 적이 별로 없는 탓에 벌어진 실수였다.

“문제 생기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조금 늦게 깨긴 하겠지만 문제는 없을 겁니다. 아마…….”

“아마?”

“그, 그게 예전에 비슷한 경우엔 죽은 놈이 있어서…….”

“빌어.”

“예?”

“살아나길 빌라고.”

“저… 혹시 못 살아나면……?”

“네놈과 함께 묻어주지.”

순간 월야의 고함이 함중에게 날아들었다.

“야- 뭐해. 물 떠와, 물!”

월야의 부산스런 정성 탓이었을까? 아니면 천우신조였을까? 사내는 무사히 눈을 떴다.

“누, 누구시오?”

잔뜩 긴장하는 사내에게 고덕이 잠들어 있는 마송을 가리켰다.

“마, 마송! 어, 어찌한 거요?”

“뭘 어째. 구해줬지.”

“구해? 우, 우리를 말이오?”

“아니면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고덕의 말에 사내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이 뭐야? 안평? 아니면 덕출?”

“어, 어떻게……?”

“저기 누워 있는 놈과 기정이란 자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제야 수긍의 표정이 된 사내가 답했다.

“안평입니다.”

구명지은이라 생각한 탓일까? 사내, 안평의 말투가 공손해졌다.

“그럼 덕출이 죽은 자겠군.”

“흑…….”

덕출의 죽음이 거론되자 안평의 입에서 억눌린 울음이 튀어나왔다.

아마도 죽어가는 동료를 버려두고 도주해야만 했던 아픔 탓인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야? 협가에서 눈이 벌게서 찾던데?”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

“예. 물론 우리 때문에 입은 피해로 화가 났기도 하겠지만…….”

“시간은 많은 것 같지 않아.”

동굴 벽에 기대는 고덕의 말에 길고 긴 안평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안휘의 서부 변경에 위치한 온주는 금채현에 딸린 작은 마을이었다.

인구라고 해봐야 열한 가구에 오십여 명 남짓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그 탓에 마을 사람들은 마치 한 가족처럼 각별한 정을 나누고 살았다.

그런 마을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은 마을의 한 처녀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예뻤던 여인은 열여덟이 되며 활짝 피어나 경국지색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미색을 뽐냈다.

오죽하면 그 처녀를 한번 보자고 인근 동리에서 총각들이 몰려들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마을의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돈 있고 힘 있는 이들의 귀에 그녀의 소문이 들어간 이후엔 마을의 근심거리가 되어버렸다.

너도나도 그녀의 미색을 탐내 그녀를 내어놓으라고 마을을 압박했던 것이다.

물론 처녀를 탐낸 이들이 혼기를 맞은 청년이었다면 처녀의 부모도, 마을 사람들도 흔쾌히 보내주었을 정도로 이름깨나 있다는 이들이 손을 벌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아들이 아니라 그 힘 있는 이들이 자신의 첩으로 또는 노리개로 처녀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버티다 못한 촌장은 안휘협가를 찾았다.

온주가 속한 금채현이 안휘협가의 권역에 들어 있었던 까닭이다.

촌장의 읍소를 들은 협가에선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던 소가주 협가검과 몇몇 무사들을 딸려 보냈다.

하지만 세가로 돌아온 것은 협가검 혼자뿐이었다.

함께 갔던 무사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온주란 마을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흘러나올 때마다 협가는 돈으로, 또는 힘으로 그 소문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 마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그들이 마을 뒷산에 숨어 피에 잠기는 마을의 혈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는 것도 협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복수를 다짐했다. 자신들의 부모를, 형제를, 자식을 도륙하던 협가에게…….

안평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고덕이 물었다.

“협가검의 짓이었나?”

“협가검은 처녀의 부모를 죽이고 그녀를 탐했을 뿐이지요.”

“하면, 마을 사람들은?”

“협가검과 함께 왔던 이들의 짓이었지요.”

살인멸구…….

“하지만 돌아온 건 협가검 하나였다면서?”

“협가검이 머리가 좋더군요.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요.”

“흠… 협가에 진정을 해보진 않았나?”

“원래 살아남은 사람은 여섯이었습니다. 나무를 하러 갔었으니까요.”

“그럼 둘은?”

“협가로 들어갔지요. 하지만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머지 넷에 대한 추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협가로 진정하러 들어간 둘이 끝까지 넷에 대해 함구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복수를 했으니까요.”

“복수?”

“예. 우리에게 달콤한 제의를 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이었지?”

“모릅니다. 나타날 때마다 복면을 쓰고 있어서…….”

복면이라는 말이 고덕의 심사를 묘하게 자극했다.

“혹시 청색 복면이던가?”

“아닙니다. 자색의 복면이었습니다.”

“자색?”

“예.”

여태까지 고덕이 마주친 복면의 색깔은 세 종류다. 청색, 흑색, 그리고 적색.

그 탓에 안평이 이야기하는 이들이 그들과 한 부류인지, 아니면 다른 부류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들의 제의가 뭐였나?”

“정보와 상단을 통한 협가의 흔들기였습니다.”

“정보와 상단이라…….”

“예. 그걸 위해 저희는 협가에서 육 년을 죽어라 일했습니다. 목숨도 걸었고, 뼈가 부서져라 충성했지요.”

“육 년이나?”

“협가 놈들이 장난치듯이 휘두른 검에 팔다리가 잘린 채 돌아가신 아버님의 한을 풀 수만 있다면, 갓 열세 살이던 여동생을 간살해 죽인 놈들에게 원한만 갚을 수 있다면 육 년이 아니라 육십 년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한이 뚝뚝 흐르는 안평의 음성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함중은 어깨를 잘게 떨었다.

“그래서 성공은 한 거야?”

“지척에서 발각된 모양이더군요.”

“도대체 무슨 복수를 계획했기에?”

“팔대세가와 구파의 사이를 틀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고덕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럼 그 일이 네들 짓이었단 말이야?”

“협가는 그렇지요. 다른 곳은 또 다른 원한을 가진 이들이 움직였다 들었습니다.”

하기야 무가다.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룬 집단이니 그 과정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없을 수 없다.

그들의 한이 깊다면, 그리고 그들을 이용하고 지원할 세력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복수가 성공했다면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상했을 텐데?”

“그런 건 모릅니다. 저들도 내 가족을 죽일 때 우리가 죄가 있어 죽인 건 아니니까요.”

하긴 복수에 이유를 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도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고덕 자신조차 검을 들면 상대가 지은 죄의 유무 따윈 따져 본 적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왠지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그럼 이제 어쩔 생각인가?”

“모르겠습니다.”

무릎에 얼굴을 묻는 안평의 음성은 지쳐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뜬 마송을 들것을 만들어 태운 고덕과 일행은 소흥 왕부로 돌아갔다.

누구의 잘못이고 누구의 죄인지를 따지기엔 자신에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고덕은 협가로도 가지 않았고, 인근 산야를 뒤지고 다니던 협가검의 죄를 징치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셋이 나가 부상자 둘이란 혹을 달고 돌아온 고덕을 왕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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