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9장 (30/129)

제29장. 형제(兄弟)-새로운 인연

소흥 왕부로 돌아온 고덕은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죽어나간 장수들을 대신해 왕부의 경비를 맡은 것이 바로 고덕이었던 탓이다.

관인이 아닌 고덕이 왕부의 경비를 맡은 까닭에 당장 경비 병력의 증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목려송과 협련, 두 화경의 고수를 거느린 고덕은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모르는 이들은 장수들의 수가 너무 적어 경비의 효용성에 의문을 드러냈지만, 실질적인 효율성은 대단히 높았다.

화경에 이른 고수의 이목을 피한다는 것은 대낮에 그늘을 찾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다.

그런 화경의 고수와 소수의 경비병을 접목시키자, 침입자는 담을 넘는 순간 경비병들의 추적에 시달려야만 했다.

다른 왕부가 보낸 첩자에서 평범한 좀도둑까지, 매일 밤 잡혀 들어오는 이들의 수가 서넛에 이를 정도라 소흥왕이 기함을 했을 정도였다.

“이들이 평소에도 왕부를 드나들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잡히지 않았단 말인가?”

“잡히긴 했습니다. 간혹 가다이긴 했지만…….”

고덕의 답에 소흥왕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 묻는 것이 아닌가? 왜 그것밖에 못 잡았냐는 말일세.”

“그야 저는 모르지요.”

솔직히 모르는 것은 아니다.

경비의 허점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고, 적당과 내통하는 자들이 적당히 왕부 안에 자리를 잡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말하면 이젠 죽거나 중상을 입은 장수들을 모조리 폄하하는 일이니 차마 그러지 못할 뿐이었다.

“허허, 이 어찌……. 내 고 무인에게 거는 기대가 크네.”

“그 기대에 다 부흥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기대를 넘어서고 있다는 반증이 지금 이렇게 내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건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원래의 체제로 돌아가면 그만큼 발각해내는 침입자들의 수도 줄 것이니까요.”

“해서 하는 말이네만 자네, 관부에 투신할 생각은 없는가?”

소흥왕의 은근한 권유에 고덕의 입가에 설핏은 미소가 어렸다.

“사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하루가 다르게 실감합니다. 저는 그저 지금에 만족합니다.”

“흠… 안타까운 일이로군…….”

“그나저나 이 체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조속한 병력의 증강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내 관할하에 있는 절강성 도지휘사사의 병력은 언제라도 빼올 수 있네. 폐하께서도 금의위에서 일부 장수를 차출해주시겠다 하니 장수의 수급에도 문제가 없고.”

“한데 왜 미루십니까?”

“이번 일로 느낀 것이 많았네.”

“무장들의 수준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랬네. 평소 난 우리 왕부 무장들의 능력이 강호의 야인들과 비교해도 그리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네. 하지만 결과는 그게 아니더군.”

“습격자들의 능력이 너무 높았습니다.”

“그런 이들에게서 왕부를 지켜 내는 것이 바로 그들의 임무일세.”

낙담의 깊이만큼 소흥왕의 실망이 컸던 모양이었다.

“세상에 모든 도적을 막는 담장은 없습니다.”

“하나, 집안을 다 털리진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야 그렇습니다만…….”

“부탁 하나 함세. 담장을 새로 쌓아주게. 모든 도적을 막을 수 있는 담장은 바라지도 않네. 그저 집안을 모조리 털리지만 않게 해주게.”

소흥왕의 부탁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고덕이 물었다.

“관부 출신이 아니라 야인들로 채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상관없네. 살고 죽는 일에 그 출신이 무슨 소용인가? 난 살아야 하네. 문정을 지키고 보살피자면 난 살아야 함세.”

“왕부의 모든 곳을 지켜 내진 못합니다.”

“내 말하지 않았나. 모든 도적을 막을 생각은 없다고. 최악의 경우에 처해도 나와 문정 둘만 지켜 낼 수 있다면 됨세.”

“그렇다면 한번 만들어보지요.”

“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지원함세.”

소흥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고덕의 시선에 결연함이 서렸다.

어차피 떠나기 전에 그녀를 위해서도 경비는 확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 *

객사로 돌아온 고덕은 목려송과 협련을 불러 앉혔다.

“사람을 구하라구요?”

“그래.”

“하지만 대협이 말씀하신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이들이라면 이미 소속된 문파들이 있는 이들뿐입니다.”

“그러니 실력은 있되 뭔가 하나씩 부족한 놈들을 고르란 말이야.”

“저기… 그게 결정적인 문제여도 됩니까?”

“어느 정도나?”

“실력은 좋은데 살생을 못한다거나? 여자만 보면 환장을 한다거나…….”

협련의 말에 고덕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그런 놈들을 알고 있나 보지?”

“그, 그게… 실은 금의위에서 쫓겨난 이들 중에 그런 이들이 좀 있습니다.”

금의위라면 실력은 이미 검증된 자들이다.

더구나 황실의 예법을 모조리 배운 이들이니, 왕부에 배치되기엔 최적의 인선인 셈이다.

“데려와.”

“그 문제들은 어쩌시려고요?”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쓸어와.”

“아, 알겠습니다.”

협련의 답에 고덕의 시선이 목려송에게 향했다.

“넌 없어?”

“언뜻 생각나는 놈들이 두엇 있긴 있습니다만…….”

“그런데 왜?”

“애들이 조금 거칠어서…….”

“실력은 확실하고?”

“그럼요. 그중 둘은 제하이십사강이니까요.”

“제하이십사강? 너 설마?”

“아마 생각하시는 이들이 맞을 것입니다.”

“일주(日晝)와 월야(月夜)와 아는 사이였어?”

“조금…….”

“그 자식들이라면 괜찮지. 데려와.”

“저기… 문제는 확실히 아시는 거지요?”

“그야 확실히 알지. 살인과 식인.”

“맞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으십니까?”

“상관없어. 대신 내 이야긴 하지 말고 데려와.”

“혹시 아십니까?”

“흐흐흐, 알지. 아주 세세하게.”

고덕의 답에 목려송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

여하간 그날 두 사람은 고덕의 명을 받아 왕부를 벗어났다.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게 되자 소흥왕은 경비에 구멍이 뚫릴 것을 걱정했지만, 오히려 잡혀 들어오는 이들의 수는 배로 늘었다.

경지의 차이에서 오는 감각의 예민함이 얼마나 극명하게 차이 나는가를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한 예였다.

* * *

보름 만에 돌아온 협련은 꽤 뛰어나 보이는 무인 넷과 함께였다.

“이쪽부터 국중경, 함중, 가극, 신허라 합니다. 모두 제 금의위 동기입니다.”

협련의 소개에 고덕이 다가서자, 첫 번째로 소개되었던 국중경이 군례를 취했다.

“국중경이라 합니다.”

“하자는?”

“예?”

“네가 가진 하자.”

“아! 그게… 살인을 못합니다.”

국중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고덕의 발걸음이 옮겨지자 그 옆에 서 있던 사내가 군례를 취했다.

“함중이라 합니다.”

“하자는?”

“시, 식탐이 많습니다.”

함중의 말에 고덕의 시선이 협련에게 향했다.

“많이 먹는다고 쫓아냈단 말이야?”

“그게… 먹을 걸 보면 임무 중에도 자제를 하지 못해서…….”

한마디로 적을 쫓다가도 음식을 보면 발길이 자동으로 음식으로 향한다는 뜻이다.

“웃긴 녀석이로군. 넌?”

고덕의 시선에 가극이라던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풍류가 좀 심합니다.”

“아! 여자라면 환장한다던 놈이로군.”

“그, 그게…….”

“됐고. 넌?”

“신허라 합니다, 장군.”

“나 장군 아니다. 쓸데없는 말은 말고. 하자는?”

“없습니다, 대인.”

“대인도 아니니 그리 부르지 마라. 그리고 하자가 없어?”

“예, 어르신.”

“잘 봐라. 내가 너보다 이십 년은 젊어 보인다. 어르신은 무슨……. 근데 정말 하자 없는 거야?”

“정말입니다, 형님.”

신허의 답에 협련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아부가 심합니다.”

“아부?”

“예. 어찌 보면 큰 허물은 아닙니다만, 대상에 상관없이 아무 때나 아부를 해대는 터라…….”

자신의 개가 남을 따라도 화가 나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자신에게 아부를 하던 사람이 자신과 척을 진 사람에게도 아부를 한다면?

절대로 관부에 붙어 있을 수 없는 경우인 셈이다.

“웃긴 놈이로군. 일단 숙사에 집어넣어놔.”

“예, 대협.”

협련을 따라 객사로 향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고덕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어렸다.

* * *

그보다 삼 일 늦게 도착한 목려송은 일주와 월야 말고도 한 명의 외팔이를 대동하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대협.”

“허억-”

자신들 앞에 나타난 고덕의 모습에 일주와 월야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왔다.

“오랜만이다.”

“대, 대협도 오, 오랜만입니다.”

“그래, 오랜만이야……. 그런데 설마 아직도 그러고 다니는 건 아니지?”

“저, 저희 그거 끄, 끊었습니다.”

“정말이냐?”

“저, 정말입니다.”

“근데 왜 그렇게 떨어?”

“추, 추워서 그렇습니다.”

“조금 있으면 여름이다. 춥긴.”

“허, 허약해서 그렇습니다.”

“하긴 네놈들이 약골이긴 하지.”

“마, 맞습니다. 대협. 그, 그래서 저흰 도, 돌아가려고…….”

“너 목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 본 적이 있냐?”

“어, 없습니다.”

“그래, 없다. 그런데 돌아간다고?”

“아, 아닙니다. 여, 여기서 아주 쭉, 그러니까 평, 평생 눌러살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이다. 한데, 저 물건은 뭐지?”

“대치라고…….”

목려송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덕이 아는 체를 했다.

“대치면, 역수검(逆手劍)?”

“아시는군요.”

“들어는 봤지.”

“맞습니다. 잔결문의 마지막 계승자인 역수검 대치입니다.”

“한데 저놈도 알고 있었냐?”

고덕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던 듯 대치가 이를 드러냈다.

“관인 나부랭이가 입이 걸구나.”

“관인? 누구? 나?”

“그럼 여기에 관인이 너 말고 더 있겠냐?”

대치의 저항에 목려송은 당황한 얼굴이었고, 일주와 월야는 하얗게 질린 표정이었다.

“나 관인 아닌데.”

“그럼 관인도 아닌 놈이 입을 그리 놀려서야 제명에 살겠냐?”

“풋- 고놈 재미있는 놈일세.”

“놈놈 거리지 마라. 듣는 놈 기분 나쁘시다.”

“하하하, 너 생각보다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하긴 개기는 맛이 있어야 패는 것도 즐거움이 있는 법이지.”

“크크크, 패? 누굴, 날? 네깟 노… 커억.”

느닷없는 일주의 일격에 뒤통수를 내준 대치가 뒤를 돌아보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이 잡놈의 새끼가.”

“뭐, 잡놈? 이 시러배 아들놈이 죽을 뻔한 걸 살려 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어디서…….”

“감사? 오냐, 감사 여기 있다. 이 새끼야.”

고함의 끝에 검이 뽑혀 나오자, 뒤로 훌쩍 물러난 일주가 잘됐다는 표정으로 쇠도리깨를 꺼내들었다.

“오냐.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찝찝하던 차에 잘됐다. 뒈져라!”

부아앙-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드는 쇠도리깨를 검면을 대어 흘린 대치가 사각으로 파고들며 검을 당겼다.

끼이이익.

옆구리를 파고드는 검날이 어느새 뒤로 물러난 쇠도리깨에 막혀 쇠 갈리는 소음을 흘려 냈다.

그 뒤를 이어서 연신 이어지는 공방을 주고받는 둘을 바라보던 고덕이 피식 웃어 보였다.

“팔팔한 놈들이라 다르군. 잘 데려왔다.”

“그런데 정말 저들이 괜찮겠습니까?”

“동남동녀 수백을 잡아먹은 네놈도 함께 다니는데, 저들이야 대수라고.”

“풍문보다 그 안에 든 것을 보라는 말씀이십니까?”

“뭐 그렇게 거창하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고. 그저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음부터 나쁜 놈은 없다는 정도. 일단 저 자식들도 객사로 집어넣어놔.”

“예, 대협.”

고개를 숙인 목려송이 나섰지만, 서로 죽일 듯이 달려드는 싸움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없었다.

결국 목려송이 육장을 뿌려서야 간신히 떼어놓았지만, 억지로 떨어진 둘은 목려송을 향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천하의 음양마 목려송에게 이를 드러내는 이들을 바라보며 고덕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토끼다 걸리면 다리를 깨끗이 잘라준다.”

담담한 음성에 꼬무락거리며 발을 밖으로 돌리던 월야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바, 발이 가려워서 그랬습니다. 절대로 도, 도망갈 생각 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대협.”

“뭐, 거짓말이어도 괜찮아. 오랜만에 네놈들과 놀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테니까.”

고덕의 말에 꿈에서도 생각하기 싫은 과거의 한때를 기억해낸 월야의 고개가 맹렬하게 저어졌다.

“저, 절대로 대협과 안 놉니다. 정말입니다. 저, 노, 놀이 끊었습니다.”

“확실해?”

“확실합니다.”

“하긴 아니어도 상관없어. 그래야 재미도 있지.”

“죽어도 아닙니다.”

“그거야 죽어봐야 알지.”

씨익 웃는 고덕의 미소에 월야의 표정은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려 갔다.

들어가 쉬라는 말을 남기고 고덕이 돌아가자, 목려송이 월야에게 물었다.

“대협을 아나?”

“예? 누, 누구요?”

“대협 말일세.”

“자, 잘 모릅니다.”

무슨 이유인지 월야는 여전히 파랗게 질린 얼굴로 횡설수설하기만 했다.

그런 월야에게선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없다고 판단한 목려송의 시선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대치를 노려보던 일주에게 향했다.

“혹시 대협을 아나?”

“잘 알죠.”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들을 수 있겠나?”

목려송의 물음에 일주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

“살아야 하니까요.”

“뭐?”

일주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목려송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일주나 월야의 입은 조개인 양 굳게 다물려 열릴 줄 몰랐다.

* * *

객사라고 큰 방 하나에 모조리 들어간 이들 간엔 알 수 없는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가진 능력은 모두 초극으로 비슷비슷하다. 하니, 절대 강자가 없는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죽일 듯이 노려보는 대치나, 비릿한 미소로 마치 먹잇감을 훑어보듯 바라보는 월야나 일주의 시선이 달가울 리 없는 국중경 등도 심기가 불편할 수밖엔 없었다.

외부에서 서로의 서열을 정해주거나 대충의 임무로라도 나누어주면 조금이라도 나았을 것을, 고덕은 그들을 그대로 방치했다.

더구나 용변마저 요강으로 해결할 뿐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자, 단 이틀 만에 방 안의 긴장감은 극도로 높아졌다.

그리고 결국, 삼 일째 밤에 사건이 터졌다.

칼이 날아다니고 쇠도리깨가 춤을 췄다. 난데없이 방패가 등장하고 그 긴 청룡도가 방 안을 휘저으며 주변의 기물을 모조리 때려 부수는가 하면 쇠줄에 묵인 겸(鎌)이 날아다니며 방심을 노렸다.

대들보 위에서 그 아비규환의 모습을 지켜보는 고덕의 입가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잠잠해진 방으로 들어선 목려송과 협련은 의외의 상황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방 꼴이 이게 뭔가?”

“험험… 거 조금 심하게 논 탓입니다.”

놀았다는 이들의 외관이 볼만하다.

이불을 뜯어 싸맨 상처에 피가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신허가 보였고, 양쪽 뺨이 한껏 부푼 함중, 양쪽 코를 솜으로 틀어막은 월야, 양쪽 눈이 시퍼렇게 물든 국중경, 대치는 그 긴 장발이 반이 넘게 잘려 나갔다.

그리고 말하며 히죽 웃는 일주의 입에선 앞니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쯧, 어찌 그 나이가 되도록……. 근데 가극은 어딜 간 건가?”

협련의 물음에 일주가 답했다.

“요강이 깨져서 바꾸러 갔습니다.”

“가극이?”

시녀들이 가득한 왕부에서 가장 위험한 종자가 가극이다. 그런 이가 방 밖으로 나갔다는 말에 협련의 얼굴에 걱정이 들어찼다.

“아무래도 찾아봐야겠습니다.”

나가려 방문을 연 협련이 놀란 표정으로 물러났다.

“오, 오셨습니까? 대협.”

“그래. 참, 이놈이나 좀 받지.”

쿵-

한쪽 발을 잡아 질질 끌고 들어온 가극을 방 안으로 던져 놓는 고덕의 움직임에 일주와 월야의 신형이 움찔거렸다.

“그런데 왜 꼴이……?”

“그냥 심심해서 좀 데리고 놀아봤네.”

데리고 놀았다는 고덕의 말에 일주와 월야가 경기를 일으켰다.

“왜 그렇게 떨고 지랄이야.”

“아으, 그그,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 방이 너무 추워서…….”

“허약한 놈들 같으니라고. 그나저나 대충 서열은 정해진 거냐?”

“서, 서열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대협. 그저 정해주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일주의 말에 대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형님, 왜 저 작자에게 그리 저자세로 나가는 게요?”

“허억. 이, 입 다물어. 새꺄-”

화들짝 놀란 일주의 고함에 불만 어린 표정으로 물러나는 대치를 바라보던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잘 잡혔네. 일단 짝을 맺어준다.”

“대, 대협! 구, 굳이 짝을…….”

일주의 당황성에 슬쩍 인상을 구긴 고덕이 짜증을 냈다.

“네가 대장 할래?”

“아, 아닙니다. 이, 입을 꿰매고 있겠습니다.”

일주의 호들갑에 혀를 찬 고덕이 말을 이었다.

“쯧, 짝은 다음과 같으니 잘 들어라. 일주와 국중경, 월야와 함중, 대치와 가극이다. 아! 신허는 짝이 없다. 대신 신허가 누군가를 칭찬하는 말을 단 한마디라도 한다면 네놈들의 주둥이를 찢어놓을 게야.”

“대, 대협!”

왠지 너무 놀라는 일주의 모습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고덕이 말을 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일주에게 듣도록. 나중에 보자, 일주. 크크크.”

요상한 웃음을 남긴 고덕이 목려송과 협련을 대동하고 돌아가자, 사람들이 일주에게 몰려들었다.

“도대체 저 새끼가 한 말이 무슨 소리요?”

대치의 말에 화들짝 놀란 일주가 문밖을 확인하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입조심해.”

“아니, 그자가 도대체 누군데 그러는 거요?”

“네들도 들어는 봤을 거야. 검마라고.”

“에엑! 천하오존의 그 검마 말이오?”

“그래.”

“아니, 그 작자가 왜 왕부에 있는 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잘 아는 거 같던데, 아니오?”

“잘 알긴 개뿔…….”

“알면 얘기 좀 합시다.”

대치의 성화에 일주의 눈치를 본 월야가 입을 열었다.

“과거에 대협의 무사단에 있었소.”

“무사단? 검마가 무사단을 만들었단 말이오?”

“대치 형님도 이야긴 들어봤을 거요. 참마대라고.”

“설마 월야 너하고 일주 형님하고 참마대였어?”

서열상 이 인자의 자리를 차지한 대치의 물음에 대형의 자리를 꿰찬 일주가 답했다.

“정확히는 참마대 훈련생이었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참마대 훈련 과정에서 도망쳤어.”

“예에?”

“그게, 너무 힘들었거든.”

“도대체 얼마나 힘든 훈련이었기에 초극에 이른 사람들이 도망을…….”

“그건 훈련이 아니라 고문이었어, 고문.”

“도대체 어떤 훈련이기에 그러는 겁니까?”

“머지않아 알게 될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유?”

“그 훈련의 첫걸음이 바로 짝 맺기야.”

“예에? 그럼 지금 우리에게 참마대의 훈련을 시킨단 말이오?”

“모르지. 다 시킬지, 아니면 일부만 시킬지.”

“도대체 그 짝 맺기가 어떻게 하는 거요?”

“생각보다 간단해. 짝은 밥을 먹을 때도, 똥을 쌀 때도, 계집질을 할 때도, 살인을 할 때도 함께하니까.”

“그거야 어려운 건 아니지 않소.”

“물론 어렵진 않아.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힘은 들 거야.”

“그게 뭐가 힘들다고……?”

대치의 의문에 일주 대신 월야가 나서 보충 설명을 이었다.

“여기서 함께한다는 건 같은 장소에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우.”

“하면?”

“정말 함께한다는 뜻이우.”

“그게 무슨 말이야?”

대치의 되물음에 다시 일주가 나서서 답했다.

“말 그대로다. 밥을 먹어도 같이 먹고, 똥을 싸도 같이 싼다.”

“아니, 한 명은 똥이 안 마려우면 어쩌라고?”

“마려울 때까지 참아야지.”

“예~ 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의 사람들에게 일주가 설명을 이었다.

“만에 하나 식사를 함께하지 않는 게 발각되면 열흘을 굶긴다. 함께 똥을 누지 않는 게 발각되면 피똥을 칠 일간 싸게 해준다.”

“하면 계집도 함께 품으란 말이오?”

웃긴다는 듯이 물었던 대치는 일주의 답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래. 계집을 품으려면 함께 품는다. 마찬가지다. 살인을 한다면 두 사람이 동시에 찔러야 한다. 만에 하나 한 명이 늦게 찌르거나 급소를 빗겨 찔러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 상대가 먼저 죽는다면…….”

“서, 설마 죽이는 거요?”

“아니, 하지만 죽는 게 나을 거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나중에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중에 알게 될 거다. 내 말뜻을.”

일주의 설명에 방 안엔 긴장이 가득해졌다.

“도망가면……?”

이들 중에 다섯째가 되어버린 함중의 말에 일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길 빈다.”

“하지만 대형이나 사형은 성공한 거 아니오?”

“성공? 반년을 죽고 싶을 만큼 얻어터지며 살았다. 참마대가 다 찼다고 놓아줄 때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안다면 그런 말은 절대로 못한다.”

“그, 그럼…….”

“재수에 옴 붙었다 생각해라.”

일주의 말에 모든 이들의 표정에 낭패감이 어렸다.

“근데 이놈, 왜 못 일어나는 거지?”

자신과 짝이 된 가극을 살펴보던 대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 이거……!”

“왜, 왜 그래?”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자 대치가 가극의 피 묻은 하의를 벗겨 냈다.

“허억-”

질겁한 비명이 나올 만큼의 참경이었다.

“이, 이거 제대로 작동하겠소?”

“그, 글쎄…….”

새롭게 의형제를 맺은 이들의 걱정 어린 시선이 정신을 잃은 가극의 하의에 모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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