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흔적(痕迹)-추적이 시작되다
항주를 떠나 폭죽이 오른 곳을 향해 달려오던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상상치 못했던 위기에 처했다.
불현듯 솟아오른 오백의 무인들 속에 갇혀 고군분투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창궁검진을 펼쳐라!”
남궁단의 고함에 백여 명의 남궁세가 무사들이 원으로 뭉쳐 들며 검을 들었지만, 압박은 그다지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피도 줄어들지 않았다.
상대는 검진을 효과적으로 분쇄하고 있었다. 마치 창궁검진을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검진이 소용없다는 것을 파악한 남궁단은 자신과 동행한 몇몇 장로들과 함께 즉시 앞으로 나섰다.
자신들의 무위로 검진에 가해지는 압박을 줄여 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걸 깨닫는 것엔 촌각도 걸리지 않았다.
복면에 야행복을 입은 무리의 공격은 빠르고 효과적이었다.
강자들이 앞으로 나서자마자 일정한 검진을 구성한 적은 오히려 강자들을 검진에서 떼어내 각각의 검진에 가두어버렸다.
강자들이 일단의 복면인들이 구성한 작은 검진들에 갇히자, 창궁검진에 의지해 뭉쳐 있던 세가 무인들에게 쏟아지는 압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압박을 견디지 못한 일각이 무너지자 검진은 급속도로 와해되었다.
검진이 깨어지자 남은 건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두 눈 멀쩡히 뜨고 피 같은 가솔들의 죽음을 바라봐야 했던 남궁단과 장로들의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사력을 다해 자신들을 가둔 검진을 깨고자 노력했지만, 알 수 없는 검진은 철벽처럼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러다간 자신들이 데려 나온 세가의 무인들이 다 죽겠다 싶었던 순간, 고덕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남궁단은 보았다.
찬란하게 부서져 내리며 적의 몸통을 가르는 강기의 소나기를…….
피로 질펀하게 변한 숲 속엔 수백의 시체가 비릿한 혈향을 풍겨 내고 있었다.
“괜찮은가?”
“감사합니다.”
“왜 나선 거야?”
“저들이 엄한 짓을 꾸미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그런데 이들은 누구입니까?”
남궁단의 물음에 고덕이 턱을 쓰다듬었다.
“단리세가에서 처음 부딪쳤던 이들이야.”
“단리세가라면 설마……?”
“그래. 그때 튀어나왔던 놈들이지.”
“미지의 세력인 겁니까?”
근심 어린 남궁단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내력은 대충 짐작하고 있어.”
“어딥니까?”
“혈교.”
“예? 혀, 혈교요!”
삼백 년 전, 전 강호를 피에 잠기게 만들었던 광인들의 집단이다.
그들을 막기 위해 강호는 마교와 정천맹의 연합이라는 유례없는 동맹을 이끌어냈다.
그러고 나서야 중원 강호는 간신히 혈교의 준동을 막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 그들의 후예가 살아 있었단 말입니까?”
“나도 자세히 알진 못해. 그들이 사용한 무공이 혈교의 것과 같다는 것뿐이지, 진정 혈교의 무리인지도 모르고.”
“그렇다 해도 이건 우리끼리 처리할 일이 아닙니다.”
“정천맹에 상신할 생각인가?”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나쁘진 않겠지. 알아서 하게.”
“한데 저분들은…….”
천천히 나타난 목려송과 일행의 모습을 돌아본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내 일행일세. 하면, 나중에 또 보지.”
“오늘의 도움은 남궁의 이름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잊지 마. 내 부탁할 일이 있으니.”
고덕의 말에 남궁단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목을 달라 해도 드리지요.”
“자네 목을 가져다 어디다 쓰라고. 그저 약속만 이행하면 돼.”
“약속이라면 설마……?”
“기억하는 모양이지?”
“정말로 연을 맺을 만한 손녀 분이 있는 겁니까?”
“그래. 하지만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아, 알겠습니다.”
남궁단의 배웅을 받은 고덕은 사람들을 데리고 항주 중심지에 위치한 도지휘사사로 향했다.
완전히 중무장한 군병으로 둘러싸인 도지휘사사에 도달한 고덕은 여덟 차례의 검문을 통과하고서야 도지휘사사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숙부!”
초주검이 되어 나타난 소흥왕과 문정 군주의 모습에 가정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가정제의 물음에 소흥왕이 고개를 조아렸다.
“괴인들의 급습을 받아… 폐하께서 강녕하시니 다행이옵니다.”
소흥왕의 말에 놀란 고덕의 시선이 가정제에게 향했다.
“황제… 였습니까?”
“무엄하다!”
곁에 서 있던 해서령의 호통이 터져 나왔지만, 고덕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 고덕의 모습에 미소를 지은 가정제가 손을 저었다.
“되었다. 강호인에게 관부의 예를 바라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으니.”
“하오나…….”
“괜찮다 하지 않던가.”
가정제의 거듭된 제지로 물러서긴 했으나 해서령의 얼굴엔 고덕에 대한 노여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해서령의 속을 고덕이 뒤집었다.
“쥐뿔도 없는 놈이 자존심은…….”
“네 이 방자한…….”
분노를 불태우며 앞으로 나서던 해서령이 움찔거리며 물러섰다.
고덕의 눈동자로 천천히 떠오르는 광기를 접한 까닭이다.
순간, 소름이 돋는 오싹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물러난 해서령의 모습에 고덕의 눈에 떠오르던 광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두 사람의 대치를 바라보던 가정제가 끼어들었다.
“그만하게.”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고개를 조아리는 해서령과 달리 고덕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 고덕의 행동에 헛웃음을 지어 보인 가정제가 물었다.
“적도들은 정리가 된 것인가?”
“일단은 그리된 것 같습니다.”
“일단? 그 소리는 남은 잔당이 있다는 말인가?”
“확실치 않습니다.”
“확실치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저들의 정체는 물론이고 그 규모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드러난 이들이 아니란 말이로군.”
“예.”
“한데, 강호인이 황족을 노린 이유를 모르겠군.”
황제의 입에서 거론되니 상황이 무서울 만큼 날카롭다.
“강호인이 아니라 반도들일 뿐이겠지요.”
“그 반도가 강호인이 아니란 말인가?”
“맞습니다. 반도가 강호인이지, 강호인이 반도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 묘한 표현의 차이에 황제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을 결정하는 건 짐일세.”
“그러니 확실하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뭐, 일단은 그대의 말을 믿어두지.”
일단이라는 단서가 달린 이상 나중엔 그 믿음이 변할 수 있다는 뜻이었지만, 고덕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관과 그가 사는 강호는 같은 공간의 다른 세계였기 때문이다.
일단의 변란이 발생했지만, 남궁세가와 호부의 거래는 무사히 끝이 났다.
자금 경색으로 일어난 남궁세가의 위기는 지나갔지만, 여전히 만금장의 지지 세력인 구파일방과 팔대세가의 경직은 풀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황족인 소흥 왕부가 일단의 강호인에 의해 습격을 당한 사건은 강호 현안에 대한 관부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소란 가운데 광서 지방의 반란은 해를 넘겨 가고 있었다.
* * *
남궁세가의 전갈을 받은 정천맹은 예상외로 조용했다.
그 흔한 통발 하나 돌리지 않았고, 혈교에 대비한 회의조차 열리지 않았다.
그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당황한 남궁세가는 팔대세가의 회합을 발의했고, 구파일방과의 마찰로 저마다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팔대세가는 흔쾌히 동의해 남궁세가로 모여들었다.
“지금의 난관을 어찌 풀어나가실 요량이십니까?”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정의 물음에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창천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그것을 논의하고자 뵙자고 한 것입니다.”
“솔직히 답답합니다. 저들은 똘똘 뭉쳐 있는 것 같은데 우린 서로가 너무 떨어져 있어요. 그 탓에 바위 앞에 선 계란의 심정이란 말입니다.”
하북팽가의 가주인 팽군현의 말에 사람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특히 사천에 자리한 당가의 가주는 심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듯 보였다.
“우리 당가는 숨조차 쉬기가 어렵습니다. 아미와 청성이 노골적으로 우리 당가타를 압박하고 있어요.”
강호십대고수의 일인이자 전대 고수인 독괴 당조성의 푸념에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황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산과 종남 사이에 끼어 죽을 맛입니다.”
“말씀들을 들으면 구파일방의 노골적인 압박에 시달리는 것인데……. 전 그들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가 이해되질 않습니다.”
남궁창천의 말에 그간 조용히 듣고만 있던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무흔이 나섰다.
“그건 구파일방이 잘못된 정보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정보요?”
“그렇습니다. 저들의 행동이 이상한 시점부터 최근까지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본 결과, 구파일방은 우리 팔대세가가 강호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합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맞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저들의 수뇌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면, 일련의 압박이 팔대세가의 야욕을 막기 위한 견제라 그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구파일방의 입장에선 주도권을 지키기 위한 견제인 셈이지요.”
“시대가 변해갑니다. 산에 틀어박혀 세상과 담을 쌓은 구파보다 사람과 함께 부딪치고 얼굴을 맞대는 우리 팔대세가가 발전해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명제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주도권을 쥐기 위해 별도로 실력을 행사한 적도 없질 않습니까?”
“맞습니다. 억울한 누명이지요.”
사방에서 그에 동조하는 말들이 쏟아지자, 제갈무흔이 소란을 정리하고 나섰다.
“지금은 우리가 억울하다 안 하다의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하면 무엇이 문제란 말씀이시오?”
“저들의 오해를 먼저 풀어야지요.”
“저들의 오해를 푼다?”
“그렇습니다. 저들의 오해를 풀지 못한다면 우린 계속적으로 구파일방과 맞서야만 합니다.”
“맞서게 된다면 그럽시다. 힘은 들겠지만 두려울 건 없지 않겠소.”
팽가의 가주인 팽군현의 주장에 제갈무흔이 고개를 저었다.
“남궁세가의 전언대로라면 혈교의 잔당으로 의심되는 이들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파일방과의 무의미한 대립은 자칫 돌이키기 힘든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구파일방에 고개를 조아리자는 겁니까?”
“지금의 상황에선 고개가 아니라 허리라도 굽혀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갈무흔의 말에 사방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죽으면 죽었지, 난 그리는 못합니다.”
팽군현에 이어 단리세가의 가주인 단리천패가 단호한 음성을 토했다.
“단리세가의 현판이 땅에 떨어지기 전엔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자식의 목숨을 구파의 일원인 청성에 빼앗긴 단리세가의 입장을 이해하는 가주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립만을 추구하다간 제갈 가주의 말처럼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 될까 두렵습니다.”
황보정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존심으로 따지자면 구파에 뒤질 것이 없는 곳이 팔대세가다.
하지만 현실로 넘어가면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그럼 어쩌자는 말씀이오?”
남궁창천의 물음에 황보정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독괴 선배께서 걸괴 선배와 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황보정의 말에 독괴 당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물과는 유별난 인연이 있지.”
“하면 그 인연에 기대볼 순 없겠습니까?”
“혹, 황보 가주께선 개방을 중재자로 내세워보자는 말씀입니까?”
제갈무흔의 물음에 황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구파일방이 한집처럼 움직이나 개중 변하지 않은 곳은 개방이 유일한 듯하니 그들을 중재자로 세워보자는 것입니다.”
“개방이라……. 하긴 그들은 여전하긴 하지요.”
“걸개들이 욕심이 없는 탓이겠지요.”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말들이 흐르자 제갈무흔이 정리를 했다.
“하면 그렇게 하지요. 가능하시겠습니까? 선배님.”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독괴 당조성이 허옇게 센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인연이야 있지만 요 근래엔 얼굴 보기조차 힘이 들었었으니…….”
천하오존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강호십대고수만 해도 전대 고수들이 주축을 이룬다.
그 탓에 그들의 현재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럼 불가능할까요?”
“글쎄, 일단은 접촉을 해보지. 결론은 그때나 내려 보세.”
“하면 언제 접촉을 시도해보실 요량이십니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해보지. 마침 개봉의 총타가 있는 개봉도 예서 멀지 않으니 오늘 바로 사람을 보내봄세.”
“그분이 응할까요?”
“생각이 있다면 응할 것이고,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겠지.”
누구나 할 수 있는 답이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그 답 외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만큼 팔대세가의 상황이 답답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 * *
당가의 무인 둘이 가주의 명을 받아 하남의 개봉을 향해 달렸다.
잠도 아껴 자고, 먹는 시간도 아껴 가며 달린 그들이 개방의 총타에 도착한 것은 안휘의 남궁세가를 출발한 지 사 일 만이었다.
“누구를 찾아왔다고?”
“걸괴 대협을 찾아왔습니다.”
“걸레?”
“아니요, 걸괴 대협이요.”
“그 자식은 왜?”
답은 않고 자꾸 쓸데없는 물음만 잇는 노걸개의 물음에 당가의 장로인 당호가 답답한 듯 말했다.
“당가 가주님의 심부름으로 걸괴 대협을 뵈러 왔습니다.”
“백결개 놈은 나가서 안 들어온 지 좀 되었는데.”
“하면 노걸개께선 어찌 되시는지요?”
“나? 나야 이 빌어먹을 집안의 가장이지.”
“헉- 무림 말학이 개방의 방주를 뵈옵니다.”
개방의 방주는 전전대의 고수다.
무슨 미련이 남아서인지 아흔이 넘도록 방주 자리를 지킨 탓에 일흔이 넘었던 후개가 먼저 세상을 뜬 웃지 못할 일화를 만들어낸 주인공이기도 했다.
“클클클, 인사성이 밝구나. 버릇을 잘 들였으니 훌륭한 스승 밑에서 사사했으렷다.”
“감사합니다, 방주님. 하온데 걸개 대협은 어디로 가야 뵐 수 있을지……?”
“그야 나도 모르지. 빌어먹을 놈들이 늙었다고 날 내팽개쳐 두고 모조리 구걸을 나갔으니 내 어찌 알겠누…….”
그러고 보니 아무리 개방이라곤 하나 방주를 홀로 두고 모든 방원들이 나간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두 나갔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니까. 빌어먹고 살다 보니 다 빌어먹을 잡놈들이 된 게야. 썩을 놈들…….”
방주의 투덜거림이 가라앉기 무섭게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거 불쌍한 애들 욕 좀 하지 마쇼.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면서 애들만 달달 볶아대는 주제에 애들 흉을 보면 어쩌우.”
“이런 빌어먹을 놈의 새끼, 말본새하고는…….”
“그러니 내가 사부같이 징글맞은 영감을 만나 이 고생이 아니겠소.”
“예라이, 시러배 아들놈아.”
“거 하나만 합시다. 빌어먹을 놈이든지 아니면 시러배 아들놈이든지.”
걸쭉한 입담을 쏟아내며 들어서는 걸개의 옷이 모조리 조각조각 모은 천으로 만든 옷이다. 세상에서 저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혹, 걸괴 대협이 아니십니까?”
“걸괴는 무슨. 사부 이야기 못 들었나? 빌어먹을 놈이거나 시러배 아들놈이라잖나.”
“이렇게 뵙게 되다니 다행입니다. 대협.”
“거지 나부랭이 하나 만난 게 뭐 대수라고 호들갑은…….”
마뜩치 않은 걸괴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당호가 반갑게 말했다.
“가주께서 뵙길 청하십니다.”
“가주? 녹피 장갑에 사슴 오줌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놈들이야 당가 놈들뿐이니, 당조성이 그 잡놈이 보낸 것이렷다.”
듣기 민망한 독설이지만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을 알고 있던 당호는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예. 가주께서 꼭 뵙고자 하십니다.”
“그놈이 뭔 바람이 불어서 날 찾아?”
“구파와 팔대세가의 문제를 풀기 위함이라 말씀 올리라 하셨습니다.”
“냄새나는 이권 다툼이라……. 하기야 냄새나는 곳이야 걸개에겐 제격인 게지. 오냐, 가보자.”
흔쾌히 승낙하는 걸괴의 말에 당호가 반색을 하며 나서자, 걸괴가 방주에게 인사를 했다.
“사부, 내 냄새나는 일 좀 해결하고 오겠수.”
“오냐. 잘 갔다 맛난 거 좀 얻어오너라.”
“맛난 건 둘째 치고 뺨이나 안 맞을지 걱정이오.”
“빌어먹을 놈이 별게 다 걱정이다. 냉큼 다녀오기나 해.”
사부의 걸쭉한 말에 빙긋이 웃어 보인 걸괴가 저만치 앞서 나간 당호를 따라 움직였다.
* * *
당호의 안내로 남궁세가에 도착한 걸괴를 맞은 것은 독괴 당조성이었다.
“아직 안 죽었냐?”
당조성의 인사 아닌 인사에 걸괴가 푸념을 늘어놨다.
“네놈 관에 넣어 땅속에 묻을 때까진 못 죽는다, 이놈아.”
“오냐.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서 꼭 묻어줘라. 못 묻으면 내 죽어서라도 네놈의 쪽박을 깨놓고야 말테니.”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그나저나 왜 부르고 지랄인 게야?”
“네놈이 힘 좀 한번 써야겠다.”
“뭔 힘. 이권 다툼에 개방이 나설 일이 동냥 말고도 있다더냐?”
“이권 다툼이라니. 우린 이권 다툼 따윈 할 생각도 없다.”
“그런 인사들이 왜 기존 상권을 잠식한 게야?”
“기존 상권을 잠식하다니, 그게 뭔 말이야?”
“구파 아무 곳이나 가서 붙잡고 물어봐라. 팔대세가가 뒷배를 보아주는 상가들의 진출로 손해를 보지 않은 곳이 있는지 말이다.”
“우리가 뒷배를 보아주는 상가들 때문에 구파가 손해를 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어허, 이놈이 이젠 눈뜨고 장님 노릇일세. 저자에 나가봐라. 구파의 상권이 어찌 되었는지. 지금 구파는 속가 애들 아니면 삼시 세끼 밥도 제대로 못 찾아 먹게 생겼어. 아무리 시전 상황이 능숙해도 그렇지, 두메산골에 처박혀 사는 놈들이 뭘 안다고 그걸 알겨먹나. 에잉…….”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이야기해보란 말이야.”
“정말로 이럴 건가?”
독괴의 말에 오히려 걸괴가 인상을 찌푸리고 나온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느낀 제갈무흔이 나섰다.
“잠시 후배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오라, 이빨 튼튼한 제갈가의 가주께서 무슨 말씀이 하고픈 게로구만. 어디, 들어나 봅시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걸괴의 모습에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인 제갈무흔이 조곤조곤 물었다.
“지금 걸괴 대협의 말씀대로라면 저희 팔대세가가 지원하는 상가들이 구파의 기존 상권에 침습해 많은 부분을 가로챘다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오호, 이제야 제대로 말하는 사람이 나오는구만. 그렇지. 당최 왜 그리 박하게 구냔 말이야. 산골에 처박혀 벽만 보고 사는 땡중들과 말코들이 뭘 안다고. 적당히 해먹고 말 일이지, 멍석 걷고 쪽박마저 깨버리면 어쩌잔 말인가?”
“단언컨대 우리 중엔 그런 일을 벌인 곳이 없습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내 알기로 가장 많이 해먹은 곳이 바로 제갈세가, 입만 번지르르한 네들 집안이건만.”
걸괴의 말에 당황한 제갈무흔이 되물었다.
“제갈세가가 가장 많이 그랬다고요?”
“그래. 설마 여전히 오리발을 내밀 생각인 건 아니겠지?”
걸괴의 말에 비로소 사태를 완전히 파악한 독괴가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일로 구파의 피해가 심각한가?”
“심각하지. 너무 심각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쥐가 나 죽을 것 같은 곳들이 지천이야.”
“이봐, 백결개.”
“왜, 또 무슨 소릴 하려고 그리 목소리 쫙 깔고 부르는 게야?”
“내 말 잘 듣게. 정말로 우린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네. 우린 오히려 구파에서 느닷없이 압박을 가해온다고 이렇게 모여들었던 거란 말일세.”
“무슨 소리야? 내 눈으로도 분명히 봤는데?”
“어디서, 누가 말인가?”
“제갈세가의 장로가 연관된 한 상단이 숭산 인근의 상권을 아주 싹 쓸어버리더군. 소림의 속가들이 세운 점포며 전장, 표국이 깡그리 망했지. 구환 대사 그 늙은이가 수양이 깊어 조용했지, 아니었으면 제갈세가 기둥이 모조리 뽑혔을 거야.”
구환 대사는 자신의 법명보다 강호십대고수 중 권왕이란 이름으로 더욱 유명했다.
“직접 보셨단 말씀입니까?”
“그럼, 봤지.”
“그 장로의 이름을 아십니까?”
“탄인가 탈인가 아마 그랬지.”
“탄… 설마 제갈탄 기찰 장로 말씀입니까?”
“그놈이 기찰 장론지 사찰 장론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은 분명 그리 들었다고.”
걸괴의 말에 제갈무흔의 시선이 배석해 있던 장로에게 향했다.
“즉시 제갈탄 장로를 잡아들여 이곳으로 압송하라.”
“명!”
고개를 숙여 복명한 제갈가 장로가 대청을 나가자 걸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뭐, 뭐야. 정말 몰랐던 거야?”
“몇 번 말해야 알아 처먹을래, 이 거지 영감탱이야. 정말 몰랐단 말이다.”
“가만, 그러면 당사자만 잡아들여선 소용이 없을걸.”
“그건 왜입니까?”
남궁창천의 물음에 걸괴가 제갈무흔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정말로 가주들에게 보고되지 않았다면 정보 관리자도 이미 저들과 한패라고 봐야겠지.”
“하지만 그 말씀대로라면 저희 팔대세가의 모든 정보 책임자가 변심을 했다는 것인데…….”
말을 하다 보니 그 문제의 심각성이 싸한 전율로 느껴져 왔다.
그 탓에 심각해진 건 남궁창천만이 아니었다. 배석해 있던 가주들의 표정에도 한결같이 경악과 당혹감이 들어찼다.
“시작할 거라면 한 번에, 그것도 빠르게 덮쳐야겠군.”
걸괴의 음성에 고개를 끄덕이는 가주들의 수가 천천히 늘어났다.
결국 팔대세가 가주들의 공동 명의로 전 세가에 비상이 떨어졌다.
그 즉시 가주와 함께 남궁세가에 와 있던 세가 최강의 무력 단체들이 일제히 자파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정보 책임자 및 핵심 인사, 그리고 상단이나 재무 담당자들에 대한 체포 구금의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남궁세가에 모여 있는 가주들은 세가로 달려간 심복들의 보고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