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위기(危機)-남궁세가, 흔들리다
한 가지 위험이 사라진 탓인지 문정 군주를 바라보는 고덕의 눈에 어린 걱정이 한 꺼풀은 벗겨진 듯 보였다.
그 시점에 복주상단에서 연통이 왔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건 어찌 알았나?”
“소흥은 항주와 가까운 곳입니다. 더구나 소흥엔 저희 상단의 점포도 있구요.”
“내 모습을 보았단 말이로군.”
“예, 대협.”
“한데 무슨 일인가?”
고덕의 물음에 심부름 온 이가 서찰을 내밀었다.
그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고덕의 표정이 굳었다.
“이것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남궁세가가 무력을 동원했지만 실패했다?”
“예, 대협.”
“현재 호부상서가 항주에 와 있다고?”
“그렇습니다. 소문엔 할인 판매 중인 점포와 계약을 체결하려 든다고 들었습니다.”
“하나, 여람의 말로는 그리되기 어렵다 하던데?”
“그 때문에 저희는 물론이고 상계 전체가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놀랍다곤 하나 상계 전체가 당황할 일은 아니지 않나?”
“그것이… 실은 할인 판매 중인 점포들이 남궁세가와 접촉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남궁세가와? 서로가 견원지간일 텐데?”
“당연히 그렇지요. 하지만 웃긴 게 남궁세가가 그 접촉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인사들을 만나다니……. 혹, 다시 무력을 사용할 생각인 건 아니고?”
“만남의 자리를 주선하는 자가 항주 자사입니다.”
“자사라면……?”
“항주부의 지부대인이지요.”
“그런 자가 어찌 사사로이 상인들의 일에?”
“그 일 자체가 광서성의 반란과 직결된 터라……. 절강성 승선포정사사에서도 오히려 등을 떠미는 모양입니다.”
“그런 자가 주선한 자리라면 무력은 물 건너갔군.”
“그렇기에 이번 만남에 당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쪽의 거래가 성사될 것이라 보는 것인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만금장에서 남궁세가에 자금의 회수를 독촉하기 시작했으니까요.”
“하면, 남궁세가가 큰 피해를 감수하고 현금을 확보할 것이란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여람 지부장께선 이제 어찌하실지 여쭈라 하셨습니다.”
“글쎄… 허허, 이걸 어찌한다…….”
고덕의 고심에 상인이 넌지시 일렀다.
“지부장께선 이곳을 잘 이용하시면 그 일을 틀 수도 있다 하셨습니다.”
“이곳을 이용해?”
“왕부만큼 호부에 입김을 불어넣기 좋은 곳이 또 없으니까요.”
“하지만 호부상서는 금사 왕부의 사람이라 했던 거 같은데. 소흥 왕부의 말을 들으려 하겠나?”
“여람 지부장께선 무턱대고 따르진 않겠지만 무시할 수도 없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일단 내가 이곳에서 수를 내보고 그리 가지.”
“하면 어찌하라 이를까요?”
“우선은 세세히 살피고 있으라 전해주게. 우리가 도착한 후에 바로 일을 벌일 수 있도록 준비도 갖춰두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대협.”
복주상단의 상인을 돌려보낸 고덕은 객사를 서성거렸다.
문정 군주에게 손을 내밀자니 마음에 들지 않았고, 소흥왕에게 청하자니 그가 들어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객사의 마당을 서성이던 고덕에게 황제, 가정제가 찾아왔다.
“잘 지내셨소?”
“그리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니 안됐소이다.”
은근히 신경을 거스르는 젊은 놈에게 고덕이 슬쩍 짜증을 냈다.
“생각할 것이 많으니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생각할 일? 무엇인지 말해보면 걱정은 줄고 해답은 늘어나지 않겠소?”
“그쪽이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이니 그냥 두고 가주시지요.”
“어허, 어찌 그리 속단을……. 자- 한번 털어놔보시오. 내가 이래 봬도 관부 쪽엔 꽤나 잘 통하는 사람이라오.”
가정제의 말에 발끈하려던 고덕의 표정에 이채가 어렸다.
“정말로 관부에선 잘 통하는 겁니까?”
“믿어보시오.”
“좋습니다. 하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오.”
“내 부탁을 들어주면 나도 그쪽 부탁을 하나 들어주지요.”
“그렇다면 좋소. 한번 들어봅시다.”
마당 한편에 놓인 조경용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는 가정제에게 고덕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덕으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은 가정제가 물었다.
“그러면 이번 거래를 중지시켜 달라?”
“그렇습니다.”
“손해를 보는 강호 문파가 있다는 건 나도 알겠소. 하지만 그것이 관부에 무슨 악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오만…….”
“그건 틀린 생각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생각을 해보면 간단합니다. 향후 호부의 거래에 발 벗고 나설 강호의 문파나 상단이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부의 거래는 나라의 거래. 감히 국명을 어긴단 말씀이시오?”
“그 국명을 믿고 미리 준비한 곳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당연히 움츠러들 터. 그들만 탓할 일이 아니겠지요.”
“흠… 타당성이 없는 말은 아니구려…….”
“하면……?”
“내 힘을 한번 써보리다.”
“나오라는 것은 안 나오고 헛방귀만 나오는 건 아니겠지요?”
고덕의 물음에 미소를 지어 보인 가정제가 고개를 저었다.
“한번 믿어보시구려. 한데 싸게 살 수 있는 것을 제값을 쳐주고 샀다는 것이 알려지면 나에게도 그리 좋은 일이 못되는데, 정말 나중에 내 부탁은 들어주는 게요?”
“내 목을 달라는 게 아니라면 그리하겠습니다.”
“좋소. 하면 내일 함께 항주로 갑시다.”
“함께? 굳이 갈 필요까지야…….”
“설마 내 서찰 하나로 국가의 큰 거래가 틀어질 것이란 기대를 하는 건 아니겠지요?”
“하면……?”
“직접 가서 발로 뛰어야 할 게 아니겠소.”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젊은 친구가 높아봐야 한계가 존재할 터. 손발이 부르트게 뛰어다녀야 가능한 일일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흠… 알겠습니다.”
고덕의 답에 가정제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달렸다.
“좋소. 하면 내일 아침에 봅시다.”
그 말을 남겨 놓고 객사를 빠져나가는 가정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고덕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쓸데없는 일을 벌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 * *
다음 날, 문정 군주의 경호를 목려송과 협련에게 떠맡긴 고덕은 항주를 향해 출발했다.
물론 가정제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그의 호위 무사가 동행했다.
그렇게 셋이 항주에 들어서자, 가정제는 해서령을 대동하고 승선포정사사로 직행했다.
물론 고덕은 복주상단의 항주 지부에 떨어트린 채였다.
승선포정사사는 발칵 뒤집혔다.
황제가 친림한 상황에 놀란 좌, 우포정사 두 사람이 흙바닥에 오체투지하고, 기별을 받고 달려온 도지휘사와 안찰사가 그 옆에 엎어졌다.
“호부상서가 와 있다 들었는데, 그의 모습은 왜 보이지 않는가?”
가정제의 물음에 좌포정사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답해 올렸다.
“호부의 거래로 인해 상단의 사람들과 대면하는 일이 잦은 터라 숙사를 저자에 잡은 탓이옵니다. 대령시키리까?”
“부르라.”
“명을 받사옵니다.”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일단의 무장들이 항주 저자로 쏟아져 나왔다.
어디서 상인들이 접대한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을 호부상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 호부상서가 승선포정사사로 달려 들어와 가정제 앞에 엎어졌다.
“소신 호부상서 상면, 폐하의 존체를 뵈옵니다. 만세만세 만만세.”
“원로에 노고가 많다고 들었소.”
“아, 아니옵니다. 어찌 맡은바 소임을 노고라 하겠나이까?”
“허허, 그리 생각하다니, 역시 호부상서의 충심은 짐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구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어쩔 줄 몰라 하는 호부상서를 황제가 그윽한 음성으로 불렀다.
“호부상서.”
“예, 폐하.”
“내 한 가지 청이 있는데 들어주겠소?”
“처, 청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사옵니다. 명하시면 바로 행하겠사오니 하명하소서. 폐하.”
“그럼 호부상서의 말만 믿고 말하리다. 호부가 최근에 절강성 도지휘사사에 구성될 기마대에 내려 보낼 군마와 외국과의 교역에 쓸 차를 구매한다 들었소만.”
“그,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미 폐하의 윤허를 득한 거래이온지라…….”
“아! 그것은 기억이 나오. 하니 내 그것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오.”
“하오시면……?”
“솔직히 내 친우가 강호에서 장사를 한다는구려.”
“치, 친우요?”
“그렇소. 작은 것으로 시작된 인연이 꽤나 깊어졌지 뭐겠소.”
“하오시면……?”
“내 그 친구 앞에서 생색을 좀 내었으면 좋겠소만.”
가정제의 말에 호부상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간 이번 계약 건으로 상인들에게 받아먹은 뇌물이며 술이 간단치 않았던 것이다.
“하, 하오시면 어느 정도의 물량을…….”
“명색이 그래도 황제인데 일부를 떼어준다는 것이……. 내 경의 충정을 믿으니 묻겠소. 얼마나 주어야겠소?”
“그, 그렇다면 다, 당연히 전량을…….”
“역시 호부상서의 충성심은 깊구려. 하면 내 장담을 해도 되겠소?”
“여,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고맙소, 호부상서.”
“아, 아니옵니다. 폐하.”
“한데, 혹 이것이 황명이라 착각하는 건…….”
“그럴 리 있겠사옵니까? 이번 일은 그저 소신의 충정일 뿐이옵니다.”
“역시 호부상서는 말이 통하는구려. 하면 내 친구에게 말해놓겠소.”
“그, 그러시옵소서. 폐하.”
고개를 조아리는 호부상서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돌려줘야 할 금전과 무마해야 할 입이 너무 많았던 까닭이다.
* * *
모두를 물리고 승선포정사사 내원 깊숙한 곳에 안내된 가정제에게 해서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손해 볼 일은 아니지 않겠소?”
“그의 능력을 사려 하시는 것이옵니까?”
해서령의 물음에 그에게 빙긋이 웃어 보인 가정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한 능력이라면 소용이 많을 듯하더구려.”
“설마… 황족의 피를 보려 하십니까?”
“벌써 십 년이 넘게 짐에게 칼을 겨누고 선 이들이오. 어찌 그런 이들이 나와 한 핏줄을 나눈 황족이라 하겠소. 그들은 역적일 뿐이오.”
“하오나 한 사람의 무인으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자들이 아니옵니다.”
“글쎄… 나는 왠지 그라면 가능해 보였소.”
“폐하… 너무 위험한 모험이옵니다.”
“때론 모험도 좋지 않겠소, 제독.”
“폐하…….”
아군은 여전히 적고, 사방은 적에게 둘러싸인 힘없는 황제였다.
그런 가정제를 부르는 해서령의 음성이 유난히 애처로웠다.
* * *
가정제가 승선포정사사에서 일을 만들던 시각, 고덕은 남궁세가의 외총관인 남궁단과 마주하고 있었다.
“대협이 이곳에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근처에 일이 있어서……. 그나저나 힘을 썼다 쪽박을 찼다고?”
“부끄럽습니다.”
“도대체 상대가 누구이기에 남궁세가가 쪽박을 찬 건가?”
“상대의 정체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다만……?”
“그들의 손속에 구파일방의 것이 녹아 있다는 것뿐입니다.”
“구파일방의 것이라…….”
“예. 아무래도 만금장이 남궁세가에 감정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설마 만금장의 소행으로 보는 겐가?”
“최근에 중원 각지의 만금장 지부에서 남궁세가의 어음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건 이전이라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처사입니다.”
“하나, 그것이 고의적인 일이라 보기엔 문제가 있지 않겠나?”
“솔직히 처음엔 긴가민가했습니다. 하지만 할인 판매를 하는 점포들이 가져다 쓰는 자금이 만금장의 것임이 드러난 이상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어졌습니다.”
“설마 할인 판매에 나선 점포들이 만금장의 자금을 끌어 쓰고 있단 말인가?”
“모르셨습니까? 그 금액이 무려 이만 냥에 육박한답니다.”
남궁단의 말대로라면 이건 심각한 일이다.
이유는 만금장의 뒤에 구파일방, 특히 청성파가 깊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만금장이 그 점포들에 돈을 빌려 주는 이유를 알아보면 되지 않겠나?”
“물었지만 답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답이 없다니?”
“왜 그들에겐 돈을 계속해서 빌려 주며 우리 남궁세가에 빌려 준 돈만 거둬 가냐고 물었지만 아무런 답이 없습니다.”
“정천맹에 도움을 청해보긴 했나?”
솔직히 말하면 정천맹 안에 함께 포함된 구파일방에 도움을 청해보았냐는 말이다.
“정천맹이 아니라 청성에 도움을 청해보았습니다.”
“결과는?”
“지금 보고 계신 대로입니다.”
“청성이 남궁을 모른 체할 리가……. 의사는 분명하게 전달된 것인가?”
“두 번, 세 번을 보냈습니다만 답은 언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답이 같았다니 무슨 뜻이야?”
“매번 사절이 다녀갈 때마다 남궁세가를 향한 압박의 수위가 높아지더군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정천맹이란 같은 울타리에 묶여 있는 청성이 남궁세가를 압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종의 사건으로 이미 단리세가와 척을 졌던 청성이다.
남궁세가와 마저도 원한을 맺게 되면 팔대세가 전체의 반발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일단, 자제하게.”
“이미 참을 수 있는 한계는 넘어섰습니다.”
“그래도 참게.”
“대협…….”
“그냥 참으라는 것이 아닐세. 이 거래, 내가 성사시켜 주겠네.”
고덕의 말에 남궁단의 표정에 놀람이 어렸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정말일세.”
“어, 어떻게 무슨 수로…….”
“그건 내가 할 일이니 신경 끄고, 일단 세가에 연락을 취해 대응을 자제시키게.”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일단 날 믿고 그리하게.”
“정말 자신은 있으신 겁니까?”
“그래, 자신 있네.”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당장에 청성과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들고일어날 기세였기 때문이다.
결국 동의를 얻어낸 남궁단을 보낸 고덕은 기다리던 소식을 받았다.
가정제의 서신을 받자마자 남궁단에게 소식을 전한 고덕은 다음 날 약속한 대로 남궁단과 몇몇 남궁세가의 실무자들과 함께 항주부 지부로 향했다.
관병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들어선 남궁단과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곧바로 내원으로 안내되었다.
“호부상서일세.”
“남궁세가의 창궁상단을 책임지고 있는 외총관 남궁단이라 합니다. 대인.”
“만나서 반갑네. 앉지.”
“예,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은 이들 사이에서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옆방에서 만난 고덕이 가정제에게 치하의 말을 건넸다.
“고생했습니다.”
“고생은 무슨……. 그나저나 약속은 잊지 마시오.”
“잊지 않습니다.”
“그러면 되었소.”
두 사람의 표정은 계약을 마친 남궁세가 사람들만큼 밝았다. 물론 반죽음 상태인 호부상서의 표정도 있었지만…….
* * *
고전의 관제묘…….
봉공의 앞에 흑면조장이 엎드려 있었다.
“마지막 기회였다는 걸 기억하느냐?”
“보, 봉공.”
“남궁세가가 안정되면 청성과의 불화는 결국 흐지부지 지나간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그렇지 않게 할 것입니다.”
“어떻게? 소흥 왕부를 흔들어보겠다는 계획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면서 어찌 흔든단 말이냐?”
“그것은 살막이 끼어들었기에 그냥 두고 보면 이루어질 것 같아서…….”
“하지만 결과는 틀어졌잖아! 이미 틀어진 일을 변명이라고 달고 있는 것이야?”
“아, 아닙니다.”
“하면? 어차피 틀린 일, 죽여 달라는 게야?”
“어, 어찌 그런 생각을……. 전 살고 싶습니다, 봉공.”
“살고 싶은 놈이 일을 이렇게 처리한단 말인가?”
“바,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바로잡는다는 말인지 설명을 해봐!”
“그, 그것이 이미 사람을 보내놓았습니다.”
“사람을 보내? 어디로?”
“소흥 왕부입니다.”
“이미 계약도 체결한 마당에 소흥 왕부를 흔들어 무얼 한다고?”
봉공의 질책에 흑면조장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계약이 체결되었다곤 하나 물건을 받거나 돈이 건너간 건 아닙니다.”
“관의 일이야. 계약의 체결만으로도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과 진배가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야.”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소흥 왕부에 일이 생길 겁니다. 그러면 호부상서의 명이 시행되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계약까지 마친 호부상서의 명이 시행되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니?”
“왕부에서 중요 인사가 사라집니다. 납치범의 요구는 하나뿐이지요. 거래의 불발.”
“그것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나?”
“아닙니다. 해결됩니다.”
“어떻게?”
“거래의 실행이 길어질수록 만금장의 독촉은 심해질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중원 각지에 풀어주어야 할 금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할 테니까요.”
“흠… 나쁘진 않군. 그러면 만금장을 통해 우리 쪽 점포들에 대주고 있는 금원은 어찌 되나?”
“그 금원은 우리가 만금장에 맡긴 돈의 일부를 담보로 빌려 주는 것입니다. 물론 비밀 보장이 조건이지요.”
“우리가 만금장에 맡긴 금원이 얼마나 되지?”
“금자 오만 냥입니다.”
“만금장이 계약을 깨고 비밀을 누설할 가능성은 없겠나?”
“비밀을 누설하면 만금장은 배액을 물어내야 합니다. 절대로 누설할 수 없습니다.”
“좋아. 하면, 소흥 왕부의 일은 언제 시작할 생각이지?”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것입니다.”
“누가 나갔나?”
“흑면 사호와 팔호, 청면 이호와 육호, 그리고 적면조에서 한 명을 지원받았습니다.”
“그들로 되겠나?”
“적면조에서 나온 이가 적면 일호입니다.”
검마에게 걸려 죽임을 당한 적면조장을 제하면 적면조에선 가장 강한 자였다.
실력은 화경.
“나쁘진 않군.”
“거기다 암군(暗軍) 이백이 동원되었습니다.”
암군이면 적면조가 부리는 무사들로 모두 일류에 접어든 뛰어난 무인들이었다.
“좋아. 이것이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봉공.”
흑면조장의 음성이 조용한 관제묘의 밖까지 울리고 있었다.
* * *
소흥 왕부를 향해 다가드는 다섯 그림자가 거리를 좁혀 들다 일제히 담을 타고 넘었다.
순간 눈을 뜬 목려송이 협련을 깨웠다.
“끄응… 왜 그러십니까?”
“손님이다.”
“손님이요?”
“그래. 난 군주마마께 달려갈 테니 넌 왕야께 달려가라.”
“왕야껜 염홍이 있으니 걱정 없습니다.”
“아니, 이번엔 달라.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라.”
그 말을 남긴 목려송이 바람처럼 달려가자, 주변의 기파를 점검하던 협련도 화들짝 놀라 소흥왕의 침전으로 달렸다.
쾅-
문을 부수고 들어선 목려송의 육장이 강기를 쏟아냈다.
파바바바바팡-
순식간에 쏟아져 나온 강기에 떠밀린 인형이 문정 군주에게 다가서던 속도보다 빠르게 뒤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목려송은 그 그림자를 쫓아 결판을 보지 못했다.
한 걸음 좌측.
순간 몸의 방향이 바뀐 목려송의 육장이 놀라 일어난 문정 군주의 침상 아래를 가격했다.
쿠앙-
폭음과 함께 검은 인형 하나가 튕겨 올랐다.
퍼벅-
두 번의 격타음.
망설임 없이 짓쳐든 목려송의 장법에 격중된 인형이 뒤로 날아가 처박히는 순간, 군주의 신형을 낚아챈 목려송이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젠장!”
처음에 목려송의 장법에 놀라 물러났던 인형이 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같은 시각.
소흥왕의 침전에선 염홍이 세 명의 침입자를 맞아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미 왼팔은 강기에 격중되어 피투성이로 변한 채 덜렁거릴 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과 비슷한 경지의 적 셋을 잡아둔다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염홍의 방어를 뚫어낸 암습자 하나가 소흥왕에게 쏘아져 갔다.
날아온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접근하는 적을 향해 검을 뽑아든 소흥왕이 이를 악무는 순간, 무언가가 방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쾅-
자신의 코앞에서 적의 검을 막아낸 이를 발견한 소흥왕의 표정에 반가움이 어렸다.
“협련!”
“조금 늦었습니다, 왕야.”
“구, 군주는?”
“목 대협이 갔으니 괜찮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어진 상황에 협련의 말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쾅-
“모, 목 대협!”
“튀어! 놈들이 몰려온다.”
당황성을 토하는 협련에게 소리친 목려송은 두말없이 반대편 문을 부수고 밖으로 달렸다.
순간 기감이 몰려오는 것을 확인한 협련도 소흥왕을 들쳐 업고 무조건 달렸다.
그 뒤를 염홍이 따르자, 목려송에게 당한 자를 제외한 암습자 넷과 왕부 무장들을 쓸어버린 암군 이백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추적자를 붙인 목려송과 협련은 죽을 둥 살 둥 항주를 향해 달렸다.
“놈들이 항주로 향합니다.”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습격자의 말에 붉은 복면의 습격자가 답했다.
“항주엔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들어와 있다. 비상 폭죽을 올려라. 항주 인근에 대기 중인 암군 오백을 동원한다.”
“예.”
지체 없이 품에서 긴 대롱을 꺼내 줄을 당기자 허공에 불꽃이 피어났다.
느닷없는 불꽃은 항주 인근에 대기 중이던 암군에게만 보인 건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고덕도 폭죽을 보았다.
“지금 곧바로 도지휘사사로 가십시오.”
“승선포정사사가 아니라 도지휘사사로?”
“당분간 소란스러울 것입니다.”
고덕의 말과 하늘에 피어났던 불꽃을 연결 지은 해서령이 지체 없이 가정제를 들쳐 업었다.
“무, 무슨 일인가?”
“무례를 범합니다.”
가정제를 업은 해서령이 2천의 무장 병력이 주둔하는 도지휘사사로 달리자, 고덕은 곧바로 폭죽이 올랐던 방향으로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남궁세가의 무인들도 항주를 벗어나 폭죽이 오른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고 소성이 울렸다.
쒜에에에엑-
강력한 파공성을 이끈 신형 하나가 항주 앞 들판을 순식간에 가르고 숲 속으로 마치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추적을 늦추기 위해 숲으로 들어 죽자고 달리던 목려송의 얼굴에 갑자기 희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대협이 온다.”
목려송의 음성에 협련마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곧 잡힐 듯 따라잡혔던 둘의 속도가 올라간 것과 비슷한 시기에 사나운 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파바바바방-
연속적인 충돌음, 그리고 그 뒤를 치는 공기의 비명.
찌이이이팡-
암습자 넷의 신형이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진 중심에 고덕의 모습이 드러났다.
“뭐냐?”
“암습자들입니다.”
어느새 발길을 멈춘 목려송의 답에 고덕의 시선이 바닥에 제멋대로 팽개쳐진 암습자들을 살폈다.
“그놈들이군.”
“조력자가 있습니다.”
목려송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습을 드러낸 암군 이백의 공격이 지체 없이 들이닥쳤다.
순간, 고덕의 허리 어림에서 번개가 번쩍거렸다.
끼이이이익-
기다란 소성의 끝에 목이 날아간 십여 명의 암군이 피를 뿌리며 나동그라진 속으로 애검, 명혼을 뽑아든 고덕이 뛰어들었다.
이후로 벌어진 참경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사람과 아름드리나무가 하나가 되어 베어졌다.
사람의 비명과 나무가 잘려 나가며 지르는 비명이 적막한 밤의 숲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