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5장 (26/129)

제25장. 습격(襲擊)-잘못된 선택

집으로 돌아온 문정 군주는 예전의 조용했던 성격과 달리 분주하게 움직였다.

시종들의 일에도 자주 관여했고, 왕부의 농토를 빌려 사는 소작농들의 삶에도 관심을 가졌다.

특히 부엌에 들어 능숙하게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엔 시녀들이 기함을 하기도 했다.

그런 문정 군주를 따라다니자니 고덕과 목려송도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임무상 그녀가 있는 곳엔 항상 자신들이 함께해야 했기 때문이다.

“배추가 실하구나.”

“멀리 복건에서 진상되어온 것이라 그렇사옵니다. 군주마마.”

왕부의 내수부를 맡은 시종의 말에 문정 군주의 표정에 아련함이 깃들었다.

“그곳의 배추가 좋긴 하지.”

“그럼은요. 복건의 배추는 알아주옵지요. 하온데 군주마마께서 어찌 그런 것을 아시옵니까?”

“글쎄다… 그냥 알고 있구나.”

왠지 슬퍼 보이는 군주의 표정에 시종은 당황했다.

“그, 그야 책에서 보셨겠지요.”

“책이라…….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암요. 책에서 보셨을 것입니다요.”

“그래, 그렇겠지. 그럼 일을 보거라.”

“예, 군주마마.”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문정 군주의 뒤로 고덕과 목려송이 따라붙었다.

“고 무인.”

“예.”

“고 무인은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이 있나요?”

“모든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럴까요?”

“예. 다 잊고, 잊히며 삽니다.”

“하아~”

깊게 내쉬는 문정 군주의 한숨에 고덕의 검미가 파르르 떨렸다.

고덕의 걱정 어린 시선 속에 문정 군주의 발걸음이 왕부의 정문을 향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잠시 바람을 쏘이고 싶군요.”

“경호를 위해 무장들을 부르겠습니다.”

“괜찮아요. 두 분이 있으니…….”

“하오나 왕부 대장군부에서 간곡한 부탁이 있었습니다.”

“왕부의 관례는 너무 거하답니다. 그냥 잠시 바람을 쏘이는 것뿐이니 조용히 움직였으면 합니다.”

문정 군주의 말에 고덕은 할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단출하게 왕부를 벗어나는 문정 군주의 모습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 * *

붉은 휘장이 사방으로 드리워진 내원의 침실에서 소흥왕비인 연후련이 젊은 무장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단 셋이 벗어났다?”

“그러하옵니다, 왕비마마.”

“좋은 기회로군요.”

“하오나 그 둘의 실력이…….”

“암살은 실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일은 장군이 움직이지 않아도 된답니다.”

소흥왕비의 말에 고개를 드는 장수는 대장군부의 지휘첨사인 이인성이었다.

그는 대장군 이첨의 아들로 실질적인 왕부 무장들의 중심이었다.

“이미 준비하신 것이 있으신 겁니까?”

“살아나 황성으로 들어갔다기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것이랍니다.”

“정말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그런 걱정은 접어두고 이리 좀 와 봐요.”

슬며시 내민 손을 잡은 이인성이 휘장이 드리워진 침상으로 들어가자, 묘한 음향이 침실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놀란 시녀들이 침전의 문을 닫고 황급히 주변에서 물러섰다.

그 와중에 한 명의 시녀가 내원 밖으로 나섰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시녀의 연통을 받은 이들이 움직인 것은 일각도 지나기 전이었다.

* * *

왕부를 품은 소흥은 제법 커다란 도시다.

인근에 위치한 절강의 성도인 항주에 비할 순 없었지만, 절강의 이대 도시로 손꼽힐 만큼 번화한 곳이었다.

그 소흥의 주변으로 흐르는 강물은 흔히 서호강이라 부른다. 수원이 서호에서 발원했다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 서호강변을 거니는 문정 군주의 뒤를 따르던 고덕과 목려송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조용히 해결하게.”

고덕의 명에 고개를 숙여 보인 목려송의 신형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직후부터 강변에 부는 바람에 옅은 혈향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런 혈향을 타고 드는 묘한 느낌에 고덕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리고 그 순간, 고덕의 신형이 세 걸음 앞에 걷던 문정 군주를 향해 폭사되었다.

느닷없이 자신을 안고 바닥을 뒹구는 고덕의 행동에 놀란 문정 군주의 시야로 바닥에 빼곡히 들어찬 작은 화살들이 들어왔다.

“무, 무슨…….”

말을 잇기도 전에 이번엔 고덕의 품에 안긴 채 허공을 날아 멀찍이 떨어진 곳에 내려선 문정 군주는 어찔거리는 정신을 차리기에 바빴다.

“괜찮습니까?”

“괘, 괜찮아요. 암습입니까?”

“그런 것 같군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십여 명의 검은 그림자가 주변으로 빙 둘러섰다.

그렇게 둘러선 이들의 손엔 기이한 형태의 암기통들이 들려 있었다.

“비천뢰?”

강호인들이 들었다면 기겁을 했을 이름이 고덕의 입에서 나왔다.

“당가 삼비의 하나인 비천뢰를 알아보다니 눈썰미가 좋구나. 그렇다면 이제 너희 연놈들의 목숨도 끝이라는 걸 알겠지?”

한 복면인의 말에 고덕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부담이 되긴 하는군. 한데 무슨 수를 썼기에 비천뢰가 자그마치 열 개나 당가 밖으로 나온 거지?”

“그건 염라대왕에게나 묻거라. 꿈이 길면 잠에서 깨지 못하는 법. 쏴라!”

퓨슈슈슈슉-

복면인의 명에 열 개의 비천뢰가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공간을 새카맣게 물들일 만큼 엄청난 수의 비침을 쏟아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침 세례를 바라보던 고덕이 문정 군주를 가슴으로 당겨 안았다.

그리고 이어진 회전.

푸황-

바람이 분다. 모든 것을 쓸어갈 듯 강맹한 바람이 주변 오 장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끌어당겼다.

나뭇잎과 작은 돌, 거기에 먼지와 비침, 그리고 바람과 공기까지…….

모든 것이 휩쓸린 바람이 고덕의 회정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파란빛이 일어섰다.

그가가가각.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음이 들려오길 얼마…….

팡-

바람이 멈추고 사위를 가득 채웠던 먼지가 가라앉자 주변 정경이 드러났다.

“이, 이것이 무슨…….”

딸려 가지 않기 위해 천근추를 쓴 탓에 발목까지 땅속에 묻힌 복면인의 눈에 드러난 전경은 참상 그 자체였다.

십여 명의 복면인 중 자신처럼 버텨 낸 이는 겨우 셋. 나머지는 정신을 잃은 문정 군주를 안아든 고덕 주변을 붉게 물들인 핏물과 육편으로 변해 있었다.

“비, 비침은?”

극독이 발라진 비침이다. 스치기만 해도 황소를 죽일 만큼 강렬한 극독이…….

푸스스스-

고덕의 주변이 급속도로 검게 변해가며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극독에 땅이 황폐화되는 것이다. 그것은 비침들마저 완전히 갈려 버린 육편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고덕의 손짓 두 번에 살아남은 복면인 중 둘의 머리가 허공에서 폭발하듯 터져 버렸다.

파묻힌 발 때문에 쓰러지지 않는 머리 없는 시체를 바라보는 복면인의 눈이 바르르 떨렸다.

천천히 다가오는 고덕에게 복면인이 떨리는 음성을 토했다.

“사, 살려 준다면 의뢰인을 알려 주겠소.”

“필요 없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덕의 손이 가리킨 복면인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주변이 정리되자마자 목려송이 달려왔다.

“어, 어찌……?”

“떨어트려 놓으려던 술수였던 모양이야.”

“송구합니다.”

“송구할 게 뭐라고……. 그쪽은 정리된 건가?”

“예. 조무래기 서른이었는데 너무 흩어져 있던 까닭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계획적이군.”

“배후를 알아볼까요?”

“두게. 왕부의 일이니 알아봐야 머리만 아플 뿐일세.”

“하지만 그냥 두면 군주께서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일단은 두게. 우리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그때 정리해도 늦지 않겠지.”

“알겠습니다.”

문정 군주를 안은 고덕과 목려송이 떠나자, 목불인견의 참상을 강변의 차가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 * *

천천히 눈을 뜨자 생경한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화들짝 놀라 일어난 군주가 주변을 둘러볼 때, 문이 열리며 고덕이 들어섰다.

“일어나셨습니까?”

“이, 이곳이 어딘가요?”

“잠시 정신을 잃으셨기에 강변 객잔으로 모셨습니다.”

“어째서 왕부로 가지 않고서요?”

“괜한 소란이 일 것 같아서…….”

고덕의 답에 문정 군주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잘하셨네요.”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일전에도 당한 일이니까요.”

“기억이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기억이 없다고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하면, 짚이시는 곳이라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이에요.”

누가 되었건 황족 살해를 기도했다면 그 죄는 역모에 해당한다.

역모란 두 글자 앞에선 죄 없는 이도 죄 있는 이로 둔갑되기 쉬운 일이기에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하면 어쩌시겠습니까?”

“정신도 돌아왔으니 돌아가지요.”

“알겠습니다.”

나가려면 옷매무새를 단정히 할 필요가 있었기에 머뭇거리는 문정 군주를 고덕은 담담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에 문정 군주가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말했다.

“잠시 밖으로…….”

“예?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오, 옷을 다시…….”

“아! 그러시지요.”

문밖으로 나가는 고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자신 앞에서 벌거벗고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던 옛일이 생각난 탓이었다.

고덕이 문밖을 지켜 선 지 잠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문정 군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혹시 머리 장식을 보지 못했나요?”

“어떤……?”

“나비 문양을 한 것이에요.”

“소중한 것입니까?”

“예.”

“비싼 물건인 모양이군요.”

“그런 건 아니지만… 제겐 소중한 것이에요.”

“군주께서 하실 만한 장식은 보지 못했습니다.”

“금은 아니고… 금을 입힌 것이에요. 정말 보지 못했나요?”

“설마 이걸 말씀하십니까?”

고덕이 내민 손 위에 놓인 장식은 군데군데 금박이 벗겨져 시커멓게 바란 쇳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문정 군주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집어 들어 가슴에 품었다.

“맞아요. 아~ 다행이에요. 정말…….”

“강변에 떨어져 있기에 주웠습니다. 너무 헐어 버린 걸로 알았습니다만…….”

“버리다니요. 절대로 그럴 수 없는 물건입니다.”

“평민들도 버렸을 물건을 어찌 군주께서……?”

“본능이 소중한 것이라 말하니까요.”

“예?”

고덕의 물음에 문정 군주가 도리질을 쳤다.

“아, 아니에요. 가죠.”

의도적으로 바삐 걷는 군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고덕의 시선은 깊고 부드러웠다.

언젠가 같은 모습, 다른 이름의 누군가를 바라보던 그때처럼…….

* * *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내원의 침실.

소흥왕비 앞에 복면인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실패라니요? 그런 일쯤은 식은 죽 먹기라 말한 것은 그대였어요.”

“송구합니다, 마마. 상대가 생각 이상으로 강했던 탓에…….”

“왕부 무장들이 상대하지 못했다 이미 말해주었을 텐데요.”

“그래서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다음번엔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음번? 기회가 매번 오는 줄 알아요? 오늘 일이 왕야께 전해지면 군주 곁에는 다가가기조차 어려워질 거란 말이에요.”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비 병력이 얼마가 되었던 수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장담을 하는 거죠?”

“본문 최고의 살수가 투입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살수?”

“예. 다른 일로 나가 있다 얼마 전에 돌아왔습지요.”

“하면, 내게 원하는 건 뭔가요?”

“비용이…….”

“천하의 살문이 돈을 탐하다니, 소문이 과장되었던 모양이군요.”

“소문이 밥을 먹여 주진 못하니까요. 마마.”

담담히 받아넘기는 복면인을 지그시 바라보던 소흥왕비가 이내 작은 주머니를 하나 던졌다.

찰랑.

슬며시 주머니를 받아 안을 들여다본 복면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군주의 부고를 들으실 것입니다.”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런 일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좋아요. 믿어보죠.”

소흥왕비의 말이 끝났을 때, 복면인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저런 신기를 가진 이들이 실패했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런 왕비의 침전으로 경비를 맡은 장수가 들어왔다.

“마마,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전하께서? 어디에 계시는가?”

“대청에 계시옵니다.”

“대청에……? 누가 오셨더냐?”

“황궁에서 어사가 나왔다 들었습니다.”

“어사가?”

황명을 받은 어사가 중원 전토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어사가 왕부를 찾았다는 것은 분명 특이한 일이었다.

“알았다.”

소흥왕비가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때까지 밑에 눌려 있던 젊은 사내의 알몸이 드러났다.

그 모습에 보고하던 장수의 눈에 진한 질투심이 일어섰다.

마치 보란 듯이 천천히 하의를 당겨 입은 소흥왕비가 웃음을 지었다.

“호호, 남자의 질투라……. 즐거운 광경이지.”

“저런 천한 것보다는 저를 부르셨어도…….”

서운함과 아쉬움이 짙은 장수의 음성에 그의 얼굴을 쓰다듬은 왕비가 속삭였다

“그렇다면 저자가 다시는 내 눈에 뜨이지 않게 해주면 되지 않겠어?”

잔인한 미소를 남긴 채 소흥왕비가 나가자 침실 안에서 짧은 비명 소리가 울렸다.

“사, 살려 주십… 으악!”

그 비명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이 소흥왕비의 입가에 조금 더 진한 미소가 어렸다.

그렇게 왕비전의 시종 한 명이 조용히 사라졌다.

* * *

대청으로 들어서던 소흥왕비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의 모습에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천첩이 폐하의 존체를 뵈옵니다. 만세만세 만만세.”

오체투지의 예를 받은 청년이 미소를 지었다.

“숙모께선 일어나세요.”

“망극하옵니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소흥왕의 곁에 선 왕비의 시선이 황제의 곁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쏠렸다.

알 수 없는 장년인 하나와 그녀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해서령…….’

“해서령이 왕비를 뵈옵니다.”

“오랜만이군요, 제독.”

“예, 왕비마마.”

인사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중단되었던 소흥왕과 황제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그를 만나러 일부러 오셨단 말씀입니까?”

“예, 숙부. 문정 고모께서 고집을 피우는 이가 누군지는 봐야겠어서요.”

“한낱 왕부의 군주가 호위 무사를 선택하는 일이옵니다. 어찌 폐하께오서 직접…….”

“한낱이라니요.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문정 고모께서 들었다면 큰일 날 소립니다.”

“그 아이의 눈물 때문이옵니까?”

“전 세상에서 문정 고모님의 눈물이 가장 무섭습니다.”

“폐하…….”

“정말입니다. 문정 고모님의 눈물만 보면 돌아가신 어머님이나 누이도 생각나고… 하여튼 가슴이 아프다 그 말입니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자- 이럴 게 아니라 그자를 좀 보러 가지요.”

“불러들이겠습니다. 잠시 계시지요.”

소흥왕의 말에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럴까요.”

황제의 답에 소흥왕이 시종을 보냈다.

하지만 시종이 가져온 답은 문정 군주를 호위해 왕부를 벗어났단 소식이었다.

“셋만 나갔단 말인가?”

당혹한 소흥왕의 물음에 시종이 고개를 조아렸다.

“수문 위사들의 말로는 그렇다 하옵니다.”

“이런! 그런 일이 발생했는데 어찌 장군부는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더냐?”

“그것이… 군주께오서 함구령을 내리신 탓이라 합니다.”

“이런!”

낭패한 표정의 소흥왕에게 황제가 웃음을 보였다.

“하하하, 문정 고모님이 밖을 나가? 그 순둥이 고모께서?”

“그러게 말입니다. 당최…….”

“걱정도 되고, 어디 직접 한번 봐야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황제에게 소흥왕이 얼른 고했다.

“소신이 모시겠습니다, 폐하.”

“아, 아니에요, 숙부. 조용히 온 길, 갈 때까지 조용했으면 합니다.”

“설마 돌아가실 때도 저 둘만 대동할 생각이란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갈 때는 한 명뿐이겠군요.”

“그것이 무슨…….”

“나중에 차차 설명드리지요.”

황제의 말에 소흥왕이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절이 뒤숭숭합니다. 이런 시기에 그리 단출한 호위라니요. 절대로 아니 됩니다.”

“사람의 수를 늘리면 그것이 더 위험합니다. 이것이 눈길을 잡지 않고 오히려 안전하더이다. 수도 없이 경험한 일이니 숙부께선 걱정하지 마세요.”

“하오나 폐하…….”

반대를 이으려는 소흥왕에게 황제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황명입니다.”

“폐, 폐하…….”

당황하는 소흥왕을 떨어트린 황제가 두 명의 호위와 함께 왕부를 벗어났다.

왕부를 벗어나 강변에 위치한 저자로 나가려던 황제는 길 위에서 문정 군주와 마주쳤다.

“폐…….”

경악한 문정 군주의 말을 황제가 재빨리 가로막았다.

“다시 뵙습니다, 군주마마.”

고개까지 숙이는 황제의 모습에 문정 군주는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문정 군주에게 황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람의 눈이 많습니다. 허락하신다면 배례는 접겠나이다.”

황제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은 문정 군주가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 그러세요.”

“감읍합니다, 마마.”

“뭐, 뭘요…….”

당혹해하는 문정 군주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황제가 고덕과 목려송을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고용하셨다는 개인 호위들인 모양이군요.”

“아! 예, 제 개인 호위들입니다. 이, 인사드리세요.”

문정 군주의 말에 정중히 목례를 한 목려송과는 달리 고덕은 가벼운 포권뿐이었다.

그 모습에 문정 군주가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고덕은 개의치 않았다.

“고덕입니다.”

“반갑소. 그래, 우리 군주마마를 모셔 보니 어떠시오?”

“호위란 게 다 똑같은 법입니다. 달리 느끼는 건 없습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고덕의 말에 황제가 실망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래요……. 그나저나 실력이 좋다고요?”

황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덕의 시선이 한쪽에 뻘쭘하니 서 있는 협련에게 향했다.

“관인이 시간이 많은 모양이외다.”

“그, 그게 사, 사직을 하였습니다.”

황제의 눈치를 보며 답하는 협련에게 고덕이 시큰둥하니 말했다.

“그렇구려. 한데 여긴 왜 다시 온 거요?”

“대, 대협을 만나고자 왔습니다.”

“나를?”

“예.”

“무슨 일로……?”

“절 받아주십시오.”

급작스럽게 무릎을 꿇어앉는 협련을 바라보는 고덕의 눈엔 어이없음이 가득했다.

“내 잘못 들은 모양이오만… 나조차 타인에게 의탁한 몸, 내게 무엇을 바란단 말이오?”

“대협의 곁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내게서 배울 것은 없소.”

“대협의 발걸음 하나 손동작 하나가 다 배움입니다. 그저 곁에 있게 해주십시오.”

협련의 말에 고덕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물었다.

“혹시 무의 길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오?”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잘못 찾아왔소.”

“아닙니다. 제겐 대협의 곁만큼 제격인 곳이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굳이 무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정천맹으로 가시오.”

“명분에 매여 사는 그런 샌님들에겐 배울 것이 없었습니다.”

협련의 답에 고덕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배울 것이 없었다?”

“예, 대협.”

“그 말은 그들의 문하에 있어봤단 말 같은데……?”

“맞습니다. 어릴 적 무당의 문하에 있었습니다.”

“무당이라…….”

어쩐지 기본이 탄탄하고 부드럽다고 느꼈다.

“예. 그들의 명분은 편견에서 기인합니다. 그런 답답함을 배울 생각 따윈 없습니다. 제겐 강해질 수 있는 길이 필요합니다.”

많이 쳐줘도 이제 사십대 초반이다. 그 나이에 벌써 화경이라. 어떤 기연을 만났는지는 몰라도 무섭도록 빠른 성장이었다.

“강함이라……. 그럼 신강으로 가시오.”

“마교, 아니 천마신교를 말씀하십니까?”

“천마신교라…….”

마교에 몸담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 부르지 않는다. 그 탓에 고덕의 물음이 이어졌다.

“설마 가봤던 거요?”

“예. 이미 십여 년 전에…….”

“설마 그곳도 눈에 차지 않았다는 말이오?”

“아닙니다. 제겐 차고 넘쳤지요.”

“무슨 뜻이오?”

“그들의 추구는 맹목적입니다. 목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저 갈고닦는 겁니다. 강해져 무얼 하겠다는 목표 의식도 없고, 왜 강해져야 하는지 이유도 없습니다. 가족도 없고, 그래서 행복도 모르고, 그저 밥 먹는 것처럼 무공을 연성하고 숨 쉬는 것처럼 내력을 기릅니다. 전 그런 멍청이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멍청이라…….”

신강의 철인들이 들었다면 대번에 껍질을 벗기고 근육을 자근자근 씹어 먹으려 들 말이다.

하지만 완전히 틀리다 말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고덕의 입가에 웃음을 만들었다.

“풋- 틀린 말은 아니구려. 하면 사패련으로 가지 그러셨소?”

자신의 말에 묘하게 변하는 협련의 표정에 고덕이 놀란 음성을 던졌다.

“설마 그곳도 가보았던 게요?”

“가보았지요. 한 반년……. 하는 일이라곤 노략질이나 남의 계집 취하고, 불 지르고, 살상하는 일밖엔 없더이다. 그렇게 죽자고 무공을 갈고닦아 겨우 한다는 일이 그런 짓들뿐이니…….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흠… 그럼 그 모든 것을 겪었는데 내 곁은 괜찮을 것 같다?”

“예, 대협.”

“만에 하나 있다가 틀어지면 또 나갈 생각이고?”

“그야…….”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는 협련의 태도에 고덕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뭐 나쁘진 않겠지. 하나, 밥벌인 스스로 해야 할 거외다.”

“받아만 주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당연히 왕부의 허락도 받아야 할 테고.”

물론 소흥왕이 허락하지 않을 리 없다는 것쯤은 고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도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협련의 답에 고덕의 시선이 목려송에게 향했다.

“군기 잘 잡아. 이젠 관인도 아니라 하니 지난번처럼 헛짓하지 말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협.”

미소를 짓는 목려송의 눈빛이 먹이를 앞에 둔 살모사를 닮아갔다.

그 눈빛을 접한 협련은 일전에 평수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런 협련의 모습에 미소를 지어 보인 황제가 고덕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뛰어난 무인을 얻으셨으니 축하합니다.”

“별로……. 혹 하나 더 붙인 셈이지요.”

“예?”

협련의 뛰어난 무위를 아는 황제로선 고덕의 신랄한 평가가 예상외였다.

“하하하, 혹이라……. 천하의 협련이 혹이란 말씀이군요.”

“천하? 천하란 말은 그리 쉽게 쓰지 않는 것입니다.”

“천하의 무게가 무겁다 그 뜻입니까?”

“천하의 무게라……. 감히 사람이 천하의 무게를 논할 자격이 있는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흠… 난 천하만큼 가벼운 게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입니다만…….”

황제의 말에 고덕의 입가에 조롱의 비웃음이 달렸다.

“큰일을 당해보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큰일이라……. 그리 보입니까?”

“겪어보고서도 그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글쎄요. 전 겪어보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말에 고덕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깊어졌다.

“본인이 그렇다면 그렇겠지요. 하긴 남의 팔이 잘린 것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픈 법이니…….”

고덕의 말에 황제의 표정이 굳었다. 어줍지 않은 경험이 다인 것같이 말하지 말라는 뜻을 알아차린 탓이다.

그런 황제의 모습에 분노한 해서령이 앞으로 나섰지만, 황제의 손짓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덕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한층 더 진해졌다.

“눈이 깊어. 좋은 눈이야. 충직하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키겠다는 의지가 충만하군. 하지만 그게 겉멋이란 걸 몰라. 한마디로 제 목숨은 물론이고, 주인의 목숨마저 날려 먹을 팔푼이란 말이지.”

“이자가 감히!”

참지 못한 해서령의 호통에 고덕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해가 안 가나? 하긴 모르니 나대는 것이겠지. 주변을 둘러봐.”

뜬금없는 고덕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뭘 보라는 거지?”

“아무도 없지. 아무도 없다는 건 증인이 없다는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이, 이 작자가!”

“조심해. 상대의 능력도 견주지 못하면서 어줍지 않은 자존심이라니……. 네 목은 물론이고, 네 주인의 목도 쥐도 새도 모르게 날아갈 수 있는 법이야.”

사납게 으르렁대는 고덕의 눈빛과 마주친 해서령의 전신에서 솜털이 곤두섰다.

그간 잊고 살았던 감정이 파도가 되어 온몸을 덮쳤다. 공포라는 원색적인 느낌이…….

싸늘히 식은 분위기에 당황한 문정 군주가 끼어들었다.

“고 무인, 무례를 범하지 마세요. 그리 대할 분들이 아닙니다.”

문정 군주의 말에 고덕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두둔하는 문정 군주의 모습이 너무 멀리 느껴진 탓이다.

그런 고덕의 마음도 모른 채 문정 군주가 재촉했다.

“어서 사과하세요.”

거듭된 문정 군주의 말에 고덕이 포권을 취했다.

“실언을 했던 모양입니다.”

“아니요. 내 좋은 것을 배웠소.”

관부 제일인 해서령조차 눈빛 한 번으로 주눅 들게 만들 수 있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일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런 황제의 말에 해서령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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