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대결(對決)-나를 알리다
갑작스런 소흥왕의 부름에 왕부의 대청으로 들어서던 고덕은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기세를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기세의 발원지를 찾자, 기세만큼이나 날카로운 인상의 장년의 사내가 보였다.
“어서 오게.”
소흥왕의 음성에 고덕의 시선이 옮겨 갔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내 궁금한 것이 있어 자넬 보자고 했네.”
“말씀하시지요.”
“듣자하니 왕부 장군부의 장수들과 충돌이 있었다고?”
“가벼운 인사였습니다.”
“나도 그랬다고 들었네. 한데, 그 이야길 듣고 나니 내 자네의 경지를 알고 싶어졌네.”
“그다지 뛰어난 것이 못 됩니다.”
고덕의 겸양에 소흥왕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 말하면 장수들의 입장이 난처할 걸세.”
그러고 보니 자신의 말이 의도와 다르게 왕부 장수들의 능력을 폄하한 셈이 되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제정신이라면 왕부에서 왕부의 장수들을 모욕할 리는 없을 테니까.”
말 속에 뼈가 들었다. 드러내고 표는 안 내지만 아마도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고덕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모른 척했다.
“험험, 뭐 그렇진 않겠지?”
“예. 아닙니다.”
“물론 나도 그리 생각하네. 한데, 그러고 나니 자네의 경지를 확인해볼 수단이 필요했네. 그래서 금의위의 장수 하나를 초빙했다네.”
소흥왕의 눈짓을 받은 협련이 앞으로 나섰다.
“협련이오. 관인이나 관직은 상관없으니 굳이 말하지 않겠소.”
“고덕이오.”
상대의 인사에 가볍게 포권을 취한 고덕의 시선이 소흥왕에게 돌아갔다.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대결을 원하네.”
“송구하나 생각이 없습니다.”
일언지하의 거절에 소흥왕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문제가 생길 걸세.”
“어떤… 문제입니까?”
“왕부의 무장들을 상하게 한 이에 대한 조사가 필요해지겠지. 아마도 취조의 방식이 되지 않겠나?”
억지였지만 왕부의 일이니 소흥왕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그리 못할 것도 없었다.
“굳이 제 능력을 보고자 하시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덕의 물음에 소흥왕의 입가에 어렸던 미소가 사라졌다.
“문정 군주가 자넬 경호 무사로 지정하겠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네. 하지만 알고 있다시피 왕비나 무장들은 반대하고 있지. 그것을 극복하자면 실력이라도 입증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소흥왕의 말에 고덕의 표정에 갈등이 어렸다.
사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낀 이상 왕부를 떠나야 했지만, 간사한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제가 증명해 보이면 인정하실 생각이십니까?”
“경호에 문제가 생겨 고초를 겪었던 아이일세. 자네의 실력을 입증해낸다면 굳이 물리칠 일도 아니겠지.”
소흥왕의 답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신다면 하지요.”
“좋네. 협련!”
소흥왕의 부름에 협련이 고개를 숙였다.
“예, 왕야.”
“잡아 꿇려야 할 것이다.”
“명을 받잡습니다, 왕야.”
자신만만하게 답한 협련이 나서자 고덕의 뒤에 묵묵히 서 있던 목려송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목려송의 말에 의향을 묻는 고덕의 시선이 소흥왕에게 향했다.
“그러고 보면 그자의 능력도 궁금했었지. 상관없네.”
소흥왕의 동의에 엷은 미소를 지은 고덕이 뒤로 물러나자 목려송이 앞으로 나섰다.
“대협을 대신하게 되었소. 목려송이라 하오.”
목려송의 소개에 협련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서렸다.
관에 몸담은 까닭에 강호 소식에 어두운 탓이다. 몇몇 유명한 무명은 알아도 이름까지 알고 있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경시하지는 않았다. 목려송의 구부정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던 탓이다.
“이미 이야기했지만 협련이오. 조심해야 할 거요.”
“기대하지요.”
목려송의 음성이 끝나기 무섭게 협련의 신형이 사라졌다.
순간 목려송의 강력한 한빙장이 허공을 후려쳤다.
펑-
주변 가득 내려앉은 서리를 딛고 잠시 드러났던 협련의 신형이 다시 사라졌다.
휘이잉-
바람이 날카롭게 벼리고 지나가는 소성 끝에 목려송의 신형이 바쁘게 뒷걸음질 쳤다.
물러난 목려송의 앞섶이 예리하게 잘려 나갔다.
그것을 확인한 목려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일그러진 그의 얼굴만큼 손속이 사납게 변했다.
파팡-
허공을 수놓는 목려송의 손짓에 따라 자잘한 강기들이 공중에서 폭발했다.
그 작은 폭발에 휘말린 공기가 터져 나갈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협련을 비껴 때린 강기는 대청 내부를 부숴나갔다.
“이런!”
그 모습에 소흥왕의 입에서 낭패한 음성이 흘렀지만, 대결을 중지시키진 않았다.
흉흉한 만큼 결투의 결과가 궁금했던 것이다.
바람 소리가 일 때마다 목려송이 미친 듯이 물러났고, 허공에서 강기가 폭발할 때마다 협련의 다급성이 대청을 울렸다.
하지만 결과는 쉽게 드러나지 않은 채 대청만 형편없는 몰골로 변해갈 뿐이었다.
“놀랍군요.”
대결에 빠진 탓인지 신형을 드러낸 염홍의 감상에 소흥왕이 물었다.
“뭐가 말인가?”
“저 노인의 경지가 협련 시위와 비등합니다.”
“협련의 경지가 어떠했는데. 높았나?”
“예, 왕야. 협련 시위의 경지는 강호인들의 분류로는 화경입니다.”
“화경이라면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경지가 아닌가?”
“알고 계셨습니까?”
“말만 들어보았지. 한데, 그런 이들은 얼마 없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강호를 통틀어도 열다섯 명을 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황궁에도 협련 시위를 포함해 둘뿐이지요.”
염홍의 설명을 들으며 두 사람의 대결을 좇는 소흥왕의 시선에 새삼스런 놀람이 담겼다.
그렇게 진행된 결투는 좀처럼 결말을 내지 못했다.
협련의 은신술과 실력이 높은 까닭도 있었지만, 목려송의 움직임이 평소와 달리 매끄럽지 못한 탓이 컸다.
그런 두 사람의 공방을 지켜보던 고덕이 짜증스런 표정으로 움직였다.
“지금 장난하나!”
목려송의 어깨를 당겨 뒤로 물린 고덕의 신형이 앞으로 나서며 허공의 한 점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쾅-
마치 뭔가가 폭발하는 것 같은 소성의 끝에서 피가 뿌려졌다.
컥-
피를 뿜으며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협련이 대청 바닥에 널브러졌다.
창졸간에 벌어진 상황에 염홍이 황급히 달려 나가 협련의 상세를 살폈다.
“잠시 내력이 엉켜 혼절한 것이니 괜찮을 것입니다. 왕야.”
염홍의 말에 안도의 표정이 된 소흥왕의 시선이 고덕에게 향했다.
“갑작스런 참견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불필요한 공방이었습니다.”
“하나…….”
다시 부당함을 성토하려는 소흥왕에게 다가간 염홍이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정정당당한 대결이었을지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왕야.”
“그것이 무슨 소린가?”
“저자의 움직임은 안다고 막을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염홍의 말에 소흥왕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자신이 보기에 고덕의 움직임이란 것은 그저 허공에 손 한 번 뻗은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협련이 고 무인의 행동을 사전에 알았다 해도 막지 못했을 것이란 말이던가?”
“그러합니다, 왕야.”
염홍의 사람됨으로 미루어 그가 헛소리를 할 리는 만무한 일. 자신이 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소흥왕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고덕을 바라보았다.
“염홍의 말을 어찌 생각하는가?”
“그의 눈이 생각 외로 뛰어나군요.”
“하면 사실이란 말이로군… 흠…….”
천천히 돌려진 소흥왕의 시선이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는 무장들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대장군 이첨이 고개를 조아렸다.
“소장들의 눈으로는 진위를 파악하지 못하였나이다. 송구하옵니다, 왕야.”
정말로 창피했던지 숙여진 이첨의 고개는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런 이첨의 반응에 고개를 돌린 소흥왕의 시선이 다시금 고덕에게 향했다.
“이번 대결의 결과는 협련이 깨어난 후에 정하겠다. 이만 물러가라.”
소흥왕의 명에 고덕은 정중한 포권을 취한 후, 당황한 표정의 목려송을 이끌고 대청을 벗어났다.
“어쩌려고 그러신 겁니까? 괜히 왕야의 역정이라도 사시면…….”
대청 밖으로 나서자마자 걱정을 늘어놓는 목려송을 고덕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왜 그런 건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아까 왜 시간을 그리 질질 끌었냐 이 말이야.”
“그야 상대가 관인이 아닙니까? 관인을 이긴다고 득 될 것도 없고, 만에 하나 상하게라도 한다면 문제만 생길 터이기에…….”
미적거리며 답하는 목려송의 모습에 고덕이 혀를 찼다.
“쯔쯔, 그런 사람이 장수들을 그 꼴로 만들어놓았던가?”
“그야… 너무 나대니까……. 하지만 이번엔 다르지 않습니까?”
“뭐가 다른데?”
“왕야가 시퍼렇게 두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자신이 내세운 사람을 눈앞에서 묵사발을 내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하물며 체면이 모두인 황족인데…….”
“쯔쯔, 예나 지금이나 네놈은 머리를 너무 굴려.”
“예?”
“생각이 많다고. 몸을 쓰는 놈이 머리가 먼저 움직여서야 무슨 일이 될까.”
“하, 하지만 왕야의 성질을 건드려 봐야 득 될 게 없는 건 맞지 않습니까?”
“손해 볼 건 또 뭔가?”
“그야 수배라도 내려지면…….”
“왜? 수배가 내려지면 잡혀 줄 생각은 있고?”
“그야…….”
왕부 안에서 차마 왕명을 어길 것이라는 답을 할 수 없어 뒷말을 흐리는 목려송의 모습에 고덕은 다시 혀를 찼다.
“쯔쯔, 그리 흐리멍덩해서야……. 되었으니 가기나 하지.”
“그래도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조치?”
“군주마마를 찾아뵙고 힘이 되어 달라든지… 아니면 호 판관이라도…….”
“일없다.”
“그러다 죄라도 물으면 어쩌시려구요?”
“그땐 떠나면 그만인 거지.”
고덕의 답에 목려송이 물었다.
“정말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고덕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떠난다. 말은 뱉었으되 그 말을 실행할 자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글쎄…….”
고덕의 음성에서 짙은 고뇌를 읽은 목려송은 역시 그와 문정 군주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고 확신했다.
“정히 원하시면 제가 군주를 슬쩍 보쌈이라도… 어이쿠!”
느닷없는 주먹질에 얻어맞고 나뒹군 목려송이 주저앉은 모습으로 고덕을 바라보았다.
“말일지라도 입에 담지 마라. 죽고 싶지 않다면…….”
고덕의 싸늘한 음성에 목려송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기억 저편에 묻어놨던 공포가 요란한 경고성을 울린 탓이다.
과거 마교에서 금역에 발을 들였다 검마라 불리던 고덕과 마주쳤던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왔다.
그땐 정말로 죽다 살았다.
단지 자신의 처소에 발을 들였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시퍼렇게 일어선 강기를 무더기로 쏟아내던 고덕의 신위는 진실로 공포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이미 화경에 들어 무서울 게 없다던 목려송이 겁에 질려 오줌을 지렸을까.
그로서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사과는 필요 없다. 다시 하지 않으면 될 일.”
“명심하겠습니다, 대협.”
“가자.”
언제 분노를 뿌렸나 싶게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간 고덕이 돌아서자, 목려송이 황급히 옷을 털고 일어나 쫓았다.
* * *
주위를 물린 상황에서 벌어졌던 대결이었지만 소문은 금세 왕부 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 소문이 가져다준 파급효과는 적지 않았다.
문정 군주의 손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미 두 사람에게 지극했던 왕부의 시녀와 시종들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었지만, 은연중에 두 사람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왕부 관리들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던 것이다.
“언제 한번 놀러 오시구려.”
지나가던 학사 우복야가 고덕을 발견하곤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에 평시처럼 고덕을 찾아와 있던 호철랑이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내 우 학사가 저리 부드러운 말을 건네는 것은 처음 봅니다. 역시 실력은 있고 봐야 하는 모양입니다.”
호철랑의 꾸밈없는 소란을 바라보며 빙긋이 미소를 지은 고덕이 물었다.
“입이 건 사람이오?”
“누구? 우 학사 말입니까?”
“그렇소.”
“말도 안 됩지요. 우 학사가 입이 걸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이지요.”
“한데 왜……?”
“아~ 우 학사가 좀 유별납니다. 실력이야 왕부 문관들이 함께 기거하는 것만으로도 자랑삼을 정도로 뛰어나긴 하나 잘난 척이 너무 심하거든요.”
“잘난 척이라…….”
“예. 말도 마십시오. 저 인간이 왕야를 빼고 먼저 아는 체를 하는 것도 고 무인이 처음입니다. 오죽하면 군주님이나 왕비마마를 뵙고도 입을 여는 경우를 보지 못했겠습니까.”
“특이한 친구구려.”
“특이라……. 뭐, 그렇게 보자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왠지 심통 가득해 보이는 호철랑의 음성에 목려송이 웃음을 지었다.
“호 판관이 왠지 질투를 하는 것 같군요.”
“지, 질투라뇨. 우 학사가 여인네도 아니고 그 무슨…….”
“문인끼리는 흠모의 정도 갖는다던데, 아닙니까?”
“그야 상대의 문취(文就)와 그 인간됨을 흠모할 뿐이지, 어찌 사람을 흠모한단 말입니까?”
“하하, 농입니다. 뭘 그리 정색을 하십니까?”
목려송의 웃음에 호철랑은 얼굴까지 발갛게 변해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험험…….”
“그렇게 얼굴이 붉으니 마치 여인네 같습니다그려.”
다시 이어진 목려송의 농에 호철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험, 어찌 그리 심한 말씀을! 소생, 오늘은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그럼.”
버럭 화를 내곤 황급히 돌아가는 호철랑의 뒷모습에 목려송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너무 심했나? 그렇다고 사내가 그만한 일에 저리 화를 낼 필요야. 역시 문인 나부랭이인가…….”
“글쎄, 가끔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 드러나면 화가 나기도 하니까.”
의미를 알 수 없는 고덕의 말에 목려송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그 무슨 말씀이신지……?”
“여전히 보이는 것만 보는 그 못된 버릇은 좀 버리는 게 좋지 않겠나?”
“예?”
역시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하는 목려송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고덕이 시선을 돌렸다.
그런 이들에게 시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
“뭔가?”
“왕야께서 찾으십니다.”
시종의 말에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고덕과 달리 목려송은 걱정스런 낯빛으로 시종에게 물었다.
“혹시 왜 부르시는지 알 수 있겠나?”
“그건 저도 모릅니다요.”
“모른다……. 하면 누구와 함께 계신 줄은 알 수 있겠나?”
“예. 군주마마께서 들어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력한 아군인 문정 군주가 함께 있다는 말에 목려송의 얼굴에서 근심이 날아갔다.
적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판단한 탓이다. 그런 목려송을 바라보며 고덕이 혀를 찼다.
“쯧, 겁은…….”
“거, 겁이라뇨. 그저 대비를 하자는 것뿐입니다. 대협.”
“부딪치면 자연스럽게 알 일. 미리 알아 대비하자는 것이 바로 겁이지 아니긴.”
“다른 겁니다. 암요, 다르고말고요.”
자신이 겁을 냈다는 말이 억울했던지 목려송은 결단코 아니라고 주장했다.
“실없는 말은 그만하고 가세.”
성큼성큼 걸어가는 고덕의 뒤를 따르는 목려송의 입은 연신 겁낸 건 아니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 * *
대청에 들어서자 단정히 앉은 소흥왕의 곁에 다소곳한 문정 군주의 모습이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지난 대결의 결과를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불렀네.”
“말씀하십시오.”
“협련의 말은 염홍의 말과 다르지 않았네. 자네의 실력이 상상 이상이라고 하더군.”
“그랬습니까?”
답을 하며 주변을 훑는 고덕의 시선에 소흥왕이 미소를 지었다.
“협련은 이미 돌아가고 없네.”
소흥왕의 말에 주변에서 시선을 거둔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랬네. 하여간 내 그래서 군주의 청을 수락하기로 하였네.”
자신의 말에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던 고덕이 의외로 담담하자 겸연쩍은 표정을 지은 소흥왕이 물었다.
“별로 기쁘지 않은 모양이로군.”
“기뻐해야 하는 일입니까?”
“하면, 아니던가?”
소흥왕의 물음에 잠시 생각해보던 고덕이 희미하게 미소를 그렸다.
“조금은…….”
“흠… 혹시 군주의 경호 무사 자리가 탐탁지 않은 겐가?”
“그렇진 않습니다.”
“한데 그런 반응이라니, 내가 기대를 너무했던 모양이로군.”
서운함을 내비치는 소흥왕의 말에도 고덕은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당연히 될 일이니 그랬던 것이 아니겠어요. 오라버니.”
어색해진 분위기에 문정 군주가 나섰지만, 소흥왕의 서운함은 별로 가신 듯 보이지 않았다.
“글쎄다. 여하간 네 소원대로 되었으니 좋은 일이었으면 좋겠구나.”
“고마워요, 오라버니.”
“아니다. 그럼 나가 보거라.”
소흥왕의 말에 문정 군주는 고덕과 목려송을 데리고 대청을 물러났다.
“나쁘지 않은 결정이십니다.”
염홍의 음성에 소흥왕이 걱정을 토로했다.
“글쎄, 자네가 놓치기 아까운 능력이라고 하여 붙잡았네만, 이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군.”
“신분 때문이옵니까?”
“강호인인 바에야 신분이야 무슨 상관인가.”
“하오시면……?”
“출신을 모르지 않는가? 더구나 자네 말대로라면 강호에서도 이름깨나 날렸을 이들인데, 전혀 감을 잡지 못하겠으니 걱정일 밖에.”
“한 명은 알듯도 하옵니다.”
“알듯도 하다?”
“예. 하오나 장담은 하지 못하옵니다.”
“자네가 그리 불투명하게 말하다니 의외로군.”
“송구하옵니다, 왕야.”
“아닐세. 그래, 짐작 가는 이가 누구인가?”
“꼽추 노인입니다.”
“고 무인이 아니라?”
“예.”
염홍의 답에 소흥왕의 표정엔 아쉬움이 깃들었다. 아무래도 수하로 보이는 꼽추 노인보다는 고덕의 신상이 더 중요했던 탓이다.
“흠… 할 수 없겠지. 그래, 누구로 생각되는가?”
“혹시 강호십대고수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풍문에 접해본 적은 있네.”
“그들 중에 꼽추 노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만, 강호십대고수라면 강호에서 가장 강하다는 열 명을 말하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물론 천하오존이 있다 하나 그들은 진정한 천외천의 인사들. 그들을 제외한다면 강호에서 가장 강력한 고수들이 바로 그들입지요.”
“한데, 그런 이들 중에 꼽추 노인이 들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게 누군가?”
“사괴 중 하나인 음양괴라고, 정천맹의 추격에서 강력한 무위를 떨쳐 보인 후엔 음양마란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음양괴나 음양마라……? 둘 다 그리 좋게 들리진 않는구만.”
“예. 솔직히 평이 좋은 이는 아닙니다.”
“어느 정도인가? 군주의 청정에 문제가 될 정도인가?”
“그것이… 정말로 풍문의 그 음양마가 맞다면 청정이 문제가 아니라 안위가 위험하옵니다.”
염홍의 말에 소흥왕이 벌떡 일어섰다.
“그런 자를 추천했단 말인가!”
“그것이… 미리 말씀드린 대로 확실치 않기 때문이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음양마라면 저리 누구를 모시고 다닐 인사가 아닙니다. 설사 천하오존이라 해도 저리 고분고분하게 누르진 못할 인사이옵니다.”
“하면?”
“지금의 모습으로 보아선 풍문만으로 비교할 땐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오나 꼽추라는 특이한 외향에 화경이라는 능력을 갖춘 이가 또 있다고 보기에도 어려운지라…….”
“그러면 외향상은 맞으나 풍문상으로 맞지 않는다?”
“그렇사옵니다, 왕야.”
“하나, 만에 하나 그가 음양마가 맞는다면 위험한 게 아닌가?”
“사실이라면 그러하겠으나 고 무인의 존재가…….”
“그가 어쨌기에?”
“보셨지 않습니까? 협련 시위가 한 수에 제압당했습니다.”
염홍의 말에 소흥왕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시 말이 나왔으니 내 묻지. 솔직히 난 그날 고 무인이 보여 준 한 수가 그리 고명하게 보이지 않았네. 그 탓에 자네나 협련이 그리 극찬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사실 내력이 일정 부분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라면 그리 볼 수밖에 없는 움직임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날 고 무인이 보여 준 한 수에 든 변화는 제가 잡은 것만 서른세 번이었습니다.”
“자네가 잡은 것만?”
“예. 협련 시위는 마흔여덟 개까지는 보았다고 하였습지요.”
“하면, 변화가 더 있었단 말인가?”
놀라는 소흥왕에게 염홍은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예. 마흔여덟 개의 변화를 피했지만 마흔아홉 번째의 변화는 미리 파악해 대비하지 못했기에 협련 시위가 당한 것이옵니다. 물론 상세로 보았을 땐 그 이후에도 몇 번의 변화가 추가되며 내력을 진탕시킨 것으로 보였습니다.”
“세상에, 그 짧은 시간에 그리 많은 변화를 줄 수 있었단 말인가?”
소흥왕도 무인이라면 무인이다.
난세에서 홀로 남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 칼을 잡고 황궁 무술을 연마했기 때문이다.
그런 소흥왕이기에 짧은 시간에 수많은 변화를 뿜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놓치기 아까운 능력을 가졌다 말씀 올린 것이옵니다.”
“그 정도라면 정확히 어느 정도의 능력인가?”
“단순히 보여 준 능력만으로 가정한다고 해도 시위장인 해 제독을 능가할 것이옵니다.”
“관부제일인 해서령, 그를 말인가?”
소흥왕의 경악은 당연한 일이다.
황궁 무학으로 통칭되는 관부 무학의 정점에 선 이가 바로 금위의 제독이자 어전시위장인 해서령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강호십대고수의 일인인 하북팽가의 도왕과 상하를 논하기 어려운 실력을 가진 자였다.
“해 제독을 능가한다면……? 설마?”
“천하오존은 아니옵니다. 나이와 외모, 기량 등 모든 것이 맞지 않사옵니다. 아니, 그 모든 걸 양보한다고 해도 자신의 소속을 떠나 움직일 이들이 아니옵니다. 왕야.”
“하긴 관직을 우습게 여기는 강호인이, 더구나 그 정도의 자리에 있는 이가 군주의 개인 경호 무사나 하자고 나서진 않겠지.”
소흥왕의 말에 염홍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이긴 해도 그렇다 하면 관부와 왕부를 싸잡아 낮추게 되는 탓이다.
소흥왕도 염홍의 답을 바랐던 건 아닌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눈길을 떼지 말게. 믿어도 좋다고 생각되기 전엔 항상 지켜보게.”
“여전히 일전의 실종 사건에 배후가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길 빌긴 하네만…….”
무거운 음성으로 답하는 소흥왕의 표정은 유난히 무거웠다.
그 표정에서 염홍은 소흥왕이 누군가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의심이 향한 이를 짐작한 염홍이 상심이 클 소흥왕을 위해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유심히 지켜보겠습니다. 그리고… 누가 되었든 그 둘이 지킨다면 쉽게 접근하진 못할 것이옵니다. 왕야.”
“그래야 하네. 그래서 선택한 인선이니…….”
소흥왕의 음성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