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2장 (23/129)

제22장. 회우(回遇)-슬픈 만남

바람이 제대로 쫓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고덕의 뒤를 목려송이 헐떡거리며 따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강소의 남경엔 아직 군주의 호송 행렬이 당도하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고덕은 곧바로 강소의 제남을 향해 달렸다.

거의 직선을 그리며 달린 덕에 관도는 무시되었다.

그 탓이었을까. 고덕이 도착했을 땐 군주의 호송 행렬이 이미 제남을 지난 뒤였다.

그때부턴 철저하게 관도를 따라 이동했다.

수십 갈래의 관도가 있었지만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고덕은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해 호송 행렬이 향한 방향을 탐문해낸 뒤 그 뒤를 쫓았다.

그렇게 이동하길 한참. 드디어 멀리서 호송 행렬을 발견했지만, 상황은 좋지 못했다.

이미 적의 습격에 노출된 상태였던 것이다.

얼마 되지 않는 적이었지만 워낙 고강한 이들을 맞은 탓에 관병들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남아 있는 병력을 독려하며 결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장수는 일전에 안면이 있던 백호장 운암이었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의 중심으로 고덕이 뛰어들었다.

투닥. 푸확-

잠시간의 격투음 뒤로 피가 뿌려졌다.

단 두 번의 손길로 상대의 팔을 잡아 뽑은 고덕의 출수에 공격하던 복면인들이 뒤로 물러섰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이다.

주인에게서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펄떡거리는 팔을 내던진 고덕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죽고자 한다면 죽여준다.”

고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복면인들은 물러가지 않았다.

스스로 물러났던 일전과는 분명 달랐다. 그런 이유가 곧바로 드러났다.

붉은 복면인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온 것이다.

그를 바라보는 고덕의 시선에 이채가 어렸다.

“현경?”

“역시 검마인가?”

강호인이 들었다면 기겁했을 경지와 무명이 불렸지만, 관병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제대로 몰랐다.

그들은 고덕을 알아본 운암의 명으로 마차 주위로 모여들어 만약에 대비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관병들의 곁으로 만약을 대비해 목려송이 다가서자, 그들이 바짝 긴장하는 것을 느낀 고덕이 운암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보냈다.

“그는 내 동료요. 그가 당분간 방패가 되어줄 것이오.”

고덕의 말에 관병들의 적개심은 가셨지만, 긴장감은 늦춰지지 않았다. 여전히 강력한 적에 직면한 것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의 중심에 서 있는 마차를 일별한 고덕이 앞으로 나선 복면인, 적면조장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놈과는 오랜만이군. 나쁘지 않아.”

“평은 죽은 뒤에 염라전에서 하지.”

그 말과 함께 움직인 적면조장의 손짓을 따라 날카롭게 벼려진 강기가 날아들었다.

스팡-

슬쩍 들어올린 고덕의 팔뚝을 스치고 미끄러진 강기가 관도 옆에 세워져 있던 아름드리나무의 허리를 뚫고 나갔다.

“십절무지(十節無指)?”

다소 의외라는 고덕의 음성에 적면조장이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오래전에 사라진 것인데 용케 알아보는군.”

“십절무지라면 혈교 놈이로군. 아직도 숨을 쉬고 있었던 모양이야?”

“마교의 개가 감히 혈교의 이름을 입에 담다니.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적면조장의 살벌한 말에도 불구하고 고덕은 헛웃음을 지었다.

“미친놈. 내가 천마신교에서 나온 지가 언젠데 여전히 그쪽과 결부시키는 겐지……. 그리고 십절무지가 뭐? 그게 그리 자신만만한가?”

말끝에 튕겨 낸 고덕의 손끝에서 무형의 강기가 쏘아져 나갔다.

“타, 탄지신통!”

소림에서도 진체가 소실되었다는 천고의 강기공이다. 놀라는 상대에게 고덕이 웃어 보였다.

“십절무지의 천적이 바로 탄지신통이지. 왜, 계속해볼 텐가?”

고덕의 이죽거림에 분노한 적면조장이 검을 뽑아들었다.

“죽인다!”

“능력이 된다면.”

달려드는 적면조장에 맞서 어느새 고덕의 손에도 애검 명혼이 들렸다.

챙챙, 추장창-

수도 없는 충돌음의 위로 펼쳐지는 강기의 노도에 관병들은 물론이고 음양마마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휘황찬란한 공방 속에 피가 뿌려졌다.

길게 찢어진 배를 부여잡고 물러난 적면조장을 바라보는 고덕의 시선엔 무료함이 가득했다.

“겨우 이건가? 과거 혈교의 검법에서 많은 것이 비는군.”

“이놈!”

분을 이기지 못한 적면조장이 고함과 함께 달려들자 고덕이 한 발을 내밀었다.

진각의 파동을 피하며 자연스럽게 적면조장의 위치가 고덕의 오른쪽으로 치우쳤다.

츠팡-

아래에서 위로 쳐올린 고덕의 검에 떠밀린 적면조장의 검이 하늘로 솟고, 그로 인해 드러난 옆구리로 고덕의 팔꿈치가 당겨지며 강력한 힘으로 틀어박혔다.

“컥-”

답답한 신음성과 함께 피를 뿜는 적면조장의 앞으로 휘돌며 들어선 고덕의 왼손이 피를 토하며 숙여진 적면조장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 안으로 고덕의 무릎이 치고 올라왔다.

퍽-

갈비뼈가 모조리 부서지며 장기를 찔렀는지 뿜어내는 피의 양이 많아졌다.

감싸 안았던 고덕의 왼손이 그대로 위로 들리며 안에 끼워진 적면조장의 목을 단박에 꺾어버렸다.

우드득-

설명은 길었지만, 그 동작은 물 흐르듯 단 한순간에 이어졌다.

목숨이 끊어진 적면조장의 시신을 내팽개친 고덕의 신형이 당황한 채 우왕좌왕하는 적들에게 쇄도했다.

쐐에에에엑-

검의 속도를 바람이 따르지 못해 검과 바람 사이에 진공 상태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쾌속하게 날아든 검에 베여 피를 뿌리는 적의 몸뚱이를 진공이 깨어지며 밀려든 날카로운 공기가 찢어발겼다.

팡-

육편으로 변한 시신과 자욱하게 뿜어진 피가 전장에 뿌려졌다.

푸확-

어느새 이동한 고덕의 검에 세로로 쪼개진 적의 몸통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져 올랐다.

투벅-

길게 한 걸음.

횡으로 쓸어간 고덕의 검에 일 장에 이르는 강기가 파란 이빨을 드러냈다.

투두둑.

강기의 경로에 서 있던 적 셋의 허리가 일검에 두 동강이 났다.

하체에서 갈라진 상체가 바닥에 구르는 순간, 다시 이동한 고덕의 검이 아직 반응하지 못하는 적의 머리 둘을 잘라 허공에 띄웠다.

그리고서야 사태를 확인한 적의 고함이 울렸다.

“물러나라!”

순간 살아남은 복면인들이 일제히 신형을 뽑아 올렸다.

그런 이들을 향해 고덕이 주먹 안에 고인 피를 뿌렸다.

파바바박-

어느새 강기로 씌워진 피가 도주하던 복면인 다섯의 몸을 걸레로 만들어 떨어뜨렸다.

그 아비규환을 뚫고 사라진 복면인은 채 셋이 넘지 못했다.

남겨진 잔혹한 참상에 관병들마저 넋이 나가 주저앉거나 토악질을 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운암이 고덕에게 다가왔다.

“고, 고맙습니다.”

절로 말투가 공손해졌다. 실수라도 하면 자신조차 목이 잘려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리가 험하오. 군주가 나오기 전에 옮깁시다.”

그나마 피가 덜 묻은 옷을 죽어 나자빠진 시신에서 벗겨 내 자신의 피를 닦아내는 고덕의 말에 운암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리를 옮겨 병력을 추스른 운암은 어두운 표정이었다.

이백의 관병 중 살아남은 이들의 수가 채 오십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중상자와 부상자를 제하면 온전히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은 스물도 되지 않았다.

장소를 옮기고 안전이 확보되자 적을 물리쳤다는 보고를 받은 문정 군주가 마차 밖으로 나왔다.

“다, 당신은……!”

고덕을 바라보는 문정 군주의 눈이 심하게 떨렸다.

“예, 예를 취해주시오.”

운암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이 무지막지한 강호인이 황실의 예를 따를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운암의 걱정처럼 고덕은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이는 예를 행하지 않았다.

아니, 바닥에 엎드리기는커녕 고개조차 숙이지 않는 그의 무례가 눈앞에서 벌어졌지만, 운암도 또 주변에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던 관병들도 일절 나서지 못했다.

그들이 나서기엔 고덕의 무위가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을 모조리 무시한 고덕이 문정 군주에게 미소를 지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이상하게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끼며 문정 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활약이라고 들었어요. 고마워요.”

절대로 이리 지나갈 것이 아니다. 아무리 도움을 받았다고는 해도 황실의 예법을 지키지 않은 이에게 인사라니…….

머리는 호통을 치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몸에 익은 듯 문정 군주의 얼굴엔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둘을 비추는 노을만큼 아름다운 미소가…….

줄어든 병력으로 인해 노숙을 극구 반대한 운암이었지만, 밤길이 더 위험하다는 고덕의 말에 할 수 없이 주저앉아야만 했다.

부상병들을 섞어 병사들로 하여금 마차 주변을 둘러싼 운암은 불안한 눈으로 문정 군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고덕을 바라보았다.

“하면, 소속된 곳이 없단 말인가요?”

처음과 달리 고덕을 대하는 문정 군주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없습니다.”

“그럼 왕부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요? 그 정도 실력이라면 분명 오라버니께서 높이 사주실 거예요.”

“관부와는 인연이 없는 몸이라…….”

“하지만 내 제의는 수용했었잖아요?”

일전의 호위 의뢰를 말하는 것이다.

“그거야…….”

딱히 답을 못하는 고덕을 미소로 바라보던 문정 군주가 말했다.

“그럼 이번에도 내 의뢰로 하죠. 임무도 내 호위. 어때요?”

이번엔 그냥 떠나게 두지 않겠다는 문정 군주의 생각이 고스란히 그녀의 눈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던 고덕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 * *

어두운 실내.

혈포를 입은 봉공이 부복한 가운데 마제의 얼굴을 한 혈교의 교주가 분노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실패? 동원된 이들 스물이 죽어?”

“놈의 실력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여…….”

“적면조장이 제대로 반항조차 못했다?”

“예. 살아 돌아온 이들의 증언이 그러하옵니다, 교주님.”

“적면조장의 실력은 너보다도 높았다. 그런 이가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보고 믿으란 말이냐?”

“그 탓에 소신도 두 번, 세 번 확인한 일이옵니다. 생존자들은 분명 그리 말하고 있사옵니다.”

봉공의 보고에 마제의 얼굴을 한 혈교 교주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자신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이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적면조장은 자신의 사제였기 때문이다.

그의 능력이라면 자신으로서도 쉽게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이가 반항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당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순간 저주처럼 퍼붓던 마제의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검마를 건드린 이상 곧 들이닥칠 너의 장례식을 미리 축하해주지.’

“놈은 어디 있나?”

“아직 위치를 찾지 못했습니다만, 아마 군주를 호위 중일 것으로 보입니다.”

“놈이 문정 군주를 호위하는 이유는 알아냈는가?”

“그것이… 알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둘의 교차점이 없어서…….”

“황제나 소흥왕이 청부를 넣었을 가능성은?”

“황제나 소흥왕과 검마가 접점을 가질 가능성조차도 알 수 없었기에…….”

“그럼 도대체 어찌 된 일이야. 지난 일은 물론이고, 이번 일도 우연이라 생각하란 말이냐?”

“그것이…….”

답을 못하는 봉공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느닷없이 문정 공주와 연결된 인연을 도무지 설명할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달리 답을 하지 못하는 봉공을 바라보던 혈교의 교주가 손을 내저었다.

물러가란 소리에 봉공은 안도의 표정으로 뒷걸음질 쳐 물러갔다.

봉공을 물린 교주가 허공을 향해 물었다.

“암혼, 너는 어찌 생각하지?”

“주천주께서 언급한 이가 아니올지…….”

허공에서 울린 음성에 혈교의 교주가 검미를 찌푸렸다.

“설마……. 사부는 주천주께서 언급한 이가 중원에 없을 것이라 했다.”

“하오나 그가 아니고서는 소주의 힘과 비슷한 적면의 힘을 깨트릴 수 없습니다.”

적면. 적면조장의 호칭 자체가 적면인 듯했다.

“그거야… 일단 혼천에 연락을 취해라.”

“멸천이 아니라 혼천입니까?”

“그래. 아직은 사부께 알리지 마.”

“하오면 혼천엔 무어라……?”

“혼천주께 탐밀 셋을 보내달라 부탁드려라.”

“탐밀을 말씀입니까?”

“그래. 그들을 풀어 검마의 뒤를 캐야겠다. 놈을 알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알겠습니다. 하온데 혼천주께서 거절을 하시면……?”

“이번에 도움을 주면 혼천의 일을 돕겠다고 전해 올려라.”

“소주!”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진 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어.”

“하오나 혼천의 일을 멸주께선 반대하고 계십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안다. 내가 그 일을 돕는다면 크게 진노하실 것이라는 것도…….”

“하온데 왜?”

“지금은 그 방법뿐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소주라 불린 혈교 교주의 말에 허공의 음성이 힘없이 흘렀다.

“명을 받습니다.”

침묵이 내려앉은 대전에 홀로 남은 혈교 교주의 표정에 짙은 복수심이 어렸다.

* * *

재도발은 생각지 않은 듯 문정 군주의 호송 행렬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안전하게 이동했다.

물론 다음 관청에서 경호 병력을 이천으로 늘리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지만, 여전히 경호의 중심은 고덕이었다.

그것은 고덕의 신위를 목격한 운암의 보고 때문도, 병사들의 진술 탓도 아니었다.

오로지 문정 군주의 의지가 만들어낸 것이었을 뿐이다.

그런 상황을 새로 호송 행렬의 책임을 맡은 정천호 곽위문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행렬이 소흥 왕부에 도착하며 그런 불편한 동행이 비로소 끝이 났다.

파발을 통해 문정 군주의 습격 소식을 전해 들었던 소흥왕은 직접 정문까지 마중을 나왔다.

“무사하니 다행이구나.”

문정 군주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소흥왕은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다 고 무인의 덕분이었습니다.”

“누구?”

소흥왕의 물음에 문정 군주가 고덕을 불러 옆에 세웠다.

“고덕이라 합니다.”

정중한 포권이라고는 하나 역시 황실과 왕부의 예법에는 크게 어긋나는 행위였다.

주변에 늘어선 장수들이 분노한 표정으로 나서려는 것을 소흥왕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강호인의 인사법이 이렇다 들었다. 그리 알라.”

소흥왕으로서는 체면치레 때문에 문정 군주를 구해준 이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배려 덕에 고덕은 소란스러움을 피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오라비의 배려에 문정 군주가 미소를 지었다.

“이자를 제 경호 무사로 고용하고 싶어요, 오라버니.”

문정 군주의 말에 소흥왕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왕부에도 경호 무사는 있지 않니?”

“그래도 전 이자가 마음에 드는걸요.”

한동안 실종 상태에 놓여 있던 것을 간신히 찾은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의 부탁을 소흥왕은 거절할 수 없었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하자꾸나. 한데, 저자는 또 누구냐?”

고덕의 뒤에서 쭈뼛거리고 있던 목려송을 가리키는 소흥왕에게 문정 군주가 미소를 지었다.

“고 무인의 동료입니다. 저자도 함께 고용할 생각이에요.”

“흠… 알았다.”

작은 나무 한 그루조차 아름답고 곧은 것만 들이는 왕부다.

그런 곳에 호위 무사로 꼽추를 들이는 일이니 탐탁할 리 만무했지만, 역시 동생의 부탁이라는 것만으로 허락되었다.

그런 결정에 불만의 음성이 나왔다.

“왕야, 어찌 저런 자들을 믿고 왕부에 들인단 말입니까?”

높은 소성을 이끌고 나타난 여인은 이제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미부였다.

“아, 왕비. 어서 오시구려.”

소흥왕비 연후련.

십여 년 전에 자객의 손에 명을 달리한 정비의 후처로 이 년 전에 왕부로 들어온 여인이었다.

“왕비마마를 뵈어요.”

“오랜만이군요, 군주.”

일 년이 넘는 시간 만에 돌아온 가족을 맞이하는 것이라곤 도저히 볼 수 없는 냉랭함에 고덕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제가 들이는 사람들이 마음에 드시지 않나요?”

“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더구나 왕부에서 호위 무사의 자격으로 머물고 있는 장수들도 적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외인을 들일 이유는 없지요.”

“하지만 저를 지켜 준 분입니다. 제겐 그 무장들보다 필요한 사람이지요.”

“호호호, 한낱 야인 따위가 왕부의 무장보다 낫다는 말씀입니까?”

고의적인지 소흥왕비는 왕부의 무장들을 충동질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장수가 나섰다.

“소장도 왕비마마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왕부의 무장들을 믿어주소서. 군주마마.”

“믿어주소서, 군주마마.”

장수들이 한목소리로 외치고 나서자 소흥왕은 물론이고 문정 군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문정 군주를 비틀린 미소로 바라보던 소흥왕비가 고덕에게 말했다.

“야인은 말을 들었으면 속히 물러가라!”

차가운 소흥왕비의 말에 고덕이 그녀와 장수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문정 군주를 몰아붙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함께 지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다른 마음을 먹을 순 없었지만, 그녀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이상 그냥 떠날 순 없었다.

“방금 전에 소흥왕 전하의 허락이 계셨습니다. 하면, 왕비마마와 장수들은 소흥왕 전하의 명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입니까?”

고덕의 말에 왕비와 장수들의 얼굴에 당황감이 서렸다.

굳이 문제를 삼지 않았다면 모르되 해당하는 이가 문제를 삼았으니 그 부분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그리되자 체면을 상하게 된 소흥왕의 인상이 찌푸려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내 이미 허락한 일이니 왈가왈부하지 말라!”

소흥왕의 명에 무장들은 고개를 숙였지만, 소흥왕비는 그렇지 않았다.

“잘못된 명이십니다, 전하.”

“왕비!”

당황한 소흥왕의 음성에도 불구하고 왕비는 말을 계속 이었다.

“관부의 무장을 왕부로 들이는 일에도 절차가 있는 것을. 하물며 야인을 들이는 일입니다. 이리 처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전하.”

절차를 들고 나오는 왕비의 말에 소흥왕이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면 왕비는 어떤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보시오?”

“그에게 맡길 책임이 경호 무사라면 그 능력을 검증받아야겠지요.”

소흥왕비의 말에 무장들의 고개가 주억거려졌다.

그것은 호송 내내 군주의 곁에 머물던 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곽위문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한 사람, 별장으로 따라붙은 운암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생각만으로도 질리는 고덕의 무위가 생각난 탓이다.

“제 손님이기도 합니다. 제 손님에게 검을 들이밀겠다는 소립니까?”

참다못한 문정 군주의 이의에 소흥왕비가 비릿하게 웃었다.

“손님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요. 아시겠지만 왕부의 법에 따라 손님은 왕부 내에 그리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물론 무기도 가질 수 없지요.”

소흥왕비의 말에 곤혹스러워진 문정 군주를 힐긋 일별한 고덕이 검대를 풀어 내놓았다.

“이러면 되는 것입니까?”

무인이 타인에게 검을 맡기는 것은 목숨을 남에게 맡기는 것으로 치부하는 무장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매달렸다.

하지만 정작 검을 내민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런 고덕을 바라보는 목려송은 불안한 표정으로 왕부 무장들을 둘러보았다.

무기가 없다고 도발했다간 절대로 온전치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목려송의 불안감과 상관없이 검을 내맡긴 채 무장을 해제당한 고덕을 왕부 무장들이 노골적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소흥왕이 마무리 지었다.

“그럼 일단은 문정 군주의 손님으로 해두지.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들어가자꾸나. 내 네가 자금성으로 먼저 들어간 탓에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구나.”

소흥왕의 재촉에 고덕을 놔두고 걸음을 옮기는 문정 군주의 눈에 불안감이 남았다.

경호 무사가 아닌 이상 소흥왕과의 자리에 함께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녀에게 좋은 객방을 내어주고 정중히 대하라 명하는 소흥왕의 처결이 그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주긴 했지만, 그녀의 불안감을 완전히 씻어내진 못했다.

연신 뒤를 돌아보는 그녀에게 고덕은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대전으로 든 문정 군주는 소흥왕의 질문 공세에 처했다.

“하면 그간의 기억을 잃었단 말이냐?”

“예. 분명 호위 무장과 함께 복건으로 구경을 간 것은 기억을 하옵는데, 그 뒤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사옵니다.”

“허허, 이거야 원…….”

답답해하는 오라비에게 문정 군주가 물었다.

“제 호위를 맡았던 무장들은 뭐라 하던가요?”

“그들 중 일부는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나머진 실종되었다. 네게 위해를 가한 이들과 싸우다 죽었는지 아니면 자객과 한통속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네 경호 무장들 중 셋은 실종 상태란다.”

당시 문정 군주를 수행했던 무장들은 모두 여섯이었다. 그들 중 셋이 시신으로 발견되고 셋은 소식이 끊겼던 것이다.

“그럴 수가…….”

놀라는 문정 군주를 비스듬히 앉아 바라보던 소흥왕비가 물었다.

“어찌 실종되게 되었는지는 물론이고,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조차 생각이 안 난다는 말인가요?”

“예. 어의의 말로는 기억상실이라고 합니다. 그 이전에도 기억을 잃었었을 가능성이 높다더군요.”

문정 군주의 답에 소흥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면 무엇이냐? 네가 예전의 기억을 되찾자 그사이의 기억을 잃어버렸단 말이더냐?”

“예.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하긴… 그래야 근 일 년 동안 네가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이 설명이 되겠지. 그나저나 그간 험한 일을 당한 건 아니고?”

미색이 좋은 편인 문정 군주가 기억도 없이 외지에 떨어져 행여 못된 일이라도 당했을까 봐 하는 걱정이었다.

그런 소흥왕에게 문정 군주가 손을 내밀었다.

“이, 이건 수궁사로구나.”

처녀성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수궁사가 남아 있다는 건 걱정하던 일이 없었음을 뜻했다.

“예, 오라버니. 저도 이걸 보고 안심했으니까요.”

“다행이로구나. 다행이야.”

진심으로 기뻐하는 오라비의 표정을 바라보며 문정 군주는 왠지 허전함을 느껴야 했다.

마치 아직도 처녀인 것이 서운한 것처럼…….

그 당혹스러운 느낌에 문정 군주는 서둘러 망측한 상념을 지웠다.

“네가 기억을 찾은 곳이 하포라고?”

“예. 황상께선 하포를 샅샅이 뒤지면 혹여 제가 잃은 기억의 편린이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하셨습니다.”

“옳은 말이로구나. 하면 어찌, 황상께서 친히 그곳을 조사해주신다더냐?”

소흥왕의 물음에 문정 군주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폐하의 은덕을 감히 사절하였습니다.”

“사절? 아니, 왜?”

“어려운 처지에 처했던 저를 도운 이들입니다. 제가 사라진 이후 찾지 않고 있으니 그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이들에게 괜한 부담을 지울 생각은 없습니다. 오라버니.”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 그들이 찾지 않으면 영영 묻어둘 요량이더냐?”

소흥왕의 물음에 자신의 머리에 꽂혀 있는 나비 문양 머리 장식을 쓰다듬은 문정 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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