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9장 (20/129)

제19장. 변덕(變德)-들썩이는 복주상단

여곤에게서 저간의 설명을 들은 두 노행수인 관억과 도만은 아침 해가 뜨자마자 즉시 행수 회의를 소집했다.

복주상단의 가장 오래된 행수인 두 사람의 소집에 행수들은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빠짐없이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행수들이 모여든 시간은 진시 중엽.

관억과 도만 두 노행수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여곤이 주변 행수들을 둘러보았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중한 손님이 도착하려면 반 시진이 필요하외다.”

여곤의 말에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자 관억 노행수가 나섰다.

“상단의 중요한 일에 그 시간도 못 참는단 말인가.”

“중요한 일인데 어찌 소상단주님이나 총관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 겁니까?”

한 젊은 행수의 물음에 이번엔 도만 노행수가 나섰다.

“이번 사안은 행수 회의에서 논의될 일이기에 두 분께 통보하지 않았네. 이 회의의 말에 그 두 분에게 통보해도 늦지 않을 것일세.”

“하면, 회의의 말엽에 통보한다는 것입니까?”

“그러하네.”

도만 노행수의 답에 이의를 내놓았던 젊은 행수가 물러나자 더 이상의 반발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진시 말, 칠십여 명에 이르는 분타 무사들을 대동한 고칠이 복주상단으로 진입했지만, 경비 무사들은 정문에서부터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고칠은 곧바로 고덕이 가르친 대로 목려송이 경비 무사들을 모아놓은 곳으로 달렸다.

복주상단에 고용된 경비 무사들은 갑자기 사방에서 몰려든 무사들의 등장에 놀랐지만, 무서운 시선으로 노려보고 서 있는 목려송으로 인해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경비 무사들을 모조리 포박한 한도회 복주 분타 무사들이 심상치 않은 기파를 내뿜고 있는 목려송을 힐끗거리며 소곤거렸다.

“저 사람, 혹시 음양괴 아니야?”

“미친… 저 사람이 음양괴면 우리가 살아 있기나 할 것 같냐?”

“그, 그야 그렇지만… 정천맹에서 돌렸던 용모파기와 너무 흡사하지 않냐?”

“그야 꼽… 추니까. 저자에 나가 봐라. 관에서 돌린 현상 수배 전단의 용모파기 중 절반은 너를 닮았을 거다.”

무사들의 수군거림에도 불구하고 목려송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고덕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고했구나.”

“다 안 분타주 덕분입니다.”

고칠의 소개에 중년인이 나섰다.

“안견이라 합니다.”

“고덕이오. 도움을 주어 고맙소이다.”

“대협의 일은 언제라도 최선을 다해 도우라는 회주님의 전언이 일전에 있었습니다.”

“회주께 내가 고마워하더란다고 전해주시구려.”

“그리하겠습니다.”

인사를 나눈 안견이 비켜서자 고덕이 목려송에게 다가갔다.

“고용주를 좀 만나봐야겠네.”

“목을 꺾으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그건 만나봐야 알 수 있겠지.”

고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목려송이 앞장을 섰다.

잠시 후, 총관의 집무실에 도착한 목려송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총관 아보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아니, 이 이른 아침에 어인 일이십니까?”

“그대를 만나고자 하시는 분이 계시네.”

천천히 문에서 비켜서는 목려송의 뒤에서 고덕이 모습을 보이자 총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 행수의 처숙부 되신다는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소.”

“한데 어찌…….”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직전에 목려송이 분이라 칭한 것을 기억한 탓이었다.

“누, 누구십니까?”

자세를 바로 하고 다시 물어오는 총관에게 고덕이 답했다.

“고덕이라 하네.”

“고 자 덕 자라? 들어본 적이 없는 함자로군요.”

“그냥 검마라 부르기도 하지.”

고덕의 말에 총관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 갔다.

“거, 검마 대협이 왜, 왜?”

“왜는. 내 조카의 일이니 나설 수밖에 없지 않겠나.”

순간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미, 미처 알지 못한 탓에…….”

“상관없어. 아마 알았어도 그대로 행했을 테니까.”

“그게 무슨 뜻이십니까?”

말을 이해하지 못한 총관의 물음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청면조장이라던가? 꽤 하더군.”

“서, 설마!”

“자네들이 어차피 노리던 사람인데, 내가 연관되어 있다고 피해 가진 않았겠지.”

상대의 말로 총관, 아니 청면 사호는 청면조장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알면서 부딪친 건지 아니면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 조우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청면조장은 검마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라는 걸 말이다.

“아무래도 외통수에 걸린 모양이군요.”

“아마도.”

“조카가 여곤의 처라고요?”

“그렇지.”

“하면, 조카 손자들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상관없어. 자넬 해결한 후엔 흑상회를 방문할 생각이니까.”

고덕의 입에서 흑상회의 이름이 거론되자 총관의 표정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변했다.

“그, 그걸 어떻게…….”

“상대가 천하오존이라면 그에 준하는 준비가 갖춰졌을 줄 알았는데, 이건 실망이로군.”

고덕의 말에 총관이 낭패한 음성을 토했다.

“알지 못했으니까요. 알았다면 이리 허술하게 대처해놓진 않았을 것입니다.”

“뭐, 이젠 소용없어진 일이니 안타까워도 할 수 없겠지.”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총관의 표정이 웬일인지 편안해 보였다.

“포기인가?”

“방법이 없으니까요. 적어도 추하긴 싫군요.”

“만에 하나 살아날 길이 있다면?”

“제 목숨을 위해 다른 이들을 팔진 않습니다.”

“팔라고는 안 했네.”

“그럼 뭡니까?”

“내 말을 전해.”

“말을 전한다면… 웃전에 말입니까?”

“그래. 가서 전해. 나와 내 가족에게서 손을 떼라고.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 자꾸 불러내봐야 너희도 손해고 나도 피곤하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그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고덕은 엉뚱한 것을 물었다.

“내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없… 습니다.”

“그런데 내 이름이 천하오존에 들어 있네. 왜일까?”

“그건…”

생각해보지 않았다.

예전부터 천하오존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검마란 무명을 들었으니 으레 그러려니 했을 뿐…….

“가서 전해. 강호엔 발 한번 디딘 적 없는 내가 왜 천하오존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게 아니라면 손을 떼라고.”

“그 말은 우리와 척을 지겠다는 뜻입니까?”

“척은 네들이 졌어. 아직은 참을 수 있지만, 여기서 더 나가면 나도 날 말리지 못해.”

“협박입니까?”

총관의 물음에 고덕의 입가에 설핏은 웃음이 지어졌다.

“애원이라고 해두지.”

그 말을 남겨 둔 고덕이 등을 돌렸다.

“그냥 두고 가는 것입니까?”

걱정스런 목려송의 물음에 고덕이 답했다.

“오늘은 피를 보고 싶지 않아. 내 핏줄이나 남의 핏줄이나…….”

“하지만 아직 인질들을 구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목려송의 말에 고덕의 시선이 멍하니 앉아 있는 총관에게 향했다.

“이 친구의 걱정처럼 어쭙잖게 손을 쓰지 마. 아이들의 솜털 하나라도 뽑혔다간 네놈과 옷깃만 스친 이들이라 해도 모조리 잡아다 토막을 쳐 놓을 테니까.”

목을 옥죄어오는 고덕의 광기에 총관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총관의 답에 고덕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 뒤를 따르며 목려송이 걱정을 했다.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후회는 안 해.”

후회가 남지 않을 정도로 밟아주면 되니까…….

고덕의 속마음을 모르는 목려송은 불안한 표정으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불안해하는 목려송에게 모종의 일을 지시한 고덕은 곧바로 행수 회의장으로 향했다.

그의 등장에 행수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요?”

행수들의 물음에 여곤이 나섰다.

“이분은 내 처숙부 되시는 분이시오.”

“여 행수의 처숙부를 왜 행수 회의에 불러들인 것이오?”

“허리에 검을 매었으니 무인 같소만, 혹시 그 힘을 빌어 우리에게 위협이라도 하고자 하는 것이오?”

사방에서 고성이 터져 나오고 억측이 난무했지만, 고덕은 같잖다는 듯이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고덕을 바라보며 여곤이 안절부절못할 때, 문이 부서지듯 열리며 여상만이 회의장으로 내던져졌다.

형편없는 모습으로 구르는 여상만을 발견한 행수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소상단주님!”

“이, 이게 어찌!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분분히 일어서 항의하는 행수들의 고함 속으로 의원을 대동한 목려송이 들어섰다.

순간 장내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조용해졌다.

목려송의 정체는 몰라도 그의 손에 적지 않은 이들의 목숨이 사라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조용해졌군. 자- 그럼 이제 설명을 해주지. 그걸 좀 주게.”

고덕의 말에 목려송과 함께 들어온 의원이 탕약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고덕이 말을 이었다.

“이것은 이곳 복주상단의 상단주께서 매일 마시는 탕약이다.”

바닥에서 간신히 일어서던 여상만에게 다가간 고덕이 그 탕약을 들이밀었다.

“왜, 왜 이러시오?”

연신 목려송의 눈치를 보며 묻는 여상만의 모습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이걸 마셔.”

“뭐, 뭐요?”

“이걸 마시라고.”

“그, 그것을 왜 내가… 마셔야 한단 말이오.”

“이 약을 처방하라 한 것은 너라고 알고 있는데.”

“그, 그거야…….”

“설마 독약이라도 든 거야?”

“그, 그렇지 않소!”

발작적으로 외치는 여상만을 바라보며 고덕이 피식 웃었다.

“그럼 먹지 못할 것도 없잖아.”

고덕의 물음에 여상만은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 하지만 저 약이 그 약이라는 증거가 없지 않소?”

“증거? 흠… 그걸 좀 주게.”

고덕의 말에 의원이 약재가 싸인 종이를 건넸다.

탕약을 의원에게 돌려주며 종이를 건네받은 고덕이 그것을 펼쳐 보이며 물었다.

“그럼 이것을 보아주겠나. 난 이것이 도대체 무슨 약재인지 몰라서 말이야.”

“그, 그건…….”

차마 답하지 못하는 여상만을 노려보던 고덕이 약재 중 하나를 들어 보이며 의원에게 물었다.

“이 약재가 무엇인가?”

“말풀이라 하는 것입니다.”

“말풀이라……. 무엇에 쓰는 것이지?”

“독약입니다.”

의원의 답에 행수들 중에 경악 어린 표정을 짓는 이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 반대로 별로 놀라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을 눈여겨봐둔 고덕이 물음을 이었다.

“이 약재는 누가 처방한 것인가?”

“여상만 소상단주께서 처방하신 것입니다.”

“이 약을 먹으면 어찌 되나?”

“점점 피가 썩어갑니다.”

“증상들은?”

“피가 썩기 때문에 첫 번째로 기력이 떨어집니다. 잔병치레가 많아지며 그 상태는 더욱 심해집니다.”

의원의 답에 행수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지금의 상황이 무엇을 말하는지 감을 잡기 시작한 탓이다.

그런 행수들을 바라보며 고덕이 다시 물었다.

“그것이 길어지면 어찌 되나?”

“말풀을 복용한 것이 오래되면 마치 치매에 걸린 사람처럼 말이 어눌해지고 허상을 보거나 헛소리를 하게 됩니다. 심해지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기도 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기도 합니다.”

듣고 보니 딱 상단주의 병세다. 놀란 행수들 중에 몇몇이 여상만을 노려보며 물었다.

“저 말이 정말 사실인 게요?”

“그, 그것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다. 모두가 거짓이라고. 하지만 자신을 금방이라도 쳐 죽일 듯이 노려보는 목려송의 서늘한 눈빛에 눌린 여상만은 말을 더듬을 뿐 부정도 하지 못했다.

그런 여상만의 반응에 행수들이 사방에서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몇몇 행수들은 여상만의 편을 들었다.

“확인된 사실은 없소. 더구나 외인의 말에 이렇듯 놀아나서야 아니 되지 않겠소. 총관은 어디에 있는 것이오. 총관을 들여 그의 말을 들어보고 결정합시다.”

총관에게 매수되거나 애초에 그의 사람임이 분명해 보이는 몇몇 행수들의 주장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일을 주장하고 나선 고덕이나 증언을 한 의원이나 외인이라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에 피식 웃어 보인 고덕이 양팔을 벌려 보였다.

“마음대로…….”

그의 허락에 젊은 행수 한 명이 총관을 부르기 위해 달려 나갔다.

하지만 한참 후에 돌아온 행수는 혼자였다.

“어찌 혼자 오신 것이오?”

이제나저제나 총관이 오길 기다리던 행수들의 물음에 돌아온 젊은 행수가 고개를 저었다.

“처소에도, 상단 안에도 계시지 않았소.”

“어디 출타하신 게 아니겠소. 수문 무사들에게 알아는 보았소?”

“그, 그것이…….”

답을 잇지 못하는 젊은 행수의 시선이 고덕에게 향했다.

사실 어수선한 총관의 집무실을 보고 그가 빠져나갔다는 것을 직감했던 젊은 행수다.

직감이 들자마자 총관의 뒷배를 믿고 저지른 비리들이 적지 않았던 그는 위기를 느끼곤 곧바로 상단을 빠져나가려 했었다.

하지만 고칠이 배치해놓은 한도회 복주 분타의 무사들에게 제지를 당해 회의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젊은 행수의 표정을 보고 그 모든 것을 짐작해낸 고덕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총관은 상단을 떠났다. 아니, 빠져나갔다. 그의 뒷배를 믿고 있었다면 일찌감치 손을 드는 것이 좋아. 더구나 그의 뒤에 있다는 무림 고수를 믿는 것이라면 더욱 일찌감치 손을 터는 것이 좋고.”

고덕의 말에 총관의 말을 들어보자고 했던 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이들에게 고덕이 결정타를 날렸다.

“왜냐고 묻고 싶은 거라면 저기 서 있는 이가 바로 네들이 믿고 있는 총관이 초청한 무림 고수라고 말해주겠다.”

그 말에 그들의 시선이 문 앞을 막아선 목려송에게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 시선들은 몰려들던 것보다 훨씬 빨리 돌려졌다. 마주 쏘아보는 목려송의 눈빛에 어린 살기에 주눅이 든 탓이었다.

그런 행수들을 바라보며 고덕이 이죽거렸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건가? 그렇다면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주지.”

말과 함께 내뻗어진 고덕의 손끝에서 빛이 뻔쩍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총관을 데리러 갔다 온 행수의 이마에서 피가 터졌다.

풀썩-

이마가 뚫린 행수가 힘없이 무너져 내리자, 행수들 사이에 경악이 흘렀다.

“주인을 배신한 자, 그것을 뉘우치지 않는 자, 여전히 죄를 인정치 않는 자는 모두 저리 죽을 것이다.”

고덕의 싸늘한 음성에 눈치를 보던 한 행수가 여상만을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저, 저자가 시킨 일이오. 우린 그저 시킨 대로 하였을… 컥-”

부여잡은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쓰러지는 행수를 바라보던 고덕이 차갑게 내뱉었다.

“주인을 배신한 자. 사(死)!”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고덕의 잔인함에 눌린 행수 중 하나가 무릎을 꿇었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 죽여주십시오. 죽여… 크헉.”

뒤통수가 터져 나가며 엎어진 행수를 바라보며 손을 거둔 고덕이 말했다.

“죽여 달라면 죽여준다.”

그러며 훑는 서늘한 눈빛에 행수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바닥에 엎드렸다.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총관에게 연줄을 대고 있다고 느껴졌던 행수들은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았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고덕의 손이 움직이자, 엎드려 용서를 빌던 이들의 목이 일거에 날아갔다.

“처, 처숙부님…….”

놀란 여곤의 부름에 고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두어봐야 고름이 될 뿐이다. 이런 일은 외인에게 맡기는 게 옳아.”

차가운 음성을 토한 고덕의 시선이 닿자 여상만이 화들짝 놀라 목을 움츠렸다.

“대신 저놈은 네게 넘겨주지. 어줍지 않은 자비로 살려 주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고덕의 말에 여곤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은 탓이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목려송의 표정이 어리둥절했다.

저리 독한 사람이 왜 총관을 살려 두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눈길을 느낀 것일까. 돌아선 고덕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고 보면 알아.”

그 말에 목려송은 총관을 놓아 보낸 것에 무언가 노림수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목려송의 시선을 받으며 물러나는 고덕의 뒤에서 여곤이 남아 있는 행수들에게 상황을 수습하도록 명령하는 음성이 들렸다.

* * *

고덕의 개입으로 복주상단의 문제는 일소되었다.

외부의 끄나풀인 총관은 축출되었고, 그와 함께 부화뇌동한 여상만과 행수들은 사로잡히거나 모두가 죽었다.

목려송의 도움을 받은 한도회의 고수들 덕에 상단의 무사들과 충돌하는 일 없이 상단의 안전도 확보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흑상회에서 인질들을 빼내오고, 그들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뿐이었다.

“초, 총관을 살려 보냈단 말씀이십니까?”

상단의 일을 대충 정리하고 돌아온 여곤은 총관을 살려 보냈다는 고덕의 말에 기겁을 했다.

“그래.”

“왜, 왜입니까? 그가 살아나가면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그리 장담하십니까?”

여곤의 물음에 고덕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내가 끼어든 이상 그들은 아이들에게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고덕의 말에 여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은 그냥 그렇다고만 알고 있으면 돼. 그럼 난 민후에 좀 다녀오지.”

“흑상회에 가시는 겁니까?”

“그래. 아이들도 데려오고 겸사겸사. 하니, 넌 상단이나 잘 지키고 있으면 돼.”

그 말만을 남겨 둔 고덕은 목려송을 대동하곤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 이게 무슨…….”

눈앞에서 사람 둘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괴사를 목격한 탓에 정신이 없는 여곤에게 고칠이 위안을 건넸다.

“언사와는 달리 생각이 깊으신 분이시오. 그러니 무언가 생각이 있으셨을 거요. 잠시 참고 기다립시다, 매형.”

고칠의 말에 여곤은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으로서는 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복주상단에서 나온 고덕은 민후의 흑상회로 향했다.

고덕과 목려송 둘 다 고절한 무공 고수인 탓인지 복주에서 민후까진 금방이었다.

소리 소문 없이 흑상회로 스며든 고덕은 두말없이 흑면 팔호라던 마천랑의 처소로 향했다.

“이미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흐트러진 서류들과 뒤엉킨 서책들의 모습들이 이 방의 주인이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는 것을 확연히 보여 주고 있었다.

아마도 복주상단에서 모습을 감춘 총관을 만나 도피했을 것이었다.

“그렇군. 서둘렀어.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서두른 게 우리에게 득이 되는 겁니까?”

“서둘렀다는 건 다른 일에 신경 쓸 여력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이니까.”

“하면, 차라리 총관을 복주상단에서 베어버리는 것이 나았던 게 아닙니까?”

목려송의 물음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왜? 그가 죽으면 이자에게 연통을 전할 수 없을 것이라?”

“그렇지 않겠습니까?”

“글쎄, 내가 엿들은 대로라면 이들은 한통속이면서도 서로 경쟁 상태에 있는 것 같더군. 그런 이들이 자신의 임무에 영향을 줄 이 근처에 다른 정보통을 심어놓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나?”

“하면……?”

“총관의 목이 날아간 순간, 여기에 있던 놈은 행동을 개시했을 거야. 아마도 우리가 되찾아야 할 인질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도주했을걸.”

상대는 적어도 그럴 만한 여유는 있을 것이라 판단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럼 총관이 살아 왔을 때는 다른 것입니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목려송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지. 여기에 있던 놈은 총관이 살아 있는 동안은 변고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다가 총관이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전한다면 어떨 것 같나?”

“당황하겠죠.”

“그렇지. 당황할 걸세. 하지만 그뿐일까? 머리가 있는 놈이라면 하나를 더 생각할 수 있을 걸세.”

“무엇을 말입니까?”

“총관을 왜 놓아주었을까? 절대로 살아오지 못할 상황인데도 총관을 살려 보냈어. 왜일까?”

고덕의 물음에 한참을 생각하던 목려송이 물었다.

“혹시 추적을…….”

“그래. 머리가 돌아간다면 제일 먼저 그것을 떠올렸을 거야. 그렇다면 시간이 없겠지. 금방이라도 추적자가 들이닥칠 테니까.”

그 말을 남긴 고덕은 방을 나가 자연스럽게 걸었다.

그가 워낙 자연스러운 탓이었을까. 흑상회의 누구도 그렇게 걸어가는 고덕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없었다.

그에 고개를 저으며 목려송이 따라붙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우리 인질 찾으러.”

잠시 후, 심각한 표정의 여수겸과 여충 형제를 만난 고덕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봐. 살아 있잖아.”

고덕의 말에 목려송은 눈앞의 청년들이 여곤의 자식들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딜 가냐는 흑상회 간부의 고함을 무시한 고덕은 그 두 형제들을 데리고 지하 뇌옥으로 향했다.

뇌옥에서 고덕을 마주한 옥주 허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

“알 것 없으니 팔 번 방의 사람이나 내놔.”

상대의 말에 허목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누구냐니까!”

허목의 고함에 고덕의 시선이 목려송에게 향했다.

그 시선에 마지못한 듯 앞으로 나선 목려송이 답했다.

“나 목려송일세.”

“목려송? 목려송이 누구… 어버버, 누, 누구시라고요?”

“목려송일세.”

“헉! 으, 음양마!”

기겁을 하는 허목에게 목려송이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람들이 그리 부르지.”

재빨리 목려송의 외관을 살핀 허목의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

“흑도 말학 허목이 음양마 대협을 뵈옵니다.”

음양마를 앞에 두었다면 무조건 길 수밖에 없다. 고개를 들고 따져 물었다간 목이 어깨 위에 얌전히 놓여 있지 않을 터였기 때문이다.

그런 허목에게 목려송이 말했다.

“대협이 말씀하신 팔 번 뇌옥의 사람들을 데려오게.”

천하의 음양마가 대협이라 부르는 이가 있다는 것에 흠칫했지만, 고개를 들어 상대를 다시 확인하는 따위의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자리에서 일어서는 허목에게 고덕의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왜, 직접 하려고? 그냥 애들 시키지.”

허튼짓하지 말라는 위협에 여전히 머리를 숙이고 있던 허목이 그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접었다.

“그, 그리하겠습니다.”

허목의 명을 받은 수하가 잠시 후, 노파 하나와 젊은 부부와 갓난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들을 확인한 고덕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간다만, 우연이라도 다시 만나게 되는 일 따위가 생긴다면 모가지를 예쁘게 비틀어줄 것이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완전히 허리를 접는 허목을 남겨 둔 고덕은 사람들을 데리고 지하 뇌옥을 벗어났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사람들의 뒤에서 허목은 여전히 허리를 접고 있었을 뿐, 외부인이 침입했다는 둥 소란을 떨지 않았다.

그로서는 음양마 목려송이나 그가 대협이라 부르는 이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흑상회에서 물러나온 고덕에게 목려송이 물었다.

“저런 놈들을 남겨 둘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조금 두고 볼 일이 생겨서 그래.”

“예? 두고 볼 일이요?”

“그래, 두고 살펴볼 일이…….”

고덕의 말에 목려송은 의문스런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 * *

복건의 북부에 위치한 고전의 한 야산 자락에 자리 잡은 관제묘에서 흑면조장이 흑면 팔호와 청면 사호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검마의 출현에 모든 걸 내팽개치고 도망 왔다?”

조금은 싸늘한 흑면조장의 물음에 청면 사호가 고개를 조아렸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개입한 이상 상황을 알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가 개입한 줄 몰랐단 말인가?”

“몰랐습니다. 혹시 흑면조장께서는 알고 계셨습니까?”

청면 사호의 물음에 흑면조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허, 이거야 원,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청면조는 모두 검마와 마주친 적이 있는 줄 아는데 아니었나?”

“검마와 마주치다니요? 그런 일 없었습니다.”

딱 잘라 답하는 청면 사호의 음성에 흑면조장이 고개를 저었다.

“청면조장이 죽던 날, 그가 누구와 부딪쳤는지 보지 못했단 말인가?”

“보지 못했습니다. 조장, 아니 청면조장의 명이 떨어지는 순간 우린 모두 밖으로 내달린 탓에……. 혹시 그럼 그때 검마가……?”

“그래, 검마가 청면조장과 부딪쳤다. 바로 그때.”

서로 간에 경쟁 상태다 보니 정보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한 탓이다.

더구나 청면조원들과 특별한 관계에 있던 봉공마저 청면조의 생존자들이 무분별한 복수에 나설까 걱정하여 그 정보를 숨긴 까닭이기도 했다.

“그럴 수가…….”

넋이 나간 청면 사호에게서 시선을 돌린 흑면조장이 흑면 팔호를 바라보았다.

“흔적을 지우긴 했나?”

“예.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에겐 추적꾼이 있어. 알잖아.”

“추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놈.”

“뒤를 밟히지 않도록 신경 썼습니다. 아무리 추귀라 해도 쫓지 못할 것입니다.”

흑면 팔호의 장담에 흑면조장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확실한 건가?”

“제 목을 걸겠습니다.”

“흠… 그렇다면… 좋아, 믿지. 한데 흑상회의 일은 어디까지 진행되었지?”

“거의 완료 단계였습니다.”

“팔호가 없다면 무산되겠나?”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손을 뗀다고 해도 흑상회는 계획대로 움직일 것입니다.”

흑면 팔호의 답에 청면 사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계획이 성공하려면 복주상단의 절강 지점들이 필요한데, 지금 상태라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오?”

청면 사호의 말에 흑면 팔호가 고개를 저었다.

“복주상단과는 상관없이 계획이 실행될 것이오.”

“그, 그것이 무슨 소리요?”

청면 사호의 의문에 흑면조장이 설명에 나섰다.

“사실 복주상단의 절강 지점들은 미끼였다. 일이 시작된 후 남궁세가의 압박을 돌릴 미끼.”

“하면……?”

“그래. 실제 일을 펼치는 곳은 따로 있다. 바로 흑상회가 비밀리에 장악한 절강성 내의 비밀 점포들이 그 일의 중심에 설 예정이다.”

흑면조장의 말에 이어 흑면 팔호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 비밀 점포들이 곧 우리의 계획에 맞춰 일을 벌이게 될 것이오. 물론 흑상회는 그저 절강성의 상계를 잠식하는 것으로 알고 있겠지만.”

흑면 팔호의 말에 청면 사호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흑면조장이 명을 내렸다.

“흔적을 지웠다면 그들의 추적은 끊겼다고 생각한다. 다시 복면을 쓰고 일을 뒤에서 조종하라. 이 일이 성공해야만 청성과 단리세가 사이의 분란이 깊어진다.”

“명을 받습니다.”

두 수하의 복명을 바라보는 흑면조장의 시선에 작은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야망을 향한 붉은 불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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