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장 (19/129)

제18장. 안면몰수(顔面沒收)-얼굴에 철판 깔기

복주로부터 반나절 거리에 민후라는 도시가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복건성의 성도인 복주의 배후 도시로, 수많은 창고와 상업 시설들이 들어선 이 도시의 물동량은 오히려 복주를 압도할 정도였다.

그 민후의 중심으로 복면인이 스며들었다.

‘흑상회?’

건물의 현판에 쓰인 이름을 읽은 고덕의 신형이 복면인을 놓칠세라 곧바로 사라졌다.

흑상회의 외당에 위치한 한 건물로 복면인이 찾아들었다.

느닷없이 복면인이 솟아올랐지만, 방 안에 앉아 있던 사내는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다시 오신 게요?”

“우리 계획의 인질들에 대한 인계 때문이오.”

“인질들이라면 누굴 말하는 게요? 뇌옥에 가둬둔 노파와 가족들이요, 아니면 비밀 임무를 띠고 파견 나왔다고 믿고 있는 복주상단의 어수룩한 두 청년을 말하는 것이오?”

“둘 다요.”

“그 둘 다를 맡아달란 말이오?”

“우리의 계획에는 모두 중요한 인질들이오.”

청면 일호의 말에 사내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쪽의 계획이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아시고 있으리라 믿소.”

“흑면 팔호가 맡은 임무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소.”

“한데도 그런 혹들을 붙여 줄 생각이란 말이오?”

“그들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복주상단에 펼쳐 놓은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이오. 아니, 어쩌면 계획 자체가 어그러질지도 모르오.”

“흠… 그건 좋지 않군.”

침음을 흘리는 사내, 흑면 팔호에게 청면 일호가 설득을 이었다.

“그렇소. 그 계획이 어그러지면 흑면조의 계획에도 치명적인 일이 될 것이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어떻게 맡아주면 되는 거요?”

“뇌옥에 가둬둔 이들은 계속해서 감시를 해주시오. 지금처럼 다른 이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 죽여서도 아니 되오.”

“그야 뇌옥의 간수들에게 돈을 조금 먹여 두면 어려운 일은 아니니……. 복주상단의 두 청년은 어찌하면 되겠소?”

“그들도 마찬가지로 지금같이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게 두면 되오.”

“내 알기로 중간 중간 엉터리 밀명을 내리는 것으로 아는데, 맞소?”

“맞소. 복주상단의 명인 것같이 꾸며 밀명을 내리고 있소.”

“하면, 그 짓을 나도 계속해야 한단 말이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오.”

청면 일호의 말에 흑면 팔호의 인상이 구겨졌다.

“난 그렇게 시선을 분산시킬 만큼 한가하지 않소. 차라리 그들도 뇌옥에 가둬두면 어떻겠소?”

“그렇게 되면 저쪽에서 그들의 안위를 확인할 방법이 사라지게 되어서 아니 되오.”

“꼭 그들이 안위를 확인할 수 있도록 관리해야만 하는 것이오?”

“그래야 우리의 계획대로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오.”

“차라리 청면조에서 인원을 한 명 이쪽으로 파견하면 아니 되는 것이오?”

“흑면조장님의 요구로 청면조의 여유 인원들은 모조리 청성으로 투입하게 되었소. 지금으로선 흑면 팔호 외에는 이 일을 맡아줄 사람이 없소.”

흑면조장이 거론된 탓인지 계속 이유를 들어 거부해오던 흑면 팔호는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한데, 그들의 관리에 문제가 생길 경우엔 어찌하면 되겠소?”

“복주상단의 일이 마무리되기 전에 그들의 관리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복주상단의 일이 틀어졌음을 뜻하오. 그땐 모두 제거하고 흔적을 지운 뒤, 복주상단에 있는 청면 사호에게 연통을 주시오. 그러면 그는 우리의 연관성을 지우고 빠져나오게 될 것이오.”

“무슨 일이 있어도 문제가 생기진 말아야 한다는 뜻이구려.”

“그렇소. 이번 일에 우리 청면조의 계획은 물론이고 흑면조가 세운 계획의 성패도 달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라겠소.”

“이건 완전히 협박이로군.”

“협박이라고 해도 좋소. 절대로 실패하면 안 되니까.”

청면 일호의 말에 흑면 팔호가 인상을 구겼다.

“알겠소.”

“참, 청면 사호와의 연락선을 구성해주시오. 그쪽의 연통이 이쪽으로도 속히 전달될 수 있도록 말이오.”

“나를 드러내란 말이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으르렁대는 흑면 팔호에게 청면 일호가 고개를 저었다.

“신분을 숨기는 것은 그대의 역량. 신분을 드러내란 말은 하지 않았소.”

“끄응… 알겠소. 그리하리다.”

“그럼 부탁하오.”

그 말만을 남겨 둔 청면 일호는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흑상회를 빠져나가는 청면 일호의 뒤엔 그림자가 붙지 않았다.

고덕으로서는 상대의 비밀을 캐는 것보다는 당장 조카 손자들의 안위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 * *

밤을 꼬박 새운 고덕은 느긋하게 일어나 세면을 하고 움직이는 목표를 따라 그늘 속을 이동했다.

아침 일찍부터 흑상회의 심처 으슥한 곳을 찾은 흑면 팔호는 사방에 창 하나 만들어지지 않은 건물로 들어갔다.

그런 그의 그림자가 조금 더 길어져 보였다.

“마 각주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뇌옥을 담당하는 허목이 흑면 팔호, 마천랑을 맞았다.

“마침 허 옥주께서 계셨구려.”

상회에 웬 뇌옥인가 하겠지만, 이 시설도 흑상회의 입장에선 꽤 큰 수익을 남겨 주는 사업 중 하나였다.

“나야 이곳이 집과 마찬가지니 이곳에 있는 것이 당연하오만, 마 각주께선 이쪽으론 걸음도 하지 않던 분이 어쩐 일이시오?”

“실은 내 수익과 상관없이 가둬둔 사람들이 있었다오.”

마천랑의 말에 허목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마 각주가 사람을 가두었다?”

“그렇소. 내게 원한을 산 이의 가족이오.”

“어허, 그런… 누구요?”

“저기 팔 번 방에 있는 이들이오.”

“팔 번, 팔 번이면 가만 있자… 아! 노파 하나와 젊은 부부와 갓난 아이 말이오?”

“맞소.”

“허허, 마 각주는 성정이 무른 줄 알았더니 갓난아이까지……. 내 마 각주를 다시 보게 되었소이다.”

“그만큼 내 원한이 깊기 때문이오. 해서지만, 난 그들이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소.”

그 말과 함께 전낭을 찔러주는 마천랑을 일별한 허목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우리 일이 그런 이들을 가둬주고 돈을 받는 것이 아니겠소. 한식구인데 그걸 못해줄 리는 없겠지요.”

“죽지 않게… 부탁드리겠소.”

슬쩍 마천랑이 찔러준 전낭의 무게를 가늠한 허목이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그런 일이 우리 전공 아니겠소.”

“그럼 부탁하오.”

허목에게 포권을 취해 보인 마천랑이 뇌옥을 벗어나는 동안, 그의 그림자의 얼굴이 실제와 달리 팔 번 뇌옥을 향해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뇌옥에서 나온 마천랑은 걸음을 서둘러 상회 식구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식당에 들러 아침을 해결하곤 느긋한 걸음으로 표방(?房)으로 향했다.

표방은 표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일반적인 표국들이 물건이나 서찰을 옮겨 준다면, 흑상회의 표방은 사람을 옮겨 준다.

물론 운송 목적물이 되는 사람들은 납치 등 불법적인 경로로 확보한 이들이다.

표방에 도착한 마천랑은 빠르게 표사들을 훑어보다 한 청년에게 다가섰다.

“흑마는 점이 없다.”

마천랑의 말에 흠칫한 청년이 조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백마는 검은 점이 있소.”

“틀렸네. 백마는 하얀 점이 있는 것이라네.”

“마 각주님께서도 저희 쪽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다 은밀성을 위한 은신이었으니 각별히 신경 썼을 뿐이네.”

“다행입니다. 마 각주님 같은 분들이 계셔서.”

“아닐세. 수겸 자네와 동생 충이 고생하고 있다고 들었네.”

“고생은요. 그저 이런 불한당 같은 놈들을 두고 보아야 하니 답답할 뿐이지요.”

“그렇겠지. 그나저나 이곳의 자금 흐름을 파악했나?”

마천랑의 물음에 여수겸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아직도인가?”

“워낙에 그쪽으론 접근할 수가 없어서…….”

“그렇겠지. 자금의 흐름이 파악되면 그 원흉이 밝혀지는 일. 이들이 허수롭게 간수할 리 없지.”

“급한 겁니까?”

“급하지 않은 일은 없지. 하지만 안전이 제일 중요한 일일세. 괜히 무리하다 발각되면 자네 형제뿐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안위까지 위험해지니, 천천히 안전하게 진행하게.”

“그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여수겸의 답에 마천랑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참, 집이나 다른 이들과 접촉한 것은 아니겠지?”

“비밀 유지를 위해 참아왔습니다.”

“잘했네. 감시의 눈초리가 사방에 깔려 있네.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것조차도 안심하기 어렵지. 각별히 유념하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임무가 해제되기 전까진 부모님과도 접촉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하이. 특히 부모님의 서신을 가장한 저들의 속임수에 속지 말게. 혹여 그런 일이 벌어지거든 내게 찾아오고.”

“알겠습니다. 한데, 부모님은 건강히 잘 계신 겁니까?”

“두 분 다 편안하시네.”

“아버님이 추진하시던 절강성의 일이 어렵다는 풍문을 들은 지가 석 달 전입니다만…….”

“다 잘되었으니 걱정하지 말게.”

“정말입니까?”

“그래. 그러니 자네들은 자네들의 임무에만 전념하면 되는 것일세.”

“명심하겠습니다.”

여수겸의 답에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돌아가는 마천랑의 그림자가 짧아지고, 남겨진 여수겸의 그림자가 길어진 것을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 * *

그날 밤, 일을 끝내고 자신들의 숙소로 들어간 여수겸과 여충의 눈앞으로 그림자가 일어서는 괴사가 벌어졌다.

“누, 누구요?”

놀라고 당황한 여수겸의 물음에 천천히 사람의 형상을 갖춘 고덕이 피식 웃어 보였다.

“놀라긴. 그나저나 무사하니 다행이다.”

“누, 누구시오?”

“네놈들 작은 외할아비지 누구긴.”

자신들 또래로밖에 안 보이는 이가 하는 말에 두 형제의 얼굴에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뭐, 외모가 조금 어려 보이긴 하다만 다 연유가 있는 것이니 넘어가자꾸나. 자, 여기 이게 내 신분을 증명할 것이라고 네 아비가 말하더라.”

고덕이 던져 준 노리개를 받아든 수겸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건!”

“네 부모의 자기혼식(磁器婚式)에 네들이 선물했던 노리개라더라만.”

“마, 맞습니다.”

물건은 맞아도 그걸 가져온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두 형제의 표정에 고덕이 한숨을 쉬었다.

“이거야 참… 일단 쉬운 것부터 가자꾸나. 일단 네들이 받는 밀명은 거짓이다.”

여전히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은 두 형제를 바라보던 고덕이 자리에 앉았다.

“이거 참, 뭐라 설명해야 알아들을까. 일단 네들 아비가 소상단주에서 밀려난 것은 아느냐?”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왜 마 각주인지 뭔지가 편안하다고 한 말을 믿는 게냐?”

“어, 어찌 그것을…….”

비밀 임무를 맡은 이들로는 빵점짜리였다.

“도대체 누가 니들보고 비밀 임무를 수행하라 하겠냐. 그렇게 표정에 다 나타나는데 말이야.”

고덕의 말에 두 형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스스로도 자신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잣거리에 나가 조금만 알아보거라. 복주상단의 소상단주가 여곤이 아니라 여상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드물더라.”

“여상만… 그럼 숙조부가 자리를 차지했단 말씀입니까?”

“그래. 절강성의 실패를 문책 삼아 소상단주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들었다. 네 아비는 너희의 안전을 걱정해 저항다운 저항은 해보지도 못하고 자리를 빼앗겼고 말이다.”

“그, 그럴 리가…….”

“금방 드러날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 날이 밝거든 알아보거라.”

“그, 그럴 것입니다. 한데, 우리를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말 속에 경계의 감정이 깊다. 아직도 믿지 않는 것이다.

“에효~ 하긴 그러니 지금까지 이러고 있는 것이겠지. 네 아비에게 너희는 저들의 손에 쥐어진 인질이다. 무슨 말인 줄 알겠느냐?”

고덕의 말에 두 형제의 표정에 변화가 나타났다.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인질인 줄 아신단 말씀입니까?”

여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여충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탓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얻어맞고 있는 실정이다. 해서 너희를 빼내가려고 왔다.”

“하, 하지만 어찌 믿고 간단 말입니까?”

“멍청한 것들, 내가 너희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이러고 있을 시간에 벌써 목을 베어버렸을 게야.”

그 말에 후다닥 뒤로 물러나는 두 형제를 바라보며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겁은 많아서는…….”

“그, 그러면 일단 우리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래야겠다. 힘으로 끌고 가면 못 갈 것도 없겠다만, 너희만 빼내간다고 일이 마무리되는 게 아님을 알았으니 그리할 수도 없게 되었구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이 생각 외로 복잡하단 말이다. 마 각주인지 뭔지 하는 놈하고 푸른 복면을 뒤집어쓴 자식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일이 간단치가 않다. 남궁세가만 연관이 없었다면 신경 쓸 일도 아니건만…….”

그랬다. 아직 남궁태란 애송이를 사모한다는 조카 손녀, 나아랑의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한 고덕으로서는 남궁세가에 변고가 생기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남궁세가에 변고가 생긴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그 일들이 너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단 말이다.”

“저, 정말이십니까?”

“자꾸 말 시키지 말고 내일 해가 뜨기 무섭게 알아보고 나중에 대화를 나누자꾸나. 멍청하게 일어나자마자 마 각주란 놈에게 달려가지나 말고.”

“그, 그러진 않겠습니다. 일단 아버님의 일부터 확인한 연후에 결정할 것입니다.”

“그래. 그 부분부터 확인하고 일을 벌여도 벌여. 네 녀석들 행동 하나하나에 네 자신들은 물론이고 부모의 안위가 달렸다는 것을 유념하고.”

“아, 알겠습니다.”

미덥지 못했지만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었던 고덕은 그 말을 남기곤 연기처럼 사라졌다.

* * *

흑상회를 빠져나온 고덕의 신형은 바람이 되어 복주상단으로 돌아갔다.

아직 밤이슬이 거두어지지 않은 시간에 복주상단에 도착한 고덕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모여 있던 고칠과 여곤의 앞에 솟아올랐다.

“어, 어디를 다녀오시는 겝니까?”

여곤의 물음에 고덕이 자리에 주저앉으며 답했다.

“자네 아들들을 보고 오는 길일세.”

“수, 수겸이와 충이를 말씀입니까?”

“그래. 민후의 흑상회라는 곳에 있더군.”

“마, 맞습니다. 정말 다녀오셨군요.”

놀라는 여곤에게 고덕이 물었다.

“왜 아이들이 그곳에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상대에겐 강호십대고수인 음양괴가 있으니까요.”

“내가 음양괴에게 당하기라도 할까 봐서?”

“천하의 음양괴입니다. 처숙부께서 위험에 처하는 것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괜히 고생만 했어. 진작 알려 주었다면 일이 쉬웠을 게 아닌가?”

“다행히 음양괴와 마주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만, 그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곤의 걱정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음양괴라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냥 그렇게만 알게.”

너무나 추상적인 고덕의 말에 여곤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의 안위가 달린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은 말씀을 청합니다.”

짜증스러운 관심이긴 하지만 여곤으로서는 자식의 안위가 걸린 일임에 고덕은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냥 나와 작은 인연이 있었네. 그 인연을 빌었을 뿐이네. 음양괴는 더 이상 관여치 않을 걸세.”

“처숙부께서 음양괴와 인연이 있었단 말씀입니까?”

백도의 공적으로 선포된 음양괴였다.

그와 인연이 있다는 고덕의 말에 여곤은 물론이고 고칠의 표정도 불신으로 가득했다.

“속고만 살았나? 웬 의심들이 그리 많아.”

고덕의 불퉁거림에 여곤이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하오나 그런 이와 연이 있다 하시니 당황스러워서…….”

“피치 못할 인연이었으니 깊게 파고들지 말게.”

“하면, 정말 음양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래.”

고덕의 확답에 여곤의 표정이 조금은 살아났다.

고덕이 굳이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으니 그 말을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일이 쉬워질 것입니다. 일단 사람들을 동원해 아이들을 빼오고, 소상단주에 앉아 있는 숙부의 독단을 행수 회의를 통해 막아내면 됩니다.”

“아니, 그렇게 쉽지 않아. 그리고 행수 회의를 전폭적으로 믿을 수도 없는 듯하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총관이라는 자가 다른 이와 내통을 하더군.”

“아 총관이 말씀입니까?”

당황하는 여곤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들끼리는 청면 사호라 불리던데, 아마도 고의적인 침투 같았네.”

“설마… 아 총관은 우리 복주상단에서 십 년을 지내온 인사입니다. 더구나 숙부에겐 수족과 같은 사람이구요.”

“그러니 무서운 것이겠지. 그 십 년간 다져 왔을 인맥이 가볍지 않을 것이 아닌가?”

고덕의 말을 들은 여곤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총관의 장악력이 지나치게 높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말씀을 듣기 전엔 그저 능력이 출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행수들의 대부분도 그의 손아귀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자네 숙부의 일이 그리 쉽게 처리된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고.”

“하긴 저도 놀랐습니다. 상단주이신 아버님이 병석에 계신데, 제게 있던 소상단주의 자리를 행수 회의의 의결로 박탈했으니까요.”

“그러니 행수 회의를 통한 정상적 복권은 어렵다고 볼 밖에. 일단 자네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이들을 추려 보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관 행수와 도 행수가 있습니다만, 둘 다 너무 고령인지라…….”

“고령이라면 그간 쌓아온 인덕도 무시하지 못할 걸세. 일단 확보해. 그리고 다수의 무사가 필요한데.”

고덕의 말에 고칠이 나섰다.

“그건 제가 맡아보겠습니다.”

“자네가?”

“예. 다행히 이곳 복주엔 저희 한도회의 분타가 있습니다.”

“얼마나 동원할 수 있겠나?”

“분타주와 상의해봐야겠지만, 분타의 무사들이 일백 정도이니 그 반수는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오십이라……. 아쉬운 대로 어찌 되겠군. 그럼 칠이는 무사들을 이끌고 내일 진시(辰時:오전 7~9시) 말에 복주상단으로 진입하거라.”

“그리되면 경비 무사들과 충돌할 것입니다.”

여곤의 걱정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경비 무사들은 움직이지 않을 거야.”

“어찌……?”

“내가 움직이는 사람이 경비 무사들을 묶어둘 테니까.”

알 수 없는 고덕의 말에 여곤은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고칠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시간을 잘 지켜야 할 거야. 경비 무사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잠시뿐이니까. 그 전에 진입해서 그들을 제압해야 한다. 잊지 마.”

“알겠습니다, 숙부님.”

고칠의 답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거라.”

“예, 그럼…….”

고칠이 나가자 고덕의 시선이 남아 있던 여곤에게 향했다.

“자네는 내일 진시 중반 이전에 그 두 늙은 행수들과 함께 행수 회의를 소집해놓아야 해. 반드시 모든 행수들이 회의장에 모여 있어야 한다 그 말이야.”

“그건 가능하겠습니다만…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나머진 맡겨 둬. 자네가 알아봐야 걱정만 늘어날 테니까.”

그 말에 더욱 걱정이 깊어지는 여곤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자네도 속히 움직이게.”

고덕의 재촉에 여곤도 할 수 없이 방을 나섰다.

모두가 움직이자 고덕도 홀연히 방 안에서 사라졌다.

* * *

접객원에서 모습을 감춘 고덕이 찾아든 곳은 목려송의 거처였다.

“이 야밤에 어쩐 일이십니까?”

인기척에 눈을 뜬 목려송은 익숙한 기파에 고개부터 숙였다.

“내 부탁이 있어 왔네.”

“대협께서 제게 말씀이십니까?”

“그래. 들어주겠는가?”

“대협의 명을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따르지 않겠다고 하면 대번에 칼이 날아올 인사다. 그것을 아는 목려송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이곳의 경비 무사들을 맡고 있는 것 같은데, 맞는가?”

“맡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우나 제어는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되었네. 오늘 진시 초에 그들을 한곳으로 모아주게.”

“이유는… 말씀해주지 않으시겠지요?”

“그냥 필요해서일세.”

“혹여 흑상회의 일에 누가 되는 것입니까?”

“아마도.”

고덕의 답에 목려송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대협, 제가 왜 상인들의 일에 관여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네.”

“그런데도 그 일을 하셔야 하십니까?”

“내 조카 손자들의 안위가 달린 일이니 모른 척할 수 없네.”

고덕의 답에 목려송의 안색이 변했다. 사안의 무게에서 밀린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졸라봐야 날아올 것은 칼밖에 없다는 생각에 목려송의 고개가 꺾였다.

“알겠습니다.”

풀이 죽은 목려송의 음성에 고덕이 말했다.

“훼방을 놓았으니 그 영약, 내가 구해주지.”

고덕의 말에 목려송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상인보다는 백배, 천배 확실성이 높은 인사의 말이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대신 바로는 안 돼. 시일이 조금은 걸려. 어쩌면 일이 년은 족히.”

“이렇게 삼십 년을 살았습니다. 구해주시기만 한다면 일이 년이 대수겠습니까?”

“그럼 그동안 내 일 좀 도와.”

“저,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일을 도우라는 말은 자신을 그동안 책임지겠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헛소리하는 거 들어본 적 있어?”

“그, 그야 없습니다. 하지만 교주께서…….”

“그 양반하고 갈라섰어. 그러니 신경 쓸 거 없고.”

“가, 갈라서다니요? 설마 내분입니까?”

“내분은 무슨. 그냥 내가 천마신교에서 나왔을 뿐이야.”

“마교, 아니 천마신교를 탈퇴하셨단 말씀입니까?”

놀라서 눈이 화등잔만 해진 목려송에게 고덕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아주 깨끗하게 갈라섰지.”

자신이 키우고 가르친 이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모두 베어버렸으니…….

“하, 하면 영약은 어디서……?”

“왜, 내가 못 구할 것 같아?”

“그, 그건 아닙니다만…….”

“내가 훔쳐 내든지 아니면 강탈을 해서라도 구해주겠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고덕의 확답에 목려송의 얼굴에 어린 걱정이 사라졌다.

믿지 못할 것투성이인 강호이긴 해도 천하오존의 확답을 믿지 못한다면 강호인이라 부를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좋아. 그럼 내가 시킨 대로 해두게. 나중에 찾아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목려송을 일별한 고덕이 또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목려송이 중얼거렸다.

“그럼 흑상회와는 어쩌지… 역시 안면몰수뿐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