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노우지독지애(老牛?牘之愛)-핥아 보살피는 사랑이 부모의 사랑이다
한편, 여곤의 안내로 접객원으로 들어선 고덕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고연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형수가 젊었을 때를 빼다 박았구나.”
고덕의 말에 고연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도 그리 말씀하실 때가 많았습니다. 어찌… 두 분 모두 건강하신지요?”
“그래, 너무 건강해서 탈이지. 두 양반이 다 네 안부를 걱정하고 계신단다. 생일이 근처라 미역국은 먹는지도 걱정이었지.”
그 말에 눈물을 글썽인 고연이 고개를 숙였다.
“참, 어머니, 아버지도…….”
“어찌, 생일은 지난 게냐?”
고덕의 물음에 고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틀 후인걸요.”
고연의 답에 힐난의 의미를 담은 고덕의 시선이 멀뚱히 서 있는 고칠에게 향했다.
그 시선에 고칠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어! 누나 생일이 열하루가 아니었소?”
“열하루는 진이 생일이지. 너는 아직도 그게 헷갈리니?”
“그랬나?”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고칠을 잠시 못 미덥게 바라보던 고덕이 시선을 돌렸다.
“그래, 아직 지나지 않았다니 다행이로구나. 여기, 이건 네 어머니가 보낸 것이고 이건 네 아버지가 보낸 것이다.”
“어머, 미역이네요.”
“그래. 네 아버지가 새벽같이 나가 좋은 걸로 사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무병 부적은 네 어머니가 용하다는 도사를 찾아 써온 게지. 내 참,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아무리 말려도 들어야 말이지.”
고덕의 말에 미소를 지은 고연이 부적을 소중히 갈무리하고 미역을 챙겼다.
마치 부모의 손길이 닿은 듯 포근한 느낌에 고연의 표정엔 오랜만에 미소가 어렸다.
“오신 김에 생일상 같이 받고 가실 거죠?”
고연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잘 생각하셨어요. 제가 맛난 것들로 대접해 올릴게요.”
“어디, 우리 연이 덕에 입 좀 호강해보자꾸나.”
고덕의 넉살에 고연의 입가에 어린 웃음이 더 진해졌다.
저녁을 준비한다며 고연이 물러가자, 내려앉은 여곤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송구한 말씀이오나 내일 길을 나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생각지 못한 말에 고덕의 눈썹이 일어섰다.
해연하긴 고칠도 마찬가지. 의아한 표정인 그가 여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고칠의 물음에 여곤이 무안한 표정으로 답했다.
“실은 내 입장이 누굴 보호할 입장이 아니라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보호하다니요.”
“상단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네. 특히 내 손님들은 의문의 사고를 당하는 일이 잦아서…….”
“설마 누군가 고의로 손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렇게 되었네…….”
자조적인 여곤의 음성에 고칠이 고덕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고덕이 물었다.
“왜 날 봐?”
“손을 좀 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숙부.”
“난 상가의 일은 아무것도 몰라.”
“사람이 자꾸 사고를 당한다면 상가의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사돈께선 뭐하시고?”
사돈. 상단주를 이름이다.
“자리보전하신 지 꽤 되셨습니다. 요사인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깊어지시는 터라 가끔은 저도 못 알아보십니다.”
“사람을 못 알아본다? 올해 연세가 어찌 되시기에?”
“칠순이 삼 년 남으셨습니다.”
예순일곱이라면 노망이 들 수도 있는 나이이긴 했다.
“치매가 오신 겐가?”
“그게, 치매라 하기엔… 헛소리를 하신다거나 과거를 기억 못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람을 못 알아보시고 말도 잘 못하십니다.”
“혹시 풍이 오셨던가?”
“힘을 못 쓰시긴 하지만 풍을 맞으신 건 아닙니다.”
“그으래?”
냄새가 났다. 아무리 병세가 깊다 해도 그런 증세가 한꺼번에 나타날 수는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자신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은 여곤의 물음에 고덕이 물었다.
“내 한번 사돈을 뵐 수 있겠나?”
“어려운 건 아닙니다만, 의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의원의 허락을 받아?”
“예. 아버님의 상세가 심해 외인의 접견이 해가 된다는 말이 있어…….”
고덕의 시선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간혹 병자의 보호자들은 병자의 상세를 걱정하는 마음에 일반적이지 못한 상황을 놓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의 경우도 그러했다.
전염병이거나 방문자가 병자의 병세를 악화시키는 병이 아니라면 굳이 방문을 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라고 말할 순 없었다.
최소한 자신의 눈으로 환자의 상태를 확인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허락을 얻어보게.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네.”
“왜 그러시는 겁니까? 혹시……?”
“다른 말은 못하겠네. 섣불리 입 밖에 낼 일도 아니고.”
고덕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여곤이 고개를 저었다.
“혹시 중독을 의심하시는 거라면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 말씀드려야겠군요.”
“중독의 가능성이 없다?”
“예. 처음엔 저도 그걸 의심해서 근동의 다른 의원들을 초빙해보았습니다. 하나, 답은 항상 같았습니다.”
“그 의원들을 믿나?”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손을 쓰기엔 너무 넓은 영역에 걸쳐져 있었습니다.”
“수고스럽겠지만 하자면 못할 것도 없는 일이네. 자네의 일을 방해하는 자가 손을 쓰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나?”
“개중엔 아버님과 막역한 분도 계셨습니다.”
“때에 따라선 가족도 속일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네.”
그 말에 여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솔직히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아니, 분명 누군가의 손길이 걸쳐져 있겠지요.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이유가 뭔가?”
고덕의 물음에 여곤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그게, 수겸이와 충이가 저들의 손에 있습니다.”
“조카들이 말입니까?”
놀라는 고칠의 말에 여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었네. 맨 처음엔 생각도 못했으니까.”
자조적인 여곤의 표정을 바라보며 고덕이 물었다.
“저들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 보니 상대를 예상하는 모양이로구나.”
“숙부입니다.”
“숙부?”
“예. 지금은 소상단주가 되어 있지요.”
“내가 개입하면?”
고덕의 물음에 여곤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가능했다면 이미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늘어졌을 겁니다.”
제하이십사강과 동급인 초극의 극의로 소개된 고덕의 능력으로도 안 된다는 말에 고칠마저 놀란 표정이었다.
“설마 상대에게 강호십대고수라도 있단 말입니까?”
“실은 연이 있던 분을 한 분 초청했었네.”
“누구? 설마… 창군(槍君) 말씀입니까?”
창군 묵린.
팔대세가엔 끼지 못했으나 삼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북경 묵가의 대장로다.
경지는 초극의 극의, 세인들의 평가로는 제하이십사강의 상(上) 십 인의 일인으로 꼽히는 고수였다.
“참, 자네도 보았겠군.”
“그럼요. 결혼식에 그가 와 있어 얼마나 놀랐었는데요.”
“내 결혼을 도우셨던 철추도 강 대협을 의식한 아버님의 대비였네. 그분과는 작은 인연이 있으셨던 모양이고.”
“하면 이번에도 그에게 도움을 청했었단 말입니까?”
“그랬네. 우연히 근처에서 뵈었기에 도움을 청했었지.”
“한데, 그가 패한 겁니까?”
“글쎄, 뭐라 말을 하지 않으니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지만 매우 당황한 모습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네.”
창왕이 당황할 정도의 상대라면 강호십대고수가 분명했다.
“강호십대고수 중에서 이런 일에 나설 인사라면… 음양괴!”
음양괴(陰陽怪) 목려송.
천고의 마공인 음양혼원공(陰陽混元功)을 익힌 천외천의 고수였다.
음양혼원공을 익히는 과정에서 동남동녀 일백 인의 정혈을 갈취한 죄로 백도 공적으로 선포된 인물이었다.
그를 잡기 위해 정천맹이 동원했던 이백의 고수들을 만사평에서 전멸시킨 일화는 근 이십 년 이래 가장 큰 싸움으로 강호에 회자되기도 했다.
“확실하진 않으나 나도 그를 의심하고 있네.”
“아직 소속이 없는 인물이긴 하나 겨우 이만한 일에 그가 개입했을 리가…….”
말을 하다 뒤를 흐린 것은 당사자를 앞에 두고 복주상단의 크기를 작게 말한 탓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것 때문에 설마 설마 했네만, 요사이 그가 곤궁한 입장에 처했다는 말을 들은 연후엔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고덕의 표정에 이채가 어렸다.
‘그놈이 아직도 자리를 못 잡았나?’
꾀죄죄한 옷을 입고 제발 살려 달라고 매달리던 꼽추 노인을 고덕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살려 주자던 자신의 말에 교주는 금지된 마공을 익힌 탓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었다.
“일단 사돈이나 볼 수 있게 해주게. 다른 건 그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걸세.”
“꼭 그리하셔야 하겠습니까?”
“자식을 살리려고 부모를 죽음으로 내모는 자식이 있어선 안 되네.”
고덕의 말에 여곤의 표정이 검게 죽었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던 여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리를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겠네.”
자신의 답에 고개를 숙여 보인 여곤이 나가자 고덕은 눈을 감았다.
순간 그의 주변으로 아지랑이 같은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기파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고칠을 빗겨 나간 기파들이 복주상단 전체를 뒤덮어가고 있었다.
* * *
다른 날보다 일찍 자리에 들어 쉬고 있던 목려송은 무언가 자신의 기감을 간질이는 느낌에 눈을 떴다.
“뭐지, 이 불쾌한 느낌은…….”
짜증이나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답답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생소한 느낌에 목려송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순간이었다.
“오랜만이다, 영감.”
방 안의 그늘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음성에 당황한 목려송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누, 누구냐!”
“이런, 벌써 잊은 건가?”
천천히 그늘에서 벗어나 달빛 아래로 드러난 인물을 확인한 목려송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거, 검마!”
“이런이런, 누가 듣고 심장마비 걸리면 어쩌라고 그렇게 크게 말하는 게야.”
“요, 용서를…….”
바짝 웅크리는 목려송을 내려다보던 고덕이 물었다.
“아직도 그 꼴인 게야?”
“그, 그것이…….”
“영약 구하기가 그리 어렵던가?”
마음 편한 이야기다.
자신이 필요한 정도의 영약을 보유한 문파는 모두 자신과 동급 또는 이상의 고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훔쳐 내기도, 강탈하기도 쉬울 리 없었다.
그런 목려송의 불만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고덕이 이죽거렸다.
“뭐야, 설마 훔치거나 강탈할 생각만 한 게야?”
“그, 그럼 어찌합니까?”
“가서 사정을 했어야지. 자네가 그리된 이유를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면 될 일이 아닌가?”
“세상 어떤 문파가 공적으로 선포된 이를 돕겠다고 나서겠습니까?”
하긴 그 정도의 영약을 보유한 문파는 마교를 제외하면 모조리 백도에 몰려 있었다.
“그런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하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역시 영약?”
“이 일을 마무리 지어주면 영약을 구해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누가? 설마 이곳의 소상단주라는 놈인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은 이곳보다 컸습니다.”
천하의 목려송이 슬쩍 두려운 빛을 보이는 것을 놓치지 않은 고덕이 물었다.
“설마 파란색 복면을 쓴 새끼들을 말하는 건가?”
“어, 어떻게……. 설마 대협도 그들의 제의를 받은 겁니까?”
“제의? 설마 다른 놈들도 끌려 들어온 건가?”
고덕의 물음에 목려송이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아닙니까?”
“무슨 제의에 어떤 놈들이 끌려 들어온 건지나 지껄여 봐.”
“마, 말할 수 없습니다.”
“영약을 구해 등 쪽에 막힌 혈도를 뚫어 꼽추를 고치는 것도 네가 살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대, 대협.”
“말해!”
음파에 실린 날카로운 기세가 방 안을 휘저었다.
순식간에 칼에 베인 것같이 수십 조각으로 난자된 침상 휘장이 바닥에 뿌려졌다.
“대, 대협…….”
“난 두 번 묻는 걸 좋아하지 않아. 알지?”
고덕의 물음에 파랗게 질린 목려송이 전음으로 무언가를 떠들기 시작했다.
* * *
접객원으로 돌아온 고덕을 여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걱정으로 가득한 여곤의 물음에 고덕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잠시 바람 좀 쐬었다.”
“위험합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사돈을 뵙는 일은?”
“이쪽을 경계하지 않는지 허락이 내려왔습니다. 지금이라도 가능합니다.”
해가 저물어 어두워졌다고는 하나 아직 식사 전이었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라 생각한 고덕과 고칠이 일어서자 그들을 여곤이 안내했다.
여곤의 안내로 들어선 상단주의 침실은 진한 약 향으로 가득했다.
“약 향만으로도 사람을 잡겠군.”
그 말에 병자 곁에 서 있던 의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고덕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그런 의원을 밀치고 병자를 살폈다.
“제대로 썼군. 말풀을 이렇게 잘 쓰는 사람도 드문데, 실력이 좋은가 봐.”
고덕의 말에 의원의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가며 하얗게 질려 갔다.
그런 의원의 표정 변화를 바라보며 피식 웃어 보인 고덕이 병자의 혈도 몇 군데를 짚었다.
쿨럭-
곧바로 시커먼 피를 토해낸 병자의 안색이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이 냄새는…….”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여곤의 물음에 고덕이 병자가 토해낸 각혈을 가리켰다.
“썩은 피야. 말풀이 피를 썩게 만들거든.”
“그, 그럼!”
“그래. 피가 계속 썩는데 썩은 피를 밖으로 빼내지 않고 피를 맑게 만드는 약만 쓰고 있었어. 이 경우엔 죽어가는 속도가 느려지지. 밖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고.”
자신이 한쪽에 처방해놓은 약재를 손가락으로 문질러보며 답하는 고덕의 말에 의원은 실신 직전의 표정이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단박에 무릎은 꿇고 비는 의원을 바라보는 여곤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변했다.
주변의 촛대를 잡아 내려치려는 여곤을 가로막은 것은 예상외로 고덕이었다.
“이 의원도 별수 없었을걸. 아마도 가족이나 그만큼 소중한 사람들이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을 테니까.”
“그, 그렇습니다. 다 늙은 마누라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제 서른도 안 된 아들놈 내외와 갓 난 손자가 잡혀 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인다는 말에 그만……. 제발 살려 주십시오.”
의원의 말에 부들부들 떨던 여곤은 결국 촛대를 내려놓았다.
그런 여곤에게서 시선을 돌린 고덕이 의원에게 물었다.
“천천히 되살릴 수 있겠지? 놈들이 눈치채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말이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도 살고 가족도 살아야 하잖아. 그러자면 시간이 필요해. 네 가족을 구해오고 우리 쪽 인질도 빼내오려면 말이야.”
고덕의 시선을 받은 여곤의 표정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두 아들이 여전히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을 상기한 까닭이었다.
“저, 정말 제 가족을 살려 주실 수 있습니까?”
“약속하지. 적어도 저들의 약속보다는 신빙성이 더 높을 거야.”
사실 의원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런 일을 시킨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일이 끝나면 토사구팽이라 하여 비밀을 알고 있는 자신과 가족을 살려 줄 확률이 높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하겠습니다. 제 가족을 구해만 주신다면 제 목숨이라도 드리겠습니다.”
의원의 말에 고덕이 피식 웃었다.
“가능하면 살아보자고. 네 가족도, 너도, 그리고 우리 쪽 인질들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대협.”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의원에게 전음으로 무언가 열심히 주의를 준 고덕이 일행을 데리고 물러가자, 아 총관이 들어왔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던 총관의 시선이 방금 전에 피를 닦아낸 바닥의 한 부분에 머물렀다.
“소인이 실수를 하여 피를 조금 토하게 했습니다.”
고덕이 시킨 대로 말하는 의원에게 총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조심해야지.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그들이 오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 괜찮았습니다요.”
“그래, 조심해야 할 게야. 자네가 조심하는 만큼 가족들이 안전해질 테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좋아. 그나저나 그들이 무슨 말을 묻던가?”
총관의 물음에 의원이 답했다.
“병자의 상세를 물었습니다. 나아질 수 있겠냐고 묻기에 조금 더 지켜보아야 확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잘했네.”
의원의 답이 만족스러웠던지 총관의 표정이 흡족해 보였다.
그런 총관에게 의원이 물었다.
“하온데 소상단주님께서 약의 양을 늘리라 말씀하셨는데 어찌하올지……?”
“상소단주가 약을 늘리라 했단 말인가?”
“예. 이각 전에 찾아오셔서 양을 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각 전이라면 자신이 만나고 나온 직후였다.
‘욕심만 덕지덕지한 늙은이.’
“그 말을 들을 필요는 없네. 약은 내가 지시한 대로 먹이도록. 대신 소상단주에게는 약의 양을 시킨 대로 늘렸다고 고해야 할 것일세.”
“그리하겠습니다.”
“암암, 그리 고분고분해야 가족들이 편안한 걸세.”
“시키는 대로 하겠으니 제발 가족들은…….”
“걱정 말게. 자네가 소용이 있는 동안 가족들은 안전할 테니까.”
총관의 말에 의원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 말은 자신의 소용이 없어지는 순간 가족들에게도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 말을 좇길 잘했어!’
우두커니 무기력하게 서 있는 의원을 비웃어준 총관은 상단주의 침실에서 나와 곧바로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 * *
총관실에는 파란 복면을 쓴 인사가 한 명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서다 말고 복면인을 발견한 총관이 포권을 취했다.
“일호를 뵈오이다.”
“고생이 많군, 사호.”
“다 혈교 천하를 위한 일이니 고단한 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일의 진척은?”
“절강 분점의 일은 그리 해결하기로 하였습니다.”
사호, 아니 총관 아보의 말에 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그리 수월하게 되었다니 여상만이 여전히 욕심이 많은 모양이로군.”
“그 욕심이 우리 일을 수월하게 만들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나저나 음양괴는 얌전한가?”
“가끔 영약에 관해 묻긴 하지만, 그 외엔 시키는 일을 이행하며 얌전합니다.”
“복주상단의 경비 무사들을 장악하도록 시킨 것은 어찌 되었나?”
“음양괴의 출현 한 번으로 정리가 되더이다. 그놈의 명성이 무섭긴 한 모양이더군요.”
“그렇겠지. 그 많은 피를 흘리고도 정천맹조차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인사이니.”
“한데, 왜 음양괴를 드러내신 건지 아직도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복주상단을 가볍게 쓰고 버릴 생각이 아닌 모양이야. 그러기 위해서 복주상단의 방어력을 틀어쥔 것 같네.”
“웃전의 명입니까?”
“봉공의 명이었네.”
“그분이라면 무언가 생각이 있으시겠군요.”
“그러시겠지. 여하간 음양괴의 관리에 만전을 기하게. 성정이 괴팍한 인사라 어디로 튈지 모르니 말이야.”
“영약에 목을 매고 있으니 당분간은 괜찮아 보입니다. 한데, 정말 그에게 영약을 구해주는 것입니까?”
“그것은 나도 잘 모르겠네. 웃전에서 알아서 할 일이니…….”
청면 일호의 말에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데, 조장이 죽었는데 우리는 앞으로 누구에게 명을 받는 겁니까?”
“사부, 아니 봉공의 명을 받아 흑면조장이 임시로 우리 청면조를 맡았다더군.”
“조장이 흑면조의 독단적인 일에 연관되어 변을 당했는데 흑면조장의 지휘를 받는단 말입니까?”
“어쩔 수 없었네. 봉공의 명이 계셨으니…….”
“봉공께선 대체 왜?”
“그 깊은 속이야 우리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나?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를 밖에.”
청면 일호의 말에 아보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지만……. 그나저나 조장을 죽인 인물은 어떻게 된 겁니까? 흉수가 누구인지는 확인이 된 겁니까?”
“웃전에선 아는 모양인데 답이 없었네. 무언가 흑면조와의 일에 연관된 모양인데, 흑면조장이 우리 청면조의 지휘를 맡은 이상 그 일이 끝나기 전까진 알 수 없겠지.”
“조장의 복수도 할 수 없다니…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사부, 아니 봉공께서도 너무하십니다.”
“봉공께서도 교주님의 명에 묶여 계시니 별수 없는 모양이었네.”
“하면, 우리라도 나서야 하는 게 아닙니까?”
“복수를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로는 무리야. 웃전의 은혜를 받은 대사형, 아니 조장의 무위는 우리 열 명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뛰어났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일단은 시킨 대로 움직이세. 다음 것은 그다음에. 지금은 그 수밖에 없네. 우리가 맡은 일을 다하고 나면 발언권이 생기겠지. 조장의 복수는 그때 주장해도 늦지 않을 걸세.”
“후~ 알겠습니다. 하면, 이제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절강의 상계를 틀어쥐라는 명일세.”
“흔드는 게 아니라 틀어쥐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하네.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복주상단의 분점들을 이용해 절강성 상계를 흔들어 남궁세가가 단리세가의 일에 신경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이번에 바뀐 계획으로는 그 정도론 부족하다더군.”
“남궁세가의 정신을 온통 절강으로 돌려놓겠다는 생각인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아마도 단리세가를 본격적으로 흔들 모양이야.”
“그럼 청성과 단리세가 사이의 불화를 더 키우는 것입니까?”
“그런 것 같네. 청성에 미리 나가 있던 삼호와 칠호 외에도 오호와 구호가 추가로 보내졌어.”
“넷을 투입했단 말씀입니까?”
“그래. 거기에 나도 청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네. 단리에 남아 있는 십호도 조만간에 활동을 재개할 예정이니, 한참 시끄러울 거야.”
“그러면…….”
“그래. 단리세가와 화해한 남궁세가가 그쪽에 일말의 관심조차 둘 여력을 남길 수 없을 정도로 흔들어야 할 거야.”
“그 일을 나 혼자 하란 말씀이십니까? 혼자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흑면조에서 절강상회에 자리를 잡고 있던 흑면 칠호로 하여금 사호를 돕게 하겠다 했으니 잘해보게.”
“흑면조에서 우리를 돕는단 말씀입니까?”
“지휘자가 같아졌으니 협조는 나아지는 셈이겠지.”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렇게 봐야겠지. 일단 웃전에선 필요하다면 음양괴를 드러내도 좋다는 명이 함께 내려왔네.”
“음양괴를 드러내면 자칫 정천맹의 간섭을 불러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와의 흔적을 지운 채 드러내야겠지.”
“최악의 상황에나 생각해볼 방법이로군요.”
“그렇지. 음양괴라면 그 정도의 무게는 있으니까.”
“한데, 그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들면 어쩝니까?”
“그와의 인연은 그곳에서 끝나는 거겠지.”
“음양괴가 그냥 물러날까요?”
“그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렇게 쉽진 않겠지.”
“하면 어찌합니까? 그의 방해라면 막아내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나온다면 적면조가 나설 것이네.”
“적면조가… 설마 제거입니까?”
“그렇게 되겠지.”
“흠… 애써 확보한 패를 버리게 되는 것이군요.”
“그러니 가능한 잘 보관해야 할 걸세.”
“알겠습니다. 가능한 음양괴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은 없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지원을 제대로 해주지 못해 미안하네.”
“어쩌겠습니까? 조장이 죽으며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된 것을…….”
총관의 낙담에 청면 일호가 주의를 주었다.
“일의 중요성이 커졌네. 자네의 일이 성공해야만 청성의 일도 성공한다는 것을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일호마저 청성으로 들어가면 인질들은 누가 관리하는 것입니까?”
“현지에 나가 있는 흑면 팔호가 조율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흑면 팔호라면 연락도 잘되지 않는 별종이 아닙니까?”
“원체 받은 임무가 그러니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일을 그런 이와 어찌 도모한단 말입니까?”
“일단 내가 청성에 들어가기 전에 한번 만나보겠네.”
“의원의 가족도 중하지만, 여곤의 아들들은 관리가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괜히 사단이 벌어지면 일은 시작하기도 전에 틀어지게 됩니다.”
“알겠네. 내 흑면 팔호와 자네 사이의 고리를 만들어둠세.”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알겠네. 꼭 그리하겠네. 하니, 자네도 최선을 다해주게.”
“그리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보를 남겨 둔 청색 복면인이 조용히 총관실을 물러나왔다.
그렇게 작은 소리 하나 남겨 두지 않은 채 복주상단을 빠져나가는 복면인은 자신을 따르는 그림자가 붙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