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6장 (17/129)

제16장. 복주상단(福州商團)-시간이 흐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연화가 정신을 찾아 집을 나간 지 보름이 지난 어느 날, 평상시처럼 밭일을 하고 들어온 고길이 묵묵히 밥을 먹고 있는 고덕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그리 성화인데 남평은 정녕 안 가볼 생각인 게야?”

지난 단목세가와의 문제가 풀어진 전후 사정을 알게 된 한도회주가 고덕을 줄기차게 초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식들이 오란다고 조르륵 달려갈 생각은 없어.”

투박한 고덕의 답에 고길이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조금 더 적극적으로 권했다.

더 이상 축 처져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돈 체면도 있고, 칠이 놈 직장이기도 하잖어.”

“그래서 가라고?”

“그래. 가서 칠이 놈도 살펴보고, 사돈 체면도 세워주면 좋지 않겠냐?”

“당분간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더구나 그쪽 일이 급한 것도 아니고.”

고덕이 좀처럼 넘어오지 않자 고길은 방법을 바꿨다.

“하긴, 급한 건 아니니까… 그래도 나중엔 가봤으면 좋겠구나.”

“알았어. 나중에 가볼게.”

건성인 고덕의 답에 슬쩍 그의 표정을 살핀 고길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칠이 놈 이야길 하다 보니 큰놈 생각이 나네. 그 녀석 생일이 내일모랜데, 미역국이나 먹는지 걱정이구나.”

은근한 고길의 말에 고덕이 끌려 들어왔다.

“누구, 상가로 시집갔다는 연이?”

“그래. 복주의 이름깨나 날린다는 집안이니 어련히 잘해먹겠지만, 들여다보지 못한 지 벌써 오 년이니 걱정이 되는구나.”

“오 년씩이나 못 봤단 말이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 보고 싶을 때도 되었지…….”

고길의 넋두리에 고덕이 물었다.

“사돈 댁 이름이 뭔데?”

“복주상단(福州商團)이라 하더라만…….”

“복주상단?”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크다더니 그저 그런 지역 상단인 모양이었다.

“그려. 복주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커다란 상인 가문이여. 그곳과 혼사를 치르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왜?”

“사돈 댁에서 미리 보아놓은 혼처가 있다면서 반대가 엄청 심했으니까. 그나마 남평 사돈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남평 사돈이면 누구, 강태명이?”

“어허, 사돈 간에 이름을 그리 헐게 부르는 게 어디에 있냐. 그러지 말어.”

“아, 알았어. 한데, 그 친구가 도움을 주었단 말이야?”

“그랬지. 당시엔 사돈도 아니었지만 칠이 놈을 예쁘게 보았던지 도움을 주더라.”

무가의 압박을 무시할 수 있는 상가는 없다.

특히 한도회처럼 한 지역의 패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입김을 같은 지역에 존재하는 상가들이 거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놈이 기특한 일을 하나 했네.”

“어허, 그 말본새하고는!”

“알았어. 그 눈 좀 부라리지 마쇼. 사람 심장 떨리게.”

이상하게도 형이 화를 내는 게 어릴 적부터 무서웠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에 형에게 적잖이 얻어터지기도 했다.

“엄살은… 그러고 보면 네 녀석이 참 겁이 많았는데, 어찌 무사가 되었는지…….”

“그것도 다 세상이 요지경인 탓이 아니겠소.”

“그렇지. 다 그런 게야. 그나저나 네가 한번 다녀오면 어쩌겠냐?”

“뭐, 연이한테?”

“그래. 칠이 놈 한번 보고, 그놈 데리고 연이한테 좀 다녀오거라.”

고길의 말에 고덕이 물었다.

“한도회주의 초청을 받아놓고 가지 않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걸리시오?”

“그래서가 아니라 연이가 걱정이라니까.”

형의 꼼수를 모를 고덕은 아니었지만, 그 마음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기에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쳇, 결국은 그 이야기네. 알았수. 그럼 내 내일 나서리다.”

“오냐, 니가 오니 내가 참 좋다.”

고길의 말에 고덕도 미소를 지었다.

“나도 집에 오니 좋소.”

매일 저녁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늙은 형수가 문 앞에 나와 기다리는 작은 초가가 고덕은 진심으로 좋았다.

물론 다른 여인이 함께 기다릴 때가 더욱 좋았지만…….

* * *

다음 날, 전날 말해놓은 대로 고덕은 왕팔을 고길 내외 곁에 남겨 두고 길을 나섰다.

인적이 뜸해지자 고덕의 발이 기묘한 변화를 보였다.

쑤아아악-

바람이 불고, 신형이 저 멀리 쏘아져 나갔다.

마도 최고의 경공이라는 섬마공(閃魔功)으로 움직이자 남평은 지척이었다.

남평 지척에서 경공을 거두고 들어서자 멀리 한도회의 현판이 보였다.

“이보게.”

고덕의 부름에 수문 무사가 반색을 띠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협!”

지난날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바로 그 무사였다.

“자네로군. 잘 지냈는가?”

“예. 덕분에 무사히 잘 보냈습니다. 그땐 감사했습니다, 대협.”

“뭐, 그럴 수도 있지.”

미소를 짓는 고덕에게 무사가 물었다.

“강 각주님께 안내해 올릴까요?”

“아닐세. 방위당주를 찾아왔네.”

“방위당주라면 혹, 고칠 전 당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네, 고칠. 내 조카일세.”

“아, 그러시군요. 하지만 고 대협은 위각의 부각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그랬나?”

“예. 지난 일에 대한 공을 높이 사 공석이었던 위각의 부각주로 승차하셨습니다. 덕분에 제가 방위당의 당주가 되었습지요.”

“그렇다니 축하할 일이군.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권을 쓰는가?”

느닷없는 고덕의 물음에 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짧은 재주지만 권을 배웠습니다.”

“몸이 탄탄해 보이는데, 달리 배운 것이 있나?”

“그게… 창피한 일입니다만 철포삼(鐵布衫)을 배웠습니다.”

이미 진체가 상실되어 저자에 널리 뿌려진 삼류 외가 기공이다.

하지만 이백 년 전만 해도 철포삼은 강호십대고수였던 철마(鐵魔)의 호신절기였다.

“조금은 제대로 된 걸 익힌 모양 같은데, 아닌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맞는 모양이군.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아. 세간에 흘러들어간 철포삼의 반식은 마성이 깊으니. 잠시 이리 오게.”

자신이 앞서 정문 안으로 들어서는 고덕을 수문 무사들은 감히 막아서지 않았다.

그 뒤를 방위당의 당주가 되었다는 무사가 따라 들어갔다.

정문 뒤 마당에 도착한 고덕은 주변에서 막대기 하나를 주워 대충 몇 가지 글귀를 적었다.

표박철문(表箔鐵門) 후연개문(後軟開門)

“겉을 쇠로 감싸고 문을 쇠처럼 굳게 다진다. 그 후에 문을 부드럽게 하여 열다.”

글귀를 읽는 무사에게 고덕이 물었다.

“무슨 뜻인 줄 알겠나?”

“그게 잘…….”

“철포삼은 살 거죽을 쇠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네.”

“그렇지요.”

모두가 아는 이야기다. 그것까지는 모두 공개된 것이니까.

“하지만 그건 진정한 철포삼이 아니지. 자네가 얻은 것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아마도 혈문을 단련하라고 말하고 있을 걸세.”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란 무사의 표정에 피식 웃어 보인 고덕이 설명을 이었다.

“내가 어찌 아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자네의 수련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먼저 인식해야 할 걸세.”

“제가 익히는 방법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래. 아마 자네 정도라면, 흠… 거궐혈에 가끔 울혈이 생기지 않나?”

“마, 맞습니다. 한참 문질러야 풀어지곤 해서 애를 먹고 있습니다.”

“혈문이 굳기 때문이야. 그러니 저 말을 가슴 깊이 품어야 할 거야.”

고덕의 말에 글귀를 되뇌던 무사가 이해가 가지 않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가르침을 주십시오.”

초극의 극의로 알려진 인물이 하는 말이다. 한 자라도 쓸데없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매달렸다.

“말 그대로이네. 혈문을 단단히 하되 안을 단단히 하는 게 아니라 겉을 단단히 하란 말이야. 당연히 혈문은 부드러워야지. 사람인 이상 혈문이 단단해서는 살지 못하니까.”

“혈문의 겉만 단단히 하라고요?”

“그렇지. 혈문을 단단히 하기 위해 행하는 수련법을 운용하되 그 직후엔 혈문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열어두어 세상의 기운을 받아들이라는 말이네. 기실 혈문을 단단히 하는 수련법이란 혈문을 두드려 더 넓게 열어 세상의 기운을 평시보다 잘 받아들이기 위한 고육지책이니까.”

그제야 무언가를 느꼈는지 무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무언가 미진하다 했더니 바로 그 말이었군요.”

“알아들었다면 되었고.”

고덕의 말에 무사가 크게 감명 받은 표정으로 포권을 취했다.

“이 엽문이 대협께 커다란 은혜를 입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협.”

“은혜는 무슨…….”

“아닙니다. 제가 받은 가르침의 무게가 어떠한 것인지는 잘 압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대협.”

틀린 말은 아니다.

고덕 정도의 고수에게 지금같이 핵심적인 무리를 얻어듣는 경우를 흔히 기연이라 부르는 것이니까.

“정히 그리 생각한다면 우리 조카를 잘 좀 도와주게.”

“고 부각주님과는 평소에도 잘 지냅니다만, 앞으로 더욱 각별히 보필하겠습니다.”

“그래주면 고맙겠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이 다르다고 했던가?

밖으로 드러나는 기운이 자신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길을 걸어갈 사람이었다.

그런 인물에게 얕은 덕을 베풀어 좋은 인연을 조카에게 맺어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엽문에겐 그리 간단한 인연이 아니었다.

훗날 제하이십사강의 일좌에 오른 투귀(鬪鬼) 엽문이 평생의 은인으로 여긴 인물이 고덕이었던 연유는 바로 이 만남 때문이었다.

엽문의 안내로 위각으로 든 고덕은 어렵지 않게 고칠을 만날 수 있었다.

“고맙소, 엽 대협.”

“아닙니다. 덕분에 고 대협께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상황을 알지 못하는 고칠이 당황하는 모습에 시원한 웃음을 보인 엽문은 숙부에게 들으라며 물러갔다.

“무슨 일입니까?”

고칠의 물음에 고덕은 그저 고개를 저어 보였을 따름이었다.

“그냥 작은 인연이 있었을 뿐이다. 그나저나 네 회주가 보자고 해서 왔다만, 왜 보자고 하는 것이냐?”

“그야 인맥을 만들고 싶어서겠죠. 그나저나 정말 초극의 극의세요?”

미처 소문을 접하기 전에 헤어진 터라 이제야 묻는 것이다.

“누가 그러더냐?”

“처남도 그러고, 사람들이 다 그러던데요. 정말이십니까?”

조카의 물음에 고덕은 그저 웃어 보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기도 그렇고, 사실대로 말하기도 우스웠던 탓이다.

하지만 고칠은 그런 고덕의 웃음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참 내, 미리 알려 주셨으면 좋잖아요. 그리 겸연쩍어하지 않으셔도 될 만큼 충분히 강하신 거라고요. 숙부는…….”

“글쎄다…….”

오해하는 조카에게 고덕은 그렇게 말할 수밖엔 없었다.

“참, 오셨으니 일단 회주님께 전갈을 드려야겠네요. 잠시 기다리세요.”

자리에서 일어서던 고칠은 문을 열고 들어서던 사내와 마주쳤다.

“아! 각주님.”

“어디 가시는가? 고 부각주.”

“예. 손님이 오신 터라, 회주전에 연통을 하려 했습니다.”

고칠의 말에 각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고덕에게 향했다.

“제 숙부님 되십니다. 숙부님, 제가 모시고 있는 위각의 각주님이십니다.”

고칠의 소개에 고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위명이 쟁쟁하신 고 대협을 뵙습니다. 동도들이 팔방섬도(八方閃刀)라 불러주는 관길입니다.”

스스로 관우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관길은 관우같이 기다란 수염을 탐스럽게 기르고 있었다.

“고덕이외다. 못난 조카를 잘 부탁드립니다.”

고덕의 인사에 관길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훌륭하게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겝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모쪼록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잘 보살피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확인한 고칠은 양해를 얻고 곧바로 회주전에 연통을 넣었다.

연락을 받은 한도회주 예자문은 직접 위각으로 나왔다.

“관길이 회주님을 뵙습니다.”

“고칠이 회주님을 뵙습니다.”

수하들의 포권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선 예자문은 소문처럼 앳돼 보이는 고덕의 외모에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흠흠, 한도회를 맡고 있는 예자문입니다. 이렇게 고 대협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고덕이외다. 초청해주셔서 고맙소이다.”

일문의 종사라 하나 경지에선 분명 고덕의 아래다.

힘이 모든 것인 강호이니 고덕의 꼿꼿한 허리를 책망할 수 없었다.

“이렇듯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못난 조카를 맡겨 두고 늦게 찾아뵙는 걸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고덕으로선 조카의 면을 보아 최대한의 예를 표한 셈이다.

“아닙니다. 하루의 만남이 만년의 기다림을 빛낸다 했으니, 어찌 기다림이 길다 하겠습니까? 반가움이 크니 모두 족하다 생각합니다.”

“그리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대충 격식을 차린 인사가 오고 가자 그 뒤로 다과가 들어오고, 소소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어차피 무슨 이유가 있어 부른 것도 아니고 할 말이 있어 찾은 것도 아니다.

서로가 인연이 있어 그 인연을 확고히 할 필요성을 가지고 이루어진 만남이니, 말은 길되 알맹이는 별로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긴 대화가 끝나고 예자문이 돌아가자, 고덕은 고칠의 안내로 접객원의 귀빈실로 안내되었다.

그날 저녁, 술을 가지고 찾아온 강태명과 술잔을 기울인 고덕은 다음 날 위각의 각주인 관길의 배려로 고칠을 앞장세워 복주로 향했다.

복주상단에 시집간 고연을 찾아보기 위한 여로였다.

조카 앞에서 굳이 자신의 능력을 내보이길 원치 않은 고덕은 고칠의 능력에 맞춰 경공을 발휘했다.

이제 상승의 일류에 이른 고칠은 세 시진 이상 달리지 못했다.

세 시진 동안 달리고, 두 시진을 걸었지만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고덕은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이동한 끝에 복주에 들어선 고칠과 고덕은 곧바로 복주상단으로 향했다.

“누구시오?”

대체로 돈 있고 권세 있는 집안의 수문 무사들은 고압적인 자세를 갖기 마련이다.

고칙과 고덕을 맞이하는 수문 무사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상단주를 만나러 왔소.”

고칠의 답에 수문 무사가 다시 물었다.

“소상단주님이면 여상만 님 말씀이오?”

수문 무사의 물음에 고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곤이란 사람이 소상단주가 아니었소?”

“아! 여곤 행수께선 소상단주에서 물러나셨소. 하면, 여곤 행수를 찾아오신 게요?”

“그렇소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접객원으로 안내되지도 못한 채 문밖에 손님을 세워놓는 것만으로도 여곤이 처한 상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한 명의 장년인이 나왔다.

“아니, 이게 누군가. 처남.”

“오랜만입니다, 매형.”

“어서 오게. 일행… 이신가?”

“아, 인사드리세요. 숙부님 되십니다.”

“숙부……?”

“예. 집을 잠시 떠나 계셨던 숙부께서 얼마 전에 돌아오셨지요.”

고칠의 소개에 상대를 살피던 여곤은 고덕의 허리에 달린 검을 발견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여곤이 처숙부님을 뵙습니다.”

“고덕이라 하네. 반갑네.”

“어서 드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여곤의 안내로 안으로 들어서는 고덕의 모습을 지켜보던 수문 무사들이 수군거렸다.

복주상단의 심처.

소상단주의 거처에 앉은 여상만은 자신의 수족을 자처하는 수문 무사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여곤을 찾아온 이들이 그의 처남과 처숙부다. 그런데 처숙부란 이의 얼굴이 이제 약관을 갓 넘긴 동안이더라 그 말이더냐.”

“예, 소상단주님.”

“흠… 그저 촌수로 숙부가 될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럴 수도 있사오나 그자가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기에…….”

“검을 찼다라……. 강호인이란 말이구나.”

강호인이라면 쉽게 지나갈 수 없었다.

여곤의 처숙부가 될 정도의 연배에서 약관의 외관이라면 그가 가진 내력이 심상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올지…….”

“나가면서 아 총관을 들라 이르게.”

“예, 소상단주님.”

고개를 숙인 수문 무사가 나간 잠시 후, 염소수염을 단 총관 아보가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아보는 여상만이 총관으로 있던 때 그의 수족이었던 인물이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눈치가 빨라 여상만이 소상단주의 자리를 꿰어 차며 자신의 뒤를 이을 총관으로 천거했던 이였다.

그럼으로써 여상만은 소상단주의 자리에 앉으며 총관을 자기 사람으로 채울 수 있었다.

“그래, 여곤이를 찾아온 손님들에 대해선 이야길 들었겠지?”

“예. 신경 쓰이는 인물이 한 명 있더군요.”

“그래. 조심스럽게 알아보게.”

“알아볼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가 호법의 말에 의하면 그 정도 연배에서 약관의 외모를 유지하려면 최소 절정에 이른 내력이 있어야만 한답니다. 더구나 주안술에만 내력을 쓰는 남자는 없으니 그것을 감안하면 상대는 초절정 내지 초극을 예상해야 한다는데, 여곤의 처가에 그런 인물이 있을 턱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분명 가후 호법이 그리 말했단 말이지?”

“예. 제가 두 번 세 번 확인한 일입니다.”

“하면 자네의 생각은?”

“촌수로 숙부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어디 무가의 제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여곤의 처가에 초절정을 넘어서는 고수가 있었다면 저리 힘없이 당하진 않았을 겁니다. 아니, 설사 초절정의 고수가 있다 한들 소용없는 일이겠지요.”

“그렇긴 하지만… 만에 하나 상대가 초극의 고수라면?”

“설사 초극이라 하더라도 흑상회에서 보낸 이라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흠… 하긴 그의 능력이라면… 천하오존이나 강호십대고수가 아닌 이상 막아낼 이가 없긴 하겠지.”

“예. 더구나 여곤의 아들이 저희 수중에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역시 그런가?”

“예. 여곤도 얼추 눈치를 채고 있는 것 같으니 이젠 여곤에 대해 신경을 끄셔도 될 것입니다.”

아 총관의 말에 여상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놈이 힘없이 물러난 것만 보아도 대충 눈치는 채고 있다고 보아야겠지. 그럼 그냥 두어야 할까?”

“일단 오늘 하루는 지켜보시다가 정히 신경이 쓰인다면 그에게 청을 넣어보시면…….”

“다른 이들처럼 정리하자는 말인가?”

“어려울 것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아직도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엔 망설임이 들었다. 그런 여상만의 주저거림을 총관이 깨었다.

“이미 기호지세입니다. 지금은 망설일 시기가 아닙니다.”

“그렇지…….”

“하면 어찌……?”

“자네 말대로 하지. 오늘은 지켜보고, 혹시 무슨 일이라도 꾸민다 싶으면 내일 중으로 없애달라고 부탁하게.”

“그리하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린 총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하옵고, 흑상회와의 이번 거래는 어찌 처리할까요?”

“조건은 여전한가?”

“예. 우리 일이 끝날 때까지 그를 우리 쪽에 보내주는 대가로 절강성의 분점들을 원합니다.”

“절강의 분점들은 우리의 견제로 실패하긴 했지만, 향후 중요한 재원이 될 곳들이야. 넘겨주긴 아깝지 않은가?”

“여곤이 직접 추진했을 만큼 중요하긴 합니다만 그것이 상단주의 자리보다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절강만큼 좋은 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우리 일에 더 집중하셔야 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여전히 주저하는 여상만의 모습에 슬쩍 눈살을 찌푸린 총관이 말을 이었다.

“잘하면 강동 쪽에 마련해놓았던 흑상회의 분점들을 넘겨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동 쪽의 분점들을?”

놀라는 여상만의 모습에 고개를 숙여 비릿한 미소를 숨긴 총관이 답했다.

“예. 우리가 계속 주저하는 것 같자 그쪽에서 슬쩍 거론했습니다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 잘하면 끌어올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던가?”

“예. 잘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총관의 답에 여상만의 표정에 탐욕이 흘렀다.

“비교는 해보았나?”

“예. 흑상회의 강동 분점들은 모두 열여덟 개입니다. 주요 품목은 옷감과 차로 강동성 상계의 삼 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절강 분점들보다 대규모로군.”

“예. 우리 절강 분점들이라 해봐야 모두 여덟 개로 주요 품목은 곡물과 말입니다. 아시겠지만 절강 상계에서 우리 분점들이 해당 품목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일 할도 채 안 됩니다.”

아 총관의 보고에 여상만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좋긴 좋은데 너무 좋은 거 아니야? 혹시 무슨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그게… 넘겨주는 대신 절강 분점들에선 계속 우리 복주상단의 이름을 쓰고 싶답니다.”

“우리 이름을?”

“예.”

“혹시 우리 이름으로 불법을 저지르려는 건 아닐까?”

“과거 절강성에서 벌인 여곤의 일을 저지하기 위해 광동의 분점들을 넘겨주었을 때도 우리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했지만, 자신들의 이름으로 바꿀 때까지 달리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습니다.”

“하니 이번에도 괜찮을 것이다?”

“힘과 자금 모두가 월등히 앞서는 흑상회라고는 하나 우리의 힘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괜히 복주상단의 이름으로 문제를 일으켜 우리와 적대시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흠… 그건 총관 말이 맞긴 한데, 너무 조건이 좋으니까 그렇지.”

“아마도 절강에 진출해 있는 남궁세가의 상단이 신경 쓰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안휘와 접경인 절강엔 이렇다 할 무림 문파가 없다.

그 탓에 절강의 상계는 남궁세가의 상단과 그들이 뒷배를 보아주는 절강 상회가 대부분의 이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긴 마도 쪽으로 보이는 흑상회로서는 꺼림칙할 수도 있겠군.”

“예. 그런 맥락으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좋아. 그 조건으로 거래를 진행시키게.”

“알겠습니다. 하오면 행수 회의와 상단주님의 재가는 어찌…….”

“내가 상단주가 되기 전까지 이번 일은 비밀에 부치게. 그때 내가 결제하는 걸로 하지.”

“하긴 소상단주님께서 상단주가 되시면 행수 회의야 금세 장악할 수 있을 테니까 문제가 없겠군요.”

“그래. 그렇게 알고 진행하게.”

“알겠습니다, 소상단주님.”

고개를 조아린 아 총관이 나가자, 홀로 남은 여상만은 병상에 누워 있는 이복형이 빨리 죽길 바랐다.

그가 빨리 죽을수록 자신이 상단주가 되는 날이 당겨지기 때문이었다.

“약의 양을 늘려 볼까…….”

중얼거리는 여상만의 눈 속에 지독한 탐욕이 이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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