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5장 (16/129)

제15장. 급변(急變)-알아보지 못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고덕과 당황하는 왕팔을 바라보던 연화가 다시 물었다.

“누구냐고 묻는데 왜 대답이 없는 것이냐?”

연화의 음성은 예상외로 차고 고압적이었다.

“모르는 이들이옵니까? 군주님.”

함께 있던 여인의 물음에 고덕과 왕팔의 표정에 경악이 들어섰다.

군주. 왕의 딸을 부르는 호칭이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연통을 받았다면 왕부에서 모르는 이들을 보내진 않았을 터인데.”

연화의 답에 비로소 위병장이 당황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오면 이들이 왕부의 사람이 아니란 말씀이옵니까?”

고덕과 왕팔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그 즉시 주변에 대기 중이던 관병들의 긴장도가 높아졌다.

“사모…….”

무언가 말을 하려는 왕팔을 가로막은 것은 고덕이었다.

“저희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입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런 것 같구나. 하면 돌아가거라.”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는 연화의 뒷머리에서 나비 문양의 머리 장식이 반짝였다.

그것을 발견한 고덕의 눈빛이 처연해졌다.

‘간혹 기억이 돌아오면 반대로 기억을 잃었던 순간부터 기억을 되찾은 때까지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소.’

의원의 말이 귓가를 울렸다.

그렇게 힘없이 돌아서는 고덕을 갑자기 연화가 불러 세웠다.

“거기.”

“예. 어찌…….”

“혹시 무인인가?”

자신의 허리 어림에 머무는 연화의 눈길이 아마도 비스듬히 묶어놓은 검을 보고 하는 물음 같았다.

“그렇습니다.”

“특별히 할 일이 있더냐?”

“…없습니다만.”

“요사이 왕부로 돌아가는 동안 필요한 경호 무사를 구하고 있었다. 대가는 넉넉히 줄 터이니 해보겠느냐?”

연화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고덕의 답에 연화의 시선이 그들을 안내해왔던 시녀에게 향했다.

“저들에게 머물 곳을 내어주거라.”

“예, 군주님.”

공손히 답한 시녀의 안내로 고덕과 왕팔이 물러가자, 곁에 서 있던 여인이 연화에게 물었다.

“모르는 이들이 아니옵니까?”

“모르는 이들이 맞다.”

“하온데 어찌 그런 이들을 경호 무사로…….”

도지휘사의 딸인 아연의 물음에 연화, 아니 문정 군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내가 자신의 곁을 떠나게 두어선 안 된다는 알 수 없는 느낌 때문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조용히 읊조리는 문정 군주의 손길이 뒷머리에 꽂힌 나비 문양 장식을 쓰다듬었다.

“그 장식을 아직도 가지고 계십니까?”

“그냥 가지고 있으면 기분이 좋구나.”

“하오나 군주의 품위엔 어울리지 않는 것이옵니다.”

한마디로 싸구려란 말이다. 그것은 문정 군주도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왠지 버릴 수가 없었다.”

“혹시 잃어버린 기억 속에 누군가가 전해준 물건이 아니올지……?”

역시 한창 사랑을 꿈꿀 나이의 아연이다.

기억을 잃은 동안 멋진 사내를 만나 사랑을 하지 않았겠냐는 그녀의 추측이 다시 시작된 모양이었다.

“글쎄, 정말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벌써 날 찾아왔겠지.”

“하지만 못 찾을 수도 있잖아요?”

“내가 정신을 차린 곳은 하포란 작은 도시였어. 그곳의 하나뿐인 표국에서 마차를 탔는데 찾지 못할 리가 없잖아.”

“그럼 관부로 향했기에 겁을 먹었을 수도…….”

“관부로 들어간 탓에 겁을 먹고 오지 않는다면 그들과의 인연이 그만큼 얕은 것이겠지.”

문정 군주의 말에 아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정도에 물러설 사랑이라면 사랑이라고 할 수도 없겠죠.”

“후후, 아연은 너무 사랑에 목을 매는구나.”

“그럼 군주님은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고픈 생각이 없으세요?”

‘운명적인 사랑…….’

그것이 바로 꿈이다. 정치란 이름으로 팔려가야 하는 군주의 자리는 그런 건 바랄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글쎄…….”

뒷말을 흐리는 문정 군주의 손길이 자신도 모르게 나비 문양 머리 장식을 쓰다듬고 있었다.

한편, 시녀의 안내로 외원의 객방으로 안내된 왕팔은 심란한 표정의 고덕에게 물었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상대는 군주라고요, 군주.”

군주와 한 방에서 지낸 사이였다고 소문이라도 나는 순간, 고덕의 목은 날아간다고 봐야 했다.

아무리 목숨을 구해주고 그간 보살펴 왔다지만 그 일을 인정해줄 만한 왕야는 이 대명천지에 있을 수 없었다.

“글쎄, 일단 잠시 지켜보자.”

“하, 하지만 대협!”

“그만!”

낮게 깔린 고덕의 음성에 왕팔의 입이 다물렸다. 함께 지내온 시간 동안 지금처럼 위협적인 음성을 들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 * *

저녁나절 하인의 연통에 마당으로 나서자, 웬 무장 하나가 서너 명의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대들이 문정 군주께서 직접 뽑은 무사들인가?”

“그렇습니다만…….”

왕팔의 답에 무장이 말을 이었다.

“이번 호송 행렬을 책임질 백호(百戶) 운암이다.”

백호면 일백의 정병을 지휘하는 장수다. 군부에선 백호장 또는 백인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상대의 답에 고덕의 시선이 운암이라 소개한 장수와 주변인들을 훑었다. 그런 고덕의 귀로 운암의 말이 들려왔다.

“이번 호송 행렬은 본관이 지휘하는 병사 일백과 열 명의 강호 무인들로 구성된다. 그들 중 여섯이 바로 그대들이다.”

운암의 말에 서 있던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일류 하나, 이류 둘. 낭인들치고는 괜찮군.’

고덕과 같은 평가를 내렸던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이들의 시선이 왕팔을 지나 고덕에 멈춰 서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자신들로서는 상대의 경지가 가늠이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강호 무인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운암의 말이 이어졌다.

“강호 무인 중 넷은 내일 도착할 것이다. 그리 알고 서로 얼굴을 익혀 두도록.”

그 말을 남긴 운암이 돌아가자, 남겨진 사람들이 서로 자기소개를 하며 안면을 텄다.

“투견(鬪犬) 태륵이오.”

그 와중에 다가온 한 사내의 인사에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고덕을 대신해 왕팔이 나섰다.

“팔이오.”

하오문의 추적을 걱정해 자신의 신분을 내세울 수 없었던 왕팔의 소개에 태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팔?”

“그렇소.”

“투견이라는 별명을 단 내가 할 말은 아니오만, 형장도 이름 덕을 보긴 틀린 것 같소.”

“하하, 그, 그렇지요.”

멋쩍게 웃는 왕팔에게 태륵이 물었다.

“한데, 저 친군 누구요?”

“대, 대협은…….”

“대협?”

적어도 일류엔 들어선 것으로 보이는 왕팔의 호칭에 태륵의 표정이 슬쩍 어두워졌다.

상대에게서 그 정도의 호칭을 들으려면 그에 필적한 능력을 보유해야 하는 곳이 바로 강호인 까닭이다.

“험험… 다른 이의 사연엔 관심이 없으니 달리 걱정하진 않으셨으면 좋겠소이다.”

태륵의 말이 일종의 사과란 것을 알아들은 고덕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먼저 들어가마.”

“예, 대협.”

왕팔의 답을 들은 고덕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태륵이 물었다.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인사이기에 그리 절절매는 게요?”

“보기보단 나이가 많으신 분이오.”

왕팔의 답에 태륵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리 말하는 왕팔의 나이가 자신보다 많은 사십대 후반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설마…….”

이제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태륵의 표정에 왕팔이 고개를 저었다.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때론 더 좋은 법이오.”

“그야… 알겠소. 신경 끊으리다. 한데, 나이가 어찌 되시오?”

“이제 마흔일곱이오.”

“그럼 함께하는 동안 형님으로 대하겠소. 난 이제 서른여덟이라오.”

생각 외로 서글서글한 사내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지 왕팔이 물었다.

“그렇다면 말을 놓아도 되겠소?”

“그리합시다. 형님으로 대하기로 했는데 말을 높인다는 것도 우습고.”

태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팔이 말을 놓았다.

“고맙네. 한데, 다른 이들은 어떤가?”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은 태륵이 답했다.

“그런대로 괜찮은 이들이우. 관부의 호송 행렬이니 누가 덮쳐 올 가능성도 적고. 충분할 것 같소.”

“그런데 관부의 호송 행렬에 왜 강호인들을 쓰는 게야?”

“형님은 모르셨수?”

“뭘 말인가?”

“그게 명 건국 초기에 태조 폐하의 호송 행렬을 원의 강호인들이 급습한 일이 있었다는구려. 그것을 근처에 있던 중원의 강호인들이 힘을 써 막아내었고, 그 덕에 태조 폐하도 무사했다고 하더이다.”

“하면, 그 일 이후 관부의 호송 행렬에 강호인을 쓴단 말인가?”

“다는 아니오. 황실이나 황족인 왕부의 호송 때만이니까. 하지만 그 덕에 우리 같은 낭인들도 적지 않은 돈벌이가 되는 것이고…….”

또 그렇게 맺은 인연으로 장수들에게 고용되어 전장으로 진출하는 낭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몸뚱이 하나로 벌어 먹고사는 낭인들의 밥벌이 수단이었다.

* * *

다음 날, 운암이 이야기했던 무인 넷이 도착했다.

“제길, 젊은 놈들 뒤치다꺼리나 하게 생겼군.”

“그게 무슨 소린가?”

“저놈들, 하북 팽가의 어린놈들이오.”

태륵의 말에 왕팔과 함께 서 있던 고덕의 시선이 많아봐야 서른 안팎인 이들을 훑어보았다.

‘상승의 일류가 하나에 둘은 일류… 호오, 그중 하나는 절정이로군.’

더구나 절정에 이른 이의 외관이 가장 어렸다. 저런 경우라면 백이면 백, 직계 후손일 공산이 높았다.

“팽가의 현이라 하오. 잘 부탁드리겠소.”

정중한 포권을 취해 보였긴 하나 나이가 제 삼촌이나 아비뻘 되는 이들에게 하는 인사치곤 건방졌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지적하지 못했다.

팽현. 약관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풍멸도(風滅刀)란 가볍지 않은 무명을 얻을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쌓은 젊은이로서 당금 팽가의 소가주였기 때문이다.

“팔대세가에서 왜 관부 일에……?”

왕팔의 의문은 이어진 운암의 설명으로 풀어졌다.

“군주께서는 왕부로 돌아가시기 전에 황궁으로 들라는 황명이 내려졌다.”

자금성은 하북에 둘러싸인 북경에 위치한다. 팽가는 그런 하북의 북쪽 숭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도 세가로 돌아가는 팽가의 고수들을 도지휘사나 승선포정사 같은 고위 인사들이 불러들인 듯했다.

“그럼 우리의 목적지가 자금성입니까?”

“그렇다. 출발은 내일 바로 할 터이니 준비를 갖추도록.”

그 말을 남긴 운암이 물러가자 팽가 사람들은 그들대로, 다른 낭인들은 또 그들대로 숙소로 들어갔다.

고덕은 왕팔과 그에게 따라붙은 태륵과 함께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저기… 연세가 정말 예순셋이십니까?”

태륵의 물음에 고덕의 시선이 왕팔에게 향했다.

“그, 그게 너무 궁금해하기에…….”

왕팔의 변명에 힐난의 눈빛을 보낸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그럼 경지도… 정말 초극의 극의십니까?”

다시금 자신에게 향하는 고덕의 시선에 잔뜩 고개를 수그린 왕팔이 중얼거렸다.

“그게… 외모를 설명하려다 보니…….”

자신으로서도 그 방법밖에 없다는 걸 느꼈기 때문인지 고덕은 별다른 힐난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돈 되지.”

고덕의 답에 태륵의 허리가 부러질까 걱정일 정도로 굽혀졌다.

“영광입니다! 대협.”

단지 말 한마디에 순순히 허리를 굽히는 태륵의 행동이 우스웠던지 고덕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달렸다.

“시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옙. 입을 닫고 있겠습니다.”

“고맙다.”

그리곤 눈을 감아버린 고덕이지만, 그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태륵은 감격스런 표정이었다.

* * *

다음 날, 문정 군주를 태운 마차를 가운데 두고 호송 행렬이 복주의 도지휘사사를 출발했다.

전후좌우 관병들로 둘러싸인 마차를 대열의 후미에서 바라보는 고덕의 눈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호송 행렬은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이동했다.

애초부터 고속 이동을 준비했던지 동원된 관병들 모두가 기마병들로 구성되었고, 강호 무인들도 모두 말에 올라탄 덕이었다.

그렇게 복건을 출발한 호송 행렬은 빠르게 북상하고 있었다.

호송 행렬의 안전을 위한 이유 탓인지 그들은 철저하게 여정을 관리하여 커다란 관청이나 군영에서만 밤을 보냈다.

그렇게 이동하길 팔 일. 호송 행렬은 안휘를 지나 하남을 통과하고 있었다.

땅은 하남이라곤 하나 통과하는 지역이 안휘와 산동 사이에 끼인 좁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하남의 관부도, 무림 방파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사단은 바로 그곳에서 벌어졌다.

쒜에에엑-

파공성을 이끌고 갑자기 날아든 수십 발의 화살에 기마병들이 맥없이 고꾸라졌다.

“저, 적이다! 마차를 보호해라!”

간신히 화살을 피한 운암의 고함에 황급히 방패를 꺼내든 병사들이 마차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병사들의 움직임에 무인들도 빠르게 움직였다.

팽가의 고수들이 화살이 날아온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갔고, 나머지 무사들은 만약에 대비해 마차 인근으로 모여들었다.

숲 속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음이 들려오자, 태륵의 시선이 어느새 마차 지붕 위에 올라선 고덕에게 향했다.

“그대로. 들어가면 죽는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숲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팽현이 튕겨져 나왔다.

볼이 넓은 패도를 든 팽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관병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물러났다.

“대비하시오. 강한 놈들이오.”

“다, 다른 이들은 어찌 된 거요?”

태륵의 물음에 팽현의 고개가 저어졌다.

“모두 죽었소.”

팽현의 말에 무인들은 물론이고 관병들까지 잔뜩 굳었다.

그런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일단의 사람들이 숲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관부 행렬을 기습한 탓인가 모두가 복면을 했다.

한데, 그런 이들 중에 고덕의 눈에 익은 이들 몇몇이 눈에 띄었다.

“오랜만이구나.”

난데없는 소리에 호송단의 사람들은 고덕의 신분을 알지 못해 긴장했고, 습격자들 중에 파란색 야행복에 복면을 쓴 이들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도 고덕이 이 행렬에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던 까닭이다.

“내가 갈까? 아니면 돌아가겠느냐?”

고덕의 말에 습격자들 사이에 술렁임이 일었다. 자신들끼리 무언가 전음을 주고받았는지 개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돌아간다면 보내주시겠소?”

“조용히만 돌아간다면.”

고덕의 말에 물러갈 생각인지 습격자들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것을 팽현이 가로막았다.

“어딜 가겠다는 것이냐? 내 허락이 없이는 갈 수 없다!”

팽현의 고함에 고덕이 차가운 음성을 토했다.

“네가 저들을 막을 수 있나? 저들과의 전투에서 마차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느냔 말이다.”

고덕의 음성에 호송단의 책임자인 운암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가면 막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호송단의 책임자인 내 결정이다. 팽가의 무인은 명을 따르라.”

운암의 말에 팽현은 고덕을 잠시 노려보다 물러섰다.

그러자 습격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장내를 빠져나갔다.

습격자들이 물러가자 호송단은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가장 가까운 관청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렇게 관청에 도착한 호송대는 해당 관청에서 병력을 지원받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런 와중에 운암이 고덕을 불렀다.

“무슨 일이오?”

고덕의 물음에 운암이 전낭을 내밀었다.

“그간 수고한 비용이다. 그대와 그대의 동료는 이 시간부로 임무에서 해제한다.”

그 말에 검미를 일그러트린 고덕이 물었다.

“이유가 무엇이오?”

“습격자들과 그대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암의 답에 고덕이 물었다.

“이것을 군주도 알고 계시오?”

“그대의 고용과 해임에 군주의 허락을 얻을 이유는 없다.”

“하면 모른다는 말씀이오?”

조금 높아진 고덕의 음성에 운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알고 계시다.”

“하면 그녀, 아니 그분이 우리를 보내라 했단 말이오?”

“그렇다. 하니 속히 떠나라.”

운암의 말에 고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물러나온 고덕은 조용히 관청을 떠났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이상 곁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고덕과 왕팔이 떠난 직후, 호송대도 관청에서 지원받은 병력 오백을 더해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대처한 덕인지 호송대는 더 이상의 습격이나 문제없이 사전에 도착지로 예정되어 있던 산동성 남부의 열력현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열력현에 무사히 도착한 문정 군주가 숙소로 이동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따.

“운 백호.”

군주의 부름에 운암이 복명했다.

“예, 군주님.”

“강호 무인들 중에 보이지 않는 이들이 있군요.”

“일전의 습격에서 사망한 이들입니다.”

운암의 보고에 문정 군주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군주님!”

놀란 시녀가 얼른 부축하자 문정 군주는 신형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괘, 괜찮다.”

“몸이 불편하신 것이옵니까?”

운암의 물음에 문정 군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것보다 안 보이는 이들 모두가 죽은 게 확실하오?”

“예. 그러합니다.”

운암의 답에 문정 군주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그뿐이었다.

잠시 당황한 듯하던 군주는 이내 신형을 돌려 숙소로 들어갔다.

그런 군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운암이 중얼거렸다.

“설마 군주님과 인연이 깊은 이들이었던가? 괜히 후에 문제가 되는 건 아니겠지……?”

운암의 걱정 어린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채 숙소로 돌아온 문정 군주는 자신의 마음이 왜 이렇게 심란한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쓰는 문정 군주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 * *

호송단에서 떨어져 나온 고덕과 왕팔은 경공을 발휘해 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뒤에 남긴 미련을 돌아보지 않기 위해 이동하는 속도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빨랐다.

그 탓에 뒤따르는 왕팔만 죽을 맛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집에서 고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팔에게서 대충의 내용을 들은 고길 내외도 고덕에게 연화, 아니 문정 군주의 일을 묻지 않았다.

상대의 신분이 그렇다면 감히 올려다보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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