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실종(失踪)-심장을 잃어버리다
아무도 잡을 수 없는 것이 시간이라고 하듯이 계절이 변했다.
온 들을 뒤덮었던 눈이 녹고, 들을 초록으로 물들인 봄이 지나고 더위가 시작되는 초여름이 다가왔다.
그렇게 연화가 고덕과 연을 맺은 지도 반년이 지나갔다.
그간 둘 사이에선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고덕이 연화를 정말 자신의 반려로 대우하기 시작한 것이다.
말도 부드러워졌고, 태도도 누그러졌다.
그런 고덕을 연화는 끔찍이 챙기고 따랐다.
“그 머리 장식은 안 빼는 거야?”
밭에서 돌아온 고덕의 물음에 유 씨와 함께 부엌에서 나와 맞아주던 연화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안 뺄 거예요.”
“질리지도 않아?”
“이게 왜 질려요. 얼마나 예쁜데요.”
연화의 답에 미소를 지은 고덕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번에 저자에 나가면 다른 것도 하나 사줄게.”
“정말요?”
“그래. 예쁜 걸로 사올게.”
“기대할게요.”
“응.”
“자자, 사랑은 이따 방에서 속삭이시고, 어서 씻고 올라오세요. 도련님.”
짓궂은 유 씨의 농에 얼굴을 붉힌 고덕이 서둘러 닦고 툇마루로 올라가자 준비한 저녁상이 나왔다.
“내일은 파를 수확해야겠다.”
고길의 말에 고덕이 물었다.
“며칠 더 둔다더니 왜?”
“날이 후덥지근한 게 조만간에 비가 오겠어. 비 오기 전에 거두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런가?”
“그나저나 팔인 언제 오는 게냐?”
“어제 갔으니까 낼 아침엔 오겠네.”
“도대체 무슨 심부름을 보냈기에?”
“복주의 관아로 실종자를 찾는 사람이 있나 알아보라고 시켰어.”
고덕의 답에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연화를 힐긋거린 고길이 물었다.
“지난번에 하포 현청에서도 알지 못한다고 했잖니?”
“그래도 복건성 승선포정사사에서는 좀 알고 있는 게 있을까 싶어서.”
“갑자기 왜 다시 찾기 시작하는 게냐?”
“그게… 이제 정식으로 혼례를 올릴까 해서.”
고덕의 답에 연화는 너무 놀라 토끼 눈이 되었고, 고길 내외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잘 생각했구나. 암, 그래야지. 하지만 찾지 못한다 해도 마냥 기다릴 필요는 없는 게다. 알고는 있지?”
“그야… 승선포정사사에서도 소득이 없으면 곧바로 혼례를 올릴 생각이야.”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이거 임자가 바빠지겠구려.”
“바쁜 게 대수인가요. 이렇게 기쁜 일인데. 이런 일은 매일같이 있어도 좋겠어요.”
“예끼, 이 사람. 하면 덕이 보고 매일 새장가를 가란 말이야.”
“아이고, 그게 그렇게 되나.”
고길 내외의 농에 밥상 앞이 웃음으로 가득해졌다.
* * *
고덕의 예상처럼 왕팔은 고덕에게서 배운 경공으로 바람같이 달려 복주를 삼 일 만에 다녀왔다.
“그런 사람을 찾는 게 없다?”
“예, 대협. 지난 일 년간 그런 일은 없었답니다.”
“아쉽게 되었군.”
“그럼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할 수 없지. 그냥 혼례를 올릴 수밖에.”
“사모께서 서운해하시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해하겠지……. 참, 경공은 좀 늘었더냐?”
“대협께서 알려 주신 경공 말입니다. 정말 끝장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내공만 안 딸렸어도 어제 저녁에 도착했을 겁니다.”
“하긴 내공 소모가 좀 있을 게야.”
“그래도 일전에 제가 알고 있던 경공에 비해 다섯 배는 빠르고 효율도 좋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로군.”
“한데 이 경공, 이름이 뭡니까? 절대로 일반적인 경공이 아닌 것 같던데요?”
왕팔의 물음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없는 것이니 네가 이름을 지어보거라.”
“예에? 그 경공이 이름도 없단 말씀이세요?”
“그래.”
이름이 없을 수밖에 없다.
검마의 독문 경공인 섬마보에서 반식만 따와 만들어낸 경공인 탓이다.
“그럼 질풍보(疾風步)라 지어도 될까요?”
“질풍보라……. 나쁘지 않은데.”
고덕의 답에 왕팔은 자신이 지어놓은 이름을 되뇌며 기뻐했다.
그런 왕팔을 두고 방을 나온 고덕이 연화를 찾았다. 결과를 알려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가족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고덕의 말에 연화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저에겐 서방님이 계시고 형님 내외도 계시잖아요.”
“정말 괜찮겠어?”
“예,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하는 연화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을 닦아준 고덕이 연화를 안았다.
“잘해줄게. 속상한 일이 없게, 찾지 못한 가족이 그립지 않게.”
조용한 고덕의 음성에 연화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믿어요.”
“그래, 믿어.”
그날 저녁, 고덕의 혼례가 보름 후로 결정되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연화가 물었다.
“만약에 말이에요.”
“응, 만약에.”
“절 잃어버리면 찾을 거죠?”
연화의 물음에 그녀를 측은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자기 아내를 찾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그럼 빨리 찾아야 해요.”
“그래, 최대한 빨리 찾을게.”
“정말이죠?”
“그래, 정말이야.”
“고마워요.”
“바보같이 또…….”
고덕의 책망에 연화는 고개를 그의 가슴에 묻었다.
“당신 냄새 좋은 거 알아요?”
“땀 냄새가 무슨…….”
“아니요, 당신한테선 좋은 냄새가 나요.”
“냄새는 당신이 더 좋아.”
연화의 머리를 쓰다듬는 고덕의 코끝으로 향긋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 * *
다음 날, 수확한 파를 수레에 가득 실은 고덕이 연화와 함께 저자로 나갔다.
고덕은 수레에 싣고 나온 파를 거래처에 넘기는 동안 연화를 먼저 저잣거리로 내보냈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할 거란 걱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전에 자신이 새로 사주마 했던 머리 장식을 미리 골라놓으라는 배려였던 것이다.
하지만 파를 모두 넘긴 고덕이 장신구 가게를 찾았을 때, 연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이십대 초반의 여자가 오지 않았소?”
“손님들이 너무 많아서…….”
상인이 난색을 표하자 고덕이 설명을 이었다.
“머리에 금빛 나비 문양 장식을 달고 있소. 이곳에서 산 것이오만…….”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 가게에서 머리 장식을 사신 분들이 워낙 많아서…….”
상인의 답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된 고덕은 저잣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자신을 찾아 움직였나 싶어 거래처인 채소 가게에도 두 번이나 돌아가 봤고, 혹시나 싶어 의원도 찾아가 봤다.
그렇게 의원을 두리번거리는 고덕을 발견한 의생이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혹시 이십대 초반의 여자 손님이 찾아온 적 없소?”
“오늘 여자 손님은 나이 드신 노파 두 분뿐이었습니다만…….”
“정말이오?”
“예. 오지 않았습니다.”
의생의 말에도 불구하고 고덕은 그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이곳저곳을 찾았다.
그런 그를 알아본 의원이 물어왔다.
“아니, 고 어르신 댁 분이 아니시오?”
의원의 아는 체에 고덕이 물었다.
“혹시 내 아내가 오지 않았소?”
“아내 분이라면… 오지 않았습니다만, 혹시 이리 오기로 하셨습니까?”
“그것은 아니었소만… 저자에서 없어져서…….”
고덕의 답에 의원은 웃음을 지었다.
“그럼 무언가 구경하고 계시겠지요. 잠시 기다리시면…….”
말을 하던 의원이 입을 다물었다. 고덕이 황급히 의원을 나간 탓이다.
“거참 성질 급한 사람이로세.”
의원의 말을 뒤로한 고덕은 자신과 헤어졌던 거리에서부터 저잣거리의 골목골목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아무 곳에서도 연화를 찾을 수 없었다.
분주하게 사방을 돌아다니며 연화를 찾는 고덕의 품에서 파를 넘기고 받은 지전이 흘렀지만, 고덕은 그것도 모른 채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해가 지고 상인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지만, 연화의 모습은 여전히 발견할 수 없었다.
해가 완전히 서산으로 넘어가고, 대부분의 상인들이 돌아가거나 문을 닫은 어두운 저잣거리에 고덕이 넋이 빠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 * *
밤이 되어서야 넋이 빠져 집으로 돌아온 고덕의 모습에 유 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늦으셨네요. 그런데 동서는요?”
“없어졌어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찌 된 건지 사라졌어요.”
넋이 완전히 나가버린 고덕의 답에 고길 내외가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자세히 말해보거라.”
고길의 재촉에 고덕이 멍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게… 머리 장식 본다고 먼저 저잣거리로 나갔는데, 내가 갔을 땐 없었어.”
“제대로 찾아는 본 게야?”
“응. 채소 가게는 물론이고 안 의원도 가봤지만 없었어.”
고덕의 답에 왕팔이 잽싸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고길 내외가 넋이 나가버린 고덕을 붙잡고 전후 사정을 들을 때, 저잣거리로 달려갔던 왕팔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흔적을 찾았습니다.”
“흔적? 흔적을 찾았다고?”
“예. 서둘러야 합니다. 표국의 마차를 이용했어요.”
왕팔의 말에 아직도 멍한 표정의 고덕이 물었다.
“표국?”
“예. 하포 표국에서 복주로 가는 마차를 탔다고 합니다. 한데…….”
“한데?”
“아무래도 정신이 돌아오신 거 같습니다.”
순간, 고덕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정신이 돌아와?”
“예. 분명 사모의 흔적을 쫓아 물었는데 표국에선 정숙한 대갓집 아가씨 같았답니다. 말수도 적고 싸늘했다고…….”
말이 많고 다정다감한 연화와는 맞지 않는 표현이다.
“옷은?”
“오늘 입고 가셨던 붉은색 성장에 나비 문양 머리 장식도 확인했습니다.”
왕팔의 답에 고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가자!”
급히 집을 나서는 고덕과 왕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고길 내외의 눈에 불안감이 가득했다.
* * *
하포 표국의 국주는 황당했다.
느닷없이 쳐들어와서는 막아서는 표사들을 반죽음으로 만들어놓은 이가 물은 것이라곤 그저 얼마 전에 마차를 타고 복주로 떠난 여인의 정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거라면 좋은 말로 물어도 되었을 게 아닙니까?”
“시간 없다. 빨리 불기나 해.”
“정보 같은 건 가진 게 없습니다. 그저 복주로 가는 마차 편을 내놓으라고 해서 주었을 뿐이니까요.”
“돈도 없었을 텐데?”
“도착해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디로 가자고 했기에 돈도 안 받고 마차 편을 제공한 거지?”
“복건성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입니다요.”
“제형안찰사사?”
복건성 제형안찰사사면 복건성의 치안을 맡은 곳이다.
“예. 그랬습니다.”
“그곳으로 가잔다고 두말없이 움직였다?”
“거기에 말투나 행동거지가 대갓집 규수 같았기에…….”
대갓집. 주로 관부의 권력을 가진 집안을 말한다.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 낸 고덕이 물었다.
“차림새가 붉은색 성장에 나비 문양 머리 장식 맞나?”
“맞습니다. 눈에 확 띌 만큼 뛰어난 미녀라 명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국주의 말에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고덕은 곧바로 복주를 향해 달렸다.
그 뒤를 따라 움직이던 왕팔이 물었다.
“이대로 무조건 따라가면 되겠습니까?”
“관도로 가면 된다.”
“하포에서 복주로 가는 관도는 네 개나 됩니다. 그중 어느 것을 이용했을진 모르지 않습니까?”
“모두 뒤진다.”
왕팔의 경공이라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도 시간이 걸린다. 적어도 한 길에 하루 정도는 소모될 것이다.
“표국의 마차입니다. 말을 바꿔가며 전력으로 달릴 것입니다. 그렇게 달리면 하포에서 복주까진 사흘 안에 당도합니다.”
“고생만 하고 길이 엇갈릴 수 있다는 말이냐?”
“예, 대협. 차라리 복주의 제형안찰사사 앞에서 기다리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마음이 그것을 거부했다.
“꼭 사흘이 넘어가란 법은 없다. 중간에 만나면 그것이 하루나 이틀이 될 수도 있으니까.”
결국 관도 모두를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바람 그 자체인 양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고덕을 쫓느라 왕팔은 죽어나갈 지경이었다.
결국 내력의 고갈에 떨어져 나간 왕팔을 버려둔 고덕은 홀로 관도를 달렸다.
고덕이 네 갈래의 관도를 모두 살피는 데 들어간 시간은 사흘이 아니라 나흘이었다. 하나당 꼬박 하루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보았느냐?”
먼저 와 복건성 제형안찰사사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자신에게 묻는 고덕에게 왕팔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표국의 마차는 하포 표국은 물론이고 다른 표국의 것도 들어간 것이 없습니다.”
“속았다.”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려 다시 하포를 향해 달리는 고덕을 왕팔이 낮은 한숨과 함께 따랐다.
며칠 만에 돌아와 사기를 쳤다며 난리를 치는 고덕에게 하포 표국의 국주는 머리를 저었다.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질 않습니까?”
“복건성 제형안찰사사엔 마차가 오지 않았다.”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럼 내가 거짓을 말한단 말인가?”
“그, 그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제형안찰사사로 간다고 했단 말입니다.”
억울하다는 국주의 항변에 왕팔이 끼어들었다.
“그럼 기다리죠. 기다리면 빈 마차가 돌아올 것입니다. 그럼 그때 도착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마차가 돌아오면 확인이 될 것입니다.”
국주마저 동의하고 나서자 고덕이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두고 보지.”
결국 하포 표국에 때 아닌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마차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오 일이 지나서였다.
“왜 이리 늦게 온 건가?”
국주의 책망에 마차의 경호를 위해 따라붙었던 표사 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기다리는 사람이…….”
국주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를 밀치고 고덕이 나섰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나운 기세에 놀라 움찔거리는 표사들에게 고덕이 물었다.
“어디에 내려 주었느냐?”
“누, 누구 말입니까?”
“이 마차를 타고 간 여인 말이다.”
순간 표사들의 얼굴에 긴장이 어린다.
“마, 말할 수 없소!”
“뭐라! 말할 수 없다?”
“그, 그렇소.”
무슨 이유인지 고집을 피우는 두 표사의 모습에 국주가 사색이 되었다.
“왜, 왜 이러나? 강 표사, 아 표사, 어서 말씀드리게.”
“손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돈을 받고 운송한 것입니다. 그 정보를 팔다니요. 안 됩니다, 국주님.”
평소에 자기가 하던 말로 버티는 눈치 없는 표사들을 향해 국주가 고함을 질렀다.
“그것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지. 표국을 다 말아먹을 셈이야!”
국주의 발작에 놀란 두 표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란에 모여든 표사들과 표두들이 표국의 신의를 지키려는 자신들을 도우려는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모두 겁먹은 표정일 뿐이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두 표사들을 향해 흉신악살의 표정이 된 고덕이 다가섰다.
“어디 한번 버텨 봐.”
“흐, 흐억!”
기겁을 하는 두 표사들을 고덕이 덮쳤다.
크아아악-
곧바로 찢어지는 비명이 하포 표국의 담장을 넘어 멀리 울려 퍼졌다.
손을 터는 고덕의 앞엔 주먹세례에 잘 다져진 두 표사가 늘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제형안찰사사가 아니라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로 갔다?”
도지휘사사면 한성의 군사 최고 기관이다.
“그, 그렇습니다.”
다 죽어가는 음성의 표사를 바라보며 고덕이 확인을 이었다.
“도지휘사가 직접 마중을 했고?”
“예.”
표사의 답에 곤혹스런 고덕의 시선이 왕팔에게 향했다.
“가능한 이야기 같냐?”
“그, 그게…….”
평상시 보아오던 연화의 모습과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한성의 군사 최고 지휘관이 직접 마중할 신분이라는 것도 쉽게 짐작되지 않았다.
“후~ 헛다리짚은 거 아닐까?”
“모든 흔적이 연결됩니다. 사모님이 틀림없습니다.”
왕팔의 확신에 고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직접 찾아가 확인하는 거.”
“그… 렇지요.”
마지못해 동의한 왕팔은 고덕의 뒤를 따라 복주로 달렸다.
* * *
좀처럼 보기 어렵다는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집기들로 가득한 어두운 실내에 촛불 하나를 가운데 두고 두 명의 사내가 마주 앉아 있었다.
“요샌 조용한가 보더군.”
“뒤엉킨 것을 푸는 중이라서 말일세.”
“후후, 검마를 목표로 움직인다더니 일이 틀어진 모양이지.”
말과 함께 몸을 의자에서 바로 세우는 탓에 드러난 얼굴은 암천의 주인, 마교의 교주 마제였다.
“그냥 조금…….”
“조금 틀어졌는데 일 년 가까이 운신을 못한다……. 후후, 세 살 먹은 아이도 믿지 않겠네.”
“그런가? 그럼 말이 나왔으니 좀 묻지. 검마란 자,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가 있었다면 자네가 일을 벌여 보지도 못했을 인사지.”
“날 막아설 수 있는 자다?”
“아닐 것 같나?”
“자네를 십여 수 만에 제압한 날세. 그런데도 그리 말하는가?”
“그에 대해선 정말 모르는군.”
“무슨 소린가?”
“천마신교에서 교주의 존역(尊域)을 아나?”
“아! 그거. 교주가 머무는 삼 장 안이라 하더군.”
“맞아. 그런데 그게 왜 삼 장인 줄 아나?”
“나도 궁금했네. 도대체 존역이라는 것을 왜 정했는지 말이야.”
“존역은 그 누구라도 침범할 수 없네.”
“그렇더군.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도 않았어. 자네의 친위대조차 말이야. 뭐, 그 덕에 내가 들키진 않고 있지만…….”
그 말과 함께 드러나는 사내의 모습은 마제와 똑같았다.
자신과 똑같은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제가 인상을 구겼다.
“언제 봐도 기분이 좋지 않군.”
“그냥 거울을 보는 거라 생각하라니까. 그나저나 하던 말이나 계속하지.”
상대의 답에 마제가 인상을 구긴 채 말을 이었다.
“존역의 범위는 교주마다 달라져. 아니, 한 교주의 재임 기간 중에도 바뀔 때가 있지.”
“왜 그런 거지?”
“사실 존역은 위엄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경호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야.”
“경호… 아! 그럼 자네의 경우엔 삼 장 밖이라면 누구에게도 암살을 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인가?”
“그랬지. 한 사람만 빼고.”
“한 사람? 누구? 설마, 검마?”
“그가 잘하는 말이 하나 있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마제의 답에 그와 똑같은 얼굴의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그로부터 안전한 거리는 얼마지?”
“글쎄, 정확히 측량하려 시도해본 기억은 없네. 다만 그가 교주전으로 다가설 때면 언제나 긴장으로 솜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지.”
그 말에 표정을 굳힌 사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질문을 바꾸지. 나라면 얼마의 공간을 확보해야 그에게서 안전하겠나?”
“오 장.”
너무나 쉽게 답하는 마제를 바라보는 사내의 표정이 굳어졌다.
“흐음… 오장이라……. 날 너무 가볍게 본 게 아닐까?”
사내의 말에 마제가 피식 웃어 보였다.
“나도 말을 바꾸지. 그럼 자넨 그 이상에서 나에게 자신이 있나?”
결국 사내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져 버렸다.
“확실한 평가겠지?”
“자네가 강호 파란의 뇌관으로 검마를 삼는다고 말했을 때, 솔직히 난 춤을 추고 싶었네.”
“내가 실패할 것이라 생각한 때문에?”
“실패하면 다시 시도하면 될 일. 춤을 출 것까진 없지.”
“하면, 왜……?”
“검마가 검을 들면 미치거든. 오죽하면 무극검이 그에게 붙인 별명이 광혈일까.”
무극검(無極劍) 무량도장.
천하오존의 일인으로 소림과 함께 백도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무당의 장생전주이면서 정천맹의 맹주를 맡고 있는 사람이다.
“무극검이 별명을 붙여 줘? 설마 둘이 겨룬 적이 있단 말인가?”
“겨뤄? 푸하하, 자넨 정말 그를 모르는군.”
“도대체 무슨 말이지?”
“천하오존에 검마의 이름이 올라 있네. 하지만 그가 강호행을 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생각하니 그렇다. 검마가 강호행을 했다는 소린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군.”
“그런데도 천하오존에 올랐어. 왜라고 생각하나?”
“마교의 주장 때문에……?”
넘겨짚는 상대에게 마제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지금의 천하오존은 무극검의 입에서 나온 이름들이네.”
“무극검이?”
“그래. 언젠가 정천맹의 군사인 제갈천이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물었다더군. 맹주님과 겨룰 만한 이가 누가 있습니까? 하고 말이야.”
현경에 오른 천고의 고수로 자타 공히 백도 최강자로 칭송되는 이가 무극검이다.
그런 그와 겨룰 만한 이라면 비슷한 경지의 인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거론한 것이 지금의 천하오존이다?”
“그렇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중 한 명만은 그가 복수하기 위해 집어넣은 이름이라는 것을 모르지.”
“그 사람이 검마라는 말인가?”
“그래. 검마에게 검 한번 잘못 들이밀었다가 당했던 수모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던 것이지.”
“무극검이 수모를 당할 정도였단 말이야?”
“풋- 아직도 그 모습이 선하군. 박살이 나선 넋이 나간 표정으로 검마를 바라보던 모습이 말이야. 하긴 그러고 보면 수모도 아니지. 고수에게 달려든 하수가 살아 돌아갔으니 선처지. 암, 선처야.”
마제의 말에 사내는 혼란스런 표정이었다.
철저한 계획하에 마교에 숨어든 지 수십 년. 드디어 날개를 펼치려 드는 순간에 생각 외의 복병이 드러난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가 어째서 그렇게 조용했던 것이지?”
“마교 내에 소문이 나지 않은 거 말인가?”
“그래.”
“세심한 자네도 간과한 모양이로군. 왜 소문이 안 나. 제대로 났지.”
“그게 무슨 소리지?”
“패주(敗主)의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나?”
“패주라면…….”
마교에 침투한 이후,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 수십 년을 암약해온 사내다. 그러니 마교 내부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는 일을 모를 리 없었다.
사내의 표정에서 패주에 관한 일을 그가 알고 있다고 판단한 마제가 입가에 비틀린 웃음을 매달았다.
“그래. 그가 바로 패천의 주인, 패주야.”
마제의 답에 사내의 눈이 부릅떠졌다.
고래로 마교엔 두 가지 하늘이 존재한다.
암천과 패천.
종교적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교주는 대대로 암천의 주인. 하지만 천마신교의 힘을 대변하는 패천의 주인은 대호법이었다.
그러나 삼백 년 전 혈교의 난 이후 대호법의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당시의 대호법이 혈교와의 전투 중 실종된 탓이다.
“하면, 그가 패천의 힘을 이었단 말인가?”
“아니라면 그의 직함이 뭐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야…….”
그러고 보니 검마가 머물던 곳은 호법원이다. 그것도 호법원의 심처 중 심처.
“하면, 그가 대호법!”
“공식적으론 식객이야. 그는 이미 교주의 자리가 흡수한 힘의 중심을 빼앗을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까.”
대호법이 공석이 된 후, 교주의 자리는 종교적 위엄뿐이 아니라 힘의 중심으로 우뚝 서며 실질적인 마교의 주인이 되었다.
자신의 질문에 선선히 답하는 마제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사내가 물었다.
“네 자릴 빼앗은 나야. 왜 이런 이야길 해주는 거지?”
“이미 검마를 건드렸으니까.”
“하지만 그는 내가 뒤에 있는 것도 모를걸.”
“글쎄, 뭐에 팔려서인지는 몰라도 그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조만간 그의 시선이 이곳으로 돌려질 거야. 어쩌면 직접 찾아올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나와 똑같이 생긴 그 얼굴만으론 어림도 없을걸.”
검마란 이가 마제가 이야기한 정도의 능력을 가졌다면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금세 읽어낼 존재이긴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걸. 그 전에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될 테니까.”
“왜? 그를 흔드는 게 아니라 아예 깨트려 보려고? 크크, 그것도 좋겠지. 그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려지는 시간이 당겨질 테니까.”
마제의 빈정거림에 기분이 상한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입이 여전히 살아 있는 걸 보면 아직 살 만한 모양이로군.”
“이 꼴을 만들어놓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모양이지?”
말과 함께 촛불 아래로 내미는 그의 아랫배에는 커다란 고리가 꿰어 있었다.
단전을 뚫고 등 뒤로 튀어나온 고리는 번들거리는 묵 빛을 띠고 있어 지독한 독이 묻어 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후후, 그걸 달고서라도 살아 있길 원한 건 자네였네.”
“그랬지. 그가 돌아와 자네의 목을 잘라내는 걸 보고 싶었으니까.”
후회했다.
교를 떠나는 검마를 막지 못했던 것을.
아니, 떠나는 이의 수족이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아 그가 수십 년을 들여 완성시킨 참마대와 마검대를 떠나는 그의 앞에 던져 지웠던 것을.
그때 피웠던 자신의 아집을 피눈물로 후회했다.
그만 있었다면, 아니 그들만이라도 있었다면…….
그 힘이 자신의 손에 있었다면 이렇게 무능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후, 또 후회하는 모양이군. 하지만 이미 늦었어. 사라진 참마대와 마검대가 돌아오기 이전에 모든 건 끝나 있을 테니까. 네가 왜, 무엇 때문에 교에서 내보냈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사라진 덕에 내 거사가 십 년은 짧아졌으니까. 아주 고마운 일이었지.”
사실 교내의 그 누구에게도 참마대와 마검대를 떠나는 검마의 앞에 던져 지웠다는 걸 알리지 않았다.
마제 자신의 아집을 차마 수하들에게 내보일 수 없었던 탓이다.
그 까닭에 사내조차 참마대와 마검대의 능력은 알아도 그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긴 그렇기에 참마대와 마검대를 경계했다고 말하면서도 그를 홀로 지운 검마를 부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이겠지만…….
“그것만 후회하는 건 아니지. 혈교의 후예가 침투한지도 모르고 살았던 안일함을 통렬히 반성 중이니까.”
“푸후- 좋은 자세야. 너무 많은 걸 잃은 후에 깨달은 것이지만, 중요한 것을 알았으니 축하해주지.”
“나도 미리 축하해주지.”
“뭘?”
“곧 들이닥칠 너의 장례식을…….”
퍽-
어떠한 반항도 못하고 얻어맞은 마제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웃었다.
“크크크… 재미있군, 재미있어.”
“재미있다니 알려 주지. 오늘부터 네 수족을 잘라줄 생각이야. 부교주인 혈마부터 차례차례, 아주 철저하게 짓이겨 주지. 기대하라고.”
멀어지는 사내의 등을 바라보는 마제의 눈에 참담함이 가득했다.
* * *
하포 표국을 떠났던 고덕은 왕팔과 함께 복주 시내에 위치한 도지휘사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뭐라고 하실 생각이신데요?”
왕팔의 물음에 곤혹스런 표정의 고덕이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무림 방파가 아닌 관부에 들어가려니 마땅한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담을 넘자니 그것도 만만치 않다.
아무리 관부라 하나 오만의 향방군을 지휘하는 도지휘사사 정도라면 한다 하는 관부 무장들 다수가 머물고 있을 터. 만에 하나 자신의 월담이 발각되는 경우엔 돌이키기 힘든 곤경에 처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일단 제가 알아볼까요?”
왕팔의 물음에 고덕의 고개가 힘없이 끄덕여졌다.
관부완 전혀 연관이 없는 자신이니 달리 묘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덕의 승낙에 왕팔이 조심스럽게 위병들에게 접근했다.
“이보시오, 내 말 좀 하나 물읍시다.”
왕팔의 말에 위병장이 나섰다.
“무슨 일인가?”
“내 사람을 하나 찾소만.”
“누구? 도지휘사사에 근무하는 병사인가?”
“아니요. 병사가 아니고 얼마 전에 이곳으로 들어간 아가씨를 찾소만…….”
왕팔의 물음에 위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지휘사사에 아가씨가 들어가? 지금 나와 농을 하자는 것인가?”
“아, 아니요. 나는 그저 며칠 전에 이곳으로 하포 표국의 마차를 타고 도착했을 아가씨를 뵙길 원할 뿐이오.”
“이자가 그래도!”
화를 내며 앞으로 나서는 위병장에게 한 병사가 다가가 귀엣말을 속삭였다.
그러자 위병장의 표정에 당황감이 떠올랐다.
“그, 그분을 왜 찾는 거요?”
당황감에 더듬거리기까지 하는 위병장의 말투는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그게… 아무래도 저희 댁 분 같아서요.”
“정말이오?”
“예. 아무리 봐도 그래서…….”
“잠시 계시오. 내 연통을 넣어보리다.”
왠지 모르게 서두는 위병장의 모습에 왕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러났다.
위병장의 명을 받은 병사 하나가 안으로 달려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녀 한 명을 대동하고 돌아왔다.
“안으로 모시랍니다.”
병사의 보고에 위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가시오.”
위병장의 허락에 왕팔과 고덕이 시녀를 따라 도지휘사사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한참을 움직여 내원의 월동문에 도착한 고덕과 왕팔의 신형이 굳어졌다.
“모셔 왔습니다.”
시녀의 말에 돌아선 여인은 푸른색 성장에 머리를 틀어 올린 궁장을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지? 날 찾아왔다고 하던데?”
그녀, 연화의 물음에 고덕은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고, 왕팔은 어쩔 줄 몰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