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여상(如上)-사람을 낚다
잔잔한 바다에 드리워진 낚싯대를 바라보는 고덕의 눈매가 부드럽다.
여상으로 돌아온 지 보름. 다시 돌아간 협가에선 고길 내외를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버선발로 달려 나온 협가 가주의 모습에 고길 내외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표정이었다.
느닷없이 내당의 당주로 승차한 나성운의 표정도 볼만했고, 부엌일에서 손을 떼게 된 고진의 환한 미소도 마음을 포근하게 했다.
그런 고덕의 상념을 옆 갯바위에서 낚시를 하던 형, 고길의 음성이 깨웠다.
“덕아, 좀 잡히냐?”
형의 물음에 들어본 자신의 어망에선 손바닥보다 작은 물고기 두 마리가 팔딱이는 게 전부였다.
“별루. 형은?”
“오늘은 시원치 않네.”
“이러다 매운탕거리도 못 잡아 가는 거 아니오?”
“글쎄다…….”
가을 바닷바람은 남쪽인 복건에서도 시원함 이상이다.
하지만 고덕은 물론이고 형인 고길도 평상복 그대로였다.
고덕이 알려 준 심공을 연성한 이후 부쩍 건강해진 고길은 만사에 과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어어…….”
형에게서 시선을 돌려 낚싯대를 확인하던 고길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잡아채진 낚싯대…….
잔뜩 휘어진 낚싯대가 무언가 커다란 것이 걸렸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더 당겨. 힘을 줬다 풀었다. 그렇지, 그렇게. 월척이다. 잘해야 한다.”
동생의 낚싯대를 확인한 고길이 한달음에 뜰채를 갖고 달려와 더 부산이었다.
내공까지 써가며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건져 올린 포획물을 바라보는 고덕과 고길의 표정이 가관이다.
“이거…….”
“살았냐? 죽었냐?”
형의 물음에 널브러진 여자의 목에 손을 댔던 고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살아 있는 모양인데?”
“그럼 뭐하고 있어, 냉큼 업어야지.”
“업어? 왜?”
“왜긴, 살았으면 얼른 집으로 옮겨야지. 저대로 두면 체온이 떨어져서 죽는다.”
“버리면 안 되고?”
“무슨 그런 끔찍한 농담을……. 어서 업어.”
형, 고길의 등살에 못 이겨 낚싯줄에 걸려 올라온 여자를 들쳐 업은 고덕이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고길과 함께 낚시를 나간다던 고덕이 여자를 업고 들이닥치자, 마당을 쓸고 있던 왕팔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낚시였으면 같이 가지…….”
왕팔의 투덜거림을 듣지 못한 고덕은 서둘러 안방으로 향했다.
“거긴 왜?”
허겁지겁 뒤따라온 형의 물음에 고덕이 답했다.
“이 여자 눕혀야지.”
“네 방으로 가.”
“내 방?”
“그려.”
순간, 자신의 방을 불청객에게 빼앗길 걱정이 든 고덕이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팔이. 그렇지, 팔이 방으로 가죠.”
“시끄러. 어서 네 방으로 가.”
형의 성화에 마지못해 자신의 방에 여자를 내려놓은 고덕을 밀치며 형수가 다가들었다.
“어서 물 끓여 와요.”
“제가요?”
“그럼 이 여자 옷 벗기는 걸 보고 있을 생각이세요? 도련님은.”
“아, 아니요.”
후다닥 물러난 고덕이 부엌으로 향하다 말고 왕팔을 바라보자, 그가 빗자루를 내보이며 말했다.
“어머님이 청소하랬는데요. 그죠, 어머니-?”
왕팔의 큰 목소리에 방 안에서 유 씨의 음성이 돌아 나왔다.
“청소 잘하는 팔이는 그냥 두시고, 도련님은 어서 물 끓여 오세요.”
형수의 음성에 두고 보자는 표정으로 왕팔에게 주먹을 쥐어 보인 고덕이 마지못해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끓여 방 안에 들여놓은 고덕은 형수의 성화에 제대로 여자의 상태도 살피지 못하고 내몰리고 말았다.
“내 방인데…….”
멍하니 방 앞에 앉아 있던 고덕과 형, 고길은 형수의 들어오란 말에 방 안으로 들어섰다.
깨끗이 씻겨 이불을 덮어놓은 여인은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온기가 돌아오고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의원한텐 안 보여도 될까?”
고길의 물음에 형수가 고개를 저었다.
“숨도 잘 쉬고 온기도 돌아왔으니 지켜보죠. 아직 젊은 처자를 함부로 의원에게 내보일 순 없잖아요.”
“그렇긴 한데, 정신을 못 차리니까…….”
“오늘 밤에 지켜보고 내일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그때 의원을 불러보자구요.”
“그러지 그럼.”
고길의 답에 형수가 고덕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에 잘 지켜보세요.”
유 씨의 말에 고덕이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누구, 제가요?”
“그럼 누가 돌봐요. 그리고 도련님이 건져 올렸다면서요?”
“그, 그거야… 하지만 데려오자고 한 건 형이었는데요?”
“그래서요? 지금 형보고 이 여자 옆을 밤새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조금은 날카로워진 형수의 음성에 고덕의 고개가 황급히 저어졌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여자는 여자. 그런 여자의 질투에 대항할 마음 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탓이다.
“아, 아니요. 제가 볼게요.”
“진작 그렇게 하시지……. 자- 우린 나가요.”
형수의 말에 고길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고덕을 힐끗거리곤 밖으로 나갔다.
그런 형의 반응 뒤로 남겨진 고덕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시간이 흘러 해가 졌지만, 져넉 식사까지 방으로 가져다준 형수 탓에 고덕은 방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결국 밤이 되어 한참을 여자를 지켜보던 고덕이 심술궂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래야 되는데. 지가 깨어날 때 되면 깨어나겠지.”
결국 여자를 보살피던 것을 때려치운 고덕은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밤이 깊고 부엉이 소리만 깊어질 때, 여자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음…….”
눈을 뜨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는 여인의 눈에 바로 코앞에 있는 사내의 얼굴이 들어왔다.
한참 동안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여인은 일어나려다 실패하고선 이불이 덮여 있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굵은 사내의 다리 하나가 자신의 배 위로 걸쳐져 있는 것을 확인한 여인은 사내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여인은 밤을 하얗게 새웠다.
* * *
“으으윽~”
이상한 소음을 내며 기지개를 켜던 고덕의 눈이 떠졌다.
“흡!”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당황하던 고덕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서렸다.
“뭐, 뭐하는 거야?”
“안녕.”
“안녕? 지금 그 꼴로 안녕이라는 말이 나오냐?”
“그 꼴?”
고덕의 말을 되뇌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왜, 미워?”
“미운 건 아닌데……. 아니, 지금 상황에 그 대사가 맞는 게 아니잖아.”
벌컥 화를 내는 고덕의 모습에 여인의 표정이 금세 울 것같이 변했다.
“당신은 내가 미운 거구나.”
“그, 그건 아니고……. 아니, 일단 이거부터 입고.”
형수가 가져다놓은 옷가지를 던져 준 고덕은 돌아앉았다.
아무리 산전수전 안 겪은 일이 없다지만, 여인이 관계된 일은 그다지 능숙하지 못했던 탓이다.
한참을 돌아앉아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없자 슬쩍 돌아본 고덕은 인상을 찌푸렸다.
여자가 윗도리를 아래에 입고 바짓단에 한 팔씩을 집어넣은 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하는 거야?”
“씨잉, 옷이 안 맞아…….”
울상인 여자의 말에 고덕은 할 수 없이 여자에게 옷을 입혀 주어야만 했다.
‘모자란 여잔가……?’
고덕의 속마음을 모르는 여인은 고덕의 손에 입혀진 옷을 보며 신나 했다.
세면을 위해 여자를 데리고 나오던 고덕은 왕팔과 먼저 마주쳤다.
“안녕히 주무… 셨어요?”
“인사가 왜 그따위야.”
불편한 심기를 자신에게 풀려는 듯 으르렁거리는 고덕에게 왕팔이 물었다.
“어제 그…….”
“그래.”
“예쁜데요.”
“예쁘긴…….”
말을 하며 돌아보던 고덕은 아침 햇살에 환하게 빛나는 여인의 얼굴에 뒷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 깨어났네.”
형수의 음성에 고덕이 돌아보자 여인이 유 씨에게 달라붙는 게 보였다.
“언니, 안녕.”
“어, 언니?”
“응. 언니, 나 배고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걸 간파한 유 씨의 표정이 측은하게 바뀌었다.
“쯔쯔, 참한 아가씨가…….”
“의원에게 보여야겠어.”
뒤따라 나오던 고길의 음성에 유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야겠어요.”
고길 내외의 대화에는 상관없이 여인은 유 씨의 팔에 매달려 ‘배고파’만 연발하고 있었다.
여인의 성화에 쫓기듯 서둘러 마련한 아침 밥상에서 여인은 고덕을 따라 했다.
밥도 고덕처럼 고봉으로 퍼달라고 떼를 썼고, 고덕이 먹는 반찬만 먹었다.
수저에 담기는 밥도, 그 작은 입에 채 들어가지도 않을 만큼 잔뜩 퍼서 먹느라 반은 흘렸다.
그 모습에 고덕은 투덜거렸고, 고길과 왕팔은 여인을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들을 나무란 유 씨는 여인이 흘린 음식들을 치우며 밥 먹는 것을 도왔다.
“내 다녀오리다.”
옷을 단정히 하며 툇마루에서 내려오는 고길에게 유 씨가 걱정을 늘어놨다.
“윗마을 최 의원네 말고 시내 저잣거리에 있는 안 의원에 가세요. 그곳이 더 잘 봐요.”
“그리하리다. 가자.”
고길의 말에 자신의 한 팔을 끌어안고 바짝 달라붙은 여인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고덕이 따라나섰다.
“좀 떨어지지.”
“싫어. 부부는 이렇게 붙어 있어야 한댔어.”
“부부? 누가 부부야?”
“당신하고 나.”
“미치겠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도련님.”
유 씨의 만류에 투덜거림을 멈춘 고덕이 왠지 흐뭇하게 웃고 있던 고길을 따라 집을 나섰다.
* * *
마을을 벗어나 하포 저잣거리로 들어선 일행은 유 씨의 말대로 안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의 진단을 기다리는 동안 여인은 약재들을 들춰보며 신기해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의원은 여인을 진맥하고는 기억상실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기억상실증?”
“예, 어르신. 무언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거나 바다에 빠지면서 생긴 외부적 충격에 의해 기억을 잃어버린 거 같네요.”
“애초에 저런 건 아니고?”
“기맥이 튼튼한 게 지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진 않으니 애초에 저런 상태는 아니었다고 보이구요.”
“그럼 못 고치는 건가?”
“약을 지어드리긴 하겠지만 크게 효험을 보긴 어렵습니다. 원래 기억상실 같은 병은 평생 가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오기도 하거든요.”
“안 돌아오면 평생 저런 채 살아야 한단 말인가?”
“지적인 문제가 아니니 새로 배우면 금세 정상적인 사람이 될 겁니다. 기억상실의 경우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에 대한 습득은 상당히 빠르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저래서야 애들 같아서, 원…….”
걱정하는 고길의 시선엔 약재로 들여놓은 바짝 말린 박쥐를 살펴보며 까르르 웃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 * *
의원이 지어준 약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여인은 고덕의 팔을 놓지 않았다.
저잣거리의 여인들은 속도 모르고 부부가 금슬이 좋다며 덕담을 건네 고덕의 심기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어주었다.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집에 돌아온 고덕은 여인이 형수에게 달라붙어 다시 밥 달라 아우성치는 덕에 간신히 해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해방은 불행히도 그때뿐이었다.
“이건 뭐야?”
“고사리.”
“이건?”
“조기.”
“요건 뭔데?”
“만두! 그만 묻고 밥이나 먹어!”
“피- 당신은 애정 표현이 너무 거칠어.”
“뭐?”
어이없이 바라보는 고덕에게 여인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난 당신을 사랑해.”
“풉-”
먹던 밥알을 모조리 뿜어낸 고덕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얼굴에 온통 밥알이 튄 여인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덕아.”
“대협!”
여인과 마찬가지로 고덕이 뿜어낸 각종 음식으로 엉망이 된 세 사람의 원성이 방 안을 채웠다.
“어디 가?”
점심을 먹고 고길, 왕팔과 함께 밭으로 나서려던 고덕은 여인에게 한 팔을 잡혔다.
“밭에.”
“밭? 밭이 뭔데?”
“밭이 밭이지 뭐긴 뭐야!”
버럭 짜증을 내는 고덕에게 눈을 흘겨 준 유 씨가 나섰다.
“곡물을 키우는 곳이라우. 우리가 먹는 음식의 대부분이 그곳에서 자라고 나지.”
“그럼 당신이 밭을 키워?”
“밭을 키우는 게 아니라 밭에서 곡물을 키우는 거라우.”
형수의 정정에 배시시 웃어 보인 여인이 고덕에게 달라붙었다.
“나도 갈래.”
“네가 왜?”
“당신이 가니까. 남편이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 가야 한다고 했어.”
“누가 남편이야?”
“피- 당신.”
“이게 자꾸…….”
“서방님, 안 의원이 연화 말대로 인정하라고 했다면서요.”
연화는 이름도 모른다는 여인에게 연꽃처럼 곱다고 유 씨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 돌팔이가 뭘 안다고…….”
“돌팔이라뇨. 이 근방에서 제일가는 의원이에요.”
“그렇다고 제가 서방이 돼요?”
“도련님이 딸린 식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못할 것도 없잖아요.”
“그래도…….”
불만스런 고덕의 음성에도 아랑곳 않은 연화가 고덕의 팔을 잡아당겼다.
“얼른 가자.
성화인 연화를 바라보던 고덕이 포기의 표정을 지었다.
“젠장, 그래! 가자, 가!”
투덜대며 성큼성큼 걷는 고덕의 한 팔을 감싸 안은 연화는 뭐가 좋은지 폴짝폴짝 뛰며 따랐다.
그 모습에 미소를 지은 고길이 왕팔과 함께 뒤따랐다.
밭에 나온 세 사람은 그러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연화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물어댄 탓이다.
“이건 뭐야?”
“무잖아!”
“무? 우리가 먹는 그 무?”
“그래.”
“아~ 무가 이렇게 생겼구나……. 근데 이거 뽑아도 돼?”
“안 돼.”
“왜?”
“다음 달은 되어야 뽑아.”
“왜 다음 달에 뽑아야 하는데?”
“아직 안 여물었잖아.”
“여물어? 여물은 게 뭐야?”
“아직 다 안 자랐다고.”
“그걸 왜 여물었다고 하는 거야?”
“그냥 그렇게 써.”
“왜 그렇게 쓰는 건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고덕의 화에도 불구하고 연화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피- 또 화낸다. 알아, 나도 당신 사랑해.”
“그게 화내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알아, 당신 부끄러워하는 거.”
“이런!”
“크크큭.”
한쪽에서 큭큭대는 왕팔을 쏘아봐준 고덕이 연화를 피해 다른 쪽으로 움직이자 그녀가 따라붙었다.
“이건 뭐야?”
“배추다. 왜?”
“배추? 배추로 뭐하는데?”
“아까 이거 넣고 볶은 거 먹었잖아!”
“이걸 먹었다고? 내가?”
“그럼 네가 먹지 누가 먹냐?”
고덕의 말에 연화가 고길을 돌아봤다.
“정말이야, 오빠?”
노인에 대한 구분이 없는 탓인지 연화는 유 씨를 언니, 고길을 오빠라 부르며 잘 따랐다.
“그렇다우. 아까 먹은 채소 볶음에 들어가 있었지.”
“음… 그렇구나. 근데 이것도 못 뽑아?”
다시 물어오는 연화에게 고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못 뽑으면 어떻게 먹었겠냐? 너 바보야!”
“또, 또. 알았어. 나도 사랑한대도.”
“이런 젠장!”
“그래, 사랑한다니까.”
“에이, 빌어먹을.”
“사. 랑. 해. 됐어?”
“에이… 그래, 됐다. 됐어.”
“피- 부끄럼장이.”
“으아아악~”
왠지 계속 피식거리는 고길과 왕팔과 함께 돌아온 고덕은 유난히 지쳐 보였다.
그런 고덕을 바라보던 유 씨가 남편을 책했다.
“힘든 일을 너무 도련님만 시키지 마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저렇게 지친 거 좀 봐요. 측은하게.”
“아! 저거. 크크.”
“무슨 반응이 그래요? 동생이 힘들다는데.”
“지 색시한테 시달려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색시? 아! 연화 처자가 왜요?”
“궁금한 게 아주 많은 아가씨더라고.”
자신의 답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의 등을 토닥인 고길이 말했다.
“나중에 말해주리다. 우선 밥이나 주구려. 하도 많이 웃었더니 오늘따라 허기져서 혼났소.”
“예, 어서 씻고 들어가요. 준비는 다 해놨으니 바로 상을 들일게요.”
“그럽시다.”
잠시 후, 유 씨가 내온 저녁상 앞에서 벌어진 질문 공세에 대한 고덕의 대처와 연화의 반응을 보며 유 씨는 고길이 나중에 해주겠단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던 고덕이 뒤를 돌아봤다.
“왜 따라와?”
“나 졸려.”
“졸리면 자.”
“알았어.”
그렇게 답한 연화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드러눕자 어이없는 표정의 고덕이 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신들의 방문을 열고 바라보던 고길 내외와 왕팔이 황급히 문을 닫아버렸다.
“젠장!”
“알아, 사랑해. 나도…….”
졸음이 가득한 연화의 음성에 하늘을 향해 마구 주먹질을 해댄 고덕이 할 수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겉옷을 벗어 걸고 돌아보니, 언제 잠들었는지 연화는 이불도 펴지 않은 맨바닥에 누워 이미 잠들어 있었다.
“젠…….”
푸념을 내뱉으려다 말고, 움찔거리는 연화를 본 고덕이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후~ 이게 무슨…….”
조용히 한숨을 내쉰 고덕은 이불을 펴고 연화를 안아 그 위에 눕혔다.
“이런!”
그러고 보니 이불이 일인용이다. 할 수 없이 연화만 덮어준 고덕은 어제처럼 그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깊은 밤, 보드랍고 따듯한 느낌에 고덕은 안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에게 안겨 드는 고덕을 미소로 바라보던 연화가 자신의 배 위에 다리 하나를 올려놓게 하곤 잠을 청했다.
* * *
“흐으으윽.”
기지개를 켜며 일어서던 고덕은 기겁을 했다.
홀딱 벗은 채 역시 알몸인 연화를 끌어안고 있는 형상의 자신을 발견한 까닭이다.
“뭐, 뭐야!”
언제 일어났는지 놀라는 고덕을 배시시 웃으며 바라보던 연화가 일어나 앉은 고덕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쪽-
“잘 잤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고덕이 엉겁결에 답했다.
“어, 어. 자, 잘 잤어.”
“으으윽.”
고덕을 흉내 내는 것인지 기지개를 펴는 연화의 어깨에서 이불이 흘러내리며 탐스러운 가슴이 드러났다.
“흡!”
잔뜩 당황한 고덕의 앞에서 연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입었다.
제대로 못하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대단히 능숙하게 옷을 입은 연화는 방문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
마당을 쓸다 말고 열려진 문 안으로 고덕을 바라보던 왕팔의 말이 흐려졌다.
순간, 자신의 처지를 상기한 고덕이 황급히 이불을 끌어 덮었다.
“아, 아무 일 없었다고!”
“아, 예… 뭐, 있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묘한 미소를 짓는 왕팔의 말에 인상을 구긴 고덕이 문을 닫았다.
밖으로 나와 있던 연화는 닫힌 문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제와 달리 인사가 정중하다. 그녀의 위치를 감 잡은 왕팔의 처세인 셈이다.
“응. 팔이도 잘 잤어?”
“네. 그나저나 어떻게, 지난밤엔 좋은 꿈 꾸셨습니까?”
“응. 궁궐처럼 커다란 집에서 언니, 오빠랑 재밌게 노는 꿈꿨어.”
“그러셨군요. 좋으셨겠습니다.”
“응, 좋았어.”
“잘 잤수?”
방에서 나오던 유 씨의 인사에 연화가 미소를 지었다.
“응. 언니도 잘 잤어?”
“그럼. 그런데 언제까지 그렇게 반말을 할 생각이유?”
“반말?”
“그렇지. 어른이나 윗사람에게는 존댓말을 해야 하는 거라우.”
“그럼 남편은?”
“당연히 존댓말을 써야지.”
“존댓말은 어떻게 하는 건데?”
“말끝에 요 자를 붙이면 되는 거라우.”
“요 자? 이렇게… 요?”
“어이쿠, 잘하는구만.”
유 씨의 칭찬에 환한 미소를 짓는 연화를 바라보는 왕팔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 몇은 잡아먹을 미색이라니까.’
“잘하는 거야… 요?”
연화의 물음에 웃음을 지은 유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아요. 조금 지나면 더 좋아질 테니까.”
“응.”
“그땐 예라고 하는 거라우.”
“예.”
“호호호, 어디, 오늘은 나랑 같이 음식도 만들어보지 않겠수?”
“정말 만들어도 돼? 아니, 돼요?”
반색을 하는 연화의 물음에 유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리 오시우.”
유 씨와 함께 연화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고길에게 왕팔이 다가갔다.
“못 보셨죠?”
“뭘?”
“아침에 문이 열렸는데 고 대협이 발가벗고 있었습니다.”
“덕이가?”
“예. 절 보시더니 황급히 이불로 가리시던데요.”
“그럼……?”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지요.”
“일은 무슨 일! 아무 일 없었다니까!”
언제 나왔는지 고덕이 고리눈을 뜨고 노려보자 왕팔이 후다닥 고길의 등 뒤로 숨었다.
“정말 벗고 있었긴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그, 그건…….”
말을 못하는 고덕을 바라보는 고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한창땐 다 그런 거란다. 부끄러워하긴…….”
“누, 누가 부끄러워한다고 그래!”
괜히 화를 버럭 내는 고덕을 바라보는 고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