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협(俠)과 협(狹)-글자 차이
시간이 흐르고, 사십대의 장한과 건장한 청년 둘이 찾아왔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아버님.”
장한의 정중한 인사에 고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냈나? 나 서방.”
“나? 협가 아니었어?”
“협가의 협은 성이 아닙니다. 한데, 누구신지……?”
사내의 물음에 고덕에게 눈을 흘긴 고길이 소개를 했다.
“자네 처숙부 되시네.”
“예?”
“젠장, 또 얼굴이지.”
고덕의 불만에 웃음을 머금은 고진이 나서서 남편에게 설명을 한 연후에야 일행의 인사는 다시 진행될 수 있었다.
“성운이 처숙부님께 문안 올립니다.”
정중한 인사에 고덕이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덕이라네.”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왕팔이 나섰다.
“잘 지내보세, 제부.”
“누구……?”
“오라버니세요. 숙부님의…….”
고진의 설명에 나성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형님.”
“나도 반갑네.”
나성운의 손을 부여잡은 왕팔은 환한 얼굴로 흔들어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년들이 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강녕하셨습니까? 할아버님.”
“오냐오냐, 천이도 잘 지냈고?”
“예. 문안 여쭙니다. 할머니.”
“오냐, 내 새끼. 이전보다 훌쩍 커졌구나.”
유 씨의 말에 멋쩍은 미소를 머금은 나천이 고덕에게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천이가 작은 외할아버님을 뵙습니다.”
“오냐, 반갑구나.”
고덕의 답에 나천이 왕팔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외숙을 뵙습니다.”
“오냐오냐,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입이 귀에 걸릴 만큼 찢어진 왕팔의 답에 천이가 물러나자 나문의 인사가 이어졌다.
그렇게 이어진 모든 인사가 끝나서야 자리에 앉은 나성운이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사위가 능력이 미천하여 좋은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니야, 무슨 소리. 우린 이만만 해도 충분함세.”
“암, 우리 집에 비하면 대궐이구만.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걱정 말아.”
고길과 유 씨의 말에 이어 왕팔까지 거든다.
“그럼, 숙소야 무슨 상관인가? 자네를 보고 이렇게 조카들을 보았으면 되었지.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게.”
물론 고덕은 고까운 표정으로 덜떨어진 조카사위와 왕팔을 바라보았지만…….
사람들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나성운은 미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런 나성운에게 고덕이 물었다.
“그나저나 남궁세가에선 사람이 온 건가?”
“내일 정도에 도착한다고 들었습니다.”
“단리세가는?”
“그곳도 내일 도착할 것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혹시 인연이 있으신지요?”
나성운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인연은 무슨……. 그냥 유명한 애들 얼굴이나 보려고 했지.”
고덕의 답을 들은 나성운의 표정에 미소가 그려졌다.
“처숙부님의 무위가 초절정이라 들었습니다.”
고덕의 외모를 고려한 최소한의 능력치를 아들에게서 들었던 고길이 동생을 자랑한답시고 그리 소개한 까닭이다.
“뭐, 대충.”
고덕의 답에 왕팔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단리세가에서 초극의 극의로 인정한 인사가 저리 말하니 무슨 꿍꿍이인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방은 좁았어도 화기애애했다.
아쉬운 게 한 가지 있다면 셋째라는 아랑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아랑인 영 안 올 모양이구나.”
부친인 고길의 걱정에 고진이 송구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너무 많이 부어서 그래요. 가라앉는 대로 온다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얼굴이 부어? 왜? 혹시 운 게야?”
유 씨의 말에 고진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속상해서 그렇지요.”
“마음에 두었다는 그 청년 때문에……?”
“예. 많이 좋아했던 모양이에요.”
“저런… 상대 청년은 아예 관심도 없었던 게고?”
모친의 물음에 고진이 남편의 눈치를 힐긋 보았다.
“그건 아닌데…….”
얼버무리는 고진을 대신해 그녀의 남편인 나성운이 나섰다.
“청년이 아랑이에게 관심이 있은들 무엇하겠습니까? 집안에선 이미 정해진 혼처가 있었답니다. 그 탓에 남궁세가에서 곤혹스러워졌다고 정식으로 항의를 해온 탓…….”
“이런… 아랑이 그것의 마음이 짠했겠구만…….”
“더구나 아버님께 불려 가 한참 꾸중을 들은 탓에…….”
안휘협가의 입장에선 남궁세가의 불만을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애한테… 내 참…….”
고덕의 불퉁거림에 나성운의 고개가 숙여졌다.
“다 제가 못난 탓입니다.”
-저 자식, 진짜 못난 놈 아니야!
고덕의 전음에 왕팔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형보단 낫다는 소리를 듣는 친굽니다. 사실상 후계자로 선택될 뻔했기도 했구요.
-그런데 왜 안 된 건데.
-혼… 인 때문이었을 겁니다.
-뭐?
-소문엔 장자가 섬서 철가의 여식을 안사람으로 맞으며 후계자가 되었다 하였으니, 나 서방이 밀려난 거야 처가의 후광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오문 출신답게 주저리주저리 정보를 토해놓는 왕팔의 전음을 듣고 있던 고덕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뭐야, 그럼 우리 집안하고 혼인했다고 후계자에서 밀려났다 그 말이야?
-그… 런 셈이지요. 근데 이거 은근히 열 받는데요.
-내 말이!
왠지 씩씩거리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이상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나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다.”
화들짝 놀란 왕팔이 손사래를 쳤지만, 고덕은 여전히 씩씩거리기만 했다.
아랑은 그날 늦게서야 나타났다.
애써 부은 얼굴을 가라앉히고 온 모양이었지만, 별 소용없는 짓이 되어버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더니 눈물이 봇물 터지듯 터지며 대성통곡을 해버린 까닭이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간신히 울음을 그친 아랑의 눈은 퉁방울만큼 부어버렸다.
그런 아랑의 등을 유 씨가 토닥였다.
“다 인연이 아닌 게여. 마음 다잡고 울지 말거라.”
“외할머니… 제가 그렇게 신분이 낮아요? 언감생심이래요. 쳐다보지도 말래요. 높은 나무는 올라가는 게 아니라 올려다보는 거라고…….”
아랑의 울먹임에 고길이 심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다 무슨 소리여?”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내 신분이 낮아서 안 되는 거라고… 꿈도 꾸지 말라고요.”
아랑의 말에 고길은 애꿎은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고, 나성운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이고, 내 새끼, 얼마나 짠했을까나……. 이 할미가 다 안다. 다 알아. 불쌍한 내 새끼…….”
유 씨의 품에서 훌쩍거리는 아랑을 바라보던 고덕이 곁에 앉은 안천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녀석 이름이 무엇이더냐?”
작은 속삭임에 바짝 다가앉은 안천이 물었다
“누굴 말씀하시는 건가요? 작은 외할아버님.”
“아랑이가 좋아했다는 그 녀석 말이다.”
“아! 태 말씀이시군요.”
“태? 그놈 이름이더냐?”
“예. 태, 남궁태입니다. 그런데 왜……?”
“아니다. 그냥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다.”
아무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고덕을 바라보는 안천은 왠지 불안함을 느꼈다.
그날은 그렇게 울음과 참담함으로 가득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 * *
다음 날, 남궁세가에서 사람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덕이 사라졌다.
단지 구경하러 나갔다고 생각했던 가족들은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덕이 아랑의 일로 남궁세가를 찾아갔을 것이라 생각한 왕팔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왕팔이 내심 불안해하는 사이, 고덕은 남궁세가 사람들이 배정받았다는 전각으로 들어서다 눈에 익은 사람과 마주쳤다.
“어? 자네가 웬일이야?”
“대, 대협!”
놀라는 남궁단의 모습에 고덕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온 것인가?”
“예. 외총관부의 일이온지라……. 한데, 대협께선 어찌……?”
“사돈이야.”
“예- 에? 사돈이요?”
“그렇다네. 이곳이 내 사돈일세. 조카가 셋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곳으로 출가를 했거든.”
“그렇습니까? 이거 안휘협가가 대협의 존재를 미리 알았던 모양이로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다는 집안의 딸을 안휘협가에서 며느리로 맞아들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 탓이다.
“글쎄…….”
확답을 피하고 묘하게 웃는 고덕에게 남궁단이 물었다.
“한데, 어디에 묶고 계십니까?”
“우리? 우리는 정문 쪽의 접객원에 머물고 있네.”
“저, 접객원이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남궁단의 물음에 고덕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워낙 없는 집안이라 홀대를 좀 받거든.”
“예? 설마요.”
세상에 초극의 극의에 이른 고수를 홀대하는 무가는 없다.
더구나 안휘협가같이 대항마로 내세울 비슷한 경지의 고수가 아예 없는 곳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적어도 멸문당하기 싫다면 말이다.
“뭐, 그 설마가 가끔 사람 잡을 때도 있는 거니까.”
“정말입니까?”
“그럼 내가 자네한테 거짓말하겠나?”
“아, 아닙니다. 그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뭐가 이해가 안 가?”
“안휘협가에서 대협을 알면서 그리 대한다는 게 말입니다.”
“그럼 모르나 보지, 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설마 정말 모르는 겁니까?”
“사실 조카가 이곳으로 시집온 건 내가 집으로 돌아오기 전이었거든.”
“아!”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갔다.
안휘협가는 고덕이라는 이 인물을 모르는 것이다. 어쩌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랄 힘과 광기를 말이다.
“협가가 운이 없군요.”
“뭐, 그런 편이지. 그나저나 내 뭐 좀 하나 묻지.”
“말씀하십시오.”
“내가 조카 손녀의 혼담을 자네 집안에 넣으면 높은 나무를 쳐다보는 것일까?”
“무슨 그런 말씀을! 고 대협 집안과의 혼담이라면 아마 가주가 맨발로 뛰어나올 겁니다.”
그럴 것이다.
적어도 가주는 제하이십사강과 동급의 고수를 가족으로 묶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 버릴 만큼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저기…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친구가 혹 이미 혼약이 정해진 곳이 있으면 어찌 되는가?”
“설마 그런 아이를 고르시겠습니까?”
“그러니 만약이라 하지 않나. 만약.”
고덕의 고집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남궁단이 답했다.
“정말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저는 대협을 밀겠습니다.”
“그 말 확실한가?”
“예. 설사 맹주님의 속가 제자와 정혼된 사이라도 그리하지요.”
맹주. 청천맹주인 권왕(拳王) 구환 대사를 이르는 것이다.
‘구환 까까머리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자신의 속내를 감춘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아일언.”
“중천금입니다.”
“좋았어. 나중에 봄세.”
그 말만 남겨 두고 훌쩍 떠나버린 고덕의 모습에 남궁단은 피식 웃어버렸다.
“협가의 대접이 많이 서운했던 모양이로군. 내게 그런 말을 다 물어보고……. 그나저나 협가가 어찌 대처하려고 용을 들여놓고 모욕을 주는가? 이걸 말해야 하나…….”
같은 팔대세가라고는 하나 협가는 분명 남궁과는 경쟁 상대인 팽가에 연줄을 대고 있는 곳이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남궁단은 고개를 저었다.
“다 제 복인 게지……. 다만 고 대협과 인연이 있는 곳이니 앞으로 더 가까워져야 하기는 하겠군.”
남궁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처소 안으로 사라졌다.
* * *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물론 칠순연 본 날은 아직도 삼 일이나 남아 있었지만, 구 일 동안 잔치를 열고 손님을 먹이고 재우는 풍습으로 인해 연회는 이미 시작된 셈이었다.
연회가 시작되었지만 고길 내외는 아직도 협가의 가주와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했다.
손님 접대에 바쁘다는 핑계로 뒤로 밀린 탓이다.
고진과 아랑의 고개는 숙여져 들릴 줄 몰랐고, 저녁이면 찾아오는 나성운의 세 부자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자 왕팔은 답답하기만 한 마음을 달랠 요량으로 접객원 밖으로 나왔다.
“하아~ 사람이 많긴 많구나.”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람들, 그들을 접대하느라 바쁜 무사들, 그리고 그들에게 날라지는 음식들을 바라보는 왕팔은 침이 꿀꺽 넘어갔다.
“우리도 좀 챙겨다주지…….”
아직 잔칫상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
삼시 세끼야 주고 있었지만, 일반적인 식사에 준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잘 차려 나오는 식단도 아니었다. 그저 일반 무사들이 먹을 정찬 정도…….
“어머, 정(丁) 호실의 사람 아니야?”
“그러네. 그런데 정 호실 사람들, 성운 님네 처가 식구들이라며.”
“응. 시골에서 농사짓는 이들이라니 잔치 음식이나 얻어먹으려고 온 모양이지, 뭐.”
“근데 초대 안 한다더니 어찌 온 거래?”
“성운 님이 무릎 꿇고 애원해서 어쩔 수 없이 하나 주었다고 하던데.”
“정말?”
“응. 그럼 저런 사람들을 사돈이랍시고 쟁쟁한 손님들 앞에 내놓고 싶겠어? 내가 가주님이라도 싫겠다, 얘.”
“하긴… 그 덕에 저 집 두 모녀가 부엌일에서 해방된 거 아니니.”
“풋- 세가의 직계가 부엌일이라니, 난 처음엔 너무 놀랐잖아.”
“나도. 한데, 뭐 자주 보니 그저 그러려니 싶더라.”
“하긴 우리 일도 덜어지고. 능숙한 게 딱 부엌일에 제격이던데, 뭐.”
“맞아. 호호호.”
“뭣들 하는 게냐? 서둘러 음식을 옮기지 않고!”
나이 든 하녀장의 호통에 수다를 떨던 하녀 둘이 화들짝 놀라 사라지자, 참담하게 일그러진 왕팔에게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아~”
“그래서 땅이 꺼지겠냐?”
느닷없는 음성에 뒤를 돌아보니, 천천히 걸어 나오는 고덕의 모습이 보였다.
“나오셨습니까?”
“그래. 안에 있다간 속 터져 죽겠어서 나와봤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우리, 여기에 계속 있어야 하는 겁니까?”
“왜? 달리 할 일이라도 있는 거냐?”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창피해서 그래?”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닌걸요. 저 하오문 출신입니다.”
강호에서 온갖 설움은 다 받는 곳이 바로 하오문이다.
그러니 창피가 아니라 모욕, 멸시라 표현할 만한 일들도 수도 없이 겪어봤었다.
“그럼 왜?”
“그냥 마음이 답답해서요. 제가 아무런 힘도 못 되어주는 게 힘들기도 하고…….”
풀 죽은 왕팔의 음성에 입가에 미소를 지은 고덕이 물었다.
“그럼 힘 좀 한번 써볼래?”
고덕의 은근한 음성에 고개를 든 왕팔이 물었다.
“힘이요?”
“그래. 할 일이 좀 있다.”
“왜요? 설마… 여기서 무슨 일을 하시게요?”
“그럼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순 없잖아.”
“아이고, 참으세요. 우리야 속풀이를 하고 간다지만, 남아 있을 진이랑 아이들을 생각하셔야죠.”
“걔들에게 피해 안 가게 하면 될 거 아냐.”
“세상에 상처를 안 주는 복수가 어디에 있습니까? 상처 입은 사람이 진이 식구들을 그냥 두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홀대를 받는 모양인데 제발 그냥 두세요.”
왕팔의 말을 들은 고덕의 표정에 이채가 스쳤다.
“홀대를 받아? 평시에도?”
“아, 아니에요.”
당황하는 왕팔의 모습에 고덕의 음성이 차가워졌다.
“난 내 주변에서 내가 모르는 일들이 벌어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그게…….”
“말해!”
“그, 그럼 다른 일은 벌이지 않는다고 약속을…….”
“쓰읍-”
이를 보이며 눈을 부라리는 고덕의 행동에 겁을 집어먹은 왕팔이 방금 전 하녀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네가 있는데도 그런 말을 했단 말이냐?”
“거리가 있어서…….”
“강호 세가니라. 그 정도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수백 명씩 드나드는 곳이야.”
“우리가 농사나 짓는 평범한 사람들이라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무시했다.”
“무시까지는 아니고…….”
서둘러 진화를 해보려 했지만 이미 고덕의 눈에선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고덕을 바라보는 왕팔의 표정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왕팔의 불안과 달리 고덕은 폭발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나갔다.
* * *
칠순연 본 연회의 날이 밝자 손님들이 모두 중앙 대연무장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안내되었다.
높은 단이 설치되고 주변으로 수십 개의 대형 천막이 차려졌다.
그 천막 아래도 천태만상이다.
푹신한 의자가 놓인 곳, 바닥에 짚을 깔고 그 위에 보료를 깔아놓은 곳, 널찍한 돗자리를 펼쳐 놓은 곳, 그저 맨바닥인 곳까지…….
그렇게 마련된 자리로 사람들이 안내되어왔다.
오늘의 주인공인 협가의 가주와 이름만 대도 알 수 있을 정도의 강호 문파들에서 온 이들은 단상으로 안내되었다.
그와 함께 뛰어난 무가에서 온 손님들은 의자가 놓인 천막으로, 중소 문파들에서 온 손님들은 보료가 깔린 천막으로, 안휘의 소문파들에서 온 손님들은 돗자리가 펼쳐진 천막으로 안내되었다.
그런 이들을 수행해온 하인들과 인근 동리에서 구경 온 잡인들, 구걸 온 걸개들은 모조리 맨바닥 위에 펼쳐진 천막으로 안내되었다.
고길 내외와 고덕, 왕팔이 안내된 곳도 바로 그 천막이었다.
“이, 이게 무슨!”
황당한 대우에 왕팔마저 당황했지만, 고길 내외는 무덤덤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치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런 부모를 고진이 아픈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자식들. 내 사돈만 아니었으면…….’
분을 속으로 삭인 고덕도 형의 곁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뭐, 자리도 축축하고 시원한 게 좋네.”
조금 큰 목소리였는지 주변에서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시선을 주었던 이들 중에 의자가 놓인 천막에 앉아 있던 남궁세가의 무사가 있었다.
“저, 저분은!”
가주가 극진히 대했던 이의 얼굴을 잊을 리 없었던 그 무사가 황급히 단상에 앉아 있던 남궁단에게 전음을 보냈다.
-외총관님, 외부인들이 머무는 천막을 보십시오.
-외부인들… 헉! 저분이 왜 저길?
-어찌할까요? 이리로 모실지……?
-우리가 객인 곳이다. 잠시 지켜보자꾸나.
-알겠습니다.
수하의 전음으로 고덕을 발견한 남궁단이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던 협가의 가주, 협무검 나현을 바라보았다.
‘답답한 양반. 여전히 세가의 부흥을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외부의 도움에서 찾으려는 것인가? 그러니 이미 손안에 들어온 용을 못 보고 저리 대하는 것이겠지.’
협가 가주를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궁단의 곁에 앉아 있던 단리명이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지난 한백의 사건을 계기로 서로 하나씩의 실수를 저지른 두 세가는 옛날의 원만한 관계로 돌아가 있었다.
양쪽 다 순간의 방심과 복수에 눈이 먼 실수라 인정한 까닭이었다.
“아, 아닙니다. 참! 단리 외총관께서도 안면이 있겠군요. 저기 보이십니까?”
남궁단의 시선을 좇아 움직이던 단리명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아, 아니, 저분이 왜 저곳에!
커다란 소리를 지를 뻔했던지 급히 전음을 날리는 단리명에게 남궁단이 고개를 저었다.
-협가의 사돈 되신다더구려.
-예? 사돈이요?
-그렇다 하더이다.
-아니, 더구나 사돈인데 왜 저기에 계신단 말입니까?
-그게… 협가에선 저분을 모른답니다.
-모른다니 그게 무슨……. 설마 저분의 능력을 모른단 말입니까?
-예. 자신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조카가 이리로 출가를 하면서 맺은 사돈이라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들은 기억이 납니다. 협가의 차남이 웬 시골 농사꾼의 딸과 성혼했다고 했었지요. 한동안 놀랄 만한 이야기로 회자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더군요. 문제는 협가가 그동안 그렇게 얻은 며느리를 꽤나 홀대했던 모양입니다.
-협가가 악수 중에 악수를 두었군요.
-그렇게 보입니다.
남궁단의 답에 단리명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우리도 객인데 나설 명분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저분의 성격이…….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 괜한 불똥이 튀는 게 아닌지…….
단목세가였다면 두말 않고 달려갔을 일이다.
하지만 고덕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은 그의 한계를 제하이십사강에 두고 있었기에 불안해하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불안한 가운데 칠순연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각지 각 문파에서 온 사람들이 순서대로 선물을 내놓고 정식으로 인사를 건네는 형식으로 시작된 연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르익어갔다.
문파의 규모와 위치가 낮아질수록 내놓는 선물의 가치가 올라갔기 때문이다.
안휘협가의 힘에 의지하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중소문파들의 안쓰러운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들의 마지막, 근동의 유지들이 내놓는 선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협가가 위치한 육안의 상인 엽합회에서 올린 선물을 필두로 빠른 속도로 쌓여 가는 선물 위에 고길이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약재가 얹혔다.
“사돈의 칠순을 축하합니다.”
허리를 굽히는 고길을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나현의 모습에 고덕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런 그의 팔을 왕팔이 조심스럽게 잡아왔다.
“진이의 시가입니다.”
왕팔의 말에 떨림이 천천히 멈추었다.
“그래, 조카의 시가였지…….”
그렇게 칠순연의 본 행사가 끝나고 술잔이 돌았다.
시간이 지나 주연이 무르익었지만, 나현은 끝내 고길을 찾아와 술 한 잔 나누지 않았다.
아니, 고맙다는 치사 한마디는 물론이고 부드러운 눈빛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 차가운 냉대 속에 본 연회가 끝이 났다.
구 일간 계속되는 연회는 아직 중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길은 본 연회가 끝난 다음 날 귀로에 올랐다.
한없이 홀대만 받았던 탓에 그런 고길 내외를 고진도 나성운도 잡지 못했다.
고길 내외가 돌아가는 날.
남궁단과 단리명이 수하들을 데리고 배웅을 나왔다.
“객의 신분이라 함부로 나설 수 없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대협.”
“용서하십시오.”
허리를 깊숙이 숙이는 남궁단과 단리명의 행동에 배웅하던 나성운과 그 가족들이 경악 어린 시선으로 고덕을 바라보았다.
상대가 아무리 초절정의 고수라 할지라도 지금 나온 두 사람이 허리를 굽힐 이들이 아닌 까닭이었다.
“뭐, 다 나름의 속사정이 있고 입장이 있었겠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니 괘념치들 말아.”
“부끄럽습니다.”
“송구합니다, 대협.”
다시금 허리를 숙인 두 사람을 따라 그 뒤의 무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개중엔 고덕의 무위를 직접 목격한 단리세가의 무사도 섞여 있었다.
그의 허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 비해 더욱 깊게 숙여졌다.
그런 단리세가의 무사를 발견한 고덕이 피식 웃었다.
“이봐.”
고덕의 부름에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낀 단리세가의 무사가 놀란 표정으로 답했다.
“예, 예. 대협.”
“이름이 뭔가?”
“다, 단리청입니다.”
“그래, 청. 자네 도를 좀 줄여 봐. 도신 길다고 적을 잘 잡는 건 아니니까. 중도보단 길게, 장도보단 짧게. 자네 팔 길이를 고려하란 소리야. 알겠나?”
고덕의 말에 단리청이 큰 목소리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대협.”
저 정도의 고수가 하는 말이다.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닌 걸 알기에 단리청은 대단히 기쁜 표정이었다.
주변의 무사들도 사내의 행운에 부러운 눈치가 역력했다.
그것이 훗날 단리세가를 팔대세가의 수좌까지 끌어올린 단도대협(短刀大俠) 단리청의 시작이었다.
수하이기도 했지만 단리 성을 쓰는 가족이었다. 그런 이에 대한 배려에 단리명이 감사를 전해왔다.
“은혜를 입었습니다, 대협.”
“은혜는 무슨. 워낙 홀대를 받았던 터라 눈에 띄었을 뿐이야.”
고덕의 말에 나성운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단리명과 남궁단의 얼굴엔 겸연쩍은 빛이 떠올랐다.
“자- 그럼 다음에 보세. 특히 자네.”
“저 말입니까?”
남궁단의 물음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자네. 설마 이곳에서 만난 첫날의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첫날이라시면…….”
‘내가 조카 손녀의 혼담을 자네 집안에 넣으면 높은 나무를 쳐다보는 것일까?’
‘무슨 그런 말씀을! 고 대협 집안과의 혼담이라면 아마 가주가 맨발로 뛰어나올 겁니다.’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친구가 혹 이미 혼약이 정해진 곳이 있으면 어찌 되는가?’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저는 대협을 밀겠습니다.’
기억을 떠올린 남궁단이 미소를 그렸다.
“아! 기억하고 있습니다.”
“좋아, 믿겠어. 남아일언.”
“중천금입니다.”
그날처럼 확약을 하는 남궁단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고덕이 마차에 몸을 싣자, 왕팔이 말들을 출발시켰다.
“이랴.”
그렇게 멀어져 가는 마차를 향해 사람들이 허리를 숙였다.
특히 단리청은 코가 땅에 닿을까 걱정일 정도였다.
수문각에서 그 상황을 보고받은 가주 나현이 남궁단을 찾았다.
마침 단리명과 차를 마시고 있던 남궁단은 나현의 방문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쉬시는데 방해를 드린 게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아닙니다. 잠시 섬전도 대협과 차를 한잔하고 있었습니다.”
“두 세가의 사이가 벌어졌다는 소문이 있어서 걱정을 했는데, 풍문이었던 모양입니다.”
나현의 물음에 단리명이 웃는 낯으로 답했다.
“예. 약간의 오해가 있었습니다만, 그것으로 사이가 벌어지기엔 두 세가의 유대가 너무 깊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솔직히 협가의 입장에선 다행은 아니다. 과거 남궁세가의 위세를 뒤에 업은 단리세가가 안휘의 상권을 틀어쥐고 있었던 까닭이다.
물론 남궁세가는 안휘를 휘어잡은 단리세가의 든든한 후원을 입고 천하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안휘에 위치한 협가로서는 두 세가의 연합이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협가가 약화된 원인도 바로 그것에 있다 할 정도로 협가가 입은 피해는 적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남궁단과 단리명의 포권에 고개를 끄덕인 나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내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구려.”
“말씀하십시오.”
“혹, 하포의 사돈과 아시는 사이시오?”
“하포의 사돈… 아! 고 대협 말씀이시군요.”
“고 대협? 그들이 고씨인 것은 맞으나 호천검에게 대협의 칭호를 들을 만한 사람은 아니라 알고 있소만…….”
나현의 말에 남궁단은 그가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실은 저도 놀랐습니다만, 고 대협을 전혀 모르시는 모양이었습니다.”
“그 고 대협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사돈 되는 사람들은 알고 있소만.”
“사돈이라시면 아마도 며느님의 부모님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렇소이다.”
“그렇다면 모르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저희가 고 대협이라 부르는 분은 며느님의 숙부 되시는 분입니다.”
“며느리의 숙부?”
“예. 본인은 은거를 했다 하나 출도도 하지 않은 은거가 있답니까? 더구나 제하이십사강과 동급의 고수를 누가 그냥 두지도 않을 것이고요.”
“가만, 지, 지금 뭐라 했습니까? 제, 제하이십사강과 동급의 고수요?”
“예. 제가 알고 있기로 고 대협의 경지가 초극의 극의이신 것으로 압니다.”
“서, 설마 그런 인물이 촌구석 농가에 묻혀 있단 말씀이오?”
믿지 않는 나현의 말에 단리명이 나섰다.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니 실력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솔직히 그 이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마음속의 생각을 속으로 삼킨 단리명의 말에 나현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 그 말씀이 정말이오?”
“예. 저 말고도 많은 가내의 무사들이 보았지요. 초극의 극의가 그리 강한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단리명의 말을 들은 나현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치르고, 서둘러 남궁단에게 내어준 전각을 나와 내원으로 달렸다.
그런 나현의 행동에 남궁단과 단리명, 두 사람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그렇게 내원으로 달려온 나현이 주변 사람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며느리, 며느리 어디 있느냐?”
“저 여기 있습니다, 아버님.”
첫째의 안사람인 철여란의 답에 나현이 고개를 저었다.
“너 말고 천이 어미 말이다.”
“동서야 부엌에…….”
“부엌? 그 아이가 왜 부엌에 있어?”
“그동안 어머님의 명으로 쭉 부엌일을 맡아왔는걸요.”
첫째 며느리의 답에 나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 갔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며느리에게 왜 부엌일을 시킨단 말이냐?”
“촌무지렁이에겐 부엌일이 제격이시라고…….”
“내 이런 망할!”
버럭 화를 낸 나현의 발걸음이 부엌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잘 뛰지도 않던 사람이 경공까지 써가며 도착한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아, 아가!”
“아, 아버님…….”
갑자기 들이닥친 시아버지의 모습에 놀란 고진의 음성에 나현이 다가섰다.
“이, 이게 무슨 꼴이냐. 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설거지를 하고 있던 자신의 손을 부여잡은 나현의 물음에 고진은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었다.
“예? 그, 그게…….”
무어라 답할지 몰라 더듬거리는 고진에게서 시선을 돌린 나현이 하녀장을 노려보았다.
“감히 네년이 죽고 싶어 이러한 일을 한 것이렷다!”
파랗게 일어선 나현의 서슬에 놀란 하녀장이 부엌에 바짝 엎드렸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가주님. 이년이 눈이 멀어 감히…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유는 몰랐지만 지금은 무조건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노력 때문이었을까?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내 그땐 네년을 물고를 낼 것이야.”
“아, 알겠습니다. 가주님.”
하녀장의 답에 나현이 고진을 이끌고 부엌을 나가는 것으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갑작스런 일이 지나간 후, 하녀들 사이에선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소란스러웠다.
고진을 데려온 나현은 곧바로 나성운을 불러 세가를 나선 사돈을 정중히 모셔 오라는 분부를 내렸다.
그에 제대로 이유도 듣지 못한 나성운은 아버지의 말에 부리나케 마차의 뒤를 쫓았다.
나성운이 마차를 쫓아 나간 지 반 시진. 방 안에서 서성거리던 나현에게 무사의 전갈이 전해졌다.
“가주님, 마차가 정문에 당도하고 있답니다.”
와당탕탕!
문이 부서질까 염려될 정도로 급격히 열리더니 나현이 정말 신발도 신지 못한 버선발로 정문을 향해 뛰어나갔다.
그런 가주의 모습에 뒤에 남겨진 무사의 눈에 의문이 가득했다.
* * *
안휘의 한 야산 자락에 버려진 사당 안.
혈포로 온몸을 감싼 사내가 어둠에 감겨 있었다.
“혈교 천하! 봉공을 뵙습니다.”
흑색 복면에 흑색 야행복. 흑면조의 조장이라던 사내가 그 앞에 부복했다.
“일을 망쳤다고?”
“죽여주십시오.”
스스로 죄를 청하는 흑면조장을 내려다보는 혈포인의 눈빛이 차갑다.
“알긴 하는군.”
“봉공!”
“왜? 죽여 달라더니.”
“살려 주십시오, 봉공.”
“살려 달라? 말이 너무 쉽게 변하는군.”
“봉공의 개가 되겠습니다. 살펴 주십시오.”
흑면조장의 사정에 혈포인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어렸다.
“지금은 아니고?”
“예?”
“지금은 말 잘 듣는 개가 아니냐고 묻는 것이다.”
봉공이라 불린 혈포인의 싸늘한 음성에 흑면조장의 고개가 숙여졌다.
“그, 그야 물론 지, 지금도 그렇습니다.”
상대의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혈포인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진해졌다.
하지만 쉽게 손을 내밀진 않았다.
“가져오라는 공은 잊어버리고, 엉뚱한 공마저 물어뜯어 못쓰게 만들어놓은 개를 살려 두어야 할까?”
“다, 다른 공을 또 물어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흑면조장의 음성엔 절박함이 가득했다.
“다른 공이라…….”
“예, 봉공.”
“하긴 아직 물어와야 하는 공은 많이 있으니까.”
“맞습니다. 시키시면 열심히 물어오겠습니다.”
이마를 바닥에 대고 바짝 엎드린 흑면조장을 내려다보던 혈포인의 고개가 마침내 끄덕여졌다.
“마지막이야.”
“가, 감사합니다. 죽음으로 봉공을 따르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야. 이번 일을 교주께 말씀 올리려면 나도 네놈처럼 이마를 바닥에 대고 기어야 할 테니까.”
혈포인의 말에 흑면조장의 음성에 곤혹스러움이 서렸다.
“보, 봉공…….”
“공치사를 하자는 게 아니야. 백 년이야. 더도 덜도 말고 딱 백 년.”
“교주께서 거사를 위해 들인 시간 말씀이옵니까?”
“그래. 그 긴 시간을 들여 준비한 일들이 틀어지고 있어. 네놈이 실패한 일도 그중 하나이고. 특히 검마의 일엔 항상 신경을 쓰고 계시니…….”
그의 말에 흑면조장이 걱정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검마의 일이 그리 중한 것입니까?”
“글쎄, 전체적인 계획을 놓고 보면 그리 중해 보이진 않던데. 모르겠어. 왜 그리 검마에 연연하시는 것인지.”
“소인도 그게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아무리 천하오존의 일인이라고는 해도 검마의 일로 동원한 안배가 자그마치 세 개입니다. 그걸 모두 드러낼 만큼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만…….”
그 의문에 혈포인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생각이 있으시겠지.”
“하온데 청면조장이 검마에게 패한 것은 어찌 된 일이온지……. 조장들이 얻은 힘은 천하오존과 동등한 힘이 아니었습니까?”
“동등하지. 하지만 그 동등함이 무조건적인 건 아니야.”
“무슨… 말씀이신지?”
흑면조장의 물음에 혈포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그럼 어디 한번 묻자. 네놈과 청면조장이 붙었다면 누가 이겼을까?”
“그야 소인이…….”
“하여간 그놈의 자만심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하면, 넌 천하오존을 능가하는 힘을 지녔나?”
“그, 그건 아닙니다.”
“그럼 적면조장과 네놈이 붙으면?”
“그, 그야…….”
인정하긴 싫었지만 적면조는 오로지 싸움을 위해 태어난 놈들이다.
그중에서도 적면조장은 싸움을 빼놓고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역시 자신이 없나 보군. 하긴 그놈은 나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놈이니까. 하여튼 그놈도 천하오존에 필적할 힘을 가졌어. 물론 나도 그렇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줄 알겠나?”
“같은 등급이라고 해도 격이 다르단 말씀이십니까?”
“격이라고 하기보단 힘의 운용 능력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럼 청면조장이 검마에게 당한 건 검마에 비해 힘을 운용하는 능력이 미숙했기 때문인 거군요.”
“그래, 그러니 그렇게 허무하게 간 것이지.”
“그나저나 청면조는 이제 어찌 되는 겁니까?”
“네놈이 살고 싶다면 살려 놓아야겠지.”
“제가 말입니까?”
“그래. 물론 맡기만 해선 안 될 테고.”
“최선을 다해 완수해 보이겠습니다. 봉공.”
“그래. 그 조건을 달아야 교주께 허락을 얻을 수 있을 테니, 잘해봐.”
“하오면 단리세가의 일은 어찌…….”
“이미 틀어진 일이니 그곳은 버린다.”
“그러면 팔대세가의 자중지란은 어찌합니까?”
“그 계획도 버린다. 대신 역량을 구파일방과 팔대세가의 틈을 벌리는 것에 집중해.”
“그 일에도 단리세가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그래, 청성과 문제가 생겼지. 작은 일이지만 잃어버린 게 커. 그냥 물러나진 못할 거야.”
“하오나 단리가 남궁과 화해를 한 이상 청성과도 은원을 풀려 하지 않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 남궁이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곳이니까 화해도 가능한 거야. 청성은 어림도 없어.”
“직접적인 가해자이기 때문입니까?”
흑면조장의 물음에 혈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절대로 이대로 넘어갈 수 없는 문제야. 지금처럼 흐지부지 흐르다 묻어버렸을 경우, 단리세가는 강호인들로부터 더 이상 무가로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을 테니까.”
“청성이 사과를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흑면조장의 물음에 혈포인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어렸다.
“체면 하나로 산다는 구파일방이 사과? 어림도 없어. 죽으면 죽었지, 제 잘못을 인정할 종자들이 아니야.”
“하오면……?”
“틈은 메워지지 않아. 그 틈을 더 넓게, 더 깊게 벌려 주는 것은 네 역량이겠지. 교주께선 도저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길 원하신다.”
“그리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그래. 기대해보지. 그나저나 검마는?”
“어제 협가를 나서 귀로에 올랐습니다.”
“대우가 좋았겠군.”
“협무검이 손님들에게 모조리 소개를 시킨 탓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협가의 사돈이 검마라고?”
“아닙니다. 여전히 검마는 신분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 탓에 소문은 초극의 극의에 이른 은거 고수로 나고 있습니다.”
“초극의 극의라……. 하긴 그만해도 쉽게 볼 수 없겠지.”
“예. 제하이십사강과 동급이니까요.”
“검마가 갑자기 마교를 뛰쳐나와 신분을 숨기고 강호행을 한다?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마교 교주의 명이 아니겠습니까?”
흑면조장의 말에 혈포인의 고개가 저어졌다.
“내 생각도 그랬지. 하지만 교주께선 아니라고 했다.”
“하, 하면……?”
“교주께선 검마가 더 무서워진 거라고 말씀하셨지.”
“더 무서워진 거라고요?”
“그래. 그게 능력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심계를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어.”
“능력이 올라갔다면 당연히 마교 교주의 자리를 차지했지, 외유를 택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게 외유가 아니라 탈퇴라니까 문제지.”
“탈퇴요? 정말 검마가 마교에서 탈퇴한 것입니까?”
“교주께선 그렇게 보고 계셨다.”
마교의 공작은 교주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교주의 말이라면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
“하면, 마교는 정천맹에 대한 우위를 상실한 것이 아닙니까?”
“둘이었던 천하오존이 검마의 탈퇴로 인해 하나로 줄었으니 정천맹과 동수가 된 셈이긴 하지. 더구나 전체적인 고수의 수는 정천맹이 앞서니 단지 숫자로만 본다면 마교가 우위를 상실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
“하오면 정천맹을 흔들어 아예 마교를 도모하면……?”
“어림없는 소리. 어줍지 않은 충동질에 불이 붙을 놈들이었다면 벌써 사단이 났을걸. 괜한 일로 흔적만 남기지 말고 계획이나 충실히 성공시켜.”
“아, 알겠습니다. 봉공.”
고개를 조아리는 흑면조장을 바라보던 혈포인이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검마를 향한 네 번째 안배는 어디지?”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네 번째 안배는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해서, 다섯 번째 안배로 곧바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아쉽게 되었군.”
“그래도 남겨진 네 번째 안배는 다른 곳에 쓸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나저나 다섯 번째 안배는 어디에서 시작되는 거지?”
“청성입니다.”
“청성?”
“예. 구파일방과 팔대세가의 틈을 벌리는 일에 연관 지어 일을 벌여 볼까 합니다.”
“놈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할 거야.”
“절대로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흑면조장의 답에 혈포인이 미덥지 못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찌 그리 장담하지?”
“남궁을 끌어들일 생각입니다.”
“남궁을?”
“예.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테니 믿어주십시오.”
“좋아. 내게 결과를 가져와. 단, 기회는 한 번뿐이란 거 명심해.”
“예, 봉공.”
쿵.
자신의 결의를 나타내기 위해 고개를 바닥에 짓찧으며 답하는 흑면조장의 앞에서 혈포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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