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귀가(歸家)-집이 최고야
복건성으로 들어선 마차는 한도회가 아니라 인근의 객잔부터 향했다.
고덕이 그곳부터 들러야 한다고 주장한 까닭이었다.
“치, 칠아!”
“진명아! 어이구, 내 새끼!”
여전히 객잔에 남아 있던 고길 내외는 무사한 고칠 부자의 모습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한참 부산을 떨었던 고길이 뒤에 서 있던 고덕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
“고맙긴. 내 조카와 조카 손자였다구.”
밝게 웃는 동생의 모습에 고길의 입가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녀석…….”
그렇게 맞잡은 형제의 손에 따스한 정이 흘렀다.
아들과 손자가 무사한 모습을 확인한 고길 내외는 한도회에 다녀가란 고칠의 청을 거절했다.
돌아온 것을 보았으니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엔 아들의 직장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고길 내외의 배려가 짙게 깔려 있었다.
부모의 고집에 고칠의 시선이 고덕에게 향했다.
“작은할아버님.”
“나도 귀찮다.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고.”
“하지만…….”
“내가 꼭 가야 하는 일도 아니고.”
“회주께서 서운해하실 겁니다.”
“글쎄… 오히려 고마워할지도 모르지.”
“예?”
“아니다. 그냥 해본 말이다.”
알 수 없는 그 말을 끝으로 고덕도 입을 닫은 탓에 결국 고칠의 가족만 한도회로 향하게 되었다.
아들 내외를 한도회로 들여보낸 고길 내외는 고덕과 함께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마차에서 내린 고길이 마부석에 앉은 왕팔의 손을 붙잡고 치사를 했다.
“고맙소. 마부 양반 덕분에 편히 왔소이다.”
“예? 에…….”
어찌 되는지 몰라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왕팔을 흘깃 바라본 고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 그놈 군식구야.”
“뭐?”
“군식구라고. 뭐, 나름 열심히 일은 시켜 보겠지만 밥벌이나 제대로 하려는지 모르겠네.”
고덕의 말에 고길이 물었다.
“수, 수하인 게냐?”
“수하는 무슨, 저렇게 덜떨어진 놈을 무슨 수하씩이나…….”
말끝을 흐리는 고덕의 행동에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고 판단한 고길이 잡고 있던 왕팔을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반갑구려. 난 덕이의 형인 고길이라우. 이쪽은 내 안사람이고.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아이고, 도련님의 수하라고요? 반가워요.”
“아, 예. 왕팔이라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왕팔을 고덕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야, 집이 역시 좋아.”
툇마루에 벌렁 누우며 터트리는 고덕의 감상에 고길이 미소를 지었다.
“암, 집이 최고지.”
두 사람의 말에 잠시 안색이 흐려진 왕팔에게 다가온 유 씨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왕 씨도 앞으론 여기가 집이유. 그러니 이젠 왕 씨도 집에 온 셈이지. 알겠수?”
유 씨의 마음 씀에 눈시울이 붉어진 왕팔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님.”
“에구머니, 마님은 무슨……. 나이 또래가 우리 칠이랑 비슷하니 그냥 아주머니로 불러요.”
그녀의 말에 슬쩍 고덕의 눈치를 보다 그의 고리눈과 마주친 왕팔이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마님!”
그런 왕팔의 모습을 본 고길이 힐난의 표정으로 고덕의 등짝을 때렸다.
퍽-
“아야, 왜?”
“몰라 물어?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는……. 이보시게, 왕 씨라 했나?”
“예, 나리. 왕팔입니다요.”
“나리는 무슨……. 덕이가 장난을 친 것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그나저나 양친은 생존해 계시는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내 괜한 걸 물은 모양이로구만…….”
“아닙니다. 오래전 일이니 이젠 괜찮습니다.”
“허허허, 그럼그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럼 안사람 말대로 내 아들뻘 되니 앞으론 그저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게.”
“그, 그래도 됩니까?”
“그럼. 옛말에 이르길 제자와 수하는 자식과 같다 했으니……. 우리 덕이의 자식뻘 되는 사람인데 내 새끼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고길의 말에 유 씨마저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럼 말씀 편히 해주십시오.”
기억에도 흐릿한 시절에 양친을 잃은 왕팔이다.
살아남기 위해 척박한 삶을 살아온 그에게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라 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것이 왕팔의 가슴 한편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 그래도 될까?”
“그럼요. 누가 자식에게 공대를 하겠습니까?”
“하하하, 그래. 그럼 내 그리함세.”
기쁘게 웃는 고길의 모습에 고덕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굳이 나서서 반대를 하진 않았다.
그렇게 고씨 집안에 왕씨 성을 쓰는 가족이 생겼다.
* * *
집에서의 생활은 한도회 사건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고길과 고덕 형제는 여전히 밭일을 나갔고, 유 씨는 찬을 날랐다.
물론 왕 씨는 고길과 고덕 두 형제의 뒤를 언제나 따라다녔다.
그렇게 쟁기질도 배우고 물 대는 법도 배워야 했지만, 왕팔은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자- 참 먹고 해요.”
참을 이고 밭으로 나온 유 씨의 음성에 왕팔이 쟁기를 놓고 쪼르르 달려갔다.
“아이고, 어머니, 힘들게…….”
서둘러 머리에 이고 온 광주리를 받아 내리는 왕팔에게 웃음을 보인 유 씨가 물었다.
“어때, 할 만은 해?”
“예, 점점 늘고 있습니다.”
“그럼그럼, 농사일은 자꾸 하면 느는 게야. 그나저나 힘들진 않고?”
“예. 아직 젊은 놈이 힘들 게 뭐라고요.”
“그렇지. 팔이는 아직 젊으니께. 자, 얼른 와 이리로 앉아.”
유 씨의 이끎에 자리에 앉은 왕팔의 앞에 음식이 놓이고 있었다.
뒤늦게 자리한 남편이나 고덕보단 왕팔에게 신경을 더 쓰는 눈치가 역력했다.
“형수님, 서운합니다.”
“아이고, 도련님도 참, 자식뻘인 사람에게 무슨 시샘이시래요.”
“그래도… 서운합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은 아직도 애기지요. 애기야. 자요, 여기 있으니 많이 드세요.”
음식을 끌어다놓는 유 씨의 행동에 고덕이 크게 답했다.
“예-”
그 모습에 고길 내외와 왕팔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하!”
“호호호.”
밝은 웃음만큼이나 따스한 햇살이 산 중턱에 만들어진 화전에 뿌려지고 있었다.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온 고길의 집에 서찰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게 뭐래요?”
유 씨에게서 서찰을 건네받은 고길이 겉봉을 확인하며 말했다.
“표국에서 온 건디. 가만, 보낸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 눈을 잔뜩 찌푸리곤 글을 읽었다.
“고진… 진이한테 온 거구만.”
“둘째가요?”
“그려.”
답하며 봉투를 뜯어 안에 든 서신을 꺼내든 고길이 잔뜩 눈을 찌푸리고 있자 왕팔이 다가섰다.
“아버님, 제가 읽어드릴까요?”
“오냐, 그려. 네가 좀 읽어보더라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고길에게서 서신을 받아든 왕팔이 읽어나갔다.
“아버님, 어머님, 두루 평안하신지요. 이렇게 서신을 올린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한참을 읽어 내려간 왕팔의 낭독이 끝나자 고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지 시댁 어른 칠순에 와 달라 그 말이구만.”
“예. 진이 낭자의 말대로라면 시어른이 아버님과 어머님을 초청했다네요.”
“진이 낭자는 무슨……. 가만, 팔이 네 나이가 올해 몇이라고 했지?”
“마흔둘입니다.”
“마흔둘이라……. 제일 큰 오라비뻘이구만.”
“가만… 우리 연이가 마흔이고, 진이가 서른아홉이니까 맞네요. 칠이 놈은 이제 서른일곱이니 더 말할 것도 없고. 팔이가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자손이네요.”
유 씨의 말에 왕팔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제일 큰 자손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헤헤헤.”
“마흔둘이나 처먹은 자식이 헤헤헤가 뭐냐. 헤헤헤가.”
뭐가 못마땅한지 툴툴거리는 고덕의 말에도 불구하고 왕팔의 입가엔 웃음이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그런 왕팔의 모습에 미소를 지은 고길이 말했다.
“우리 팔이가 마음이 넓구나. 암, 큰 자손은 그래야 하느니. 진이가 어리니 동생으로 대하면 될 게야.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고.”
“감사합니다, 아버님.”
“하하하, 감사는. 다 그게 순리인 것을…….”
그렇게 혈혈단신으로 살아온 왕팔에겐 부모에 이어 동생들이 생겼다.
“그런데 어떻게, 갈 거야?”
고덕의 물음에 고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그런 행사에 빠지면 욕먹는다.”
“하지만 힘들지 않겠어? 지난번에 한도회에 다녀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괜찮아. 네 덕에 갈 때도 마차로 갔고, 올 때도 여기 팔이 덕에 마차로 와서 고생인 줄도 모르겠더라.”
고길의 답에도 불구하고 고덕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지난번, 고칠 부자의 일로 놀라 기진했던 모습을 보았던 탓이다.
“꼭 가야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응. 내가 뭐 한 가지를 알려 줄 테니 매일 아침에 그걸 하는 거야.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알았지?”
고덕의 말에 고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그런 형에게서 시선을 돌린 고덕이 유 씨에게도 말했다.
“형수님도요.”
“에구, 저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럼 형수님은 안 가시게요?”
“아뇨. 해야죠. 해야 갈 수 있다면 해야죠, 도련님. 네, 할게요.”
유 씨의 답을 들은 고덕은 곧바로 고길 내외를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매번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과연 잘하는 짓인지 몰라 망설이던 것을 실행하려는 것이었다.
고길 내외를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고덕은 두 사람을 나란히 앉혀 놓고선 신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알려 드릴 건 간단한 호흡법이에요. 뭐, 내공이니 뭐니 하는 건 아니지만 건강에는 오히려 훨씬 좋은 거니까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꼭 해야 해요.”
“건강에 좋은 거라는데 뭐는 못할까. 알았으니 어여 알려 주기나 해.”
고길의 말에 고덕이 슬쩍 미소를 그렸다. 건강이란 말에 고길이 강한 의욕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덕은 그런 고길의 등 뒤로 돌아가 앉았다.
“자, 내가 천천히 형의 선천지기를 깨우고 돌려 줄 거야. 그 느낌을 기억했다가 그대로 하면 돼.”
이윽고 장심을 명문혈에 댄 고덕이 천천히 자신의 기를 투입해 마르고 쇠해진 고길의 선천진기를 두들겨 깨우기 시작했다.
한참의 노력 끝에 약간의 생기를 머금은 고길의 선천진기가 고덕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질거리는 무언가가 지나간 자리가 싸할 만큼 시원함을 전해주자 고길의 눈이 커졌다.
“잘 기억해. 한번 두들겨 깨우면 스스로 알아서 돌겠지만 형이 길을 기억했다 인도해주면 더 잘 돌 거야.”
달리 말해준 게 없었건만, 고길은 입을 열어 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고덕이 풀썩 웃었다.
“하여간 이야기들이 사람 여럿 잡아.”
그 말을 남긴 고덕이 열심히 고길의 선천진기를 이끌고 돌자 고길의 혈색이 점점 붉어지며 대춧빛으로 물들어갔다.
남편의 변화를 지켜보던 유 씨는 혈색이 좋아진 고길의 얼굴을 보며 좋아했다.
“아이고, 우리 영감, 혈색 펴지는 거 보게.”
어느 정도 길이 익었다고 판단한 고덕이 고길에게서 손을 떼며 형수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자- 이제 형수님 차례예요. 형수님도 잘 기억해두세요.”
“암요. 제가 기억력 하나는 영감보다 낫지요.”
유 씨의 너스레에 미소를 지은 고덕이 이내 장심을 명문혈에 대고 내기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방에서 나온 고길 내외의 혈색이 붉은 대춧빛 인 걸 본 왕팔이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키야- 아버님, 어머님, 한 십 년은 젊어 보여요.”
“정말?”
반색하는 유 씨에게 고길이 면박을 주었다.
“호박 닦는다고 수박 되던가? 그냥 혈색이 좋아졌다는 소리지, 정말은 무슨…….”
면박을 주었지만 자신도 몸이 가뿐하고 기운이 솟는 걸 느낀 터라 고길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런 두 내외와 함께 고덕과 왕팔이 집을 다시 나선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서였다.
그 이틀은 고길 내외가 사돈의 선물을 준비하느라 소비된 시간이었다.
근동에서 제일간다는 의원에서 자신들이 모아온 거의 대부분의 돈을 써 마련한 약재를 소중히 싸안고 가는 고길 내외의 표정엔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
“그런데 어머니, 어디로 가야 하는 겁니까?”
마부석에 앉은 왕팔의 물음에 유 씨가 답했다.
“그게… 아이고, 이름도 까먹었네. 무슨 협씨 네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그게 안휘의 무슨 협씨네여.”
형 내외의 말에 고덕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안휘협가 말하는 거야?”
“아! 맞다. 안휘협가. 맞아요, 도련님.”
유 씨의 답을 들은 고덕의 표정에 이채가 스쳤다.
“진이가 그곳으로 시집을 갔단 말이에요?”
“예. 그 집 둘째랑 결혼했지요.”
유 씨의 답에 고덕의 입가엔 설핏은 미소가 그려졌다.
‘시원치 않은 그저 그런 무가인 줄 알았더니 안휘협가였다? 허,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심란한 고덕의 마음과 달리 제법 유명한 곳으로 동생이 시집갔다는 것이 기분 좋았던 왕팔이 신난 음성으로 외쳤다.
“자- 그럼 안휘협가로 출발합니다. 이랴-”
왕팔의 호령에 마차에 연결된 두 마리 말이 투레질을 하며 땅을 박찼다.
* * *
안휘로 향하는 길을 다시 나선 여정은 보름 정도에 다다랐다.
가능한 풍광 좋은 곳으로 움직이라는 고덕의 명을 왕팔이 충실히 따른 덕인지 여행 내내 고길 내외는 즐거워 보였다.
그렇게 여행한 끝에 안휘성 육안에 위치한 안휘협가에 도착한 마차는 정문에서 멈추었다.
“여기 초청장이오.”
서신 안에 동봉되어 있던 초청장을 왕팔이 내밀자 그것을 확인한 수문 무사가 안내자를 붙여 주었다.
안휘협가 안은 칠순연의 준비로 상당히 분주했다.
그 분주함을 뚫고 안내된 곳은 접객원 내의 작은 방이었다.
“이 방 하나가 배정된 것이오?”
왕팔의 물음에 안내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물러갔다.
무언가 불만을 토로하려는 왕팔을 눈짓으로 제지한 고덕이 방 가운데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뭐해? 앉지 않고.”
이어진 그의 말에 고길 내외는 침상에, 왕팔은 고덕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손님들이 많은 데다 형 내외만 올 줄 알았나 보지.”
그 말에 고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그럴 것이야.”
하지만 답을 하는 고길의 표정에 아차 함이 스치는 것으로 보아선 결혼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 모양 같았다.
그런 형에게 애써 웃어 보이는 고덕의 눈길엔 작은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중년 미부가 들어섰다.
“엄마, 아버지.”
“아이고, 진아!”
중년의 나이에도 상당한 미색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 바로 고길의 둘째 딸, 고진이었다.
서로 얼싸안은 세 사람은 한참 만에 떨어지더니 부산스럽게 수다를 떨었다.
그러길 잠시, 고덕을 가리키며 고길이 말했다.
“인사드리거라. 네 숙부니라.”
돌아선 고진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진이가 숙부를 뵈옵니다.”
“오냐오냐. 만나서 반갑구나. 이거 또 내 얼굴 이야길 해야 하는 모양이다. 나는…….”
이후로 이어진 설명에 미소를 지어 보인 고진의 수긍에 왕팔이 소개되었다.
“네 오라비 되는 팔이란다.”
“아! 그럼 숙부님의…….”
“그렇지.”
중간 설명 모두를 생략한 고덕의 답에 아비가 되어버린 고덕보다 늙어 보이는 자식이 고진에게 인사를 받았다.
“진이에요. 오라버니, 잘 부탁드려요.”
“하하하, 만나서 반가워. 진이 동생. 난 팔이야, 팔.”
“예. 팔이 오라버니.”
“으허허허.”
무엇이 좋은지 연신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는 왕팔을 고덕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아이들은?”
“천이와 문이는 애들 아버지와 함께 손님들 접객으로 바빠서 아직 오신지도 모를 거예요.”
“그럼, 아랑인?”
“그게… 요새 아랑이가 마음고생을 좀 해서…….”
“뭔 소리야. 우리 아랑이가 왜?”
유 씨의 물음에 진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아랑이가 남궁세가의 도령을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쪽에선 아무래도 우리가 처진다고…….”
같은 팔대세가라 하나 안휘협가는 간신히 턱걸이를 하고 있는 곳이다.
세간에선 자칫 잘못하면 팔대세가의 자리를 다른 무림 세가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안휘협가는 남궁세가와는 비교가 힘들 정도로 차이가 지는 곳이었다.
고진의 말에 왕팔의 시선이 고덕에게 향했다.
눈 속 가득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고덕의 모습에 왕팔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곁에 붙어 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걱정이 든 까닭이었다.
“남궁세가에서도 손님이 오겠지?”
고덕의 물음에 고진이 답했다.
“그럼요, 숙부. 안휘에 있는 웬만한 무가들에선 거의 다 오고, 전 중원으로 보아도 팔대세가에선 모조리 올 거예요. 정천맹에 속한 구파일방에서도 손님들이 올 테고요.”
말석이라도 팔대세가는 팔대세가다.
그 안휘협가의 가주가 맞은 칠순이니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긴 했다.
-그런데 가주의 나이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칠순이면 다른 문파에선 태상가주라고.
고덕의 전음에 왕팔이 답했다.
-가주인 협무검 대협 외엔 아직 이렇다 할 고수를 배출하지 못한 탓입니다. 소가주라 불리는 협가검도 아직 절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요.
-협가검?
-협가를 벗어나지 않아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탓에 붙은 무명입니다.
-한마디로 별 볼일 없다는 말 아니야?
-그게 그렇긴 합니다만…….
별 볼일 없어도 팔대세가다.
그 명판 하나만으로도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강호이기도 했다.
-그지 같은 것들이 사람을…….
전음으로 전해지는 것임에도 고덕의 불만이 그대로 느껴진 왕팔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괜한 분란을 일으켜 진이에게 피해가 갈까 우려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