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대면(對面)-적과 부딪치다
갑론을박 끝에 내려진 결론은 모른 척한다는 것이었다.
결과가 그리 나온 것엔 가주의 침묵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모른 척이라니요. 거절도 아니고 모른 척이라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파평도(破平刀)의 말이 맞습니다. 언제부터 우리 단리세가가 이렇게 흐릿하게 일을 처리해왔단 말입니까?”
온건파에 속한 두 장로의 말에 단리태천의 표정에 깊은 시름이 서렸다.
“모른 척한다는 것은 이미 그 일에 우리가 발을 담그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서, 설마 십자패도께선 우리 단리세가가 남궁세가에서 벌어진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거절이 아니라 모른 척하겠단 결론이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그, 그것은…….”
무언가 부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장로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달리 이유를 대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럼 십자패도께선 누가 그 일을 맡고 있다고 보시는 겝니까?”
“파평도도 보셨겠지만 오늘의 일은 외총관이 주도하더이다.”
“하면, 외총관이 그 일을 맡고 있다?”
“모른 척하자는 말을 그가 처음 하더구려.”
“흠… 외총관이…….”
“명을 달리한 소가주를 누구보다 아끼던 사람이 외총관이요. 가주의 상처만큼이나 깊게 패였던 모양이더이다.”
“한데, 왜 회의장에선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겝니까?”
“가주가 침묵하는 일에 왈가불가할 수 없었소.”
“하면, 가주도 이 일을 알고 있다는 말씀이시오?”
“그럼 파평도께선 가주가 모르면서 침묵을 지켰다고 보십니까?”
“그야 남궁세가의 일로 서운한 마음에 입을 다물고 계셨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이라면 오늘 결정은 모른 척이 아니라 거절로 나왔어야 하겠지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은 두 장로의 표정에서 핏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칫 세가 전체가 지탄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닙니까?”
“새어나간다면 그러하겠지요.”
그 말에 두 장로가 조용히 되뇌었다.
“새어나간다면…….”
“그렇지요. 새어나간다면.”
“그 말씀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말입니다.”
“그럼 그 말도 안 되는 일에 동조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다소 격앙된 음성의 파평도 장로를 바라보며 단리태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적어도 세가는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리태천의 말에 파병도를 비롯한 두 장로의 표정에 참담함이 가득해졌다.
잠시 후, 장로원에 소속된 무사들이 접객원을 조용히 둘러싸기 시작했다.
은밀한 움직임이었고, 적당한 거리를 둔 탓에 세가 내 다른 사람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과 다른 무리의 무사들이 대규모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이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는데도.”
단리명의 말에 단천도단 전부를 이끌고 온 단리격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은 어찌 돌아갈지 아무도 모르는 걸세. 투입되는 무사들이 모두 골라 뽑은 고수들이라고는 하지만, 만에 하나 그 이상의 힘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너무 많이 움직이면 우리의 움직임이 상대에게 미리 읽힐 수도 있는 일이니 그런 게 아닌가?”
“그건 걱정해야 소용없는 일이 아닐까 싶네. 아마 상대는 우리가 움직이는 순간 이미 알아차리고 있을 걸세.”
단리격의 답에 함께 움직이던 단리강후가 끼어들었다.
“격이의 말도 맞아. 세상은 우리 맘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더구나 상대는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을 걸세. 우리가 움직이는 순간 알 거라는 말엔 나도 동감이네.”
단리격의 의견에 단리강후마저 동의하고 나서자 반대하던 단리명은 입을 닫았다.
단리격의 주장이 틀렸기 때문에 하던 반대가 아니었던 터라 포기가 빨랐던 것이다.
“하아~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하지만 분명히 하세. 전부 투입하진 말게. 일반 무사들의 피가 흘러선 절대로 안 되네!”
“그건 걱정하지 말게. 직접 투입되는 이들은 저들 중 소수의 고수들뿐이니까.”
단리격의 확답에 단리명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렇게 움직이는 이들의 시선으로 드넓은 대나무 밭이 다가오고 있었다.
“진법이다. 모두 사전에 알려 준 방법을 잊지 말라!”
단리격의 외침에 단천도단의 무사들이 일제히 답했다.
“옛, 단주!”
그렇게 오백이 넘는 인영들이 대나무 밭 속으로 스며들었다.
대나무 밭 안에 존재하는 것은 작은 모옥 한 채였다.
세가의 은밀한 작전을 도맡아오던 비천도단의 안가인 모옥 안에선 청의 복면인과 한백이 마주 앉아 있었다.
“어째서 이곳이었나?”
“그저 이곳으로 가라 해서 왔을 뿐입니다.”
“흑면 일 호, 이곳에서 벌이고 있던 우리 청면조의 일을 몰랐단 말인가?”
“들은 바 없습니다.”
“이익…….”
한백의 답에 발끈하던 청의 복면인이 이를 악물었다.
“이곳을 택한 이유는?”
“남궁세가와 단리세가 사이의 분란을 최대한 이용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흑면조장의 명이었나?”
“그렇습니다.”
“젠장!”
같은 조장이라고는 하나 그와의 사이엔 분명 격이 존재했다. 그 탓에 함부로 욕설을 퍼붓지도 못하는 것이다.
“문제가 있습니까?”
한백, 흑면 일 호의 물음에 청의 복면인, 청면조장이 답했다.
“아직은 모르겠다. 단리세가의 움직임이 가시화되지 않았으니.”
“수뇌엔 침투하지 못한 겁니까?”
“단리세가는 남궁세가보다 규모가 작아. 또한 더 폐쇄적이고. 이들은 외부 인사에게 고위직을 맡기지 않는다.”
“그럼 이들의 속을 조정하지는 못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 상태에서 무언가 조작을 펼친다는 게 가능합니까?”
“그러니까 더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자네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고.”
“그런데 왜 도운 것입니까?”
“돕지 않았으면 이미 남궁세가 인근에서 잡혀 죽었을 테니까.”
“제 죽음이 그리 큰 의미를 가지는 줄은 몰랐습니다.”
“흑면 일 호의 죽음 따윈 상관없어. 단지 그것으로 인해 전체적인 그림이 흔들리게 되는 걸 우려했을 뿐이니까.”
정이라곤 일말도 가지 않는 말을 해대는 상대를 바라보는 한백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역시……. 그럼 이제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방법은 두 가지야. 첫 번짼 널 도와 이곳을 가능한 빨리 뜨는 거.”
“또 한 가지는 뭡니까?”
“단리세가가 널 버리도록 충동질하는 거지.”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실 생각입니까?”
“생각 중이야.”
청면조장의 답에 피식 웃던 한백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아무래도 결정이 빨라야겠군요.”
한백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뒤늦게 알아차린 청면조장이 투덜거렸다.
“젠장, 진세가 막고 있어서 놈들의 접근을 미리 알지 못했군. 이렇게 되면…….”
“어쩔 생각입니까?”
“탈출.”
“모두 버리는 것입니까?”
“버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자네 탈출을 도운 후엔 우린 다시 돌아올 거야.”
그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지만 상관할 마음은 없었다.
여하간 그건 청면조장이 결정할 일이지, 흑면조의 일원인 한백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닌 까닭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죠.”
일어나는 한백의 팔을 청면조장이 잡았다.
“가만!”
“왜……!”
왜냐고 물으려던 한백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어마어마한 기파가 모옥 전체를 휩쓸고 지나간 탓이다.
“이건… 그자입니다!”
“그자? 누구, 검마?”
“예. 이 정도의 기파라면 그자뿐입니다.”
겁에 질린 한백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청면조장은 느긋하게 일어섰다.
“잘됐군. 자꾸 신경 쓰이던데 이참에 제거하는 것도 좋겠지. 흑면조장에게 선물도 될 테고 말이야.”
그 말은 흑면조가 벌이던 일을 망치겠다는 뜻이다. 아마도 자신의 일을 훼방한 것에 대한 앙갚음 같았다.
하지만 그 말에도 불구하고 한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흑면조장의 당부가 머릿속을 울려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걸리면 무조건 도주해. 안전거리? 그에게 그따위 건 없어. 네 목숨을 버리고 임무를 완수한다는 꿈은 꾸지도 마. 임무도 버리고 네놈도 죽는 거니까.’
파랗게 질려 가는 한백을 비웃은 청면조장이 밖으로 나가자, 한백은 인질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유일한 구명줄인 양…….
* * *
접객원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이틀을 머물고 있던 고덕의 일행은 단리세가로부터 아직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좋지 않아.”
뜬금없는 고덕의 음성에 단목하진이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공기가 변했어.”
“공기요? 무슨……?”
“단리세가에 흐르는 긴장감이 높아졌어. 이건… 좋지 않아.”
고덕의 알 수 없는 말에 단목하진이 긴장한 신색으로 물었다.
“하면, 단리세가가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단목하진의 물음에 남궁단이 강하게 부정하고 나섰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럴 리 없네!”
“확신하십니까?”
“뭐?”
“남궁세가와 문제가 생긴 단리세가입니다. 확신하시느냔 말입니다.”
“아무리 문제가 생겼다 해도 남궁세가에 적대적일 수는 없어!”
단호한 남궁단의 음성에 단목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호천검 대협은 그럴지도 몰라도 우린 아닙니다.”
“그건…….”
아니라고 할 수만은 없었다.
적어도 단목하진은 마도인 단목세가의 장자였고, 길잡이인 왕팔은 사도인 하오문의 사람이었으니까.
“둘 다 맞고, 둘 다 틀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고덕의 말에 남궁단과 단목하진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적대적이진 않겠지. 하지만 호의적이지도 않을 거 같다.”
남궁단의 물음이 공손한 데 반해 고덕의 답은 하대다.
나이도 나이였지만,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은연중에 정해진 서열이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그게 무슨……?”
“주위로 무사들이 배치되었지만 살기는 없어. 그리고 움직임이 우리 쪽이 아니야.”
“그럼…….”
“이건 마치… 양쪽이 따로 노는 느낌이랄까?”
“무사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움직인단 말씀이십니까?”
남궁단의 물음에 고덕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한 무리는 서쪽으로 움직여. 접객원을 둘러싼 애들과는 조금 달라. 기파가 조금 더 정연해.”
“그럼 주력이 서쪽으로 움직인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그것은 무언가 지켜야 하거나, 제압해야 하는 것이 서쪽에 있다는 뜻일 겁니다.”
“그래. 그리고 그 무언가가 우리와 연관이 있겠지.”
그 이유를 짐작하진 못한 단목하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라면 굳이 무사들을 동원해 우리를 격리할 이유가 없으니까.”
말과 함께 일어서는 고덕을 바라보며 남궁단이 물었다.
“어찌하시려구요?”
“내가 좀 성격이 못돼서 말이오. 하지 말라면 꼭 하고 싶고, 관여치 말라면 반드시 끼어들어야 직성이 풀려서 말이외다.”
“그럼 지금 서쪽으로 가보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야 하지 않겠소?”
“하지만 그러다 충돌이라도 벌어지면…….”
남궁단의 걱정에 고덕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뭐, 다 운명 아니겠소.”
남궁단은 왠지 그 말 속에서 피 냄새가 물씬 풍긴다고 느꼈다.
그렇게 걱정스런 표정의 일행을 남겨 둔 고덕은 접객원을 나서 천천히 걸었다.
한데, 접객원의 마당을 벗어나자마자 그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더 이상은 나가실 수 없습니다.”
앞을 가로막은 무사의 말에 피식 웃은 고덕이 물었다.
“누가 그래?”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가 그러냐고. 내가 더 갈 수 없다고.”
“장로원의 명입니다.”
“네 장로원이지, 내 장로원은 아니야.”
그 말을 남긴 고덕이 자신을 밀치고 나가려 하자 무사가 손을 써왔다.
“못 갑… 컥-”
언제 어떻게 잡혔는지 모르게 목을 잡아당겨 눈을 맞춘 고덕이 물었다.
“갈 수 없나?”
“으으으으.”
무사는 도저히 갈 수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공포에 질린 무사를 내던지고 다시 움직이려던 고덕의 발길을 막아서는 인물이 있었다.
“멈추시오.”
“십자패도……. 우리 편이 되어준다던 사람이 길을 막는다라……?”
고덕의 지적에 잠시 얼굴을 붉혔던 단리태천이 이내 침중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변명은 않겠소. 하지만 그렇다고 보내주지도 못하오.”
“괜찮아. 안 보내줘도.”
자신의 말을 오해했는지 밝아지는 단리태천의 얼굴을 직시하던 고덕이 말을 이었다.
“내가 스스로 갈 테니까.”
“그 무슨! 지금 단리세가와 피를 보자는 말씀이시오?”
“피라……. 내가 나가면 피를 보겠다?”
“세가의 준엄한 명이오. 그 명을 거부한다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줄 알았소이까?”
단리태천의 경고에 고덕은 오히려 피식대며 웃었다.
“피? 후후, 피 좋지. 따스하고 알싸한 향도 나고…….”
“저, 정녕!”
“피를 보자면 거부는 하지 않아. 하지만 하나는 알아둬. 난 피를 보면 가끔 미치는 경향이 있으니까.”
담담한 음성과 달리 하얗게 빛나기 시작하는 눈은 광기 그 자체였다.
“허억-”
놀라 신음을 흘린 단리태천은 걸어 나가는 고덕을 막지 못했다.
막아선 안 된다는 본성이 막아야 한다는 이성을 짓누른 탓이었다.
그렇게 멀어지는 고덕을 바라보던 단리태천의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시, 십자도단, 십자도단에 비상을 걸어라. 속히!”
단리태천의 고함에 장로원의 무사가 급히 달려갔다.
뒤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깔끔하게 무시한 고덕의 발길은 기파가 말해주는 대로 서쪽으로 향했다.
한참을 꼬불거리는 전각군을 거쳐 도착한 곳은 한산한 대나무 밭이었다.
그 대나무 밭을 바라보는 고덕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진이라…….”
중얼거리며 대나무 밭으로 들어서는 고덕의 신형에서 엄청난 기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고뇌에 찬 채 가주전에 머물고 있던 단리세가의 가주, 화염천도(火焰穿刀) 단리천패의 표정이 일변했다.
자신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무지막지한 기파를 느낀 탓이다.
“이, 이게 무슨!”
놀란 단리천패가 가주전을 박차고 나와 달리자, 가주전의 호위들이 그 뒤를 따라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기어코! 따라라!”
모여드는 십자도단원들을 기다리던 단리태천이 단원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달렸다.
사위를 크게 흔드는 엄청난 기파를 향해서…….
오로지 힘으로 진세를 부수는 것밖에 알지 못하던 고덕은 무한정으로 쏟아지는 내력을 기파로 바꿔 사방으로 뿌려 대며 걸었다.
질식할 만큼 고도로 농축된 내기의 힘을 이기지 못한 진세가 밀려나며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징-
마치 무언가가 깨져 나가는 느낌과 함께 주변의 정경이 바뀌었다.
대나무 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수십여 명의 무사들이 둘러싼 모옥이 나타났다.
하지만 무사들은 모옥이 아니라 고덕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군.”
고개를 젓는 단리강후의 말대로다.
오로지 힘으로 진법을 깬다는 것은 말로만 들었지 처음 보는 기사였기 때문이다.
“초극이 생각 이상의 경지였던 모양이야.”
단리명의 중얼거림에 이어 단리격의 명이 떨어졌다.
“막아라!”
순간 주변으로 수백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배치해두었던 단천도단의 무사들이 나선 것이었다.
그런 이들을 비릿한 미소로 바라보던 고덕의 시선이 갑자기 모옥 쪽으로 향했다.
“역시 말씀이 틀리지 않았군.”
천천히 모옥을 걸어 나오는 인물은 예상외로 한백이 아니었다.
파란색 복면과 야행복.
“가, 가마꾼?”
단리명의 중얼거림을 무시한 고덕이 특이한 차림의 사람에게 물었다.
“뭐냐, 넌?”
“나? 청면조장.”
“청면조장? 그게 뭐하는 자린데?”
“널 죽이는 이가 앉는 자리.”
상대의 말에 고덕의 입가가 비틀렸다.
“오랜만이네.”
“뭐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이전에도 있었던 모양이군.”
“뭐, 가끔.”
“그래? 하지만 그때와는 다를 걸세.”
그 말과 함께 펼쳐진 손짓에 모옥을 깨고 일곱 명의 신형이 튀어나왔다.
복색은 청색 복면에 청의 야행복.
청면조장이라 말했던 이와 동일한 복장이었다.
모옥을 부수듯 튀어나온 그들은 곧바로 단리명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광- 쾅!
급작스런 폭음이 울리고 사방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의 뒤로 모옥을 빠져나온 신형에 고덕의 눈썹이 모로 섰다.
한백의 양팔에 끼어진 이들을 알아본 탓이다.
“이놈!”
일성대갈을 지른 고덕의 신형이 직선을 그렸다.
그 직선상에 파란 광채가 끼어들었다.
쾅-!
엄청난 굉음을 뒤로하고 물러난 고덕의 시선이 자신을 가로막았던 청면조장에게 향했다.
“네놈…….”
“자- 제대로 놀아볼까?”
그 말과 함께 들이닥친 청면조장의 검에 파란 광채가 일렁거렸다.
광채를 쏟아내며 떨어지는 청면조장의 검을 하얗게 불타오르는 고덕의 팔이 막았다.
쾅-
손해도 이익도 없다. 아니, 반걸음 정도를 밀려난 고덕의 손해라면 손해다.
손이 저릿거렸다. 강호에 나온 이래 유련수를 막아낸 인물은 손에 꼽는다.
“네놈,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재미? 후후, 이래도 재미있을까?”
말과 함께 떨어져 내리는 복면인의 검이 사위를 완전히 파랗게 물들이고 쏟아져 내렸다.
파바바바방!
주변에 일어나는 자잘한 폭발과 함께 폭음이 일었다.
주변을 자욱하니 메우며 쏟아져 내린 강기의 소나기를 막아낸 고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네놈…….”
“소문과 달리 말이 많은 모양이로군.”
상대가 자신을 안다. 그것은 가족 전체가 위험해짐을 뜻했다.
순간 고덕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하얗게 빛나기 시작하는 눈에서 광기가 쏟아졌다.
“죽인다!”
츠팟- 푸캉!
순간적으로 고덕의 허리에서 튀어나온 빛 무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휘두른 청면조장의 검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시작된 고덕, 아니 검마의 검격이 이어졌다.
순간을 수십 조각으로 쪼갠 듯한 짧은 찰나에 수십 격의 검격이 쏟아졌다.
정신없이 검을 휘둘러 상대의 검격을 막아나가는 청면조장의 복면이 젖어 들어갔다.
긴장으로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흐르는 탓이다.
차장-
힘겹게 검을 밀어내고 뒤로 물러난 청면조장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힘을 얻고 나선 천하오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럴 만큼 충분한 힘을 얻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검마, 검마, 자신의 주인이 왜 그토록 경계를 하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쑤아아앙-
떨어졌던 고덕의 검이 공간 전체를 가르며 달려들었다.
추앙-
황급히 들어 막은 청면조장의 검에 막혀 선 자신의 검을 확인한 고덕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쓰아아앙-
순간, 기이한 음향을 이끌며 고덕의 검이 청면조장의 검을 둘러싼 검강을 잘라내며 미끄러져 내려왔다.
“헉!”
생각도 못해본 괴사에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놀란 청면조장이 다시 한 번 고덕의 검을 밀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런 상대를 순순히 놓아 보내줄 생각이 없었던 고덕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쾅- 울컥.
어깨의 반이 피 보라에 묻힌 청면조장의 복면이 붉게 물들었다.
당황과 불신으로 흔들리는 청면조장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고덕의 검이 공간 자체를 부쉈다.
꽈과광!
모조리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을 정도의 굉음을 동반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의 여운이 가라앉자 드러난 것은 반 동강이 난 검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청면조장의 너덜거리는 육신이었다.
“제법.”
칭찬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그 말을 이끌고 고덕의 검이 움직였다.
스걱-
깨끗이 날아간 청면조장의 목이 바닥을 구르는 것을 확인한 청의 복면인들이 싸움을 피하고 일제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덕은 그들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쑤아아앙-
풍압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와 함께 삼십 장(丈)의 공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겁한 한백이 양팔에 끼고 있던 두 사람을 내던졌다.
날아들던 고덕의 신형이 멈춰 서며 공중에 던져진 두 사람의 신형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을 이용해 한백은 도주를 택한 청의 복면인들의 뒤를 따라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렇게 고칠과 고진명, 두 사람을 받아들고 돌아서는 고덕의 주변이 고요해졌다.
상대의 강함을 보고 느낀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기척조차 내지 않은 탓이다.
그런 상황에서 언제 도착했는지 잔뜩 굳은 표정의 단리천패가 물었다.
“저, 정녕 누, 누구시오?”
“말했잖아. 얘들 작은할아비라고.”
* * *
사태가 이상한 방향으로 정리되자 곤혹스러워진 것은 단리세가였다.
“그러니까 놈이 숨어든 것을 알아서 제압하러 움직였다?”
“그렇습니다.”
단리명의 답에 고덕이 피식 웃었다.
“이봐, 내가 바보로 보여?”
“예?”
“바보로 보이냐고.”
“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래?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누가 믿는다고?”
“하, 하지만 사, 사실입니다.”
“사, 사실이세요?”
“험험…….”
자신을 놀리는 게 분명한 고덕의 흉내에도 단리명은 화를 낼 수 없었다.
자신들의 실책도 걸렸지만, 초극의 극의로 보이는 상대의 무위를 직접 확인한 이상 기분을 거스를 수 없었던 탓이다.
“아- 뭐, 좋아. 결과가 좋으니 다른 건 묻지 않지.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하자고. 단리세가는 내게, 그리고 내 조카와 조카 손자에게 빚을 졌어. 맞나?”
“그, 그것이…….”
강호에서의 빚은 그 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간혹 그 빚 때문에 목숨을 걸거나 피를 보아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왜, 그것도 부정할 생각인가?”
차가와지는 말투와 상대의 눈에 서서히 떠오르는 광기를 발견한 단리명이 황급히 답했다.
“아, 아닙니다. 인정합니다.”
단리명의 수긍에 언제 화를 냈냐 싶게 고덕이 활짝 웃어 보였다.
“좋아, 잊지 말라고.”
“예.”
“그럼 돌아가 볼까.”
밝은 얼굴로 일어서는 고덕을 단리명이 다급히 불렀다.
“저, 대협.”
“왜?”
“가주께서 잠시 뵙기를 청하십니다.”
“가주가?”
“예.”
“흠…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으니 생략하자고. 자네가 여기 와서 땀 뻘뻘 흘려 가며 변명한 것으로 충분하니까.”
“대, 대협…….”
“가주께 전해주시게. 상처가 깊다 해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거라고. 백도라서가 아니라 무인이라면 지켜야 할 자존심이 있는 거라고 말이야.”
“…….”
차마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는 단리명을 바라보며 고덕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일은 잊겠노라고 전해주시게. 남궁이야 지은 죄가 있으니 예전처럼만 지내준다면 당연히 함구할 것이고, 단목은 원래 입이 무겁잖아. 그렇지?”
고덕의 시선에 단목하진이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그, 그럼요. 이곳에서의 일은 발설되지 않을 것입니다.”
단목하진의 확답에 고개를 숙여 보인 단리명의 시선이 멀뚱하니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왕팔에게 향했다.
“아! 저놈, 저놈도 걱정하지 마.”
“하지만 하오문은…….”
“저놈 거기 탈퇴했어.”
“예?”
단리명과 왕팔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터져 나온 물음에 고덕의 시선이 왕팔에게 향했다.
“그럼 계속 다닐 생각이었냐?”
“그거야…….”
계속 다닐 생각이라고 말하면 죽일 거라는 확신이 풀풀 풍겨 나오는 고덕의 섬뜩한 눈을 확인한 왕팔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예, 저 탈퇴했습니다.”
마지못한 그의 답에 단리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 알고 가주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러자고. 그럼 우린 간다.”
다시금 일어서는 고덕을 바라보며 단리명이 말했다.
“아직 환자들의 상태가…….”
“대충 가면서 치료해도 괜찮아.”
“그럼 마차라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나가서 마차를 하나 사려 했던 고덕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좋지.”
“예,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바로 조치해드리겠습니다.”
돌아서려는 단리명을 고덕이 불러세웠다.
“참!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나도 참지 못하는 일을, 너보고 참으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열하게 하진 말아라. 참을 수 없었거든 다음부턴 타인의 생명이 아니라 네 목숨을 걸어라. 그게 사내다.”
고덕의 말에 단리명의 고개가 힘없이 숙여졌다.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던 바위의 정체를 비로소 명확히 확인한 탓이다.
“그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실수는 나도 너도,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복되면 그건 실수가 아니라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감사합니다. 대협.”
“되었으니, 마차나 좋은 것으로 부탁하지.”
고덕의 웃음에 고개를 든 단리명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상대가 그것으로 감정을 털어버렸다는 것을 확인한 까닭이다.
* * *
단리세가를 나선 고덕의 일행은 곧바로 안휘로 길을 잡았다.
남궁세가에 머물고 있는 강유화와 여린을 데리고 돌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환자 둘을 마차 안에 누이고 자신들은 지붕 위에 자리를 잡았는데도 별다른 흔들림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마차는 편안했다.
좋은 것으로 부탁한다고 했더니 정말로 신경을 써준 모양이었다.
그렇게 남궁세가로 향하는 동안 왕팔은 자신의 탈퇴를 정식으로 하오문에 통보했다.
“조만간 척살조가 움직일 겁니다.”
“무슨 저잣거리의 왈패도 아니고, 탈퇴한다고 죽이겠다고 설친단 말이야?”
“비밀을 다루는 집단이 하오문이니까요. 반대로 자신들의 비밀이 새어나갈 구멍은 막으려 들지 않겠습니까?”
불만스런 왕팔의 답에 고덕이 웃긴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래서 널 노릴 거다?”
“예. 제 실력이라고 해봐야 고작 일류 턱걸이니, 하오문의 웬만한 척살조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요.”
“그래? 그럼 앞으로 걱정되겠다.”
“그러니 대협께서 절 잘 보살펴 주셔야 합니다.”
“내가?”
“예. 당연한 게 아닙니까?”
“내가 왜 너를 보호해야 하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는 듯한 고덕에게 왕팔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협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그야 당연한 게 아닙니까?”
“싫다.”
“예?”
“귀찮아서 싫다고.”
“대, 대협. 어,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한 말씀을…….”
“무책임이라……. 흠… 원래 나 무책임해. 몰랐냐?”
“대협!”
“몰라. 네가 알아서 대비해.”
“그, 그런 게 어디에 있습니까? 이러시면 저 하오문 탈퇴 못합니다.”
왕팔의 반항에 고덕이 피식 웃어 보였다.
“맘대로 해. 대신 자신의 정보가 샐까 봐 널 죽이려 든 게 하오문뿐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란 걸 미리 말해주지.”
“설마 단리세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황하는 왕팔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멀리도 간다.”
고덕의 말에 왕팔이 남궁단을 바라보았다.
“날 왜 보시는가?”
담담한 표정인 남궁단의 물음에 이번엔 왕팔의 시선이 마부석에 앉아 있는 단목하진에게 향했다.
“쟨 왜 봐?”
“그, 그야…….”
“멍청한 놈. 난 신경 안 쓰이고?”
“예? 대협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건데 대협도 절…….”
말을 하다 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생각이 드나 보지.”
“이, 이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게 강호잖아.”
“예?”
“그게 강호라고. 힘 있는 놈이 장땡인 세상. 그 비틀린 곳이 바로 강호인데 몰랐냐?”
고덕의 말에 왕팔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침울해진 왕팔의 뇌리로 전음이 흘러들었다.
-상곡혈(商曲穴)에 이 푼, 신궐혈(神闕穴)에 이 푼 반…….
-뭐, 뭡니까?
-살고 싶으면 익혀. 익히면 적어도 맞아죽기 전엔 도망갈 수 있을 테니.
-다, 다시 불러주십시오.
-미련한 놈! 상곡혈에 이 푼, 신궐혈에 이 푼 반…….
고덕의 전음이 끝난 뒤에도 왕팔은 눈을 감은 채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런 왕팔을 흘깃 쳐다본 남궁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여행은 순탄했다.
산길을 수도 없이 지났지만 그 흔한 산적 한 번 만나지 않고 안휘의 황산에 도착한 고덕 일행은 곧바로 남궁세가로 들어갔다.
“여, 여보!”
수척해진 고칠을 본 강유화가 놀란 표정으로 달려왔다.
“여보…….”
달려온 강유화를 안은 고칠의 음성이 잘게 떨렸다.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아내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것이 너무 고마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고칠을 강유화가 보듬어 안았다.
수척해진 모습으로 갑자기 떠나버렸던 시숙부와 함께 찾아온 남편에게서 수없는 사연을 느낀 탓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진명이, 그리고 여린이 부둥켜안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고덕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남궁세가는 고덕을 꽤나 정중하게 대했다.
대충 무슨 보고가 올라갔는지 짐작은 되었지만, 고덕은 모른 체했다.
그런 가운데 고덕의 접객을 맡은 것은 남궁세가의 가주인 진천신검 남궁창천이었다.
태상가주전에 틀어박혀 세상과 담을 쌓고 있는 검존(劍尊) 남궁호군에 이은 남궁세가 제 이의 실력자로 경지는 초극의 극의, 제하이십사강의 수위에 거론되는 검도의 고수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고 대협의 사문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천하오존, 강호십대고수, 제하이십사강의 순으로 매겨진다고 해도 강호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고수 서른아홉 명 중에 속하는 이가 바로 남궁창천이다.
그런 자신과 동급이라는 상대에 대한 궁금증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글쎄요. 워낙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말씀드려도 모르실 것입니다.”
돌려 말해 알려 주기 싫다는 뜻이다.
“허허, 그렇습니까? 하긴 제 견문이 낮아 모든 문파를 아는 것은 아니지요.”
숨기는 것이 고깝다는 말이다.
“허허허.”
‘웃긴 자식.’
그저 웃는 고덕을 따라 남궁창천도 웃었다.
“하하하.”
‘소심쟁이.’
서로의 속내를 숨긴 두 사람의 대화는 자못 화기애애했다.
남궁창천은 자신과 동급에 올랐다는 고수에게 감정을 사지 않기 위해 애를 쓴 것이고, 고덕은 더 이상 능력을 드러내선 곤란하다는 판단 탓이었다.
두 사람의 의중이 맞아떨어진 연회는 즐겁고 평화로웠다.
* * *
이틀간 나름 환대를 받았던 고덕은 고칠의 식구들과 단목하진, 그리고 왕팔을 데리고 남궁세가를 떠났다.
그렇게 안휘성을 떠난 일행은 복건성에 들어서 단목세가로 향했다.
고덕의 신분을 아는 단목세가에선 남궁세가에서 받았던 환대보다 더한 환영을 받았다.
무사들이 도열한 사열을 받았고, 제하이십사강에 이른 가주가 정문까지 달려 나와 맞았으며, 강호십대고수에 속한 혈존이 직접 접대를 담당했다.
그 부산에 왕팔은 묘한 시선으로 고덕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물론 불행(?)하게도 그런 느낌은 왕팔만이 받을 수 있었다.
부상 치료에 전념해야 했던 고칠 부자와 그들을 간호한다며 곁을 떠나지 않았던 강유화 모녀가 혈존이 개최한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 탓에 고덕에게 혈존이 허리를 굽히는 믿지 못할 광경도 왕팔만이 보았다.
약당의 도움으로 고칠 부자의 부상이 빠르게 낫자 단목세가의 가주, 혈파검 단목운정은 고칠이 맡았던 임무를 완수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로 인해 한도회와 단목세가는 결국 화평을 체결했다.
부드러운 논조의 사과와 약간의 보상비까지 언급된 단목운정의 친서를 받아든 고칠과 함께 고덕은 단목세가를 떠났다.
그가 떠나자 혈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벽력탄을 떠나보낸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고칠과 그 식구들을 마차에 태운 고덕이 단목세가를 떠난 건 단목세가에 머무른 지 삼 일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