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장 (9/129)

제8장. 암운(暗雲)-보고도 보지 못하다

고속 질주에 이은 후유증은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흔적을 놓쳐 버렸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남궁세가로부터 삼십 리 떨어진 작은 구릉에서부터 또다시 지루한 추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꼭 저래야 하는 겁니까?”

땅바닥을 열심히 뒤지고 있는 왕팔을 바라보는 남궁단의 물음에 고덕이 피식 웃어 보였다.

“이야기책을 너무 많이 읽었군.”

“예?”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궁단의 의문을 고덕은 깨끗이 무시해버렸다.

그렇게 흔적이 연결된 곳에 도착의 이들의 시선에 어이없음이 가득해졌다.

“이게 무슨…….”

“에효~”

“대협, 설마 이번에도…….”

각자 다른 감상평을 토해놓은 사람들의 시선이 고덕에게 몰렸다.

하지만 고덕의 시선은 거대한 솟을대문에 걸린 현판에 고정되어 있었다.

“흐음… 단리세가라…….”

“어쩌지요.”

“들어가야지.”

“어떻게요?”

왕팔의 물음에 고덕의 시선이 남궁단에게 향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여기서 저곳에 연줄을 댈 수 있는 이가 또 있소?”

“그, 그야…….”

일행의 면면을 살펴보던 남궁단의 얼굴에 낭패감이 깃들었다.

“그렇긴 하지만… 단리세가와 저희 사이에 사소한 문제가 좀 있습니다.”

“문제?”

“예.”

“그거야 무슨 상관이겠소. 일단 비벼 봅시다.”

고덕의 말에 남궁단은 마지못해 단리세가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비척거리며 다가오는 남궁단을 바라보던 수문 무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궁… 무슨 일이십니까?”

가슴에 선명한 ‘창궁’ 두 글자를 확인한 수문 무사의 물음에 남궁단이 말문을 열었다.

“외총관을 뵙고자 하네.”

“뉘시라 전해드릴까요?”

“남궁세가의 호천검이 좀 뵙잔다고 전해주게.”

상대의 소개에 수문 무사가 이채를 띠었다.

“남궁세가의 외총관이신 호천검 대협이십니까?”

“그러하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접객원으로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수문 무사의 안내로 접객원에 자리한 일행은 잠시 후, 한 사내의 방문을 받았다.

“오랜만이구려, 호천검.”

“그렇군요.”

“한데, 어쩐 일이시오?”

물어오는 상대의 음성이 차다.

같은 백도 팔대세가인데도 남궁단의 방문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게 조금 도움을 받을 일이 있어서…….”

“그 잘난 남궁이 우리 단리에 무슨 도움을 말씀이오?”

“그것이…….”

이후로 이어진 설명에 단리세가의 외총관인 섬전도 단리명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러니까 단목세가를 방문하던 한도회의 사절을 납치한 남궁세가의 수석 호원을 찾으러 오셨단 말씀이오? 우리 단리세가로?”

“그게… 그리되었소.”

“허 참, 남궁세가의 기강이 그 정도로 무너진 줄은 몰랐소이다.”

상대의 도발에 남궁단의 주먹이 쥐어졌지만 그뿐, 달리 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다.

그런 남궁단을 지그시 바라보던 단리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가주께 여쭙고 답을 주리다.”

“틈을 주면 도주할 놈이오. 시급하다는 것을 알아주시오.”

“그러니 그쪽에서 해결했으면 좋았을 것 아니오.”

그 말을 남겨 놓은 단리명이 나가자, 침울해져 있던 남궁단에게 고덕이 물었다.

“도대체 사소한 문제가 뭐기에 저 모양이오?”

“그, 그게…….”

“뭐요? 나도 좀 알아야겠소.”

고덕의 재촉에 남궁단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보름쯤 전에 이권을 두고 청성과 단리세가가 충돌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니, 청성과의 이권 다툼이 있었는데 왜 남궁세가하고 문제가 된단 말이오?”

“그것이, 충돌이 남궁세가의 권역에서 이루어져서…….”

“청성과 단리세가의 이권 다툼이 남궁세가의 권역인 황산 근처에서 벌어졌단 말이오?”

“예. 황산 인근의 한 객잔을 두고 벌어진 다툼이라…….”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장로를 동원한 청성에 비해 단리세가가 보낸 이라곤 소가주뿐이었기에…….”

“지원을 요청했던 모양이군.”

“예. 그랬습니다.”

“한데 거절했고?”

“그렇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권을 청성에 빼앗겼고?”

고덕의 물음에 남궁단이 고개를 저었다.

“이권은 지켰습니다. 소가주가 죽기 살기로 나섰으니까요.”

“허, 단리세가의 소가주가 청성의 장로를 이겼다?”

“예. 그랬습니다.”

“그랬으면 되었지, 속 좁게 무슨 앙심을…….”

“그게… 그 소동에서 입은 부상 끝에 소가주가 죽었다는 것이 문제였지요.”

남궁단의 말에 고덕과 다른 이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그게 무슨… 지금 청성과의 다툼 끝에 단리세가의 소가주가 죽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혹시 청성이 최근에 마교나 사패련에 가입했소?”

“아닙니다.”

“그럼 여전히 같은 정천맹?”

“예. 그래서 문제가 커졌지요.”

“흠…….”

커져도 보통 커진 게 아닐 것이다.

사단 속에 한쪽의 상속자가 죽었으니, 강호의 관례대로 였다면 양측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어도 벌써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었던 탓이다.

“그럼 단리세가가 남궁세가를 원망하는 것이란 말이구려.”

“피할 수 없는 원망이었습니다.”

같은 입장이었다면 남궁도 단리세가를 원망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참, 어렵게 되었군.”

“예. 그래서 걱정입니다. 이번 일에 그 감정이 개입되면…….”

“어렵군, 어려워…….”

고덕의 걱정이 방 안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 * *

한편, 단리세가의 심처에 위치한 가주의 처소에선 가주와 외총관의 독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흔적이 분명하게 연결된 것은 확인했나?”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후, 눈에 띄게 수척해진 가주의 물음에 단리명이 답했다.

“그것이… 추적에 뛰어난 이들을 내보내 확인해보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찾지 못했다?”

“예. 추적에 특화된 이들이 아니긴 하나 그들이 못 찾는 흔적이 있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면, 그들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인가?”

“어쩌면 괜한 분란을 일으켜 청성과의 충돌을 확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듭니다.”

청성의 이야기가 나오자 가주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감히 남궁이!”

“제 소견으론 팔대세가 내부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단리명의 말에 가주의 눈에 한기가 번뜩였다.

“남궁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우리 단리의 자존심을 짓밟으려 한다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럼 외총관의 생각은?”

“그들도 우리의 지원을 거절했습니다.”

“하니, 우리도 거절한다?”

가주의 물음에 남궁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도 곤란을 겪어봐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일에 참견할 명분도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옳은 말이야. 그럼 돌려보내게.”

“바로 거절하면 다른 방법을 찾을 겁니다.”

“그럼……?”

“시간을 끌다 돌려보내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나?”

“저들이 한 짓을 저는 잊지 못하겠습니다. 그냥은 지나가지 않겠습니다.”

“외총관…….”

“저들에게 칼을 휘두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들도 당해보란 것뿐입니다.”

“꼭 그리해야겠나……?”

“예. 그래야겠습니다. 그래야 추호도 눈을 감지 않겠습니까?”

단리추호. 이번 청성과의 충돌에서 죽어나간 소가주의 이름이었다.

“그런다고 바뀔 것도 없음인데…….”

“그래도 그냥은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럼 그리하게. 단,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겠네.”

가주의 말에 단리명이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습니다.”

가주전을 물러나온 단리명의 눈에는 복수에 대한 갈망이 번뜩였다.

기다리던 이를 맞은 남궁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얼마나 기다리면 되겠소?”

“가주께서 충격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하신 까닭에… 장로 회의를 거치고 추인을 받으려면 이틀은 필요할 게요.”

“이틀…….”

작게 되뇌는 남궁단의 시선이 고덕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고덕이 물었다.

“기다리면 좋은 답을 받을 수는 있는 거요?”

그에 단리명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알 수 없소.”

“알 수 없다? 거절할 수도 있다는 말이로구려.”

“가끔은 거절당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일도 거절당하는 세상이라 말이오.”

단리명의 비꼬는 말에 남궁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흠… 시간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소?”

남궁단의 걱정스런 물음에 단리명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부족한 시간이 우리의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소이다.”

“섬전도(閃電刀)!”

답답한 마음에 남궁단이 단리명의 무명을 힘주어 불렀지만, 돌아오는 답은 여전히 무성의했다.

“왜 그러시오?”

“사사로운 감정을 따지기엔 사안이 심상치 않소이다.”

“사사롭다. 허허, 일문의 소가주가 목숨이 끊긴 일이 사사로운 일이었던 모양이구려.”

“그, 그건…….”

“되었소. 내 남궁의 마음은 익히 알고 있으니.”

단리명의 말로 대화는 중단되었다.

“참! 노파심에 말해두겠소만,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시오. 남궁세가에 불만이 많은 장로들이 많아 심히 걱정이니 말이외다.”

그렇게 위협을 남긴 단리명이 나가자 남궁단은 곤혹스런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고덕이 물었다.

“거절할 것 같소?”

“감정이 좋지 않지만 사안이 사안이라 거절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놈이 빠져나간다면?”

“일단 다른 사람을 더 만나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누굴?”

“십자도단(十字刀團)의 단주와 안면이 있습니다.”

“십자도단?”

“단리세가 최강의 전투 집단입니다.”

“그런 곳의 단주라면 영향력은 있겠구려.”

“예. 가주의 숙부로 단리세가를 움직이는 실세 중 한 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궁단의 답에 고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되었던지 빨리 만나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길 원했던 까닭이다.

* * *

접객원을 나선 단리명은 비천도단의 전각으로 향했다.

“어서 오게.”

단주인 단리강후의 인사에 단리명이 물었다.

“그들은?”

“비천도단의 안가로 보내놓았네.”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하게 해야 하네.”

“물론이지.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

“그래. 이 치졸한 복수를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건 없겠지.”

“그나저나 남궁세가에서 사람이 왔다고?”

“단목세가의 소가주까지 달고 왔더군.”

“그들을 찾아온 것이겠지?”

“그래. 왕팔이라는 자가 흔적을 쫓았더군.”

“추귀라……. 그라면 흔적을 놓치진 않았겠지.”

“그런 모양이야.”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나?”

“그래야지. 오성창은 아직 눈치를 채진 못했겠지?”

“아직은……. 한데, 그자를 제압하자면 우리 쪽의 피해도 적지 않을 걸세.”

“자네와 나 둘로 안 될까?”

“글쎄… 그래도 명색이 초절정의 고수일세. 우리가 아무리 절정이라곤 하지만 확신할 순 없네.”

“비천도단을 함께 동원하면……?”

“절반 이상의 승기는 장담할 수 있겠지만, 그 와중에 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일세.”

“그러면 안 되지. 이번 일에 더 이상 단리의 피를 흘릴 순 없어.”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야. 난 그저 오성창을 제압해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남궁의 이름에 똥칠을 하고플 뿐이니까.”

“그래. 그러기 위해선 조력자가 필요해.”

단리세가에서 초절정은 둘뿐이다.

가주와 십자도단의 단주…….

“가주는 말할 것도 없지만, 태천 숙부가 이 일을 받아들일 거라곤 생각되지 않네만.”

단리강후의 말에 단리명의 고개가 주억거려졌다.

“나도 같은 생각일세.”

“하면?”

“격을 만나볼 참이네.”

단리격. 단천도단(斷天刀團)의 단주로 자신들과는 사촌 형제간이었다.

“격이 참여할까?”

“설득해봐야지. 격이 동조해준다면 우린 절정이 셋이 되네.”

불안하지만, 그렇게 되면 비천도단과 단천도단의 최고수 몇을 추려 일을 도모해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좋아. 그렇게 하지.”

단리강후의 답에 단리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만나 결심을 받아보겠네.”

“혼자 되겠나?”

“만약을 대비해 나 혼자 만나는 게 좋겠네.”

단리격이 거절하고 가주를 찾아갈 것을 대비하는 것이다.

그 경우 단리명 자신이 혼자 뒤집어쓰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같이 가세. 그게 좋겠어.”

자리에서 일어서는 단리강후의 모습을 바라보는 단리명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어렸다.

“미안하네.”

“됐어. 그런 말은.”

그렇게 두 사람이 단리격을 찾아가던 그 시각, 접객원에 남겨진 사람들은 새로운 손님을 맞고 있었다.

“오랜만일세, 호천검.”

“오랜만에 뵙습니다. 십자패도(十字敗刀) 대협.”

십자패도 단리태천.

현 가주의 숙부로 태상가주가 없는 단리세가의 가장 큰 어른이자 최강의 고수다.

그 탓에 단리세가 최강의 전투 집단이라는 십자도단의 단주를 맡고 있기도 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지금 같은 시기에 방문을 하신 겐가?”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단리명처럼 적대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외총관에게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입니까?”

“외총관? 명을 만나셨던가?”

“일의 성격상 그의 업무이기에…….”

“외총관에게 아직 듣지 못했네만.”

“그가 장로 회의를 소집했다고 했습니다만…….”

“소집 통보는 받았으나 회의는 내일 아침일세.”

단리태천의 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남궁단이 사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장로 회의에서 듣겠지만, 미리 설득해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흠… 그런 일이…….”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렇다 해도 남궁의 치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네만.”

범인으로 지목된 이가 남궁세가의 사람이었던 탓이다.

“그렇지 않을 것 같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목세가가 있는 곳까지 다녀올 만큼 한백이 자리를 비운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사라진 이들을 데려온 것은 한백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가마였다고 하니까요.”

남궁단의 설명에 단리태천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설마 제삼 세력의 개입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그것 외엔 다른 답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암중의 제삼 세력이 나타난 후엔 언제나 강호에 피바람이 불었다.

만에 하나 남궁단의 판단이 맞는다면 지금의 사안은 자신들이 왈가불가할 규모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반드시 제삼 세력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겠나? 단순히 단목세가와 한도회를 목표로 한 누군가가 오성창을 매수할 수도 있고…….”

“세상에 그 어떤 이가 단목세가와 한도회가 다투길 원하겠습니까?”

“마도와 백도가 다투면 이득을 얻는 이들이 있으니 하는 말일세.”

“지금 사패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도엔 사패련만 있는 게 아니지.”

“하지만 그쪽에서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이들이라고 해봐야 사패련 외엔 없으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흠… 그렇다 치면 사패련은 안창의 난으로 그럴 정신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겠군.”

“예, 바로 그렇습니다.”

안창의 난.

광서에 위치한 사패련은 최근 광서성 성주인 안창이 일으킨 난으로 인해 사실상 봉문 상태였다.

아무리 강호가 관이 지배하는 천하와 별개의 세상이라곤 하나 한 공간에 머무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그 탓에 관부의 분란에서 사소한 오해라도 사지 않길 바랐던 사패련은 사실상 봉문의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제삼 세력이라면?”

“사안을 정천맹에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남궁의 치부를 드러내겠다?”

“치부를 감추려다 초가삼간을 모두 태워먹을 수도 있으니까요.”

“청성과 본 세가의 일로 구파일방과 팔대세가의 사이가 벌어진 시점일세. 자칫 남궁이 씻기 힘든 수모를 당할 수도 있을 텐데?”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걱정해 정천맹에 대한 상신을 가주께서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구요. 하지만 제 생각은 상신이 옳다고 봅니다.”

“물론 그 결정을 내리기 전에 범인을 잡아서 뒤를 캐야 하고?”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치부를 감출 수도 있지 않겠나?”

단리태천의 의심에 남궁단이 단호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단리세가에서 취조하고 상신하셔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처리해도 된다?”

“예.”

“그러다 아무 일도 아닌 남궁의 치부일 뿐이라면?”

단리가 남궁의 흠을 잡으려 무리수를 두었다는 비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 그건…….”

미처 생각지 못한 남궁단의 당황에 단리태천은 오히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놀랄 건 없네.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자네가 그것을 노린다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하오시면……?”

“내일 장로 회의 때 힘을 써봄세. 결론이 무어로 나오든지 일단 마무리는 지어야 할 일 같으니. 적어도 난 같은 팔대세가인 남궁의 도움 요청을 거절할 생각은 없네.”

단리태천의 말에 남궁단의 얼굴이 붉어졌다.

* * *

단리태천이 남궁단 등을 만나고 돌아간 시각, 단리격을 설득해 계획의 일원으로 삼은 단리명이 비천도단의 안가로 들어섰다.

“아! 섬전도 대협.”

자신을 반갑게 맞는 한백에게 단리명은 미소를 보였다.

“어떻게, 지낼 만하십니까?”

“예.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고자 주변에 무사들을 배치해놓았습니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주변을 지켜 주니 편하고 좋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남궁세가에서 사람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소문이 예까지 들어옵니까?”

“무사들이 나누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백의 말에 단리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습니까? 예, 맞습니다. 걱정하실까 봐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남궁과 단리는 이제 함께할 수 없는 사이니까요.”

“그 말씀은……?”

“남궁의 어떤 요청도 거절할 것입니다. 또한 오성창 대협에 관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에 한백이 포권을 취했다.

“고맙습니다. 섬전도 대협.”

“별말씀을……. 그런데 저들은 저리 두어도 되겠습니까?”

정신을 잃은 채 방 한쪽에 묶여 있는 두 사람을 일별한 단리명의 물음에 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 위해를 가한 건 아닙니다. 그저 미혼약을 먹였을 뿐이지요. 저들을 잡아두면 단목세가와 한도회의 싸움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야 분란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한데,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왜 그들을 충돌시키려 하는지가 궁금하신 것이겠죠?”

한백의 말에 단리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아니라면 그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실례가 될 일도 아닙니다. 그저 작은 원한일 뿐이니까요.”

“작은 원한이라시면…….”

“한도회의 조극동을 아십니까?”

“육웅도 말씀이십니까?”

“맞습니다. 그 파렴치한 놈.”

“그와 맺은 원한인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그놈이 사도에서 전향한 건 알고 계시겠지요.”

“그거야……. 어릴 적 친우인 칠파도에게 설득당해 사도를 버리고 백도로 전향한 이야기는 제법 유명한 것이니까요.”

“맞습니다. 그놈이 사도에 있을 때 저지른 패악이 산처럼 쌓였답니다. 그 산 중에 제 여동생의 한이 끼어 있는 것이지요.”

“오성창께 여동생이 있었습니까?”

단리명의 물음에 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대로 있었지요.”

“그 말씀은……?”

“예. 짐작하시는 대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혹시 육웅도에게 변을……?”

“아니요. 자살했습니다. 하지만 조극동 그놈 때문에 벌어진 일인 건 분명합니다. 그놈이, 그놈이 내 여동생을…….”

사도인들에게 강간은 흔히 벌이는 놀이 같은 것이다.

아무래도 그런 일에 연관된 모양이라 생각한 단리명이 위로를 했다.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안타깝진 않습니다. 대신 이가 갈리는 한이 남았지요.”

스산한 기운을 흘리는 한백을 바라보는 단리명은 저도 모르게 일어서는 솜털을 느껴야만 했다.

“한도회에 정식으로 도전을 넣어보지 그랬습니까?”

한백의 경지는 초절정, 육웅도도 마찬가지인 초절정이다.

결과야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한백이 원수를 갚으려 시도할 능력은 구비한 셈이었다.

“했지요. 정중히 사안을 적어 신청했습니다.”

“하면……?”

“거절하더군요. 전향하기 전의 옛일은 그저 옛일로 묻어달라면서 말입니다. 옛일이라……. 한도회와 조극동 그놈에겐 옛일이었던 모양이지만, 제겐 현실이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면, 이번 일은 한도회가 목표로군요.”

“맞습니다. 일이 꼬이면 한도회는 멸문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 와중에 마도의 단목세가까지 더불어 정리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 일이니 일거양득이 아니겠습니까?”

눈을 번뜩이며 말하는 한백에게서 단리명은 광기까지 느껴졌다.

그런 그에게 적당히 동조하고 적당히 치켜세우며 이야기를 나눈 단리명이 안가를 나온 시간은 사위에 어둠이 내려앉은 후였다.

“조심해서 살피거라. 내 허락이 없이는 누가 들어가서도 안 되겠지만, 저들이 나와도 안 된다.”

단리명의 말에 수하들을 데리고 나와 있던 비천도단의 고위 무사가 고개를 숙였다.

“명!”

무사의 복명을 들으며 안가에서 멀어지는 단리명은 한백의 깊은 한을 머릿속에서 털어냈다.

지금은 그의 복수나 한을 이해하고 동조해줄 여력이 없었다.

자신의 한을 풀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

* * *

다음 날, 오전에 열린 장로 회의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이미 남궁세가에서 사람이 온 것이 세가 내에 파다하게 소문이 난 까닭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장로 회의를 소집한 외총관 남궁단의 설명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 설명을 들은 장로들은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뉘었다.

“무슨 상관이오. 그저 무시하면 될 일. 저들이 한 일이 있는데 우리가 굳이 저들에게 협조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오이다.”

“저들에게 받은 홀대가 없다곤 말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외면하는 것도 길은 아니라고 봅니다. 적어도 우린 저들과 달리 팔대세가의 일원이라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양측의 의견은 팽팽히 맞섰다.

특히 외총관을 비롯한 강경론자들과 십자도단주를 위시한 원로들의 온건론이 상충되며 회의는 길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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