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야바위-셋 중 하나, 아니면 모두 거짓
뛰어 들어온 복면인에게 잔뜩 긴장한 남궁영호가 물었다.
“뭔가?”
“조금 전에 수석 호원께서 그들을 데리고 예서원을 나갔다 합니다.”
복면인의 보고에 당황한 남궁영호의 질문이 이어졌다.
“세가를 벗어난 건가?”
“수문전에선 본 적이 없답니다.”
“숙소는?”
“비어 있습니다.”
복면인의 답을 들은 남궁영호의 시선이 남궁단에게 향했다.
“어쩌지?”
“일단 세가를 둘러싸지. 나가면 문제가 커질 걸세.”
“그러지. 청풍검대로 서와 북을 막아두겠네.”
“그럼 외총관부는 천왕검대를 동원해 동과 남을 막겠네. 수색은 기찰전을 동원하지.”
“비영전을 움직여서 돕겠네.”
“부탁함세.”
말을 하기 무섭게 나가는 남궁단의 뒤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남궁세가를 단박에 휘감았다.
각기 일천의 무사를 보유한 두 전투 집단의 이동에 남궁세가에 때 아닌 긴장감이 가득해졌다.
* * *
접객원에 머물고 있던 고덕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그러십니까?”
단목하진의 물음에 고덕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남궁… 세가에 말입니까?”
“그래. 사람들이 대규모로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군. 이건… 포위인데.”
“혹시 대협을 알아보고 적대 행위를…….”
걱정하는 단목하진에게 고덕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목표가 우리가 아니야. 우리였다면 저런 떨거지들이 아니라 검존(劍尊)이 움직였겠지.”
검존 남궁호군.
남궁세가의 태상가주로 혈존처럼 강호십대고수 중 삼존의 일인이다.
“고수로 상대가 안 되니 머릿수로 해결하려 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단목하진의 걱정을 들은 왕팔이 고덕을 힐끗 쳐다본다.
검존으로 상대가 안 되는 이가 선뜻 짐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지가 천하오존이라도 된다는 말이야?’
“머릿수로 해결은 될 거 같고?”
“그, 그거야…….”
해결 안 된다는 건 안다. 해결될 일이면 혈가가 그리 저자세로 나갈 필요가 없을 테니까.
“소용없는 말은 하지 마라. 문제는 왜 저러냐는 건데…….”
고덕의 의문에 단목하진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흔적을 찾은 게 아닐까요?”
“흔적을 찾았는데 왜 지들 집을 포위해?”
“법인이 탈출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냥 고수 투입해서 제압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
“그, 그렇군요.”
“팔아.”
“예?”
잘못 대답한 이후, 호칭이 팔이로 굳어버린 왕팔의 답에 고덕이 말했다.
“나가서 상황 좀 알아보고 와라.”
“제가요?”
“그럼 내가 가랴? 아님 이 와중에 하진이를 보낼까?”
고덕의 말로 슬쩍 단목하진을 일별하던 왕팔은 살기가 번뜩이는 눈빛에 마주치곤 화들짝 놀란 음성으로 답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살피고 와.”
고덕의 명을 받은 왕팔이 마지못해 밖으로 나갔다.
한데,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왕팔은 이명리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이오?”
고덕의 물음에 이명리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문제는 놈이 꼬리를 자르고 도주했다는 것입니다.”
“도주? 남궁세가에서 빠져나갔단 말이오?”
“그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놈의 소행을 확인하자마자 무사들을 동원해 세가를 둘러싸고 수색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뒷말을 흐리는 이명리에게 고덕이 물었다.
“수색을 벌이고 있다는 말은 아직 찾지 못했다는 말이구려.”
“그렇습니다.”
“하면, 놈의 신원은 알아냈소?”
“그것이… 수석, 아니 한백입니다.”
“오전에 보았던 그 오성창 말이오?”
“그것이… 그렇습니다.”
이명리의 확인에 고덕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허-”
범인을 눈앞에 두고도 놓친 셈이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빠져나간 건 아니오?”
“정문을 통과하는 걸 본 이들이 없습니다.”
“담을 넘었을 수도 있는 게 아니오?”
“그렇긴 하지만 흔적이 없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두 사람을 데리고 흔적 없이 월담을 하기엔 담이 너무 높습니다.”
그저 담장의 높이만 말하는 게 아니다. 월담을 하기 위해선 조밀하게 짜인 남궁세가의 경비망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아울러 말하는 것이다.
“흠… 우리가 나서도 되겠소?”
“그것이… 죄송합니다.”
이명리의 완곡한 거절에 고덕이 왕팔을 일별하고 다시 물었다.
“왕팔만이라도 안 되겠소? 저래 봬도 추적엔 쓸 만한 놈이오.”
“왕 대협이라면…….”
필요할 것이다. 중원 전역에 소문이 날 정도로 능력은 있는 이이니까.
“부탁하오.”
고덕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이명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갑시다.”
이명리의 말에 왕팔이 주춤거리며 따라나섰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나가자 고덕은 눈을 감았다.
남궁세가 안에서 움직여지는 기파의 이동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순간, 간질거리는 기운이 엄청난 양으로 빠져나가는 고덕을 바라보던 단목하진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 * *
기찰전 무사들을 이끌고 호원 내 한백의 처소를 수색하던 남궁단은 이명리가 대동하고 온 왕팔을 만났다.
“이자는 왜 데려오신 겁니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이명리의 답에 잠시 왕팔이란 이의 소용을 생각해보던 남궁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줄 수 있겠소?”
“최선을 다해 찾아보겠습니다.”
“부탁하오.”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왕팔이 방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길 얼마, 왕팔이 침상 근처에서 뭔가 꼼지락거린다 싶더니 이변이 발생했다.
그그그극.
기관이 움직이는 소음과 함께 침상이 밀려나며 시커먼 지하 입구가 드러난 것이다.
“이, 이게 어찌!”
놀라는 남궁단의 뒤로 기찰전의 무사들이 모여들었다.
“작지만 흔적이 남았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을 통해 나간 것 같군요.”
“이런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건 들은 기억이 없는데…….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남궁단의 물음에 이명리가 고개를 저었다.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명리의 확인에 남궁단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이럴 게 아니라 추적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팔의 말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남궁단과 이명리가 앞장서 지하로 들어갔다.
그 뒤를 왕팔과 기찰전의 무사들이 따랐다.
지하로 이어진 길을 한참 동안 이동한 끝에 남궁단들이 도달한 곳은 남궁세가에서 한참 떨어진 황산 자락의 한 고분이었다.
“이럴 수가…….”
얼이 빠진 남궁단이 넋을 놓고 있을 때에도 왕팔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한 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여기 좀 보십시오.”
왕팔의 음성에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이명리가 물었다.
“이게 무슨 자국이오?”
“가마입니다.”
“가마?”
“예. 몸이 불편한 두 사람을 가마에 태운 모양입니다. 한데, 문제는 가마보다 이 앞의 흔적들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가마의 흔적에 비해 그 앞의 흔적이 너무 없다는 말입니다.”
“탈출하는 자들이니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하는 게 정상 아니오?”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명리를 일별한 왕팔이 설명을 이었다.
“이곳에선 가마에 사람이 탄 흔적만 있고 다른 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저기.”
왕팔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에 놀람이 서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흔적이 남았습니다.”
“그럼 쫓으면 되는 게 아니오?”
남궁단의 말에 왕팔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긴 한데… 문제는 방향이지요.”
“방향? 도망가는 놈이 방향을 따질 리도 없는 법. 방향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게… 저쪽이 어딘지 모르시겠습니까?”
왕팔의 물음에 잠시 흔적이 남겨진 방향을 바라보던 남궁단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이명리의 의문에 남궁단이 곤혹스러운 음성으로 답했다.
“우리 세가 쪽입니다.”
“예?”
“우리 남궁세가 방향이란 말입니다.”
재차 이어진 남궁단의 답이 뜻하는 바를 알아들은 이명리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잘못하면 남궁세가가 범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증거를 옮기다 흔적이 남은 것으로 몰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범인으로 지목당한 이는 호원의 수석. 배신자라 말하기엔 너무 고위 인사였다.
“일단 흔적을 쫓지요. 중간에 방향을 틀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명리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인 남궁단이 왕팔을 선두에 세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명리의 바람은 그저 바람으로 끝났다.
그들을 비웃듯이 선명한 흔적이 남궁세가 동쪽 담벼락 아래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돋움발의 방향이 앞쪽입니다.”
그 말은 안으로 뛰어올랐다는 뜻이었다.
“쫓아라!”
표정을 완전히 굳힌 남궁단의 명에 기찰전의 무사들이 일제히 담을 뛰어넘었다.
담장 안쪽의 경비 무사들과 잠시 혼란이 있었는지 약간의 소란이 일었지만, 소음은 곧바로 가라앉았다.
그 뒤를 남궁단과 이명리, 그리고 왕팔이 담을 넘어 들어갔다.
흔적은 담 안쪽에도 선명했다.
“받음발이군요.”
“받음발?”
“예. 이쪽 계통에선 떨어져 내릴 때 딛는 발을 그리 부릅니다.”
“하면, 밖에서 이쪽으로 분명히 들어왔다는 뜻이구려.”
“맞습니다.”
왕팔의 확인에 남궁단의 시선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경비 무사들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경비 무사들 중에서 조장으로 보이는 자가 포권을 취했다.
“외총관님과 차석 호원님을 뵙습니다.”
“고생이 많구나. 한데, 이쪽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온 자를 보지 못했느냐?”
“내총관님 일행 외엔 보지 못하였습니다.”
조장의 답에 인상을 찌푸린 남궁단이 흔적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면, 이 발자국은 뭐란 말이냐?”
남궁단의 지적에 조장이 흔적을 내려다보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게 언제 생긴 거지?”
“뭐라!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어정쩡한 답에 벼락같이 화를 내는 남궁단에게 조장이 바짝 긴장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 그게 일각 전에 주변을 조사할 때만 해도 없었던 흔적입니다.”
“그게 말이 되는가! 일각 전에 없던 게 새로 생겼는데 상대는 보지도 못했다?”
“그, 그게…….”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조장에게서 시선을 돌린 남궁단이 사나운 눈길로 모여 있는 경비 무사들을 훑었다.
“아는 이들이 정말 없는가?”
“어, 없습니다.”
경비 무사들의 답에 발작하려던 남궁단의 팔을 이명리가 잡았다.
“예서 화를 내신다고 달라질 일은 아닌 듯합니다.”
“하지만…….”
말을 이으려던 남궁단은 이명리의 눈짓에 뒤를 돌아보았다.
“저, 저들이 어찌……?”
그렇게 의문 어린 남궁단의 시선을 받으며 단목하진을 대동한 고덕이 천천히 다가왔다.
“흔적은 있는데 본 사람은 없다?”
고덕의 물음에 답은 안 한 채 남궁단이 되물었다.
“어찌 나오신 겁니까?”
차가운 음성에 고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 발이 있어 움직이는 것을 남에게 허락을 맡아야 하는 것이오?”
“잠시 접객원에 머물러 달라 청했습니다만.”
“그래서 기다렸다고 생각하오. 그것도 거의 하루 전부를 말이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더 기다려라?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소. 얻을 게 없다면 떠날 것이고, 문제가 있다면 해명을 들어야겠소.”
고덕의 말에 남궁단은 말문이 막혔다.
그런 두 사람의 사이로 이명리가 끼어들었다.
“상황이 좋지 못했습니다. 일부러 정보를 차단하려 했던 게 아니란 뜻입니다.”
“알고 있소. 그래서 기다렸고.”
“하면, 잠시만 더…….”
“그럴 수 없게 되지 않았소. 정문으로 나갔던 이들이 담을 넘어 들어왔소. 그건 문제가 생겼다는 뜻인데, 나보고 앉아 있으라고만 하긴 우스운 게 아니오?”
“기, 기파를 살피고 있으셨습니까?”
“방 안에 갇혀 있는데 그라도 해야 하지 않겠소.”
고덕의 답에 물었던 이명리도, 심기가 상한 표정으로 뒤에 서 있던 남궁단도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접객원에 앉아 정문이나 이쪽 담까지 기파의 이동을 살필 정도라면 최소한 초극의 극의에 이르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 놀람을 재빨리 가라앉힌 이명리가 물었다.
“그럼, 혹시 일각 이내에 이쪽에 새롭게 들어선 기파는 느끼지 못했습니까?”
“느끼지 못했소만, 왜 그러시오?”
“그것이, 이쪽으로 일각 이내에 새로 생긴 흔적이 있어서…….”
말을 하며 담벼락 아래를 바라보는 이명리의 시선을 좇은 고덕이 흔적을 발견하곤 다가섰다.
“팔아.”
흔적을 바라보던 고덕의 부름에 왕팔이 다가왔다.
“예, 대협.”
“흔적이 생긴 시간도 알 수 있다며?”
“가능합니다.”
“이게 언제 생긴 흔적 같으냐?”
고덕의 물음에 흔적이 담긴 흙 한쪽을 집어 손가락으로 비벼 보고, 심지어 맛까지 본 왕팔의 표정에 이채가 어렸다.
“이건…….”
심상치 않은 왕팔의 표정에 이명리가 바짝 다가왔다.
“왜?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있는 게요?”
“흙이 너무 건조합니다. 이 정도면 적어도 이삼 일 이전에 만들어진 흔적입니다.”
“이삼 일?”
“예.”
왕팔의 답에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명리가 부탁을 해왔다.
“바깥쪽의 흔적도 살펴봐주시오.”
이명리의 요구에 몇몇 기찰전의 고수들과 함께 담을 넘었던 왕팔이 약간의 흙을 쥐고선 다시 돌아왔다.
“이건 최근에 생긴 흔적이 맞습니다. 많이 쳐줘도 한 시진 안짝입니다.”
“밖의 흔적은 최근인데 안쪽은 이삼 일 전의 흔적이다?”
“예.”
“그럼 상관이 없는 흔적이란 말이 아니오?”
이명리의 말에 왕팔이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경비조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흔적이 정말로 일각 전에는 없었습니까?”
“없었소. 정말이오.”
아니라고 했다간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 같은 조장의 답에 왕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기환(奇幻)입니다.”
“기환?”
고덕의 물음에 왕팔이 설명을 이었다.
“진법이나 작은 기관 같은 것으로, 사람의 눈을 속여 무언가를 감추어두었다가 일정한 조건이 성립하였을 때 드러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하면, 이 흔적이 그렇다?”
“예. 기환이라면 일각 전에 안 보이던 흔적을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밖의 흔적과 연결되면…….”
“혼란이 오겠구려.”
중얼거리는 이명리의 말에 남궁단이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어 물었다.
“뭘 바라고?”
그의 의문에 대한 답을 단목하진이 전음으로 고덕에게만 전했다.
-대협을 노린 겁니다. 오해! 놈들은 남궁세가가 그들을 숨기고 내놓지 않는다는 오해를 만든 겁니다.
단목하진의 전음에 고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단목세가에서 줄기차게 주장하던 검마 목표설이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고덕이 왕팔에게 물었다.
“밖에 다른 흔적은 없었고?”
“다시 살펴봐야겠습니다. 너무 선명한 흔적이라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못하고 쫓았기 때문에…….”
“서둘러.”
고덕의 명에 고개를 조아려 보인 왕팔이 담을 넘어 사라지자, 남궁단의 눈짓을 받은 기찰전의 무사 대여섯이 그를 따라 담을 넘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기다림이 이어지고…….
삐익-
갑자기 울린 긴 소성에 남궁단의 고개가 담 밖으로 향했다.
“기찰전의 신호입니다. 무언가 발견한 듯하군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덕과 단목하진의 신형이 담을 넘어 사라졌고, 그 뒤를 남궁단과 이명리, 그리고 남아 있던 기찰전의 무사들이 따랐다.
고덕 등이 달려간 곳엔 바닥에 바짝 엎드려 무언가를 살펴보는 왕팔과 그를 보호하듯 주변을 둘러싼 기찰전 무사들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남궁단의 물음에 기찰전 무사 하나가 답했다.
“누군가가 이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다 발각 당하자 도주했습니다.”
“추적은?”
“워낙 빠르게 사라진 탓에…….”
보고하는 기찰전 무사의 실력은 상승의 일류다. 그런 이가 쫓지 못했다는 말에 남궁단은 작게 침음을 흘렸다.
“그럼 상대의 경지가 절정 이상이라는 말이군.”
“경공만 익힌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던지 상대의 경지를 부정하는 기찰전 무사의 말에 왕팔이 고개를 저었다.
“풀이 꺾인 형태와 흙에 남겨진 흔적으로 보았을 때 상대는 내공이 높습니다.”
“그럼…….”
“외총관께서 생각하시는 이상일 겁니다. 절정으로는 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합니다.”
왕팔의 지적에 남궁단의 눈짓을 받은 기찰전 무사 하나가 흔적을 살폈다.
그리고 끄덕여지는 고개…….
“어렵군…….”
어두운 표정의 남궁단을 일별한 고덕이 왕팔에게 물었다.
“방향은 잡을 수 있겠어?”
“가능은 합니다만, 속도가 워낙 빨랐습니다.”
“나와 비교하면?”
고덕의 물음에 왕팔이 피식 웃었다.
“지가 빨라봤자죠.”
“그럼 쫓는다.”
“에효~ 예.”
한숨을 내쉰 왕팔이 뒷덜미를 들이대자, 단목하진도 마지못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런 이들의 움직임에 고개를 갸웃거린 남궁단이 물었다.
“지금 쫓아갈 생각이십니까?”
“그럴 생각이오.”
“함께 가겠습니다.”
그 말에 고덕이 턱밑을 긁적였다.
“셋은 해본 적이 없는데…….”
“그게 무슨…….”
“뭐, 해보면 되겠지.”
다짜고짜 뒷덜미를 잡아오는 고덕으로 인해 남궁단의 의문은 깔끔하게 무시되었다.
그렇게 셋의 뒷덜미를 잡아챈 고덕의 신형이 왕팔이 손을 들어 가리키는 방향으로 쏘아졌다.
쐐애애애액-
엄청난 소성과 일진광풍을 남기며 멀어져 가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이명리와 기찰전 무사들의 표정엔 얼이 빠져 있었다.
* * *
어스름한 실내.
흑의 복면에 야행복 차림인 사내 하나가 조곤조곤 이어지는 음성을 듣고 있었다.
“일 호가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구나.”
“드러나기 전에 빼내다 보니 움직임이 급해진 듯합니다.”
“안배는 소용이 없어진 것이고?”
“예. 남궁세가에 펼쳐 두었던 안배는 모두 거둬들였습니다.”
음성의 보고에 사내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추귀의 실력이 생각 이상으로 좋았던 모양이군.”
“추귀의 실력보다 남궁세가의 움직임이 빨랐습니다. 특히 외총관의 움직임이 우리의 예상보다 기민했습니다.”
“남궁세가의 외총관이라… 그자 이름이……?”
“남궁단입니다.”
“맞아, 생각나는군. 무명이 호천검이지?”
“예, 조장.”
“놈이 기민했다라……. 나중을 위해 제거하는 것도 좋겠군. 남궁세가에 깔아둔 안배를 거둬들이기 전에 놈의 목을 잘라라.”
조장의 명에 보고하던 음성이 곤혹스러워졌다.
“그게… 놈이 목표와 함께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목표와?”
“예.”
“명이 질긴 놈이로군.”
“어찌 하올지……?”
“지금은 내버려 둬. 목표에 접근하는 건 아직은 안 돼.”
“하오면 이후의 행보는 어찌……?”
“세 가지 중 한 가지를 망쳤고, 한 가지는 버려졌다. 그럼 나머지 하나를 해봐야지 않겠나?”
“마련은 해두었다 하나, 앞의 두 가지가 다 실패할 줄은 몰랐던 상황에서 세워진 계획입니다. 생각 이상으로 허점이 많습니다.”
“허점이 오히려 완벽을 도와줄 수도 있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왜 야바위가 성공하는지 아나?”
“야바위요?”
“그래, 야바위. 장바닥의 속임수 놀음 말이야.”
“잘 알지 못합니다.”
“걔들은 언제나 세 가지 경우를 쓰지. 사람에게 세 가지 선택의 기회를 주어 심리적인 안정을 주는 거야. 이번이 아니어도 저긴 있겠지 하는 거 말이야.”
“그렇… 습니까?”
“그래. 한데, 문제는 속는 이들의 바람과 달리 세 가지 모두가 눈속임이란 말이지.”
“그렇군요.”
“그래, 그렇지. 거짓 속에 진실, 진실 속에 거짓. 헷갈리지 않겠나?”
“그 말씀은……?”
“섞어봐. 시간이 짧다 하나 적당한 진실은 섞을 수 있을 거야. 뭐,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괜찮아. 우리의 의도가 아니니 일관성이 없어 더 헷갈릴 테고.”
“어디까지 진실을 섞을까요?”
음성의 물음에 답은 않고 사내가 엉뚱한 것을 물었다.
“요새 적면조 애들은 한가한가?”
“목표가 집을 나선 이래로 교주가 두문불출이라 잠시 보류 중인 것으로 압니다.”
“그럼 적면조 애들 운동 좀 시키지.”
“그 말씀은…….”
“좋잖아? 헷갈리면 검마가 마제에게 검끝을 돌릴 수도 있고, 아니면… 적면조 애들 발광하는 모습도 보고.”
“알겠습니다.”
음성의 복명에 사내의 물음이 이어졌다.
“참, 새로 들어온 청면조 애들은 뭐해?”
“정천맹을 흔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정천맹을?”
“예.”
무엇이 웃긴지 사내의 음성에 웃음기가 섞였다.
“풋- 정천맹이야 그냥 내버려 둬도 지들끼리 흔들리는 애들 아니던가?”
“그걸 확대시켜 본답니다.”
“그게 된다고 생각하나 보지?”
“그렇게 믿는 거 같습니다.”
“청면조가 아직 서투른 모양이군. 명분에 목을 매는 정천맹 애들은 안 돼. 그놈들은 명분에 막혀 꼭 최후의 한 발을 내딛지 못하거든.”
“그렇긴 합니다만, 요사인 그도 아닌 모양입니다.”
음성의 보고에 사내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구파일방과 팔대세가 사이에 문제가 생긴 모양 같습니다.”
“걔들 그러는 거야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이번엔 그 한계를 넘어설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해놓았기에 그 인간들이 그러지?”
“청면조가 벌여 놓은 일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문제의 중심에 청성과 단리세가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청성과 단리? 제갈세가 놈들만큼은 아니어도 둘 다 잔머리로 유명한 놈들이잖아? 그런 놈들이 청면조의 그물에 걸렸단 말이야?”
“예.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인지는 몰라도 이번엔 제대로 걸려든 모양입니다.”
보고를 듣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사내가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도 세 번째 안배는 단리세가에 펼쳐 놓지. 청면조와 안면도 익힐 겸 이번엔 한배를 타보자구.”
“그들이 협조할까요?”
“협조 안 하면 우리 단독으로 하지, 뭐.”
“그러다 청면조의 일에 문제가 생기면……?”
“그게 뭐, 우리 일이 잘못되는 것도 아니잖아.”
“아, 알겠습니다.”
당황스런 음성에 사내가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 일을 대충해도 된다는 건 아니야. 만에 하나 네가 범한 실수로 일이 틀어지면 그 보상을 네 목으로 해야 할 거야.”
“며,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가봐.”
“명!”
이후로 조용해진 사위의 적막을 즐기는 듯 사내의 눈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