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4/129)

제3장. 인연(因緣)-사람에 엮이다

소란스런 아침이 지나자 진명의 성년례가 치러졌다.

조촐한 생일상에 천지신명께 사내가 제구실을 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제례상까지 차려진 마당엔 그윽한 향냄새가 알싸하게 퍼져 나갔다.

사방을 향해 절을 하고 향을 피워 신들에게 고한 진명에게 고길이 도 하나를 내밀었다.

“선물이니라.”

“하, 할아버지.”

놀라는 진명의 음성에 반가움이 가득하다. 누군가에게 도를 선물받긴 처음인 까닭이다.

진명은 설레는 마음으로 선물받은 도를 조심스럽게 뽑아들었다.

“우와~!”

탄성이 절로 인다.

시리게 푸른 도신이 날카로움보다는 정갈함을 풍겼다. 한눈에 봐도 명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라는 표시가 났다.

“감사합니다.”

좋아서 겅중겅중 뛰는 진명에게서 시선을 돌린 고칠이 걱정스런 음성을 토했다.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무기를 항상 곁에서 떼어놓지 않는 무인이니 그것들의 가격을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다.

“걱정할 거 없다. 다 사줄 만하니까 사준 것이니.”

“하지만…….”

“되었다는데두.”

고길의 만족스런 미소에 고칠이 입을 닫았다.

“뭐, 하긴 저 녀석이 저리 좋아하니까요.”

“그래. 그러면 족한 것이다.”

그 말과 함께 동생을 돌아보는 고길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너무 비싸니 다른 걸 사자는 자신을 설득하고 돈을 치른 것이 바로 고덕인 까닭이었다.

“자- 이것은 이 작은할아비의 선물이다.”

서둘러 풀어보니 단아한 무복이 보였다.

“이, 이거!”

“그래, 철의(鐵衣)니라. 뭐, 돈이 달려서 왼쪽 가슴만 철의가 입혀진 것을 샀구나.”

“우와~ 작은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코가 땅에 닿을까 걱정일 정도로 진명의 허리가 숙여졌다.

철의라 해서 그냥 철로 된 엄심갑을 덧댄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질기기로 소문난 고래 힘줄을 늘이고 늘여 실처럼 가늘게 만든 것에 부레풀을 먹여 그늘에서 백 일을 말려 만든 실은 같은 부피의 황금과 같다.

그 실로 짠 천을 왼쪽 가슴 부분 전체에 덧댄 것이다. 가격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됐다. 처음 보는 조카 손자의 성년례라고 돈 좀 써봤으니.”

고덕이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고칠에게 한 말이다.

성년례가 끝나고 새로 얻은 옷에 검을 차고 이리 돌아보고, 저리 폼을 재보는 진명의 수선에 미소를 짓던 고덕은 이번엔 여린에게 붙들렸다.

“작은할아버지~”

“왜 코맹맹이 소리를 내고 그러는 게냐?”

“어제 약속하신 거요. 그거 안 주실 거예요?”

“약속? 여린이에게 내가 뭘 약속했을까?”

“아이, 작은할아버지~”

“으하하하, 그래그래. 자- 이리 오너라.”

자신의 부름에 냉큼 다가온 여린을 곁에 앉히고 고덕이 말을 이었다.

“내가 네게 줄 건 유련수(流連手)란다.”

“유련수요?”

“그래. 사나운 아이니 잘 달래야 할 것이다.”

고덕의 말에 여린의 눈이 반짝였다.

“강한가 봐요?”

“강하다……? 글쎄, 부드럽다고 해야 할걸. 하지만 그 무엇보다 사납지. 잡히면 모조리 부수고 뜯고 찢는다. 어때, 사납겠지?”

“예.”

답하며 어깨를 움츠리는 여린의 모습에 고덕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사나운 아이이니 잘 달래고 보듬어야 할 게야.”

“근데 자꾸 아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이상해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흠… 어떤 면에선 살아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린의 물음에 고덕이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말로는 잘 모를 거다. 자, 돌아앉아볼래?”

고덕의 말에 여린이 등을 보이고 앉자, 양쪽 어깻죽지를 잡은 고덕이 조용히 말했다.

“조금 간지러울 거야.”

우우우웅~

작은 벌레의 날갯짓 같은 소리가 들리고, 여린의 아미가 조금 찌푸려졌다.

하지만 입가가 말려 올라간 것이 아파서가 아니라 고덕의 말대로 간지러운 까닭 같았다.

여린이 느끼던 소음과 간지러움은 곧 사라졌다.

그러나 고덕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움직이는 혈을 기억해두거라.”

그 말을 끝으로 견정혈을 파고든 고덕의 내력이 여린의 보잘것없는 내력을 이끌고 혈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크흡!”

놀라기도 하고 조금 찌릿하기도 한 느낌에 짧게 당혹성을 내뱉었지만, 여린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대체로 이런 전수는 입을 열면 무소용이란 소리를 들은 까닭이다.

그런 여린의 모습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고덕이 말했다.

“말을 해도 괜찮다. 대신 기억만 잘한다면…….”

“후아~ 소리 내면 안 되는데 냈는지 알고 놀랐어요.”

“하하하, 이야기책을 너무 많이 읽은 모양이로구나.”

고덕의 놀림에 여린은 볼을 붉힐 뿐,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고덕의 웃음이 커졌다.

“하하하!”

고덕이 웃든 말든 여린은 내력이 달려가고 있는 길을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변화가 너무 빨리, 너무 많은 부분에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을 알려 주길 예닐곱 번. 여린의 어깨에서 고덕이 손을 뗐다.

“자- 한번 시도해보거라.”

고덕의 말에 정신을 집중한 여린이 기억에 존재하는 길을 따라 내력을 움직였다.

샤라라랑-

무언가 가는 금속성이 낮게 울리더니, 여린의 손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

여린의 탄성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예쁘지?”

“예. 아름다워요.”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취하면 안 된단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라고?”

“사나운 아이요.”

“그렇지. 잊지 않았다니 되었다. 자- 그 상태로 돌을 쥐어볼래?”

시키는 대로 돌을 주워든 여린을 보며 고덕이 말을 이었다.

“이제 힘을 주어봐.”

푸스슥.

“어, 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못 잇는 여린의 주먹이 펼쳐지자, 돌가루가 흘러내렸다.

“내공이 올라가면 힘도 세어질 게다. 어쩔 땐 네가 다스리기 어려울 정도로 힘을 내기도 할 거야. 그때마다 다독이는 것을 잊지 말거라.”

“예, 작은할아버님.”

답하는 여린의 눈이 샛별처럼 반짝거렸다.

* * *

며칠간의 외유를 끝낸 고칠과 그 가족들은 남평에 있는 한도회로 돌아갔다.

고길의 집이 있는 하포와 남평의 거리는 제법 멀어서 마차로 달려도 이틀이나 필요했다.

그 길을 떠나며 고칠과 강태명은 고덕에게 꼭 한 번 다니러 오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렇게 고칠의 가족이 떠나자 고길과 고덕은 평소로 돌아왔다.

흙냄새는 푸근했고, 시간은 평화로웠다.

그렇게 흘러가던 시간에 작은 파장이 던져졌다.

시전을 나갔던 유 씨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오며 고길을 찾았다.

“영감, 영감!”

“왜 그리 소란이여.”

고길의 심드렁한 음성에 유 씨가 다급성을 토해냈다.

“사단이, 사단이 났대요.”

“사단이라니?”

“진명 애비가 있는 그 한도 뭐라는 곳이 큰 싸움에 휘말렸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한도회가?”

“예. 수십이 죽고, 그보다 훨씬 많이 다쳤다네요. 관병이 나와 볼 정도로 싸움이 커다랬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아내의 걱정에 고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칼로 먹고사는 이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무슨 일이 있다는 연통이 온 것도 아니니 기다려 보자고.”

남편의 말에 유 씨가 펄쩍 뛰었다.

“그 난리가 났다는데 여기서 기다리고만 있자는 말이에요?”

“그런다고 찾아가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니겠소.”

“무슨 소리예요. 찾아가야죠. 찾아가서 살아 있는지, 팔다리는 모두 붙어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죠.”

“어허, 장성한 아이의 일에 그리 참견을 해서 될 일이 아니야. 그걸 왜 몰라.”

“난 몰라요. 어서 준비해요. 가서 내 눈으로 똑똑히 보기 전까진 절대로 안심할 수 없다고요. 일반 무사들도 많이 죽었다는데 진명이라도 끼어 있다면…….”

“어허! 그 입방정!”

고길의 역정에 찔끔한 표정이었지만, 유 씨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성인이 되어서 진명이도 무사들과 함께 일을 맡는다고 했단 말이에요.”

“어허, 그래도!”

“당신이 안 간다면 나 혼자라도 갈 테니 그리 알아요.”

“어허, 임자.”

고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방 안으로 들어간 유 씨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도저히 말릴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렸는지 아니면 그도 궁금했던지 고길이 일어섰다.

“그리 헐게 싸서야 길 중간에 돌아오겠구먼. 비켜 봐. 저기 내 옷가지도 좀 가져오고.”

갑자기 나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남편에게 유 씨가 물었다.

“당신도 가려고요?”

“그럼 임자만 보낼 순 없잖아.”

고길의 말에 유 씨가 반색을 했다.

“잘 생각했어요. 내 빨리 짐을 챙길게요.”

그렇게 한참을 소란을 떨어 봇짐을 꾸려 멘 고길이 유 씨와 함께 마당으로 내려섰다.

“응? 네 차림은 왜 그런 모양이여?”

평소 입던 낡은 단삼이 아닌 단정한 흑색 유삼을 차려입은 고덕의 모습을 발견한 탓이다.

“그럼 나 혼자 있으라고?”

“아! 그렇지. 그래, 이참에 한번 같이 찾아가보자꾸나.”

남편의 말에 유 씨가 고덕의 팔을 잡았다.

“잘되었네요. 그렇지 않아도 도련님 끼니가 걱정이었는데.”

칠순이 가까운 형수가 예순을 넘긴 시동생의 끼니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 마음에 미소를 지어 보인 고덕이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집에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다시 집을 나섰다.

하지만 몰래 도망쳐 나와야 했던 과거와 달리 이번엔 형 내외와 함께 나선 여행이었다.

걸어갈 생각이던 형 내외를 설득해 고덕은 마차를 하나 구해 길을 재촉했다.

* * *

마차 덕인지 그들이 남평에 도착한 것은 이틀이 지난 점심나절을 약간 넘긴 시간이었다.

싸움이 크긴 컸던지 여전히 한도회는 그 뒤처리로 분주했다.

“어떻게 오셨소?”

강압적인 음성의 수문 무사에게 고덕이 답했다.

“고칠을 찾아왔네.”

약관으로밖에 안 보이는 놈이 대뜸 반말이니 수문 무사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더구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기감이 전혀 없으니 무시하는 마음도 들었다.

“뭐, 고칠? 그런 놈 모른다. 그리고 어른에게 그따위 말버릇은 명을 재촉한다는 것쯤은 알아두거라.”

수문 무사의 으르렁거림에 고덕이 피식 웃어버렸다. 자신의 외모를 간과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미안하네. 내 버릇이 되어서. 그런데 고칠을 모르는가?”

“이 자식이 그래도… 에이, 그래, 모른다. 됐냐?”

그래도 문규가 헐겁진 않았는지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기에 고덕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나름 괜찮은 곳에 가족이 몸을 담고 있다고 느낀 까닭이다.

“그럼 철추도에게 전갈을 좀 전해주게.”

“이 자식이! 강 각주께서 네놈 친구라도 되냐? 어디서 무명을 함부로 불러. 정녕 치도곤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래!”

무사의 윽박에 안 되겠던지 고길이 나섰다.

“미안하네, 무사 양반. 강태명이라는 분에게 전갈을 넣어주시게. 하포에서 사돈이 다니러 왔다고 말일세.”

고길의 말에 수문 무사의 얼굴에 놀람이 자리 잡았다.

“가, 강 각주님의 사, 사돈이십니까?”

“그렇다우. 소식 좀 넣어주시구려.”

답을 들은 수문 무사가 고덕을 슬쩍 일별하고는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각주님께 연락을 넣겠습니다.”

“부탁하오.”

고길의 부탁에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하급 무사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기다리길 얼마.

철추도 강태명이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아이고, 사돈어른.”

고길의 손을 잡고 반색을 표하던 강태명이 고덕에겐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오셨습니까?”

“다시 보는구려.”

“다시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이리 반겨 주니 고맙소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수문 무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적어도 자신이 그리 홀대해서는 안 되는 인사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강태명의 안내로 들어가는 고덕에게 수문 무사가 지나칠 정도로 공손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지난 과오에 대한 사과의 의미가 담긴 것이다.

그 모습에 미소를 지은 고덕의 고개가 끄덕여졌고, 그것을 확인한 수문 무사의 표정이 차츰 제 색을 찾아갔다.

그렇게 안으로 안내된 고길 내외와 고덕은 강태명의 개인 숙소로 안내되었다.

“소식을 들으신 모양이시군요.”

“그것이 소문이 크게 난 터라……. 부끄럽소이다.”

고길의 말에 강태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직 모든 소식을 듣진 못하신 모양이군요.”

“그게 무슨……?”

“이번 싸움에서 제부와 진명이가 상대에게 포로로 잡힌 이들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뭐, 뭐요!”

경악하는 고길과 유 씨를 보며 강태명이 말을 이었다.

“지금 전력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곧 반격을 가해 적을 부수고 제부와 진명이 포함된 포로들을 구출해올 것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강태명의 말에 너무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고길 내외를 대신해 고덕이 물었다.

“조카며느리와 여린이는 왜 보이지 않습니까?”

“싸움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습니다.”

강태명 정도의 무인이 가족을 피신시킬 정도라면 상대가 이쪽보다 훨씬 강하다는 뜻이다.

그 탓에 안색을 가라앉힌 고덕이 물었다.

“안전한 곳이라면 어디를 말하는 것이오?”

“제 사제에게 보냈습니다.”

“사제가 있었소이까?”

“예. 저보다 나은 사제지요. 남궁세가에서 녹을 먹고 있습니다.”

그 말은 강유화와 여린을 남궁세가로 보냈다는 뜻이다.

“흠…….”

가족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긴 것이 마음이 들지 않아 침음을 흘렸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안전한 곳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상황을 알고는 있는 게요?”

“알리지 않았습니다. 곧장 달려올까 걱정이 되어서…….”

“그건 잘한 것 같소. 그나저나 상대는 어디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말을 못할 정도로 강한 상대요?

고덕의 전음에 강태명이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

-단목세가입니다.

강태명의 답에 고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혈가와 척을 지다니, 무슨 일이 있던 게요?

-말이 깁니다.

고길과 유 씨를 앉혀 놓고 나눌 말이 아니란 뜻이었다.

고덕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태명이 고길을 달랬다.

“이곳은 안전한 곳이 못 됩니다. 반드시 구출해낼 터이니 집으로 돌아가 계십시오. 사돈어른.”

“아니요. 내 아들놈과 손자가 돌아올 때까지 예서 기다릴 겁니다. 그 아이들의 숙소로 안내해주시구려.”

“사돈어른…….”

강태명의 난간함 표정에 고덕이 나섰다.

“그렇게 하지, 형. 이곳도 분주하고 준비할 것도 많을 터인데 괜히 우리가 거치적거리면 안 되지 않겠어?”

동생의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되었는지 고길이 한발 물러섰다.

“그렇구나. 내 생각이 짧았소, 사돈. 내 시내에 객잔을 잡고 기다리리다. 아이들이 돌아오거든 꼭 연통을 주시구려.”

“사돈어른…….”

무언가 만류의 말을 꺼내려던 강태명은 고덕의 고갯짓에 뒷말을 흐렸다.

“그래, 형. 그렇게라도 하자.”

그렇게 고길 내외는 한도회를 떠나 시내에 객잔을 잡았다.

짧지 않은 여정에 놀란 탓인지 객잔을 잡자마자 그들은 힘없이 잠이 들었다.

하긴 소식을 들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지 않은 것이 용했다.

형 내외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한 고덕이 객잔의 일 층으로 내려갔다.

객잔을 안내한 강태명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혈가와 싸움이 붙다니.”

백도에 팔대세가가 있다면 마도엔 이가가 존재한다.

달리 단목세가와 진마벽가라 불리는 혈가와 마가가 바로 그들이다.

“사소한 오해였습니다.”

“사소한 오해?”

“예. 우리 한도회 산하의 표국이 옮기던 화물 중에 단목세가의 물건이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물건이라면… 설마 장물이오?”

“그랬던 것 같습니다. 표행 중간에 나타난 단목세가의 고수들이 다짜고짜 자신들의 물건을 돌려달라고 했으니까요.”

“흠… 돌려주지 못했겠군.”

“예.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그렇게 돌려주면 앞으론 표행을 할 수 없으니까요.”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고덕을 확인한 강태명이 말을 이었다.

“거절에 대해 그들은 힘을 사용했습니다. 표사들로는 항거 불능이었지요. 많은 수가 다치고 표물을 빼앗기기 직전,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자리에 은거기인이 나타났습니다.”

“은거기인?”

“예. 이름도 형색도 생소한 이가 나타나 단목세가의 고수들을 거꾸러트렸습니다.”

강태명의 말에 묘한 표정을 지은 고덕이 물었다.

“설마 죽인 거요?”

“그것이…….”

뒷말을 잇지 못하는 강태명의 모습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의심은 하고 있는 것이구려.”

“너무 완벽한 우연이니까요.”

완벽한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뿐이다.

강태명은 지금 그것을 거론하는 것이다.

“작위적인 부분을 찾아내긴 한 거요?”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고수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단목세가겠구려.”

피의 대가는 피로. 유명한 혈가의 잣대가 드리워진 것이다.

“예. 열셋 모두 시체로 돌아왔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인 걸 보면 그걸 참지 못한 모양이구려.”

“참을 수도 없었습니다.”

“하긴 그 지경을 당하고도 참는다면 한도회의 존속이 어려웠겠지만…….”

“그렇습니다. 무가에겐 가장 치명적인 자존심 싸움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럼 아이들은 그 싸움에 동원된 것이오?”

“아닙니다. 그 싸움이 벌어진 동안 일단의 단목세가 고수들이 본회를 급습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부는 정문과 접객당을 맡은 방위당의 당주이기에…….”

찾아온 적과 첫 충돌에 휩쓸렸을 것이다.

“진명이도 방위당 소속이었소?”

“예. 아비의 밑에서 배우라고 배려를 한다는 것이 그만…….”

강태명의 얼굴에 자괴감이 어렸다. 아마도 그가 나서서 만든 일인 모양이었다.

“찾아올 가능성은 있는 게요?”

고덕의 물음에 강태명은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고덕의 입에서 깊고 무거운 침음이 흘러나왔다.

“흠…….”

놀람이 깊었던 모양인지 고길 내외는 강태명이 돌아간 후에도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그에 걱정이 깊어진 고덕이 점소이를 시켜 의원을 불러왔다.

“놀란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려.”

진맥을 마친 의원의 물음에 고덕이 답했다.

“그렇소이다. 어찌… 괜찮겠소이까?”

고덕의 물음에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되진 않겠소. 나이가 나이이니 깨어나는 것이 조금 더딜 뿐이오. 침도 놓았고, 내일 아침이면 무사히 일어날 수 있을 게요. 일어나거든 챙겨 준 약이나 먹이시오.”

“고맙소.”

고덕의 말투가 마뜩치 않았던 의원은 고까운 표정으로 치료비를 받아 돌아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잠이 든 형 내외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고심하던 고덕은 밤이 깊은 시간에 객잔을 나섰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흩어졌다.

* * *

강서의 백운산 자락에 고색창연한 거각들이 즐비하다.

오백 년 역사를 가진 단목세가, 이른바 혈가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혈가의 담장을 낯선 그림자 하나가 뛰어넘었다.

혈가의 심처, 혈존이란 이름으로 강호십대고수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단목장경의 처소에 그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어떤 급한 일이 있는 객이시기에 이 밤에 찾아오신 게요?”

언제 일어나 앉았는지 침상에 걸터앉은 혈존의 무릎 위에서 혈검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답무용.”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퍼렇게 강기가 일어선 팔이 공간을 부수고 날았다.

“흡!”

생각 이상의 강공에 혈존의 신형이 침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를 쫓아 상대가 달빛 아래 드러난 순간, 경악한 혈존의 신형이 멈춰 섰다.

퍽- 털썩.

천하의 십대 고수가 그렇게 제압당했다.

“날 알고 있었나?”

머리를 긁적이던 고덕이 널브러진 단목장경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끄응.”

정신을 차린 단목장경의 시선에 자신의 침대 머리맡에 앉은 인물이 보였다.

“정말 당신이로군.”

“날 아나?”

“천하의 검마를 모른다면 마도인이 아니지 않겠소.”

“글쎄, 내 얼굴을 보고도 살아 있는 이들은 없는 줄 아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구려.”

“뭘?”

“몇 년 전 교주의 회갑연에서 잠시 만났었는데, 잊으셨소?”

단목장경의 물음에 잠시 기억을 더듬다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그때 교주와 함께 내 숙소를 방문했던 사람 중 하나였던 모양이로군.”

“검마의 입장에서야 보잘것없겠지만, 그래도 기억조차 못하다니 서운하구려.”

“원래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않아. 곧 죽을 놈들만 상대해서 생긴 버릇이니까 당신이 이해해.”

고덕의 말에 피식 웃어 보인 단목장경이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시오? 설마 교주가 내 목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닐 텐데.”

“교주와는 상관없어. 그저 내 개인적 볼일이지.”

“개인적 볼일?”

“원래대로라면 인질이 되어줬어야 했겠지만, 마침 날 아는 것 같으니 쉬운 길로 가기로 하지.”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사람 잡아놨지?”

“사람? 설마 한도회의 사람들을 말하는 거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야.”

“한도회가 마교와 무슨 상관이라고……?”

“개인적인 일이라는데 왜 자꾸 신교는 들먹거려.”

짜증이 묻어나는 음성에 단목장경이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아, 미안하오이다. 내 머리가 둔해서 그렇소.”

천하의 혈존이 자신을 굽힌다.

세상 사람들이 들었다면 기절할 일이었지만, 그 상대가 검마라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근 백 년 이래 하늘 아래 가장 강한 다섯 무인을 이르는 천하오존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이가 바로 검마이기 때문이다.

일인군단, 검무지존, 일검필살, 현경의 극의를 걷는 자.

모두가 검마에게 붙여진 수식어들이었다.

그 검마가 요구했다.

“다는 필요 없어. 둘만 내줘.”

“둘이라면 누구를……?”

“고칠, 고진명.”

“그 둘이면 되는 거요?”

“그래.”

“무슨 관계요?”

“호구조사가 필요하나?”

“호구? 서, 설마 가족이요?”

놀람 가득한 상대의 음성에 고덕은 아차 싶었다.

이래서 말을 길게 하는 게 싫었다. 말주변도 없기도 했고…….

“손자 손녀가 오래 살길 바란다면 신경 끄는 게 좋아.”

지독한 협박이다. 하지만 천하의 혈존이 주먹을 불끈 쥐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상대는 그 말을 충분히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알아들은 것 같으니 가지.”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마검에게 혈존이 물었다.

“그렇다면 양보를 원하는 거요?”

“귀먹었나? 난 그저 그 둘을 원했을 뿐이야.”

“그럼 한도회를 쓸어버려도 상관없는 거요?”

단목장경의 물음에 고덕의 시선이 따가워졌다.

“직접 나설 생각이었나?”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을 오래 지켜보는 취미는 없소.”

“창피한 줄 알아. 애들 싸움에 무슨…….”

“난 그런 거 모르오.”

“좋겠다. 얼굴 두꺼워서.”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고 확실히 해주시오. 한도회와는 정말 상관이 없는 게요?”

“상관이 없지… 는 않겠군.”

“뭐요?”

“그게, 그곳이 애들 직장이라서 말이야.”

“애? 자손이요?”

단목장경의 물음에 고덕이 턱을 긁적거렸다.

어차피 자신의 실수로 드러난 일이다. 감춰봐야 억측만 남으니 일정 수준까진 드러내는 것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혼삿길 막지 말지.”

“그럼……?”

“조카랑 조카 손자야. 현재로는 우리 가문의 대를 이을 유일한 존재들이지.”

“젠장.”

“왜 그래?”

“그럼 양보하란 말이 아니오.”

단목장경의 마뜩치 않아하는 음성에 고덕이 눈을 부라렸다.

“왜, 좋게 가니까 아쉬워?”

“그, 그런 건 아니오.”

“좋은 게 좋은 거야. 좀 베풀고 살아.”

그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나버린 고덕의 뒤에서 단목장경이 투덜거렸다.

“그런 작자가 허락 없이 자신의 숙소에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교주한테 물병을 집어던졌나.”

하지만 그 투덜거림을 들어줄 상대는 이미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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