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3/129)

제2장. 상봉(相逢)-새로운 가족을 만나다

그렇게 농사일을 시작한 지 십여 일이 지날 때쯤의 어느 날이었다.

“어이구, 내 새끼들, 어여 오너라.”

유 씨의 호들갑에 정리하던 농기구를 놓고 돌아보니 몇몇의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툇마루에 앉아 농기구를 손질하던 고길 형제를 바라보다 버선발로 마중하는 유 씨에게 안겨 드는 소녀의 애교가 제법 귀엽다.

“어머니, 아버님, 안녕하셨어요.”

이어진 중년 미부의 인사에 고길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서 오너라.”

고길의 답에 미부의 곁에 섰던 청년이 공손히 포권을 취해왔다.

“진명이가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그간 건강하셨죠?”

인사하는 폼이 무가의 기틀이 잡힌 녀석이다.

아마도 성년례에 다니러 오겠다던 조카 고칠의 아들 같았다.

“오냐오냐. 너도 무탈하고?”

“예. 할아버님.”

“애비는 어찌… 같이 안 온 게야?”

“아범은 낼 아침에 오라버니와 함께 올 거예요.”

미부의 답에 고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아 참, 내 정신 좀 보게. 덕아, 이리 오거라.”

형의 부름에 고덕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출현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인사 드리거라. 네 시숙부시니라.”

고길의 말에 미부의 표정에 곤혹스러움이 서린다.

“예?”

며느리가 하라는 인사는 하지 않고 놀란 표정만 짓고 있자 유 씨가 나섰다.

“도련님 얼굴 때문인가 보네요.”

“아! 네 시숙부가 동안이라 그런 것이니 묻지 말고 인사부터 드리거라.”

거듭된 시아버지의 재촉 탓인지 미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수, 숙부님. 강유화라 하옵니다.”

“도련님, 얘가 셋째인 칠이 색시예요.”

유 씨의 도움에 고덕이 가볍게 답례를 했다.

“반갑구나. 작은 인연으로 얼굴이 이리 되었으니 너무 이상타 생각지 말거라.”

“예? 아, 예.”

역시 답이 탐탁지 않다.

그런 어미를 뒤로하고 두 조카 손주가 유 씨의 손에 등을 떠밀려 앞으로 나섰다.

“진명이가 작은할아버님께 인사 올립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작은 하, 할아버님, 여린이에요.”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얼떨떨한 것이다.

자신의 어미보다 더 어려 보이는 할아버지를 대하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냐, 어서 오너라. 네 작은할아버지란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자못 늙수그레한 말투로 인사를 받는 고덕이었으나 역시 젊은 모습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느낀 것일까? 고길이 나서 짧게 설명을 했다.

“언젠가 이야기한 적 있었지? 고칠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집을 나간 숙부가 계셨다고. 이 녀석이 그 아이란다. 이름은 덕이지. 고덕. 나보다 나이가 세 살 어리니 지금은 예순둘이겠구나. 얼굴은 무공을 익혀 그렇다는데, 그건 나보다 네들이 더 잘 알지 싶다.”

고길의 말에 고덕이 불퉁거렸다.

“거, 숙부라 하지 말든지 녀석이나 아이라 하지 말든지. 무슨 설명이 그래.”

“허허허, 이러이런. 내 실수했네. 그래도 내 눈에 넌 예전에 집을 나갔던 덕이 그대로니까. 이놈아.”

자신의 불만에 웃음을 짓는 고길의 답에 고덕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어버렸다.

그에겐 이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가 모두 즐거운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고칠의 식구들은 그다지 편치 않았다. 예순둘이나 된 사람의 외모가 약관으로 보이자면 쌓았을 내공이 좀처럼 짐작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정도면 최소 절정? 아니, 주안술만 익힌 것이 아니라면 무조건 초절정엔 들어서야 가능한 일이다.

초절정.

감도 잘 잡히지 않는 경지다.

아무리 낮춰 잡아도 절정. 그것조차 쉬운 경지가 아니다.

아니, 쉽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강호에 발을 들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표로 삼는 경지가 바로 절정 고수라 불리는 발경(發勁)이니 그 지고함이야 달리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절정에 이른 내공으로도 주안술 하나에만 매진하지 않고서는 유지하기에도 벅찰 외모를 가진 이가 가족이라고 느닷없이 나타났으니 혼란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어리면 그만큼 이해와 적응이 빠르다 했던가?

상대의 경지를 가늠하자마자 진명이 관심을 보였다.

“작은할아버님, 검을 쓰십니까?”

진명의 물음에 고덕이 자신의 허리 어림에 비스듬히 메인 검을 슬쩍 쓰다듬었다.

“이놈 때문이로구나.”

“예. 그러합니다.”

“그래, 맞다. 검을 쓰지.”

말과 함께 진명의 허리를 훑은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도를 익힌 모양이로구나.”

“예. 외가의 독문 도법을 익혔습니다.”

음성에 자랑스러움이 가득하다. 아마 이름깨나 알려진 도법인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어 보인 고덕이 물었다.

“도폭이 넓은 걸 보니 패도식(敗刀式)인 모양이지?”

“예. 외백부께 철혈도법(鐵血刀法)을 배웠습니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조카 손자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들은 바가 없었다.

“그, 그렇구나. 훌륭한 도법을 익혔으니 축하할 일이다.”

급히 둘러댔으나 완전히 감추지 못한 모양이다.

조카 손자의 표정에 반발심이 깃들었다.

“작은할아버님은 어떤 검법을 익히셨습니까?”

물어오는 기세가 사뭇 도전적이다.

자신이 익힌 도법에 대한 자부심과 도를 익히는 이들이 갖는 검객에 대한 호승심이 뒤섞인 형세다.

백일창(百日槍), 천일도(千日刀), 만일검(萬日劍).

세간에 회자되는 이 말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창술가와 도객들이 적지 않았다.

조카 손자도 그 범주에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천투검(天鬪劍)을 익혔느니라.”

정천맹의 고위 정보 관계자가 들었다면 기겁을 했을 무공이었지만, 불행(?)하게도 고칠의 가족들은 처음 듣는 무공 명이었다.

“후, 훌륭한 검법을 익히셨군요.”

자신만큼 속을 감추지 못하는 조카 손자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인 고덕이 물었다.

“외백부의 함자가 어찌 되시느냐?”

“강, 태 자 명 자를 쓰십니다.”

‘한도회의 강태명, 강태명… 아! 철추도(鐵鎚刀).’

자신이 이름을 기억할 정도니 무명소졸은 아니다.

절정에 달한 고수로 그래도 복건성 일대에선 이름깨나 날리는 이라는 기억이 고개를 들었다.

“철추도께서도 안녕하시고?”

“외백부님을 아십니까?”

“아니, 면식은 없다. 그저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이니…….”

외백부의 유명세를 확인한 탓인지 진명의 목에 힘이 들어가 보였다.

그 어줍지 않음이 귀여웠다.

“작은할아버님의 무명은 어찌 되십니까?”

웃었다. 말할 수 없는 걸 묻기 때문이다.

“아, 죄송합니다. 모, 모두가 무명이 있을 필요는 없지요.”

이상한 오해였지만 나름 나쁘지 않기에 고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네 도를 한번 보자꾸나.”

“저,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작은할아버님.”

고개를 숙이는 진명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었다.

최소 절정, 아니 초절정일 것이 거의 확실한 고수가 자신의 도법을 보아준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스승 격인 외백부도 절정 고수이긴 했지만, 문파의 일에 쫓겨 요사인 자신의 무공을 지도해줄 시간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수련을 일반 무사들과 함께 한도회의 교육 단체인 교각(敎閣)에서 하고 있었지만, 집단 교육이 의례 그렇듯이 발전 속도는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린이 쪼르르 달려와 생글거리는 얼굴로 고덕의 팔에 매달렸다.

“작은할아버지, 저는요? 저도 무공을 배우는데요.”

손이 작고 흰데 반해 손끝이 무디다. 조법을 배운다는 뜻이다.

“조법을 배우느냐?”

“어! 어떻게 아셨어요?”

조법은 수련 중에 손끝이 헐기 쉽고, 대성하더라도 흉터들이 남아 여인들이 꺼리는 무공인데, 의외로 그걸 익히는 모양이었다.

“네 손끝이 말을 해주는구나.”

고덕의 말에 엉망이 되어 있는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본 여린이 풀 죽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저도 이것 때문에 속상해 죽겠어요.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거든요. 외백부께서 아는 무공은 도법과 조법뿐이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여자가 무식하게 도를 휘두를 순 없잖아요.”

무공을 배우고는 싶은데 마땅히 배울 것이 조법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수공을 먼저 배우고 익혔을 것을 잘못했구나.”

“수공이요?”

“그래. 수공.”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여린에게 수공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수공은 그렇게 구하기 쉬운 무공이 아니다.

강호에 그런대로 이름난 수공은 소수마공, 천강수, 혈옥수, 건곤산수, 삼음수 정도였다.

소수마공과 천강수는 희대의 마공과 백도 최강의 수공으로 수공들의 수좌를 두고 다투는 신화적인 무공들이다.

건곤산수와 삼음수는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구파의 일원인 종남과 곤륜의 진산절기(鎭山絶技)이니 문외불출은 당연지사였다.

그럼 남은 것은 혈옥수다. 그런데 이건 사파의 전설적인 무공으로 익히는 방법조차 극악하기 그지없다.

결국 이름깨나 알려진 수공들 중에는 배울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격수나 파철수 같은 기초 수공들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기초의 기초를 나열한 것들이기에 무공이라 부르기에도 모자란 것들이었다.

솔직히 그것들을 익힌다고 시간을 허비하느니 그냥 손끝이 엉망인 게 나았다.

그걸 알기에 여린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 것이다.

“내일 보자꾸나. 내가 네게 선물할 것이 있겠다. 아마 실망은 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마.”

고덕의 말에 여린의 동그란 눈에서 놀람이 걷히며 작은 기대가 꿈틀거린다.

그것을 바라보며 고덕이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기분이 자신을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정말이지요. 약속이에요. 작은할아버지.”

어느새 기대로 몸속을 꽉꽉 채운 여린이 고덕의 팔에 매달려 들뜬 목소리로 애교를 떨어댔다.

“하하하, 오냐. 내 약속하마.”

“와~”

여린의 환성이 터져 나온 마당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 * *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하고 물러난 강유화가 아이들에게 타일렀다.

“작은할아버님을 너무 가까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왜요?”

여린의 물음에 이어 진명이 나섰다.

“혹시 진위 여부 때문입니까? 어머니.”

“그래. 얼굴이 너무 어리구나. 무공을 익힌 탓이라 하나 예순을 넘겼다는 나이에 그 정도의 동안을 유지하려면 그 경지가…….”

“최소 절정이지요.”

진명의 답에 강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안술만 갈고닦은 절정 고수여야 한다. 하지만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주안술만 익혔을 리는 만무하니, 적어도 그 경지가 초절정에는 이르러야 가능한 소리지 싶다.”

어머니의 말에 진명과 여린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말이 초절정이지, 결코 보기 쉬운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례로 복건성의 패자라 자처하는 한도회만 하더라도 초절정의 고수는 회주를 포함해 셋뿐이었던 것이다.

“하오면 어머니는 저분이 가짜라 보시는 겁니까?”

“그래. 나는 그리 생각한다. 더구나 네 아버지가 방위당의 당주로 자리를 옮긴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다. 너무 공교롭지 않느냐?”

모친의 말을 듣고 보니 간과할 일이 아니다.

잔뜩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으며 배신감이 배가되었다. 그것이 고스란히 분노로 뒤바뀌고 있었다.

“하면 어찌합니까?”

“일단은 아버님과 네 외백부를 기다려 보자꾸나. 두 분이 오시면 무언가 방법이 생길 것이다.”

“만에 하나 목표가 두 분이라면 어찌합니까?”

“네 외백부는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네 외백부를 해쳐서 득이 될 일도 없고.”

“하면 어머니는 그분이, 아니 저자가 왜 접근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마도 네 아버님이 새롭게 맡은 일을 이용할 생각이지 싶다.”

“아버님의 새 일이라면……?”

“방위당은 정문과 접객당을 맡은 부서니라. 그곳을 통하면 회의 구석구석 가지 못할 곳이 없지.”

강유화의 말에 진명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면 저자의 목적이 침투에 있다고 보시는 것이군요.”

“글쎄, 침투까지는 아니어도 목적이 한도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지금의 위장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

“어머님 말씀을 들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 조용한 잠입엔 가족만큼 훌륭한 위장이 없을 테니까요.”

“그래. 바로 그것이란다.”

“그렇다면 아버님과 외백부께서 오시면 곧바로 제압하여 전후의 사정을 따져 봐야겠군요.”

“글쎄, 네 아버님과 외백부님이 오셔도 제압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아! 그자의 경지 때문이군요.”

“그렇지. 그러니 우리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들켜선 안 되는 것이란다.”

“하오면 어찌하시려는 것입니까?”

“일단 네 아버님과 외백부께 전후 사정을 말씀드리고 어찌할지 의논해야겠지.”

“알겠습니다. 하면, 그때까지 조심하겠습니다.”

진명의 답에 여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조심할게요, 어머니.”

그렇게 강유화가 자녀들과 모종의 논의를 진행하는 가운데, 고덕은 손자들의 방문에 기분이 좋아진 형에게 붙잡혀 술 상대가 되어주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부터 들이닥칠 거란 예상을 깨고 두 조카 손주들이 조용하자 고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르침이 깊은 탓인가? 그도 좋겠지.’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고덕이 아침 밥상 앞에서 마주한 두 조카 손주들에게 말문을 열었다.

“아침에 짬이 좀 나는구나. 진명이부터 보아주랴?”

“아, 아닙니다. 작은할아버님. 소손은 아침에 정해진 수련이 있는지라…….”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네 때엔 규칙적인 수련도 중요한 법이니. 하면 여린이부터 볼까?”

“아, 아니요. 저도 할 일이 있는데요.”

“그래? 이런, 우리 두 조카 손주들께서 꽤나 바쁜 걸 몰랐구나. 그럼 이따 오후에 보자꾸나.”

“예. 작은할아버님.”

“알겠어요.”

진명과 여린, 두 조카 손자의 답에 고덕은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밥상을 물리자 고길과 고덕 두 형제는 평소처럼 밭일을 나갔다.

손님이 왔다고 내팽개쳐 둘 만큼 느슨한 성격들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밭으로 나가고 점심나절 고길의 아내마저 참을 가지고 나가자, 집엔 강유화와 두 남매만 남았다.

고칠과 철추도 강태명이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런 때에 맞춰오시다니, 이것도 다 천지신명께서 도우시는 일인가 봐요.”

강유화의 말에 고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실은 어제 집에 왔는데 말이에요…….”

이후에 이어진 처의 설명에 고칠이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간자란 말이오?”

“제 생각이에요. 결론은 직접 보고 내리셔야겠지만…….”

“얼굴이 그렇다면 유화의 말에 타당성이 있네. 제부.”

철추도 강태명의 말에 고칠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아시겠지만 저희 아버님이 그리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십니다. 분명 무언가 믿을 구석이 있으니 믿고 계신 게 아니겠습니까?”

남편의 의견에 강유화가 고개를 저으며 나섰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던 형제가 사십 년 만에 찾아온 거예요. 그 사실만으로도 이성을 마비시킬 힘은 충분하지 않겠어요?”

“그렇긴 하지만… 더구나 어린 얼굴이라며. 그러면 우리가 의심할 걸 뻔히 알 텐데,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흠… 제부의 말도 일리가 있군. 신중할 필요가 있겠어. 만에 하나 진짜라면 자칫 커다란 결례를 범하게 되는 것이니 말이야.”

강태명의 신중론에 강유화와 진명, 여린 남매의 표정에 당황감이 들어찼다.

만에 하나 간자로 몰았는데 정말이라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렇게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동안 밭일을 마친 고길, 고덕 형제와 유 씨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고, 사돈 오셨어요.”

들어서던 이들 중에 가장 먼저 손님들을 발견한 것은 유 씨였다. 마당 중간에 우람한 덩치의 강태명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발견했던 탓이었다.

“예.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안사돈어른.”

“저야 늘 그렇죠.”

미소를 짓는 유 씨에 이어 고길이 나섰다.

“잘 오셨소, 사돈.”

“예. 다시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사돈어른.”

“무슨 그런 말씀을. 항시 편히 오시면 됩니다.”

“매번 감사합니다.”

세 사람의 인사가 마무리되자 고칠이 끼어들었다.

“저는 보이지도 않아요?”

“얼굴 봤으면 왔는지 알지, 굳이 인사가 필요한 게야?”

고길의 퉁명에 고칠이 툴툴거렸다.

“그래도 아들이 왔는데 이건 박대가 너무 심하잖아요.”

“예라- 이, 그려, 오서 오너라. 이제 되었누.”

인색한 남편의 표현에 유 씨가 통박을 주었다.

“당신도 참, 오랜만에 온 아이한테… 어서 오니라. 내 새끼.”

“아~ 어머니, 역시 내겐 어머니뿐이에요.”

“그럼그럼, 내도 우리 새끼뿐이 없지.”

두 사람의 모습에 빙긋이 미소를 짓는 고덕을 일별한 고길이 나섰다.

“참, 인사하시구려. 사돈, 내 아우 됩니다. 덕아, 칠이의 처남 되는 분이시란다.”

고길의 소개에 강태명이 포권을 취해 보였다.

“동도들이 철추도라 부르는 강태명입니다.”

“고덕이오.”

마주 포권을 취하는 형색이 거칠다.

포권의 자세로만 평한다면 정파보다는 마도나 사파의 냄새가 짙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갑소.”

무미건조한 두 사람의 인사 뒤로 고칠이 고개를 숙였다.

“고칠이 숙부께 인사드립니다.”

“네가 고칠이로구나. 그래, 이렇게 보니 반갑구나.”

“아, 예.”

떨떠름한 고칠의 표정에 고덕이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역시 외모 때문인가?”

고덕의 물음에 고칠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하나, 그 정도의 젊음이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는 내력을 무시할 수 없으니…….”

“아! 경지.”

고덕이 무언가 감을 잡았다는 듯이 말하자 고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경지라면 최소한 함자 정도는 회자되어야 하건만, 죄송스럽게도 숙부님의 존함은 들어본 적이 없기에……. 솔직히 간자가 아닌가 하고 의심까지 하고 있습니다.”

고칠의 말에 강유화와 두 조카 손주들이 화들짝 놀란 표정이다.

그것만으로도 그 말의 발원지가 어디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어. 가만 있자… 이걸 어찌 푼다. 그렇지. 일단 경지부터 풀어봄세.”

말과 함께 들어 보이는 손에서 푸른 광채가 번뜩인다.

“허억! 가, 강기!”

코앞에서 발현된 강기에 놀란 고칠의 경악성에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 고덕이 이번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부우우우웅-

벌 떼 우는 소리와 함께 검의 형상으로 솟아오르는 기의 형상에 사람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의, 의기성형(意氣成形)이라면 초, 초극!”

기절 직전인 고칠의 모습에 피식 웃은 고덕이 기를 풀어버리고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대략 경지는 그렇지. 하면 이제 외모로군. 이걸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나……. 그렇지, 간단히 말하자면 영약일세. 자네, 혹시 천년 빙삼이라고 들어보았나?”

“그, 그런 것도 있습니까?”

“없는 것을 만들어내서 뭐하게.”

“하, 하오시면 설마 그것을…….”

“우연이었네. 죽기 직전에 만난 기연인 셈이었지.”

고덕의 말에 고칠은 물론이고 강태명의 고개도 절로 끄덕여졌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는 것이다.

초극에 이른 고수가 뭐 아쉬운 게 있다고 겨우 한도회의 당주 집에 와서 위장을 할 것이냐는 생각 때문이다.

“그, 그러면 무공은…….”

“기연에 연결된 내 운이었지. 버려진 사문의 유지와 그렇게 인연을 맺었으니.”

“하오면 그간 어디에 계셨던 것입니까?”

‘천산. 강자들의 대지에…….’

진심을 숨기고 말을 꾸몄다. 적어도 가족에게까지 두려움을 사고 싶진 않았으니까…….

“살다 보니 이루려 하는 것이 높고 멀게 있을 때가 있더군.”

“그, 그럼 그간 수련에만 몰두해 계셨단 말씀이세요?”

“대성을 하고 보니 세월이 그리 흘렀더란 말일세.”

고덕의 말에 이번엔 진명이 흥분해서 끼어들었다.

“그러면 강호행을 하셨어야죠.”

“그게 웃기는 일이야. 외모는 이런데 나이는 먹었으니 생각이 어떻겠니? 이 나이에 강호에 뛰어들어 젊은 친구들과 지지고 볶기도 그렇고……. 불현듯 흙냄새가 아련하고, 가족이 그립더라 그 말이야.”

그 말에 얼마 전 오십을 넘긴 강태명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려. 그래도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세상 구경은 했으니 집 떠난 보람은 있었지.”

“예끼, 이놈, 그게 무슨 보람이여.”

고길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웃는 낯이 그렇게 싫지 않아 보였다.

아마도 동생이 하늘 높은 줄 모른다던 사돈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놓은 것이 기분 좋았던 모양이다.

“하하하, 그러게 말이오. 내 형이 이러고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다 때려치우고 돌아왔지.”

“말은……. 됐어. 손님 세워놓지 말고 어여 들어가자. 임자는 뭐하는 거여. 어서 차도 내오고 해야지.”

“아이고, 내 정신 좀 보게. 도련님 기예에 넋이 나가서 그만……. 어서 들어들 가세요.”

유 씨의 등 떠밂에 고덕을 비롯한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가자, 강유화는 시어머니를 돕는다고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방은 화기애애했다.

무인의 삶을 사는 이들이니 저만치 앞서 가는 이에게 물을 것도 많고, 듣는 것은 모조리 귀한 말이니 흘려들을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을 고길은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처지가 기우는 성혼에 항상 마음 졸여 하던 것이 오뉴월 햇살 아래 얼음인 양 흔적도 없이 날아간 탓이었다.

* * *

밤늦도록 이야기로 보내고 새벽녘에서야 잠이 들었건만, 고덕은 평소처럼 동이 트기 전에 눈을 떴다.

“이것도 병이겠지…….”

씁쓸히 웃으며 방문을 열고 나와 시원한 공기를 마시던 그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작은할아버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허리를 깊숙이 숙이는 진명의 인사에 고덕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오냐. 늦게 잤는데 일찍 일어났구나.”

“잠이 오지 않아서요. 헤헤헤.”

뒷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에 미소를 지은 고덕이 진명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그리 애가 타는 걸 놔두면 병이 될 게야. 하니, 내친 김에 어디 네 도를 한번 보자꾸나.”

고덕의 말에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진 진명이 냉큼 허리에서 도를 뽑아들어 역수로 잡고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작은할아버님.”

“자- 천천히, 모든 것을 되짚어본다는 생각으로 시작해보거라.”

“예.”

힘차게 답한 진명이 헤실거리던 모습을 버리고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곧바로 도를 뽑아들고 기수식을 취한다. 이어서 한 발을 내딛고 도를 휘두르고 발을 차는 폼이 틀이 잘 잡혀 있었다.

한참을 베고 휘두르고 치고 뛰던 진명이 숨을 고르고 도를 넣자 고덕이 박수를 쳤다.

짝짝짝.

“틀이 잘 잡혀 있구나. 내가 철혈도법의 정수를 보지 못해 정확하게 보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길은 잘 가고 있는 듯하구나. 다만.”

다만이라는 말에 미소를 짓던 진명의 신색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긴장하는 진명을 바라보며 고덕이 말을 이었다.

“급하다. 패도라 하나 빨라야만 파괴력을 내는 것은 아니니, 때론 느린 것이 더 무겁고 큰 힘을 내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흔히 만중쾌경(晩重快輕)이라 하는 말은 검법이나 도법이나 매한가지이니 잊지 말거라.”

“만중쾌경, 만중쾌경…….”

자신이 알려 준 참언을 되뇌어보는 진명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고덕의 시선이 돌아갔다.

“이거 어줍지 않은 말이 폐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아, 아닙니다. 철혈도법의 이치에 합당한 가르침이니 저 또한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어느새 나와 있던 강태명의 모습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서 강한 호승심을 발견한 탓이었다.

“기왕 결례를 범한 것. 그럼 한번 어울려 보시겠소이까?”

초극의 고수가 내리는 지도 대련이다. 거절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감사히 따르겠습니다.”

도를 뽑아들고 나서는 강태명을 맞아 고덕은 주먹을 들었다.

“검을 쓰지 않으십니까?”

“손이 비었다고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라오.”

고덕의 말에 강태명의 표정이 굳었다.

“권법도 익히셨습니까?”

“사나운 수공을 하나 익혔소이다.”

수공. 언뜻 떠오르는 이름들이 강태명을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그럼 사양치 않겠습니다.”

강태명의 말에 고덕이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오시오.”

“사양치 않겠습니다. 그럼.”

쑤아악.

첫걸음부터 강공이다.

항상 감추고 품어오던 것을 모조리 풀고,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도가 궤적을 그릴 때마다 희뜩이는 것은 도기의 파랑이다.

넓은 마당을 도기가 가득 채웠으나 상대는 그 희미한 빈틈을 용케도 찾아 이동하며 피해낸다.

호승심이 발동한 강태명의 수법이 살수로 옮겨 갔다.

상대의 변화에 고덕의 팔 전체가 보석을 뿌려 놓은 듯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채를 머금은 강태명의 공격이 직선으로 뻗었다.

츠랑- 깡, 따당.

손과 도가 부딪치는데 금속성이 울렸다.

그것을 확인한 강태명의 몸이 휘돌고, 그를 따라 도가 휘몰아쳤다.

츠라라라랑-

도를 감싸고 하얗게 일어서는 도기에도 불구하고 고덕의 손이 망설임 없이 들이밀어졌다.

까강-

놀란 강태명의 눈이 부릅떠졌다.

권기도, 권강도 일어나지 않은 육장이 검기에 부딪치고도 금속성을 울린다는 괴사는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신경을 쓸 만큼 한가로운 모양이구려.”

싸앙-

섬뜩한 음향과 함께 고덕의 팔 전체에 파란 광채가 떠올랐다.

강태명의 눈은 마치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팔뚝 아래가 아니라 팔 전체를 권기로 뒤덮는 수공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강태명의 경악을 찢어발기며 고덕의 팔이 날아들었다.

츠깡- 차장, 깡, 츠팟-

파랗게 일어난 수도에 옷깃이 잘려 나갔다. 대련이 아니었다면 목이 날아갔을 일이다.

경악한 강태명이 정신없이 도를 휘두르며 물러나서야 고덕의 공격권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수공의 고수에게 거리를 준 탓이오.”

고덕의 주의에 강태명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그리고 도를 움켜쥐고 달려 나왔다.

철혈도법은 패도식이다. 공격과 전진은 있어도 방어와 후퇴엔 원활하지 않았다.

장점을 취하고 약점을 버린다.

정석을 따른 강태명의 공격이 직선, 그리고 사선을 그리며 몰아쳐 들어왔다.

싸앙-

또다시 섬뜩한 음향이 울리고, 고덕의 수도가 공간을 부수며 들이닥쳤다.

다시금 밀릴 수 없다는 자존심이 최후의 패를 꺼내들게 만들었다.

“흐합!”

압살천망(壓殺天網)!

철혈도법의 최후 절초가 펼쳐졌다.

천지사방으로 도기의 그물이 깔리고, 틈새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턱-

도기로 조밀하게 짜인 강태명의 그물코를 유유히 뚫고 들어온 고덕의 손이 어깨 위에 얹혀졌다.

순간의 정적을 뒤로하고 물러난 고덕이 물었다.

“알겠소이까?”

“이럴 수도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알아차렸을까 싶었는데 용케도 놓치지 않은 모양이다.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알았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감사합니다. 이 강태명이 오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강태명의 모습에 고덕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가족이외다. 그 무슨 과례를… 그저 작은 도움이 크게 쓰인다니 기분이 좋을 뿐이오.”

“감사합니다. 사돈어른…….”

고덕의 배분이 높다 하나 비슷한 연배다.

그걸 빌미로 흐릿하게 불러도 될 호칭을 선명히 한다.

그것으로 고덕을 대하는 강태명의 마음이 드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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