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장(1권) (2/129)

제1장. 귀향(歸鄕)-고향으로 돌아가다

작은 야산을 돌아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마을로 들어서던 길목 어귀에 세워져 있던 대장군들이 세월에 바랜 채 기우뚱한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나이 어린 그땐 그저 무섭고 듬직하기만 하던 마을의 수호신은, 시간을 돌아온 그에게 서글프게도 세월에 쓸린 목각 조각 이상의 존재를 보여 주지 못했다.

그것이 단지 나이를 먹고, 세월이 흐른 때문만은 아니라 가슴 한편이 이리도 아리리라.

어귀를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서니 야트막한 산을 배경으로 넓지는 않지만 평평하게 트인 평지가 나왔다.

고만고만한 집들 수십 채가 난마처럼 얽혀 들어앉은 평지는 수북한 초가와 아릿한 볏짚 타는 냄새가 가득했다.

고향.

그리운 이름에 싸한 연기가 눈물을 뺐다.

풀썩 튀어나오는 웃음이 입안을 간질거린다.

마을 앞 공터에 버티고 선 성황수는 여전히 색색의 천을 입고, 새끼줄로 허리를 묶은 채 훌쩍 커서 돌아온 옛 벗을 반겨 왔다.

자신이 기억하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곳에서 매일같이 형과 자신의 무병장수를 빌었다.

가만히 두드려 보는 성황수에서 험한 산을 개간한 화전에서 흥건히 젖어오던 아버지의 알싸한 땀 냄새와 참혹한 흉년, 삼단 같던 머릿결을 보리 반 되에 팔고서도 웃기만 하시던 어머니의 포근함이 풍겨 나오는 것 같았다.

선머슴같이 변해버린 짧은 머리로 돌을 얹고 기원하던 어머니의 음성이 아직까지도 귀에 생생하다.

‘죽지 않게 하소서. 건강하고 죽지 않게 하소서.’

목을 막아 숨을 쉬기 힘들게 만드는 무언가가 가슴 밑바닥을 치댄다.

힘없이 휘청이는 신형을 성황수에 기대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나간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부서져 쏟아졌다.

눈을 감자 성황수에 기대선 등으로 지나간 세월만큼 거친 감각이 흘러들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고 신형을 세웠다.

기원이 수북이 쌓여 만들어진 돌무덤 위에 작은 기원 하나를 더하고 돌아서는 마음이 알싸했다.

이곳부터였던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초가들의 낮은 토담들이 만들었던 작은 골목길이…….

그 좁은 길을 따라 요리조리 달려가면 금방 나왔던 집이었건만, 이렇게 훌쩍 커서 돌아온 골목은 좁고 복잡했다.

한참 동안 과거에 머무는 기억의 편린들을 더듬어 간신히 찾아낸 곳엔 자신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이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 머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미소를 그린 사내는 천천히 초가로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랑채의 벽을 끼고 도는 짧은 골목이 나오고, 그 앞에 마당이…….’

골목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짧은 길목을 지나자 드러난 작은 마당엔 머리가 허연 초로인이 앉아 농기구를 손질하고 있었다.

거친 야산의 작은 사면을 화전으로 일궈낸 작은 농토를 가지고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집안의 내력은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던 모양이다.

아직 자신이 들어선 것도 모르고 등을 지고 앉아 농기구를 손질하고 있는 초로인의 구부정한 등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가에 습막이 차오른다.

집을 나서기 전에 지겹게 보았던 아비의 굽은 등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모습을 보일 사람을 그는 단 한 명밖에 알지 못했다.

“형.”

사내의 목멘 부름에 농기구를 손질하던 초로인의 손길이 그대로 멈춘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앉는 그의 움직임에 나타나는 것은 사내가 나이를 더 먹으면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닮은 모습이었다.

“누구… 서, 설마 더, 덕이냐?”

“형!”

사내는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초로인에게 달려들어 앉아 있는 그대로 얼싸안았다.

“형, 형, 혀어- 엉!”

마치 부르지 않으면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사내는 그렇게 형을 연호하며 나이에 걸맞지 않게 펑펑 울었다.

앉은 상태로 사내를 앉은 초로인도 울기는 마찬가지.

자신의 어깨 어림으로 떨어지는 동생의 눈물을 느끼며, 그도 집 나갔던 동생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눈물을 쏟았다.

“이, 이놈. 어디에,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이제야… 덕아, 덕아 이놈아. 으흐흐흑…….”

한동안 그렇게 두 형제는 서로를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

너무나 힘들고 고독했던 그 긴 시간을 위로받듯 동생은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

사십 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어도 몸 성히 집으로 돌아와 준 동생이 고마워 형도 함께 울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얼굴을 다시금 볼 수 있어서 형과 동생은 한참 동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거 우는 소리유? 무슨 일인데…….”

사내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던지 부엌에서 나오던 고길의 아내 유 씨가 마당의 모습에 놀라 멈춰 섰다.

“무, 무슨 일이에요…….”

걱정으로 묻는 유 씨의 음성에 사내가 돌아보았다. 그 얼굴을 확인한 유 씨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 덕이 도련님?”

“혀, 혀, 형수님. 크흐흑…….”

눈물, 콧물 가득한 얼굴로 형수라 부르는 이를 바라보던 유 씨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에구머니, 도련님, 에고에고, 이 모습이 뭔 일이래요. 옷 꼴은 이게 또 뭐고요. 흑흑…….”

덕지덕지한 피조차 닦지 않고 걸어온 길이다. 그 형편없을 몰골을 본 형수는 서글피 울었다.

그렇게 울기를 한참. 서로가 어느 정도 복받쳐 올랐던 감정이 가라앉자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불거졌다.

“그런데 정말 덕이가 맞긴 하는 거여?”

고길의 질문에 유 씨도 놀란 눈이 되어 남편의 팔에 바짝 붙었다. 겁을 집어먹은 탓이다.

“응. 형, 나 덕이, 고덕이요.”

“하, 한데 어찌 모습이…….”

‘아! 외모.’

세 번의 환골탈태는 자신의 외모를 약관으로 돌려놓았던 것이다.

“그게… 세상을 돌며 무공을 익힌 탓이야.”

“아,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고는 하나 어찌 모습이 그럴 수 있단 말이냐?”

동생이라 주장하는 이의 모습이 기껏해야 이제 약관밖에 안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집을 나갈 때의 나이가 그때쯤이니, 막말로 변한 게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꺼림칙한 눈빛인 형 내외에게 연신 무공 때문이라고 설명을 해도 의심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내공 때문이라고. 정말이야. 내공, 그건 들어봤지?”

“들어는 봤다만 너처럼 안 변한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다.”

“그게 사람마다 다르다니까? 가끔가다간 아예 젊어지기도 한다고.”

“세상에 그런 일이 어떻게…….”

여전히 못 미더워하는 고길에게 사내, 고덕이 열심히 설명을 이었다.

그 덕이었을까? 한참을 설명에 설명을 듣던 고길과 유 씨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결국 한 시진이나 공을 들인 후에야 형 내외에게서 긍정의 반응을 이끌어냈으나 그것은 마지못해 끄덕이는 고갯짓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고덕을 바라보는 눈 속엔 의심의 기운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형 내외의 생각을 알면서도 고덕은 더 이상의 설명을 이을 수 없었다.

일반인인 형 내외를 이해시킬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설득을 포기한 고덕의 배고프다는 말에 유 씨가 미적거리며 내온 밥상의 밥을 꾸역꾸역 먹는 것으로 답답함을 달랠 뿐이었다.

“그나저나 멸치 놈은 뭐해? 아직도 이 마을에 살아?”

밥을 입안 가득 퍼 넣고 웅얼거리며 묻는 고덕의 물음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고길이 답했다.

“멸치라면 수열이 말이냐?”

“엉. 그놈 이름이 수열이었던가? 아! 맞다, 수열이. 그놈 형이 수성이 형이었던가? 아마 형하고 동갑이었지?”

“그래, 맞다. 수성이 동생이면 수열이가 맞구나. 예전에 네가 멸치라 불렀던 것도 같구나.”

고덕이 멸치라 칭한 수열은 집을 나가기 전까지 고덕과는 가장 친한 불알친구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수열의 집은 대대로 사냥꾼이 가업이었다.

“그놈 뭐해? 지금도 활 들고 산에 오르나?”

고덕의 물음에 고길의 표정이 처연해졌다.

“그 녀석, 사냥 나갔다 호환을 당한 것이 벌써 십수 년도 더 되었다.”

뜻밖의 답에 흠칫했던 고덕은 친우의 불행이 아쉬웠지만 세상사라는 것이 그럴 수도 있겠기에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툇동의 갈치 놈은, 그놈은 잘 있지?”

툇동은 아이들이 마을 촌장네 집을 부르는 별칭이었다.

툇마루가 넓고 젓갈을 저장해놓는 동굴이 있다 하여, 아이들의 치기로 그걸 줄여 툇동이라 불렀던 것이다.

갈치는 그 툇동, 그러니까 촌장집 손자로 고덕, 멸치와 함께 복청 골통 삼총사로 불렸던 단짝 친구였다.

“촌장 댁 갈치라면 길수를 말하는 모양이다만, 그 녀석도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단다. 몇 년 병으로 고생을 하더니 그렇게 가더구나.”

형의 말에 이번에도 잠시 멈칫거린 것으로 마음을 다잡은 고덕은 밥을 퍼먹으며 말을 이었다.

“형은 애들 없어? 왜 이리 조용해?”

고덕의 질문에 형인 고길은 처연한 눈으로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동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수열이나 길수의 별명을 아는 것을 보니 덕이가 맞긴 맞는 모양이로구나. 그나저나 덕아, 험히 살았더냐? 고생이 많았겠구나. 어디 크게 다친 곳은 없었더냐?”

자신의 물음에 답은 안 하고 엉뚱한 말이다.

그럼에도 한껏 애정과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 형의 물음에 고덕은 순간 다시 목이 메는 것을 느껴야 했다.

칠순이 코앞인 형이다.

강호의 노련함이 없다 해도 생을 그 정도로 살아온 이들에겐 그에 따른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눈이 사람이 죽었다는데도 담담한 동생의 반응만으로 험하게 살았을 생을 대번에 짚어낸다.

그리곤 그 어려운 길을 걸었을 동생을 측은하게 여기는 것이다.

거기에 한술 더 뜬다.

“너 집에서 먹는 밥이 오랜만이지? 도대체 얼마나 고생을 했기에 집 밥도 못 얻어먹고 다닌 게야? 혹시 장가도 못 간 건 아니지?”

숨이 막혔다.

집 밥! 그랬다. 척박한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입에 달라붙고 한없이 입으로 들어간다 생각했더니 형수의 요리 솜씨도 솜씨지만 집을 나선 이후 가족이, 식구가 지어준 밥을 먹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물음에 수저를 들고 멍하니 밥상을 바라보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고길이 투박한 손을 들어 다정하게 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괜한 말을 했구나. 고생이야 이제 집으로 돌아왔으니 더 이상은 없을 것이고, 장가야 아직 얼굴이 동안이니 지금이라도 가면 되는 것을. 어여 먹어라. 밥 식는다.”

이런 것이었다. 그간 이 푸근함을 잊고 척박한 강호에 몸을 담았던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에 외로워하고, 알 수 없는 갈증에 몸을 떨었던 이유가 바로 가족들과의 인연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형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다시 수저를 움직이자, 고길이 어린아이 수발들듯 반찬들을 고덕의 앞으로 당겨 주었다.

그러며 동생이 던진 물음에 뒤늦은 답을 이었다.

“아들 녀석이 하나 있지. 위로는 딸을 둘 두었는데, 모두 출가했구나. 큰애는 성도인 복주의 큰 상가(商家)로 시집을 갔고, 둘째는 칠이 놈 때문에 멀리 안휘로 보냈구나. 뭐 강호에 큰 집안이라는데 잘은 모른다.”

“혼례를 올리느라 갔었는데 집은 정말 크더라구요. 도련님. 칼 찬 사람들이 많아서 별로였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고덕도 허리에 칼을 차고 있다.

그것 때문인지 숭늉을 받쳐 들고 들어오며 말을 잇던 유 씨의 말이 뒤로 가면서 흐려졌다.

그 모습에 고덕이 빙긋이 웃었다.

“하긴 저도 무술을 배웠으니 칼을 차고 다니지만, 칼 찬 놈들이 문제가 많긴 하지요. 툭하면 칼부림이나 하고 말이지요.”

고덕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유 씨는 다시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요. 내 도련님은 다를 줄 알았다고요. 하긴 흉악한 놈들이 많으니 호신은 해야지요. 칠이 놈도 그래서 칼을 찬다고 하니… 그래도 걱정이에요.”

형도 그렇고 형수도 칠이란 이름을 거론한다.

“칠이가 혹시 조카 이름이에요?”

“어머! 이런, 정신이 없어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데 그놈 이름이 칠이지요. 도련님.”

고덕이 집을 나가기 삼 년 전에 시집을 온 형수였다.

시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자신을 꽤나 살뜰히 보살펴 주던 착한 여인이었다.

얼굴이 둥글고 소담해서 귀여운 인상이었건만 세월은 그런 형수의 얼굴에 깊은 주름만 가득 심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조카들의 나이도 꽤나 되었겠다 싶었다.

“조카들도 장성한 아이들이 있겠는걸요.”

고덕의 물음에 고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큰애 연이가 열여덟에 시집을 가서 사내아이만 둘을 낳았지. 큰놈 나이가 스물둘이고, 작은놈이 스물이다. 지금은 그 집안에서 한몫들을 한다는데 잘하는지 항상 걱정이지.”

형의 말에 형수가 설명을 이었다.

“둘째인 진이는 더 일찍 갔어요. 열여섯에 시집을 갔지요. 지 언니보다 일 년이나 빨리요. 그래도 애들 나이는 비슷해요. 큰애가 스물둘, 둘째가 스물, 셋째가 열아홉이지요. 셋째는 얼마나 예쁘게 컸는지 몰라요.”

“셋을 두었나 보군요. 말씀을 들으니 이남 일녀?”

“아이고, 도련님 머리는 예나 지금이나 좋으시네요. 네, 이남 일녀를 두었지요. 그런데 걱정이 많아요. 그 애들도 칼을 차고 다니니…….”

말대로라면 무림 세가로 보낸 모양이니 가문의 무공을 익혔을 것이다.

안휘라……. 안휘에 있는 무림 세가라면 일단 남궁세가가 생각이 나고 단리세가, 안휘협가 정도가 생각난다.

개중 남궁세가는 하북팽가와 함께 팔대세가의 수좌를 놓고 다투는 대방파였으니 일단 제외. 단리세가도 남궁세가에 비해 좀 손색이 있긴 해도 역시 팔대세가 중 하나이니 그들도 제외.

그러면 고덕이 아는 안휘성의 무림 세가는 결국 안휘협가만 남는데, 그곳도 만만한 곳이 아니다. 말석이긴 하나 그들 역시 팔대세가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덕이 아는 세 곳 모두 이런 시골 촌부의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결국 이름 없는 작은 무림 세가와 사돈을 맺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가문이냐고 물을 수 없었다.

괜히 알지 못하는 가문의 이름이 나오면 곤란한 일이 될 터였기 때문이다.

그 탓에 대신 칠이란 조카의 일을 물었다.

“한데, 칠이도 칼을 차고 다닌다 하시니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디에 있는지요?”

유 씨에게 물은 것이었지만 답은 고길에게서 나왔다.

“복주에 자리 잡고 있는 한도회라는 곳에 있단다. 그곳에서 무슨 당주가 되었다는데 잘 모르겠구나. 그 녀석이 하는 일은 영 미덥지 못해서…….”

한도회. 복건성에서 행세깨나 하는 문파다.

백도 십오대파에 들지는 못하지만, 백도 사십 중문(中門)에는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런 곳의 당주라면 조카의 무위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오~! 한도회라면 제법 커다란 문파지요. 그런 곳의 당주라면 칠이도 제법 한가락 한다는 말입니다.”

고덕의 말에 유 씨가 반색을 하며 나선다.

“그렇지요? 거봐요. 도련님도 칠이가 제법 하는 거라잖아요. 너무 그렇게 낮춰 잡지만 말아요. 애가 당신 앞에만 서면 얼마나 기가 죽는지 알아요? 이제 그 애도 아이들이 둘씩이나 있는 한 집안의 가장이라구요.”

그간 남편이 아들을 면박 주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는지 유 씨의 말에 제법 서운함이 가득하다.

그에 피식 웃는 고덕의 모습에 형, 고길이 멋쩍었는지 퉁명스런 음성으로 답을 했다.

“그래도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알잖아. 그놈 피투성이 돼서 집으로 요양 차 실려 온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냐고.”

아마도 일반 무사일 때 모종의 일로 전투에 임해 상처를 입으면 마음 편히 쉬라고 친가로 휴가를 보내준 모양인데, 그때 모습에 걱정을 쌓은 모양이었다.

여하간 그 말엔 유 씨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별말을 못하고 ‘그래도’만 연발했다.

그런 유 씨에게서 시선을 돌린 고길이 밥을 다 먹고 숭늉을 들이켜는 고덕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째, 밥을 더 주련?”

“엉? 아니. 벌써 세 그릇을 비웠다고. 배 터져 죽겠어.”

말을 하며 불룩이 나온 배를 두드리는 동생을 푸근한 미소로 바라본 고길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일어서라. 잠시 다녀올 곳이 있구나. 임자는 준비해놓은 것 좀 가져오고.”

말을 하며 일어서는 고길을 따라 고덕도 엉겁결에 일어섰다.

그렇게 방을 나선 두 사람에게 유 씨는 작은 보따리를 내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고길은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으며 집을 나섰다.

그렇게 길을 걷길 반 시진.

작은 산에 오른 고길은 나지막한 두 봉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사십 년이 지났어도 변함없는 모습… 아니, 봉분이 하나 늘었으니 변화가 있었던가?

복받쳐 오르는 감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고덕을 일별한 고길이 보따리를 풀어 술과 몇 가지 제사 음식을 펼쳐 놓았다.

“인사 올리거라. 어머님도 많이 기다리셨겠지만 아버님이 널 많이 그리워하셨다. 돌아가실 때도 숨을 놓으실 때까지 네 이름만 부르셨다.”

고길의 말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고덕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가 되어 흘렀다.

“아… 아버지, 어머니, 저 돌아왔어요… 흐흐흑.”

한참의 통곡이 봉분을 감돌았다.

해가 어스름하니 떨어지는 시간이 되어서야 마을로 돌아오는 고길, 고덕 형제의 분위기는 많이 풀어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곁에서 지낸 짧은 시간이 오랜만에 만나 서먹한 분위기를 금세 지워놓은 덕이다.

확실히 부모란 그런 존재인 모양이다.

그들이 살아 있든 천명을 다해 땅속에 누워 있든 변함없이 말이다.

“하하하, 그래서 형수한테 들켰단 말이오?”

“어쩌겠어. 하필 그 베개를 내가 없을 때 빨아 젖힐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 그렇게 십 년을 모아온 비상금을 모조리 털린 게야. 에잉~”

“그러게 왜 베개에 숨겨요.”

“그렇지 않아도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이었다고. 베개는 잠깐 이용한 거였단 말이다.”

시간이 지난 일이건만 여전히 생각만 해도 열불이 나는지 말을 잇는 고길의 얼굴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고덕이 물었다.

“도대체 그 돈으로 무얼 하려고 모았던 거요?”

“그게 우리 집 장손 놈이 올해 성년례(成年禮)를 올리잖어. 그래서 그때 멋진 칼이라도 하나 사주려 했지.”

칼을 차고 다녀 걱정이 많다더니, 역시 조부모나 부모나 자손을 대하는 마음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그에 피식 웃어 보인 고덕이 말을 이었다.

“성년례가 언제인데?”

“며칠 남지 않았지. 그날 집에서 성년례를 치르기로 해서 온다고 했으니까. 그나저나 줄 것이 마땅치 않아 걱정이야.”

고길의 말에 고덕은 슬며시 옆구리에 메어진 자신의 검을 일별했다.

명혼(銘魂)!

혼을 새긴다는 의미의 검명처럼 자신의 혼을 새겨 넣은 검이다.

명검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좋은 검이긴 하지만, 이미 피 맛을 알아버린 검을 조카 손자의 성년례에 선물로 주기엔 좋지 않았다.

“그럼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저잣거리에나 한번 나가봅시다. 형은 좋은 칼 하나 사고, 난 단아한 무복을 하나 사지요. 그걸로 선물을 합시다. 돈은 내가 낼 테니 걱정 말고.”

고덕의 말에 고길이 걱정스런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돈은 그리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닌 게야. 세상의 험함을 알지 않느냐.”

동생이 돈을 쓴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런 형의 걱정에 슬쩍 웃음을 지은 고덕이 답했다.

“걱정 말아. 그 정도는 쓸 여유가 되니까. 그리고 이제 형이 밥은 먹여 줄 텐데, 칼 값은 식비라 생각하고 받아도 되잖아. 서로 상부상조하자고.”

부담이 덜어지라고 한 말이었건만 그 말이 서운했던지 고길의 음성이 칼칼하다.

“형이 되어서 동생 밥도 못 먹일까. 그런 말은 하지도 말어!”

“하하하, 알았어. 미안해. 그냥 형 부담 갖지 말라고 한 말이야. 너무 화내지 마.”

솔직한 고덕의 말에 그나마 조금 누그러졌는지 뒷말을 잇는 고길의 음성이 평시처럼 돌아왔다.

“그런 거라면… 알았다. 내일 네 덕 좀 보자꾸나.”

“덕은 무슨. 하여튼 그러자고.”

두 형제가 휘적휘적 걸어가는 골목길 뒤로 따스하게 가라앉는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 * *

다음 날부터 고덕은 쟁기를 들고 형을 따라 논과 밭으로 나가 농사일을 거들었다.

생전 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작은 동작에까지 자연스럽게 스며든 내력이 힘든 농사일들을 수월하게 풀어나갔다.

모르는 것들은 노련한 농부인 형의 말을 따르면 되니, 오히려 일하는 솜씨는 고길보다 나아 보일 정도였다.

밭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던 커다란 바위가 고덕의 쟁기질 한 번에 작은 조약돌로 변해 치워졌고, 단단한 바위산이 가로막아 물길을 내기 어려워 버려두었던 땅이 고덕의 쟁기질 두어 번에 훌륭한 물길을 가진 기름진 농토로 바뀌었다.

고덕이 벌이는 일들을 멍하니 서서 바라보는 고길의 눈엔 놀라움이 가득했다.

아무리 촌부일지라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은 구별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놀라서 멈춰 선 형에게 다가온 고덕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조금 힘을 써봤지. 어때, 괜찮아?”

형이 안 보는 사이 해치울 수도 있었고, 아예 티를 안 내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형에게 얹혀살아야 하는 고덕으로서는 차라리 자신의 능력에 대해 실생활에 도움이 될 정도로는 드러내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이 앞으로 함께 살아가는 데 편할 테니 말이다.

동생의 말에 농사일을 나오면서도 허리에 빗겨 맨 검에 시선을 주며 고길의 고개는 힘없이 끄덕여졌다.

듣기도 많이 듣고, 자손들로 인해 보기도 했던 것이다.

칼로 일어서 칼로 망하는 이들, 바로 강호인들에 대해서.

아이들이 강호에 살고 있으니 아무리 촌부라도 귀동냥을 안 할 수는 없다.

그렇게 얻어들은 이야기 중에 그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새처럼 하늘을 날고, 일 수에 바위를 부수며, 단칼에 산을 벤다는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들, 무림 고수들에 대한 이야기가.

동생이 그런 이들 정도는 아니어도 꽤나 대단한 강호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고길의 눈은 언제 놀랬냐 싶을 정도로 빠르게 가늘고 길게 휘어지며 반월을 그렸다.

기꺼운 것이다. 고생만 한 줄 알았더니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것이 자못 자랑스러웠다.

“괜찮은 게 뭐냐. 멋있다. 정말 대단하다. 녀석아. 하하하!”

시원한 웃음과 함께 어깨를 두드려 주는 형의 손길에서 고덕은 자신을 위해 놀람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보아주는 형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 형. 대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티 안 낼 테니 걱정 말고, 형도 그렇게 알아. 형수는 알아도 되지만…….”

그 말에 고길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번잡한 강호를 떠나 집으로 돌아온 동생의 주변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고길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마. 걱정하지 마라.”

간단한 말이었지만 그보다 많은 말과 굳건한 의지가 고길의 눈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에 선하게 마주 웃어준 고덕은 다시 고길과 함께 농사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형제가 나선 농사일은 다른 때보다 갑절은 빨리 끝났고, 규모도 커졌다.

버려진 땅을 일구고 비탈을 트고 화전을 일구니 농토도 많이 늘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덕은 시골의 삶에 적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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