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가주(家主)>
삼 년 하고도 다시 이 년이 더 지난 어느 날.
예전에는 이름이 없는 산이었으나 이제는 삼절산(三絶山)이라 불리게 된 곳에 고고(高古)한 풍취를 지닌 장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삼절산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당대의 천하오절(天下五絶) 중에서 세 명이 함께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세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을 뭐라 부르든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위명에 관심을 두는 성격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이 세력을 두고 천하검가(天下劍家)라고 부르거나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로 칭했다.
하지만 그곳에 속해 있는 자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조소를 한 번 날린 다음에 종종 천하제일 공처가(天下第一 恐妻家)로 불렀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노릇.
어느새 무림에서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세력으로 거듭나고 있는 청협문과 백검문이 일부러 즐겨 부르는 이름이었다.
어쨌든 이 공처가 세력은 삼절산이 아우르는 일대에서 장원뿐만이 아니라 객잔, 표국, 전장, 상단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드러난 것일 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정보를 사고파는 정보상인 조직과 같은 암중 세력도 활동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세력을 갖추기엔 시간이 촉박했을 것인데… 어찌 이렇게 단 시간 내에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일까?
더 놀라운 사실은 이곳의 가주(家主)가 아직도 세력을 더 넓히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문주나 방주라는 이름도 아니고 가주라는 말이 더욱 인상 깊은 세력이었다.
그 세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장원.
이마에 하얀 끈을 동여매고 뒷머리를 묶은 꼬마 여자 아이가 조그만 목검 두 자루를 양 손에 쥐고 휘두르고 있었다.
어찌 이렇게 귀여울 수 있을까.
이제 겨우 네 살밖에 되지 않는 꼬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보고 배운 게 있는지 제법 누군가의 흉내를 내면서 쌍검을 휘둘렀다.
천하오절 중 한 명인 목군자가 손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설영이가 자라면 무림에서 한 몫을 단단히 하겠습니다. 형님, 아무리 목검이라지만 저 나이에 검을 잡는 경우도 있습니까?”
목군자의 말에 검선이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로 걸어 나왔다.
“그러게 말이야. 우리 설현(雪炫)이는 언니를 보고 배우지 말아야 할 터인데….”
검선이 품에 안긴 손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자, 설현이 큼지막한 눈을 뜬 채로 검선을 올려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목검을 쥐고 있던 이설영(李雪榮)이 검선을 발견하곤 목검을 좌우로 늘어뜨린 엉성한 자세로 꾸벅 인사를 올렸다.
“할아버지.”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설영이에게 물었다.
“설영아 아침부터 무슨 연습을 하는 게야?”
설영이 눈을 껌벅이면서 수줍게 대꾸했다.
“쌍검술 연습해요.”
“할아버지한테 한 번 보여주겠느냐?”
“네.”
설영이 자색으로 빛나는 조그만 목검을 양 손에 쥐고 앞으로 전진 하면서 천천히 휘둘렀다. 초식이랄 것도 없는 휘두름이었으나 본 게 있는지 마구잡이로 휘두르진 않았다. 천천히 방향을 잡아 나가면서 좁은 보폭으로 침착하게 한 바퀴를 돌았다.
검선이 걱정 섞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허… 큰일이다. 큰일이야.”
목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막내딸인 설현이야 이제 갓난아기인지라 어떻게 자랄지 몰랐으나 설영이는 큰 문제였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 목검을 가지고 놀더니 어느새 이렇게 되어 버렸다.
가르치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만약 이렇게 자란다면 이른 나이에 무림에 나가겠다고 떼를 쓸 수도 있는 노릇이라 벌써 마음이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
가끔 검선이나 목군자가 가부좌를 튼 채로 눈을 감고 있으면 설영이 다가와서 무언가를 하는 것임을 깨닫고, 두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 것인지 꼬치꼬치 캐물을 정도였다.
한 동안은 할아버지들을 따라 옆에 앉아서 눈을 감더니 이내 잠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요새는 내공심법도 모르는 주제에 제법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눈을 감은 채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떠드는지라 목군자와 검선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였으니 검선과 목군자가 매번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부모는 오죽하겠는가?
옥의림은 설영이를 돌보느라 수련을 못한 지도 오래 되었고….
이서휘는 여전히 할 일이 많아서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느닷없이 등장했다가 두 딸과 옥의림을 보고선 또 다시 어디론가 나가기 일쑤였다.
검선이 설영이를 불렀다.
“그만 이제 쉬어라. 휴식도 중요하단다.”
“네, 할아버지.”
설영이의 성격은 옥의림을 빼닮아서 말도 무척 잘 듣는 편이었다. 설영이 다가와서 동생을 보여달라고 하자, 검선이 쭈그려 앉아서 품에 안은 설현을 보여줬다.
설영이 동생을 바라보다가 검선과 목군자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근데 동생은 언제 걸을 수 있어요?”
“아직 멀었지.”
“그건 왜? 같이 놀고 싶은 게냐?”
설영이 눈을 껌벅이더니 할아버지들의 말엔 대꾸를 하지 않고 다른 말을 늘어놓았다.
“그럼 동생은 언제 목검을 잡을 수 있어요?”
목군자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설영을 번쩍 안았다.
“그것은 한참 더 기다려야겠구나. 그런데 목검으로 때리면 동생이 많이 아파할 텐데?”
설영이 대꾸했다.
“안 때릴 거예요. 그냥 겨루기만 할 거예요.”
“겨루기도 안단 말이냐?”
“그럼요.”
설영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검선과 목군자가 장원 바깥을 바라보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서휘가 오늘도 안 오려나보군요.”
“제법 거리가 머니까…. 그래도 갈수록 경공이 빨라지고 있으니 오늘 저녁엔 오겠지.”
그때, 안쪽에서 옥의림이 걸어 나오면서 말했다.
“식사 하셔요. 설영아… 자꾸 할아버지한테 안기지 말라 그랬지.”
옥의림의 말에 설영이 당돌하게 대꾸했다.
“스승님은 허리 안 아프세요.”
설영이는 옥의림이 자주 하는 말을 듣고 목군자를 스승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옥의림이 설영이의 말을 무시하고 목군자에게 말했다.
“스승님, 이리 주세요. 저번에 눈이 많이 내린 날, 산 내려오시다가 삐끗하셨잖아요. 설영이도 요새 제법 더 무거워졌어요.”
“괜찮다. 들어가자.”
목군자가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먼저 들어가자, 검선도 괜히 서두르면서 설현을 안고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옥의림이 조용한 말투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두 분 올 겨울엔 산 내려오시는 거 금지에요. 제가 가주(家主)한테도 단단히 일러놨어요. 가주가 올해는 두 분을 단단히 감시하시겠다고 했어요.”
산을 내려오다니? 대체 산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기에 이토록 옥의림이 화를 내는 것일까.
어쨌든 안쪽에서 검선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누가 하겠다고 그랬느냐? 올 겨울은 나도 좀 쉬려고 그랬지.”
목군자도 짤막하게 대꾸했다.
“나도 쉬려고 했어.”
그 말에 옥의림이 힘을 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 말씀, 제가 꼭 믿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누구 말이라고….”
옥의림이 말을 이었다.
“설영이가 무공도 익히지 않고 할아버지들 따라 할까 걱정이에요.”
“에이, 그럴 리가 있겠느냐? 걱정하지 말아라.”
설영이 눈을 껌벅이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뭔데요? 가르쳐주세요.”
“밥부터 먹자.”
천하오절 중 두 명이 옥의림의 말에 잔뜩 풀이 죽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상황을 보아 하니, 이 자리에 없는 천하오절도 옥의림에게 별 다른 반항을 못 할 것 같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 ☆ ☆
천하삼절이 머무르는 장원에서 말을 타고 하루 반나절 정도를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는 평원에 막사까지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춰서 설치해놓고 머무르고 있는 대규모 병력이 있었다.
흑도맹이었다.
그 중심에 깃발이 내걸린 본영(本營)이 있었는데, 그 깃발엔 흑부(黑斧)가 그려져 있었다.
본영에는 물론 당대의 흑도맹주인 송무진이 머무르고 있었고.
상석에 앉은 송무진의 좌우에는 흑도맹의 최고위 간부(幹部)들이 앉아 있었다.
인원은 대략 이십여 명.
송무진이 간부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그때, 바깥에서 급히 뛰어든 사람이 결례를 무릅쓰고 대뜸 보고부터 올렸다.
“무인 한 명이 맹주님을 찾아오셨습니다.”
보고에 무뚝뚝한 표정의 송무진이 대꾸했다.
“누군데.”
“그게… 아, 새카만 장검 한 자루를 들고 있었는데 송구하게도 맹주님의 벗이 왔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송무진이 떫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새카만 장검이라고?”
“네.”
한데, 또 다시 수하 한 명이 달려와 급히 보고를 올렸다.
“검제(劍帝)께서 오셨습니다.”
송무진이 한숨을 쉬면서 무슨 말을 하다 말고 바깥을 바라봤다.
“하필….”
본영의 입구에서 한 남자가 등장해 걸어들어오면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송 맹주….”
이서휘가 등장하자 송무진 수하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흑도맹의 간부들을 바라봤다.
“다들 오랜만이오. 한 일 년 만에 보는가?”
여기저기서 성의 없는 인사가 쏟아졌으나 이서휘는 개의치 않고 송무진의 옆자리에 가서 누군가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 단주, 잠시 자네 맹주님과 얘기 좀 하겠네.”
“예.”
정 단주라는 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자리를 비켜주곤 자신은 비어있는 말석으로 말없이 이동했다.
그러자 이서휘가 흑도맹의 간부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서 말했다.
“아니, 이 사람아….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나한테 연락을 안 하고.”
흑도맹주 송무진이 또 한 숨을 쉬었다.
“그래. 미안하다. 연락 못 해서.”
송무진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곳은 백도맹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내심 은밀하게 이동한다고 만전을 기했는데도 느닷없이 이서휘가 홀로 나타난 것이었다.
송무진의 성격으론 무척 오래 참은 것이었다.
진작 사분오열 처지에 놓인 백도맹인지라… 이번 기회에 흑도맹을 이끌고 완전히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변수라고 해봤자 별 게 없었다.
군림맹은 근래 들어 백도맹과 사이가 틀어졌고.
청협문과 백검문도 백도맹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물론 송무진이 중간에서 조율한 탓이었다.
유일한 변수는 이서휘의 세력….
송무진이 떫은 표정으로 이서휘에게 말했다.
“공처가주(恐妻家主)께선 잘 지내셨는가?”
당대 무림에서 이서휘에게 공처가주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다섯 명 정도였는데 송무진도 그 중 하나였다.
이서휘가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에 둘째가 태어났네.”
“축하하네.”
“큰 아이는 벌써 목검을 잡았어.”
그 말에는 송무진도 빙긋 웃었다.
“겨우 네 살? 세 살?”
“네 살이네.”
“대단하네. 어르신들은 잘 계신가?”
“뭐 정정하시지.”
“그러게 혼인은 왜 해가지고. 세상 천지에 널린 게 여인인데.”
이 말에는 이서휘가 조소를 날렸다.
“여인과 부인이 같을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송무진이 보기 드물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하하, 난 사양하겠네.”
한데, 송무진이 웃자… 수하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근 몇 년 간, 수하들 앞에서 웃는 모습을 내보인 적이 없었던 송무진이다.
송무진은 저도 모르게 수하들의 표정을 살펴봤다가 속이 철렁해 말을 이어 나갔다.
“다들 나가 있어라. 회의는 나중에 이어서 하겠다.”
그러자 간부들이 우르르 일어나면서 맹주와 이서휘에게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이서휘가 잠시 바깥을 바라봤다.
송무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해하게. 다들 거칠어서 말이지.”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이해하고말고.”
송무진이 안색을 굳히고, 이서휘에게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 혹시 날 말리려고 온 것은 아닐 테지? 아무리 날 무시해도 혼자 와서 그런 얘기를 한다면 흑도맹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이네.”
송무진이 목소리를 한껏 내리깐 채로 말하자, 이서휘의 두 눈이 커졌다.
“뭘 말려? 자네, 뭐 하려고 했는데?”
“하… 이러지 말지. 우리…. 다 알면서 온 게 아닌가.”
“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요청할 것은 있지.”
이서휘가 품에서 서찰을 한 통 꺼내더니 송무진에게 내밀었다. 이서휘의 말이 이어졌다.
“벽천회가 삼도왜구와 대규모로 붙은 모양이야. 일부는 절강을 돌파하고 강서로 나갔다고 하네. 강서는 근래 자네가 대부분의 세력을 규합하지 않았나.”
송무진의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소자성이 절강에서 벌어진 일은 어떻게든 막아보겠다고 했네. 하지만 강서로 넘어온 세력은 소자성도 어찌할 방법이 없겠지. 그 수만 해도 대략 천오백.”
“천오백? 어찌 그렇게 많은….”
“몰랐나? 소자성은 벽천회를 이끌고 삼도왜구가 쳐들어 올 때마다 그 이상의 병력도 막아내곤 했었네. 하지만 이번엔 왜구 내부에서 무슨 큰 사건이 있었는지 수 백 척의 군선을 이끌고 대규모로 넘어왔다 하더군. 절강에 남은 왜구는 더 많다는 얘기야.”
송무진의 등줄기에서 소름이 돋았다.
이제 흑도맹의 세력이 된 강서 지역의 분타는 초토화 될 게 분명했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강서면 내가 우혁이와 류혼이에게 연락해서 도와달라고 하겠네. 그리고 나도 도울 것이야. 자네도 급히 연락을 취하고. 아마 이것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고 다니느라 당장은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 터. 차라리 자네와 내가 정예를 뽑아서 추적한 다음에 지원 세력과 합류해야 할 것이야.”
송무진이 침을 삼키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 모르니 안휘 쪽에도 지원을 요청하겠네.”
안휘라 하면 다름 아닌 군림맹.
이서휘는 군림맹을 나온 이후에도 군림맹의 고수들과 불편하지 않은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일이 있을 때마다 이서휘가 적극적으로 나서주니 관계가 나쁠 리가 없었던 것.
송무진은 서찰을 찬찬히 읽어내려다가 소자성의 인장까지 확인한 다음에 이서휘에게 말했다.
“아니, 자네 세력도 점점 늘었다면서 어찌 직접 왔는가? 날랜 파발이라도 보내든가 하지.”
그 말에 이서휘가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가장 빠른 거 알면서 뭘 그러나.”
“아….”
“자네 결단력도 나 못지않게 빠르니까 어서 준비해주게.”
이서휘가 일어나자, 송무진이 얼떨결에 같이 일어나서 말했다.
“이 가주, 술이나 한 잔 하고 가지. 어찌 바로 가려고?”
그 말에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안 돼. 우리 딸들 보러 가야 해. 그리고 술 먹고 늦게 들어오면… 됐다. 말을 말자.”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자, 송무진은 기가 차서 이젠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서휘가 걸어 나자자, 송무진이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자네… 내가 백도맹 치려는 거 알고 있었지?”
송무진의 말에 이서휘가 걸음을 멈추더니, 송무진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지. 물론….”
“내가 강서를 포기하고 백도맹을 먼저 치려면 어쩌려고.”
송무진이 이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하자 이서휘가 빙긋 웃었다.
“뭐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이 있을 지도 몰라서…”
이서휘가 칠흑검을 툭툭 두드렸다.
“검 들고 왔지 않은가.”
“하… 자네 혼자?”
송무진이 이서휘를 바라봤다. 어느새 이제는 이서휘의 기도조차 읽을 수가 없게 된 송무진이었다.
잠시 바닥을 내려 보던 이서휘가 송무진과 시선을 마주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한서령이 부추겼지?”
“뭐?”
“자네는 아직 내 벗이라 생각하고 있네. 고집을 부리면 자네 간부들 스무 명쯤은 목을 베고 돌아갈 생각이었네. 아무리 흑도맹이라도 그리 된다면 백도맹을 치는 게 당장은 어렵겠지. 만약… 아니다. 그럴 일 없길 바라네. 또 보세. 술은 다음에 하자고.”
이서휘가 씨익 웃더니 바깥으로 나갔다.
이서휘가 본영을 나오자 송무진이 물러가라 일렀던 흑도맹의 간부들이 잔뜩 모여서 본영에서 들리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서휘가 죽이겠다고 한 흑도맹의 간부들이 모두 모여 있는 셈이었다. 저마다 살벌한 표정과 살기를 띄운 채로 이서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 한서령을 찾아낸 이서휘가 조용히 물었다.
“한서령, 이 자리서 다 죽고 싶은 게냐?”
그 순간,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흑풍대주, 염라대주, 명왕대주 등이 나섰다.
이서휘가 미소를 지었다.
“하… 역시 흑도맹이로다.”
그때, 본영에서 송무진의 싸늘한 말이 이어졌다.
“그 자리서 죽기 싫으면 다들 길을 터라.”
그 말에 오히려 수하 한 명이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검제가 그렇게 대단한가? 한 수 보여주고 가시오!”
이서휘가 대번에 칠흑검으로 손을 뻗자, 사람들이 일제히 움찔했다.
이서휘의 몹쓸 심리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바로 뽑을 것처럼 하더니… 잠시 미소를 지은 이서휘가 덤덤하게 내뱉었다.
“길을 비켜라.”
이어서 쐐애애앵! 하는 소리와 함께 뽑힌 칠흑검에서 흑도맹 간부들을 향해 검풍(劍風)이 쏟아졌다.
바람이 아니라 재앙에 가까웠다.
아, 이것은 대체 무슨 무공이란 말인가?
발검 소리를 듣는 순간 이서휘를 둘러싸고 있는 흑도맹의 최고수들이 검풍에 휘말려 각자의 무공 고하에 따라 뒤로 날아갔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이서휘의 전방에는 소용돌이가 지나간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바람의 길이 움푹 파여 있었다.
머리가 산발이 된 사람들이 그제야 놀라면서 일어났을 때 이서휘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바람의 길을 따라 걷더니 어느새 질풍처럼 달려 나갔다.
말 한 마디 내뱉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격차를 확인한 흑도맹의 고수들이 이서휘가 사라진 곳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본영에서 송무진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검제가 네놈들 수준 같더냐? 어리석은 놈들. 반 시진을 주마. 강서로 이동할 준비를 마쳐서 보고해라. 늦은 놈은 군율로 다스리겠다.”
송무진의 말에 수하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다음에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에 남은 것은 여전히 이서휘에게 맞았던 검풍의 서늘함이었다.
누군가가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일격(一擊)에 다 죽을 수도 있었소.”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던 흑도맹 간부들이 저마다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 ☆ ☆
이른 저녁.
해가 서서히 지는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검선과 목군자가 그토록 좋아하는 하얀 눈이었다.
눈이 쌓이기 시작한 길목 어귀에서….
등에 불그스름한 장검을 멘 여인이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고 있었다.
화지련이었다.
어느새 시간이 이처럼 흘러갔던 것일까.
군림맹을 나와 수련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덧 삼 년이 흘렀고. 불현 듯 찾아온 깨달음의 경지를 마주하고선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경지를 돌파할 때까지 수련에만 매진했다.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길을 걸었다.
물론 그 소문의 장원을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한데 지금 화지련이 서 있는 객잔 거리의 풍취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낯이 익다고 해야 할까?
어쩐지 군림맹의 객잔 거리와 건물의 모습이나 분위기가 무척 흡사했다.
도이, 도삼, 이서휘, 정천과 자주 들락날락하던 검풍객잔.
그곳과 흡사했다.
한참을 구경하던 화지련은 어느 간판을 보자마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질풍표국(疾風鏢局).
화지련은 당장 믿어지지 않아 저도 모르게 간판을 따라 읽었다.
“질풍표국?”
그때, 질풍표국을 기웃거리는 화지련을 누군가가 발견하고 말을 걸려다가 헉 소리를 내뱉었다.
“화 소저?”
그 소리에 화지련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화 소저 아닌가?”
“표국주님, 아시는 분입니까?”
질풍표국의 표국주인 장시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묘한 미소를 지으며 화지련을 바라봤다.
“옛 동료랄까….”
“옛 동료요? 저리 젊은데요?”
“그때는 더 젊었지.”
잠시 미소를 지으며 화지련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던 장시우가 그대로 질풍표국으로 들어갔다.
화지련은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 내렸다.
‘내가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도망을 가지? 하아….’
잠시 길을 걷자 화지련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침착하게 표정을 추스른 다음에 간판과 건물을 올려다봤다.
장엄한 분위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위세가 대단한 건물의 중앙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월야전장(月夜錢莊).
화지련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녀 자신이 월야대였으니 감회가 더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화지련이 중얼거렸다.
“대단하네.”
그 말에 화지련의 뒤에서 대꾸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마어마하지?”
화지련이 급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화지련과 이서휘가 말없이 서로를 한참을 바라봤다.
무슨 말이 나오려다 말고, 나오려다 말고를 반복했다.
결국 먼저 말을 한 것은 이서휘였다.
그것도 무척 뜬금없는 말이었다.
“강해졌네?”
“하…. 그게 첫 마디에요?”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이서휘를 바라보던 화지련이 그녀답게 대꾸했다.
“대주님은 이제 아예 기도가 안 느껴져요. 예전엔 살벌했는데….”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강해졌지.”
“예전에도 강했잖아요.”
“검선 어르신과 목군자 어르신이 내 의부님들인 거를 잊었나? 정확히 말하면 세 명 모두 더 강해졌지.”
“아, 맞다. 잘 지내시지요?”
“물론.”
“다행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월야대 시절의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화지련이 말했다.
“도이, 도삼은 잘 있어요?”
이서휘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뒤에 있잖아.”
화지련이 급히 뒤를 돌아보자, 아무도 없었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월야전장(月夜錢莊)의 주인이 도삼이야.”
“와아…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아, 맞다. 아까 장 대주님 봤어요.”
“형님은 질풍표국주라 불리시고.”
“도이는요?”
도이의 정체는 기밀사항이었으나 화지련에게 말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도이는 정사지간에 속한 문파를 하나 세웠어. 하지만 뭐 내 암중 세력 중의 하나라고 해야겠지.”
“다들 출세했네요?”
“글쎄…. 뭐 다들 나쁜 짓은 안 하고 사니까. 그런 셈인가?”
“정천 오라버니는요?”
“정천 형은 그냥 자유롭게 수련을 하고 다니지.”
“또 뭔가를 맡기셨군요?”
“뭐 강요하진 않았는데 중요한 일이나 알아야 할 게 있으면 연락이 오는 정도지 뭐.”
“좋네요.”
이서휘가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잘 있었다니 다행이다. 더 강해진 것 같아서 보기 좋고.”
화지련이 침을 한 번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장원은 어디에요? 한참 찾았는데….”
“같이 갈까?”
“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잠시 후에 이서휘가 말했다.
“언제 올지 기다렸다. 다루를 하나 맡든가. 아니면 정보 상인들이 일하는 각(閣)을 하나 맡든가. 딱히 방해는 하지 않을 테니 멀리 가지 말아라. 이제…. 의부님들에게 무공도 더 배우고.”
이서휘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화지련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싫은데요?”
“그래. 너답다.”
이서휘가 피식 웃자… 화지련이 숨을 훅 들이마시더니 이서휘에게 말했다.
“늦은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는데, 일단 내 말 전해요.”
“뭐? 뭘 전해?”
화지련이 이서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북화(北華)가 남옥(南玉)에게 비무하러 왔다고 전해요. 아니다. 내가 가서 말해야지.”
이서휘가 얼어붙은 것처럼 잠시 서 있자, 어느새 멀리 보이는 장원으로 화지련이 홀로 걸어갔다.
이서휘는 화지련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무림인들의 시기 어린 말들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천하제일 공처가주.
이서휘가 아무리 강해져도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여인이 한 명 더 늘어나는 분위기였다.
화지련이 앞서 가면서 멀뚱히 서 있는 이서휘를 불렀다.
“안 볼 거예요?”
이서휘가 서둘러 따라가면서 말했다.
“봐야지.”
이서휘는 새하얀 눈 위에 화지련이 수놓은 발자국을 따라 걸어서 장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어느새 멈춰 서더니 그의 오랜 버릇대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표정은 무림고수가 아니라 영락없는 가장(家長)이자, 가문을 이끄는 가주(家主)의 모습이었다.
종장(終章). 전생의 인연
함박눈이 그친 날이었다.
허름한 장포를 걸친 노인이 눈을 밟으며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노인의 손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판자(板子)가 들려 있었다.
대체 무슨 용도로 쓰는 판자일까?
제법 두터웠는데 가운데는 평평하고, 앞뒤는 하늘로 치솟은 곡선이었다.
노인은 하얀 입김을 내뱉으면서 산 정상에 올라 하얗게 뒤덮인 산을 내려다 봤다.
무엇을 하려는 걸까?
물론 내려갈 생각이다.
노인의 얼굴은 천진난만 그 자체. 하지만 누군가 노인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면 외로움이라는 게 보였으리라.
어쨌든 눈이 잔뜩 내린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노인이 판자를 눈 위에 던지더니 가볍게 그 위로 뛰어 올랐다.
노인은 판자 위에서 기가 막히게 균형을 잡았다.
워낙 경사가 가파른 곳이라 노인의 신형이 쏜살같이 산 아래로 질주했다.
무공이 대체 얼마나 높은 걸까?
노인은 두 다리에 내공을 주입해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눈길을 미끄러졌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노인의 뒤편으로 눈보라가 쳤다.
한데 어느새 노인의 눈앞에 불쑥 솟아난 둔덕이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피하지 않았다.
미친 사람일까?
바람을 가르던 노인이 어느새 언덕을 타더니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 뿐이면 좋으련만….
노인은 자세를 낮추고 나무를 한 손으로 붙잡고 있다가 빙글빙글 공중제비마저 돌았다. 어느새 타아아악 소리와 함께 내려선 노인은 좌우로 을(乙) 자를 그리면서 눈보라를 일으켰다.
휘날리는 눈을 맞으면서 그렇게 산 아래까지 내려가던 노인은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밟고 있던 판자 위에서 솟구쳤다.
휘리릭 소리와 함께 땅에 내려선 노인이 무언가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또 네 녀석이야? 이 추운 날에….”
눈이 잔뜩 쌓인 곳에서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기른 한 청년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긴 머리 때문에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여기서 검을 휘두르는 걸까.
무슨 오의라도 터득할 셈인가? 알 수는 없었지만 청년은 무척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노인은 힐끗 바라 본 후에 지나쳤다.
무언가를 가르치기도 너무 늦은 상태. 더군다나 휘두르는 자세가 무척 안 좋았다. 한 마디로 기초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청년이었다.
노인이 고개를 젓다가, 판자를 주워 옆구리에 끼더니 자주 가는 국수 가게로 향했다.
“벌써 출출하다니….”
걸음을 옮기던 노인이 저도 모르게 청년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밥은 먹고 다니는 게냐? 거지꼴을 하구선. 하긴 내 꼴도 만만치 않다만.”
노인이 젓가락을 비비더니 국수를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기 시작했다. 멸치로 국물을 우려낸 평범한 국수였다. 인연이 닿아 국수집에 도움을 준 이후론 이곳의 노파가 벌써 반년이나 노인에게 공짜로 국수를 대접하고 있었다.
잠시 후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먹고 가네.”
노파의 손녀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더 안 드시고요?”
“많이 먹었다.”
“네, 어르신. 허리는 좀 괜찮으세요? 그 눈길 좀 그만 타세요.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나 봐요. 산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요.”
“산 귀신이라….”
“적당히 좀 오르세요. 저번처럼 미끄러지셨다가 누워 계시지 말고.”
“알았다. 한데 요 며칠 산 아래에서 자주 보이는 청년이 있더구나. 누군지 아느냐?”
“아, 그 사람이요? 얼마 전에 뭐라더라 기억이 안 나네. 하여간 돌봐주는 사람들이 간간이 있더라고요. 꼴에 검객이라던데요? 말을 안 해요. 벙어리는 아닌 거 같은데.”
“돌봐주다니? 사지 멀쩡한 놈을 왜?”
“못 보셨어요?”
“뭘?”
손녀가 자신의 두 눈을 가리키더니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두 눈 모두 칼에 맞아 잃었대요. 그 전까지는 제법 알아주는 그 뭐더라? 아 후기지수? 그런 사람이었다던데.”
노인이 소매로 입가에 묻은 국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눈이 멀었다고? 아까 멀쩡하게… 아니지, 자세가 안 좋았지. 하여간 검을 휘두르는 걸 봤는데.”
“그러니까요. 독종이래요. 귀도방(鬼刀幇) 놈들 아시죠?”
“알지. 한심한 놈들…”
“저 사람 괴롭히다가 이 다리 위에서 혼쭐이 났어요. 귀신처럼 악착같이 싸웠다고 하더라고요.”
“독종이로구나. 그래 알았다 하여간….”
노인이 밖으로 나와서 고개를 갸웃했다.
“눈이 멀어서 자세가 그리 엉망이었나. 머리가 치렁치렁했는데… 아! 앞이 보이지 않으니 머리가 얼굴을 가려도 상관이 없었구나.”
하지만 노인은 바둑 맞수를 찾아가는 도중에 이내 청년을 머리에서 지웠다.
다음 날.
국수집을 걸어가던 노인은 마을 초입에 놓인 다리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노인은 걸어가다 멈추고 청년의 앞에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청년의 말투가 무척 사납게 흘러나왔다.
“뭐요?”
청년의 오른손이 장검으로 뻗어 갔다.
노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어찌 그렇게 살기가 짙단 말이냐. 다짜고짜 사람을 벨 생각이야?”
청년은 뜻밖에 노인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검에서 손을 떼고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노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흘러나왔는데 때마침 청년의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흘러 나왔다.
노인이 말했다.
“밥은 먹었느냐?”
“…….”
“국수나 먹으러 갈까?”
청년이 저도 모르게 말라붙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너털웃음을 지우며 말했다.
“원 녀석… 노인네한테 국수 한 그릇 얻어먹는 게 그리 부끄러우냐? 사내 녀석이…”
청년이 대꾸했다.
“그럼….”
“그래. 꽉 막힌 녀석은 아니로구나. 가자.”
노인은 청년이 어떻게 일어나서 자신을 따라올지 궁금했다. 국수집 소녀가 말한 맹인 검객이 바로 이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노인이 유심히 바라보자 청년은 의외로 쉽게 일어났다. 대신에 귀를 기울이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잠시 후 노인이 먼저 국수집 문을 열어주면서 말했다.
“내 단골집이다.”
청년은 노인이 문을 열어주자, 눈치가 빨라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나갔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노인이 국수집 손녀를 향해 말을 내뱉으며 의자를 툭툭 쳤다.
“여기 국수 두 그릇만 주게.”
“네, 어르신. 근데 두 그릇이요?”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던 국수집 손녀가 치렁치렁하게 머리를 기른 청년을 보고선 나지막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 저 사람이랑 같이 오셨네.’
노인과 청년이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국물이 알맞게 따뜻했다.
노인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맛이 어떠냐?”
“좋습니다.”
“그 머리 좀 어떻게 해보아라. 그러다 네 머리카락도 국수로 알고 씹겠구나.”
노인의 말에 엿듣고 있던 소녀가 풉 소리를 내자, 소녀의 등에 국수집 노파의 손바닥이 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러자 노인이 주방을 향해 히죽 웃었다.
청년이 말했다.
“머리를 걷으면 흉합니다.”
“괜찮다. 걱정 말아라.”
잠시 국수를 입 안에서 우물거리던 청년이 품에서 끈 하나를 꺼내더니 앞머리를 쓸어 올린 다음에 길게 자란 뒷머리까지 묶었다.
청년의 두 눈엔 일자로 된 칼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노인은 청년의 얼굴이 의외로 준수한 것을 보고 감탄했다.
“허… 그놈 참 잘생겼구나. 부럽다.”
“네?”
“녀석, 잘 생겨서 부럽다고.”
“아, 아닙니다.”
“뭐가 아니야. 못 생겼다고?”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네 얼굴인데…“
청년은 노인의 말투가 당황스러웠으나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두 사람은 어느새 국물까지 싹 비웠다. 한데, 다 먹자마자 청년이 말했다.
“어르신, 이 국수는 제가 사겠습니다.”
“네가?”
“네.”
“안 돼.”
“네?”
“이 국수집은 나한테 돈 안 받기로 했어. 안 그렇소?”
“그럼요. 어르신…”
노인이 손녀를 보더니 히죽 웃었다. 손녀의 미모가 제법 뛰어나서 주변의 얼간이들이 자주 치근덕거렸다. 한 번은 납치를 당할 뻔한 적이 있었는데 노인이 나서서 소녀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 후로 노인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노인이 매번 먹고 가는 것은 고작 국수 한 그릇이었다.
노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여튼 잘 먹었으니 됐다. 잘 먹었소.”
청년도 주방을 향해 고개를 숙이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두 사람은 나와서 소화를 시킬 겸해서 길을 걸었다.
노인이 편하게 말했다.
“자네는 어찌 혼자 지내는 것인가?”
“그렇게 됐습니다.”
“가족은?”
“없습니다. 원래….”
“친구나 뭐 연인?”
“가끔 찾아오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동료? 동료라… 그러고 보니 검객이군. 상처를 보니 아직도 아물려면 멀었더구나. 본래 얼굴에 난 검상은 오래가지. 그래도. 싹 아물면 그리 흉하진 않을 게야… 얼굴이 잘 생겼으니.”
“어르신도 얼굴에 상처가 있습니까?”
노인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한데 어디서 다쳤느냐?”
“구화산에서 다쳤습니다.”
“구화산?”
“네.”
청년은 왜 갑자기 노인이 구화산이라는 말에 아무런 대꾸가 없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노인은 한참 후에야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다.
“그렇군. 복수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눈밭에서 검을 휘둘렀구나.”
“뭐 평소에 매일 하던 것이라…”
본래 노인은 바둑이나 두러 갈 생각이었다. 한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청년의 얼굴을 자주 쳐다보게 되었다.
손에 들고 있는 허름한 장검이 어쩐지 더 노인의 마음을 가슴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이 청년은 평생 저 허름한 장검을 휘두르면서 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더군다나 노인의 기준에선 실력도 형편없었다.
‘호구 같은 제자 한 명 받아서 부려 먹으려 했었으나… 그 기준에서 한참이나 모자라는 녀석이로구나.’
하지만 노인은 그런 자신을 스스로 꾸짖었다.
‘아무렴 어떠랴? 내가 강한데… 강해지게 만들면 되는 것을.’
노인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검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딱히 없습니다. 낭인이었습니다.”
“없어? 낭인이었다고?”
“네.”
노인은 그제야 청년의 자세가 왜 엉망인지 깨달았다.
‘혼자 익힌 것인가. 거의 실전으로 익혔겠구나. 특이한 녀석일세.’
노인이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는지 청년을 보며 밝게 웃었다.
“내게 배워 보겠느냐?”
“네?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검이지… 무엇이겠느냐?”
노인은 기가 막혔다. 다른 자들은 배우지 못해 안달인데, 이 녀석은 보질 못하니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봐도 모르는 녀석들이 태반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노인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보이지 않으면 소리로 가늠해 보아라.”
노인은 청년을 멈춰 세우고 앞으로 홀로 걸어가더니 칠흑색의 장검을 뽑자마자 길게 늘어선 나무들을 향해 휘둘렀다.
청년의 귓가에 아름다운 소리가 이어졌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 강할 수가 있을까?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이어나갔다.
보이지 않았으나… 상상만으로 눈앞에서 나무들이 아른거렸다.
소리만으로 장면이 그려진 셈이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노인이 또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나무가 연달아 쓰러지고, 매서운 검풍이 회오리를 일으킨 것처럼 뻗어나갔다. 그 경이로움에 청년이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제가 이것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원한다면 가르쳐주마.”
“어찌 오늘 처음 본 제게 이런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인지 솔직히 이 후배는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너무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노인이 무릎을 꿇은 청년을 일으키며 말했다.
“제자를 한 명 받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너와 인연이 닿은 것이다. 제자가 되겠느냐, 말겠느냐? 싫으면 바둑이나 두러 가련다.”
청년이 다급하게 말했다.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해놓고도 아직 통성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이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 해라. 난 검선이라 한다.”
“검선 어르신!”
청년은 검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무너지듯 주저앉아 절을 올린 채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평생을 불운하게 살았던 자신에게 어찌 이런 행운이 생겼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검선이라 하면 백도가 추앙하는 고수가 아니던가. 믿기지 않았으나, 눈을 감고 들은 것만으로도 검선의 무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검선이 청년을 일으켰다.
“인연이 별 거 있겠느냐? 이렇게 만나 국수 한 그릇 나눠 먹었으니 된 것이다. 젊은 나이에 눈을 잃어 그간 많이 괴로웠을 것이나 이제 내가 네 눈이 되어주마. 걱정 말아라.”
청년은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단 한번만이라도 눈을 떠서 스승의 얼굴을 봤으면 하는 심정뿐이었다.
검선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네 이름도 모르는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검선의 말에 청년이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아 급히 목청을 가다듬은 후에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어르신.”
“어르신?”
“스승님!”
검선이 너털웃음을 짓자, 청년이 다급한 마음을 잔뜩 섞어서 대꾸했다.
“스승님, 제자의 이름…. 이서휘라 합니다.”
검선이 처음으로 얻은 제자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휘도 무척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서휘가 예를 차리기 위해 급히 다시 절을 하려고 하자, 검선이 이서휘를 부축하며 말했다.
“됐다. 그놈의 절 좀 그만해라.”
검선이 이서휘의 눈가에 난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감정표현이 지극히 솔직한 검선인지라…… 오늘 받아들인 제자의 상처마저도 검선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녀석이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착한 녀석일까, 못된 녀석일까.
그런 것은 검선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검선이 이서휘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린 다음에 말했다.
“서휘야.”
“네, 스승님.”
“내가 너를 강하게 만들어주마. 무림에 네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다.”
이서휘는 대답할 말이 없어 침을 삼켰다.
검선이 감정을 추스르고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은 믿기지 않겠지.”
“아닙니다. 제자가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리 하면… 언젠가… 사람들이 너를 부를 때 이서휘라는 이름 대신에 검제(劍帝)라 부를 날이 올 것이다.”
“검제…….”
“마음에 안 드느냐? 검왕은 내 친구고… 검성… 어르신은 이미 계시고. 높은 경지를 일컫는 별호로는 그것이 가장 적당하구나.”
“아닙니다. 무척 마음에 듭니다. 제자가 검제가 되겠습니다.”
검선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길을 걸었다.
이서휘가 검선의 발걸음을 들으며 조용히 뒤따랐다.
이서휘는 불현 듯 찾아온 이 인연에 감사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천하의 검선이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이다니….
자신에게 어찌 이런 복이 올 수 있단 말인가?
이서휘가 검선이 걷는 눈길을 뒤따라가며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제자가 노력하겠습니다.’
이서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서 가던 검선이 느닷없이 기합을 내지르며 허리를 펴고 있었다.
이서휘는 검선의 행동 하나하나를 귀에 담고 있었다.
그렇게 새하얀 눈이 수북하게 쌓인 길을….
검선이 앞서 걸어가고, 이서휘가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눈길에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