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이서휘>
검선과 이서휘.
오료의 영역에 진입한 백도의 최고수들이 위극신과 검마를 상대로 승부를 당장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이렇게 승부가 길어지는 것일까?
위극신과 검마도 그들이 익힌 마공으로 ‘오료’의 영역에 진입했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로 이 싸움을 해석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백도와 마도의 본질적인 싸움이었다.
이서휘는 검선을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상황판단을 내릴 때마다 검선의 안위를 고려하고 있었다.
검선도 마찬가지….
그가 지닌 절기들은 이서휘까지 다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범위가 넓었기 때문에 마땅한 상황을 포착할 수 없었다.
반면에 검마와 위극신은 어떠한가?
누가 죽든 개의치 않았다. 검마가 당하는 순간에 위극신이 기회를 노릴 게 뻔했고, 위극신이 당하는 순간 검마가 나설 게 뻔했다. 이 둘은 서로의 안위를 무시한 채 겨루고 있었다.
승부가 길어지는 것은 개개인의 실력보다 이러한 마음가짐 덕분이었다.
하지만 검선과 이서휘마저 마도의 방식을 눈치챘고.
검마와 위극신도 백도의 고수들이 서로를 보조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출수가 자신들처럼 과감하지 못하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무공의 싸움이 아니라… 살아왔던 인생의 방식을 겨루고 있는 셈이다.
과연 어느 쪽이 맞을까?
초반에는 분명 마도가 유리했다. 하지만 합을 맞출수록 이서휘와 검선에게 기회가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검마의 대응방식 때문에 이서휘마저도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위태로운 순간이 이어졌다.
아마도, 이서휘가 검마와 위극신을 한명씩 만나 상대했다면 지금보다 빠르게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었을 터.
물론 검선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분타 외곽을 벗어난 상태.
거리낌 없이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드넓은 공터에서 네 사람이 한참을 맞붙다가 굉음이 한 번 터진 이후에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불청객들이 있었던 것.
두 개의 신형이 빠르게 달려와서 이서휘와 검선의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검마의 좌우사자들이 도착한 것이었다.
검마가 낄낄대고 웃었다.
“왔느냐?”
그런데 위극신의 좌우사자들마저 연달아 도착하더니 이번에는 위극신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위극명을 호위하기 위해 일월마가의 좌우사자로 발탁된 자들과는 수준이 다른 두 사람이었다.
위극신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포위하라.”
좌우사자 두 명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넓은 곳에 각기 자리를 잡았다.
중앙에 이서휘와 검선이 등을 맞대고 있고.
검마, 위극신, 좌우사자 네 명이 백도의 고수를 포위한 상황이었다.
이서휘와 검선이 등을 맞대고 대화를 나눴다.
“많아 졌군요. 의부님.”
“그렇구나. 의미 없다. 오늘 죽일 자들이 늘어난 것일 뿐이야.”
“옳은 말씀이십니다.”
검선과 이서휘의 여유에 검마가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죽는 순간까지 여유를 부릴 놈들이구나.”
하지만 최강의 부자가 동시에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호랑이 둘을 잡는데 네 마리의 늑대가 끼어들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터였다.
이미 이서휘와 검선은 두 마리의 용(龍)이나 다름이 없었다.
총 여섯 명이 동시에 이서휘와 검선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등을 맞댄 채로 무척 흡사한 검기를 반월형으로 동시에 내뱉었다.
쐐애애애애앵!
콰아아아아아아앙!
좌우사자들이 대번에 날아갔다가, 땅을 박차고 다시 달려 들었다. 이들도 이번 싸움이 대세를 결정지을 것이라 예상한 상태.
하지만 이서휘와 검선은 이 지경이 되어도 평상시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움직였다.
이서휘가 말했다.
“의부님, 슬슬 조금 넓게 움직이겠습니다. 보중하십시오.”
“걱정 말거라. 버텨주마.”
서로의 무공을 살펴보던 두 사람이 평범한 대화로 전략을 나누더니 서서히 동작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이서휘는 전신에서 기파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기도가 변하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아――
이서휘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했다. 이어서 이서휘의 두 눈이 번뜩이면서 마교 고수들의 사이사이를 암행표로 빠르게 질주했다.
이서휘는 일(一), 을(乙), 인(人)의 궤적을 섞으면서 전장을 누볐다.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하더니…… 이서휘의 신형이 희미해질 정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좌우사자들은 이서휘의 방향을 가늠하느라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검선은 장거리 경공 대결에서는 자신이 서휘에게 이겼지만, 근거리에서는 자신이 서휘에 비해 한 수 뒤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자신마저 겨우 이서휘의 궤적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인데 마교의 고수들이 어찌 대응할 수 있을까?
위극신마저 가까스로 예측에 가까운 장력을 내지르다가, 이서휘의 검에 튕겨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수법으로 검마를 가를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검마를 제외한 자들을 대상으로 질풍처럼 누볐다.
이것은 마치 네 명의 좌우사자들에게 남기는 경고였다.
너희가 감히 끼어들 수준의 대결이 아니라고.
검선이 일으키는 바람이 선풍(仙風)이라면.
이서휘가 일으키는 바람은 묵풍(墨風)이었다.
그 묵풍이 불어 닥칠 때마다 형벌(墨)을 가하듯이 좌우사자들의 몸에 검이 박히고 있었다.
그런데, 칠흑검의 절삭력이 또 어떤 수준인가?
좌우사자들이 무엇으로 막든지 간에 소용이 없었다.
파앗! 파앗! 츠츠츳!
어느새 이서휘가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서 핏물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이어서 짧은 비명이 뒤따랐다.
좌우사자들의 합류로 어떻게 해서든 이득을 보려고 했던 검마와 위극신마저 갑작스럽게 돌변한 이서휘의 상식을 깬 질풍검(疾風劍)에 당혹스러웠다.
좌우사자들이 자신의 임무대로 백도맹 분타를 미는 곳에 있었다면 적어도 수 싸움에서는 계속 이기게 됐을 터.
괜히 이곳으로 불려 들어서 마교의 소중한 전력들이 서서히 피 칠갑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챙챙챙챙챙! 파앙…!
그 때, 달려들고 있던 검마와 위극신을 홀로 막아내고 있던 검선이 말했다.
“서휘야.”
단 한 마디에서, 이서휘는 의부의 의중을 깨닫고 두 발로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한줄기 바람이 공중으로 솟구치는 형세다. 대체 어디까지 솟구치려는 것일까.
그에 맞춰서 검선이 바람처럼 움직여서 물러나면서, 쥐고 있던 구성검으로 건곤상양검의 선풍화골(仙風化骨)을 시전했다.
검의 궤적으로 만들어낸 선풍이다.
그 선풍에 휘몰아치는 검기가 담겼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 장포 소리가 요란하게 펄럭이면서 검선의 신형마저 회오리를 치듯이 회전했다.
쐐애애애애애앵!
궤적을 가늠할 수 없는 선풍화골이 좌우사자들은 물론이고 위극신과 검마에게도 쏟아졌다.
화르르르르르륵!
일대가 바람에 휩쓸리는 것처럼 요동쳤다.
이미 이서휘는 의부의 절기가 일대를 휘감을 것이라 판단하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높이 솟구친 상태.
신비로운 형국이었다.
검선이 내보낸 선풍화골은 마교의 고수들을 날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 안에 가둬서 분쇄를 시켜버리겠다는 듯이 제자리서 회전했다.
그 회오리에서 좌우사자들의 비명과 핏물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검마는 난생 처음 보는 공격에 당황하여, 자신의 마검을 땅에 박아 넣고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선풍화골이 검마의 몸에 수십 차례나 쏟아지면서 채재쟁― 챙챙― 타앙― 소리를 울려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검불침의 상태인 검마가 가장 버틸 만했다.
위극신의 대처는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수준.
감히 빠져나갈 수 없는 기이한 무공에 휩싸였다고 판단하고, 신형을 벼락같이 움직여 쌍장으로 검마의 좌우사자들의 목을 붙잡은 다음에 땅속에 무릎까지 묻어버린 후…. 기를 흡수하면서 시체가 되어가고 있는 좌우사자들을 붙잡고 버텨냈다.
하지만 위극신의 신체마저 수십 개의 칼날에 찢겨나가는 것처럼 피를 내뿜고 있었다.
이미 위극신의 좌우사자들은 선풍 안에서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간 상태. 도망가려다 넘어지고, 검을 휘두르려다가 쓰러지고. 정신을 차릴 수조차 없는 절망을 맛보고 있었다.
이 모두가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솟구쳐 있던 이서휘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서휘의 칠흑검에 달빛이 쏟아졌다.
이서휘는 그 순간, 세상의 속도가 느려진 것 같은 착각이 들고 있었다.
이서휘가 공중에서 웃음을 흘리더니 구화산 석실의 뻥 뚫려 있던 천장을 떠올렸다.
새카만 칠흑검에 검사가 휘몰아치더니 이내 하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보고 계십니까? 제가 검성 조부(父祖)님의 경지를 흉내내보겠습니다.’
검선이 선풍화골로 마교도를 붙잡아 놓고 있는 진영에…….
이서휘가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암천세도 백야경도 아닌….
기억에만 남아 있는 그 경지를 칠흑검에 담았다.
달빛을 머금은 칠흑검이 하늘에서 땅으로 향하는 순간….
초식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이서휘의 순수한 힘이 검에 담겨서 떨어졌다. 무아지경에 빠져 저절로 말이 흘러 나왔다.
“칠흑(漆黑)에서 쏟아지는 월광(月光)이로다.”
칠흑검에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서휘의 손등에서 힘줄이 폭발할 것처럼 튀어 올렸다.
달빛이 압축된 것처럼 쏟아졌다.
응축되었던 기운이 폭발하면서 빛이 기둥 형태로 되어 지상에 떨어지는 형국. 오히려 이서휘의 신형은 하늘 위로 다시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
휘몰아치는 선풍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마교 고수들의 머리 위로 이서휘가 쏟아낸 순수한 징벌이 가해진 셈이었다.
선풍과 월광의 조화.
구성검과 칠흑검의 합작….
피하기 어려운 경지에 오른 순수한 힘 그 자체가 뒤섞였다.
선풍 안에서 갈기갈기 찢겨나갈 것처럼 비틀리고 있던 좌우사자들이 이내 쏟아지고 있는 월광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콰아아아아아앙!
이어서 두드드드드 소리와 함께 선풍이 휘감고 있던 일대가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움푹 파였다.
그 재앙 속에서….
일종의 구도자나 다름이 없었던 검마의 선택은 죽음과 마주하는 것이었다.
쏟아지는 월광을 향해….
마검을 치켜들고 마장검극의를 분출했다.
두 사람이 극의를 펼쳐내면서 힘의 대결을 펼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검마가 마도라지만, 생과 사의 위기에서 대처한 방식은 실로 처절한 분위기가 흐르는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검마도 분명 대종사가 될 자질을 갖춘 자였다.
하지만 검마의 그 처절한 반항을….
이 순간에도… 위극신이 이용했다.
검마가 마장검극의로 잠시 이서휘가 쏟아내는 월광에 대항하자… 위극신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검마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푹!
도검불침의 신체에 어찌하여 이런 소리가 발생한 것일까.
위극신이 검마의 등 뒤에서 나타나 검마를 껴안듯이 휘감았다.
좌장의 검지와 중지로 검마의 두 눈을 찌른 후….
우장으로 검마의 목덜미를 움켜잡은 후에 검마를 방패삼아서 땅으로 드러누웠다.
그 도검불침의 신체 위로 이서휘가 내보낸 빛줄기가 쏟아졌다.
검마의 처절한 비명이 터지고….
위극신은 땅에 묻히면서까지 검마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세상천지에 이보다 더한 악인은 태어난 적이 없었을 터.
어느새 이서휘가 내보낸 검강이 두 사람의 신형을 땅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타닥… 소리와 함께 이서휘가 땅에 내려섰다.
검선이 대번에 소리를 질렀다.
“서휘야, 방심하지 마라…!”
검선의 경고에 이서휘가 신형을 날려서 검선을 호위할 생각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일대가 초토화된 것은 아까부터 빈번하게 발생했던 일이었으나… 이번에는 규모가 달랐다.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드넓은 지역이 반달처럼 파인 상태.
그 중심 부근에 깊은 구멍이 파여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일까?
그때….
평평한 곳에서 불그스름한 빛을 머금은 마검이 솟구쳤다.
검선이 감탄사를 내질렀다.
“허어… 독한 놈이로다.”
이서휘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 누가 튀어나오든 간에 가르면 그만이었다.
잠시 후….
흙을 잔뜩 뒤덮은 신형이 하나 솟구치자….
이서휘와 검선이 동시에 검기를 날렸다.
자의로 솟구친 것일까.
타의로 솟구치게 된 것일까.
어쨌든 구덩이에서 솟은 것은 검마였다. 하지만 등장하자마자 바람을 가르는 두 개의 검기를 알아채고 맨손을 휘둘렀다.
한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먼저 날아오던 검기를 오른손으로 튕겨냈다.
파아아아앙!
하지만 이어서 날아온 검기에 왼팔이 허망하게 잘려 나갔다.
푸악…!
쿵 소리와 함께 내려선 검마가 무릎을 꿇은 채로 잘려나간 자신의 왼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두 눈에선 피가 가득 흘러나오고 있는 터라 보일 리가 없었다.
얼굴까지 진한 색으로 가득했던 문신은 어느새 희미해진 상태.
이어서 구멍에서 위극신이 솟아나더니 공중에서 떨어지는 마검을 붙잡으면서 내려섰다.
위극신은 겉으로 보기엔 달라진 게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위극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검마야… 그간 수고했다.”
검선과 이서휘는 검마와 위극신의 상태를 번갈아가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희끼리 힘을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검선이 위극신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네 놈은… 실로 마도(魔道) 그 자체로구나. 제월헌 교주가 어찌 당했는지 훤히 보일 정도다.”
검선의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위극신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과찬이오.”
그때였다.
흑의인 두 명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면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나눴다.
“역시 이 대주…가 아니라 우리 형님께서 강적과 싸우고 있었군.”
“내 말이 맞았지?”
도이와 도삼이 실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등장하자 이서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물러나라!”
“네?”
“가까이 오지 말고 멀찍이 서 있어.”
이서휘의 서슬 퍼런 호통에 도이, 도삼 형제가 처참한 표정으로 털썩 엎드려서 쓰러지는 검마를 봤다가, 그 옆에 서 있는 위극신의 괴이한 눈동자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서 검선과 이서휘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뭐야 저거…”
놀라고 있는 도둑 형제들에게 이서휘가 물었다.
“검림은?”
“곽서명 어르신과 함께 왔습니다.”
“고생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서휘마저도 위극신의 상태를 보면서 새삼 침을 한 번 삼켰다. 사람이 눈동자만 달라져도 저렇게 괴이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예전에는 눈빛에 일렁이는 기운을 머금고 있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아예 청색과 적색의 구슬이 박혀 있는 것처럼 인간이 아닌 분위기가 두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위극신이 검선이 했었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수가 늘었구나. 의미 없다. 오늘 죽일 자들이 늘어난 것일 뿐이니….”
“수가 늘었다는 것은 우리를 두고 한 말이냐?”
어느새 단우혁이 다가오면서 말을 내뱉고, 백색의 장포가 온통 피로 물든 백류혼마저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몰려드는 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유은결과 한서령이 도착하고.
검림이 몰려와 자리를 잡았다.
위극신은 다가오는 자들을 바라보면서 도망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점점 수가 불어나서 빠르게 원형 방진을 그리고 있는 백도 세력을 천천히 훑어봤다.
이서휘가 단우혁에게 말했다.
“전세가 많이 불리했을 것인데… 어찌 이렇게 빨리 온 것이냐?”
단우혁이 뒤쪽을 한 번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수장들이 대부분 빠져 나가더구나. 물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선배가 뜻밖에 나타나셔서… 어라? 안 오시는군. 흐음…”
“누가 오셨는데?”
“곧 오시겠지. 기다려보자.”
검림과 곽서명까지 도착해 위극신을 중앙에 두고 모였다. 위극신이 도망을 치든 누군가를 해치려고 하든 이서휘와 검선, 그리고 곽서명과 백도의 고수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
어떤 일이 벌어지든….
검마의 힘을 흡수한 위극신이 얼마나 강해졌든 간에….
위극신은 이 자리에서 끝장이 날 형국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실로 괴이한 위극신의 풍모에 다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이서휘는 몰려든 사람들을 보며 감회가 남달랐다.
자신과 검선이 마교의 수뇌부를 붙잡은 것도 물론 큰 공이었지만, 연합이 스스로 수적 열세를 버텨낸 것과 검림의 등장은 그간 이서휘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하지만 이서휘가 그간 동분서주하면서 판을 짰다는 사실은 무척 우습게도 이곳에선 도이와 도삼이 가장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 도이와 도삼을 힐끗 살펴보던 이서휘가 앞으로 나섰다.
이서휘가 위극신에게 몇 걸음을 걸어가자 백도 전체가 병기를 움켜쥐었다.
위극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늘어선 백도를 노려봤다.
“실로 놀랍구나. 쓰레기 놈들이 어찌 이렇게… 단합이 잘 되었을까? 원래 이런 놈들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안 그런가? 이서휘.”
위극신이 아직도 거리낌 없이 욕을 내뱉자 여기저기서 호통이 쏟아졌다.
백도맹에서 진천뢰를 터트렸던 일이나 다른 마가가 저질렀던 일까지 모두 위극신에게 쏟아졌다.
한참을 듣고 있던 위극신이 말했다.
“말들이 많구나. 너희 백도는 오래전부터 자중지란(自中之亂)하여 우리가 파고들 빈틈은 수도 없이 많았다. 돈만 조금 쥐어 주면 배신하는 자가 수두룩했고, 겁박하면 알아서 기는 자들이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 더 많이 죽일 수 있었는데, 아쉬울 따름이야… 그런 너희가 이렇게 세를 합친 것도 무척 놀랄 일이다. 네 놈들 개개인의 속이야 빤한 것 아니겠는가? 실력도 없으면서 남의 위에 서길 바라는 자… 남의 위에 서서 약자를 괴롭히는 자. 그간 내가 바라봤던 마교와 백도는 한 치도 다른 점이 없었다. 반박할 수 있는 자, 있느냐?”
위극신의 말에 백도가 잠잠해졌다.
그러자 위극신이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저 홀로 전쟁을 다시 선포했다.
“내가 살아있으니 마도는 끝난 것이 아니다. 자신 있는 놈부터 와 보거라… 이곳에 있는 태반은 함께 성화신(聖火神)에게 데려가 주마.”
이서휘가 덤덤한 표정으로 위극신의 말에 대꾸했다.
“네 시선으로 보는 세상이 다가 아니다.”
이서휘가 중앙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다들 물러나시오.”
“어쩔 셈인가? 이 대주. 저 자의 눈빛을 보게. 이미 인간이길 포기했네. 다 함께 때려죽이는 수밖에 없네.”
이서휘가 위극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백도의 군웅들을 바라봤다.
위극신의 시선으로 보면 백도도 마교와 똑같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백도 세력 내에서도 다툼이 빈번하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에겐 마치 귀족처럼 행세하고 있지 않았던가.
사마세가와의 분쟁 등을 떠올려 보면 이서휘 자신이 겪었던 일도 제법 있었다.
이서휘가 위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 놈 세계의 강자존…. 내가 받아들여 주마.”
이서휘가 백도의 군웅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혼자 상대하겠소. 아무도… 나서지 마십시오.”
그러자 검선마저 나서서 이서휘를 말렸다.
“서휘야…”
이서휘가 검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의부님… 이번 단 한 번입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이서휘는 냉정한 사람이다.
상항을 이렇게까지 만들어놓고 혼자 상대하겠다는 건 이서휘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위극신의 상태로 보건대 이서휘가 당한다면 피해는 더욱 커질 터.
결국 검선이 나서고, 백도의 군웅들도 함께 나섰다가 여럿이 다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의 심정을 그 누가 알겠는가?
이서휘는 자신이 나서서 위극신과 마무리를 짓는 게 옳다고 여겼다.
이서휘 자신은 전생에 천마교에 포위되어 혈전 끝에 패배했다. 하지만 똑같은 방법으로 위극신을 죽이는 것은 이서휘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이서휘가 위극신에게 말했다.
“넌 오로지 나만 상대하면 된다. 인질을 잡는다든가 도망을 친다든가… 이 승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땐 백도의 검이 쏟아질 것이다.”
“날 혼자 상대하겠다고? 사람들이 이리 많은데.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바로 그 점이야. 애초에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 네가 세상이 이렇다, 저렇다 판단을 내리고 있나?”
이서휘가 미소를 짓자, 위극신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백도의 자존심이라는 것이겠지.”
그 말에 이서휘는 대꾸하지 않은 채로 검을 쥐고 위극신에게 걸어갔다.
두 사람은 마주 선 채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위극신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백도의 군웅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서휘의 정기를 모두 흡수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승부를 내는 순간에 조금이라도 이서휘의 힘을 또 다시 흡수한다면 이 자리에서 마신(魔神)이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열린 셈이었다.
이서휘는 말도 없이 칠흑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선제공격까지 위극신에게 내줄 마음은 없었다.
까앙―!
위극신도 마검을 들고 있던 터라, 어느새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면서 두 사람이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고함을 쳤다.
“거리를 벌려라. 이서휘 대주가 패배하더라도 저 놈이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지켜봐라.”
우르르 소리와 함께 백도 세력이 거리를 벌렸다.
검을 휘두르던 이서휘의 두 눈은 위극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네 놈의 경지는 어디에 오른 것이냐. 전생보다 강해진 것이냐? 아니면 전생보다 한참 뒤처지는 것이냐.’
이서휘의 검으로 가늠할 수밖에 없었다.
좌우사자들을 죽일 때 사용했던 쾌속의 움직임과는 달랐다. 이미 칠흑검과 하나가 되어 마검을 튕겨내고 있었다.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겼으나, 위극신은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의 머리에서 위극신이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나올 것인지 변수의 변수까지 파악해둔 상태.
벌써 몇 차례나 굉음이 터졌으나….
두 사람은 예상 외로 매우 좁은 공간을 활용한 채로 겨루고 있었다. 신형을 빙글빙글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위극신의 움직임에 넋이 나갔다가….
이서휘가 펼치는 자유로운 검의 궤적에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오른 자들이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서휘가 펼치는 검법은 이미 초식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무초검(無招劍)이 마도를 상대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싸움이다. 하지만 검을 잡아본 이들이라면 이서휘의 경지가 쉽게 오를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대번에 깨닫고 있었다.
찌르고, 베고, 튕겨내는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양 발과 양 손의 위치는 검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어떤 궤적에서도 벨 수 있었고.
베던 궤적마저 되돌려 찔러 대다가….
다시 베거나 찌르기 위해 튕겨낼 뿐이었다.
싸움은 이서휘와 위극신이 하고 있는데….
각자의 경지가 답답하게 막혀 있던 자들은 저도 모르게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지고 있었다.
‘나라면 어떻게 막았을까.’
‘나라면 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백도의 군웅들이 저마다 열심히 이서휘의 검을 쫓아갔다.
하지만 중도에서 포기하는 자가 속출했다.
어느새 절반이 포기했고, 잠시 후에는 대부분이 포기했다.
이제 깨달음과는 상관이 없는 구경만이 남은 셈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까지도 단우혁과 백류혼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이서휘의 검을 쫓아가고 있었다.
단우혁이 고개를 젓고….
백류혼마저 침을 삼켰다.
한서령은 이미 사패들보다도 먼저 고개를 저은 상태.
젊은 사패보다 다소 늦게, 무당은검 유은결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서휘의 궤적을 따라가다가 자신이 알고 있는 무당파의 모든 검법으로 대응했으나 머리만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의 검이 위극신의 시야에 백색의 빛 무리를 튕기고, 검기를 뿌렸다가… 신형을 감추는가 싶더니 공중에서 암연심검의 환을 여러 차례 뿌리면서 솟구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구경하는 자의 심정으로 입만 벌리고 있었다.
경지가 막혀 있던 유은결마저 무아지경에 빠져 들고….
그 다음 수준까지 따라갔던 자들은 극소수가 남아 있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백도의 고수들이 서서히 한숨을 내짓자….
이제, 이들마저도 순수한 마음으로 이서휘의 경지를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일식경이 흐르자….
구경하던 자들 중에선 단 두 명이 이서휘와 위극신의 경지를 여전히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검선 진무결.
그리고 그 반대편의 군웅들 틈에서 피가 잔뜩 묻어 있는 이화검(理化劍)을 들고 있는 목군자 진금구가 있었다.
목군자는 그의 성격답게 조용히 이서휘를 도와주고 물러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검선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비록 어머니는 달랐으나 평소 이복형인 검선을 존경하고 있었던 진금구다.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고, 검선의 성을 따른 것이 그 증거였다.
진금구는 이서휘의 대결을 보다가도 문득 멀리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검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과 서휘도 인연이 있었나보구나….’
가끔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으나 서로의 상처를 후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이미 검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분위기로 세상일에 초연(超然)한 경지에 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이서휘를 돕기 위해 달려왔다가 목군자 진금구마저 평소에 겪지 못했던 깊은 상념에 빠져 들고 있었다.
이서휘는 왜 홀로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있을까.
위극신을 죽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악이 끝나지는 않을 터.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당대의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는 검선은 이미 나이가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이서휘의 목표가 어디인지 보여줄 셈이었다.
마도, 흑도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몰려 있는 백도에게도 확실히 보여주고 싶었다.
새로운 시대의 천하제일은 바로 자신이라고….
그 천하제일은 백도마저 감시할 것이라고….
마교의 수장을 꺾은 검이 여기 있다는 것을 보여줄 셈이었다.
그게 이서휘가 생각하는 자신의 의무였다.
남들과 다르게 다시 생(生)의 기회를 얻은 검(劍)이 해야 할 일은 무림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이서휘의 눈이 빛나고.
위극신의 광기가 폭발했다.
이미 위극신은 검으로 이서휘를 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버린 상태….
마검은 천하제일검이 아니다.
검마의 신체를 도검불침의 상태로 만들어주는 도구일 뿐….
서서히 운명의 수레바퀴가….
위극신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근접 상태에서 칠흑검과 마검이 붙었다.
쩌엉……… 소리가 울리자 이서휘와 위극신의 주변으로 기파가 단번에 퍼져나갔다.
구경하던 자들 대다수가 저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보호했을 때….
이서휘와 위극신이 동시에 좌장을 부딪치면서 굉음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앙!
위극신의 안광이 번뜩이더니…. 청안과 적안의 위치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대체 무얼 준비하는 것일까.
이서휘는 위극신의 안광이 바뀌자마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뭐냐?’
이서휘의 강맹한 장력이 위극신의 좌장에 빨려가듯이 사라지더니… 위극신이 쥐고 있던 마검에서 흑색의 마기가 뿜어 나와 이서휘를 튕겨냈다.
이서휘가 백도 세력을 향해 날아가고.
어느새 마검을 던져버린 위극신이 엄청난 속도로 쫓아가면서 양 손을 휘감았다.
역천반경일까 아니면 일월광천지세일까.
무엇이든 간에 이서휘가 피하기만 한다면 뒤편에 있던 백도 세력이 몰살될 터….
속절없이 날아가던 이서휘가 지상에 내려서더니….
위극신의 양 손이 역태극을 그리는 순간에 이서휘가 전생에서 했던 것처럼 즉발기인 암천세를 터트렸다.
이서휘와 위극신.
두 사람이 펼치는 무공을 따라할 수 없는 자들에겐 지금 보이는 광경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서휘의 검에서 검광(劍光)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있는 빛의 덩어리가 분출됐다.
하지만 위극신의 선택은 역시나 역천반경이었다.
광역(廣域)으로 뻗어나가던 검광의 일부가 고스란히 이서휘에게 튕겨나갔다.
전생에도 이서휘가 이런 식으로 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서휘의 두 눈이 멀쩡한데다가 이미 위극신의 반격기를 예상하고 있는 상태였다.
암천세가 이서휘를 향했다.
검이 뿜어낸 빛인데 암천(暗天)이라는 이름을 지녔으니 무척 모순적이다.
물론 전생의 이서휘는 볼 수 있는 게 없었으니, 칠흑검제에겐 무척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이서휘가 검사를 휘감아서 칠흑검을 하얗게 만들더니 되돌아오는 어두운 하늘(暗天)을 스스로 반으로 갈랐다.
어쩌면 이 순간, 이서휘는 자신의 과거를 검으로 가른 셈이었다.
어두운 하늘이 갈라진 틈으로….
운명의 심판자라 할 수 있는 위극신이 마지막 난제를 만들어 세상에 던졌다.
일월광천지세(日月光天地勢).
이 한 방으로 세상에 재앙을 내리겠다는 것처럼 위극신이라는 존재 안에 머물러 있던 악이 일점(一點)으로 뭉쳤다.
마치 원혼(寃魂)이 뭉친 구체와 같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기괴한 색을 머금고 있었다.
위극신에게 흡수되었던 생명의 정수들이 풀어달라는 것처럼 극렬하게 요동치고 있는 기운이었다.
세상의 순리를 역행한 무공.
태극의 원리마저 거꾸로 재해석한 금기(禁忌) 그 자체.
그 구체 내부에서 끔찍한 비명들이 합을 이뤄 파지지지직 하는 기괴한 파공음을 흘려대고 있었다.
이서휘는 그 구체의 모습이 예상보다 작았으나, 그래서 더 오히려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막아도 터질 것이다.
가르거나 베어도 터질 것이다.
이서휘는 자신이 살아남아도 이곳에서 구경하고 있는 백도의 대다수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위극신도 자신이 있었다.
‘죽어라. 하찮은 존재들아….’
이서휘는 위극신의 표정을 보자마자, 칠흑검을 오히려 하늘 위로 세웠다.
사류곡에서 깨달았던 회광반조(回光返照).
그 극의를 검에 담았다….
순식간에 바람이 불고… 검기에 이어 검사가 휘몰아치고… 하얀 빛이 구체를 만들어냈다.
터트리면 이 일대에 백야(白夜)의 현상이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이서휘는 터트릴 마음이 없었다.
날아오는 일월광천지세의 구체를 검봉에서 만들어낸 백야경으로 휘감았다.
일월광천지세가 즉시 폭발할 것처럼 순식간에 크기가 커지더니 이서휘와 위극신의 사이에 놓였다.
파지지지지지지지직――
이서휘가 만들어낸 백야경이 위극신이 만들어낸 혼돈의 기운을 삼켰다.
하지만 구체가 폭발할 것처럼 점점 크기가 불어났다.
그 순간, 이서휘의 전신에서 기파가 폭발했다. 칠흑검을 들고 있는 손의 모든 핏줄이 터져나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 순간 이서휘가 하늘을 향해 검기를 날리는 것처럼 하얀 검사를 길게 분출하면서 백야경에 휩싸인 혼돈의 구체를 공중으로 올려 보냈다.
휘이이이이잉――
혼신의 힘을 다하는 와중에 이서휘의 입에서 절규에 가까운 기합이 터졌다.
이서휘가 칠흑검에서 분출한 정순한 내공으로 위극신이 내보낸 구체를 하늘로 밀어내고 있었다.
이서휘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안위를 생각해 행동하는 것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 기이한 장면에….
백도 세력 전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재앙이 하늘로 솟구치면서 여전히 파지지지직 소리를 냈고, 그 폭발을 하얀 구체가 감싼 형국으로 솟구쳤다….
이서휘가 칠흑검에서 빛 무리를 뿜어대면서 구체를 하늘 위로 올려 보냈다.
하지만 이서휘가 만들어낸 하얀 빛 무리의 색이 점점 연해지고 있었다.
이서휘마저 하늘로 시선을 올렸을 때….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서휘의 신기(神奇)에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위극신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빠른 속도로 이서휘에게 달려갔다.
한 사람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조심해요!”
대체 누굴까.
다른 자들은 모두 하늘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던가.
위극신마저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을 정도로 이서휘의 백야경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 중에 있던 단 한 명은 여전히 이서휘가 걱정되어 끊임없이 이서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외침에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이서휘의 눈동자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섬뜩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기습을 펼치려던 위극신의 눈과….
신기를 펼쳐내고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던 이서휘의 눈이 마주쳤다.
위극신이 코앞으로 다가오는데도, 이서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늘을 향해 힘을 쏟아내면서 속으로 대꾸했다.
‘고맙다.’
위극신이 장력을 쏟아내자, 이서휘는 구체를 튕겨내는 것처럼 손목을 올린 다음에… 출수가 늦을 것 같아서 급히 좌장으로 위극신에게 대항했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자들을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던 이서휘다.
좌장으로 막긴 했으나, 이 순간의 집중력과 폭발력은 위극신이 우위에 있었다.
위극신의 외기발현 장력이 이서휘의 좌장에 쏟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앙!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다급하게 지상으로 떨어졌다.
위극신과 이서휘가 각자의 손에서 외기가 발현되는 기파를 쏟아내면서 장력을 겨루고 있었다.
위극신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이서휘마저 백야를 터트린 후폭풍을 몸으로 감내하면서 위극신의 장력을 견뎌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간격이 점점 좁아지더니 기파가 사라지고 위극신이 점점 이서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이어서, 두 사람의 손바닥이 마주치면서 다시 한 번 요란한 굉음을 터트렸다.
위극신의 우장과 이서휘의 좌장에서 뼈마디가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쥐어짜듯 흘러나오고….
이미 두 사람의 손은 엉켜있는 것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순간, 위극신의 좌장이 바람을 일으키면서 이서휘의 목으로 향했다.
위극신이 움직이는데 어찌 이서휘의 우장이 가만히 있을까.
위극신의 좌장이 이서휘의 목에 도달하는 직전에….
이서휘의 칠흑검이 위극신의 목을 날렸다.
서걱!
여전히 왼손은 위극신에게 붙잡힌 상태에서 이서휘는 엄청난 속도로 출수를 이어나갔다.
위극신의 목을 치면서 일(一)을 새기고.
위극신의 왼팔과 오른팔을 인(人)의 궤적으로 끊고.
암연심검의 파로 다시 한 번 일(一) 자를 새겼다가….
천(天)을 완성하는 순간에….
위극신을 어두운 하늘로 떨어뜨리겠다는 듯이 이서휘의 존재 자체가 암천세를 폭발시켰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이서휘의 암천세에 맞은 위극신은 형체가 남아 있지 않은 채로 먼지처럼 휘날려서 하늘로 흩어지고 있었다.
이서휘의 미간이 대번에 좁혀졌다.
이서휘, 이 고집쟁이가 결국에 칠흑검제의 암천세로 위극신을 먼지로 만들었다.
그때였다.
하늘 위에서 쿠르르르릉 소리가 울렸다.
마치 아수라가 비웃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괴이한 소리였다.
이서휘와 모여 있던 군웅들이 일제히 하늘을 바라봤다.
이미 위극신의 일월광천지세를 휘감고 있던 백야경 때문에 주변 일대가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여전히 이서휘가 날려 보낸 힘 때문에 공중으로 치솟고 있었다.
그런데 굉음과 함께 서서히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까마득한 하늘에서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위극신이 내보낸 재앙이 하늘 위에서 추락하고 있었다.
마신(魔神)이라는 게 있다면 저런 형태가 아닐까?
이서휘가 칠흑검을 다시 한 번 움켜쥐었다.
일월광천지세가 백야경을 깨뜨리고 쏟아지는 것임을 그 누구보다 이서휘가 잘 알고 있었다.
이서휘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경지의 파괴력을 지닌 셈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늦출 수 있었던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공중에서 불길한 굉음이 터졌다.
파지지지지지지지직―――!
누군가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기랄! 어찌해야 합니까?”
엄청난 경공을 보유하지 않은 이상 장안의 절반 이상이 죽어날 것처럼 거대해진 상태.
싸늘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이서휘가 대번에 외쳤다.
“의부님!”
이서휘가 검선을 불렀다가, 이어서 목군자 진금구를 대번에 찾아냈다. 이서휘에게 조심하라고 외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옥의림이었기 때문.
소리만으로 옥의림의 위치를 알아내고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그 옆에 목군자 진금구가 서 있었다.
이서휘는 옥의림에게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말을 이었다.
“목군자 선배님…!”
두 사람이 대답할 틈도 없이 이서휘의 다급한 말이 이어졌다.
“다들 구화산의 석실을 기억하십니까? 검성 어르신이 날려 버렸던 그 뻥 뚫린 천장을 기억하십니까!”
검선의 눈에 눈물이 반쯤 차올라 있었다. 너털웃음과 함께 검선의 말이 이어졌다.
“기억하고말고….”
목군자 진금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언제 따라할 수 있을까 평생을 고민했었다.”
이서휘가 대꾸했다.
“의부님… 그리고 작은 의부님….”
이서휘가 쏟아지는 재앙을 향해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 경지를 따라할 수 있겠습니까?”
검선과 목군자가 이서휘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어서 검선이 구성검을 치켜들고….
목군자 진금구가 중앙으로 걸어 나오면서 스르릉 소리와 함께 이화검을 빼 들었다.
이서휘가 의부인 검선과 이제는 작은 의부가 된 목군자 진금구를 향해 다가가면서 칠흑검을 검사로 휘감고 좌하단으로 늘어뜨렸다.
거리가 아직 멀었다.
단 한 번에 분쇄시켜야 했다.
이서휘가 모여 있는 군웅들을 향해 말했다.
“백도… 흑도…. 그리고 모여 있는 군웅들…. 잘 들으시오.”
좌중의 시선이 잠시 이서휘에게 모였다.
이서휘가 왼손을 하늘로 가리키며 말했다.
“…함께 갑시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일월광천지세가 흉측한 얼굴을 들이대는 것처럼 떨어지는 순간….
검선이 너털웃음을 짓다가 구화산 석실을 떠올리며 말했다.
“가자.”
그때, 어디선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던 사마초가 외쳤다.
“가봅시다!”
부상을 당한 사마초가 겨우 힘을 짜내서 장검 한 자루를 공중으로 던졌다.
“제기랄!”
힘없이 날아가던 장검 한 자루가 구체에 닿지도 못하고 다시 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마치 그것이 신호탄인 것처럼 군웅들이 일제히 검을 휘둘렀다.
검선과 목군자가….
그리고 단우혁과 백류혼이….
유은결과 한서령이….
자신의 경지를 뛰어넘는 검기를 하늘로 향해 분출했다.
이어서 백도와 흑도의 수많은 병기와 검기가 하늘로 치솟으면서 올라갔다.
쐐앵! 쐐앵!
쐐애애애애앵!
쐐애애애액!
곽서명을 비롯한 검림 세력도 일제히 검기와 병기를 하늘로 쏟아내고….
검기를 쏟아낼 수 없는 도이와 도삼이 직도와 단검을 쥔 채로 떫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둘 다 이를 악물고 하늘 위로 던졌다.
그 장엄한 풍경을 눈에 담아낸 이서휘가 떨어지는 구체를 바라봤다.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구해주옵소서.’
이서휘가 검성이 했던 것처럼 하늘을 향해 빛줄기를 쏟아냈다.
가장 뒤늦게 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빠르게 뻗어나간 이서휘의 빛줄기가 온갖 형태의 검기와 맞물려 공중에서 떨어지는 구체와 부딪쳤다.
“――――――!”
두 개의 초자연적인 현상이 충돌하고 일순간의 정적이 잠시 감돌았다가….
장안 일대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굉음이 터졌다.
하늘을 지켜보던 자들 대다수가 귀를 틀어막았으나….
이서휘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하늘이 요란했다.
이어서 후두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치솟았던 병기가 떨어졌다. 하지만 구체는 검선과 목군자가 내보낸 빛살에 갈라지고, 군웅들이 던진 검기와 병기에 쩌저적 하고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연달아 도착한 이서휘의 빛살에 공중에서 폭발했다.
사람들이 한참이나 하늘 위를 바라봤다.
잠시간 달과 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컴컴해지더니….
서서히 본래 하늘이 가지고 있던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이서휘가 변함없는 하늘을 눈에 담으며 미소를 지었다.
힘을 합쳐서 위극신이 만들어낸 일월광천지세를 터트렸을 때는 백도와 흑도의 구분 없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어쩌면 흑도와 마도의 차이는 이런 것이리라.
다시 찾아온 고요한 밤하늘은 여전했다.
그 여전함이 연합의 승리를 축하해주는 것 같았다.
이서휘는 하늘에서 시선을 내리자마자 옥의림을 찾았다.
하지만 다가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무리하고 우리는 나중에 봐요.’
옥의림의 마음이 이서휘에게 전해졌다.
이서휘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바닥에 놓인 마검을 주웠다.
사악한 기운이 여전히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서휘가 여전히 바닥에 누워 있는 검마를 힐끗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숨이 붙어 있는 것 같군.’
이서휘가 왼손에는 마검을, 오른손에는 칠흑검을 쥐고 있다가 내공을 주입해 두 검을 가차 없이 부딪쳤다.
쩡――!
요란한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이서휘에게 모였다.
칠흑검에 의해 마검이 단박에 두 동강이 났다.
그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검마의 몸을 뒤덮고 있던 문신이 재가 되어 날리는 것처럼 스산하고 불길한 소리를 내면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부러진 마검과 검마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너희의 불길함도 오늘로 끝이다.”
다시는 마검이 그 누구의 손에도 들어가선 안 되리라.
땅 속 어딘가에 마검을 묻는다 해도, 어딘지 모르게 불길하고 찝찝한 마음이 남을 정도.
어느새 모여든 곽서명과 검림을 향해 이서휘가 말했다.
“선배님, 그리고 검림의 형제들…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서휘가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몰려든 검림이 이서휘를 향해 저마다 치하하듯이 말을 남겼다.
“검림주가 부르시면 어디든지 달려갈 겁니다.”
“곽서명 어르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검림주께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곽서명이 이서휘가 들고 있는 마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마검… 내가 처리해도 되겠는가? 세상에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흔적도 없이 녹여야 할 것이네.”
“그래주시겠습니까?”
이서휘가 부러진 마검을 넘기자, 곽서명이 검은 천으로 휘감아 등에 매달았다.
곽서명이 검마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놈도… 불태우는 게 좋겠다.”
곽서명이 싸늘한 표정으로 도광양회 형제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이 처리해주게.”
“알겠습니다.”
도광양회 형제들이 검마의 시체를 한 쪽으로 질질 끌고 가는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검마가 말을 내뱉었던 것.
“검은… 내 검은 부러졌는가.”
끌고 가던 자들이 화들짝 놀라서 검마의 발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곽서명과 이서휘가 놀란 얼굴로 다가와 검마를 뒤집자… 실로 인상이 달라진 남자가 그곳에 누워 있었다.
본래 이십 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사십 대의 중년인이 지친 것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얼굴에 가득 차 있던 문신이 사라지자… 인상이 완전 달라졌던 것.
검마가 누운 채로 이서휘를 올려보며 말했다.
“검은… 부러졌는가?”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부러뜨렸다.”
검마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묘한 말을 내뱉었다.
“그래? 그럼 끝이 났군. 하아….”
☆ ☆ ☆
곽서명은 검림과 함께 검마를 끌고 갔다.
곽서명이 남긴 말이 인상적이었다.
“검총의 무덤지기로 쓰겠네. 하지만 언제든 마귀(魔鬼)의 기운이 느껴지면 그 자리에서 죽일 것이야. 걱정 말게나.”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쪽 팔이 날아간 것을 보자, 도검불침의 상태도 이미 끝났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마검마저 부러진 상태….
곽서명의 무공 수위를 가늠했을 때 검마가 무슨 행동을 하든, 어떤 식으로든 부활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설령 부활한다고 한들….
이제 백도엔 이서휘가 있었다.
이서휘가 먼저 물러나는 검림 세력과 포박을 당한 채로 끌려가는 검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 ☆ ☆
그 다음은 검선과 목군자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검선은 아예 잊은 것처럼 살아갔고.
목군자는 때때로 검선을 떠올리면서 살아갔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더군다나 이서휘의 외침으로…….
구화산의 석실을 떠올렸던 두 사람이다.
할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하지만 두 사람은 천천히 서로를 향해 걸어가더니 마치 신기한 존재를 바라보는 것처럼 마주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검선은 워낙 감정표현이 솔직한 사람이다.
어쩌면 그렇게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 힘들어질까봐 평생을 홀로 지낸 것일 지도 모른다.
목군자가 다가올 때부터 검선은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반면에 목군자는 의연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죄송스럽다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목군자가 먼저 다가오더니 절을 할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검선이 목군자를 부축하자….
두 사람이 그제야 손을 맞잡았다.
목군자가 말했다.
“형님… 제가 금구입니다.”
검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다. 내가 무결이다.”
“형님을 종종 생각하여 허락도 맡지 않고 형님의 성을 따라 진금구로 살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검선이 언제 울었냐는 것처럼 웃음을 터트리면서 대꾸했다.
“어찌 그게 용서를 받을 일이냐… 반갑구나. 조금 더 젊었을 때 너를 찾아갈 것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검선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쉽지가 않았다.”
목군자가 어찌 검선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목군자가 말을 이었다.
“어찌… 서휘와 인연이 닿으셨는지요.”
“아, 그러게 말이다. 너는 어찌 알고 지냈는고?”
새삼 두 형제의 대화에 이서휘가 딸꾹질이 나려는 것을 겨우 참으면서 다가왔다.
우연이 겹쳐서 그런 것이라 하기에도 부족했고.
운명이었다고 하기에도 궁색했다.
우연과 운명과 이서휘의 전생이 있었기 때문에 맺게 된 인연이지 않은가.
이서휘가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의부님, 다친 곳 없으시죠?”
“물론이지.”
“작은 의부님,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 작은 의부라니….”
목군자가 보기 드물게 소리 내 웃더니 이번에는 자신의 제자를 불러 검선에게 소개시켰다.
“형님… 제 제자입니다.”
검선이 화들짝 놀라면서 옥의림을 바라봤다.
“오오… 어찌 이렇게 제자를 미모를 보고 거둬들였단 말이더냐?”
이서휘와 목군자가 웃음을 터트리자, 옥의림이 웃음을 겨우 참은 채로 예를 올렸다. 옥의림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 검선이라는 이름은 예전부터 들었으나 스승의 형님이라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더군다나 정인(情人)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서휘의 의부라니?
옥의림은 새삼 이서휘를 바라봤다가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이서휘가 자신을 가리키면서 ‘수법, 수법…’이라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
겨우 심호흡을 한 옥의림이 검선에게 예를 올렸다.
“제자 옥의림이 검선을 뵙습니다.”
검선이 옥의림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금구의 제자… 옥의림이구나. 한데 옥씨라면….”
목군자 진금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군자검 옥운몽 대협의 딸입니다.”
“아… 옥 대협의 딸이었구나. 나이도 적당한데 정혼자는 있는 게냐? 내가 내 아들을 소개시켜주마. 서휘야!”
이서휘가 바로 옆에서 대꾸했다.
“네, 의부님.”
“내 아우의 제자다. 실로 아름답구나.”
검선이 어처구니가 없는 방식으로 대뜸 옥의림을 이서휘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이미 옥의림과 목군자는 이서휘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서휘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농을 섞었다.
“옥소저의 미모가 실로 눈이 부셔서 감히… 쳐다보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서휘의 말에 도이와 도삼이 혀를 차면서 다가왔다.
“놀고 있네.”
“놀고 있어.”
도이와 도삼이 어슬렁거리면서 다가오더니 대뜸 검선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른바 이서휘와 도원결의를 맺기 위한 포석이자, 선수필승의 의도가 담긴 말이었다.
“천하제일검이신 검선 어르신께 이서휘 형님의 아우인 도이가 인사를 올립니다.”
“막내 도삼도 함께 인사를 올립니다.”
“오호… 우리 아들이 형제들이 있었구나.”
“그럼요. 어르신… 도원결의 한 사이입니다.”
이서휘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도이, 도삼을 바라보자 도둑형제들이 별 의미 없이 엄지를 척 하고 올렸다.
도이와 도삼이 아무렇지도 않게 모이자 그간 검선을 보고 싶었던 무리들이 잔뜩 몰려왔다.
하지만 검선이 이런 번잡함을 싫어한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이서휘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목군자가 구원자였다.
“형님,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저와 함께 가시지요. 이렇게 만났는데 여기서 헤어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검선이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서휘에게 말했다.
“서휘야. 가자꾸나.”
사람들이 일제히 이서휘를 바라보자, 이서휘가 헛기침을 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의부님, 그리고 작은 의부님… 함께 계시는 것을 보니 제가 더 기쁩니다. 하지만 저는 감숙으로 떠났던 군림맹을 조금 마중 나가 보겠습니다. 무사히 복귀하면 그때 의부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가겠습니다.”
목군자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괜찮겠느냐?”
이서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서휘가 도이와 도삼을 은근히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 의형제들과 같이 다녀올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검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순리였다. 어쩌면 감숙의 총본산으로 떠났던 연합은 더 큰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장안의 전투가 끝났다고 하여 다들 돌아가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한데, 이서휘가 나서주겠다니 다들 안심하는 눈치였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검선에게 말했다.
“의부님, 차라리 여기 작은 의부님의 거처에 함께 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경치도 좋고 조용한 마을입니다.”
“그리 하겠다.”
이서휘는 그제야 여러 가지가 마음이 놓였다. 이서휘도 나름 철두철미한 성격이다. 불쑥 옥의림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도이가 대번에 이서휘를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니까 형님은 여기 정인이신 옥 소저 곁에 천하제일 고수 두 분을…”
“시끄럽다.”
도이의 말에 검선이 화들짝 놀랐다.
“정인이라니? 서휘랑 의림이가 벌써 아는 사이였느냐?”
검선의 말에 이서휘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의부님.”
“하하하… 서휘야.”
“네.”
“걱정 말고 다녀와라. 네 정인은 우리 형제가 단단히 감시하고 있으마.”
검선의 농담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이서휘는 옥의림의 손이라도 잡고 싶었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의림아.”
“네.”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까 고마웠다.”
“음?”
사람들이 고개를 젓자… 이서휘와 옥의림이 미소를 교환했다.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 보느라 넋이 나가있을 때,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은 옥의림이 유일했다. 그것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이서휘가 옥의림에게 말했다.
“조만간 갈게.”
“조심하세요.”
이서휘가 검선과 목군자에게 예를 올리고 아우들에게 말했다.
“가자.”
“갑시다! 좀 쉴 수 있나 했더니….”
“하여간 우리 대주님은 바쁘다니까.”
“흐흐, 별 일 없을 것이다. 분타에서 말을 빌려서 가자꾸나. 둘 다 무척 지쳐 보이니.”
이서휘의 말에 도이와 도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이고, 고맙소.”
“눈물 나겠네.”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구시렁거리면서 이서휘에게 싫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검선 일행을 먼저 보내고….
백도맹 분타로 가서 말을 빌리려던 이서휘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뒤통수를 때렸다.
“화지련은?”
그러고 보니 목군자를 데리러 간 것은 화지련이었다. 한데, 말을 하는 도중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분명히 군웅들이 줄지어 있을 때도 화지련의 모습은 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도이와 도삼이 화지련의 행방을 알 수는 없는 노릇.
이미 떠난 검선 일행을 쫓아가서 물어보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도삼도 고개를 갸웃했다.
“거 참… 일찍도 물어보시오. 그러게 우리도 깜박했네. 아까 목군자 선배님하고 같이 있었어야….”
말을 하던 도삼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눈을 껌벅였다.
“뭔가 불편했을 것 같기도 하고….”
“하아….”
이서휘가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화지련…’
다른 때보다 무언가 묵직한 느낌이 전해졌다.
이서휘가 이번 생애에서 옥의림을 택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눈이 멀었던 이서휘를 보살폈던 것은 옥의림이었고.
화지련은 사사건건 이서휘와 충돌했던 여인이었으니까.
미모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였다.
하지만 다시 생을 살면서 화지련과 인연이 먼저 닿았고.
사람의 마음이 간사한 면이 있어….
전생에 그렇게 이서휘와 부딪쳤던 화지련은 어느새 이서휘에게 은근히 마음을 두게 된 상태였다.
물론 눈치 빠른 이서휘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담아두고, 무시했던 이서휘다. 웃기지 않은가? 맹인이라고 무시하던 여인이 어느새 정을 내비치고 있으니.
이서휘는 복잡한 심정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였다.
이서휘가 망연한 표정으로 잠시 서 있자, 어디선가 화지련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지련이 걸어 나오면서 말했다.
“언제 찾나 했어요.”
화지련이 덤덤한 얼굴로 등장하더니 이서휘를 바라봤다.
이서휘가 대뜸 호통을 쳤다.
“주변에 있었으면 빨리빨리 와서 인사를 했어야지.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 나타나느냐?”
도이가 혀를 찼다.
“마교를 박살내더니 이제 화 소저한테까지 손을 댈 기세구나.”
도삼이 맞장구를 쳤다.
“말세다. 말세야.”
두 놈들의 말을 무시하고 이서휘가 화지련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의부님을 쫓아가라고 말하기엔 너무 늦은데다가 상황이 흉흉하니 그럴 수는 없겠고….’
이서휘가 말했다.
“가자.”
“어디요?”
이서휘가 덤덤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어디긴, 마중 가야지. 질풍검대… 그리고 군림맹.”
그렇게 이서휘와 도이, 도삼, 화지련이 총본산으로 갔던 군림맹을 마중 나가기 위해 출발했다.
한데 분타에 들렸다가 말을 빌려 이동하는 와중에 화지련이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었다.
“저 조만간 옥의림하고 비무 대결할 거예요.”
“뭐?”
“소원 들어주기 비무랄까?”
“목군자 선배님만 모셔오라고 했더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화지련의 눈이 갑자기 날카롭게 반짝이더니 전방을 응시했다.
“실력이 제법이더군요. 한데 그 누구였더라. 교아라는 제자를 데리고 온….”
“초언약(招嘕楉) 말이냐? 또 왔어?”
“네. 옥의림하고 그 분 제자가 접전을 펼치더군요.”
한데, 갑자기 화지련이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이서휘가 옥의림의 승부가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래서? 어찌 됐는데?”
화지련이 이서휘를 바라보면서 대꾸했다.
“뭘 그렇게 관심을 보여요? 안 가르쳐줘야지.”
“이게…”
도삼이 혀를 차며 이서휘가 삼킨 말을 대신 이어나갔다.
“쳐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뭐 이런 말이 생략됐군.”
이서휘가 말했다.
“…어찌 됐냐고?”
“교아와 옥의림은 승부를 내지 못했죠. 대신에….”
화지련이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교아라는 그 여제자를 뭐… 흠… 이런 걸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뭐, 왜? 아 왜 자꾸 말을 하다 말아! 답답해 미치겠네.”
도삼이 인상을 잔뜩 쓰고, 도이가 귀를 쫑긋하고 이서휘가 화를 낼까말까 하는 시점에 화지련이 말을 이었다.
“박살을 내놨죠.”
도이와 도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도삼이 말했다.
“그렇다면 화 소저보다 옥의림 소저가 약하다는 말인가? 둘은 무승부를 냈는데 화 소저가 한 여인을 박살냈으니.”
이서휘도 코웃음을 쳤다.
“군림맹에서 그렇게 비무를 자주했는데, 또래의 여인들이 지련이에게 쉽게 이길 수는 없겠지.”
더군다나 이서휘 자신이 비무를 하면서 가르친 것도 제법 많았다.
화지련이 이서휘를 힐끗 쳐다보더니 갑자기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옥의림이나 혼내준 다음에 무슨 소원을 말할까.”
도삼이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와, 나 방금 소름 돋았다. 화 소저, 어디 아프신 건 아니고? 혹시 마교에 투신하셨소?”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애들도 아니고 무슨 소원 내기 비무를… 참나… 원!”
화지련이 이서휘를 보면서 계속 빈정거렸다.
“왜요. 걱정되나 보죠?”
“아이고, 됐다. 걱정은 무슨….”
“걱정이 안 되시면 뭐… 박살을 내야지.”
“아니, 넌 왜 갑자기 자꾸 박살을 내겠다느니… 대체 말투가 왜 그런 거야? 못 본 사이에.”
화지련이 이번에는 눈을 멀뚱멀뚱하게 뜬 채로 대꾸했다.
“대주님한테 배운 건데요?”
“그러세요?”
“네.”
이서휘가 계속 밀리자, 도이와 도삼이 저희끼리 보면서 씨익 웃었다.
서로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알 수 있었다.
[재미있는데? 이 대주가 은근히 약하네.]
[그러게 말이다. 화지련을 잘 키워야겠군. 이서휘를 박살내자.]
[아무렴… 그래야지.]
두 형제가 눈빛을 교환하다가 사파의 삼류무인처럼 웃었다.
“클클클….”
“낄낄낄….”
☆ ☆ ☆
얼마 가지 않아서 이서휘는 말을 타고 맹렬하게 달리는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지?”
한데, 그 사람도 이서휘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사내가 대뜸 말을 걸었다.
“이 대주, 나는 맹주님의 전령이오.”
“허어…. 그렇습니까?”
초면이다. 한데 이서휘는 사내를 보자마자 남궁세가 인물임을 깨달았다. 남궁위와 놀랍도록 외모가 흡사했다. 전쟁에서 장수들이 종종 계략을 펼칠 때 내세우는 그림자 무사의 느낌이랄까?
“안 그래도 후방의 사정이 걱정되어서… 말이오. 총본산에 도착해서 싸워 보니 어쩐지 마교의 수뇌부들은 거의 없었소. 그렇다면 각 본진이 위험하다는 얘기인데….”
사내는 스스럼없이 이서휘에게 말을 편하게 건네고 있었다. 남궁위의 외모와 흡사하니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다.
이서휘가 수하들을 돌아보다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마교 수뇌부… 특히 새로 교주로 임명됐다고 하는 자까지 포함해서 장안에서 모두 섬멸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히려 감숙의 상황이 걱정되어 마중을 나가는 중이었습니다.”
“섬멸되었다고?”
“그렇습니다.”
“수뇌부들이 만만치가 않았을 텐데….”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럴 때는 의부의 위명을 이용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선 어르신이 함께 계셨습니다.”
“허허……! 천운이로군.”
도이와 도삼은 무슨 소리냐는 듯 이서휘를 잠시 바라봤다. 어쨌거나 마교의 우두머리를 죽인 것은 이서휘다. 그런데 이서휘는 자신이 공적은 전혀 내세우지 않고 있었다.
남궁무영이 말했다.
“그렇다면 군림맹 본진이나 백도맹 본진이 타격 받을 위험도 없다는 말인가?”
“아마 없겠지요. 대다수의 수뇌부를 장안에서 죽였으니 세력을 이끌고 갈 수 있는 자들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하… 기가 막히는군. 어쨌든 수고했네. 한데, 감숙까지 갈 생각이라고? 그럴 필요 없을 것이야. 아마 내가 전령으로 출발했던 다음날 쯤이면 총본산을 무너뜨렸을 것이니….”
“오… 그렇습니까? 사상자는요?”
이서휘의 말에 남궁무영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사상자는 제법 있을 것이네. 실로 마교답게 싸우더군.”
이서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아 있는 자들이 연합을 상대로 어찌 상대했을 지는 보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남궁무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길로 안휘로 출발하고, 이서휘는 수하들을 이끌고 감숙으로 향했다. 하지만 남궁무영의 말처럼 고작 며칠만에 회군하는 군림맹의 병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
이서휘는 무척 지친 모습으로 이동하는 군림맹을 보자마자 홀로 말에서 내려서 도삼에게 맡긴 다음에 가장 후미에서 이동하는 질풍검대의 뒤를 따라잡았다.
“놀래키고 오마.”
도삼이 히죽 웃으면서 대꾸했다.
“다녀오십시오. 뒤에서 따라가겠습니다.”
뒤에서 바라보는 질풍검대의 복장은 그야말로 혈전을 치르고 온 것처럼 엉망이었다.
다리를 쩔뚝이는 자,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자들부터 시작해 도저히 승리한 자들의 발걸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기세가 떨어져 있었다.
오히려 장안에서 더 큰 싸움을 했던 이서휘가 멀쩡할 지경이니…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도 격전을 치른 것에 비하면 피해가 크지 않은 상황.
이서휘가 가장 뒤에서 걸어가는 질풍검대로 진입했다.
강기찬이 초췌한 몰골로 터벅터벅 걷고 있길래 이서휘가 옆에 가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막내, 고생이 많았구나.”
강기찬은 이미 막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서휘의 눈에는 여전히 강기찬이 막내였다.
친근한 목소리가 들리고 머리를 쓰다듬자 걸어가던 강기찬이 걸음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서….”
이서휘가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쉿… 다친 자들은 없고?”
죽은 자들은 없냐고 물었어야 했는데 차마 그렇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질풍검대에서도 첫 날에만 사상자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강기찬이 대꾸했다.
“……거의 대부분이 다쳤습니다. 형님…. 그래도 다행이지요. 사상자는 첫 날에만 있었으니.”
강기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서휘는 괜히 침을 삼켰다. 후미에 있던 자들이 이서휘를 바라보자, 이서휘가 다시 한 번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내고 앞쪽을 살폈다.
“다녀오마.”
이서휘가 질풍검대 사이를 지나갔다.
전쟁의 냄새가 코끝으로 진하게 흘러 들어왔다.
땀 냄새와 피 냄새가 섞인… 익숙한 냄새.
조금 걸어가자 질풍검대원들 중에서 가장 익숙한 사내의 등이 보였다.
이서휘가 조용히 따라가보니 장시우가 선두에 있었고, 그보다 약간 뒤쪽 좌우에 질풍부대주 이건영과 정천이 따르고 있었다.
장시우가 지친 음색으로 말을 꺼냈다.
“서휘가 있었으면 이렇게 많이 안 다쳤을 텐데 말이다….”
이서휘가 다가가다가 씨익 웃었다.
‘내 몸이 둘이 아니잖소, 형님….’
이건영이 대꾸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 이 대주가 있는 쪽도 무척 고전을 하고 있을 겁니다. 총본산에 진입해서도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자들이 죄다 빠져 나간 상태였지 않습니까? 이 대주라면 분명 그 자들을 상대하고 있을 겁니다.”
장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오. 가끔 보면 놀랍다니까. 이렇게 마교의 수뇌부들이 빠질 것을 대비해 막겠다고 나섰으니 말이요… 별 일 없기를 바라야 할 텐데….”
어느새 선두를 따라잡은 이서휘가 빙긋 웃으면서 장시우의 뒤에서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만만치 않았죠.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이서휘의 대꾸에 장시우가 우뚝 멈추고… 눈치를 채고 있던 질풍검대 전체가 웃음을 참으면서 행군을 중지했다.
장시우가 눈을 껌벅이면서 뒤를 돌아보자 이서휘가 활짝 웃고 있었다. 장시우는 아무 말을 못 하고, 대신에 이건영이 소리쳤다.
“형님! 서휘 형님!”
정천도 외쳤다.
“이 대주!”
장시우가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이서휘가 지금 여기 왜 있냐는 심정으로 바라보자, 이서휘가 장시우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시우 형님, 질풍검대 부대주 이서휘… 임무를 완수하고 지금 복귀했습니다.”
“허허… 서휘야. 이놈아!”
질풍검대가 둥그렇게 모여서 이서휘와 장시우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장시우의 잔뜩 지쳐 있던 얼굴에서 웃음이 번지더니 이서휘를 번쩍 안으면서 말했다.
“이 놈 새끼야! 언제 왔던 것이야? 하여간 사람 놀라게 만드는 재주는 천하제일이구나.”
동시에 질풍검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이 대주님!”
“부대주님!”
“형님!”
저마다 각자 부르고 싶은 대로 이서휘를 불러댔다.
“후발대로 오시는 거 아니었어요? 마교는 다 잡은 겁니까?”
장시우가 이서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찌 된 것이야? 무슨 일이 있었느냐? 혹시 이대로 또 우리가 출동해야 하는 것이냐?”
이서휘는 대꾸하기 전에 질풍검대를 돌아봤다. 그러고 나서는 장시우를 보며 말했다.
“형님 아우가 다 정리했습니다. 출동하긴 어디로 출동합니까? 조만간 휴가나 갑시다.”
질풍검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와아아아아아!”
이서휘가 히죽 웃으면서 장시우에게 말했다.
“형님, 전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이서휘의 말에 장시우가 황당한 얼굴로 대꾸했다.
“보고부터 하고 나한테 왔어야지.”
장시우의 말에 이서휘가 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후후… 다녀오겠습니다.”
이서휘가 군림맹의 선두를 향해 가다 말고는 질풍검대 전체를 돌아봤다.
“다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이서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질풍검대에서 환호성이 터지자 이동하는 군림맹 전체가 멈췄다. 다들 고개를 갸웃하면서 가장 후미에서 따라오던 질풍검대를 바라보면서 한 마디씩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질풍검대는 저희끼리 뭉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웃고 있었다. 그제야 누군가가 다른 검대에게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더니 파도가 치는 것처럼 소문이 퍼져나갔다.
[장안에서 이서휘 대주와 백도 세력이 마교 수뇌부를 섬멸했답니다.]
잠시 후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잔뜩 지쳐 있던 군림맹 전체가 떠들썩하게 외쳤다.
“끝난 거야? 그럼? 우리 그냥 돌아가면 되는 건가?”
“다 죽였는데 그럼 돌아가야지!”
막상 전쟁이라는 것을 겪어보니… 먼 타지에 와서 생각나는 것은 각자 머무르던 안휘, 군림맹, 그리고 집이었다.
총본산에 수뇌부가 없는데도 고전을 했던 군림맹이다. 그런데 다시 수뇌부를 잡기 위해 고생을 할 것이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이서휘가 질풍검대로 복귀했다는 소식은 곧장 선두에 자리잡고 있던 남궁위 맹주에게도 전해졌다.
평소 단정한 모습 그 자체였던 남궁위마저 까칠한 턱수염에 잔뜩 피곤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서휘가 왔다는 소식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휘, 이 녀석이… 나한테 먼저 알려야지.”
남궁위의 좌우에서 유백과 한신이 눈을 마주치며 한 번 웃었다. 이미 환호성 덕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대략 감이 왔던 것.
남궁위가 말을 이었다.
“공을 세웠으니 용서를 해줘야겠지?”
남궁위의 말에 한신이 대꾸했다.
“맹주님… 이제 서휘를 어째야겠습니까? 전공포상으로도 부족한 공을 세웠으니 말입니다.”
“후후, 그러게 말이다.”
잠시 후 문제의 이서휘가 도착해 드디어 정식으로 보고를 올렸다.
검선의 합류와 백도, 흑도의 후발대가 활약했다는 것이 보고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검림이라는 말은 뺀 채로 각지에서 몰려 든 백도 세력이 모여 수적 열세를 이겨내고 반격에 성공했다는 보고였다.
남궁위가 한숨을 길게 내뱉으면서 말했다.
“그래. 수고했다. 그럼 이제 행군 속도 좀 늦추자구나.”
남궁위의 말에 유백이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보고를 마치고 물러난 이서휘도 무척 오랜만에 월야대, 질풍검대와 함께 장안에서 있었던 일을 떠들면서 함께 걸었다.
갈 길은 멀었으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각 세력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것은 어쨌든 당분간 평화롭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그 평화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총본산을 공격하던 세 곳의 맹은 이미 언젠가 싹틀 전쟁의 씨앗을 품은 채로 복귀하고 있었다.
사소하다고 보면 사소하고, 중대하다고 보면 중대한 그런 상황들 말이다.
가장 용맹하게 싸운 것은 흑도맹이었다.
송무진의 성격은 맹장 그 자체.
가장 용감했으나 덕분에 피해도 가장 많았다.
반면에 가장 현명하게 싸운 것은 군림맹이었다.
오랜만에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남궁위 맹주는 병력을 효율적으로 운영했다. 적절하게 후퇴하고, 단호하게 기회를 포착했다.
한데, 가장 우왕좌왕했던 세력은 백도맹이었다.
백도맹주 범우는 본래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데다가 진천뢰가 터지는 것을 보자 백도맹에서의 일이 떠올라 급히 후방으로 후퇴했다.
대장이 후퇴했으니 통제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
다행히 총본산에 남아 있는 세력이 얼마 없어 남궁위의 지휘로 어렵지 않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앙금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피해가 가장 컸던 흑도맹의 송무진이 백도맹의 작태에 분노했고.
군림맹의 남궁위마저 백도맹을 비웃었다.
그렇다고 세 곳의 맹이 당장 충돌하지는 않을 터.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송무진이 이를 갈면서 흑도맹으로 복귀했다는 사실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 이상, 이서휘의 전생처럼 송무진이 흑도를 장악할 터.
마도라는 공공의 적이 사라진 와중에 송무진이 무슨 선택을 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 ☆ ☆
군림맹과 복귀하던 이서휘는 양해를 구하고 정천을 제외한 월야대와 함께 의부인 검선을 찾아갔다.
명분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이미 장안에서 벌어졌던 결전에 대해 보고할 때 검선이 도왔다는 말을 했었기 때문.
도움을 받았던 이서휘가 검선에게 찾아가는 것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솔직히 이서휘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옥의림이 뭐가 아쉬워서 화지련과 소원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비무를 해야 하는가.
무슨 대화를 했었냐고 화지련에게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렇다고 화지련의 기세를 보건대 옥의림이 이기기도 만만치 않은 상황.
더군다나 이서휘는 화지련에게 실전까지 가르쳤으니 마음이 더욱 불편했다.
하지만 비무는 기어코 벌어지고야 말았다.
다행히 검선과 목군자가 있어 분위기는 흉흉하지 않았다. 사정을 잘 모르는지라 그저 비슷한 연배의 후기지수끼리 비무하는 것이라 여겼을 뿐.
그런데 화지련의 미모가 또 옥의림과 다툴 정도로 뛰어나지 않았던가.
검선이 화지련을 보며 말했다.
“우리 서휘의 부하라고?”
화지련이 공손히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무공은 누구한테 배웠느냐?”
검선이 궁금하다는 것처럼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화지련에게 호의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화지련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돌아가신 스승님께 기초를 배웠으나 실전에 대한 것은 대부분 이서휘 대주에게 배웠습니다.”
듣고 있던 이서휘가 괜한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검선이 웃음을 터트리고, 목군자가 그제야 떫은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그렇다면 내 제자와 서휘의 제자가 붙는 것이냐?”
이서휘가 화들짝 놀라서 변명하기 시작했다.
“선배님… 아니, 작은 의부님. 그냥 부하일 뿐입니다. 뭐 가르치고 그럴 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왜 두 사람이 겨루려고 하는 지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서휘의 말에 오히려 놀라는 것은 목군자였다.
“왜라니? 의림이가 먼저 요청한 것이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만 소원 들어주기를 요청한 것도 의림이고.”
“네? 정말입니까?”
“거짓말을 왜 하겠느냐.”
그때, 사람들이 다 모인 곳에 뒤늦게 연락을 받은 옥의림이 비무 준비를 마치고 걸어왔다.
구경하는 사람은 적었으나 분위기는 제법 뜨겁게 달아올랐다.
검선과 목군자가 나란히 앉아서 미소를 짓고 있고.
검선 옆에 이서휘, 도이, 도삼이 앉아 있었다.
목군자의 거처에서 벌어지는 비무여서 외부 손님은 없었다.
이서휘는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옥의림과 화지련이 마주하자 모인 사람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두 명 모두 화용월태(花容月態, 꽃다운 얼굴과 달 같은 자태)라 부를 수 있는 절세미인들이었다.
더군다나 무공을 익혀 자세가 바르니 평범한 미인과 비교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밀리지 않는 기세를 지니고 있어 빛이 더욱 발하고 있었다.
아마 지켜보는 남자들의 마음은 다들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기가 차는 대결이구나.’
‘직접 마주 보고 서니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가….’
이서휘마저 새삼 놀라는 중이었다.
복장 탓일까?
옥의림은 새하얀 무복에 난생 처음 보는 묵빛 검을 쥐고 있었다.
묵빛 검은 밤하늘처럼 어두웠고.
옥의림의 피부와 옷은 보름달처럼 밝아 묘한 정취가 느껴졌다.
한데, 이서휘는 묵빛 검을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줬던 철선을 녹여 만들었구나….’
이서휘가 검을 바라보자, 그제야 옥의림이 자신의 장검을 내밀면서 말했다.
“스승님이 사용하시는 이화검을 따라 월화검(月花劍)이라 지었어요. 잘 쓸게요.”
말을 하며 옥의림이 웃자, 지켜보던 남자들이 죄다 순수한 마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도이가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잘 쓰시오. 실로 잘 어울리는군. 허허허…”
도삼이 황당한 얼굴로 형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서휘 형님이 주신 거 같은데 형이 왜 대꾸해.”
“시끄럽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옥의림에게 말했다.
“월화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번에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 화지련이 자신의 장검을 스릉― 소리와 함께 뽑아 들었다. 일부러 내공을 살짝 주입했는지 검명이 지잉― 하고 듣기 좋게 울렸다.
사람들이 이번에는 화지련의 자태로 시선을 옮겼다.
붉은 빛이 감도는 무복에 홍화검(紅花劍)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필 이름마저 홍화검이라니….
우연일까 운명일까.
월화검 대 홍화검.
더군다나 두 검 모두 이서휘가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화지련이 사용하는 검은 지난날 이서휘가 검림에서 가져온 검붉은 색의 장검이었는데, 화지련이 직접 홍화검이라 검명(劍名)을 지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의도일까.
화지련이 굳이… 그야말로 굳이… 홍화검의 출처를 은근슬쩍 밝혔다.
“월화검이라 잘 어울리는군요. 제 검은 이 대주님이 선물해주신 홍화검이라 합니다.”
검선, 목군자, 옥의림의 시선이 대번에 이서휘에게 향했다.
‘선물했어?’
이런 표정이다.
반면에 이서휘는 대답하기도 애매하고 무언가 복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선물이야 했지. 했는데… 아… 설명할 방법이 없네.’
이번에는 옥의림이 평소와 다르게 입술을 안쪽으로 감추더니 화지련을 노려봤다.
노려보는 것이야 화지련도 이제는 천하제일여고수가 된 지 오래여서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옥의림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남자들의 심정이야 얼추 다 비슷했다.
[살벌하다….]
그때, 묘한 정적을 깨고 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두 분은 왜 갑자기 싸우시는 것인지…?”
화지련이 앙칼지게 대꾸했다.
“알 거 없어! 싸우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도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근데 너는 왜 갑자기 나한테 반말을…”
도이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도삼을 바라보자, 도삼이 말없이 도이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그냥 형은 입 다 물고 있어. 그게 이득이야.”
검선과 목군자는 형제들의 대화가 재미있는지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다가 목군자가 말을 꺼냈다.
“한데 진검으로 겨룰 생각이냐? 누가 다치든… 걱정이 되는구나.”
목군자의 말에 화지련이 대답했다.
“목검을 사용하면 제가 불리합니다. 전에도 보아하니 주로 목검으로 연습한 것 같더군요.”
목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하지만 반대로 진검을 사용하면 의림이가 불리하다. 들고 있는 진검은 우리 서휘가 재료를 줘서 얼마 전에 완성한 것이야. 무게부터 적응되지 않았을 터.”
일부러 목군자가 ‘우리 서휘’라는 말을 무척 강조했다.
검선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면 비무를 두 번 하게. 진검으로 한 번, 목검으로 한 번…. 소원 들어주기를 걸었다지? 두 번이나 패한다면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할 테고. 서로가 한 번씩 이긴다면 상대가 무리한 요구를 했을 때 동률이므로 거절할 수 있도록 하지. 아니면 각자 소원을 말할 수도 있겠고. 어쨌든 결국엔 일방적인 소원을 요구하려면 두 번 다 이겨야 하는 것으로.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의 소원이든 그것이 이치와 도리에 맞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이해했나?”
이서휘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게 좋겠습니다. 의부님.”
검선이 나서고 이서휘까지 동의하자 화지련은 할 말이 없었다.
‘흥… 두 번 다 이기면 되겠지 뭐….’
이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진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훗날에 여중제일고수를 다투는 두 사람이 무척 뜻밖에도 이른 시기에 만나 겨루게 된 셈이었다.
내공은 누가 높을까?
검법은 누가 우위에 있을까?
실전 경험은 누가 많을까?
사람들은 화지련이 이길 것이라 생각했지만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채앵!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부딪쳤다.
옥의림과 화지련의 검이 맞붙자마자 미세하게 밀려난 것은 오히려 화지련이었다.
도이와 도삼을 제외하고는 당대의 최고수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검선, 목군자, 이서휘다.
세 사람은 일합에서 이미 내공은 옥의림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하지만 상대를 압도할 수 있을 정도의 격차는 아니었다.
이내 침착하게 검을 회수한 화지련의 공격이 이어졌다.
챙챙챙챙챙!
이렇게 보니 사람의 성격이 그대로 검법이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옥의림은 중앙에 굳게 서서 공격과 방어를 적절하게 배분하여 대응했고.
화지련은 옥의림의 주변을 돌면서 무척 자유롭게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화지련은 공격에 더 치중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바라보다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옥의림의 검법이야 스승인 목군자가 가르쳐준 것이다.
하지만 화지련의 움직임은 분명… 이서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경쾌한 발놀림을 토대로 상대방의 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기조(基調)를 지녔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서휘가 쌍검을 주로 사용하던 시기의 움직임이랄까.
돌이켜 보면 이서휘가 화지련과 도이, 도삼을 상대로 비무를 자주 벌였던 시기는 쌍검을 사용했던 시기였다.
화지련의 움직임이 바로 그때의 기조였다.
파라락―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옷자락이 날리고.
채채챙― 소리와 함께 검이 부딪쳤다.
옥의림은 진검이 익숙하지 않을 것인데도 의외로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지켜보던 자들은 두 사람 모두 여인들 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기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실전 감각은 화지련이 위였다. 두어 번을 깊숙이 들어가다가 자신감을 얻었는지 옥의림의 초식을 튕겨내자마자 오른발이 스윽 하고 전방으로 들어갔다가, 왼발을 튕겨내 옥의림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대번에 홍화검으로 옥의림을 가리켰다.
화지련이 말했다.
“졌죠?”
옥의림의 백옥 같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옥의림의 성정도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붉어졌던 얼굴이 어느새 다시 백옥처럼 변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에 잔뜩 쌓여 있는 목검을 향해 걸어가더니 한 자루를 화지련에 던졌다.
휘릭― 탁! 소리와 함께 화지련이 낚아채자….
옥의림이 어느새 평온한 얼굴로 화지련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가볼까요?”
두 사람의 시선이 또다시 뜨겁게 엉키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일단 두 사람이 하는 대로 지켜볼 생각이었다. 이서휘로서도 전생에 없었던 일이라 누가 이길지, 무슨 소원이 나올지 짐작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만 누가 무슨 말을 하던 간에… 이서휘는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옥의림과 화지련이 착각하는 게 있었다.
연애(戀愛)라는 분야로 한정을 지으면 두 사람이 얼마나 예쁘든 마음이 곱든 간에 언제나 이서휘가 강자일 것이다.
이서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성격이 드센 남자들이 ‘내가 갑이야.’라고 여기는 것처럼, 이서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 어쨌든 아직까지는… 그랬다.
옥의림이 드디어 목검을 쥐었다.
목군자의 가르침에 따라 지금까지 목검만 사용했던 옥의림이다. 진검 비무에선 화지련에게 패했으나, 이미 화지련의 내공 수준과 검법을 살펴봤으니 더 이상 불리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옥의림의 외모가 아름답고 순수해 보인다고 하나, 이서휘의 전생에서도 여중제일고수를 다투던 옥의림이다.
호승심은 물론이거니와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실력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옥의림은 대기만성형이다.
목군자가 기초부터 탄탄하게 가르쳤기 때문인데 어쨌든 훗날 옥의림에게 패배하는 여고수 중에는 목군자가 나름 인정했던 여몽도주 초언약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앞으로 화지련과 옥의림은 수없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우열을 가리게 될 터.
지금 펼치는 대결은 겨우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 대결이 대체 뭐라고….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로 목검 비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단 옥의림의 분위기가 확 바뀌어 있었다.
화지련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도이와 도삼마저 어리둥절해질 정도.
애초에 옥의림은 목검이 편했다.
타격으로 승부를 낼 수 있다는 점도 무엇보다 옥의림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어찌 보면, 진검으로 화지련과 어우러진 것도 옥의림에겐 크나큰 모험이었다.
옥의림이 선공을 예고했다.
“갑니다.”
화지련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옥의림의 출수가 이어졌다.
타악!
첫 초식부터 강맹한 힘이 실린 옥의림의 목검이 화지련의 목을 노렸다가, 방향을 바꿔 화지련의 종아리를 후려쳤다.
목검에 실린 바람마저 제법 매서웠다.
타닥!
화지련도 만만치 않았다.
군림맹 검대 대원들과 벌였던 비무가 얼마나 많았던가? 더군다나 도이와 도삼과도 자주 겨뤘으니 이 정도 공격은 버틸만했다.
삽시간에 두 사람의 목검이 강맹하게 부딪쳤다.
타다다닥!
거리를 잠시 벌린 두 사람이 자세를 잡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서휘는 팔짱을 낀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보기에도 이번에는 화지련이 밀리고 있었다. 옥의림이 물 만난 고기처럼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
이서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북화남옥….’
아직 생기지 않은 별호이다. 하지만 이번 생애에도 두 사람을 한데 묶는 별호가 생기리라 예상했다.
화지련의 발전은 눈부셨고.
옥의림의 목검은 도이와 도삼마저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견고했다.
후욱―!
바람이 일어나더니, 옥의림이 목검 끝으로 화지련의 가슴을 찔렀다.
탁―! 소리와 함께 화지련이 밀려 들어오는 목검의 방향을 틀어내자, 옥의림의 목검이 연달아 화지련의 가슴, 배, 어깨를 노리면서 쏟아졌다.
화지련의 대응은 그녀의 성격답게 호쾌했다.
세 번의 공격을 연달아 쳐내더니 자세를 급히 낮춰 왼발을 땅을 스칠 것처럼 내밀었다.
하지만 이전과도 비슷한 수법이라 옥의림이 당할 리가 없었다.
옥의림은 오히려 화지련의 머리 위로 솟구치더니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면서 목검으로 화지련의 어깨를 노렸다가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화들짝 놀란 화지련이 황급하게 피하면서 옥의림의 목검을 쳐냈을 때는… 선수를 빼앗긴 상태.
땅을 한 번 도약한 옥의림은 강맹한 공격을 내지를 것처럼 위협하다가, 일부러 허초를 섞어서 화지련을 밀어붙였다.
이미 화지련의 발걸음은 흐트러진 상태.
옥의림이 심리적인 압박을 넣기 위해 허초를 섞기 시작하자, 화지련이 연달아 스무 걸음을 밀려나면서 방어만 펼칠 수밖에 없었다.
허초라고 생각하면 뜻밖에도 강맹한 공격이었고.
강맹한 공격이라 판단해 방어하면, 다른 곳에서 바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다.
넘어지거나 자세를 삐끗하는 순간에 승부는 바로 결정될 터.
이를 악문 화지련은 이대로 지는 게 싫어서 승부수를 걸었다.
이서휘에게 여러 번 당했던 수법 중에 상대의 무기를 감아서 던져버리는 묘수가 있었다.
상대방이 내민 검의 궤적을 읽고, 적절한 부분에 자신의 병기를 갖다 대어 곡선으로 휘감듯이 후려치는 것이었다.
병기를 갖다 대는 찰나의 순간과 적절한 내공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반격이었다.
사실 화지련이 지금 수준에서 해낼 수 있는 경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여러 차례 방어를 펼치던 화지련은 옥의림이 휘두르는 목검이 중단으로 들어오자, 뒤늦은 출수로 목검의 중앙 부분을 절묘하게 휘감아 바깥으로 날렸다.
휘릭―!
지켜보던 자들의 눈이 동시에 커졌을 때.
옥의림의 쌍장이 벼락같이 뻗어 나갔다.
이번엔 저마다 짧은 외침을 내뱉었다.
“앗!”
화지련이 목검을 회수해서 반격에 나서긴 늦은 상황.
화지련도 좌장으로 응수하려는 찰나….
그보다 빠르게 뻗어나간 옥의림의 우장이 허공에서 손바닥을 뒤집더니 화지련의 목검을 낚아채서 돌아오고….
동시에 옥의림의 좌장과 화지련의 좌장이 부딪쳤다.
하지만 퍼억! 소리와 함께 튕겨난 것은 화지련이었다.
검선이 즐겁다는 것처럼 감탄사를 내뱉었다.
“호오… 승부가 났구나.”
옥의림이 목검을 빼앗아 오고, 장력 대결까지 이겼다. 화지련이 급히 목검을 주워봤자, 옥의림의 공격이 더 빠를 터.
목군자도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총평을 남겼다.
“둘 다 잘했다. 지련이도 대단하구나. 하지만 일전에 의림이가 교아와 승부를 내지 못했던 것은 진검 대결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 깨달았을 것이다. 비록 그 교아를 지련이가 압도적으로 이겼다만…. 목검으로 하게 되면 결과가 이렇게 된다. 결코 의림이가 교아보다 약하지 않느니라. 둘은 앞으로 좋은 맞수가 되겠구나.”
“네, 선배님.”
화지련이 바라보자 목군자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도 훌륭했다. 서휘가 잘 가르쳤나 보군.”
“과찬이십니다.”
그 말과 함께 잠시 정적이 감돌았는데 사람들이 왠지 모르게 이서휘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서휘의 총평도 기대했던 것.
하지만 이서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이서휘는 사람들이 자신을 계속 쳐다보자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소원들을 서로…”
이서휘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화지련을 바라봤다.
화지련은 자신이 두 번 모두 이길 줄 알았다. 이곳에서 소원을 한 번 말해봤자… 옥의림이 거부하면 그만이니 말할 이유가 사라진 셈.
화지련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다음에 말하겠습니다. 저는 그럼 이만 맹으로 먼저 복귀할게요. 죄송합니다.”
“뭐?”
화지련이 검선과 목군자를 향해 포권을 하더니 홍화검을 쥐고 서둘러 떠났다.
화지련이 바로 떠나자, 어쩐지 옥의림이 가장 당황했다.
“화 소저!”
검선도 한 마디를 거들었다.
“흉흉한 이 시기에 어찌 홀로 복귀를 한다는 말이냐. 서휘야, 가서 데려오너라.”
그때, 어느새 경공으로 달려 나가던 화지련이 골목 어귀에서 다급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누구세요? 대주님!”
“어?”
그 소리에 이서휘가 벌떡 일어서자, 목군자가 미간을 좁히면서 말했다.
“뭐지? 형님, 이곳에 계십시오. 서휘와 다녀오겠습니다.”
“알았다.”
하지만 이서휘는 이미 사라지시다시피 하여 달려나간 상태. 목군자가 안색을 굳힌 채로 따라갔다.
“혹시 또 그놈이….”
도이와 도삼도 뒤늦게 일어나더니 검선에게 말했다.
“저희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삽시간에 검선과 옥의림이 남고.
나머지는 모두 화지련을 쫓아간 상태.
검선이 깜짝 놀란 옥의림에게 말했다.
“걱정 말아라. 별 일 없을 게야.”
“네.”
이서휘는 벌써 화지련의 목소리가 들렸던 곳을 지나, 발소리를 죽인 채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한데 화지련을 들쳐 업고 가는 불청객의 경공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하지만 이서휘를 뿌리칠 수는 없는 노릇.
어느새 먼 거리를 순식간에 따라잡은 이서휘가 화지련의 목소리를 듣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였기 때문.
바람이 한 차례 일어나고.
이서휘가 도망가던 중년 사내의 앞을 막아섰다.
“내려 놔라.”
중년 사내는 젊은 청년이 막아서자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왜 네 놈이 따라왔지? 목군자는… 어디 있고?”
이서휘가 침착하게 화지련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괜찮느냐?”
화지련이 대꾸했다.
“네.”
이서휘가 불청객을 향해 말했다.
“목군자 선배님에게 원한이 있소? 그런데 왜 내 부하를 납치한 것이오. 원한은 당사자에게 푸시오. 애꿎은….”
“네 부하? 놀고 있네. 자신 있으면 잡아보든가.”
중년 사내가 조소를 날리더니 화지련을 안은 채로 깜쪽 같이 사라졌다. 경공의 수준이 남달랐던 것.
하지만 십여 걸음이나 걸었을까.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한 이서휘가 중년 사내의 앞을 또 다시 가로막았다.
이번엔 이서휘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은 상태.
이서휘가 싸늘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죽고 싶소?”
“허… 이 놈 말투 보게나….”
중년 사내가 화지련을 옆쪽에 내려놓더니 보기 드문 도 한 자루를 등 뒤에서 뽑았다. 뽑자마자 쇠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칼등에 쇠고리가 여러 개 달려 있는 환도(環刀)였다.
이서휘는 불청객이 화지련을 내려놓자 내심 마음이 놓였다. 이서휘가 중년 사내를 살펴보다가 화지련에게 말했다.
“다친 곳은 없느냐?”
“없어요.”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불청객을 바라봤다.
“그래도 다치게 하진 않았으니 목숨은 살려주마.”
“하하하, 웃기지 마라.”
중년 사내가 대뜸 환도를 내리치자 환도 끝에 도풍(刀風)이 뻗어 나왔다.
이서휘는 발검으로 환도를 쳐내자마자 검사를 휘감아 중년 사내의 눈앞에서 빛 무리를 터트리더니, 땅을 굴러서 왼팔로 화지련을 안은 다음에 반대편으로 순식간에 자리를 잡았다.
이서휘의 엄청난 출수에 중년 사내가 잠시 눈을 껌벅이면서 환도를 양 손으로 부여잡았다.
“허… 제법이로구나. 목군자에게 제자가 더 있었나?”
하지만 이서휘는 대꾸를 하지 않고 잠시 왼팔에 안긴 화지련을 내려다봤다.
화지련은 말없이 이서휘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그래? 너 답지 않게.”
한데, 화지련이 대뜸 이서휘의 말에 대꾸했다.
“군림맹 떠나실 거죠?”
“뭐?”
이서휘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뒤편에서 등장한 목군자가 내공을 실어 외쳤다.
“조심해라… 서휘야. 저 자는 망객(忘客)이라는 고수다.”
그 말에 이서휘가 중년 사내를 바라봤다.
목군자가 바람을 일으키면서 다가오더니 이서휘 옆에 섰다. 이서휘가 화지련을 목군자에게 넘기면서 말했다.
“작은 의부님… 지련이 좀 부탁드립니다. 혈도가….”
“알았다.”
목군자가 화지련을 받자마자 혈도를 살피고… 이서휘가 망객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요?”
이서휘의 말에 대꾸하는 것은 오히려 한숨을 내쉬는 목군자였다.
“망객… 저 자는 무슨 일이든 한다. 기억을 찾기 위해서라나….”
목군자의 말에 망객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목군자가 말을 이었다.
“어쩐지 나를 가끔 찾아와서는 이렇게 예기치 못한 행동을 하곤 한다. 어떻게 해서는 기억을 다시 찾으려고 그러나 본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러니 내가 의림이 곁에 항상 있었던 것이고.”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망객을 바라봤다.
“기억을 잃으셨다… 일전에 들은 것 같군. 한데, 이런다고 기억이 찾아지겠소?”
“흐흥… 네 놈이 내 고통을 알겠느냐? 내 기억은 분명 저기 목군자와 관계가 있다.”
목군자는 대꾸를 않고 한숨만 쉬다가 화지련의 혈도를 풀면서 말했다.
“괜찮으냐?”
“네.”
이서휘가 망객에게 말했다.
“당신… 내 부하 다치게 했으면 내 손에 죽었어. 하지만 괜찮은 것을 보니 이쯤 하지. 갈 길 가시오. 그놈의 기억… 얼른 찾으시길 바라고.”
이서휘는 말을 마치고 일부러 살기를 죽인 채로 망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망객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망객이 비릿하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싸움 말이다. 내 기억은 싸우다가 잃은 것이거든…”
“그래서 나와 붙자고? 기억을 찾기 전에 죽으면 무슨 소용이겠소?”
“보기 드물게 시건방진 놈이로구나. 문답무용이로다….”
망객이 환도를 내밀면서 다가왔다.
망객의 환도가 찌링… 찌링… 하는 소리를 시끄럽게 울려대자, 환도를 튕겨내던 이서휘가 칠흑검을 하단에서 상당으로 올려쳤다.
촤르르륵 소리와 함께 칼등에 있던 쇠고리들이 쓰윽 소리와 함께 허망하게 갈라졌다.
이어서 환도와 칠흑검이 맞붙었다.
챙챙챙! 까앙!
망객은 목군자가 상대했던 자들 중에서 손꼽을 수 있는 고수였다. 그간 기억을 찾기 위해 수많은 결투를 했던 망객이나… 대부분 자신의 손에 고수들이 패배해 죽었다.
기억은 여전히 사라진 상황….
수련 끝에 다시 목군자를 찾았다가 미모의 여인이 걸어 나오자 충동적으로 납치를 했던 것. 여인에게 무슨 행동을 하려는 심산보다는 목군자의 마음을 뒤흔든 다음에 적당한 곳에서 한판 겨룰 셈이었다.
한데 엄청난 속도로 쫓아온 이서휘와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서휘가 목군자에게 패배한 상대에게 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서휘가 망객을 몰아붙이면서 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싸우다가 기억을 잃으셨다고?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한 번 해보시겠소?”
망객이 한 손으로 휘두르던 환도를 손바닥에서 돌리더니 어느새 양손으로 붙잡아 칠흑검을 강맹하게 쳐내면서 말을 내뱉었다.
“뭔가? 좋은 방법이…”
이서휘가 매우 단순한 초식… 그저 속도와 힘만 더한 내려치기로 환도를 찍어대며 말했다.
“죽기 직전까지… 쳐 맞으면…!”
깡! 깡! 깡!
“생각이… 날 수도! 있을 것이오!”
이서휘의 검에 실린 무게가 점점 묵직해지자, 망객의 환도가 도기에 휩싸였다가 칠흑검과 부딪쳐서 굉음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앙!
하지만 밀려나는 것은 당연하게도 망객.
이서휘는 망객의 손아귀가 찢어질 때까지 단순한 공격으로 칠흑검을 내려쳤다.
망객이 일부로 같은 방향으로 막을 수밖에 없게끔 의도한 것이다.
망객이 출수를 변환하자….
챙챙챙챙챙! 소리와 함께 환도를 튕겨내던 이서휘가 또 다시 내공을 주입해 같은 방향으로 칠흑검을 그었다.
까앙!
망객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손아귀가 찢어졌던 것.
이서휘가 말을 쥐어짜듯 내뱉었다.
“기억을 잃을 거면 곱게 살아가든지… 어디서….”
이서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자연스럽게 내뱉던 말이 ‘감히 내 부하를…’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쩐지 화지련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아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가 한숨을 내뱉고 칠흑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손아귀가 찢어진 채로 이서휘의 검을 사십여 초나 막아내던 망객이 결국에 환도를 놓쳤다.
이서휘는 좌장을 내밀다가, 빠르게 갈고리 모양으로 바꾼 후에 망객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망객의 발이 뻗어 나오다가 멈췄다. 이서휘가 손을 비틀어서 바닥에 꿇렸던 것.
이서휘가 납검한 다음에 말을 이었다.
“기억을 찾는 게 중요하냐… 죽지 않고 사는 게 중요하냐? 이제 가르쳐주마.”
이서휘의 손이 서서히 망객의 목을 조르기 시작하자, 망객의 얼굴이 빨갛게 익어갔다.
목군자는 이서휘를 말리려다가 잠자코 기다려 봤다. 아무리 이서휘라도 저런 상대는 죽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생각이 있겠지.’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기억이 중요한가… 아니면 살아가는 게 중요한가?”
대답을 듣기 위해 이서휘가 손의 힘을 풀고 다시 물었다.
“대답해라. 쳐 죽이기 전에….”
이서휘의 눈과 망객의 눈이 부딪쳤다.
망객은 딴 소리를 늘어놓았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알 거 없다.”
이글이글 타오르던 눈빛이 어느새 가라앉은 망객이 이서휘의 예상과 다른 대답을 내놨다.
“이렇게 살아가는 건 의미가 없다. 기억을 찾는 게 더 중요하지. 난 하루를 살아도, 기억을 되찾은 하루가 더 중요하다.”
이렇게 말하니 이서휘의 마음이 더 황당했다.
“하루라도 기억을 찾아서 살고 싶다고?”
“그렇다. 어느 시점부터 내 기억은 어두컴컴한 밤처럼… 됐다. 죽이려면 죽여라.”
잠시 망객을 노려보던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면서 망객을 밀어냈다.
“갈 길 가시오. 당신 같은….”
이서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망객의 눈빛을 보고 말을 삼켰다. 망객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화지련이 입을 열었다.
“그… 기억 잃는 거 부럽네요. 어떻게 하면 되죠?”
“뭐?”
이서휘가 놀라서 화지련을 바라보자, 화지련이 이서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대주님, 이제 군림맹 떠나실 생각이잖아요. 저도 이제 군림맹에서 있었던 기억이 필요 없을 것 같아서요.”
“지련아….”
이서휘가 부르자, 그 말에 튕겨나듯이 화지련이 홀로 걸었다.
이서휘가 호통을 쳤다.
“지련아!”
그러자 화지련이 등을 돌리더니 이서휘를 향해 포권을 하면서 말했다.
“맹으로 먼저 복귀하겠습니다. 대주님….”
이서휘는 당황스러웠다.
군림맹을 떠나겠다는 생각은 이서휘 자신도 어렴풋이 했을 뿐이다. 이제 할 일을 마쳤으니 군림맹은 그대로 둘 작정이었다. 하지만 결코 수하들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한데 화지련이 대체 어찌 알아차렸을까.
화지련이 걸어가자, 이번에는 목군자가 화지련을 불러 세웠다.
“지련아, 솔직하지 못하구나.”
화지련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솔직하지 못하다니요?”
“서휘에게 마음이 있으면 그리 말을 해야지.”
삽시간에 망객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이 되었다. 한데, 이 심각한 분위기에서 무언가를 느끼는 듯 한쪽으로 멀리 물러난 망객은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서휘는 아무 말을 못하는데 목군자가 화지련에게 말을 이어 나갔다.
“서휘만 괜찮다면 네게 기회를 주마.”
“기회라니요?”
“의림이와 서휘는 이미 서로 마음을 확인한 사이. 네가 당장 끼어들 틈이 없을 것이야. 하나, 네 마음이 계속 서휘에게 있다면 삼 년 후에 다시 의림이와 비무를 하여라.”
“하면요?”
“네가 이기면 둘째 부인이 되는 것이지.”
“제가요? 왜 그래야 해요. 싫어요.”
화지련이 거부해도, 목군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 여기는지 말을 이어나갔다.
“싫으면 관두어라. 아마 상황이 반대였다면… 의림이는 삼 년이 아니라 십 년도 기다렸을 터. 나도 강요할 마음은 없다. 그 삼 년 안에 좋은 남자를 만나는 게 좋을 게야.”
이서휘 대신에 목군자가 실로 현실적인 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화지련은 묵묵히 길을 걸었다.
그러자 이서휘가 어둠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도이, 도삼.”
“네.”
도이와 도삼이 농담 한 마디 건네지 않은 채로 모습을 드러내자, 이서휘가 화지련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같이 복귀해.”
“예, 먼저 가겠습니다.”
도삼이 대꾸하자, 잠시 이서휘를 바라보던 도이가 반말로 말했다.
“너무 걱정 말고. 잘 데려다 줄 테니… 부럽네. 인기 많아서. 우리 이 대주…”
어쩐지 도이의 반말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어울려 보였다. 도이와 도삼이 조용히 화지련을 뒤따라 사라졌다.
그러자 이서휘를 지켜보고 있던 망객이 코웃음을 쳤다.
“허… 대단하군. 옥의림과 저기… 저 아름다운 소저까지 부인으로 맞을 셈인가?”
이서휘가 망객을 보며 말했다.
“아직 안 가셨나?”
망객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아까 말투가 이해 가는군. 내 부하 다치게 했으면 내 손에 죽었어라니…. 하하하하.”
“휴우… 운 좋은 줄 아시오. 가시죠. 작은 의부님.”
목군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망객이 비웃는 말투로 이서휘를 다시 멈춰 세웠다.
“흐흐흐… 화지련이나 따라갈까. 허접한 두 놈들 쯤이야.”
이서휘가 대번에 신형을 돌리더니 내공을 실지 않은 주먹으로 망객의 얼굴을 내려쳤다.
빡! 소리와 함께 망객이 뒤로 나뒹굴었다. 어쩐지 망객도 피하지 않은 채로 주먹을 얻어맞은 상황.
이서휘가 다가가서 망객의 멱살을 잡았다.
“죽여주길 바라느냐?”
망객이 웃음을 터트렸다.
“네 놈… 정이 깊구나. 옥의림에겐 미안하고… 복잡하지? 킬킬킬…”
퍽 소리와 함께 다시 이서휘의 주먹이 떨어지자 망객이 웃음을 길게 터트렸다.
“더 쳐라. 더… 더…. 말했지 않느냐. 난 죽는 게 낫다고.”
이서휘가 대번에 칠흑검에 손을 뻗자, 목군자가 소리쳤다.
“서휘야!”
이서휘의 손이 우뚝 멈췄다. 목군자의 말이 이어졌다.
“가자!”
“이 놈이 쫓아갈 수도 있습니다.”
“말 뿐이다. 그렇다고 죽일 수 있겠느냐? 걱정이 되면 네가 쫓아가는 게 옳다.”
목군자의 말에 이서휘가 손을 뻗어 타다닥 소리와 함께 망객의 혈도를 짚은 다음에 멱살을 잡아서 길 한 쪽에 내려놓았다.
망객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흐흥… 젊은 놈치곤 제법이나, 한 시진이면 풀겠군.”
이서휘가 짚은 혈도를 한 시진에 풀 리가 없었다. 망객은 되는 대로 지껄인 셈이었으나 이서휘의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이서휘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내가 보기엔 반나절은 더 누워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째서?”
망객이 되묻는 순간에 내공을 주입한 이서휘의 우장이 망객의 얼굴에 떨어졌다.
퍼억…!
먼저 걸어가던 목군자가 이서휘의 출수에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철저한 녀석.’
히죽 웃고 있던 망객이 웃는 표정 그대로 대번에 기절했다. 다시 깨어나는 순간… 기억이라도 되찾길 바라야 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망객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 될 터.
이서휘와 목군자가 나란히 걸었다.
이서휘가 대뜸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작은 의부님.”
“죄송하긴… 사실 지난번에 화지련이 왔을 때부터 눈치를 챘다. 나도 의림이도….”
“음….”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어찌나 떼를 쓰던지… 결국에 그래서 내가 네 놈 구하러 장안에 간 것이 아니더냐.”
“아….”
목군자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의림이도 눈치를 챘던 것이고….”
이서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목군자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서휘가 일대 영웅이 되었으니 부인을 두 명이나 두는 것이야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할 처지가 아니다만…. 하필 내 제자와….”
“죄송합니다. 화지련이 갑자기… 이렇게 나올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평소에 잘 해준 것도 없고….”
“잘해 준 게 없다고? 거짓말 하지 마라. 홍화검은 무엇이냐?”
이서휘가 쩔쩔맬 수밖에 없는 상황.
“그것은 제가 부하들을 다 챙겨줄 때 함께 준 것이라….”
목군자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검도 주고… 무공도 가르쳐 주고… 더 이상 어찌 더 잘해준다는 말이더냐? 더구나 너는 혼인도 하지 않은 몸. 이게 화지련의 탓인지 네 탓인지 잘 생각해보아라.”
“하아….”
이서휘는 무언가 억울했다. 그렇다고 목군자에게 전생의 일을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일.
이서휘가 한숨을 쉬자 목군자가 말을 이었다.
“삼 년이면 충분할 게다. 의림이는 내 제자지만 존경하던 군자검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내가 딸처럼 키웠다. 화지련이 삼 년 후에도 마음이 변치 않으면 기회는 내가 주마. 그러면 넌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유일한 남자가 되겠지. 그것은 복이 아니라…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세상에 망객 같은 자가 한둘일 것 같으냐? 더군다나 옥의림과 화지련의 미모는 실로 보기 드문 수준이다. 네 놈만 고생하는 것이지.”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자, 목군자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돌 볼 자신이 없으면 지금 포기해라. 내 제자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리게 했다간 내 손으로 너를 때려죽일 것이야.”
쳐 죽인다고, 죽을 이서휘도 아니었으나 작은 의부의 서슬 퍼런 호통에 이서휘가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흥… 무공이 높아졌다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구나.”
“아닙니다. 작은 의부님… 제가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하지만 여전히 목군자는 단단히 주의를 줬다.
“네 놈이 아무리 강해졌다 한들… 형님과 내가 힘을 합치면 대응할 수 있겠느냐? 형님과 내가 평생 무엇으로 고통 받고 살았는지는 네 녀석이 잘 알고 있을 터.”
목군자가 검선과 합세하여 혼을 내준다고 하자 이서휘는 그제야 등줄기에 땀이 흘러 내렸다.
“제가 어찌 의림이를 잘 보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래. 믿어야지. 의림이는 이제 너무 컸구나. 내가 데리고 있기도 불편할 지경이야. 의림이는 올해 내로 데려가거라. 나는 형님이나 모시고 조용히 살 생각이다.”
뭐가 이렇게 일사천리란 말인가.
이서휘가 조용히 대꾸했다.
“그것은 안 될 말씀이십니다. 의부님도 작은 의부님도 제가 모시겠습니다. 조용한 곳에 함께 계셔도 불편하지 않을 큰 장원을 하나 짓겠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평생 모시겠습니다.”
이서휘의 뜻밖의 말에 이번에는 목군자가 말이 없었다.
목군자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되물었다.
“작은 의부님? 들으셨습니까?”
잠시 아무 말이 없던 목군자가 잠시 후에 덤덤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러면 좀 조용한 곳이면 좋겠구나. 산이 있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겠고…. 형님도 나도 산을 좋아해서 말이지.”
이서휘는 갑작스러운 목군자의 태세 전환에 웃음을 겨우 참은 채로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그런 곳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목군자와 이서휘가 잠시 말없이 길을 걸었다.
말없이 걷던 목군자가 불쑥 코웃음을 치더니 이서휘를 놀렸다.
“부러운 놈.”
“네?”
“아니다. 어쨌든 삼 년은 기다려보자꾸나.”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