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41화 (41/43)

<4장. 이서휘의 검>

시끌벅적했던 장안도 밤이 되면 고요했다.

사패 중 둘이 합류하고 사마초가 도착했다. 이서휘는 단우혁, 백류혼, 사마초를 검선에게 인사시키고 잠시 네 사람이 늦은 밤까지 재회의 기쁨을 나누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 했다.

늦은 밤, 홀로 남은 이서휘는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 백도맹 분타의 담벼락 위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쩌면 선발대와 함께 총본산으로 가는 게 옳지 않았을까.’

이서휘의 시선이 장안의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밝아 하늘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대낮부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이서휘는 불쑥 구성검을 뽑아 검신을 드러내 보였다.

가볍고 날카롭다.

무척 오래된 검이다.

그러나 아직도 백야검처럼 손에 맞는 기분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남의 검을 사용하는 느낌이랄까.

이서휘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담벼락 위에 검선이 내려섰다. 이서휘가 일어서려 하자, 터벅터벅 걸어오던 검선이 말했다.

“같이 앉자.”

“네, 의부님.”

검선이 이서휘 옆에 앉아서 달을 올려다봤다.

“그 놈 참 밝구나, 오늘.”

“그렇습니다.”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이야.”

검선도 이서휘와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검선이 말을 이었다.

“별 일 없을 게다. 내가 보고 온 바로는 세 곳의 맹이 합치면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는 규모였다.”

“네.”

검선이 이서휘를 힐끗 돌아보면서 말했다.

“검왕의 손자와 친구인 줄은 몰랐구나.”

“백류혼…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일전에 한 번 제가 혼을 내줬습니다. 뭐 친구까지는 아니고 단우혁이나 사마초도 다 제 아우들입니다. 이긴 사람이 형이죠.”

“하하하하.”

뜬금없는 이서휘의 자기자랑에 검선이 웃음을 터트리고 이서휘도 함께 웃었다.

이서휘가 얇은 무복을 하나 입고 나온 검선에게 말했다.

“의부님, 춥지 않으십니까?”

“춥기는…. 괜찮다.”

“허리는 좀 어떠십니까?”

이서휘의 말에 검선의 왼손이 자연스럽게 허리로 갔다. 등에 있어야 할 칠흑검은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그제야 이서휘는 어떤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매번 그렇게 그 무거운 중검(重劍)을 등에 매고 다니셨습니까?”

“중검? 아, 이 칠흑검 말이냐? 제법 무겁지.”

그 순간에 자연스럽게 검선의 시선이 이서휘가 들고 있는 구성검으로 향했다.

대체 이것은 무슨 분위기일까.

검선은 구성검을 바라보고 있고.

이서휘는 칠흑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마음도 모른 채로 서로의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구성검을 내밀면서 말했다.

“보시겠습니까? 검성 어르신이 남기신 검입니다.”

“아 그러냐?”

검선이 칠흑검을 옆에 내려놓고 구성검을 받았다. 대번에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가볍구나.”

“혹시 기억나십니까?”

검선이 구성검을 쥐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가 사용하던 장검이다. 손에 쥐는 순간 석실에서 겪었던 끔찍한 수련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고통의 기억마저 희미해질 정도로 오래된 일이다.

검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목검으로 시작했어.”

“네?”

그 순간에 이서휘가 어찌 목군자 진금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검선의 말이 이어졌다.

“손재주가 좋으셨지. 여러 개를 깎아 오셔서 각자 하나씩 쥐고 비무를 했지. 무척 아프게 때리셨다. 진검은 더 아플 것이라면서…. 그때, 초식 연습은 진검으로 했었는데 어쩌면 그게 이거 일수도 있겠구나.”

검선이 맑은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구성검에게 말했다.

“오랜만이로구나. 반갑다.”

검선이 구성검을 달빛에 비춰가며 하염없이 바라보자, 이서휘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칠흑검 좀 보여주십시오.”

검선이 칠흑검을 넘기자 이서휘의 심정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검선이 구성검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하고 싶었다.

오랜만이라고…. 반갑다고….

전생에선 검선이 이서휘에게 넘겼던 검이다.

죽는 순간까지 붙잡으려 애썼던 검이다.

하지만 과연 그 누가 이서휘의 심정을 이해하겠는가?

칠흑색에 무겁다는 것만 알았다.

촉감으로만 느꼈던 검이다.

지금은 이서휘의 두 눈에 칠흑검이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오른손으로 검병을 잡고, 왼손으로 검신을 쓰다듬었다.

두 눈을 감고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할 수 있었던 칠흑검이 이서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 차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두 검객이 달빛 아래서 말없이 각자의 사연이 담긴 검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검선이 몇 번 뜻 모를 웃음을 터트리고.

이서휘도 때때로 웃음을 흘렸다.

문득 시선을 마주친 이서휘와 검선….

검선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선제공격을 날렸다.

“네 의부가 허리가 안 좋아서 말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중검을 오랫동안 등에 매고 다녀서 그런 것 같구나.”

이서휘가 진중한 표정으로 반격 아닌 반격에 나섰다.

“의부님, 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어쩐지 허리가 자꾸 아프시다고 할 때부터 저도 이 중검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무거운 검이 아닙니까?”

검선은 이서휘가 뜻 밖에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꾸하자 짐짓 놀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 이 칠흑검은….”

이서휘가 재빨리 대꾸했다.

“제가 쓰겠습니다. 의부님이 구성검을 사용하십시오. 이 칠흑검은 계속 의부님의 허리를 악화시킬 게 뻔합니다. 반면에 구성검은 의부님이 어렸을 때 초식을 연습할 때 잡았던 검인 데다가 검성 어르신이 남기신 검이니… 그게 순리입니다.”

검선이 입 모양을 둥그렇게 하더니 “호오….” 소리를 내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꾸자꾸나.”

“알겠습니다.”

이서휘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검객이 달빛 아래서 엿 바꿔먹듯이 순식간에 장검을 교환하고 있었다.

칠흑검을 받아든 이서휘의 표정과….

구성검을 받아든 검선의 표정은….

마치 진검이 처음 생긴 검객들이 기뻐하는 것처럼 해맑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양보를 한 것은 이서휘다.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휘에게 말했다.

“고맙다. 서휘야….”

이서휘가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의부님, 저도 이 칠흑검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다행이로구나. 나도 여러 검을 사용해봤지만 칠흑검의 절삭력(切削力)과 예기에 비할 수 있는 명검은 아직 찾지 못했다. 더군다나 육중한 무게가 뒷받침을 하니, 자유자재로 다루기만 하면 맞서 싸울 수 있는 자가 무림에서 드물 것이야. 더군다나 네 무공은 이미 말할 필요가 없는 경지가 아니더냐?”

“실로 옳은 말씀이십니다. 저야말로 의부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검선과 이서휘가 달밤 아래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날 밤, 두 순진한 검객들은 자신의 장검을 품에 안고 단잠에 빠져 들 수 있었다.

☆ ☆ ☆

다음날 일어난 이서휘는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는 청협과 백검을 돌아보고 일찌감치 장터로 나가 무언가를 잔뜩 구입했다.

검선의 장포와 자신이 입을 옷이었다.

한데, 이서휘가 입을 옷은 전신이 검은색이었다. 이미 칠흑검제처럼 싸울 필요는 없으나 결전을 앞에 두고 자신이 즐겨 입던 무복으로 갈아입은 것이었다.

이서휘는 그렇게 살수처럼 갈아입고 나타났다.

백도맹 분타에 온갖 검은색 무복으로 갈아입은 이서휘가 등장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였다.

“뭐요?”

단우혁과 백류혼도 이서휘의 행동에 웃음을 지었다.

“살수 나셨네.”

“어라? 검도 바뀌었네. 그건 어디서 난 게냐?”

“의부님과 바꿨다.”

“바꿨다고?”

백류혼과 단우혁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림인이 병기를 바꾸는 게 가능한 일인가? 이서휘는 사정을 설명할 수 없어서 그저 웃고 있었다.

☆ ☆ ☆

위극신 일행은 여산에서 출발해 화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범하게 관도(官道)를 이용했다.

어디까지나 속도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총본산의 결과가 어찌 되든지 간에 화산파를 빠르게 무너뜨리고 백도맹의 거점을 칠 생각이었다.

전원 말에 올라타서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 인원은 대략 삼십 명 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이들은 마교에 남아 있던 최정예 고수들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선두에서 달려 나가던 위극신이 오른손을 들어 이동을 중지시켰다.

뒤편에서 위극명이 달려오면서 외쳤다.

“형님, 무슨 일입니까?”

정예고수들이 늘어서서 전방을 주시했다. 잠시 후 지평선에서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거뭇하게 올라오는 정체 모를 세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일백? 아니군. 삼백… 사백…?”

대규모 인원이 몰려오고 있었다.

위극신이 비릿하게 웃으면서 선두에서 달려오는 자를 향해 말했다.

“검마로구나….”

저 멀리서 검마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위극신아…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는 것이냐?”

위극신의 일행은 겨우 사십 명. 몰려오는 자들은 사백 여명. 하지만 위극신을 비롯한 정예 고수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한빙마제가 말했다.

“어쩔 텐가? 다 몰살시키는 게 낫겠군. 서역에서 병력을 데려온 모양이야.”

위극신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잠시만 이야기를 해보겠소.”

어느새 다가온 검마의 세력이 먼지를 일으키면서 위극신 일행을 포위했다.

위극신이 검마에게 말했다.

“뭐하는 게냐?”

위극신의 말에 검마가 웃음을 터트렸다.

“네 놈이야 말로 여기서 뭐하는 것이냐? 총본산을 버려두고.”

“말했지 않느냐…. 관심 없다고.”

검마는 사백 여명에게 둘러싸인 위극신 일행이 저마다 비웃는 표정을 하고 있자 고개를 갸웃했다.

“뭐 그리 자신감이 넘치는 게냐? 위극신아… 이 자리서 한 번 끝장을 내자꾸나.”

위극신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 물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지 못했을 터인데….”

위극신의 말에 검마가 히죽 웃었다.

“네 놈들을 쳐 죽이고 장안으로 가야지.”

“장안은 어째서?”

서로를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은 두 사람인데… 어쩐지 이곳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위극신의 일행들이 사백 명에게 둘러싸인 채로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검마가 위극신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소식이 늦구나. 화산으로 가려다 회군했다. 장안에 재미난 놈들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서 말이지.”

검마의 말에 위극신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누가 있느냐?”

검마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검선과 이서휘가 있다는구나.”

검마의 말에 위극신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위극신이 자신의 일행을 돌아보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었다.

위극신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같이 가자꾸나. 장안을 피바다로 만들러…. 화산보다 검선이 더 중요하구나.”

검마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 네 놈이랑 가야 하지?”

검마의 말에 위극신이 스산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네 놈들 다 죽이기도 귀찮구나. 검마, 너는 어차피 훗날 나와 승부를 내야 할 터. 그 전에 함께 장안을 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놀고 있구나.”

검마가 몇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이번에는 검마 일행이 위극신의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먼지를 일제히 바라봤다. 심지어 자신들이 이동할 때보다 땅의 울림이 더욱 심했다.

위극신이 데려온 정예고수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검마 일행의 표정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표정들이 가관이로구나.”

“이 놈들부터 죽이고 장안을 치는 게 어떻겠소?”

순식간에 몰려온 위극신의 세력과 마가의 병력이 위극신을 가둬놓고 있는 검마의 세력을 방진으로 가둬버렸다.

위극신이 씨익 웃으면서 검마에게 말했다.

“검마야… 이제 좀 장안으로 같이 갈 마음이 드느냐? 사백이라니… 제법 모았구나.”

검마가 새카맣게 모인 위극신의 세력을 둘러보며 킬킬대고 웃었다.

“하여간 미친 새끼…. 총본산은 불바다가 됐겠구나.”

위극신이 검마의 말을 무시하고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장안으로 간다. 검선부터 찾아서 죽여라….”

위극신이 검마를 무시하고 병력을 돌려서 장안으로 향하자, 검마의 좌우사자들이 검마에게 다가왔다.

“련주님, 어쩌시겠습니까?”

검마가 그답지 않게 허탈한 표정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한 위극신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보자. 장안으로. 갈 때까지 가 봐야지. 위극신, 이서휘, 검선까지 있다 하지 않느냐?”

검마가 그답지 않게 이를 갈며 전방을 주시했다.

“끝장을 내자꾸나.”

장안 일대에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서휘와 검선이 구성검과 칠흑검을 교환한 다음날 저녁, 검선은 빗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게 일찍 잠이 든 상태였다.

해시(亥時) 무렵이었다.

잠이 든 검선은 어린아이처럼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검선에겐 연일 피곤한 나날이었다.

맹서웅과 비무를 하고, 이서휘와 함께 속속 전해지는 급보를 살폈고, 수십 년 동안 만났던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짧은 시간에 만났다.

무척 피곤한 나날이었다.

어제도 이서휘와 함께 새벽녘에 겨우 잠들었던지라 오늘은 일찍 자리에 누워 모처럼 단잠을 자고 있었다.

검선의 입에서 허연 침 한 방울이 뚝 떨어지는 찰나에 옆에 둔 구성검에서 불현듯 검명(劍鳴)이 흘러나왔다.

기이한 일이다.

검이 스스로 울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이서휘에게 넘겨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 느닷없이 검명이 운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검선이 느닷없는 검명에 잠이 깨서 중얼거렸다.

“왜 그러느냐.”

대꾸하는 자 없으니, 구성검에게 건넨 말일 것이다.

이서휘가 구성검을 지니고 다녔을 때도 발생했던 일이다. 그때, 검선의 물음에 대꾸하듯이 구성검에서 다시 검명이 진하게 흘러나왔다.

그 순간, 검선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검선이 일어나서 구성검을 쥐고 바깥으로 나가자, 대청 너머로 보이는 백도맹 분타 전체에 대낮처럼 불이 밝혀 있었다.

어쩐지 아직 검선 홀로 잠이 들었던 것처럼 생기가 흘러 넘쳤다.

그 불꽃에서 느껴지는 것은 전의(戰意).

검선이 아무도 없는 대청에 잠시 서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이서휘가 전신에 흑의(黑衣)를 걸치고 등장했다.

한데, 이서휘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검선이 말했다.

“서휘야.”

“의부님.”

“무슨 일이냐?”

“서안에서 급보가 도착했는데 장안으로 밀려오는 병력이 있다고 합니다.”

“마교인가? 구성검이 울더구나.”

“아, 그렇습니까? 지난 날 구성검을 쥐고 검마와 겨룰 때 저도 경험한 바 있습니다. 검마도 오는 모양입니다.”

“신기하구나. 그 녀석이 들고 있던 마검 때문인가? 한데, 그건 무엇이냐?”

검선의 말에 이서휘가 손에 들고 있던 잿빛 장포를 내밀었다.

“흑도맹주가 의부님 옷을 찢어놔서 하나 준비했습니다. 깜박하고 이제 드립니다.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검선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입어 보자.”

이서휘가 다가가 검선이 장포를 입는 것을 도왔다. 검선이 장포를 걸치면서 말했다.

“재질이 훨씬 좋구나. 오늘은 찢겨 나가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이야.”

검선의 농담에 이서휘가 미소를 지었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나저나 참 공교롭구나. 네 예상이 맞았어. 병력이 어느 정도나 될꼬?”

“모르겠습니다. 아마 저희보단 많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이서휘와 검선이 눈을 마주쳤다. 검선이 이서휘의 복장을 새삼 바라보며 말했다.

“칠흑검과 잘 어울리는 복장이로구나. 다른 자들은?”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나가자.”

검선이 구성검을 쥐고 이서휘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이서휘가 단우혁과 백류혼에게 미리 말을 해놓아서 그런지 이미 청협문과 백검문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해놓은 상태.

검선과 이서휘가 등장하자 백도맹 분타에 머무르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검선이 잔뜩 몰려든 후배들을 향해 어처구니없는 어조로 말했다.

“적들이 온다며?”

사람들이 괴이한 검선의 말투에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서 웃음을 터트렸다.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목표가 어쩌면 나를 잡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어느새 검선의 말에 좌중이 고요해졌다.

“하지만 내 걱정은 말고 너희나 보중해라. 수가 얼마나 많든 간에….”

검선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백도는 약하지 않으니… 여기 이서휘와 내가 혼쭐을 내줄 것이다.”

검선의 평범한 어조에 다들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렇다. 수가 부족해도 이곳에 검선이 있었다. 여유로운 검선의 말투와 표정에 백도맹 분타에 흐르던 긴장감이 어느새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부상을 당했던 흑도맹주 맹서웅이 장검 한 자루를 쥐고 모습을 드러냈다.

“마교가 온다고? 하필 이런 때에…. 노인장, 지원을 부를 곳은 없소?”

검선이 무어라 대꾸하려는 찰나 장안 외곽에서 신호탄이 터졌다. 퍼버벙 소리와 함께 상공에 섬광이 발생했다.

올려다 보던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휘에게 말했다.

“서휘야.”

“네, 의부님.”

“조금 나가서 마중을 하자꾸나.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다칠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먼저 가거라. 곧 따라가마.”

이서휘가 사패 둘과 흑도맹주, 백도맹에서 후발대로 출발하기 위해 남아 있던 무당은검 유은결과 염라대주 한서령 등을 돌아봤다. 이서휘가 후발대를 이끄는 특작대주였기 때문에 편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청협과 백검은 나와 함께 갑시다.”

단우혁과 백류혼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무당은검께서는 무당 제자들과 함께 백도맹 분타에 있다가 필요한 곳으로 지원을 나가주시고, 한서령 대주는 흑도맹주님을 부탁합니다. 적의 주력은 여기 있는 청협과 백검이 맞이하겠습니다.”

“알겠소.”

유은결이 짤막하게 대꾸하고, 한서령이 서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휘가 일동을 바라보며 말했다.

“갑시다.”

이서휘가 선두에서 서서 장안의 외곽으로 향하자, 뒤편에서 검선의 말이 들렸다.

“다들…. 무리할 필요 없다. 총본산을 친 병력이 회군하면 이 정마대전은 백도의 승리로 끝날 것이야.”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떠나자 검선이 홀로 생각에 잠겼다.

‘나도… 오늘 피 좀 묻혀야겠구나.’

검선이 이서휘가 넘겨준 구성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양 손을 허리에 대더니 으라차차 소리와 함께 허리를 폈다. 검선의 허리에서 우드드득 소리가 심각하게 흘러나오자 분타에 남아 있던 자들의 안색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검선이 그 표정들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느니라.”

☆ ☆ ☆

장안으로 몰려드는 마교의 세력에겐 독기가 서려 있었다. 이들은 총본산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뻔히 알고 있었다. 병력이 많지 않으니 분전을 하다가 초토화될 게 빤했다.

하지만 총본산을 내주고 현재 백도세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검선을 쓰러뜨리면… 그나마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 터.

마교의 고수들이 이런 생각에 잠겼을 때….

병력을 지휘하는 위극신도 검선과 이서휘, 검마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셋 중 한 명만 제대로 흡수해도 일월신공의 성취가 한 단계 오를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또한, 검선만 확실히 제거하는 데 성공하면 시기가 얼마나 걸리든 간에 재기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위극신이 어둠에 잠겨 있는 장안 일대에서 유일하게 불이 훤하게 밝혀진 백도맹 분타 주변을 바라보며 말했다.

“흩어져서 검선부터 찾아내라. 그리고 위극단.”

“네, 형님.”

“넌 주력과 부딪치지 말고 수하들 데리고 백도맹 분타 주변으로 이동해 불을 질러라.”

“알겠습니다.”

☆ ☆ ☆

이서휘에겐 완벽한 밤이다.

이미, 이서휘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었다.

오료의 경지.

칠흑검.

즐겨 입던 흑의.

걱정이 되는 것은 오히려 검선이 아니라 동료들이었다. 사패들에겐 너무 일찍 닥친 시련이다.

그리고 청협과 백검의 희생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희생은 어쩔 수 없다.

이서휘 자신이 아무리 대단해졌다고 한들… 희생자를 막을 순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서휘는 단우혁, 백류혼과 나란히 서 있다가, 믿는 종교도 없건만 합장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잠시 이서휘가 눈을 감고 있자, 옆에 있던 단우혁과 백류혼이 이서휘를 힐끗 바라봤다.

두 사람도 오늘따라 농담 한마디를 건네지 않았다.

잠시 후 눈을 뜬 이서휘가 말했다.

“우혁아, 류혼아.”

“말해.”

“너희는 되도록 청협과 백검이 마교의 고수들에게 피해를 입지 않게 살펴봐다오.”

“셋이 함께 하는 거 아니었나?”

“나는 따로 움직이마.”

“혼자 무얼 하려고? 수가 저리 많은데…. 수성하듯이 막는 게 낫지 않을까?”

이서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저놈들 속으로 침투해 있겠다.”

“미쳤구만.”

단우혁이 고개를 젓자, 이서휘가 빙긋 웃었다.

“걱정마라. 너희와 만났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으니.”

“이런 순간까지 잘난 척이냐?”

백류혼도 코웃음을 치면서 대꾸했다.

“네 놈만 강해진 건 아닐 게다.”

백류혼도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하게 수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럼 다행이고.”

단우혁이 말했다.

“검선 어르신은 듣던 것보다 무척 고령이시더군. 괜찮으실까?”

불쑥 단우혁이 검선을 걱정하자, 이서휘가 웃으며 대꾸했다.

“후후, 다들 의부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천하제일이시다…. 난 오히려 너희 둘이 걱정이야. 죽지나 말아라. 다치면 의부님 쪽으로 물러나 있는 게 좋을 것이야.”

“흐흥.”

백류혼이 코웃음을 치고. 이서휘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단우혁이 오히려 이서휘를 걱정했다.

“남 말 하고 있네. 이 대주, 자네나 너무 설치지 말게나. 혼자 다 죽일 생각 좀 말고.”

“후후후.”

이서휘가 씨익 웃더니 그 순간,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사패들도 이서휘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

단우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어? 어디 가는 게냐?”

어둠 속에서 이서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먼저 가마. 나중에 보자.”

이서휘는 어느새 지붕 위를 이동하고 있었다. 등에 맨 칠흑검이 때때로 번뜩였다. 적의 수장은 되도록 이서휘가 나서서 다 죽일 셈이었다.

물론 그 중에서 위극신은 특히 자신이 상대해야 할 터.

전생에서도 위극신은 이서휘와 단 한 번을 만나 승부를 겨뤘다. 그전에 위극신의 성격과 대처 방식, 무공을 파악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터.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뒤바뀌었다.

위극신을 비롯한 마교의 수장들을 되도록이면 무림의 방식이 아니라, 암살의 방식으로 상대할 생각이었다.

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적의 수가 얼마나 되던 간에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바람처럼 달려 나가던 이서휘는 어느 건물의 지붕에 멈춰 서서 몰려오는 병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새카만 파도가 출렁이면서 밀려오는 모습이다.

이서휘의 몸이 지붕 위에서 떨어졌다.

머리부터 떨어지던 이서휘의 몸이 방향을 선회하더니 바닥에 내려설 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서휘가 홀로 몰려오는 대군을 향해 걸어갔다.

이 순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

이서휘는 걸어가면서 몰려오는 병력의 수를 가늠하고 거리를 쟀다. 마교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거리가 어디인지 감각으로 계산하고 있었던 것.

마교의 선두에서 달려 나가던 위극명이 아주 먼 전방에서 거뭇한 형체를 하나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을 때…. 이서휘는 이미 암행술로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두드드드드드….

땅이 진동하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세찬 비는 조금 멈췄으나 바람이 거센 날이라 빗방울이 여기저기로 흩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과 빗속에서 모습을 감춘 이서휘의 좌우로 마교의 병력이 밀려들었다.

이서휘는 그야말로 귀신처럼 홀로 서 있었다.

이서휘의 시선이 마교의 병력을 섬뜩하게 훑었다.

구성이 실로 다양했다. 마가의 정예고수를 추려서 온 것처럼 복장이 다양했다. 그 중에 다행히 이서휘처럼 온통 흑의를 걸친 집단이 두 곳이나 있었다.

그 중 한 곳에서는 검마가 있었고.

다른 한 곳에는 난생 처음 보는 남자가 전원 흑의를 걸친 무리를 이끌고 나아가고 있었다.

마교의 무리가 이서휘를 지나쳐 지나갔을 때….

이서휘가 신형을 돌려 전원 흑의를 걸친 무리를 빠르게 쫓아갔다.

이미 이서휘가 가장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던 지라 눈치를 챌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하도 많은 병력이 소란스럽게 이동하는 터라, 뒤쪽에서 일어난 변고를 눈치 채는 게 힘들었다.

이서휘는 얼굴까지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사내를 불쑥 붙잡아 목을 비튼 다음에 복면을 벗겼다.

복면의 이마 부분에 나락(那落)이라는 말이 수 놓여 있었다.

나락은 곧 불교에서 지옥을 이르는 말이다.

이서휘가 나락이라 적힌 복면을 뒤집어쓰고 나락마가(那落魔家)로 추정되는 무리의 후미를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암행술을 섞어 경공을 펼치는 터라, 오료의 경지에 오른 백도의 고수가 마가의 일행에 섞여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그렇게 마교와 함께 장안에 진입했다.

적의 수장을 파악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때까지 하나하나 암살하면서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실로 이서휘다운 생각이었다.

과연 그 어떤 백도인이 정마대전에서 이런 방식으로 마교를 상대하려 했을까.

어쩌면 고리타분한 백도의 누군가는 이서휘가 이런 짓을 벌였다는 사실만으로 비난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이런 것에 신경쓰는 남자가 아니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마찬가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이서휘의 눈이 번뜩이면서 전방에 있을 마교의 수장들을 찾아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교는 이 순간까지도 자신들의 무리에 지옥에서 돌아온 귀신 한 명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멀리서 단우혁이 낭랑한 목소리로 청협문답가를 우렁차게 선창했다. 단우혁의 버릇이었다.

저 뜬금없는 노래에 마교도의 일부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하지만 단우혁을 뒤따르는 청협 전체에서 일대를 뒤흔들 정도의 박력이 담긴 화답이 이어졌다.

[청협이로다!]

마교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사람은 목소리에서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목숨을 각오했는가.

전쟁에 임하는 자세가 결연한가.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백이 담겼는가.

청협문답가의 단조로운 노래엔 이 모든 것들이 담겨 있었다.

마교의 누군가가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재미있는 녀석들이 남아 있었군.”

달려드는 청협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반대편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서휘의 등줄기에 전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 선두에서 단우혁이 청룡도에 내공을 주입해 쩌엉…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로 치켜 올렸다. 마치 전국시대의 장수들이 하는 것처럼 대담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청협의 단우혁이다!”

그의 호연지기가 담긴 외침에 잔뜩 위축되었던 청협문 전체가 마치 도신(刀神)의 가호를 받은 것처럼 분위기가 일변했다.

이서휘의 귓가에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파도가 치는 것처럼 이어졌다.

고함을 치는 자.

욕설을 내뱉는 자.

부딪치자마자 단말마를 내지르는 사람까지.

‘시작이로구나.’

그 처절한 비명을 듣자마자 이서휘는 사류곡을 떠올렸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단우혁, 백류혼, 검선까지 함께 하고 있지 않은가.

비록 백도 세력이 열세였으나, 이서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그 자신의 몸 상태가 정점에 올랐기 때문.

어쩔 수 없이 살생(殺生)을 저질러야 하는 날이다.

이서휘가 청협에게 무운을 빈 다음에 이동했다.

‘버텨라. 버티기만 하면 내가 곧 마교에게 공포가 무엇인지 가르쳐주겠다.’

백도의 검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킬 생각이었다.

이서휘가 자신이 드러낼 수 있는 온갖 존재감과 기척을 최대한 줄인 채로 마교와 섞여서 이동했다.

마교는 일부만 청협을 상대하고 검선을 찾을 생각으로 그대로 지나쳐갔다.

꽤 많은 병력이 그대로 지나쳐가자, 단우혁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마교 전체를 도발했다.

이서휘의 근처에 있던 자가 단우혁을 욕하면서 지나갔다.

“병신 새끼가 목숨을 내놨구나.”

그때, 이서휘가 급히 앞으로 이동하다가 실수한 것처럼 오른발을 내딛어 욕지거리를 내뱉은 놈의 발을 밟았다.

한데, 대체 어느 정도의 내공이 실렸던 것일까.

끄억― 하는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찰나에 이서휘가 아혈(啞穴)을 치고 이동했다. 표정이 끔찍하게 변했는데도 소리를 내지를 수 없는 상황. 더군다나 이미 왼쪽 발은 산산이 부서진 채로 땅속에 박힌 상태였다.

이서휘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이 다가와 발이 빠진 사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왜 그래? 발이 빠진 건가?”

이서휘는 청협을 지나쳐서 어느 마가의 무리에 섞여 있었다.

아직은 탐색의 시간이다.

섣불리 나설 생각이 없었다.

수뇌부를 많이 쓰러뜨릴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상황을 살피면서 움직일 생각이었다.

간간히 마교의 수장들이 내리는 명령도 함께 듣고 있으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보다 수가 적으니 분타 주변을 포위해둬라.]

[생사부에 있는 자들의 위치를 파악하면 섣불리 겨루지 말고 보고부터 해라.]

곧이어 백검문이 쏟아져 나왔다.

백류혼은 단우혁과 달랐다.

실로 차가운 검이다. 오히려 수하들이 용기백배하여 뛰어가고 백류혼 자신은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교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 마디 말도 섞지 않은 채로 백류혼이 검을 휘두르자 핏― 하는 소리와 함께 무척 얇은 검기가 실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교는 백검문마저도 일부 병력을 내보내 맞서게 하고, 나머지 병력을 좌우로 내보내 그대로 지나쳤다.

그러자 우측에서는 흑도맹의 잔여 세력이 튀어 나오고, 좌측에서는 백도맹의 잔여 세력이 등장해 막아섰다.

여전히 수는 부족했다.

그 순간, 이서휘의 눈이 빛나면서 누군가를 노려봤다.

좌측으로 빠지는 무리 중에 실로 거대한 덩치가 섞여 있었던 것. 더군다나 전원이 엄청난 경공을 자랑하는 자들이었다. 특히 선두에 선 사람에게선 지난 날 수호사왕이라 불리던 강자에게서나 느낄 법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수호사왕 중 한 명인가 보구나.’

이서휘가 바라보고 있던 자는 한빙마제였다.

하지만 그 무리에 섞여 있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남자를 잠시 주시했다.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고 있었으나 아무런 정보가 없어 확신할 수가 없었다.

‘위극신인가?’

이서휘의 시선이 다른 때보다 오래 머물렀다가 이동했다. 일단은 전체에 퍼져있는 고수들을 모조리 살펴보고 차례차례 죽일 생각이었다.

마교는 얼마 전에 살생부를 만들었으나, 이서휘는 이 자리에서 살생부를 적어나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순서까지 정해놓은 상태.

그 사이에 격돌한 세력들이 서로 섞여서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 건물이 잔뜩 줄지어 있었다.

피할 곳이 많았다.

덕분에 이서휘는 꽤 날뛰고 있던 마가의 고수를 칠흑검을 뽑자마자 목을 날리고는 뒤편에서 밀려오던 마교 교수들을 향해 대뜸 암연심검의 파를 쏟아내고 골목으로 삽시간에 사라졌다.

“으악!”

“커헉!”

동료들이 있어야 할 곳에서 느닷없이 분출되는 검기를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순식간에 십여 명이 검기에 맞아 영문도 모른 채 팔다리와 목이 잘려 나갔다. 어느 한 명이 얼핏 검은 옷을 입은 사내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서휘는 어느새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나가서 거리마다 가득 차기 시작한 마교인들 틈으로 다시 들어가 다시 함께 전진했다.

잠시 후 이서휘는 단체로 이동하고 있던 나락마가의 무리를 다시 발견하고 후미를 따라잡았다.

‘나락마가 전체가 살수들이었군.’

걷는 자세, 소리를 죽이고 이동하는 모습을 보니 애초에 마가 전체가 살수업을 병행했던 놈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후방에서 나락마가에게 명령을 내리던 가주가 이서휘의 근처에 있었다. 그는 이서휘가 그간 상대했던 마존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이 서늘한 목소리로 간략하게 명령을 하달하자 좌우사자들이 먼저 흩어지고 병력이 나뉘어 사라졌다.

한데, 중년인은 수하들을 다 내보내더니 등을 돌린 채로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 나오시게. 우리 흉내는 그만내고.”

‘음? 어찌 알았지.’

이서휘는 이미 뒤쫓다가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나락마가의 가주가 아무리 뛰어난 살수라 할지라도 이서휘를 감지하긴 어려울 터.

이서휘가 다소 황당한 마음으로 조금 떨어진 어둠 속에서 나락마가 가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의 마음은 여전히 고요했다. 실력이 드러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

고민 끝에 내린 결론.

‘내가 쫓는 도중에 나락마가의 어떤 규율을 어긴 모양이군.’

이서휘의 추측대로였다.

나락마가 가주는 이서휘의 기도를 읽은 게 아니라, 이서휘가 펼치는 경공과 자리를 잡고 있는 진형의 위치만으로 예민하게 깨달은 상황이었다.

나락마가는 소수의 인원이었고, 틀에 맞춘 행동을 해야 하는 독특한 살수집단이었다.

나락마가는 전원이 같은 무공을 사용했는데 마가 전체가 익히는 무공의 비결도 겨우 아홉 개에 불과했다.

나락구결(奈落九決)이라 불렀다.

그 중 한 가지가 단체 행동 시 지켜야 할 법도였고, 다른 한 가지가 경공이었다.

단순히 복면을 뒤집어 쓴 것만으로 나락마가를 흉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락마가 가주의 실수는 바로 이런 여유로움이었다.

이서휘는 나락마가 가주가 주변에 도움을 청하거나 호통을 치지 않는 것을 보고, 측은한 마음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서휘가 속으로 읊었다.

‘이제 한 명….’

등을 돌리고 있던 나락마가의 가주가 고개를 반도 돌리기 전에 모습을 드러낸 이서휘의 칠흑검이 정수리로 떨어졌다.

다가오는 소리도 없었다.

나락마가 가주가 깜짝 놀랄 틈도 없이 시커먼 직도를 머리 위로 들어 막아냈다.

직도와 칠흑검이 맞붙었다.

직도의 강도가 대단해서 칠흑검을 막아낼 때, 불꽃이라도 튀겼다면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나락마가 가주의 머리에 부질없는 생각이 찰나처럼 흘러갔다.

칠흑검이 그 어떤 변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검과 도가 부딪치는 찰나….

나락마가 가주는 자신의 직도가 반으로 갈리는 순간, 본능적으로 고개를 왼쪽으로 젖혔다.

하지만 이것은 대체 무슨 상황일까.

그대로 어깨를 내려칠 것 같았던 시커먼 장검도 궤적을 비틀었다.

베는 순간까지 소리가 없었다.

이서휘는 나락마가 가주의 목을 날려버린 다음에 공중으로 솟구쳐서 날아가는 머리통을 붙잡고 그대로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붕 위에 고여 있던 빗물이 후두두둑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붕 위에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의 머리가 놓였을 때, 이미 이서휘의 신형은 사라지고 없었다.

지붕 위에서 다음 대상을 발견하고 이동 중이었던 것.

이번에는 거리가 제법 멀었다.

적의(赤衣)를 걸친 자들이었는데, 이 무리의 우두머리는 선두에서 철곤을 들고 청협문도의 머리통을 으깨고 있었다.

이서휘의 눈빛이 대번에 살벌해지는 순간….

하늘에서 천둥벼락이 내려쳤다.

꽈광―! 하는 순간에 이서휘는 사류곡에서의 경험이 떠오름과 동시에 칠흑검에서 번갯불과 같은 검기를 내뱉었다.

암연심검의 환이 빛살처럼 뻗어 나가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뒤통수로 향했다.

그 순간, 수하 한 명이 철곤을 든 가주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가주님, 같이 움직이기로 했던…”

말을 미처 끝맺지도 못했는데 가주의 뒤통수에서 퍽 소리가 들렸다. 가주에게 말을 걸던 수하 한 명이 넋이 나간 채로 머리가 날아간 가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셈을 이어나갔다.

‘두 명….’

누군가가 지붕 위에서 거뭇한 형체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흑의인이 위에 있습니다. 나락마가의….”

하지만 이서휘는 대답대신에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등장해 암연심검의 파를 길게 뿌리고 이동했다.

파바바박 소리와 함께 외치던 자를 포함한 대여섯 명의 신체가 갈라지고, 그 뒤에 있던 자들마저 영문을 모른 채로 고꾸라졌다.

이서휘는 우두머리들이 아닌 지라 셈에 넣지도 않았다.

또 다시 마가의 누군가가 아군 진영에 살수가 끼어 있다고 외쳤다.

하지만 빗소리와 여기저기서 내뱉고 있는 고함에 묻혀 신경을 쓰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가까운 곳에서 콰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병기가 맞붙는 소리가 들렸다.

단우혁이 어느새 밀려온 모양이었다.

이서휘는 단우혁이 그의 버릇대로 땅을 한 번 찍은 다음에 싸우고 있는 것이라 판단하고, 지붕 위를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다.

이서휘가 힐끗 시선을 내려다보니, 단우혁이 백발의 노인과 수염이 더부룩한 중년인을 상대로 청룡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단우혁은 무지막지한 속도로 청룡도를 휘두르면서 견고한 수비를 펼치고 있었다.

이서휘는 지붕 위에서 대각선 아래로 빛살처럼 떨어지다가 신형을 감춘 다음에 암행표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어느새 귀신처럼 다가간 이서휘가 노인의 등 뒤에 칠흑검을 찔러 넣었다.

까앙! 소리와 함께 좌우사자쯤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칠흑검을 막아냈다. 백발노인의 실력도 제법 고강했다.

하지만 이서휘의 등장으로 기회를 얻은 단우혁의 청룡도가 호쾌한 궤적을 그리며 중년인의 목으로 향했다.

중년인이 청룡도에서 벗어나려고 보법을 밟는 순간….

어느새 중년인의 앞에 등장한 이서휘가 좌장으로 중년인의 가슴을 강타하고, 동시에 칠흑검을 수직으로 그어서 달려드는 백발노인의 정수리를 갈랐다.

퍽! 콰아아앙!

이서휘의 장력에 밀려나간 중년인이 등 뒤에서 날아오는 청룡도에 목이 날아가고, 이어서 백발노인은 이서휘의 칠흑검을 막아내다가 단우혁을 지나서 날아가더니 건물 벽에 부딪쳐 피를 토해냈다.

백발노인이 인상을 일그러트리더니 이서휘를 노려보면서 튕겨 나왔다.

단우혁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서휘냐?”

하지만 그 순간에 이서휘의 신형이 단우혁을 쏜살같이 지나치더니, 암연심검의 환을 내지르고 곧장 따라갔다.

백발노인이 근거리에서 엄청난 속도로 쏟아지는 빛살을 피하는 순간 이서휘의 칠흑검이 백발노인의 목에 박혔다.

“컥.”

이서휘가 싸늘한 표정으로 칠흑검에 뽑아내며 단우혁에게 말했다.

“조심해라. 조금 이따 보자.”

이서휘가 강하다는 사실은 단우혁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나, 방금 보여준 공력의 무시무시함과 판단력은 잠시 단우혁의 사고가 멈출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또 다시 사라진 상황.

단우혁이 고개를 젓다가 청룡도를 쥐고 경공을 펼치면서 앞으로 뛰어 나갔다.

‘서휘가 실로 귀신처럼 행동하는구나.’

이서휘의 모습이 순식간에 멀찍이 떨어진 곳에 다시 등장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명.”

☆ ☆ ☆

어쨌든 마교의 병력이 많은지라, 선봉대로 나선 청협과 백검이 점점 분타 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사패의 저력을 믿고 있었다.

더군다나 분타에는 소수의 인원이지만 흑도맹의 염라대가 남아 있고,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는 무당은검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했다.

어디선가 검마의 독특한 웃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클클클…”

검마가 느닷없이 검선을 부르짖었다. 이어서 이서휘의 이름을 길게 외쳤다.

더군다나 이서휘의 이름은 마치 자신의 친구인 것처럼 친근하게 불러대고 있었다.

검선도 이서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가 쥐고 있는 마검에서 기괴한 검명이 비명처럼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검마는 아직 검 한 번 휘두르지 않았는데도, 담력이 약한 자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나서지 않았다.

다른 마가 가주들처럼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득보다 실이 많으리라 예상했다.

도발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어딘가에서 검마가 음정과 박자가 엉망인 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단우혁을 흉내 내는 꼴이었다.

이서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신 나간 놈.’

하지만 이서휘는 끝내 검마의 도발을 무시하고 지나치고 있었다.

‘넌 나중에 죽여주마. 기다리고 있어라.’

여태 마교와 함께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이서휘는 위극신으로 추정되는 우두머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

지난날, 위극신은 그 높은 무공을 지니고도 마지막 순간에 등장했다.

어딘가에서 이서휘처럼 숨을 죽이고 전황을 살펴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이서휘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언제까지 숨어 있나 보자.’

이동하던 이서휘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사내가 수하들에게 호통을 내지르는 장면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척후 활동을 하던 자가 서둘러 돌아와 사내에게 보고를 올렸다.

[일월가주님… 분타의 우측 방향, 멀지 않은 곳에서 흑도맹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흑도맹주가? 그 놈은 우리가 살펴보자꾸나.]

일월가주라 불린 자의 목소리가 이서휘의 귀에 꽂혔다.

‘일월가주…의 목소리가 어찌 위극신이 아니지?’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따라갔다.

분명 일월가주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사내의 목소리는 이서휘의 기억에 남은 목소리와 차이가 컸다. 더군다나 이서휘가 기억하고 있는 목소리는 중년 시절의 위극신이었으니 더욱 애매했다.

사내는 좌우에 호위처럼 보이는 무인을 대동하고 제법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복장이 남들과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짙은 청색 바탕에 적색 띠가 불꽃처럼 휘감겨 있었다.

이서휘는 이 시기에 위극신에게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흑도맹주는 의부님에게 부상을 입었는데 어찌 나섰단 말인가?’

이서휘가 흑도맹주의 격한 성격을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인원이 몰려가면 부상을 입은 흑도맹주도 무사하지 못할 터.

이서휘가 외곽으로 돌아가서 순식간에 일월가주를 앞서 나갔다가 골목 사이에 매복을 했다.

적들이 지나치는 순간에 선제공격을 펼칠 생각이었다. 그 순간 이서휘는 머무르고 있는 상가의 지붕 천막에 고여 있는 물을 발견했다. 천막이 고래 등을 내민 것처럼 볼록하게 내려온 상태.

일월가주 일행히 지나가는 찰나, 이서휘의 손바닥이 짧게 끊어지는 동작으로 기둥을 부러뜨리자마자 물이 와르륵 쏟아졌다.

하지만 이서휘는 기다림을 이어나갔다.

이 순간에도 심리전을 펼치고 있었다.

천막의 다리가 부러져 고여 있던 물이 쏟아졌을 뿐….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자 깜짝 놀랐던 일월마가의 선두가 다시 이동했다.

이서휘가 노린 순간은 바로 지금….

아무리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지만, 일월마가가 다시 이동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는 찰나….

이서휘가 어둠 속에서 눈여겨보고 있던 일월가주의 목을 향해 칠흑검을 휘둘렀다.

빛살이 뻗어나갔다.

위극신이라면, 알아챌 것이 분명했다.

그 때문에 이서휘의 신형도 함께 움직였다.

빛살이 훨씬 빨랐다.

일월가주가 갑자기 신형을 비틀어 양손을 교차한 장력으로 이서휘의 검기를 막아내더니, 균형을 잃고 뒤로 날아갔다.

그 순간….

이서휘와 일월가주가 두 눈을 마주쳤다.

한데, 이서휘의 시야에 일월가주 눈동자의 색이 희미하게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청안과 적안…. 위험한 놈이다.’

정체가 드러나더라도 이 자리에서 죽일 필요가 있었다. 튀어나간 이서휘가 일월가주에게 빠르게 다가가려는 찰나에 이서휘의 양 허리로 누군가의 장력이 동시에 쏟아졌다.

이서휘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던 걸음을 순식간에 멈춘 후 칠흑검을 우측으로 내지르고, 좌장을 동시에 뻗었다.

콰아아아앙!

좌장에 얻어맞은 자가 튕겨 나가고, 우측에서 장력을 내지르던 자는 칠흑검에 관통되어 비명을 내질렀다.

한데,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자가 어찌 이렇게 갑작스럽게 멈출 수가 있을까.

장력에 얻어맞고, 검에 찔린 사내는 고통과 함께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순간적으로 판단력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절대 고수….’

절대 고수가 아니면 방금 전에 흑의인이 펼친 출수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가 대번에 외쳤다.

“이서휘가 여기에 있습니다!”

튕겨나갔던 일월가주, 위극명의 두 눈에 이상한 광채가 감돌더니 장검 한 자루를 뽑아들고 몸을 날리면서 이서휘에게 덤볐다.

챙챙챙챙챙!

이서휘의 좌우에서 일월마가가 밀려드는 중이었다.

이서휘는 감히 받아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한 힘을 실어 그대로 일월가주의 상반신을 그었다.

일월가주가 훌쩍 물러났다.

하지만 이서휘의 의도는 몰려드는 자들이었다. 출수 그대로 좌측에 검기를 뿌리고, 땅을 한 번 구른 후에 일월가주의 요혈을 노리면서 달려들었다.

챙챙챙챙!

위극명은 이서휘와 검을 부딪치자마자 감히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님을 깨닫고, 근접 거리에서 검기와 좌장의 장력을 동시에 분출했다.

그런데 그 손 모양이 무척 기괴했다.

‘태극?’

이서휘는 바로 죽이려다 멈추고 위극명의 표정을 살피면서 무슨 수를 쓰는지 지켜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위극신의 압도적인 면모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서휘의 추론이 진실에 빠르게 근접하고 있었다.

‘위극신이 교주에 오르고 일월마가를 넘긴 것이로구나. 무공의 궤가 같은 놈일지도 모르겠다.’

이서휘는 어느새 일월마가의 병력에 포위된 채로 위극명과 겨루고 있었다.

위극명이 성명절기라도 내뿜기를 기다리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일월마가를 쓰러뜨리고 다녔다. 칠흑검이 워낙 육중한 덕에 검기를 뿌리지 않아도 막아선 서너 개의 병기가 대번에 부러지고 있었다.

이서휘를 공격하던 위극명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형님과 마제를 불러라!”

가장 멀찍이 떨어진 사내가 급히 신형을 돌려서 몇 걸음을 걷다가 이서휘가 내보낸 검기에 목이 날아갔다.

이서휘가 일월가주를 보며 말했다.

“못 간다. 이 새끼들아….”

“이런 개 같은…!”

일월가주의 턱에서 빠드득 소리가 나는 순간, 이서휘가 일부러 허초를 내지르고 일월가주의 가슴을 향해 좌장을 다소 평범하게 내밀었다.

그 순간, 위극명이 이서휘의 장력을 역천반경(逆天反鏡)으로 튕겨냈다. 초식과 손동작이 실로 특이했다. 양 손에 맺힌 외기발현의 장력이 역태극을 이루자 이서휘의 장력이 고스란히 튕겨나왔다.

퍼어엉!

이서휘는 역천반경의 초식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익힌 다음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묘한 무공이로구나.’

왠지 위력이 낮은 위극신의 수법을 훔쳐 본 기분이랄까.

튕겨나간 이서휘의 눈매를 확인한 위극명은 어쩐지 이서휘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이마에서 힘줄이 불끈 돋았다.

이서휘가 칠흑검을 어깨 위로 올리자마자 검사가 순식간에 휘몰아치더니 백색의 검기를 칠흑검에 휘감았다.

“죽어라.”

칠흑검에서 빛살이 분출됐다.

쐐애애애애앵!

한데, 그 순간에 이서휘와 위극명 사이로 거대한 시체 한 구가 날아왔다. 하지만 이서휘는 시체마저 가를 생각으로 그대로 출수를 이어나갔다.

한데, 평범한 시체가 아니었다.

어찌된 노릇인지 꽝꽝 얼어붙은 시체였던 것.

한빙마제의 출현이었다.

하지만 그 꽝꽝 얼어붙은 시체마저 반으로 쪼갠 이서휘의 검기가 위극명의 이마부터 시작해 낭심까지 핏빛 선을 그었다.

“커헉…!”

하지만 한빙마제가 던진 시체 덕분에 검기가 제대로 박히지 않아 쓰러진 위극명의 숨은 아직도 붙어 있었다.

그때였다.

공중에서 누군가의 침착한 목소리가 울렸다.

“명아…”

그와 동시에 한빙마제와 위극신이 내려섰다. 하지만 이서휘는 이미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춘 상태.

“명아.”라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서휘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단 한 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귓가에 벌레가 스며드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드디어 네 놈을 보는구나.’

마제와 위극신이라면 이서휘도 섣불리 뛰어들 수 없었다. 그렇다고 위극신을 버려두고 당장 이동할 수도 없었다.

이서휘는 멀찍이 물러나와 건물의 벽을 차고 올라간 다음에 암행술로 모습을 감춘 다음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일월마가 가주를 내려다봤다.

위극신은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서휘가 속으로 침을 삼켰다.

‘위극명…. 위극신의 동생이었구나.’

한빙마제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위극신에게 말했다.

“명이는 어떤가?”

위극신은 대꾸가 없었다.

이미 이서휘에게 당해 깊은 상처를 입은 상황. 하지만 숨이 붙어 있었다.

위극신이 동생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명아, 그렇게 갈 바에는…”

“크윽… 형, 형님!”

위극명은 자신의 형이 무슨 행동을 할지 깨닫고, 입가에서 잔뜩 피를 뿌려대며 다급하게 외쳤다.

이서휘가 멀리서 지켜보는 가운데, 어쩌면 살릴 수도 있었던 위극명의 목으로 위극신의 손이 천천히 뻗어나갔다.

이 끔찍한 상황에 한빙마제의 안색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자네… 지금 뭐….”

하지만 기어코 뻗어나간 위극신의 왼손이 위극명의 목을 움켜잡았다.

동시에 위극신의 장포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뒤로 펄럭였다. 잠시 후 위극명은 비명 한 번 내지르지도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하지만 위극신의 장포는 한참이나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저 대범한 이서휘마저도 위극신의 미친 행동에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는 것도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그저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애초에 동생을 저렇게 흡수할 생각으로 살려놓은 게 아니었을까, 하고 실로 무서운 추측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이서휘마저도 넋이 나가서 잠시 위극신의 등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위극신이 위극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명이를 살리기는 어렵소. 명이의 힘을 받아 복수를 해주는 게 옳은 상황이오.”

한빙마제가 위극신의 악독한 생각에 탄성을 내지르자, 천천히 일어난 위극신이 말없이 그제야 등을 돌렸다.

이미 위극신의 양 눈은 청안과 적안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위극신이 이서휘가 숨어 있는 건물의 지붕을 노려보더니, 어느새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서휘와 눈을 마주쳤다.

대체 어떻게 찾아낸 것인지도 모를 지경….

위극신이 이서휘가 숨어 있는 어둠을 바라보면서 조용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자네가 이서휘인가?”

위극신이 어둠 속에 이서휘가 숨어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자, 한빙마제가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솟구쳤다. 위극신이 바라보고 있는 어둠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하지만 어둠 속에 머무르고 있던 이서휘가 숨을 죽인 채로 날아오는 한빙마제에게 좌장을 내밀었다.

어둠 때문에 거리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던 한빙마제가 깜짝 놀라서 장력을 일으켜 대응했다.

콰아아아앙!

튕겨 나온 한빙마제의 신형이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아서 위극신의 옆쪽에 내려서더니 뒷걸음을 치면서 휘청거렸다.

한빙마제가 휘청거리자, 그 모습을 구경하던 위극신이 무척 성의 없이 박수를 몇 번 쳐댔다.

“훌륭하구나.”

위극신이 낯빛이 바뀌어 가는 한빙마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무리 아래에서 솟구치다가 기습을 당했다지만 한빙마제가 장력으로 누구에게 밀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 푸르죽죽하던 한빙마제의 낯빛이 대번에 새빨갛게 변하고 있었다.

극음의 장력이 극양의 장력에게 압도됐을 때 나타나는 상황임을 위극신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한빙마제가 불시에 기습을 당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서휘는 여전히 복면을 쓰고 어둠에 잠겨 있다가 몇 걸음을 걸어 나왔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을 바라보며 이름까지 언급하는 위극신을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서휘는 자신을 찾아낸 위극신을 보며 전생에서처럼 그대로 물어보고 싶었다.

[그건 무슨 무공이냐고.]

하지만 침묵으로 일관했다.

위극신의 얼굴을 보느라 말이 나오질 않았다.

독심술을 익혔던 터라, 얼굴과 표정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는 이서휘다.

위극신의 얼굴은 보면 볼수록 기이했다.

이마와 눈썹, 눈빛과 눈매, 코와 입, 입 주변과 턱까지.

조화로웠다.

어찌 보면 완벽함을 추구하는 자의 얼굴이다.

하지만 그 완벽함이 오히려 위화감을 주고 있었다. 무언가 결여된 것처럼….

바라보다 보니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농담을 건넬 자가 없어서 이서휘가 홀로 웃었다.

‘인간미(人間味)가 없구나.’

지금 이 순간….

위극신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딱 하나였다.

이서휘의 무공 수위.

만난 적도 본 적도 없으니 정확하게 가늠할 길이 없었다.

때문에 한빙마제가 달려들 때까지도 위극신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살생부의 후반부에 적혀 있는 백도의 젊은 고수였으나, 애초에 위극신은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이는 편이었다. 제월헌을 쳤을 때와는 또 다른 마음가짐을 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솟구치는 한빙마제를 다시 지상으로 떨어뜨린 다음에 지붕 난간에 왼발을 걸치고, 무릎 위에 왼팔을 얹더니 턱을 괴는 자세로 위극신을 감상하는 것처럼 말없이 계속 내려다 봤다.

그러다 문득 이서휘는 복면을 벗어서 바닥에 던졌다.

‘내가 이서휘다.’

이런 심정이었다.

위극신은 이서휘가 복면을 벗자, 예상하지 못한 행동인지라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이서휘도 복면을 벗자마자 위극신과 함께 웃었다.

그 순간에 이서휘는 묘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위극신에 대한 일종의 예의였다.

이서휘에게 패배를 안겼던 위극신에 대한 예의랄 게 대체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이서휘의 생각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이서휘 자신은 두 번째 기회를 얻어 위극신과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전생에는 위극신이 사류곡에서 꽁꽁 숨어 있다가 기회를 엿봤으나, 이서휘는 위극신에게 그럴 생각이 없었다.

위극신의 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보자 더욱 그랬다.

이서휘는 위극신의 표정을 보자마자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패배라는 감정을 겪지 못한 놈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자신은 그 누구보다 더 위에 있다는 위극신의 마음이 이서휘에게 읽히고 있었다.

여전히 이서휘는 위극신의 얼굴에서 그의 인생을 읽어 나가느라 말이 없었다.

그러자 결국 위극신이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이서휘…. 마존을 꽤 많이 죽였다지? 그런데….”

위극신이 양팔을 벌린 채로 이어나갔다.

“어찌 내 앞에서 도망을 가지 않는 게냐?”

어폐가 있는 위극신의 말에 이서휘가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자신은 마존과 급이 다르다는 자신감의 표출일 터.

이서휘가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이서휘는 위극신의 말을 듣는 게 즐거웠다. 아무리 죽이고 싶었던 상대라지만 어느새 이서휘의 마음에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있던 자다.

생사의 결투를 떠나서 즐겁기 짝이 없었다.

위극신이 말했다.

“예상보다 훨씬 젊구나. 네가 아무리 설치고 다녀도 검선은 오늘 이 자리에서 죽겠지만… 네겐, 기회를 더 주고 싶구나. 가라.”

“보내주란 말인가?”

한빙마제가 되묻자, 위극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내주시오. 죽이기 아깝지 않소이까? 저 나이에… 더 살아서 인생의 고통을 알 필요가 있겠소.”

위극신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위극신의 말에 이서휘야말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이서휘의 웃음이 장안에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창칼 부딪치는 소리가 잠시 잦아들 정도로 기괴할 정도로 큰 웃음소리였다.

이서휘의 웃음이 길게 이어졌다.

얼굴을 보니 이서휘와 나이 차이가 대여섯 살 차이도 나지 않을 만큼 젊었다. 그런데 세상만사 통달한 것 같은 저 말투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인생이 고통이라는 것은 이서휘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서휘가 위극신을 보며 말을 건넸다.

“위극신, 오늘 함께 인생을 알아가보자. 네가 말한 그 고통… 말이다.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있겠느냐?”

위극신은 이서휘를 검선의 아래로 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검마보다 아래일 것으로 예상했다.

때문에 이서휘를 보자마자 검마에게 했던 것처럼 더 키워서 흡수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원래 위극신이라는 자의 생각이 그랬다. 하지만 이서휘는 위극신의 사고방식마저 서서히 분해시킬 작정이었다.

이서휘가 말을 이어나갔다.

“신아…. 사냥꾼 놀이를 하고 싶은 게냐?”

“신아?”

마교 교주 제월헌이나, 자신의 아버지가 부를 법한 호칭이었다. 태어나서부터 후계자로 자랐기 때문에 그 둘을 제외하곤 이런 호칭을 들은 적이 없는 위극신이다.

하지만 위극신은 여전히 마교를 지휘하는 장수의 심정을 지니고 있었다.

“마제, 여기서 저놈과 놀고 계시오. 검선을 죽이고 오겠소. 보니까 얼추 비슷하겠더군. 즐기시오.”

위극신이 이서휘의 장력에 튕겨 나온 마제의 자존심을 짓밟아 놓고, 이서휘를 올려다보면서 씨익 웃었다.

“또 보세.”

이서휘도 침착하게 상황을 가늠했다. 마제를 검선에게 보내고 위극신이 남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다.

하지만 마제를 남겨놓고 위극신이 떠나려 하자, 이서휘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위극신아… 누가 보내준다 하더냐?”

이서휘의 거만한 말투에 감정 표현이 드문 위극신이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구나. 검마와 어울리겠어.”

이서휘가 지금 이곳에서 목숨을 걸 생각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백도여, 내가 이곳에 있다.]

적어도 검선은 이 의미를 알 것이다.

검선이 알아채면 이내 소식이 퍼질 터.

이서휘가 하늘을 향해 칠흑검을 추어올렸다.

시커먼 밤하늘에 휘몰아치기 시작한 검사가 폭풍처럼 칠흑검을 휘감았다. 검사가 쏟아질수록 이서휘가 머물고 있는 주변이 대번에 대낮처럼 밝아졌다.

동시에 이서휘가 빛살에 휘감겨서 등을 돌린 위극신을 향해 날아갔다.

한빙마제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쩌엉 하는 소리와 함께 양 손에서 푸른색의 장력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서휘의 공격이 더 빨랐다.

위극신을 향해 휘감고 있던 검사를 쏟아내고, 검을 회수해 푸른색의 장력을 향해 검막을 펼쳤다.

콰콰콰콰콰콰콰―― 콰아앙!

위극신이 머물고 있던 자리의 땅이 좌우로 무너지듯이 파이고 한빙마제가 쏟아낸 혼천한빙장(混天寒氷掌)이 검막에 가로막혔다.

이서휘의 손에서 칠흑검이 자유자재로 방향을 전환했다.

위극신이 자세를 돌리지도 않은 채로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이서휘가 있는 곳으로 내려서면서 장력을 내질렀다.

세 사람은 이제 단 한 마디도 내뱉을 틈이 없었다.

과연 당대 무림의 그 어느 누구가 마교의 우두머리가 된 위극신과 한빙마제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펼칠 수 있을까.

위극신과 한빙마제가 달려들자….

이서휘가 일부러 칠흑검을 수평으로 그었다가 신형을 회전시키면서 솟구쳤다.

그 어느 때보다 길게 뻗어나간 암연심검의 파가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것처럼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퍼버버벅― 쩌적― 쩌저적―!

이서휘의 검기에 맞은 동서남북의 건물이 대번에 무너지면서 굉음을 일으켰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 먼지가 잠시 피어올랐다.

어디선가 위극신의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미치광이였군. 죽이고 이동합시다.”

먼지와 빗줄기를 뚫고 두 개의 신형이 땅을 밟지도 않은 채로 이서휘에게 날아왔다.

칠흑검을 쥐고 있던 이서휘가 비릿하게 웃었다.

투두두둑 떨어지던 빗줄기가 어느새 땅을 때리고, 이서휘의 신형은 사라진 상태.

위극신의 등 뒤에서 나타난 이서휘가 칠흑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위극신마저 웃고 있었다. 달려들고 있던 한빙마제의 오른손에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빙결이 맺혔다.

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칠흑검이 빙결에 떨어지고.

웃고 있던 위극신이 자세를 돌리자마자, 양 손에 각기 태을양장(太乙陽掌)과 월온음장(月韞陰掌)을 만들자마자 합치면서 이서휘를 향해 외기발현 장력인 일원광천장(日月光天掌)을 분출했다.

이서휘는 빙결에 달라붙은 칠흑검을 회수하기 위해 단 한 번의 도약에 목숨을 걸었다.

이서휘의 오른발이 땅을 한 번 찍자….

이서휘의 신형이 공중에서 수평선을 그리며 지상을 스치는 것처럼 물러났다.

그 사이에 위극신이 날린 장력이 파지지직 소리와 함께 구 형태로 뭉친 채로 따라왔다.

공중에서 밀려나가던 이서휘가 일월광천장의 중심에 칠흑검을 찔러 넣었다.

칠흑검의 검봉이 일월광천장의 표면에 닿는 순간, 이서휘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암연심검의 환을 분출했다.

날아오던 일월광천장이 동서남북으로 빛살을 뿌리면서 흩어지는 순간, 그 중심에서 엄청난 속도로 뻗어 나오는 검기가 위극신의 두 눈을 향해 밀려나갔다.

이서휘의 미칠 듯한 방어 능력에 위극신이 저도 모르게 역천반경을 준비했다.

본래 이런 순간에 사용해선 안 되는 수법이었다. 근접 거리에서 사용해야 빛을 발하는 초식인데 순간 다른 대처 방식이 떠오르지 않았다.

급히 만든 역천반경이 이서휘의 검기를 튕겨냈으나, 되돌린 검기로 멀리 떨어진 이서휘를 공격하는 것은 무리였다.

파바바바박 소리와 함께 역천반경에서 튕겨나간 검기가 어딘가를 뚫고 지나갔다.

어쩔 수 없이 거리만 서로 벌어진 꼴이었다. 한빙마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위극신의 옆에 섰고.

위극신마저도 할 말을 잠시 잃고 이서휘를 바라봤다.

그때, 검마의 광소가 터졌다.

“크하하하하하!”

이서휘가 싸움 직전에 터트린 웃음과 주변을 환하게 밝혔던 터라, 병력을 직접 지휘하지 않고 있던 수장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검마가 외쳤다.

“킬킬킬…. 이렇게 재미있는 싸움을 나 없이 할 생각이었나? 안 되지, 이 사람아… 어? 도와줄 테니 이서휘는 나눠 먹자꾸나.”

위극신의 오른쪽 건물 위에서 마검을 어깨에 멘 검마가 등장하고.

누군가의 말이 들렸다.

“나눠 먹어?”

동시에 어디선가 노인의 엄살 섞인 한숨이 이어졌다.

검선이 골목에서 걸어 나오면서 허리를 두드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뭔 비가 그리 내렸는지… 이제 좀 그칠 생각인가 보구나….”

검선의 등장에 좌중이 고요해졌다.

검선이 상황을 살펴보다가 이서휘에게 말했다.

“내 아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세 명은 무리겠지.”

백도맹 분타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던 검선이 이서휘가 걱정되어 결국 모습을 드러냈던 것.

검마는 검선까지 등장하자 등줄기에서 전율이 일어나는 것처럼 양손을 부르르 떨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좋다. 좋구나! 이 보다 더 마음에 들었던 밤은 없었다.”

검마가 부르르 떨리고 있는 손으로 이서휘와 위극신이 대치하고 있는 중앙을 가리켰다.

“이 곳에서 오늘 죽음과 삶을 결정짓고, 천하제일까지 가리는 것이 어떠한가?”

그 순간….

이서휘와 위극신이 눈을 마주치더니 한 마디씩 내뱉었다.

위극신이 여전히 이서휘를 노려보면서 검마에게 말했다.

“굳이 네 놈이 없어도 천하제일을 가릴 수 있을 것 같구나. 저기… 검선까지 왔으니.”

이서휘 역시 위극신을 노려보면서 검선에게 말을 건넸다.

“의부님, 이 쓰레기들의 생사는 제가 결정짓겠습니다. 보중하십시오.”

그러자 검선이 아랫것들을 내려다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들 젊구나.”

검선이 서서히 그쳐가는 비를 올려다보다가 평온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뭐 오래 살아보니 죽는 건 나이순서가 아니더구나.”

검선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검마의 광기가 무너지고, 이서휘와 위극신의 살기마저 부질없게 느껴지고 있었다.

검선이 말했다.

“서휘야.”

“네.”

이서휘가 고개를 돌리자 검선이 무어라 말을 반쯤 내뱉다가 멈추고 구성검을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한빙마제를 향해 휘둘렀다.

선풍(仙風)이 뻗어 나갔다.

검선이 모두를 속이고 선제공격을 펼쳤던 것.

그 어처구니없는 노인네의 작태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 것은 역시 이서휘였다.

선풍의 궤적을 읽자마자, 마치 예측을 한 것처럼 한빙마제가 도망을 치기 위해 가장 편하게 선택할 수 있는 상공을 향해 암천세를 쏟아냈다.

☆ ☆ ☆

장안 백도맹 분타의 외곽.

전신에 흑의를 걸친 채로 두 눈만 빠끔히 내놓은 두 남자가 팔짱을 낀 채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살수의 차림새였다.

한 사내가 말했다.

“이번 일을 마무리 지으면, 독립할 생각이다. 언제까지 남의 수하로 살 생각이냐? 이번 일만 해도 산전수전… 너무 힘든 과정이었다. 잘 마무리 지었으니 이제 우리는 갈 길 가자.”

“하여간 주둥아리는… 쳐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그런데 왜 아직 안 오는 거야? 여기가 맞다니까. 제대로 찾아왔네. 벌써 난리가 났군.”

말을 하던 사내가 뒤편의 어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쪽도 거의 다 왔군.”

한 사내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난 이 대주가 앞으로 나를 큰 형으로 모시지 않겠다면 이번 기회에 독립하련다. 도적파나 세워야지.”

“예예, 마음대로 하세요.”

뒤편에서 중년인이 걸어오면서 말했다.

“제대로 찾아왔군. 우리는 바로 진입하겠네. 자네들은?”

중년인은 검림의 곽서명이었다.

곽서명의 뒤편에도 각 지역에서 몰려온 이백여 명이 넘는 검림의 사내들이 병기를 쥐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특히 양원에서 연화객잔을 운영하던 도광양회(韜光養晦) 형제가 가장 많은 수의 검림을 대동했고, 염악마제(炎惡魔帝)에게 대항했던 비완객잔의 서태현이 그 다음으로 많은 형제를 이끌고 도착했다. 이 밖에도 전서구를 받거나 곽서명의 호출을 받은 각지의 검림이 몰려든 상태였다.

하지만 이 전력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곽서명이었다.

도삼이 곽서명의 말에 대꾸했다.

“저희가 익힌 무공은 암살과 잠입에 치우쳐 있습니다. 검림주를 일단 찾아보겠습니다. 분타를 도와주십시오.”

“암살과 잠입이라…. 자네들 혹시 도둑이었나?”

“그럴 리가요. 살수였습니다. 살수… 물론 개과천선했습니다만….”

“그렇군. 수고하게.”

곽서명이 검림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저마다 복장과 무기가 실로 다양한 자들이 소리 없이 이동했다. 이미 백도맹 분타에 모인 세력은 수로 밀어붙이는 마교를 상대로 처절한 분전을 하고 있었다.

체력이 멀쩡한 검림의 이백여 명이 숨을 죽인 채로 이동하자, 다시 도이와 도삼이 남았다.

어쨌든 둘은 엄청난 고생 끝에 이서휘가 시킨 임무를 완수하고 도착한 상태였다.

일종의 체력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중원을 누비다시피 해서 이서휘의 명을 수행한 두 사람이었다.

워낙 검림이 흩어져 있던 터라, 곽서명과 도이, 도삼의 빠른 대처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 인원도 모이기 힘들었을 터였다.

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 대주가 있는데 어찌 이렇게 밀리고 있을까? 강적을 만났나? 백도는 왜 이리 수가 또 적은 게야?”

“그러게 말이야. 빨리 가서 도와주자. 잡담 좀 그만하고.”

“잡담이라니 잠시 전장의 상황을 살피는 게다. 다리도 퉁퉁 부었고.”

형제들의 말투는 점점 격조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 왜 이렇게 말이 많아졌어? 나도 부었어.”

“어허, 이놈이 말이 짧구나. 장차 차세대 검림주(劍林主)가 될 형님에게….”

“검림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가서 곽 어르신한테 그 소리 한 번 해보지. 어떻게 되나 보게.”

그때였다.

상공에서 괴이한 물체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마치 회오리에 휩싸인 것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도삼이 말했다.

“저거 뭐여?”

도이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실로 거한이로군.”

“사람이야?”

선풍에서 벗어나려다가 공중에서 이서휘에게 암천세를 얻어맞은 한빙마제가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한빙마제는 검선의 선풍도 끝내 완벽하게 피하진 못했다.

결국 검선과 이서휘의 합작으로 불가사의한 속도로 먼 곳까지 날아오고 있는 셈이었다.

도이와 도삼이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할 수 없는 사태였다.

하지만 한빙마제도 보통은 아니었다.

암천세가 쏟아지는 순간 자신의 전신에 빙결(氷潔)을 휘감았다. 하지만 암천세가 그 빙결마저 분쇄시키고 한빙마제의 전신에 쏟아졌다. 한빙마제의 몸이 산산조각이 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무척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서휘의 암천세를 정통으로 맞았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상태였다.

의식이 희미하게 남아 있던 한빙마제는 땅에 처박히면서 다시 기절할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도이와 도삼이 백야검과 직도를 든 채로 이동했다. 도이가 말했다.

“이 새끼 이거 전신에 마교라고 쓰여 있는데? 푸르죽죽하네.”

한빙마제는 기절한 상태에서 꿈틀거리면서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도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예전에 우리가 팔 자른 놈이랑 분위기가 비슷한데…?”

“수호사왕인가 그렇다던 놈?”

도이와 도삼이 눈을 마주쳤다.

‘죽이자.’

도둑 형제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한빙마제에게 달려들어 직도와 백야검을 가차 없이 휘둘렀다.

한데 무척 특이한 경험이었다. 무슨 마공을 익힌 것인지 검이 잘 박히지 않았다.

하지만 도삼이 쐐앵! 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에서 청협비수를 뽑자마자 한빙마제의 목덜미를 푹푹푹 소리가 나도록 찍었다. 도이와 도삼은 살수나 다름이 없는 자들이었다. 마교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를 그대로 두고 갈 정도로 자애로운 형제들이 아니었다.

도이가 말했다.

“죽었느냐?”

“죽었겠지.”

“이렇게 또 우리가 한 건을 하는구나. 진짜 백도 세력은 우리한테 감사해야 한다.”

도이가 검선과 이서휘가 합작해서 날려버린 한빙마제를 마무리해놓고 자화자찬을 늘어놓고 있었다.

도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누가 알아줘 우리를….”

“누가 알아주다니, 세상이 알아줘야지. 마교의 대단한 고수를 도이와 도삼이 죽였다고.”

“아무도 안 믿어.”

도삼의 말에 도이가 씁쓸하게 대꾸했다.

“이서휘는 믿어주겠지.”

“왜 또 대주님한테 반말이야?”

두 사람이 걸어가면서 계속 티격태격 입씨름을 했다.

도이가 말했다.

“이 대주가 자신의 나이를 말한 적이 있었느냐? 우리처럼 고아라서 자기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모른다니까. 알면서 그래. 아마 나랑 동갑이거나 내가 형일 수도 있을 걸?”

도삼이 주먹을 쥔 채로 대꾸했다.

“형, 원래 무림은 이거 강한 놈이 형이야. 더군다나 형은 노안(老顔)이라서 이 대주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거고.”

“이 새끼가 형한테… 하여간 이번 일 잘 끝나면 서휘랑 셋이 도원결의(桃園結義)로 결판을 짓자. 의형제나 맺자고. 언제까지 부하로 지낼 거야?”

“의형제는 이해가 가는데 왜 도원결의야 그게…”

“복숭아에 낚였으니까 도원결의지.”

도삼이 형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가끔 보면 이 형 새끼는 천재인지 바보인지 모르겠다니까.”

“어쨌든 내가 큰 형이다. 서휘가 둘째고. 네가 막내.”

도삼이 콧방귀를 끼며 대꾸했다.

“그러시던지요. 대주님한테 쳐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안 맞으니 기가 너무 살아났어.”

“솔직히 지난날 우리가 그 무시무시한 마제를 지존폭탄신공(至尊爆彈神功)으로 날려서 승부를 결정지음과 동시에 잘난척하던 이서휘를 한 번 살려줬잖아.”

“그랬지. 지존폭탄신공은 금시초문이지만.”

“한데 지금 장안의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백도가 밀리고 있고, 결국 우리가 산전수전을 겪은 끝에 검림을 이끌고 와서 반격의 실마리를 제공했잖아.”

“그렇지.”

“더군다나 갑자기 무시무시한, 실로 어마어마한 힘을 숨겨둔 푸르죽죽한 마교의 고수를 우리가 또 한 번 척살하여, 백도를 위기에서 구했단 말이지.”

도삼이 측은한 표정으로 형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쳐줬다.

“그런 셈이지.”

“이런 활약은 무림사에 드물 터.”

“근데 그걸 누가 알아줘? 우리 말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어.”

“이서휘.”

“그래. 가서 실컷 자랑해라. 다 죽어가던 사람 끝장냈다고. 하여간 형은 좀 맞아야 돼. 이 대주님한테 형이 오늘 반말한 거랑 욕한 거랑 죄다 이실직고한다. 같이 쳐 뚜드려 맞는 한이 있더라도.”

도삼이 말을 하다 말고 이서휘를 찾아가겠다는 것처럼 달려 나갔다. 도이가 급히 따라가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거기 안 서?”

잠시 동생을 쫓아가던 도이가 내공을 실어서 외쳤다.

“서휘 형님!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왔소. 재간둥이들이 왔단 말이지.”

그때, 멀리서 신호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어두운 상공에 섬광이 솟구쳤다. 도이와 도삼 형제는 서로 말도 없이 신호탄이 터진 부근으로 향했다.

☆ ☆ ☆

검선과 이서휘가 단 한 번의 합격으로 한빙마제를 전장에서 이탈시키자 검마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뛰어내렸다.

위극신도 대단했다.

즉각 바닥에 장력을 쏟아내더니 먼지를 일으킨 후에 장포를 펄럭이며 뒤로 물러나면서 신호탄을 공중에 터트린 상태였다. 적어도 좌우사자를 비롯한 수장들은 신호탄을 보고 달려오게 될 터.

이서휘도 공중에 터지는 신호탄을 힐끗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래, 차라리 이쪽으로 다 와라. 우리 부자가 다 죽여주마.’

위극신은 백도맹 분타를 쓸어버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 자리에서 날뛰고 있는 검선과 이서휘를 잡는 것이 더욱 중요한 상황이라 판단했다.

내려선 검마가 미친놈처럼 마검을 휘두르자, 위극신이 다시 미끄러지는 것처럼 다가와 검선을 공격했다. 위극신의 공격은 외기발현 장력이 주를 이뤘다. 더군다나 한 쪽 손은 불꽃이 휘감긴 것처럼 불그스름하게 변하고 있었고, 반대편은 한빙마제처럼 극음의 장력을 품은 것처럼 푸른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작태를 보며 이서휘와 검선은 콧방귀를 끼고 있었다.

검선과 이서휘는 무척 빠른 속도로 서로의 자리를 바꿔가면서 검마와 위극신의 공격에 대응했다.

두 사람이 전력을 다해서 힘을 합쳐 싸우는 것은 처음이다.

그런데 이서휘는 마치 검선이 어떻게 행동할지 모두 꿰뚫은 것처럼 행동했고, 그런 이서휘의 보조에 검선은 더욱 자유롭게 검을 휘둘렀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위극신과 검마를 가둬놓은 것처럼 이서휘와 검선의 공격이 무차별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검마와 위극신은 버텨냈다.

검마의 신체가 대부분의 공격을 튕겨내고, 그 순간에 위극신의 집요한 공격과 방어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검선은 구성검이 검마의 몸에서 튕겨 나올 때마다 금속음이 터져 나오자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서휘가 칠흑검을 휘두르면서 말했다.

“도검불침입니다.”

“후후후… 그런가?”

맞붙은 네 사람이 순식간에 칠십여 초를 겨루자, 검마와 위극신은 이서휘와 검선의 실력이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위극신은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순간적인 폭발력은 자신들이 한 수 위일 것이라 내다보고 있었다.

더군다나 검마가 생명을 포기한 것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마검을 피하는 것보다, 검마의 좌장이 더 문제였다. 검마는 기회가 될 때마다 이서휘나 검선의 옷깃을 붙잡으려고 불쑥 내밀었다.

검마와 위극신도 서로의 무공을 잘 알고 있는 상태.

네 사람의 천재가 무림사에 다시없을 단체전을 펼치는 형국이었다.

그 사이에 검마와 위극신이 눈을 마주치면서 의견을 교환하고.

검선과 이서휘가 눈을 마주치면서 상황을 재고 있었다.

네 명 모두 각자의 절명기가 있었다. 넷 중 하나라도 빈틈을 보인 다면 두 사람의 절명기가 한 사람에게 쏟아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진영은 달랐으나… 네 사람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승부는 한 순간이로구나.’

검마는 내공의 운용이 특이한 지라 끊임없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검을 휘둘렀고.

위극신은 동생의 힘을 흡수한 상황에서 거대한 힘이 담긴 성명절기를 감춰둔 채로 상황을 엿보고 있었다.

검마의 마장검극의(魔將劍極意).

위극신의 일월광천지세(日月光天地勢).

마교 교주 제월헌마저 끝내 무력하게 만들었던 두 사람의 성명절기다.

더군다나 위극신은 위극명을 흡수했기 때문에 일월광천지세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이었다. 왜냐하면 위극명도 혈옥귀체(血玉鬼體)와 청옥귀체(靑玉鬼體)를 오랜 세월에 걸쳐 흡수한 터라, 무시못할 일월마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장검극의와 일월광천지세를 한 사람에게 쏟아내면, 이서휘든 검선이든 한 명은 반드시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이미 네 사람에 의해 일대가 초토화된 상태.

처음에 싸우기 시작한 장소에서도 한참 멀어진 상태였다. 발을 한 번 박차고 물러나면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지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여파로 건물이 가득했던 자리는 네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폐허가 된 것처럼 무너지고 있었고, 서서히 네 사람은 걸리적거리는 건물이 없는 공터로 점점 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심 초조한 쪽은 이서휘와 검선이었다.

백도맹 분타에 머물고 있는 인원이 마교보다 열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두 사람은 아직 검림이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새 검마의 웃음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검마와 위극신이 다시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검선이 무언가를 깨닫고 구성검을 휘두르는 도중에 이서휘를 스쳐 지나가면서 경고했다.

“조심해라.”

이서휘도 적들의 성명절기를 기다리는 중이어서 짧게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누굴 노리자고 대놓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검선과 이서휘의 생각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일치하길 바라야 할 터였다.

네 사람이 서서히 성명절기를 쏟아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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