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40화 (40/43)

<3장. 격돌>

검선이 기어코 흑도맹원들과 무림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흑도맹주에게 패배를 안겼다.

충격적인 일이다.

비무를 벌이자고 검선이 몰아간 것도 아니었다.

맹서웅의 작태를 지켜보다가 몇 마디를 건넸고, 전광석화처럼 비무가 벌어졌으며 그 결과로 맹서웅은 어깨가 관통되는 부상을 입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하지만 맹서웅의 대처도 무척 담대했다.

명왕대주 송무진을 단주로 승격시키고 지휘권을 넘겼던 것.

어차피 데려온 자들 중에선 송무진의 무공과 장악력이 특출했다. 다른 단주들이 있어 급이 맞지 않았으나, 맹서웅이 송무진을 단주로 승격시키자 이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을 수락하는 송무진 또한 당연하다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놀란 것은 오히려 백도맹과 군림맹이었다.

고작 서른 중반도 되지 않는 명왕대주(明王隊主) 송무진을 단주로 승격시켜서 전권을 일임했기 때문.

“송무진이 누구인가?”

“처음 듣네. 듣자하니 대주에서 단주로 승격됐다던데 이번에.”

“하여간 특이해.”

이 인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는 이서휘가 유일했다.

‘흑도도 이렇게 시대가 바뀌는구나.’

맹서웅은 흑도맹으로 돌아가지 않고, 흑도의 작전권을 이어 받을 송무진을 데리고 검선에게 갔다. 어쨌든 명목상이라도 검선이 연합 맹주였기 때문.

검선도 새롭게 흑도를 이끌 남자, 송무진을 보자마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젊구나.”

맹서웅은 송무진을 검선에게 소개시키면서 다음 시대를 이끌어 나갈 후배라 소개했다. 검선의 안목이 자신과 동일한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송무진이 검선에게 인사를 올렸다.

“후배 송무진, 검선 선배님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휴식하고 있던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젊은데 기도가 실로 무겁구나. 송무진이라고?”

“네.”

“백도와 너무 흉흉하게 지내는 것도 피곤한 일이야. 기왕 손을 잡은 김에 너희 시대가 오면 적당히 좀 지내도록.”

검선이 송무진에게 묘한 말을 남긴 다음에 옆에 있는 이서휘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음 시대의 백도는 내 의자가 이끌어나갈 것이니 두 사람은 잘 알아둬야겠구나.”

그러자 송무진과 이서휘가 새삼 눈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미소를 짓자, 검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둘이 아는 사이였느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송무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일전에 제가 한 번 패했지요.”

“그래?”

검선이 두 사람을 바라보다 능청스럽게 말했다.

“종종 만나서 자주 싸우도록 하게. 아직 둘 다 젊으니까 우열을 가릴 기회는 여러 번 생길 게야.”

“네?”

“하하.”

송무진이 고개를 갸웃하고,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렸다.

검선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신에 흑도와 백도에 큰 일이 생기면 두 사람이 싸워서 합의를 봤으면 좋겠군. 깔끔하지 않은가? 무림인이라면 그런 면도 좀 있어야지. 지금처럼 이렇게 많은 사람을 대동해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닌가. 송무진, 마도와는 방식이 달라야지 않겠나?”

대체 이 정도로 백도와 흑도를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자가 그간 무림에 있었나 싶을 정도다.

검선의 말에 송무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리 하겠습니다.”

이서휘도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네, 의부님.”

맹서웅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대주.”

“네, 맹주님.”

“아직도 그 불패의 전적, 깨지지 않았나?”

맹서웅의 말에 이서휘가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아 아직 그렇습니다만.”

맹서웅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검선에게 말했다.

“대체 언제부터 가르치신 게요? 선배의 양아들이 일전에 흑도맹에 와서 불패의 전적을 자랑했었습니다.”

맹서웅의 말에 검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휘야, 네가 아직 패배한 적이 없다고?”

“네.”

검선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쯧쯧, 젊었을 때는 패배도 경험해봐야 하는데 말이지. 불패를 고집하는 것도 좋지 않다.”

“으음….”

검선의 말에 맹서웅, 이서휘, 송무진이 침음을 흘렸다.

이서휘가 알기로는 검선도 딱히 패배한 적이 없는지라 고개를 갸웃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의부님께서는… 그간 패배하신 적이….”

이서휘의 말에 검선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야 없지. 너희는 필요하다고.”

이 앞뒤 맞지 않는 말에 듣고 있던 자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묘한 여운을 줬다.

검선이 말을 이었다.

“과거에는 나보다 강한 상대가 여럿이 있었는데 되도록 피해 다녔다. 무척 오랫동안 말이야. 어느새 다 죽어 있더구나.”

“피해 다니셨다고요?”

“몰랐느냐? 나는 허리가 안 좋아서 싸우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느니라.”

맹서웅의 입에서 쩝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가버렸다.

“하여간 이상한 노인장이야. 먼저 가리다. 가자, 무진아.”

“네, 검선 어르신.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두 사람이 나가자 검선이 히죽 웃었다.

“송무진이 요주의 인물이군. 웃지 않더구나. 마음이 무거운 놈인가 보다.”

검선은 어쩐지 계속 송무진을 살피느라 실없는 농담을 던진 모양이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나중에 겨루게 되면 팔 하나 정도는 잘라 놓아라.”

어쩐지 검선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이서휘가 검선의 표정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농담이다.”

“으흠….”

“뭐 나쁜 짓을 하면 그리 하란 얘기지. 매번 그렇게 진지하게 들을 필요 없다. 서휘야….”

“아,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그 순간에 욱하는 심정과 당황스러운 마음이 교차되더니 갑자기 도이와 도삼, 단우혁이 그리웠다.

‘이 놈들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걸까.’

이서휘는 검선과 대화를 할 때마다 검을 겨루는 것처럼 불쑥 허초에 속고, 실초에 당했다가 검기에 혼쭐이 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서휘를 당황하게 만드는 사람이 과연 천하에 몇이나 있을까. 역시 천하제일은 아무나 오르는 자리가 아니었다.

☆ ☆ ☆

며칠 후 장안에서 백도맹, 군림맹, 흑도맹이 감숙으로 출발했다. 소수는 남아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화산파, 백검문, 청협문 등의 백도 세력을 기다릴 셈이었는데….

이서휘와 검선, 부상을 당한 맹서웅 맹주는 장안에 남아 있다가 후발대로 합류할 생각이었다.

때문에 백도맹주 범우, 군림맹주 남궁위, 흑도맹 송무진이 이끄는 선발대가 먼저 총본산 근처에 도착해서 후발대를 기다리기로 약조한 상태.

하지만 어느새 강행군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한 세 세력은 누가 먼저 총본산에 도착해 선봉대를 자처할 것인지 겨루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원초적인 인간의 심리가 군중을 지배할 때가 많았다.

반면에 이서휘는 맹주들에게 보고한 대로 특작대를 꾸렸다.

그 덕분에 이서휘 곁에는 무당파의 유은결, 흑도맹의 염라대주 한서령(韓曙逞) 등이 남은 상태였다.

무력 조직은 감숙으로 향했지만….

정보 조직은 여전히 섬서와 감숙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백도맹 장안 분타에서 기다리면 정보가 모이기 마련이었다.

이서휘는 검림 세력까지 합류시킨 다음에 감숙의 외곽에서 변수를 차단할 생각이었다.

백도와 흑도의 목표는 마교였으나, 이서휘의 목표는 위극신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 ☆ ☆

강행군 끝에 군림맹, 백도맹, 흑도맹의 병력이 총본산에 도착했다.

하지만 삼천 명이 넘었던 병력은 감숙에 진입하자마자 어느새 수백 명이 줄어든 상태였다.

특히 백도맹 세력의 이탈이 가장 심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최초 병력은 애초에 백도맹이 가장 많았다. 종남파를 제외한 구파에서 고수를 추려 각기 백 명 정도를 차출하고, 나머지 인원은 맹에 주둔하고 있던 조직에서 차출하여 더했다.

하지만 수가 많다 보니 병참이 문제였다.

행군이 길어지니 온갖 부상도 속출했다.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도 현실적인 문제는 어쩔 수 없었다.

전염병에 걸린 자, 배탈 같은 소소한 질병으로 전력이 도움이 안 되는 자, 낙마, 다리 부상 등 이탈 이유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 중 가장 많은 이탈 사유는 이유 없이 도망치는 자들이었다.

특히 정마대전이 벌어진다고 부푼 기대감으로 합류해서 가장 큰 목소리로 떠들던 자들이 소리 없이 빠져 나갔다.

노모가 걱정이 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자.

몸이 아파서 물러난다는 자.

혹은 말도 없이 사라지는 자.

그렇게 수백 명이 증발했다.

어쩐지 구파를 제외한 백도 세력이 사라진 느낌이 날 정도였다.

백도맹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거나, 병참 분배에 불만이 있다거나, 이유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행군은 각 맹의 결속력을 시험하는 전쟁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맹이 가장 결속력이 강한가?

오히려 군림맹과 흑도맹의 결속력이 백도맹보다 훨씬 강했다.

정말로 부상을 당한 자들을 제외하곤 이탈하는 자가 없었다.

백도맹의 이탈자 때문에 연합의 사기 전체가 떨어진 상태였다.

또한, 마교가 어느 정도 병력을 보유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진 게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어쩔 수 없이 척후의 보고를 토대로 가늠할 수밖에 없었다.

백도맹의 백협단, 군림맹의 특작대, 흑도맹의 흑풍대.

먼저 출발했었던 세 곳의 척후가 선발대에 합류하여 보고를 이어나갔다.

보고는 비슷했다.

특이 사항이 없고 일부 발견한 병력은 죄다 총본산으로 들어갔다는 소식 뿐.

그 수가 얼마인지를 묻자, 각기 본 것이 달랐다.

백협단이 보고한 수는 오백.

정천의 특작대는 삼백여 명이 합류하는 것을 지켜봤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흑풍대는 매우 소수가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모양인데 오히려 더 무거운 소식이었다.

총본산 합류를 저지하려던 흑풍대 일부가 소수의 마교 고수들에게 말 그대로 찢겨나갔다는 보고였다.

백도와 흑도가 도착했는데도 안개가 엷게 깔려 반쯤 모습을 드러낸 총본산은 여전히 고요했다. 누군가 자신의 감상을 그대로 내뱉었다.

“불길하구나. 차라리 시끌벅적하길 기대했는데.”

백도맹에 기관진식을 전문적으로 해제하는 조직이 있어 총본산의 초입을 살피기 시작했으나 별다른 기관진식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

워낙 드러난 것이 없는 터라 총본산의 코앞에 자리를 잡은 세 곳의 맹엔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결국 후발대를 기다리기고 하고 병력이 줄지어 늘어서서 각자의 형태로 막사 등을 설치했다.

백도맹은 구파끼리 자리를 잡았고.

군림맹과 흑도맹은 검대나 조직 단위로 자리를 잡았다.

시간은 어느덧 유시(酉時, 오후 다섯 시).

한 차례 강맹한 바람이 불어오고 나서야 총본산에 드리워졌던 안개가 걷혔다.

정찰조의 누군가가 외쳤다.

“적이 나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산 아래로 향했다. 사산의 초입에서 약 백여 명의 인원들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뭘까요? 겨우 백 명 정도인데….”

다가오던 마교의 병력이 우뚝 멈췄다. 전원 같은 복장이었는데 어쩐지 다들 흰색 무복이었다.

“어찌 다들 흰색을 입고 있을까. 마교가….”

하필이면 백도 세력에도 흰색 무복을 입은 자들이 가장 많았다.

그때, 총본산의 외곽에서 무언가가 들썩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끼기기기긱―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에 백도와 흑도 세력 전체가 귀를 틀어막았다.

이어서 총본산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색의 깃발이 솟구치고, 사산 주변의 지상에서 그보다 크기가 작은 깃발이 연달아 등장했다.

깃발에 적힌 것은 다름 아닌 마가의 이름.

백도 세력에서 웃음이 터졌다.

“춘추전국시대도 아니고 뭐하는 짓들이냐?”

몰려드는 깃발을 살펴보니….

환, 음, 번뇌, 묵연, 화, 풍, 괴패, 심연, 수륜, 공륜, 야율, 사자, 혼천, 나락… 등등으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깃발의 바탕색마저 모두 흰색이었다.

어느 세력은 고작 삼십여 명이 깃발을 올린 채로 다가왔고.

어느 세력은 삼백에 달하는 인원이 같은 무복을 입고 걸어왔다.

괴이한 풍경이었다.

또한, 조금 전에 들은 정체 모를 굉음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살피고 있을 때, 후방에 머물고 있던 누군가가 경공을 펼치면서 다가와 맹을 향해 외쳤다.

“병력을 일자 대형에서 방진으로 전환하십시오. 바깥에 총본산에서 이어지는 비밀 통로가 있는 모양입니다.”

외부에서 백도 세력을 포위하는 형태로 마교의 병력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수는 아니었다. 그저 포위하는 형태로 모양만 갖춘 꼴이었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리자, 깃발을 들고 있던 마교의 병력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거대한 원형진으로 백도와 흑도를 가둔 채로 마교의 병력이 달려들었다.

병장기 뽑는 소리가 파도가 치는 것처럼 이어지고, 곧이어 백도맹주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포위뿐이다. 흔들리지 말고 방진으로 대응하라.”

확실히 수는 여전히 백도가 더 유리했다.

남궁위는 본진에 눌러앉아, 굵직한 어조로 검대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하고.

지휘권을 넘겨받은 송무진은 거대한 흑부를 쥐고 총본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흑도맹은 적진을 돌파해서 총본산에 진입한다. 정예 세력이 아닌 거 같다.”

위극신과 이서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와중에… 정마대전이 불쑥 시작되고 있었다.

정예를 감춘 마교의 전력과 후발대가 합류하지 않은 연합 세력의 일차전인 셈이었다.

한데, 후방에서 등장한 마교 세력의 복장도 전원 흰색 무복이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추측 섞인 한 마디가 백도 세력의 가슴을 일제히 싸늘하게 만들었다.

“이놈들은 순교자(殉敎者)들인 것 같소!”

순교(殉敎)란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마교는 이 점이 문제였다.

그 자신이 배척을 당하는 와중에도 철저히 남을 배척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겐 총본산으로 몰려온 자들이 누구인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죽을 생각뿐이었다.

자신들의 성역이라 불리는 총본산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위극신이 순교자들에게 남긴 말도 실로 가관이었다.

“이미 우리가 열세다.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곳을 그대들에게 맡기고 중원 무림의 본거지로 가서 겁화(劫火, 인간세계를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리는 큰 불)를 일으키겠다.”

위극신은 순교자와 겁화를 일으킬 전사(戰士)를 구분했다.

이 순간, 일월마가 대부분은 전사 쪽에 배치됐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런 모순을 지적하지 않았다.

순교자들은 대부분 자의로 지원한 것이라 스스로 믿고 있었다.

위극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순교자들이 백의를 걸치고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참으로 모순적인 상황이다.

왜냐하면 사태를 이렇게 만든 위극신은 마교에 대한 아무런 충성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이용할 뿐이다.

마교가 그간 무림에 공포로 작용했던 이유는 이들의 본질이 무림인이 아니라 무림세계보다 중요한 종교세계의 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이치나 설득이 통하지 않는 존재다.

마교를 거슬러 올라가면, 불로 세상을 정화시킬 악신(惡神)을 기다리는 자들이 만든 종교가 있었다.

그 악신의 이름은 여러 가지였다.

‘아리만’이라 불릴 때도 있었고, 성화신(聖火神)이라 불릴 때도 있었다.

그 추종 세력의 일부가 중원 무림으로 흘러 들어와 분쟁을 겪으면서 성장한 것이 당대의 마교였다.

하지만 그 마교마저도 다시 교리에 따라 복잡하게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하지만 위극신은 이러한 것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저 지배자의 통치수단으로 봤던 것.

더군다나 위극신은 자신의 가문이 속해 있던 일월성교의 교리도 믿지 않는 자였다.

위극신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믿었다.

때문에 그가 만든 세력이 천마교였고, 천마는 자신을 칭하는 말이었다.

전통에 기대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종주가 되려는 야심가였다.

이미 위극신에게 마교의 순교자들은 쓸모가 없었다.

백도와 흑도에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그 자신은 이미 섬서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다.

누군가의 외침을 듣고서야 이 자들이 순교자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차라리 무림인끼리의 대결이었으면 이토록 허망하지 않을 터.

무림인들이 알고 있는 전쟁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때때로 동료의 죽음에 절망하고 분노하는 자들이 튀어나와 비장한 복수전을 치르다가 쓰러지곤 하는 것이 무림인들이 알고 있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달려드는 자들 모두 죽음을 각오했으니….

이 순교자들에겐 동료들이 죽든 말든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 때문에 무의미하고 무차별적인 살육전을 주고받았다.

백도와 흑도는 밀려드는 순교자들을 몰살시키고 나서야 이 자들의 뒤에 거대한 악(惡)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도대체 누구냐.

이 천인공노할 짓을 계획한 자는….

그 자야 말로 죽여야 할 자다.

들끓은 분노가 치솟자….

어느새 달려드는 순교자들을 죽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워지고, 백도와 마도는 점점 살육의 광기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우두머리를 죽여야 한다.]

[악의 근원을 뿌리 뽑아야 한다.]

백도맹, 군림맹, 흑도맹원들의 눈빛에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분노와 살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딱 이 시점에서, 위극신이 남기고 간 두 번째 간계가 시작됐다….

마침 날이 어두워지고 달이 뜬 상황.

총본산에서는 안개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어느새 총본산에서 내려온 일부 병력이 순교자들과 같은 백의를 걸치고 전장에 추가로 투입되었다.

이들은 안개를 발판삼아, 동서남북으로 퍼져서 괴패마가가 펼쳤던 마라월혼지망(魔羅月魂蜘網) 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동서남북에서 뻗어 나가기 시작한 희뿌연 연기가 달무리를 이루더니 사산 일대를 휘감았다.

그 다음에는 실로 슬프게도, 참극(慘劇)만이 남아 있었다.

총본산에서 일월마가가 공수한 잔사진천뢰(殘絲振天雷)을 휘감은 순교자들이 내려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마라월혼지망에 의해 이미 일대가 극히 어두워진 상황.

폭발음이 연달아 터졌다.

그제야 이 전장에서 가장 냉정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던 사나이가 일어섰다.

“수호팔검.”

“네, 맹주님.”

“두 명씩 짝을 이뤄 외곽으로 이동해 대법을 깨뜨려라. 기이한 색의 안개가 동서남북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죽더라도 반드시 끊어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가라, 한신 있느냐?”

“네, 맹주님.”

“이 폭발음은 무엇인가.”

“이것은 백도맹을 공격했다던 진천뢰 계열 같습니다. 마교가 몸에 두르고 돌진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유백.”

“네, 맹주님.”

“수호팔검이 이 대법을 막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추가 폭발을 저지해라. 원거리 무기로 죽이든지…. 검기를 운용할 수 있는 고수들을 끌고 가든지 알아서 판단해라.”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한신은….”

“네, 맹주님.”

“백도맹주와 송무진에게 내 의견을 전해라.”

“네.”

“피해가 예상 외로 크구나. 대법을 차단한 다음에 멀찍이 물러났다가 내일 시야가 밝아지면 그때 총본산을 밀자고 해라. 지금은 퇴각하는 게 옳다고 일러라.”

“알겠습니다.”

“만약….”

“네.”

“두 곳이 거부하면 군림맹만 전원 철수시켜라. 가라.”

“다녀오겠습니다.”

한신이 떠나고 두 눈을 부릅뜬 남궁위가 갑자기 어디론가 신형을 날리더니 어느새 가슴께로 밀려든 단검 세 자루를 맨 손으로 후려쳤다.

남궁위의 손에 하얀 강기가 맺히더니 허망한 소리와 함께 단검들이 대번에 부러지고 흑의를 걸친 암살자들이 핏발이 선 두 눈을 빛내며 추가 공격을 펼쳤다.

하지만 그 사이에 남궁위의 전신에 백색의 뇌기(雷氣)가 감돌았다.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쌍장을 휘두르자, 숨어서 기회를 엿보던 암살자들의 상반신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어느새 자세를 돌린 남궁위의 표정은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되어 있었다.

분노에 찬 남궁위가 쥐어짜듯 말을 내뱉었다.

“고작 쥐새끼들을 보낸 것을 보니… 총본산을 포기한 모양이로구나.”

마교의 수장들을 죽이기 위해 수하들이 죽어나가도 침착하게 본진에 머물러 있던 남궁위가 그야말로 분노한 상태로 전장을 바라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 쓰레기들이 무슨 생각으로….”

어느새 퍼져 나간 수호팔검에 의해서 마라월혼지망(魔羅月魂蜘網) 대법이 깨지고 있었다.

총본산을 치던 백도와 흑도의 선발대는 남궁위의 걱정대로 예상 밖의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남궁위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더욱 처참한 참극을 목격했을 것이다.

한신이 소식을 가져 오지 않자, 답답해진 남궁위가 내공을 소비할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뱉어 사산 일대를 울렸다.

“백도맹주! 송무진! 병력을 거두시오!”

남궁위는 자신의 목소리를 못 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보나마나 직접 병기를 쥐고 어딘가로 뛰어나간 모양이었다.

그 순간에 송무진은 최전방에서 터져 나간 맹원들을 살펴보다가 남궁위의 목소리를 들었고.

백도맹주 범우는 직속 호위들과 함께 후방으로 물러나다가 남궁위의 외침을 들었다.

남궁위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이런 곳에 와서도 무림의 협객처럼 싸운다는 말이더냐. 한심한 작자들아….”

그때, 누군가가 남궁위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게 말이야…. 남궁 맹주.”

하지만 남궁위는 여전히 전방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누군가의 말이 이어졌다.

“잘 있었나?”

짙은 어둠 속에서 그 어둠보다 짙은 마기를 내뿜고 있는 한 남자가 남궁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궁위는 움직이지 않았다.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대꾸했다.

“네 놈, 누군가 했더니 주양위의 사제로구나. 사형 따라 죽을 결심을 한 것이냐? 자신이 있으면 이곳으로 오너라.”

남궁위는 마치 전장에 강림한 장수처럼 백도 세력 중앙에 서서 전장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남궁위 맹주는 분노한 무림인이 아니라….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의 마음가짐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선발대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남궁위의 마음가짐 덕분이었다.

간천 장로는 섣불리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다른 전장으로 스며들어갔다. 유인할 생각이었는데 남궁위가 마치 석상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천의 기도가 사라지자, 남궁위가 누군가를 불렀다.

“무영(無影)아.”

“네.”

누군가의 대꾸와 함께 백룡검(白龍劍)을 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무영이라는 사람으로 남궁세가 방계의 인물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은자(隱者)였다.

경공과 은신술이 특히 뛰어난 고수였는데 외모가 남궁위와 흡사했다.

남궁위가 남궁무영에게 명령을 내렸다.

“장안으로 속히 복귀해 이 사태를 알려라. 마교의 수장들이 빠져 나간 것 같으니 경계하라 이르고. 그 다음에 넌 군림맹으로 복귀해 수호전주에게도 기습에 대비하라 일러라. 아, 그리고….”

“네, 말씀하십시오.”

“혹시 내가….”

“네.”

“아니다. 됐다. 어서 가라.”

“알겠습니다.”

남궁무영은 질문 한 번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맹주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갔으나…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맹주님, 죽지 마십시오.’

☆ ☆ ☆

선발대는 그야말로 위극신에게 당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상황.

이 순간에 위극신은 정예 병력을 이끌고 여산에 마련해둔 안가에 도착해 그간 모아 놓은 정보를 빠르게 훑어보고 다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위극신을 따라온 정예 병력은 그야말로 마교의 최고수들이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위극신의 말을 듣고 있는 고수들만 해도 위극신의 좌우사자, 일월마가의 위극명과 위극단, 한빙마제, 이십일가의 일부 가주들과 좌우사자들, 제월헌에게 감금되었다가 풀려나온 일부 전대 가주들과 일월마가에 투신했던 장로들이 있었다.

위극신은 이미 총본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관심이 없었다.

위극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보고를 살펴보니 종남은 불태울 가치도 없겠군. 종남은 나중에 치고 지금은 화산파로 간다. 병력이 남아 있든 없든 화산파 본거지와 그곳에 있는 개와 말까지 불태울 것이다. 그 다음은 백도맹 본진…. 가자.”

“알겠습니다.”

실로 섬뜩한 작전이자 심계였다.

이서휘가 검선과 머무르고 있는 장안은 여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위극신의 행보를 예상한 이서휘마저도 위극신의 위치까진 파악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위기를 겪어야 사람의 진가가 발휘된다.

선발대로 출발했던 인원 중에 남궁위 맹주가 없었더라면 백도 세력은 총본산과 함께 불에 휩싸였을지도 모르는 형국이었다.

남궁무영이 다시 장안으로 달려오고 있을 때….

이서휘는 검선과 함께 여전히 소식을 기다렸다.

이미 시작된 정마대전이라 사소한 정보를 담은 전서구가 끊임없이 각지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다행히 검선이 통합 맹주 자리에 오른 지라, 이서휘도 즉각 정보를 살펴 볼 수 있었다.

물론 정보만 모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우혁이 청협문과 함께 도착하고, 이어서 백류혼이 백검문을 이끌고 도착했다.

그날 저녁엔 한 사내가 홀로 백도맹 분타를 기웃거리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사패 두 명과 재회하고 있는 이서휘를 불렀다.

“어이, 이 대주.”

이서휘가 돌아보니 그곳에 시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는 사마초가 서 있었다.

위극신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이서휘와 함께 반격에 나설 동료들이 서서히 모여들고 있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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