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집결>
이서휘와 검선이 종남파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보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두 사람은 종남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모조리 처리한 이후에 물러 나왔다.
이제 종남파의 일은 종남파가 감당해야 할 터.
장연후가 장문직을 이어 받도록 지켜본 후에 이서휘는 전중산을 비롯한 천대암의 사제들에게 경고의 말을 남겼다.
[장연후가 그 어떤 이유에서든 장문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될 경우 의부님과 다시 종남파에 방문하겠소.]
다행히 검선이 미소를 지어가며 종종 오자는 둥의 말을 남겨 내심 전중산을 다음 장문인으로 밀려던 일파의 낯빛이 대번에 무거워졌었다.
이서휘가 본래 다음 행선지로 생각했던 화산파로 가지 않고, 방향을 선회해 장안에 도착한 이유는 명확했다.
검선 때문이었다.
이서휘는 지난날 화산비사를 읽었던 터라, 검성(劍聖)이 화산파로부터 모함을 당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의부가 혹시라도 불편하게 생각할까봐 이런 시국에 굳이 화산파로 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검선이 털어놓은 사정은 달랐다.
[젊은 시절, 화산파의 고수와 겨루다가 내 무공의 뿌리가 화산파라는 사실을 알았지. 그 이후로는 오랜 세월에 걸쳐 화산파 무공을 버리고 내 스스로 무공을 창안했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 그 이후로 화산 근처에도 가지 않게 되더구나.]
물론 이서휘가 전생에 익힌 무공은 검선이 창안한 것이라 화산파와 별 다른 관련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이서휘는 검선과 함께 장안에 도착한 상태였다.
이미 장안은 북새통이었다.
검선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허어, 본래도 사람이 많은 장안인데 지금은 일전의 두 배는 되는 것 같구나. 장안에 온 적이 있느냐?”
“처음입니다.”
이서휘도 대꾸를 하면서 몰려온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백도 세력이 몰려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백도맹이 장안으로 모이라 했더니….
섬서의 백도 세력이 대부분 몰려든 상황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객잔 한 곳만 들어가도 돌아가는 상황이 훤히 보였다.
[군림맹도 출발했다더라.]
[흑도맹까지 나섰다는군.]
[무림사 이래 유례없을 대규모의 연합군이라고 하더만.]
[마교가 아무리 대단해도 버텨내지 못할 걸세.]
이미 승리는 기정사실화된 것처럼 보였다.
그럴 만도 하다.
건재한 세 곳의 맹에서 대규모로 무인들을 파견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이서휘가 동분서주하면서 판을 짜놓아 전생과는 운명이 달라졌다지만, 이 들뜬 분위기에 오히려 마음이 이상한 것은 이서휘였다.
“기분이 묘하군요.”
“어째서.”
“너무 순조롭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검선이 씨익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간 실패를 많이 겪었나보군.”
“흐음….”
검선은 몰려온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느낌을 말했다.
“너무 많아 오합지졸처럼 보이는구나.”
“오합지졸이오?”
“무림인은 군대의 병력과는 성격이 다르지 않느냐. 제 멋대로인 데다가 통제도 어렵다. 맹이나 되어야 규율이 제법 서 있지. 어중이떠중이 문파들을 봐라. 이게 정마대전을 하겠다고 온 것인지 장안으로 술을 마시러 온 것인지 모르겠구나.”
검선의 말에 이서휘가 살펴보자 이른 저녁부터 취객이 가득했다.
괜히 마른 웃음이 흘러 나왔다.
‘의부님 말씀처럼… 이게 대체 무슨 분위기란 말이냐.’
군림맹만 하더라도 원정 지역에 가면 음주를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야말로 가지각색의 문파가 섞여 있어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판을 짜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들뜬 마음으로 장안에 몰려든 무림인들을 보자, 이서휘의 심정은 다소 답답했다.
‘개판이로구나.’
심지어 정사지간의 문파들로 대거 참여한 상태였다.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퍼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마교를 물리치자.]
그 순간 이서휘는 왜 전생에 각종 세력들이 천마교에 차례차레 무너졌는지 그제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오합지졸이었구나.’
그나마 제대로 된 세력은 구파를 비롯한 백도맹과 이서휘가 속한 군림맹이었다.
오히려 군림맹은 백도맹보다도 더 규율이 더 엄격하고 군대를 지향하는 무력조직에 가까웠다.
그리고 아직 등장하지 않은 흑도맹도 마찬가지….
나머지 중소문파는 마치 전쟁이 끝난 후에 전리품이나 얻어가려는 도둑떼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각하구나.’
몰려온 자들의 태반은 마교와 싸워보지도 못한 자들이다. 마교와 가장 많은 교전을 벌인 것은 아마도 군림맹이 유일할 터.
두 사람은 객잔에 들어가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다가 검선에게 말했다.
“의부님, 혹시 연합 맹주가 되실 생각은….”
“없다.”
“네, 물론 없으시겠지요. 한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실로 엉망입니다. 분명히 범우 맹주, 남궁위 맹주, 맹서웅 맹주는 서로 총대장을 맡겠다고 경쟁할 게 분명합니다. 누구 한 명이 특출하게 나은 상황도 아닙니다.”
이서휘의 말에 검선이 놀란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것은 언제 파악했느냐?”
“일전에 한 번 군림맹을 떠나서 살펴봤습니다. 딱히 의부님이 아니면 연합 맹주를 맡을 사람도 없습니다.”
“늙은 내가 이런 시국에 무얼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보십시오. 그야말로 오합지졸입니다. 차라리 정예만 추려서 감숙으로 가는 게 나아 보일 지경입니다. 놀러 가는 것으로 아는 자들이 수두룩하군요. 혼란만 가중될 것입니다.”
“그것은 좀 걱정이 되는구나. 마교가 전쟁을 치르는 것에서만큼은 허술한 놈들이 아닌데… 지난 역사가 말해주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정 걱정이 되면 네가 연합 맹주를 하든가.”
검선이 말을 내뱉고 실실 웃었다.
이서휘가 황당한 얼굴로 대꾸했다.
“전 일개 대주입니다. 세 명의 맹주를 제가 어떻게 거느리겠습니까?”
“그래? 그 맹주들이 아들보다 강한가?”
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뜬금없이 검선이 이서휘를 도발했다. 오료의 경지에 접어든 이 상황에서 과연 이서휘가 맹주들보다 약할까?
새삼 질문을 받고 나서 이서휘가 잠시 고민했다.
“딱히 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때, 이서휘의 대꾸에 객잔 한 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와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
“아, 정말 미쳐서 돌아가시겠구나!”
하지만 이서휘와 검선의 대응 또한 실로 가관이었다. 자신들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자, 이서휘와 검선도 시선을 마주치곤 마음껏 웃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뭐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노복들이나 입고 다니는 장포를 걸친 노인네와 새파란 청년이 ‘연합 맹주’를 권하질 않나, ‘그냥 네가 맹주해라.’라고 하질 않나.
누가 봐도 미친 자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가 호통을 내질렀다.
“야 이 미친놈들아! 어디서 굴러먹다 와서 감히 세 명의 맹주를 아래로 본다는 둥 연합 맹주를 하라는 둥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이서휘는 평소와 다르게 웃음이 계속 터졌다. 이서휘가 급히 일어나서 주변을 돌아보며 포권을 취했다.
“술에 취해 그만 마음껏 떠들어 보았소. 형제들은 괘념치 마시오. 사과하리다.”
이서휘가 검선을 보며 히죽 웃었다.
“의부님, 자리를 옮길까요?”
그때 구석 자리에서 내공을 실은 목소리가 객잔 전체에 울렸다.
“이 대주, 그럴 필요 없네. 이리 와서 같이 한 잔 하세나.”
이서휘가 시선을 돌리자 객잔 한 쪽에 뜻밖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백협단주 담가막(潭嘉嗼)이었다.
담가막을 보자마자, 이서휘가 탄성을 내질렀다.
백협단은 본래 섬서에서 가장 활동이 많은 단체였다. 이서휘는 모르고 있었으나 장안의 백도맹 분타도 백협단의 실세들이 머무르는 조직이었다. 담가막이 백도맹주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
이서휘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담 단주님!”
“후후후, 여기서 보게 되나니 그야말로 반갑군.”
그나저나 이서휘가 일어서자 이서휘에게 욕을 했던 정사지간의 인물 한 명이 이서휘를 막아섰다.
“넌 뭔데 그렇게 허튼 소리를….”
“시끄럽고, 비켜라.”
이서휘가 손을 뻗어 어깨를 누르자, 막아섰던 사내가 대번에 양 무릎을 바닥에 꿇으면서 쿵 소리를 객잔 전체에 울렸다.
검선이 미소를 지으면서 무릎 꿇은 사내를 보고 괜히 히죽 한 번 웃었다.
이서휘가 범상치 않은 노고수를 한 명 모셔오자 담가막은 잠시 살펴보다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수가 고수를 알아본다고.
담가막은 노고수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저절로 일어나게 됐던 것.
검선도 담가막을 처음 만난다.
하지만 이서휘가 담가막을 무척 반가워하는 것만큼이나 짧은 순간에 담가막을 살펴보곤 속으로 감탄을 삼키고 있었다.
‘제법 괜찮은 후배로구나.’
담가막이 이서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함께 오신 어르신은 누구신가.”
사람이 하도 많은 터라 대번에 검선이라고 소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서휘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적당히 소개했다.
“제 의부님입니다.”
“의부님?”
하지만 담가막은 이서휘의 표정을 보고 의부라는 사람을 나중에 소개해주겠다는 뜻을 파악한 상태.
대신에 담가막은 그야말로 정중하게 예를 올리면서 자신을 밝혔다.
“백도맹의 백협단주 담가막이라 합니다.”
그의 말에 검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유명한 백협단주가 자네였군. 반갑네.”
동시에 객잔에 머무르고 있던 자들이 그제야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백협단주라고?”
“오오! 백도맹이 벌써 와 있었군.”
“허허….”
장안에 머물던 자들이야 백협단주를 잘 알고 있었으나, 워낙 다양한 곳에서 온 터라 백협단주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때문에 호들갑이 대단했다. 백협단주의 위명이 섬서 전체에 알려진 모양이었다.
이서휘와 검선에게 호통을 쳤던 자나 비웃었던 자들마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자기 앞에 놓인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쩐지 다들 귀를 쫑긋하면서 담가막, 이서휘, 검선의 대화를 엿들을 수밖에 없었다.
담가막이 말했다.
“앉으십시오.”
담가막은 서너 명의 수하들과 함께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한 명은 얼마 전에 부상을 입었는지 새하얀 천으로 팔을 감쌌고, 다른 한 명도 가슴에 검상을 입었는지 하얀 천을 두르고 있었다.
이서휘가 담가막의 수하들을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담가막이 자신의 수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사람들은 한중을 살펴보던 단원들이네. 그쪽에서 분쟁이 있었다는군.”
이서휘가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하필 한중입니까?”
“하필이라니? 한중에서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이서휘가 담가막을 바라보며 말했다.
“태백파와 한중검가라는 놈들이…. 종남파에 쳐들어왔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천 장문인께서 부상을 입으셔서 마침 저와 의부님이 없었더라면 곤란스러운 일이 발생했을 겁니다.”
이서휘의 말에 백협단원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한중검가 말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단원에게 쏟아지자, 단원이 말을 이었다.
“전부 장원을 비워놓고 사라졌습니다. 추적 끝에 이동하는 자들을 따라잡았는데 느닷없이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단원의 말에 담가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한중검가가 마교 세력이었다는 뜻일세. 그간 의심이 간 세력이었으나….”
담가막의 말에 이서휘와 검선이 시선을 마주쳤다.
“태백파가 마교와 손을 잡은 것일까요.”
검선이 대꾸했다.
“태백파도 몰랐을 가능성이 있을 게다. 저 정도로 신분을 잘 위장했다면 말이야…. 어쨌든 마교 세력도 감숙으로 몰려가는가 보구나.”
검선의 말에 이서휘와 담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 잘 참고 있던 담가막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검선의 정체를 물었다.
“실례지만 어르신, 제가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성함을 여쭙니다.”
객잔에 살짝 정적이 감돌았다.
다들 노고수의 정체가 궁금했던 것.
떠들썩하던 객잔이 이내 조용해지자, 이서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무언가 분위기가 우스꽝스러웠던 것.
대답하고 말고는 검선의 몫인지라 이서휘는 잠시 의부의 대답을 기다렸다.
검선은 그간 이서휘가 함께 다닌 터라 어쩐지 자신이 자꾸 세상 밖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번에도 세상 물정 모르는 늙은이라고 시원찮게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밝혔다.
“검선이라 불리네만….”
“어이쿠, 이런….”
담가막을 비롯한 백협단원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객잔의 상황이 더 가관이었다. 자신들과 별로 관계가 없는데도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길게 정적이 이어졌다….
저마다 충격받은 표정들도 가관이었다.
이서휘가 충격의 물결이 넘실대는 객잔 전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다가, 뜬금없이 농담 아닌 농담 한 마디를 던졌다.
“난 군림맹의 이서휘라 하오.”
그때, 누군가가 다시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어쩌라고. 지금 검선께서 장안에 오셨는데….”
이서휘가 괜히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한데, 술이 잔뜩 취한 누군가가 객잔이 떠나갈 정도로 외쳤다.
“검선께서 참전하셨다!”
아무리 술에 취한 자의 외침이었다지만 이 뜻밖의 호응은 대체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그야말로 난데없이 객잔 안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검선 어르신!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서휘가 둘러보니 다들 감격에 찬 표정들이었다. 이서휘마저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가 검선에게 말했다.
“의부님, 아무래도 통합 맹주는….”
검선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안 한다니까.”
그러자 이서휘에게 눌려서 무릎을 꿇었던 사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셔야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체 어르신을 빼고 그 누가 통합 맹주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큰일을 앞두고… 웃을 일이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뜻하지 않은 의부의 인기에 이서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검선이 정마대전에 참전했다는 소식은 백도 세력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소문은 무척 빨랐다.
덕분에 사기가 무척 오르고 있었다.
은둔자에 가까웠던 검선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든든한 지원군을 만난 것처럼 백도 세력은 열광하고 있었다.
이서휘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분명 혼자 움직였을 터.
이서휘도 의부의 인기에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이서휘와 검선이 머무는 객잔은 연일 방문객으로 가득차고 있었다. 객잔을 옮겨봤자 같은 일이 벌어질 게 뻔했기 때문에 옮길 수도 없었다.
거기에 뜻밖의 소문이 하나 더 퍼졌다….
[군림맹 이서휘 대주가 실은 검선의 의자였다는군.]
[양아들이라고? 그랬군. 젊은 나이에 기이하게 강하더라니….]
[군림맹의 대주가 점창파 장문인을 누른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좀 이해가 가는군.]
물론 백도맹원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한 소문이었다.
장안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또한 검선에 대한 관심 덕분에 이서휘에 대한 위명도 백도맹 이외의 세력에게 점차 퍼져나가고 있었다.
☆ ☆ ☆
백도맹에 이어 군림맹이 도착하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흑도맹주 맹서웅마저 장안에 수하들을 이끌고 도착했다.
맹주들이 서신을 교환하면서 오는 도중에 장안에서 삼자회담을 열기로 합의를 했던 것.
유례없는 일이었다.
백도맹, 군림맹, 흑도맹의 맹주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그 회담이 시작되는 날 세 명의 맹주는 수하들의 보고를 통해 검선이 장안에 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백도맹주 범우는 회담에 모셔오라고 명을 내렸고.
군림맹주 남궁위는 이서휘가 검선의 양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놀란 상태.
흑도맹주 맹서웅은 흑도의 절대자답게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늙은 호랑이의 명성이 과연 소문만큼 대단할까? 궁금하군.”
어느덧 검선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맹주들을 압도하기 시작하자 삼자회담이 아니라 사자회담이 열리는 것처럼 군웅들이 기대하고 있었다.
회담의 장소는 장안의 백도맹 분타.
맹주 세 사람은 공식적인 회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마련된 자리는 고작 네 개.
각 맹주들이 앉아 있고 검선의 자리를 비워둔 상태였다.
그 주변에 대주급 이상의 수뇌부들이 둥그렇게 원형진을 그리고 서 있었다. 또한 수많은 고수들이 분타 바깥에서 안전한 회담이 이뤄지도록 눈에 불을 켜고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이서휘와 검선이 머물고 있는 청풍객잔(淸風客棧).
이서휘가 검선에게 말했다.
“의부님, 가보셔야죠.”
검선은 여러 차례 초대를 받았으나 확답을 하지 않은 상태. 이서휘에게 거듭 확인하듯 질문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상징적인 자리입니다. 맡으셔도 됩니다.”
이서휘는 계속 검선에게 통합 맹주 자리에 오르라고 권유한 상태였다. 가장 큰 이유는 흑도맹주 맹서웅 때문이었다.
검선은 백도의 인물이었으나 유일하게 맹서웅을 후배라 부를 수 있는 노고수였다.
달리 사람이 없었다.
검선이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흑도맹주도 왔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혹시 아십니까?”
이서휘의 말에 검선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렇게 마음에 드는 친구는 아니지. 흑도의 수장이니까. 이렇게 손을 잡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야. 더군다나 그 자는 패왕이라 불리는 사람…. 이번 일에 얼마나 협조적일지 걱정도 되고, 정마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느냐. 마교를 격퇴한다고 해서 흑도맹이 흩어지는 것도 아니고.”
보기 드문 검선의 냉혹한 평가가 뒤따랐다.
전생의 이서휘가 검제로 활동하던 시절의 흑도맹주는 송무진이다. 따라서 이서휘도 맹서웅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지난날 사자로 가서 본 게 전부였다.
성격이 호쾌한 반면에 권위적인 면모도 강했다는 인상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검선은 맹서웅이 못내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검선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두 맹주는 오랜만에 보고 싶구나. 가자.”
이서휘가 검선을 뒤따르며 말했다.
“엇? 두 맹주를 이미 보셨습니까?”
“그럼. 무척 오래전 일이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아.”
결국에 검선이 나서자 백도맹원들이 즉각 나서서 검선과 이서휘를 분타로 안내했다.
☆ ☆ ☆
사자회담이 벌어졌다.
맹의 병력은 장안 주변에 주둔한 상태.
세 명의 맹주는 각자 감숙으로 갈 인원을 공유하고, 진격 방향, 공동으로 차출하여 맡길 임무 등에 대해 논의할 생각이었다.
더불어 장안에 모인 자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버린 통합맹주도 뽑아야했다.
군림맹과 백도맹만 있었다면 결정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흑도맹이 끼어서 어려운 일이었다.
여론도 점점 검선이 통합 맹주를 맡을 거라는 식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런 목적으로 검선이 사자회담에 초대되었다.
네 명의 무림인.
각자의 진영 혹은 위명으로 각기 정점을 찍은 자들.
이미 세 명의 맹주가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서로를 가늠하느라 분위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그런 와중에 검선과 이서휘가 등장했다.
세 명의 맹주가 검선을 보자마자 일어섰다.
이서휘는 검선을 빈자리로 안내하고 군림맹의 고수들 쪽으로 이동해 오랜만에 만나는 쌍각의 각주들에게 예를 올리고 자리를 잡았다.
역사적인 순간이라 이서휘도 가슴이 설레는 것은 마찬가지.
용케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서휘가 홀로 이뤄낸 일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검선이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이서휘의 공이 컸다.
백도맹주 범우가 예를 올리면서 말했다.
“검선 선배, 어서 오십시오. 제가 선배라는 말을 쓰는 것도 무척 오랜만이로군요.”
“오랜만이다. 너도 많이 늙었구나.”
검선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남궁위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로 짤막하게 예를 올렸다.
“후배 남궁위가 검선을 뵙습니다.”
“남궁 맹주, 잘 지냈나? 어째 살이 더 쪘구나.”
어처구니가 없는 검선의 말에 남궁위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선배님, 이게 다 근육입니다만.”
맹서웅의 반응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노인장, 어찌 여태까지 살아계셨소.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뵈니 참으로 영광이오.”
맹서웅의 말에 검선이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그러게 말이야. 흑도맹주를 이런 자리서 보게 되다니. 그건 그렇고. 자네들 셋이서 회담하면 될 것을 굳이 나 같은 늙은이는 왜 부른 게야.”
검선이 투덜거리면서 앉자, 맹주들이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이서휘가 지켜보니 네 명의 고수들 중에서도 남궁위의 덩치가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컸다. 그 다음이 짙은 투기를 내뱉는 것처럼 살기가 흉흉한 맹서웅이었고, 그 다음이 키가 가장 큰 백도맹주 범우였다.
반면에 검선은 그야말로 동네에서 바둑이나 둘 법한 인상 좋은 얼굴의 노인장이었다.
맹서웅이 검선을 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노인장이 등장해서 백도가 아주 신이 난 모양이외다. 이것은 세 사람이 합심하여 나를 누르려는 의도가 아니오? 수하처럼 부리겠다는 뜻으로 밖에 안 보이는군.”
맹서웅의 말에 범우가 혀를 찼다.
“흰소리는 그만 하시게. 검선 선배를 이 자리에 모신 것은 대의를 생각해서 그런 것일세. 세 곳의 맹이 모여 연합하기로 했으니 상징적이든 아니든 ‘총대장’을 선임해야겠지. 우리 셋은 누가 되든 나머지 두 명이 반대할 게 빤하지 않은가. 작은 일은 우리가 처리하면 되겠으나, 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검선 선배에게 부탁드리기 위함이네. 아무리 우리 셋이 맹을 이끄는 맹주들이라지만 어쨌든 검선 선배에겐 무림의 후배가 아닌가. 남궁 맹주는 어찌 생각하나?”
남궁위가 대꾸했다.
“이견 없습니다. 맹 형만 승낙하심 될 듯 하오만.”
사람들이 맹서웅을 바라보자 맹서웅이 대꾸했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를 하는군.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작전이나 논하자는 것이었지, 허울뿐인 총대장을 선출하자고 참석한 게 아니란 말일세. 이번 한 번이야. 딱 한 번은 자네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노인장, 안 그렇습니까? 총대장이 되시겠다고 오셨습니까?”
맹서웅의 말에 검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이야기들 나누게.”
맹서웅이 여전히 검선을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대하자 백도맹주 범우의 얼굴이 험악해지고 있었다.
이서휘도 마찬가지.
‘묘한 고집이 있는 사람이네. 악연이라도 있는 겐가.’
지켜보고 있던 백도 세력 대부분이 맹서웅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이서휘는 자신의 반대편에 서 있는 송무진을 발견하고 말없이 포권을 취했다.
송무진이 씨익 웃더니 답례를 보냈다.
회담의 분위기는 역시 맹서웅이 계속 주도했다.
“내가 정예만 추려서 일천을 데려왔소. 보고에 따르면 내가 가장 병력이 많다고 하던데…. 내가 중군(中軍)을 이끌 테니 좌우는 두 맹주들이 맡으시오.”
맹서웅의 말에 백도맹주 범우가 코웃음을 쳤다.
“흑도맹주, 우리보다 훨씬 적군. 보고를 어찌 받은 게야.”
병력 규모가 가장 작은데다가 별 다른 의견을 낼 생각이 없는 남궁위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내심 병력의 수와는 무관하게 군림맹의 검대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 남궁위는 내다보고 있었다.
남궁위가 살펴본 바로는 백도맹 구파의 특색이 너무 제각각이라 군율이 형편없어 보였다.
지켜보는 이서휘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지금이라도 나서서 맹서웅의 멱살을 붙잡고 나가서 좀 혼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담을 원활하게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은연중에 다른 자들을 내리찍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그게 통하면 문제가 없겠으나….
남궁위와 범우가 어떤 사람들인가….
맹서웅이 아무리 떠들어도 코웃음을 치며 넘길 뿐이었다. 덕분에 검선만 자리가 불편했다.
딱히 할 말도 없는데다가 하도 이서휘가 내몰아서 온 자리였다.
이야기를 듣던 검선이 불쑥 이서휘를 돌아보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서휘가 검선의 표정을 보고 눈을 껌벅였다.
‘음? 괜히 참석해달라고 요청을 했나. 죄송스럽군.’
맹서웅의 날카로운 반응은 이서휘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검선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흑도맹주.”
“네, 노인장.”
“네가 통합맹주를 맡으면 감숙에 도착하기도 전에 흑도와 백도가 맞붙어서 끝장이 나겠구나.”
검선의 말에 백도 세력에서 웃음이 터졌다.
맹서웅이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웃음이 잦아들면서 대번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검선이 말했다.
“내가 통합맹주를 하마. 작전권은 그대로 맹주에게…. 나는 그냥 허수아비처럼 있겠다. 대신에 정마대전에 악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나서서 물러나게 할 것이다. 이 정도면 동의하나?”
백도맹주 범우가 재빨리 대꾸했다.
“동의합니다, 선배님. 그렇게 맡아주십시오. 그럼.”
남궁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하지만 맹서웅은 생각이 달랐다.
“검선 선배, 어찌 나를 두고 하는 말씀 같소만?”
맹서웅의 말에 검선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대꾸했다.
“그럼 자네를 두고 하는 말이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이겠나. 자네를 흑도맹주로서 존중하네. 하지만 분쟁과 논쟁은 일단 마교를 쓸어버린 다음에 하세.”
검선의 말에 맹서웅이 웃었다.
“선배, 언제부터 무림인들이 나이순서로 맹주 같은 것을 정했습니까? 백도와 흑도의 구별 없이 강한 자가 군대를 이끄는 게 옳습니다. 늙은 순서로 했으면 초나라는 범증(范增, 항우의 책사)이 총대장이었겠지요. 더군다나 선배는 작전을 지시할 세력도 없으니 비효율적입니다.”
맹서웅의 날선 발언을 듣고 나서야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이 맹서웅의 의도를 깨달았다.
총대장에 마음을 둔 것이 아니라 검선에게 시비를 걸어 자신의 위명을 높이려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실로 흑도맹주 맹서웅에게 어울리는 패기를 내뿜고 있었다.
돌려서 말한 것이다.
‘검선 노인장, 내가 당신보다 강하니 총대장 자리를 양보할 수 없겠소. 두 명의 맹주도 마찬가지. 정마대전에서 만큼은 내 밑으로 오시오.’
이런 뜻이리라.
검선이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두 눈을 껌벅이면서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내가 언제 나이를 강조했나. 검성 어르신이 돌아가셨으니 당대의 천하제일은 나일세.”
듣고 있던 이서휘의 팔에 갑자기 소름이 쫙 올라왔다.
느닷없는 의부의 천하제일 선언이었다.
정적이 감돌았다.
잠시 후 그 정적을 깬 것은 맹서웅의 웃음소리였다.
“하하하하하.”
맹서웅이 홀로 웃음을 터트렸다. 좌중을 돌아보더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재미있군. 이보시오. 노인장, 어차피 정마대전이 벌어지면 맹주들 검에 피나 한 번 묻을까 의심될 정도로 우리의 전세가 더 유리하오. 천하제일이라는 말이 이렇게 쉽게, 뜬금없이 나오다니…. 그 천하제일에 오르면 그럼 통합맹주가 될 수 있는 것이오? 이거 흥미가 동하는군. 다들 어떻소?”
맹서웅의 패기 넘치는 제안.
맹주들은 뒤에서 구경만 할 정도로 전황이 좋으니 이 자리에서 천하제일이나 가려보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맹서웅의 말에 대꾸한 것은 검선이었다.
“흑도맹주, 말이 자꾸 엇나가는군. 천하제일을 가리려면 자네들이 내게 도전을 하면 되네.”
검선의 말에 맹서웅이 웃으며 대꾸했다.
“노인장, 한 번 도전해도 되겠소이까? 이 자리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맹서웅이 말을 던져놓고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정마대전을 앞두고 있다.
이미 나이가 많은 검선이다.
맹서웅은 검선을 백도의 존경과 아부를 받으면서 생을 마감할 뒷방 노인네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검선의 반응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도전하게. 대신에 자네가 다치면 흑도맹의 전권을 넘길 사람을 이 자리에서 임명하게.”
“뭐라 하셨습니까?”
검선이 진지하게 그리고 진중하게 타이르듯 대꾸했다.
“자네는 이번 정마대전에 참여 않는 게 도움이 될 거 같다는 말이야. 나랑 비무나 한 번 하고 지휘권 넘겨준 다음에 물러나게나. 부맹주가 누구인가?”
검선의 말에 맹서웅이 대꾸했다.
“부맹주는 물론 맹에 남겨두고 왔소.”
“다음 책임자는?”
“신경쓸 것 없소. 아니, 그런데 노인장…. 진심이시오?”
맹서웅이 홀로 황당한 표정으로 되묻자, 검선이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뭐 알아서 하게.”
검선이 벌떡 일어났다.
사람들의 표정이 기이하다.
충격적인 상황이다.
‘뭐야?’
느닷없이 결정된 흑도맹주와 검선의 비무다.
이서휘마저도 당황했다.
검선이 비무장으로 나가자 급히 검선의 뒤를 따르면서 말했다.
“의부님…. 갑작스럽게….”
이서휘가 따라오자 검선이 말했다.
“서휘야.”
“네.”
“내가 지면 무공을 봐뒀다가 네가 나중에 꺾어다오.”
“네?”
이서휘가 놀라자 검선이 웃음을 터트렸다.
“성정을 보아하니 정마대전 다음에는 흑도맹과 전면전이 일어나겠어. 걱정 말거라. 내가 바라는 것은 무림이 조용해지는 것…. 이것은 백도의 기회다. 정정당당한 비무니 맹서웅도 억울함이 없을 게야. 더 늙기 전에 만나서 다행이다.”
검선의 자유분방한 생각이 이서휘의 예상마저 어긋나게 하고 있었다.
맹서웅을 은퇴시킬 수 있는 백도의 기회라니.
이서휘는 내심 자신이 나서고 싶었으나, 검선에겐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검선이 이서휘를 바라보다가 묵묵히 비무장으로 걸어갔다.
‘네 시대에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이것으로 더 이상 내가 비무를 할 일은 없겠지.’
☆ ☆ ☆
비무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설마 했더니 정말로 벌어지는 일이 되었다.
여전히 대주급 이상의 무인들이 관전하는 가운데….
다소 황당한 표정을 한 맹서웅이 서 있고.
검선이 허리를 펴고 있었다.
일이 이 지경으로 되면 누군가가 나서서 말리지 않을까 예상했던 맹서웅이었다.
하지만 말리는 자 한 명 없었다.
그렇다면 검선을 말리는 자가 있지 않을까? 이미 고령이니까 비무를 벌이기 힘들 터인데? 하지만 백도 세력에서도 검선을 말리는 자가 없었다.
맹서웅이 허리를 펴고 있는 검선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거 제대로 해도 되는 겁니까?”
허리를 펴던 검선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말투가 이상하군. 내가 자네 팔 하나만 잘라도 되겠는가?”
“뭐라고요?”
“긴장하시게. 정신 차리고.”
“허헛!”
맹서웅이 무모한 것일까.
검선의 생각이 허를 찌른 것일까.
장안에서 벌어진 느닷없는 검선과 맹서웅의 비무.
한 사람은 백도의 정점이라 불리고.
한 사람은 자타공인 흑도의 정점이다.
하지만 맹서웅을 자극한 단어는 다름이 아니라 ‘천하제일’이란 말이었다.
맹서웅이 검선을 노려보면서 생각했다.
감히 내 앞에서 천하제일을 논하다니.
검선이라는 별호는 흘러간 시대의 허명(虛名)일 뿐이다. 누군가를 꺾었다는 소문을 들은 지도 십 년이 넘었는데….
나와 겨루겠다는 말인가?
맹서웅이 특이한 검 한 자루를 쥐었다.
은색의 검신 아래 불꽃이 피어오르는 모양의 적색 검병….
사화검(死火劍)이라 불리는 장검이었다.
사화, 죽음의 결말을 화재가 꺼진 것에 비유한 말이다.
맹서웅이 자신의 무공을 완성한 다음에 그 무공에 어울리는 장검을 직접 제작해 검명(劍名)을 붙인 것이다.
그 검명처럼 패도적인 무공을 사용하는 맹서웅….
비무에 어울리지 않는 무공임은 맹서웅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노인장을 만나 자웅을 겨루게 되다니….”
맹서웅과 검선이 마주 서고, 두 사람의 무위를 염두에 둔 고수들이 자리를 드넓게 잡아 희대(稀代)의 대결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검선이 맹서웅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미 미움과 분노라는 감정을 벗어 던진 지 오래된 검선.
검선이 편한 말투로 비무의 시작을 알렸다.
“오늘 둘 중 한 명은 은퇴하세.”
맹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합시다.”
맹주끼리 붙었으면 결과가 어찌되든 간에 유혈사태로 이어졌을 터.
검선이 나서자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다.
백도는 검선이 맹서웅을 꺾으리라 생각했고, 흑도는 자신들이 받드는 맹주의 강력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장안에서 ‘천하제일’이 흑도맹주로 정해지겠거니 하고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리고 이서휘….
의부와 흑도맹주를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흑도맹주도 오료의 영역에 진입을 했다면… 이 싸움, 어렵겠다.’
눈으로 확인해볼 수밖에 없었다.
검선이 검을 쥐지 않은 채로 서 있자, 맹서웅이 공격을 예고했다.
“노인장, 내가 먼저 가겠소.”
“오시게.”
“괜찮겠소? 그 등 뒤에 검이나 뽑으시지요.”
“어련히 뽑지 않겠는가.”
맹서웅이 걸어갔다.
정점에 있는 자들이라 갑자기 신형을 숨기고, 강맹하고 빠른 검법을 추구할 줄 알았더니만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더니 무척 평범하게 검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이서휘, 남궁위, 범우의 안색이 대번에 굳어졌다.
저것은 대체 무슨 경지일까?
움직임은 느렸으나, 휘두르고 있는 화사검이 짙은 회색빛으로 휩싸였다.
검강(劍罡)을 운용하는 것이야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시작부터 검강을 휘감았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었다.
이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검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 서서히 맹서웅의 동작이 빨라지고 있었다.
반면에 검선은 장포를 휘날리면서 맹서웅의 검을 피하고 있었다.
몸놀림이 가벼워 보는 자들의 눈이 즐거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맹서웅이 사화검법(死火劍法)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자 검이 아니라 편(鞭,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잿빛의 검기가 길게 이어졌다.
휘감고 있던 검강의 형태가 마치 검법의 초식처럼 뻗어나가면서 검선의 장포를 갈기갈기 찢어내고 있었다.
검을 피해도 이어지는 검기의 형태는 구경하는 그 어떤 누구도 쉽게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마치 칼날이 흩날리는 형국이다.
이서휘 자신이었으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시작된 비무를 지켜보니 자신의 무위와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라면 거리를 벌린 다음에 검기를 날리고.
지형지물, 바닥의 흙마저 이용해 온갖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다가 기회를 잡아 일순간에 승부를 갈랐을 터.
맹서웅이 저 짓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몰랐으나, 실로 기괴하면서도 대응 자체가 어려운 기이한 검법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
남궁위와 범우는 물론이고 심지어 이서휘마저도 간과한 것이 있었다.
검선의 경지였다.
왜 자신을 당대의 천하제일이라 평가했을까.
맹서웅이 하는 짓을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이제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할 터였다.
검선의 첫 번째 대응은 바람이었다.
왼손으로 장포를 벗자, 구경하고 있던 자들이 얼굴을 질끈 감을 정도로 바람이 칼날처럼 뻗어나왔다.
맹서웅이 뿌려대던 검기가 장포 바람에 방향과 힘을 잃고 흩어졌다.
이어지는 검선의 발검(拔劍).
칠흑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맹서웅의 머리에 떨어졌다.
떠엉! 소리와 함께 맹서웅의 몸이 후방으로 날아가더니 상공으로 솟구쳤다.
맹서웅이 추가 공격을 염두에 두고 반격을 준비했던 것.
하지만 검선의 추격이 먼저였다.
지난날 총본산에서 펼쳤던 것처럼 왼손을 비틀어서 쥐고 있던 장포를 휘날렸다.
펑퍼짐한 장포가 륜(輪) 형태의 거대한 병기가 되는 순간이었다.
강맹한 회전력….
엄청나게 빠른 속도….
검을 들어 대응하면 장포에 휩싸여 날아갈 것 같은 분위기.
스치면 베일 것 같은 위압감이 섞여 있었다.
고작 장포를 던졌을 뿐인데, 지켜보던 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막기 어렵겠다.’
하지만 공중에 솟아 있던 맹서웅이 침착하게 십자(十字) 모양으로 허공을 긋자, 날아오던 장포가 네 조각으로 분리되어 찢어졌다.
이어서 선수를 제압한 검선의 두 번째 대응이 펼쳐졌다.
칠흑검을 내밀면서 떠오른 검선과 땅에 떨어지기 시작한 맹서웅이 검을 부딪쳤다.
일반적인 타격음이 발생하리란 기대는 그 누구도 하지 않았으나 맞붙은 두 검은 쩌엉―! 소리를 한 번 내더니 검신을 맞댄 채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어서 양 발을 땅에 붙인 두 사람은 각기 좌장을 들어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장력, 금나수(擒拿手), 권, 손날이 바람을 가르면서 오가다가 때때로 부딪치면서 굉음을 일으켰다.
하지만 여전히 두 검은 맞붙은 상태.
도대체 누가 붙잡고 있는 것일까?
지켜보던 사람은 이내 검선이 붙잡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검선이 축이 되어 있고….
맹서웅이 검을 떼어내기 위해 움직이면서 빙글빙글 검선 주변을 회전했다.
그 사이에도 두 사람은 출수를 멈추지 않았다.
때문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제야 검선의 말을 깨닫고 있었다.
‘누가 이기든 한 명은 은퇴.’
다치지 않고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승부를 두 사람이 펼치고 있었다.
어쨌든 상황을 주도하는 것은 검선.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면서 검선과 대응하고 있는 맹서웅의 무위가 훨씬 더 강력해 보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자들은 검선이 오른손으로 계속 내공을 내보내 맹서웅의 검을 붙잡고 있는 상황이 얼마나 펼치기 어려운 무공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공격하는 검선도 대단했고.
받아치는 맹서웅의 무위도 명불허전이었다.
순식간에 삼십 여초를 주고받던 사람이 동시에 왼쪽 어깨를 뒤로 뺐다.
장력을 겨룰 심산이었다. 초식의 우열을 가릴 수 없으니 내공으로 승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그 순간마저 동시에 깨달았으니.
맹서웅의 무위도 무척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오른손으로 쥔 장검은 여전히 교차된 상태로 맞물려 있었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좌장을 각기 준비해 내밀었다.
맹서웅이 흑운연장(黑雲嚥掌)이라는 초식을 펼치자마자 좌장에 새카만 기운이 뭉치기 시작했다.
검선은 군자도회(君子韜晦)란 초식으로 장력을 펼쳤다.
보기에 맹서웅은 강맹했고.
검선은 평범했다.
군자도회, 자신의 재능을 숨긴 군자를 뜻하는 초식 이름이었다.
이미 검게 물든 맹서웅의 장력과 평범한 손바닥을 내민 검선의 장력이 맞붙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날아간 쪽은 검선이었다.
두 검은 어찌하여 떨어졌을까.
군자도회라는 초식은….
검을 맞붙이는 초식인 군자결의(君子決意)에 이어지는 초식이었다.
즉 검을 붙이고 장력으로 겨루는 것까지가 큰 틀에서 보면 군자도회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재능을 숨겼다는 뜻의 도회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검선이 공중에서 합장(合掌)하는 마음으로 후배를 바라봤다.
‘미안하네.’
엄청난 속도로 물러나던 검선이 공중으로 솟구치다가 칠흑검을 그었다.
검선의 눈이 번뜩이더니 맹서웅의 왼쪽 어깨를 노려봤다.
그 순간, 이서휘가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이 펼치는 암연심검의 환과 흡사한 검기가 쏟아졌던 것.
흑도맹원들에겐 무척 참담한 장면이 이어졌다.
빛살이 뻗어나가 맹서웅의 어깨를 관통해버리더니 기세를 잃지 않고 그대로 땅바닥에 파바바바박 소리와 함께 박히기 시작했다.
맹서웅이 몸을 한 번 휘청하더니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어깨를 오른손으로 급히 붙잡았다.
이어서 쨍그랑 소리와 함께 맹서웅의 사화검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흑도맹 무인들이 달려 나왔다.
그러자 맹서웅이 고개를 한 번 돌려 호통을 내질렀다.
“멈춰라!”
맹서웅이 불쾌한 얼굴로 수하들을 돌아보다가 땅에 내려선 검선에게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검선 선배, 한 수 잘 배웠습니다.”
맹서웅의 말에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뚝뚝한 얼굴로 대꾸했다.
“수고했네. 가서 빨리 치료해.”
“알겠습니다.”
맹서웅이 물러나려고 자세를 돌리자 검선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래서 자네 후임은 누구야. 결정하고 가서 쉬어라.”
맹서웅이 걸어가다 우뚝 멈췄다.
“노인장 거 참…. 걱정 마십시오.”
맹서웅의 말에 검선이 코웃음을 쳤다.
“흐흥, 알았으니 물러가게.”
“갑니다.”
“부상 입었으니 자네는 나랑 이제 바둑이나 둬야겠군.”
검선은 맹서웅에게 중상을 입혀놓고 여전히 농담을 건네고 있었다. 맹서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시끄럽소. 바둑 둘 줄 모르니까.”
맹서웅이 물러나자, 그제야 검선이 백도 세력을 돌아보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앞으로 연합에 금이 가게 하는 자가 있으면 흑도맹주처럼 몸에 구멍을 내줄 것이라 전해라. 그럼 회의들 계속 하고… 난 좀 쉬어야겠다….”
누군가가 조용히 대꾸했다.
“네, 어르신.”
좌중이 고요한 가운데 검선이 이서휘를 향해 터벅터벅 걸으며 중얼거렸다.
“서휘야.”
“네, 의부님.”
“허리가 지끈거린다.”
이서휘가 홀로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