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38화 (38/43)

8권

<1장. 압도(壓倒)>

전중산의 안내로 별채에 머무르던 이서휘와 검선은 얘기를 나누다가 한 명씩 조용히 빠져나와 종남파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검선은 아예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당당하게 말한 후에 종남파를 벗어난 상태였고, 이서휘는 가끔 암영술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말을 엿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한 상황.

이서휘와 검선은 종남파의 고수들과도 격차가 심할 정도로 압도적인 무위를 지니고 있는 터라, 두 사람이 은연중에 종남파를 살피고 있다는 점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태백파가 도전을 해온 마당에….

두 사람의 존재는 종남파의 위기를 벗어나게 해주는 구세주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 ☆ ☆

이서휘와 검선이 종남파 주변을 살펴보고 있을 무렵….

태백파의 고수들이….

종남산에 오르고 있었다. 종남파에 머무는 종남 제자들의 수만 해도 일백에 가까운데, 이 열 명의 고수들은 그야말로 자신감이 대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종남파의 천대암 장문인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백 명이 아니라 이백 명이 넘을지라도 종잇장처럼 찢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선두에서 신형을 날리는 중년인이 바로 태백파의 장문인인 태백중검(太白重劍) 단목강(端木强)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태백파의 고수뿐만이 아니라,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고수들이 섞여 있었다.

이들이 태백파와 뭉친 이유는 단 하나….

종남파를 재기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음험한 생각에 동의한 단목강도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한이 판단을 흐리게 한 것이다.

단목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종남파에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밖에 없어서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한….

그리고 종남파를 짓누르고 구파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일념.

단목강의 마음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나저나 태백파를 은근슬쩍 부추긴 자들 또한 어찌 된 일인지 단목강보다 약간 뒤처지는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

천대암 장문인이 쓰러지자마자 종남파의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 ☆ ☆

이서휘와 검선이 다시 별채에서 만나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의부님, 산책은 어떠셨습니까?”

“오랜만에 왔는데도 그대로구나. 고수들을 배출할 수밖에 없는 산의 정기가 여전했다. 다만 이렇게 쇠락해가고 있으니 아쉬울 따름이구나. 천 장문인의 인성이 올곧아서 제법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말이야.”

검선이 이서휘에게 빙긋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특별한 게 있더냐?”

“별 다른 게 없었습니다만, 대신에 제자들의 이야기를 조금 듣고 왔습니다.”

“뭐라 하던가….”

“대부분 전중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있어 제대로 들리지 않았는데 이름은 확실히 들었습니다. 또 다른 자의 이름을 거론했는데… 너무 작게 속삭여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

“전중산이라… 어쩌면 다음 장문인으로 가장 유력한 자의 이름을 그렇게 조심히 부르다니 확실히 이상하구나.”

그러다 이서휘는 검선의 몸에서 어떤 냄새를 맡고 말을 이어나갔다.

“의부님, 혹시 약초를 캐 오신 겁니까?”

“어? 어떻게 알았느냐.”

“제가 냄새를 무척 잘 맡습니다만.”

“허허, 재주가 다양하구나. 그나저나 너는 무림에서 불리는 별호가 있느냐?”

“아직 없습니다.”

전생에서나 검제였지, 지금은 그저 군림맹의 대주일 뿐이었다. 이서휘의 말에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막강한 무위를 갖췄는데 아직 별호가 없다니 이상한 일이로군.”

검선의 말에 내심 ‘검제(劍帝)’라는 별호를 기대하고 있던 이서휘가 눈을 빛내면서 순진한 표정으로 검선에게 물었다.

“의부님이 하나 지어주십시오.”

이서휘의 말에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별호라는 것은 말이야.”

“네.”

“거창하지 않을수록 좋아.”

“그렇습니다. 의부님의 별호인 검선(劍仙)처럼 말이죠?”

“알고 있었구나.”

“물론입니다.”

검선이 두 눈을 잠시 껌벅이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견비달(犬鼻達) 이서휘가 어떠하냐?”

“네?”

“개(犬) 코(鼻)처럼 후각에 통달(達)한 사람이란 뜻이지.”

검선이 이서휘를 놀리자, 이서휘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마음에 안 듭니다.”

“단호하구나.”

“아니, 그게 단호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검객의 별호라면 은근히 멋도 좀 있고 그래야지요. 의부님….”

이서휘가 당황해서 받아치자, 검선이 웃음을 참으며 대꾸했다.

“싫으면 말고.”

“싫은 게 아니라 너무 막 지으신 거 아닙니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별호에 왜 개코를 집어넣으셔 가지고.”

“넘어가자. 더 고민해보마. 그건 그렇고….”

“아니, 뭘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십니까? 좋은 거 하나 생각해주십시오. 견비달 말고 뭐 제왕(帝王)에서 조합을 한다든지… 뭐 그런 좋은 말들이 있잖아요. 의부님…?”

“제왕은 너무 거창하고. 일단 생각해보마.”

“네.”

이서휘가 두 눈을 껌벅이자, 검선이 품에서 무언가를 조심히 꺼냈다. 그것은 이서휘의 예상대로 약초였다.

검선이 말했다.

“이것은 연흥초(燃馫草)라 한다.”

“연흥초요? 어떤 약초입니까.”

“뭐랄까… 일종의 환각제(幻覺劑)라 해야겠지. 의외로 독성은 약하다. 하지만 향을 맡기 시작하면 중독성이 매우 짙다. 연흥초는 고통을 약간 줄여주는 효과가 있으나 대신에 회복이 무척 더디게 된다. 건강이 나쁠 때 자주 마시게 되면 그야말로 독약이나 다름이 없지. 천 장문인의 머물던 곳에서 연흥초의 냄새가 나더구나. 안타깝게도 천 장문인은 고통에 빠질 때마다 연흥초를 피워달라고 했을 것이야. 그 정도 부상이면 연흥초 때문에 절대 회복될 수 없다고 봐야겠지. 아까 견비… 아니, 너도 무언가 이상한 냄새를 맡지 않았더냐?”

이서휘의 눈매가 잠시 파르르 떨렸다.

“그렇습니다. 저는 독약으로 예상했습니다만.”

“종남파에 벗어나서 산길을 좀 살펴보니 외진 곳에 잔뜩 피어 있었다. 이것을 보니 무슨 일인지 대충 감이 오는구나. 왜 저기에 천 장문인이 누워있는지도 알겠고.”

이서휘는 새삼 검선의 예리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는 약초나 독약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오로지 후각으로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있을 뿐…. 지난 생애부터 눈이 멀었으니 이런 것을 눈으로 구별하는 게 남보다 뛰어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검선은 천하를 주유하면서 때로는 약초와 독초를 구분하면서 섭취했으니… 지식이라기보다는 그저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들이라 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연륜과 경험의 힘이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연흥초를 썼다는 것은 누군가가 천 장문인을 빨리 죽일 마음이 없다는 뜻이야. 그 말은 즉… 천 장문인에게 무언가를 얻어낼 게 있다는 것이겠지.”

이서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하….”

이서휘도 두뇌회전이 빠르다. 대번에 무슨 상황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천 장문인이 내놓지 않는 것이라면 분명히 종남파와 관련된 무공 비급이나 명검 등의 신물(神物)일 터. 천 장문인이 쓰러지면서까지 아직 토해내지 않는 모양이었다.

검선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추측했다.

“아무래도 종남파 최강의 절기라 불리는 벽사해검(辟邪觧劍)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장문인에게만 전해지는 것이라… 단순히 천 장문인이 쓰러졌다고 해서 종남파의 장문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지…. 종남의 장문인은 벽사해검을 써야 한다.”

“그렇군요.”

“천 장문인이 벽사해검의 비밀을 쥐고 있으면 종남파의 그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할 터….”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어찌 보면 태산파와의 분쟁도 진실일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그저 저희를 이용하여 또 다른 호랑이를 쫓아내려 함이겠지요.”

이서휘의 추측에 이번에는 검선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어부지리(漁夫之利)라 생각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종남파에 오자마자 돌아가는 양상을 빠르게 파악했다는 사실을 과연 누가 알까.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한 종남파에 기이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가 놀란 것은 검선의 다음 행동이었다. 커다란 나뭇잎을 하나 더 꺼내더니 탁자에 펼쳐 보였다. 그곳에 이미 잘게 빻아진 약초가루가 수북이 있었다.

“엇?”

이서휘가 놀라자 검선이 말을 이었다.

“약간의 해독 작용이 있는 약초들을 모았다. 상황을 봐서 천 장문인에게 먹여야겠으니 방해를 하거나 막는 자가 있으면 사정을 봐주지 말고 제압해라.”

“알겠습니다.”

이서휘와 검선….

어떤 의미로는 그야말로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검선이 바로 일어서면서 말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으니… 지금 가자꾸나.”

“알겠습니다.”

이서휘도 벌떡 일어나서 천 장문인이 있는 안채로 향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대청에서 누군가가 급히 달려오더니 방문자들이 있음을 고했다.

“전 사숙께서 급히 두 분을 찾으십니다.”

이서휘와 검선이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검선이 말했다.

“으음, 그럼 먼저 다녀오자꾸나.”

“알겠습니다.”

“잠시만 그 전에 준비할 게 있구나.”

검선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악동처럼 웃고 있었다.

이서휘가 바라보니 왠지 자신이 도이나 도삼을 놀려먹을 때 종종 짓는 표정이라 의부의 생각이 무엇인지 대번에 눈치를 채고 있었다.

“흐흐흐.”

이서휘와 검선이 나가보니 태백파에서 몰려온 자들은 고작 십여 명.

반면에 전중산을 비롯한 종남파의 제자들의 수가 더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전중산과 비교적 나이가 많은 종남파의 제자들은 몰려온 자들의 기도를 읽고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한명 한명이 자신이 나서서 상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범상치 않은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전중산이… 몰려온 불청객들을 바라보며….

문도들에게 벽운검진(碧雲劍陣)을 펼치라고 말하려는 순간에….

나란히 서 있는 종남파 문도들 뒤편의 좌우에서 각각 이서휘와 검선이 등장했는데 태백파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차림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검선은 약초를 캐다 온 터라 안 그래도 허름한 장포에 먼지가 잔뜩 묻어 있어 영락없이 종남파의 노복으로 보이는 차림새였다. 워낙 평소에 입고 다니고 있는 옷이 허름해서 갈아입을 필요도 없어 보였다.

이서휘도 마찬가지.

검선이 옷을 갈아입으라 하여….

이서휘는 종남파에 갓 입문한 자들과 삼대제자에게 지급되는 잿빛 무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에게 딱 어울리는 무복이었다.

더군다나 이서휘와 같은 무복을 입고 있는 제자들이 가장 많아 유심히 바라보지 않으면 이서휘의 존재 자체를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검선은 등봉조극(登峰造極)에 올라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처럼 보일 수가 있었고.

이서휘는 회광반조 현상을 겪은 이후로 살기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즉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종남파의 노복과 입문제자로 보였다. 그 두 사람이 눈을 빛내면서 몰려온 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검진을 펼치려던 전중산이 생각을 바꾼 다음에 태백중검을 향해 호통을 쳤다.

“단목 장문인께서 종남파에 도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나… 우리 장문인께서 부상을 입은 틈을 타 오신 것은 실로 파렴치한 행동이라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시오?”

전중산이 제법 기세 좋게 말을 내뱉었다.

단목강(端木强)이 코웃음을 치자, 전중산이 몰려온 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말을 이었다.

“또한 처음 보는 낯선 자들도 있는데 설마 이들이 모두 태백파의 문도들이오? 도저히 보고 넘길 수 없는 행동을 하시는구려.”

전중산의 말에 턱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인이 나서서 종남파 문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태백파인지 아닌지 자네들이 어찌 안다는 말인가? 나는 얼마 전에 태백파에 입문한 무명노검(無名老劍)이라 한다.”

무명노검….

이름이 없고 늙은 검이라니….

그야말로 시비를 걸기 위해 이 자리서 지어낸 별호였다.

정상적인 별호가 아니라 종남산 전체를 깔보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 의문의 남자가 무명노검이라 밝히는 순간에 이서휘와 검선이 눈을 마주쳤다.

자신들이야 말로 이곳에서 무명노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던 것.

이서휘가 무명검(無名劍)이고.

검선이 노검(老劍)이었다.

두 사람이 악동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중산이 태백파에 섞인 정체불명의 사내들을 바라보며 호통을 쳤다.

“그대들의 사문을 명백하게 밝히시오! 감히 태백파를 칭하여 종남파의 위기를 틈 타 들어오다니. 단목 장문인… 이렇게 나오시면 우리도 정상적으로 응대할 수 없겠소. 이미 우리 장문사형이 부상을 입은 사실은 잘 알고 계실 터. 종남파 전체가 벽운검진(碧雲劍陣)으로 상대해드리겠소.”

전중산의 말에 단목강이 대꾸했다.

“중산 후배, 이상한 말을 하는군. 종남파와 태백파는 늘 이시기에 비무를 벌였지 않은가? 문파의 흥망성쇠에 따라 비무를 연기할 수는 없는 법. 그렇게 숫자로 밀어붙이지 말고 다섯 명이 나와서 우리와 겨루면 되지 않겠나? 설마 종남은 천 장문인 이외에는 인물이 없단 말인가?”

단목강의 말에 무명노검이라 자신을 소개한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흐흐흐, 그러지 말고 한 번 봅시다. 벽운검진이라니… 보나마다 검진 흉내나 조금 내다가 자멸할 것으로 보이네만.”

이서휘는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태백파만 있다면 나설 명분이 없었는데 이서휘가 보기에도 무명노검이라는 자는 종남파의 불운을 틈 타 허튼 수작을 부리려는 놈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서휘는 옆에 서 있는 삼대제자 한 명에게 평범한 검을 한 자루 빌리고, 자신의 구성검을 맡고 있으라고 노려본 다음에 대뜸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삼대제자는 이서휘의 눈빛이 대번에 살벌하게 변하자 아무 말도 못하고 구성검을 넘겨받았다.

아무래도 구성검은 삼대제자들이 들고 다니는 검처럼 보이지 않는 명검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데, 이서휘와 동시에 나선 종남파의 제자가 있었다. 나이는 이서휘와 비슷했는데 얼굴 가득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서휘와 종남파의 제자가 눈을 마주쳤다. 이를 빠드득 가느라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종남파 제자의 신분을 밝혀줬다.

“대사형!”

‘대사형?’

이서휘가 온 몸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아… 느낌이 좋구나. 전중산보다는 훨씬 낫다.’

이서휘는 대사형이라 불린 자와 통성명을 할 겨를이 없었다. 때문에 이서휘가 먼저 사내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 자는 아무래도 태백파가 아닌 것 같으니 내게 맡겨주시오. 괜찮겠소?”

사내가 잔뜩 붉어진 눈으로 이서휘를 바라보더니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고맙소.”

대체 무엇이 고마울까. 고맙다면 종남파가 고마워해야 하는 일인데…. 하지만 이서휘는 묘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마치 종남파에 그대가 있어 고맙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쨌든 문파의 위기를 깨닫고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지 간에 종남파의 자존심을 생각해 먼저 나서려던 자가 아니던가.

이서휘는 전중산이 아니라는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느닷없이 종남파의 삼대제자들이 입는 무복을 걸친 청년이 장검을 쥐고 나오자, 종남산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무명노검이 실실 웃으면서 이서휘의 용기를 칭찬했다.

“허허… 그래도 용기 있는 청년이 있었군.”

하지만 단목강은 종남파의 대제자를 들어가게 만든 후에 걸어 나오는 이서휘를 보자마자 고개를 갸웃했다. 단목강이 말했다.

“넌 누구냐? 종남의 제자가 맞느냐?”

태백파 장문인의 말에 이서휘가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종남산에 입산(入山)했소.”

단목강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입산이라고?”

“그렇소. 본래 오늘쯤 정식 입문제자가 되려고 했으나 그대들이 불시에 찾아오는 통에 입문시험을 치르지 못해 시기가 늦어졌소.”

누가 들어도 개소리로 들릴 정도로 뻔뻔한 말을 이서휘가 내뱉고 있었다.

그러자 듣고 있던 무명노검이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하… 그래. 너는 내가 상대해야겠구나. 나도 태백산에 엊그제쯤 입산했으니까 말이야.”

“하하하.”

무명노검의 동료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무명노검도 종남파를 상대하기엔 내심 명분이 약했던 터라 이서휘가 뻔뻔하게 나서자 기회다 싶었다.

무명노검이 나서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됐군. 그렇다면 입산제자끼리 한 번 해봅시다.”

입산제자라는 말은 없으니, 결국 가짜끼리 붙어보자는 말이었다.

검선이 눈을 빛냈다.

과연 이서휘의 검은 어느 경지에 오른 것일까?

그 순간, 종남파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이서휘가 군림맹의 대주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백도맹에서 활약이 대단했다고 하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태백파도 외부 인물을 초빙해온 눈치였으니… 왠지 모르게 마음도 편했다.

다만, 종남파는 매 순간마다 새삼 천대암 장문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천대암의 존재감이 종남파의 전부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위대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장문인께서만 부상을 입지 않았어도 이런 치욕을 받지 않았을 것인데….’

종남파 제자들은 저마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다.

이서휘는 어쩐지 무명노검을 바라보지 않고 몰려온 십여 명의 무리를 향해 말을 건넸다. 이서휘가 종종 사용하는 도발적인 언행으로 분위기를 이끌어나가기 시작했던 것.

“그러지 말고 한꺼번에 다 덤비는 건 어떻겠소?”

이서휘의 말에 태백중검 단목강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뭐라고?”

이서휘가 실실 웃으면서 빈정거렸다.

“뭘 눈치를 보고 그러시오. 그대들은 백도가 아니지 않소? 염치가 있다면 종남파의 불운을 틈 타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지. 백도라 주장한다고 해서 모두 백도가 되는 것은 아니요. 그 행동이 백도에 어울려야 비로소 백도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이지. 안 그렇소?”

이서휘의 말에 단목강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지고, 분위기가 이상해진다고 판단한 무명노검이 대뜸 살수를 펼치면서 이서휘의 정수리를 향해 검을 그었다.

“건방진 놈!”

쩌엉!

이서휘가 장검으로 튕겨내고 한 걸음을 물러섰다. 애초에 이 자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이서휘에겐 종남파를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즉, 백도를 운운하는 것은 태백파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중산을 향한 말이기도 했다.

이서휘가 무명노검에게 말했다.

“말을 하는 도중에 기습을 하는 것을 보니… 너는 사마외도의 무리였구나. 태백파가 이렇게 썩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어찌 사마외도의 무리와 섞여서 어울린다는 말인가?”

“닥쳐라!”

이서휘는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길게 끌기엔 이미 무공 수준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이다. 다만 무명노검을 죽여야 하나, 부상을 입혀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무명노검은 종남파의 전중산이 나섰어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이서휘 앞에서….

이서휘가 평범한 장검 한 자루를 되는 대로, 초식 없이 휘둘렀다. 오료의 경지에 접어든 이후로 처음 만나는 상대다.

초식이 불필요할 지경으로… 이서휘의 장검에 실린 힘은 묵직했다.

압도적인 격차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초식은 오히려 무명노검이 신중하게 펼쳐야 했다.

이서휘의 검에 튕겨날 때마다 자세가 흐트러지고, 궤적이 벗어나고,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순간이 되어서야….

무명노검은 이서휘의 눈빛을 제대로 살폈다. 이서휘는 무명노검이 바라보자, 일부러 기도를 폭발시켰다.

어디선가 화르르륵 소리와 함께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무명노검의 눈에는 어느덧 이서휘가 덩치가 세 배쯤은 더 커진 것으로 보이고….

이서휘의 등 뒤에 거대한 검 한 자루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가 떨어지는 것 같은 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누구냐 이 자는….’

속으로 중얼거리는 그 생각마저 읽은 이서휘가 검을 내려치면서 말을 내뱉었다.

“기회를 줄 때….”

이서휘가 검을 내려치자 떠엉! 소리와 함께 무명노검의 팔목이 꺾이기 힘든 방향으로 비틀어졌다.

“윽!”

“한꺼번에 덤볐어야지. 이제와서 궁금해 해봤자….”

무명노검이 미처 내공을 운용하지 못하고 고통을 느끼는 순간… 이서휘의 검이 또 다시 떨어졌다.

‘태백파를 이용해 종남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놈이면… 몸 성하게 내려갈 생각을 말아야지.’

검선이 눈을 크게 뜰 정도로 이서휘의 행동은 단호했다.

이서휘가 불쑥 궤적을 그리면서 무명노검의 검을 휘감아 바깥으로 던져 버린 다음에 빠드득 소리와 함께 움켜쥔 일권으로 무명노검의 가슴에 벼락같은 권풍(拳風)을 내질렀다.

콰아아아앙!

훅― 하는 바람소리와 굉음이 연달아 이어지고… 무명노검의 몸이 대번에 종남파의 정문 쪽으로 날아갔다.

이서휘가 말을 마무리했다.

“기회가 물 건너갔구나.”

이서휘의 말에 검선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허, 내 아들이 그야말로… 혹독한 면이 있었구나.”

무명노검이 대자로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자, 그 순간에 태백파와 태백파가 아닌 자들이 갈렸다. 서너 명이 뛰어가서 무명노검을 일으키면서 한마디씩 외치고 있었던 것.

“사형, 괜찮습니까?”

“사형!”

그제야 이서휘가 자신의 성정대로 내공을 실어 종남파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외쳤다.

“태백파가 데려온 무리가 누구인지 밝혀라!”

이서휘는 태백중검 단목강을 장검을 들어 가리키며 자신을 밝혔다.

“단목 장문인, 나는 군림맹의 이서휘요. 저 자들이 누군지 밝히시오. 대답에 따라 저들만 죽이든지 태백파까지 몰살시키든지 결정하겠소. 말을 잘 해야 할 것이오. 나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내뱉는 백도(白道)는 전혀 믿지 않으니까.”

느닷없이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이서휘가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하자 종남파의 분위기가 대번에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단목강도 한 문파의 종주다. 어린놈이 꾸짖고 나서자 쌍심지를 올리고 대꾸했다.

“누군가 했더니 군림맹의 이 대주라는 작자였군. 듣던 것보다 실로 거만해. 대답은 먼저 내 중검과 겨룬 다음에 듣는 것이 어떠한가?”

단목강이 천으로 휘감겨 있는 묵직한 검 한 자루를 빼내들자, 이서휘가 싸늘한 말투로 대꾸했다.

“후회하지 않겠소?”

이서휘가 자신의 구성검을 맡겼던 제자를 바라보며 말을 내뱉었다.

“장검 잘 썼네.”

제자가 말을 알아듣고 이서휘에게 급히 구성검을 던졌다. 동시에 이서휘도 장검을 던지자 두 개의 검이 공중에서 교차하면서 원래 주인에게 각기 돌아갔다.

이서휘가 구성검을 낚아 챈 다음에 태백파 장문인을 노려봤다.

이서휘가 또 다시 살벌한 기운을 머금고 나서려고 하자, 구경하고 있던 검선이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한마디를 내뱉었다.

“서휘야….”

“네, 의부님.”

검선이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조금 침착할 필요가 있겠다.”

검선의 말에 이서휘가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검선은 이서휘의 기도가 한 번 변하자, 끝 모를 정도로 사나워지는 것을 누구보다 더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때, 정체불명의 무리가 이서휘에게 맞아서 쓰러져 있던 무명노검을 부축하고 빠져나가려고 하자, 이서휘가 엄청난 높이로 솟구쳐서 종남파의 정문 쪽에 내려섰다.

“움직이지 마라. 허락을 맡고 종남산을 내려가야 할 것이다. 아니면 시체로 굴러가던가.”

이서휘가 멀찍이 날아가 정체불명의 사내를 막아서자, 이번에는 검선이 어슬렁거리면서 나섰다.

아무래도 이서휘의 손에 다 맡겼다가는 종남산이 피바다가 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던 것.

‘적당히 상대해주고 돌려보내야겠구나.’

기세등등하던 이서휘가 물러나고, 노인 한 명이 걸어 나오자 태백중검 단목강이 검선에게 말했다.

“당신은 또 누구시오. 못 보던 분인데….”

그 질문에 검선이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확실히 이서휘보다는 훨씬 말투가 부드러웠다.

“단목 후배….”

“후배?”

“함께 온 자들의 정체부터 밝히게. 별 일 없도록 중재하겠네. 저기 내 양자가 나서면 어쩐지 다칠 사람이 많아질 것 같군. 아마도 이게 마지막 기회일세.”

이서휘는 협박하고, 검선은 달래고. 아주 죽이 잘 맞는 조합이었다.

그 순간, 단목강의 눈빛이 대번에 흔들렸다.

“누구십니까?”

검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서휘의 방법과는 달리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별호를 내뱉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자주 불리는 말은 검선(劍仙)이라 하네만….”

그 충격적인 고백에 무언가가 와장창창 깨지는 것처럼 분위기가 돌변했다. 여기저기서 놀라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나저나 정문을 막아선 이서휘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아, 의부님처럼 검선…. 이러면 다들 기가 팍 죽어야 할 것인데…. 내가 내 입으로 검제라 할 수도 없고. 하아….’

이서휘가 홀로 억울함을 삼키고 있었다.

검선(劍仙)이라는 이름의 무게감은 대단했다.

그 극적인 효과는 검선의 소탈한 모습 때문에 더욱 빛을 발했다.

나름 백도 세력에선 점점 유명해지고 있는 군림맹의 이서휘가 그야말로 공손하게 노인과 말을 나누던 것을 떠올려 보니 어느 정도 납득이 가고 있었다.

검선(劍仙).

백도 세력의 정점이다.

누군가는 아예 전설로 취급하고 있었다.

‘살아 계셨단 말인가?’

아무리 태백파 장문인의 담력이 크더라도 검선에게 도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파의 장문인들과 세 명의 맹주들마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다.

검선의 소탈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단목강은 무림에 전해 내려오는 소문대로 검선이 과연 강할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일단 검선에게 느껴지는 위압감이 전혀 없었다.

‘절대 고수라면 등장할 때부터 좌중을 압도해야 할 것이나 어쩐지 실로 평범하구나.’

허름한 장포 한 벌을 걸치고 있어서 종남파의 노복이 아닐까 의심되는 차림새.

하지만 단목강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나이였다. 여유로운 검선의 표정과 은연중에 드러나는 대종사의 면모를 찾아내자마자 쓸데없는 생각을 내려놓았다.

단목강이 조심스레 물었다.

“검선 어르신께서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뜻밖의 말을 하는군. 내가 종남파에 있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단목 후배는 어서 저 자들의 정체나 밝히게.”

검선의 말에 단목강이 대꾸했다.

“저 자들은 제 지인들입니다. 종남파의 무공을 보고 싶다하여 데려온 자들로 한중검가(漢中劍家)의 고수들입니다. 어차피 비무는 저희 태백파에서 나서려고 했습니다. 다소 불경스러운 태도를 보였던 것은 제가 사과하겠습니다만 저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니 그냥 보내주십시오.”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중검가?”

이서휘는 한중검가가 일월마가가 거느린 세력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단목강마저 한중검가의 정체를 잘 모르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한중검가는 자신들의 신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큰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단목강이 저렇게 나오자 이서휘는 이 자리에서 한중검가라고 밝힌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일 명분이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그 중의 우두머리는 이서휘에게 맞아 중상을 입은 상태. 무턱대고 핍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서휘가 검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의부님, 어찌해야겠습니까? 가르침을 주십시오.”

검선이 뒷짐을 지고 단목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단목 장문인.”

“네.”

“이 자리에서는 그냥 보내주겠네. 자네들과 한중검가 모두.”

단목강이 쉽게 대꾸를 하지 못하자, 검선이 말을 이었다.

“훗날 만약 한중검가가 사마외도의 무리였다는 것이 드러날 경우에는 태백파와 한중검가 모두에게 그 죄를 묻겠네. 저기 있는 내 의자와 함께 태백파를 찾아갈 것이니 유념하도록. 이제 종남산을 내려가게나.”

검선의 엄중한 경고가 전해졌다. 부드러운 말투를 쓰는데도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소탈하게 국수를 허겁지겁 먹다가 배탈이 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으니 검선은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면이 있었다.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남파의 정문에서 한중검가를 막아서고 있던 이서휘가 제 성격대로 태백파의 장문인에게 경고의 한마디를 남겼다.

“태백파는 한중검가가 불순한 무리가 아니길 바래야 할 것이오.”

“허허, 이 대주, 그대와는 한 번 승부를 내야겠구나. 언제든 태백산으로 찾아오너라.”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그때는 내가 종남파의 고수들과 함께 가겠소.”

검선이 또 다시 이서휘를 타일렀다.

“서휘야, 그만 보내주자꾸나.”

그 말에 이서휘가 바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어쩐지 이 자리에서 가장 화가 난 사람은 종남파의 대제자와 이서휘 두 사람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검선이 없었다면 이서휘의 손에 성한 몸으로 내려갈 수 있는 자들이 없었을 터.

태백파의 운이 좋은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소 과격한 이서휘보다는 검선의 생각이 옳았다.

종남파의 분쟁이기 때문에 군림맹의 이서휘가 깊게 개입하는 것은 모양새가 무척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선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녀석, 그간 어떻게 지내왔는지 훤히 보이는구나. 안휘에서 기세등등하게 날뛰었겠지?”

의부의 말에 이서휘가 겸연쩍게 웃으며 대꾸했다.

“음, 그런 편이었습니다. 의부님.”

“하하.”

검선이 다가온 이서휘의 등을 한차례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서휘야.”

“네.”

“저들은 너보다 많이 약한 자들이야. 강자는 힘을 쓰기 전에 침착하게 되돌아보는 게 옳다. 사람이란 언제나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야. 늘 과격하게 대처하다 보면 실수로 네가 무고한 자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마음의 짐을 네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느냐. 이런 일은 생각보다 자주 발생하니 경계해야 할 일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검선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다음에 이어졌다.

“특히 백도를 상대할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어떤 말씀이신지.”

어쩐지 검선의 말에 이서휘뿐만이 아니라 종남파 전체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검선이 솔직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백도가 백도를 건드리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모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야. 변절자 내지는 무림 공적으로 몰리는 경우도 있다. 피곤한 일이지. 반드시 경계할 필요가 있느니라. 물론 아주 명백하게 잘못이 드러나면 반드시 응징해야 할 것이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조심하겠습니다.”

어쩐지 검선의 말은 종남파를 떠나기 시작한 태백파 장문인의 마음속에도 스며들고 있었다.

‘무림 공적이라, 어쩐지 날 두고 남기시는 말 같구나.’

태백파가 물러가자 전중산이 기쁜 표정으로 걸어 나와 검선을 치하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검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서휘와 잠시 대화를 나눴던 대제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개나 해주게.”

“네?”

“종남의 대제자가 아닌가?”

“아, 그렇습니다.”

전중산이 이서휘와 동시에 나섰던 청년을 불렀다. 그 사이에 이서휘도 통성명을 나누기 위해 가까이 다가온 상태였다.

전중산이 대제자를 소개했다.

“검선 어르신, 여기는 장연후(張練煦)라 합니다.”

종남파의 대제자인 장연후가 정중하게 예를 올리면서 말했다.

“종남의 장연후가 검선 어르신을 뵙습니다.”

장연후는 이어서 이서휘에게도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군림맹 이 대주님을 뵙습니다. 조금 전에는 감사했습니다.”

“별 말씀을….”

이서휘가 답례하고, 검선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장연후를 바라봤다. 검선 역시 장연후를 바라보며 이서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이도 아직 많지 않고. 기초가 괜찮구나. 천대암이 잘 가르쳤으면 종남의 기세는 다시 뻗어 나갈 수 있었을 것인데….’

검선이 빙긋 웃더니 전중산에게 대놓고 말했다.

“중산아.”

“네, 어르신.”

“함께 천 장문인을 보러 가자꾸나.”

“지금 말입니까?”

“그래. 연후야, 너도 함께 가자.”

검선의 말에 장연후가 전중산의 표정을 힐끗 보더니 바로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이서휘가 가장 뒤에서 사람들을 쫓아가며 생각했다.

‘장연후라…. 전생에 종남파가 가장 먼저 쓰러진 터라 기억에도 없는 이름이구나.’

몰려간 사람들이 천대암 장문인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이서휘가 검선을 바라보자, 검선은 대뜸 자신이 만든 약초 가루를 주섬주섬 꺼내서 탁자에 내려놓았다.

“약간의 해독작용이 있는 약초일세.”

“네? 어째서 그런 것을….”

장연후가 깜짝 놀라서 검선을 바라보자, 검선이 말을 이었다.

“연후야.”

“네.”

“네가 이제부터 스승의 수발을 들어라. 이 약초를 차를 다려서 하루 두 번 정도 마시면 연흥초(燃馫草)의 독성이 체내에서 좀 빠질 것이다.”

“연흥초라니요?”

대뜸 장연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묻자 검선의 설명이 이어졌다.

“고통을 줄여주는 약초다. 하지만 천 장문인에겐 독초나 다름이 없지. 부상 회복이 느려질 테니까.”

검선의 화술은 그야말로 거리낌이 없었다. 곧장 전중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중산아.”

“이 연흥초는 누가 먹인 것이냐?”

“아, 그것은…. 누가 먹였다기보다는 본래 장문사형이 종종 복용하시던 겁니다. 말이 없으시고 고통스러워하셔서 시비들이 알아서….”

그때 누워있던 천대암이 끄응 소리를 내더니 처음으로 눈을 떴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천대암이 느닷없이 등장한 검선을 바라보면서 눈을 껌벅였다.

이후에 천대암이 바라보는 것은 장연후였다.

검선이 천대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신이 조금 드는가? 아직 말을 하긴 어렵겠지?”

검선이 대뜸 천대암의 손목을 붙잡고 한줄기 내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 스스로 운기조식을 한 지가 무척 오래되어 그토록 강맹한 검선의 내공마저 갈 길을 잃은 것처럼 부딪쳐 나왔다. 일부러 내공을 더 주입할 수는 있겠으나 아직 천대암의 체력이 버텨내지 못할 것 같아 검선도 다시 손을 거뒀다.

검선이 장연후에게 말했다.

“너는 이제 여기서 먹고, 여기서 잠을 자라. 정 힘들면 여기 이 대주를 찾아 교대하거라. 우리가 잠시 이곳에 머무를 것이니. 명심해라. 먼저 연흥초의 독성을 제거하고, 체력을 회복시킨 다음에 내가 운기조식을 도우면 천대암은 일어날 수 있을 것이야. 물론 예전처럼….”

무공을 되찾지는 못할 것이다, 라는 말은 차마 검선도 할 수가 없었다.

장연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쩐지 검선의 말을 들었는지 천대암의 눈가에서도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여전히 시선은 장연후에게 가 있었다.

검선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대제자를 보니 기분이 좋은가? 나이 먹고 눈물이나 흘리다니…. 어서 일어나게.”

검선의 말에 천대암은 뭐가 그리 웃긴지 제대로 웃지도 못하면서 두 눈을 질끈 감고 아주 미약하게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서휘는 검선의 대처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자신과는 방법이나 접근 방식이 달랐다.

아마도 이서휘가 이 일을 처리했다면 먼저 전중산을 협박에 가깝게 몰아붙인 이후에 독심술을 써서 이것저것을 캐냈을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반항하는 전중산 일파는 대부분 이서휘의 손에 박살이 났으리라.

하지만 검선은 아예 전중산을 데리고 와서 천대암과 장연후가 나누는 끈끈한 정을 보여줬다. 대화 한마디 없었건만 두 사람의 관계가 실로 깊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었다.

검선이 종종 전중산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 표정은 마치… ‘중산아, 이래도 네가 종남파를 네 멋대로 할 생각인 게냐?’라는 물음과도 같았다.

애초에 천대암이 감추고 있고, 지키고 있는 게 무엇이든 간에 대제자인 장연후에게 넘길 생각임이 확실해졌다.

당대의 장문인인 천대암의 뜻이 그러하다면….

종남파의 다음 시대는 전중산이 아니라 장연후가 짊어져야 할 터.

검선은 그것을 고리타분한 말 한 마디 하지 않은 채로 전중산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에 뒤에서 말없이 눈을 빛내고 있는 이서휘의 분위기….

또 다른 섬뜩한 면이 있었다.

애초에 이서휘도 검선과 함께 종남파의 상황을 모두 파악한 상태. 가끔 전중산을 살벌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한중검가의 고수를 격퇴할 때 보여준 무위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전중산은 이제 할 말이 없었다.

더군다나 검선은 전중산의 의도를 다 알면서도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제야 검선이 바깥에서 했던 말을 떠올린 전중산이다.

[백도가 백도를 건드리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모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야. 변절자 내지는 무림 공적으로 몰리는 경우도 있다.]

전중산은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장문인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살아남아야 할 시기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검선의 압도적인 혜안과….

이서휘가 보여준 압도적인 무력이….

어처구니없게도 전중산이 지니고 있던 불순한 생각을 연달아 격파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검선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방점을 찍었다.

“서휘야.”

“네.”

“바쁘냐?”

“아닙니다.”

“그럼 며칠 종남산이나 실컷 구경하다 가자꾸나.”

검선의 말에 이서휘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의부님.”

☆ ☆ ☆

느닷없이 등장한 검선과 이서휘 때문에 종남파의 위기가 한차례 수그러들었다.

그 위기를 초래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이 태백중검 단목강이 문도들과 함께 종남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미 한중검가의 고수들은 부상당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서둘러 떠난 상황.

태백파가 종남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쯤….

아무것도 없던 하늘에서 무언가가 쿵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뭐냐?”

태백파의 일부가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큼지막한 물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밤눈이 밝은 누군가가 말했다.

“어? 시체 같습니다만.”

“대체 어디서 떨어진 것이지?”

바닥에 떨어질 때 들리던 굉음도 엄청났다. 마치 산 위에서 누군가의 장력에 맞아 날아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 정도 속도로 떨어졌다면 살아있을 수가 없었다.

단목강과 태백파의 고수들이 조심스럽게 옴짝달싹하지 않고 있는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쏟아지는 달빛에 누군가가 엎드려 있었다.

태백파가 살펴보니 목덜미에 기괴한 문신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태백파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죽은 것인가? 어이….”

물론 하늘에서 떨어진 기괴한 사나이는 검마(劍魔)였다. 위극신이 예상했던 대로 검마는 백도 세력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한데, 종남파에 도착하기 전에 괜찮은 먹잇감을 발견한 셈이었다.

만약 태백파를 만나지 못하고 홀로 종남산에 올랐다면 검선과 이서휘에게 잡혀 죽었을 터.

어찌 보면 검마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온 셈이었다.

검마는 벼랑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는 사람처럼 떨어지자마자, 무토연시공(無吐沿屍功)으로 호흡과 기척을 없애고 있었다.

검마를 모르는 사람들이 발견했다면….

시체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도 기이한 일이어서 태백파의 고수들은 누워 있는 검마를 중상을 입은 자라 판단하고 긴장을 다소 풀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던 태백파의 무인이 뒤를 돌아서 단목강에게 말했다.

“죽은 것 같습니다. 주변에 누군가가….”

그 말을 끝으로 푸욱 소리가 이어졌다.

누워있던 검마가 어떤 동작도 펼치지 않은 채로 강시처럼 일어나자마자 마검을 무인의 등에 박아 넣었던 것.

검마가 무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죽는다는 건 이런 거지.”

무인의 배에서 마검이 관통해서 빠져나오고 왼손으로 무인의 목을 부여잡고 있던 검마가 태백파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면서 히죽 웃었다.

“안녕들 하시오?”

단목강이 오른손에 힘을 주자 태백중검에 감겨 있던 천이 대번에 흩어지면서 쩌정― 하고 울리는 검명과 함께 신형을 움직여 검마의 이마를 순식간에 내려찍었다.

검마가 무인을 앞으로 던진 다음에 웃음을 흘리면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단목강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포위해라. 조심들 하고… 마교의 무리로구나.”

“알겠습니다.”

태백파도 어쨌든 백도를 지향하는 무리.

종남파에 올라 그토록 못난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맞닥뜨린 마인을 보자마자, 저마다 장검을 뽑아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고 있었다.

검마는 경공을 펼치면서 어디론가 향했다.

단목강을 비롯한 태백파는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에 불타 귀신에 홀린 것처럼 검마라는 귀신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 ☆ ☆

반 시진 후….

검마를 따라갔던 태백파의 무인은 단목강을 제외하고 모두 처참하게 죽은 상태….

검마가 일부러 종남파에서 멀어지기 위해 유인을 한 것이었으나, 태백파는 혼자 도망가는 검마를 과소평가하다가 이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여기저기 시체가 흩어져 있고.

검마는 그 중 한 시체 위에 앉아서 서역에서 가져온 망우초를 한 대 피우고 있었다.

피 칠갑을 한 단목강이 여전히 중검을 뽑아들고 있는데도….

검마는 연기를 내뿜으면서 요지부동이었다.

검마가 말했다.

“이제 조금 지쳤나보군.”

단목강은 허리를 한 번 베여서 피를 잔뜩 흘리고 있었다.

단목강은 그동안에 검마에게 수없이 많은 공격을 적중시켰는데도 검마가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자 넋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그 사이에 태백파에서 데려온 고수들이 전부 검마에게 목숨을 잃었다.

애초에 검마가 도검불침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렇게 피해가 크지 않았을 터. 하지만 검마는 어둠을 틈 타 이리저리 도망 다니면서 태백파를 농락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

검마의 양 팔에는 태백파의 무인들을 죽이면서 묻은 피가 가득했다.

단목강이 침을 삼켰다.

죽였다, 라고 느낀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정수리에도 공격을 적중시켰고, 심장 부위에도 중검을 한 번 찔러 넣었다.

하지만 이상한 금속성이 울릴 뿐, 검은 박히지 않았다.

이대로 검마와 계속 싸운다면 동이 틀 때쯤에 검마의 손에 죽게 되리라는 것을 단목강도 잘 알고 있었다.

한데….

허연 연기를 뿜어대던 검마가 단목강을 보며 말했다.

“자네는 어느 문파인가?”

어찌 사람의 말투가 이런 것일까. 무척 단조로웠다. 마치 지금 처음 만나서 통성명을 나누는 것 같았다.

지치고 당황한 마음에… 잠시 호흡을 고르던 단목강이 검마의 물음에 대꾸했다.

“태백파다.”

“태백파라…. 유명한 문파도 아닌데 제법 강하군.”

“태백파는 원래 강했다. 내가 아둔하여 본파의 무공을….”

단목강은 말을 하다 말고 삼켰다.

자신의 문도들을 죽인 자와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생각해도 제 정신이 아니었다.

연기를 뿜어대던 검마가 단목강에게 말했다.

“가라. 넌 살려주마.”

“허… 미친 새끼로구나. 승부를….”

“승부? 아직도 이게 승부라 생각하느냐. 체력이 떨어지더니 상황파악이 잘 안 되나 보군. 저쪽을 보아라.”

검마의 말과 함께 저 멀리서 한줄기 바람을 일으키면서 한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단목강이 언뜻 봐도 결코 자신보다 아래라 볼 수 없는 또 다른 고수의 등장이었다.

사내가 다가오자 앉아 있던 검마가 말했다.

“우사는 어찌하고. 자네 혼자 오는가?”

새롭게 등장한 사내는 검마가의 좌사자였는데 나이가 서른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대번에 거리를 좁힌 사내가 검마 앞에 우뚝 멈춰 서더니 대꾸했다.

“곧 올 겁니다. 이놈은 뭡니까?”

‘이 놈.’이라 불린 태백파의 장문인 단목강이 중검을 움켜쥐고 새롭게 등장한 사내를 바라봤다.

뜬금없이 검마가 좌사자에게 단목강을 소개했다.

“태백파의 장문인인 것 같다.”

“태백파라… 죽일까요?”

“놔둬라. 보내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검마와 검마가의 좌사자는 이내 단목강을 없는 사람 취급하기 시작했다.

단목강은 자신을 왜 놓아주는지도 모르는 상태….

그렇다고 덤비자니 검마는 물론이고 새롭게 등장한 사내 또한 만만치 않아 보였다. 더군다나 배에서 점점 피가 콸콸 쏟아지는 형국이라… 어처구니없게도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단목강이 기괴한 표정으로 물러나자 좌사자가 검마에게 물었다.

“련주(聯主), 저 자는 어찌 살려주는 겁니까? 제법 쌓은 내공이 많아 보이는데요.”

좌사자는 검마를 련주라 불렀다.

지난날 검림의 곽서명이 언급했던 검마련주(劍魔聯主)….

검마는 그 검마련주의 후예였던 것.

검마가 냉소를 머금은 채로 딴 소리를 내뱉었다.

“위극신이 말이야….”

“일월가주요?”

“그래.”

“날 풀어주더구나.”

말과 함께 검마가 히죽 웃었다. 그러자 좌사자도 검마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킬킬…. 먹잇감이 되신 겁니까?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그러게 말이다.”

“하하하하.”

말과 함께 주종(主從, 주인과 부하)이 함께 웃었다. 검마가 말을 이었다.

“내가 먹잇감이 되다니…. 정확히 말하면 위극신이 날 두 번 풀어준 셈이다. 내 몸에 추종향을 발라놨겠지.”

“고생하셨습니다. 위극신이 그리 대단합니까? 그놈 아버지가 유명한 것이야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좌사자의 말에 검마가 씨익 웃었다.

“암, 재미있지. 이 중원무림에서 가장 재미있는 녀석들 중의 한 명이지.”

“또 있습니까?”

“있다. 군림맹의 이서휘라고….”

검마가 불쑥 이서휘를 떠올리곤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침을 삼켰다.

“둘 중 한 명만 얻어도 발판이 될 터인데…. 저 따위 장문인은 흡수해봤자 도움이 안 되는구나. 무언가에 막힌 기분이야.”

검마가 단목강이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위극신을 떠올렸다.

“이 사냥꾼 새끼를 어찌할까….”

검마가 위극신을 언급하자, 좌사자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어찌하긴요. 우리가 먼저 잡아야지요.”

좌사자의 말에 검마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몇 명이나 모았느냐?”

검마는 검마련주의 본래 근거지인 서장에서 모은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묻고 있었다.

좌사자가 실망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이백 명 밖에 못 모았습니다. 어쩐지 죽인 놈들이 그보다 많을 것 같군요. 검마련주가 죽은 줄 알았답니다. 썩어빠진 녀석들…. 그래도 우사가 직속 세력을 데리고 오면 더 늘어날 겁니다.”

“그 정도면 훌륭하다. 충분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좌사자의 물음에 검마가 실실 웃으며 일어섰다.

“곧 정마대전이 벌어질 게다.”

“기대가 됩니다.”

“기대? 정마대전은 신경도 쓰지 말아라. 우리는 상황을 살펴 보다가 단 두 명만 잡으면 된다. 위극신과 이서휘…. 그 두 놈을 죽여야 다음 일이 풀릴 것이다.”

검마가 자신의 마검을 손으로 튕기며 말을 이었다.

“두 놈을 차례차례 여기에 담으면 이 중원 무림에서 나를 막을 자는 없을 것이야.”

검마가 걸음을 옮기자 좌사자가 따라가면서 질문을 던졌다.

“순서를 정해주십시오.”

“상황을 지켜보자꾸나. 위극신이 총본산에서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르니…. 동향부터 감시해라. 추종향도 슬슬 지워야겠다.”

“알겠습니다.”

검마가 주변을 둘러보며 킬킬거렸다.

“위극명이나 위극단이 오면 좀 괴롭혀 주려고 했더니 코빼기도 안 보이는구나.”

검마….

이 남자는 정마대전이 벌어질 때, 위극신과 이서휘를 흡수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참으로 검마다운 생각이었다.

점점 감숙과 섬서 일대로 가지각색의 세력들이 집결하고 있었는데 검마처럼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자들이 제법 섞여 있었다.

각자의 운명이 바뀐 터라, 이는 이서휘도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 ☆ ☆

이서휘는 검선과 함께 종남파에 머물면서 천대암 장문인이 회복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이서휘는 그 사이에 군림맹, 청협문, 백검문 등에 종남파의 전서구를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도이와 도삼이 검림을 이끌고 오고….

백도맹에 이어서 백도 세력이 집결하면, 이서휘는 섬서와 감숙을 오가며 상황을 조율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며칠 동안 종남파에 머무는 동안 가장 먼저 움직인 세력은 백도맹이었다.

종남파에도 참전을 하라는 전서구가 날아왔던 것.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교의 총본산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정파 무림의 기둥을 자처하는 백도맹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서신에 따르면 백도맹주가 직접 무력 조직을 이끌고 섬서의 장안으로 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백도맹에 속한 각 문파에서도 병력을 동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백도 세력이 먼저 섬서의 장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삼일 째 되는 날….

천대암의 제자인 장연후(張練煦)가 검선과 이서휘를 찾아와 조용히 고했다.

“스승님이 두 분을 찾으십니다.”

“깨어났나?”

“네.”

두 사람이 급히 장연후와 함께 천대암을 찾아갔다.

검선은 깨어있는 천대암을 보자마자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대암아.”

누워 있던 천대암이 고개를 돌리면서 대꾸했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이렇게 누워서….”

“개의치 말아라. 몸은 좀 어떠하냐?”

그 말에 천대암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좀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자네 문중의 일이라 물어볼 사람도 없어 답답했는데 그래도 깨어났으니 다행이로구나.”

천대암이 시선을 돌려 옆에 서 있는 장연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연후야.”

“네, 스승님.”

천대암이 자신의 오른손 중지에 끼고 있던 투박한 철반지를 빼내더니 장연후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네? 안 됩니다.”

이서휘와 검선은 철반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천대암이 말을 이었다.

“일으켜다오.”

장연후가 천대암의 등에 손을 넣자 땀을 흘렸는지 무척 축축했다. 천대암이 일어나더니 검선과 장연후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어르신… 종남파 장문인의 자리를 여기 장연후에게 넘기겠습니다.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본래 제가 공표하면 그만이나 사제들의 반발이 클 것으로 예상되어….”

“스승님!”

장연후의 외침을 무시하고 천대암이 말을 이었다.

“이미 네가 따로 익히던 무공의 기초는 장문인들이 사용하는 벽사해검의 일성 부분을 훈련시킨 것이다. 이것을 받아라. 사용 방법은 따로 알려주마.”

천대암은 이서휘가 있어 문파의 무공을 익히는 비밀을 직접 말할 수가 없었다.

천대암이 말을 이었다.

“이미 제 사제들은 나이가 많고 무공이 정형화되어 있어 본문의 벽사해검을 익히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저만 해도 연후의 나이에 장문직을 뜻하지 않게 이어 받아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어르신께서 공표만 도와주시면 나머지는 종남파의 운명에 맡기겠습니다.”

“그게 자네 뜻이라면 도와주겠네.”

“감사합니다.”

“연후야. 장문인으로서 마지막 명을 내린다.”

“말씀하십시오.”

“종남파는 오늘부터 십 년 간 봉문에 들어갈 것이다. 십 년이면 네가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벽사해검을 삼성, 아니 사성까지도 이룰 수 있을 터. 그 전까진 종남파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니 종남파의 명운은 네 손에 달렸다.”

“알겠습니다.”

천대암이 계속 고집을 피워 장문인 자리를 장연후에게 기어코 넘겼다.

이서휘와 검선은 잠시 후에 바깥으로 나와 한숨을 내쉬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어렵겠습니까?”

“이미 무공을 회복하기 힘들어 보이는구나. 공표까지만 도와주고 물러나자. 남의 문중의 일이라 더 개입하는 것도 옳지 않다. 다만 전중산이 허튼 짓을 하면 나중에 죄를 물어야겠지. 이제부터 종남파의 장문인은 장연후니까.”

“알겠습니다.”

한데, 종남파의 일을 지켜보던 이서휘는 문득 그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서휘 자신도 언젠가는 제자를 맞이해야 할 터.

이서휘가 얻은 깨달음과 무공은 이미 일가(一家)를 이룬 상태였다.

훗날의 일이었지만 이서휘도 조심스럽게 문파 혹은 암중세력을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한, 무공이 목적이 아니라….

이서휘가 지금 정마대전을 앞두고 하려는 행동처럼 무림의 대사를 암중에서 처리하고 조율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생의 낭혼련이 그야말로 전쟁만을 위해 조직한 단체였다면, 지금 만들려는 문파는 이서휘처럼 ‘숨은 검’을 자처하는 세력이 될 터였다.

쉽게 말하자면, 드러나지 않는 신비 세력을 만들 생각이었다.

검림은 토착 세력처럼 뿌리를 내린데다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문파처럼 행동하기에는 제약이 컸다.

이서휘는 당대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검선처럼 늙게 되는 시절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종남파에서 겪은 경험이 이서휘의 사고(思考)를 확장시킨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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