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1장. 백옥무하(白玉無瑕)>
목검을 쥐니 이서휘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서휘가 두 명의 호위 무사를 바라봤다. 그 순간, 세 사람은 눈빛만으로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두 명의 호위 무사는 이서휘의 기도를 읽자마자 보통 고수가 아님을 깨닫고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더니 이서휘와 천화공자 구궁인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눈치가 제법이네.’
수하들이 나서다가 걸음을 멈추자 구궁인이 눈을 빠르게 껌벅이면서 말했다.
“뭐하십니까? 대체.”
호위무사 한 명이 입술에 침을 바르더니 조용히 대꾸했다.
“고수입니다.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파악이 아직 덜 된 것은 구궁인이었다.
“두 분, 평소에 할 일도 없는데 제 주머니에서 꼬박꼬박 보수(報酬)가 지급됐다는 건 잊으셨나 봅니다. 이런 날을 위한 거 아니었습니까? 나는 저 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으니 가서 보여주십시오. 목검입니다. 목검! 장난하십니까?”
구궁인의 말에 두 사람이 밥값을 하려고 용기를 냈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더니 거리를 벌려 이서휘의 좌우로 흩어졌다.
‘목검에 맞아 죽을 수도 있건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서휘는 목검을 쥐고 등 뒤에 서 있는 옥의림과 잠시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옥의림도 그간 이서휘의 무공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모를 것이다.
좌측의 사내가 직도를 내려치면서 들어오고, 동시에 우측에서 장검 한 자루가 가슴께로 들이닥쳤다.
이서휘가 단 일보를 뒤로 움직이면서 직도를 피하고, 오른손의 손목을 경쾌하게 돌려 목검으로 상대의 손목을 내려쳤다. 하지만 일부러 내공을 적당히 주입해 순식간에 이서휘의 목검이 손목, 팔뚝, 어깨, 머리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실제로 때린 것은 머리 한 번이었다.
따악!
“윽.”
이서휘의 동작은 동시에 펼쳐졌다. 좌측에서 내밀고 있는 직도를 왼손으로 붙잡아 이동 중인 경로에 힘을 실어줬다.
사내의 균형이 앞으로 쏠리자 이서휘가 발로 사내의 안쪽 무릎을 살짝 밀었다.
사내는 별 다른 충격도 없었는데 그 자세 그대로 균형을 잃고 땅바닥에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그 사이에 우측에 있던 사내는 머리를 비비면서 물러났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나섰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지만… 이서휘의 대처에 호위 무사 두 명은 등줄기가 서늘했다.
예상은 했으나 격차가 너무 심했다.
직도를 쥔 사내가 벌떡 일어나 자세를 잡았고.
이마를 한 대 맞은 사내가 침을 꿀꺽 삼키고 발걸음을 옮기면서 팔꿈치를 치켜들고 검봉을 땅을 향하게 하는 특이한 파지법으로 변경했다.
단 일합(一合)에 이서휘의 경지가 까마득하게 높다는 것을 눈치 챈 두 사람은 어느새 두려움을 잊고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이서휘를 바라봤다.
누군가의 꿀꺽 소리와 함께 침이 채 식도로 넘어가기도 전에 이서휘의 신형이 움직였다. 동시에 목검이 두 사람의 눈가에 어지러운 궤적을 그렸다.
직도를 쥐고 있던 자의 이마에 목검이 스쳐 지나갔다.
이마가 대번에 찢어지면서 솟구친 핏물이 구궁인의 얼굴에 튀었다. 구궁인이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기랄… 더럽게…”
구궁인이 손바닥에 묻은 피를 잠시 내려 보는 와중에…….
빠각― 소리가 들려 구궁인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
직도를 들고 있던 사내가 몸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구궁인이 중얼거렸다.
“머리를 맞았나?”
구궁인이 그 말을 하자마자 휘청거리던 사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사이에 장검을 쥔 호위 무사가 뒷걸음을 치더니 이서휘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것처럼 초식도 잊은 채로 검을 마구 휘둘렀다.
그 추태에 구궁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하십니까?”
구궁인은 이서휘의 등을 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목검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호위 무사가 휘두르는 검을 검지와 엄지로 붙잡았다.
“헉!”
이서휘가 목검을 치켜들자 호위 무사가 검을 놓치더니 엉덩방아를 찧어 버렸다.
하지만 이서휘는 출수를 거두지 않았다.
적당한 힘을 줘서 목검을 내려치자 빠각― 소리와 함께 사내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어찌나 아파보이던지 지켜보던 구궁인이 자신의 이마를 저도 모르게 붙잡을 정도였다.
두 명의 호위무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이서휘가 말을 툭 던졌다.
“이제 됐으니 두 사람은 가시오.”
그 말에 두 사람이 자세를 대번에 풀더니 꼿꼿하게 서서 이서휘의 말에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두 사람은 이서휘와 구궁인에게 번갈아 포권을 취하더니 서둘러 물러났다.
구궁인이 도망가는 두 사람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이 사람들이!”
이서휘가 등을 돌린 다음에 구궁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화공자, 내가 누구라고?”
“뭐… 뭐가… 당신이 누군지 어찌 알아?”
이서휘가 구궁인에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말했지 않느냐?”
구궁인이 점점 다가오는 이서휘와 옥의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지 마라.”
그 말에 이서휘가 구궁인의 코앞으로 다가와 구궁인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누구라고?”
구궁인이 눈을 두세 번 깜박이더니 대꾸했다.
“아, 정혼자시라고? 맞네. 이제 생각났네.”
“또 올 텐가?”
“뭐 여기가 당신 집도 아니고 내가 못 올 이유는 없지. 그리고 내가 어?”
구궁인이 옥의림을 바라보면서 놀란 표정을 짓자, 이서휘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구궁인의 좌장이 바람을 일으키며 이서휘의 갈비뼈로 향했다. 하지만 구궁인의 좌장이 이서휘의 갈비뼈에 닿기도 전에 이서휘의 왼손이 뻗어 나와 구궁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크윽.”
이서휘는 여전히 옥의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이서휘와 옥의림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이서휘가 바라보자 구궁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서휘의 시선을 회피한 옥의림의 얼굴도 약간 빨갛게 익어 있었다.
이서휘는 볼 수 없었지만 구궁인은 옥의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수 있는 위치였다.
이서휘가 왼손을 천천히 풀자 구궁인은 그제야 숨을 쉬면서 옥의림이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고 호통을 내질렀다.
“이… 이것들이 정말! 너 진짜 내가 가만히…….”
구궁인은 눈치도 없이 말을 내뱉다가 이서휘의 눈빛을 보고 말을 삼켰다.
이서휘가 말했다.
“구 공자.”
“왜.”
“돌아가서 다른 고수를 초빙해 올 생각이지?”
구궁인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꾸가 없었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구대문파 장문인들과 혹시 친분이 좀 있는가?”
“없소만….”
“세 곳의 맹주 중에 아는 사람이 있는가?”
“없소이다.”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럼 누가 됐든 간에 데려 오지 말거라. 번거롭다. 만약 데려 오면…….”
이서휘는 그 순간에 자신의 살기를 의도적으로 지워냈다. 이서휘의 표정과 기도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내뱉는 말은 더 묵직해진 느낌이었다.
“……천화상단으로 찾아가겠다.”
별 말이 아니다.
살기도 없었다.
그러나 이서휘의 표정과 눈빛이 진지했다. 구궁인의 입가에 조소가 감돌 정도로 평범한 어조였다.
‘이 자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이서휘가 구궁인의 눈빛을 읽고 쥐고 있던 목검을 구궁인의 눈앞에 가지고 와서 목검을 세운 채로 내공을 주입했다.
“뭐하시오.”
이서휘가 검사(劍絲)를 일으킬 때의 내공을 주입하자 목검의 표면이 파르르르 떨리고 있었다.
구궁인과 옥의림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검의 결에서 쩍, 쩌적 소리가 흘러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새 하얗게 몰아치기 시작한 검사가 목검을 휘감더니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휘감고 있던 목검을 새까맣게 태우고 있었다.
어느새 목검은 검병 부분만 남았다. 검신의 형태를 유지하던 검사는 이서휘가 내공을 거두자마자 너풀거리면서 하늘 위로 흩어지고 있었다.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무공 수위였다.
구궁인과 이서휘가 눈을 마주치자, 이서휘가 말했다.
“다시 오면 천화상단은 잿더미다. 알아들었지?”
이서휘가 대답을 하라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낯빛이 하얗게 질린 구궁인이 침을 삼키면서 대꾸했다.
“알아들었소.”
“가라.”
이서휘는 구궁인을 보내고 나서야 잠시 옥의림과 모닥불을 피우는 자리에 앉았다.
옥의림이 말했다.
“천화상단은 제법 위세가 있어요.”
“걱정 말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
“이렇게 노골적인 일은 처음이죠. 스승님이 계셨으니까.”
“저 놈이 선배님이 말한 부잣집 놈이야?”
“네.”
“그럼 다른 놈들도 더 있다는 얘긴가?”
“아마도?”
이서휘가 피식 웃자 옥의림이 말했다.
“그 목검을 불태운 것은 어떻게 하신 거죠?”
“별 거 아니야. 나도 할 수 있고 선배님도 할 수 있고. 내공부터 쌓아야지.”
“내공은 저도 착실히 쌓았어요.”
“해 봐. 그럼.”
옥의림이 쌓여 있는 목검 한 자루를 들고 오더니 양손으로 쥐고 내공을 불어넣었다.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옥의림의 얼굴이 홍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서휘가 미소를 짓자 옥의림이 시무룩한 얼굴로 포기했다.
옥의림이 말했다.
“언제쯤 가능할까요?”
“내공을 잘 쌓으면?”
“네.”
“내공 수련만으로는 부족하고 영약의 도움이 있어야 할 것 같아. 각종 영약을 구해서 먹는다고 하더라도 십년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불공평하네.”
“어째서?”
“대주님이랑 저랑 열 살 차이도 안 나는데 어찌 십년이에요?”
“그러게.”
“그러게라니요?”
“십년이 안 걸릴 수도 있고.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거니까.”
이서휘가 옥의림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옥의림이 이서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왜요? 내공 살펴보게요?”
옥의림의 말투가 조금씩 편해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별 말을 하지 않고 손을 흔들자 옥의림이 눈을 껌벅이다가 자신의 손목을 올려놓았다.
백옥무하(白玉無瑕)라 불리던 옥의림의 손목이 이서휘라는 검은머리 짐승에게 잡히는 순간이었다.
이서휘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옥의림의 내공 수준을 가늠해봤다.
이서휘가 돌팔이 의원처럼 중얼거렸다.
“음. 나쁘지 않아!”
그때였다. 진금구의 거처에 추옥대로 추정되는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이서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가까스로 자제하고 말했다.
“저건 또 뭐야.”
그 말에 옥의림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승님이 말한 어중이떠중이들이요.”
“아이, 정말.”
이서휘가 짜증난다는 것처럼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마구 비비다가 일어나서 목검이 쌓인 곳으로 걸어갔다.
‘시간으로 따지면 십수년 만에 겨우 손목 한 번 잡았다고. 내가 뭘 어떻게 하겠데? 왜 이렇게 방해들이야!’
이서휘가 목검을 거칠게 쥐고 성큼성큼 걸어가서 몰려온 추옥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려면 좀 한꺼번에 오지 왜 이렇게 드문드문 오는 것이냐?”
저 이서휘마저도 흥분하여 앞뒤를 자르고 되도 않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어쩐지 목군자가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이 퍼진 모양이었다. 기회라 생각하여 옥의림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겠다고 서로를 밀치면서 몰려왔던 추옥대의 무리가 이서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넌 뭐야?”
“뭐야 저 놈은.”
“당신은 뭐야?”
“옥 소저, 이 사람 누굽니까?”
동네 청년들을 비롯해 근방에 머물던 무림인들까지. 훗날 옥의림의 미모를 칭송하며 백옥무하(白玉無瑕)라는 별호를 붙였던 핵심인원들이었다.
하지만 이서휘가 알게 뭔가?
겨우 용기를 내서 옥의림을 찾아왔던 이서휘다.
본래 마교를 정리할 때까진 돌아보지 않을 참이었던 이서휘다.
그러나 지친 마음으로 덜컥 옥의림을 찾아와 모처럼 전생에서 못 다했던 인연을 조금이나마 이어가려 했던 이서휘였다. 그런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생에는 진금구가 알아서 어중이떠중이들을 막았었나 보다. 이서휘는 새삼스럽게 전생의 진금구에게 감사하면서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것들을 정리하지 못하면 내가…… 주화입마에 걸리겠구나!’
이서휘가 목검을 쥐고 몰려온 추옥대를 바라봤다. 저들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화지련과 옥의림…….
미모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견줄 여인이 없는 북화남옥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옥의림을 보러 왔다는 이유만으로 저 자들을 모두 목검으로 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서휘가 목검을 쥐고 사람들을 막아섰다가 가만히 서 있자 옥의림도 이서휘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대주님, 천화공자하곤 좀 달라요. 사정을 봐주셔야 해요.”
“그런가?”
“네.”
이서휘는 옥의림의 말에 몰려온 추옥대를 돌아보며 말했다.
“옥 소저는 정혼자가 따로 있으니 다시는 이런 식으로 몰려오지 마시오.”
“정혼자가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지.”
이서휘가 혀를 찼다.
“이 사람들이 정말 봐야 믿겠소?”
이서휘의 말에 아우성이 더 커지고 있었다.
“봐야 믿겠네!”
“뭘 보란 말인가?”
“쯧쯧! 허풍이나 떨고 말이야.”
사람들의 시선이 이서휘에게 고정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서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목검을 왼손으로 넘기고 오른손을 옥의림을 향해 내밀었다.
누군가가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옥의림이 이서휘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사람들의 시선도 이서휘의 손으로 향했다.
누군가는 심각한 눈빛으로, 누군가는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뭐야?”
“농담이 지나치군.”
“아니지?”
“저 자가 정혼자? 처음 보는 사람이?”
누군가는 성난 얼굴로 걸어올 기세였다. 이서휘가 왼손에 들고 있는 목검으로 경고하듯이 다가오는 자를 향해 겨누며 말했다.
“멈춰라.”
여전히 오른손은 옥의림에게 내밀고 있었다.
옥의림이 손을 잡지 않는다면 이서휘는 다가오는 자들을 목검으로 죄다 두드려 팰 기세였다.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어처구니없게도 옥의림이 선택할 시간이었다.
이서휘의 몹쓸 심리전이었다.
이서휘가 목검으로 이 자들을 모조리 때리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옥의림 자신이 이서휘의 손을 붙잡아 이 자들의 마음을 되돌리게, 아니 포기하게 할 것인가.
추옥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동물이라 했다.
추옥대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제발 옥의림이 손을 내밀지 말았으면….
저 목검을 들고 있는 얼굴 허연 애송이를 한바탕 혼내줄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우린 믿고 있소. 옥 소저를…….”
믿고 기다리던 자들이 눈을 빛내며 옥의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욱 하는 성격을 지닌 무림인이 이서휘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자네가 감히 우리를 농락해! 뭘 보란 말인가? 그 손 치우지 못해?”
그 말에 이서휘가 경고했다.
“이 자들이 분수도 모르고 정말.”
옥의림이 머뭇거리자 이서휘가 결국 앞으로 두어 걸음을 나섰다. 목검을 쥔 왼손에서 빠드득 소리가 심상치 않게 울렸다.
그 순간에 사람들이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성큼 다가온 옥의림이 이서휘의 손을 잡았던 것.
그 순간이었다.
쨍그랑― 쨍그랑― 투두둑―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이더냐?
누군가의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였을까?
뭐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겠으나 그건 아니었다. 몇 명이 들고 있던 병장기를 저도 모르게 바닥에 떨군 소리였다.
누군가의 탄식이 울려 퍼졌다.
“젠장, 다 끝났군.”
끝나긴 대체 뭐가 끝났다는 말일까?
추옥대가 내뱉는 한숨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서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괜히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으나 본심은 이 자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이러고 있는 것처럼 시선을 돌리지 않고 사람들을 바라봤다.
옥의림의 말대로 천화공자보다는 그래도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낙심 그 자체의 모습.
이서휘는 손을 내밀었을 뿐, 이서휘의 손을 잡은 건 옥의림의 의지였다.
추옥대에겐 그 사실이 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으니….
어쨌든 이게 다 이서휘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이서휘는 옥의림의 섬섬옥수를 손에 쥐고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손이 어찌 이다지도 부드러울까 하며 감탄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이서휘와 옥의림이 손을 맞잡고 추옥대를 바라봤다.
누군가는 부러워하고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이서휘를 노려봤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격하고 순수한 감정들이 두 사람에게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일부는 차마 이서휘와 옥의림이 손잡은 모습을 보기 싫다는 것처럼 시선을 돌린 다음에 터벅터벅 발걸음을 돌리면서 세상을 잃은 것처럼 추옥대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갑시다. 이런 날엔 술을 마셔야지.”
“뭐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내 알았지.”
“뭐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은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
“거 사람들 참 말이 많군. 옥 소저가 누굴 선택하든 우린 다 존중해주기로 지난날 모여서 굳게 약조했지 않은가?”
돌아가던 자가 자세를 돌리더니 이서휘를 향해 물었다.
“그쪽 이름이나 압시다.”
이서휘는 이름을 밝히기 싫었다. 괜히 진금구와 옥의림에게 피해를 입힐까 두려웠던 것. 마교의 표적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아니던가. 사람들의 말이 어디까지 퍼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도이와 도삼을 떠올리던 이서휘가 덤덤하게 내뱉었다.
“도일(盜一)이라 하네.”
“도일? 흥, 그딴 이름도 있는가. 하긴, 이름부터 잘 훔치게 생겼네.”
“뭐 이름을 밝히기 싫다는 것이겠지. 갑시다.”
누군가가 이서휘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이면서 걸음을 옮겼다.
“천하제일의 도둑놈이란 뜻이겠지….”
이서휘는 귀가 밝아 다 듣고 있었으나 뭐 어쨌든 저 자들의 심정을 잘 알 것 같았기에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에 곱게 보내줬다.
추옥대가 물러나자 이서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선배님의 부탁을 어쨌든 나름 잘 수행했군.”
사람들이 다 물러났는데도 이서휘는 옥의림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
옥의림이 말없이 사라지는 추옥대를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이제 보니 대주님이 풍류공자였군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풍류공자라니? 맹세하건대 그렇게 살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이서휘가 옥의림을 바라보자 옥의림이 슬며시 손을 빼며 말했다.
“뭔가 속은 느낌이 드는데….”
“허… 속다니! 그럴 리가 있나? 평화롭게 물러나게 만든 것만으로도 우리 두 사람이 지혜롭게 잘 대처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이서휘가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설득을 하고 있었다.
옥의림이 아무 말 없이 찬 바구니를 들더니 집으로 들어갔다.
이서휘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밥은 주려나보네.’
그나저나 이서휘에게 감히 풍류공자라니….
이보다 더 억울한 말이 있을까.
그간 기루에 가서도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터라 단우혁과 백류혼에게 수모를 당한 게 얼마나 많았던가.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었다.
‘억울하다. 억울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건만….’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내가 이서휘였다.
차라리 무림공적으로 몰려도 이보다 더 억울하진 않을 터.
진정한 풍류공자라면 더 교묘한 수법을 썼지 않겠는가? 옥의림이 대놓고 풍류공자라 말할 정도로 이서휘의 수법은 빤한 면이 있었다. 그 어설픔이야말로 이서휘의 풍류수법이 그리 높지 않은 경지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일이 어찌되었든 다행스럽게도 밥 짓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서휘가 그 냄새를 맡으며 생각했다.
‘좋구나. 어쨌든 오길 잘했어.’
이서휘가 스스로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꽝꽝 얼어있던 가슴 한 구석이 봄바람에 눈 녹듯이 부드럽게 풀리고 있었다.
심마(心魔)라는 게 있었다고?
옥의림이 집에 들어가서 밥을 하는 광경.
그리고 조용한 집 한 채.
이 꿈 같은 일상의 평온함에 심마가 머물 곳은 없었다.
잠시 후 옥의림이 목검을 깎고 있는 이서휘를 불렀다.
“식사하세요.”
이서휘는 옥의림이 차려준 밥과 찬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진금구 선배가 워낙 검소한 터라 오늘 올라온 음식들도 실로 간소했다.
그러나 이런 호사가 어디 있을까.
옥의림이 이서휘의 앞에서 밥을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이서휘가 말없이 밥을 먹기 시작하자 옥의림도 고개를 숙이고 함께 그릇을 비워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이서휘가 옥의림을 힐끗 바라보자 옥의림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주님.”
“응?”
“전에도 궁금했던 건데….”
“응.”
“원래 절 아셨어요?”
“아니? 왜?”
옥의림이 무슨 생각을 하더니 이서휘에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상하게 듣지는 마세요.”
“응.”
“눈빛이….”
“내 눈빛?”
“네.”
“말이 이상하긴 한데 하여튼… 처음 볼 때부터 처음 보는 사람처럼 쳐다보지 않으셨어요.”
“말이 이상하네.”
“이상하죠?”
“응.”
이서휘는 목이 막혀서 물을 마신 다음에 말을 이어나갔다.
“전생에 인연이 있었나 보지.”
“참 고리타분한 말이네요. 대주님이 풍류공자는 아닌 걸로….”
“인정해주니 고맙네.”
“별 말씀을요. 그런데 스승님이 돌아오시면 또 바쁘시겠네요?”
“바쁘다니?”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 오셨을 때도 그렇고. 바쁘지 않고서야….”
“스승님에게 세상 이야기는 듣고 있어?”
“아니요. 바깥 얘기는 전혀 하지 않으세요.”
“세 곳의 맹을 연합하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때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연합과 마교를 칠 생각이야.”
이서휘가 그야말로 짤막하게 현황을 설명하자 옥의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대답에는 ‘그걸 왜 대주님이 하시나요?’라는 어조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어조에 대꾸할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가 이해하지 못할 지라도 전생이 암울했던 이서휘에겐 꼭 필요한 일이었다.
가만히 있어서는 지금 주어진 행복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이서휘는 알고 있었다. 개인의 행복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행복과도 연계되는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누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설령 말리더라도 이서휘는 해낼 생각이었다. 심지어는 이서휘가 바라보고 있는 옥의림에게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옥의림이 납득하도록 쉽게 설명할 길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서휘가 말했다.
“예전에 선배님을 뵈었을 때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어.”
“왜요?”
“무공 실력은 높은데 세상을 관망하는 것 같아서.”
“지금은요?”
“추측이지만 한 때는 나처럼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녔던 적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이 바뀌었어.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더군. 선배께서도 목검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고. 아직 내가 그럴 시기는 아니야. 젊으니까….”
잠시 옥의림을 바라보던 이서휘는 마음이 정리되고 있었다. 속내를 털어놓았다.
“선배를 따라 목검을 쥐어보니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더군. 나도 언젠가는 목검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그러나 때가 있는 것 같아. 지금은 목검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니까.”
두 사람은 식사를 마쳤으나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옥의림이 말했다.
“바깥이 그런 세상이라면… 저도 관망하진 않을 거예요. 스승님이 돌아오시면 물어볼게요. 세상 일에 대해서.”
옥의림의 말에 이서휘가 속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표정은 덤덤하게 유지한 채로 이서휘가 말했다.
“그렇다면 다음에 올 때는 영약이라도 구해와야겠네.”
그 말에 옥의림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좋은 걸로 구해주세요.”
“알았어.”
대답은 그리 했으나 옥의림이 나설 때까지 상황을 길게, 그리고 나쁘게 이어나갈 생각은 없었다. 이서휘가 불쑥 화제를 전환했다.
“산책할 만한 곳이 있을까?”
“곡양호가 있지요.”
“보고 싶군.”
“곧 해가 떨어질 걸요?”
그 말에 이서휘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난 원래 달을 더 좋아해.”
이서휘의 말에 옥의림이 고개를 삐딱하게 하더니 또다시 풍류공자 바라보듯이 이서휘를 노려봤다. 그 눈빛에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진심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니까.”
옥의림이 이서휘를 따라나설 수 있을까? 곡양호의 위치만 대충 알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도 되는 순간이었다. 이서휘가 옥의림의 마음을 읽고 씨익 웃으면서 일어나 성검을 먼저 챙기면서 말했다.
“늦었으니 먼저 집에다 바래다줄게. 곡양호 위치만 알려줘.”
“그래요. 그 전에 여기 좀 치우고요.”
“놔 둬. 내가 할 거야.”
두 사람이 바깥으로 나갔다. 옥의림의 말대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조금 어둑해진 길을 잠시 거닐었다. 말없이 걷던 옥의림이 말했다.
“왼쪽으로 쭉 가면 곡양호. 오른쪽으로 가면 저희 집.”
“들어가. 금방 다녀올 거야.”
“네.”
옥의림이 이서휘를 한 번 올려다봤다가 도망가는 것처럼 종종 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잠시 후에 옥의림이 돌아보자 이서휘가 빨리 들어가라는 것처럼 손짓을 하며 말했다.
“어두워진다.”
이서휘의 말대로였다. 옥의림은 민가가 이어진 곳으로 걸어가는 터라 점점 밝은 길이 이어지고 있었고 이서휘가 홀로 서 있는 곳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옥의림이 서 있는 곳에서 이서휘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거뭇한 형체가 어둠에 묻혀 있었는데 그 순간에 옥의림은 이서휘가 어둠에 묻혀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있었다.
자신이 손을 내밀지 않으면 저 어둠을 빠져 나오지 못할 것처럼 고지식해 보였다. 옥의림이 낮은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못된 사람이네…….’
그 순간, 고민하던 옥의림이 빛을 몰고 가는 것처럼 어둠에 잠겨 있는 이서휘에게 다가갔다.
눈이 멀었던 전생에는 늘 어둠에 잠겨 있던 이서휘다.
다시 눈을 뜬 지금은 다를 줄 알았다.
그러나 이서휘는 눈을 뜨고 있는 지금까지도 짙은 어둠 속에서 머무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이서휘의 눈동자에 옥의림의 모습이 담기는 순간에 이서휘의 마음에 드리웠던 어둠이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서휘가 옥의림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내 빛이었구나. 눈을 잃었던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지만 지금은 이서휘만의 심상(心想)일 뿐, 옥의림은 사정을 모를 터였다. 때문에 이서휘는 말없이 옥의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정적을 깨고 옥의림이 말했다.
“흠, 같이 가요. 멀지 않으니까.”
“그래.”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길을 걸었다. 길을 걷던 옥의림이 자신의 심상을 꺼내 놓았다.
“제가 대주님보다 약한 거 맞죠?”
“아마도 그렇겠지?”
“근데 방금 왜 그렇게 물가에 아이를 혼자 보내는 느낌이 들었을까요. 수법인가?”
“수법……헙.”
별 말도 아닌데 이서휘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수법이라니…”
“아니라고 말해 봐요.”
옥의림이 고개를 삐딱하게 하더니 이서휘를 올려다봤다.
“말해보라고?”
“네. 거짓말은 잘 못 하시는 거 같아서.”
몇 걸음을 걷던 이서휘가 덤덤하게 말했다.
“수법이지, 물론.”
“역시….”
말과 함께 옥의림이 걸음을 멈추자, 이서휘가 옥의림을 바라보면서 뒷걸음질로 걸으며 슬쩍 화제를 전환했다.
“어둡지?”
“네.”
이서휘가 쌔앵 하는 소리와 함께 성검을 뽑아서 검신에 검사를 휘감자 이서휘와 옥의림이 서 있는 주변이 환해졌다.
이서휘가 말했다.
“이것은 어둠을 밝히는 수법이고….”
“하…!”
이서휘가 양팔을 좌우로 뻗더니 다시 자세를 돌려 어두운 밤길을 향해 성검을 시원하게 휘둘렀다.
바람과 함께 이서휘가 뱉어낸 검사가 풀려나면서 밤길을 차례차례 밝히면서 앞으로 뻗어나갔다. 이서휘가 다시 납검을 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이것은 길을 밝히는 수법…….”
“신났군요.”
“눈치가 빠르군. 오성이 뛰어나.”
“스승님도 제 오성이 뛰어나다고 하셨어요.”
“하하하.”
이서휘가 웃으면서 혼자 멋대로 걸어가자, 옥의림이 서둘러 뛰어와 이서휘와 발걸음을 맞췄다. 잠시 후 곡양호가 모습을 드러내자 이서휘가 탄성을 내질렀다.
“와아, 좋은데?”
탁 트인 곳에 곡양호의 잔잔한 물결이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반사광 때문에 주변이 제법 밝았다. 이서휘가 주변을 둘러보니 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이 흩날리고 바닥에는 이미 떨어진 벚꽃이 눈꽃처럼 머물러 있었다.
이서휘가 옥의림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손이라도 잡고 싶은데… 이미 수법이 바닥이 난 이서휘였다. 수법이 바닥났다는 것 때문에 이서휘가 홀로 웃자, 옥의림이 저 웃음의 의미를 궁금해 할 수밖에 없었다.
“왜 웃어요?”
하지만 물어봐도 이서휘는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이미 이서휘가 먼저 많이 다가갔다.
옥의림이 집으로 도망쳐도 무방할 정도로 부담을 줬다. 딱 이 선까지가 적당했다. 그 다음에 다가오는 것은 옥의림의 몫이라고 이서휘는 생각했다.
이서휘가 곡양호의 물결을 바라보며 딴소리를 했다.
“조각배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걸…….”
잠시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곡양호를 바라봤다.
무심코 이서휘가 시선을 돌렸다가 옥의림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그때, 불쑥 이서휘의 마음에 자리 잡은 생각이 있었다.
‘아이코, 안 된다.’
뭐가 안 된다는 것일까. 하여간에 이서휘가 자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옥의림에게 불쑥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초상비(草上飛)라고 들어봤어?”
풀잎 위를 걷는다는 경신술이다. 옥의림이 놀란 얼굴로 대꾸했다.
“들어는 봤지만 그게 가능해요?”
“수상비(水上飛)까지는 무리지만 초상비 정도는……에헴.”
이서휘가 일어나서 밑동이 잘린 나무를 성검으로 쪼개더니 곡양호의 물결에 뿌렸다. 적당히 나뉜 나무가 물결 위에서 흔들거렸다.
옥의림의 두 눈이 커졌다.
‘대주님이 스승님보다 무공이 높은 걸까?’
이서휘가 성검을 내려놓더니 성큼성큼 물가로 걸어가다가 주저 없이 날았다.
이서휘의 신형이 물 위에 떠 있는 나무 조각을 절묘하게 밟더니 이어서 조금 떨어진 나무 조각으로 순식간에 이동하다가…….
풍덩― 소리와 함께 물에 빠졌다.
부글부글 소리와 함께 이서휘가 곡양호의 수면 아래로 잠기는가 싶더니 어느새 물결 위가 잠잠해졌다.
옥의림이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수법이 너무 과하잖아요.”
옥의림이 더욱 잔잔해진 물결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설마 무공이 그렇게 높은데 수영을 못하시진 않겠지?’
그때, 이서휘가 가라앉았던 곳에서 회오리가 감돌기 시작하더니 쏴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소용돌이가 보일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물 밑에서 신형을 회전시키고 있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는군.’
그제야 이서휘가 바닥을 향해 쌍장을 분출하더니 그 여파로 물 위로 훌쩍 떠올랐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물속에서 이미 방향과 높이를 계산한 것처럼 곡선을 그리면서 날아와 순식간에 옥의림의 앞에 내려섰다.
옥의림이 황당한 표정으로 이서휘를 바라보자, 이서휘가 머리를 좌우로 털어내면서 말했다.
“초상비는 아직 무리인 걸로…….”
옥의림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 젖었잖아요. 초상비라더니…….”
“처음이라 그래. 그리고 금방 마를 거야.”
하지만 금방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이서휘의 몸에서 물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서휘는 일부러 극양의 내공을 일으켜 전신의 물기를 태워버리는 것처럼 사라지게 만들었다.
옥의림은 두 눈으로 보고도 이서휘의 경지가 새삼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옥의림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대주님은….”
“응.”
“무림에서 어느 정도 강한 거예요?”
다른 자도 아니고 옥의림이 물으니 이서휘가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이서휘 같은 성격에는 더욱 그렇다.
‘겨뤄봐야 알지….’
하지만 옥의림을 이해시킬 필요는 있었다. 이서휘가 곡양호를 바라보면서 바닥에 털썩 앉았다.
“생각해볼게.”
“네.”
옥의림이 이서휘 옆에 와서 앉더니 정말 물기가 마른 건가 싶어 이서휘의 소매를 살짝 만졌다. 애초에 물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처럼 물기가 전혀 없었다.
이서휘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덤덤하게 대꾸했다.
“많아야 열다섯 정도밖에 안 떠오르는군. 확실한 건 스무 명은 넘지 않을 거야.”
“그 정도 밖에 없어요? 그 분들이 대주님보다 강한 거예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느 정도 비슷한 경지에 있는 사람이 그 정도는 있을 거야. 더 많을 수도 있고…… 시간이 흐르면 달라지겠지. 줄어들거나 더 늘거나.”
“제 스승님은요?”
“물론 포함이지.”
“나머지가 누군지 알려주세요.”
“한 번이라도 봤던 사람이나 확실히 알려진 사람만 언급할게. 보지도 않고 가늠하는 건 말이 되질 않아서.”
“네.”
옥의림이 눈을 빛내자 이서휘가 새삼 옥의림을 바라봤다. 생각해보니 옥의림도 무림인이다. 더군다나 전생에선 무척 강했다. 여인들 중에서는 화지련을 제외하면 적수가 없을 정도였으니. 이서휘의 대답이 옥의림의 마음가짐을 조금이나마 단련시킬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이서휘가 가장 먼저 언급한 고수는…….
“검성(劍聖).”
그 순간에 이서휘가 눈을 빛냈다. 진금구 선배가 자신의 아버지인 검성을 언급한 적이 있을까? 하지만 옥의림의 표정에는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냥 들어본 적은 있어요, 하는 표정이랄까. 잠시 이서휘가 침음성을 흘리다가 말을 이었다.
“백도, 군림, 흑도 세 곳의 맹주, 무당과 화산의 장문인, 독고세가 가주….”
“잠시만요.”
“응.”
“대주님이 생각하는 서열로 언급하시는 거예요?”
“아니. 무작위인데?”
“네.”
“곽서명 선배….”
“곽서명이라는 분의 이름도 처음 들어요. 제 스승님까지 벌써 아홉 명이에요. 나머지는요?”
“마교에 있거나 아직 내가 뵙지 못했거나.”
이서휘는 말과 함께 스승인 검선을 떠올렸다. 옥의림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마교에 속하지 않은 고수가 더 많네요?”
“응.”
“그럼 승산이 있겠어요.”
“물론이지. 합치면 말이야…… 이렇게 합치게 하려고 그간 바빴던 것이고.”
“어쨌든 제가 스승님께 들은 것과는 조금 다르네요.”
“뭐라고?”
이서휘가 화들짝 놀라면서 묻자 옥의림이 말을 이었다.
“곽서명이라는 분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없으셨고… 먼저 초언약(招嘕楉).”
“초언약? 금시초문인데….”
“스승님에게 도전했던 사람이에요. 그 선배의 여제자와 제가 훗날 승부를 내기로 했어요. 스승님이 인정하셨어요. 무척 강하다고. 여중제일고수라 할 만하다고. 두 분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으세요.”
“여성이시라고?”
“네.”
“사연이 있나보군. 또 있나? 초언약이라는 선배 말고.”
“소림이 있죠.”
“맞아. 깜박했군. 활동을 하지 않으니…….”
“그리고 망객(忘客).”
“망객이 누구야?”
왜 이서휘가 모르고 있을까? 옥의림이 대답이 이어졌다.
“오래 전에 활동을 멈춘 고수라고 하셨어요. 기억을 되찾기 위해 고수들을 수소문해서 찾아다니는 자라고…… 활동이 없는 것을 보니 기억을 찾았거나 다른 누구에게 당했거나. 어쨌든 높게 보셨어요.”
“그렇군. 기억하고 있을게. 초언약과 망객이라… 두 분 모두 진금구 선배님에게 패했나?”
“네.”
“대단하시네. 설마 목검으로 겨루신 건 아니겠지?”
“네. 어제 이 대주님 오셨을 때처럼 이화검을 가져오라고 하셔서….”
“그렇군.”
그나저나 초언약의 제자와 옥의림이 맞붙는다면 그렇게 걱정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이서휘의 기억에 옥의림이 여인에게 패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다만 기회가 되면 영약이라도 구해줄 생각이었다.
바람이 어느새 서늘해지자 옥의림이 양손으로 자신의 팔뚝을 쓰다듬었다. 이서휘가 성검을 들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들어가자.”
그나저나 옥의림은 이서휘가 왜 물에 빠졌는지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다.
이서휘도 남자다.
남자들이나 눈치 챌 수 있는 행동이었다.
시원한 곡양호에 몸을 담그니 어느새 이서휘의 몸에 휘감기던 짐승도 달아난 모양이었다.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옥의림과 해야 할 이야기와 함께 바라보면서 나눌 게 많았다. 단 둘이 있어도 이서휘가 예의 없는 행동을 하지 않자, 옥의림도 그제야 마음이 좀 편해진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다른 의미에서 한껏 편해진 마음으로 다시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서휘가 어느새 밝아진 달을 힐끗 본 다음에 옥의림에게 시선을 옮겼다.
“나 때문에 귀가(歸家)가 많이 늦었네.”
“네, 산책 잘 했어요. 수중비(水中飛)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다행이네.”
“또 늦게 일어나실 거예요?”
“아니. 그럴 일 없을 거야.”
“알겠어요. 그럼 내일!”
“그래.”
옥의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집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서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의림아.”
“네?”
“내일 봐.”
“네. 뭐에요. 그 말이 끝?”
“응. 수법이 바닥났어.”
그 말에 옥의림이 활짝 웃었다. 이서휘도 미소를 지었다. 옥의림이 경쾌하게 자세를 돌리면서 이서휘를 약 올리듯이 말했다.
“수법 좀 고민하셔야겠네요.”
옥의림이 말과 함께 경공을 펼치더니 길에서 금방 사라졌다. 혼자 남은 이서휘가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도발을 해?”
괜히 히죽 웃던 이서휘가 진금구의 거처로 향했다. 문득 달을 올려다보니 저잣거리에서 파는 흔한 삼류 연애서(戀愛書)의 내용처럼 옥의림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제야 이서휘는 어젯밤과 다른 의미에서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옥의림이 달에 비치네. 미쳤구나.”
이서휘가 집으로 들어가다가 높이가 낮은 문이라는 것을 잊고 이마를 부딪쳤다. 쿵 소리가 고요한 일대에 울려 퍼졌다. 이서휘가 이마를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선배님, 되도록이면 천천히 오십시오.”
하지만 세상 일이 모두 이서휘의 바람대로 흘러가진 않고 있었다.
옥의림을 보내고 집에 홀로 들어온 이서휘가 침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간 이서휘는 복수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결코 무림의 안녕만을 위해서 바빴던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원한도 깊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복수 하나만을 위해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이서휘의 생각과 마음이 점차 유연해지고 있었다.
복수만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이제 행복해지기 위한 삶을 살고 싶다고….
지난날에는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도 떠올리지 못했던 이서휘였으나 지금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일을 끝내고 이곳으로 돌아오면 돼. 아니, 의림이에게 돌아오면 된다.’
그런 상념 끝에 이서휘가 잠이 들었다. 덕분에 달리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한 밤이었다. 마음이 차분하게 정리됐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난 이서휘는 마치 자신의 집을 정리하는 것처럼 진금구의 거처를 정리하고, 주방 청소부터 시작해 집 앞으로 나와 빗질까지 했다.
‘진금구 선배가 아무리 빨라도 오늘 아침까지는 의림이와 둘이 밥을 먹을 수 있겠지?’
가련한 이서휘의 순진한 희망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청소와 정리를 마치고 나서야 이서휘는 마치 매일 하던 일처럼 목검을 깎았다. 목재가 얇게 떨어져 나갈 때마다 이서휘는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앞으로 벌어질 일을 가늠했다.
‘백도와 흑도를 아우르고 단 한 번에 승부를 지을 수는 없을까.’
세 곳이 연합할 때, 되도록 이서휘는 군사(軍師) 역할을 맡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와 경험이 부족하다고 하여 이서휘에게 그런 중책을 맡길 가능성은 적은 편이었다.
‘만약 군사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 다음에 고려해할 일은 세 곳의 맹을 아우르는 특작대를 이끌 생각이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리라.
이서휘가 목검을 깎던 손칼로 바닥에 특작조로 생각하는 인원들을 생각했다. 맹 소속은 아니었지만 사패들은 무조건 특작대에 넣을 생각이었다.
‘먼저 단우혁과 백류혼을 넣고… 극제 소자성은 어찌 될지 모르겠군.’
그 다음에 떠올린 것이 흑도맹의 송무진과 무당파의 유은결이었다.
‘송무진, 유은결을 합류시키고 가능하면 정천 형까지 넣은 다음에… 소수 정예로 움직인다.’
이들을 이끌고 자유롭게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이서휘 자신은 되도록 위극신이나 수뇌부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전에….’
이서휘의 눈이 번뜩였다.
과연 자신의 무위가 무림과 마교를 압도할 정도로 독보적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날 마교의 수호사왕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했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아직도 완성된 경지는 아니었다.
또한 이서휘는 이 시기에 이미 마교 교주가 전생처럼 위극신의 역모에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마교 교주의 무위를 전생의 천마 위극신 정도일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하고 있었다.
이미 세력의 연합은 큰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될 터.
남은 것은 이서휘 자신의 한계 돌파가 아닐까?
놀랍게도 옥의림을 만나고서야 이서휘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보다 더 압도적으로 강해져야 한다.’
지난 날 위극신의 무위를 떠올리면 방심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강할까, 아니면 위극신이 강할까… 이런 고민 자체가 문제다.’
이서휘가 그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면 된다. 그럼 봉착한 문제들도 모두 해결할 수 있을 터. 단순히 복수를 이루는 데 필요한 무위가 아니라 행복을 거머쥐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럴 필요가 있었다.
“압도적인 강함….”
그것은 곧 천하제일인의 자리일 터.
이서휘는 본래 똑똑하고 용의주도한 면이 있으면서도 형식이나 예법에 구애되지 않아 어찌 보면 본성 자체는 정사지간에 어울리는 무림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서휘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하제일인이 되기 위한 포부와 열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서휘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옥의림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주님,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세요?”
“아, 왔어?”
이서휘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옥의림이 찬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대주님, 또 좋지 않은 생각하셨죠?”
“응? 아니야.”
“표정이 이렇게 많은 사람인 줄 몰랐어요. 오늘은 어제와 전혀 다른데요?”
그 말에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그런가?”
그런데 옥의림은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서휘가 앉은 곳에 찬 바구니를 내려놓으면서 덮어놓았던 천을 거둬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예 반찬과 밥을 집에서 만들어 온 모양이었다.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바구니로 시선을 돌리자 옥의림이 말을 이어나갔다.
“집에서 음식 좀 하느라 늦었어요.”
“와….”
옥의림도 사람을 감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하여간 착하다니까….’
어제 먹었던 음식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다양한 반찬이 잔뜩 있었다.
옥의림이 말했다.
“드세요.”
“잘 먹을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셨어요?”
이서휘가 묘한 대답을 내놨다.
“엄청난 결심을 했지.”
“결심이요? 무슨 결심을….”
이서휘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결심?”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를 할 것처럼 하더니 의외의 답변이 이서휘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옥의림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닌 거 같은데요. 다른 결심이면서….”
“아니야. 결국엔 같은 거야.”
옥의림은 이서휘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으나 이서휘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내가 차차 보여줄게. 어떻게 이뤄내는지….’
이서휘는 어쩌면 당분간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옥의림과의 일상을 보냈다.
밥을 먹고, 산책길을 거닐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렇게 일상을 함께 했다.
비무나 종종 하라던 진금구의 말은 두 사람 모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서휘를 뒤덮고 있던 짙은 살기가 옥의림의 밝은 기운 덕분에 모조리 날아간 상태였다.
☆ ☆ ☆
그나저나 진금구의 경공은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인 모양이었다.
저녁 무렵에 진금구가 도착했을 때는 모습이 무척 기괴했다. 온 몸에 붉은 빛이 감돌고 있었던 것.
“앗! 오셨습니까?”
“스승님, 오셨습니까.”
“다녀왔다.”
이서휘도 놀라고 옥의림도 놀랄 수밖에 없는 저 빠른 속도에 두 사람이 저도 모르게 눈을 마주쳤다.
도착한 진금구는 이서휘의 기도를 슬쩍 살피더니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집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도중에 초언약이 따라왔다. 곧 도착할 게야. 초언약의 호승심 때문에 경공 대결을 하게 되다니… 덕분에 내 예상보다 더 일찍 왔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오마.”
“네.”
하지만 초언약이라는 말에 옥의림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경공 대결을 하셨다고? 저 온 몸이 붉어지는 무공은 무엇이지?”
“비천운신행(飛天雲身行).”
“비천운신행?”
“네, 스승님의 독문 무공이에요. 아직 저도 배우지 못했어요.”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내 스승님과 무공의 궤가 다르셨구나.’
진금구가 옷을 갈아입고 나서야 이서휘가 처음 보는 중년 여인이 경공을 펼치면서 도착하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진금구가 먼저 옥의림과 이서휘에게 말했다.
“별 일 없었고?”
“네, 스승님.”
“잘 있었습니다.”
진금구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이미 읽은 모양이었다. 그뿐이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금구는 묻지 않았다. 다만 이제 막 도착한 중년 여인을 이서휘에게 소개할 뿐이었다.
“소개하지. 여몽도주(旅夢島主) 초언약(招嘕楉)이라 한다. 이쪽은 군림맹의 이서휘 대주.”
옥의림이 말없이 인사를 하고 이서휘는 초언약을 살피면서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군림맹 이서휘, 초언약 선배를 뵙습니다.”
초언약이 물끄러미 이서휘를 바라보자 이서휘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초언약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나이는 마흔쯤으로 보였으나 짐작일 뿐이었다. 이런 나이에 이렇게 미모를 유지하기도 힘들어 보일 정도로 단정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두 눈에는 정사지간의 인물로 단정 지을 수 있을 만큼 서늘한 눈빛을 머금고 있었다.
초언약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자를 더 들이신 겁니까?”
“아니.”
“아니라고요?”
진금구가 이서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금구는 초언약의 말에 별 말을 하지 않은 채로 집으로 걸어가다가 축객령(逐客令)이나 다름이 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직 의림이는 준비가 안 됐어. 먼 길 왔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고 차나 한 잔 준비해 주겠네. 이거나 마시고 돌아가게나.”
꽤 먼 거리를 함께 온 모양이었는데 진금구의 말투가 무척이나 쌀쌀 맞았다.
초언약은 옥의림과 이서휘가 보고 있는데도 진금구의 말에 콧방귀를 끼고 있었다.
“진 선배, 그간 뭐하셨습니까? 삼 년이면 충분하거늘….”
그 말에 집 안에서 진금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네와 달라서 무공 전수가 느려. 약조한 날도 아닌데 왜 따라와서 고생인가?”
그 말에 초언약이 이서휘를 힐끗 봤다. 그러자 진금구는 바깥의 상황이 다 보이는 것처럼 초언약에게 경고했다.
“차 한 잔 마시고 가라 했다. 초언약.”
“왜 성질을 내십니까? 제가 언제 싫다 했습니까?”
진금구가 차를 만들다가 이서휘를 불렀다.
“서휘야, 들어오너라.”
“네, 선배님.”
이서휘가 들어가자 진금구가 마치 수고했다는 것처럼 친근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별 일 없었느냐? 귀찮게 하는 놈들이 왔을 것인데… 내가 깜박했다. 철방에 들렀더니 그만 이야기가 퍼진 모양이야.”
“후후, 괜찮습니다. 다들 잘 돌려보냈습니다.”
“그래? 재주가 좋네.”
또르륵 소리와 함께 차를 따르던 진금구가 말했다.
“들어오게.”
이서휘의 병기를 잔뜩 가져갔던 진금구다. 그런데 진금구의 애검인 이화검만 한 쪽에 놓인 상태였다. 저도 모르게 이서휘가 침을 삼키자 진금구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왜? 내가 자네 무기라도 팔아먹었을까 봐?”
“아닙니다.”
“애초에 들고 가지도 않았다.”
“네?”
이서휘가 깜짝 놀라자 진금구가 말을 이었다.
“구화산으로 가기 전에 곡재철방에 맡겼다. 백야검은 어차피 손질을 한 번 해야 하는 상태였으니까. 철선은 어찌 처리할지 몰라서 그냥 맡겨만 놨다. 묵철 자체는 나쁘지 않으나 마도의 병기를 네가 지니고 쓰는 건 반대하고 싶구나.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 게다. 돌아갈 때 어찌할 것인지는 네가 결정해라.”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 사이에 옥의림과 초언약이 들어왔다. 초언약이 옥의림의 자태를 노골적으로 살펴보며 말했다.
“하여간 예쁘게 자랐구나. 날이 갈수록…….”
무슨 말을 하려다가 진금구가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초언약이 말을 삼켰다.
“이거 제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쓸데없는 소리지. 차나 마셔라.”
“네.”
초언약이 차를 마시면서 말을 이었다.
“교아(嬌兒)가 오려면 내일이나 가능하겠군요. 그전까지 머물러도 되겠죠?”
“집이 좁은데 어디에 있겠다는 거야? 그리고 교아가 와도 비무를 시킬 생각이 없어.”
“그래요. 쌀쌀맞으시긴.”
초언약이 옥의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교아도 예쁜데 의림이에겐 안 되겠구나. 무공이나 열심히 가르쳐야지. 안 그러니?”
말투가 그야말로 불편했다. 옥의림도 어찌 대꾸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초언약의 말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세상사 다 등진 선배님 집에 군림맹의 대주가 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네요.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실 생각이에요?”
“내가 나가서 무얼 하겠나. 인연이 있어 머무르고 있는 것이지.”
“인연?”
초언약이 이서휘와 옥의림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잘 어울리네.”
그러나 초언약의 미소에는 호의가 담겨 있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이서휘가 모를 리 없었다.
더군다나 초언약 때문에 진금구 선배가 빨리 도착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더 밉게 보일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옥의림이 대꾸할 말도 없게 만드는 말투까지…….
무엇보다 진금구 선배가 내내 쌀쌀맞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보니 무슨 사연이 있었던 간에 편하게 알고지낼 수 있는 여인은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그 방점을 초언약이 찍고 있었다.
“뭐 제 제자라서 자랑하는 것은 아니고. 의림이가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하니 여기 군림맹 대주와 교아가 비무를 하는 건 어때요? 이서휘라 했나?”
“네, 선배님.”
“자네 생각은 어때?”
그 말에 이서휘가 예의도 잊은 채로 살짝 콧방귀를 끼었다.
‘누굴 상대하겠다고?’
하지만 이서휘의 콧방귀는 약과였다. 진금구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감정표현이 극히 드문 진금구가 크게 웃자 초언약, 이서휘, 옥의림이 진금구를 바라봤다.
진금구가 웃음을 멈추더니 초언약에게 말했다.
“언약아.”
“네, 선배님… 웬 일로 제 이름까지 친근하게 부르시고.”
“그간 게을러졌나보구나. 너 답지 않게 말이야.”
“무슨 말씀이시죠? 제 성격을 잘 아시면서…”
“네 제자가 여기 이 대주의 상대가 되리라 생각하느냐? 여몽도주도 나이를 먹는구나. 여러모로 실망이군. 좋아. 의림이와 교아의 비무는 앞당겨 보겠다. 네가 그 정도로 무디어졌다면 승산이 있겠어.”
진금구의 말에 초언약이 그제야 표정을 감추고 이서휘의 기도를 살폈다.
‘네가? 내 제자보다 낫다고? 어디가? 새파란 애송이처럼 보이는데….’
이서휘는 진금구를 찾아온 이후로 가장 흔하게 읽을 수 있는 기도인 살기를 점차 지워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쨌든 진금구의 안배로 옥의림과 단 둘이 있게 된 이서휘였다. 살기라는 게 피어오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진금구는 구화산에서 돌아오자마자 이서휘의 살기부터 살펴본 상태.
진금구가 돌아오자마자 희미하게 웃음을 지은 것은 이서휘가 흉흉한 살기를 거의 다 내려놨기 때문이었다. 진금구가 쐐기를 박았다.
“언약아.”
“네.”
“너보다 강해.”
그 말에 초언약이 싸늘한 표정으로 이서휘를 바라봤다. 무언가 겸양 섞인 한마디를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서휘는 말없이 초언약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당신 때문에 의림이랑 지내는 시간이 줄었잖아….’
초언약과 진금구가 무슨 대화를 하던 간에 이서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혼자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초언약이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선배님이 저를 미워하시는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만 이 녀석이 저보다 강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도가 지나치신 겁니다.”
“도가 지나친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거다. 네가 그간 거만한 생각을 하며 지냈나 보구나. 고쳐야 할 태도다.”
잠시 정적이 감돌자, 진금구가 차를 마시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대주, 뭐라고 말 좀 해보게. 자네 생각은 어떤가?”
진금구가 이서휘에게 떠넘기자, 이서휘도 진금구와 비슷한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 같았으면 별 생각 없이 초언약을 혼쭐내줬을 텐데, 옥의림이 보고 있으니 이서휘도 방법을 달리 고민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이서휘가 살기를 띠고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여인을 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초언약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점창파 장문인인 여서문보다 강할 리가 없다. 더군다나 이서휘는 초언약의 자세와 기도에서 이미 많은 것을 파악해 둔 상황.
잠시 고민하던 이서휘가 생각을 말했다.
“으음… 마침 두 분이 경공 대결을 하면서 오셨지 않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저도 경공으로 한 번 승부를 냈으면 합니다.”
“하…! 건방지군. 이게 어찌 승부라 할 수 있느냐? 네가 도전하는 것이라고 말을 해야지. 어쨌든 나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나보구나… 기가 막히는군. 네가 나한테 지면 조건을 걸겠다.”
“무슨 조건입니까?”
“네 수준을 인정하고 내 제자와 비무를 벌이는 것이지 달리 뭐가 있겠느냐?”
질 생각이 전혀 없는 이서휘인지라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뭐 어렵지 않군요. 나가시죠.”
이서휘가 먼저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차라리 잘 됐군.’
옥의림과 진금구가 보는 앞에서 살기를 흉흉하게 띠고 여인을 혼내는 것보다는 확실히 경공 대결이 나은 선택이었다.
‘일단은 경공 대결로 몰고 가서….’
이서휘가 초언약을 노려봤다. 진금구와 옥의림도 느닷없는 두 사람의 경공 대결에 관심을 표하고 있었다.
판을 짜는 건 늘 이서휘의 몫인지라 이서휘가 먼저 방안을 내놓았다.
“곡양호 아십니까?”
“알지.”
“벚꽃이 피었더군요. 거리도 적당하니 벚꽃을 꺾어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군. 경공에서 져도 벚꽃 하나 꺾어와 의림이에게 줄 생각인가 보지?”
초언약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이서휘를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이서휘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신경을 살살 긁는구나. 정신이 바짝 들게 해주마.’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다가 동시에 출발했다.
경공(輕功)은 문파 혹은 무공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단순히 앞으로 빠르게 달리는 경공이 있는 반면에 이서휘의 암행표(暗行飇)처럼 무공을 보조하는 식의 경공이 있다.
하지만 결국엔 몸을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라 그 근간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내공이다. 짧은 거리에서 압도적인 속도를 낼 수 있는 고수가 있는 반면에 두터운 내공으로 천리길을 쉬지 않고 빠르게 달리는 고수도 있다.
그러나 이서휘의 경공은 다른 무림인들과 비교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으니, 바로 눈을 잃었을 때 익힌 경공이라는 점이었다.
생존을 위해 익힌 경공이다.
누구보다 더 빨라야 했고.
그 어떤 고수들보다 끈질겨야 했다.
단순히 속도를 높이는 게 아니라 보법을 이용해 방향전환에 특화된 경공술이었다. 지난날 천마교가 이서휘를 잡기 위해 사류곡 전체를 포위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이서휘의 경공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지금 쌓아둔 내공도 감히 초언약이 넘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거리가 짧든 간에 길든 간에….
길이 복잡하든 혹은 일직선이든 간에….
심지어 가려는 길이 어둡다고 할지라도….
경공만큼은 이서휘가 무림의 정점에 근접해가고 있었다.
당대에 이서휘의 경공을 능가할 수 있는 고수는 앞서 이서휘가 언급했던 고수들의 수보다 훨씬 적을 터였다.
그 때문에 늘 이서휘는 상대방의 무위보다 뒤처지는 형국에서도 과감하게 행동했다. 기회를 엿봐 물러나거나 어두운 곳에서 혈전을 펼칠 수 있는 기초가 쌓여 있었기 때문.
그런 이서휘에게 초언약이 도전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서휘는 옥의림과 진금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초언약을 금방 추월했다. 이서휘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별 감흥도 없었다.
한참을 달리던 초언약의 옆으로 이서휘의 신형이 질풍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초언약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자신의 독문 경공을 펼치며 추격했다. 초언약이 여기까지 진금구를 따라온 것은 경공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진금구에게 패했지만 이서휘에게 패하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앞서 나가던 이서휘는 초언약에게 잡힐 것처럼 일부러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서휘는 초언약과 둘만 남았다고 판단하자, 그제야 초언약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제가 이길 것 같습니다만.”
그때 이서휘의 도발에 욱하는 심정이 든 초언약이 대뜸 지풍(指風)을 날렸다. 손을 한 번 휘두르는 가벼운 동작이었으나 이서휘의 등을 보고 있었던 지라 의도가 제법 음흉했다.
초언약의 지풍이 이서휘의 무릎으로 향했다.
이서휘는 초언약이 손이 움직일 때부터 경계하고 있었다. 이미 속도를 줄인 상태였기 때문에 바람을 읽고 순식간에 앞으로 뻗어 나갔다. 지풍이 땅에 부딪히면서 별 효과 없이 흩어졌다.
‘공격을 했다 이거지?’
이서휘 같은 사람은 건드리면 안 된다. 옥의림이 아닌 이상 딱히 여인이라고 봐줄 성격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도발 한 마디 던졌다고, 발을 꼬이게 하려고 지풍을 뱉어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서휘가 사악한 마음을 품고 속도를 줄였다.
어느새 초언약이 바짝 따라왔다. 그래도 그 수준이 제법 높았다. 경공도 검법이나 장법과 같다. 경공이라는 분야도 끝없이 몰두할 수 있을 정도로 배우고 익힐 게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름 경공을 익히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초언약인지라 이서휘가 봐주는 것인지도 모른 채로 진지하게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곡양호가 드러나고 순식간에 출렁이는 물결이 시야에 드러났다. 먼저 벚꽃을 꺾고 방향을 전환해야 할 터.
하지만 초언약은 마음이 급했다.
일단 먼저 벚꽃에 도착하기 위해 왼손으로 이서휘의 팔뚝을 붙잡으려고 내밀었다.
그 순간에 이서휘가 초언약의 손목을 그대로 비틀면서 동시에 우각을 내밀어 초언약의 정강이를 밀었다.
초언약은 균형을 잡기 위해 공중제비를 돌려다가 이서휘의 우각 때문에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곡양호의 물결로 날아갔다.
초언약이 너무 놀란 나머지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핫!”
도대체 무슨 뜻일까. 아마 초언약 자신도 모를 터였다. 그 순간에 천근추의 수법으로 공중에서 멈추려던 초언약은 자신의 속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곡양호로 풍덩 소리와 함께 빠지고 말았다.
실실 웃던 이서휘가 먼저 벚꽃의 가지를 꺾은 다음에 말했다.
“선배, 지풍까지는 봐줬으나 금나수법에는 나도 모르게 반응을 해버렸구려.”
“네놈이!”
초언약이 물 밖으로 나오려다가 제풀에 놀라 가만히 있었다. 옷이 흠뻑 젖어서 이서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 초언약이 물속에서 호통을 내질렀다.
“거기 서라.”
“누가 가겠다고 그랬소?”
“먼저 네놈의 눈부터 감아라. 일다경(一茶頃)이면 이 정도 물기는 금방 다 말릴 수 있다.”
“나는 본래 눈을 감는 것을 좋아하지 않소.”
“그러냐? 여기서 나가면 네놈의 두 눈부터 뽑아주마.”
“허…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인데 방금 실수하셨소이다.”
이서휘가 꺾어온 벚꽃 가지를 다듬으면서 털썩 앉더니 초언약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밤새 물속에 있고 싶소?”
초언약은 당장 뛰쳐나가서 이서휘를 때려죽일까 하다가 침을 삼키면서 이서휘를 노려봤다. 여기까지 오면서 지켜본 바로는 확실히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서휘가 초언약을 보면서 말했다.
“진금구 선배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시겠소? 비무를 피하려고 일부러 경공 대결을 했더니 뒤에서 공격을 하지 않나… 한 번 겨뤄봅시다. 이리 썩 나와 보시오. 어서요.”
초언약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이서휘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무리 내공이 높다 하더라도 물속에 계속 머무르고 있자 초언약의 입술이 점점 자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서휘가 벚꽃을 다듬으면서 자신을 도발하고 있으니 초언약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초언약의 어조가 누그러졌다.
“그래. 일단 경공은 내가 진 것으로 하겠다. 몸을 말린 후에 비무를 하자꾸나. 먼저 돌아가거라.”
“허? 이게 무슨 소리십니까? 분명 조건은 선배가 먼저 걸었소. 나도 경공에서 이겼으니 조건을 걸어야하지 않겠소?”
“말해라.”
“진금구 선배와 약조한 날 이외에는 절대로 이곳에 찾아오지 마시오. 귀찮게 하지 말란 소리요.”
듣고 보니 별 부탁이 아닌지라 초언약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초언약은 물속에 있으니 어쩐지 몸에서 물을 내보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초언약의 낯빛이 살짝 변하자 이서휘가 덤덤하게 물었다.
“급하시오?”
초언약이 싸늘한 말투로 대꾸했다.
“……뭔 소리냐.”
“별 말 아니외다.”
“네 놈이! 진 선배를 믿고 실로…… 거만하구나!”
“걱정을 해줬더니 거만하다는 말을 듣다니.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말이외다.”
“네가 정녕 호되게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나도 물속에서 그렇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무림 선배는 처음이외다. 어쨌든 나는 먼저 가보겠소. 급하신 거 같은데 거기까진 내가 봐줘야지.”
“닥치지 못해!”
이서휘가 등을 돌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천천히 일…… 아니다. 조심히 오시오.”
초언약이 스스로 분노했다고 느낀 순간에 자신의 몸이 다 젖었다는 것도 잊은 채로 물속에서 솟구쳐 공중에서 검을 뽑은 다음에 이서휘의 등을 향해 검기를 뿌렸다.
물론 이서휘도 성검을 뽑자마자 검막을 뿌렸다.
파아아아앙――!
이서휘의 오른손에는 성검, 왼손에는 옥의림에게 줄 벚꽃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어느새 땅을 밟은 초언약과 이서휘가 순식간에 사십여 초를 맞붙었다. 이서휘가 초언약의 검을 튕겨내면서 빈정거렸다.
“경공보다 낫군요. 제법 강하십니다. 물이 좀 튀어서 그렇지.”
“닥쳐!”
초언약은 일부러 동작을 크게 하면서 극양의 내공을 끌어올려 이서휘와 맞붙는 도중에 젖은 옷을 다 말린 상태였다.
이서휘가 코웃음을 쳤다.
‘흥! 봐주고 있는데도 여전히 기세가 등등하구나. 그렇다면…’
챙챙챙!
이서휘는 초언약의 검을 튕겨내다가 불쑥 벚꽃 가지를 초언약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초언약이 깜짝 놀라 갈고리 모양으로 만든 손가락으로 전방을 그었다. 그 사이에 벚꽃을 회수하고 성검을 내밀어 초언약의 검을 내공으로 휘감더니 곡양호로 던져버렸다.
본래 이렇게 당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으나 몸이 젖은 터라 동작을 펼치는 게 매끄럽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서휘의 도발에 정신이 뒤흔들리고 있어 초언약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휘리리리릭 소리와 함께 초언약의 장검이 궤적을 그리면서 날아가자 동시에 초언약의 신형이 흔들거리더니 장검을 되찾기 위해 곡양호로 몸을 던졌다.
풍덩….
물살이 있어 장검이 떠내려가면 찾을 길이 없었기 때문에 물에 빠지는 순간에 건지는 게 가장 확실했다. 그나저나 거의 장검이 빠지자마자 달려가서 장검을 건져낸 초언약이 다시 물 위에 동동 떠서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성검을 치켜들었다.
“언약 선배, 나머지 비무는 이걸로 대체합시다.”
이서휘는 조금 전까지 드러내지 않았던 내공을 폭발시키면서 암연심검의 파를 초언약이 떠 있는 곳보다 약간 멀리 떨어진 곳에 뿌렸다.
초언약이 깜짝 놀라면서 뒤를 바라보자 이서휘가 내보낸 검기가 반달형으로 쏟아지더니 잔잔하던 곡양호의 물결이 촤아아아아아 소리와 함께 연달아 솟구쳤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물 위에 떠 있는 초언약이 입을 반쯤 벌리고 솟구치는 물기둥을 올려다볼 정도였다. 하지만 그 솟구쳤던 물줄기는 또 다시 초언약에게 왕창 쏟아지고 있었다. 이리저리 물줄기를 막아내던 초언약이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이서휘는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
진금구가 고개를 갸웃하며 혼자 오고 있는 이서휘에게 말했다.
“언약이는? 설마 도중에 때린 것이냐?”
“아닙니다.”
“근데 왜 안 와? 언약이가 이렇게 느린가?”
“아… 물에 빠졌습니다.”
“그래?”
“네, 곧 오겠죠. 의욕이 과해서 속도가 줄어들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이서휘의 농담인 줄 알면서도 진금구는 진지한 낯빛으로 이서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군. 그래도 다행이다. 물에 빠지는 것으로 끝났으니… 네가 잘 대처했다. 초언약은 누가 꺾어도, 꺾이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를 봐라. 얼마나 귀찮은 일을 당하고 있느냐…… 물에 빠졌으니 정신을 좀 차리겠지.”
“그렇습니다.”
진금구가 옥의림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두 사람은 아쉽겠군. 내가 빨리 와서.”
“네?”
옥의림마저 두 눈을 크게 뜨고 스승을 바라봤다. 진금구가 두 사람을 보며 되물었다.
“그럼 아쉽지 않다 이 말인가?”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진금구의 말을 인정했다.
“아쉽습니다. 그러나….”
대체 뭐라 말해야 할까.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마저도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옥의림을 바라보며 씨익 웃다가 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또 오겠습니다.”
“누가 오라 하던가?”
“하하.”
진금구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옥의림도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금구가 이서휘에게 말했다.
“살기를 내려놔서 다행이다. 상태가 좋지 않았으면 며칠 더 있으라고 할 참이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구나. 너도 할 일이 있을 테니 잘 마무리 짓고 오너라.”
진금구가 이서휘의 인사도 받지 않고 집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또 보자.”
“선배님!”
이서휘가 부르자 진금구가 손을 훠이 저으며 말했다.
“의림이와 인사하고 가거라.”
“선배님, 또 뵙겠습니다. 그럼.”
진금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제야 이서휘와 옥의림이 마주 보고 섰다.
막상 자리를 피해준답시고 들어간 진금구도 아직 근처에 있었고 어디쯤인가 초언약도 오고 있을 테니 두 사람은 쉽게 말을 꺼낼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자 옥의림이 진금구를 향해 말했다.
“스승님, 대주님 바래다 드리고 올게요.”
“그리해라.”
두 사람은 도피하는 것처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초언약과 마주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에 서둘러 걷자는 것처럼 이서휘가 옥의림의 손을 붙잡았다.
수법인지, 수법이 아닌지 옥의림으로서는 판단할 길이 없었으나 어쨌든 옥의림은 말이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손을 붙잡고 길을 걸었다. 쑥스러워서 두 사람 다 별말은 하지 않고 있었다.
<2장. 준비>
이서휘와 옥의림이 작별 인사를 나눴다.
두 사람은 아직 연인이라 할 수 없는 관계였으나 서로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마음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상태였다.
옥의림과 있기 위해 진금구의 거처에 노골적으로 머무는 것도 못난 행동인지라 미련 없이 빠져 나왔다. 대신에 이서휘는 앞으로 옥의림을 종종 찾아올 생각이었다. 물론 이서휘에게 손이 잡힌 채로 말이 없는 옥의림도 이서휘의 생각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의림아.”
“네.”
“그 교아라는 제자한테 꼭 이기길 바랄게.”
“네.”
“나는 군림맹에 돌아가서 수법 좀 많이 고민해봐야겠어.”
그 말에 옥의림이 잔잔하게 웃었다.
“그러세요.”
그때, 우연히 지나가던 추옥대의 남자가 이서휘와 옥의림을 발견하고 공연히 길가의 돌을 발로 차면서 지나갔다. 그 모습을 슬쩍 보던 이서휘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진 선배님이 있어서 안심이네. 나 때문에 며칠 수련을 잘 못했을 텐데 열심히 해. 비무 한 번 못하고 가는 게 조금 아쉽군.”
이서휘의 말에 옥의림이 대꾸했다.
“아니에요. 아직 대주님과 비무를 할 수준도 못 되는 거 같아요. 조금 기다려주세요.”
“그래? 알겠어.”
이서휘는 잠시 옥의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노려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당분간 못 볼 것 같으니 몰아 보는 심정이랄까. 이서휘의 눈에 옥의림의 얼굴이 새겨지고 있었다.
옥의림도 마찬가지.
이서휘가 바라보자 옥의림은 저도 모르게 호흡이 약간 가빠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서휘가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급히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서휘나 옥의림이나 그간 제대로 된 연애(戀愛) 경험이 없어서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어색함 자체로도 두 사람은 좋았다.
이서휘가 아쉽게도 작별을 고했다.
“의림아, 또 보자. 더 따라나오면 추옥대가 더 많아져서 네가 불편하겠다.”
“네.”
두 사람의 손이 그제야 떨어졌다. 이서휘가 등을 돌렸다가 손을 흔들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옥의림의 솔직한 말 한 마디가 이서휘의 심장을 강타했다.
“대주님,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할까요?”
“뭐라고…? 아….”
옥의림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느닷없는 말인지라 이서휘가 깜짝 놀라면서 뒤를 돌아봤다.
도대체 어찌 된 걸까.
전생에는 눈 먼 이서휘의 곁에 머물면서 감정표현을 극히 자제했던 옥의림이다. 하지만 전생의 이서휘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듯이 지금 이서휘를 바라보는 옥의림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적당한 나이에 만났다. 전생과는 전혀 다른 인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서휘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꾸했다.
“아… 그러니까….”
용기를 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서휘의 손발이 약간 쥐어짜듯이 비틀렸다.
‘에라, 모르겠다.’
성큼성큼 걸어간 이서휘가 옥의림을 가볍게 안으면서 말했다.
“내가 보러 올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옥의림은 대꾸를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휘를 바라봤다.
“그럼….”
헛기침을 몇 번 한 이서휘가 공연히 경공을 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서휘가 달려 나가는 와중에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쥐어박고 있었다.
안아 버리다니.
실수한 게 아닐까.
대낮에 대체 뭔 짓을 한 걸까.
나는 왜 사는가.
오만가지 생각이 이서휘의 머릿속에서 맴돌아 그저 달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렇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스스로 칭찬하고 있었다.
“잘했다…!”
누가 이 광경을 봤다면 해줄 말이 이것 밖에 없었으리라.
…놀고 있네 진짜 혹은 웃기고 있네 정말….
뭐, 이 정도 말을 듣지 않았을까?
이서휘는 곡재철방에 들러 진금구의 부탁으로 새롭게 다듬은 백야검을 돌려받은 다음에 철선에 대해 잠시 수석 철공과 의논했다. 사십 대의 중년인이 간략히 설명해줬다.
“뭐 어르신께서 값을 다 치러놔서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어르신에겐 돈을 받을 필요가 없었는데….”
이서휘가 철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녹여서 여인이 쓸 만한 장검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수석 철공은 그 말에 놀라는 기색 없이 대꾸했다.
“여인이라… 혹시 의림이를 말하는 것이오?”
이서휘가 잠시 혀를 내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석 철공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대꾸했다.
“가능할까 모르겠네. 묵철 자체는 좋은데… 모자를 수도 있소. 다른 철과 함께 섞으면 가능하겠지. 뭐 한 번 해보리다. 우리 의림이에게 주는 것이라면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야겠지. 대신에 어르신에게 한 번 물어보겠소. 아무래도 제자의 장검이니 어르신의 생각도 들어볼 겸.”
“좋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우리 의림이’라는 말에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실실 웃자, 수석 철공이 이서휘를 질책하듯이 말을 이었다.
“왜 웃소?”
“아, 아닙니다.”
“그대가 추옥대주(追玉隊主)라는 소문이 있던데 정말이오?”
“추옥대주요? 하하하하.”
“거 되게 좋아하네.”
수석 철공이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이서휘가 뒷머리를 긁었다. 하여간에 백도맹 행에 별호가 늘어버린 이서휘였다. 수석 철공과 한담을 짧게 나눈 이서휘는 그제야 군림맹으로 출발했다.
이서휘는 처음 도착했던 날 밤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옥의림과 진금구 덕분이었다. 혹은 이서휘의 용기 덕분이거나.
☆ ☆ ☆
며칠 후 이서휘가 군림맹에 도착했다.
무척 오랜만이라 처음 온 것처럼 잠시 군림맹의 전경이 낯설었다. 이서휘는 복귀 신고를 마치고 월야대에 들어서자마자 들뜬 열기에 놀라고 있었다.
월야대의 비무대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비무를 구경하고 있었던 것.
살펴보니, 화지련이 겨루고 있었다.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는데 상대가 무려 화룡검대의 부대주인 유자광(柳子光)이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유자광 부대주는 좀 어려울 텐데.’
살펴보니 화룡검대에서 꽤 많이 몰려와 있었고, 월야대는 한쪽에 모여 비무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비무를 중지시키려다가 잠시 멈추고 바라봤다.
‘화지련이 꽤 강해졌네.’
지난날 화지련에게 비무를 금지시켰던 이서휘다. 내공 수련을 강조했는데 어째서 비무를 벌이게 된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이서휘의 눈이 일부 화룡검대원에게 향했다. 부상을 입은 자들이 섞여 있었다.
‘임무도 없었을 텐데 무슨 부상이지?’
그러다 이서휘가 살펴보니 유자광은 일부러 거칠게 화지련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참 눈치가 빠른 이서휘다. 보아 하니 화지련과 몇 명이 분쟁을 일으킨 모양이고, 유자광이 그 성격답게 복수를 해주러 온 모양이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자광 형, 비무를 멈추십시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이서휘에게 모였다.
“오, 이서휘 대주님!”
그러나 유자광은 이서휘의 말을 듣고도 화지련에게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서휘가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훌쩍 솟구친 이서휘가 성검을 절묘하게 찔러 넣어 유자광의 검을 단박에 튕겨내고 바닥에 내려섰다.
떠엉!
그 사이에 출수를 거두지 못한 화지련의 검이 이서휘의 팔뚝으로 떨어지자 이서휘가 검집으로 후려쳤다.
까앙!
덕분에 이서휘를 중앙에 둔 두 사람이 좌우로 밀려나면서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이서휘는 사정을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짐짓 화지련을 보면서 혼내는 말투로 말했다.
“당분간 비무 금지라 했더니 이게 무슨 일이냐?”
화지련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이 없자, 이서휘는 유자광을 바라봤다.
“어찌 된 일입니까? 아직 화지련이 부대주들과 비무를 할 실력이 아닙니다만.”
멀리 있다던 이서휘가 갑자기 등장하자 유자광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워낙 거친 성격이라 큰 소리는 여전했다.
“아니긴 뭐가 아닌가? 여기 내 대원들 부상 입은 것 좀 보게. 전부 화 소저에게 당했네.”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화지련이 제 명령을 그렇게 쉽게 어기진 않았을 텐데… 어쨌든 자광 형, 그만 하시죠. 사정은 화지련에게 묻겠습니다. 화룡검대는 다들 물러가십시오.”
이서휘는 월야대주다.
직급으로 봐도 말을 거역할 사람이 없었다. 화룡검대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자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원들과 함께 물러났다.
이서휘는 화지련을 혼내려다가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말을 아꼈다.
“다들 잘 계셨소?”
이서휘의 말에 도이와 도삼이 다가와서 이서휘의 표정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상한데?”
“이상하군요.”
이서휘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너희는 내가 어째 오자마자 헛소리를 준비하느냐?”
“아닌데요? 얼굴이 좀 편해진 거 같아. 대주님 맞아요?”
도삼의 말에 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사이에 득도했나?”
“득도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정천 형, 별 일 없었습니까?”
“별 일 많았지. 그나저나 자네 대신에 회의에 자주 불려갔었네.”
“고생하셨군요.”
이서휘가 화지련을 힐끗 바라봤다.
“지련이는? 어찌 된 일이냐. 수련은 잘 하고 있었고?”
“네.”
도삼이 은근슬쩍 끼어 들어서 사정을 설명했다.
“유자광 부대주가 대주님 오시니까 정말 별말 안 하고 물러나네요. 안 그래도 정천 형님이 한 번 나서서 유자광 부대주하고 붙을 뻔 했습니다.”
“흥… 검대 부대주들 중에 정천 형을 이길 자는 없을 터인데… 어쨌든 잘 참으셨습니다. 밀린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전 질풍검대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게.”
“다녀오십시오.”
이서휘는 월야대를 나와 질풍검대 장시우를 찾아갔다. 고작 달포 가량을 비웠을 뿐인데 질풍검대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새로 들어온 대원들이 많아졌나?’
그때 질풍검대의 연무장에서 처음 보는 낯선 자가 이서휘에게 말했다.
“이 대주님!”
“누구신가?”
고작 스물이나 됐을 법한 청년이었다. 그때, 청년이 이서휘를 발견하자 수련을 하고 있던 질풍검대가 우르르 몰려왔다.
누군가는 여전히 부대주님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형님이라 부르는 등 난리법석이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못 보던 대원들이 더 늘었네?”
“형님! 이 사람들이 누군지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이서휘가 몇 명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어?”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본 거 같은데?”
“그렇죠?”
“설마….”
이서휘의 말에 누군가가 정답을 내놨다.
“추리대입니다. 이 대주님!”
“하…자네들이 왜 여기에 있나!”
이서휘의 호통에 한 사람이 대꾸했다.
“그날 안 도와주셨으면 저희는 사마세가에 다 죽었을 겁니다. 갑자기 대주님이 사라지셔서 군림맹까지 왔다가 저를 포함한 일부가 입맹했습니다.”
“하… 황당하기 이를 데 없군.”
이건영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추리대라는 말을 듣고 한참 웃었습니다. 백도맹에서 활약이 엄청나셨다면서요. 소문이 벌써 다 퍼졌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왜 다들 질풍검대에 있는 거야?”
이건영이 대꾸했다.
“그야 형님이… 아니 대주님이 질풍검대 출신이기도 하거니와 상부에서 월야대에 대원을 넣는 것은 대주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질풍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렇군. 시우 형님은 어디 계신가?”
“여기 있다, 인마.”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집무실에서 이서휘의 목소리를 듣고 이미 장시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서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형님!”
“아이고… 우리 이 대주, 유명해져서 형님 소리 듣는 것도 민망한데 이제?”
“아, 또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그러십니까.”
이서휘가 다가가서 장시우를 안는 것처럼 하더니 번쩍 들어버렸다. 장시우가 이서휘의 등을 치면서 말했다.
“내려 놔, 인마. 이 녀석 왜 이렇게 밝아졌어?”
그 말에 강기찬이 키득거리면서 말을 던졌다.
“백도맹에서 애인 만들고 오셨나 봐요.”
이서휘가 강기찬을 불렀다.
“강기찬, 이리 와 바. 어이구, 이 놈 다 컸네. 이제 징그럽구나.”
“헤헤, 형님.”
강기찬이 다가오자 이서휘가 손가락을 튕기면서 강기찬의 이마를 가격했다. 빡―! 소리와 함께 강기찬이 이마를 부여잡으면서 엄청난 속도로 비비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시우 형님.”
“응?”
“조만간 월야대와 합동 훈련 좀 하시죠. 이거 새로운 대원들도 많은데 제가 한 번 힘차게 지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오오… 역시! 이제 서휘가 돌아온 느낌이 나는구나. 지옥 훈련 좋지. 다들 그간 너무 편하게 지냈어. 몇 번 눈치를 줬는데도 개인 훈련하는 녀석들도 없고 말이지.”
장시우의 말에 이서휘와 훈련을 해봤던 질풍검대원들의 낯빛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이서휘가 질풍검대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다들 기대하고 있으라고.”
이서휘가 물러나자 질풍검대원들이 강기찬에게 다가가서 으름장을 놓았다.
“넌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하필 서휘 형님하고 훈련을 하게 만드는 것이냐?”
“아, 그게 왜 나 때문이에요. 또….”
대원들이 강기찬을 구박하자 장시우가 호통을 내질렀다.
“다들 막내 그만 괴롭히고… 아, 이제 막내 아니지. 하여간 오후 수련이나 준비해라.”
“네, 대주님.”
이서휘는 저물어가는 해를 보다가 군림맹의 전경을 훑어봤다. 백도맹과의 협의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살펴봐야했으나 잠시 미루고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이서휘의 머리에선 이미 군림맹과 함께 마교의 총본산을 쳐들어가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죽어날 것인데… 그래도 기다리다가 당하는 것보단 우리가 공격하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한참 떠들고 왔던 질풍검대 대원들을 보자 마음이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것이 차선책이라 믿고 있었다. 정마대전이 벌어지더라도 최대한 대원들이 죽지 않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개인 수련과 함께 그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지옥 훈련을 선보일 생각이었다.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안면이 있는 수호전 소속의 무인이 이서휘에게 달려왔다.
“이 대주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잘 다녀왔네.”
“맹주님이 보자십니다.”
“맹주님이? 안 그래도 뵈려 했었는데. 알겠네. 어디로 가면 되나?”
“수호전으로 같이 가시죠.”
이서휘가 무척 오랜만에 맹주 남궁위를 보러 수호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도맹주의 전언을 비롯해 할 이야기가 무척 많이 쌓여 있는 상태였다.
이서휘는 무척 오랜만에 군림맹주 남궁위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그간 무공의 발전이 눈부시다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급격한 속도로 전생의 무위를 되찾은 이서휘다.
경험이야 회귀하자마자 그대로였으나 이서휘는 두 눈을 잃었을 때 익힌 무공과 새롭게 눈을 뜨고 익힌 무공을 조화시켜 그 누구와 겨뤄도 쉽게 지지 않을 무위를 갖춘 상태였다.
물론 그 기준은 천하였다.
그 때문에 남궁위는 오랜만에 만나는 이서휘의 기도를 읽자마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허, 서휘야. 그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사람이 달라진 것 같구나.”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라 이서휘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일전에 주신 천양뇌단(天壤雷丹)을 발판으로 운이 좋아 몇 번의 기연을 더 얻었습니다.”
“후후, 그러냐? 하늘이 돕는 것 같구나.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사람도 드물어.”
그나저나 이서휘가 오랜만에 바라보는 남궁위도 분위기가 무척 달라져 있었다.
‘맹주께서도 한 단계를 더 넘어선 것인가?’
전생에는 은둔을 하고 있을 시기였을 텐데,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 이서휘와 독대를 하고 있는 것만 봐도 크게 달라진 일이었다.
남궁위가 이서휘의 눈빛을 바라면서 물었다.
“어찌 그렇게 보느냐?”
“맹주님도 분위기가 달라지셨습니다.”
“그러냐? 후후후. 돌이켜 보면 어느 정도 주양위 덕분이었다.”
“네? 주양위요?”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남궁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 천양육합신공(天壤六合神功)은 당시 완성된 경지라 할 수 없었다. 천장강림(天將降臨)이라는 비기를 사용할 때 마음이 급해 운용이 완벽하지 못했다. 주양위를 죽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오히려 나도 천장강림으로 인한 내상을 입어야 했다.”
“으음….”
이서휘는 남궁위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지난날 염악마제와 겨룰 때 사용했던 백야경(白夜景)의 경우에도 극도의 집중력과 엄청나게 소비되는 내공을 동반해야 펼칠 수 있는 비기였다. 때문에 이서휘도 극히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면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차라리 위력이 약하더라도 암천세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남궁위가 사용했던 천장강림은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백야경과 흡사했으리라고 이서휘는 추측했다.
남궁위가 말을 이었다.
“내상을 치료하면서 천양육합신공을 함께 다듬었다. 이제는 자신감이 좀 붙었구나. 이 나이를 먹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지만 말이야.”
그 말에 이서휘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근래 들어 천하제일인이 되고자 마음을 먹었던 이서휘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 어쩌면 훗날에 남궁위와 우열을 가려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훗날 일이니… 그때 생각하자.’
이서휘가 화제를 전환했다.
“백도맹주께서 어떤 식으로든 맹주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범우(范雨) 선배가?”
“아, 백도맹주님이 더 항렬이 높으십니까?”
“뭐 문파가 다르니 항렬이라 할 수는 없고. 그런 셈이지. 진작 은퇴하셨어도 무방한 분이니까. 올해나 내년쯤 은퇴하실 걸로 생각했는데 아직 정정하신가 보군. 뭐라 하시던가?”
“한 번 무림맹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하십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무림맹이라….”
남궁위가 떫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범우 선배의 생각은 이해하네. 하지만 백도맹은 화산과 곤륜, 무당의 입김이 강해서 합치게 된다면 사실상 무림맹이 아니라 우리 군림맹이 백도맹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전처럼 말이야. 어쨌든 연락을 취해 봐야겠군.”
이서휘의 예상보다 남궁위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후배 된 입장에서 달리 말해줄 게 없었다.
이미 이서휘가 파악한 기도로는 남궁위의 무위가 예전보다 더 강력해진 상태였다. 어쨌든 선택은 맹주인 남궁위의 몫인지라 일단 이서휘는 말을 아끼고 있었다.
남궁위가 말했다.
“보고를 통해 들었는데 사마세가의 습격을 받았다고?”
“네.”
추리대를 통해서 말이 흘러간 모양이었다. 사마세가는 어쨌든 군림맹의 일원이었다. 탈퇴를 한 터라 이서휘에게 죄를 물을 수도 없는 상황이고, 먼저 공격을 감행했던 증거가 이미 너무 많아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남궁위의 말이 이어졌다.
“사마가는 아마 군사회의 부회주였던 사마예(司馬睿)가 가주 자리를 이어받을 것 같다. 어찌 됐든 사마록이 무너졌으니 당분간 어디 가서 세가라는 말은 쓸 수 없을 것이고. 설마 사마예가 또다시 너를 공격하는 일은 없겠지?”
“음… 아무래도 사마준보와 관련된 일이었으니까요. 그러진 않겠지만…”
“만약 그리 된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사마예의 아들인 사마초 부대주를 맹에서 쫓아내고 검대를 이끌고 가서 사마세가의 씨를 말릴 수밖에 없어.”
이서휘가 새삼 남궁위를 바라봤다. 확실히 패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아니면 이서휘 자신이 살기를 내려놓아 다르게 보이는 걸 수도 있었다.
이서휘는 몇 마디 잡담을 더 하고 수호전에서 일찌감치 물러 나왔다.
이서휘가 월야대로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은 형식적으로 힘을 합치게 될 분위기였다.
군림맹주 남궁위는 백도맹주 범우에게만 호의가 있을 뿐이고 화산파, 곤륜파, 무당파는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예전 무위를 넘어선 터라 은근히 세 곳의 명문정파를 꺾기 위해 준비하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서휘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옥의림과 함께 있을 때 다짐했던 마음가짐을 계속 유지할 생각이었다.
‘내가 압도적으로 강해지면… 어떻게든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내가 나서서 조정할 테니까.’
오랜만에 복귀했으니 한신과 유백도 만나야 했으나 이서휘는 미뤄두고 질풍검대로 직행했다.
☆ ☆ ☆
이서휘는 생각하고 있던 야간 훈련을 장시우와 함께 논의했다.
“어찌 할 셈인데?”
“야전을 연습해 보죠.”
“야전을?”
“저희가 대원이었을 때 형님과 종종 고생하던 그 훈련 말입니다.”
“대원들이… 버틸 수 있을까?”
“뭐 없으면 없는 대로 경험이 되겠지요.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될 테니까.”
이서휘의 말에 장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찬성이다. 보고는 내가 하고 올 테니 건영이 통해서 준비시킨 다음에 조금 이따 만나자.”
“오늘 밤이요?”
“당장 해야지 그럼.”
“알겠습니다. 간자는 따로 뽑지 말고 형님이랑 제가 하는 게 낫겠습니다.”
“후후, 알았다.”
두 사람이 말한 훈련은 ‘간자(間者) 잡기’라 불렸다.
군림맹에 침투한 간자가 도망을 치고, 그 간자를 검대가 포위해서 잡아내는 작전이었는데 간자가 누구냐에 따라 난이도가 대폭 올라가는 훈련이었다.
물론 이번 훈련의 간자는 이서휘와 장시우.
월야대와 질풍검대 전원이 목검으로 무장하고 군림맹에서 멀지 않은 명린산(明燐山)에서 작전을 수행한다.
이서휘와 장시우가 명린산으로 도망을 치고 질풍검대와 월야대가 명린산을 포위, 추격하는 것이다.
경공과 무공, 끈질김과 예민함, 체력까지 필요했다.
이서휘와 장시우가 불쑥 나타나서 목검으로 대원들을 무참하게 패면서 돌아다닐 계획이었기 때문.
더군다나 이 간자 잡기 훈련은 시작일 뿐이었다.
누구보다 경험이 많은 이서휘가 일부러 정마대전이 벌어졌을 경우를 가정하고 이런저런 상황에 대원들을 노출시킬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서휘는 복귀하자마자 월야대와 질풍검대를 혹독하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 ☆ ☆
이서휘가 군림맹으로 복귀할 무렵…….
마교의 총본산.
마신일 덕분에 흥청망청했던 거리는 어느새 정적이 감돌 정도로 고요해진 상태.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자도 없을 정도로 무거운 공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특히 중앙 거리에는 죽창에 꽂힌 시체에 파리가 꼬이고 있었다.
대다수가 독마가(毒魔家)였다.
위극명이 일월마가를 이끌고 진입하고 위극신이 수하들과 함께 직접 나서서 독마가 전체를 궤멸시켰던 것.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일월마가가 총가를 뒤집은 것이었기 때문에 이십일가에 속했던 다른 마가의 도전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마교십존의 지위를 받지 못한 마가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제 전대 교주라 불려야 할 제월헌(諸月軒)이 각종 진법과 독무를 뿌려 숨겨 놓았던 총본산을 바깥에 드러나게끔 모든 진법을 해제한 상태였다.
마교의 깃발은 어느새 내려오고 천(天)이라 쓰인 단 한 글자가 펄럭이고 있었다.
대체 총본산을 장악한 위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위극신이 사왕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말을 이어나갔다.
“진법은?”
“다 해제했습니다. 이제 안개만 걷히면 총본산이 외부에 드러납니다.”
“좋아. 소식을 전해라.”
“명을 받듭니다.”
위극신은 이미 마교를 장악해 제월헌 교주의 직속세력이었던 은귀단(銀鬼團)과 독마가를 주살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다른 조직과 다른 마가와 연계되어 있는 세력은 일절 건드리지 않았다. 또 다른 누군가가 연합을 해서 일월마가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위극신은 여유롭게 대처했다.
아예 한 술을 더 떠서 그간 독마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거나 십존쟁투에 끼지 못했던 이십일가(二十一家)의 나머지 세력을 총본산으로 불러들일 생각이었다.
그중에는 놀랍게도 감숙에서 정사지간 세력으로 위장하고 있는 야율세가(耶律世家)가 있었고, 북방에서 꾸준히 힘을 비축하고 있는 무벌 세력인 동여사자맹(東餘獅子盟)도 있었다.
하지만 위극신은 총본산을 개방하면서 미끼를 던졌다.
[제월헌 교주를 죽였다. 다음 교주는 강자존으로 결정할 것이니 이십일가에서 자신 있는 자는 총본산으로 오라. 더불어 총본산을 휘감고 있던 독무와 기관진식은 오늘부로 모두 해제했음을 밝힌다. 위극신.]
이것은 대놓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간 이십일가는 제월헌 교주를 두려워했다. 고작, 일월마존에 불과한 위극신을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위극신은 그저 일월마가의 수장에 불과했으니까.
위극신의 심리전은 계속 됐다.
위극신은 총본산을 장악하자마자 가장 먼저 제월헌에게 잡혀 있던 마가의 전대 가주들에게 자고독(紫膏毒)의 해약을 내리고 풀어준 상태였다. 대신에 총본산을 떠나게 할 수 없도록 감시만 하고 있었다.
일부는 이미 목숨을 잃었으나 몇 명의 전대 가주들은 여전히 건재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이십일가는 자신들의 전대 가주를 모시러 오기 위해서 출발했고, 혹은 마교의 차기 교주가 어떻게 추대되는지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물론 상황을 살피다가 교주 자리를 넘보기 위해 몰려드는 자들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위극신의 안배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십일가에서 숨죽이던 고수들도 저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대의 일월마존 정도야….’
그렇게 위극신은 총본산에 앉아서 이십일가의 마음을 쥐락펴락 하고 있었다.
심리전의 극치는 마지막 수에 있었다.
위극신은 자신과 함께 제월헌에게 도전했던 검마(劍魔)를 살려놨던 것.
더군다나 위극신은 검마에게 마검까지 돌려준 상태였다.
교주 자리를 놓고 벌이는 쟁투의 첫 번째 사람이 바로 검마였다.
검마에게 이십일가의 고수가 나서서 도전을 하고, 도전자가 나오지 않으면 제월헌의 안배대로 다시 위극신이 이십일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검마와 교주 자리를 놓고 겨룰 생각이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다른 이십일가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죄다, 각자의 포부를 안고 무척 오랜만에 총본산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제월헌이 시작한 십존쟁투는 어느새 위극신에 의해 이십일가의 교주 쟁투로 변해 있었으며, 그 공정함을 보장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수호사왕들인 혈륜마제(血輪魔帝), 한빙마제(寒氷魔帝), 탈명마제(奪命魔帝)였다.
왜 그랬을까?
위극신은 마가의 뒷받침이 없는 세 사람에게도 은근하게 교주 자리에 도전하라고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 이십일가가 보는 앞에서 강자존으로 교주 자리를 정합시다.’
하지만 세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가가 주축이 되지 않으면 총본산을 장악하고 총가의 위엄을 내보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께름칙한 것은 대체 위극신이 어떻게 제월헌 교주와 좌우사자들을 죽일 수 있었는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간에 위극신의 패기는 도대체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또한 위극신은 교주 쟁투가 끝난 이후에는 백도 세력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지 대략적인 계획을 이미 세워 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위극신과 이서휘는 각자의 성향대로 훗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3장. 남자의 약속>
비룡검대의 무인 세 명이 명린산에서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는 월야대와 질풍검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벌써 며칠 째 저러네.”
“그러게 말이야.”
“이 대주가 혹독하게 다룬다더군.”
“혹독하게? 좋구나.”
말을 하는 와중에 세 사람의 시선은 죄다 화지련의 뒤태에 꽂히고 있었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탐스럽구나. 탐스러워. 이 대주가 복귀했으니 이제 더 어렵겠네.”
“무슨 소리야? 뭐가 어려워?”
“화지련 엉덩이 구경하는 게 어렵다고 인마.”
“낄낄….”
“야! 가자. 이 대주 온다.”
구경하던 비룡검대 무인들이 우르르 이동하자, 이서휘가 잠시 서둘러 떠나는 비룡검대의 무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놈들이네….’
이서휘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질풍검대도 그렇고 다른 검대에도 인원이 제법 충원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그간 간자 훈련 덕분에 월야대는 녹초가 된 상황이었다.
질풍검대도 마찬가지.
그간 비무장에서 익혔던 검법을 소규모 인원이 모여 검진처럼 펼치는 훈련도 병행을 해야 했다.
이서휘나 장시우를 대원들이 홀로 상대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
이서휘는 일부러 삼삼오오 모여 있는 질풍검대와 몇 차례 비무 형식으로 겨룬 다음에 도망가곤 했다.
말이 비무였지, 허술해 보이는 자들은 꼭 이서휘에게 한두 대씩 얻어맞아야 했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릴 수밖에 없었다.
비무장에서 검을 사용하는 것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풍검대와 월야대는 이서휘와 장시우를 잡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벌써 간자 훈련만 십일 째였다.
저녁마다 이서휘의 손에서 목검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느새 월야대와 질풍검대가 무척 힘든 합동 훈련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군림맹에 퍼진 상태여서 며칠 전에는 천룡검대와 운룡검대도 합동 훈련에 참여했었다.
한데, 그 틈을 이용해 헛된 욕망을 품은 자들이 있었다.
이서휘가 오자마자 도망치듯이 빠져 나갔던 비룡검대의 무인들…. 군림맹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강서 지역에서 정사지간이나 다름없는 무림인들이었다.
저희끼리는 스스로 ‘강서파’라 일컫고 있었다.
군림맹이 대대적으로 검대 인원을 충원할 때 이들은 처음으로 안휘에 발을 디딘 자들이었다. 직접 들어와 보니 대우가 좋아서 강서에 퍼져 있는 지인들을 추가로 입맹시킨 상황이었다. 비룡검대와 운룡검대에 이 자들의 지인들이 제법 섞여 있었다.
그 강서파의 무리 중 비룡검대의 양오대(羊俉大)라는 자가 몇 명을 모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양오대는 훈련이 끝나면 술집으로 달려가는 강서파의 일원이었는데 호시탐탐 화지련에게 치근덕거리던 자였다.
양오대가 말했다.
“듣자하니 사마초 부대주가 이서휘 대주를 엄청 싫어한다던데?”
“왜?”
“싫어할 만하지. 이 대주가 사마가주와 사마준보를 죽였다는 소문이 정말인 모양이야. 이 대주의 무위가 엄청 높아져서 웬만한 고수들은 상대도 못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해. 그래서 사마 부대주는 요새 술만 마신다는군. 낙향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야…. 덤비자니 개죽음이고, 머물자니 사마세가가 휘청거리고 있어 마음이 불편하고. 제 아비를 도우러 가는 게 낫겠지.”
“그래? 그럼 부대주 자리가 하나 비겠군.”
“킬킬킬… 그 생각을 못 했네.”
“어쨌든 사마초를 끌어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보류… 생각을 더 들어봐야겠어. 술이라도 한 잔 하던가.”
그야말로 끼리끼리 모여서 나눌 법한 대화들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서파의 종가성(終加成)이 말을 이었다.
“정천만 있을 때 화지련을 어떻게 했어야 됐는데… 너무 몸을 사렸어.”
“그러게 말일세.”
이건 또 대체 무슨 소리일까.
개 버릇 남 주지 못한다고. 이들은 군림맹에 들어오기 전에는 종종 여인네들을 납치해 욕구를 채우는 무리들이었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군림맹에 들어왔을까.
군림맹은 왜 이런 쓰레기들을 걸러내지 못했을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가들이 점점 빠져나간 빈자리를 채우려다 보니 이런 자들도 간혹 섞여 있었다. 정황상 마교와 일전을 앞두고 있고, 세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으니 칼밥 좀 먹은 티가 나면 이런 자들도 종종 입맹할 수 있는 형국이었다.
살인 이력이 붙지 않아 있는데다가 강서에서는 미적지근하게 활동하던 놈들이었기에 입맹 심사에서 들키지 않았던 것.
이런 대화를 하는 놈들이라는 것을 이서휘가 아니라 다른 검대의 대주에게 발각되었더라도 그 자리서 죽임을 당했을 놈들이었다.
딱히 이런 때가 아니더라도 군림맹엔 가끔씩 이렇게 자격미달의 쓰레기들이 군림맹에 들어오곤 했었다.
하지만 이 자들의 목표가 화지련인 것은 그야말로 불운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종가성이 말했다.
“우리도 곧 월야대와 저 훈련을 하겠군. 기대 되는 걸?”
“아서라. 이서휘에게 다 죽을 일 있나?”
“못 들었나? 전원 목검이라던데… 더군다나 야간 훈련이 아닌가. 월야대주는 보통 간자 역할을 한다더군. 즉 화지련은 우리와 함께 월야대주를 잡으러 간단 말이지.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이야, 똑똑한데? 안 그래도 운룡 얘들도 화지련과 같이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하더니만.”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어두컴컴한 깊은 산속에서 말이야. 목검을 든 여인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말씀이야.”
“아무리 목검이라도 정천과 그 약아빠진 놈이랑 어벙하게 생긴 놈도 제법 강하다던데?”
“상황을 보자고.”
그 말에 양오대가 파렴치한이 내뱉을 수 있는 정점의 말로 자신의 희망을 밝혔다.
“화지련만 어떻게 한 번 가질 수만 있다면… 군림맹에 머무르지 않아도 좋아. 수틀리면 뭐 벽천회나 아니면 흑도맹으로 가자고.”
“전향인가?”
“전향이지.”
“클클클… 어쩌면 우리는 흑도맹에 더 어울릴 지도 몰라. 안 그런가?”
“암, 그렇고말고.”
참으로 부질없는 이야기였다.
☆ ☆ ☆
이틀 후.
장시우와 이서휘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서휘야, 비룡검대와 합동 훈련은 하루 쉬고 해야겠다.”
장시우의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네, 쉴 때가 되었죠. 그나저나 곽진(郭震)이 이번에 비룡대주가 됐다면서요? 고속 승진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전 대주가 부상 때문에 은퇴를 했으니 계속 공석으로 둘 수는 없었겠지. 사마초가 본래 더 경력이 많은가 본데 사마세가 때문에 밀린 모양이야. 곽진이 아주 의욕적으로 나서고 있지.”
“사마초라….”
애초에 사마세가가 꽉 잡고 있던 비룡검대였는데 점점 밀려난 모양이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형님은 함께 하시겠습니까?”
“우린 이제 제법 방법을 익혔으니 자체적으로 수행하든가 아님 검진 훈련을 좀 더 하는 게 낫겠다. 네가 좀 고생해라.”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도 하루만 쉬고 제가 곽 대주랑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그래.”
이서휘는 스스로 엄격한 면이 있지만 수하들을 몰아세울 때는 다소 느슨한 면이 있었다. 벌써 십일 째 간자 잡기 훈련을 하느라 지쳐 있을 대원들을 위해 오늘은 검풍객잔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이서휘가 월야대에 들어가면서 말했다.
“오늘은 검풍에 가서 좀 쉬자.”
“오오! 기다렸습니다. 십일 째 이게 무슨 고생인지!”
도삼의 말에 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군림맹 나갈 뻔 했다고.”
은근히 이서휘와 겨루고 싶어 벼르고 있던 정천은 훈련 기간에 그 누구보다도 이서휘에게 많이 얻어맞은 상태였다. 때문에 정천마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화지련도 마찬가지.
돌아오자마자 산 속에 몰아넣고 훈련만 시키는 대주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성격답게 이를 악물고 참아내던 와중이었다.
검풍객잔에서 조촐하게 술을 마시는 와중에 정천이 입을 열었다.
“월야대는 당분간 이 인원으로 가는가? 월야대로 오고 싶어 하는 자들이 그간 참 많았네. 각주들께서 한사코 반대하시더군. 이 대주, 자네 승낙이 있어야 한다면서.”
“그게 맞죠. 검대처럼 운용할 게 아니니까. 기다려 보십시오. 제가 봐서 괜찮다 싶으면 좀 늘리겠습니다.”
이서휘는 사람을 가려 뽑는다. 설령 잘 못 뽑았더라도 갱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도삼도 그간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진짜로 궁금한 게… 아니 믿을 수 없었던 소문이… 있는데 말입니다.”
“뭐가?”
“진짜 점창파 장문인하고… 챙챙?”
“챙챙이 뭐냐. 하여간에 그랬지.”
“와, 정말 이긴 겁니까?”
“그럼 가짜로 이겼겠냐. 져줄 사람도 아니고.”
이서휘의 말에 네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신들의 상관이 그렇게 강했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때, 객잔 구석에서 한 남자가 일어서더니 비틀거렸다가 자세를 잡은 후에 이서휘에게 걸어왔다.
“이야, 우리 유명인사 질풍검대… 아니지 월야대주께서 여기 계셨네.”
이서휘가 고개를 돌려 보니 사마초였다. 술에 잔뜩 취한 모습이었다.
이서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마초, 많이 취했군.”
“왜… 난 취하면 안 되나? 사마세가가 전 무림에 망신살이 뻗쳤는데 취하면 안 되느냐고…….”
“부대주님, 아이 또 왜 그러십니까. 좋은 술 마시면서….”
“실례했습니다.”
낯선 자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우르르 몰려와서 사마초를 끌고 가다시피 데려갔다. 한데 두어 명의 눈빛이 화지련의 위아래를 기분 나쁘게 훑고 있었다.
이서휘가 놓칠 리 없었다.
낯선 자들을 바라보며 이서휘가 말했다.
“저 자들은 누구냐?”
그 말에 도삼이 콧방귀를 끼며 대꾸했다.
“저 놈들이오? 뭐 강서에서 올라온 신입들이라는데 나이도 제법 있고 무공도 제법 고강해서 뭐 자기들끼리는 자주 뭉쳐 다니면서 강서파라 한다던데요. 꼴도 보기 싫은 놈들입니다.”
도삼이 갑자기 줄줄이 읊어대자 이서휘가 뜨악한 얼굴로 도삼을 바라봤다.
“넌 대체 이런 소식을 다 어떻게 알아? 아직도 담 넘어 다니느냐?”
“아이 참, 대주님도 말씀을 또 그렇게… 객잔 몇 번 와보면 다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요새 담 안 넘습니다.”
“강서파라… 비룡검대면 비룡검대지… 못난 놈들이군.”
“그렇습니다. 바로 보셨습니다.”
그 순간 강서파의 양오대가 화지련을 한 번 더 보려다가 이서휘와 눈을 마주쳤다.
이서휘가 노려보자 죄 지은 놈이 화들짝 놀라는 것처럼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뭐야, 이 새끼들은…’
그때 술에 취한 사마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서휘에게 외쳤다.
“야! 이서휘! 이 새끼야… 네가 그렇게 강해졌다면서? 한 판 붙자… 어? 야 장검, 장검 어디 있어.”
“허…”
장탄식을 내뱉은 이서휘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얼추 다 먹었으면 일어납시다. 내일 정오까진 푹 쉬십시오. 아마 저녁에 다시 훈련을 재개해야 할 테니.”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일어나도 이서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화지련이 앉아 있는 이서휘에게 말했다.
“대주님은 안 가세요?”
“어. 난 사마초나 바래다주고 와야겠다.”
“바래다준다고요?”
도삼이 고개를 갸웃하자, 도이도 중얼거렸다.
“뭔 말이지? 때리겠다는 뜻인가….”
“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먼저 들어가.”
“네.”
이서휘가 정천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술을 좀 먹었으니 잘 데리고 가란 뜻이었는데 말로 하지 않아도 정천이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월야대가 나가자 이서휘가 자리에서 일어나 월야대가 먹은 술값을 내면서 사마초가 먹고 있던 곳까지 함께 계산을 치렀다.
이서휘가 터벅터벅 걸어가 사마초가 있는 곳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사마초, 술이 과했군. 자네들은 초면인데 전부 비룡검대인가?”
이서휘가 세 사람을 돌아보자 공연히 헛기침을 하던 세 사람이 각자 자신을 소개했다.
“비룡검대 양오대라 합니다.”
“비룡검대 종가성입니다.”
“비룡검대 조호웅(祖浩雄)입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말로 대꾸했다.
“이번에 들어 온 신입들인가?”
세 사람이 갑자기 떫은 표정을 지었다.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월야대주라고 으스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
세 사람이 대꾸했다.
“예. 뭐 그렇습니다.”
사마초는 아예 탁자에 엎드려 있었다. 이서휘가 짧은 한숨을 쉬더니 탁자에 있는 술병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면서 말했다.
“이 놈은 왜 이렇게 취했어? 약이라도 탄 게야?”
“예? 약이라뇨.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오기 전부터 이미 많이 드신 상태였습니다.”
“그래?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 발끈해?”
이서휘의 말에 세 사람의 기도가 참으로 빤하게 살짝 변하고 있었다.
‘이 놈들 봐라?’
이서휘가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비룡검대 곽진이 우리와 합동 훈련을 요청했다지?”
“예.”
“예, 그렇다고 하네요.”
“그렇구나. 목검 훈련이니까 행여나 진검 들고 올 생각들은 말고. 다들 알겠지?”
이서휘의 말투가 야릇했다. 놀리는 거 같기도 하고 빈정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일부러 상대방을 떠 보는 것이었다.
양오대가 히죽 웃으면서 대꾸했다.
“아, 예. 목검이죠. 목검.”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표정을 숨겼다.
‘이 새끼들 뭔가 성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떻게 입맹을 한 것이지?’
이서휘가 말했다.
“사마초는 내가 바래다 줄 테니 자네들은 그만 가 봐.”
“네? 아직 할 이야기도 있고.”
“술이 이렇게 취했는데 뭔 할 이야기가 있어. 가라.”
세 사람이 삽시간에 분한 표정이 되더니 말없이 일어나 포권을 취한 후에 밖으로 나갔다.
이서휘는 저 작태에 한숨을 쉬다가 남아 있는 술을 한 잔 따라 마시면서 엎드려 있는 사마초를 내려다봤다.
기분이 묘했다.
어찌 보면 전생과 가장 운명이 달라진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이서휘의 기억으로는 사마초가 비룡검대의 후임 대주가 됐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사마세가는 자신의 손에 궤멸되다시피 하고 사마초는 여기서 코를 박은 채 엎드려 있었다.
이서휘가 사마초 앞에 놓인 술잔에 잔을 부딪치면서 말했다.
“네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준보 탓이지.”
이서휘의 말에 사마초가 놀란 얼굴로 일어났다.
“준보 형? 어? 이서휘. 너 여기서 뭐하냐.”
그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한 잔 더 할래? 아님 들어갈래.”
사마초의 얼굴 상태를 보아하니 더 마셔서는 안 되는 지경이었다. 사마초가 말했다.
“이 강서파 새끼들은 어디 갔어? 뭐 할 말 있다고 왔는데.”
“먼저 보냈다. 가자.”
이서휘가 사마초를 부축하자, 사마초가 이서휘의 손을 뿌리치더니 혼자 일어나면서 말을 내뱉었다.
“안 취했어. 인마… 장난하나….”
“알았다.”
잠시 후 객잔을 나온 사마초가 비틀거리면서 군림맹으로 걸어가고 그 뒤를 이서휘가 조용히 따라가고 있었다.
앞서 가던 사마초가 술에 취한 사람답지 않게 뒤에서 따라오는 이서휘에게 자세도 돌리지 않은 채로 조용히 물었다.
“이서휘.”
“어. 말해라.”
“준보 형이 정말 살수들을 보냈었냐?”
“그래.”
잠시 서서 하늘을 바라보던 사마초가 중얼거렸다.
“그래 뭐, 그러고도 남을 내 종형(從兄, 사촌 형)이지. 덕분에 내 인생도 꼬였구나.”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군림맹으로 함께 걸어갔다.
사마초는 숙소 앞에 도착하자 그제야 술이 조금 깬 모양이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이서휘가 쫓아오고 있었다.
“참나, 여기까지 따라온 게냐? 왜 그래?”
“……가려는 참이었다.”
“빨리 가라. 내가 애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러나자 사마초가 입을 열었다.
“너 대체 얼마나 강해진 거야? 내가 몇 년 수련하면 따라잡을 수 있는 거냐?”
그야말로 술에 취해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이미 사마초는 지난 부대주 비무전에서도 이서휘에게 패한 바 있었다. 그간 이서휘의 기연을 생각하면 그 격차는 이미 까마득할 터. 그런데도 사마초는 답답한 마음에 당사자에게 직접 묻고 있었다.
이서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꾸할 말이 없어 그냥 말을 내뱉었다.
“십 년? 이십 년?”
“빌어먹을 새끼. 차라리 불가능할 거라고 말을 하던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든, 없다고 생각하든 너한테 달렸지.”
사마초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강서파를 칠 생각이지?”
“뭐?”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들어올 때부터 눈여겨 본 놈들이야. 후우… 술 마시면서 네 욕 좀 했더니 자연스럽게 꼬이더라. 한둘이 아니야. 화지련 얘기도 여러 번 나왔다. 내가 나가가기 전에 처리하려 했는데. 아마 진검을 준비할 게다. 사고를 많이 치는 놈들이야.”
“그랬군.”
사마초가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검대 대주가 목표였는데… 눈앞에서 놓치다니… 하여간 다 너 때문이다.”
이서휘가 고개를 그떡이며 대꾸했다.
“그래. 다 나 때문이다.”
사마초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나중에 보자.”
“나중이 언제야?”
“알 거 없어.”
이서휘는 들어가는 사마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정마대전을 앞두고 유능한 부대주 한 명을 잃게 되는 게 아닐까 하여 무척 아쉬웠던 것.
이서휘는 술에 만취한 사마초가 비룡검대 숙소에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본 다음에 비룡검대 대주실을 찾아갔다.
“곽 대주, 있나?”
“어? 웬 일인가, 밤늦게…. 들어와.”
이서휘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말했다.
“안 잤네?”
“너는 오랜만에 보면서 어제 본 것처럼 말하는구나. 무슨 일이야…?”
“강서파 얘기 좀 해다오.”
“강서파?”
이서휘의 말을 듣자마자 곽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놈들 어떻게 처리하지. 휴우.”
“일단 이야기나 해 봐. 몇 명인지, 어떤 놈들인지.”
“그게 말이다….”
☆ ☆ ☆
다음날 저녁, 명린산.
비룡검대와 합동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이서휘가 월야대에게 주의를 주고 있었다.
“이번 훈련은 간자 잡기다.”
“네. 알고 있습니다만.”
도삼이 고개를 갸웃하자 이서휘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작전 변경이야. 진짜 간자를 솎아낸다.”
“진짜 간자라니요? 대주님 말고 간자가 더 있습니까?”
“일단 내가 드러난 간자고, 드러나지 않은 간자들이 어딘가에 속해 있다. 활동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이서휘의 말에 삽시간에 월야대가 조용해졌다. 무언가 이서휘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
“농담이 아니신 거 같은데?”
이서휘가 바로 말을 이었다.
“월야대는 화지련을 중심으로 움직이면 된다. 비룡검대에서도 벼르던 일인데 이번에 처리하기로 했다. 대신에 화지련이 조금 위험해지겠지. 화지련을 건드리는 자가 없으면 간자 작전을 예전처럼 진행하면 된다.”
대원들이 일제히 화지련을 바라봤다. 하지만 화지련은 이서휘에게 따로 들은 게 있는지 덤덤한 얼굴이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훈련의 기본은 규칙을 지키는 것이야. 만약 목검 이외에 병기를 지녔거나 작전에서 이탈해 다른 행동을 하는 자가 있으면 명령 불복종이니 그 자리에서 죽여도 좋다.”
“죽이라고요? 비룡검대를?”
“일단 목검이니까 혼절을 시키든지 제압해라… 진검을 들고 있다면 너희가 위험하니까 봐줄 필요 없다는 뜻이야.”
“알겠습니다.”
“화지련에겐 신호탄을 건넸다. 이전 훈련처럼 흩어져서 이동할 거야. 화지련이 신호탄을 쓰면 비룡검대도 화지련 주변으로 모일 것이다. 알겠지?”
“아 대체 뭐야? 진짜 위험한 거 아니에요?”
“안 위험해.”
“왜요.”
도삼의 대꾸에 이서휘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지켜볼 거니까.”
“아, 네.”
“가자.”
“갑시다!”
이서휘는 어째서 이런 판단을 했을까.
이서휘는 오전에 이미 화지련과 대화를 나눈 상황이었다. 치근덕거리던 인원 중에 비룡검대 소속의 무인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심하던 것을 확신한 참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병 같은 놈들이 검대에 섞여 있어봤자 훗날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화지련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강서파라는 놈들이 단체로 움직이는지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 단체로 싸잡아 군림맹을 내보내든지 아니면 곽진과 함께 즉결 처단할 생각이었다.
강서파라는 사조직이 흘러 들어왔다가 궤멸될 처지에 놓인 셈이었다.
☆ ☆ ☆
명린산이 술시(戌時, 오후 7시)가 되자 일찌감치 어둠에 잠겼다. 비룡검대와 월야대의 일부는 횃불을 들고 있고, 이서휘와 비룡검대의 곽진 대주는 검은 무복을 입은 채로 먼저 명린산에 오르고 있었다.
이서휘가 곽진을 보며 말했다.
“준비는 잘 했고?”
“주의는 충분히 줬다.”
“사마초는?”
“모르겠다. 자, 부탁했던 거.”
곽진이 비룡검대가 입는 감색 무복을 건네자 이서휘가 그 자리에서 갈아입은 후에 복면으로 얼굴을 감싸고 눈만 내놓았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먼저 명린산으로 경공을 펼치면서 말을 남겼다.
“조금 이따 보자.”
“그래.”
명린산의 입구에 비룡검대가 줄지어 있었다. 그 한 쪽에 복장이 다른 네 사람이 이방인처럼 서 있었다.
물론 월야대였다.
사마초가 부재중이라 작전을 설명하는 사람은 임시로 특작대주 역할을 수행하는 정천이었다.
“임시 특작대주 정천이다. 이서휘와 곽진이 간자로 발각되자마자 명린산으로 도주했다. 두 사람 모두 무공이 뛰어나니까 혼자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네다섯 명으로는 잡을 수가 없다. 목표는 일단 포위망을 구축해 특작대 인원을 다 불러 모으는 것이다. 몇 사람에게 신호탄이 지급됐을 것이니 잘 판단해서 사용하도록. 각자 흩어져서 올랐다가 도중에 감독하는 대원들에게 수색 증표를 받아 다시 이곳으로 무사히 내려오면 된다.”
정천의 말에 비룡검대와 월야대가 조용히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복면을 착용하고 흩어져서 이동한다. 출발…”
감색(紺色) 무복을 입은 비룡검대와 은청색(銀靑色) 무복을 입은 월야대가 천라지망을 펼치는 것처럼 줄지어 선 다음에 길도 나지 않은 명린산을 수색하면서 오르기 시작했다.
☆ ☆ ☆
이서휘는 비룡검대가 산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서휘의 기억에 비룡검대는 질풍검대보다 강했다.
세가가 주축이 된 검대다.
물론 지금은 사마세가 인원이 대다수 빠졌는데 굳이 말한다면 사마록의 일파가 빠진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가 백리세가, 독고세가, 모용세가 출신들이다.
사마세가의 빈자리는 강서파라 불리는 놈들이 채워놓고 있었는데 이서휘가 곽진에게 들어보니 없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로 나름의 세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간 다른 검대와 합동 훈련을 진행하면서 다른 대주들과 함께 새로 들어온 자를 면밀히 감시했던 이서휘였다. 어찌 보면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것이라서 이서휘에겐 확실히 음흉하고 냉정한 면이 있었다.
이서휘는 일부러 길을 돌아서 비룡검대의 후미에 합류했다가 은근슬쩍 근처에서 이동하는 화지련을 주시하고 있었다.
애초에 계속 화지련을 지켜줄 생각이었다.
사단은 일찌감치 벌어졌다.
복면을 쓰고 있었기에 강서파의 일원들이 화지련을 감싸는 형태로 몰려 왔던 것. 이서휘가 경고했던 일인지라 내심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화지련의 가슴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서너 명이 화지련에게 다가가자, 화지련은 근처에 있는 도이, 도삼과 합세하려고 이동했다. 그때 경공을 펼치면서 다가온 누군가가 화지련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 사이에 화지련의 목검이 가차 없이 정수리로 떨어졌다.
빠악!
대번에 강서파 무인이 한 명 뒤로 쓰러지고.
저희끼리 놀란 강서파가 우르르 달려들어서 화지련에게 덤비기 시작했다.
타다다닥!
한 명이 뒷짐을 지고 선 채로 명령을 내렸다.
“어허, 다치게 하면 못 쓴다. 혈도를 제압해서 차라리 명린산을 빠져 나가자. 뭔가 낌새가 이상해. 눈치를 챈 모양이야. 다들 목검이니 길을 뚫는 건 어렵지 않을 게야.”
“그러게 말이야. 눈치 빠른 새끼들… 운룡 얘들은?”
“대기 하고 있을 거다.”
그때, 감색 무복을 입은 사내가 한 명 다가오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물은 감색 무복의 사내는 물론 이서휘였다. 그 뒤로 도이와 도삼이 따라오고 있었다.
한데 동시에 산 위에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는데, 앞서 말한 운룡검대 소속의 강서파였다. 저들이 입고 있는 감색 무복 위에는 이슬이 내려앉아 있었다.
설마 했던 일을 화지련을 미끼로 잡아내게 됐던 것.
근데 이서휘의 예상보다 수가 많았다. 일단 비룡검대에서만 대여섯 명이 화지련을 둘러싸고 있고, 뜻밖에도 산 위에서 서너 명이 더 내려온 상태.
그때 구름에 가린 달이 잠시 모습을 드러내자, 누군가가 이서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누구지?”
대답 대신에 목검이 번갯불을 뿜어내는 것처럼 움직였다. 빡 소리와 함께 질문했던 자가 선 자세에서 정신을 잃고, 동시에 이서휘의 신형이 화지련 곁으로 순식간에 내려서서 타다다닥 소리와 함께 강서파의 목검을 떨어뜨렸다. 그 순간에 채앵, 쌔앵 소리와 함께 저마다 비수와 단도를 뽑았다.
그 광경에 이서휘가 말했다.
“날붙이는 금지라 했을 텐데… 어쩜 이렇게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는 것이냐. 기가 차는구나.”
화지련을 뒤에 두고 이서휘가 선 자세에서 목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도이와 도삼이 화지련을 지키는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강서파의 무인들은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당했구나.’
누군가는 이번 일을 이야기한 자들을 원망하고 있었다.
‘고작 여인 한 번 갖겠다고 이게 무슨 봉변이란 말이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이서휘의 목검 한 방에 칼을 놓치거나 이마를 얻어맞아 기절하기 일쑤였다. 그때, 도망가던 자들은 어둠 속에서 나온 누군가에게 기습을 당해 그야말로 단말마를 내지르면서 쓰러졌다.
또 다시 서늘한 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비명이 길게 이어졌다. 근처에 있던 비룡검대 무인이 신호탄을 쏘아 올리고 즉시 작전이 중지된 것처럼 흩어졌던 대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복면을 쓴 사내는 진검을 쥐고 강서파를 생각하는 자들에게 달려들어 무작정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서휘가 외쳤다.
“누구냐?”
그 말에 복면을 쓰고 있던 자가 싸늘한 말투로 대꾸했다.
“나다, 이서휘. 방해하지 마라.”
사마초였다.
하도 어이가 없는 상황이라 이서휘가 잠시 서있자, 강서파의 대부분이 사마초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삽시간에 챙챙챙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강서파와 사마초 간에 살벌한 싸움이 이어졌다.
사마초는 아예 맹을 나갈 생각으로 진검을 들고 온 모양이었다. 사마초를 죽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서휘가 한 걸음을 나서자 힐끗 쳐다본 사마초가 호통을 내질렀다.
“다들 멈춰라. 비룡검대의 일이다. 내가 처리한다.”
하지만 남은 자들이 아직 많았다. 더군다나 각자 짧은 병기를 쥐고 있어 사마초 혼자 상대하는 게 벅찼다.
사마초는 강서파로 파악하고 있던 대원들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싸우기 시작했다.
“양오대로구나. 너는 조호웅이냐?”
챙챙챙챙챙! 쌔앵!
“종가성이로구나. 너는 내 손으로 입맹 심사를 했었는데…”
말과 함께 사마초의 검이 종가성의 어깨로 떨어졌다. 푸욱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졌다. 하나 사마초도 누군가의 일장을 얻어맞아 땅바닥을 구르면서 다시 자세를 잡았다.
사마초가 서늘한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 누구도 낄 생각 마라. 내 검만 더럽히면 되니… 강서파, 비룡검대를 우습게 봤다 이거지.”
그러나 사마초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면서 강서파를 베어 나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 비룡검대와 월야대가 신호탄이 터진 곳으로 복귀해 말없이 간자 작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촤악 소리와 함께 또다시 사마초의 팔뚝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마초는 악착같이 달려들어서 어깨를 부여잡고 있던 종가성의 머리통을 붙잡고 장검을 찔러 넣은 다음에 등 뒤에서 날아오는 일장을 좌장으로 응수했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내밀던 자의 손목이 대번에 부러졌다.
그야말로 혈전이었다.
이서휘는 몇 번을 나서려다 참고 대신에 손에 목검을 언제든 던질 수 있게끔 들고 있었다. 그 사이에 몰려온 비룡검대와 월야대 전체가 사마초와 강서파를 포위하고 있었다.
잠시 후 사마초의 손에서 결국 혈전이 마무리되었을 때 사마초는 온 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곽진과 상의해서 처리하려고 했던 일이다.
그런데 사마초가 불쑥 나타나서 강서파를 도륙했다. 심지어 도망가던 몇 명이 붙잡혀서 돌아오자 사마초가 느닷없이 검을 뽑으면서 그대로 절명시켰다.
군림맹에도 절차가 있다.
죽일지 쫓아낼 지는 상부에서 판단해야 할 일.
예외가 있다면 작전 수행 도중에 부대주 급 이상이 즉결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 빈틈을 물고 들어가 사마초가 손을 쓴 것이었다.
사마초가 숨을 몰아쉬면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쥐고 비룡검대를 노려봤다.
어느새 곽진이 다가와 사마초에게 말했다.
“괜찮나?”
“괜찮아.”
두 사람은 본래 나이도 같은데다가 입맹은 오히려 사마초가 빨랐다. 대원들이 있건만 사마초는 무슨 생각에선지 상급자인 곽진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고, 곽진도 개의치 않고 있었다.
사마초가 숨을 크게 내쉬더니 이서휘를 바라봤다.
“서휘야. 애초에 내 손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치료부터 해야겠다.”
“킬킬… 나 때문에 너희 작전이 엉망이 된 건가?”
그 말에 곽진이 대꾸했다.
“아니다. 이 대주랑 이리 하려고 했던 작전이다.”
사마초가 납검하면서 말했다.
“자, 비룡검대.”
“네, 부대주님….”
비룡검대가 물끄러미 사마초를 바라봤다. 이들도 사마초가 떠나리란 것을 알고 있던 참이었다.
사마초가 불쑥 작별을 고했다.
“다들 잘 있어라. 나는 사마세가로 돌아간다. 군림맹에서 쫓겨난 사마세가로… 그리고 강서파는 이게 다가 아닐 것이야. 곽 대주랑 서휘 네가 다 찾아내서 내보내는 게 좋겠다.”
“알았다.”
“그리 하마.”
사마초가 명린산을 내려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이서휘, 조금만 기다려라. 사마세가 이름을 걸고 도전해주마.”
“얼마든지… 그 전에 할 일이 더 있지 않나?”
“뭔데?”
사마초가 바라보자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정마대전이 벌어지면 사마세가를 이끌고 백도 세력에 참여해라. 그럼 도전을 받아주마. 아니지. 둘 다 살아남으면 그때 승부를 내자.”
“하… 새끼. 아예 멸문을 시키려고 하는구나. 우리를….”
“안 올 셈이야?”
이서휘의 말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사마초가 말했다.
“이제 사마세가는 내 아버지가 가주다. 그리고 내가 후계자가 된 셈이고. 사마세가도 백도의 검이야. 나 혼자서라도 참여할 것이다. 다들 그럼 나중에 보자….”
군림맹에서 뼈를 묻겠다고 생각을 하던 사마초가 그렇게 작별을 고했다. 비룡검대가 우르르 몰려가더니 걷고 있는 사마초의 뒤에서 저마다 소리를 질렀다.
“부대주님, 또 볼 수 있는 거죠?”
“사마 형님, 정마대전 때 봅시다.”
“조심히 가십시오.”
이서휘, 월야대, 비룡검대가 상처 입은 야수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사마초의 등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이서휘가 말했다.
“약속한 거다.”
어느새 어둠에 잠긴 사마초가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래.”
<4장. 구패(求敗)>
백학루(白鶴樓)의 최상층.
술자리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쓰러진 술병과 지저분하게 흩어진 술안주들까지. 지난밤의 여흥이 못난 꼴로 남아 있었다.
높이가 낮은 탁자 아래의 바닥에 네 개의 발이 엉켜 있었다. 두 개는 남자고, 두 개는 여인이었다.
이미 해가 뜬지 오래됐는데도 두 사람은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탁자 위에는 새하얀 검이 주인과 함께 말없이 누워 있었다.
남자는 다름 아닌 백류혼이었다.
백류혼의 오른팔에 안겨서 누워 있는 기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는데 가끔 추울 때마다 백류혼의 장포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진은 충분히 더 잘 것 같았던 백류혼의 왼손이 탁자 위에 놓인 백연검(白燕劍)으로 향했다.
여전히 눈은 감겨 있고, 입도 반쯤 벌리고 있었는데 왼손은 백연검을 붙잡고 있었다.
그때, 밀실 바깥의 복도가 미세하게 울리더니 누군가가 등장해 낮은 어조로 말을 꺼냈다.
“공자님, 명영(明影)입니다.”
그 말에 백류혼이 백연검을 잡으려던 손을 거두고 눈을 감은 채로 대꾸했다.
“왜.”
“어르신이 자리에 누우시더니 공자님을 찾으셨습니다.”
명영의 말에 백류혼이 눈을 천천히 뜨며 대꾸했다.
“이 시간에 왜 누우셨나.”
어르신이란 백류혼의 조부인 검왕을 말했다. 백류혼의 조부는 평생 동안 묘시(卯時, 오전 5시~오전 7시) 이후로는 자리에 눕지 않았다. 일어나고 눕는 시각이 검처럼 분명한 사람이 바로 검왕이었다.
백류혼 자신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기루에 머무르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조부가 묘시 이후에 다시 자리에 눕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명영이 말했다.
“몸이 많이 편찮으십니다. 들어오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았다.”
백류혼이 대꾸를 해도 명영은 물러나지 않고 문 밖에 계속 서 있었다. 그 사이에 기녀도 잠이 깼는지 하얀 나신을 백류혼에게 들이밀면서 졸린 눈으로 웃고 있었다.
“가야 해요? 좀 이따 가지.”
기녀의 말에 백류혼이 명영에게 말했다.
“알았다니까. 곧 들어가마.”
“…….”
“명영아!”
백류혼의 목소리가 커지자, 그제야 명영이 대꾸했다.
“네, 들어오십시오. 먼저 가 있겠습니다.”
명영이라는 젊은 사내가 굳게 담긴 문을 잠시 노려보더니 그대로 발길을 되돌렸다.
백류혼이 그제야 일어나려는데 예화(睿花)라는 기녀가 백류혼의 위로 올라오면서 속삭였다.
“못 가요. 좀 이따 가.”
백류혼이 눈을 내리깔자 예화의 풍성한 가슴이 좌우로 납작하게 퍼져 있었다.
백류혼이 말했다.
“무거우니까 옆에 누워봐.”
백류혼이 턱짓을 하자 예화가 빙글빙글 돌더니 옆으로 누운 후에 백류혼을 바라봤다. 그러자 백류혼이 벌떡 일어나더니 백연검을 쥐고 문을 날려버릴 듯이 열어젖히고 아무 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뒤에서 예화의 외침이 들렸다.
“공자님!”
백류혼의 몰골은 그야말로 초췌했다.
며칠 째 술을 마셨는지는 물론 기억이 나지 않았고.
방금까지 같이 있던 여인이 예화였는지 화예(花睿)였는지 심각하게 헷갈리고 있었다.
주섬주섬 옷깃을 여민 백류혼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수통을 발견하고 자신의 긴 머리 위에 물을 콸콸 쏟아냈다.
그야말로 취객의 작태였다.
한 손에는 검을 쥐고, 한 손으로는 뚝뚝 떨어지는 물로 대충 세안을 한 백류혼이 백학루(白鶴樓)를 나서면서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속는 건 아니겠지.”
백류혼이 백검문에 들어서자 평소와 다르게 공기가 무거웠다. 소문주가 평소처럼 술을 잔뜩 마신 모습으로 등장하자 백검문의 가솔들은 말없이 예만 올리고 지나갔다.
백류혼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태상전(太上殿)으로 조부를 찾아갔다.
“류혼입니다.”
백류혼이 문 앞에서 고하자 넓은 방 안쪽에서 백류혼의 조부인 백이건(白利乾)이 대답했다.
“들어와.”
백류혼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은 방에 백이건이 홀로 누워 있었다.
백류혼이 멀찍이 서서 예를 올리고 서 있자, 백이건이 말을 이었다.
“가까이 와서 앉아라.”
“네.”
백류혼이 앉자 백이건은 여전히 천장을 올려다보는 채로 말했다.
“술 마셨구나.”
목소리가 의외로 정정하자 백류혼이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며 대꾸했다.
“네.”
백이건은 손자의 솔직한 대답에 별 감흥 없이 대꾸했다.
“그래, 한참 술을 마실 때지.”
“많이 편찮으십니까?”
백류혼이 슬쩍 화제를 돌리자 백이건이 나지막이 대꾸했다.
“늙어서 그런다. 너도 늙으면 이리 된다.”
“네.”
“기녀도 품었느냐?”
당대의 검왕이라는 자가 참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백류혼도 조부의 질문에 별 생각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그래, 한창 그럴 때지.”
잠시 말이 없던 백이건이 그제야 고개를 조금 돌려 백류혼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꼴이 엉망이구나.”
“네.”
“소문을 듣자하니 일전에 돌아다니다가 졌다면서?”
백이건이 아프다는 사람 같지 않게 누워서 바람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손자가 졌다는데 이렇게 기뻐하는 조부가 세상 천지에 어디에 있을까.
백류혼이 떨떠름한 얼굴로 조부의 웃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한참을 웃던 백이건이 말했다.
“누구한테 진 게야?”
“군림맹의 검객에게 졌습니다.”
“하필 검객에게 졌느냐? 세가의 고수였나보지?”
“아닙니다. 낭인 출신이라 들었습니다.”
“이름은.”
“이서휘라 합니다.”
“백검문의 후계자가 낭인 출신의 무인에게 졌다는 말이지?”
“네.”
실실 웃던 백이건이 말을 내뱉었다.
“운 좋은 놈…….”
백류혼이 눈을 내리깔고 바닥을 바라봤다. 운 좋다는 말이 기분이 나쁘기도 하거니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 그렇다고 시무룩하게 앉아 있을 성격도 아니었다.
“이게 어찌 운이 좋은 것입니까.”
백이건이 혀를 차며 말했다.
“너보다 많이 강했지?”
실로 자존심을 다치게 하는 질문이라 백류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백류혼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백이건이 말을 이었다.
“너보다 많이 강한 자한테 졌는데 너는 어찌 멀쩡히 살아서 날 쳐다보고 있는 게야? 술도 퍼마실 정도로 다친 곳도 없고.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기녀한테 힘쓸 체력이 있는 것을 보니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백류혼이 대답 대신에 한숨을 쉬자 백이건의 말이 이어졌다.
“검을 겨루고 패했는데… 죽지 않는 경우는 드물어. 이서휘라는 자가 네 친구인가 보구나.”
“뭐… 친구라 할 것 까진… 그냥 아는 사이입니다.”
“그래서 까마득한 격차를 느끼고 술이나 퍼마시러 다닌 게냐?”
“아닙니다.”
“내가 이런 놈에게 검왕이라는 별호를 넘기고 떠나야 하다니… 넌 나가서 검왕이라는 별호를 쓰지 말거라.”
“네, 알겠습니다.”
백류혼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백이건이 말을 이었다.
“좀 일으켜 다오.”
백류혼이 다가가서 백이건의 등에 손을 집어넣고 일으켜 세웠다. 백이건이 앉은 자세로 물끄러미 백류혼을 바라보다가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말했다.
“명영아.”
“네, 어르신.”
“그거 좀 가져와 봐.”
“네.”
잠시 후에 명영이 들어오더니 서찰 한 장을 백이건에게 넘기고 다시 사라졌다.
백이건이 서찰을 바라보다가 백류혼에게 툭 던졌다. 흐느적거리는 종이가 천천히 날아가더니 백류혼의 손에 떨어졌다.
백이건이 말했다.
“검선(劍仙) 노인네가 마교의 총본산을 찾았다고 연락이 왔다.”
“네?”
백류혼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이건이 말했다.
“읽어 보면 알게야. 마교에 무슨 변고가 생긴 모양이다. 백도(白道)에 연락을 취해라. 함정일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이르고.”
“알겠습니다.”
“검선도 이제 늙어서 올해나 내년쯤엔 포기할 것이라 하더니 결국 찾아냈구나. 검성 노인네도 죽은 거 같고, 이제 너희가 해결해야 할 일인데…”
백이건이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손자 놈은 술이나 퍼마시고 기녀나 품고 패배를 곱씹고 있으니 이거 내가 다시 검을 잡고 무림에 나서야겠구나. 총본산으로 백도 세력이 결집하면 나한테도 꼭 기별을 보내라. 죽기 전에 저 유명한 마교나 한 번 구경해야겠다. 아직은 마졸 한 명 정도는 죽일 힘이 남아 있다.”
백이건이 실실 웃으면서 계속 백류혼을 꾸짖었다. 백류혼은 말을 듣는 동안 한숨만 계속 내쉬고 있었다.
백이건이 말했다.
“내 검, 이리 내놔라.”
그 말에 표정이 굳은 백류혼이 백연검을 두 손으로 들고 백이건에게 내밀었다.
백이건이 양 손으로 검신을 드러내면서 노망이 난 것처럼 백연검에게 말을 걸었다.
“내 손자가 네 나신을 보는 것보다 기녀의 나신을 더 좋아하니 네 죄가 크다. 쓸모없는 놈….”
탕 소리가 나도록 납검한 백이건이 백류혼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자야.”
항상 류혼아, 라고 부르던 백이건이 거리감이 있게 손자라 부르자 백류혼이 묘한 기분을 느끼며 대꾸했다.
“네.”
“너는 참 운이 좋은 놈이다.”
아까 했던 얘기를 또 꺼내고 있었다. 백류혼은 울적한 표정으로 가만히 조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백이건이 말을 이었다.
“마교에게 패하면 네 놈은 끝이야. 그냥 죽는 것이다. 이서휘에게 패해 뭐 달라진 거라도 있느냐? 젊은 나이에 기연을 잔뜩 얻은 놈인가 보지.”
“네, 그렇습니다.”
“나는 젊을 때 세 번이나 패했고 그때마다 패배의 흔적을 몸에 새긴 터라 아직도 비가 오면 쑤신다. 검왕이라는 별호도 사십이 넘어서야 겨우 얻었어.”
“네, 알고 있습니다.”
“무림에 나가자마자 천하제일이 될 줄 알았느냐?”
“그건 아닙니다만.”
“네 또래 중엔 적수가 없을 것이라 여긴 게야?”
“네.”
아프다던 백이건이 백연검의 검집으로 백류혼의 머리를 내려쳤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백류혼이 앉은 자세에서 머리를 얻어맞았다.
백이건이 호통을 내질렀다.
“이서휘에게 또 져도 네 놈은 살아와서 이렇게 못난 모습을 보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마교에게 지면 네 놈 목숨은 그 자리서 없어지는 게야. 네 놈이 죽으면 백검문도 끝난다는 걸 모르겠느냐?”
“…….”
“네 아비는 그래도 너라도 남기고 죽었지. 너는, 너는… 후사도 없고….”
말을 하던 백이건이 갑자기 쿨럭 대더니 입에서 피를 한 움큼 뱉어냈다.
그때, 쿵쿵쿵 소리와 함께 명영이 달려오더니 백이건에게 하얀 천을 건네고 허리춤에 있던 마른 수건으로 바닥을 닦은 후에 재빠르게 물러났다.
백이건이 피가 잔뜩 묻은 입 주변을 닦으면서 말했다.
“눕겠다.”
그 말에 다시 백류혼이 다가가서 백이건을 자리에 눕혔다. 백류혼의 이마는 백이건에 맞아서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백이건이 누워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정마대전이 일어나면 백검문은 참가하지 말거라. 문도들에게 내 유언이라 일러라. 죄 없는 문도들이 몰살당할까 걱정이 되는구나. 이제 나가라. 쉬어야겠다.”
“네.”
백연검을 다시 조부에게 돌려준 백류혼이 서찰 한 장을 들고 말없이 일어나 예를 취한 다음에 조용히 물러났다.
백류혼이 문을 닫자, 누워 있던 백이건이 명영을 불렀다.
“명영아.”
“네.”
“당분간 아무도 안 만나겠다.”
“알겠습니다.”
문 밖에 서 있던 백류혼이 시뻘건 눈으로 복도를 거닐다가 우르르 몰려가는 문도들을 잠시 피해 바깥으로 빠져 나왔다. 문득 손에 무언가 있어서 바라보니 조부가 넘긴 서찰이었다.
서찰에는 흐느적거리는 필체로 마교의 총본산을 찾았다고 적혀 있었다.
서찰에는 그야말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주로 백이건의 안부를 묻는 것과 검선 자신의 근황이 적혀 있었다.
총본산을 십 년만 일찍 찾았어도 자네와 함께 활약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는 대목이 있었다. 이제 늙었으니 죽기 전에 제자를 찾아보려 한다는 글귀도 있었다.
말미에는 백류혼 자신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네 놈 입에서 손자 자랑은 언제 멈출 것이냐?]
그 글귀를 읽던 백류혼이 저도 모르게 서찰을 구겼다가 가까스로 다시 폈다.
밖으로 나가려던 백류혼이 서찰을 다시 접어 품에 넣고 백화(白華)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백화 연무장은 중진 문도들이 수련을 하는 장소였다.
기합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가 쩌렁쩌렁 하게 들리고, 이어서 오와 열을 맞추고 수련을 하고 있던 문도들이 백류혼을 보자마자 입을 맞춰 외쳤다.
“소문주를 뵙습니다.”
백류혼은 대꾸도 하지 않고 걸어가다가 문도들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놓여 있는 목재 침구에 드러누워 훈련을 하는 문도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비무장에 놓인 침구라 무척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백류혼이 늘 누워 있는 장소라 문도들 역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백류혼이 슬슬 잠을 자겠거니 하고, 문도들은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류혼이 여전히 눈을 뜬 채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저희끼리 눈을 맞추면서 고개를 갸웃하거나 어깨를 으쓱하던 문도들이 평소대로 수련에 임했다.
그렇게 두 시진이나 흘렀다.
문도들이 밥을 먹으러 가고, 일부는 교체되고, 다시 연무장에 모여 잡담을 하다가 수련을 시작할 때까지도 백류혼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한 시진이 흘렀을 때 백학루(白鶴樓)에서 보낸 노복(奴僕) 한 명이 종종 걸음으로 들어와 백류혼을 보며 웃음을 흘리면서 귓속말을 건넸다.
“공자님, 아삼입니다. 오늘 추련(娵蓮)이라고 새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또 가장 먼저 공자님에게 이 소식을……”
백류혼은 노복을 보는 대신에 힐끔거리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문도들의 표정을 일일이 바라보고 있었다.
‘또 출타하시는구나.’
대충 이런 표정들이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백류혼이 문도 한 명을 불렀다.
“정문(定雯)아.”
“네.”
“밖으로 모셔라.”
“네? 아, 네.”
정문이라는 자가 납검을 하고 아삼에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밖으로 모시겠소.”
“예?”
아삼이 끌려가다시피 하여 밖으로 나가자, 백류혼이 다른 문도를 불렀다.
“승태(勝太)야.”
“네.”
문도가 다가오자 백류혼이 서찰을 넘기면서 말했다.
“읽어 본 다음에 총본산에 대한 내용만 요약해서 백도에 전해라. 말미에는 함정일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글귀를 추가하고.”
“알겠습니다만, 백도라 하면 어디 어디를…”
“아니다. 그냥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곳에 다 보내라.”
“알겠습니다.”
“서찰이 좀 구겨졌는데 곱게 펴서 나중에 명영이에게 줘라.”
“알겠습니다.”
잠시 백류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문도들과 백류혼의 눈이 부딪쳤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문도들이 서둘러 고개를 돌리면서 다시 잡담을 이어나가자 백류혼이 일어섰다.
좌중이 고요해졌다.
백류혼이 일반 문도들이 사용하는 장검을 하나 쥐더니 백화 연무장에 가득 찬 문도들 앞에 섰다.
백류혼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잠시 휴식을 취하느라 삼삼오오 흩어져 있던 문도들이 다시 오와 열을 맞추더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로 숨을 죽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류혼의 장검이 바람을 가르더니 검봉을 하늘로 향하게 하면서 좌수를 내밀어 백검문 특유의 기수식을 펼쳤다.
백류혼의 엄지와 검지가 검신을 타고 하늘로 향했다.
어느새 새하얀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백류혼의 움직임에 맞춰 백검문도들이 일제히 기수식을 따라 펼쳤다.
만약 소리에도 색이나 모양이 있다면….
백류혼의 검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검명(劍鳴)은 백설(白雪)에 가까웠다.
지난날의 과오(過誤)와 패배감 위에 새하얀 눈이 차갑게 내려앉고 있었다.
백류혼이 패배감을 떨쳐내고 다시 수련에 돌입했을 무렵에 이서휘는 백류혼과는 전혀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천하제일인이 아직 되지 않았는데 무언가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 느꼈던 것.
이미 내공도 지난 생애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고.
눈을 뜨고 익힌 무공 또한 전생에 비해 위력이 뒤처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심 검제 시절보다 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경험은 고스란히 남아 있고 회귀한 이후 패배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군림맹주 남궁위나 독고세가 가주를 압도하는 무위를 갖추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한 적은 없었으나 생사를 걸고 겨루면 당대의 그 어떤 고수에게도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부족하다.’
그간, 지독한 살기와 악착함으로 버틴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서휘는 연공실에 틀어박혀 암연심법에 집중하는 한 편, 경지를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연공실에 틀어박혀 십여 일이 흐른 후에 문득 든 생각은 단순했다.
‘나보다 더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를 만나 패배를 한다면… 닿지 않는 경지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만 있다면…….’
그리 된다면 활로가 보이지 않을까?
이는 자신을 이겨줄 상대를 찾는 일과 같았다. 또한 그 상대를 찾아서 패배를 해야 했으니, 말의 어폐가 다소 있지만 구패(求敗)라 표현해야 할 것이다.
백류혼이 이서휘에게 패배했던 것을 밑거름 삼아 다시 꿈틀대고 있었다면, 조금 다른 의미에서 이서휘도 지금의 경지를 뚫어내기 위해 패배를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 당대의 어떤 고수가 이서휘를 압도적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까.
남궁위나 독고세가 가주와 겨뤄도 누가 이기든 용호상박의 혈전이 될 게 분명했다.
때문에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결국….
‘스승님과 진금구 선배님 밖에 없겠구나….’
이서휘는 그렇게 두 사람을 떠올렸다.
검왕이 손자에게 건넨 말처럼 패배해도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백도의 검 두 자루….
검선이 유랑 끝에 마교의 총본산을 찾은 것은 무척 뜻밖의 일이었다. 전생에는 포기를 했었으니까. 아니, 독마가가 여전히 건재했을 시기라 총본산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위극신이 총본산에 휘감겨 있던 기관진식을 모두 해제한 상태. 더군다나 이십일가를 총본산으로 불러들이고 있어서 검선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백도 무림에 총본산의 위치가 드러날 수 있는 형국이었다.
마침 검선은 백검문의 검왕에게 서찰을 보내 제자를 찾아봐야겠다고 글을 남긴 상황.
이서휘가 전생에서 검선의 제자가 되었던 시기가 도래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한숨이 나왔다.
‘평생을 천하를 돌아다니셨던 스승을 대체 어디에서 찾는다는 말인가…….’
전생에서는 이서휘마저도 눈을 잃고 방랑하던 시기에 만났고.
그 장소마저도 지금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 장소를 기억해서 지금 찾아간들 이서휘의 회귀로 무림의 판도가 바뀌어버린 지금, 검선과 만날 가능성이 높지 않은 상태였다.
이서휘가 문득 스승이 종종 내뱉던 말을 떠올렸다.
‘오득을 지나 오철에 도달했으나 오료의 벽에 오랫동안 막혔다.’
이제야 그 말이 무엇인지 알아듣게 된 이서휘였다.
오득(悟得)은 깨달아서 얻는 것을 말했고.
오철(悟徹)은 철저하게 깨닫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검선이 말한 오료(悟了)는 그야말로 무(武)를 완전하게 깨닫는 것이라 그 경지가 까마득해 보였다.
지금 이서휘의 상태가 그러했다.
오료에 닿기 전에 막힌 느낌이었다.
아니면 지금 수준에서는 오료가 까마득하게 멀리 있거나.
이서휘가 생각하기엔 남궁위, 독고성도 오료에 막힌 자들로 보이고 있었다.
즉, 같은 선상에 있는 자들이라 위험하게 겨룬들 얻을 게 많지 않았다.
검성에겐 내공만 이어받았을 뿐이지… 직접 가르침을 받진 못했다. 석실의 벽에 새겨놓은 흔적들로 이 경지를 뚫어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게 이서휘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어찌 보면 검왕 백이건이 손자인 백류혼을 꾸짖었던 말과 다름이 없는 고민을 스스로 하고 있는 셈이었다.
며칠이 다시 흐른 어느 날.
이서휘가 늦은 저녁에 연공실에서 나오자 마침 이서휘를 두고 저희끼리 밥을 먹으러 가려던 월야대원들이 움찔거렸다.
도삼이 말했다.
“아, 대주님 식사는요?”
“같이 가자.”
저녁을 먹으러 이동하려던 월야대에 수호전에서 내보낸 전령이 급하게 도착해 이서휘를 찾았다.
“대주님, 백검문에서 급보가 와서 전주님이 회의를 하자십니다.”
“백검문? 공격 당했나?”
“아, 그것은 아닙니다만 전주님이 직접 말씀해주시겠다고.”
“알았다.”
이서휘가 월야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녀오겠소. 식사는 따로 할 테니….”
“바쁘시네.”
“다녀오십시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전령과 함께 수호전으로 이동했다.
‘무슨 일이지?’
이서휘가 도착해 보니 이미 검대 대주들과 쌍각의 수뇌부들이 거의 다 몰려온 상태였다.
수호전주 남궁익현이 대청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다 왔는가?”
“아직 가주님들과 운룡검대주가 안 왔습니다.”
“아, 운룡검대주는 늦을 거 같으니 바로 시작하겠네. 급보가 왔는데 감숙의 무도에서 마교의 총본산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네.”
“……….”
침묵하는 자, 탄성을 지르는 자, 고개를 갸웃하는 자까지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이서휘는 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놀라고 있었다.
‘뭐지? 전생에 이런 일이 없었는데….’
구파와 백도맹, 군림맹이 침공을 당하면서 시작되는 정마대전이 이서휘가 알고 있는 미래였다. 하지만 시기도 한참 다르거니와 이처럼 총본산이 드러났다는 급보가 퍼진 적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서휘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극신이 벌써 마교를 장악했단 말인가……?’
남궁익현의 말이 이어졌다.
“무도에 사산(死山)이라는 곳이 있다는데… 평소에는 안개가 짙고 질병이 돈다는 소문과 말 그대로 죽은 산이라는 풍문 덕분에 사람들이 근처에 가지 않았다 하는군. 지금은 안개가 걷히고 마가로 보이는 자들이 대거 도착하는 한편, 지켜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위용을 자랑하는 요새(要塞)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는군.”
“요새요?”
“그리 적혀 있네. 요새라고….”
남궁익현은 서찰 말미에 적혀 있는 글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함정일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도 있었네.”
“급보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검왕(劍王).”
그 말에 누군가 중얼거렸다.
“백검문주께서… 그리 말하셨다면…. 으음.”
듣고 있던 한신이 말했다.
“감숙이면 거리가 너무 멉니다.”
뒷말이 함축된 듯한… 묘한 말이었다. 좌중의 시선이 한신에게 모이자 남궁익현도 한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생각을 말하게.”
한신도 그간 각원들을 내보내 마교의 거점을 조사하면서 보고를 받는 와중이었다. 그간 백도맹과 군림맹은 정보를 교환하다가 섬서의 몇 곳을 의심하고 있었다.
한신이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무작정 병력을 이끌고 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어서 불가합니다. 일단 섬서 지역에 퍼져있던 각원들에게는 이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하지만 별개로 또 척후(斥候)를 꾸려서 보내야 할 겁니다. 검대 이동은 그 후에 결정을 하시지요.”
한신이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의견을 제시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남궁익현이 대꾸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한 각주가 백도맹, 흑도맹 등의 세력에 연락을 취하고 유 각주, 자네는 척후를 꾸리게. 말 그대로 특작조가 되겠군.”
말을 하던 남궁익현이 힐끗 이서휘를 바라봤다.
두 명의 각주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남궁익현이 말했다.
“서신 말미에도 적혀 있지만, 생각해 보니 이상하군. 감숙이면 특별한 지역이 아니네. 수십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앞으로 계속 숨어 있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 말에 생각에 잠겨 있던 이서휘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어쩌면….”
좌중의 시선이 이서휘에게 모였다.
“마교의 총가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총가?”
“교주를 뒷받침하는 가문을 말하는데… 그간 저희와 싸웠던 마가는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는 느낌이 났습니다. 만약 이번에 총가가 바뀌었다면 마교 수뇌부 전체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지요.”
이서휘가 사실에 근접하게 추측해도 다른 자들은 별다른 위화감이 없었다. 그간 이서휘가 마교와 겨룰 때마다 기이할 정도로 활약이 컸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
남궁익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고가 있을 수 있다 하더니… 어쩌면 자네 말이 맞겠군. 중요한 소식이라 직접 불러서 이야기를 했네. 되도록 외부 임무 파견은 자제하고. 어찌됐든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할 수 있으니 검대는 그 준비도 철저히 하게. 새로 입맹한 자들에겐 이동하는 거 자체가 힘들 테니.”
“알겠습니다.”
검대주들이 대답했다.
남궁익현이 유백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 각주는 척후 관련해서 할 말이 있으면 여기서 전하게.”
유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유백은 이서휘를 바라보다가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최근에 궂은일은 이서휘가 다 도맡아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서휘는 유백이 바라보자 슬쩍 미소를 지었다. 유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척후 조직을 따로 붙일 필요는 없겠습니다. 월야대가 특작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월야대 인원으로는 부족하고. 검대와 쌍각에서 인원을 추려 이서휘 대주에게 넘기겠습니다.”
유백이 이서휘를 보며 말했다.
“이 대주는 명단을 보면서 직접 척후를 뽑게나. 월야대에서 누가 갈지도 자네가 판단하고. 보고는 나한테 직접 하게나.”
“알겠습니다.”
유백이 남궁익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경공과 일정 이상의 무공 실력을 갖춘 자들로 보내야겠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그래야지.”
유백이 불현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우리 가주님들은 여전히 코빼기를 안 비치시는군요.”
최근 군림맹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사마세가가 빠진 이후에는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서휘는 그곳에서 몇 마디 말을 더 듣다가 빠져나와 월야대로 향했다.
☆ ☆ ☆
백도 세력으로 백검문이 보낸 급보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물론 청협문의 단우혁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우혁은 백류혼과는 또 다른 성격이어서 일찌감치 문도들을 휘어잡은 채로 마음과 몸을 함께 단련시키고 있었다.
그런 단우혁이 서찰 한 장을 든 채로 수련에 열중하는 문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총본산이라… 때가 왔구나. 말로만 듣던 정마대전이야….’
단우혁이 외쳤다.
“전할 말이 있다.”
단우혁의 외침에 청협문도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아직 천진난만해 보이는 어린 문도들도 있었고 세상의 풍파를 겪은 중진 문도들도 섞여 있었다.
단우혁은 자신의 성격대로 마도에 맞서는 것은 전혀 두렵지 않았으나 일부 어린 문도들을 보자 그 어느 때보다 묵직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적인 생각은 이내 집어치워버리고 몰려온 문도들에게 속마음과는 약간 다른 말을 내뱉었다.
“이제 청협문의 위명을 무림에 떨칠 시기가 온 모양이다.”
늘 자신만만한 소문주의 말에 문도들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순간, 가장 나이가 어린 문도의 표정을 바라보던 단우혁이 저도 모르게 할 말을 잊은 채로 말을 삼키고 있었다.
☆ ☆ ☆
그리고 이서휘는….
저녁을 먹고 온 월야대를 불러 모아 마주하고 있었다.
단우혁이나 백류혼이 코앞으로 다가온 정마대전을 예감하고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워져 있었다면 이서휘는 조금 달랐다.
이미 다시 출발했을 때부터 늘 느끼고 있었던 압박감이다.
더군다나 동분서주 뛰어다니면서 판을 미리 짜놓았다.
나름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었다.
다만… 대원들의 얼굴을 보니 어색한 웃음이 났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조금 더 강해지게 만들지? 내가 척후를 다녀오는 동안 계기를 마련해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군림맹에 머무른다 해서 별 도움이 되진 않을 터.’
월야대가 이서휘를 바라보는 와중에 한참이나 이서휘는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이서휘가 문득 화지련을 바라봤다.
‘아, 지련이는 이 방법 밖에 없을 거 같은데 입이 안 떨어지는구나.’
이서휘는 아직 성장 가능성이 높은 화지련, 도이, 도삼에게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월야대원에게 마교의 총본산이 모습을 드러냈고, 자신이 척후를 이끌게 될 것이라는 말만 남긴 채 연공실로 들어갔다.
“일단 내일 다시 이야기합시다. 생각 좀 해보고.”
뒤바뀐 운명에 대해 고민을 먼저 한 다음에 대원들을 어떻게 할지 결정할 생각이었다.
물론 이서휘 스스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도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서휘가 연공실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왜 총본산이 이 시국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미래가 바뀌었다. 이서휘의 머리에 가득 찬 것은 대부분 위극신에 대한 생각이었다.
‘손 놓고 당할 놈이 아닌데….’
백도 세력을 총본산 앞으로 끌어들이고 결전을 벌이겠다고?
위극신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회의에 가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총가가 바뀐 것은 분명해 보였다.
총본산이 바깥에 드러난 것도 결국 위극신의 계략이 아닐까.
이서휘로서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것이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라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나…….”
호랑이를 산에서 떠나게 하는 계책.
백도 세력이 거점을 떠나 총본산과 붙는 와중에 위극신이 정예를 이끌고 구파와 백도맹을 초토화시킨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총본산은 마교의 거점이지, 훗날 천마교를 만드는 위극신의 거점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대의 백도 세력에게 마교의 총본산보다 달콤한 유혹은 없을 것이다.
무림사에 길이 남을 위명을 얻을 수 있는 순간이다. 더군다나 수십 년 간 베일에 싸여 있던 장소다.
이서휘의 전생대로 위극신의 천마교가 발호한다면….
마교라는 과거의 잔재쯤이야… 불태워도 그만일 것이다.
‘대비를 해야겠군. 척후는 내가 아니어도 된다.’
이서휘는 생각 끝에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다.
이서휘가 일을 이렇게까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결국에 미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위극신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서휘가 생각을 정리하고 연공실에서 나왔을 때는 주변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늦은 밤.
아직 화지련을 비롯한 월야대원들이 비무장에 서 있었다. 이서휘가 걸어오자 화지련이 말했다.
“대주님?”
“아직 다들 안 잔 거야?”
“네.”
“왜?”
“아까 무슨 할 말이 있으신 거 같아서….”
“아….”
이서휘가 대원들을 바라봤다. 그 중 총본산으로 가든 척후로 가든 지금 상황에서 화지련은 전력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
‘화지련은 잠시 목군자 선배님에게 보내고 싶은데….’
옥의림이 있는 곳이다.
두 사람은 어차피 훗날 여중제일고수를 다투게 된다. 이서휘의 검제 시절에도 두 사람은 늘 호각이었다.
‘일찍 만나면 좋을 텐데, 두 사람에게 모두….’
어찌 보면 가장 좋은 수다.
이서휘와 사패가 일찍 만난 것처럼 옥의림과 화지련이 일찍 만나 서로를 자극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이서휘가 자꾸 머뭇거리자 화지련이 선제공격을 펼쳤다.
“대주님, 술이나 한 잔 사줘요.”
“이 야밤에 술은 왜.”
도삼도 거들었다.
“가시죠, 대주님.”
“이 사람들이 오늘 왜 이러지?”
이서휘가 정천과 도이를 바라봤다. 다들 표정이 무거웠다. 정마대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소식 때문에 그런 것일까?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갑시다. 그럼….”
나이가 가장 어린 화지련이 술을 따르려고 하자, 이서휘가 술병을 낚아채고 자신이 직접 대원들에게 술을 따랐다.
마지막에 화지련의 잔까지 채워준 다음에 물끄러미 바라보자 화지련이 말을 이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척후로 가시는 거예요? 저희는요.”
화지련의 물음에 다들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서휘가 헛기침을 하고 말이 없자 도삼이 답답한지 이서휘를 다그쳤다.
“공자님… 아니, 대주님. 말 좀 하세요. 뭔가 생각을 정리하셨지 않으셨습니까? 뭐 지금까지 공자님, 아 오늘따라 왜 자꾸 공자님이란 말이 나오지? 하여간 정리를 한 번 해주시죠. 따르겠습니다.”
이서휘가 정천, 화지련, 도이, 도삼을 바라봤다.
“그래. 일단…. 한 잔 더 마시자.”
이서휘가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자, 이어서 월야대가 서로를 보며 함께 마셨다.
또르륵… 소리와 함께 다시 이서휘가 잔을 채웠다.
“군림맹에서는 내가 척후를 이끌어주길 바라고 있는데…….”
“네.”
“일단 내일 가서 이야기를 해보겠지만 안 할 생각이야.”
“어째서요.”
“어째서냐고 묻기 전에 다들 내가 하라는 대로 할 거야?”
대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자코 있던 도이가 말했다.
“뭐 대주가 죽으라 하겠어?”
그 말에 침을 한 번 삼킨 이서휘가 정천을 바라봤다. 정천이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다.
“왜 날 보나? 나한테 위험한 걸 시킬 생각이로군?”
“그렇습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정천 형이 척후를 이끌 게 될 겁니다.”
“알겠네. 뭘 조심하면 되겠나? 뭔가 의미가 있을 터인데….”
“아마도 척후에 관련된 모든 것을 신속하게 보고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고, 그 다음은 생존입니다. 따라서 누굴 뽑을 건지도 정천 형에게 맡기겠습니다.”
“알겠네.”
“특작 대주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흠… 고속 승진이로군. 마음에 들어.”
하지만 정천의 말에 웃는 자들이 없었다. 군림맹은 이서휘가 나서줬으면 바랐던 일이다. 위험이 따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잘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그 말에 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게나.”
이서휘가 도이와 도삼을 바라보다가 품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이게 뭡니까?”
하지만 이서휘는 말을 하지 않고 품에 남아 있던 전표를 가득 꺼냈다.
“우와! 이게 뭐야? 이게 대체 얼마야?”
도삼이 전표를 세어보더니 점점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쫓겨나는 건가요? 퇴직금치고는 너무 많은데?”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너희 둘도 고생할 거 같구나.”
“무슨 일입니까?”
“이것은 검림세력일람(劍林勢力一覽)이라는 책이다. 그 돈을 다 써도 좋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검림을 모아라.”
“책으로 어떻게 사람을 모읍니까?”
도삼이 묻자 이서휘가 대꾸했다.
“먼저 노산의 곽서명 선배를 찾아가. 주요 인물은 그 책에 위치와 이름이 다 적혀 있다.”
잠시 정적이 감돌고 이서휘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곽서명 선배가 먼저 나설 것이다. 그 분의 도움으로 세력을 하나하나 찾아서 이끌고 오면 된다. 전서구가 닿는 곳엔 전서구로… 발로 뛰어 갈 수 있는 곳엔 직접 가서… 하오문을 쓰든 편지를 보내든 너희 재량이야.”
도삼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사람들이 왜 마교와 싸웁니까? 암중 세력이에요?”
그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검림주(劍林主)가 마교와 싸우기로 했다고 전해. 장소는 감숙의 무도. 그거면 된다. 검림주에 대한 맹세가 가슴에 남아 있다면 다시 무림에 나서겠지. 내가 일일이 다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너희가 나서는 게 낫겠다.”
도삼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형은 어때?”
도삼이 도이를 바라보자, 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복숭아는 언제 줄 건데?”
그 말에 아무도 웃는 자가 없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질문과도 같았으니.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석실의 문을 여는 법을 이 자리에서 털어놓았다.
“도이는 구화산의 석실에 들어가려 했으니 주변 지형을 다 알게다.”
“알지.”
“벼랑에 있던 큰 소나무를 기억하느냐?”
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구화산의 산세가 다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움푹 파인 바위가 하나 있을 게다. 내공을 주입해 밀어 넣으면 열린다.”
“그렇게 간단했어?”
도이가 화들짝 놀라자 이서휘가 주의를 줬다.
“선배가 만들어 놓은 장소이니 함부로 여기면 안 된다. 본래 목군자 선배에게 묻고 가는 것이 예의이나…. 됐다. 나중에 내가 얘기를 전하마. 대신 둘은 일을 마치고 가겠다고 약속해라.”
“알겠소.”
이서휘가 도이와 도삼을 바라보다가 백야검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가져가라. 백야검은 검림주의 증표. 세력을 모으는데 필요할 거다.”
도이는 거절하는 법을 모르는 남자.
대뜸 손을 내밀어 백야검을 붙잡았다. 그런데 도삼의 손이 동시에 떨어졌다.
“이걸 왜 형이 들고 다니겠다는 거야? 양보할 수 없어.”
그 말에 도이가 무척 오랜만에 입꼬리를 올렸다.
“동생아, 쳐 맞고 싶으냐?”
“하… 승부를 한 번 낼 때가 됐지.”
이서휘가 두 사람의 말을 잘랐다.
“그건 두 사람이 알아서 하고. 일단 도이가 갖고 있어라.”
“거 봐라.”
도이가 도삼을 노려보더니 백야검을 낚아채며 말했다.
“이제 내가 검림주다.”
저 뻔뻔한 소리에 결국 이서휘와 월야대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천이 이서휘에게 말했다.
“괜찮겠나? 그간 쌍검을 주로 사용했는데….”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화지련….”
“네.”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화지련에게 모이자 이서휘가 말했다.
“너도 할 일이 있다.”
“네.”
이서휘가 실로 무서운 소리를 내뱉었다.
“네 임무는 은거한 선배 고수를 정마대전에 어떻게든 참여시키는 것이야. 실패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이 임무를 맡아라.”
이서휘는 모든 것을 걸 생각이었다.
누구는 은거를 하겠다고….
누구는 무림사에 관심이 없다고 빠지고….
그들 생각일 뿐이다.
이서휘는 생각이 달랐다.
‘백도 전체가 일어나게 해서 피해를 최소화시킨다.’
목군자 진금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서휘 자신이 나서서 되는 일이었다면 진작 진금구가 군림맹 주변으로 왔을 터.
이서휘가 말했다.
“곡양에 목군자 진금구 선배라는 사람이 은거하고 있다. 여 제자를 한 명 둔 분인데… 내가 일전에 겨뤄보니 화지련 너와 무공 수위가 비슷하다.”
“화 소저와 비슷하다고요?”
검대대원들을 연달아 패배시켰을 정도로 성장을 하고 있는 화지련이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화지련을 바라봤다.
‘…결국 이게 화지련에게도 가장 안전한 일이다.’
하지만 속마음과 다르게 말이 이어졌다.
“진금구 선배가 무림에 나설 때까지 넌 거기에 머물러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재량껏 설득해. 특히…….”
“네.”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전해.”
이서휘의 말에 좌중이 고요해졌다. 정마대전이 벌어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터. 하지만 이서휘가 죽을 수 있다고? 에이, 설마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하지만 월야대원들이 바라보는 이서휘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이들이 과연 어찌 알겠는가.
이서휘가 정마대전을 치르다 죽었던 전생이 있었음을 말이다. 어찌 보면 진금구에게 전하는 일종의 협박이나 다름이 없었으나, 화지련은 나름 이서휘의 뜻을 이해한 터라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알겠어요.”
이서휘가 말을 마치자, 정천이 다시 핵심을 짚었다.
“자, 그럼 우리는 자네의 명령을 앞으로 수행할 것이네. 한데, 자네는 무엇을 할 생각인가.”
이서휘가 말했다.
“정마대전이 벌어지면 군림맹뿐만이 아니라 백도 세력 전체가 싸움에 임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군림맹에 발이 묶이지 않을 겁니다. 때로는 백도맹에 있을 수도 있고, 혼자 싸울 수도 있고, 가능하다면 흑도맹과도 함께 힘을 합칠 겁니다.”
“전장은 감숙의 총본산이 아니었나? 어찌 일이 그렇게 돌아가지?”
“맞습니다. 전장은 총본산입니다. 하지만 조호이산지계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백도맹과 군림맹의 고수들이 즐비한 상황… 다른 사람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전 전황을 더 살피면서 준비하겠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에 의아한 빛이 감돌았다.
어찌 보면 순전히 이서휘의 추측에 의존한 판단인지라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럴 땐 오히려 흔한 말이 더 필요하다.
이서휘가 평소와 다르게 존댓말로 대원들에게 말했다.
“함께 지낸 지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라는 사람에 대해 신뢰가 조금 생겼다면 믿고 지켜보십시오.”
정천이 대꾸했다.
“어찌 우리가 이 대주를 안 믿겠나? 하지만 다들 총본산으로 쳐들어가겠다는 판국에 이 대주가 후방에 머물면… 군림맹이 이해를 하겠는가?”
이서휘가 설명을 덧붙였다.
“전장이 총본산만은 아닐 겁니다. 그런 예감이 드네요. 물론 총본산에서도 혈전이 벌어질 겁니다. 하지만 어디가 됐든 가장 위험한 곳엔 제가 있을 겁니다. 지금은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한 번 믿어 보십시오. 그리고 별 일이 없을 경우엔 제가 무림의 그 누구보다 빠르게 총본산으로 향할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이서휘가 양손으로 잔을 들면서 불쑥 말했다.
“자, 그럼 다들 무운(武運)을 빕니다….”
월야대가 이서휘를 바라보며 한마디씩 대꾸했다.
“무운(武運)을 빌겠네….”
“살아서 봅시다….”
도이의 말에 도삼이 버럭 화를 냈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말이 그래?”
“아, 그러니까. 왜 성질이야.”
그제야 화지련은 자신이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간다는 것을 깨닫고 풀이 죽은 채로 말했다.
“다들 조심하세요. 다치지 마시고.”
다섯 사람이 두 손으로 치켜든 잔을 들이키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들 진심으로 무사했으면 좋겠다고….
다시 이곳에 모여 별 일 없이 서로를 구박하며 술을 마시게 될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감숙의 총본산.
원형 탁자에 사람들이 제 멋대로 앉아 있었다.
사왕전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교주 자리를 정하겠다고 몰려오는 이십일가의 고수들을 별다른 감흥 없이 바라보고 있던 위극신이 모여 있는 수뇌부들에게 말을 툭 던졌다.
“다 모일 때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잠시 살생부나 작성합시다.”
위극명, 마제들, 간천, 좌우사자, 위극단, 일월마가 장로들까지…
일제히 위극신을 바라봤다.
‘왜 지금 그걸 정하지? 교주 쟁투가 끝난 것도 아닌데….’
이런 눈빛이었다.
위극명이 홀로 대꾸했다.
“형님, 갑자기 살생부는 왜요?”
위극신은 동생의 말을 무시하고, 좌사자에게 명부를 꺼내라 일렀다.
대체 언제부터 작성되고 있던 것일까.
종이를 여러 번 교체한 것 같은 서책 한 권이 탁자에 놓였다. 위극신은 불필요한 설명을 줄이고 본론을 꺼냈다.
“펼쳐라.”
좌사자가 서책을 펼치니 맨 앞에 가장 먼저 검성의 용모파기가 드러났다. 그 밑에는 검성이 머물고 있는 위치와 별호, 특징 같은 것이 서술되어 있었다.
검성의 얼굴을 모르고 있던 자들이 저도 모르게 다가와 서책을 구경했다.
사람들이 관심을 표하자 위극신이 말했다.
“기억하시오. 여러분들이 죽여야 할 자들이니….”
듣고 있던 한빙마제(寒氷魔帝)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러지. 진행하게.”
또다시 한빙마제가 위극신에게 힘을 실었다. 별 것 아니었지만 마제들끼리 미묘하게 뜻이 어긋나고 있었다. 그 중 한빙마제는 노골적으로 위극신에게 기울어진 상태였다.
위극신이 말했다.
“검성은 죽었으니 파기해라.”
좌사자가 검성의 용모파기 부분을 뜯어내더니 손가락을 몇 번 문질렀다. 좌사자의 내공에 종이가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좌사자가 다음 장을 펼쳤다.
사람들에게 낯선 인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용모파기마저 명확하지 않아 어설픈 선으로 대략의 외모가 그려져 있었다.
그 밑에 검선(劍仙)이라 적혀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위극신이 말했다.
“검선, 일 순위. 다음…”
위극신의 말에 간천이 대꾸했다.
“용모파기가 엉망이군. 특징은? 머물고 있는 곳은?”
위극신이 말했다.
“거주지 불명, 용모 불명, 생사는 모르겠으나… 칠흑색의 장검 한 자루.”
“흠, 칠흑색의 장검이라… 그 정도면 충분해. 다음은?”
좌사자가 장을 넘기자, 백발의 노인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좌사자가 말했다.
“검왕(劍王), 백이건. 어쩌시겠습니까?”
좌사자가 위극신을 바라보자, 위극신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외해라. 폐병에 걸린 늙은 호랑이가 무얼 할 수 있겠느냐?”
“손자가 있습니다. 백류혼이라고….”
“애송이는 나중에 죽여도 돼. 다음.”
일월마가 이외의 사람들은 위극신이 가진 정보망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좌사자가 다음 장을 펼치자마자, 위극신이 말했다.
“맹주들은 물론 최우선으로 처리한다. 하지만 일단 저 자들은 총본산 쪽으로 오게 둬라. 넘기고 다음….”
위극신의 말에 백도맹주 범우, 군림맹주 남궁위의 얼굴이 지나갔다.
다음에 드러난 얼굴은 흑도맹주 맹서웅(孟誓熊).
침묵이 잠시 흐르고, 위극신이 질문을 던졌다.
“흑도맹주는 어째야겠소?”
이런저런 의견이 오갔다.
백도가 움직여도 방관할 것이다. 그러니 나중에 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자 위극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외하시오.”
회의가 어찌 이렇게 됐을까. 어느새 다른 자들은 의견을 말하고 위극신이 수락하거나 거절하는 형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혈륜마제와 탈명마제는 그 작태를 묵묵부답(黙黙不答)으로 지켜보고 있었으나 위극신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다음엔 구파의 장문인들이 등장했으나 일부는 좌사자가 알아서 말도 없이 뜯어냈다. 그러자 간천이 물었다.
“어찌 되었나?”
“일부는 이미 죽였습니다.”
좌사자가 위극신을 보며 말했다.
“곤륜과 화산, 무당과 점창은 어찌할까요?”
“넣어야지.”
위극신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기억하시오. 여러분들이 죽여야 할 자들이오.”
그런 식으로 백도 세력의 고수들이 연달아 나왔는데 위극신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역시 제외한다.”
“어째서요?”
“욕심이 많은 자는 분란을 일으킬 것이다. 제외.”
“이 자는요?”
“방관자다. 제외. 그 다음도 넘겨라. 기회만 엿보는 여우 같은 놈이야. 이리 줘봐라.”
위극신이 서책을 받아들더니 대다수의 용모파기를 북북 찢어버렸다.
“살려놓는 게 이득인 자들은 바로 이런 놈들을 말하는 것이오. 기회를 엿보거나, 탐욕이 많거나, 수수방관하는 자들은 전혀 죽일 필요가 없소. 오래오래 살려둬야지. 마지막에 죽이겠소. 비참하고 참혹하게.”
위극신의 손에서 열 명의 얼굴이 지나갔을 때 새로 집어넣은 종이에 다른 자들과 분위기가 확연하게 다른 젊은 사내의 용모파기가 드러났다.
위극신이 미소를 짓더니 젊은 사내의 용모파기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살생부에 오른 사람 중에 가장 젊어 보이는군.”
“그렇습니다.”
좌중의 시선이 용모파기로 향했다.
그곳엔 다른 용모파기보다 훨씬 더 상세한 묘사로 이서휘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위극신이 말했다.
“젊은 영웅은… 일찌감치 죽이는 게 낫지. 다음….”
위극신의 말에 간천도 함께 웃었다.
“이서휘라… 본 적이 있지. 저놈을 처리할 땐 나도 함께 가겠네.”
“좋을 대로 하십시오.”
위극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좌사자가 이서휘의 얼굴을 넘겼다.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가 수뇌부들을 향해 보고 했다.
“장로 한 명이 오셔서 언제 진행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말에 위극신이 바깥을 힐끗 보면서 대꾸했다.
“전부 상계(上界)의 객석으로 모셔라. 곧 가겠다.”
“알겠습니다.”
☆ ☆ ☆
위극신은 이십일가를 삼계륜(三界侖)이라 불리는 원형 비무장에 데려다 놓은 상태였다.
그간 마교 교주가 생사투의 방식으로 결정될 때 종종 이용되던 장소였다.
삼계륜의 최상층인 상계(上界)에는 관전하는 자들이 자리를 잡는다.
생사투가 시작될 때까지 상계에 머무르는 자들은 교주 쟁투에 참여할 자격이 사라진다.
교주 쟁투에 참여할 자들은 모두 하계(下界)로 내려간다.
거기서 죽은 자들은 사계(死界)로 밀어 넣는다.
사계는 삼계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끝을 알 수 없는 죽음의 구덩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교주 자리를 두고 경쟁하다가 패배한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삼계륜은 그런 곳이었다.
하계의 넓이만 해도 천 명 정도의 무인이 사열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일단 하계에 발을 디디면 다시 상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단 한 명이 남을 때까지….
회의를 마치고 수뇌부들과 함께 삼계륜에 도착한 위극신은 상계는 쳐다보지도 않고 중앙에서 솟구쳐 하계에 내려섰다.
위극신보다 먼저 하계에 머무르고 있던 자는 단 한 명, 검마가 있었다.
위극신은 상계에 자리를 잡은 마가의 수뇌부들을 올려다봤다.
좌중이 고요해지자, 위극신이 말했다.
“위극신이외다.”
말과 함께 위극신이 하계를 천천히 거닐었다. 모인 자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할 것처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전해 들은 마교는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지.”
무슨 소리일까.
위극신은 상계에 있는 자들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강자존에는 규칙이 없소. 참가 자격도 없소. 내려와서, 살아남으면 되는 것이오. 이대로 검마와 내가 교주 자리를 정해도 되겠소? 흥이 떨어지는군. 다들 구경하지 말고 내려오시오.”
위극신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상계에 앉아 있는 자들을 노려봤다.
“차륜전이 될 것이라 생각했소? 아니오. 백도들이 벌이는 것처럼 비무전이 될 줄 알았소? 아니오. 교주가 되고 싶은 자는 모두 내려오시오. 그간 품었던 야망을 이곳에서 드러내시오. 저 쪽을 보시오.”
위극신이 가리키는 곳에 길쭉한 모양의 모래시계가 매달려 있었다. 위극신이 딱 소리를 내자 그그극 소리와 함께 모래시계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위아래를 뒤집으면서 쏴아아아 소리와 함께 모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 떨어지기까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위극신이 말했다.
“모래가 다 떨어진 이후에 하계로 내려서는 자들은 이십일가의 협공을 받을 것이오.”
“흥.”
누군가의 짤막한 코웃음이 들리고. 동시에 두 명의 중년인이 하계로 내려섰다.
위극신이 한 중년인을 알아보고 말을 건넸다.
“야율 선배, 오랜만이외다.”
“어렸을 때 봤는데 아직 기억하는구나.”
“물론이오.”
다른 중년인은 위극신이 모르는 자였는데 이름을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중년인은 스스로 자신을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소혼마가(燒魂魔家)의 가주, 한지량이라 하오.”
위극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닐었다.
“청해(靑海)의 소혼마가셨군. 한데 고작 네 명이오? 기가 차는군. 이렇게 겁쟁이들이 많을 줄 알았다면 제월헌 교주처럼 그냥 총본산에 틀어박혀 일월마가가 전권을 휘두르는 게 나았소. 그대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소? 당신들 표정을 서로 쳐다보시오. 복종하기는 싫고, 그렇다고 본인이 나서기엔 두렵고. 쓰레기들 천지야. 그나마 제월헌 교주가 안목이 좋았소. 여기에 얼마 전에 백도를 치다가 죽은 십마가의 가주들이 있었다면 기회라 여기고 모두 나섰을 것이오. 당신들의 행태를 보아하니 그런 생각이 드는군.”
“일월, 듣던 것보다 말이 참 많군.”
짐승의 가죽을 벗겨 만든 것 같은 옷을 뒤집어쓴 거한이 하계로 내려서자 쾅 소리와 함께 하계의 바닥이 흔들렸다.
위극신이 양 팔을 벌리며 내려선 자를 환대했다.
“어서 오시오, 사자맹주라 들었소만.”
“말투가 참 가관이로구나. 네 아비가 널 데려왔을 땐 젖먹이였다는 사실을 아느냐?”
“젖먹이가 어찌 기억하겠소.”
위극신이 동여사자맹주를 무시하고 상계를 바라보며 하대를 했다.
“이게 끝인가? 이 쓰레기 새끼들.”
“뭐라고!”
“저런 개잡놈의 새끼가!”
“주둥이를 찢어놔야겠구나.”
상계에 있던 마가의 장로들이 욕설을 내뱉자, 검마가 킬킬대며 웃었다.
“말들이 많아. 자신 있으면 내려오라고. 기다리기도 지루해. 그냥 시작하지, 일월.”
“아니지. 이 쓰레기들에게 한 마디를 더 해야겠다.”
위극신이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결과가 어찌 되든 너희는 이제 여기에서 살아남은 자의 부하다. 하대를 하든 욕을 하든 너희는 복종만이 남은 개가 되는 것이야.”
“위극신, 이 개새끼가.”
콰아아아아아앙!
앉아 있던 자리를 박살내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개의 신형이 하계에 내려섰다.
다름 아닌 혈륜마제와 탈명마제였다.
마제 두 명이 동시에 등장하자, 위극신이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들께선 뭐 이렇게 늦게 오셨소. 기왕 오실 거면 빨리 모범을 보이셨어야지.”
그 말에 탈명마제가 서늘하게 웃었다.
“네 놈 하는 꼴이 재미있어서 말이지.”
“영광이구려.”
혈륜마제가 거대한 혈고륜을 꺼내면서 상계에 머무르고 있는 한빙마제에게 말했다.
“한빙마제.”
“말하게.”
“미안하네.”
“아닐세. 예상한 일이네.”
“누가 되든 잘 보좌해주게.”
“걱정 마시게나.”
두 명의 마제까지 등장하자, 이제 더 이상 내려올 자가 없어 보였다.
위극신이 말했다.
“이제 하계를 피로 물들이면 되겠소?”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탈명마제였다. 탈명마제가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다들 위극신은 건드리지 말게. 나 혼자 죽여야겠으니.”
“음?”
탈명마제의 말에 위극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 그러셨소? 여기 정신을 못 차린 선배가 있었군. 당신이 나를 치는 동안에 다른 자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소?”
위극신의 말에 탈명마제가 주변을 둘러봤다.
위극신의 말 그대로였다.
강자존은 한 명이 남는 것이다. 탈명마제가 위극신과 싸우는 동안에 다른 자들이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제야 이 강자존의 의미를 깨달은 참가자들이 저도 모르게 모래시계를 바라봤다. 투두둑 소리와 함께 모래시계가 어느새 다시 아래로 가득 차오른 상태였다.
검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킬킬킬. 시작하지.”
검마, 탈명마제, 혈륜마제, 동여사자맹주, 야율제, 한지량, 그리고 위극신.
어느새 하계에 모인 자들은 저마다 웃음을 짓고 있었다. 결국 이런 날을 위해 마도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게 아닐 정도로 상계에서 구경하는 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색다른 감회에 젖어들고 있었다.
위극신도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미 생과 사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
어떤 자는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보람을 느꼈고, 어떤 자는 누구를 먼저 죽일까 고민하느라 즐거워했고, 어떤 자는 이런 자리라면 후회 없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위극신이 이들의 감상을 대신 말하고 있었다.
“살다 보니 이렇게 재미있는 날이 오는구려.”
위극신이 하계에 모인 자들에게 정중하게 두 손을 맞잡으며 예를 올렸다.
“저 사계에 안식이 있기를 바라겠소.”
위극신의 선전포고에 하계에 머물고 있는 자들의 몸에서 저마다 기파가 쏟아져 나왔다. 죽음의 향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생사투가 벌어지는 삼계륜(三界侖)은 특이한 장소다.
상계에서 누가 물을 흘리면, 결국에는 하계 중앙에 위치한 구멍으로 빠져 사계에 떨어진다.
소용돌이처럼 경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구멍이 났으니 물이 아니더라도 사람도 빠지고 때때로 마가에서조차 금지한 병기나 실험에 실패한 강시의 일종인 마령시(魔靈屍) 같은 것들도 집어넣는다.
문제는 무엇이 떨어지든가에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깊으면 그런 것일까.
누군가는 지옥의 입구라 불렀다. 그 입구를 지척에 두고 겨루고 있었으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위극신은 애초에 자신의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이 자들을 다 죽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시작은 미약했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지옥의 입구를 의식한 것처럼 사람들이 멀찍이 물러났다.
원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결국 선제공격에 나선 것은 탈명마제였다.
그간 위극신이 총본산에 들어와 했던 짓을 지켜보고 참고 또 참았던 탈명마제다.
위극신은 탈명마제가 다가오자 미끄러지는 것처럼 물러났다. 어느새 맞붙은 두 사람은 하계의 가장 외곽에서 장법을 주고받으면서 원을 그렸다.
객석에 있던 누군가가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누군가는 망설였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아, 내려 갈 것을… 아쉽구나.’
누군가를 두려움 때문에 내려가지 못했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위극신과 탈명마제가 붙고.
검마와 혈륜마제가 붙었다.
그리고 북쪽에서 온 동여사자맹주와 야율제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합공으로 소혼마가(燒魂魔家)의 가주인 한지량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한지량이 두 사람의 합공을 받아 넘기며 욕을 삼켰다.
‘빌어먹을 북방의 벌레 새끼들이…….’
한지량은 애초에 호랑이 굴에 뛰어든 늑대 정도 밖에 안 되는 인물이었다. 청해 인근에서는 맞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무위를 자랑했으나 이곳은 청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상대로 사십여 합을 버텼으니 나름 선전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슬슬 몸이 뜨거워진 두 명의 호랑이가 작정을 하고 합공을 펼치니, 얼마 버티지 못한 한지량이 야율제의 일장을 얻어맞고 피를 토했다.
“크윽….”
그 순간부터, 생사투의 본질적인 흐름이 이어졌다.
소혼마가의 좌우사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야율제가 한지량의 팔을 끊어내고, 동여사자맹주의 일권(一拳)에 한지량의 복부가 뚫렸다.
정말 우리 가주님이 가장 먼저 죽는 것일까?
좌우사자들의 사고가 정지된 것처럼 멈췄을 때….
야율제는 한지량의 뒷덜미를 잡더니 멀리 떨어진 지옥의 구덩이로 던져 버렸다.
이어지는 것은 비명이 아니라 정적이었다.
한지량이 가장 먼저 사계로 떨어졌다.
그런 후에 야율제와 동여사자맹주는 서로 싸우지 않고 팔짱을 낀 채로 머물러 있었다.
이게 실책이었다.
합공으로 한 사람을 죽이고 구덩이에 빠뜨린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팔짱을 낀 채로 방관자처럼 서 있자, 멀리서 탈명마제와 겨루던 위극신이 웃음을 흘리면서 미끄러지듯이 도망을 쳤다.
“후후후후…….”
탈명마제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가 위극신이 흘리는 웃음의 의미를 깨닫고 추적을 멈추고 느닷없이 우뚝 서 있었다.
혈륜마제는 마침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는 검마를 후려쳤다.
검마의 신형이 일직선으로 튕겨 나가 외벽에 대자로 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앙!
하지만 검마는 벽에 부딪치자마자 미끄러져 내려오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킬킬킬……아, 이것 참 흥미롭구나….”
검마, 위극신, 탈명마제, 혈륜마제가… 동작을 멈추고 겨루지 않고 있는 야율제와 동여사자맹주를 바라봤다.
‘둘이 약조를 했다 말이지?’
위극신의 행동이 가관이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공격하던 탈명마제의 옆을 그대로 스쳐 지나가면서 웃음을 흘렸다.
검마도 마찬가지….
자신을 날려버렸던 혈륜마제를 지나쳐서 위극신과 함께 동여사자맹주와 야율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에 혈륜마제와 탈명마제가 눈빛을 교환하자마자 피식 웃었다.
혈륜마제가 말했다.
“어쨌든 후회 없네.”
“마찬가지야. 내려오길 잘했어. 너무 무료하게 살았던 것 같네.”
“그러게 말이야. 진작 이렇게 살았어야 했는데 말이지.”
두 사람이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담을 나누면서 위극신과 검마를 따라서 걸어가더니 야율제와 동여사자맹주를 포위했다.
검마, 위극신, 혈륜마제, 탈명마제는 그 순간 뜻을 모았다.
‘야율제와 동여사자맹주를 먼저 죽인다.’
야율제와 동여사자맹주가 합공을 펼쳐서 한지량을 죽인 이후에 공격을 멈춘 순간에 이 일은 결정되었다.
물론 그 뜻을 처음 발의한 사람은 위극신이었다.
네 사람이 갑자기 싸우던 것을 멈추고 몰려들자 야율제가 이를 빠드득 갈면서 말했다.
“뭐 하자는 것인가 지금?”
그 말에 위극신이 웃고… 이어서 혈륜마제, 탈명마제, 검마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검마가 달려들면서 말했다.
“뭘 물어봐 알면서… 하하하…”
혈륜마제의 혈고륜이 바람을 일으키면서 날아들고, 스슥 하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감춘 탈명마제가 동여사자맹주의 등에 나타나서 쌍장을 내질렀다.
야율제는 일단 피하겠다는 생각으로 공중에 훌쩍 솟구쳤다가, 느닷없이 등장한 위극신과 공중에서 눈을 마주쳤다.
‘어?’
위극신의 눈이 청색과 적색으로 각기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일장을 부딪치는 순간, 생사투가 시작된 이후로 가장 큰 굉음이 공중에서 터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야율제는 위극신의 일장과 부딪치는 순간…….
기이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와중에 어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궁금한 것을 어쩌겠는가.
야율제가 위극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힘을 숨기고 있었구나.’
야율제가 신형을 돌려 땅에 내려서자마자 동여사자맹주를 돕기 위해 그리고 위극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경공을 시전하는 순간 등 뒤에서 혈고륜이 날아왔다.
그때 야율제의 장력에 의해 공중으로 한참이나 솟구쳤던 위극신이 다시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물론 야율제의 등 뒤에서 날아오고 있는 혈고륜의 위치도 파악한 상황.
야율제가 혈고륜을 피하겠다고 몸을 솟구치는 순간…….
공중에 솟아 있던 위극신의 쌍장이 역태극을 그렸다.
위극신은 여전히 힘을 아꼈다. 역태극으로 내뱉은 장력은 뒤틀린 바람이 되어 날아가 야율제의 몸을 약간 눌렀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거대한 혈고륜이 야율제의 발목을 끊고 지나갔다.
“크악!”
이게 끝이면 좋으련만….
검마가 터트리는 긴 웃음소리와 함께 마검이 야율제의 몸통을 가르고 지나갔다.
동여사자맹주는 어찌 됐을까?
그야말로 강자였다.
탈명마제와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위극신, 검마, 혈륜마제가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잔인한 장면이다.
굳이 피가 튀기지 않아도 힘을 가진 자들이 한 사람을 짓밟는다는 것은 보기 안쓰러운 일이었다.
혈륜마제의 혈고륜이 빛을 머금은 채로 궤적을 그리고.
검마가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웃음을 흘리면서 달려들어서 동여사자맹주를 붙잡았다.
위극신은 장력으로 동여사자맹주의 움직임을 뒤틀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탈명마제가 마무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무척 빠르게 다가왔다.
탈명마제의 손끝이 동여사자맹주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자 핏물이 튀었다.
위극신은 가장 먼저 출수를 멈춘 다음에 그 순간에도 남아 있는 세 사람의 무공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었다.
동여사자맹주가 저항을 하지 못하는 순간에 검마가 마검을 박아 넣더니 검명과 함께 동여사자맹주를 정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깜짝 놀란 탈명마제가 일장을 내질러 검마를 날려 버리고, 혈륜마제는 혈고륜을 휘둘러 동여사자맹주의 목을 날려 버렸다.
검마가 우당탕탕 소리를 내면서 바닥을 굴렀다.
정리는 혈륜마제의 몫이었다.
눈에 거슬린다고 생각했는지 동여사자맹주와 야율제의 시체를 구덩이로 던져 버렸다.
남은 자는 네 명.
검마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군.”
그 말에 위극신이 대꾸했다.
“그러게 말이야.”
위극신과 검마가 대화를 나누자, 그 사이 혈륜마제와 탈명마제가 눈빛을 교환했다가 한마디씩 내뱉었다.
“네 놈 둘도 연합할 생각이었구나.”
“혈륜, 함께 저 둘을 죽이는 게 낫겠네.”
검마가 하품을 하면서 대꾸했다.
“뭔 개소리야? 연합이니 그런 건 모르겠고. 상황을 보라고. 마제 늙은이 두 명과 마존 두 명. 그림이 잘 나오지 않나?”
위극신이 검마에게 걸어가면서 마제들에게 말했다.
“오시오.”
위극신과 검마는 제월헌을 치면서 서로의 무공을 잠시나마 엿봤던 사이다. 반면에 마제 둘은 그간 합공을 했던 순간이 없었다.
위극신은 검마가 살아남은 네 사람 중에서 가장 공력이 떨어지지만 마공에 의해 도검불침의 신체를 얻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검마도 위극신이 순식간에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장력을 펼쳐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검마가 붙잡으면, 위극신이 칠 생각이었다.
검마가 막아내는 순간 위극신이 달려들 생각이었다.
위극신은 검마가 깨닫기 전부터 자신의 역할이 창이고, 검마가 방패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마제들도 그 어느 곳에 있었더라도.
한 지역의 패자가 될 수 있는 강자들이었다. 제월헌 교주에게 눌려 지내느라 빛을 보지 못했을 뿐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도 검마와 위극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말을 나누지 않아도 깨닫고 있었다.
검마는 지옥의 구덩이에 넣으면 된다.
이미 검마가 도검불침의 신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도검불침의 비밀은 다름 아닌 마검과 연계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방법은 간단했다.
마검을 빼앗은 다음에 구덩이에 넣는 것도 방법이었다.
그 순간에 위극신은 마제들이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눈치를 채고 검마에게 경고했다.
“검이나 뺏기지 말아라.”
“일월, 자네 등이나 조심해. 내 손에 검이 없으면 자네 등에 꽂혀 있는 거니까.”
두 사람이 진담을 하면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마제들이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 ☆ ☆
위극신이 교주 쟁투를 시작하고 있을 무렵…….
이서휘는 군림맹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이틀밤낮에 걸쳐 한줄기 질풍이 된 것처럼 빠르게 이동해 어딘가에 도착한 상태였다.
이서휘는 도착하자마자 속도를 줄인 다음에 어두운 길목을 지나고, 어두운 숲 속을 지나고, 어두운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오기 전에 대원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이서휘다.
정천은 선발대 격인 척후로.
도이와 도삼은 노산의 곽서명에게.
화지련은 목금자 진금구에게.
그리고 질풍검대주 장시우와 그 어느 때보다 비애감을 느끼면서 어색한 대화로 작별을 나눴다.
그런 그가 향한 곳은 과연 어디였을까.
경지를 뚫어낼 시간도 없었고.
검선을 찾을 수도 없었던 와중에….
패배를 갈망하던 이서휘가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사류곡이었다.
사류곡.
죽음이 흐르는 계곡이다.
어쩌면 지난 생애에는 누군가에게 멸문 당했던 사류곡의 살수들과 마주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눈을 감은 채로 왔던 곳이라.
풍경이 낯설었다.
하지만 전생에 자신이 왜 이곳을 최후의 장소로 생각했는지 이제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어둡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
음기가 충만한 곳….
어둠과 그 어둠에 묻힌 그림자가 교차하는 곳이다.
다행히 이서휘의 발걸음은 저절로 사류곡의 사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구패(求敗).
패배를 갈망하는 것.
패배를 경험하는 것.
굳이 다른 사람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패배해 죽었던 장소.
패배했던 자신을 찾아가는 것보다 구패와 어울리는 행동이 과연 있을까.
이서휘는 그렇게 칠흑검제를 찾아갔다.
위극신에게 당했던 불쌍한 사나이…
사천왕과 그의 수하들에게 대부분의 힘을 소진한 상태에서 위극신의 계략에 말렸던 칠흑검제….
두 눈이 먼 채로 악착같이 살아가던 남자….
어둠에 휩싸여 점점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약한 남자.
이서휘가 패배했던 자신을 찾아갔다.
아수라의 사당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서휘는 저절로 걸음이 멈췄다.
비는 내리지 않았건만….
어느새 그날의 기억처럼 세찬 비가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아직 사당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건만, 어디선가 먼지 냄새가 풀풀 피어나고 있었다.
손에 쥔 검은 칠흑검에서 구성검으로 바뀌어 있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키고 싶은 자들이 많아졌다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칠흑검제와 이서휘는 이제 다른 사람이었다.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이서휘가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 자신의 내부를, 자신의 인생을 서늘하게 관조했던 존재를 올려다봤다.
이서휘가 말을 속으로 삼켰다.
‘아수라(阿修羅)….’
그곳에 아수라의 거대한 석상이 두 눈을 부릅뜨고 이서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아수라와 마주했다.
이해의 영역과 실존의 영역을 넘어선 존재와 마주한 것이다. 이서휘는 저 아수라가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냈던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아수라는 신(神)인가?
아니면 다른 곳에 머물고 있는 신이 아수라를 통해 손을 한 번 내민 것일까.
모를 일이었다.
이서휘가 아수라를 바라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아수라가 세 개의 머리를 가졌다고 했다. 팔은 여섯 개라 했다. 하지만 이서휘가 바라보는 아수라 석상은 소문과 달랐다.
여섯 개를 합친 것보다 더 두꺼운 양팔에 근육이 새겨져 있었고, 두 눈엔 형형한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누가 만들었든 간에…
아수라 석상은 궁극에 다다른 무인(武人)을 본떠서 만든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석상에 휘감긴 위압감의 정체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머리카락과 수염, 그리고 몸에 잔뜩 난 터럭은 하늘로 치솟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절정의 고수가 기파를 내보내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설마 실존 인물을 묘사한 것이란 말인가.’
이서휘가 고즈넉한 사당을 둘러봐도 아수라에 대한 설명이나 내력을 찾을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이서휘는 아수라의 석상 앞에서 무릎을 꿇은 다음에 구성검을 조용히 발 옆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이었다.
이서휘가 검을 내려놓자마자, 아수라 석상의 전신에 기이한 기운이 한 차례 휘감기는 것 같은 분위기가 서렸다.
어디선가 한기(寒氣)가 몰려왔다.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구성검을 오른손으로 쥐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사당 안에 감돌던 한기가 어느새 사라졌다.
이서휘와 아수라는 그것을 계기로…….
대화 없이 뜻을 나눌 수 있었다.
아수라가 이서휘에게 말을 건네는 느낌이다.
‘애송이, 검을 잡아라….’
아수라의 뜻이 전해졌다. 그 순간에 검을 잡은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수라를 보려면 심안(心眼)을 뜨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서휘의 본능적인 감각이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인도했다.
심안의 경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수라를 마주하겠다는 일념(一念).
그것이면 충분했다.
이서휘가 두 눈을 감고 바라보자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졌다. 눈이 멀었을 때처럼 누군가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서휘의 심안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아니면 아수라가 직접 강림한 것일까.
그 어떤 곳이라 부를 수도 없는 영역의 어딘가에서 아수라의 천안(天眼)이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끼자마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와 마주 선 이서휘.
이어지는 아수라의 말은 아수라의 입이 아니라 이서휘가 서 있는 영역 전체에서 울리고 있었다.
[기회를 얻은 자, 운명을 되돌린 자, 복수의 검(劍), 나약한 무인아…… 네가 그 복수를 완성하지 못하면 네 영혼은 이곳에서 영원히 머무를 것이다. 보라… 네가 머물러야 할 어둠을….]
이서휘가 주변을 둘러봤다.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고독 그 자체의 세계….
죽지도 못하고….
보이는 것도 없고….
그저 머물러야 하는 세계에 이서휘가 놓여 있었다.
고작 눈을 뜨면 사라질… 환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서휘는 이 모든 게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도 잊은 상태였다.
그 순간에….
이서휘가 구성검을 쥐었다.
빛이 휘감겼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장소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서휘라는 생명이 지니고 있던 온갖 힘이 한 자루의 검(劍)에 담겼다.
단순히 손에 들어간 악력부터 시작해 내공, 집중력, 의지, 관찰력, 통찰력, 예지력, 평정심, 살의, 분노…… 무인(武人)이 지닌 강력함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요소들이 일순간에 폭발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구성검에서 터진 극의(極意)는….
일전에 자신이 이름을 지었던 바로 그것으로 발현되었다.
백야경(白夜景).
이서휘가 서 있던 장소를 중심으로 구성검에서 퍼져나간 백야경이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흑수(黑水)에서 피어난 거대한 백색의 꽃이 꽃봉오리를 터트리는 풍경이다.
이서휘를 중심으로 피어난 꽃잎은 어느새 백색의 파도가 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면서 어둠을 잠식했다.
이서휘의 모든 것이 담긴 힘이었다.
이서휘의 삶.
살아가는 이유.
살아가야 할 이유.
함께 있어야 할 사람들…
백색의 파도가 어둠을 밀어내자, 그 위로 이서휘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이 내려섰다.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옥의림이 내려서고….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등을 돌린 검선이 내려서고….
장시우가… 도이와 도삼이… 화지련이… 단우혁과 백류혼이… 군림맹으로 복귀하지 않고 있는 설진우가… 질풍검대의 아우들이… 군림맹의 동료들이… 백색의 파도가 넓어질수록 이서휘와 함께 살아가던 자들이 하나둘씩 내려서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의 힘이 줄어들자….
백색의 파도도 어느 순간 멈췄고….
내려설 수 있는 자들도 점점 적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내였다. 강보에 쌓인 아기를 품에 안고 있던 남자가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장시우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장시우는 아주 어린 소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장시우의 주변에도 위아래로 서너 살 차이가 나는 어린 소년들이 잔뜩 서 있었다.
사내가 강보에 쌓인 아기를 장시우에게 넘기더니 말없이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다.
여전히 사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서휘는 사내의 얼굴을 보기 위해 구성검을 휘둘렀다. 구성검에 휘감긴 백색의 궤적이 사내 주변에 쏟아졌는데도 여전히 얼굴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사내가 이내 자세를 돌리더니 어딘가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제 사내의 등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미 이서휘는 검을 치켜들고…….
사내가 걷고 있는 길에 하얀 빛줄기를 뿌렸다.
그때였다.
어두운 밤을 걷고 있던 사내가….
갑자기 환해진 주변을 목격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사내가 마주한 것은 백야(白夜)였다.
백야를 처음 목격한 것처럼 당황하던 사내가 고개를 들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봤다.
어찌 달밤이 이렇게 밝단 말인가?
사내의 몸짓에는 기이한 장면을 목격한 자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서휘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진 않고 있었다.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때 길을 걷던 사내가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어둠을 돌아봤다. 이서휘와 무척 닮은 중년의 사내가 충혈이 가득한 눈으로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저 표정을 무슨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이다.
슬프게, 웃고 있다.
복잡한 감정이 주름살마다 섞여 있는 저 표정은…….
아버지의 표정이었다.
이서휘의 아버지가 다시 등을 돌리더니 장검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혼자 가시는 겁니까? 외롭진 않으셨어요?’
이서휘의 말에 반응하듯이 사내의 좌우로 동료들이 내려서더니 순식간에 수십 명으로 늘어났다.
이서휘의 아버지가 선두에서 달려 나가고.
그 뒤를 동료들이 뒤따랐다.
더 보고 싶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사내는 어둠으로 돌진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보여 다오. 내 아버지의 최후를….’
이서휘가 내민 구성검에서 백색의 파도가 길을 만들면서 뻗어 나가더니 아버지가 갔던 길을 쫓아갔다.
그러나 너무 멀었다.
너무 멀어 모든 게 흐릿했다.
볼 수 없다면… 싸우는 소리라도 듣고 싶구나.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은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할까.
장시우가 아기를 안고 뛰었다. 어느 언덕에 도착해 맞붙고 있는 두 무리의 처절한 싸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감각을 집중했다.
이서휘가 온 힘을 다해 귀를 기울였다. 사람의 집중이라는 것은 묘한 일면이 있어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으면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해도 전혀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도저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에서 들리는 소리….
이서휘는 그것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먼저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리고 정적이 잦아들 무렵에 멀리서 전쟁터의 함성이 들렸다.
이서휘는 안다.
소리만으로도 장면이 그려지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를 마주하고 있음에도 밀리지 않겠다는 기백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점점 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사람까지 검을 놓치고 모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린 장시우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수라의 사당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이서휘의 눈도 함께 떠졌다.
이서휘의 눈에 이채(異彩)가 잠시 감돌았다.
눈을 감고 환상을 봤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서휘가 듣고, 보고, 추측하던 것을 만들어내어 본 것이었다.
분명히 존재했던 일이었으나.
망각에 묻혀 있던 기억과 감각을 끄집어 낸 것이었다.
그 순간에 이서휘는 다시 심안과 청각에 대한 감각을 일깨웠다.
왜 지금은 칠흑검제 시절보다 강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일까.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과 마주하다가 이곳으로 왔다.
눈을 뜨고 감각을 버렸기 때문일까.
두 눈을 다시 뜬 이서휘가 아수라의 석상 밑을 바라봤다. 자신이 죽었던 장소. 암천세를 펼치자마자 튕겨났던 순간…
이서휘의 눈에는 그날의 칠흑검제가 누워서 피를 흘리는 모습이 재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이서휘가 칠흑검제에 배에 꽂힌 검과 곳곳에 짓눌린 형태의 상처들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암천세에 당한 것인가…….’
위극신이 암천세를 사용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암천세가 위극신의 어떤 무공에 의해 되돌려 나왔다는 얘긴데…….
눈이 멀었으니 그 순간에 위극신이 무슨 수법을 쓴 것인지.
어떠한 동작으로 반격을 펼친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위극신이 검으로 무슨 궤적을 그렸던 것 같은데……’
이서휘가 바라보는 장소에 칠흑검제가 수십 번이고 부딪쳐서 날아갔다. 매번 똑같았다. 암천세를 내보내고, 거대한 힘에 튕겨서 날아가는 와중에 복부에는 검 한 자루가 꽂히는 장면…….
반복, 그리고 또 반복…….
‘튕겨낸 것과 검을 던진 것은 다른 무공이자 별개의 동작이었구나…….’
위극신도 이서휘처럼 쌍수로 무공을 펼친다고 봐야했다. 한 손에는 장력을, 한 손에는 검을…….
그런데 그 장력의 힘이 암천세를 그대로 되돌려 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추고 있다면… 그야말로 신공(神功)이라 불릴 정도의 무공을 익혔다는 뜻이다.
복부가 뚫린 채로 빨간 피를 뿜어내던 칠흑검제가 이서휘가 있는 곳을 노려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 말은 마치 위극신에게 하는 말과 같았다.
“내 두 눈이 멀쩡했다면 과연 네가 날 이길 수 있었을까.”
하지만 칠흑검제에 대꾸하는 사람은 이서휘였다.
“그래도 졌을 것이다.”
“뭐라고? 거짓말 하지 마라.”
하지만 이서휘는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아니다. 당신이 약했던 것이야. 눈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어. 설령 두 눈을 뜨고 있었더라도, 천마는 분명 당신보다 강했다. 그 뿐이야. 인정해야 된다. 그 날의 패배를…….”
“억울하구나.”
“패배는 패배… 당신은 강했어. 두 눈이 먼 채로 살아왔던 나날이 억울했던 거지. 천마에게 패해 억울했던 게 아니야. 패배와 혼동하면 안 된다. 더 강해지면 된다.”
이서휘가 손을 내밀었다.
이서휘가 손을 내민 곳에 두 눈을 잃었던 자들 중에서 무림사에서 가장 강했던 무인, 칠흑검제가 있었다.
이서휘는 칠흑검제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이서휘의 손을 잡을 때까지 억겁의 시간이라도 기다릴 생각이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새롭게 태어나자.”
두 눈을 잃었기에 졌던 것이라고 생각했던 오만한 칠흑검제와 두 눈을 떴기 때문에 오만해진 이서휘가 동시에 지난날의 과오를 깨달았다.
그 순간….
이서휘와 칠흑검제가 손을 잡았다.
그 순간에 아수라 사당 전체에 이서휘의 존재 자체가 발하는 기파가 휘몰아쳤다.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기이한 고수가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기이한 운명….
오료(悟了)의 경지를 추구하던 칠흑검제의 초월(超越) 감각이, 역시 오료(悟了)의 경지를 추구하고 있었던 이서휘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었다.
누구는 이 현상을 각성(覺醒)이라 부를 것이다.
칠흑검제는 본래 이서휘의 스승이나 다름이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 자신이었던 칠흑검제의 한계를 깨닫고, 장점을 수용하고, 지난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이서휘는 막혀 있던 경지를 뚫어낼 수 있게 되었다.
경지를 뚫어낸다 함은….
곧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내공이나 영약, 검법이나 무공의 영역과는 다른 문제였다.
가장 중요한 본질은 이서휘가 자아(自我)을 깨닫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류곡을 찾았다가 무(武)와 관련된 자신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 이서휘는 구패(求敗)의 마음가짐에서 벗어나 오료의 영역에 진입하게 되었다.
<5장. 대종사(大倧師)>
투둑― 소리와 함께 쏟아지던 비가 어느새 쏴아아―― 소리를 내며 사류곡을 뒤덮었다.
이서휘는 아수라에게 마음을 담아 예를 올리고 있었다. 기회를 준 존재에게 그 어떤 불경한 마음을 담을 수가 없었다. 비록 아수라가 남긴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네가 그 복수를 완성하지 못하면 네 영혼은 이곳에서 영원히 머무를 것이다.]
어찌 보면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하지만 그 협박에 두려움에 떨면서 살아갈 정도로 나약한 이서휘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에 남는 말은 ‘나약한 무인’이라는 표현이었다. 아수라가 보기엔 이서휘가 나약한 수준인가 보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서휘는 나약한 무인이라는 말을 되새길수록, 이서휘가 생각하는 무(武)의 경지가 아득하게 확장되고 있었다.
‘아직 성장할 요소가 많다는 것이겠지.’
대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대체 어느 한계까지 돌파할 수 있을까.
이제 이서휘가 생각하는 무의 경지는 당대의 무림이 아니라 무림사 전체를 배경으로 놓아야 할 지경이었다.
사당 앞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잠시 감상하던 이서휘는 그대로 빗속을 걸었다.
온 몸을 적시는 비다.
이서휘가 빗속에서 천천히 구성검을 뽑았다.
투두둑 하며 쏟아지던 빗방울이 검신에 부딪쳐 흐르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보통 검객이 기를 운용하면 검기든 검막이든 검에 맺힌다.
하지만 오료의 경지에 접어든 이서휘…….
늘 운용하던 검막을 빗속에서 운용하자 이서휘의 전신에 엷은 막이 순식간에 뒤덮였다.
이제 이서휘의 몸에 비가 닿지 않았다.
이서휘가 전신에 검막을 운용한 채로 구성검을 우하단으로 늘어뜨리고 빗속을 다시 걸었다.
십여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또 다른 깨달음이 이서휘의 전신을 관통했다.
흑수(黑水)에서 피어나던 꽃봉오리.
이서휘의 기억에만 남아 있던 잔상이 떠오르자, 이서휘가 빗속에서 검막을 다시 거두고 궤적을 그린 다음에 검 끝을 눈높이에서 멈췄다.
검 끝에서 백화(白花)가 피어났다.
빗속의 백화라니…….
이서휘는 자신이 만들어낸 기운이 백화의 모습으로 발현하자 곧장 백류혼의 종종 사용하던 백화만개(白花滿開)를 떠올렸다. 모양은 조금 달랐으나 백류혼이 만든 것보다 훨씬 섬세한 꽃 한 송이가 검 끝에 피어 있었다.
백검문이 지켜봤으면 기겁을 했을 장면…….
경지에 오르니 지켜봤던 검객들의 비전(祕傳) 무공마저 이서휘의 방식으로 검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그렇게 사류곡의 경사진 어느 길을 내려가던 이서휘가…….
세차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깨달음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새롭게 만들어내는 무공이 비처럼 쏟아졌다.
심득(心得)이 비처럼 쏟아지는 형국이다.
어쩌면 과거에 있던 무공, 어쩌면 현세에서 누군가가 사용 중인 검법, 혹은 미래의 누군가가 깨닫게 되는 검의 경지까지.
지금 이 순간 이서휘의 검에서 순식간에 재현되고 있었다.
잠시 검무(劍舞)를 펼치던 이서휘가 검을 하늘로 치켜드니…….
쏴아아아 내리고 있던 빗방울이 공중에 멈췄다가 이서휘가 발산한 검풍과 함께 하늘 위로 다시 치솟았다.
그제야 구화산 석실의 뻥 뚫린 천장을 떠올린 이서휘.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검성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순간에 뚫어내신 흔적이었구나…….’
호쾌하게 검무를 펼치던 이서휘의 동작이 우뚝 멈추자, 그 어느 때보다 묵직한 빗물이 후두두둑 소리와 함께 다시 떨어졌다.
잠시 이서휘의 몸은 길가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이서휘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서휘는 어둠 속에서 시전 했던 암영술(暗影術)을 떠올리고 있었다.
암영술의 은밀함을 다소 버리고 펼쳤던 암행술. 그리고 일순간이나마 모습을 감추는 것처럼 펼쳤던 쾌속의 암행표.
이서휘는 세 가지를 다 버렸다.
아니, 어쩌면 세 가지를 동시에 취한 것이다.
빗속을 걷던 이서휘의 몸에 검막이 겹치면서 신형이 사라졌다. 투두두둑 소리와 함께 여전히 비가 부딪쳐서 물방을 튀기게 하고 있었으나 이서휘의 본체만은 투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음을 먹은 대로…….
뜻을 펼치니…….
이서휘가 펼치는 동작마다 무의 경지가 한계 없이 확장되고 있었다.
암영술로 총칭할 수 있는 은신술은 본래 검객이 추구해야 할 경지가 아니었으나, 칠흑검제 시절에 얻은 묘리로 어느새 이서휘라는 검객의 강점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공의 경지를 끌어올린 무인이 과연 있었던가.
비를 맞으면서 검무를 추며 웃음 짓는 자가 있었던가.
그렇게 이서휘가 사류곡을 내려가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시간마저 잊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사류곡에 굉음과 함께 하늘의 노기를 담은 뇌전(雷電)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서휘가 천둥을 듣고, 번개를 바라보며 잠시 빗속에 서있었다.
‘저 뇌전마저도 나보다 강하다.’
그 순간, 이서휘의 마음에는 호승심이 불길처럼 피어올랐다.
세찬 비가 쏟아지고 짙은 먹구름이 뇌전을 떨어뜨리는 와중에 검 한 자루를 쥔 무인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오라….’
대체 무엇을 보고?
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하늘을 바라보던 이서휘가 우레가 터져 하늘이 번쩍 하는 순간에 구성검을 하늘을 향해 휘둘렀다.
흩날리는 하늘의 붓이 자유분방한 번개 모양의 궤적을 잠시 그리는 순간….
이서휘의 구성검에서도 백색의 빛줄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닿지 않았다.
어찌 닿겠는가.
무모한 행동일 뿐이다.
하지만 이서휘의 호앙(豪昻, 당당하고 호기로움)은 분명 하늘을 뚫어낼 기세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과 땅에서 솟은 벼락이 서로 경쟁하듯 교차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빗속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 ☆ ☆
이서휘가 사류곡의 빗속에서 심득을 얻고 있을 때….
위극신은 핏물을 뒤집어쓰고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즐거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즐겁다.
누군가 분명히 죽을 것이지만….
즐겁다.
살육이란 본디 이런 것이다. 어쩌면 무림사가 시작되기 전 의 원시 사회에서부터 전해오던 인간의 본능인 것이다.
죽여라!
죽여라!
내가 더 강하다.
누구보다 더 강하다.
이 자리서 증명하마.
네 명의 마도인은 전율에 이은 전율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검마는 자신이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즐거워했다. 온 몸을 타고 흐르는 고통이 검마의 동작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그 어떤 마공에도 마음을 쓰지 않고 도검불침의 신체를 완성하는 불생귀검마공(不生鬼劍魔功)에만 매달렸다.
불사가 아니라 불생이다.
그의 마검에 흡수된 불생귀가 가득했다. 그 힘을 토대로 검마의 본체는 불사지체를 추구하고 있었다.
탈명마제와 혈륜마제.
이 시대의 마인의 정점은 자신들이라 생각하는 자들….
이미 제월헌에게 패배 했던 두 사람이다.
하지만 제월헌이 아닌 자에게 패배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고작 마가의 애송이들이 아닌가….
그런 탈명마제(奪命魔帝)와 혈륜마제(血輪魔帝)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한 남자가 이곳에 있었다.
위극신.
벌써 한 시진이 흘렀다.
네 사람 중에 타격을 입은 사람은 검마가 유일했다. 위극신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돌아다녔다.
하지만 저 위극신마저도 탈명마제와 혈륜마제에게 공격 한 번 적중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마제들과 위극신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강하구나…. 하지만 이상하다. 교주를 죽일 수 있는 실력은 분명 아닌데….’
검마와 위극신의 합격이 신들릴 정도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별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도 두 마제는 위극신에게 전혀 피해를 입힐 수가 없었다.
의혹이 깃들었다.
심지어 장력을 겨룰 때도 위극신의 내공은 마제들에 비해 전혀 뒤처짐이 없었다.
둘은 모를 것이다.
일월마가의 후계자로 낙점된 어린 시절부터 위극신이 혈옥귀체와 청옥귀체로 단시간에 폭발적인 내공을 쌓고 있었음을….
슬슬 마제들이 승부수를 던져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위극신은 그 변화를 묵묵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위극신, 이 교활한 남자는 검마와 합격을 이루면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자신이 가진 일반적인 무공으로는 두 마제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월헌에게 펼쳤던 일월광천지세(日月光天地勢)가 필요했다. 하지만 두 마제는 위극신에게 찰나의 틈도 주지 않고 있었다.
반각이 다시 흐르고.
또 다시 반시진이 흘렀을 때.
검마가 휘청거렸다.
이제야 검마의 내공이 네 사람 중에 가장 뒤쳐진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었다.
혈고륜이 날아들었다.
채애앵!
혈전 이후 처음으로 검마가 마검을 손에서 놓쳤다. 혈고륜은 궤적을 그리면서 공중에서 방향을 전환하고 있었고, 기겁한 검마는 날아간 마검을 저도 모르게 바라봤다.
하지만 빠르게 회전을 하면서 날아가는 마검을 위극신이 낚아채더니 이내 혈륜마제와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사단이 벌어졌다.
탈명마제가 마검을 놓친 검마의 등에 쌍장을 내질렀다.
콰아아아앙!
검마의 몸이 지옥의 입구로 날아가자, 그야말로 절묘한 경공으로 검마의 몸을 따라가던 탈명마제가 검마의 뒷덜미를 잡고 지옥의 입구를 향해 던졌다.
터억― 쉬이이익!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던 검마가 천근추로 떨어지더니 우장을 내질러 탈명마제와 장력을 다시 겨뤘다.
탈명마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친 놈이 무슨 장력 대결을….’
그 순간, 검의 궤적을 그리는 것처럼 검마의 손이 기묘하게 뒤틀리더니 탈명마제의 팔목을 붙잡았다.
검마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같이 갈까?”
검마가 미친 사람처럼 탈명마제를 붙잡고 지옥의 입구로 향했다. 탈명마제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좌수로 검마의 오른팔을 끊어내려다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인상을 찌푸렸다.
검도 박히지 않는 신체인지라 자신의 손만 아플 뿐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이 싸우는 것처럼 원초적인 몸싸움이 벌어졌다. 검마의 신체가 특별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기이한 장면이었다.
그 사이에 혈륜마제와 위극신.
챙챙챙챙!
한참을 겨루고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지옥의 입구 쪽으로 신형을 옮겼다. 두 사람은 지옥의 입구로 가는 동안에도 마검과 혈고륜으로 공수를 주고받았다.
‘위기이자 기회.’
혈륜마제가 위극신에 묘한 눈빛을 보냈다.
‘두 사람 다 처넣고 승부를 가리자.’
뜻을 전달하게 위해 공격을 느슨하게 늦추자, 위극신이 바로 그 뜻을 이해하고 두 사람이 질풍처럼 신형을 움직였다.
위극신과 혈륜마제가 맹렬하게 뛰어오자, 검마와 탈명마제가 순식간에 떨어졌다.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느꼈기 때문.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 위극신과 혈륜마제가 틈을 주지 않고 곧장 공격을 쏟아냈다.
물론 위극신은 검마가 도검불침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일장을 날렸다.
퍼억!
그와 동시에 혈륜마제가 혈고륜으로 탈명마제의 어깨를 내려치고, 재빠르게 피하는 탈명마제의 가슴에 일장을 적중시켰다.
콰아앙!
검마는 위극신의 장력을 맞자마자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날아갔다.
“하하하하.”
미치광이가 끝까지 웃으면서 지옥의 입구로 날아갔다.
반면에 탈명마제는 지상에서 구멍으로 이어지는 각진 부분에 허리가 부딪쳐 우지끈 소리가 나더니 이어서 긴 비명소리와 함께 입구로 빠졌다.
검마와 탈명마제가 구멍에 빠진 것을 보자마자….
위극신과 혈륜마제가 맞붙었다.
좌중이 그 순간에 모두 숨을 죽였다. 지금까진 이런저런 말을 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어찌 된 노릇인지 싸늘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 사이에 위극신은 지옥의 입구로 밀리고 있었다.
밀리던 위극신이 악수(惡手)를 뒀다.
훌쩍 솟구쳐서 혈륜마제를 넘어가자, 선수를 빼앗기게 되었던 것. 혈륜마제의 등에 지옥의 입구가 있었으나, 이미 기세는 혈륜마제에게 있었다.
혈륜마제가 위극신을 맹렬하게 몰아붙이며 생각했다.
‘후후, 이렇게 마교의 교주가 되는 날이 오는구나….’
혈륜마제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는 순간….
검마가 지옥의 입구에서 순식간에 솟구쳤다. 검마가 웃었던 것은 위극신의 행동 때문이었다.
요란하게 와서 장력을 내지르는데 별 다른 내공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 심계가 하도 웃겨서 웃음을 터트리면서 날아갔던 검마다.
검마는 혈륜마제의 시야에 드러나지 않는 벽에 달라붙어 있었고.
그 반대편의 관객석에서도 빤히 검마를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혈륜마제에게 경고를 남기는 자들이 없었다.
오히려 침묵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손가락 힘으로 지옥의 입구 끝부분에 매달려 있던 검마가 신형을 날리고…….
그제야 악마처럼 웃던 위극신이 혈륜마제를 향해 마검을 던졌다. 혈륜마제가 고갯짓으로 마검을 피하는 순간 위극신의 쌍장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외기발현 장력이다.
더군다나 음기와 양기가 역태극으로 교차되고 있었다.
타격극점(打擊極點)에서 폭발하는 기운을 머금었다.
혈고륜으로 대응하기도 전에 혈륜마제의 눈앞에서 눈부신 섬광이 터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는….
푸욱….
날아오는 마검을 공중에서 낚아챈 검마의 마검이 혈륜마제의 배를 뚫고 나왔다. 동시에 위극신의 오른손이 혈륜마제의 목을 붙잡았다.
검마의 광소가 터지고….
위극신이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이 동시에 혈륜마제의 정기(精氣)를 흡수했다.
검마의 마검은 여전히 혈륜마제의 복부를 뚫고 나온 상태였다.
두 사람은 혈륜마제의 생명력을 모두 소진하자마자….
찰나의 틈도 주지 않고 겨루기 시작했다.
검마가 내민 검이 혈륜마제의 복부를 완전히 뚫고 나와 위극신에게 향했다.
위극신이 선 자세에서 미끄러지듯 물러나자, 검마가 푸아악 소리와 함께 혈륜마제의 몸통을 찢어내면서 피를 뒤집어썼다.
혈륜마제가 처참하게 쓰러지자, 검마의 목까지 뒤덮었던 문신은 어느새 자라서 얼굴의 반까지 차오른 상태.
무척 기괴한 모습이다.
혈륜마제가 그야말로 풍족한 먹잇감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장면이리라.
위극신도 마찬가지.
그릇이 흘러넘치는 것처럼 잠시간 한 쪽 눈에서 청안이 번뜩였다.
위극신과 검마는 배고픈 맹수가 서로를 탐색하는 것처럼 어슬렁거리며 바라봤다.
그때 일월마가의 위극명이 말했다.
“검마, 자네는 어차피 교주 자리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 형님을 교주로 인정하고 그만 물러나라.”
위극명의 말에 검마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닥쳐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애송이 새끼야.”
위극명이 또 다시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자, 위극신이 힐끗 쳐다보면서 싸늘한 말투로 경고했다.
“명아, 입 다물어라.”
“네.”
위극신이 힐끗 쳐다보는 틈을 노리고 검마가 달려들었다. 그 순간 검마는 비릿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가 안색을 굳혔다.
위극신의 적안(赤眼)이 순식간에 방향을 틀더니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
검마가 마검을 휘두르면서 광소를 터트렸다.
“네 놈도 괴물이 다 됐구나. 이제….”
검마와 위극신이 맞붙었다.
검마는 위극명의 지적대로 교주 자리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위극신도 검마가 자신을 이겨도 교주 자리를 박차고 총본산을 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위극신이 달려드는 검마를 보면서 웃자, 검마도 이마에 주름을 잔뜩 넣은 채로 낄낄 거리면서 웃었다.
대체 검법이나 제대로 익힌 적이 있는 것일까.
언뜻 보면 마구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마가 강한 것은 금기시 되는 동작이 없기 때문이었다.
공격 당하는 순간에 마검을 찔러 넣고 있었으니 이것을 어찌 검법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위극신은 그런 검마를 짓누르고 있었다.
공방전이 길어지자….
상계의 객석이 다시 고요해졌다.
상계의 객석에 무척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펑퍼짐한 잿빛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손과 발은 물론이고 무슨 병기를 지녔는지도 보이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머리가 무척 길어서 남자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은 검마와 위극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남자의 생각을 누군가가 읽었다면….
아마 상계의 전체가 일어나 남자를 공격했으리라.
남자는 치열하게 공수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때때로 눈을 감고 있었다.
대체 누굴까.
이미 남자의 주변에서도 정체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십일가가 모인 터라 낯선 사람이 가득했다. 더군다나 이런 곳에서 통성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검마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시간이 흐를수록 전황은 위극신에게 유리했다.
벌써 몇 차례 굉음과 함께 외벽에 날아갔다가 킬킬대며 다시 걸어 나오고 있는 검마다.
하지만 이제 슬슬 위극신이 지긋지긋한 괴물처럼 보이고 있었다.
‘도대체 방법이 안 떠오르는구나. 구파의 고수들을 흡수하고 죽여야 할 것 같은데… 도망이나 갈 수 있을까.’
걸어가던 검마가 속마음을 감추고 마검을 바닥에 질질 끌면서 위극신에게 다가갔다.
마장검극의(魔將劍極意)을 펼칠 생각이다.
혈륜마제의 일부 정기를 흡수한 터라 충분히 가능했다.
검마의 기도가 확연하게 변하자….
위극신도 대놓고 양손을 좌우로 늘어뜨린 후에 일월신공의 역천반경(逆天反鏡)을 준비했다.
그야말로 멈추지 않는 기세를 지닌 두 사람이다.
공방전이 길어진다 생각하자 각자의 절기를 드러내놓고 준비하는 두 사람이었다.
검마의 신형과 위극신의 신형이 빛살처럼 뻗어나가면서 거리를 좁혔다.
이미 위극신의 쌍장에는 각기 청색의 아지랑이와 적색의 아지랑이가 맺힌 상태.
그 순간에 검마가 솟구쳤다.
검마는 위극신의 비기가 무엇이든 간에 마장검극의로 뚫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심계는 위극신이 위였다.
위극신이 양손으로 역태극을 그리는가 싶더니 꽈드드득 소리와 함께 주먹의 크기로 압축시키는 것처럼 두 개의 기운을 비틀었다.
검마의 빛살이 쏟아졌다.
그 순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출수를 늦춘다고 생각했던 위극신의 쌍장이 검마의 빛살을 그대로 갈무리하더니 검마가 내보낸 형태와 똑같은 빛살을 내보냈다.
검마의 두 눈이 부릅뜨는 순간….
겨우 신형을 약간 비틀었다.
하지만 검마는 자신이 내보낸 마장검극의를 맞고 굉음과 함께 날아갔다. 하지만 공중에 솟구쳤던 터라, 상계의 객석을 넘어서서 아예 바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위극신은 그야말로 기가막혔다.
‘제 놈의 절명기까지 막아내는 신체라니…’
일부러 간격과 위치까지 조절해 검마의 심장 부분을 노렸던 위극신이다. 하지만 마장검극의마저 검마의 신체를 꿰뚫지 못하고 그대로 삼계륜 바깥으로 날려버렸다.
한참을 날아가던 검마는 공중에서 피를 뿜어내면서 굉음과 함께 목재 건물을 서너 개나 뚫어내면서 뒹굴어 다녔다.
위극신이 잠시 허탈하게 서 있을 때였다. 일월마가가 동시에 일어나자 위극신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다 갈 필요 없다. 명아.”
“네.”
“네가 총본산의 추견(追犬)들을 끌고 가라.”
“알겠습니다.”
위극신은 삼계륜 너머를 노려보다 객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시국에 누군가가 분탕질을 할 수도 있는 노릇이라 일월마가 전체를 검마를 쫓는데 보낼 필요가 없었다.
그 대신에 이 자리서 확실히 끝맺음을 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 이외에 교주가 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위극신이 또 다른 설레임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라보는 자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충성의 서약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야심가들이 군데군데 섞여 있는 느낌이다.
그 반역의 싹을 보니….
위극신은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흡족해지고 있었다. 위극신은 자신의 감상을 그대로 내뱉었다.
“아직 죽여야 할 놈들이 여기저기서 눈을 빛내는 구나….”
그때, 위극신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잿빛 장포의 사내가 조용히 일어섰다.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터라 위극신만큼이나 허탈해 하고 있었다.
조용히 빠져 나갈 생각이었다.
몇 걸음을 걸었을 때….
잿빛 장포의 사내를 주시하던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어느 마가의 선배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제 교주 쟁투가 끝난 것 같으니… 통성명이나 하시지요.”
“아, 뭘 굳이 통성명까지… 나는 어서 가서 저 검마를 잡아오겠네. 죽였어야 했는데 아쉽지 않은가.”
잿빛 장포 사내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나가자, 누군가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멈추시오.”
그 말에 잿빛 장포가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아… 나는 말이지. 그 저기… 화마가의 장로거든.”
대번에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게 드러날 정도로 허술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마가의 선배가 장난을 치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하던 한 사람이 대꾸했다.
“화마가는 대부분 죽었는데…”
“그런가? 그럼… 물렀거라! 뭐 이렇게 다들 몰려와?”
사람들이 어느새 몰려와 잿빛 장포의 사내를 포위하고 있었다.
위극신마저 웅성거림을 듣고 반대편의 소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이상한 자가 있습니다.”
잿빛 장포의 사내가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냅다 뛰기 시작했다. 이어서 마가의 고수들이 잿빛 장포의 사내를 뒤따랐다. 하지만 잿빛 장포의 사내가 다리를 삐끗하더니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상계를 굴러가더니 하계에 떨어졌다.
“아… 내 허리.”
사내가 허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면서 일어났다. 그 사이에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오고, 위극신은 달리다가 넘어진 사내가 별 놈이 아니라 판단했다.
검마가 도망치고….
허접한 놈이 하계에 떨어져….
근엄한 분위기로 교주 자리를 이십일가가 보는 가운데 인정받아야 할 순간이 기분 나쁘게 엉망으로 변하고 있었다.
위극신이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위극단에게 말했다.
“취임식을 따로 준비해라.”
“네.”
잿빛 장포의 사내는 끄응 소리와 함께 왼손을 허리에 가져다댔다. 하지만 두 눈은 그 순간에 등을 내보인 위극신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
천천히 어깨 너머의 등으로 손을 뻗은 사내가….
발검과 함께 빛을 뿜었다.
암연심검(暗嚥心劍)의 파(波)와 흡사한 검기가 쏟아졌다. 반월 형의 검기가 위극신의 등으로 날아갔다.
위극신은 이미 발검 소리를 들을 때부터 화들짝 놀란 상태로 가까스로 역천반경(逆天反鏡) 준비하자마자 뒤를 돌았다.
콰아아아아아앙!
위극신의 역천반경이 완벽한 역태극을 그리기도 전에 잿빛 장포 사내의 검기가 쏟아졌다. 위극신은 쌍장에 머금은 기운으로만 막아야 할 처지에서… 그대로 굉음과 함께 외벽으로 날아갔다.
콰아아앙!
연이은 굉음….
위극신이 외벽에 부딪쳐 피를 한 움큼이나 토해내고….
그 앞으로 일월마가의 고수들이 죄다 내려서고….
동시에 한빙마제가 그 앞에 나섰다.
하지만 잿빛 장포의 사내는 고개를 이리저리 빼면서 위극신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더니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막았네.”
말투가 이상했다.
노인끼리 장기를 두다가 장군(將軍)을 한 번 부르고, 상대가 피하자…
아, 그걸 막았네… 정도의 말투다.
이미 잿빛 장포의 사내는 원형진으로 포위된 상태.
사내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자책했다.
“늙으면 죽어야지.”
그때, 한빙마제가 호통을 내질렀다.
“뭣들 하는가. 죽여라.”
“잠시만….”
사내가 왼손을 내밀더니 말을 이었다.
“검마를 잡아오겠다. 그냥 곱게 보내다오. 저대로 검마를 살려 놓으면 실로 무림의… 아니, 마교의 화가 될 게다.”
“무슨 미친 개소리인가! 쳐라!”
“물론 위극신도… 무림에 상당히…”
그 순간에 수십 명이 잿빛 장포의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사내가 욕설을 내뱉다 말고 삼켰다.
“이 놈들이…”
사내가 왼손을 뒷덜미로 내밀어 잿빛 장포를 뽑아내자마자 부아아앙 소리와 함께 장포를 공중으로 던졌다. 그 순간에 탁 소리와 함께 솟구친 사내가 자신이 던진 장포에 올라타더니 순식간에 삼계륜의 외벽 끝에 올라섰다.
상계에서 외벽 끝에 단번에 올라서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하계에서 장포를 날리더니 그 위에 올라타서 외벽 끝에 올라섰다.
도대체 눈으로 목격하고도 납득이 되질 않는 광경에…
추적하려던 자들이 할 말을 잃고 외벽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위극신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걸어 나와 사내에게 물었다.
“누구시오.”
몇 명이 경공을 펼쳐 외벽 위로 올라가려 했으나 위극신이 제지했다. 사내의 무위를 보아하니 어느 누가 올라가더라도 이내 절단 날 형국이었다.
사내가 마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누구냐 물어보면 내가 알려줘야 하느냐?”
아,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말투다.
사내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제월헌은 대체 어떻게 죽은 게야?”
이건 완전히 선배가 후배에게 묻는 말투였다. 그 말에 위극신이 대꾸했다.
“내 손에 죽었소.”
“네가?”
“그렇소.”
“무서운 놈이네. 간계를 썼구만.”
그 말에 위극신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누군가 하셨더니…”
그 말을 자르고 사내가 촤르륵 소리와 함께 장포를 다시 걸쳤다. 시커먼 검 한 자루가 장포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사내가 외쳤다.
“제월헌이 죽다니!”
이번에는 또 혼잣말을 했다.
“뭔가 이상하구나. 다들 나중에 보자. 너희 마교는 하여간…… 말을 말자.”
사내가 외벽에 선 자세 그대로 뒤로 떨어졌다. 마치 자살하려는 사람이 몸을 던지는 것 같다.
중간에서 몸을 비튼 사내가 외벽을 박차더니 순식간에 뻗어나가서 곡선을 그리다가 땅에 내려섰다.
표정이 심각했다.
어느새 치렁치렁하게 흘러내리던 흑색의 가발이 어디론가 날아가고…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백발의 사내가 얼굴을 드러냈다.
사내가 몇 걸음을 걷다 미간을 좁히면서 우뚝 멈추더니 하늘 저 멀리에 짙게 깔린 먹구름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서휘에게 비를 뿌려대고 있을 먹구름일지도 몰랐다.
“어쩐지 허리가…”
두리번거리던 사내는 일부러 검마가 튕겨나간 곳으로 내려선 상태였다.
사내가 중얼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제자나 들여서 부려 먹어야지. 나이 먹고 이게 대체 무슨 고생이냐.”
검선(劍仙)이 왼손으로 허리를 받친 채로 걸어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더니 마교 쪽을 돌아봤다.
“허, 겁도 없이 나를 쫓아오는 것이냐?”
하지만 말을 내뱉자마자 도망가는 것은 검선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위극신이 외벽에서 뛰어내린 사내의 정체를 추측하다가 말했다.
“검선이 여기까지 오다니.”
한빙마제가 되물었다.
“검선? 확실한가?”
“그런 것 같소.”
위극신은 안타까웠다. 살생부에서도 가장 첫머리에 있는 사내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위극신은 검선에게 부상을 입은 상태라 추적에 나설 수가 없었다.
수하들을 모두 내보내도 붙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에 검선을 당장 응징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짧은 한숨을 내쉰 위극신이 상계에 있는 이십일가를 바라봤다. 이제 교주에 오르면 지난 세월과는 방법을 달리할 것이다. 체계를 구축한 다음에 저 이십일가를 모조리 찍어 누를 생각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적당한 반발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반발의 대가가 무엇인지 보여줄 생각이었으니까. 위극신에겐 백도나 마도나 별 차이가 없었다.
적당히 상황을 조율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은 총본산이라는 잔재와 함께 모조리 불태울 생각이었다.
위극신이 한빙마제와 단둘이 이야기를 하면서 사왕전으로 빠져 나갔다.
한빙마제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명이가 검마를 상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부상을 당했다지만.”
한빙마제의 말에 위극신이 덤덤한 얼굴로 대꾸했다.
“검마에겐 이미 추종향을 발라뒀소.”
위극신의 말에 잠시 한빙마제가 말없이 서 있었다.
어쩐지 위극신이 검마를 그대로 내보낸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던 것.
더군다나 검마를 살려놓는 게 위극신에게 무슨 이득이 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 한빙마제는 위극신이 혈륜마제를 흡수하던 장면을 떠올리고 위극신을 바라봤다.
‘일부러 내보냈구나.’
한빙마제가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위극신이 그제야 희미하게 웃었다.
“더 여물어야 하니 모른 척 하시오.”
“여물다니…”
위극신은 검마를 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표현의 기괴함에 잠시 한빙마제가 떫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곡식을 거두는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는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위극신은 이미 검마에게 관심을 끊고, 길을 걷다 멈추고 상계에서 나오는 자들을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 ☆ ☆
위극명은 총본산에서 뛰쳐나와 수하들과 추견들을 이끌고 검마를 쫓고 있었다.
이미 위극신이 검마에게 추종향을 발라놨다는 사실을 위극명도 알고 있었다.
도망을 치는 경로만 확인하고 돌아오면 될 일이다.
검마는 언제가 됐든 위극신을 완성시키는 귀체나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제압하든 간에 지옥에 입구에 빠트려선 안 되는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위극신도 판단을 보류할 정도로 검마의 신체는 특이했다. 그래서 일단 살려둔 다음, 교주 쟁투에서 일종의 방패로 사용한 것이었다.
애초에 위극신은 검마를 지옥의 입구에 빠트리기 위한 노력을 전혀 기울지 않았다.
위극신은 검마가 총본산을 벗어나면 구파의 장문인들을 찾아갈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위극명은 형님의 이야기가 정말일까 의구심이 들었으나 추적 경로를 확인할 때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검마, 네놈은 어차피 형님의 손바닥 안이로구나. 무럭무럭 성장하거라.’
☆ ☆ ☆
허리가 욱신거리는 노인, 검선도 검마를 쫓고 있었다.
그 때문에 검마를 쫓아오고 있는 마교의 무리가 자신을 쫓고 있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검선이 혀를 찼다.
‘허, 그 놈들 참 귀찮구나.’
그런데 그 귀찮음마저 잊은 검선이 이어서 다른 생각에 잠겼다.
‘제월헌이 죽다니… 믿을 수가 없어.’
총본산이 드러났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변고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설마 제월헌이 죽었을 줄은 검선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애송이가 위태천의 장남이겠구나….’
검선은 위극신을 보자마자 그의 아비를 떠올렸다. 제월헌이 죽었다는 충격도 이내 위태천(韋太天)을 떠올리자 어느 정도 납득이 가고 있었다.
위태천은 중년 시절의 검선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반 시진을 추적했는데도 검마의 흔적이 보이지 않자 검선은 금방 포기를 해버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배고프구나.”
나이를 먹을수록 잘 먹어야 한다는 단순한 지론을 가진 검선이다. 어느새 처음 와보는 객잔 거리에 접어들어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연신 침을 삼키고 있었다.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 또한 별 게 아니었다.
“돈이 없네.”
친구 집이나 단골집에 들러서 밥을 축내는 게 취미였으나 총본산을 구경하겠다고 멀리 온 마당에 근방에서 지인을 쉽게 찾을 리가 없었다.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도 단순한 검선이다.
‘이럴 때 도적놈들이나 시비를 거는 놈들이 있으면 딱 좋은데 말이지.’
저 위대한 검선께서 객잔 거리를 누비며 시비를 걸 사람을 한참이나 찾아다녔다.
하지만 이곳은 검선의 바람과는 달리 평화로웠다.
이럴 때는 장소를 옮기는 게 상책이었다.
펑퍼짐한 잿빛장포가 눈에 좀 띄긴 하지만, 언뜻 보면 봇짐 상인으로 보일 수도 있는 차림새였다.
더군다나 검선의 얼굴엔 아무런 살기가 없었다. 때문에 바둑이나 한 판 두러 나온 동네 영감처럼 보이는 행색이었다.
다른 번화가로 향하는 도중에 잠시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검선이 단호하게 마음을 먹었다.
“돈이 없으면 굶어야지.”
검선이 주린 배를 틀어쥐고 거리를 걸었다. 고지식한 정도가 지나친 노인이었다. 하지만 낙천적인 면이 있었다.
“산짐승이라도 잡아먹어야지.”
다행히 자신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검선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산을 뛰어다녀서 소박하게 토끼 한 마리를 잡았다. 검선은 털을 대충 뽑은 다음에 나뭇가지에 꽂아 익힌 후에 양념도 없이 살점을 뜯어먹었다.
딱히 가야 할 곳도 없어서 대충 장포를 이불 삼아 잠을 청한 검선이 두 시진 정도를 자고 일어나 다시 여정을 떠났다.
검선의 여정은 궁색하고 궁핍했다.
늘 그랬기 때문에 불편함이 없었다. 불의를 봐야 살림살이가 나아지는데 운이 없게도 어쩐지 가는 산마다 산적도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근방에서 횡포를 부리는 방파를 한군데 찾아가서 털어먹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정의를 집행하겠다.’
하지만 횡포를 부리는 방파도 딱히 없어 며칠이 더 흐르자 행색이 꾀죄죄해지고, 낯빛이 초췌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검선은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호구 같은 제자 하나 있었으면 여한이 없겠구나.’
검선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때때로 해맑게 웃었다.
☆ ☆ ☆
이서휘는 어느새 비가 멈추자 길을 걸으면서 흠뻑 젖어 있던 몸을 순식간에 말렸다.
사류곡을 나와서 섬서로 향했다.
총본산이 있는 감숙이 아니라 섬서로 가는 이유는 단순했다.
종남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서휘의 기억에 가장 먼저 무너지는 문파는 종남파와 화산파였다. 둘 다 섬서에서 상징적인 백도 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위극신이 감숙의 총본산에서 죽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도 세력이 총본산으로 몰려가는 것도 막을 명분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었기 때문.
더군다나 이서휘의 안배로 백도 세력은 전력 손실이 많지 않았다.
‘내가 위극신이라면 시선을 돌리고 구파를 먼저 초토화시켰을 것인데….’
이서휘는 생각이 막힐 때마다 내가 위극신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되새기고 있었다.
이서휘는 종남으로 향하는 도중에 천리비문(千里飛門)을 통해 백검문, 청협문, 벽천회에 전서구를 보냈다.
이미 몸 상태는 극히 좋았다.
이제 말을 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경공이 빨랐기 때문에 지치고 배고플 때까지 한줄기 질풍이 되어 섬서의 종남으로 향했다.
물론 쉬어야 할 때면….
그야말로 호의호식을 하면서 머물렀다. 인근 전장에서 전표를 몇 장 바꿔서 돈을 펑펑 써댔다.
자고로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무인의 기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이서휘다.
그렇게 이서휘는 호의호식을 하면서 종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덕분에 때깔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 ☆ ☆
검선은 어딘지도 모를 마을에 도착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다리 한쪽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몇 사람이 지나가다가 몇 푼을 던지자, 검선이 성난 얼굴로 호통을 내질렀다.
“이 사람이! 사람을 어찌 보고!”
하지만 검선은 그 몇 푼을 들고 곧장 국수집으로 찾아가더니 젓가락을 비비면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국수를 기다렸다.
후루룩 소리와 함께 국수를 먹자, 국수집 노파가 나와서 혀를 차더니 면을 더 삶아서 검선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검선이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더 먹을 돈은 없소만.”
“아이고, 드시오. 국수 처음 드시는 분인 줄 알았네.”
“허허, 이거 감사히… 그럼.”
후루룩, 후루루루룩!
검선이 반들반들해진 소매로 입가를 닦은 다음에 국물까지 들이켰다. 인생의 참맛을 느낀 것처럼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때, 국수집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청년이 국수집 노파에게 말했다.
“고 아주머니, 금사방(金蛇幇)이 옵니다. 숨어 계십시오.”
“알았다. 다치지 말고.”
“다치긴요…. 오늘 이것들 뿌리를 뽑아버리겠습니다.”
청년의 말에 검선이 드디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노파는 국수를 국물까지 싹 비워낸 노인이 갑자기 히죽 웃자 혀를 찼다. 제 정신이 아니라고 봤던 것.
검선이 말했다.
“후후, 금사방이라… 이름만 들어도 나쁜 놈들인 것 같군. 무슨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겠소?”
“다 드셨으면 얼른 몸이나 피하쇼. 다리 쪽으로 가지 말고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게 좋을 거요. 매번 거기서 싸우니까.”
“후후후, 설명이나 해주시오. 이곳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지. 황사방이라니 처음 듣는군.”
“금사방이라니까.”
“그래요. 금사방.”
한 그릇 값을 내고 두 그릇을 처먹은 노인네가 자꾸 묻자 노파는 귀찮아하면서 금사방에 대해 읊기 시작했다.
검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괘씸한 놈들이군. 내가 저 황사방을 쫓아내주겠소.”
“하이고… 예예.”
노파가 썩은 미소를 지으며 검선을 바라봤다. 검선이 물을 들이키더니 노파에게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었소. 실로 맛있군. 기회가 되면 또 오리다.”
“예예.”
☆ ☆ ☆
금사방.
말 그대로 사파의 무리.
주로 인신매매나 도박, 기루를 운영하다가 이곳 대정(大靜)까지 넘보고 있는 방파였다.
그런데 대정에는 토착 청년들이 조직한 사조직이 있어 금사방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 사조직의 우두머리는 종남파에서 쫓겨난 무인이었는데 장하송이라는 삼십 대의 남자였다.
장하송은 대정의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금사방과 다투고 있었다. 그러나 금사방이 사파의 고수를 초빙해온다는 소문이 그간 자자했다.
아무래도 대정의 객잔 거리 이권을 두고 싸우는 것이라 다들 긴장하고 있었다.
대정에는 본래 상납금 같은 게 없었다.
장하송은 이권을 지켜주는 대신에 무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즉, 이 상가에서 돈을 벌고 있는 상가 주인들의 자식들이 대거 무관에 들어가 돈을 내고 장하송에게 무공을 배우는 식이었다.
그런 장하송의 무관과 금사방이 또다시 맞붙으려고 하고 있었다.
☆ ☆ ☆
이서휘는 점점 경공을 펼치는 시간이 늘어나 바로 전까지는 사흘 밤낮을 달렸다.
하루를 쉬고 어딘가에 도착한 상태였다. 도중에 물어보니 종남까진 아직 여정이 더 남은 상태였다.
다시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는데 다행히 객잔이 모인 것처럼 보이는 불빛이 전방에 일렁이고 있었다.
‘하루는 쉬어가야겠군. 길도 잘 모르겠고.’
이서휘가 객잔 거리로 진입하는 다리를 건너는 와중이었다. 뒤편에서 땅이 울렸다.
이서휘가 돌아보니 칼을 쥔 흉흉한 무리가 몰려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자가 이서휘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비켜라!”
이서휘는 물론 비키지 않은 채로 다리 위에 서서 몰려오는 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 ☆
검선은 국수집을 나와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간만에 너무 과식을 했나.’
배가 부글부글 거리고 있었다. 산나물과 산토끼도 의심이 갔다. 아니면 갑자기 기름진 국수를 연달아 먹었기 때문일 터.
‘역시 사람은 과욕을 부리면 안 된다.’
검선은 자책하면서 다리 방향으로 분주히 뛰어가는 청년들을 바라봤다. 검선은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가, 서둘러 되돌아와서 국수집 노파에게 뒷간이 어딘지 물었다.
‘뒷간부터 가야겠군.’
검선은 뒷간으로 가서 일단 바지를 내린 다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옷이 한 벌이었기에 무척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 ☆ ☆
이서휘는 흉흉한 무리의 행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다시 호통을 쳤다.
“비키라고 하지 않느냐!”
그때,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소 방주, 자네가 말한 장하송이 저 녀석인가?”
금사방의 소천락(邵天樂) 방주가 불렀다는 사파의 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음속검귀(音速劍鬼) 해일(海一).
삼십 대 초반의 검객.
일종의 해결사(解決士).
입에는 망우초로 보이는 것을 하나 물고 있고, 새카만 어둠이 서 있는 것처럼 무거운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복장과 검마저도 칠흑색….
얇은 검 한 자루를 양팔 사이에 넣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해일이 눈동자만 슬쩍 움직여 이서휘를 살핀 다음에 말했다.
“장하송이 실로 새파란 놈이었구나.”
뒤편에 머물러 있던 소천락 방주가 걸어 나오면서 대꾸했다.
“저 자는 아닙니다.”
해일이 대꾸했다.
“아니라고? 그럼 저 자는 누구냐. 보통 놈이 아닌 것 같은데….”
“글쎄요.”
이서휘가 콧방귀를 끼며 몰려온 자들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걸음을 못 가서 다시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말하는 장하송이 직접 관도들을 이끌고 달려왔던 것.
이서휘는 졸지에 다리 위에서 양측에게 포위된 상태.
장하송이 호통을 내질렀다.
“하하! 금사방주! 뭐 대단한 고수를 초빙했나 했더니 새파란 애송이를 하나 데려왔군.”
이서휘가 침음을 흘렸다.
‘이것들이 새파란 게 죄도 아니고.’
이서휘가 양측을 번갈아 보다가 말을 내뱉었다.
“어이가 없네.”
결국 이서휘가 상황을 정리해줬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일세.”
“이 자식이 말투가 왜 저래? 어린놈이… 일세?”
“미안하다. 미안해. 말투가 이래서.”
이서휘는 어쩐지 사류곡에 다녀온 이후로 전생에 쓰던 말투와 지금 쓰는 말투가 혼란스럽게 섞이고 있었다.
이서휘가 장하송에게 비키라는 식으로 걸어가자 음속검귀 해일이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이 검귀 앞에서 건방지게 등을 돌리다니…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절을 하고 물러가거라. 그럼 보내주마.”
해일이 먼저 분위기를 찍어 누르기 위해 애꿎은 이서휘를 잡고 늘어졌다.
그나마 장하송 측이 사람대접을 해주고 있었다.
덩치가 무척 큰 사내, 장하송이 앞으로 나서서 이서휘에게 말했다.
“이리 오시오. 저 자들의 말은 신경 쓸 필요 없소. 불법이란 불법은 다 저지르는 쓰레기들이니….”
장하송의 말을 들은 이서휘가 걸음을 멈추고 대꾸했다.
“불법? 누가?”
대뜸 이서휘가 반말 비슷하게 말을 꺼내자, 장하송이 헛기침을 한 후에 대꾸했다.
“저 자들… 금사방이오. 이 근방에서 횡포가 심한 자들이오. 무조건 힘으로 해결하고 상납금을 바치라 윽박지르고… 오늘 내가 끝장을 볼 생각이오.”
“아하. 도와드려도 되겠소?”
이서휘의 말에 장하송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고맙지만 가던 길 가시오.”
“아쉽군.”
이서휘가 그제야 금사방을 바라보자, 음속검귀 해일이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도와줘? 거슬리는 놈이군. 귀가 먹혔나? 절을 해야 보내준다 했느니라.”
“아, 그래?”
그대로 지나갈 것 같았던 이서휘가 자세를 돌려 대뜸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홀로 금사방으로 향했다.
뒤편에서 장하송이 외쳤다.
“이보시오!”
다리 위.
이서휘가 홀로 금사방을 막아선 채로 서 있었다.
음속검귀 해일과 금사방주 소천락이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일이 말했다.
“죽으려고 온 게냐? 넌 방금 내 간격(間隔)으로 들어왔다.”
“간격?”
“바람구멍을 내줘야 믿겠느냐?”
그 말에 이서휘가 몇 걸음을 더 걸어가서 말했다. 금사방의 인원은 대략 오십여 명. 그 뒤에도 숨어 있는 자들이 있었다.
이서휘가 금사방 전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는 방금 내 간격으로 들어왔다.”
이서휘가 말과 함께 씨익 웃자, 정적이 잠시 흘렀다.
“…….”
금사방에서 웃음이 전염병처럼 터졌다.
“으하하하하!”
하지만 음속검귀 해일과 금사방주 소천락만 웃지 않고 있었다.
둘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경험과…
이서휘의 분위기와 눈빛을 파악하건대…
이 자는 고수다.
다만 정신이 반쯤 나간?
소천락이 엷은 미소를 짓는 찰나….
검을 품고 있던 해일이 음속(音速, 소리의 속도)이라 불리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검을 뽑아 이서휘의 목을 노렸다.
툭―
하지만 이서휘가 왼손을 들어 해일의 검을 중지와 검지로 멈춰 세웠다.
그와 동시에 소천락이 기합과 함께 바람을 가르는 일권(一拳)을 내질렀다.
이서휘가 어깨를 살짝 뒤로 뺐다가 우장을 내밀어 소천락의 일권을 응징했다.
콰아아아앙!
소천락의 몸이 날아가면서 금사방 무인들을 연달아 쓰러뜨리고, 일부는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둥 난리법석이 일어났다.
여전히 해일의 검은 이서휘의 손가락에 붙잡힌 상태.
검을 빼내기 위해 비틀었다가, 당겼다가 밀었다가 무수히 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장력을 내질러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에 이서휘가 해일의 두 눈을 보며 말했다.
“간격…?”
이서휘가 발검과 함께 뽑은 구성검을 그야말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내밀었다가 해일의 어깨 위에서 멈췄다. 그대로 그었으면 해일은 외팔이가 됐으리라.
대신에 구성검의 검봉에서 검풍(劍風)이 뻗어 나갔다.
이서휘가 내보낸 검풍에 선두에 선 자들이 대번에 쓰러지고 그 여파로 길이 뚫리듯이 금사방의 무인들이 좌우로 밀려났다.
해일이 입에 물고 있던 망우초를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뜨렸다.
이서휘가 말한 간격이 무엇인지 실감하는 중이었다.
금사방의 맨 뒤에 서 있는 자들까지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다.
이서휘가 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건가? 간격이라는 거 말이야.”
그 말과 함께 이서휘가 손가락을 떼자, 그제야 해일이 조용히 검을 회수하면서 대꾸했다.
“물러가겠소.”
음속검귀 해일이 이서휘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뒷걸음을 치자 이서휘가 말했다.
“보내주겠다고 한 적 없다.”
주변이 어느새 고요해졌다.
이서휘의 뒤편에 있던 장하송과 그의 관도들마저 입을 못 열고 있었다.
이서휘가 장하송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서 금사방주를 데려오시오.”
금사방주는 이서휘의 장력에 맞아 정신을 잃은 채로 누워 있었다.
장하송이 그래도 되겠느냐는 눈빛을 보내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소. 데려오시오. 다들 내 간격 안에 있단 말이지.”
이서휘가 은근히 계속 얄밉게 말을 내뱉어도 대꾸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장하송이 용기를 얻더니 문도들과 성큼성큼 걸어가서 쓰러져 있는 금사방주를 둘러업고 다시 돌아왔다. 그 사이에 이서휘는 별다른 표정 없이 금사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인 줄 알았건만….
이서휘가 다시 해일을 가리켰다.
“자네도 이리 오게.”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는지라 이서휘는 자신들보다 다 나이가 어린 것처럼 하대를 하고 있었다.
망설이던 해일이 다가오자 이서휘가 장하송에게 가라는 식으로 턱짓을 했다.
그런 후에 이서휘가 금사방을 향해 말했다.
“그 다음 책임자는 누구인가?”
이서휘의 말에 누군가가 나서서 눈을 치켜뜨며 대꾸했다.
“접니다.”
“자네가 누군데.”
“부방주 장포(張苞)라 합니다.”
그의 말에 이서휘가 홀로 몹쓸 농담으로 받아쳤다.
“장비 장군의 아들이군. 하하하.”
“…….”
아무도 웃지 않았다.
큰 은혜를 입은 하송무관의 관도들마저 이서휘의 썩은 농담에 조용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서휘가 쩝 소리를 내더니 장포에게 말했다.
“부방주….”
“예.”
“금사방에서 벌이고 있는 모든 불법적인 사업을 이 시간부로 정리해라. 예를 들어 상납금을 걷는다던가….”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닌….”
그 말에 이서휘가 덤덤하게 내뱉었다.
“이 자리서 다 죽고 싶은 겐가?”
“그건 아닙니다만.”
“목숨보다 중요하면 계속 해보든가. 정리할 시간은 주겠다. 여기 장 형제가 금사방을 살펴보고 허락하면 그때 방주를 돌려보낼 것이다. 다들 물러가라.”
잠시 침묵으로 일관하던 금사방이 이서휘를 바라보면서 대꾸했다.
“네.”
이서휘가 장하송을 바라보며 말했다.
“며칠 후에 살펴보고 결정하시오. 저 금사방주는 단단히 감금해놓고.”
“알겠소.”
이서휘가 음속검귀 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여기서 간격이 가장 좁은 객잔으로 안내해라. 배가 고프구나.”
해일이 열 받은 표정을 겨우 감추면서 속으로 욕을 삼켰다.
‘젠장…’
장하송이 호탕하게 웃더니 이서휘에게 말했다.
“종남파의 제자였던 장하송이라 하오. 제가 안내해 드리겠소.”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갑시다. 종남파라니… 안 그래도 종남파를 한 번 가보려고 했소.”
“오, 그렇소이까? 잘 됐군!”
이서휘가 장하송의 안내를 받으며 그제야 다리에서 이동했다.
다리 위에서 한 노인이 쭈그려 앉아서 그야말로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이서휘와 장하송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국수집의 뒷간에서 일을 보고 나온 검선이었다.
중간에 일을 보던 것도 끊고 달려온 터라 아직도 복통이 미약하게 남아 있었다.
그 덕분에 표정이 더욱 핼쑥했다.
살펴보니 웬 새파란 놈이 상황을 거의 완벽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죽은 놈 하나 없는데도 분위기를 압도해서 휘어잡은 형국이다.
이서휘의 일행들이 다리 위를 지나다가 쭈그려 앉아 있는 노인네를 힐끗 본 후에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지나갔다.
검선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이서휘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새파란 놈이네… 젊음이 부럽군.’
사람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새파란 놈도 멀어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문득 길을 걷다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이서휘가 다리 위에 쪼그려 앉아 있는 초췌한 노인을 바라보자, 사람들의 시선도 노인을 향했다.
“아는 분입니까?”
“아, 아니오만…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서휘가 노인에게 다가갔다. 검선도 자신이 세웠어야 할 공적을 가로챈 새파란 놈이 다가오자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는 다가갈수록 노인의 눈빛이 참으로 맑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잘 먹지 못했는지 피부가 꺼칠하고, 어딘지 몸도 많이 불편해 보였다.
다른 자들은 그냥 지나쳤지만….
어쩐지 이서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침 이서휘는 지닌 돈도 많았다.
아니,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식사라도 대접을 할까?’
이서휘가 노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후에 입을 열었다.
“어르신… 어디 편찮으십니까?”
검선은 양 손에 기를 끌어올려서 아랫배에 대고 있었다. 이서휘가 다가오자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괜히 콧방귀를 뀌었다.
“흐흥….”
이서휘와 검선이 잠시간 눈을 마주쳤다.
이서휘는 검선의 눈을 가까이서 바라보자, 더욱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눈이 정말 맑으시구나.’
반면에 검선도 이서휘의 눈빛을 바라보면서 떫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살기가 흉흉했던 녀석이로구나.’
이서휘가 안심하라는 것처럼 엷은 미소를 지은 채로 정중하게 말했다.
“혹시 복통이 있으십니까? 체하신 거 같은데요…”
이서휘가 검선의 손을 살펴보려고 자신의 손을 뻗었다. 검선은 청년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서휘가 손을 뻗어서 검선의 손을 붙잡았다.
‘어?’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산 것일까.
자신의 손보다 훨씬 더 많은 굳은살이 손바닥 곳곳에 배어 있었다.
돌덩이를 만지는 느낌이다.
그 때문에 이서휘는 대번에 노인이 무슨 일을 하고 살았는지 알아챘다.
‘검객…?’
노인이 천천히 손을 빼더니 말을 내뱉었다.
“아마….”
그 첫마디에 이서휘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검선이 해맑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국수 때문인 것도 같기도 하고 말이야. 두 그릇을 급하게 먹었거든. 아니면 산토끼를 너무 급하게 먹었나봐. 원래는 내가 저놈들을 쫓아내려고 했는데 자네가 방해… 방해는 아니군. 잘했네. 다친 사람도 없고. 훌륭하군.”
검선이 자신의 공적을 가로 챈 이서휘에 대한 감정을 훌훌 털어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이서휘는 어느새 양 무릎을 바닥에 붙이고 검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의 두 눈은 어느새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이서휘는 검선과 재회했다는 기쁨과 난생처음으로 스승의 얼굴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있었다.
재회의 기쁨만 해도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스승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감정은 상상 이상으로 이서휘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숙인 이서휘가 겨우 눈물을 참았다. 하지만 검선을 당황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으니까.
이서휘도 전생에는 검선처럼 천하를 방랑하고 다녔다. 더군다나 눈까지 멀었었으니 그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불쌍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서휘는 검선의 표정을 보자마자 검선이 전생에 자신을 왜 거둬줬는지 일순간에 이해했다.
‘원래 그러신 분이다.’
검선의 마음이 곧 선(善)이었다.
정의로운 자.
정의를 부르짖는 자.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 많다.
하지만 검선은 삶 자체가 선이자 정의였다. 누군가가 검선처럼 강해질 수는 있겠지만, 검선처럼 살아가긴 무척 힘들 것이다.
이서휘 자신은 운이 좋아 그 인연, 그 정의, 그의 선에 닿았던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 인연으로 이서휘는 얼마나 다른 인생을 살았던가.
누구보다 더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눈이 먼 무림인이 어떡하면 더 강해질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하고.
심지어 이서휘에게 맞는 무공까지 창안해서 가르쳤던 검선이다.
[아직이다. 더 수련하거라. 지금 나서면 힘들 것이다. 서휘야….]
그 걱정과… 그 경고와… 그 마음마저 무시하고 무림으로 다시 나섰던 이서휘가 아니던가.
이서휘는 시일이 흐른 후 사패의 일원으로 불리며 한 지역의 패자처럼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스승의 걱정대로 이서휘는 단 한 번의 패배로 모든 것을 잃었으니까.
그랬던 이서휘가 검선을 바라보는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스승님, 이 못난 놈이 다시 스승님에게 돌아왔습니다.’
검선은 이서휘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는 것은 아는 대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살아가는 검선이다.
검선이 편한 얼굴로 장하송의 일행과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자네들과….”
“어르신! 함께 가시죠.”
이서휘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검선이 이서휘의 손을 툭 치면서 홀로 일어났다.
“왜 자꾸 노인 취급을 하는 게야? 남자 놈이 자꾸 손을 잡으려고 하지 않나.”
검선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장하송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이서휘는 “흐흐.” 하고 웃으면서 검선을 바라봤다.
펑퍼짐한 잿빛 장포.
장포 위로 칠흑색의 장검이 살짝 보였다.
검선이 사용하고… 그리고 자신이 이어받아 사용했던 칠흑검이 보이자 이서휘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이서휘는 자신의 구성검을 바라봤다.
‘알아보실까?’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스승은 어린 시절 이후에는 검성과 별다른 왕래가 없었을 것이다. 이서휘는 구화산 석실에서 검성이 남긴 말을 떠올렸다.
[무결이는 네가 잘 돌봐다오. 나 때문에 외롭게 살았을 것이다.]
이서휘가 하늘을 흘낏 바라보며 그제야 대꾸했다.
‘이제 걱정 마십시오.’
한편….
검선의 감상은 어떨까.
곁눈질로 종종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놈 참 때깔이 좋구나.’
바르게 걷는 모습을 보아하니 또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자세도 좋고.’
다리에 쭈그려 앉아서 청년이 분쟁을 해결하는 상황을 귀로 들었던 검선이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했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으나 무언가 좌중을 압도하는 성격을 지녔나 보다 하고 추측했다.
‘어리숙하지도 않은 것 같고.’
지켜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검선이 장하송을 따라가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서휘 때문이었다.
검선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양손을 비볐다.
‘이놈을 한 번 제자로 삼아봐야겠는데.’
검선의 마음이 마냥 설레이고 있었다.
‘그냥 내가 확 검선이라고 밝힐까? 아니지. 요새 애들이 나에 대해 알기나 하려나… 장문인들 정도는 되어야 나에 대해 좀 알 텐데 말이지.’
그때 이서휘가 객잔으로 팔을 뻗더니 검선에게 말했다.
“어르신,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 말에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굳혔다.
‘무엇보다도 예의가 참 바르단 말이야. 마음에 들어!’
대정제일장(大靜第一莊).
거창한 이름처럼 넓고 으리으리한 객잔이었다. 장하송은 객잔에 들어가자마자 주인장을 부르는 한편, 이서휘를 사람들에게 떠들썩하게 소개하면서 대번에 금사방을 무찔렀다는 둥 이서휘를 칭송하느라 침을 마구 튀기고 있었다.
대정제일장(大靜第一莊)의 아들도 장하송의 제자인 모양이었다.
오래지 않아 음식과 술이 잔뜩 밀려왔다.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여전히 검선은 뒷전이었다.
사람들이 나서서 이서휘를 상석에 앉히려고 하자, 이서휘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사양했다.
“됐소. 됐소. 어허, 아니라니까. 그냥 여기 앉겠소. 장 형제가 앉으시오.”
이서휘는 먼저 의자를 하나 빼내어 검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르신, 먼저 앉으십시오.”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앉자, 이서휘가 음속검귀 해일에게 말했다.
“자네는 내 왼쪽에 앉게.”
해일이 자리에 앉으며 이서휘를 잠시 노려봤다. 강하다는 것이야 잘 알고 있으나 어린놈이 자꾸 하대하자 기분이 불쾌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해일이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해일이 말을 꺼내자마자 이서휘가 대꾸했다.
“뭐? 왜?”
이서휘가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 해일은 말이 쏙 들어갔다. 공연히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해일이 기어들어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직 존함을 알지 못하여….”
장하송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통성명을 아니지… 존함을 알려주십시오!”
사람들이 일제히 이서휘를 바라봤다. 검선마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전 군림맹의 이서휘라 합니다.”
“오오….”
뭔가 감탄사가 흘러나오긴 했는데 태반이 모르는 눈치였다.
“군림맹에서 어찌 섬서까지 오셨습니까?”
그 질문에 갑자기 좌중이 고요해졌다. 꽤 먼 거리다. 더군다나 들리는 풍문이 있었다. 정마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도는 참이었다.
검선도 궁금하긴 마찬가지.
‘그렇군. 안휘에서 여기까지….’
이서휘는 처음 보는 자들이 섞여 있어 속내를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백검문과 백도맹의 보고를 이용하기로 했다.
“감숙에서 마교의 총본산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호오…”
검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퍼트린 이야기다.
‘검왕 노인네가 제법 손을 빨리 썼군.’
이서휘의 말이 이어졌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나 변고가 발생했고….”
이서휘는 검선을 바라봤다.
‘스스로 밝히지 않는 이상 검선이라는 칭호는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겠다.’
“어쨌든 군림맹에선 감숙을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한데… 일전에 백도맹에서는 섬서를 유력한 마교의 본거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섬서면 종남과 화산이 있는 곳. 무슨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여,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 이곳에 온 셈입니다.”
이서휘의 전략적인 언급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검선은 이서휘의 말이 무척 흥미로웠다.
“허, 재미있는 의견이군. 나중에 자네는 나와 이야기 좀 해야겠어.”
“알겠습니다.”
그때 분위기의 흐름을 깨고 누군가가 탁자를 치며 말했다.
“이서휘!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혹시 그 점창파 장문인을 꺾었다는 군림맹의 이 대주가 아니십니까?”
“뭐라고!”
“점창파 장문인? 여서문?”
“정말입니까?”
검선이 턱을 매만지면서 이서휘를 새삼 다시 바라봤다.
‘여서문을 꺾었단 말인가? 저 나이에? 여서문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닌데.’
사람들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이서휘를 바라보고, 이서휘에게 덤비려고 했었던 음속검귀 해일은 침을 삼키고 있었다.
‘점창파 장문인을 어찌 꺾는다는 말인가. 말도 안 돼.’
하지만 이서휘는 덤덤한 얼굴로 대꾸했다.
“뭐, 운이 좋아 그렇게 됐습니다.”
이서휘의 말에 검선이 “호오…”를 연발하며 생각했다.
‘이놈 물건이로구나!’
장하송이 대뜸 소리를 질렀다.
“저 금사방 놈들을 대번에 물리칠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 느꼈습니다! 오늘 이 대협에게 거하게 대접을 해야겠소!”
“그럽시다!”
“이 대협!”
“이 대협!”
이서휘가 마른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스승이 처리하려고 했던 놈들이다. 한데, 이서휘가 슬쩍 바라보니 검선도 사람들을 따라 웃음을 짓고 있었다.
먹고 마시는 와중에 이서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옆에 있는 검선의 시종처럼 행세하면서 젓가락이 떨어지면 새 젓가락을 가져오고,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검선 앞에 대령하는 둥 누가 봐도 이상하게 행동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검선에게 시선이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장하송이 검선에게 말했다.
“한데 어르신은 처음 뵙습니다. 이곳 분이 아니신 모양입니다.”
“유랑하는 몸이오.”
“그나저나 존함을 여쭙지도 못했습니다.”
그 말에 이서휘도 퍼뜩 놀라서 검선을 바라봤다. 자신이야 검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나, 이 자들이 검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검선이 히죽 웃었다.
자신의 입으로 내가 검선이오,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사실은 이 많은 사람들과 이런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검선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다만 이서휘라는 청년이 궁금해 함께 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검선이 덤덤하게 말했다.
“세상일 잘 모르는 촌부(村夫)일 뿐이네.”
그 말에 이서휘가 홀로 빙긋 웃었다. 검선이 늘 대답하는 말이었기 때문.
그때, 누군가가 검선의 등에 장검 한 자루가 매달려 있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인장께서도 검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언뜻 들으면 기분 나쁘게 해석할 수 있는 말이었으나 검선은 웃으면서 대꾸했다.
“검을 어찌 좋아만 하겠나?”
검선의 그 한 마디에 사람들은 그제야 검선을 새삼 바라보면서 질문을 더 던졌다.
“그럼요?”
검선이 말했다.
“검은 애증의 관계일세. 죽이고 살리는 경계를 가르는 놈이니 좋아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네.”
누군가 대꾸했다.
“그럼 어찌 생각해야 합니까?”
검선이 이 자리에 잔뜩 모인 후배들에게 잔잔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내처럼 대해야지. 예뻐도 하고 가끔 무서워하기도 하고. 그래야 오래가는 법.”
“하하하.”
사람들이 검선의 절묘한 비유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서휘는 감회가 남달랐다. 스승이 똥을 보고 메주라 해도 믿을 놈이 이서휘였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아내라…
예뻐해야 하고, 무서워하기도 해야 한다.
말을 곱씹던 이서휘가 홀로 진중하게 대꾸했다.
“실로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이서휘와 검선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런데 두 분은 오늘 처음 보십니까?”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누군가가 말했다.
“함께 오래 지낸 스승과 제자 같습니다. 어쩐지 느낌이….”
이서휘는 속이 철렁하고, 검선은 실실 웃고 있었다.
“그런가?”
그러자 검선도 이서휘의 사문이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사문(師門)이 어디인가?”
검선의 말에 잠시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 이서휘가 침음을 흘렸다.
사문이 당신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서휘가 대꾸했다.
“저는….”
사람들이 죄다 눈을 빛냈다.
대체 이 젊은 고수의 사문이 어디일까.
군림맹은 말 그대로 맹이지, 사문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었다. 혹시 세가의 제자일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문파? 궁금함이 파도를 치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전 낭인 출신이라 딱히 사문이라고 부를 곳이 애매합니다… 여기저기서 많이 배웠습니다만 특히….”
말을 하다 잠시 멈추고 이서휘가 검선의 눈치를 한 번 살핀 다음에 말을 이었다.
“구화산에서 매우 중요한 기연을 얻었습니다만….”
아니나 다를까 검선의 반응이 있었다.
“구화산?”
“네.”
검선은 어쩐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구화산이라… 뭐 어쨌든 낭인이라는 말이지? 스승이라 부를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검선은 이서휘의 스승이 있는지 없는지가 가장 중요한 모양이었다. 검선이 눈을 껌벅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탐나는 놈이야….’
일단 지켜본 바로는 똑똑한 청년이다. 더군다나 사파의 무리를 처리하는 수법이 정도(正道)에서 크게 어긋나는 점이 없었다.
‘간만에 술을 한 잔 마셔야겠군.’
여태 물만 마시던 검선이 빈 잔으로 손을 뻗자, 냉큼 일어난 이서휘가 양손으로 조심히 술을 한 잔 따랐다.
졸졸졸….
검선이 술잔을 들더니 이서휘에게 말했다.
“한잔 같이하세.”
“네!”
이서휘가 자작을 하려고 하자, 검선이 술병을 낚아채더니 손수 이서휘의 잔을 채웠다.
“젊은 청년에게 협객의 풍모가 느껴지니 검을 오래 잡았던 선배의 입장에서 기분이 그야말로 좋아지는군. 마시게나.”
이곳에서 검선을 인정하는 사람은 이서휘가 유일했다. 이서휘는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무어라 말하든 간에 검선은 자신의 스승이라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이든 혹은 어느 날이 되었든 간에 자신이 검선보다 강해졌을지라도…
스승은 영원히 스승인 것이다.
그렇게 검선과 이서휘가 함께 술을 들이켰다.
검선이 이서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놈을 어떻게 제자로 만들까… 내가 영 볼 품 없어 보일 것인데….’
이서휘도 그 순간, 검선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
이서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있는 금사방주 소천락을 바라봤다.
“일어났는가?”
“으음….”
소천락의 얼굴에 미혹이 가득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여기는 대체 어디고.’
하지만 이내 소천락은 음속검귀 해일이 굳은 자세와 딱딱한 표정으로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다.
소천락이 이서휘를 바라봤다.
‘맞다. 저 자의 장력에 맞아서….’
소천락이 넌지시 해일에게 말했다.
“광승(狂僧)과 냉심선자(冷心仙子)께서 기다리지 않겠소?”
광승과 냉심선자는 음속검귀와 함께 다니는 해결사 무리였다.
구성이 나름 화려했다.
불가, 도가, 속가를 대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본래는 광승이 불가에 관련된 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고, 그 밑에 냉심선자라는 여인이 도가의 일을 해결했다. 그리고 여기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음속검귀 해일이 세속의 일을 해결하는 식이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돈만 받으면 뭐든지 끼어 들어서 해결사 노릇을 해왔던 세 사람이다.
어쨌든 소천락의 말은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해일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소 방주가 정신을 못 차렸군.’
그 말에 오히려 관심을 표하는 것은 검선이었다.
“또 누가 오기로 하셨는가?”
검선의 말에 좌중이 고요해졌다. 그 정적을 깨고 장하송이 말했다.
“이보시오. 소 방주, 아직 정신을 못 차리셨소? 당신은 금사방이 불법적인 일을 모조리 접을 때까지 우리와 계셔야겠소.”
그 순간… 검선이 대정제일장의 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물론 이서휘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순간 바람이 휘몰아치고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바깥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누가 우리 셋째를 핍박하느냐….”
그 말에 검선이 미소를 지었다.
“손님이 더 있었군.”
이서휘도 해일을 보면서 웃었다.
“이제 외롭진 않겠네.”
밖으로 나가려는 이서휘를 보며 해일이 조용히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준이 너무 달라. 아무리 형님과 누님이….’
검선이 이서휘에게 말했다.
“자네 나와 함께 나가볼까? 이야기도 할 겸 말이야.”
“그럴까요?”
이서휘도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보니 별호에 어울리는 남녀가 서 있었다.
광승과 냉심선자.
한데 대정제일장으로 사람이 몰려갔다는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하송무관 소속의 청년을 무참하게 때려놓은 모양이었다. 장하송을 비롯한 하송무관의 청년들이 실신한 자를 바라보며 외쳤다.
“이환아!”
“이런 쳐 죽일 놈들이…!”
광승이 조소를 떠올리고 있다가 청년의 뒷덜미를 붙잡고 그대로 던졌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자 검선이 한 걸음 나서서 손을 뻗었다. 날아오던 청년이 공중에서 속도가 대번에 줄어들었다.
검선이 아무렇지도 않게 청년을 받아든 다음에 장하송에게 넘기자….
그와 동시에 냉심선자라는 여인이 소매를 휘둘러 검선과 청년에게 수십 개의 작은 바늘을 쏟아냈다.
이때, 냉소를 머금은 이서휘가 구성검을 한 번 휘두르니 엷은 검막이 검선 앞에 펼쳐졌다.
투두두둑―
그 광경에 광승이 입꼬리를 올렸다.
“장하송이라는 놈이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일단 소 방주부터 내놓거라.”
냉심선자가 말했다.
“우리 막내는 어디 있느냐?”
그 말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해일이 나지막이 말했다.
“형님 그리고 누님… 그냥 제발 돌아가시오. 일 일으키지 마시고.”
냉심선자가 그 말에 오히려 앞으로 나섰다. 냉심선자는 소매가 넓은 검붉은 장삼(長衫)을 걸치고 있었는데 별호답게 차가운 표정과 살기어린 눈빛을 머금고 있었다.
검선이 이서휘를 보며 말했다.
“어찌 생각하나? 저 둘을….”
그 말에 이서휘가 광승과 냉심선자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아직 배울 게 많은 자들이지요.”
“그런가? 자네는?”
검선이 바라보자 이서휘가 솔직하게 대꾸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류곡에서 있던 깨달음으로 오료의 경지에 접어든 이서휘다. 그 어느 곳에서도 일대종사라 불릴 정도의 무위를 갖춘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서휘는 검선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형식으로 말했다.
왜냐하면 검선의 진가(眞價)는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이서휘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이서휘와 검선의 성격은 비슷한 면이 많았다.
배울 게 있다면 그 누구에게라도 가르침을 청할 수 있는 성격이다.
그런 성격이었으니 이서휘가 전생의 스승에게 다시 못 배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당대의 이서휘가 다시 검선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대종사와 대종사가 만난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었다.
검선이 가진 무(武)의 세계.
검선이 지닌 너른 마음의 세계.
이서휘가 배울 것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암연심검이 검선으로부터 나와 이서휘에게 전해졌지만 당대에는 이서휘가 홀로 사용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스승이 아직 만들지 않았던 무공이었으니까. 물론 그 바탕은 검선으로부터 나온 것. 앞으로 이서휘가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자세히 보면 무언가 이상하다 느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서휘는 그마저도 나름 훌륭하게 피해나갈 방법이 하나 있었다.
구화산의 석실.
그곳에서도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어쨌든 암연심검은 두 눈을 잃은 자에게 쓰라고 가르쳐 준 무공이다.
검선의 무공은 그보다 더 범위가 넓고 자유분방했다.
때문에 암연심검을 바탕으로 성장하여 오료의 경지에 든 이서휘는 또 다시 검선에게 가르침을 청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이서휘를 가르치게 될 검선 또한 느끼는 바가 적지 않을 터.
이서휘는 스승과 자신의 조합이 무림사에 길이 남을 만남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검선이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도 이서휘에게 기회를 빼앗기면 안 된다는 심정을 지니고 있었다.
본래 이런 식으로 자주 나서는 검선이 아니었으나…
이서휘가 탐이 나서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광승과 냉심선자는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방주 장포로부터 새파란 놈이 엄청난 무위를 발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
하지만, 사람 좋아 보이는 노인 한 명이 걸어나오자 코웃음을 연발했다.
“노인장… 들어가시오. 우리는 저 놈을 상대하려고 했소.”
장하송마저 걱정이 한가득이다. 재빨리 이서휘 옆으로 와서 속삭였다.
“이 대주님, 나서주십시오. 어찌 노인장을 보내시는 겁니까? 저 두 사람이 검귀라는 자보다 훨씬 강해 보입니다만….”
다른 사람들마저 이서휘에게 빨리 나서달라는 것처럼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서휘가 알아듣게 설명을 해줬다.
“형제들… 걱정하지 마시오. 여러분들이 제 실력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처럼… 저 선배님 또한….”
그때, 이서휘가 말을 하다 말고 시선을 돌렸다.
광승과 냉심선자가 달려들었다.
한데 검선은 검을 뽑지도 않은 채로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는 탄성을 내지르고.
누군가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반면에 이서휘는 두 눈을 번쩍 뜨고 있었다.
이서휘 또한 스승이 직접 무위를 펼치는 것을 처음 바라보는 중이다. 스승이 펼치는 무공도 보지 못한 채, 말로 전하는 것만 귀로 듣고 무공을 익혔던 이서휘다.
이제는 바라보면서 따라할 수 있었다.
이제는 바라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검선의 무공마저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서휘의 얼굴에 미소가 감도는 가운데….
검선이 광승과 냉심선자에게 달려들었다. 이 순간, 지켜보던 자들이 저마다 입을 벌렸다.
광승과 냉심선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광승은 소뇌음사(小雷音寺) 출신으로만 추측될 뿐, 이렇다 할 무공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냉심선자도 마찬가지.
한 줄기 한랭한 장력을 내뱉고 있었으나, 내뱉을 때마다 어쩐지 광승에게 장력을 쏟아내고 있었다.
무공을 모르는 자들이 바라보면 광승과 냉심선자가 싸우고 있고, 검선은 도망을 다니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두 눈을 부릅뜨고 검선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고 있었다.
검선은 두 사람을 꾸짖고 있었다.
보라, 너희 둘의 이 악독한 출수를….
광승이 내지른 강맹한 금강반야장(金剛般若掌)은 냉심선자의 너풀거리는 옷을 갈기갈기 찢어내고 있었다.
검선은 광승의 어깨를 밀었을 뿐이었다.
냉심선자가 버럭 화를 냈다.
“자꾸 뭐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냉심선자가 내지른 한맥결장(寒脈決掌)도 퍼버벅 소리와 함께 광승의 아랫배와 낭심에 쏟아지고 있었다.
검선의 손이 냉심선자의 옷자락에 살짝 닿았을 뿐이었다. 그러자 오히려 더 성을 내는 쪽은 광승이었다.
“지금 뭐하는 게야? 선자, 방금 내 낭심을 공격했나?”
그 말에 냉심선자가 말했다.
“흥, 둘 다 평정심을 찾자고요. 이 노인네가 그렇게 만든 것을 뻔히 보고도 그런….”
검선이 여유롭게 말을 받아쳤다.
“아직 두 사람이 말할 여유가 있나 보군.”
검선이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이서휘쪽으로 훌쩍 솟구쳐서 내려섰다.
이서휘가 씨익 웃으면서 스승의 다음 동작을 기다렸다.
‘이제 건곤상양검을 제 두 눈으로 보게 됐군요. 제가 일찌감치 포기했던… 아니면 장포를 사용하시려나.’
스승이 무복 위에 걸치고 있는 장포를 사용해 펼치는 무공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서휘다. 다리에서 스승을 봤을 때는 쭈그려 앉아 있어서 펑퍼짐한 복장을 확인하지 못했었다.
검선은 건곤상양검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제자로 낙점해둔 이서휘가 보고 있지 않은가.
이서휘는 검객이니 검을 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터.
고로….
검선이 드디어 칠흑검을 뽑았다.
광승과 냉심선자는 범상치 않은 노인네가 그제야 검을 뽑아들자 잔뜩 위축된 상황.
검선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건곤상양검(乾坤徜徉劍)이라 하네.”
건곤은 하늘과 땅을 말하는 거창한 단어고, 상양은 천천히 여기저기를 거닌다는 뜻을 가진 소박한 말이었다. 검선이 지향하는 바를 나타내는 함축적인 말이었다.
하늘과 땅처럼 높은 무위를 추구하되….
자유롭고 소박하게 천하를 주유하는 삶.
그 뜻을 검에 담은 것이다.
검선이 휘두른 칠흑검에서 도대체 어떤 궤적인지 파악조차 할 수 없는 검풍이 휘몰아치더니 광승과 냉심선자를 휘감았다.
두 사람은 검선의 공격을 몸으로 받고 나서야 검풍의 정체를 깨달았다. 검으로는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한 회오리 그 자체였다. 두둥실 떠오른 두 사람이 공중에서 태극의 궤적을 그리더니 앞뒤로 교차해 날아갔다.
냉심선자는 이서휘쪽으로, 광승은 반대방향으로.
단 일검에 죽일 수도 있었는데, 검선이 살생을 꺼려 봐준 것임을 어찌 모르는 것일까?
냉심선자는 이서휘에게 날아오는 와중에 화들짝 놀라서 그만 쌍장을 일으켰다.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나름 호승심도 치밀었다.
스승의 힘이 담겨 날아오는 자가 아니던가.
스승이 살려놓은 자들을 자기 손으로 때려죽일 수는 없는 노릇.
이서휘도 검풍으로 대응했다.
이서휘가 발검과 함께 구성검을 휘두르자마자 검집에 다시 꽂았다.
발검과 납검만으로도 굉음이 터졌다.
쐐애애애앵!
무시무시한 검풍이 쌍장을 내민 냉심선자의 정수리로 쏟아지더니, 순식간에 날아오던 방향을 바꿔서 광승이 날아간 쪽으로 냉심선자가 되돌아갔다.
“헉!”
좌중에 감돌고 있는 충격을 어찌 말해야 할까? 한참이 지나서야 광승이 바닥에 떨어지고, 거의 연달아서 냉심선자가 떨어졌다.
하지만 이서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냉심선자는 이서휘의 검풍에 너풀거리던 옷이 좌우로 찢어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검기로 착각하고 검풍을 맞는 순간에 기절한 상태.
그 광경을 보자마자 검선이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돌렸다.
“어이쿠, 이런.”
사람들이 보기엔 검선이 날려버린 사람을 이서휘가 받아쳐서 돌려보냈으니 이서휘의 무위가 더 대단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야말로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서휘의 검풍은 여전히 예리한 면이 있어 냉심선자를 선 자세에서 두 동강 낼 뻔했던 반면에 검선이 내보낸 선풍은 그야말로 자연적으로 발생한 회오리와 같았다. 애초에 살생하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경지를 내보였던 것.
물론 그 차이를 미세하게 깨달을 수 있는 무위를 갖춘 자도 이곳에선 이서휘가 유일했다.
그나저나 검선마저 이서휘의 무위에 놀라고 있었다.
“자네….”
“네, 어르신.”
“솔직히 약간 충격을 받았네.”
이서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순간, 검선은 과연 자신이 이 청년에게 가르칠 게 있을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반드시 제자로 맞이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이어받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 정도였으니까.
검선이 불현듯 한숨을 지으며 이서휘에게 산책이나 하자는 것처럼 손짓을 했다.
“잠깐 걸을까?”
“네.”
두 사람은 충격에 빠진 사람들을 뒤로 하고 시간상으로는 무척 오랜만에 함께 산책을 나섰다.
검선이 뒷짐을 지면서 천천히 걷자, 이서휘가 그보다 약간 뒤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따라서 걸었다.
그러자 검선이 손짓을 하며 말했다.
“옆으로 오게. 함께 걷지.”
“그러겠습니다.”
검선이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고, 길가에 핀 이름 모를 잡초를 구경하다가 이서휘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 자네와 같은 젊은 고수는 태어나서 처음 보네. 내 젊은 시절보다 나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이서휘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잠시 말을 멈춘 검선이 그답지 않게 한숨을 살짝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 혹시 검성(劒聖) 어르신을 뵈었나?”
“아…”
이서휘가 탄성을 내질렀다.
검선이 어찌 모르겠는가.
세상에 이 정도 무위를 젊은 나이게 갖추려면 검성을 만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으리라 예상한 것일까.
아니면, 이서휘가 구화산을 언급했을 때 눈치를 챈 것일까.
이서휘도 이제 어쩔 수 없었다.
검성 그리고 검선, 그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결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네, 구화산에서 검성 어르신을 뵈었습니다….”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랬군. 그러면 자네의 무위가 조금 납득이 되는군. 우리 둘은 오늘 만났지만 이미 인연이 있는 사이였군 그래.”
두 사람이 인연이라는 말을 각자 떠올리면서 걷기 좋은 산책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서휘는 스승의 말마따나 새삼 인생의 묘한 인연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는 검선도 마찬가지였다.
검선의 말이 이서휘에게 와 닿았다.
‘인연이 있는 사이.’
하지만 걸음을 옮기던 검선이 때때로 한숨을 내쉬었다. 검선에게 검성이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무거운 주제였기 때문이다.
전생의 이서휘에게도 털어놓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서휘가 검성을 만났다고 하자 검선도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물꼬가 트인 셈이었다.
이서휘는 스승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묵묵히 기다렸다.
함께 걷는 와중에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다 전한 상태였다.
우연히 구화산에서 석실을 찾아냈었고, 두 번째 방문했을 때 검성과 만날 수 있었다고….
검성이 특별히 검선 진무결을 언급하면서 이서휘에게 돌봐달라는 말을 했었다는 것은 아직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검선이 느닷없이 이서휘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세상에서 가장 기쁨을 주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이서휘는 검선의 복잡한 마음을 눈치 채고 덤덤하게 대꾸했다.
“물론 가족이겠지요. 아내와 자식…. 부모와 형제….”
검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주는 사람 또한 가족이지.”
“그렇습니다.”
“검성 어르신은 내게 고통을 주는 가족이었네.”
이렇게 털어놓으면서까지…
아직까지도, 아버지란 말을 언급하지 않는 검선이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검선이 덤덤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자네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참 웃긴 일이야.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드는군.”
“…….”
“이런 이야기를 자네가 아니면 누구에게 하겠나? 자네는 검성 어르신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배…. 그리도 나도 검성 어르신과 인연이 있으니….”
이서휘는 숨을 죽이고, 검선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검선이 걸음을 멈추며 말을 이었다.
“돌아가셨다고 하더군. 어떠했나?”
“글쎄요. 그것을 어찌 죽음이라 표현하겠습니까. 등선(登仙)이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말이 없겠습니다.”
“등선이라… 어쨌든 난 찾아가 보지도 않았네. 지금도 그럴 생각이 없고.”
“네.”
“자네는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나?”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버지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검선이 눈을 크게 뜨며 대꾸했다.
“그런가? 마음이 아프겠군.”
“모르겠습니다. 그냥 아련합니다.”
“검성께서는… 여인이 많았네. 무림이 추앙하는 인물… 평생, 무림의 정점에 서 있던 자. 하지만 돌보지 않는 가족이 많았지. 사람이 완벽할 수 없다지만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검선이 말을 끝맺지 못하자, 이서휘도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검선이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제 아비가 검성인지도 모르는 자식들이 많았을 게야. 버림받은 가족이 겪는 고통이 어떤지, 자네는 모를 거야.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도 늙게 되니 어쩐지 이해가 되더군.”
“이해가 되셨다고요?”
“이해가 되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지.”
“또 다른 문제라 하시면…”
짐짓 모른 척을 하고 있었으나, 또 다른 문제라 언급하는 검선의 마음을 이서휘도 잘 알고 있었다.
검선이 말을 이었다.
“가족을 갖는다는 게 두려웠네. 지금은 그런 생각조차 잊고 살았네만….”
바람이 한줄기 불어왔다.
검선도 한줄기 바람처럼 살았다.
머무는 곳 없이….
함께 지내야 할 사람을 만들지 않고….
천하를 주유했다.
전생에는 이서휘가 제자였고, 벗이었고, 가족이었다.
이서휘도 마찬가지였다.
검선이 스승이자, 벗이자, 가족이었다.
그 때를 떠올리면서 이서휘가 미소를 지었다.
검선의 마음은 이서휘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 속의 두려움마저 이서휘 또한 비슷하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다시 회귀하자마자 옥의림에게 달려가지 못했던 이유가 그런 것이리라.
내가 소중한 사람을 지켜낼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선 이서휘도 검선처럼 자신이 없었다.
언제 부러질지 모르는 검(劍)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미루고, 또 도망 다녔다.
강해지자.
강한 사람이 되자.
사람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하자.
외롭게 버티면서 자신이 성장하길 기다렸던 이서휘다.
그런 이서휘가 어찌 검선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두 사람이 다시 길을 걷다가, 검선이 웃으며 말했다.
“주책없지? 자네에게 별 말을 다하는군. 내가….”
검선이 쑥스러워하자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얼마 전 일입니다. 무척 기이한 경험을 했었습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놓였던 느낌이랄까요.”
이번에는 검선이 이서휘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고, 이서휘가 말을 이어 나갔다.
“기억날 리가 없는 아버지가 칼 한 자루를 쥐고 서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저는 강보에 싸여 있는 아기였지요. 그때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 봤습니다. 기억날 리가 없건만 저 분이 제 아버지임을 대번에 깨달았습니다. 저는 칠흑같은 어둠에 묻혀 있었는데, 제가 쥔 검으로 빛을 밝혀 보게 된 과거의 장면들이었습니다.”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를 검선에게 하고 있었으나, 검선은 묵묵하게 이서휘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서휘가 말을 이어 나갔다.
“아버지는 칼을 한 자루 쥐고서는 어디론가 뛰어가서 싸우시더군요. 동료들과… 최후의 순간까지 말이죠. 어떤 아버지였을까, 왜 싸우셨을까, 도망치면 되지 않았을까… 이해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만.”
그 말과 함께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마지막으로 본 그 표정을 떠올려 보니… 알겠더군요. 도망칠 수 없는 일이고, 싸워야 하는 일이고, 저를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하시다고… 표정을 보니 다 이해가 됐습니다.”
이서휘의 말에 이번에는 검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속내를 훌훌 털어놓았다.
검선의 소탈함과 이서휘의 솔직함이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대화였을 것이다.
검선이 말했다.
“자네가 겪었다던 그 현상… 흥미롭군. 훌륭한 아버지였을 것이네. 가족을 두고 나선 일이니 그 마음의 단단함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어찌 감히 따라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가족을 남겨놓고 나쁜 일에 목숨을 걸겠다고 떠나지 않는 동물이야. 분명히 필요한 일이고 훌륭한 일이었을 게야.”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서휘의 대꾸에 잠시 고민하던 검선이 이서휘의 기도를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한데, 그 자네가 겪었다는 현상 말이네.”
“네.”
“불가(佛家)의 회광반조(回光返照) 현상과 비슷하군.”
“회광반조요?”
검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보통은 사람이 죽기 직전에 기운을 돌이키는 현상을 말할 때 언급하는 말이지만 실은 불가의 선종(禪宗)에서 언급하는 해석이 내 마음에는 더 맞네.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이켜 보고, 진실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네. 불가의 스님이라면 회광반조 현상을 겪으면서 불성(佛性)을 발견한다고 봐야겠지.”
검선의 말에 이서휘의 두 눈이 커졌다. 검선이 말했다.
“하지만 자네는 무(武)를 추구하는 사람이니 불성과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을 게야… 어땠나?”
이서휘가 침을 삼켰다. 더불어 소름이 끼쳤다.
회광(回光), 즉 빛이 돌아오고….
반조(返照), 새롭게 비추다….
해석이 무궁무진할 수 있는 단어였으나 검선의 설명을 듣고 보니 사류곡에서 느꼈던 그 현상과 무척 흡사했다.
검선의 말대로 그 직후에 이서휘는 오료의 경지에 진입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말씀하신 깨달음… 적지 않았습니다.”
“대단하군. 축하하네. 회광반조라니… 이는 무림인들이 무공이나 심법을 익히다가 깨달음을 얻을 때 겪는 무아지경(無我之境)이나 삼화취정(三花聚頂)을 넘어서는 경지일세…”
“삼화취정이요?”
삼화취정은 운기조식을 할 때 머리 위에 세 개의 꽃봉오리와 같은 환영이 피어나는 것을 말했다.
이서휘도 들은 적은 있으나 그 같은 현상을 무림 고수들이 일일이 겪을 것이라고 기대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흑수(黑水)에서 피어난 거대한 백색의 꽃이 꽃봉오리를 터트리는 풍경을 스스로 재현하지 않았던가?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삼화취정보다 상위 단계일 것이라는 검선의 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검선은 이서휘가 겪은 환상을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도 무척이나 근접하게 추측하고 있었다.
검선의 말이 이어지고, 이서휘가 조용히 경청했다.
“회광반조는 무림인들이 등봉조극(登峰造極)이라 말하는 경지에 준하는 깨달음일세. 회광반조와 등봉조극 이후의 경지는 그야말로 전설에나 회자되는 경지. 그렇다면 자네는 이미 나와 같은 선(線)에 서 있다는 말이군.”
검선에게서 더 이상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의 극찬이 이서휘에게 쏟아졌다.
도대체 몇 번의 소름이 등줄기에 솟구쳤던 것일까.
이서휘는 자신의 깨달음을 설명해주는 검선의 말에 놀랐고, 이를 통해 스승도 이미 한참 전에 오료의 경지에 진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생의 이서휘가 다시 중원무림에 나서겠다고 한 것을 말렸던 이유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몰랐다.
‘오료에 진입하고 나서라. 아직은 아니다.’
이서휘가 생각에 잠기자, 검선이 미소를 지으며 뜻밖에도 경고의 말을 남겼다.
“다만 사람들이 이런 수준을 세세하게 정의해놓은 말에 얽매이지는 말게. 말에 사로잡혀선 안 되네. 등봉조극을 동시에 이뤄낸 무인 두 명의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처럼 벌어질 수 있는 노릇이니 말이야.”
이서휘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지를 정해놓고 사람을 껴 맞추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야.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고 익힌 무공이 다른데 어떠한 경지에 올랐다고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네….”
“그 또한, 명심하겠습니다.”
검선이 소탈하게 웃었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도 무척 오랜만이군.”
“하하, 저 때문에…”
“아니야. 즐겁네. 즐거운 일이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아. 검왕(劍王) 노인네를 만나야 나눌 법한 이야기를 자네와 하고 있으니… 묘하게 마음이 기쁘군.”
이서휘는 새삼 스승의 칭찬에 마음이 부끄러워져서 대번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 순간, 검선이 불쑥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서휘가 눈을 껌벅이자 검선의 손에서 하얀 빛무리가 뭉치기 시작하더니 작은 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기(氣)의 운용이 극에 달하면 저런 것도 가능한 것일까?
검선의 손에서 피어난 새하얀 새가 하늘을 날았다.
검선은 자신이 올려 보낸 새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자네가 겪은 회광반조, 그리고 내가 겪은 등봉조극…. 그 위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도 무척이나 궁금하군.”
검선이 하늘을 바라보자, 이서휘도 함께 하늘을 올려다봤다.
‘스승님, 다음 경지는 스승님과 함께 도전을 하고 싶습니다.’
그때, 불쑥 검선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사실 자네처럼 스승이 없네.”
“네?”
어찌 없단 말인가? 분명 검성일 터.
하지만 이어지는 검선의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어머니는 내내 아버지를 미워했지. 버림받은 여인이었으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에 나는 복면을 쓴 사람에게 납치를 당했네.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른 채로 말이야. 도착한 곳은 어느 석실이었네.”
“아…!”
이제야 터져 나오는 진실….
검선이 말을 이었다.
“그야말로 혹독하게 훈련시키더군. 외우라 하면 외워야 했고. 펼쳐 보여야 했던 동작은 내가 펼칠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보더군. 마치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온갖 무공을 쏟아냈네. 외워라. 이해는 나중에 해라. 깨달음은 더 늦게 오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 내가 배운 것은 그게 전부였네. 세월이 흐르고…. 지금은 돌아가신 어느 선배 고수가 그러더군. 검성의 아들들은 대부분 강하더라고. 검성? 내 아버지가 저 위대한 검성이란 말인가?”
검선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어머니가 평생 저주하고 미워했던 사람이… 무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네.”
검선이 한숨을 내쉬며 이서휘를 바라봤다. 이제야 검선 자신이 아버지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말을 내뱉은 셈이었다.
검선이 말했다.
“남기신 말이 있는가?”
“네.”
이서휘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최대한 검선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끔 덤덤하게 내뱉었다.
“검성께서 어르신을 언급하시면서 자신 때문에 외로우셨을 것이라고… 혹시 만나게 되면….”
이서휘에게 검선을 돌봐주라는 말을 했다는 것은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검선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참으로….”
무슨 말을 하려던 검선은 그 후로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이서휘도 함께 검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6장. 최강의 부자(父子)>
검선도 인간이다.
비록 평생에 걸쳐 아버지란 존재를 지우고 살아왔으나….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가 최후를 맞이하면서 남긴 말을 곱씹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듣는 검성의 사과였다.
비록 이서휘의 입을 통해 졌으나….
그 심정은 검선에게 충분히 전달되고 있었다.
검선도 너른 마음을 지닌 자다. 잠시 우울했던 마음을 이내 떨치고 이서휘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을 전했다.
“본래 자네를 내 제자로 삼고 싶었네.”
“앗!”
어찌 부정을 예고하는 말투를 사용하실까? 이서휘가 의아해 하는 동안에 검선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자네는 이미 일가를 이룬 사나이. 내가 더 뭘 가르치겠나? 앞으로 지기지우(知己之友, 서로 뜻이 통하는 친한 벗)로 지내세. 나도 자네에게 가르침을 받을 부분이 분명 있을 게야.”
그 말에 이서휘는 속이 철렁했다.
“어찌 감당하지 못할 말씀을 하십니까?”
“왜? 불만인가? 나도 솔직한 사람이네. 솔직한 내 마음이고.”
검선이 먼저 걸어가자, 이서휘의 시야에 검선의 등이 보였다. 그 순간에 사류곡에서 바라봤던 아버지의 등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터.
이서휘가 검선을 따라가면서 말했다.
“어르신, 저도 솔직한 사람입니다.”
“알고 있네.”
“실은 검성께서 등선하시기 전에 제게 내공을 물려주셨습니다.”
“그런가? 기연이군.”
“더불어 부탁도 하셨습니다.”
그 말에는 검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금구무결(金甌無缺)….”
금구무결이라는 말은 물론 검성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나, 이서휘는 검선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내뱉었다.
이서휘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걸어가던 검선이 멈칫했다.
무결(無缺),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의 본명이다.
이서휘가 말했다.
“제게 어르신을 돌봐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하나, 제가 어찌 돌봐드리겠다고 말을 하겠습니까. 어르신의 무공은 이미 무림의 정점이신데…. 때문에 이 후배가 이렇게 말씀 드립니다.”
검선이 뒤를 돌자, 이서휘가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후배 이서휘가 앞으로 어르신을 의부(義父, 의리로 맺은 아버지)로 모시겠습니다.”
이서휘의 예상치 못한 말에 검선이 깜짝 놀랐다.
의부(義父)라니?
이서휘의 말이 이어졌다.
“저를 아들로 받아주십시오.”
검선이 이서휘의 황당한 제안에 그야말로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만난 지 하루 만에 부자 관계를 맺자는 말인가? 나보다 더 한 사람이 있었군.”
이서휘가 히죽 웃었다.
“어르신, 가족이란 말이 가지는 기쁨과 두려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이 무림에서 아니, 이 무림 역사상. 저보다 강한 의자(義子)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아마 없을 겁니다.”
검선이 이서휘의 자기자랑에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또한 저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말인가?”
이서휘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무림 역사상 가장 강한 의부님을 모시게 되겠지요.”
“하하하. 자네가 참 능청스러운 면이 있었군.”
하지만 생각해보라.
전부 맞는 말이다.
이서휘처럼 강한 아들을 어느 세상천지에서 구하겠는가.
평생 가족을 갖기 두려워했던 검선에게….
이보다 더 충격적이고.
이보다 더 안심되는 말이 있을까.
놀라운 말이다.
그리고 놀라운 접근이었다.
검선이 이서휘의 눈빛을 바라보니 진심이라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검선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진심이란 말인가? 어찌 나 같은 사람을 의부로 모신단 말인가.”
“저는 검성의 내공을 이어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등선을 하셔서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처음엔 어르신의 제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하지만 제자로 받아들이기 싫어하시니 그러면 저를 아들로 받아주십시오. 그리도 저 또한….”
이서휘가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가족이 없습니다.”
검선이 참으로 기이하게 웃었다.
길게 웃었다가 멈추고, 다시 웃었다.
그러나 끝내는 하늘을 바라보며 격앙된 마음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검선이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고 있는 이서휘를 양손으로 붙잡아 일으켰다. 그 사이에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마음과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 수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검선이 이서휘를 바라봤다.
자신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이서휘도 가족 없이 훌륭하게 자란 청년이다.
검선은 무척 의아했다.
어찌 나에게 이런 복이 있을 수 있을까?
외롭다는 사실마저 잊고 살았던 자신이 아니던가.
믿기지 않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검선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자네를 아들로 삼아도 정녕 되겠는가?”
또 다시 이서휘가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검선이 붙잡은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격식을 싫어하네. 심지어 격식이 무엇인지도 몰라. 자네가 내 의자가 되겠다면 그저 대답 한 번이면 충분하네. 정말인가?”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검선이 이서휘를 어깨를 두드렸다가 손을 빼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검선이 천천히 걸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럼 나도 이제 가족이 생긴 건가?”
“저도 그렇습니다. 이제 제게도 가족이 생기는 겁니다.”
“아들이 생기다니 신기하구나.”
검선은 그야말로 수련의 깊이가 남달랐다. 그저 순수한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검선이 감탄사를 섞어가며 말했다.
“신기하구나. 신기해. 내게 어찌 이런 복이 생긴다는 말인가? 무림에서 가장 강한 아들이라고?”
“그렇습니다.”
“하하하하.”
검선의 웃음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순간, 검선이 하늘에게 선언하듯이 호탕하게 말을 내뱉었다.
“서휘야!”
“네, 의부님.”
“이 의부가 앞으로 너를 더 강해지게 해주겠다. 너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이 만나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기쁜 날이로구나.”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제 검선의 모든 것은 이서휘의 것이었고.
이서휘의 모든 것은 검선의 것이었다.
그것이… 두 사람이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였다.
☆ ☆ ☆
검선은 자신에게 어찌 이런 복이 생겼을까 의아해했지만…
이 모든 것이 그가 가진 선(善)과 전생에 쌓았던 선행 때문임은 모를 것이다.
이서휘에게 검선은 말 그대로 사부(師父)였다.
스승이자 아버지였다.
경지가 높아 가르칠 게 없다는 검선의 말에 의부로 모시겠다고 한 이서휘의 말과 선택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최강의 부자(父子)가 탄생했다.
정파 무림의 가장 큰 어른이라 할 수 있는 검선(劍仙) 진무결.
그리고 검제(劍帝) 이서휘.
두 명의 대종사가 기이한 인연으로 인해 부자지간을 맺었으니 이보다 더 극적인 일은 찾기 어려울 터였다.
산책을 하던 검선이 말했다.
“서휘야.”
“네, 의부님.”
“앞으로 우린 서로 많은 것을 알아야 할 터.”
“그렇습니다.”
“네게 해줄 이야기도 많다. 마교를 비롯하여….”
“마교라… 저도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그래. 기대되는구나.”
검선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일단은 서로를 알기 위해…”
“네.”
검선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경공 대결부터 해보자꾸나.”
“네? 하하하하하.”
이서휘가 검선의 느닷없는 말에 박장대소를 했다.
부자지간이 됐어도 호승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호승심이야 말로 무림인을 지탱하는 가장 원초적인 마음이 아닐까.
누가 이기든 상관이 없을까?
검선과 이서휘가 눈을 마주치며 속내를 서로에게 내보였다.
상관이 있었다.
무공이야 차차 알아가면 될 터였지만 경공만큼은 일단 서로에게 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서휘가 이미 오료에 진입했다는 것은 검선도 눈치를 챈 상황.
이서휘도 마찬가지로 스승이 오료의 영역에 한참 전에 진입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
두 사람이 예열을 하는 것처럼 말도 없이 진기를 끌어올렸다.
검선이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자네 의부가 좀 빠르거든. 허리가 조금 안 좋지만 달리다 보면 까먹는단 말이지.”
이서휘가 진중한 표정으로 검선의 말을 받았다.
“아, 그렇군요. 저도 경공만큼은 누구에게 뒤쳐진 적이 없습니다만.”
“그래? 오늘 내가 또 서휘에게 몹쓸 짓을 하게 되겠군.”
“하하하하.”
검선이 말을 이었다.
“뭐 자네도 잘 알겠지만 경공은 곧 내공과도 직결되는 분야.”
“그렇습니다.”
“대정제일장까지 달리는 것은 너무 가깝고. 어떤가? 종남파까지 달려보는 것은… 길은 내가 안내하겠네. 어차피 네가 뒤따라와야 할 테니까.”
“하하하하하.”
검선이 자꾸 이서휘의 자존심을 뭉개려고 하자, 이서휘는 검선의 호승심이 웃겨서 배를 잡고 웃었다. 이서휘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쉽지 않으실 겁니다. 제가 앞서 나가면 길 좀 알려주십시오.”
“걱정도 팔자라더니… 자, 가볼까?”
“잠시 준비 좀 하겠습니다.”
“후후후, 그럼 나도 허리 좀 펴볼까?”
검선과 이서휘는 대정제일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그야말로 까마득하게 잊은 채로 경공 대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구성검을 등에 단단히 묶어 놓고 어깨와 목을 풀었다.
검선은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허리를 펴고 있었다.
종남파(終南派).
가서 당장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서휘는 종남파를 살펴본 다음에 일종의 경고를 남기고 싶었다.
마교가 밀려올 수 있으니 대비를 해놓으라는 경고를 남길 생각이었다.
만약, 이 순간에 종남파로 밀려오는 마교의 무리가 있다면 그야말로 종남파의 큰 복이 될 게 분명했다.
검선과 검제가 가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어찌 될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검선이 말했다.
“어디 한 번 아들의 실력을 구경해볼까?”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의부님, 허리 조심하셔야 합니다. 자칫하면 제가 업고 가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희망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게야. 가보자.”
“가시죠.”
“내가 길을 아니 먼저 가겠다.”
“따라가겠…”
이서휘가 미처 말도 다 내뱉지 않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검선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
‘당했다.’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이서휘가 한줄기 질풍이 되어 검선을 쫓아갔다.
“의부님!”
“빨리 오게. 굼벵이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아니…!”
벌써 저 멀리에서 점처럼 작아지고 있는 검선이다.
‘아아아! 저 심계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어쩐지 이서휘는 자신에게 그토록 당했던 단우혁, 백류혼, 도이, 도삼의 심정을 그제야 조금 깨닫고 있었다.
참으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었다.
저 심계를 가장 잘 이어받은 사람이 이서휘 바로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이서휘의 전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내 월단화의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하더니… 전신의 기운과 내공이 호승심이라는 마음을 연료 삼아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서휘의 마음은 침착하게 가라앉고 있었으나, 이미 사람이 달릴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 날아가는 것처럼 도약하고 있었다. 오료의 경지에 접어든 이후 처음으로 몸의 한계를 시험하게 된 셈이었다.
검선은 호승심에서 경공 대결을 제안한 것이었으나….
이서휘는 이 순간에도 엄청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달리기… 그 원초적인 움직임 덕분에 이서휘의 전신이 환골탈태(換骨奪胎)를 맞이한 것처럼 밀려오는 부담감과 한계를 뚫어내기 위해 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검선은 바람 그 자체였다.
이야기를 통해 이미 이서휘 자신보다 훨씬 빨리 오료의 영역이 진입했다는 것도 깨달은 상태. 이서휘는 이 승부를 그야말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질 수 없다. 아직 그 어떤 분야에서도 패배한 적이 없단 말이다. 그 상대가 의부님이라 할 지라도!’
하지만 이서휘의 바람과는 다르게 쉽지 않은 승부였다. 이서휘의 시야에 잡힌 검선은 이제 겨우 점에서 콩알만 하게 커졌을 뿐이었으니까.
이서휘는 연달아서 암행표를 펼쳐 검선은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검선은 이서휘가 발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불쑥 다가오자, 화들짝 놀라면서 이서휘를 놀리듯이 말을 내뱉었다.
“허허허… 제법 빠르구나.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라니요!”
검선이 또다시 질풍처럼 뻗어 나갔다. 이서휘가 “아…” 하는 뜻 모를 탄성을 내뱉은 다음에 이를 악물면서 쫓아가기 시작했다.
‘허리가 안 좋으시다더니! 또 속… 속았나?’
그렇게, 최강의 부자가 느닷없이 종남파로 향했다.
두 줄기의 바람이 무림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서휘는 간격을 좁히지 못했다.
이서휘의 대답을 기다리는 척 하더니 먼저 출발한 검선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검선의 성격을 아는지라 이서휘는 달리는 내내 웃음이 터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발걸음이 다소 흐트러져 쉽게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검선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고로 검선보다 경공의 경지가 높다고 봐야 할 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체 두 사람은 몇 시진이나 달린 것일까.
본래 경공을 즐겨 사용해 무척 빠른 속도로 천하를 누볐던 이서휘다.
하지만 검선이야 말로 경공 하나로 천하를 구경하던 고수였다. 애초에 자신감이 없었다면 총본산에 몰래 들어가 교주 쟁투를 구경하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검선도 이제야 겨뤄 볼 만한 맞수가 나타나서 기쁘다는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또한 두 사람의 내공은 어떠한 수준인가?
한 사람은 회광반조….
한 사람은 등봉조극에 올랐다.
이서휘의 내공도 천하에 비할 바 없을 정도로 높아진 상태였으나, 아무래도 검성이 남겨서 전해준 내공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하지만 검선은 오랜 세월에 걸쳐 본인이 천천히 쌓은 내공을 보유하고 있었다.
달리면 달릴수록, 도도하게 이어지는 장강의 물결처럼 강맹한 힘이 쏟아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도 다시 두 시진이 더 흐르자 조금씩 힘겨워 하고 있었다.
‘아, 대단하시다.’
검선도 이서휘의 실력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앞서 나갔다 싶으면 이서휘가 순식간에 따라 붙었다. 검선이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내 군자소요신법(君子逍遙身法)을 이렇게 따라오는 고수도 난생 처음이로구나.’
신법에 소요(逍遙)라는 말을 붙였다.
하지만 그 소요라는 말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쾌속 그 자체의 신법이었다.
하지만 군자소요신법의 장점은 빠르기가 아니라 가벼움에 있었다.
일단 검선이 군자소요신법을 운용하기 시작하면 검선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지난날 마교의 총본산에서 장포를 날린 후에 날아간 것과 마찬가지로 무림인들이 목격하면 기겁을 할 정도로 신비로운 신법이었다
이 군자소요신법이야 말로….
대성(大成)하는 순간에 초상비(草上飛)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었으니….
무림인들이 농담으로 초상비니 수상비니 하는 것들은 실상 그야말로 까마득하게 높은 경지에서 펼칠 수 있는 것이라 봐야했다.
그렇다면 답설무흔(踏雪無痕, 눈을 밟아도 흔적이 남지 않음)의 경지는? 아직 검선도 펼칠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은 경지라 봐야했다.
그렇게 검선이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두둥실 미끄러져 나아가고….
이서휘는 젊은 혈기와 강맹한 내공을 바탕으로 무척 화끈하게 달려 나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경공을 펼치는 검선….
강맹함을 주로 삼은 경공을 펼치는 이서휘….
장기전으로 갈수록 누가 더 유리할 지는 빤한 일이었다.
이서휘가 검선의 내공을 압도해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서휘도 두 유형의 차이를 깨닫고 있었다.
검선이 이를 어찌 모르겠는가?
이미 검선의 가르침은 경공 대결을 펼치는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종남파로 가는 길을 검선만이 알고 있었다.
검선은 일부러 상가의 건물을 밟고 지나가고, 대번에 강물을 횡으로 가로질러 건너는 둥 그야말로 이서휘를 곤욕스럽게 하고 있었다.
공중에 솟아있던 검선이 장포를 느닷없이 펼쳐대며 날아가자 강가에 서 있던 이서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전생에도 말로는 들었으나 두 눈으로 목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 군자소요신법이로구나.”
어쩔 수 없겠다고 판단한 이서휘가 그야말로 내공을 가득 끌어올려 강물 중간에 띄워놓은 나룻배를 한 번 밟으면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뱃사공에게 외쳤다.
“실례하겠소.”
타악!
나룻배가 기우뚱하는 찰나….
이서휘의 신형이 질풍처럼 회전하면서 반대편 강가에 내려섰다. 이미 검선의 신형은 또 다시 까마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이서휘는 제자리서 두 손을 불끈 쥐고 괴상한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소리쳤다.
“의부님! 같이 좀 가시죠!”
“패배를 인정하겠단 말인가?”
“그렇게는….”
이서휘의 신형이 또 다시 질풍처럼 뻗어나가면서 이서휘의 말이 이어졌다.
“못합니다!”
저 믿지 못할 광경에 나룻배에 있던 뱃사공이 턱이 떨어질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 ☆ ☆
겨우 검선을 따라잡을 때였다.
이서휘가 내공을 실어 외쳤다.
“의부님, 목 좀 축이고 가시죠.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하하하. 그럴까?”
두 사람은 무척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주고받는 목소리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더군다나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또렷하게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검선이 속도를 줄이고….
이서휘가 이제야 의부를 따라 잡았다.
마침 객잔 거리가 즐비했다.
시간은 어느덧 밤을 지나 아침에 접어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밤새 달려왔던 것.
목을 축여야 할 게 아니라 아침밥을 먹어야 하는 상태였다.
검선과 이서휘가 마주하고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길게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대단함에 두 사람은 무어라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이서휘는 다소 지치기도 했거니와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일부러 검선을 불러 세운 것이다.
마침 아침부터 문을 활짝 열어놓은 정화객잔이라는 간판이 보며 이서휘가 검선을 그쪽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검선은 으리으리한 대문을 쳐다보면서 걱정이 되는지 이서휘에게 말을 건넸다.
“이거 너무 비싸 보이는구나.”
그 말에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의부님, 제가… 돈이 무척 많습니다. 언제, 어떻게 써야 할 지도 모를 지경입니다. 들어가시지요.”
“군림맹의 대주라더니 제법 받는 돈이 많은가 보지?”
“아닙니다. 지난 날 마교의 무리를 한 번 털었는데 그때 이놈들이 군자금처럼 모아두고 있던 돈을 털었습니다.”
그 말에 검선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 마교 놈들이 누군가의 호주머니를 단단히 털었다는 게 이야기로구나. 사람을 찾아서 응당 되돌려줬어야 할 일인데….”
“아,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서휘가 겸양쩍은 표정을 짓자, 검선이 씨익 웃었다.
“일단 먹자꾸나. 지금 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하하하.”
확실히 검선은 정도(正道)를 지향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느슨한 면이 있었다.
이서휘는 그 점이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이 정화객잔에서 진수성찬을 차리고 먹었다.
목이나 축이자는 게 어쩌다 보니 푸짐한 아침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검선이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이서휘 앞에서 오랜만에 밥을 먹었다. 늘 혼자 먹는 게 버릇이 되었는지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 것조차 불편한 모양이었으나, 이서휘가 눈치를 보지 않고 신나게 먹기 시작하자 검선도 이내 체면을 버리고 웃고 떠들면서 잔뜩 먹기 시작했다.
때문에 두 사람은 평소보다 과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검선이 배가 볼록하게 나올 정도로 과식을 하자 느닷없이 이서휘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의부님, 제 계략에 당하셨군요.”
“뭐라고?”
“어찌 그렇게 드시고 빨리 뛰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평소에 먹는 양만큼 먹었습니다만.”
“허, 이거 내가 한 번 당했구나.”
그 말에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의부님, 농담이었습니다. 차를 마시고 소화를 시킨 다음에 천천히 출발하시지요. 그 사이에 이야기도 좀 나누고요.”
“사정을 봐주니 고맙기 이를 데 없으나 이거 서휘의 심계를 이제 경계해야겠구나. 방금 그것이 계략이었다면 그야말로 나는 곤란했을 터. 아마 길을 달리는 도중에 뒷간에 가느라 경공대결에서 졌을 것이야.”
“자연현상까지 참을 정도로 경공 대결을 해서는 안 되겠지요.”
잠시 후 두 사람은 용정차(龍井茶)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눴다. 하여간 두 사람은 서로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남달랐다. 이번에는 검선이 선공을 펼치면서 이서휘를 놀라게 만들었다.
“얼마 전에 마교의 총본산에 들어가서 이 마교 놈들이 교주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것을 구경하다가 나왔네.”
그 말에 이서휘가 마치던 차를 푸웁 소리와 함께 뿜었다.
“아, 죄송합니다.”
천으로 자신의 소매를 닦던 이서휘가 다시 되물었다.
“의부님, 정말입니까? 총본산에 홀로 들어가셨다고요?”
“그래. 나도 난생처음 가보는 것이라 보면서도 신기하더군.”
“한데, 마교 교주 자리를 놓고 싸웠다고요?”
“그래….”
그야말로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한데, 의부는 어째서 총본산까지 홀로 들어가서 그런 것을 구경하고 나온 것일까.
이서휘는 배포나 배짱에 관해서는 천하에서 뒤처지지 않을 것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검선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직 자신의 수준은 의부보다 낮은 모양이었다.
검선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위극신이라는 놈으로 마교 교주가 정해진 모양이야.”
“허허…”
이서휘가 눈을 잠시 껌벅였다.
‘위극신이 어찌 이렇게 빨리….’
하지만 놀랄만한 이야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검선이 말을 이었다.
“마교 교주를 가리는 것이야 어찌 보면 저희끼리 당연한 일이겠지만 도대체 어떤 식으로 제월헌을 죽였는지가 나는 더 궁금하군.”
“제월헌이 누굽니까?”
검선이 대꾸했다.
“제월헌이 바로 얼마 전까지 마교 교주였다. 독마가(毒魔家)의 가주, 만독불침(萬毒不侵)의 마인이지. 정파 무림에서 근래 들어 천하제일이라 주장하는 자가 나오지 않은 제월헌과 승부를 못 가렸기 때문이야. 나는 물론이고 검왕 노인네도 마찬가지. 물론 겨뤘다면 가려졌겠지. 누가 천하제일인지….”
이서휘가 침을 삼켰다가 말을 이었다.
“실은 저도 군림맹에서 동료들과 마존이라 불리는 자들을 여럿 죽였습니다. 듣자 하니 모두 마교의 후계자 다툼을 벌이는 자들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가?”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꼽았다.
“네. 번뇌마, 음마, 환마, 화마, 묵연마, 심연마는 저와 겨루다가 혹은 군림맹과 겨루다가 죽었습니다.”
“허어… 대단한 활약이었군. 그 마가들은 제법 상위권에 있는 마가들일 터.”
“그렇습니까? 그리고 괴패마와 풍마라는 놈도 있었는데 이 둘은 아직 생사를 모르겠습니다. 또한 검마라는 놈과 한 차례 겨뤘었고, 일월마존이라는 놈은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말씀하신 그 위극신이라는 놈이 아마 일월마존이라 불릴 겁니다.”
그 말에 검선이 차를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일월마가라…?”
“네.”
“일월이라… 어쩌면 저 옛날, 무림맹에 멸문을 당했던 일월성교(日月聖敎)의 후예들이겠군. 일월성교의 후예가 마교를 장악했다면 어떻게 되든 간에 마교의 모습이 다소 바뀌겠군.”
“일월성교요?”
“일전에 마교에 통합된 세력이다. 나도 들은 얘기라 확실하진 않다만…. 어쨌든 마교는 문파, 방회, 연합, 교 등을 통합해 전부 마가(魔家)로 격하시켰지. 일월성교도 그 중 하나라 보면 된다.”
검선의 말을 듣고 보니, 위극신이 왜 일월성교라는 말을 쓰지 않고 훗날 천마교라 이름을 지었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검선이 말을 이었다.
“위극신은 아마도 위태천의 장남일 것이다. 일전에 나와 오랜 세월에 걸쳐 겨루던 지독한 사내였지. 그때, 일월성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알아낼 수 있었다.”
“위태천… 아직 살아있습니까?”
그 말에 검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한 팔이 잘려서 절벽에서 떨어졌으니…. 괴물이 아닌 이상 지금까지 살아 있겠느냐?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나를 찾거나 혹은 검왕을 진작 찾아 나섰을 놈이니…. 그나저나…”
검선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안휘에서 어찌 그렇게 많은 마가들과 상대했는지 신기할 지경이군. 마가의 본거지는 대부분 흩어져 있을 것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에는 번뇌마가 뿐이었는데 상대하다보니 점점 늘어났습니다. 어찌 보면 군림맹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그리 움직인 것 같습니다. 검마와 일월마도 제 손으로 잡았어야 했는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 말에 검선이 웃었다.
“검마라… 빨리 잡아야 할 것 같더군. 시간이 흐르면 마교에 못지않게 재앙을 불러올 놈이야.”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잠시 후, 검선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자, 이제 소화는 다 되었겠지?”
“물론입니다.”
“이번엔 한 걸음에 갈 수 있겠군.”
“거의 다 왔나 보군요.”
“우리 두 사람의 속도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두 사람이 빙긋 웃었다.
그야말로 다시 찾기 힘든 맞수가 만난 셈이었다. 이서휘가 밥값을 치르자 검선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들 덕에 호의호식했군.”
“앞으로 더 기대해주십시오.”
그 순간 검선은 이서휘의 실로 때깔 좋은 안색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이서휘는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피부가 꺼칠어진 의부의 안색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이제 서휘를 따라 다니면 앞으로 제법 맛있는 걸 많이 먹겠구나.’
‘앞으로 천하에서 가장 좋은 음식을 대접해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쩐지 서로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어색한 웃음을 동시에 흘리고 있었다.
“후후. 자, 출발하자꾸나.”
“가시지요, 의부님!”
종남산(終南山).
두 줄기의 신형이 간격을 벌린 채로 바람처럼 뻗어나가고 있었다.
앞서 가는 사람은 여전히 검선…
하지만 이서휘도 무척 빠른 속도로 검선을 따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검선은 이서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이서휘는 그야말로 진중한 표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검선의 본질도 무림인이다.
이서휘가 뛰어난 기연을 얻어 젊은 나이에게 오료의 경지에 진입했다곤 하나, 결코 져 줄 생각이 없었다.
또한, 내심 이서휘를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길도 멀찍이 돌아온 상태였다.
그렇게 검선은 종남파까지 이서휘에게 단 한 번도 뒤처지는 법 없이 내달려 먼저 도착했다. 이것은 검선이 경공이라는 분야에 대해 이서휘를 가르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보았느냐?
경공만 해도 이러한 깊이가, 이러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서휘 또한 검선의 가르침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종남파에 도착했을 때는 차이가 무척 근소했다.
눈치가 빠른 이서휘다.
어쩌면 의부가 중간에 속도를 약간 줄인 게 아닐까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두 사람이 찾은 종남파는 예상과는 달리 분위기가 매우 적막했다.
종남파(終南派).
한 문파의 흥망성쇠는 한 국가의 흥망성쇠와 흡사하다. 중소문파의 경우에는 대부분 백년에 있을까말까 한 위대한 개파조사가 문파를 일으키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중소문파는 대부분 삼대가 지나지 않아서 쇠락의 길을 걸을 때가 많았다.
사람들이 명문정파를 거론할 때 구파를 대부분 꼽는 것은 구파가 그간 삼대가 아니라 수십 대에 걸쳐 발전을 거듭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종남파는 약간 달랐다.
굳이 비유하자면 중소문파와 명문구파의 중간쯤에 있었다.
흥할 때는 무림맹주를 배출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다가도 쇠락할 때는 구파에 꼽히지 못할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섬서의 화산파가 항상 정파 무림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늘 비교가 되곤 했다.
지금, 검선과 검제가 찾아온 종남파엔 어쩐지 쇠락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이서휘의 전생에도 마찬가지였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서휘가 종남파에 내려앉은 적막함을 느끼며 말했다.
“설마 종남파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두 사람은 오는 도중에 객잔에서 쉬었던 터라, 지금은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종남파에 발을 들여도 나와서 마중하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은 고즈넉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종남파를 이리저리 구경했다.
“어찌 이렇게 조용할꼬?”
검선과 이서휘의 대화가 종남파 전체에 울릴 정도로 고요했다. 그때, 종남파의 연무장을 걷고 있던 사내가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문안(問安)을 오셨습니까?”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저었다.
“문안? 아니오만….”
그 말에 사내가 대번에 안색을 굳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가자 이서휘와 검선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서휘가 침음을 흘렸다.
“문안이라니… 무슨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가시지요.”
“가보세.”
“백도맹에서 마가의 습격으로 다치거나 죽은 장문인도 있다 하던데 아마 그일 때문인가 봅니다.”
“설마 천 장문인이 당했을 리가….”
“종남의 장문인을 아십니까?”
“몇 번 본 사이지.”
이서휘는 종남파의 분위기로 보건대 어쩌면 천 장문인이라는 자가 죽었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너른 대청으로 안내되었다.
하지만 대청에 들어가자마자 두 사람은 이내 깨달았다.
대청 안에 감도는 것은 분명 짙은 살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대청 안에 들어서자마자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싹 사라지고 검을 쥔 종남파의 문도들이 저마다 쌍심지를 켜고 우르르 밀려나왔다. 그 사이로 중년인이 한 명 걸어 나오면서 혀를 찼다.
“그대들도 우리 종남파가 우습게 보이시오? 아무리 우리 장문인께서 부재중이시라고 하나 종남파가 겨우 그대들 두 명으로 어찌될 문파는 아니외다.”
“대뜸 무슨 소립니까?”
이서휘가 되묻자… 중년인이 호통을 내질렀다.
“후후, 벌써 그대들과 같은 자들을 수십 명이나 종남산에서 기어 내려가게 만들었다. 이렇게 예의도 모르는 자를 정식으로 상대할 필요 없다. 문도들은 저들을 함께 쳐라.”
종남의 제자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순간에…
검선이 덤덤한 말투로 중년인에게 말을 건넸다.
“중산아, 나를 기억하겠느냐?”
검선의 말에 중년인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먼저 제자들을 멈추게 하고 걸어 나와 검선을 이리저리 살폈다.
“어?”
“기억하느냐? 네 이름이 아마 중산(中山)이었지?”
중산이라 불린 사내가 화들짝 놀라더니 대번에 뛰어와서 검선에게 예를 올렸다.
“엇! 어르신! 적하채(赤河寨)의 수적들을 혼내시던 그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이서휘는 그 순간에 몰려온 종남파의 제자들을 일일이 바라보고 있었다.
검선이 껄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서 다행이구나. 나는 자네의 이름까지 기억하는데 말이야. 무척 섭섭할 뻔 했구나.”
“아, 후배 중산이 어르신을 뵙습니다. 여기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내 의자가 종남파에 와보고 싶다 하여 한 번 와봤는데 자네가 없었으면 크게 봉변을 당할 뻔 했구나.”
“봉변이라니요. 그야말로 저희가 큰일이 날 뻔 했습니다.”
중산이 제자들에게 외쳤다.
“다들 무기를 내려라. 그야말로 귀한 손님이 오셨다. 정구야.”
“네, 사숙님.”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모실 준비를 해라.”
“네, 알겠습니다.”
검선도 문도들의 흉흉한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대체 이게 어쩐 일인 게야?”
“아, 어르신…. 기가 막힌 일을 연달아 당했더니 잠시 경황이 없었습니다. 어찌 이런 때에 어르신을 뵙게 된 것인지….”
“침착하게. 인사부터 나누고.”
그제야 중산이라는 중년인이 화들짝 놀라면서 이서휘에게 포권을 취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종남의 전중산(展中山)이라 합니다.”
이서휘가 화답했다.
“군림맹의 이서휘라 합니다.”
이서휘의 말에 이번에는 전중산뿐만 아니라 대청에 있던 제자들 대부분이 놀라고 있었다.
“백도맹을 도와주셨던 이 대주가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만….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을 뿐입니다.”
검선이 미소를 지으며 이서휘를 바라봤다.
“허허, 이거 서휘가 나보다 더 유명 인사였구나.”
“하하, 아닙니다.”
전중산은 마치 구세주가 온 것처럼 기뻐하더니 두 사람을 안채로 안내했다.
“들어가시지요.”
말과 함께 전중산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오는 자가 없는지 살펴 보거라.”
“네, 사숙님.”
☆ ☆ ☆
안채에 들어가자 전중산은 검선에게 대뜸 절부터 올렸다. 하지만 그대로 둘 리 없는 검선이다. 재빠르게 전중산을 붙잡아 일으켰다.
“뭐 이렇게 과한 예를 차리나. 내가 불편하네.”
검선이 일으키자 전중산이 말을 이어나갔다.
“백도맹에서 장문 사형이 큰 부상을 입고 돌아오셨습니다. 어르신은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그런가? 천 장문인이…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
“부상이 어찌 이렇게 처참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검이나 장력에 당한 것도 아니고 진천뢰에 당하신 것처럼 부상이 심각합니다.”
그의 말에 검선과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서휘야 현장에 있었으니 그날의 참상이 어땠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데, 종남파의 장문인이 껴 있었다고? 그야말로 불운한 일이었다.
전중산이 말을 이었다.
“제 사형께선 태백파와 수십 년에 걸쳐 복잡한 은원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언제가 됐든 결판을 지으려고 했는데 부상 소식이 퍼졌는지 태백파가 이제야 나타나서 종남과 마무리를 짓자고 하는군요.”
“한데, 어찌 우리를 보고 오해를 한 것인가?”
전중산이 코웃음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어찌 태백파만 있겠습니까? 장문 사형이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저희에게 눌려 지내던 섬서의 중소문파들이 벌써 여러 차례 도전해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백도 세력이 태반이니… 진절머리가 날 지경입니다. 태백파는 그 중 하나일 뿐입니다. 태백파의 서신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서신을 한 장 내밀자, 검선이 받아들였다. 서신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사년 전, 천 장문인에게 노호산(老虎山)에서 당했던 패배…. 이제 부족하나마 사문의 무공을 완성했으니 종남파에 다시 도전하겠소. 태백중검(太白重劍).]
“태백파는 들어본 적이 있으나 태백중검은 금시초문이로군. 자네는 알고 있나?”
전중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태백파의 장문인이 쓰는 별호입니다.”
태백파.
섬서의 태백산에 위치한 문파로 세가 꽤 컸으나 구파에 꼽히지는 못했던 문파였다. 태백에서는 그야말로 위세가 대단했다. 또한, 태백파의 전대 장문인부터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해 종남파를 꺾고 구파의 자리를 뺏겠다는 야심으로 뭉쳐있는 문파였다.
하지만 늘 종남파의 장문인인 천대암에게 수없이 패배했던 자들이었다.
그 덕분에 소소한 은원 관계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사상자가 연달아 발생했고, 같은 정파 출신인지라 오월동주 같은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종남파의 불운을 틈 타 도전장을 다시 내밀었으니 종남파 전체가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전중산이 말했다.
“다른 자들은 미약하나마 제가 감당을 했으나 태백중검은 예전부터 늘 장문사형께서 꺾었습니다. 그 접전을 익히 알고 있기에…”
전중산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 한 몸 죽는 것이야 아무렇지도 않으나… 하필이면 종남이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백도맹에 중재를 바라려고 해도 태백파는 정파임을 내세우면서도 백도맹에 가입하지 않은 놈들입니다.”
검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렵지 않게 말을 이었다.
“문파의 불운을 틈 타 도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 내가 달래서 돌려보낼 테니 자네는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 말에 전중산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파의 일을 다른 문중의 어른이 해결해주는 것도 그리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종남파는 지금 부상을 당해 누워있는 장문인인 천대암(千大巖)이 위대할 뿐…. 심지어 그와 동문인 사제들도 천대암에 비하면 한참 실력이 모자라는 형국이었다.
검선이 말했다.
“천 장문인을 볼 수 있을까?”
“네, 별채에 누워 계십니다.”
전중산의 안내로 세 사람만 일어나서 종남파의 장문인을 만나러 이동했다.
고요한 별채에….
시동 한 명이 서 있다가 전중산이 들어오자 급히 예를 취하고 물러났다.
전중산이 누워 있는 천대암에게 다가가 말했다.
“장문 사형…!”
하지만 이서휘는 별채에 들어가자마자 안색을 굳히고 주변을 돌아봤다.
‘으음?’
이서휘가 다시 누워 있는 천대암을 내려다봤다.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상태로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그 천대암을 바라보는 순간에….
불쑥 이서휘와 검선이 눈을 마주쳤다. 말을 하지 않아도 천대암의 몸에서 어떤 위화감을 느꼈던 것.
백도맹에서 입은 부상과는 상관없는 위기를 몸으로 겪고 있는 모습이었다.
검선이 어찌 파악하고 있는지는 몰랐으나….
이서휘는 후각으로 별채에 흐르는 기묘한 냄새를 맡고 있었다.
이서휘의 시선이 전중산에게 향했다.
‘자네 사형이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모르느냐?’
전중산은 검선이 데려온 새파란 놈이 느닷없이 자신을 노려보자 그 눈빛을 읽고 급히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천대암의 상태를 보자마자 어울리지 않게 코웃음을 내뱉으며 검선에게 말했다.
“의부님, 일단 태백파를 기다려봐야겠습니다.”
“그러자꾸나.”
“나가시죠.”
이서휘가 검선을 모시고 나가자, 전중산이 호들갑을 떨면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하지만 이서휘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은 상태.
아무래도 종남파의 누군가가 태백파와 호응하고 있는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잠시 접대를 준비해야겠다고 전중산이 물러나자 이서휘가 검선에게 말했다.
“의부님…. 이 종남파를 어찌해야겠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외부인이 이렇게 개입해도 되는 것일까 모르겠군.”
검선의 말에 이서휘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입해야겠습니다. 종남파도 백도맹의 일원…. 이렇게 태백파에 무너지는 꼴은 볼 수가 없습니다. 의부님도 도와주십시오.”
이서휘의 단호한 대답에 검선이 미소를 지었다.
“서휘가 이제 보니 무척 단호한 면이 있었구나. 그럼 도와주자꾸나. 어쨌든 천 장문인의 의식부터 깨운 다음에 그가 바라는 대로 일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서휘가 검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걸어 나와서 종남파에 짙게 깔린 무거운 공기를 살펴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천 장문인, 독에 중독되었더군요.”
“예상했다만….”
“전중산일까요?”
“더 있을 수도 있고… 기다려보자꾸나.”
“네.”
종남파와 태백파는 경공 대결을 펼치기 위해 도착한 사람들이 두 문파의 명운을 가를 수도 있음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상태.
이서휘라는 독심술의 귀신이 절대감각을 예리하게 가다듬고….
검선이라는 노회(老獪)한 노인네가 자꾸 허리를 꾹꾹 눌러가면서 종남파를 이리저리 바라보고 있었다.
<8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