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36화 (36/43)

<7장. 추리대(追李隊)>

이서휘가 떠난 후에도 백도맹에서는 한참이나 이서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수많은 고수들이 즐비한 무림이라지만 이서휘의 등장만큼 충격적인 일은 근래 드물었다.

명문정파의 후계자도 아니다.

고작 이십 대의 나이로 군림맹의 대주라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익히고 있는 무공의 출처나 사문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구파의 충격이 어땠을까?

그 여파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점창파 장문인 여서문을 포함하고 있는 백도맹 최고수들의 입장은 떠도는 소문보다 더 심각했다.

여서문이 천하오절이라는 칭호를 얻지 못했으나 백도맹의 그 어느 누구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고수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런 여서문이 패한 것이다.

이서휘가 떠나고 며칠이 흐르자 객잔의 안주 이름은 어느새 이서휘가 될 지경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었다.

“이서휘가 이미 군림맹에서도 활약이 대단했다던데?”

“이서휘가 낭인 출신이라지만 내가 봤을 때는 신비문파의 후계자일 가능성이 높아. 그렇지 않고서야…….”

“이서휘가 말이지…….”

“내가 봤을 때 이서휘는 무언가 큰 기연을 얻지 않고서야…….”

참으로 말이 많았다.

누군가는 이서휘와 술을 진탕 마셨단다.

누군가는 이서휘와 기루에 함께 갔는데 유난히 가슴 큰 여인을 밝히더란다.

며칠 후에 이서휘의 친구들이 강호에 참 많아졌다. 물론 이서휘는 누군지도 몰랐지만…….

위명이란 그런 것이다.

장점은 더욱 부각되고 단점과 소문도 부풀려진다.

누군가는 젊은 혈기로 군림맹으로 향하고 있는 이서휘를 따라나섰다.

‘도전을 해봐야겠다. 제깟 놈이 별 거 있겠어?’

수준 차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삼류 무인들과 제법 고강한 무공을 지난 중년인들까지 안휘로 가는 길에 속속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동료들과 군림맹으로 향하고 있는 이서휘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며칠이 흘렀을 때는 청협과 백검으로 복귀하려는 단우혁, 백류혼과 함께 잠시 이별주를 마시느라 여정을 멈췄다.

어쩐지 도이와 도삼은 먼저 군림맹으로 복귀한 상황. 둘을 먼저 보낸 이서휘의 의도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단우혁이 말했다.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어디로 빠지시려고? 혹시…….”

이서휘가 물을 마시다가 단우혁에게 경고했다.

“거기까지만 해라.”

“내가 뭐라 했는가?”

사정을 모르는 백류혼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어디 여인이라도 숨겨 놓은 거야?”

“핫핫핫!”

단우혁이 웃음을 터트리자 이서휘가 쩝 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이서휘는 옥의림이 머무르고 있는 양곡에 한 번 들릴까 고민 중이었던 것.

단우혁이 농담을 멈추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백도맹과 군림맹, 과연 힘을 합칠 수 있을까? 보기 전까지는 가능성이 높다 생각했었네. 하지만 직접 바라보니 백도맹이야 말로 춘추전국시대처럼 문파들이 제각각으로 노는 분위기더군.”

그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뭐 그러라고 하게. 일단은 마교를 쳐야지.”

“그 다음엔?”

단우혁의 물음에 이서휘가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졌다.

“세상이 좀 조용해지면 천하제일 자리에나 도전해볼까 싶네.”

“하하하하.”

단우혁이 홀로 웃었다. 하지만 백류혼은 딱딱한 얼굴로 술을 한 잔 들이키면서 말했다.

“지금 당장이야 어렵겠지만 훗날 천하제일 자리는 이 대주 자네가 가장 먼저 근접하겠군.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야.”

“뭐야 이 어울리지 않는 말은……. 백가야 어디 아픈 게냐?”

단우혁이 바라보자 백류혼이 그제야 피식 웃었다.

“뭐 그래봤자……. 어차피 나한테 따라잡힐 거니까.”

백류혼의 말에 단우혁과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말을 하는 게 백류혼에게 어울렸다.

각자의 여정을 잊고 세 사람은 그날 늦은 밤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이서휘는 술자리가 다 끝날 무렵에야 술에 조금 취해 두 사람에게 묘한 말을 남기면서 탁자에 엎드렸다.

“다시 만날 때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 있길 바란다. 우혁아……. 류혼아…….”

“뭐야? 취했느냐?”

“취할 리가 없지. 내공이 그렇게 깊은데…….”

하지만 이서휘는 탁자에 엎드려서 대꾸가 없었다. 두 사람은 어쩐지 이서휘가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밤새 술잔을 나누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단우혁이 잠든 이서휘를 내려다보다 백류혼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놈도 사람이긴 했구나.”

“그러게 말이다.”

두 사람은 본래 이서휘가 술에 매우 약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더 모르고 있었던 사실은 이서휘가 두 사람과 술을 마시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들 정도로 두 사람을 신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 ☆

단우혁, 백류혼과도 헤어진 이서휘가 홀로 갈림길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다.

온 몸에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경공 수련이라 생각하고 한참을 달려왔던 것.

어쩐지 갈림길을 보자마자 신기한 물체를 보는 것처럼 생각에 잠긴 이서휘였다.

‘기분이 묘하군.’

이서휘는 이때쯤에 위극신이 마교 교주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서휘의 전생에서 벌어진 위극신의 반역 형태와 전투 양상, 시기, 참가 인원이 모두 달라져 있었다.

이서휘가 어찌 알겠는가?

저 용의주도한 위극신이 목숨을 걸어야 했을 정도로 생과 사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군다나 위극신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를 하나하나 거슬러 올라가면 이서휘의 움직임과 다 연관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만난 적도 없으면서 각자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갈림길을 바라보는 순간, 이서휘도 자신의 인생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전생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군림맹에서부터 시작된 두 번째 삶이다.

단우혁, 백류혼과는 너무나 일찍 만났고 전생에는 인연이 없었던 도이와 도삼이라는 사람도 주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뿐인가? 곽서명, 유은결, 송무진, 진금구 등은 전생에서 만나보지도 못했던 사람들이다.

새로운 삶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새로운 삶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서휘가 갈림길을 보면서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였다.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그 선택에 따라 자신의 삶이 크게 변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서휘가 우측 길을 바라봤다.

양곡이 나온다.

진금구 선배와 옥의림이 머무는 곳이다.

이서휘가 다시 고개를 돌려 좌측 길을 바라봤다.

검림세력일람에 표시된 지도를 살펴보니 좌측 길로 이동하면 사류곡이 나온다.

이서휘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한 번쯤은 가봐야 할 터였지만 기분이 묘했다.

한 쪽은 생을 마감했던 곳.

한 쪽은 마음에 품었던 여인이 살고 있는 곳.

고민하던 이서휘는 우측 길을 선택했다.

‘사류곡은 위극신을 죽이고 나서……. 혹은 위극신을 죽이러 가기 전에 한 번 들러야겠다.’

이서휘가 양곡으로 향했다. 거창한 여정은 아니다. 어차피 들렀다가 군림맹으로 복귀하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예전처럼 진금구 선배와 옥의림을 보고 갈 생각이었다. 옥의림을 생각하자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얼굴이 벌게지고 있었다.

아, 어찌 이다지도 숫기가 없을까.

백도맹의 군웅들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던 저 이서휘가 얼굴을 붉히다니…….

단우혁이나 도삼이 있었으면 삼사일은 두고두고 놀려 먹었으리라.

“가보자.”

일전에는 군림맹 주변으로 진금구 선배와 옥의림을 데려오고 싶었으나 지금은 생각이 달랐다.

‘양곡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본 다음에 결정하자.’

이서휘가 양곡(亮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단우혁과 백류혼과의 술자리 때문일까. 하루 반나절 정도를 지체했더니 이서휘를 쫓는 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쫓아오는 자들이 무리를 이루더니 급기야 모임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서휘가 알았다면 배꼽을 쥐고 웃었을 것이다.

사실이었다.

이서휘를 쫓는 모임인 추리대(追李隊)가 탄생했다.

누군가 장난스럽게 말한 이름을 저희끼리 박장대소를 하며 좋아하다가 어느새 공식 명칭이 되어 버린 이름이었다.

또 다른 이름은 진휘회(趁輝會)였다. 이서휘의 이름 중에 ‘빛날 휘’가 들어 있어 어쩐지 ‘빛을 쫓는 모임’이라는 중의적인 뜻도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너무 있어 보인다는 지적에 사람들은 추리대라는 말을 선호하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가 이서휘에게 도전하려는 무림인이었다. 이서휘가 도전을 받아줄 지도 의구심이 들었지만 어쨌든 저희끼리는 오는 도중에 가장 강한 순서대로 서열까지 정했다. 그 서열에 따라 이서휘에게 도전할 생각이었다.

어찌 보면 나름 순수한 구석이 있는 자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 추리대에는 이서휘를 실로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이 섞여 있었다.

어쨌든 이서휘가 누군가 쫓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때는 양곡에 진입했을 때였다.

불취객잔(不醉客棧).

이서휘가 혼자서 저녁을 먹고 있는 와중에 이마에 “나 무림인이오.”라고 적힌 것처럼 분위기가 남다른 자들이 하나둘 입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 딴에는 나름 이서휘를 보지 않겠다는 듯이 행동했으나 밥을 먹던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힐끔 거리는 자들이 많았다.

‘뭐야? 이 새끼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저희끼리 밥과 술을 시켰다. 시종일관 어색한 이야기가 불취객잔에 가득했다.

나이는 이십 대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삼십 대. 간혹 사십 이 넘는 중후한 무림인들이 섞여 있었다.

아무리 이서휘가 눈치가 빠르다지만 가지각색의 무공을 익힌 이 자들이 한데 뭉쳐서 이서휘를 쫓아왔다는 사실만큼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추리대의 수장 격인 세 사람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중앙에 있던 자가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이서휘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이서휘가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초면입니다만.”

“저는 구환쾌도(九環快刀) 관형이라 합니다.”

관형이라는 자가 옆을 보자 또 다시 별호와 이름이 쏟아졌다.

“일보권풍(一步拳風) 이정빈이라 합니다.”

“무쌍대호(無雙大虎) 전상택이라 합니다.”

이서휘가 침음을 흘렸다.

‘으음. 뭐지 이 허접스러운 별호들은……? 호랑이는 술집에 왜 온 거야.’

어쩐지 여기저기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여인까지 섞여 있었다.

그때였다.

사람들이 저마다 이서휘에게 이름과 별호를 밝히는 가운데 심상치 않은 기도를 지닌 중년인 한 명이 조용히 걸어 들어왔다.

추리대가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와중에 중년인이 무척 서늘한 어조로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밝혔다. 한데, 그 내공의 깊이가 심상치 않았다.

“별호는 없고 사마록(司馬熝)이라 하네.”

다른 자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던 이서휘가 그 목소리와 어조, 이름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

사마록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불취객잔 전체가 잠시 조용해졌다.

이서휘와 사마록이 눈을 마주쳤다.

사마세가에서 두문불출하던 자다. 그러나 자세히 바라보니 이서휘의 기억에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이서휘가 딱딱한 어조로 사마록에게 말을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사마가주님…….”

사마세가의 가주가 불취객잔에 등장해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죽였던 사마준보의 아버지이자 일전에 군림맹을 탈퇴했던 사마세가의 가주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사마록이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일까? 이서휘로서는 알 수 없었으나 여기에 모여 있는 추리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사마록은 거짓 이름과 신분을 대고 추리대와 함께 이서휘를 쫓아왔던 것.

사마록이 일보권풍 이정빈과 무쌍대호 전상택의 사이에서 두 사람을 밀치고 등장하더니 탁자에 홀로 앉아 있는 이서휘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이제야 만나는군. 우리는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안 그런가?”

이서휘가 사마록을 바라봤다. 이미 객잔에 등장할 때부터 살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추리대는 이미 오는 도중에 이서휘에게 도전할 서열을 정해둔 상태였다. 가장 먼저 이서휘에게 자신의 별호와 이름을 밝혔던 관형, 이정빈, 전상택의 서열이 가장 높았다.

이정빈은 사마록이 순서를 무시하고 먼저 도전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얼굴을 굳히고 나섰다.

“이보시오. 이 대주에겐 우리가 먼저 도전하려는…….”

콰아아앙! 우지끈!

사마록이 손을 쓰자 이정빈의 머리가 탁자를 부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서 관형과 전상택이 달려들자 사마록이 양손을 내밀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관형과 전상택이 선 자세에서 한 바퀴를 돌더니 바닥에 처박혔다. 무공의 격차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세 사람이 바닥에서 신음을 흘리자, 사마록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이 대주, 이 자들이 누군지 아는가?”

“모르오.”

“추리대라 하더군. 이서휘를 쫓는 모임이야. 그래서 나도 합류했지.”

그 말과 함께 사마록이 싸늘한 눈빛으로 결코 호의적으로 볼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이서휘와 사마세가는 참으로 악연(惡緣)이었다.

이서휘가 될 수 있으면 백도에 속한 무림인은 죽이지 말아야 할 터. 그런데 저 멍청한 사마준보 때문에 결국 사마세가의 가주까지 나섰다.

이서휘는 씁쓸했다.

결국 자신이 이 악연을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자식이 죽었으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록이 이렇게 살기를 띤 채로 찾아왔다는 것은…….

‘사마준보가 내게 살수를 보냈던 것을 알고 있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가 싸늘한 눈빛으로 사마록을 바라봤다.

‘너도 같은 놈이야.’

사마록이 맞은편에 앉으면서 대꾸했다.

“이 대주, 강해졌다더니 사실인가 보군. 나를 보고서도 이렇게 여유가 넘치는 것을 보니 말이야.”

“그걸 아시면서 혼자 오셨소?”

이서휘의 말에 사마록이 씨익 웃었다. 이서휘가 바깥을 힐끗 보며 욕이나 다름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역시…… 사마준보나 당신이나.”

이서휘의 기억에는 사마가주의 실력이 다른 세가의 가주보다 한참 모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군림맹에서도 주요 자리에 계속 밀려나던 터였다. 그런 자가 이서휘 앞에 홀로 나타날 리가 없었다. 이서휘가 무겁게 생각하는 군림맹의 고수는 지금 무위로 따졌을 때 아마도 맹주인 남궁위와 독고세가의 가주밖에 없을 터였다. 사마록은 이미 이서휘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런 사마록이 이서휘를 앞에 두고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였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나 혼자 상대할 생각이니까. 나갈까?”

“그럽시다.”

두 사람이 온몸에 무서운 기세를 휘감고 바깥으로 나갔다. 추리대 역시 두 사람을 따라나서면서 중얼거렸다.

“대체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일까?”

“모르지. 보통 일은 아닌 거 같군.”

“사마세가 가주라면 군림맹에서 제법 위세가 대단하다 들었는데…….”

“탈퇴했다 하네.”

추리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서휘를 따라나섰다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상태였다.

이미 불취객잔 앞에 사마세가의 무인들이 잔뜩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서슬 퍼런 광경을 목격한 추리대는 저도 모르게 이서휘 뒤에 줄지어 서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몰려온 자들의 수가 너무 많았던 것.

분위기마저 심상치 않았다.

이서휘가 몰려온 사마세가의 무리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수가 많은 것을 보자 어쩐지 이서휘의 마음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이 많은 자들을 또 다 죽여야 한단 말인가? 저 멍청한 사마록 때문에?’

이서휘가 표정을 굳힌 채로 말했다.

“어찌 이렇게 다 몰려오셨소?”

이서휘의 말에 혼자 이서휘를 상대하겠다던 사마록이 딴 소리를 내뱉었다.

“자, 일단은 이서휘 빼고 다 죽여라.”

“명을 받듭니다.”

추리대는 자신들을 죽이라는 명령에 순진한 사람들처럼 고개를 갸웃하며 사마세가 사람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사마세가 무리는 저마다 검을 뽑더니 천천히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무척 황당해하던 이서휘가 여전히 검을 뽑지 않은 채로 말했다.

“잠시만.”

사마록이 손을 들더니 이서휘의 말에 대꾸하면서 씨익 웃었다.

“왜?”

이서휘는 흥분을 억누르느라 저도 모르게 반말로 대꾸했다.

“뭐하는 짓인가?”

이서휘의 말에 사마록이 뒷짐을 지면서 대꾸했다.

“보면 모르겠나?”

이서휘가 호통을 내질렀다.

“무고한 사람들을 왜 죽이려는 것이냐! 덤비려면 나한테 다 덤벼라.”

“내가? 그럴 생각 없네. 저 멍청한 놈들은 자네한테 죽은 게 될 거야. 이서휘라는 사람은 도전하는 자들을 비정하게 다 죽인 사람이 되겠지. 세상일이라는 게 본래 다 그런 것이지.”

그 말에 이서휘가 평소와 다르게 표정이 급격하게 우울해지고 있었다.

“알려줘서 고맙군. 나를 앞에 두고 대놓고 중상모략이라니. 대단하네, 대단해.”

이서휘를 얕잡아 보는 수준이 사마준보나 그 아비나 다를 게 없었다.

이서휘가 백야검을 뽑아 사마세가 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 엮인 악연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겠다니.”

어쩐지 말을 내뱉던 도중에 이서휘의 말끝이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그 말에 사마록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 대주, 정신 차리게. 분노한 모양이야. 제법 냉정하다 들었는데 아닌 모양이었군.”

사마록의 태도는 그야말로 적반하장에다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이었다. 사마록의 말에 이서휘가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대꾸했다.

“나를 성인군자로 보셨소? 아니외다. 경고했소. 치지 마시오.”

사마록이 손을 한 번 흔들거리더니 명령을 다시 내렸다.

“죽여라. 모조리.”

추리대가 동시에 병기를 뽑아들었다.

이서휘는 사마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마록은 이서휘와 눈을 마주치더니 히죽 웃었다.

그 순간에 추리대의 무인 한 명이 소리 없이 다가와 이서휘의 등에 칼을 쑤셔 넣었다.

이서휘의 백야검이 후방으로 궤적을 그리더니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다가오던 자의 머리통을 깨끗하게 잘라냈다.

스윽! 텅, 텅텅!

사마록이 추리대 안에도 사마세가의 무인을 심어놨던 것이다. 그러나 이서휘를 뒤에서 습격하겠다고?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이어서 사마세가가 추리대를 향해 밀려들었다.

이서휘는 잠시 멀뚱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 사마록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추리대를 바라봤다. 이서휘에게 도전을 하겠다고 몰려왔다가 사마세가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순간이었다.

불쌍한 자들이다.

분노가 치밀었다.

‘백도와 마도의 차이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이미 잘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이서휘의 가슴에는 분노가 끊임없이 차올랐다. 이어서 사마세가의 무인 몇 명이 추리대를 신경 쓰지 않고 동서남북 방향에서 이서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사마록이 명령을 내렸다.

“일단 두 눈과 혀부터 뽑아라. 저 놈의 목숨은 추리대의 지인들이 복수해서 죽이게 만들 것이다.”

사마록의 말에 이서휘는 자신의 정수리 위가 뻥 하고 터지는 기분을 느꼈다. 회귀한 이후 어쩌면 가장 분노하게 된 날이었다. 한데 그 심적인 충격 자체가 이서휘의 신체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서휘의 마음에 차올랐던 분노가 정도(正道)를 넘어서고 있었다.

“사마록, 너는 내 손으로 꼭 죽여주마.”

그런데 살기를 품자마자, 이서휘의 두 눈에선 어쩐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애달프구나. 인간의 어리석음이 만들어내는 비극이란…….’

네 개의 검이 동시에 이서휘의 몸통으로 뻗어올 때까지도 이서휘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추리대의 누군가가 이서휘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이 대주님!”

이서휘는 네 개의 검이 밀려드는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공중으로 솟구치면서 검 하나를 밟고 공중제비를 돌아 사마록 앞에 내려섰다. 나이 차이가 이십 년도 더 되건만 이서휘는 사마록에게 다가가면서 하대를 했다.

“사마록 가주, 네 놈이 사마가문을 망치는구나. 이제 보니 준보의 탓이 아니라 네 놈이 악의 근원이었어. 내 손에 죽은 준보가 불쌍하구나.”

이미 이서휘의 눈빛은 정상이 아니었다. 사마록도 이서휘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고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허, 이서휘. 정신이 나간 모양이로구나.”

사마록이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자마자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이서휘의 백야검이 사마록의 검을 튕겨내더니 연달아 삼초를 더 내뱉고 쐐앵 하는 소리와 함께 좌수로 성검을 뽑아 좌측에 휘둘렀다.

달려오던 사마세가의 무리를 향해 이서휘의 검기가 쏟아졌다.

콰아아아앙!

누군가는 막아냈고,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면서 검을 놓쳤다. 이서휘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사마록에게 다가가면서 백야검을 휘둘렀다.

챙챙챙!

몇 번 검을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지겨울 정도로 달려드는 자들이 있었다. 이서휘는 사마록의 검을 튕겨내다가 엄청난 높이로 솟구쳐서 반대방향으로 떨어진 다음에 사마세가 무리를 향해 쌍검으로 검기를 내뱉었다.

쫘아아아악! 소리와 함께 추리대와 싸우던 일부가 검기에 몸통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서휘가 쌍검으로 검기를 내뱉자마자 가슴이 불에 데여 타버린 것처럼 기혈이 뒤집혀 지고 있었다.

더불어 심상치 않은 고통이 밀려오고 있었다.

분노한 터라 이서휘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았던 것.

그러나 여전히 마음은 그야말로 짙은 살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이미 지난날 군림맹에서 생을 다시 시작하자마자 수많은 마도인을 죽였던 이서휘다. 이서휘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살기에 짙게 사로잡혀 있던 나날이었다.

아마 단우혁이나 도이, 도삼이 없었더라면 이서휘의 상태는 더 빠르게 악화됐을 터.

하지만 이서휘는 기혈이 뒤집히는 순간에 자신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쌍검을 휘둘렀다.

‘이상하구나. 몸 상태가…….’

이대로 이서휘가 폭주한다면……. 어쩌면 또 한 명의 검마가 탄생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리라. 검을 휘두르던 이서휘마저도 어쩐지 저도 모르게 검마를 떠올리고 있었다.

‘검마(劍魔).’

그때였다.

이서휘가 휘두르는 성검(聖劍)에서 고오(高傲)한 검명(劍鳴)이 울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웅―

그간 수없이 많은 마도인을 베던 이서휘의 검심(劍心)이 마도에 빠질 수도 있었던 위기의 순간에 성검이 스스로 울었던 것.

검을 휘두르던 이서휘가 깜짝 놀라면서 검명에 귀를 기울였다. 다름 아닌 성검이 울었기 때문에 이서휘는 자연스럽게 검성을 떠올렸고, 검성의 내공을 이어받았을 때 흘렸던 자신의 눈물과 마음을 떠올렸다.

그제야 가슴 가득히 몰아치던 분노와 뒤엉킨 기혈을 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나도…… 잘못됐구나. 사마록을 죽이는 것보다……. 먼저 추리대를 더 많이 살리자.’

이서휘는 달려드는 사마세가의 고수들을 향해 비열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땅을 갈라버리듯이 백야검으로 돌덩이와 먼지를 피어오르게 만든 다음에 성검으로 적들의 무릎께에 검기를 비스듬히 뿌렸다.

순식간에 달려오던 자들이 동시에 바닥에 쓰러지자 이서휘가 신형을 솟구쳐 추리대와 어우러지고 있는 사마세가의 무리를 향해 뛰어들어 쌍검을 휘두르면서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팔목, 팔꿈치, 무릎, 목덜미…… 닥치는 대로 베면서 돌아다녔다.

지난날 이서휘가 마도를 상대로 펼쳤던 일검일흔(一劍一痕).

지금은 그 수법이 훨씬 더 정교했다.

푸욱, 푹푹푹푹푹! 채앵! 챙챙챙!

잠시도 지체하는 법 없이 적 사이를 누비면서 지나다녔다. 싸움이 길어질 것 같은 상대들은 상대도 하지 않으면서 쌍검을 휘둘렀다. 이서휘는 추적해오는 자들을 엄청난 속도로 뿌리치면서 일검일흔으로 사마세가의 무리를 차례차례 쓰러뜨렸다.

이서휘의 활약은 추리대에겐 한줄기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이들도 무림인들이다. 부상을 당한 사마세가의 무인들이 점점 추리대의 무림인들에게 죽고 있었다.

사마록마저도 이서휘를 잡지 못하고 있었으니 다른 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서휘는 암행표를 오로지 추격자들의 검을 피할 때만 사용했다.

오히려 추리대보다 훨씬 많았던 사마세가는 어느새 과반수이상이 바닥에 쓰러져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고, 그 틈에 추리대가 이서휘의 행동에 보조를 맞추면서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그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 어쩐지 갑자기 비명이 잦아들었다.

이서휘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던 것. 사마세가의 무리가 겁에 질려 이서휘의 행방을 찾았다.

사마록도 검을 쥐고 사방팔방을 노려다봤다.

이서휘는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서휘는 어둠 속에서 사마록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몸이 이상하구나. 사마록만 죽이고 빠져나가야겠다.’

그 사이에 이서휘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사마록이 추리대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이서휘가 다시 암행표로 움직였다.

거리는 꽤 멀었으나 움직일 궤적을 미리 봐둔 상태. 어쩐지 쌍검을 납검하고 손에는 청협비수(靑俠匕首)가 들려 있었다.

사마록이 추리대의 무인을 내려치려는 순간 이서휘가 엄청난 속도로 시전하는 암행표로 다가가, 사마록의 근처에서 암행술로 몸을 감췄다가 청협비수로 사마록의 목을 긋고 그대로 순식간에 빠져 나갔다.

이어지는 결정적인 공격은 사마록에게 죽을 뻔 했던 추리대의 몫이었다. 양패구상이라 생각하고 내지른 검 한 자루가 어쩐지 사마록의 배에 푹 꽂혀 있었다.

하지만 사마록은 어쩐지 그 전에 자신의 왼손으로 목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막고 있었다. 그러다 배에 꽂힌 검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더니 이서휘의 모습을 찾으면서 바닥에 고꾸라졌다.

이서휘는 추리대와 사마세가를 뒤로 하고 온 몸에 피를 묻힌 채로 양곡으로 향했다. 이미 이서휘의 실력은 사마록보다 윗길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록을 암살하다시피 하고 빠져 나온 것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사마록의 말이 그간 이서휘의 마음에 자리 잡았던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이서휘가 양곡으로 향하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겠구나.”

이서휘가 서글픈 모습으로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 ☆ ☆

목군자(木君子) 진금구(秦金甌)의 거처.

진금구가 조그만 모닥불을 피워놓고 작은 손칼로 목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만 조용히 퍼지는 가운데 옥의림이 양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고 진금구의 맞은편에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부녀지간으로 보일 정도였다.

문득 진금구가 어둠 너머를 바라봤다.

무언가를 본 모양이었다.

진금구가 어둠을 주시하자 자연스레 옥의림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진금구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의림아.”

“네.”

“가서 이화검(理化劍)을 가져오너라.”

“네?”

옥의림은 반문하면서도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스승의 이화검을 가지러 가기 위해 움직였다.

늘 목검만 쓰던 스승이 진검인 이화검을 가져오라 한 것은 말 그대로 심상치 않은 상황. 더군다나 스승이 이화검을 들 때면 늘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곤 했었다.

옥의림이 이화검을 가지러 간 사이에 진금구는 어둠에 묻혀 있는 형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을 걸었다.

“누구신가? 이 밤에.”

사내가 몇 걸음을 움직이더니 쏟아지는 달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이서휘였다.

진금구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서휘에게 말했다.

“이 대주가 아닌가?”

“선배님, 지나다가 들렀습니다.”

“이리 오게. 꼴이 비 맞은 생쥐 같군.”

옥의림이 이화검을 가지고 나오다가 모닥불로 걸어오는 이서휘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멈췄다.

그러자 진금구가 옥의림에게 말했다.

“의림아 그건 제자리에 두고 물러가거라.”

“알겠습니다.”

옥의림은 다시 이화검을 두러 가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옥의림도 놀라는 중이었다. 이서휘가 한 밤중에 찾아온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스승이 이서휘의 기도를 읽자마자 이화검을 꺼내오라 한 것도 놀랄만한 일이었다.

옥의림은 다시 나와서 스승에게 예를 올리고 이서휘를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한 다음에 말없이 물러났다.

그 사이에 진금구는 모닥불에 비치는 이서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자네, 어디 아픈가?”

만나자마자 진금구가 그렇게 묻자 이서휘는 문득 실소가 터졌다.

“후후후, 아닙니다.”

“지쳐 보이는군.”

“그렇습니까?”

이서휘의 말에 진금구가 씨익 웃었다. 어쩐지 이서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기에 왜 온 건지 어렴풋이나마 다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서휘는 모닥불을 쬐자 그제야 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어떻게 찾아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멍한 정신으로 걸어왔다.

잠시 이서휘가 모닥불을 빤히 바라보자 진금구가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다.

“의림이에게 진검을 가져오라 했었네. 자네의 살기가 이 조용한 마을의 고요한 분위기를 짓누를 정도야.”

“음.”

“이거 상태가 안 좋군.”

문득 진금구가 다듬고 있던 목검을 손에 쥐더니 이서휘에게 말했다.

“이리 가까이 좀 와보게. 이쪽이 더 따뜻해.”

“네.”

이서휘가 엉거주춤 일어나 진금구 곁으로 다가와 다시 앉자 진금구가 무척 느린 동작으로 목검을 들고 이서휘의 이마를 내려쳤다.

딱!

물론 이서휘는 피할 수 있었는데 어쩐지 진금구가 하는 대로 내버려뒀다. 아무런 호신강기도 펼치지 않았기에 순수한 고통이 머리에 짜릿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고통을 참으면서 한 손으로 이마를 비비자 진금구가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정신 좀 차리게. 그 살기도 좀 내려놓고.”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때 진금구의 입이 반쯤 벌어지고 있었다.

“무슨…….”

“네?”

“무기 팔러 다니는가? 대체 병기가 몇 자루인 게야. 다 꺼내놓게.”

“다 꺼내라고요?”

이서휘가 반문하자 진금구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자네, 나랑 싸우러 온 겐가? 여기서 그런 무기를 잔뜩 들고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진금구의 말이 맞다.

이서휘는 시무룩한 얼굴로 먼저 종아리와 허벅지에 남아 있는 비수를 뽑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진금구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팔짱을 낀 채로 이서휘가 내려놓는 무기들을 구경했다.

실로 가관이었다.

비수 다음에는 그야말로 서슬이 퍼런 예기(銳氣)를 내뿜고 있는 청협비수가 바닥에 놓였다.

그 다음에는 허리춤에 있던 철선이었다.

진금구는 묵빛의 철선을 보자마자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뭐야? 줘 봐.”

철선을 넘기자 진금구가 촤르륵 소리를 내면서 철선을 편 다음에 이리저리 구경했다.

“어디서 얻었나?”

“마교의 인물을 죽이고…….”

“이름도 말해보게.”

“묵연마존이라 합니다.”

“묵연마존의 철선이라…….”

진금구가 철선을 바라보다 물었다.

“이건 파검혈(破劍穴)인가?”

“그렇습니다.”

진금구가 피식 웃으면서 싸늘한 눈빛으로 철선을 바라보더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또.”

그제야 이서휘가 백야검을 검집 채로 끌러서 진금구에게 넘겼다. 진금구가 백야검을 받아들더니 스릉 소리를 내면서 검신을 드러냈다.

백야검의 검신이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진금구는 어찌 된 노릇인지 시무룩한 얼굴로 백야검을 이리저리 바라보다 이서휘에게 말했다.

“많이도 베고 다녔군. 손질할 시기도 지났고. 명검이었으니 망정이지……. 대체 뭐하고 돌아다닌 게야?”

이서휘는 진금구의 물음에 낮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주로 마교와 싸웠지요. 얼마 전엔 점창파 장문인과 비무를 했습니다.”

이서휘는 말을 하다 보니 갑자기 봇물이 터진 것처럼 전적을 읊었다.

“사마세가 가주와 겨뤘습니다. 마교의 장로들, 마존들, 이름조차 모르는 마교의 무리들. 사마준보……. 대다수 그 검으로 다 죽였습니다.”

“다 죽였다…….”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했네. 죽여 마땅한 놈들이었을 테지.”

진금구가 별 생각 없이 백야검을 내려놓더니 이서휘의 등에 있는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도 좀 꺼내보게.”

그제야 이서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아볼까?’

이서휘가 성검을 넘기자 아니나 다를까 진금구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금구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추고 물끄러미 성검을 바라봤다.

무려 한 시진이 그렇게 흘러갔다.

두 사람은 그 사이에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로 때때로 모닥불에 불쏘시개와 땔나무를 밀어 넣었다.

그 침묵을 깨고 진금구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버님은 편안하게 가셨나?”

그 말에 이서휘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네.”

“구화산?”

“네.”

“유해(遺骸)는…….”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대로 등선하셨는데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석실 천장에 뚫린 하늘로 사라지셨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말이 없었다. 진금구는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지만 옆에 있던 이서휘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한 마음과 슬픔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한참 후에 진금구가 입을 열었다.

“자네 혼자 지켜봤나?”

“네.”

진금구가 성검을 바라보다가 이서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손 좀 줘보게.”

이서휘가 손을 내밀자 진금구가 손을 맞잡았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이서휘의 손과 진금구의 손에서 한줄기 내공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진금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가 이어 받았구나.”

“남은 것이라며 주셨습니다.”

두 사람은 검성의 내공을 말하고 있었다.

진금구는 어찌 된 노릇인지 이서휘가 어떻게 해서 구화산에 갔고 석실에 들어갔으며 검성에게 어떻게 내공을 받을 수 있었는지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또한 그 생각이 무엇인지도 털어놓지 않은 채로 때때로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진금구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면서 이서휘에게 말했다.

“늦었으니 들어와서 눈 좀 붙이게. 내일 다시 이야기하지.”

“알겠습니다.”

진금구가 이서휘의 병기를 내려다보더니 어쩐지 성검을 제외하고 자신이 모두 주워서 집으로 들고 갔다. 이서휘는 진금구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성검만 든 채로 따라 들어가 잠시 눈을 붙였다.

다음날 이서휘는 정오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코에 음식 냄새가 전해졌다.

바깥에서 진금구가 이서휘에게 말했다. 깨난 것을 알아챈 모양인지 귀신처럼 말을 건넸다.

“그만 자고 일어나게.”

이서휘가 바깥으로 나가보니 모닥불이 있던 곳에 목재 탁자가 놓여 있고 옥의림이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이 탁자에 앉아 밥을 먹었다.

그런데 이서휘가 말없이 밥을 먹는 도중에 탁자 옆에 봇짐 같은 것을 발견하고 시선을 보내자 진금구가 말했다.

“장례랄 것도 없지만 어쨌든 마지막으로 머무셨던 장소는 다녀와야 할 것 같군.”

옥의림이 무슨 말인지 몰라 진금구와 이서휘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나저나 이서휘는 당혹스러웠다.

어젯밤에 불쑥 찾아온 일로 진금구가 구화산으로 떠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진금구가 옥의림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의림아.”

“네.”

“내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구화산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아버님이요?”

옥의림은 과연 진금구의 아버지가 검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이서휘가 바라보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옥의림이 눈을 껌벅이자 진금구가 이서휘를 바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다녀올 때까지 의림이는 자네가 지키고 있어.”

이서휘의 목구멍에 밥이 막혔다. 이서휘가 끅끅 거리자 옥의림이 조용히 물 주전자와 잔을 내밀었다. 씹지도 않은 밥을 물로 넘긴 이서휘가 대꾸했다.

“지키라니요? 누가 잡아갑니까?”

그 말에 진금구가 이서휘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네 같은 놈들이 수십 명은 되니까 자네가 지키고 있어. 알겠나?”

그 말에 옥의림이 옆에서 입술을 안으로 감추더니 웃음을 참고 있었다.

진금구가 말했다.

“별 일 아니야. 내가 머무는 곳에 있으면서 의림이와 비무나 해주게. 금방 다녀올 테니. 식사는 의림이가 알아서 챙겨 줄 것이다.”

이서휘가 그러겠다고 승낙도 하지 않았는데 진금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비수 몇 자루와 철선, 백야검은 내가 가지고 가겠다. 가는 길이 험할 수 있으니 내가 쓸 생각이야.”

“네? 어째서 이것을.”

그 말에 진금구가 이서휘를 다시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간 대체 사람을 몇 명이나 죽인 것이냐?”

“대부분 마교였습니다만.”

“자네 혼자 악인을 다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진금구가 잔뜩 묶어놓은 봇짐을 가리키며 옥의림에게 말했다.

“의림아.”

“네, 스승님.”

“이 친구 무서운 자니까 조심하거라.”

“알겠습니다.”

“이 안에 비수와 철선과 검이 들어 있다. 남들이 한 명 죽일 시간에 이 자는 서너 명을 베고 돌아다녔을 게야.”

옥의림이 스승의 말에 장단을 맞췄다.

“그렇군요. 병기가 실로 많습니다.”

“아무리 마도에 의탁한 자들이라지만 그 수많은 목숨을 해하고 돌아다니니 이 녀석의 상태가 이 모양인 거야. 무기들에 달라붙은 원혼을 씻어내던가 그게 안 되면 구화산의 절벽에 이것들을 다 버리고 오겠다.”

그 말에 이서휘가 다급하게 대꾸했다.

“선배님, 백야검은 안 됩니다.”

“왜?”

이서휘는 백야검이 검림주의 증표(證票)인 검이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진금구가 말했다.

“백야검이 가장 문제야. 그리고 자네가 왜 마지막에 구성검(久成劍)을 내려놓았는지 아는가?”

“구성검이요? 모릅니다.”

이서휘가 성검(聖劍)이라 이름을 붙였었는데 본래 이름은 구성검인 모양이었다. 구성(久成)이란 말은 오랜 시일을 두고 닦아야만 불도(佛道)를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었는데 검 이름으로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검성은 불도를 닦지 않았으니 그저 도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검명(劍名)의 뜻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진금구의 말이 이어졌다.

“심적으로 가장 아꼈기 때문이지. 자네 성격이 그래. 이미 무공의 수준도 내가 뭐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높은 상태이기 때문에 구성검도 과해. 그 높은 무공으로 쌍검에 철선에 비수까지……. 자네는 남들이 짊어졌어야 할 업보까지 모조리 등에 지고 있네. 자네가 대체 뭐라고? 하늘에서 내려 보낸 아수라인가?”

“네?”

아수라란 말에 이서휘가 화들짝 놀라 반문하자 진금구의 말이 이어졌다.

“생각 같아선 목검만 쥐고 있으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참은 것이야. 알겠나?”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서휘가 아쉬워하자 진금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정을 봐줬다.

“백야검에도 뭔가 또 의미가 있나 보군. 참고하겠네.”

하여간 진금구 이 사람의 눈치는 이서휘에 못지않았다. 잠시 세 사람은 밥을 다 먹은 다음에야 다시 말을 나눴다.

진금구가 옥의림에게 말했다.

“그 놈들이 오면…….”

“네.”

“이 대주에게 목검을 내줘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부잣집 놈이 오면.”

“네.”

진금구가 말을 하다 말고 이서휘를 바라봤다.

“아니다. 이 녀석이 알아서 하겠지.”

진금구가 옥의림과 저희끼리 아는 대화를 잠시 나누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서휘에게 경고했다.

“이서휘.”

“네, 선배님.”

“내가 없는 동안에 내 집에서 살인을 했다가는 돌아와서 가만히 안 두겠다. 알겠어?”

앞뒤 자르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이서휘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일어나자 진금구가 말을 이었다.

“대답 안 하는가?”

“알겠습니다.”

“목검을 써라. 당분간……. 그리하면 네 상태는 금방 나아질 게다.”

“알겠습니다. 목검을 쓰겠습니다.”

이서휘가 진금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천지에 이런 처방이 어디 있겠나 싶었지만 어쩐지 이서휘는 진금구의 말을 그대로 따를 생각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진금구가 봇짐을 들고 집에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어처구니없는 모습으로 등장해 이서휘와 옥의림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이서휘는 그야말로 기가 차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옥의림도 스승의 모습에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다시 등장한 진금구의 모습은 이서휘와 무척 흡사했다.

진금구가 양팔을 벌리더니 이서휘를 놀리는 것처럼 말했다.

“어떠한가?”

이서휘는 넋이 나간 상태였다.

‘이게 그간 내 모습이었단 말인가?’

진금구는 등에 쌍검을 매달고 있었다.

이화검(理化劍)과 백야검이다.

허리에는 철선이 꽂혀 있고 다리의 각반 부분이 볼록 튀어나온 것을 보아하니 이서휘의 비수를 꽂은 모양이었다.

즉 이서휘가 넘긴 병기로 진금구가 무장하고 있었다.

진금구가 말을 이어나갔다.

“백도의 무인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사마외도의 무리로 보이느냐.”

진금구가 말과 함께 쐐앵 하는 소리와 함께 쌍검을 뽑았다. 그야말로 기세가 흉흉했다. 진금구가 검을 휘두르면서 이서휘에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싸웠단 말이지?”

마치 이서휘가 펼쳤던 쌍검술을 따라하듯이 이화검과 백야검으로 여러 가지 초식을 전개하다가 멈췄다. 그 잠깐의 동작에서 이서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내 동작과 흡사하게 펼치시는군.’

진금구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쌍검에 철선, 비수까지 준비했으니 백여 명의 목숨은 순식간에 뺏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 옥의림이 웃음을 터트렸다. 스승과 너무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서휘도 자신을 놀리는 말인 줄 알면서도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진금구가 이서휘와 옥의림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다녀오겠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스승님, 조심하셔요.”

“그래.”

진금구는 구화산이 마치 뒷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서휘와 옥의림의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이내 먼지를 일으키면서 경공을 펼쳤다.

그 속도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서 지켜보던 이서휘가 경공 대결을 해보고 싶을 정도였다.

어느새 진금구의 모습이 사라지자 이서휘와 옥의림은 한참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진금구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두 사람에게 각기 글을 남겼는데 깜박했군. 내 책상 위에 있다.”

“글이요?”

들리지도 않건만 이서휘가 홀로 대꾸했다.

진금구가 아침에 일어나 두 사람에게 쓴 편지였다.

이서휘가 들어가 보니 책상 위에 이서휘, 옥의림이라 적힌 종이가 단정하게 접혀 있었다.

이서휘가 두 개를 짚어 하나를 옥의림에게 건넸다. 어쩐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읽어봐야 할 것 같았기에 이서휘가 바깥으로 나가면서 진금구가 남긴 글을 읽었다.

필체와 내용이 그야말로 자유분방했다.

[이 대주, 내가 없는 동안에 의림이를 잘 보살펴다오. 혹시 내가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이 퍼져 어중이떠중이들이 많이 꼬일까 걱정이다. 하지만 자네의 무공이 뛰어나니 잘 대처할 것이라 믿고 있다.

그리고 자네 상태에 대해서는 지난밤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내가 목검을 고집하는 이유와 비슷한 것 같다. 검을 쥔 자들이 강해지다 보면 겪게 되는 단계라 생각하고 잘 넘겨야 할 것이다. 이는 주화입마도 아니고 잘못된 현상도 아니다. 검을 쥐고 상대의 목숨을 뺏는 자라면 응당 고민해봐야 할 일인 것이다. 무료할 때면 내가 잘라 놓은 재료들이 있으니 목검을 깎으면서 생각을 다듬어 보거라. 돌아와서 보자꾸나. 별일 없기를 바란다.]

이서휘는 한참이나 진금구가 남기고 간 편지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검을 쥐고 상대의 목숨을 뺏는 자라면 응당 고민해봐야 할 일.’

더군다나 진금구는 자신이 목검을 고집하는 이유와 비슷하리라 추측했다. 이 말은 곧 진금구도 이서휘의 상태를 겪어봤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간 이서휘는 진금구를 관망자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문득 이서휘가 잠시 고요한 마을을 바라봤다.

어차피 이곳을 나가면 다시 검을 쥐고 마도의 무리와 싸워야 할 것이다. 그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는지 이곳에서 정리해둘 필요가 있었다.

옥의림도 진금구가 남긴 편지를 읽고 있었다.

[의림아, 내가 없는 동안에 이서휘를 보살펴다오. 협의심(俠義心)이 나름 있는 놈이라 생각한다. 너를 충분히 지켜줄 수 있을 게다. 다만 너도 지켜보면 알겠지만, 불운해질수록 심마(心魔)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녀석이다. 나쁜 놈은 아니니까 너무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비무를 종종 해 보거라. 실전 경험이 많은 녀석이라 배울 게 많을 것이다. 궁금한 것은 직접 물어보아라. 처음엔 어색해하겠지만, 나중에는 잘 가르쳐줄 거다. 돌아와서 보자꾸나. 별일 없기를 바란다.]

옥의림은 편지를 들고 있다가 바깥을 바라봤다. 이서휘 역시 편지를 들고 서 있었다. 그나저나 옥의림은 스승이 사람의 본질을 잘 간파하는 분이라 알고 있었다.

이서휘에 대해 언급한 것이 협의심과 심마였다. 아직 옥의림의 나이가 어리고 강호 경험이 미천해 대체 협의심과 심마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옥의림은 두 단어만으로도 여러 가지를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서휘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언급한 부분보다는 편지의 앞부분만을 다시 읽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 의림이를 잘 보살펴다오.’

이런 부탁이 없었더라도 그 누구보다 더 옥의림을 지키기 위해 애쓸 사람이 이서휘다.

옥의림이에게 무슨 일이 곧 생길 것이라는 말일까?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이서휘는 진금구가 돌아올 때까지 그의 거처에서 머무를 생각이었다.

옥의림이 집에서 나오지 않자 이서휘는 잠시 집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이 그야말로 고요했다.

산자락에 덜렁 놓인 집이라 은거하기 좋은 장소다. 일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진금구가 한가로이 목검을 깎는 모습을 보고 내심 한심하다 생각했던 이서휘였으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져 있었다. 진금구가 모아 놓은 나무를 보자마자 자신도 목검을 한번 깎아보고 싶었던 것.

그제야 옥의림이 집에서 나와 이서휘에게 말했다.

“대주님.”

“네.”

“예림이가 학당에서 돌아올 시간이에요. 데리러가야 하거든요. 이따가 저녁 찬 가지고 다시 올게요. 대주님.”

“그러시오.”

어쩐지 옥의림이 부끄러운 낯빛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그나저나 옥의림이 빠져나가자 그제야 이서휘도 마음이 놓였다. 이서휘도 은근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던 참이었다.

☆ ☆ ☆

진금구의 거처에 목검을 깎는 청년이 앉아 있었다.

한 시진이나 집중해서 다듬었건만 이서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직접 만들어보니 이서휘가 만들고 있는 목검과 진금구가 완성한 목검의 완성도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쉬운 일이 아니었구나.’

그 고요함을 깨고 마차가 한 대 진금구의 거처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서휘는 마침 목검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쳐다보지도 않았다.

스윽, 스윽 하는 소리에 따라 나무가 얇게 썰렸다. 검신을 매끄럽게 만드는 것은 어느 정도 숙달됐으나 어려운 것은 검병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진금구는 다른 장비는 사용하지 않은 채로 손칼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한 것처럼 보여 이서휘도 오기가 생기는 중이었다.

그 사이에 마차에서 한 공자가 내려서 수하들과 함께 무작정 다가오더니 이서휘에게 외쳤다.

“어이, 어르신은 어디 계시는가?”

이서휘가 힐끗 보니 잘 차려입은 청년이 호위 두 명을 대동하고 이서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서휘는 힐끗 본 것만으로도 싹수가 노란 녀석이라 판단해 말을 무시하고 손칼로 검병 부분을 다듬었다.

검병을 손으로 쥐어보니 어딘가 불편했다. 부잣집 공자가 또다시 이서휘를 방해했다.

“자네 귀머거리인가? 처음 보는 녀석인데 제자일리는 없고.”

“후―!”

이서휘가 입으로 바람을 불어 검병 부분에 묻어 있는 먼지를 날린 다음에 다시 손에 쥐었다. 이제야 제법 손에 착 감겼다.

이서휘가 자신이 만든 목검을 쥐고 중얼거렸다.

“기분이 묘하군. 이제 좀 쓸 만하겠어.”

“뭐라고? 이 봐!”

이서휘가 불청객들을 힐끗 바라봤다.

‘부잣집 놈이라는 녀석이 이 놈인가 보군.’

사마준보에게서나 볼 수 있었던 거만함이 온 몸에 흐르고 있었다. 머리와 구레나룻을 길게 기르고 눈썹과 수염을 깔끔하게 다듬어 화류계의 풍류공자처럼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렇게 외진 곳까지 마차를 끌고 왔으니 그 성격이 어떨지 훤히 보였다. 더군다나 제법 고강해 보이는 삼십 대의 호위 무사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자신을 계속 무시하자 공자가 기가 찬 얼굴로 말했다.

“자네, 내가 누군지 아는가?”

그 말에 이서휘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관심 없으니 돌아들 가라.”

그 말에 호위 무사 한 명이 조소를 날리며 한 걸음을 나서자 공자가 손을 들어 제지하고 말을 이었다.

“천화상회라는 곳을 들어봤겠지?”

“못 들어봤다.”

“천화표국은?

“마찬가지.”

“천화전장은?”

“그만해라. 다 모르니까.”

공자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을 이었다.

“전부 천화상단(天化商團)의 사업들이지. 내가 그곳의 후계자다. 천화공자 구궁인(具穹忍)이라 한다.”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좋겠네. 돈 많아서.”

그때 옥의림이 저녁 찬거리를 바구니에 담아 걸어오다가 천화공자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서휘는 옥의림의 얼굴에 가득 퍼진 당혹스러움이 어쩐지 반가웠다. 천화공자를 불편해하는 표정이라 생각했던 것.

이서휘가 구궁인을 바라봤다.

‘진금구 선배는 어찌 이렇게 한심한 놈이 계속 찾아오게 두셨는지 의문이로군.’

이서휘의 예상대로 구궁인은 옥의림을 쫓아다니는 무리 중 한 명이었다.

바로 며칠 전에는 이서휘를 쫓는 모임인 추리대와 일이 엮였던 이서휘다. 그런 의미에서 옥의림도 추옥대(追玉隊)가 제법 많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서휘와 옥의림이 모처럼 둘만 있을 수도 있었던 시간을 방해한 셈이었다.

이서휘가 이 자를 어떻게 쫓아낼 것인지 고민하다가 문득 손에 쥔 목검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진 선배의 말대로 살기가 좀 가라앉았구나. 저 놈들이 덤비더라도 별 문제 없겠다.’

천화공자 구궁인은 옥의림이 등장하자 이서휘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띠고 있었다.

“옥 소저, 잘 지냈소?”

“네.”

옥의림이 덤덤한 얼굴로 대꾸하자 문득 구궁인이 이서휘를 보면서 말했다.

“이 자는 대체 누구요?”

옥의림이 이서휘를 대체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굳이 말하자면 스승이 남기고 간 호위 무사? 옥의림이 머뭇거리는 와중에 이서휘가 구궁인의 물음에 저도 모르게 덜컥 대꾸했다.

“정혼자다.”

“뭐라고!”

구궁인이 마치 원수를 만난 것처럼 이서휘를 노려봤다. 옥의림마저 저 큰 두 눈을 껌벅이면서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궁인이 귀를 후비면서 말했다.

“잘 못 들은 거 같은데 다시 말해보게.”

그 말에 이서휘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정혼자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왜 여기에 있겠나? 목군자 선배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실 일이 있어 특별히 나를 부르셨네. 자네 같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옥 소저를 지켜달라는 부탁이었지.”

이서휘는 되도 않는 말을 늘어놓을수록 어쩐지 가슴이 시원해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옥의림도 천화공자 구궁인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이서휘가 거짓말을 늘어놓아도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구궁인의 표정이 점점 썩어 가고 있었다.

“네놈이 대체 뭔데 옥 소저의 정혼자란 말이냐? 옥 소저, 사실이오?”

이서휘가 물끄러미 옥의림을 바라보자 옥의림이 이서휘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질책의 의미가 눈빛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기색도 담겨 있었다.

옥의림이 침을 한 번 삼키더니 구궁인을 향해 대꾸했다.

“맞아요.”

“맞아?”

“네.”

“맞다고?”

“맞아요.”

“허허허허허허…….”

구궁인이 웃음을 멈추더니 또다시 길게 헛웃음을 터트리면서 말을 이었다.

“허허허허헛! 그간 예의를 다했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구려.”

구궁인의 기도가 확 변하더니 주변을 살피면서 말했다.

“일단 집으로 데려갑시다. 목 선배도 없으니. 가서 예의범절부터 가르쳐야겠소.”

말과 함께 구궁인이 씨익 웃자, 구궁인의 호위 무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옥의림을 강제로 데려갈 생각이었던 것.

이서휘가 먼저 옥의림의 앞으로 가더니 손을 내밀어 옥의림을 자신의 등 뒤로 보내고 호위 무사들을 바라봤다.

어쩐지 진금구가 말한 그대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진금구도 참으로 대범했다. 그렇게 아끼는 애제자를 이서휘에게 맡기고 구화산으로 훌쩍 떠났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을 예상했으면서도 이서휘에게는 굳이 목검을 쓰라고 강조했다. 마음에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가 목검을 쥐고 기도를 살짝 드러내자 다가오던 호위 무사 두 명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이서휘의 기도에 놀라는 것을 보니 삼류 무사들은 아닌 셈이었다.

그때였다. 이서휘의 등 뒤에 있던 옥의림이 까치발을 들더니 이서휘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주님, 저도 제법 강한 편인데……. 한 명은 제가…….”

옥의림의 말에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옥의림에게 말을 놓아 버렸다.

“내 뒤에서 얌전히 구경이나 해.”

옥의림이 뒤로 물러나자, 그제야 자신이 옥의림에게 반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이서휘가 근래 보기 드물게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7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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