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35화 (35/43)

<6장. 결의(決意)>

이서휘는 며칠간 단향객잔과 백도맹을 오갔다. 다행히 점창파 장문인 여서문은 이서휘의 예상보다 담백한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까마득한 후배에게 패해 마음이 불편했을 법도 하건만 이서휘를 친한 아우로 여기는 것처럼 편하게 대했다.

그 덕분에 백도맹을 대하기가 조심스러웠던 이서휘는 담가막에 이어 마음을 약간 터놓을 수 있는 상대를 한 명 더 얻게 되었다.

하지만 백도맹 전체의 분위기와 다른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화산파였다.

‘선배나 장문인이 나서서 이서휘를 한 번 꺾어줬으면…….’

이제 화산파의 후기지수들은 이서휘를 꺾지 않고서는 무림에 드날리는 위명을 갖기 힘들어졌다. 심지어 구파의 중진과 장문인들도 마찬가지. 특히 스스로 천하제일문파라 여기고 있는 화산파는 노골적으로 이서휘와 겨뤄보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지만 저 강력한 점창파의 여서문이 패배한 터라 쉽게 나설 수 없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무림인들의 사고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백도맹과 더 겨뤄봤자 얻을 게 없었다. 며칠 백도맹을 오가면서 화산파의 분위기를 눈치 채고 있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점창파 장문인과 겨룰 때는 이서휘 목숨도 위태로웠다. 일반적인 무인이었다면 검을 자르지 않고 여서문의 목을 잘랐을 것이다.

그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여서문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점창파의 마음이 이서휘에게 풀린 것이었다.

여서문이 점창 문도를 데리고 가서 설명한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목숨을 빚진 것이다. 부끄럽고 감사한 일이다. 내 패배를 곱씹어 너희도 하루하루 수련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훗날 이서휘를 꺾을 수 있는 고수가 우리 점창에서 나오길 바란다.]

만약 여서문보다 더 강력한 고수가 비무를 요청한다면 이서휘는 요행을 바랄 수 없을 터였다. 승부를 내기 위해서는, 그리고 죽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여야 할 터였다. 그 때문에 이서휘는 화산파를 자극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장마처럼 며칠째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서휘는 단향객잔에 돌아와 며칠을 더 머물렀다. 떨어지는 빗소리에 하루는 술을 마시고 하루는 객잔 방에서 홀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서휘가 단향객잔에 있다는 소식은 백도맹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도 퍼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백도맹에 소속되지 않은 무림인들도 이따금 단향객잔으로 찾아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서휘는 빙긋 웃었다.

‘주제도 모르고 도전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은 단우혁과 백류혼에게 보내야겠다.’

이서휘의 예상대로 여서문과 겨뤘던 다음 날 저녁부터 실로 다양한 문파에서 보낸 도전자들이 한두 명씩 등장해 단향객잔 주변에서 기웃거리거나 객잔 안으로 들어와 이서휘 일행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서휘는 일부러 자신이 나서지 않고 단우혁이나 백류혼과 엮이게 만들었다.

이 친구들이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궁금했던 것.

그 때문에 실력 한 번 뽐내려고 왔다가 단우혁이나 백류혼에게 패해 돌아가곤 했다.

쏟아지는 비가 조금 그치자 창밖을 바라보던 도삼이 말했다.

“이제 슬슬 가셔야죠. 그렇게 몰아치던 비도 어느새 그치는 모양입니다.”

이서휘가 하늘을 살피며 대꾸했다.

“내일까진 더 쏟아질 것 같다.”

창 밖으로 사람들이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투둑― 투두두둑― 소리에 이어 쏴아아아 하며 세찬 빗소리가 지겹게 느껴질 정도로 다시 이어졌다.

도이가 고개를 저었다.

“이젠 하다하다 비까지 예언하네. 재주도 좋아.”

그 말에 이서휘가 피식 웃었다.

“먹구름이 저리 많은데 무슨 소리냐?”

일행들은 시커멓게 몰려오는 하늘의 먹구름을 그제야 바라볼 수 있었다. 이서휘가 무척 짙은 먹구름을 보며 말을 내뱉었다.

“……그 놈 참 지독하게 시커멓구나.”

이서휘의 중얼거림에 이어 귀청이 떨어질 정도의 천둥이 울리고 벼락이 떨어졌다. 이서휘는 한참을 그렇게 먹구름을 바라보다가 불쑥 위극신이 생각나고 있었다. 죽음을 맞이했었던 사류곡에서도 오늘처럼 이렇게 많은 비가 쏟아졌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은 쏟아지는 비를 동료들과 함께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서휘는 아무 말 없이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 ☆

이서휘가 백도맹과 단향객잔을 오가며 장강 이북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남기고 있었을 때, 일월마존 위극신은 마교 총본산에 가기 전에 자신의 본거지인 섬서의 한중(韓中)에 위치한 일월마가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 일월마가의 안가 중 한 곳.

겉으로 보면 지금이나 수십 년 전이나 한중검가(韓中劍家)로 알려진 장원이었다.

한중검가의 세력은 또 다시 이름만 바꿔서 한중 곳곳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지난 날 백도맹의 백협단이 자꾸 섬서 지역에서 실종되었던 것은 한중검가, 즉 일월마가의 고수들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가주가 안가에 모습을 드러내자 일월마가의 일원들은 대다수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냉혹한 가주다.

속을 알 수 없는 가주다.

일월마가를 십존쟁투(十尊爭鬪)에 끌어올리기 위해 온갖 음모와 계략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았던 가주였기에 존경심보다는 두려워하는 자들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위극신이 오랜만에 자신의 안가로 돌아오자마자 사람들을 죄다 불러 모았다.

백도맹을 치라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수뇌부들과 함께 밤낮을 달려 돌아온 위극신이다.

이미 위극신뿐만 아니라 이공자와 삼공자라 불리는 위극명(韋克明)과 위극단(韋克端)의 얼굴도 무거웠다. 더군다나 위극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청아(靑兒)와 적아(赤兒)도 보이지 않았다.

‘죽었거나 위극신에게 흡수됐거나…….’

사정을 얼핏 알고 있는 일월마가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위극신은 수하들을 모아놓고 상석에 가서 자연스럽게 앉으며 말했다.

“간천 장로가 총본산으로 검마(劍魔)를 데려오는 것에 실패하더라도 교주를 칠 생각이다. 그 전에…… 처리할 일이 있구나.”

처리할 일이 있다는 말에 좌중이 고요해졌다.

턱을 괴고 있던 위극신이 바로 아래 동생을 불렀다.

“위극명.”

“네, 형님.”

위극신이 짧게 한숨을 내쉬다가 말을 이었다.

“위극명.”

위극신이 또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위극명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위극명이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대답했다.

“네, 가주님.”

위극신이 말했다.

“넌 여기 남아라.”

“네?”

“다들 잘 들으시오.”

“네.”

위극신이 일월마가 전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일월마가의 가주 자리를 위극명에게 넘길 것이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잠시 숨소리만 이어졌다.

위극신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

좌중이 고요하자 위극신이 말을 이었다.

“명아, 이제 네가 일월마가의 가주다.”

위극명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위극신이 말을 이어나갔다.

“따라서 너는 총본산으로 동행시키지 않을 것이다. 남아서 일월마가를 이끌어라. 일월마가는 앞으로 위극명을 가주로 대하시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위극신이 말석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잔사진천뢰는 얼마나 남았나?”

“아직 넉넉합니다.”

“의복용으로 두 벌만 가져 오너라.”

“알겠습니다.”

잠시 후 명을 받은 자가 붉은 색으로 된 의복용 잔사진천뢰를 가져왔다. 백도맹에서 죽음을 각오한 자들이 이것을 입고 맹주에게 돌진한 바 있었다.

잔사진천뢰가 탁자에 놓였다.

서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누가 입을까?

위극신이 지목하는 자는 입어야 할 것이다.

잔사진천뢰가 터지는 순간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위극신의 말 한마디가 두려운 순간이었다.

위극신이 자신과 함께 교주를 치러갈 수뇌부들을 바라봤다. 장로들도 있어 위극신은 어조를 바꿔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교주를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 두려워하지 마시오.”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나이만 먹은 늙은이일 뿐이오. 육체만 살아 있을 뿐 총본산에 틀어박혀 노망난 짓만 골라 하는 자요. 교주를 죽이고 총본산의 병력을 우리 아래로 두는 날이 올 것이외다.”

“물론입니다.”

“사천왕과 교주의 좌우사자는 죽일 필요가 없소. 교주만……. 오로지 교주만. 교주의 목을 베지 않으면 그 아래 몸통은 점점 썩어갈 것이오.”

오늘따라 위극신의 말이 길어졌다. 평소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는 법이 없었는데 위극신마저도 묘한 감상에 젖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사람들은 어서 이 시간이 지나길 바라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은 여기 있는 그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잔산진천뢰는 다르다. 자신의 사지가 공중분해 되면서 적과 함께 죽는 것이다.

저 두 벌의 잔사진천뢰를 입는 사람이 내가 아니었으면 하는 심정을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위극신의 막내 동생인 위극단이 눈을 빛내더니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 하나는 제가 입겠습니다.”

그 말에 위극신이 빙긋 웃었다.

“왜?”

“왜라니요. 큰 형님도 목숨을 거셨습니다. 둘째 형님은 가주 자리를 이어받아 만약을 대비하실 겁니다. 제가 입는 게 맞습니다.”

위극신의 막내 동생이 나서자 분위기가 묘해졌다. 그리고 불편해졌다. 쉽게 나설 수 없는 일이라 더욱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위극신은 특이하다.

수하들을 상대할 때 단 한 번도 집중력을 잃은 적이 없었다. 분위기는 늘 위극신이 조성하고 있었다. 이곳에 모여 있는 자들의 마음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내색하는 법이 없었다.

위극신이 말했다.

“네게 줄 생각은 없다. 넌 아직 그럴 실력도 되지 않아. 마음 같아서는 명이와 함께 남아 있으라 하고 싶지만……. 뭐 그 이야기는 됐고.”

위극신이 말을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극신이 일어나자 앉아 있던 자들이 죄다 일어나려고 움직였다. 위극신이 그대로 앉아 있으라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그 다음 행동이 가관이었다.

즐겨 입는 피풍의를 벗고,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장포를 벗어 맨살을 드러냈다.

마치 외공을 익힌 것처럼 세세한 근육이 발달한 상체가 드러났다. 그제야 사람들은 위극신이 무슨 행동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 챘으나 누구 한 명 나서서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위극신이 맨살 위에 의복용 잔사진천뢰를 입었다.

위극신이 중얼거렸다.

“의외로 촉감이 부드럽군.”

“…….”

위극신이 양 손으로 잔사진천뢰를 쓰다듬었다.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만약 이곳에서 폭발한다면 지금 탁자를 둘러싸고 앉아 있는 자들은 필히 함께 죽는다.

저마다 침을 삼키거나 혹은 말 그대로 분위기에 얼어붙어서 말을 잊은 것처럼 앉아 있었다.

그런데 위극신이 그 분위기에 방점을 찍었다.

탁자에 남아 있는 여벌의 잔사진천뢰를 손으로 집더니 스슥 소리와 함께 결국 잔사진천뢰 두 벌을 자신이 모두 걸쳤다.

누군가가 탄성을 내질렀다.

“아…….”

이어서 무표정하게 장포를 걸치는 위극신…….

위극신이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내가 죽는 순간에 교주도 죽을 것이오. 그 다음 대업은 명이와 상의하시오.”

겨우 위극명이 홀로 대꾸했다.

“형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저희 일월마가의 힘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위극신이 손을 들어 동생의 말을 끊었다.

“내가 죽든지 안 죽든지…….”

위극신이 위극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네가 일월마가 가주인 게다. 알겠느냐? 나는 곧 있을 마신일(魔神日)에 맞춰 총본산에 진입할 것이다. 독마가 전체를 주살하고 마교의 깃발도 불태울 것이다. 내가 총본산 지역에 진입해 열흘이 흘렀는데도 총본산 곳곳에 천(天)이라는 깃발이 내걸리지 않는다면 네 형은 교주와 죽은 것으로 알아라. 유언은 따로 남기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위극명의 눈이 대번에 적색과 청색으로 번뜩였다. 목숨을 각오한 위극신의 의지에 위극명의 살기가 저도 모르게 뻗쳐 나왔던 것.

위극명은 겨우 침착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위극신이 말한 마신일(魔神日)은 당대 마교 교주의 광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마교 교주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마신(魔神)으로 칭하면서 신격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월마가에게 마신일은 교주 아들의 생일일 뿐이었다.

위극신이 좌중을 둘러봤다.

“이제 죽이러 가겠다.”

사람들이 마치 정신세뇌를 당한 것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일어섰다.

잠시 후 위극명을 포함해 일월마가에 남는 자들이 위극신을 배웅하느라 안가의 정문에 줄지어 서 있었다.

위극신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작별의 말을 남겼다.

“일월마가(日月魔家). 그리고 새로운 일월마가 가주는 듣거라.”

“네, 말씀하십시오.”

위극신이 선언하는 것처럼 한마디를 남겼다.

“저 사지(死地)에서 돌아오는 날……. 나는 천마(天魔)라 불릴 것이다.”

그 누구도 대꾸하지 못한 채로 ‘천마’라는 말만 뇌리에 새겨지고 있었다.

위극신이 총본산으로 향했다.

감숙의 무도(武都)라는 곳에 마교의 총본산이 숨어 있었다.

독마가의 본거지에 총본산이 자리 잡은 지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총본산이 위치한 사산(死山).

잿더미가 되어 생명을 잃은 허허벌판으로부터 시작해 저주가 내린 것처럼 생기를 잃은 장소. 정상으로 오르는 곳마다 기문이 설치되어 있고 천연의 안개가 짙게 깔려 있어 무림인들마저 다가가기 힘든 곳이었다. 더군다나 몇 곳의 사문은 미로처럼 되어 있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고 그저 황량한 들판으로 인도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사산에 가기 꺼려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독무(毒霧) 때문이었다.

약초꾼들이 사산에 올랐다가 돌아온 이후로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기 일쑤였다.

“저주 받은 산.”

하지만 위극신의 눈에는 어설픈 눈가림일 뿐이었다. 애초에 총본산에 오르는 생문을 알고 있는데다가 지금 데려온 장로들과 수하의 무공 수위는 독무를 개의치 않는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마신일의 시기.

위극신 일행뿐만 아니라 외부에 머무르고 있던 마교의 수하들이 온갖 진귀한 선물을 진상하기 위해 모이는 시기였다.

물론 일월마가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총본산에서는 아직 일월마가가 백도맹을 공략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백도맹의 피해 규모가 상세히 보고되고 있었으나 그 보고마저 위극신이 만들어낸 허위 보고였다.

수하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위극신은 다방면으로 준비를 해놓은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극신을 제외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총본산은 거대한 성이다.

독마가가 정권을 잡자마자 천년마교를 선언하면서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여 만들어낸 거성(巨城)이었다. 위극신이 알아낸 것도 있었지만 일월마가의 전대가주가 훗날 마교 교주를 공략하기 위해 알아낸 것을 위극신에게 전달한 것도 많았다.

위극신은 소수의 인원으로 기문을 뚫고 사문을 피하고 독무를 흩어버리면서 총본산의 턱 밑까지 이동해 잠시 숨을 고른 다음에 진입했다.

마신일(魔神日).

마교 총본산에서 벌어지는 축제다.

교주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교주의 아들을 마신으로 떠받드는 날이다.

더불어 쓸모없는 포로를 죽이는 날이기도 했다.

총본산을 장악한 독마가(毒魔家)답게 엷은 미혼약(迷魂藥)이 총본산에서 흘러나오면 축제가 시작된다.

한 번 맡게 되면 계속 중독되는 미혼약인지라 축제에 참가한 가면인(假面人)들의 눈동자가 대부분 혼탁했다.

가지각색의 해골가면(骸骨假面)이 가득했다.

궁중음악을 방불케 하는 축제 음악에 맞춰 해골가면을 쓴 자들이 춤을 추면서 가면희를 즐기고 있었다.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포로들을 죽이는 날이었는데, 가끔 총본산에 잡혀 온 여인들이 알몸으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잡혀 죽거나.

누군가에게 잡혀 강간을 당하거나.

어쨌든 새벽이 올 때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미 널브러진 시체들이 가득한데도 누구 한 명 나서서 치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광기의 현장에 위극신이 나타났다.

위극신과 수하들도 해골 가면을 쓰고 있었다.

총본산의 초입부터 사왕전까지 가면을 쓴 자들이 가득했기 때문에 이동하는 데는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위극신은 홀로 사왕전까지 걸어갔다. 그 와중에 생각을 정리하고 수호마제에게 할 말을 생각했으며, 수호마제를 지나 교주를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오는 도중에 검마와 연락이 닿아 간천과 검마가 곧 합류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검마의 안내자는 간천 장로. 그도 위극신만큼이나 총본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검마와 간천이 합류해도 위극신 일행은 겨우 스무 명도 되지 않았다.

☆ ☆ ☆

본래 사왕전으로 직행할 수 있는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으나 어찌 된 노릇인지 위극신은 해골 가면을 쓰고 중앙대로를 거닐어 사왕전에 도착했다.

대담하다.

무려 마교의 총본산이다.

아무리 축제라지만 세 명의 수호자들은 그대로 머무르고 있을 터.

위극신이 그곳에 들어가 마교 교주를 죽이겠단다.

미친 생각이고 무모한 짓이다.

그러나 위극신을 따르는 자들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럴까.

위극신을 그토록 신뢰해서?

위극신이 마교 교주보다 강할 것 같아서?

위극신이 사왕전에 갈 때까지도 제지하는 자가 없었다. 이런 날에 홀로 사왕전으로 걸어가는 위극신도 이상했지만,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겨우 몇 명의 경비가 문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위극신을 바라보는 순간에 목이 뒤틀려 쓰러졌다.

위극신은 결국 홀로 끼이익 소리와 함께 거대한 사왕전의 문을 열었다.

축제랍시고 남아 있는 수호마제들마저 저희끼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시비 몇 명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다름 아닌 마신일이었으니까.

사왕전으로 해골 가면을 쓴 자가 들어오자 수호마제(守護魔帝)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위극신이 세 사람을 바라봤다.

혈륜마제(血輪魔帝), 한빙마제(寒氷魔帝), 탈명마제(奪命魔帝).

그 중 혈륜마제가 말했다.

“누구냐 묻지 않느냐?”

그 말에 위극신이 해골가면을 벗으며 말했다.

“접니다.”

위극신이 나타나자 세 명이 깜짝 놀라면서 한마디씩 했다.

“일월이구나. 여긴 어쩐 일이냐?”

“어찌 기별도 없이 왔느냐.”

“혼자 온 게냐?”

위극신이 세 사람에게 걸어가다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일월마존(日月魔尊), 마제를 뵙습니다.”

위극신의 극진한 인사에 세 사람이 빙긋 웃었다. 마존에 따라 예의가 제각각이었으나 위극신은 늘 마제들에게 정중했다.

세 사람이 말을 열기도 전에 위극신은 어쩐지 빠르게 걸어가 본래 염악마제가 앉아 있어야 할 빈 의자에 불쑥 앉으며 말했다.

“형님들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하하.”

위극신에게 그간 가장 호의적이었던 한빙마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혈륜마제와 탈명마제는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 위극신을 경계하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에 한빙마제마저 불온한 공기를 깨닫고 얼굴을 굳힌 채로 위극신에게 말했다.

“대체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게냐?”

그 말에 위극신이 세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죽으러 왔습니다.”

혈륜마제가 탈명마제를 바라봤다. 탈명마제는 혈륜마제와 한빙마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월, 그게 무슨 말인가? 이제 자네와 검마 밖에 남지 않았네. 곧 총본산으로 불러들여 두 사람의 쟁투를 마무리 하라는 교주님의 명이 있었네.”

“어째서요? 쟁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말에 탈명마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일월, 자네가…….”

말과 함께 탈명마제의 기도가 변하자 위극신이 덤덤하게 말했다.

“손을 쓰시면 우리 네 사람은 함께 죽습니다.”

“어째서.”

위극신이 천천히 가슴께로 손을 올리더니 툭 소리와 함께 간결한 동작으로 장포를 갈랐다. 그 속에 입고 있던 잔사진천뢰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제 세 명이 동시에 얼굴을 찌푸렸다.

한빙마제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월가(日月家)의 잔사진천뢰군.”

“그렇습니다.”

탈명마제가 한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생각했다.

‘미친 새끼가…….’

위극신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변했다.

청안과 적안이 각기 빛났다.

위극신이 깍지를 끼고 세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좌사와 우사는 어디 있습니까?”

한빙마제가 대답했다.

“알면서 뭘 묻나? 교주님과 있겠지.”

나머지 두 사람은 위극신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여인을 품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 잠시 후 한빙마제가 말했다.

“이렇게 해서 얻는 게 무엇인가?”

그 말에 위극신이 대꾸했다.

“그런 희망적인 얘기는 살아난 다음에 합시다.”

위극신이 잔사진천뢰를 손가락으로 들어 두어 번 펄럭이면서 말했다.

“두 벌을 입었습니다. 이 정도면 교주는 몰라도 마신(魔神), 그 핏덩어리는 반드시 죽겠지요. 세 분께 묻겠습니다. 마신이 죽고 교주가 천수를 누리다 죽으면 누굴 또 모실 생각입니까? 독마가의 장로 한 명을 옹립하시겠습니까? 후후.”

세 사람은 숨만 내쉴 뿐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진다고 알고 있는 위극신의 일월신공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오히려 말을 하는 와중에 청안과 적안이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때, 끼이이익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사왕전의 문이 열리면서 피를 뒤집어쓴 위극신의 수하들이 등장했다.

그 선두에서 위극단이 걸어오면서 말했다.

“검마가 왔습니다.”

그 말에 위극신이 고개를 돌리니 마검에 피를 잔뜩 묻힌 검마와 간천이 들어오고 있었다.

간천이 말했다.

“은귀단(銀鬼團)과 독마가의 장로들이 오고 있네.”

그 말에 위극신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수호마제들이 몰려온 자들을 바라봤다.

위극명, 간천, 검마, 일월마가의 좌우사자를 비롯해 일월마가의 최고수들로 알려진 장로들까지. 그리고 난생 처음 보는 자들도 섞여 있었다.

그때, 한빙마제가 일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빙마제에게 모였다.

한빙마제가 사왕전의 큼지막한 철문으로 걸어가면서 몰려온 침입자들에게 말했다.

“문에서 비켜라.”

위극신이 노려보다가 손짓을 하자 입구에 서 있던 자들이 좌우로 나뉘었다.

그곳으로 걸어간 한빙마제가 느닷없이 멀찍이 서 있는 시비 한 명에게 순식간에 다가가 목을 꺾었다.

뚜둑.

절명한 시비의 목을 붙잡더니 사왕전의 대문으로 날려버렸다.

콰아아아아앙!

시비의 사체가 그야말로 끔찍하게 분쇄됐다. 그와 동시에 한빙마제의 양 손에서 빙백장(氷白掌)이 쏟아졌다.

후드드드드드― 후드드득―투드드드득!

한빙마제의 양 손에서 새하얀 빙설이 쏟아져 시비의 잔해를 뒤덮더니 이어서 거대한 철문 전체가 만년빙설이 서린 것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후드드드득 소리와 함께 새하얀 빙백설이 바닥에도 떨어졌다.

한빙마제가 뒤를 돌아 위극신과 수호마제를 향해 말했다.

“당분간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을 것이네. 이 승부를 보고나서 자네들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겠네.”

그 말에 위극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검마, 가자. 나머지는 대기하라.”

위극명이 외쳤다.

“형님! 어찌 저희는…….”

검마가 마검을 땅바닥에 질질 끌면서 이동하다가 위극명에게 말했다.

“네 놈도 만독불침(萬毒不侵)이면 따라오던가.”

“뭔 소린가? 우리 형님과 자네도 만독불침이 아닌데.”

그 말에 검마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과연 그럴까?”

끼이익 소리와 함께 사왕전의 내문이 열렸다.

붉은 비단이 바닥에 깔려 있고 마치 지옥문으로 향하는 것과 같은 좁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통로를 바라보던 위극신이 말했다.

“먼저 가라.”

“클클클. 이 정도도 못 지나가느냐?”

“잔사진천뢰를 입었다.”

“허, 하여간 미친 놈…….”

검마가 좁은 통로를 지나갔다.

쐐앵! 쐐앵! 쐐앵! 투드드드득!

위극신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가운데 검마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좌우의 벽에서 각종 암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뒤를 위극신이 쫓았다.

잠시 후 검마의 마검이 붉게 물들더니 통로 끝에 있는 문틈에 꽂혔다.

취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검마의 좌장에 문이 활짝 열렸다.

두 사람의 예상보다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들이었다. 그 사이로 눈을 가린 교주의 아들이 술래잡기를 하듯이 여인들을 붙잡고 있었다.

여인들은 미혼약을 먹었는지 쉴 새 없이 깔깔대거나 잔뜩 풀린 두 눈으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위극신과 검마는 교주의 아들을 발견하자마자 마치 경쟁하듯이 엄청난 경공을 발휘해 뛰어들었다.

경공은 위극신이 더 빨랐다.

쐐앵 소리와 함께 마검이 빛을 내뿜자 쫘아악 소리와 함께 검마를 막아서던 여인들의 몸통이 그대로 갈렸다.

어쩐지 두 사람은 교주 아들이 어떤 상태인지 바로 눈치를 채고 있었다.

위극신이 먼저 교주 아들의 목을 붙잡아 일월신공을 발동했다.

“컥.”

그보다 약간 늦게 여인들을 밀치고 등장한 검마의 마검이 교주 아들의 등에 꽂혔다.

푸욱.

검마가 위극신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디 혼자 먹으려고 그러느냐 썩을 놈아.”

그 말에 위극신이 빙긋 웃었다.

“알고 있었느냐?”

위극신이 교주 아들의 얼굴에서 눈을 가린 천을 벗겨낸 다음에 말했다.

“정묵(政嘿)아. 오랜만이로구나. 그동안 좋은 걸 많이 먹었나보구나. 살이 통통 오른 것을 보니…….”

교주의 아들은 귀체(鬼體)가 아닌데도 어찌 된 노릇인지 위극신의 일월신공에 의해 정기(精氣)가 흡수되고 있었다. 그 사이에 검마도 마검을 꽂아 넣고 위극신과 경쟁하듯이 정기(精氣)를 취하고 있었다.

검마가 잔뜩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껄껄, 대체 뭘 먹인 것이냐? 끝이 없구나.”

두 사람의 기이한 합공에 마교 교주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마신으로 만들려고 했던 교주 아들의 정기가 두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교주의 아들은 두 눈이 움푹 들어간 채로 생명이 꺼진 상태. 그 사이에 여인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흩어지고, 위극신은 잔사진천뢰 두 벌을 모두 벗더니 하나는 몸에 걸치게 하고, 하나는 머리에 덮어 씌워서 둘둘 말았다. 위극신은 교묘하게 내공을 주입해 교주 아들을 옆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든 셈이었다.

그 사이에 검마는 닥치는 대로 마검을 휘두르면서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하핫……!”

그 소란이 있고 나서야 안쪽에서 마침 방사(房事)를 마치고 나온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교 교주 제월헌(諸月軒).

독마가의 가주.

만독불침의 마인.

압도적인 재력과 끝 모를 욕심으로 신체 자체를 탈바꿈시킨 구십 세의 노마두가 여전히 삼십 대의 청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월헌이 상석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제월헌은 속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로 장포 하나만 위에 걸치고 있었다.

어찌 이런 자가 마교 교주일 수 있을까.

저 작태를 보자마자 위극신이 한숨을 지었다.

‘여전하구나.’

제월헌은 상황의 심각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마와 위극신을 발견하고 두 사람의 본명을 말했다.

“신이와 무연(懋燃)이는 여기까지 어쩐 일이냐? 일단 묵아(嘿兒)는 이리 보내 거라. 이야기를 들어주마. 그리고 우사, 저년들도 치워라. 시끄럽다.”

“알겠습니다.”

제월헌의 뒤에서 소리도 없이 등장한 우사자가 마침 흩어지기 시작한 여인들을 소 몰 듯이 치우다가 정신을 못 차리는 여인은 그대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뒤편의 통로에서 좌사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월헌이 눈을 껌벅이다가 말했다.

“좌사, 뭔가 인질극이라도 할 모양인데 흥미 없으니 가서 일단 묵아를 데려와라.”

“알겠습니다.”

싸늘한 정적이 감도는 와중에 위극신은 잔사진천뢰를 입혀 놓은 교주 아들의 목덜미를 쥐고 있다가, 느닷없이 교주를 향해 던지면서 우장에서 대뜸 자색의 불꽃을 일으켰다.

화르르륵―!

제월헌은 자신의 아들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자 받아낼 생각이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만큼 마신의 육체를 갖춰가고 있던 아들이다. 무슨 짓에 당했든 간에 살려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제월헌이 날아오는 아들을 받아내려는 순간 무척 조그마한 자색의 불꽃이 빠르게 날아와 잔사진천뢰를 휘감았다.

두 벌의 잔사진천뢰가 동시에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그 근처에 있던 제월헌 교주와 좌우사자.

그리고 심지어 멀리 떨어져 있던 위극신과 검마마저 동서남북의 벽으로 날아갔다.

위극신, 검마, 제월헌 교주, 여인들을 내보내던 우사자, 위극신에게 다가가던 좌사자까지 잔사진천뢰의 폭발에 날아갔다.

여기서 누가 살았을까?

두 벌의 잔사진천뢰라 다섯 명의 마도 최고 고수들이 동시에 목숨을 잃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일단 위극신의 피해가 가장 적었다.

무엇보다 잔사진천뢰가 날아갈 때부터 방어를 준비했다는 것이 컸다.

가장 운이 나쁜 것은 오히려 위극신에게 다가가던 좌사자였다. 그의 등 뒤에서 잔사진천뢰가 폭발한 덕에 피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폭발소리와 함께 좌사자가 무언가를 준비하는 순간,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쇄되고 말았다.

반면에 우사자는 운이 좋아 능숙하게 대처했다.

이미 주변에 방패막이들이 많았다. 위극신이 불꽃을 날리는 순간에 위급한 상황임을 눈치 채고 여인들을 순식간에 방패막으로 삼은 다음에 호신강기까지 일으켰다.

그러나 위극신의 수법에는 미치지 못했다.

위극신은 불꽃을 내보내자마자 좌장과 우장에 각기 태을양장(太乙陽掌)과 월온음장(月韞陰掌)을 준비해 밀려오는 폭발에 대응했다. 본래 태을양장과 월온음장이 부딪치는 순간에도 폭발력이 대단했다. 위극신은 이를 마치 충격파를 튕겨내는 호신강기로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극신의 몸도 끝내 벽으로 날아가 퍽 소리와 함께 부딪쳤다.

검마는 어땠을까?

그야말로 기이한 반응으로 폭발에 대처했다. 자신의 마검을 벽으로 향하게 하고 좌장으로 폭발을 받아냈다. 도검불침의 신체라지만 이 순수한 타격 앞에는 검마도 부상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움큼의 피를 토한 후에야 마검의 검기에 뚫린 벽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굉음에 이어 먼지가 피어오르는 와중에 잠시 서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가장 먼저 깬 것은 검마였다. 무너진 벽을 이리저리 밀치고 나오면서 위극신을 욕했다.

“낄낄낄……. 미친 새끼 진짜…….”

위극신은 대꾸를 않고 잠시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제월헌 교주를 향해 있었다.

먼지가 자욱하다.

교주의 생사가 관건이었다.

교주는 자신의 권좌에서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검마와 우사자가 걸음을 옮기다가 마주치자마자 격돌했다.

위극신은 부상당해 일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잠시 눈을 감고 검마와 우사자가 격돌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기 시작했다.

우사자의 부상은 의외로 크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사자가 검마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검마는 시종일관 얻어맞으면서 입으로는 킬킬대고 있었다.

“우사의 장력이 제법 맵구려. 일월이는 죽은 게냐?”

또 다시 퍽 소리와 함께 검마가 날아갔다. 우사자가 다시 검마에게 다가가는 순간에 실로 스산한 음성이 교주의 권좌에서 흘러 나왔다.

“우사는 멈춰라.”

“네, 교주님.”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검마와 위극신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 폭발에도 살아 있어?’

살아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제월헌 교주가 우사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는 게 더 괴상한 일이었다.

제월헌이 권좌에서 눈을 떴다.

아, 저것이 어찌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분명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에서 짙은 녹색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녹색의 빛은 알아볼 수 없는 괴이한 문자로 되어 있었다. 그 녹색의 빛이 온 몸에서 피를 운반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꿈틀대고 있어 실로 기괴했다. 마인이 아니라 악마 그 자체가 된 모습이었다.

제월헌 교주가 낮은 어조로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구나. 그럼 이제 일월마존과 검마존은 이 자리에서 생사투를 시작하도록……. 살아남는 자에게 교주 자리를 넘기겠노라…….”

그 말에 검마가 웃었다.

“크하하하하하하! 미친 새끼.”

이 지경이 됐는데도 제월헌은 교주의 입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 대단한 위극신마저 교주의 저의가 궁금할 정도로 기괴한 말이었다.

더군다나 검마와 위극신도 교주의 상태를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몸이 회복되었다면 당장 나서서 위극신과 검마를 죽이는 게 옳지 않겠는가?

하지만 기괴한 모습으로 두 눈마저 짙은 녹색이 되어가고 있는 제월헌은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우사자가 그나마 정상적이어서 침착한 어조로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교주님, 반역자들입니다. 속히 죽이고…….”

우사자의 말에 눈을 내리깔고 죽은 아들의 사체를 바라보던 제월헌의 시선이 그제야 우사자를 향했다.

“우사, 오늘따라 말이 많구나. 자네답지 않아.”

그 어조가 너무 침착하고 평온해 우사자는 할 말이 없었다.

“…….”

우사자는 교주를 힐끗 바라 본 다음에 조용히 움직여 교주의 우측에 말없이 섰다.

그 작태를 바라보던 위극신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어찌 살아있는 것이냐?’

위극신이 일어나 중앙으로 걸어 나오자 검마도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걸어 나와 교주의 안색을 살폈다.

“교주, 대체 무슨 괴물이 된 게야?”

검마는 말을 내뱉는 와중에 위극신을 힐끗 바라봤다.

우사자는 움직이지 않았고 교주 또한 자리에 앉아 있으니 교주의 말대로 위극신을 죽일까 하는 심정이 잠시 들었던 것.

하지만 위극신은 교주와 눈을 마주친 채로 검마에게 말했다.

“검마야, 네 놈은 끝까지 말 잘 듣는 개가 되려느냐?”

그 말에 검마가 히죽 웃었다.

“난 교주 놀음은 관심 없다. 하지만 네 놈에겐 관심이 좀 있지.”

마검으로 빨아들이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대라는 말이리라. 하지만 위극신은 여전히 제월헌 교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상황을 재고 빈틈을 엿보고 있었다.

‘저 놈만 죽으면 된다. 그리 되면 우사자도 검마도 내 앞길을 막을 수 없을 터.’

위극신은 오로지 마교 교주만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제월헌의 묘한 말 한 마디에 검마가 슬금슬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위극신은 속으로 검마를 욕할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새끼. 우리 둘이 생사를 걸고 다툴 때 우사자가 나설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설마 그 생각도 못할 정도로 바보인가?’

위극신이 문득 고개를 돌려 검마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있지도 않은 심안(心眼)으로 상대방의 마음이라도 꿰뚫어봐야 할 순간이었다.

그때, 위극신은 고개를 돌린 검마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었으나 감정을 숨겼다.

‘싸우는 척 하다가 우사부터 처리하자는 것인가? 검마를 믿어야 하나, 교주를 믿어야 하나…….’

잠시 상황을 냉정하게 살피던 위극신이 뒷짐을 진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갑자기 세 사람에게 등을 내보인 채로 반대방향으로 섰다.

이 상황에서 등을 돌린 위극신의 대담함도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다.

위극신이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위극신은 등을 돌리고 나서야 저 무표정한 얼굴에 감정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밀랍인형처럼 무뚝뚝한 얼굴을 평생 동안 유지했던 위극신이다.

좋은 계략이라도 떠오른 것일까?

위극신의 입꼬리가 먼저 올라가더니 이어서 광대뼈가 올라갔다. 평생 웃어본 적 없었던 사람이 처음으로 웃음을 짓는 것처럼 어색한 미소가 얼굴에 서렸다.

그렇게 위극신이 웃었다.

아마도 이 모습이 위극신이라는 사람의 본질을 말해주는 표정이 아니었을까.

그 누구도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할 때만 괴이한 표정으로 위극신이 웃었다.

악마가 웃는다면 아마도 이런 표정일 것이다.

하지만 위극신이 다시 서서히 자세를 돌릴 때는 어느새 표정이란 게 얼굴에서 사라져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위극신은 적안과 청안으로 어쩐지 우사자를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교주, 우사를 죽이는 게 먼저다. 그리하면 내가 검마와 승부를 내겠다. 애초에 우리 둘은 우사를 쓸 생각도 없고, 쓸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우사도 마찬가지. 우사, 자네는 교주를 보위하는 데 실패했다. 이 일이 어떻게 끝나든 교주에게 죽을 터. 두 사람이 먼저 선택해라.”

위극신은 교주의 악의(惡意)를 간파하고, 자신이 품고 있던 악의를 내비쳤다.

이것은 무공의 대결이 아니라 악의(惡意)를 겨루는 대결이었다.

악(惡)과 악(惡)의 대결이리라.

검마와 위극신에게 향하고 있던 악의(惡意)의 화살이 어느새 교주와 우사자에게 똑같이 향하고 있었다.

위극신의 말에 교주의 성격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우사자의 눈동자가 움직이더니 권좌에 앉은 교주를 슬쩍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극신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저도 모르게 우사자의 목울대가 꿀렁이자 교주가 한숨을 내쉬며 경고했다.

“우사, 위극신의 심계(心計)에 섣불…….”

우사자가 느닷없이 교주의 정수리에 장력을 쏟아냈다.

대체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일단 우사자는 자신의 부상이 가장 미약하다고 판단했다. 자신과 동격인 좌사자가 잔사진천뢰에 찢기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한 터라 교주의 부상도 엄청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일 뿐, 결국에는 위극신의 악의(惡意)에 당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우사자는 교주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이 정도 고강한 무공을 가진 자라면 상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일장을 적중시켜 죽일 수 있다고 믿기 마련이었다.

놀랍게도 우사자의 장력과 앉아 있던 제월헌 교주의 독장(毒掌)이 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앙!

동시에 위극신과 검마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교주와 우사자 앞에 등장해 각기 성명절기를 준비했다. 두 사람에게도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검마는 달려가는 와중에도 ‘위극신이 배신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위극신도 ‘검마 역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야말로 나란히 달려 나가 절기를 내뿜었다.

검마의 마장검극의(魔將劍極意).

위극신의 일월광천지세(日月光天地勢).

어쩐지 검마가 더 앞서 나갔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일생에 없을 기회라 생각해 그간 단 한 번도 펼치지 않았던 비기를 각기 내뿜었다.

검마의 마장검극의는 빛살처럼 된 검기였다. 다른 곳도 아닌 제월헌 교주의 얼굴에 쏟아져 두 눈을 불태웠다. 검마는 마검을 제월헌에게 박아 넣기 위해 속도를 줄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위극신의 비기는 남달랐다.

혈옥귀체(血玉鬼體)와 청옥귀체(靑玉鬼體)를 흡수하면서 쌓아뒀던 일월마기가 위극신의 쌍장에서 폭발했다.

이 순간을 위해 아끼고 아꼈다.

나설 수도 있었던 매 순간마다 위극신은 참고 또 참았다.

심지어 잔사진천뢰가 터질 때도 아껴뒀던 일월광천지세(日月光天地勢)다.

그 심계의 끝은 이 비기로 내뿜는 충격파가 광역형이라는 점에 있었다. 쌍장에서 뻗어 나온 기운이 역태극의 형태로 맞물려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위극신의 일월광천지세가 장력을 겨루던 제월헌과 우사자뿐만 아니라 함께 달려들던 검마까지 날려 버렸다.

이제 이 공간에 서 있는 사람은 위극신이 유일했다.

하지만 위극신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마검까지 손에서 놓친 검마는 바닥에서 발에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우사자는 일월광천지세가 폭발할 때 목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문제의 제월헌 교주는…….

두 눈이 멀었지만 아직도 한 가닥 숨이 붙어 있었다.

위극신이 교주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불사지체(不死之體)에 근접했던 것이냐? 어찌 죽지 않는 게야.”

위극신이 두 눈을 잃은 교주의 목을 한 손으로 부여잡았다.

“숨은 쉬어야 할 터.”

위극신의 말과 함께 교주의 숨이 막히고 있었다. 위극신이 교주에게 남아 있던 정기를 쥐어짜내는 것처럼 빨아들이면서 말했다.

“자네……, 내가 얘기했던가? 그간 이 위극신이 자네를 무척이나…….”

위극신이 제월헌의 목을 쥐어짜면서 말을 이었다.

“존경했었다고 말이야.”

시간이 약간 흐르고…….

사왕전에 대기하고 있던 자들은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문이 열리면서 무언가가 번뜩이며 빛을 내뿜었다.

마검(魔劍)이었다.

문이 활짝 열리면서 사왕전을 비추던 빛이 통로에 이르자 웃통을 벗은 위극신이 한 손에는 마검을, 한 손에는 혼절한 검마의 머리통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위극신이 검마를 질질 끌고 나오더니 중앙 바닥으로 검마를 던졌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위극신으로 향하고 있었다.

위극신은 모인 자들을 일일이 노려보다가 수호마제들이 앉아 있던 탁자로 걸어가 마검을 올려놓고 술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술잔을 내려놓은 위극신이 좌중을 돌아보다가 덤덤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자, 이제 희망적인 얘기를 한 번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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