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34화 (34/43)

<5장. 은검(隱劍)과 비검(飛劍)>

군림맹이 도전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백도맹에 모두 퍼진 상태였다.

이서휘는 무당파에 대해 이런저런 것을 전혀 알아보지 않은 채로 자신의 수련에만 집중했다.

무당파를 꺾으면 화산이 예기치 않게 나올 수도 있고, 곤륜이 나설 수도 있다.

한 번으로 끝내자는 것은 어디까지나 백협단주 담가막의 바람이었기 때문에 이서휘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개인의 명성을 쌓는 것보다 군림맹의 대표로 나선다는 마음가짐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 이면에는 군림맹의 존재감을 장강 이북에 확인시키자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패해도 손해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 강자가 나왔으면 하고 이서휘는 기원했다. 비무 한 번 패한들 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강자와 겨룬 이서휘의 존재감이 묵직하게 드러난다면 장강 이북의 고수들은 군림맹을 달리 보기 시작할 것이다.

담가막이 주선하는 비무는 시일이 제법 걸렸다.

백도맹 내부에서 비무를 진행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으나, 담가막이 무당파의 고수를 설득하는 시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담가막은 묘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무당파에서 누굴 내보내려는 것일까?

만약 비무 당일이 되어 백도맹의 고수들이 무당파에서 누가 나오는지 확인하는 순간 아마 대다수가 담가막을 비난할 터였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모두 담가막의 의도대로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단향객잔.

이서휘, 단우혁, 백류혼, 도이, 도삼이 마치 작전 회의를 하는 것처럼 둘러앉았다.

도삼이 중얼거렸다.

“무당파(武當派)라…….”

강호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무당파를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하지만 이서휘를 포함하여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일단 도이와 도삼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도이가 중얼거렸다.

“무당파든 아니든 강한 사람이 이기겠지.”

단우혁이 옛날 일을 꺼냈다.

“내 아버님이 젊었을 때 비무를 하시겠다고 무당파를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하네. 비무도 잘 하지 않고 문파의 고수들은 툭하면 폐관수련에 들어가서 당대의 제자들도 윗사람들을 자주 만나지 못한다고 한다더군.”

그 말에 백류혼이 빙그레 웃었다. 백류혼도 사문에 무당파와 엮인 일이 있는 눈치였다.

이서휘가 백류혼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웃어?”

“아닐세.”

“자네는 무당파에 대해 우리보다 아는 게 많을 것 같은데. 말 좀 해보게.”

“궁금해?”

“궁금하지.”

“계속 궁금하도록.”

백류혼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이 욕을 반쯤 내뱉었다. 백류혼은 그나마 장강 이북의 고수들에 대해 아는 게 제법 많았다. 네 사람이 성질을 내려고 하자, 그제야 백류혼이 말을 이었다.

“백도맹에서 무당파 고수를 내보낸다면 한 사람 밖에 안 떠오르는군.”

그 말에 이서휘가 흥미를 보였다.

“누군데?”

“무당은검(武當隱劍).”

백류혼은 말을 내뱉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백류혼이 혼자 말하고 혼자 웃자, 단우혁이 인상을 쓰며 백류혼을 구박했다.

“미쳤느냐? 혼자 웃고 말하게.”

“알게 될 것이다. 만약 무당은검이 나온다면 말이지.”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유명한 건 확실해?”

“유명하지. 아 그런데 이 대주가 이제 보니 위명을 날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군?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단우혁도 피식 웃었다.

“아니라고? 거짓말 하지 말게. 얼굴에 다 드러난단 말일세. 뭐 이 대주 실력이면 진작 유명해졌어야지. 우리가 이해해주자고.”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이번 비무는 중요하다니까. 백도맹이 군림맹을 너무 깔보면 일이 더 어렵게 돌아가네. 그리고 남자가 큰일을 하려면 이름도 제법 알려지는 게 낫지.”

그 말에 도이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우리 이 대주 많이 컸네. 복숭아 타령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서휘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놀고 있다. 복숭아 타령은 너희 형제들이 했고.”

며칠이 흐르고.

드디어 백도맹의 초대를 받은 날.

이서휘 일행이 백도맹으로 향하는 와중에 백류혼이 무당파 고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풀어놓았다.

당대 무당파엔 기인이 세 명이 있다.

무당파에서는 이들을 무당삼치(武當三嗤)라 불렀다.

천수를 누리고 하늘로 돌아간 지 몇 해가 지난 무당파의 전대 장문인, 무담진인(無談眞人)이 사손 세 명에게 내린 별호라 한다.

무담진인은 죽은 지 사오 년이 넘었으나 천하오절의 별호는 그대로 무당파에 남아 있었다. 건드릴 수가 없었고 누군가 나서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도 없었다. 마치 무담진인이 아직 살아서 신선처럼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천하오절의 한 자리는 무당파에 묶여 있었다.

그런 무담진인이 키워낸 제자들마저 나이가 들어 은퇴를 했거나 죽은 지 오래였다. 무담진인이 홀로 장수를 했을 뿐 그 제자들은 대부분 단명했기 때문인데 당대 무당파의 무당삼치가 바로 무담진인의 사손(師孫)들이었다. 사손이지만 직접 가르쳤다는 소문도 제법 퍼져 있었다.

세 명은 다음과 같았다.

무당산보(武當散步) 장예보(張禮步).

무당숙수(武當熟手) 아무무(牙貿貿).

무당은검(武當隱劍) 유은결(劉隱結).

무당은검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별호라 할 수도 없었다.

산보와 숙수라니…….

무당산보 장예보는 무당산 주변을 산보하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다 하여 붙여진 별호였다.

무당숙수 아무무는 말 그대로 숙수인 데다가 무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그 무무(貿貿)라는 이름의 뜻마저 말과 행동이 서투르고 무식함을 말했다.

무담진인, 무당산보, 무당숙수는 평생 무당산 바깥을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무담진인만 죽었다고 알려졌을 뿐 산보와 숙수의 생사도 명확하지 않았다.

거창한 장례를 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죽은 지 몇 해가 흘러야 죽었는지 알 정도였기 때문.

그러나 무당은검이 무림에 등장했다. 더군다나 무림인들의 예상보다 나이도 많지 않았다. 무척 어린 나이에 무당파에 들어갔던 셈.

무림에 등장하자마자 무당은검은 장강 이북에서 나름 유명해졌다. 별호도 무림인들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무당이 숨겨 놓은 검이 드디어 무림에 등장했다는 반응이었다.

얼마나 대단할까?

그러나 무림인들은 무당은검의 실체를 알고 나서는 관심을 끊은 지 오래였다.

무당이 숨겨 놓은 검이라는 말도 어느새 비꼬는 의미가 되었다.

[부드럽게 처신하고 다투지 말라.]

무당은검은 도가 문파의 제자답게 철저하게 처신했다.

그렇게 무당이 숨겨 놓은 검은 어느새 무림에서도 통용되는 별호가 되어 있었다. 싸우는 법이 없었으니 숨겨 놓은 검이라는 말이 그야말로 절묘했다.

담가막이 과연 그 무당은검을 불러낸 것일까?

도착해야 알 수 있을 터.

백도맹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백류혼이 말했다.

“……무당파는 옛날부터 다른 문파에 비해 항렬이 높아. 갑자기 늙은 도사가 등장해도 놀라지 말게. 어리다는 말도 있지만 직접 봐야 알 것이야.”

“무슨 소립니까?”

도삼이 묻자 백류혼이 간략하게 설명했다.

“제자들도 나이가 많다 하더군. 무담진인의 일대제자들은 다른 문파의 장문인들과 나이가 비슷해.”

“아 그렇습니까?”

“그 무당은검이라는 자는요?”

“몰라. 몇 살인지……. 무담진인이 말년에 거둔 제자라는 말도 있고. 별호만 알려졌네.”

오늘따라 이서휘는 말이 없었다.

마치 전쟁에 나가는 사람처럼 완전 무장을 한 상태로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내심 철저하게 준비를 마쳐 놓은 이서휘였다.

백도맹.

온갖 고수들이 다 모였다.

이미 비무대는 손님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담가막의 보고를 받았으나 어쩐지 백도맹주 범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구파의 고수들은 비무가 벌어지는 날까지 담가막과 협상을 벌이듯이 자신의 문파 고수들을 비무에 내보내겠다고 성화였다.

그럴 때마다 담가막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일단 지켜보시오.”

백도맹에 도착한 이서휘는 안내를 받아 바로 비무대에 올랐다. 단우혁 등은 무대를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담가막이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써서 배려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서휘가 둘러보니 당장 무당파 고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백류혼의 말처럼 무당파는 형식적인 인원만 파견했을 뿐이지 백도맹의 일에는 큰 관심이 없는 문파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오히려 담가막의 처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대체 왜 무당의 고수를 내보낸다는 것일까.’

이서휘는 잠시 무대 위에서 상대를 기다렸다.

백도맹은 비무에 따른 전통과 예법이 있는지 어디선가 북이 둥둥 하고 울리면서 누군가 낭랑한 목소리로 이서휘의 상대를 호명했다.

“군림맹의 이서휘 대주와 백도맹의 비무를 시작하겠소. 담가막 단주의 요청에 따라 무당파의 고수가 나설 것이오. 무대 위로 올라오시오.”

백도맹이 숨을 죽였다.

무대 위로 한 남자가 걸어 올라왔다.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는 잘생긴 남자였다.

머리가 새하얗다.

그런데 얼굴은 흰머리에 어울리지 않게 서른 중후반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보일 뿐이지 흰머리 때문에 대체 몇 살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무당파가 입는 옷도 아니고 백도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무복을 입고 있었다.

사내가 무대 위로 오르자 누군가는 기대 섞인 표정을, 누군가는 대번에 실망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군가가 탄식과 함께 중얼거렸다.

“아, 무당은검을 왜 내보내는가. 분명 이야기만 할 게 뻔한데.”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야기만 할 게 빤하다고?’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담가막을 바라봤다. 그러나 담가막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기만 했다.

사내가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당의 유은결이라 합니다.”

이서휘가 예를 취하며 말했다.

“군림맹의 이서휘입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두고두고 이야기 할 정도로 기이한 대화가 오고 가기 시작했다.

유은결이 말했다.

“반갑습니다. 군림맹의 고수는 처음 뵙습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무당파 고수는 처음입니다.”

유은결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이내 이서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기 시작했다.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능청스러운 모습이라 이서휘는 두 눈을 껌벅이면서 구경했다.

유은결이 침음을 흘렸다.

“검이 그게 두 자루나…….”

“네, 쌍검을 씁니다.”

이서휘가 대꾸하자 유은결이 ‘아…….’ 소리를 내뱉더니 무대 외곽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검 좀…….”

유은결의 말에 백도맹의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 검을 넘기자 유은결이 받아서 다시 이서휘에게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이서휘는 유은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씀을요.”

유은결이 침을 한 번 삼키더니 철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철선도 쓰실 생각이십니까?”

이서휘는 유은결이 자신의 철선을 바로 지적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도 처음이었다. 이서휘가 대꾸했다.

“네, 상황에 따라서는요.”

“실례지만 볼 수 있겠습니까?”

“네?”

저 어지간한 이서휘도 그 요청에는 그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과 지금 생애를 통틀어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일행들을 흘낏 쳐다봤다가 철선을 유은결에게 넘겼다.

유은결이 씨익 웃더니 촤르륵 소리와 함께 철선을 구경하면서 말했다.

“보기 드문 묵철인데요?”

“네, 묵철입니다.”

유은결은 이서휘가 가진 수법을 어렵지 않게 다 드러내고 있었으나 그쯤에서는 이서휘도 오기가 생겨 유은결이 묻는 대로 대답을 해줬다.

유은결이 철선의 파검혈을 발견하더니 이서휘에게 말했다.

“이거 병기를 부러뜨리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죠?”

그 지경이 되자 어쩐지 백도맹 전체가 조용해졌다. 유은결과 이서휘의 대화에 저도 모르게 다들 빠져 들었던 것.

이서휘는 아예 한 술을 더 떴다.

“줘 보십시오.”

“네.”

유은결이 넘기자 이서휘가 철선을 설명해줬다.

“손에 쥐고 검신을 물린 다음에 내공을 주입해 비틀면 웬만한 병기는 부러집니다. 물론 내공이 우위에 있거나 최소한 비슷해야겠지요.”

유은결이 이서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무서운 병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유은결이 쉴 새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혹시 무기가 또 있습니까?”

“네. 단검도 몇 자루 씁니다.”

“허어…….”

유은결이 진지한 낯빛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잘 쓰십니까?”

“제법 잘 다룹니다.”

“역시…….”

유은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실례가 참 많았습니다. 제가…….”

“별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서휘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일부러 유은결의 말을 성의 있게 들어줬던 이서휘다.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말씀하십시오.”

“검 좀 보여주십시오.”

그 말에 좌중이 다시 술렁였다. 탄식하는 자, 고개를 떨구는 자, 한숨을 내짓는 자…….

그런데 그 반응에 무색하게 이서휘가 바로 백야검을 뽑으며 말했다.

“두 자루 모두 보여드릴까요?”

“아닙니다. 한 자루만 보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이서휘가 백야검을 넘기자 유은결이 백야검을 쥐고 찬찬히 구경했다. 구경하던 백도맹의 고수 한 명이 호통을 내질렀다.

“은결! 자네 대체 뭐하는가?”

그 말에 유은결이 입으로 쉿! 소리를 냈다.

그 다음에 유은결이 펼친 행동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누군가로부터 받아든 검을 왼손에 쥐고 내공을 주입하니 스릉 소리와 함께 검집이 저 홀로 빠져 나가서 공중으로 솟구쳤다.

사람들이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앗!”

그 다음 행동은 더 가관이었다.

유은결은 왼손에 평범한 장검을, 오른손에 백야검을 쥐고 있다가 내공을 공평하게 주입해 두 검을 가차 없이 부딪쳤다.

쩌엉―!

백야검이 대번에 평범한 장검의 검신을 부드럽게 잘라 버렸다.

쨍그랑―!

그 위로 공중에 솟아 있던 검집에 반쯤 부러진 검신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그 장면을 덤덤하게 바라보던 유은결이 이서휘에게 백야검을 건네며 말했다.

“좋은 검입니다.”

이서휘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이 준비했던 수를 모조리 다 읽힌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어쩐지 이서휘나 담가막 정도만 유은결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서휘가 유은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네. 무척 강해 보이는 데 성격은 엉뚱하구나.’

유은결은 부러진 장검을 가지고 무대를 몇 번 걸어가더니 내공을 주입해 적당히 던지며 말했다.

“미안하네. 부러졌어. 내가 나중에 그보다는 괜찮은 것으로 하나 구해주겠네.”

유은결의 말을 듣고 있던 장검의 주인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나는 괜찮지 않아.”

말과 함께 다시 무대 위로 돌아온 유은결이 이서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서휘도 말없이 유은결을 바라보다 속으로 탄성을 삼켰다.

‘아…….’

유은결의 눈빛은 이서휘만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눈매에 몰아치는 희미한 떨림과 눈빛에 담긴 복잡한 의미가 이서휘의 마음과 머리로 전달되고 있었다.

이서휘에게도 무척 기이한 경험이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로 한참을 이서휘를 바라보던 유은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네.”

이서휘가 대꾸하자 유은결이 무대 주변에 모인 백도맹 고수들에게 예를 취하며 당당하게 말했다.

“이 유은결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서휘 대주에게 이기긴 어렵겠습니다.”

“뭐라고!”

“그게 대체 무슨 되도 않는 말인가!”

“담 단주는 어찌해서 그렇게 고집을 부렸나! 내 저럴 것이라 분명 경고했거늘!”

유은결이 손을 들더니 평소와 다르게 힘을 주어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들이 저를 무당은검이라 놀리는 것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솔직히 오늘은 한 번쯤 비무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올라왔습니다. 여기 담 단주님이 하도 부탁을 하셔서요.”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전부 숨을 죽이고 유은결의 말을 듣고 있었다.

유은결이 좌중에 찬물을 뿌리듯이 이서휘의 실력을 이미 정확하게 평가(評價)한 것처럼 의견을 제시했다.

“저도 보고 싶습니다. 이 대주의 비무를요. 저는 물러납니다만 다음 도전자는 구파의 장문인들께서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제 눈이 틀리지 않다면 그게 맞습니다.”

아, 장문인들이라니…….

유은결은 구파의 장문인들을 직접 언급하면서 이서휘의 다음 상대를 지목했다.

과연 이 일을 담가막이 예상했을까?

되도록 유은결이 나서서 상대해주기를 바라던 담가막이다.

그러나 유은결은 비무도 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더니 비무를 끝내 펼치지 않고 구파의 장문인을 지목하고 있었다.

백도맹 전체에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 ☆ ☆

누군가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은결, 우리는 이서휘 대주의 무위도 궁금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네의 무위도 궁금하네. 이기든 패하든 겨루시게. 다만 내가 하나 약속하지. 비무 결과에 상관없이 다음 비무는 내가 나서겠네.”

“허어…….”

사람들이 단상에 자리 잡은 장로들 사이에서 턱을 괴고 있는 한 사람을 바라봤다.

당대 점창파의 장문인인 점창비검(點蒼飛劍) 여서문(呂書文)이었다.

어쩐지 무당은검 유은결이 웃음을 지우고 여서문에게 대꾸했다.

“그런 못된 말씀을 하시다니요.”

그 말에 점창파의 장로 한 명이 호통을 내질렀다.

“말버릇이 그게 무엇인가!”

그 말에 유은결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여 장문인께서 손님을 대하는 예의가 바르지 않습니다. 제 무위가 궁금하다면 이렇게 합시다. 여 장문인께서 이서휘 대주에게 패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비무 결과에 상관없이 언제가 됐든 제가 여 장문인에게 도전하겠습니다.”

유은결은 말과 함께 무대에서 쓱 내려가 버렸다.

흥분했던 사람들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게 이치에 맞았다.

이서휘가 무당의 고수를 상대하고 나서 연달아 점창파의 장문인을 상대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얼떨결에 점창파 장문인이 나서게 되었다.

여서문은 쏟아지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더니 단상 위에서 훌쩍 몸을 날려 순식간에 비무대에 내려섰다.

여서문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나쁘지 않아. 이 대주, 범천락과 범사량을 꺾었다지?”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래. 내가 나서도 될 명분이 있군. 겨뤄보세.”

이서휘가 입꼬리를 올리며 생각했다.

‘그 놈의 명분 타령은…….’

무당은검 유은결 때문에 백도맹의 최고수 중 한 명이 바로 나서게 되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다.’

드디어 구파의 장문인을 상대하게 된 것. 무당은검과 겨룰 필요도 없다. 이 비무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이서휘가 호흡을 길게 하면서 비무대 위를 잠시 거닐었다.

‘하여간 괘씸한 놈들.’

저도 모르게 이서휘는 담가막을 바라봤다.

일이 이렇게 흐를지 예상했을까?

무당은검 유은결 때문에 이서휘의 수법이 다 드러났다. 그런 후에 구파의 장문인이 나섰다.

유은결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능청스러운 면이 있었다.

담가막도 마찬가지.

담가막(潭嘉嗼), 유은결(劉隱結), 여서문(呂書文).

어쨌든 세 사람은 백도맹이다.

이서휘는 불현듯 웃음이 났다. 유은결에게 검을 내주고 철선을 보여준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자 그만 입 밖으로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하하.”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리자 시선이 일제히 모였다.

이서휘는 백도맹의 고수들을 바라보다가 입이 근질근질했다.

‘내가 검제(劍帝)요.’

하지만 말을 내뱉을 필요는 없었다.

검으로 보여줄 생각이었으니까.

이서휘가 여서문에게 예를 취하며 말했다.

“준비됐습니다.”

그 말에 여서문이 자신의 애검인 청강검(靑强劍)을 뽑으며 말했다.

“자네 검이 좋으니 내 마음도 편하군.”

이서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 정도 고수들이 맞붙으면 아무리 비무라지만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 정도 준비는 된 자들이었다.

백야검의 검병을 쥔 이서휘의 주먹에서 빠드득 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어서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백야검이 뽑히자 이서휘의 기도가 살기(殺氣)로 바뀌었다.

그럴만한 상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서휘가 죽을 수도 있다.

단우혁과 백류혼마저 숨을 죽였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이서휘가 진지하게 나서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마도와 겨룰 때는 각자의 상대가 버거워 이서휘의 표정이나 움직임을 구경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서휘가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백야검을 뽑아들자 전신에 허연 아지렁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갑니다.”

이서휘는 말과 함께 백야검에 내공을 잔뜩 불어넣고 있었다.

‘전력(全力)으로 가자.’

점창비검 여서문이 특이한 자세로 청강검을 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내공을 가득 싣고 있었던 이서휘는 여서문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벼락을 떨어뜨리듯이 백야검을 수직으로 휘둘렀다.

시작부터 서로의 내공을 가늠해보자는 패기(覇氣)가 담겨 있었다.

그 강맹한 공격의 냄새를 맡은 여서문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순식간에 청강검을 하단에서 상단으로 올려치며 내공을 불어넣었다.

겨우 서로의 일검(一劍)이 맞부딪쳤는데 비무대 전체가 아찔하게 흔들릴 정도의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어찌 된 노릇인지 두 사람의 신형이 좌우로 찢어지듯이 미끄러졌다가 타닥 소리와 함께 더 빠른 속도로 간격을 좁혔다.

바람이 두 사람을 쫓았다.

까앙―! 소리가 터지자마자 쐐앵! 하는 소리와 함께 이서휘가 무척 오랜만에 성검(聖劍)을 뽑았다.

이서휘가 쌍검을 사용하자마자 백도맹 진영에서 ‘앗!’ 하는 소리가 터졌다.

“정말 쌍검을 쓰는군.”

“그럼 장식용인 줄 알았나?”

“처음 봐서 그러네.”

“조용히들 해라.”

웅성거림이 서서히 잦아들고 무대 위에서 바람과 먼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백야검과 성검으로 일단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것처럼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이미 초식의 연계가 무의미할 정도로 이서휘의 공격은 자유분방했다.

백야검으로 내려치고, 성검으로 좌우를 그었다.

챙챙!

불시에 쌍검을 교차시켜 내밀었다가, 청강검을 갈라낼 것처럼 좌우로 뻗어 나가면서 추가공격을 펼쳤다. 이후에는 이서휘가 암행표를 펼치면서 검무를 펼치듯이 공격을 이어나갔다.

이미 첫 번째 부딪침에서 내공의 고하를 겨뤘던 두 사람이다. 놀란 것은 여서문이었다.

‘이 애송이의 내공이 나와 비슷하다니…….’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서휘는 여서문이 놀라는 표정을 읽으면서 자신의 감정은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 여서문이 무슨 검법을 사용하는지 몰랐으나 이서휘는 여서문이 비기를 사용하기 전에 먼저 기세를 제압한 상태였다.

빠져 나가기 위해 비장의 수를 한 번 사용할 것이라 이서휘는 예측했다.

‘어떻게 할 셈이냐? 보여 봐라.’

이서휘가 검으로 말을 걸었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저 경험이 많은 여서문조차도 이렇게 빠르게 몰아치는 쌍검의 무인을 상대해본 적이 없었다.

채챙, 챙챙챙챙챙챙!

이서휘가 춤을 추면서 몰아치자 막아내던 여서문이 이를 꽉 문 채로 이서휘의 기세를 튕겨냈다.

‘광인이란 말이더냐!’

드디어 여서문이 반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여서문이 사용하는 검법이 왜 비검(飛劍)이라 불리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초식을 펼쳤다.

이서휘의 검을 후려치던 여서문이 마치 회오리 그 자체가 된 것처럼 솟구치더니 쐐앵, 쐐앵! 하는 소리와 함께 유형의 검기를 내뱉었다. 그 검기의 모습은 청강검과 똑같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켜보던 누군가가 탄성과 함께 여서문의 움직임을 알아챘다.

“답엽능신비(踏葉能迅飛).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

여서문은 선 자세에서 검기를 펼치는 게 아니라 답엽능신비(踏葉能迅飛)라는 무공과 섞어 쓰고 있었다.

답엽능신비(踏葉能迅飛).

낙엽을 한 번 밟아도 능히 빠르게 날아오를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점창파의 절예(絶藝)였다.

땅을 한 번 박차는 것만으로도 괴이한 궤적을 그리면서 여서문의 신형이 공중으로 솟았다. 힘없이 솟구치는 게 아니라 매가 지상의 동물을 낚아채는 모습처럼 곡선을 그리면서 움직였다.

기이하다.

그리고 강했다.

이서휘가 여서문의 강력함을 통감하면서 속으로 분노했다.

‘백도맹은 대체 이런 고수들을 데리고 내 전생에 무엇을 했단 말이냐! 이 멍청한 것들아!’

콰아아아앙!

이서휘가 난데없이 분노한 것처럼 날아오는 여서문을 후려쳐서 거리를 벌리더니, 도약 한 번으로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무척 빠른 동작으로 대(大) 자 형태로 양팔을 뻗었다가 쌍검을 오므리면서 암연심검의 파를 동시에 쏟아냈다.

쐐애애애애애앵!

백야검과 성검에서 뻗어 나온 두 개의 검기가 인(人) 자 형태의 궤적을 그리면서 여서문에게 쏟아졌다.

피하기엔 너무 궤적이 컸다.

더군다나 이서휘가 팔목을 비틀었던 터라 두 개의 검기는 교묘하게 방향을 비틀어대고 있었다.

속도마저 빠르다.

순간, 여서문이 검기의 궤적에서 활로를 발견하자마자 답엽능신비(踏葉能迅飛)로 솟구쳐서 아슬아슬하게 검기를 피했다.

하지만 이서휘의 눈이 먼저 여서문을 쫓았다.

더군다나 자신이 내뱉은 검기의 궤적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맞으면 맞는 대로 이서휘가 추가 공격을 펼칠 셈이었고, 활로를 찾아 빠져 나오면 그대로 응징을 가할 생각이었다.

탁! 소리와 함께 땅을 밟자마자 이서휘의 신형이 여서문의 발 밑으로 이동했다.

챙챙챙챙챙챙챙!

여서문이 이서휘의 쌍검을 튕겨내면서 공중으로 점점 솟구치는 신기를 선보였다. 지켜보던 이서휘가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하지만 이서휘의 성격은 그야말로 대쪽 같은 면이 있었다. 강자였기에 이것저것 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까앙! 소리와 함께 여서문을 공중으로 튕겨낸 이서휘가 하늘을 바라보다가 가차 없이 공중을 향해 즉발기인 암천세(暗天勢)를 쏟아냈다.

여서문은 이서휘가 절기를 펼치는 것이라 판단하고 즉각 사일강기(射日罡氣)를 쏟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여서문은 하늘로 솟구치고, 이서휘는 바닥에서 사일강기의 여파를 맞았다.

이서휘의 주변으로 먼지가 피어오르는 와중에 쩌저적 소리와 함께 비무대 바닥에 금이 갔다.

두 사람의 어마어마한 공방전에 백도맹 고수들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있었다.

비무대가 부서지는 것처럼 쪼개지면서 먼지가 퍼진 터라 구경하던 자들은 이서휘와 여서문의 모습을 당장 찾아내기 어려웠다. 그때, 하늘에서 투두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핏물이 투두둑 소리와 함께 떨어지더니 바닥에 선을 그렸다.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답엽능신비(踏葉能迅飛)를 펼친 모양이었다. 핏물을 머금은 붓이 힘찬 필체로 약간 휘어진 일(一)자를 그려놓은 형국이었다.

먼지가 여전히 피어올랐다.

이 혼란 속에서 누가 더 유리할까?

점창파의 여서문은 발소리도 내지 않은 채로 바닥에 내려서서 이서휘의 신형을 찾아 움직였다.

이미 왼팔에 부상을 입은 상태.

두 사람 모두 상대를 이겨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본능적으로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생사의 경계가 아슬아슬해지는 싸움이 계속 이어졌다.

여서문이 먼지 사이로 거뭇한 형체를 발견하자마자 청강검을 내질렀다.

채앵……!

‘어?’

여서문의 마음에 한줄기 의혹이 떠오르는 순간 쌍검이 먼지를 흩어버리면서 쏟아졌다.

‘먼지 속에서 어찌 이렇게 정확하게 대응을 할꼬?’

이서휘의 쌍검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휘휘휙― 하는 바람 소리가 먼지를 가르면서 청강검을 튕겨냈다.

이서휘가 휘두르는 쌍검, 두 줄기의 질풍이라 부르면 어울리는 모습이려나.

섬세하면서도 매서웠고.

기이하게 묵직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였다.

챙챙챙챙챙챙!

여서문은 좌우로 청강검을 내지르면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감탄을 할 순간이 아니었으나 여서문의 마음에 이서휘를 정의내리는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일대검호(一大劍豪)로구나.’

분명 두 자루의 검의 상단에서 청강검과 함께 불꽃을 튀기고 있었는데 불쑥 하단에서 묵직한 바람이 불어오자마자 여서문이 청강검을 내지르면서 동시에 땅을 박차고 이서휘를 노려보면서 훌쩍 뒤로 솟구쳤다.

이서휘의 좌각이 바람을 가르면서 지나갔다.

‘허어…….’

여서문은 난생 처음 보는 초식 연계 방식이었다.

여서문은 자신의 답엽능신비(踏葉能迅飛)를 처음으로 물러나는 와중에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여서문에게 호흡을 가다듬을 틈을 주지 않았다.

챙챙챙챙챙!

여서문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느닷없이 필사검기(筆寫劍氣)를 준비하자마자 청강검으로 을(乙) 자를 그렸다.

엷은 빛줄기가 이어지면서 이서휘가 공격해 올 공간에 검기로 이어지는 획을 그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서휘가 선택한 것은 암연심검의 환, 일점형 검기였다.

쐐앵!

더군다나 지난날 범사량이 이미 필체를 베낀 검법을 이서휘에게 펼친 적이 있었다.

이서휘는 여서문이 펼치는 궤적을 보자마자 을(乙)자의 획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획의 빈 공간으로 검기를 내뱉었다.

섬뜩한 칼날이 연달아 여서문의 몸통 곳곳으로 쏟아졌다.

타앙! 타앙! 타다당!

이것을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까.

지켜보던 고수들이 저마다 입을 반쯤 벌렸을 때 검을 급히 거둔 여서문이 저력을 발휘하며 좌장을 청강검에 붙였다가 구(口)자를 좌측으로 늘리듯이 손을 움직이자 그 궤적에 푸르스름한 기가 발현(發現)됐다.

투둑, 투두둑!

이서휘의 검막과 흡사한 경지를 보여주는 무공이었다.

여서문의 심오한 무공을 구경한 자들이 대번에 박수를 치려다 가까스로 참았을 때, 이미 선수를 제압한 이서휘의 신형은 여서문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더군다나 이미 이서휘의 어깨가 한껏 뒤로 젖혀 있었다.

‘아…….’

여서문이 급히 청강검을 머리 위로 들어 산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맹렬한 기세로 쏟아지는 이서휘의 검과 내공을 막았다.

콰아아아아앙―! 콰지직― 쩌저적―

굉음에 뒤이어 정체 모를 소음이 섞였다.

여서문의 두 발이 비무대의 바닥에 박혔다가 빠져 나왔던 것.

이제 여서문은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서휘가 내지르는 쌍검의 궤적만이 여서문의 눈에 하얀 빛줄기를 새겨놓은 것처럼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여서문의 마음이 어느새 한 자루의 검(劍)이 되어 가고 있었다.

‘……죽기 전에 이르지 못했던 경지에 도전해보자, 검과 하나가 되리라.’

여서문은 이서휘에게 밀리겠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점창파의 비기를 사용할 작정이었다.

평생 추구했으나 이르지 못했던 영역…….

언제 닿을지 기약이 없었던 검아일체비검(劍我一體飛劍)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점창파의 비기가 여서문의 마음에서 먼저 폭발했다.

‘검아일체(劍我一體)로 추구사일(追求射日)이로다.’

몸과 검의 형(形)이 하나로 된다.

그 순간에 이서휘의 안광(眼光)이 여서문의 마음을 훑어보는 것처럼 번뜩였다.

‘설마 양패구상을 하려는가?’

본능이 경고하자마자 이서휘가 결단을 내렸다.

여서문이 죽음을 목전에 둔 무인이 된 것처럼 혼신의 반격을 준비하는 것이라 파악했다.

이런 곳에서 비무를 벌이다가 둘 다 죽을 수는 없었기에 여서문의 신분과 자존심을 깡그리 뭉갤 정도로 이서휘가 재빠르게 대응했다.

이서휘의 쌍검에 좌라락 소리와 함께 검사가 휘몰아쳤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검사가 휘몰아치는 성검이 여서문의 턱 밑으로 솟구쳤다.

검과 하나가 되어 비검을 사용하려던 여서문은 어쩔 수 없이 성검을 막았다.

까앙!

‘떨어져라!’

어쩐지 청강검이 성검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고 있었다. 이서휘가 순간 내공을 폭발시켜 여서문의 내공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서휘도 여서문의 비기를 눈치 채고 필사적이었다.

‘하필!’

여서문은 저도 모르게 죽음을 직감하고 떠올라 있는 해를 거뭇하게 막아선 백야검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해가 갈라졌는가?’

아니었다. 이서휘가 백야검을 치켜들고 있을 때 우연히 해를 가렸던 것이다.

쐐애앵―!

무언가 베였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여서문의 몸이 휘청거렸다. 몸에 입은 상처도 없건만 끝 모를 자부심 하나로 평생을 지탱했던 여서문의 정신에 ‘패배’라는 두 글자가 떠올랐다.

동시에 여서문은 찰나의 순간, 혼절할 수밖에 없었다.

지켜보던 자들이 헉 소리를 동시에 내뱉었다.

여서문마저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귓가에 들리는 것은 쨍그랑 소리와 이서휘의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여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아……, 뭐라 했는가?”

“괜찮으십니까?”

여서문이 어둠에 반쯤 잠겨 있던 두 눈을 다시 떠보니 이서휘가 자신의 어깨를 부축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잠시 여서문이 반쯤 혼절한 상태에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서너 번의 호흡을 기다리자 여서문의 시야가 다시 밝게 돌아오고 있었다.

여서문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문득 바닥에 두 동강이 나서 부러져 있는 청강검을 내려다 봤다.

‘아……, 사부님의 검이…….’

문득 여서문의 눈에 눈물이 반쯤 차올랐다.

청강검, 사부님이 주신 검이다.

사부에게 물려받은 지 십년이 넘었으면서도 아직도 청강검은 ‘사부님의 검’이라 생각했던 여서문이다.

그 검이 부러져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때, 이서휘가 말했다.

“살릴 수 있을 겁니다.”

“뭐라고?”

어찌 청강검이 부러질 수 있을까 하고 살펴보던 여서문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검신은 어쩐지 멀쩡하고 검병의 윗부분이 그야말로 깨끗하게 잘려 있었던 것.

“아, 아직 검이 멀쩡한가?”

그 말에 이서휘가 바닥에 놓인 청강검의 검신을 주워 여서문에게 넘기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선배님이 워낙 위험한 것을 펼치려고 하셔서 이 방법 밖에 안 떠올랐습니다. 다행히 검신이 살아 있으니 복구할 수 있을 겁니다.”

아, 그야말로 검객들만 나눌 수 있는 대화였다.

정확하게는 검병까지 이어지던 검신의 끝부분도 함께 잘렸다. 그러나 여서문은 이 정도도 다행이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승패에 대한 이야기는 허공으로 흩어지고, 검을 다시 살릴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서휘와 잠시 나눴다.

“……죄송합니다.”

이서휘가 말을 마치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자 그제야 퍼뜩 정신이 돌아온 여서문이었다.

아무리 검에 미친 검객들이라지만 두 사람 모두 바보들은 아니었다.

여서문이 말했다.

“아, 아닐세. 자네가 죄송할 건 없지. 내가 살아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니까.”

여서문은 양 손으로 쥐고 있는 청강검의 검신을 내려다보다가 제 몸이 죽을 뻔 했던 것은 잊은 채로 다행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겠는데…….’

그제야 여서문이 이서휘를 바라봤다.

이서휘와 여서문이 눈을 마주쳤다.

여서문은 저도 모르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누고 싶은 말은 많지만 패배자가 먼저 비무대를 내려가야 하는 법. 나중에 시간 한 번 내주게.”

이서휘가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후배가 찾아뵙겠습니다.”

여서문이 바닥에 놓인 검병을 줍더니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비무대를 내려갔다.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좌우로 물러나면서 길을 터주자 여서문이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가 여서문에게 물었다.

“어찌된 것이오? 어떻게 진 것이야?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어.”

“점창파 장문인이 어찌 군림맹의 대주에게 진단 말이오.”

“그게 무슨 말인가? 봐 놓고도 몰라?”

사람들이 제 멋대로 떠들자 여서문이 걸음을 멈추고 일갈했다.

“장강 이남의 일대검호에게 진 것이다. 도전할 자가 있으면 나서 보던가.”

여서문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있는가?”

있기는커녕 정적이 감돌았다.

여서문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 이만 쉬어야겠네.”

여서문이 마치 호통을 내지르듯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점창 문도들을 향해 외쳤다.

“점창은 빠져라.”

여서문이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서문의 명령에 점창파 소속의 백도맹 무인들이 여기저기서 우르르 소리와 함께 빠져나와 여서문을 따라나섰다.

수하들을 데려가서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셈일까? 점창파가 아니면 어차피 들을 수 없을 터였다.

이서휘가 여전히 비무대 위에 서 있었다.

낮은 한숨과 몹시 감탄하는 탄성이 뒤섞여서 여기저기서 흘러 나왔다.

백도맹에서는 이번 비무가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담가막과 무당은검 유은결에겐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이야기였다.

담가막이야 직접 이서휘의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에 감흥이 적었다고 할 수 있었으나 무당은검 유은결의 패배 선언은 그 뒤로 한참이나 회자할 만큼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유은결, 이 무당의 숨은 검은 싸우지도 않고 자신의 명성을 한층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실로 묘한 남자였다.

그렇게 백도맹의 고수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는 가운데 점창파의 여서문 장문인이 군림맹의 이서휘에게 패배했다.

그제야 담가막이 무대 위로 올랐다.

“비무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좌중이 고요했다.

일부는 몸이 근질근질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서문을 꺾은 이서휘에게 곧바로 도전할 만큼 예의 없는 무인은 없었다.

담가막이 입가에 미소를 진 채로 말을 이었다.

“지난날 백도맹 분타에서 군림맹 이서휘 대주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쩐지 백도맹에서도 그 사실이 널리 퍼졌을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아는 분들이 없더군요. 호북 분타의 전서구를 마교에서 탈취해 거짓된 정보를 흘렸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오늘 비무에 대해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담가막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 어리석은 생각을 말씀드리면 여기 이서휘 대주는 앞으로 백도맹과 군림맹이 추후 힘을 합쳐 마도를 상대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 대주, 안 그런가?”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담 단주님…….”

담가막이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물론 군림맹의 고수들이 이 대주처럼 모두 강하지는 않을 터.”

“후후후.”

여기저기서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담가막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군림맹의 힘은 이 대주가 증명했습니다.”

담가막이 이서휘를 향해 말했다.

“이제 백도맹 선후배들에게 자네가 한 마디 해주게나.”

담가막의 말에 이서휘가 좌중을 향해 예를 취하면서 말을 받았다.

“백도맹의 선후배 여러분들……. 힘을 합쳐야 할 시기가 오면 어떤 방식으로든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과 같은 자리에 서고 싶습니다. 군림맹과 백도맹이라는 구분을 짓기 전에 저는 백도(白道)의 무인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서휘가 말을 멈추고 잠시 좌중을 둘러봤다.

담가막, 유은결, 단우혁, 백류혼, 도이, 도삼, 막무영, 유명수, 조자룡, 정이강, 손몽한처럼 이름을 아는 자들을 바라보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이름조차 모르는 자들을 바라봤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도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는 거창한 이야기를 할 생각도 없었다. 대신에 마음을 담아 분명하게 말했다.

“……함께 합시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겨우 ‘함께 합시다.’란다.

저 어이없는 말주변에 단우혁이 가장 먼저 피식 웃었다.

백류혼도 콧방귀를 살짝 뀌었다.

도삼은 이서휘를 바라보며 엄지를 올렸다.

도이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이 어색하고 이상한 침묵의 정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있었으나 딱히 도이의 머리에 해답이 떠오르진 않고 있었다.

백도맹의 누군가가 덤덤하게 내뱉었다.

“그럽시다.”

그 말에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이미 백도맹의 고수들은 단우혁의 표정과 비슷하게 변하고 있었다.

‘말주변은 별로 없구나. 그래서 더 믿음이 가는군.’

누군가가 말했다.

“군림맹을 다시 보게 되었네.”

“쓸데없는 말들 마시고. 이 대주 걱정처럼 우리가 그렇게 꽉 막힌 자들은 아니외다. 안 그런가?”

“자네는 꽉 막혔지 이 사람아.”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에 사정을 아는 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서휘가 말했다.

“군림맹의 후배는 물러가겠습니다.”

이서휘가 예를 취하자 백도맹에서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꽤 많은 고수들이 이서휘를 향해 자신의 두 손을 맞잡았다. 너나할 것 없이 작별인사와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먼 길 조심히 가시오.”

“조심히 가시길.”

“덕분에 견문을 넓혔소.”

“좋은 비무였소이다.”

비슷하지만 대부분 같은 의미를 지닌 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이서휘는 차마 바로 내려오지 못하고 한참이나 두 손을 맞잡고 백도맹의 군웅들과 눈을 마주쳐야 했다.

이서휘라는 이름 석 자가 장강 이북에 쩌렁쩌렁하게 울리게 된 출발점이 되는 날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