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33화 (33/43)

<4장. 실력자(實力者)>

이서휘가 백도맹에 도전 의사를 밝혔다.

본래는 백룡지회 이후에 벌어지는 고수들의 비무에 뛰어들려고 했었으나, 일월마가의 난동으로 무산되었다.

백도맹주 범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조용히 군림맹으로 돌아가려던 이서휘는 승룡회 무인들 때문에 생각을 바꿨다. 백도맹주가 문제가 아니라 백도맹 전체의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앞으로 군림맹에 도움이 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백도맹의 인식 수준이 문제였다.

백도맹은 자신들이 백도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물에 갇혀 있었다. 이서휘의 전생에도 그렇고 이번 생애도 마찬가지. 백도맹이 그렇게 대단했다면 천마 위극신과 끝까지 남아 싸우던 자들이 사패가 아니라 백도맹이었을 터.

이서휘는 그 점이 가장 괘씸했다. 사패인 검제 이서휘의 눈에 비치는 백도맹은 그저 다른 곳보다 조금 더 큰 우물일 뿐이었다. 백도맹의 후기지수들마저도 군림맹을 무시하고 있으니 이서휘가 나서서 천하가 드넓다는 것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었다.

다음 날, 이서휘는 단향객잔에서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도이와 도삼이 언제 떠날 것이냐 물을 때마다 이서휘는 엉뚱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무슨 일이요?”

“기다려 보면 알 것이다.”

이서휘는 일월마가 때문에 백도맹이 정신이 없을 것이라 내다봤다. 폭발 때문에 죽은 사람도 꽤 많았다. 그곳에 쳐들어가서 비무를 하자는 것은 이서휘가 생각해도 예의가 아니었다.

때문에 백도맹이 어느 정도 평상심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대신에 이서휘는 모처럼의 여유라고 생각하고 단향객잔 주변의 유명한 음식점을 찾아다니면서 단우혁, 백류혼, 도이, 도삼에게 맛있는 음식을 잔뜩 사주고 있었다.

인생을 다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었지만, 전과는 달리 하루하루를 전보다 더 의미 있게 보내고 싶게 만든다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더군다나 본래 돈에 대한 집착이 별로 없었던 이서휘다. 친구들에게 쓰는 돈은 얼마가 되었든 아까워하는 법이 없었다.

특히 백룡지회에서 도이와 도삼이 백도맹에 모인 고수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자주 봤던 터라, 이서휘는 투덜대는 두 사람을 끌고 다니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의복을 새로 맞춰줬다. 그래도 귀공자들이나 입는 옷을 입혀놓으니 그나마 돈은 제법 넉넉한 무인들로 보였다. 하지만 표정들이 워낙 어둡고 까칠해서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바탕 주변을 누비다가 다시 단향객잔으로 돌아왔을 때는 서서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단향객잔 앞에 전날 이서휘에게 망신을 당한 승룡회의 막무영(莫武英), 유명수(劉明水), 조자룡(曺子龍)이 떨떠름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서휘가 일행들과 함께 단향객잔으로 들어가려다 세 사람을 힐끗 보며 말했다.

“자네들 여기서 뭐하는가?”

이서휘의 말에 조자룡이 대꾸했다.

“아, 이 대주님.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세 사람이 전날 이서휘에게 호되게 당했다는 것을 모르는 일행들이 저 정중한 말투에 고개를 갸웃했다.

도삼이 말했다.

“누구신데 갑자기 오셔서 안부(安否)를 물으시는지?”

도삼의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승룡회의 무인들이네.”

“아, 우승자들……. 대단한 분들이 오셨군요.”

이서휘가 말했다.

“세 사람, 무슨 일이냐고? 말을 해 이 사람들아.”

“그게 그러니까…….”

세 사람이 말을 흐리자 이서휘가 객잔으로 들어가자는 것처럼 손짓을 하며 말했다.

“들어가서 저녁이나 같이 하세.”

“아, 그게 아니고……. 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승룡회에서 한 번 뵙자고 하십니다.”

그 말에 이서휘가 피식 웃으면서 객잔 안으로 쑥 들어갔다.

“직접 오라 해라.”

어디선가 바람이 휘날렸다.

도이는 영문도 모르면서 이서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와야지.”

이서휘가 객잔으로 들어가자, 단우혁 등의 일행도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객잔으로 들어갔다.

이서휘가 사라지자 세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선배들이 직접 와야지.”

“가서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선배들이 직접 오는 게 맞지. 아직 이 대주가 정식으로 비무 요청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우리가 먼저 말을 해서…….”

“어쨌든 우리가 이 대주를 데려갈 수는 없네. 그럴 실력도 없고.”

맞는 말이었다.

승룡회는 우승자 출신들이 기수에 따라 선후배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조직이었다. 아마 천하를 뒤져도 이렇게 경직된 구조를 지닌 조직은 드물 것이다. 백도맹에서도 승룡회가 유일할 정도다. 그 때문에 아예 문파에서는 참가자의 나이가 너무 많으면 아예 백룡지회 참가를 금지시킨다. 승룡회에 보내봤자 적응하기가 힘들었기 때문. 승룡회는 묘한 자부심과 경직된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특권 의식이 남달랐다. 딱, 이서휘가 싫어하는 부류라 할 수 있었다.

결국 세 사람은 승룡회의 선배라는 작자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가서 제대로 전할 말이라도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왜 너희만 오는 것이냐?”

승룡회의 누군가가 세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자 조자룡이 더듬거리면서 대꾸했다.

“그게 아무래도 이 대주가 친구들을 접대하느라 바쁜 것 같습니다.”

“바쁘다? 친구들을 접대하느라?”

“네.”

“화를 내지 않을 테니 그 자가 한 말 그대로를 뱉어라.”

조자룡의 말에 화를 억누른 승룡회의 손몽한(孫蒙翰)이 후배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손몽한의 거친 성격을 잘 아는지라 막무영(莫武英)이 바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직접 오시라고…….”

“그렇구나. 그러지 뭐. 어려운 일도 아니구만 말을 그렇게 더듬어?”

어쩐지 손몽한은 화를 내지 않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룡회의 위상이 언제 이렇게 땅에 떨어졌는지 모르겠다만 군림맹의 대주라는 작자가 객잔으로 오라 그러면 뭐 승룡회가 가야지. 안 그러냐? 가자, 우리가.”

손몽한이 검을 쥐고 일어나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유명수(劉明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선배님, 혼자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혼자 가지.”

“아, 제가 권 선배와 주 선배도 모시고 오겠습니다. 아무래도 객잔에 그 단우혁이라는 놈과 백류혼이라는 놈이 있어 만약을 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 자들도 제법 실력이 좋다 보니…….”

그 말에 손몽한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말했다.

“내 별호가 무엇이냐?”

“쾌검독행(快劒獨行)입니다.”

“내 문파가 어디냐?”

유명수가 잠시 주변에 누가 없는지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대(大) 쾌걸검문(快杰劍門)입니다.”

손몽한이 유명수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했다.

“이 녀석이 뭘 눈치를 봐? 내가 말했느냐 안했느냐? 내가 우승했을 때 화산과 무당, 곤륜만 해도 스무 명이 넘었다고. 또 말해줘?”

“아닙니다. 자주 하셨습니다.”

“너희는 명문정파 출신이라는 놈들이 셋이나 몰려가서……. 하이고, 됐다. 잔소리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가자.”

손몽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검을 쥐고 단향객잔으로 나섰다.

☆ ☆ ☆

“이서휘 대주 나오라고 해라.”

승룡회 손몽한이 단향객잔 바깥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점소이에게 거만한 말투로 명령을 내렸다. 백도맹의 무인이라는 것을 아는지라 점소이는 지체 없이 객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서휘는 마침 단향객잔에서 도둑 형제들의 무용담을 듣고 있었다. 아니, 무용담이라기보다는 도둑으로 빠지게 된 이야기였다.

도둑 형제들이 살고 있던 마을에 부인을 셋이나 거느린 부호가 있었다고 한다.

그 부호가 네 번째로 맞이하는 부인의 나이가 고작 열다섯이었는데 문제는 도이가 평소에 좋아하던 소녀였다고 한다. 첫사랑이 짝사랑이었달까.

“부당한 일이야. 누군가가 남보다 돈이 아주 많다는 것은…….”

도삼이 도이의 말투를 따라하자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렸다. 도이의 그 당시 말이 기억에 오래 남은 모양이었다.

단우혁이 낄낄 웃다가 말했다.

“그래서 털었단 말이냐?”

어쨌든 도이의 선동으로 두 사람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나이에 도둑질을 감행해 부호의 집을 크게 털었다는 이야기였다. 도삼의 허풍과 도이의 시큰둥한 반응이 합을 이뤄 이서휘, 단우혁, 백류혼이 함께 배꼽을 쥐면서 듣고 있었다. 한참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객잔의 점소이 하나가 이서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바깥에 백도맹이 와 있습니다. 이서휘 대주님을 찾더군요.”

이서휘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몇 명인데?”

“네 명입니다.”

단우혁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다녀와서 이야기 해주겠네.”

이서휘가 허리춤에서 철선을 뽑아들고 바깥으로 나가자 도이가 혀를 차며 말했다.

“또 누굴 때리려고 저걸 뽑아들고 나가는지. 쯔쯔, 방금 이 대주 웃으면서 나가는 거 보셨소?”

백류혼이 중얼거렸다.

“뭐 신나는 일이 바깥에 있나 보지.”

그때 객잔 바깥에서 바람이 휙휙 불어대는 소리와 병기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어서 덩치 큰 사람이 바닥에 떨어지는지 쿵 하는 소리가 울리면서 객잔의 문이 살짝 흔들렸다.

단우혁, 백류혼, 도이, 도삼이 동시에 한 마음에 되어 별 말 없이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끝났군.”

“그래도 비명은 지르지 않는 것을 보니 제법 강단이 있는 친구였네.”

단우혁과 백류혼의 말에 도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수하들을 데려와서 그랬겠지요.”

잠시 후에 이서휘가 객잔 문으로 다시 들어오더니 자리에 앉으며 도삼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게 끝이야?”

“끝이라니요. 그게 시작인 것이지요. 애초에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지라 한 번 부잣집을 털어보니 이거 재미있더군요. 하지만 그 부호가 눈치를 챘는지 바로 살수를 고용하는 바람에 근 일 년은 도망만 다녔습니다.”

“그게 몇 살 때였는데?”

“제가 열하나, 도이 형이 아마 열셋쯤 되었을 겁니다.”

“후후, 그 어린 나이에 용케 살수를 피했구나.”

“바깥엔 누가 왔다 갔는가?”

백류혼의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아, 승룡회.”

“승룡회는 왜?”

사람들이 궁금해 하자 그제야 이서휘가 말했다.

“백도맹에 도전할 생각이네. 지금 피해복구를 하느라 당장 도전하기는 어렵고 여기에 머물면서 기다릴 생각이었네만 승룡회가 알아서 도전을 해오는군. 검이 제법 빠르더군. 뭐 어느 정도 생각해놓은 선이 있어서 말이지. 조금 더 기다려 봐야겠네.”

“어디까지 상대할 생각인데?”

단우혁의 말에 이서휘가 잠자코 있었다.

“글쎄다. 백도맹 전체가 인정하는 고수는 꺾고 갈 생각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서휘의 말에 단우혁과 백류혼이 재미있겠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은 이서휘가 백도맹을 잔뜩 눌러줘도 좋고, 저 거만한 친구가 한 번쯤 패배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백류혼이 히죽 웃었다.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심심하진 않겠어.”

☆ ☆ ☆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조자룡이 이마를 붙잡고 있는 손몽한을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자룡을 비롯한 세 사람은 웃음을 참고 있었다. 사실 세 사람이 덤비면 손몽한도 쉽게 당해내진 못할 것이다. 분명히 실력 차이가 심했다고 오는 와중에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손몽한은 세 사람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 결과로 손몽한의 이마에는 커다란 혹이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손몽한의 싸늘한 눈빛과 부풀어 오르는 혹이 너무 대조적이어서 세 사람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손몽한이 말했다.

“저 정도면……. 그래, 인정한다. 강하구나. 하지만 내가 방심한 것도 있다. 부회주님……, 아니다. 큰 형님은 어디 계시냐?”

손몽한이 말하는 큰 형님이란 다름 아닌 승룡회주 맹기풍(孟奇楓)을 말했다. 자타공인 승룡회 제일의 실력자라 할 수 있었다.

조자룡이 조심스럽게 반대의견을 내놨다.

“회주님이 나서시는 것은 반대입니다. 아무래도 군림맹 대주와 너무 격이 크고, 만에 하나라도 패하신다면 승룡회의 명예가 땅에…….”

손몽한이 괜히 조자룡에게 손찌검을 하면서 화를 냈다.

“아무리 대주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저렇게 공개적으로 도전하는 자들은 우리 승룡회가 처리하는 것이 관례였다. 우리 선을 넘어가는 것 자체가 승룡회의 망신이야. 딱히 업무도 주어지지 않는 놈들이 이런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고 말이야. 내가 너희 때 얼마나 구박을 많이 받았는지 아느냐?”

“아, 그렇습니까?”

세 사람의 말투가 확 변해 있었다. 이서휘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니 손몽한과 자신들의 실력 차이가 거기서 거기라고 느꼈던 것.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막무영(莫武英)이 말했다.

“그럼 회주님을 찾아뵙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 ☆ ☆

세 사람은 승룡회주 맹기풍(孟奇楓)을 찾아가서 보고했다. 맹기풍이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

세 사람이 있었던 일을 보고 하자 맹기풍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군림맹의 사자에게 덤볐다고? 미친 것이냐? 멍청한 놈들……. 손몽한이 데리고 와.”

“네?”

맹기풍의 뜻밖의 반응에 세 사람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맹기풍이 말했다.

“내가 가서 말할까?”

“아, 아닙니다.”

“그리고 분명 손몽한이 이십여 초도 못 겨뤘다고? 암습을 하거나 방심을 한 게 아니고?”

“아닙니다. 공격도 먼저 하셨습니다.”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맹기풍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막무영에게 말했다.

“막무영, 보아 하니 군림맹의 젊은 고수가 작정하고 시비를 걸려는 모양인데 구파의 선까지 가지 않도록 해야한다. 가서 숭무단(崇武團), 집법단(執法團), 제검단(齊劍團), 백협단(白俠團)에 보고한 다음에 고수 추려서 단향객잔으로 보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드려라. 군림맹이 먼저 도전했다고 해. 알아서들 대응할 거다.”

맹기풍은 군림맹의 칼끝을 다른 조직으로 돌릴 생각이었다. 막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수하들이 나가자 맹기풍이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새끼들, 대체 뭘 배운 것이야?”

맹기풍은 숭무단, 집법단, 제검단, 백협단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으나 단주들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곳에서는 고수를 보낼 것이라 예상했다. 저들이 만약 다 패한다면……. 그때, 맹기풍이 스스로 나설 생각이었다.

승룡회의 회주라는 작자가 직접 알아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수하들의 보고를 토대로 잔머리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 ☆ ☆

승룡회주 맹기풍이 백도맹의 단주들에게 전언을 보냈다.

“군림맹의 대주가 도전하고 있다고…….”

이 말을 곱게 들을 단주들이 과연 있을까? 어쨌든 다들 불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듣자마자 고개부터 갸웃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백협단주 담가막.

담가막은 이서휘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담가막이 말을 전하러 온 막무영에게 말했다.

“군림맹이 도전을 해? 설마 이서휘 대주를 말하는 것인가?”

“어? 아십니까?”

“무턱대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

무언가를 생각하던 담가막의 인상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이서휘가 먼저 도발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담가막은 이서휘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백도맹을 진심으로 도와줬던 이서휘가 아니던가?

담가막이 싸늘한 어조로 막무영에게 말했다.

“막무영.”

“네, 단주님.”

“자네들 혹시 이서휘 대주한테 덤볐었나?”

“네? 아, 그게 아니고 저희는…….”

담가막이 책상을 내려치면서 말했다.

“정신이 있는 놈들이야?”

“네?”

“얼마 전에 분타에서 군림맹의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도 못 들었나?”

“아……, 들은 게 있긴 합니다만.”

“들은 게 있긴 하다?”

“네.”

담가막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그래? 그때 도와줬던 사람이 이서휘 대주다.”

“아……, 거기까진 들은 게 없어서.”

“그래. 못 들었다 치자, 자네들은 예의도 없나? 승룡회가 날뛰는 건 백도맹 안에서나 귀엽게 봐주는 것이지 어디 감히 다른 단체의 무인을 건드린단 말인가?”

“건드렸다는 말씀은 좀. 물론 실력을 좀 보려는 생각들은 다들 있었습니다만.”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군. 이 대주가 백도맹에 사자로 온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맹주님과 독대를 한 사람이다. 이 대주가 맹주님에게 보고하면 승룡회는 어쩌려는 것인가?”

“아, 그게 저희도 그게 참 조심스러웠습니다만. 회주께서 일단 상황을 전하시라하여…….”

“생각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군림맹이 백도맹의 하부 조직이야? 예의를 다해도 부족할 판국에.”

담가막이 계속 화를 내자 막무영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상대는 백협단이라는 무력 조직의 수장이고, 막무영은 승룡회에서 막내나 다름이 없는 신분이라 그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내게만 보고하는 것이냐?”

담가막이 묻자 막무영의 눈빛이 요동쳤다.

“승룡회주가 숭무단(崇武團), 집법단(執法團), 제검단(齊劍團)으로 다 전하라고 하셔서.”

담가막이 코웃음을 쳤다.

“맹기풍(孟奇楓)이 또 잔머리를 쓰는구나……. 그 뭐야……. 이 대주가 머무는 곳이 단향객잔이라던가?”

“네? 아, 그렇습니다.”

“제검단이 가장 빠르게 도착하겠군. 숭무단하고 집법단은 엉덩이가 무거우니 바로 가면 말릴 수 있을 게다. 숭무, 집법의 두 단주에게 제검단이 나서기로 했으니 그대로 계시라고 일러라. 그리고 자네 회주…….”

담가막은 맹기풍을 부르려다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능구렁이 같은 맹기풍이다. 불러봤자 분명 수하들에게 떠넘길 게 뻔했다.

“됐다. 어서 가 봐.”

“네, 알겠습니다.”

막무영은 되돌아가려다 말고 담가막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단주님.”

“뭐.”

“제검단도 어렵겠지요?”

담가막이 코웃음을 쳤다.

“맹주 비무전에 나서려던 사람이다. 젊다고 하여 너희 승룡회와 수준이 비슷할 것 같으냐? 이것들이 한 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어서 가라.”

“알겠습니다.”

담가막은 승룡회가 하는 짓이 못마땅했으나 한 편으로는 이서휘의 도전을 대체 누가 나서서 막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담가막이 씁쓸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이걸 어쩐다. 누군가 도전은 받아줘야 할 텐데……. 이 대주 실력이 나보다 아래라 할 수 없으니 다른 단주들도 어찌할 수 없을 터…….’

담가막은 이서휘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자, 특히 백도맹의 대표로 내보내도 무방한 자가 없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장문인들이 나서면 그 또한 부끄러운 짓이었다.

[백도맹에 그렇게 인재가 없는가? 대주 상대로 장문인이 나서다니.]

담가막이 한숨을 내쉬다가 일어섰다.

‘숭무, 제검, 집법까지 연달아 패하면 이게 무슨 망신이냐?’

담가막은 다른 조직을 말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 ☆ ☆

막무영은 지금까지 이서휘에게 속절없이 당했다는 사실이 무척 분했으나, 지금은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래. 어쩐지 기이하게 강하다 했어.’

막무영은 숭무단(崇武團)을 찾아가는 도중에 온통 검은색 무복에 일부러 빛을 죽여 만든 묵검(墨劍)을 차고 있는 제검단(齊劍團)을 발견했다. 그야말로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뭐야? 벌써 몰려가는 것인가? 빠르군. 빨라.’

제검단이 잔뜩 인상을 쓰고 지나가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막무영이 제검단의 선두에 나선 자를 바라보며 침을 한 번 삼켰다.

‘부단주가 직접 나서다니…….’

이미 조자룡의 보고를 받은 제검단은 코웃음을 치면서 단향객잔으로 향하고 있었다.

군림맹의 대주가 승룡회의 무인을 꺾었다고?

‘제검단이 처리해주마.’

본래 제검단은 백도맹 주변에서 치안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나서는 조직이었다. 밤낮으로 경계를 펼치다가 수시로 출동을 하다 보니, 다른 조직에 비해 업무가 과중하고 정신적인 압박이 심했다.

아흔 번을 문제없이 임무를 수행했다 하더라도 한 번을 실수하면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특히 무슨 사고만 터지면 대다수가 제검단 탓을 하고 있었다. 하는 일에 힘겹다는 것에 비해 인정을 받지 못해 이런저런 불만이 많은 조직이었다.

그 제검단의 정예 고수들이 단향객잔으로 향하고 있었다.

묘한 자부심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뒤엉켜 있는 자들이었다.

“도전을 했다 이거지?”

그 중심에 제검단의 부단주인 정이강이 있었다.

이미 군림맹 대주에게 패하고 돌아온 손몽한의 이마에 홍시(紅柹)가 탐스럽게 익었다는 말이 퍼지고 있는 와중이었다.

제검단이 군림맹의 고수를 제압하면 자연스럽게 저 거만한 승룡회보다 제검단이 더 훌륭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터.

정이강이 손몽한을 비웃으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멍청한 놈. 일인전승 문파의 장문인이라는 되도 않는 소리로 거들먹거리기나 하더니……. 꼴좋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대 쾌걸검문이랍니다.”

“쾌걸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 ☆ ☆

승룡회의 손몽한이 이서휘에게 당하고 돌아간 지가 채 반시진도 되지 않았는데 백도맹의 제검단이 다시 몰려와서 이서휘를 불러냈다.

점소이가 또 다시 이서휘에게 말했다. 이제는 점소이도 이서휘가 누구인지 대충 파악한 모양이었다.

“이 대주님, 백도맹에서 이번에는 더 많이 몰려 왔습니다만.”

이서휘가 대꾸했다.

“몇 명이나?”

“스무 명이 넘습니다. 꽤 유명한 분도 오셨네요.”

“유명한 분?”

“제검단의 부단주님일 겁니다. 이 일대의 치안 담당이랄까요. 제검단은 툭 하면 잡아가겠다고 위협을 하니 웬만한 사람들은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는 조직입니다.”

점소이가 큰 일 났다는 표정으로 이서휘를 바라보자, 이서휘가 눈을 껌벅이면서 일어났다.

“잡아가긴 뭘 잡아가.”

☆ ☆ ☆

이서휘가 일어나자 이번에는 단우혁을 비롯한 일행이 우르르 따라 나섰다. 그래도 제검단의 부단주라면 꽤 높은 직책이겠거니 생각했던 것.

이서휘가 객잔 바깥으로 나오자 서른 후반으로 보이는 제검단 부단주 정이강이 말했다.

“군림맹 이서휘 대주가 누구시오?”

그 말에 이서휘가 정이강의 기도를 살피며 대꾸했다.

“여기 있습니다.”

“대주께서 백도맹에 도전하시겠다하였소?”

정이강의 표정과 말투에는 놀라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렇게 새파랗게 젊은 놈이 손몽한을 제압했다고?’

이서휘가 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럴 생각입니다만. 백도맹의 누구십니까?”

“제검단의 부단주 정이강이라 하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쨌든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백도맹으로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한 명을 상대하고 올 생각은 없으니 기회가 되면 내일 뵙겠습니다.”

이서휘가 등을 돌리자, 제검단 부단주 정이강이 이서휘를 불러 세웠다.

“이 대주가 수고롭게 직접 백도맹에 갈 필요가 없게 해주겠소.”

이서휘가 등을 돌린 채로 단우혁 등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정이강의 말이 이어졌다.

“여기서 승부가 끝나면 백도맹에 갈 일도 없을 것이오. 안 그렇소?”

이서휘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도삼에게 말했다.

“구경할 테냐?”

“좋죠.”

“그래.”

이서휘는 허리춤에 있던 철선을 쥐고 촤르륵 소리와 함께 펼치면서 등을 돌렸다.

철선은 병기 그 자체로도 꽤 쓸 만했다.

손에 쥐면 무겁고, 펼치면 날카롭다.

파검혈(破劍穴)로 날카로운 병기를 대번에 부러뜨릴 수 있으니 음흉함도 갖추고 있었다.

이서휘가 철선을 펼치자, 정이강이 고개를 갸웃했다.

“검객(劍客)이 아니었소?”

“검객입니다.”

“한데, 철선은 뭐란 말이오?”

“부채 모양의 검(劍)일 뿐입니다.”

“흥! 좋게 봐주려 해도 이 대주께서 거만한 면모가 있구려.”

“자주 듣는 얘기입니다.”

말과 함께 이서휘가 한 발을 불쑥 나섰다. 그 순간 정이강은 이서휘의 덩치가 갑자기 커진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시작하시죠.”

이서휘의 말에 정이강이 쌔앵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뽑았다. 이서휘가 양 팔을 내린 채로 가만히 있자 정이강은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지고 있었다. 준비 자세랄 게 딱히 없어 보였다.

정이강이 말했다.

“이 대주께선 준비 되셨는가?”

정이강의 물음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자세는 별 게 없어도 방비가 철저할 것이라 판단한 정이강이 바람을 가르며 이서휘의 어깨를 노리면서 초식을 전개했다.

어쨌든 승룡회의 손몽한을 꺾었으니 약하지는 않을 터. 대충 하진 않을 생각이었다.

이서휘의 생각도 비슷했다.

정이강은 백도맹 제검회의 부회주다. 허술한 자가 아닐 것이라 판단하고 내공을 실어 정이강의 검을 후려쳤다.

대번에 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정이강의 검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정이강이 내공을 운용하자 검을 쥐고 있던 팔의 소매가 삽시간에 부풀어 올랐다.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검풍 위주의 검법인가…….’

정이강은 공동파의 고수다.

공동파에서 전해지는 복마검법(伏魔劍法)을 익혔다. 그러나 복마검법은 세월이 흘러 십팔수(十八手) 밖에 남지 않은 검법이라 부족함을 느끼고 정이강의 사조(師祖)가 창안한 현풍서검(顯風舒劍)을 배운 다음에 백도맹에 입맹한 자였다.

현풍서검(顯風舒劍)은 검법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기이한 무공이었다.

검법이 아니라, 검법을 보조하는 무공이었는데 정이강은 그 차이점도 명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복마검법과 현풍서검을 섞어 사용하고 있었다.

정이강의 사조가 독무(毒霧)를 사용하는 마인을 죽이기 위해 고심 끝에 만들어낸 검법이 바로 현풍서검이었다. 공동파는 예로부터 사마외도의 무리를 제압하는 데 매우 적극적인 문파였는데, 검법과 무공의 대다수가 복마(伏魔)라는 큰 뜻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마인도 아니고 독무도 사용하지 않는 이서휘를 상대로 사용하기엔 어쩐지 위력이 반감되는 검법이었다. 후대의 고수들이 검법에 담긴 뜻보다 위력에만 치중해 익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이강의 소매에서 장력을 내보내는 것 같은 바람이 쏟아져 나와 정이강의 검을 휘감았다.

현풍서검을 처음 겪는 사람은 기이한 바람이 쏟아질 때마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서휘는 말 그대로 바람을 읽었다.

시야와 운신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바람을 맞이했다.

그러다가 불쑥 철선을 내지르니 당황스러운 것은 오히려 정이강이었다.

현풍서검에 복마검법에 더해져 검풍의 형태로 발현되면 내공이 얕은 자들은 정이강과 검을 부딪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이서휘는 시야가 가려진 곳에서 불쑥 뻗어 나오는 정이강의 검을 어렵지 않게 후려쳐내고 있었다.

챙챙챙! 까앙!

정이강의 검법 때문에 구경하던 자들이 점점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거리를 벌려주자 정이강은 오히려 운신이 편해진 것처럼 바람을 일으켰다.

부웅―!

정이강의 팔에서 뻗어나온 회오리가 검을 휘감더니 이어서 정이강이 펼치는 궤적에 따라 이서휘에게 날아왔다.

후―웅 소리를 발산하며 어느새 매서운 검풍이 되었다.

맞는 순간, 몸이 비틀릴 정도로 강맹한 바람이다.

그 때문에 회오리는 이서휘의 보법을 방해하거나 철선을 쥐고 있는 손목을 노렸다.

그 사이에 정이강이 복마법검의 초식을 시전하자 보는 이들의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공방전이 이뤄지고 있었다.

챙챙챙챙챙챙!

그런데 이런 기묘한 우연이 있을까.

이서휘가 쥐고 있는 철선은 일단 현풍서검을 제압하는 데 매우 효율적이었다.

이서휘는 정이강이 희한한 무공을 사용하면서 종종 바람을 쏟아내자 철선으로 바람을 일으켜 맞대응했다.

정이강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이서휘가 현풍서검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대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이서휘가 정이강이 펼치는 무공의 장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마교와 겨룰 때 나름 훌륭한 전력이 될 것 같구나.’

공동파의 고수와 겨뤄본 적도 없고, 정이강이 공동파 출신이라는 사실도 모르면서 이서휘는 정이강이 펼치는 무공의 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오히려 정이강의 무공이 고강한 것을 보고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그래. 이러니저러니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해도 백도맹은 백도맹이로구나.’

정이강의 검풍과 이서휘가 일으키는 선풍(煽風)이 또다시 부딪쳤다.

후―웅, 파―앙!

“앗! 따가워.”

그 여파로 사람들의 얼굴에 매서운 바람이 쏟아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얼굴과 눈이 따가워서 잠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두 눈을 감은 채로 싸우던 검객이다. 따가운 바람을 그대로 맞을 리도 없었거니와 소리와 감각이 예민해 때때로 눈을 감아도 별 다른 지장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이서휘가 검병과도 다름없는 철선의 손잡이를 쥐고 맹렬하게 밀려오는 정이강의 검을 튕겨냈다.

차앙―! 까앙―! 챙챙챙챙! 촤르륵!

본래 철선을 사용했던 것처럼 부채를 펴고 접는 기예 또한 수준이 높았다.

바람이 불어오면 철선의 바람으로 응대하고, 검이 들어오면 철선으로 누르고, 튕기고, 후려쳤다.

때로는 철선의 친골(親骨, 부채의 제일 바깥쪽에 있는 뼈대)로 막았다가 암행표와 함께 섬뜩하게 파고들어 철선의 끝을 검처럼 내밀었다.

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서휘의 철선이 정이강의 목 부근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자, 정이강이 인상을 찡그렸다.

‘제기랄!’

목덜미에서 서늘한 느낌이 나면서 기분 나쁜 고통이 밀려왔던 것. 철선에 베여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서휘가 정이강의 표정을 살폈다. 기분 나쁜 표정이 가득했다.

‘흥……! 봐준 것임을 모른단 말이냐?’

이서휘가 일부러 철선이 길이를 감안해 휘둘렀다. 손가락으로 튕겼든 보법을 펼쳤든 간에 방금 한 수로 승부를 지을 수 있었다.

‘승부를 끝내자.’

이서휘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움직이는 와중에 승부를 어떻게 낼 것인지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

‘선택지가 없게 만들어주마.’

정이강의 검풍을 상대하느라 주로 철선을 펴서 사용하던 이서휘가 자세를 낮추고 정이강에게 파고들면서 철선을 접었다.

촤르륵―

바람이 그 기세를 펼쳐내기도 전에 이서휘의 철선이 먼저 뻗어와 마치 금나수법을 펼치듯이 정이강의 검을 가뒀다.

맞서는 정이강도 대단했다.

연달아 이십여 초를 막아내더니 왼발로 바닥을 찍고 뒤로 솟구치면서 검풍을 휘날렸다.

휘―잉!

정이강은 이서휘가 무언가 계략을 쓰는 것이라 판단하고 지체 없이 빠져 나갔다.

이서휘는 검풍을 보자마자, 두 발로 땅을 찍고 도약했다.

파앙―! 소리와 함께 정이강의 검풍을 선풍으로 흩어버리고, 땅에 착지할 때는 철선을 오므려 정이강의 요혈을 연달아 노렸다.

챙챙챙챙!

워낙 묵직한 철선이라 검으로 찌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서휘가 일부러 속도를 올렸다.

정이강이 철선을 막느라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서휘의 철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정이강은 막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잠시 후 서서히 이서휘의 동작을 파악했다고 느꼈을 때 겨우 찾아낸 빈틈으로 정이강이 검을 내밀었다.

이게 함정이었다.

훅―!

기다렸던 이서휘가 불쑥 철선을 내밀어 철컥 소리와 함께 정이강의 검을 튕겨내고, 찰나의 틈도 주지 않은 채로 좌장을 빠르게 내밀었다.

정이강은 자신의 손에서 검이 떠나간다는 기분을 느끼자마자 이서휘의 움직임을 읽고 동시에 좌장을 내밀었다.

정이강으로서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나무랄 데 없는 반격이었다.

그러나 이서휘는 그 반격을 끌어내기 위해 심리전을 펼치면서 함정을 파놓은 상태.

첫 번째 심리전에 당한 정이강의 검은 순식간에 파검혈에 물렸다.

이서휘는 파검혈로 검을 부러뜨리지 않고, 궤적을 비틀면서 단순하게 검을 튕겨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정이강은 순간 검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정이강은 자신의 검이 손아귀에서 떠나자마자 다시 빠르게 손을 내뻗어 검을 움켜쥐었다.

이어서 이서휘가 좌장을 내밀었을 때는 정이강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당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좌장을 같이 내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장력이 정직하게 맞붙었다.

콰아아아아앙―!

이서휘가 철선을 허리춤에 꼽고 있을 때 정이강은 구경하고 있던 제검단의 수하들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앗! 부단주님!”

동시에 세 명의 제검단원들이 허리와 다리에 힘을 줘서 정이강이 다치지 않도록 막아내려다가 네 사람이 동시에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지켜보던 백류혼이 한숨을 내쉬고, 단우혁마저도 씁쓸한 표정으로 이서휘를 평가했다.

“하여간 우리 이 대주가 강하다니까.”

친구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강해지고 싶다. 이서휘와 겨루고 싶다.’

처음에는 이서휘가 잘난 척만 하는 놈인 줄 알았던 두 사람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서휘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게 있었다. 젊은 나이에 이서휘를 일찍 만난 두 사람, 검왕(劍王)과 도왕(刀王)도 전생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보고, 듣고, 부러워하고, 때로는 자책하는 마음마저 두 사람을 조금씩 강해지게 만들고 있었다.

이서휘는 정이강이 자신과 격차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만 내공을 주입해 날렸다. 피를 토하거나 내상을 입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이강은 얼떨떨한 얼굴로 수하들의 부축을 받아 핼쑥한 얼굴로 일어나고 있었다.

정이강이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먼저 이서휘에게 도전을 했고, 제검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패배했다.

‘아,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이냐.’

철선이라는 특이한 무기가 있어 어딘지 모르게 억울한 면이 있었지만 얄밉게도 마무리는 매우 정직하게 장력 대결로 끝나 버렸다.

수하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단주님, 괜찮으십니까?”

그제야 정이강의 얼굴이 빨갛게 익고 있었다. 여기서 더 추태를 부리면 제검단 전체의 망신이다. 두어 번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면서 마음을 가라앉힌 정이강이 이서휘에게 몇 걸음 다가가 말했다.

“이 대주, 한 수 잘 배웠소. 내일 또 견문을 넓혀주시길 바라겠소. 밤늦게 찾아와 실례가 많았소이다.”

정이강이 뒤끝 없는 말투로 정중하게 말하자 이서휘도 그제야 예를 취하며 대꾸했다.

“부단주님의 문파가 궁금하군요.”

이겨놓고 물어보니 얄미울 법도 하건만 정이강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덤덤하게 자신의 사문을 밝혔다.

“공동파에서 무공을 익혔소.”

“그러셨군요. 과연 복마의 기운이 느껴지는 무공이었습니다. 훗날 마교를 칠 때 부단주님의 활약이 매우 기대됩니다.”

느닷없이 이서휘가 칭찬하자 어리둥절한 정이강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검법의 이름은 모르겠으나 마교의 고수들이 펼치는 무공을 제압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무공 같았습니다.”

“허, 그렇소이까? 아직 고강한 마교의 고수와 겨뤄본 적은 없어서 위력을 확인하진 못했소. 어쨌든 참고하리다.”

정이강과 이서휘가 눈을 마주치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휘가 말했다.

“살펴 가십시오. 그럼.”

“또 뵙겠소.”

정이강은 발걸음을 돌리면서 패배했다는 굴욕감 대신에 이서휘가 자신의 검법의 용도를 정확하게 알아맞췄다는 점에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말하는 게 어찌 우리 사조님이 현풍서검을 설명할 때와 비슷할까.’

어쨌든 두 사람도 이 험난한 세상을 백도(白道)라는 이름하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남자들이었다.

이서휘도 정이강의 태도에 제검단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을 빠르게 지워버렸다.

이서휘도 느낀 바가 많았다.

무언가 고치기 어려운 관습과 괜한 고집, 실력에 비해 터무니없는 자부심으로 뭉쳐 있는 백도맹이다. 더군다나 막연하게 군림맹을 아래로 여기는 작태를 이서휘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 않은가.

이서휘가 활약할수록 군림맹은 얕잡아 보이지 않을 것이며.

백도맹의 거만한 몇 명은 생각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이후 군림과 백도가 어떤 방식으로든 힘을 합치게 된다면 이서휘의 백도맹 도전이 그리 나쁘게 작용하진 않을 터였다.

‘진정한 강자로 평가 받는 자, 그 한 명만 꺾어도 충분하다. 부단주 급은 부족해.’

단향객잔으로 들어가려던 이서휘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먼지를 일으키면서 다가오는 자들을 향해 한마디씩 내뱉었다.

“오늘 무슨 날이오?”

“또 깨지러 오는가?”

“오려면 한꺼번에 좀 오지.”

“거 참 성질들은 대단하네.”

제검단이 물러난 곳에 어쩐지 담가막의 말을 듣고 눌러 앉아 있어야 할 숭무단(崇武團)과 집법단(執法團)의 고수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여기서 이러면 좀 알려지려나?”

“딱히……. 백도맹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이서휘가 문득 귀찮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뒤편에서 누군가가 숭무단과 집법단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숭무, 집법은 거기 멈춰라.”

몰려오던 숭무단과 집법단이 동시에 멈추더니 그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이서휘는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갑게 말했다.

“담 단주님, 오셨습니까?”

백협단주 담가막은 급히 달려온 기색이 역력했다.

담가막이 이서휘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숭무단과 집법단을 살펴봤다. 단주들이 직접 나선 곳은 없었기에 담가막이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말했다.

“돌아들 가라.”

“네?”

대뜸 돌아가라 이르자 숭무단과 집법단의 무인들의 얼굴에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 서렸다. 하지만 담가막에게 대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작대의 임무를 주로 수행하는 백협단이다. 숭무단과 집법단보다 수는 적었으나 백도맹에서 무시 못할 위세를 지니고 있는데다가 담가막의 평판도 매우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말이라도 꺼내봐야 할 터. 숭무단의 누군가가 담가막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담 단주님, 여기 군림맹의 대주가 도전했다 하여 저희도 단주님의 허락을 받고 오는 길입니다.”

그 말에 담가막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방금 돌아간 제검단과 길이 어긋났나?”

“아니요? 봤습니다만.”

담가막이 이서휘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승부는 어찌 되었나?”

그 말에 도삼이 대꾸했다.

“정이강 부단주님이라 들었습니다. 이 대주님에게 패해 돌아갔습니다.”

“들었나? 그럼 일단 정이강 부단주보다 강한 자만 남고 돌아들 가게.”

담가막의 말에 바로 걸음을 돌리는 자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정이강보다 강한 자도 없는 눈치였다. 엇비슷한 자들이 섞여 있었으나 정이강이 패했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

담가막이 혀를 차며 말했다.

“답답한 녀석들, 이 대주.”

“네, 단주님.”

이서휘가 대꾸하자 담가막이 한숨을 쉬며 단향객잔으로 들어갔다.

“술이나 한 잔 하세.”

“그러시죠.”

이서휘가 일행들에게 단향객잔으로 들어가라 이른 다음에 몰려온 집법단과 숭무단의 무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내일 뵙겠소.”

이서휘까지 단향객잔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숭무단과 집법단이 웅성거렸다.

“정이강이 패했다고? 전혀 그런 얼굴이 아니던데?”

“정이강이 네 친구냐?”

“아, 죄송합니다.”

숭무단의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정이강이 이겼다면 우리와 스쳐 지나갈 때 분명히 누군가가 자랑을 늘어놓았을 텐데 이것들이 히죽 웃기만 했었지.”

“단주님에겐 뭐라 하지요?”

“뭘 뭐라 하느냐? 담 단주님이 돌아들 가라고 한 것인데. 가자.”

숭무단이 먼저 발걸음을 돌리더니 백도맹으로 사라지고, 집법단은 닭 쫓던 개처럼 잠시 남아서 단향객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갔다.

단향객잔 안에서는 담가막이 한숨을 짓고 있었다.

“승룡회가 무례를 저질렀나본데 내가 대신 사과하지.”

이서휘가 히죽 웃으며 담가막의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긴. 뭐 자네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네. 군림맹이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지. 그래. 누굴 꺾어야 마음 편하게 돌아가겠는가?”

그 말에 이서휘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누가 강한지도 잘 모릅니다. 막연하게…….”

“막연하게.”

“그래도 조금은 상징적인 고수와 우열을 가려보고 싶습니다만.”

담가막은 이서휘가 마교의 수호사왕에게 덤비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주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담가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일 무당파(武當派)의 고수와 비무를 주선하겠네. 이기든 지든 그 선에서 끝내주게. 개인적인 바람이야.”

“유명합니까?”

이서휘의 말에 담가막이 피식 웃었다.

“아직은 자네보다는 유명하지. 적어도 이 백도맹 세력 내에서는 말이야.”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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