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32화 (32/43)

<3장. 격차(隔差)>

백룡지회가 시작됐다.

도이, 도삼, 단우혁, 백류혼이 백룡지회 예선에 참가하는 와중에 이서휘는 홀로 떨어져 나와 백도맹을 둘러봤다.

꽤 비싼 참가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참가자가 많았다. 더군다나 참가자와 함께 온 사람들까지 백도맹에 몰려드니 백도맹의 외성(外城)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내성(內城)이라 부르는 곳엔 주요 조직의 건물이 밀집되어 있었는데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숭무문(崇武門)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외성(外城)에 마련된 예선 비무장에서 백룡지회를 치르고 있었다.

백도맹의 구조는 마치 일국(一國)의 성(城)처럼 되어 있었으나 차마 성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담벼락의 높이가 모두 낮았다. 구경을 하던 혹자는 황실을 의식해서 그런 것이라는 말도 했지만 이서휘가 보기엔 오히려 백도맹의 고집과 자신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낮은 담장으로 외곽을 둘러놓은 것은 백도맹이 자신감을 표출하는 것이라 느꼈던 것.

이서휘는 백도맹의 전경을 살펴보면서 자연스럽게 군림맹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예선 비무대만 해도 총 아홉 곳이었다.

여기저기서 고함을 지르고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서휘는 신경 쓰지 않고 홀로 백도맹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잠시 백도맹의 전경을 살피던 이서휘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요새처럼 꾸며진 백도맹이다. 황성에는 미칠 바가 아니겠지만 발길이 닫는 곳마다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 빼곡했다. 처음에는 공들여 지은 건축물마다 웅장한 느낌이 들어 대단하다 여겼지만 잠시 더 살펴보자 이서휘의 눈에는 백도맹의 허세가 대단하다 여길 수밖에 없었다.

‘유지하는 돈이 엄청나게 들겠군.’

백도맹에 비하면 군림맹은 그야말로 황량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대부분 실무를 위해 만들어진 건물 아니면 연무장이 전부였을 정도니까.

반면에 백도맹은 곳곳에 교량(橋梁)과 연못은 물론이고 넓은 호수에다가 심지어 말을 달릴 수 있게 닦은 마도(馬道)가 따로 있었다.

외성이라는 곳만 돌아봐도 이 정도였으니 내성이라는 곳은 더 대단한 위용을 갖추고 있을 터. 둘러보던 이서휘가 감탄사를 섞어가며 굳게 닫혀 있는 숭무문을 바라봤다.

‘기가 차는군. 고작 십 수 년 후에 이런 성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단 말인가?’

이서휘가 지난 생애에 이끌고 있던 낭혼련(浪魂聯)을 다 끌고 와도 지금의 백도맹을 쓰러뜨리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서휘가 숭무문을 바라보고 있자, 숭무문으로 들어가려던 누군가가 이서휘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이 대주, 여기 있었구만.”

고개를 돌린 이서휘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담 단주님.”

백도맹의 백협단주인 담가막(潭嘉嗼)이 수하들과 함께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가막이 웃으면서 말했다.

“왔으면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나?”

“바쁘실 것 같아서요. 부상은 어떠십니까?”

“덕분에 많이 회복했네.”

하지만 이서휘가 담가막의 안색을 살펴보니, 낯빛이 썩 좋지 않았다. 백도맹 분타에서 마가와 겨룰 때 입은 부상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담가막이 숭무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백룡지회가 끝날 때까지 외부 사람들은 숭무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됐네. 숙소를 어디로 잡았나?”

“단향객잔(丹響客棧)에 잡았습니다.”

“그럼 내가 백룡지회가 끝나면 한 번 찾아가겠네. 일이 있어 먼저 갈 테니 또 보세나.”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담가막의 수하들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물었다.

“백룡지회 참가자로 보이는데 왜 저기서 어슬렁거릴까요?”

“아는 분입니까?”

수하들의 질문에 담가막이 대꾸했다.

“군림맹의 이서휘 대주라 한다. 백룡지회에 참가할 수준이 아니야.”

담가막의 말에 누군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말했다.

“하이고 군림맹이 날이 갈수록 말이 아니군요. 대주라는 작자가 백룡지회에도 참가하지 못할 수준이라니……. 쯧쯧.”

그 말에 담가막이 걸음을 멈추더니 한숨을 내쉬며 십여 명의 수하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담가막이 말없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수하들이 눈을 껌벅이며 되물었다.

“왜요? 제가 뭐 틀린 말이라도…….”

그 말에 담가막이 떫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너희 전원이 덤벼도 이 대주에게 못 당할 거다. 백룡지회에 참가할 수준이 아니라고. 이것들이 요새 왜 이렇게 이해력이 낮아졌지? 뭐 잘 못 먹었어?”

담가막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걸음을 옮기더니 계속 중얼거리면서 수하들을 질책했다.

“이상해.”

“단주님, 농담하지 마십시오. 저 새파란 대주는 저 혼자 겨뤄도…….”

담가막이 계속 고개를 갸웃하면서 수하에게 말했다.

“하여간 이상해. 아!”

“왜 그러십니까?”

담가막이 갑자기 인상을 쓰면서 이서휘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저 친구……. 설마……?”

“설마 왜요? 그렇죠? 잘못 보신 거죠?”

그 말에 담가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백룡지회 우승자가 나오면 그때 무대 위에 오를 생각인가 보군. 이 대주의 무위는 그때 구경하여라. 다들…….”

수하 몇 명은 침음을 흘렸고 몇 명은 농담이 심하다는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

“단주님이 요새 좀 이상하셔.”

“그러게 말일세. 가세나.”

“말이 됩니까? 저런 청년이……. 우승자 이후의 비무에 나서게요?”

담가막은 수하들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이서휘는 한 바퀴를 천천히 돌면서 구경하다가 저절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외곽 비무대에서 매잠파(梅岑派)의 여인과 도이가 겨루고 있었기 때문.

“어?”

본래 도이와 도삼은 사패들 때문에 결승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관심을 끊었던 이서휘다. 그러나 매잠파의 여인과 맞붙고 있는 모습을 보자,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이서휘도 여인의 이름이 생각났다.

‘매잠파 능설현(能偰炫)이라 했던가?’

이서휘는 몰랐으나 능설현은 이 자리에 오지 않은 매잠파 장문인의 직전제자이자 대사저였다.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자, 매잠파의 어느 여인이 길을 물어보던 이서휘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장강 이남 남자들의 수법이 다 저렇지.”

이서휘는 그 소리에 눈을 몇 번 껌벅이다가 다시 무대를 바라봤다.

능설현이 펼치는 매잠파의 초식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더군다나 아름다운 여인이 단아한 멋이 살아있는 백의무복을 입고 연검(軟劍)을 휘두르자 점점 다른 무대를 바라보고 있던 구경꾼들이 이쪽으로 모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도이는 얼굴에 땀을 가득 흘릴 정도로 능설현에게 고전을 하고 있었다.

지켜보던 이서휘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도이에게 말했다.

“침착해라. 뭐 하는 것이냐?”

도이는 이서휘의 말에 오히려 더 화들짝 놀라면서 자세를 바로잡아 능설현의 검을 튕겨냈다.

또다시 도이와 능설현이 맞붙었다.

챙챙채앵!

이서휘가 잠시 살펴보자, 도이는 결정적인 수를 내밀 때마다 망설이고 있었다. 그간 살수(殺手)의 무공을 펼치는 것에만 익숙했지, 이런 비무에서 이기는 방법은 전혀 몰랐던 것. 도이에겐 어느 정도 상대의 부상을 염려해야 하는 비무라는 것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지켜보던 이서휘가 답답한 마음에 탄성을 내질렀다.

“하아…….”

이서휘도 바라보다 보니 도이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붙잡는 기회마다, 능설현의 목이나 가슴을 찌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일격에 능설현의 목숨을 뺏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도이가 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융통성이 전혀 없는 대처랄까. 그런데 그런 기회를 놓치자, 오히려 도이가 능설현에게 밀리고 있었다. 장기전으로 가자 능설현의 굳건한 검법에 도이가 점점 수세에 몰렸던 것.

지켜보던 이서휘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멍청한 놈이……. 손잡이로 공격하면 될 게 아니냐?”

도이는 실로 멍청한 면이 있었다. 여태까지 비수로 찌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능설현에게 밀렸던 것. 이서휘의 말을 듣자마자 도이가 ‘아하!’ 소리를 내뱉더니 쌍비수로 연달아 능설현의 검을 튕겨냈다.

챙챙챙챙챙!

“어어?”

구경하던 자들이 갑자기 탄성을 내지를 정도로 도이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었다. 능설현이 다치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도이의 움직임이 다시 되살아났던 것.

도이가 갑자기 거세게 반격을 펼치자 이를 악물고 막아내던 능설현이 풍연화양(風軟花敭)이란 초식으로 내공을 주입해 연검의 궤적을 기이하게 꺾었다.

파르륵 소리가 나더니 연검(軟劍)의 끝이 순식간에 네다섯 개로 늘어난 것처럼 보이면서 도이의 요혈을 노렸다.

도이의 눈이 번뜩이더니 쌍비수를 짧게 끊어 치면서 능설현의 풍연화양을 모조리 튕겨냈다.

챙챙챙챙챙!

그 순간에 도이는 능설현의 상체가 내공이 부족해 앞으로 기운 것을 보고 매번 이서휘에게 당했던 수법을 몸으로 기억해낸 도이가 이서휘의 보법을 흉내 내면서 능설현의 무릎을 툭 찼다.

능설현이 매잠파의 대사저답지 않게 화들짝 놀라며 묘한 소리를 내뱉었다.

“아이코……!”

이서휘가 웃음을 참으며 바라봤다.

‘아이코라니…….’

능설현이 기어코 균형을 잡더니 오른발을 땅에 찍으면서 순식간에 신형을 한 바퀴 돌아서 멀찍이 물러났다. 한데 그 사이에 능설현을 과감하게 따라간 도이가 좌비수를 던졌다.

휘익―!

채앵―!

능설현이 비수를 튕겨내자 불쑥 다가간 도이가 능설현의 팔을 잡아당겼다가 순식간에 비수를 거꾸로 쥐고 능설현의 이마를 내려쳤다.

“헉!”

좌중이 깜짝 놀라는 가운데 도이의 비수가 능설현의 이마 바로 위에서 겨우 멈췄다.

깜짝 놀란 것은 도이도 마찬가지.

도이가 저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이코……. 미안하오.”

구경꾼들은 아무래도 대부분 능설현의 편이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묘하게 휴우우―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매잠파의 여인들이 능설현을 부르면서 무대 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저! 괜찮으세요?”

“괜찮아.”

“와, 열 받네. 보셨죠? 그 벽천회 왔냐며 물어보던 사람이잖아요!”

“어? 맞네. 쌍검 차고 있던 무뢰한(無賴漢)이네!”

능설현이 주저앉아서 독기를 품은 눈으로 몇 마디 훈수로 전세를 역전하게 만든 이서휘를 노려봤다. 누군가가 능설현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을 내뱉었다.

“아, 재수 없어.”

도이가 비수를 주워 무대에서 내려오자 매잠파를 비롯해 구경하던 자들이 대부분 도이와 이서휘를 번갈아보며 노려보고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버럭 성을 냈다.

“비무 중에 훈계를 하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도이마저 갑자기 이서휘에게 갑자기 버럭 하며 성을 냈다.

“아아아! 대주, 여기 분위기가 너무 이상하잖아!”

“뭐가?”

“아니……. 비무인데 다치게 하진 말라 그러고. 이게 무슨 말이야 대체.”

“되도록 부상을 입지 않게 서로 배려하라는 것이지. 이 놈아……. 무공의 높고 낮음만 겨루면 되는데 어찌 그렇게 사람을…….”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도중에 구경꾼들의 시선이 싸늘하게 변하면서 정적이 감돌았다.

이서휘가 쩝 소리를 내면서 도이에게 눈짓을 했다.

두 사람이 발걸음을 빠르게 하면서 외곽 비무대를 빠져나왔다.

도이가 또다시 버럭 성을 냈다.

“좀 그런 건 미리 알려줬어야지!”

“경험이라 생각해라. 잘해놓고 왜 나한테 성질을 부리는 게야. 이제 알았으니 됐잖아.”

“아무리 봐도 내가 익힌 무공과 이런 비무는 어울리지 않아.”

그 말에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건 맞는 말이다.”

이서휘도 지난날 익힌 무공이 비무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었으니까.

더군다나 도이와 도삼은 이서휘를 만나기 전까지는 살수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그야말로 누군가를 불시에 기습하여 죽이기 위한 무공을 익힌 터라 비무를 펼칠 때는 부적합한 면이 많았다.

이서휘가 말했다.

“몇 번 이긴 것이냐? 규칙은 어떻게 되고.”

“세 번 이기면 본선이라던데. 본선은 조금 이따가.”

“후후, 본선은 진출하는구나. 다들 어디에 있느냐?”

“같이 가봅시다. 관리 막사의 상황판에 있을 것이니.”

“상황판?”

“저 쪽에 있소.”

이서휘가 도이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삼연승 본선진출’ 방식은 어느 정도 운이 따라야 했다. 그런데 도이에게 듣고 보니 이서휘는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도이와 도삼을 얕잡아보는 자들이 많아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던 것. 결국 가장 먼저 올라온 세 명을 꺾었다는 게 도이의 설명이었다.

도이가 성난 얼굴로 말했다.

“단 공자와 백 공자는 비무를 한 번 밖에 안 한 것 같소.”

“어째서? 세 번이라며.”

“한 번 이겼더니 도전하는 자들이 없더군.”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너랑 도삼은 사람들이 우르르 올라왔고?”

“이 백도 새끼들 짜증이……. 이미 청협문과 백검문의 소문주라는 게 다 퍼진 모양이오. 나도 진짜 도삼이랑 문파나 하나 만들어야겠소. 도적파(盜賊派)나 만들지 뭐. 더러워서 못 살겠네.”

“후후후.”

백도맹에 몰려든 후기지수들도 단우혁과 백류혼에게 격차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서휘와 도이가 상황판을 보러 가자, 마침 동료들도 상황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이 대주, 구경은 잘하고 왔느냐?”

“내성으로 못 들어가게 해서 외성만 잠시 돌아봤다.”

“별 거 없었고?”

“없더군.”

이서휘가 상황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화산 이재곤(李才滾), 무당 손빈(孫臏)은 뭔가? 예선 비무도 안 치렀단 말인가? 맨 위에 이름이 올라가 있군.”

백류혼이 대꾸했다.

“뭐 지난 대회 사강(四强)은 그냥 올렸다더군. 곤륜의 구범천은 참가를 못했고…….”

사강 중 나머지 한 명은 우승을 해서 백룡회에 들어갔고, 곤륜의 구범천은 단우혁에게 부상을 입어 아예 참가를 포기한 모양이었다. 단우혁이 이재곤과 손빈의 이름을 보며 말했다.

“백도맹, 제멋대로군.”

고개를 끄덕이며 살펴보던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통과자가 생각보다 많진 않네?”

“두 번 이기고 패한 자들이 많으니 어쩔 수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이름 옆에 가끔씩 ‘도전자가 나오지 않아 본선으로 올림’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서휘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고수들이 제법 많은가보군. 방심하진 말게.”

한데, 이서휘가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살피기 시작하자 이서휘를 본선 진출자라 생각한 다른 참가자들이 이서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기 싸움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서휘는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사람들을 훑어봤다.

어차피 후기지수들은 이서휘와 아득한 실력 차이가 난다. 우승 후보인 단우혁과 백류혼도 이서휘에 비하면 격차가 제법 나는 형국이라서 이서휘는 노려보는 자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마도의 인물이 섞여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 참가자들의 얼굴을 신경 써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서휘와 눈이 마주친 어느 청년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이서휘가 바라보자 그 자가 다시 손가락을 들어 이서휘를 가리키며 말했다.

“쌍검(雙劍)?”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쌍검이오.”

그 말에 남자가 씨익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남자의 등에는 모양이 괴상한 쌍겸(雙鎌, 낫)이 매달려 있었다. 쌍겸을 내보이던 사내가 주변 사람들이 다 듣도록 백도맹을 빈정거렸다.

“우리 말고도 사마외도로 취급당할 자들이 또 있었군. 든든한 걸?”

“하하하하.”

잿빛 무복을 맞춰 입고 있는 청년의 일행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리는 문파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가(魔家)는 아닌 것 같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문파가 이서휘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리자 단우혁과 백류혼도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단우혁이 대뜸 인상을 그으며 말했다.

“이것들이 쳐 웃기는…….”

백류혼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낙양(洛陽)의 북망파(北邙派)로군.”

백류혼이라는 인간 자체가 본래 남을 깔보는 데 특화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저 백류혼이 입가에 조소를 띄우고 바라보자 북망파 전체가 대번에 불쾌한 낯빛으로 바뀌었다.

북망파(北邙派).

백류혼의 말대로 낙양(洛陽)에서 위세를 과시하는 문파였는데 훗날에는 정사지간 세력으로 변질되는 세력이었다. 북망파를 구성하는 자들은 특이하게도 대부분 묘지기였다. 북망산은 역대 제왕과 명사들의 무덤이 많은 곳이라 자연스럽게 묘지기들이 세를 이뤘는데, 무덤과 관련된 각종 이권을 장악한 터라 낙양에서는 제법 위세가 대단했던 것. 더군다나 북망파의 무공 실력도 얕잡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대략 사오십 년 전, 어느 무림인이 탈취하려던 무덤 속의 무공비급을 북망파가 다시 회수한 이후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위세가 대단해지고 있는 문파였다.

이서휘도 전생의 북망파를 기억해내고 미소를 지었다.

‘백도맹과 껄끄러운 관계를 맺게 되는 그 북망파로구나. 이야기만 들었었는데 이제 보니 그럴만한 녀석들이었군.’

따지고 보면 도둑을 막다가 조직화되어 결성된 문파였으니, 도이와 도삼에겐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북망파의 청년이 이서휘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쪽은 본선에 통과한 자가 몇 명이오?”

단우혁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네 명.”

“그러신가? 잘 됐군. 본선 비무는 우리랑 합시다. 우린 다섯이나 통과했는데 한 명을 제외하고 네 명이 동시에 나서서 겨루면 되겠군. 어떻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서휘가 히죽 웃으며 백류혼에게 물었다.

“저런 규칙도 가능한가?”

“뭐 어려울 거 있겠나? 감독관이 결정할 문제지. 그러나 저 자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지난 대회부터 단체전을 했던 모양이야.”

백류혼이 날카롭게 지적하자 북망파의 누군가가 대꾸했다.

“왜? 겁이 나시나? 백검문의 소문주?”

그 말에 백류혼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날 아는가?”

“백검문에 탕아(蕩兒)가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지.”

백류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대로 알고 있군.”

이미 겨루기로 결정한 것처럼 백류혼, 단우혁, 도이, 도삼이 북망파의 고수들을 바라봤다.

백류혼과 단우혁은 북망파의 도발에도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고, 도이와 도삼은 북망파가 뭐하는 놈들인지도 자세히 모르면서 어쩐지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본질적으로 무언가 기질이 맞지 않는 놈들이라는 것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단우혁이 북망파 전체를 도발했다.

“북망파는 본선 진출자가 다섯이라 했는가?”

“귀가 먹으셨소?”

단우혁이 손가락으로 귀를 한 번 후비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는 네 명이 나갈 테니 그쪽은 다섯이 나오시오. 그래야 본선 진행도 빠르고 좋지 않겠소?”

“어이 대도(大刀)……. 북망파를 우습게 보는군. 그러다 낭패를 본 친구들이 제법 많아.”

뜬금없이 도이와 도삼도 단우혁에게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그걸 왜 단 공자가 정합니까! 그냥 네 명씩 겨루면 되는 것을!”

“하여간 이 대주랑 어울리더니 몹쓸 사람 다 됐네.”

그 말에 백류혼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북망파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나도 다섯이 나오라고 할 예정이었다.”

그 말을 들은 도이, 도삼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도이가 이서휘, 단우혁, 백류혼을 바라보며 말했다.

“셋이 왜 친구인지 알겠다. 진짜 대단한 사람들이야.”

그 말에 도삼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도이를 바라봤다.

“형, 요새 말 좀 늘었다?”

도이가 대꾸를 못 하고 잠시 눈을 껌벅이다가 생각에 잠긴 척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다. 평정심을 되찾아야 하는데……. 이게 다 이서휘……. 아니, 이 대주 때문이지.”

어쨌든 단우혁과 백류혼의 말에 북망파의 표정이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그런데 상황판에 진출자를 적던 감독관 한 명이 이 작태를 다 구경한 모양이었다.

“이보게. 자네들 정말 단체전에 다들 동의하는가? 괜찮다면 첫 시합을 자네들의 단체전으로 배정하겠네. 패하는 쪽은 전원 탈락일세. 그리고 수가 맞지 않으면 진행할 수 없네. 네 명씩 나서게.”

감독관의 말에 도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거, 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백 번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감독관의 말에 백류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주십시오.”

“좋아. 북망파는 어떠한가?”

감독관의 말에 북망파도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일입니다.”

삼십 중반의 감독관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알겠네. 보통 단체전을 하면 다치는 사람들이 많더군. 부상자에게 추가로 위해를 가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실격 처리를 하고 있네. 참고하게.”

북망파의 누군가가 말했다.

“흐흥! 뭐, 살살하면 되겠지. 안 그런가?”

그 말에 그때까지 아무 말 않고 있던 북망파 일행의 우두머리가 싸늘한 말투로 대꾸했다.

“다들 입 다물어라.”

“네, 사형.”

사형이라는 사람의 말 한 마디에 북망파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 ☆ ☆

이서휘는 네 사람이 비무대에 오르기 전에 잔소리를 늘어 놓았다.

“다들 알겠지만 비무 도중에 흥분했다고 사람 죽이고 그러면 안 된다.”

이서휘의 말에 도이가 대꾸했다.

“뭐라는 거야? 군림맹의 살인검(殺人劍)이…….”

도이의 막말에 나머지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서휘가 쩝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말이 그게 뭐냐? 마도(魔道)를 상대할 때만 자비를 베풀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나저나 도삼은 북망파의 고수들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뭐 저희 형제는 단 공자님과 백 공자님만 믿겠습니다. 그럼 전략은?”

도삼의 말에 단우혁이 코웃음을 쳤다.

“전략 따위가 필요한가? 저런 놈들 상대하는데……. 저 사형이라 불린 놈이 가장 강해보이니 내가 맡겠다.”

“역시 우리 단 공자님, 든든합니다.”

도삼이 믿음직스럽게 단우혁을 바라보자, 단우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아무래도 전생에 간신배였을 것이다.”

“허, 그런 섭섭한 말씀을…….”

단우혁의 말에 코웃음을 치던 백류혼이 북망파의 무공을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참고해라. 북망파의 무공은 엄밀히 따지면 정도(正道)라 볼 수 없다. 도망가는 자들을 잡기 위해 쇠사슬이 달려 있는 무기도 거리낌 없이 쓴다. 그리고 대부분 검보다는 겸(鎌, 낫)을 선호한다. 부딪칠 때마가 병기가 끌려가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지. 그리고 겸과 부딪치는 와중에 쇠사슬의 움직임도 살펴야 하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비무 도중에는 까먹을 수가 있을 것이다. 특히 도이는 유념해라.”

백류혼이 예리하게 지적하자 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휘 일행이 북망파를 바라보자 백류혼의 말대로 쇠사슬 끝에 추가 달려 있는 사슬낫을 쓰는 자들이 섞여 있었다.

백류혼이 말을 이었다.

“북망파는 본래 도굴꾼을 잡으면서 무공을 발전시킨 문파다. 너희 형제와는 상극(相剋)이라 할 수 있지. 무서우면 비무대 끝에 서 있어라. 우혁이와 내가 상대할 테니.”

도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런 잘난 척은 이 대주 한 명이면 족해.”

“그러게 말입니다. 도이 형! 그냥 우리 둘이서 넷을 상대합시다.”

도삼이 그야말로 호기롭게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늘어놓자, 도이가 정색하며 대꾸했다.

“미친놈이……. 그걸 말이라고.”

북망파를 살펴보던 이서휘가 네 사람에게 말했다.

“시끄럽다. 자, 저기 두건을 쓴 자가 우두머리 같다.”

이서휘가 두건을 쓰고 있는 사내를 가리켰다. 도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쌍겸(雙鎌)을 들고 있군요.”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연스럽게 전략을 설명해줬다.

“저 자는 얕잡아 볼 상대가 아니다. 살펴보니 저들은 도이와 도삼을 먼저 공격하고, 힘을 합쳐 단우혁과 백류혼을 합공으로 쓰러트리는 전법으로 나올 것 같다.”

“흘낏 보고 어찌 그렇게 잘 아시오?”

도이가 되묻자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병기 구성이 단체전에 특화되어 있다. 예선 때와 마찬가지로 도이와 도삼, 너희 둘을 얕잡아 보고 시비를 건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 우혁이와 류혼이가 우승 후보라는 것은 저들도 이미 알고 있어. 두 사람을 합공으로 쓰러뜨리기 위해 일부러 도발한 것이야. 본래부터 단체전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겠지.”

이서휘는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북망파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 말에 도이가 진지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우리 대주는 똑똑해. 대주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류혼이와 우혁이는 각자 알아서 하고. 너희 둘은 떨어지지 말고 날 상대할 때처럼 붙어 다니면서 합공을 펼쳐라. 어느 순간 북망파 전원이 너희를 공격할 텐데 그때는 류혼이와 우혁이가 알아서 도와줄 것이다.”

이서휘가 정확하게 맥을 짚자 매번 농담을 하던 단우혁과 백류혼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삼이 홀로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본선을 치르는 비무대가 네 곳으로 줄었지만 그래도 겨뤄야 할 사람이 많았다. 단체전을 승낙한 감독관을 따라 비무대로 이동하자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고 있었다. 이서휘 일행과 북망파가 무대 위에 올라 대치하는 와중에 이서휘는 팔짱을 낀 채로 무대와 구경하는 자들을 번갈아 살펴보고 있었다.

☆ ☆ ☆

단우혁이 대도를 휘두르면서 개전을 알렸다. 순식간에 청룡도에 휘감겨 있던 도풍(刀風)이 비무대 위를 뒤덮었다.

단우혁은 예고했던 대로 북망파의 우두머리에게 무작정 달려들었다. 한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류혼이 우측에 절묘하게 백화만개(白花滿開)를 뿌렸다.

좌라라라락―

비무대 위에 갑자기 백화 모양의 기이한 빛 무리가 휘날리자 북망파가 쇠사슬을 돌리면서 시야를 확보했다.

이어서 백류혼이 백연검을 쥐고 훌쩍 뛰어 들었다.

챙챙챙챙챙!

이서휘의 말을 들은 단우혁과 백류혼이 먼저 선공을 펼치자 도이, 도삼은 이서휘의 말대로 뭉쳐 다니면서 가장 약해 보이는 한 놈을 골라 쌍비수와 직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로써 순식간에 단우혁과 백류혼이 세 명을 상대하고, 도이와 도삼이 한 명을 합공하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조언을 했던 이서휘마저 감탄할 수밖에 없는 빠른 대처였다.

‘생각보다 네 사람의 합이 좋네.’

순식간에 여덟 명의 진출자들이 비무대 위에서 먼지와 바람을 일으키면서 정신없이 맞붙기 시작했다.

비무는 다른 무대에서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이서휘는 동료들의 움직임이 경쾌한 것을 보고 별 걱정을 하지 않은 채로 다른 비무대를 바라봤다.

화산파 이재곤(李才滾), 무당파 손빈(孫臏)이 누군가와 겨루고 있었는데 그곳에 구경꾼들이 가장 많았다.

이서휘는 두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나 워낙 화산파와 무당파의 복장이 특이한지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들은 지난 대회의 사강(四强) 자격으로 진출한 터라, 각각의 무대에서 첫 시합을 치르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본선이 시작되자 구경하는 자들이 더 많아졌다. 굳게 닫혀 있던 숭무문이 열리면서 백도맹의 중진들이 후기지수들의 비무를 구경하기 위해 하나둘 몰려오고 있었다.

저마다 얼굴에 묘한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백도맹에 몰린 무림인들을 보면서 잠시 상념에 잠겼다.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은 누구일까?

이서휘는 천하에 숨어 있는 고수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에 오히려 섣불리 단정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비무대를 바라보고 백도맹에 몰려든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마치 천하제일은 이 백도맹에 있는 게 당연하다는 모습들이었다.

저마다 언젠가는 백도맹에서 이름을 날려 천하제일이 되고야 말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으리라.

하지만 이서휘는 생각이 달랐다.

천하제일은 이런 비무 몇 번으로 가려지지 않는다. 천하제일은 말 그대로 천하가 인정하는 일인자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지난날 이서휘가 목군자(木君子) 진금구(秦金甌)와 나눴던 대화가 천하제일에 대한 이서휘의 생각이었다.

[천하제일이 있고 그 천하제일을 꺾지 못하는 고수들이 있을 뿐이라고…….]

때문에 이서휘는 이런 곳에서 서열을 나누고 정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못했다. 스스로 아직은 천하제일에 반열에 오르기엔 부족하다 여겼기 때문.

그러나 분위기는 점점 과열되고 있었다. 후기지수 비무가 끝나고 맹주에게 도전하려는 고수들이 이서휘의 눈에 빤히 보이고 있었다.

검성이 죽은 이후로 마치 천하제일인 자리가 공석이 된 것처럼 느끼는 모양이었다.

상념에 빠졌던 이서휘는 문득 네 번째 무대에 오른 후기지수 한 명을 유심히 바라봤다. 흰색 바탕에 검붉은 용이 수놓인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의 오른쪽 눈가엔 검흔(劍痕)이 길게 새겨진 사내였다.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무대에 오르자마자 다른 진출자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십여 초나 겨뤘을까?

격차가 너무 컸다.

검흔 사내는 상대의 검을 후려치더니 왼손을 내밀어 멱살을 쥔 다음에 더 겨루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처럼 무대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내공이 제법 높았는지 검흔 사내의 상대는 그대로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이서휘가 사내를 살펴보면서 생각했다.

‘제법이네. 누굴까?’

사내가 아무 말 없이 무대를 내려가자 감독관 한 명이 사내의 승리를 선언했다.

“천무궁(泉懋穹) 승리.”

“천무궁?”

이서휘는 사내의 얼굴이 묘하게 뇌리에 남았다. 백룡지회를 구경한 이후로 가장 인상적인 사내라 할 수 있었다. 이서휘는 천무궁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면서 다시 단우혁이 겨루는 무대로 돌아와 구경했다.

그 사이에 도삼과 북망파의 참가자 한 명이 부상을 입고 무대 외곽에 서있었다.

“어?”

이서휘가 입모양으로 ‘괜찮으냐?’라고 물으니 도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이 깊진 않은 모양이었다.

비무대에선 여섯 명이 겨루고 있었다.

백류혼과 단우혁이 있는데도 이렇게 버티는 것을 보면 북망파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 듯 했다. 하지만 북망파는 전원이 부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북망파 고수들이 이를 악물고 덤비자, 단우혁이 기합을 내지르면서 북망파를 향해 대도파랑(大刀波浪)을 쏟아냈다.

쐐애애애앵―!

북망파의 참가자들이 병기를 들어 대도파랑을 막아내자, 거의 동시에 백류혼이 북망파 참가자들의 발밑에 검풍(劍風)을 교묘하게 뿌렸다.

마무리는 도이의 몫이었다. 사슬낫을 쥐고 있던 북망파 고수를 발로 차서 무대 바깥으로 날려버리고, 다른 자를 쌍비수를 휘둘러 퍽퍽! 소리를 내면서 비수의 끝으로 뒤통수와 어깨를 찍었다.

“크윽!”

그 순간, 북망파의 우두머리가 그야말로 살기를 머금은 출수를 펼쳤다. 낫 한 자루가 바람을 가르면서 도이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던 것.

그때, 백류혼의 백연검이 번쩍 하고 빛을 내뿜었다. 백류혼이 구사하는 검기 중 섬광살(閃光殺)이라 불리는 살초였다.

츠읏― 하는 기이한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백류혼이 상대를 죽이면 백룡지회에서 떨어지리라 판단했던 것. 하지만 다행히 백류혼의 섬광살은 엄청난 속도로 뻗어나가 낫을 날려버렸다.

이어서 단우혁이 순식간에 다가와 좌장을 내지르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북망파의 고수가 무대 바깥으로 날아갔다.

지켜보던 이서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할 정도로 긴박한 순간이었다.

“휴우…….”

네 사람이 무대에서 내려오자 이서휘는 도삼의 부상부터 살폈다. 직도를 쥐던 오른손의 손아귀가 찢겨 있고, 허벅지도 사슬낫에 베여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넌 여기까지만 해라. 많이 안 다친 게 다행이다. 상황판 쪽에 의료 막사가 있으니 가봐라.”

“네, 봤습니다. 아이고, 아쉽네요.”

“어서 가서 지혈부터 해.”

“알겠습니다.”

이서휘가 도이를 바라보자, 도이는 동생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대주, 나도 여기까지. 아까 저놈들 죽일 뻔 했소.”

이서휘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가서 도삼 좀 살펴봐라.”

“알겠소.”

도둑 형제가 사라지자 단우혁이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도둑 형제들의 실력이 제법 좋았다. 자네가 가르쳤나?”

“나랑은 가끔 비무만 했을 뿐이야.”

“그래? 실전 경험이 풍부해 보이더군. 정말 싸우는 것이었으면 저렇게 부상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네.”

“과찬이군.”

백류혼도 고개를 끄덕였다.

“북망파가 제법 강했다. 단체전을 괜히 원한 게 아니었네. 자네 말대로 도삼을 자주 노리더군. 하지만 도삼이 부상을 당했을 때 우리의 공격도 모두 적중해 승부가 빨리 기울었네. 도(盜) 형제들에게 미안하군.”

그 말에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나중에 술이나 사라.”

“그러지.”

도삼이 부상을 당했으나, 이서휘는 흡족했다. 무엇보다 단우혁과 백류혼이 도둑 형제들에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제법 활약을 펼친 셈이었다.

‘둘에겐 좋은 경험이 됐을 것이다.’

세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무대 위에서 굉음이 발생했다.

세 사람이 고개를 돌려보니 무당의 손빈이 무대 바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무당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손빈(孫臏)을 일으켰다.

이서휘가 무대 위를 바라보니 바로 조금 전에 다른 진출자를 무대 바깥으로 던져 버렸던 천무궁(泉懋穹)이 서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천무궁이라 하던데 아는 사람 있는가?”

“금시초문이군.”

“나 역시.”

“흐음……. 자네 둘을 제외하면 가장 강해 보이는군.”

반 시진 후에 이서휘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최종 사강에서 다시 천무궁의 이름이 올랐던 것.

준결 대진은 다음과 같았다.

이재곤(李才滾) 대 단우혁.

천무궁(泉懋穹) 대 백류혼.

이재곤 대 단우혁의 대결은 그야말로 백도맹에 파란을 불러왔다. 화산의 이재곤도 대단히 강했으나 비무 도중에 단우혁의 청룡도에 검이 두 번이나 부러졌던 것.

결국에 화산의 누군가가 명검을 빌려주고 나서야 다시 단우혁과 어우러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재곤은 단우혁이 자신의 부상을 염려해 출수를 늦추는 것을 보고 비무 도중에 패배를 시인해 버렸다.

이재곤의 검을 두 번이나 부러뜨렸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를 준 단우혁의 호방함이 백도맹 전체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문제는 천무궁과 백류혼의 대결이었다.

물론 이서휘는 두 사람이 모두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무당의 손빈을 날려버리는 내공의 수준이 겨우 이십 중후반으로 보이는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천무궁은 그야말로 은거고수여서 천무궁에 대한 이름을 아는 자들이 전혀 없었다. 가끔 누군가가 ‘쾌섭도객(快燮刀客)’이라 불린다고 말을 했으나 쾌섭도객이라는 별호마저 어딘가 모르게 낯설고 어색했다.

‘뚱딴지같은 놈이로군.’

‘빠르고 뜨거운 칼’이라면서 비무 도중 여태 칼 한번 꺼내지 않은 채로 진출자들을 격파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이서휘가 천무궁을 상대할 백류혼을 잠시 붙잡았다.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백류혼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무궁을 힐끗 바라봤다. 백류혼도 천무궁의 무위가 대단하다는 것을 눈치 챈 모습이었다. 단우혁마저도 화산의 이재곤을 꺾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천무궁과 무당의 손빈은 그야말로 격차가 제법 컸다.

이재곤과 손빈이 지난 대회 사강(四强)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천무궁의 실력이 지난 사강을 압도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백류혼이 단우혁과 이서휘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

“다녀오겠다.”

백류혼이 백연검을 쥐고 무대 위에 오르자 이서휘는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이서휘를 불렀다.

“이 대주!”

이서휘가 고개를 돌려 보니 백협단주 담가막이었다. 그런데 이서휘는 물론이고 구경하던 대다수의 눈길이 비무대에서 담가막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담가막 뿐만 아니라 장문인들로 보이는 백도맹의 수뇌부들이 담가막의 외침에 걸음을 멈추고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그 중엔 백도맹주도 있었다.

백도맹주 범우(范雨).

이서휘와 전생에 인연이 없었던 백도맹주이자 곤륜파의 전대 장문인.

백도 세력이 무림 서열을 거론할 때 자주 언급하는 천하오절(天下五絶)의 일원이었다.

‘하, 천하오절이라…….’

이서휘는 불쑥 웃음이 났다. 이서휘는 지금 시기쯤에 백도맹주의 자리가 곤륜파에서 화산파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천하오절이라 불리던 자들은 몇 년 간격으로 중진 고수들에게 패해 서서히 ‘명예’를 잃게 된다. 그 이후로는 마치 천하오절이라는 이름이 옛 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무림을 지배했는데, 그 시기에 새롭게 떠오른 강자들이 이서휘를 비롯한 사패들이었다.

담가막이 이서휘를 불렀다.

“이 대주, 와서 맹주님께 인사나 올리게.”

이서휘는 담가막의 소개로 느닷없이 백도맹주 범우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걸음을 옮긴 이서휘가 백도맹주를 향해 예를 취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군림맹의 이서휘라 합니다.”

“듣던대로 무척 젊군. 내가 곤륜의 범우일세.”

이서휘는 예를 취한 후에야 범우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아…….’

아무리 낮게 보아도 육십은 족히 넘어 보였다. 더군다나 이서휘의 예상보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딘가 잘못됐구나. 맹주라는 사람이 안색이 이렇게 좋지 않다니.’

마치 심산유곡에 거처하던 선비가 저잣거리에 내려와 술과 여인으로 인해 몸을 망친 것처럼 초췌해 보였다.

백도맹주 범우가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대주, 우리 분타를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들었네.”

“네, 우연히 그리 했습니다.”

“고맙군. 백협단주의 칭찬이 자자해서 한 번 보고 싶었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범우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말했다.

“자네, 문파는 어디인가? 군림맹의 일원인데 세가의 성도 쓰지 않는 것을 보니……. 궁금하군.”

범우의 말에 이서휘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낭인 출신입니다. 떠돌면서 배웠다가 주로 군림맹에서 익혔습니다.”

그 말에 범우뿐만 아니라 범우 주변에 있던 명문정파의 고수들까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서휘는 이런 반응에 매우 익숙한 편이어서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백도맹의 고수들을 살피고 있었다.

백도맹주 범우는 이서휘가 낭인 출신이라 말하자 잔잔한 어조로 이서휘를 칭찬했다.

“대단하군. 백협단주의 말에 의하면 무공이 무척 고강하다 들었네.”

“과찬이십니다.”

“아닐세. 이제 보니 장강 이남의 기재였구만. 홀로 일가(一家)를 이뤘단 말이 아닌가?”

범우의 태도는 무척 소탈했다. 이서휘가 낭인이라 밝히자 오히려 더 마음에 든다는 눈치였다.

이서휘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아, 일가라는 말씀은 후배가 감당하지 못할 말입니다.”

이서휘는 낯이 뜨거웠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서휘의 스승인 검선이 일가를 이룬 것이었기 때문.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범우가 이서휘에게 호의를 보였다.

“후후. 이 대주, 올라가서 함께 비무를 보는 것이 어떠한가?”

“네?”

범우가 단상 위에 마련된 귀빈석을 바라봤다. 이서휘가 시선을 돌리자 무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단상 위에 붉은 비단으로 덮어씌운 의자가 스무 개 가량 마련되어 있었다.

백도맹주의 제의에 이서휘가 솔직하게 대꾸했다.

“맹주님, 실은 제 친구들이 백룡지회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저는 내려가서 보겠습니다.”

이서휘의 대답에 범우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럼 그리하게.”

“네, 맹주님.”

이서휘가 범우에게 예를 올리자 범우가 일행들과 함께 단상으로 이동했다.

그나저나 백도맹주와 이서휘가 이야기를 나누자 주변에서 이서휘를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 사이에 환호성이 몇 번이나 터졌다.

무대 위에서 겨루던 백류혼과 천무궁(泉懋穹)이 접전을 펼치고 있었던 것.

이서휘가 바라보니 천무궁은 무기를 쥔 상태였다. 하지만 백류혼이 뿌려대는 백화(白花) 모양의 기이한 빛 무리가 무대를 수놓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만 들어도 백류혼이 강적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서휘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챙챙챙챙챙챙! 까앙!

백류혼이 휘두르는 백연검이 때때로 번쩍이며 섬광살(閃光殺)을 내뱉었다.

하지만 천무궁은 백류혼의 섬광살을 모조리 튕겨내고 매서운 반격을 펼치면서도 한 점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었다.

잠시 지켜보던 이서휘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무언가 이서휘의 본능을 자극하는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밀려오고 있었던 것.

‘뭐지……? 개입해서 막아야하나? 뭔가 불안한데…….’

백류혼의 백화만개가 걷히자 그제야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백류혼의 장포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이서휘의 옆에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던 단우혁도 고개를 갸웃했다.

“백류혼이 이렇게 고전할 줄이야. 심상치 않다.”

이서휘는 이미 백류혼을 상대하고 있는 천무궁을 마가의 인물일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예상만으로 무대에 뛰어들어 천무궁을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문득 이서휘는 단상 위를 바라봤다.

백도맹주와 이야기를 하느라 화산파의 장문인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했던 것. 그러나 단상 위에는 무당이나 화산의 장문인으로 보이는 자들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소림도 마찬가지. 소림은 벌써부터 지난 생애와 마찬가지로 백도맹에 가입만 해놓고 소림 밖으로 나서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이서휘는 느닷없이 단상 쪽으로 급하게 걸어가는 무인들을 바라봤다.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누구지?”

그와 동시에 내성에서 폭발음이 연달아 들렸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앗!”

사람들이 시선이 일제히 내성으로 향했다. 단상에 앉아 있던 자들이 일어날 때, 이서휘는 본능적으로 단상으로 이동하는 무인들을 향해 뛰어갔다.

그때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백도맹주가 앉아 있던 단상 위에서도 붉은 비단으로 씌워놨던 의자 몇 개가 그대로 폭발하면서 앉아 있던 곤륜파의 장로들과 일부 장문인들의 사지(四肢)를 앉은 자세 그대로 찢어발겼다.

콰아아아아앙……!

굉음이 터지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이서휘의 눈빛이 흔들렸다.

‘맹주는?’

자욱한 먼지 사이로 백도맹주 범우가 전신에 운룡선경(雲龍仙境)이라 부르는 호신강기(護身罡氣)를 두르고 있었다. 마치 범우 주변에 구름이 감돌고 있고, 범우 자신이 한 마리의 용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미 단상 위에는 백도맹주 범우만 홀로 살아남은 형국이었다. 경황이 없어 보였지만 저 온순하게만 보이던 범우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허연 눈썹이 기이할 정도로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습격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 계단에 오르던 무인들이 입고 있는 백도맹 무복에서 엷은 빛줄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무인들은 일월마가의 결사대였는데 무복 안에 잔사진천뢰(殘絲振天雷)를 두르고 있었던 것.

이들은 맹주에게 달려들어 함께 폭사할 셈이었다.

이서휘가 달려 나가면서 쌍검을 발검하는 동시에 내공을 실어 소리쳤다.

“맹주님!”

쐐앵……!

쐐애애애애앵!

이서휘의 판단은 검기가 아니라 검막이었다.

발검과 함께 백야검과 성검에서 뻗어 나간 엄청난 크기의 검막이 백도맹주의 좌우로 쏟아졌다.

마치 백도맹주의 좌우에 거대한 검 두 자루가 떨어지는 형국이랄까. 츠앗―! 하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검막이 형성되는 순간에 잔사진천뢰를 두르고 돌진하던 자가 그대로 단상 위에서 폭사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그 엄청난 위력에 이서휘가 내보낸 검막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사이에 백도맹주 범우의 이에서 꽈드득 소리가 나더니 양 손을 뻗어 좌우로 공진파천장(共振破天掌)을 쏟아냈다.

뒤따라 달려오던 결사대의 일부가 마치 바람에 실린 것처럼 공중에 떠서 이동하더니 호수까지 날아가 폭발했다. 호수의 물이 마치 수룡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기가 막히는 찰나였다.

단상 아래까지 이동해 있던 마가의 고수들이 순식간에 솟구치면서 범우에게 일제히 장력을 쏟아냈다. 백도맹주 범우가 단상 아래에서 달려드는 마가 무인들의 장력을 모조리 튕겨내고 고함을 내질렀다.

“마도의 무리가……!”

마가의 누군가가 무모하게 달려들자, 범우가 일장을 쏟아냈다. 퍼억― 소리와 함께 마가의 무인들이 달려 나가던 자세 그대로 사지가 터져 나갔다.

백도맹주 범우가 일갈했다.

“감히 백도맹의 한 가운데서 난동을 피우다니!”

그와 동시에 이서휘가 쌍검을 쥐고 솟구쳤다가, 암연심검의 파를 연달아 내보내면서 단상 위에 내려섰다.

백도맹의 상황은 그야말로 난장판.

곤륜파의 무인들이 백도맹주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오고, 구경꾼 틈에 숨어 있던 마가의 고수들이 백도맹주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혼란은 끝이 없었다. 누군가가 숭무문에서 달려 나오면서 소리쳤다.

“좌안문(左安門), 우안문(右安門), 철옥(鐵獄), 승천각(承天閣)이 갑자기 폭발했습니다. 동문과 남문의 담장으로 밀려들어온 적들과 화산파가 맞서고 있고 무당은 폭발한 건물에서 부상자들을 빼내고 있습니다.”

단상 위에는 이서휘와 백도맹주 범우만 살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백협단주 담가막은 장로의 신분이 아닌지라 단상 아래에서 몰려드는 마가의 무인들을 베고 있었다.

그런데 범우는 호신강기로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자, 이서휘가 범우에게 말했다.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하지만 이서휘는 범우가 폭발 속에서 어딘가 부상을 입었으리라 추측하고 있었다.

☆ ☆ ☆

한편, 무대 위에서 겨루고 있던 백류혼과 천무궁(泉懋穹)은 어느새 생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미 천무궁이 의심 가는 자라 판단했던 백류혼이 비무를 멈추지 않고 살수를 펼치기 시작했기 때문.

그 사이 굉음이 발생해도 두 사람은 안색 한 번 변하지 않은 채로 겨루고 있었다.

백류혼이 악착같이 달려들자, 천무궁은 백류혼을 죽이고 다른 곳으로 합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켜보고 있던 단우혁이 바로 결단을 내렸다.

비무가 아니라고 판단하자마자 ‘쩌정…….’ 소리와 함께 청룡도를 바닥에 찍은 단우혁이 엄청난 속도로 솟구쳤다.

그 사이에 백류혼이 전방에 백화만개를 뿌리고, 공중에 솟은 단우혁이 몸을 비틀면서 천무궁을 향해 청룡도를 내려치면서 일도양단을 쏟아냈다.

어느새 무대 위에서는 천무궁과 단우혁, 백류혼이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 ☆ ☆

이서휘는 단우혁이 합류한 것을 보고 비무대의 상황에 대해서는 신경을 껐다. 두 사람의 무위면 충분히 천무궁을 잡으리라 판단을 했던 것.

문제는 맹주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구경꾼들이 너무 많아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몰랐기 때문.

대신에 이서휘는 살기를 띄고 단상 위로 몰려오는 자들은 가차 없이 베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무림에서 펼쳐질 만한 대결이 아니었다. 구경꾼들 틈에 잔사진천뢰를 두르고 있던 결사대가 그야말로 처절한 모습으로 사람들과 함께 폭사하기 시작했다.

저 냉철한 이서휘마저도 입을 벌리고 바라볼 정도로 지긋지긋한 장면이었다.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아, 위극신…….”

단상 아래에서도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르고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 와중에 이서휘가 백도맹주 범우에게 말했다.

“맹주님, 자리를 옮기시지요.”

“어째서?”

“개활지에서 싸우는 게 낫겠습니다. 자폭조가 있어서.”

범우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옮기세.”

이서휘와 범우가 단상에서 뛰어내려 내성 쪽으로 이동하자,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화마가(火魔家) 구양휘 장로가 드디어 나섰다.

그가 이번 기습의 책임자였던 것.

일월마존 위극신은 결국 마교 교주를 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백도맹을 기습한 다음에 모습을 감출 생각이었다. 마교 교주의 명을 수행하면서 마교 교주를 칠 생각이었던 것. 그 때문에 위극신은 구양휘 장로를 겁박(劫迫)하여 구양휘 장로가 데려왔던 화마가(火魔家)의 병력 일부를 이용하는 중이었다.

겁박을 하는 방법도 그야말로 진절머리가 나는 방법이었다.

위극신은 구양위 장로가 보는 앞에서 일월마가의 일부 무인들에게 잔사진천뢰를 휘감았던 것.

“구 장로님, 내 수하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백도맹에서 잘 이끌어주십시오. 화마가만 죽게 하진 않을 생각입니다.”

구양휘 장로는 위극신의 말을 떠올리며 양 손으로 염라박화(閻羅烞火)를 생성시켰다. 화르르르륵 소리와 함께 백도맹주 범우를 향해 지난날 화마존이 생성했던 것보다 크기가 더 큰 염라박화가 날아갔다.

동시에 구양휘 장로와 그의 제자들이 백도맹주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 백도맹주 범우와 이서휘가 등을 돌렸다. 비록 지금은 이서휘의 나이가 젊었으나 둘이 지닌 경험은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두 사람은 대화도 하지 않고 합격을 이뤄냈다. 날아오는 불덩이를 보자마자 백도맹주 범우가 진공허천(眞空虛天)이라는 비기로 공중에 떠 있던 염라박화를 좌우로 찢어버리는 것처럼 흩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이서휘가 암연심검의 파를 수평으로 길게 내뱉어 구양휘 장로에게 날렸다.

쐐애애애애앵!

서너 명이 이서휘의 검기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이서휘의 검기를 튕겨낸 구양휘와 제자들이 달려들었다.

챙챙챙챙챙!

퍼억!

백도맹주 범우가 일장을 내지를 때마다 화마가의 무인들이 일격에 죽어나가고 있었다. 이서휘도 마찬가지. 쌍검을 휘두를 때마다 구양휘 장로의 제자들이 버텨내지 못하고 있었다. 구양휘 장로는 범우에게 달려들 것처럼 덤볐다가 그대로 사람들 틈으로 몸을 숨겼다.

[암살에 실패할 확률이 높소.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혼란이외다. 화마가가 마침 우리를 돕겠다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요.]

구양휘 장로가 경공을 펼치면서 돌아다녔다. 이동하는 곳마다 불길이 솟구쳤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일월마가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란 희망에 부풀고 있을 때. 어느새 쌍검을 쥔 이서휘가 구양휘를 발견하고 뛰어오고 있었다.

내성에서 밀려나온 백도맹의 고수들이 백도맹주 범우를 보호하자, 이서휘의 운신이 자유로워졌던 것. 진작 염락박화를 던졌던 구양휘의 인상착의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이서휘였다.

이서휘는 맹주를 지킬 것처럼 머물러 있다가 백도맹의 지원이 오자마자 모습을 감춰 불을 지르고 다니는 구양휘를 뒤쫓았다.

구양휘는 경공을 펼치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놈.”

그때, 의료 막사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던 도이와 도삼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로 주변에 멀뚱히 서있다가 움직이는 이서휘를 발견하자마자 건물 지붕으로 올라가 이서휘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구양휘는 지붕 위에서 도둑 두 명이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로 이서휘의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다니고 있었다. 잠시 후 요리조리 도망가고 있던 구양휘 앞에 도이와 도삼이 불쑥 내려섰다.

화들짝 놀란 구양휘가 쌍장을 일으켜 도이와 도삼을 후려쳤다. 그러자 도이와 도삼은 겨룰 마음이 없다는 듯이 재빠르게 좌우로 흩어졌다.

그때, 이서휘의 검기, 암연심검의 환이 연달아 구양휘의 등에 쏟아졌다.

쐐애애애앵!

휙휙휙! 푸욱! 푸욱! 푹!

서너 번을 이리저리 피하던 구양휘는 결국 어깨를 관통 당하고, 연달아 날아오는 검기에 맞아 선 자세 그대로 퍼버버벅 소리와 함께 신체 곳곳에 구멍이 났다.

그때, 타다다닥 소리와 함께 달려오던 이서휘가 백야검을 휘두르니 구양휘의 무릎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목이 하늘로 솟구쳤다.

이서휘가 어딘가에 숨어 있을 도이, 도삼에게 소리쳤다.

“화재 때문에 부상자가 많을 것이다. 전투는 백도맹에게 맡기고 너희가 무너진 건물로 가서 부상자들 좀 살려라.”

도이와 도삼은 이서휘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로 달려나가면서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반면에 이서휘는 쌍검을 납검한 채로 눈에 불을 키고 위극신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위극신은 이미 마교의 총본산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 ☆ ☆

백도맹이 처참하게 당한 이 상황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전쟁이란 표현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무공으로 겨룬 것도 아닌데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백도맹이 허술하거나 약해서? 그것도 아니다. 무언가 요점이 어긋나는 말이다.

곪은 게 터진 셈이었다.

무림을 이끈 다기 보다 어느새 이권을 챙기는 거대한 세력으로 변질된 지 오래였다. 그 이권은 구파가 나눠 챙겼고, 더 큰 이득을 얻기 위해 각종 사업이 달라붙었다.

건물을 증축했다.

분타를 늘렸다.

또 늘어난 분타의 건물을 세운다.

땅을 구입하고 이권 사업을 진행하고, 방해되는 세력은 사마외도로 몰아 쓸어냈다.

백도맹에 무림인들만 거주하는 게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자 이권과 관련된 자들이 제법 많아지기 시작했고 일월마가는 그 틈을 노려 간자를 손쉽게 투입시켰다.

이것을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애초에 막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백도맹은 일월마가의 ‘악의(惡意)’에 당한 것이었다.

혹은 백도맹의 욕심에 스스로 당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백도맹의 간자들은 무력 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권 사업에 달라붙어 있었다. 군림맹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백도맹은 곪아 있었다. 이제 간자를 찾아내느라 구파가 다툼을 시작하면 의심이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할 터였다.

☆ ☆ ☆

이서휘가 이러한 백도맹의 속사정을 어찌 알 수 있을까. 그저 추측할 뿐이었다. 이서휘가 백도맹을 누비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백도맹주 범우가 아직은 건재하다는 점이었다.

‘맹주를 노리고 단상까지 폭발하다니 이걸 대체 어떻게 수습한단 말이냐?’

이 난국에 누군가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서휘의 감각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이미 일월마가의 수뇌부는 백도맹에 없었기 때문에 찾아낼 수 없었다.

이서휘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빠져 나갔거나 애초에 없었던 것 같구나…….’

이서휘는 내성 근처도 살펴봤다가 다시 외성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성에 있던 백도맹의 무인들이 이서휘를 붙잡았다. 그 태도가 실로 가관이었다. 오히려 이서휘의 정체를 더 의심하는 자들이 많았던 것.

이서휘는 때때로 걸음을 멈춰 자신을 소개해야 했다.

“군림맹의 이서휘요.”

두세 명을 만날 때는 대부분 지나치더니 우르르 몰려다니는 인파가 이서휘를 발견했을 때는 군중심리 때문에 아예 이서휘를 간자 취급하면서 둘러쌌다. 누군가 의심을 말하면 다수가 쉽게 그 의심에 동조하고 있었다. 이서휘도 처음 겪는 일이라 무척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가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허, 대단한 사람들이로군. 말했지 않나? 군림맹이라고.”

그나마 백도맹에 아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 다행이었다. 몰려든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가 사람들을 밀쳐내며 나섰다.

“잠시 비켜 보게. 아, 다들 물러나시오. 군림맹의 이서휘 대주요.”

이서휘를 알아본 자들은 다름 아닌 점창파의 범천락(范天樂)과 범사량 사형제들이었다. 뜻밖의 인물들 때문에 이서휘는 곤경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맥이 끊기더니, 이서휘는 힘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멍청한 놈들이.”

점창파의 사형제들과 함께 돌아다닐 수 없는 노릇이라 이서휘는 다시 비무대로 돌아갔다.

단우혁과 백류혼이라도 살펴볼 생각이었다. 이서휘는 두 사람의 합공이면 천무궁(泉懋穹)을 쉽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경공을 펼쳐서 이동한 이서휘는 비무대 근처에 가자마자 탄성을 내질렀다.

“대체 뭐야?”

물론 이서휘의 예상대로 천무궁은 사패의 손에 죽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그야말로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백도맹의 일부 무인들이 단우혁과 백류혼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 싸움이 벌어지진 않고 있었으나 말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협이라면 우리도 들어보았소. 알겠으니 가서 일단 이야기를 해봅시다. 거기, 백검문 소문주께서도 일단 같이 갑시다.”

단우혁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백도맹에 숨어든 간자나 찾으시오. 우리에게 뭘 물어본다는 말이오? 그리고 구경꾼들 중에서 빠져나간 자가 한두 명인 줄 아시오? 진작 통제를 해서 사람들을 다 가둬놨어야지. 남아있는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다니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야?”

단우혁이 제 성질을 겨우 억누르고 대꾸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일부러 콰아앙― 소리가 퍼지도록 땅을 밟은 후에 순식간에 비무대 중앙에 내려섰다.

이서휘가 둘러보니 대다수가 특정 조직의 무복을 맞춰 입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군림맹 이서휘 대주입니다. 여기 두 명은 제 친구들입니다.”

“군림맹이라…….”

어느 중년인이 이서휘의 말에 대꾸하면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제검단주(齊劍團主) 연임평(連壬平)이라 하네. 이 대주, 자네도 같이 가지.”

그 말에 이서휘가 싸늘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백도맹은 일은 어찌 이런 식으로 합니까? 애꿎은 사람 의심할 시간에 내성이나 외성을 더 돌아보겠습니다. 제가 살펴보려 했습니다만 저 역시……. 아, 이거 정말 답답하군.”

그때, 이서휘는 지나가는 점창파 사형제를 다시 불렀다.

“범 형! 여기 좀 도와주시오.”

이서휘는 단상 주변에서 백협단을 통제하고 있던 담가막까지 불렀다.

“담 단주님!”

“이 대주, 무슨 일인가?”

“잠시 와주십시오.”

“가겠네.”

그보다 먼저 범천락(范天樂)이 걸어오면서 제검단주 연임평에게 예를 올렸다.

“연 단주님, 이쪽은 군림맹의 이 대주입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는 사이인가?”

“네, 군림맹 사자로 갔을 때 봤습니다. 이 분들도 이 대주의 친구들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서휘, 단우혁, 백류혼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제검단주를 바라봤다.

‘제검단주라니 뭐하는 작자인가? 오히려 더 의심스럽군.’

일이 이 지경이 되나 보니 오히려 이서휘는 도둑 형제들이 걱정됐다. 말 주변도 없는데다가 워낙 태생이 도둑놈들이라 의심을 사기 딱 좋았다.

하지만 진작 군중 틈에 섞여 있던 도이와 도삼은 이서휘 일행의 의심이 풀리자마자 능청스럽게 등장해서 이서휘를 아는 척 했다.

“대주님! 여기 계셨군요!”

도삼이 뛰어오면서 자기자랑을 늘어놓았다.

“무너진 곳에서 사람들을 제법 끄집어냈습니다만, 누구냐 묻는 분들이 많아서 그만 되돌아 왔습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그제야 제검단주 연임평(連壬平)이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의심해서 미안하네.”

연임평이 등을 돌리자 제검단 전체가 연임평을 따라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점창파의 사형제들마저도 제검단주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제검단은 백도맹에서도 유명한 고집불통들이오. 고생들 하셨소. 백도맹이 당분간 경황이 없을 것 같으니 여러분들은 빨리 나가 계시는 게 좋겠소이다.”

담천락의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또 봅시다.”

점창파의 사형제들이 떠나자, 아무 말 않고 있던 백류혼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일침을 가했다.

“제검단이라……. 일 못하는 놈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랄까?”

이서휘도 이미 백도맹의 어이없는 대처에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싹 사라진 상태였다.

“나가세.”

이서휘가 걸음을 옮기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백도맹도 썩은 환부를 도려낼 때가 온 것 같군.”

☆ ☆ ☆

놀랍게도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백도맹주 범우도 이서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곪은 게 터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지치는구나.’

백도맹주 범우의 나이도 어느새 육십을 훌쩍 넘었다. 패기 넘치는 화산파의 장문인과 무당파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맹주를 맡아 비교적 순탄한 행보를 거듭한 범우다.

‘고여 있다가 썩은 느낌이 드는구나.’

맹주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곳곳에서 화재를 진압했다는 소식과 잔당들을 처리했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 작태가 더 우스웠다. 단주 이상의 고위직에 있는 수하들의 한심한 보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럴 때는 또 빠르단 말이지.’

누군가는 사망자 명단을 벌써 작성해서 들어왔고, 누군가는 피해 상황을 정리해 보고했다. 하지만 백도맹주 범우의 귀에는 수하들의 말이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알아서 하시오.”

실로 무책임한 말을 내뱉으면서 숭무단주(崇武團主)와 집법단주(執法團主), 제검단주(齊劍團主)를 내보냈다.

‘본질을 이야기하고 싶구나.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죄다 사고 처리에 대한 이야기만 하자고 찾아온단 말이냐.’

이어서 백협단주 담가막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맹주 집무실로 들어왔다.

범우가 담가막의 몰골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했네.”

범우는 담가막을 바라보다가 단상으로 뛰어든 이서휘가 불쑥 생각났다.

“군림맹 이 대주는 어디 있는가?”

“제검단에게 제지를 당한 모양입니다. 표정이 안 좋더군요. 아마 머무는 숙소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범우가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담가막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건강도 좋지 않으셨는데…….”

“없네.”

“다행입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범우가 담가막을 바라보며 말했다.

“담 단주.”

“네.”

“당분간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간자 색출에 모든…….”

범우는 말을 하다말고 자신의 처지가 우스웠다. 그간 간자를 찾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진작 찾았더라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터.

‘곪았어.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범우는 문득 이서휘에게 물어볼 말이 떠올랐다.

“멀리 가지 않았으면 이 대주나 다시 불러오게. 군림맹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야기나 한 번 들어봐야겠네.”

“알겠습니다.”

☆ ☆ ☆

이서휘는 이미 객잔으로 들어간 상태여서 이서휘와 범우의 만남은 늦은 밤에나 이뤄졌다.

“맹주님. 군림맹 이서휘입니다.”

이서휘가 맹주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범우가 의자에 파묻히듯이 앉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게.”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범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휘에게 말했다.

“자네 덕분에 괜찮아. 이 대주, 고마웠네.”

“아닙니다. 마땅히 할 일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거니까. 그런데 군림맹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자살조나 미리 설치해둔 폭발물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기가 차는군요.”

“어쨌든 간자들은 있었다?”

“그렇습니다.”

“어찌했나. 다 색출했나?”

“아니요. 불가능했습니다.”

“그럼?”

“조직 자체를 없앴습니다. 덕분에 회(會)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지요. 제갈세가와 사마세가가 이탈하는 등 전력도 많이 약해졌습니다. 물론 간자가 더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무엇을 꾸미기엔 어려울 겁니다.”

범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예 다 날려버렸다.”

“그렇습니다.”

범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곤륜으로 넘어가 쉬려고 했더니만 이 일까지는 처리를 하고 은퇴를 해야겠군.”

범우의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어찌 벌써 은퇴를 하십니까?”

“자네야 사정을 모르겠지만 난 본래 장문인 자리를 넘기고 은퇴했던 사람이야.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 사문을 잊고 이런 일을 오랫동안 수행하겠는가? 저 화산 놈들이나 무당 놈들도 이런 자리에 앉아봐야 그간 내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거야. 괘씸한 놈들…….”

“후후.”

이서휘가 별 다른 말 없이 빙긋 웃자, 범우도 함께 웃었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야.’

범우가 더 심한 농담을 던졌다.

“이 대주, 군림맹이나 버리고 여기로 오게. 자리 하나 만들어주겠네.”

“하하하.”

범우가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남궁 맹주는 잘 있나?”

“그게……, 네.”

“아직도 부상 중인가?”

“아닙니다. 아마 폐관 수련을 하고 계시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범우가 히죽 웃으며 묘한 말을 꺼냈다.

“백도맹과 군림맹은 본래 하나였어. 무림맹(武林盟)이었지.”

“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뜬금없겠지만 악의를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네. 남궁 맹주의 의견이 궁금하군. 누가 맹주가 되든 상관없으니 언제 한 번 무림맹(武林盟)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전해주게. 내 진심이야.”

“무림맹이요?”

“그래. 무림맹.”

범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휘의 전생에는 무림맹이라는 세력이 탄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무림맹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이서휘는 전생의 흐름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이라니. 백도맹이 이 수준이라면 차라리 합치지 않는 게 나을 정도다.’

하지만 이서휘는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범우가 말했다.

“논의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네. 만약 일이 진행된다면 의심 가는 조직과 사람을 모두 내 선에서 쳐낼 생각이야. 돌아가면 남궁 맹주의 의사를 물어보게.”

“허어……. 알겠습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실로 대담한 제안이었다. 범우는 썩은 환부를 도려낼 생각으로 두 맹의 통합을 추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즉석에서 생각한 것 같지는 않고. 지난 생애에도 이런 시도가 있었단 말인가?’

성사되긴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이서휘는 백도맹주 범우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다가 어쩐지 한 단어가 머리에 계속 맴돌고 있었다.

‘무림맹주(武林盟主)라…….’

이서휘는 백도맹주 범우와 독대를 마치고 나와서 단향객잔으로 이동했다.

범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군림맹주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마침 이서휘를 좋게 봐서 그런지, 백도맹주 범우는 허심탄회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서휘는 별 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고 경청만 했으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백도맹주의 고민은 어느 정도 이서휘의 고민과도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시간은 축시(丑時, 오전 1시)에 접어들고 있어 백도맹에서 멀어질수록 어두컴컴한 어둠이 이서휘를 반기고 있었다.

그렇게 일다경(一茶頃, 차 한 잔 마실 시간) 정도, 어두운 밤길을 걷던 이서휘는 문득 코웃음을 치면서 뒤를 돌아봤다.

‘대체 누가……. 무슨 생각으로 따라오는 것이냐……?’

이서휘는 어둠을 잠시 주시했다. 따라오던 자들을 불러낼까 하다가 생각을 달리했다.

타닥―

이서휘는 일부러 단향객잔 쪽으로 경공을 펼치면서 도주했다.

이서휘는 백룡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 백도맹 주변에서 이서휘의 무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을 터. 이서휘는 단향객잔 근처까지 이동하면서 따라오는 자들의 무공 수준을 파악할 생각이었다.

이서휘가 경공을 펼치자, 아니나 다를까 희미하게 느껴지던 인기척이 바스락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어둠 속에서 세 명의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 이서휘를 빠르게 쫓아왔다. 이서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생각했다.

‘허, 겨우 세 명인 게냐…….’

이서휘는 일부러 단향객잔 근처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이서휘가 전력을 다해 달렸다면 이 자들이 쫓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서휘가 일부러 속력을 조절했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어쨌든 이미 객잔 거리에 접어든 터라 무슨 일이 생기든 단우혁과 백류혼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 사람 모두 같은 복장에 복면을 쓰고 있어 빛나는 두 눈만 내놓고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복면인 한 명이 이서휘에게 말했다.

“맹주와 무슨 밀담을 그리 오래 하셨소?”

생각보다 젊은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밀담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복면인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제검단(齊劍團)이 그냥 보내준 모양인데 우리는 그럴 수 없소. 함께 가서 나눈 이야기를 우리에게 다 실토하시오. 거절하면 강제로 데려가겠소.”

그 말에 이서휘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허, 놀랍군. 보아 하니 백도맹인 것 같은데……. 복면을 쓰고 군림맹의 사자를 핍박하다니……. 자네들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에 자네들이 속한 조직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그 말에 세 명의 복면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웃긴 사람이군. 군림맹의 대주 따위가 감히.”

“그러게 말일세. 자신감이 너무 과도한 게 아닌가?”

“자네 친구들이 백룡지회의 사강(四强)에 올랐다고 본인도 대단한 고수가 된 것으로 착각하는가?”

그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뭔 개소리인가?”

“…….”

방금 이야기를 꺼낸 자를 향해 두 명의 복면인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서 우두머리일 것으로 예상되는 복면인이 말했다.

“일단 데려가세. 되도록 외상(外傷)이나 부상은 입히지 말게. 나중에 골치 아프니……. 혈도만 제압하는 게 낫겠군.”

“그래야겠지.”

이서휘가 손을 내밀었다.

“잠시만.”

이서휘의 말에 다소 어처구니없게도 공격하려는 자들이 멈췄다. 그 순간, 이서휘는 이 자들의 정체를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다.

‘풋내기들이로구나…….’

이서휘는 복면인들의 목소리와 기도, 경공의 수준으로 이들의 정체를 금방 추측했다. 그 때문에 이서휘는 살기를 거뒀다. 이들의 정체를 확인하는 방법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서휘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이제 보니 승룡회(勝龍會)의 형제들이었군?”

이서휘의 말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이 애송이들이…….’

승룡회(勝龍會).

백룡지회의 우승자들이 모여서 만든 조직으로 나름 백도맹에서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이 자들도 백도맹을 위해 혹은 무림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을 갖춘 자들이었다. 승룡회의 구성원들은 온갖 불만으로 똘똘 뭉친 젊은이들이 몰려 있는 곳이었는데 그 불만의 대상은 백도맹과 구파를 가리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감당치 못할 혈기로 인해 사건과 사고도 많이 만들어내는 조직이었다. 한 마디로 혈기왕성한 사고뭉치들이 몰려 있는 조직이었다.

그 승룡회의 후기지수들이 이서휘를 포위했다.

이서휘가 승룡회의 무인으로 추정되는 복면인들에게 말했다.

“자네들……, 다행인 줄 알게.”

“닥쳐라. 무슨 말이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많은 게냐?”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복면을 벗고 이야기나 하러 가세. 내가 술 한 잔 살 테니.”

복면인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네 놈이 그야말로 개소리를 하고 있군.”

이서휘가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난 분명 자네들에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줬네. 조금 이따가 복면을 벗기고 표정들을 구경해야겠군.”

“하, 실로 건방진 사람이군.”

이서휘가 계속 놀리자 한 복면인이 성을 내면서 외쳤다.

“제압하겠소.”

세 명이 동시에 금나수법과 지법, 장법을 펼치며 달려들었다. 꼴에는 이서휘를 다치게 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병기를 뽑지 않았던 것.

이서휘가 암행표로 신형을 움직이자마자 왼손으로 지법을 내민 자의 손목을 움켜쥐고 비튼 다음에, 우장을 내질러 장법을 사용하는 자를 튕겨냈다.

퍼억……!

그 사이에 금나수법을 사용하는 자의 오른손이 뱀처럼 미끄러지더니 이서휘의 팔을 휘감았다. 이서휘는 팔이 잡히는 순간에 손바닥을 뒤집으면서 중지와 검지로 상대방의 손목을 튕겼다.

“윽……!”

겨우 손가락으로 튕겼을 뿐인데 맞은 자의 눈빛이 대번에 흔들렸다. 고통을 참느라 끄윽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팔을 붙잡았다가 다시 이서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우측에서 다시 장력이 쏟아졌다.

이서휘는 과감하게 한 발을 더 들어가자마자 복면인의 장력을 피하면서 팔을 붙잡아 방향을 바꿨다. 그러자 지법을 사용하는 자와 장법을 사용하는 자가 맞붙더니 동시에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윽!”

복면인이 외쳤다.

“뭐하는 게야?”

세 명은 공수의 합이 안 맞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식의 고명함을 떠나서 이서휘의 경험과 실력 때문에 세 사람의 빤한 움직임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서휘와 내공의 격차가 심해 공격을 성공한들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할 정도였다.

괜한 고함 소리가 조용한 밤거리에 울려 퍼졌다.

애초에 검으로 싸웠으면 진작 죽었을 세 사람이었다.

이서휘는 장법을 내지르는 자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지법을 쓰는 자의 손목을 우드득 소리를 내며 비틀었다. 그 사이에 금나수법을 쓰는 자가 이서휘의 손목을 붙잡고 와락 비틀었으나, 이서휘는 그대로 내공을 주입해 어처구니없이 튕겨내 버렸다.

이십여 초를 더 겨루자 세 사람은 이서휘에게 도망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맹한 공격을 동시에 내지른 세 사람은 이서휘가 겨우 한 발을 물러나자, 그 틈에 신형을 돌려 쏜살같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이서휘가 순식간에 달려들어 두 사람의 혈도를 제압하고 뒷덜미를 붙잡아 단향객잔 쪽으로 던져 버렸다.

다른 한 명도 멀리 도망가지도 못했다. 이서휘가 마음을 먹고 경공을 시전하자, 수십 걸음도 못 가 금방 따라잡혔다.

상대를 제압할 때는 이서휘의 행동이 매우 과감했다. 도망치던 자가 반격을 하겠다고 우장을 휘두르자, 이서휘는 상대의 팔목을 그대로 붙잡아 비틀었다.

복면인이 선 자세에서 그대로 한 바퀴를 돌아 바닥에 처박혔다.

쿵―!

“윽!”

이서휘는 복면인의 팔목을 쥐더니 바닥을 청소하듯이 끌고 단향객잔으로 이동했다.

“반항하지 마라. 부러뜨리는 수가 있다.”

☆ ☆ ☆

이서휘가 탁자에 앉아 있고 그 옆에 복면을 벗은 세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단향객잔은 밤새 운영하는 곳이어서 간단한 음식과 술을 주문할 수 있었다. 이서휘는 입 안이 텁텁했던 터라 술로 입 안을 헹궜다가 삼킨 다음에 말했다.

“승룡회의 누구라고? 한 명씩 말하게. 당장 내일 맹주님에게 가서 보고하는 수가 있어. 바른 대로 말하게.”

“막무영(莫武英)이오.”

“유명수(劉明水)이외다.”

“조자룡(曺子龍)이오.”

마지막 이름에 이서휘가 놀라며 대꾸했다.

“조자룡이라니! 훌륭한 이름을 가지고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그 조자룡과는 성이 다르오.”

“뭔 상관인가? 하여간……. 셋 다 승룡회는 맞는가?”

그 말에는 대꾸가 없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어허! 조사하면 금방 다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맞소이다.”

“맞소.”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야밤에 한 사람을 습격하다니……. 그것도 복면을 쓰고. 그게 백도맹이 할 짓인가? 세 사람이 병기를 들고 있었다면 그 자리서 다 죽일 셈이었네.”

세 사람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찌 이렇게 격차가 심한 것일까?

겨우 군림맹의 대주라 들었다.

세 사람은 말 그대로 승룡회의 무인이다. 백룡지회의 우승자 출신인 것이다. 그런데 이서휘와 제대로 싸워볼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서휘의 지적대로 지은 죄가 있는 터라 할 말도 별로 없었다. 알려지는 순간에 승룡회의 명예가 바닥으로 추락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기 때문. 세 사람은 설마 셋이서 이서휘 한 명을 끌고 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조자룡이 말했다.

“군림맹의 이서휘 대주가 맞소?”

“맞네.”

이서휘는 세 사람의 자세를 힐끗 바라봤다. 이서휘는 세 사람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한 적이 없었다. 어쩐지 저희끼리 지레 겁을 먹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야기는 들어봐야 했기에 이서휘는 한숨을 내쉰 후 세 사람에게 탁자에 앉으라 권했다.

“앉아서 이야기하세.”

탕탕탕 소리와 함께 이서휘가 세 사람 앞에 술잔을 놓고 또르륵 소리와 함께 술을 따랐다.

“드시게.”

세 사람이 눈치를 보다가 한 잔을 들이키자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군림맹의 사자를 쳤나?”

“사자로 오셨소? 아니라 들었는데.”

“그러게 말이오. 청협인가 백검문의 소문주들에 대해 제검문에서 이런저런 이야기와 불만이 많았소이다.”

“무슨 이야기?”

“청협과 백검문은 예전부터 백도맹 가입을 거절한 문파들이오. 이제 와서 백룡지회에 참가하다니……. 백도맹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오? 더군다나 사강에 오르고 우승까지 할 기세였소. 우승을 해도 청협과 백검의 후계자가 승룡회에 들어올 리가 없지 않겠소? 백룡지회에 참가하기 위해 문파의 후기지수들이 짧게는 반년, 길게는 일 년을 수련을 한단 말이오. 이게 대체 무슨…….”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겨우 그런 이유였단 말인가?”

“겨우 라니. 말했지 않소?”

이서휘가 세 사람을 보니 한심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이서휘가 말했다.

“청협과 백검에 대한 생각은 잘 알겠고. 그럼 날 왜 쫓아왔지? 맹주님과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네만 승룡회에서 왜 그것을 궁금해 하는지 모르겠군.”

이서휘의 전생에서도 군림맹과 백도맹은 사소한 일을 두고 다툼이 잦았다. 이서휘는 전생에 사자 역할을 수행한 적이 없어 몰랐지만, 누가 사자로 갔든 간에 이런 일을 당했다면 사이가 틀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막무영(莫武英)이 대꾸했다.

“백도맹에선 군림맹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소. 백도맹이 이미 있는데 맹이라는 게 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오.”

이서휘가 눈을 빛냈다.

“고작 그런 이유인가?”

이서휘는 그제야 지난 생애에 군림맹과 백도맹이 틀어진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따위 후기지수들마저 군림맹을 무시하고 있었다.

오늘 밤에 벌어진 일과 비슷하게 군림맹의 사자가 무시를 당했다면 그 다음 행보는 뻔한 것이다. 군림맹의 사자가 돌아가서 보고를 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군림맹이 백도맹을 문책하는 사자를 보낼 터. 그런 식으로 쓰잘데기 없는 신경전만 지루하게 이어졌을 것이다. 한 마디로 백도맹 전체가 군림맹을 얕잡아 봤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자신이 백도맹에 방문한 이상, 무시당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서휘는 세 사람을 더 추궁해봤자 소용없으리라 생각했다. 대신에 이서휘는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들이킨 다음에 속으로 다짐했다.

‘돌아가기 전에 어떻게든 백도맹에서 유명한 고수를 한 명 꺾고 가야겠구나……. 괘씸한 놈들이야. 정식으로 비무를 요청해야겠군.’

괜히 트집을 잡아서 겨루게 되면 백도맹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정식으로 요청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미 백도맹주 범우와 안면을 튼 상황이었기 때문.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돌아들 가게. 자네들이랑은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군.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가겠네. 대신에…….”

이서휘는 말을 하다 말고 마도의 무리를 가차 없이 벨 때나 발산하던 살기를 갑자기 내뿜었다. 이서휘의 기도가 순식간에 변하면서 세 사람을 찢어버릴 듯이 위압적인 안광이 두 눈에서 뿜어 나왔다. 세 사람은 그제야 이서휘와 자신들의 격차가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서휘가 말했다.

“……군림맹의 이서휘가 곧 백도맹의 고수들에게 도전하겠다고 가서 전하게. 정식으로 비무 요청을 할 것이야. 격에 맞는 상대가 나왔으면 좋겠군.”

세 사람은 어쩐지 말 한 마디를 못한 채로 이서휘가 시선을 돌려 일어날 때까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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