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악의(惡意)>
벽운장.
벽운장은 일월마가가 잠시 남양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은신처이자 안가(安家)가 됐다.
간천(簡天)은 벽운장에 도착해 일월마가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데 간천을 맞이하는 일월마가의 태도가 무척 담담했다.
그동안 간천의 향방은 다른 마존들이 모두 주시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이야깃거리였다. 그런데 스스로 일월마가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환영하기는커녕 덤덤하게 일상에 대한 이야기나 주고받고 있었다. 그 중에 간천보다 먼저 와있던 화마가(火魔家)의 구양휘 장로가 간천을 먼저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간 선배, 오셨습니까?”
“자네가 이곳에 왜 있는가?”
“화아(火兒)가 죽었습니다.”
“뭐라? 어쩌다가?”
“검마에게 당했습니다.”
“허, 미친 새끼들……. 검마는 거처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을 텐데? 먼저 공격했나?”
“네, 그렇게 됐습니다.”
“어리석구나.”
구양휘가 침음을 흘리자, 그 사이 간천이 일월마가 사람들을 훑어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그나저나 위극신(韋克神)이 많이 컸구나. 사람들이 알아서 몰려오는 형국이야.’
서늘한 바람이 산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어 제법 서늘했다.
그때, 자색 피풍의(避風衣)를 걸친 일월마존(日月魔尊) 위극신이 등장해 간천을 바라보며 씨익 웃은 다음에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간 장로님, 오셨습니까?”
“신아, 오랜만이로구나.”
간천이 자연스럽게 하대하자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 순간에 자리에서 일어난 위극신이 간천 옆에 앉은 자에게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비켜라.”
“네.”
위극신이 자연스럽게 간천 옆에 앉더니 손수 술병을 쥐고 간천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이게 대체 얼마만입니까? 주 장로님 일은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었다. 군림맹을 너무 얕잡아봤어.”
위극신은 자신의 잔에도 직접 술을 따르더니 수하들에게 말했다.
“들어라.”
“네.”
위극신이 잔을 높이 들고 기다리는 동안 수하들이 분주하게 잔을 채우고 위극신을 바라봤다. 위극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간천에게 말했다.
“간 장로님, 드시지요. 주양위 장로님을 생각하는 이별주로 마시겠습니다.”
“그러세.”
간천은 출렁이는 술잔의 표면을 잠시 바라보다 무표정하게 술을 들이켰다. 이어서 위극신을 포함한 일월마가 사람들이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여기저기서 편한 얼굴로 간천과 위극신을 번갈아 바라봤다.
위극신이 말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왜? 슬슬 사고라도 치려고 그랬나?”
“그렇습니다.”
“궁금하군. 자네가 무슨 사고를 칠 것인지…….”
그때, 벽운장 바깥에 있던 수하 한 명이 들어와 방문자가 더 있음을 알렸다.
“형제들이 오셨습니다.”
“그러냐? 들라 해라.”
간천이 감탄사를 섞어가며 말했다.
“허, 명(明)이와 단(端)이도 온 겐가?”
“네. 백룡지회에 맞춰 오기로 했었지요.”
일월마가는 분위기가 묘했다.
마도라 하기엔 어딘지 모르게 차분한 분위기가 시종일관 흘러 넘쳤다. 그때, 위극신의 친형제들이 벽운장으로 수하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위극명(韋克明)은 위극신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고, 위극단(韋克端)이 위극신의 막내 동생이었다.
위극신이 반가운 얼굴로 일어나자 간천을 제외한 자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어서 오너라.”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큰 형님, 철옥에서 고생하셨다고요?”
“별일 없었다.”
간천이 기이한 장면을 구경한다는 것처럼 감탄사를 내질렀다.
“허허, 일월마가의 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였군.”
간천의 말에 위극신의 형제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간천을 맞이했다.
“간 장로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잘 있었다네. 그런데 이곳으로 다들 몰려오는군. 다른 손님도 더 올 분위기로구만.”
그 말에 위극신이 형제들을 앉히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금 더 올 사람이 있습니다만…….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일월마가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려는지 알고 간천이 자리를 피해주기 위해 일어섰다. 그러자 위극신이 간천에게 말했다.
“간 장로님, 계셔도 무방합니다.”
“그런가?”
“물론입니다.”
위극신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자 일부 직급이 낮은 자들이 대청 바깥으로 조용히 나가고 있었다.
이어서 벽운장 곳곳에서 그그극 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사방팔방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던 것.
순식간에 정적이 감돌자 위극신이 자신에게 모인 손님들과 일월마가의 수뇌부들을 돌아보며 말투를 바꿨다.
“일월마가의 가주 입장에서 말을 편하게 드리겠소.”
위극신이 좌중을 돌아본 다음에 말을 이어 나갔다.
“교주님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일월마가(日月魔家)의 수뇌부들은 백룡지회에서 전원이 죽어야 할 것 같소.”
위극신의 말에 일부가 눈을 감고, 일부는 침음을 흘렸다. 특히 위극신의 두 동생이 노골적으로 불만 섞인 표정으로 위극신을 바라봤다.
그러나 말 한마디 내뱉는 자가 없었다.
위극신이 말을 이었다.
“일단은 백룡지회에 참가하는 자들이 우승까지 할 수 있도록 진행하시오. 실패해도 큰 상관은 없소.”
서너 명이 동시에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맹주 비무전에서는 서열에 따라 장로들이 나섰다가 최후에는 좌우사자들이 나설 것이오. 이때 되도록 구파의 장문인들이 나오면 그 자리서 동귀어진이라도 해서 장문인들의 목숨을 끊도록 하시오.”
일월마가의 장로들과 좌우사자가 대꾸했다.
“명을 받듭니다.”
아무도 토를 다는 사람이 없자 간천이 홀로 ‘허…….’ 하는 감탄사를 내질렀다.
위극신의 말이 이어졌다.
“맹주가 끝까지 나오지 않거나 죽이는 데 실패할 경우 좌안문(左安門), 우안문(右安門), 철옥(鐵獄)의 독방 구역, 승천각(承天閣)에 설치한 잔사진천뢰(殘絲振天雷)가 폭발할 것이오. 동시에 남양 일대에 주둔한 일월마가와 동생들이 데려온 병력이 전부 투입될 것이오. 또한 아직 소식은 없으나 총본산도 지원을 약속했으니 합류할 것이오. 목표는 백도맹 전체. 퇴각 명령은 따로 내리지 않을 것이니 전원, 백도맹에서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시오. 백룡지회 참가 시, 복장을 다르게 할 것이며 두 명 이상 몰려다니지 마시오.”
아무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자 화마가(火魔家)의 구양휘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보게 일월(日月), 총본산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보낸다는 것인가? 움직임이 보고된 적은 없는데.”
“저도 모릅니다.”
“아니, 그것도 듣지 못하고 일월마가 홀로 백도맹을 치겠다는 말인가?”
“군림을 먼저 치고 일부 마가가 남양에 모이기로 했으나 검마가 이외에는 소식이 없습니다. 일월마가가 본래 백도맹을 치기 위한 준비를 오랫동안 맡고 있었으니 실행에 옮길 뿐입니다…….”
말을 하던 위극신이 간천을 비롯한 손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간 장로님, 구 장로님을 비롯한 손님 여러분들은 이번 일에 나서지 말아주십시오. 특히 간 장로님은 무공이 뛰어나시니 일월마가가 물러서지 않고 전멸 당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셨다가 교주님께 상세히 보고 드렸으면 하는 부탁입니다.”
무슨 생각인지 간천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알겠네. 일월마가의 분전에 이십일가(二十一家)와 총본산이 아주 감명을 받겠군. 이제 나머지 마가가 똘똘 뭉칠 게야. 일월마가가 이렇게 큰 희생을 치렀으니 말이야.”
“그럼 다행입니다.”
말과 함께 위극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지켜보는 자들에게 등을 내보이며 대청 안쪽을 향해 말했다.
“쌍옥(雙玉), 나와라.”
일월마가의 수하들이 무언가 불만을 말하려는 찰나에 위극신이 교묘하게 분위기를 끊고 누군가를 불렀다. 그때, 대청의 안쪽에서 청면인(靑面人)과 적면인(赤面人)이 걸어 나왔다.
일월마가 사람들은 청면인과 적면인을 보자마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심지어 위극신의 동생들이 형이 하려는 행동을 제지하려고 입을 열었다.
“형님, 굳이 그렇게까지…….”
“큰 형님!”
하지만 위극신이 한 번 뒤를 돌아보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위극신이 청면인과 적면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청아(靑兒), 적아(赤兒). 이제 모두 같은 날에 죽기로 하였다.”
위극신의 말에 청면인과 적면인이 서로를 얼굴을 한 번 바라본 다음에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었다.
간천은 일월신공에 대해 들은 바가 있어 위극신이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눈치를 채고 있었으나, 다른 손님들은 이 상황이 도대체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청면인과 적면인.
언젠가는 위극신의 일월신공에 흡수될 혈옥귀체(血玉鬼體)와 청옥귀체(靑玉鬼體)였다. 이들이 다른 귀체(鬼體)와 다른 점은 일월마가에서 위극신 형제들과 함께 자랐다는 점이었다.
이들도 사람이다.
귀체(鬼體)가 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자들의 피를 취했지만 죽음의 순간만큼은 두렵기 그지없었다. 언젠가 가주에게 흡수될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 시기가 이렇게 빠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 죽음이 바로 오늘 이 순간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감정이 제거 되어 있던 두 마인(魔人)이 무척 오랜만에 절망이라는 감정을 맛보고 있었다.
하지만 저 위극신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좌중을 무표정한 낯빛으로 돌아보면서 두려움을 덜어주고 있었다.
“곧 나도 너희와 함께 죽을 것이다. 그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백도와 마교, 이십일가 전체에 일월마가의 공포를 새기고 전원이 불꽃에 휩싸일 것이다. 너희 둘의 삶은 내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니……. 오너라. 너희의 힘으로 내가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어주겠다.”
이 물러날 수 없게 만드는 위극신의 어조…….
좌중에 감도는 비장한 침묵…….
결국 청면인과 적면인의 마음에 남아 있던 한 줄기 미련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이 눈을 질끈 감으며 대꾸했다.
“명을 받듭니다.”
동시에 일월신공(日月神功)을 일으킨 위극신의 좌측 눈동자가 푸르게 변하고 우측 눈동자가 이어서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손님 중 누군가가 탄성을 내질렀다.
“아…….”
이어서 위극신의 좌장과 우장에서 바람이 일더니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청면인과 적면인의 단전이 뚫렸다.
“크윽.”
이어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핏물이 땅바닥을 적시기도 전에 두 개의 혈옥(血玉)이 일월신공의 월양명취공(月煬命醉功)에 의해 위극신의 손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청면인과 적면인은 죽음이 고작 이런 것일까 라는 생각에 조금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위극신이 월양명취공을 멈추는 순간에 끔찍한 고통이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순간, 위극신이 허공에 양손을 뻗더니 월양명취공을 엇갈리게 내뱉어 두 사람의 목을 기이한 각도로 비틀었다.
우드득― 우드득―
두 사람이 참으로 허망하게 바닥으로 쓰러지자 누군가 와서 시체들을 안고 사라졌다.
위극신은 귀체를 두 명이나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심법을 운용하지 않은 채로 다시 상석에 앉아 말을 이었다.
“이제 각오들이 좀 되셨습니까?”
그 말에 위극신의 동생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형님, 알겠으니 들어가 쉬십시오. 나머지 얘기는 좀 저희끼리 해보겠습니다.”
“둘째 형님 말씀대로 어서 들어가십시오.”
형제들의 말에 위극신이 꾸짖었다.
“시끄럽다. 일월마가가 죽음을 각오했는지 난 아직 확인을 못했다.”
위극명이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일월마가의 좌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좌사, 뭐라고 말 좀 하십시오.”
위극명의 물음에 좌사자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명을 따를 뿐입니다.”
“하! 것 참.”
위극명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싸늘한 눈빛으로 좌중을 돌아보면서 혀를 찼다.
“기가 차는군. 다 죽자는 데도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어. 정녕, 다 죽을 셈이오?”
위극신이 동생의 불만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머무시오. 술은 과하게 먹지 말고. 술을 많이 마시는 자가 있으면 우사자가 저 쪽에 감금할 것이외다. 그럼 이야기들 나누시오.”
그제야 위극신이 일어나더니 안채로 들어갔다. 위극신이 안채로 들어가자 그제야 여기저기서 한숨과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때, 위극신이 하는 짓을 지켜보던 간천이 홀로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간천이 웃음을 터트리자 위극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간 장로님은 무엇이 그리 즐거워 웃으십니까?”
위극명의 말에 간천이 히죽 웃으며 일월마가에게 말했다.
“어찌나 이렇게 연기들을 잘 하는지 나도 깜빡 속을 뻔 했네. 뭐 연기가 아니래도 좋아. 나는 생각이 다르다네. 다시 이야기를 해보세. 아니면 내가 먼저 말할까?”
간천이 안광을 빛내며 일월마가 전체를 위압적으로 노려보자, 위극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저는 아둔하여 간 장로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럼 먼저 말씀해 주시지요.”
간천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겨우 일월마가를 데리고 백도맹의 한 복판에서 죽느니 마교 전체를 이끌고 오는 게 낫지 않겠나? 백도맹부터 부수고, 그 다음은 군림맹……. 그 다음엔 병력을 나눠 구파의 본거지와 군소방파를 쓸어버리고……. 지켜보고 있을 흑도맹은 마지막에……. 뭐 이런 이야기나 한 번 들으러 왔더니 일월(日月)의 농락이 과연 대단하군. 아니 그런가?”
“농락이라니요? 교주님이 병력을 안 내어 주시니 이러는 게 아닙니까?”
간천이 한숨을 내쉬며 결국 말을 꺼냈다.
“그럼, 교주부터 죽여야지.”
간천의 말에 손님들과 일월마가의 사람들의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침묵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교주를 죽이자는 말씀입니까?”
사람들이 되묻자, 간천은 일월마가(日月魔家)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코웃음을 쳤다.
일월마가에 모인 사람들 대다수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간천에게 역모를 꾸민다며 꾸짖는 자들이 없었다. 그 작태가 가소로웠다.
‘영악한 놈들…….’
간천이 보기에 일월마가만큼 자신들의 전력을 감추고, 온전하게 보전하고 있는 세력도 없었다. 더군다나 백도맹 공략의 선봉을 맡고 있었다. 총본산에서 어서 일을 꾸미라고 해도 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차일피일(此日彼日) 미루던 일월마가다.
간천이 교주를 죽이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이들은 어떻게 했을까? 위극신의 말대로 백도맹에서 전원이 죽음을 맞이했을까? 간천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간천은 일월마가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위기를 떠 보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간천은 본래 번뇌마가의 인물이다.
지금은 번뇌마가로 복귀하지 않고 천하를 떠돌고 있었으니, 일월마가의 눈에는 교주의 밀명을 받고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오해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간천도 일월마가의 의심을 알았기 때문에 이야기를 듣는 척 하다가 교주를 치차는 말을 하고 있었다.
결국, 위극신의 바로 아래 동생인 위극명(韋克明)이 말을 꺼냈다.
“간 장로님, 실로 엄청난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그 말에 간천이 대담하게 대꾸했다.
“자네들과 생각이 다르다면 이 자리서 날 죽이게. 그런다고 죽일 수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만…….”
간천이 화마가의 구양휘 장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구양휘는 그제야 능글맞은 표정으로 자신은 결정권이 없다는 식으로 대꾸했다.
“저는 어쨌든 일월마가에 몸을 의탁하기로 했습니다. 일월마존이 결정하는 대로 따를 생각입니다.”
간천이 콧방귀를 끼며 대꾸했다.
“그런가? 좋은 자세로군. 자네는 됐고. 나머지 손님들은? 내가 모르는 자도 있군. 말을 똑바로 해야 할 거야.”
위극명이 대꾸했다.
“똑바로 해야 하다니요?”
간천이 대꾸했다.
“교주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가는 이곳에서 살아서 나갈 수 없을 테니까. 안 그런가?”
“허허허, 일월마가가 마치 그 동안에 쭉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하시는 군요. 오히려 저는 간 장로님이 교주님께 그렇게 반감이 크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말장난 하지 말게.”
간천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일월마가가 교주를 친다면 내가 돕겠네. 아니라면 관심이 없으니 이만 가야겠어. 일월에겐 나중에 보자 이르게.”
간천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위극명이 말렸다.
“간 장로님, 일월마가의 진퇴(進退)는 모두 형님이 결정합니다. 저희와 이야기하실 게 아니란 말이지요.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함께 형님과 이야기를 더 해보시지요. 저 또한 마가의 일원으로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에 일월마가의 좌우사자들이 위씨 형제들과 조용히 일어났다.
☆ ☆ ☆
위극신은 안채에서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동생들과 좌우사자, 간천이 몰려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시비에게 차를 더 내오라 일렀다. 위극명이 편한 말투로 위극신에게 말했다.
“형님, 이야기 좀 합시다.”
“앉아라. 간 장로님도 앉으시지요.”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위극신이 덤덤한 말투로 말을 꺼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가?”
위극명이 간천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형님, 이 꼭두각시놀음은 그만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간천은 형제들이 나누는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위극명이 말을 이었다.
“마가의 숙원은 마도천하(魔道天下)입니다.”
위극신이 우습다는 듯 동생의 말을 따라했다.
“후후, 마도천하.”
“그렇습니다. 교주가 총본산에 눌러 앉아 마가들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간 이십일가가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니 그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후계자를 세우겠다는 미끼를 내건 경쟁 때문에 총가와 점점 격차가 벌어지고, 그 여파로 총본산만 더욱 굳건해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교주를 먼저 친 이후에 마교를 장악하고 다시 돌아오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흥…….”
코웃음을 치던 위극신이 짐짓 엄격한 표정으로 능청을 떨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어찌 교주님에게 위해를 가한단 말인가? 이제 슬슬 검마가(劍魔家)와 우리가 승부를 가린 다음에 후계자 수업을 한 이십년이나 삼십년 정도, 충실하게 받다보면 자연스럽게 교주 승계가 이뤄질 것이야.”
위극신이 심각한 얼굴로 정론을 이야기하자 잠시 침묵이 감돌다가 위극명부터 웃음을 터트렸다. 이어서 위극단과 간천이 함께 웃고 좌우사자들마저 표정 관리를 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다 죽자 하더니 어찌 검마와 싸울 수 있단 말입니까?”
“하하하하하. 맞습니다. 이십 년을 기다리면 되는 일을 우리가 너무 급했군요.”
위극신이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백룡지회나 잘 합시다. 일월마가를 이끌고 백도맹에서 죽으나 총본산을 치다 죽으나 매한가지요.”
간천이 대꾸했다.
“이십년이나 후계자 수업을 받아도 자네한테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게야. 또한 마가의 수장들이 전부 죽을 때까지 교주는 나서지 않을 게야. 자라서 마교를 이끌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제 늦둥이를 감싸느라 점점 미쳐가고 있다는 소문이네. 성장할 때까지 어떻게든 무공을 전수하면서 기다릴 뿐이겠지.”
이렇게까지 간천이 얘기하자, 그제야 위극신이 제대로 된 대꾸를 내놓았다.
“주양위 장로님이나 음마가의 공손일엽(公孫一葉) 장로께서 살아계셨으면 능히 수호사왕이나 교주의 좌우사자를 한 명씩 감당하셨겠지요.”
간천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해놓고 여태 능청을 떨었나?”
위극신이 양손으로 깍지를 끼며 진실을 토로했다.
“그렇습니다. 전 생각이 많습니다. 간 장로님이 도와주신다면야 승산이 올라가겠지만……. 보십시오. 제 못난 동생 두 명이 힘을 합쳐도 좌우사자는커녕 수호사왕 한 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감당할 것이라 한번 가정해봅시다…….”
위극신이 동생들을 바라보자, 위극명과 위극단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있었다.
“우리 좌우사자가 한꺼번에 덤비면 겨우 수호사왕 한 명을 붙잡을 수 있겠지요. 염악마제는 죽었으니 이제 하나가 남았습니다. 물론 간 장로님이 감당하실 수 있겠지요.”
그 말에 간천이 씨익 웃었다.
“문제는 좌우사자와 교주입니다. 바깥에 있는 일월마가 장로들과 구양휘 장로가 다 덤벼도 좌사자 한 명을 감당할 수 없을 터. 하지만 감당할 것이라고 셈을 해보겠습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셈을 한다 치더라도 결국엔 제가 홀로 교주와 우사자를 죽여야 합니다.”
위극신이 말과 함께 씨익 웃었다.
“더군다나 단주들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결사대가 막아서야 할 겁니다. 결사대가 길어야 한 시진 정도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군요.”
위극신이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여러분들이 상대해야 할 수호사왕과 좌사자를 한 시진 내에 죽이고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대꾸를 하지 못하자 위극신이 선을 그었다.
“전멸입니다. 교주는 총본산에서 도전 받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수십 년 동안 즐겼지요. 반란을 진압할 때마다 보아라, 이게 너희와 나의 격차다. 반란과 관련이 없는 자들마저 불려가서 지긋지긋하게 빈정거림을 들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최소한 백도맹에서 죽는다면 이 지긋지긋한 빈정거림은 듣지 않아도 될 겁니다.”
“후후후후.”
“하하.”
위극신의 말에 사람들이 심각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웃음을 지었다. 간천은 그간 들은 게 가장 많아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다.
위극신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십년은 걸릴 것이라 애초에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양위 장로와 공손일엽 장로가 죽은 이후로는 당분간 교주를 치겠다는 생각은 접었습니다.”
그 말에 간천이 대꾸했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간천이 욕지거리를 내뱉어도 위극신은 슬며시 웃을 뿐이었다. 간천이 말했다.
“어차피 기습을 펼쳐야할 터. 사왕전(四王殿)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알고 있네.”
“그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가? 놀랄 틈이 없군. 그렇다면……. 우사자는 검마(劍魔)에게 맡기세.”
간천의 놀라운 말에 위극명이 대답했다.
“검마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상대가 교주입니다.”
위극단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교주가 전대 검마를 죽였기 때문에 도검불침(刀劍不侵)을 어떻게 상대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지요.”
그 말에 간천이 고개를 저었다.
“교주는 일월(日月), 자네가 상대하게. 그리고 전대든 당대든, 검마는 사실상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아. 검마들은 항상 그랬네. 제 아비와 마찬가지로 싸우다 죽을 놈이야. 더군다나 아무리 광인이라 할지라도 아비의 원수를 갚게 해주겠다는데 마다할 놈이 아닐세. 그럼, 검마를 설득하는 것은 내가 하겠네. 자네들이 찾아가긴 어려울 터이니.”
일월마가의 수뇌부들이 잠자코 있자 간천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백룡지회나 잘 마무리하게. 전멸당한 것으로 위장하거나 모습을 숨기는 게 좋을 거야. 아니지. 자네들도 생각이 있을 터. 나는 이야기 된 것으로 알고 검마가에 다녀오겠네.”
그제야 위극신이 간천에게 물었다.
“검마가 어찌 우사자를 감당하겠습니까?”
그 말에 간천이 히죽 웃었다.
“우사자가 어찌 검마를 죽일 수 있겠는가?”
위극식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겠군요. 맞으면서 버티겠지요. 그럼 일단 검마의 의중을 물어봐 주십시오.”
위극신이 간천을 배웅하겠다고 일어나자 나중에는 일월마가 전체가 간천이 벽운장을 나가는 모습을 보고 예를 취했다.
위극신이 벽운장 바깥을 바라보며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자 위극명이 말했다.
“형님, 결정하시지요. 어디서 목숨을 내놓을 것인지……. 그나저나 간 장로가 참 무섭습니다.”
동생의 말을 흘겨 들은 위극신이 벽운장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화마가의 구양휘 장로를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구 장로님은 나와 얘기 좀 합시다. 이리 오십시오.”
위극신이 대뜸 자신을 부르자 구양휘는 내심 깜짝 놀랐다. 한편으론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했기 때문에 주변을 살펴보다가 침을 삼키며 위극신에게 다가갔다.
구양휘 장로가 위극신에게 걸어가는 동안에 위극신이 덤덤하게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일월마가(日月魔家).”
“네, 마존.”
위극신이 일상적인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말이 새나갈 수 있으니 다른 손님들은 다 죽여라.”
걸어오던 구양휘 장로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그러자 위극신이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씨익 웃으며 구양휘를 불렀다.
“구 장로님, 뭘 그렇게 긴장하십니까?”
“아……, 그게……. 아닐세.”
위극신의 동생들을 포함한 일월마가의 사람들이 벽운장에 손님으로 왔던 자들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거리낌없이 몰살하는 와중에 위극신이 구양휘 장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안채로 안내했다.
“가서 이야기합시다. 간 장로님이 좋은 의견을 주셔서 공유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그런가?”
“구 장로님도 결단을 내리셔야지요.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그래. 들어봐야지.”
위극신을 따라가는 구양휘 장로는 어쩐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 ☆
며칠 후 단향객잔(丹響客棧).
백룡지회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이서휘는 백도맹으로 출발하기 전에 단향객잔에서 동료들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도삼이 말했다.
“백룡지회 참가비를 받다니 백도맹의 상술(商術)이 대단하네요.”
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큰 도적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호주머니를 턴다니까. 우리처럼 허접한 도둑들은 백도맹이 하는 짓을 잘 배워놔야 해.”
도이의 말에 이서휘, 단우혁, 백류혼이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도이가 이서휘를 보며 말했다.
“대주도 빨리 한 자리 차지해서…….”
이서휘가 도이를 노려보면서 대꾸했다.
“차지해서 뭐?”
도이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옥 소저와 알콩달콩 살림도 차리고 잘 살라 이 말이지. 대주 닮은 아들도 낳고.”
“뜬금없는 녀석.”
도이가 대답을 하지 않고 뜨거운 차를 입으로 후 불어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마셨다.
이서휘가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백룡지회 우승해봤자 별 거 없으니까 그냥 경험이라 생각하고 적당히 해. 몸 다치지 말고.”
그 말에 단우혁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적당히 되겠느냐? 비무를 하다보면 피가 끓기 마련인데. 그나저나 엊그제 죽은 놈들 때문인지 백도맹이 아주 날이 서 있더군.”
단우혁의 말에 백류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비를 하고 있겠지. 자하도주(紫霞島主) 구하홍(丘霞泓)이라는 놈이 마공 때문에 낯빛이 변하던 것을 다들 봤을 테니…….”
이서휘가 먼저 일어나며 말했다.
“자! 이제 슬슬 가보자. 백도맹으로.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보자꾸나!”
이서휘는 직접 부딪쳐가면서 백도맹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 이서휘마저도 백도맹 곳곳에 이미 설치되어 있는 일월마가의 잔사진천뢰(殘絲振天雷)를 파악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군림맹의 신분으로 백도맹을 샅샅이 구경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전생의 시기상으로는 눈을 잃고 암담한 나날을 보내던 시기라 백도맹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도 이서휘의 마음 한쪽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