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1장. 사패(四霸)>
이서휘는 탁자에 쌓인 은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구범천 쪽에만 은자가 수북했다.
‘아무리 단우혁이 현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지만 단우혁이 지닌 기도를 읽는 자들도 없다니.’
물론 백도맹에 몰려든 무림인들이 구범천을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곤륜파, 무려 구파의 일원이자 백도맹에서도 위세가 대단한 명문정파다.
더군다나 지난 백룡지회에서는 구범천이 준우승을 했었다. 그 때문에 구경꾼들은 아예 단우혁을 비웃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한 번 크게 당해보라는 심정들이 표정에 묻어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이서휘가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날이구나. 돈도 벌고 단우혁의 위명도 널리 알려지겠군.’
그나저나 도이와 도삼마저 고개를 갸웃하는 눈치였다.
“대주님, 정말 단 공자가 이깁니까? 상대는 무려 곤륜파라고요. 어느 놈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지난 백룡지회 준우승자가 구범천이라던데요?”
이서휘가 혀를 차며 대꾸했다.
“너희는 이제 나를 믿지 않느냐?”
“대주님을 믿는 것과 단 공자가 곤륜파의 고수와 겨루는 것은 다른 문제죠.”
그 말에 이서휘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단우혁을 믿는다.”
도이가 대꾸했다.
“와, 뭔가 멋있는데 재수 없다.”
단우혁이 진다면 사패가 지는 것이다.
사패라는 위명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버텼기 때문에 얻은 위명이 아니었다.
강했기 때문에 얻었던 위명이다.
더군다나 이서휘가 가장 뒤늦게 검제라 불리면서 사패에 합류했을 때 무림인들은 종종 이서휘가 사패의 말석이라 여겼다. 이서휘는 검제 시절에 필살검(必殺劍)을 사용했기 때문에 비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무림인의 눈에는 다른 사패들이 이서휘보다 더 강해 보였다는 말이다. 이번 비무만 이기면 단우혁의 이름 석 자는 앞으로 제법 위세를 떨칠 게 분명했다. 잘생긴데다가 호쾌한 성격을 지녔으니 과거처럼 여인들에게도 꽤 인기를 끌 게 분명했다. 물론 단우혁도 여자에 대해서는 이서휘와 더불어 멍청한 면이 많은 남자였다. 남들이 다 아니라고 하는데도 혼자 미인이라고 우긴다던가, 여인은 허벅지가 예뻐야 한다든가하는 묘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서휘는 관심 없다는 식으로 해놓고, 그 누구보다 더 유심히 단우혁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있었다.
‘도왕(刀王)이 될 사내가 곤륜파의 후기지수한테 밀린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증명해다오.’
☆ ☆ ☆
예의가 오고가고 비무가 시작되자, 백룡지회에 참가하려는 백류혼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단우혁이 육중한 청룡도를 쥐고 구범천을 노려봤다.
“자, 시작합시다.”
단우혁은 늘 기세가 좋았다.
구범천도 실전 경험이 많아 단우혁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걸음을 옮기면서 잠시 거리를 재고 있었다.
곤륜파의 검법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구범천이 주로 익힌 것은 천풍취설검(天風吹雪劍)이었다.
역사가 오래된 곤륜파답게 상승의 무공을 배우려면 먼저 일반 문도들이 익힐 수 있는 낮은 단계의 검법을 배워야 했는데, 그나마 일반 문도들이 익힐 수 있는 최상승의 검법이 바로 천풍취설검이었다.
하지만 단우혁에겐 부질없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인 단의황으로부터 전수받은 도법에는 대다수 정파의 검법을 깨뜨릴 수 있는 묘리가 담겨 있었다.
이는 단의황이 평생에 걸쳐 천하를 주유하면서 비무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이를 단우혁이 전수를 받았으니 완벽하게 깨우치지 못한 구범천의 천풍취설검은 단우혁에게 크게 위협적인 공격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채―앵! 까―앙!
단우혁과 어우러지던 구범천도 이를 깨달았다. 몇 번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검을 쥔 손아귀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 때문에 천풍취설검의 묘리를 펼치기도 전에 강맹하면서도 빠른 청룡도가 날아와 검의 궤적을 이리저리 찍어 누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단우혁이 심리전까지 펼쳤다. 정상적인 보법을 밟다가 느닷없이 왼발로 땅을 찍어버리자 돌덩이들이 튀었던 것.
콰아아아앙―
깜짝 놀란 구범천이 뒤로 물러나면서 천풍취설검의 비기인 대풍파설(大風破雪)을 날렸다. 구범천이 휘두른 검신에서 뻗어 나간 십여 발의 예리한 검풍(劍風)이 단우혁을 향해 맹렬하게 쏟아졌다.
쏴아아아아―
그 모습이 마치 눈보라가 치는 것 같았다.
단우혁은 검풍의 기세를 파악하자마자 코웃음을 치면서 청룡도를 양 손으로 쥐고 섬뢰진도(閃雷震刀)를 일으켰다.
쩌엉―! 파아아앙!
청룡도에 맺힌 푸르스름한 섬뢰진도가 허공을 가르자 날아오던 대풍파설이 기세를 잃고 허공에 흩날렸다.
이로써 지켜보는 자들은 두 사람의 내공 격차가 상당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청협문이라 했나? 대단한데.”
그제야 구경꾼들은 단우혁의 내공이 구범천보다 훨씬 윗길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단의황이 첩첩산중(疊疊山中)과 심산유곡(深山幽谷)을 뒤져 온갖 영약을 구해다가 단우혁에게 먹였으니 감히 같은 나이의 청년들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의 내공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이서휘의 저 재수 없는 말이 진실이었던 셈이다.
나이와 무관한 일이었다. 호랑이는 호랑이였던 것이다. 고작 곤륜파의 후기지수에게 패하는 실력이었다면 단우혁은 진작 괴패마존의 손에 죽었을 터였다.
단우혁은 구범천이 미처 호흡을 고를 틈도 없이 불쑥 전방으로 솟구쳐 무척 단조로운 동작으로 허공을 갈라 대도파랑(大刀波浪)을 쏟아냈다.
쐐애애애액―!
강맹한 도기가 쏟아지니 일순간 구범천의 모든 초식이 무용(無用)해질 지경이었다.
이서휘가 외쳤다.
“청협의 도법이 참으로 시원하구나!”
단우혁의 대도파랑이 바닥으로 쏟아지자 콰콰콰― 소리를 내면서 표면을 가르고 돌덩이를 튀겼다. 청룡도에서 뻗어 나간 도기에 땅이 움푹 파이자 사람들의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오오오.”
“대체 어디에 있던 고수란 말인가?”
그 엄청난 위력에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구범천이었다. 그가 서둘러 몸을 피하자 어느새 땅을 박차고 콰앙! 소리와 함께 튀어나간 단우혁이 청룡도를 짧게 끊어 치면서 예리한 도풍(刀風)을 연달아 일으켜 구범천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쐐앵! 쐐앵!
구범천은 단우혁이 뿌려대는 도풍을 좌장과 검으로 튕겨내다가 가까스로 밀려들어 오는 청룡도를 검으로 막았다.
까―앙!
구범천은 그제야 단우혁의 정체를 깨닫고 있었다.
‘아, 청협문주 단의황이 무척 강하다는 얘기는 종종 들었는데……. 이 자가 청협문의 소문주였구나.’
그제야 구범천은 격차를 깨닫고 이를 악물면서 방어에 치중했다.
챙챙챙챙챙! 까앙!
하지만 단우혁의 도법은 이렇게 방어에 치중하는 상대를 농락하기에 딱 좋았다. 단우혁은 구범천을 밀어붙이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구범천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언가 비장의 수가 있지 않을까 경계했던 것. 그 덕분에 구범천은 호랑이의 기세에 눌린 것처럼 점점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달아 이어졌다.
구경하던 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도삼에게 말했다.
“역시 우리가 약한 게 아니라 단 공자가 강한 거였어.”
도삼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근데 형 우리도 백룡지회에 나가도 되겠는데?”
도둑 형제들의 어처구니없는 대화가 이어져도 이제는 아무도 비웃는 자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후기지수가 참가하는 대회라면 이서휘에게 시도 때도 없이 맞으면서 지낸 도이와 도삼도 어느 정도 활약할 수 있는 무대였다.
그나저나 이서휘 일행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단우혁의 비무를 보다가도 힐끔거리면서 탁자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은자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서서히 단우혁이 승부를 끝내려고 하자, 누군가가 욕설을 내뱉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기랄, 어디서 튀어나온 사기꾼 새끼들이야?”
그러자 누군가가 대꾸했다.
“이거 백도맹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완전 사기도박(詐欺賭博)이잖아.”
“그러는 넌 돈을 왜 걸었는데? 나보다 더 걸더구만.”
“아니, 그게 아니고……. 아! 이게 대체 뭐야! 구범천이 진다는 건 말이 안 돼!”
그 말에 팔짱을 낀 채로 구경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이가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돼.”
구경하던 이서휘와 도삼이 도이의 심술에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단우혁은 비무를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남들 눈에는 그저 화려하게 보였을 구범천의 천풍취설검은 단우혁의 청룡도 앞에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청룡도의 육중함과 단우혁의 내공, 그리고 단우혁의 실전 경험이 어우러져 구범천은 천풍취설검의 이십팔수(二十八手)도 미처 다 펼쳐보지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검과 도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어보라.
챙챙챙! 하는 균형감 있는 타격음이 어느새 사라지고 마치 어린아이가 쥔 검을 혼내는 것처럼 까앙! 소리와 함께 구범천의 장검이 이리저리 튕겨 나가고 있었다.
단우혁이 싸늘한 표정으로 구범천을 바라봤다.
‘자, 끝내주마.’
단우혁이 구범천의 허리를 섬뜩하게 노리고 청룡도를 크게 휘둘렀다.
후―웅!
구범천이 훌쩍 뒤로 물러나자, 휘두르던 궤적의 힘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몸을 한 바퀴 돌린 단우혁이 힘을 약간 줄인 일도양단(一刀兩斷)을 쏟아내 큼지막한 도풍(刀風)을 날렸다.
쐐애애애애앵―!
도풍이 구범천의 전신에 쏟아졌다. 검을 들어 막는다고는 했으나 도풍 전체를 막지는 못했다.
순간, 쫘아아악 소리와 함께 구범천의 머리부터 단전까지 세로줄이 길게 패였다. 의복이 있었던 곳은 의복이 찢어졌고, 얼굴과 목엔 채찍에 후려 맞은 것처럼 붉은 줄이 길게 이어지면서 구범천이 날아갔다.
더군다나 도풍에 맞는 순간, 구범천은 죽는다고 생각했는지 너무 놀란 나머지 뒤로 쓰러지면서 기절을 해 버렸다. 하지만 단우혁은 일부러 힘을 조절한 상태라 구범천이 죽을 일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도이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기절을 해?”
“그러게. 우리는 안 했잖아.”
“그렇지. 그게 차이점이지.”
도삼과 도이가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룡지회.”
“우리가 접수한다.”
이서휘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도이야, 도삼아……. 알았으니까 돈 챙겨라.”
“네!”
도이와 도삼이 도둑처럼 재빠르게 은자들을 챙기면서 이서휘를 칭찬했다.
“우리 대주, 재주가 많아.”
“암, 그렇고말고 무림 사기단이여. 이제 대주라 부르지 말고 사기 단주라 부르자.”
“그럴까?”
“시끄럽다. 이 녀석들아.”
단우혁이 여전히 위압적인 눈빛으로 구경하는 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더 없소?”
대꾸하는 자들이 없었다. 그 침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그제야 단우혁이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비무였소.”
그때, 이서휘가 구경꾼들을 향해 외쳤다.
“자, 오늘은 이 아무개가 술을 대접하겠으니 은자를 걸었든 안 걸었든 객잔에 있던 여러분들은 마음껏 술과 음식을 시키시오.”
그러자 이서휘의 말에 은자를 안 걸었던 자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백류혼마저 감탄사를 내지르며 이서휘를 다시 바라봤다.
“자네의 놀라운 수법에 내 오늘 안목을 아주 크게 넓혔네.”
도삼과 도이가 한마디씩 거들었다.
“맨날 우리한테 도둑놈이니 어쩌니 하더니 이거 사기 치는 수법이 보통이 아닌데요? 이제 사부로 모시겠습니다. 사부님, 앞으로 잘 가르쳐 주십시오. 배울 게 많습니다.”
“큰 도둑일세, 큰 도둑이여.”
단우혁이 걸어오면서 은자를 아직도 쓸어 담고 있는 도둑 형제를 보며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돈인가?”
그 말에 도이가 근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재주는 단 공자가 부리고 돈은 이 대주가 챙기고 있는 현장이랄까?”
단우혁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비무 결과를 두고 내기를 한 것이냐?”
이서휘가 웃으면서 말했다.
“자자, 들어가자. 힘 좀 썼으니까 쉬어야지.”
단우혁은 비무에서 이기고 돌아왔는데 무언가 크게 진 것 같은 찜찜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어. 이건 아니다.”
그때 도이가 뼈 있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간 이 대주가 돈 많이 썼으니 이 정도는 벌어도 돼.”
“옳소!”
그나저나 이서휘 일행이 다시 객잔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몰려와 단우혁의 무위에 매우 놀랐는지 통성명을 하려는 자와 술을 한잔 하자는 자들이 늘었다. 마침 누군가가 단우혁의 별호를 묻자 술을 마시던 이서휘가 대신 대답했다.
“도왕(刀王)이라 불릴 남자요.”
그 거창한 말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한 별호일세!”
“아니야! 어울리는데! 청협문의 도왕이로구만!”
“이제 보니 보통 일행들이 아니었군. 다들 백룡지회에 참가하려는 것이오?”
단우혁이 무위를 드러내자 사람들의 관심이 과해지고 있었다.
한데, 이서휘는 그 순간에도 간간이 눈을 빛내며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서휘의 웃는 표정 속에는 누군가를 찾는 섬뜩한 눈빛이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 ☆ ☆
이서휘는 벌어들인 은자로 객잔에 모인 사람들을 그야말로 거하게 대접했다. 심지어 객잔에 없었던 자들까지 들어와 공짜 술을 마시고 갔으나 이서휘는 제지하지 않았다. 대신에 몰려든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술을 대접하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었다. 백도맹에 몰려든 자들은 이서휘의 얼굴을 기억했고, 이서휘도 술을 대접한 자들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 와중에 이서휘는 의심이 갈 만한 사람들은 두어 번 정도 예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일월마가든 다른 마가든 간자 같은 놈들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터…….’
백룡지회에 참가하려고 먼 곳에서 온 무림인들이 제법 많았기에 마가에서 간자를 파견하거나 분탕질을 치려는 놈들이 활약하기 딱 좋은 시기였다.
그때, 누군가가 놀라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그러면 군림맹에서도 왔단 말이오?”
“저기 술을 산 청년이 군림맹이라는 거 같던데?”
“요새 군림맹이 장강 이남에서 위세를 다시 되찾았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니만.”
“언제는 위세가 없었나?”
“없었지. 제갈세가와 사마세가가 이탈했다는 소문도 듣지 못했나? 제갈세가는 이제 백도맹을 기웃거린다는 소문일세.”
이런 저런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자 그야말로 다양한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특히 제갈세가가 백도맹에 기웃거린다는 소문은 이서휘로서도 뜻밖의 일이었다.
그렇게 객잔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이서휘 일행이 청협문, 백검문, 군림맹에서 왔다는 것을 알자 무림인들은 그야말로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백검문이야 검왕(劍王)이라 불리는 노고수가 있어 유명했고, 청협문도 단의황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아는 자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이서휘라는 이름 석 자를 아는 자는 없었다.
이서휘의 예상대로 단우혁과 백류혼은 삽시간에 이목을 끌고 있었다. 곤륜파의 후기지수를 그야말로 압도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신에 이서휘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일부러 사람들의 이목을 단우혁과 백류혼에게 집중시킨 다음에 이서휘는 홀로 눈을 빛내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백도맹 근처로 온 목적은 일월마가의 움직임을 찾는 것이었기 때문.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어도 이서휘는 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서휘는 잠시 왁자지껄한 객잔에서 홀로 나와 주변을 거닐었다.
눈에 띄는 사람도 없거니와 밤거리를 거닐면서 남양의 불야성을 한 번 구경해보고 싶었기 때문. 눈에 담은 남양의 풍경은 그야말로 신기했다.
이서휘가 주로 머물던 장강 이남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사람들의 성격은 더욱 활기차 보였고 빼곡하게 이어지는 객잔과 상가 건물의 분위기도 현격하게 차이가 났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정말 많아서 다소 번잡하다 느껴질 만큼 시끄러웠다.
이서휘가 감탄을 하며 시골 청년처럼 중얼거렸다.
“대단하군. 대단해.”
상인들에겐 백룡지회가 성수기(盛需期)나 다름없는 모양이었다. 그곳에선 이서휘의 모습과 복장도 꽤 시선을 끄는 편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서휘의 복장과 등에 매단 쌍검을 유심히 바라보다 작은 목소리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흥……. 쌍검이라니.]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많았지만 이서휘는 못 들은 척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구대문파 중에 쌍검을 사용하는 문파는 없구나.’
이서휘가 쌍검을 차고 다닌다는 이유로 구파가 연합한 백도맹 주변에서는 좌도방문(左道傍門)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끼며 이서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마도(魔道)의 온갖 잡다한 기술을 만나게 되면 기겁을 하겠구나.”
그나저나 백룡지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상황이었다. 결국 도이, 도삼, 단우혁, 백류혼까지 백룡지회에 참가하기로 한 상황. 이서휘는 앞서 말한 대로 맹주에게 도전하는 비무전을 살펴보다 중간에 난입할 생각이었다. 백룡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지만 이서휘 정도 되는 고수가 후기지수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몹쓸 짓이었기 때문.
이서휘는 이런저런 상념을 하면서 남양의 모습을 눈에 담다가 매잠파(梅岑派)의 여인들이 객잔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조용히 불러 세웠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이서휘가 말을 걸자 매잠파의 여인들이 돌아봤다. 그 중 가장 연장자이면서도 미모가 돋보이는 여인이 이서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대꾸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엉뚱한 질문입니다만 혹시 절강의 벽천회는 함께 오시지 않으셨는지요?”
“아, 벽천회는 오기 어렵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 말에 이서휘는 매잠파가 벽천회와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서휘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매잠파의 여인들에게 인사를 한 후에 돌아서려는 데 매잠파의 여인이 말했다.
“궁금한 것만 물어보시고 가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성함이라도 알려주시지요.”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군림맹의 이서휘라 합니다.”
이서휘가 포권을 취하자 그제야 매잠파의 여인이 대꾸했다.
“매잠파의 능설현(能偰炫)이라 합니다.”
“그럼, 능 소저! 또 뵙기를.”
이서휘는 매잠파 여인들이 들어가는 객잔의 이름을 확인한 후에 빙긋 웃었다.
이서휘가 용무가 끝났다는 듯이 자세를 돌리자, 매잠파의 여인들이 이서휘의 등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재수 없네요.”
“그러게. 우리가 무슨 궁금한 거 알려주는 사람이야?”
“벽천회랑 우리랑 연락하고 지내는 것을 저 사람이 어찌 알까요?”
“모르겠구나. 그나저나 능 사저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보는 사람도 처음이야. 처음에는 어떻게 치근덕거리려고 온 줄 알았는데.”
“저게 다 장강 이남의 수법이다. 관심 없는 척 하다가 다시 나타나서 능 사저에게 또 이것저것 물어보겠지. 안 그래요, 능 사저?”
“내가 어찌 알겠느냐?”
매잠파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능설현이 괘씸하다는 눈빛으로 이서휘의 등을 잠시 노려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길을 다시 나서는데 도삼이 달려와서 말했다.
“대주님, 말없이 어딜 가셨습니까?”
“왜? 산책 좀 했다.”
“곤륜파가 대사형이라는 놈을 앞세워서 우르르 왔습니다.”
“왜 왔어?”
“왜 오긴요! 백룡지회에 나가려는 놈을 단 공자가 흠씬 팼으니 따지러 온 것이죠. 백도 문파를 건드리면 이런 식이라니까요.”
“가자.”
이서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벽천회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구나.”
“벽천회요?”
“아니다.”
이서휘가 도삼과 함께 머물고 있던 단향객잔(丹響客棧)에 도착하자 도삼의 말대로 곤륜파가 잔뜩 몰려와 있었다.
그런데 이서휘가 없는 사이에 단우혁과 백류혼 주변에서 객잔 사람들이 진형을 짜고 곤륜파에 항의하고 있었다.
“정당한 비무였는데 곤륜파는 이게 무슨 짓이오?”
“우리가 지켜봤는데 그야말로 정정당당한 비무였소.”
“졌을 때는 아무 말이 없이 떠나더니 사람을 데리고 몰려와서 이게 무슨 짓이오?”
이서휘가 나서지 않아도 객잔에 있던 무림인들이 힘을 모아 단우혁을 변호하고 있었다.
이서휘와 도삼이 씨익 웃었다. 도삼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술 얻어먹은 값은 하네요.”
그나저나 술이 오른 단우혁은 양발을 책상 위에 걸쳐 놓고 일부러 귀를 후비는 등 몰려온 곤륜파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 곤륜파의 대제자(大弟子)인 목소광(睦小廣)이 나서서 호통을 내질렀다.
“구범천은 백룡지회에 참가하려는 곤륜파의 대표였다. 이렇게 부상을 입혀놓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앉아 있다니 뻔뻔하구나. 그리고 듣자 하니 이곳에서 비무 결과를 가지고 도박을 벌였다지?”
단우혁이 슬슬 열이 받은 표정으로 바뀌고, 이서휘도 나서려는 찰나에 구경하고 있던 중년인 한 명이 먼저 나서서 곤륜파를 비웃었다.
“곤륜파 하는 짓이 실로 가관이구나.”
사람들의 시선이 중년인에게 일제히 모이자, 중년인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비무에서 져놓고 위세가 당당하군. 지켜본 자가 한둘이 아닌데 어디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냐?”
중년인은 누가 봐도 곤륜파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의 흐름 때문에 지켜보던 자들은 중년인의 말에 휩쓸려 동조했다.
“옳소! 곤륜파가 적반하장이로구나!”
“어차피 여기 단 공자도 백룡지회에 나가려고 했다고 들었소. 백룡지회에서 붙으나 여기서 붙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오.”
“실로 옳은 얘기로군.”
이서휘는 나서려다 말고 중년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중년인의 말투는 교묘하게 사람들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었지만 이서휘는 판단을 미루고 중년인의 눈빛을 노려봤다.
마흔 초반의 취객이었는데 술에 취한 겉모습과는 달리 번뜩이는 안광을 숨기고 있었다.
다행히 곤륜파의 대제자라는 자도 중년인의 기도를 읽었는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러자 중년인이 히죽 웃으면서 몰려온 곤륜파의 자존심을 일부러 건드렸다.
“곤륜파는 썩 물러들 가라. 하여간 목군학(睦君學)은 어찌 이렇게 제자들을 방만하게 키웠는지……. 쯧쯧.”
삽시간에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지금 벌어진 일을 비난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곤륜파의 장문인까지 걸고넘어지는 것은 다소 과한 대응이었다.
목군학(睦君學)은 당대 곤륜파의 장문인이자 목소광(睦小廣)의 아버지다.
사십 대의 선배 무림인이 그저 목소광의 행동만 꾸짖었으면 어쩌면 아무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취객은 일부러 목군학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곤륜파가 도저히 듣고 넘길 수 없는 발언이었다.
목소광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소?”
“왜? 목군학이 너희를 잘 가르쳤으면 이렇게 무례하게 사람들을 핍박했겠느냐? 백도맹 지역이라고 유세를 떠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로구나. 나는 자하도주(紫霞島主) 구하홍(丘霞泓)이라 한다. 곤륜파가 실력 행사를 할 생각이면 내 장법부터 구경해야 할 것이다.”
완벽한 시비였다.
이서휘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지점을 생각하며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봤다.
‘자하도주라 금시초문이군. 시비가 흐릿한 상황으로 몰아가 일단 싸우자는 의도인데……. 곤륜파가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나?’
곤륜파가 괘씸한 것은 물론 이서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하도주라는 구하홍의 의도가 더욱 괘씸했다.
이서휘의 눈에는 중년인의 무위가 결코 낮지 않았다. 싸움이 붙으면 아마 몰려온 십여 명의 곤륜파 무인들을 전부 도륙 낼 수도 있는 실력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곤륜파가 괘씸했지만 차마 다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이서휘가 분쟁이 벌어진 중간에 내려섰다. 이서휘가 쌍검을 맨 채로 중앙에 뛰어들자 시선이 다시 이서휘에게 집중됐다. 누군가가 얼큰한 낯빛으로 이서휘에게 말했다.
“오늘 덕분에 시원하게 잘 마셨소. 허허허헛!”
“나도 잘 마셨네!”
“어찌 거기 계신가? 저기 저 분과 곤륜파가 한 판 붙을 기세였는데……. 그냥 내버려 두시게.”
그 말에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무슨 일로 싸운단 말입니까?”
그 말에 이미 살기가 뻗친 목소광이 말했다.
“비키시오.”
이서휘가 목소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안 되겠소.”
“뭐라?”
목소광이 싸늘한 눈빛으로 이서휘를 바라보자, 이서휘가 취객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이 누군지 아시오?”
“모르오. 내 아버지와 곤륜파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 밖에는.”
그러자 이서휘가 주변을 돌아보며 멍청한 말을 내뱉었다.
“이 분은 자하도주 구하홍이라는 분이오.”
누군가 대꾸했다.
“방금 우리도 같이 들었지 않나?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이서휘가 말했다.
“자, 이 반응들을 보시오. 자하도주 구하홍이라는 별호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소이다.”
“이곳에 몰려든 자를 어찌 다 알겠는가?”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은 내가 이 분의 정체를 알고 있소.”
“뭐라고?”
구하홍이 반문하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은 아마도…….”
이서휘는 구하홍의 정체를 몰랐다. 그저 께름칙한 생각이 들어 되는 대로 읊을 생각이었으나 무언가 찔리는 게 있는지 구하홍이 먼저 나섰다. 구하홍이 히죽 웃으며 다가와 슬쩍 이서휘의 어깨에 빙백장(氷魄掌)을 주입한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방해하지 마시오.”
“방해는 무슨…….”
이서휘가 씨익 웃으면서 취객의 손목을 더 자연스럽게 붙잡았다.
순간 구하홍이 오른손으로 빙백장을 쏟아냈다. 구하홍이 한랭한 장력을 쏟아내자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웃음이 나오는가?”
구하홍은 이서휘의 상체를 얼어붙게 한 다음에 곤륜파의 후기지수들과 시비를 이어나가 모조리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서휘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붙잡더니 밀려오는 빙백장을 내공으로 받아친 다음에 그대로 되돌려 내고 있었다.
순간 붉은빛이 돌고 있던 구하홍의 얼굴이 삽시간에 푸르스름한 낯빛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을 본 이서휘의 눈빛이 삽시간에 살벌하게 변하더니 반말이 쏟아져 나왔다.
“자하도주, 내공이 제법 깊군. 내력이 어떻게 되시는가?”
구하홍은 이서휘의 내력이 밀려오자 제대로 입을 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물어보는 이서휘의 의도가 괘씸했으나, 구하홍의 예상보다 이서휘의 내공은 무지막지하게 높은 수준이었다.
이서휘의 표정과 눈빛이 구하홍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위압적으로 변했다.
“왜 대답을 못하는가? 일월마가(日月魔家)의 종자(從者)인가?”
이서휘가 질문과 함께 내공을 약간 줄이자, 구하홍이 겨우 입을 뗐다.
“아……! 윽.”
구하홍이 ‘아니다!’라고 외치려는 순간에 이서휘의 내공이 또다시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때문에 마치 구하홍이 내뱉은 말은 정체가 드러나 탄식을 내지른 것처럼 들렸다. 구하홍이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속으로 이서휘를 욕했다.
‘빌어먹을 새끼!’
이서휘는 주변에 일월마가의 종자들이 더 있으리라 판단해 시간을 잠시 끌었다. 이서휘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일방적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실로 대담하구나. 백룡지회의 번잡함을 틈타 일월마가가 몰려들었다니…….”
한편, 일부러 상황을 설명하는 이서휘의 말에 오히려 곤륜파 무인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서휘가 난입해 곤륜파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마가(魔家)’라는 말에 놀랐기 때문.
그때, 이서휘가 내공을 계속 주입해 구하홍을 핍박하는 것을 구경하던 무리에서 한 명이 불쑥 튀어 나와 엄청난 속도로 이서휘에게 달려들면서 서늘한 장력을 내질렀다.
누군가가 외쳤다.
“조심하시오!”
이서휘가 쉽게 당할 리가 없었다. 이서휘는 왼손으로 구하홍의 팔목을 붙잡은 상태에서 우장을 내밀어 불청객의 장력을 정확하게 맞받아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난데없이 굉음이 발생하자 구경하던 자들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이서휘의 장력에 튕겨 나간 불청객이 공중에서 한 움큼의 피를 토하면서 날아가자, 찰나의 틈을 노린 구하홍이 내공을 잔뜩 일으켜 좌장으로 이서휘를 공격했다.
이서휘는 좌장이 뻗어오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구하홍의 팔목을 으스러뜨렸다.
우드드득――
구하홍의 비명이 터지면서 내지르던 좌장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서휘가 구경꾼들을 살펴보다 짤막하게 말을 꺼냈다.
“우혁, 류혼.”
그 말과 동시에 구경꾼 두 명이 구하홍을 살리기 위해 이서휘에게 달려들고, 청룡도와 백연검을 움켜 쥔 단우혁과 백류혼이 대도파랑(大刀波浪)과 탁섭찰나(萚燮刹那)를 동시에 쏟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앙―!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 더 빠르게 이서휘를 도와줘 놓고, 느닷없이 한 마음이 되어 이서휘를 꾸짖으면서 적과 겨뤘다.
“이 대주, 명령하지 마라…….”
“건방진 놈…….”
이서휘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별 말 안 했는데…….”
이서휘가 말을 내뱉는 순간 그야말로 독기를 품은 구하홍이 이서휘에게 잡힌 자신의 팔을 뜯어내고, 동시에 빙백장(氷魄掌)을 내질렀다.
양패구상을 노린 장력이 이서휘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구하홍이 이미 일월마가라 판단한 이서휘가 가차 없이 백야검을 발검하는 동시에 제자리에서 그었다.
쐐앵―!
구경꾼들의 눈에 무언가 번뜩였다고 느꼈을 때는 이서휘의 백야검이 구하홍의 오른팔을 가른 상태. 푸악― 소리와 함께 구하홍의 팔이 떨어지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며 이서휘가 또박또박 힘을 줘서 말했다.
“마가(魔家)의 무리가 근처에 더 있을 것입니다. 도망가지 않게 원형 진을 짜서 주변을 살피십시오.”
“마가라고!”
“정말인가?”
이서휘의 말에 한줄기 의혹을 내비치는 자들도 있었지만 마치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을 받은 것처럼 백도의 무인들이 저마다 병기를 뽑아 우르르 소리를 내면서 단우혁과 백류혼이 상대하고 있는 마가의 무인을 포위했다.
심지어 곤륜파마저 이서휘의 말에 따라 진형을 짜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직 구하홍을 죽이지 않고 있던 이서휘는 파공음을 느끼자마자 백야검을 휘둘러 검막을 뿌렸다.
후드드득 소리와 함께 구하홍과 이서휘를 동시에 노린 강침이 검막에 부딪쳐 떨어졌다. 암살에 실패하자 구경꾼 무리에서 누군가가 빠져나와 경공을 펼치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본 이서휘가 곤륜파의 목소광(睦小廣)에게 말했다.
“목 소협, 이 자를 살펴봐 주시겠소? 강침을 뿌려댄 놈을 좀 따라가리다.”
목소광은 저도 모르게 존댓말로 이서휘의 요청을 승낙했다.
“네? 아, 알겠습니다.”
목소광이 대답하자 이서휘가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도이, 도삼.”
“네, 대주님.”
“이제 우리 차롄가?”
이서휘가 학사가 도망가고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방향으로 천천히 따라와라. 먼저 가있겠다.”
도삼이 이서휘의 말을 이해하고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단우혁과 백류혼을 잠시 바라보다가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구경꾼들을 넘어서, 빼곡한 인파의 물결을 피해 달아나는 학사(學士) 차림의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서휘가 학사 차림의 사내를 쫓아가자, 도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천천히 따라오라는 건 무슨 말이야?”
잠행으로 따라와서 전력을 숨기고 있다가 기습을 펼치거나 이서휘를 도우라는 말이었다. 어쨌든 숨어 있으라는 이야기였는데, 도삼은 이서휘의 의도를 얼추 다 이해하고 있었다.
도삼이 안쓰러운 얼굴로 형에게 말했다.
“형, 그냥 나만 따라오면 돼.”
그러자 도이가 불쾌한 표정으로 도삼을 따라가면서 사패들의 대화를 그대로 따라했다.
“명령하지 마라. 건방진 놈…….”
“성질은 하여간…….”
한편 이서휘는 인파가 빼곡한 대로변으로 추격하지 않고 방향만 살핀 다음에 골목으로 들어가 건물 벽을 두어 번 밟고 순식간에 지붕에 올라섰다.
남양의 건물은 그야말로 빼곡했다.
이서휘는 멀어지는 학사 차림의 사내를 눈으로 발견하자마자 지붕 위를 질풍처럼 내달렸다.
간혹 건물 사이가 제법 먼 곳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서휘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학사는 인파를 뛰어넘느라 속도를 낼 수 없었고, 이서휘는 거침없이 하늘을 달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따라잡은 이서휘가 학사를 살펴보니 강침을 발사할 때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길쭉한 피리 모양의 병기를 들고 있었다.
이서휘가 어느 건물 위에서 뛰어내렸다가 다른 건물의 지붕을 가볍게 밟은 후에 다시 솟구치면서 바닥에 내려섰다. 도망가던 학사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가 이서휘를 발견하고 다시 몸을 돌려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동료를 제압할 때 봤던 이서휘의 무위를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던 것.
대신에 학사는 자신의 동료들이 잠복하고 있는 길을 골라 다람쥐처럼 빠져 나가고 있었다.
이서휘는 추적하는 와중에 학사의 동작 하나하나를 유심히 바라보다 섬뜩한 눈빛으로 주변을 함께 둘러보고 있었다.
☆ ☆ ☆
이서휘가 가차 없이 팔을 자른 자하도주 구하홍은 일월마가 소속의 무인이었다. 지난날, 일월마존이 벽운장에서 마가를 소집했을 때 등장했던 취객이 바로 구하홍이었던 것.
지금 이서휘가 쫓고 있는 학사도 마찬가지였다. 백도맹의 남양에서 오랫동안 신분을 숨기고 있으면서 암살과 교란의 임무를 띤 자들이었다.
특히 구하홍은 곤륜파와 단우혁이 벌인 분쟁을 우연히 구경하고 있다가, 일부러 곤륜파를 자극해 후기지수를 몰살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서휘가 등장해 구하홍은 팔을 잘리고, 구하홍을 살리려던 숙수 차림의 사내와 도사 차림의 사내는 단우혁과 백류혼을 맞이하여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 ☆ ☆
이서휘가 학사를 거의 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비교적 사람이 뜸해진 거리에 들어선 상황이라 학사도 나름의 경공을 마음껏 펼치면서 도주하고 있었다. 한데, 학사가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는데도 땅바닥에 앉아 쭈글쭈글한 동냥 그릇을 앞에 두고 있던 거지 한 명이 놀라는 기색도 없이 멍하니 있었다. 그 모습을 힐끗 보자마자 이서휘가 코웃음을 쳤다.
‘남양에 마가의 무리가 가득 했구나…….’
이서휘가 지나가려는 찰나에 우측에서 기를 갈무리하고 있던 거지가 불쑥 솟구치면서 장력을 내질렀다.
훅―!
동시에 좌측의 가판대 뒤에 있던 상인이 느닷없이 신력을 발휘해 가판대 전체를 이서휘에게 날렸다.
이서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것처럼 검을 뽑지도 않은 채로 쌍장을 내밀어 거지와 상인이 날린 가판대를 장력으로 맞받아쳤다.
콰아아아아앙―! 퍽!
상인은 엄청난 힘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가판대에 맞아 어딘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날아갔고, 장력을 쏟아낸 거지는 이서휘의 우장과 부딪치자마자 그대로 벽으로 날아가더니 퍽 소리와 함께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내더니 그 자리에서 목이 기이하게 꺾였다.
이서휘는 두 사람의 생사도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학사를 쫓았다.
‘곳곳에 잘도 숨어 있구나.’
이서휘의 전생에는 이들이 흉계를 꾸미고 암습을 펼치면서 백도맹을 뒤흔들었다는 얘기였다. 이런 식의 수법은 빙산의 일각이었을 터. 하지만 이서휘는 그 빙산의 일각을 붙잡아 바닥까지 쪼갤 기세로 움직였다. 꼬리를 추적하다 보면 몸통이 나오리라 생각했다.
최악의 상황은 백도맹 내부에 간자들이 있을 경우였다.
찾아내기도 어렵고 묘하게 상황을 역이용 당하면 백도맹과 군림맹의 사이가 대번에 틀어질 수도 있었기에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이서휘의 전생에서도 비슷한 일로 백도맹과 군림맹이 여러 차례 맞붙었기 때문.
그 때문에 이서휘는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히 진행할 예정이었다. 드러난 꼬리부터 확실하게 자를 생각이었던 것.
어느새 학사는 남양의 동쪽 성문을 지나 백운산(白雲山) 근처까지 도망을 치고 있었다. 이서휘는 거지와 상인 때문에 잠시 벌어진 간격을 순식간에 좁힌 다음에 백야검을 뽑자마자 암연심검의 환을 내지르면서 손목을 비틀었다.
쐐애애애앵―!
이서휘가 내뻗은 검기가 바람을 가르면서 도망가고 있던 학사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심장을 노린 것이었으나 학사가 바람 소리를 듣고 가까스로 피했던 것.
“크윽.”
학사가 휘청거리다가 고꾸라지자마자, 학사의 좌우에 일월마가의 청면인(靑面人)과 적면인(赤面人)이 내려섰다.
“음……!”
이서휘는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기도를 읽자마자, 경공을 멈추고 먼저 주변을 살폈다.
청면인과 적면인은 익히고 있는 마공(魔功)이 신체의 외형에 드러난 자들이었다. 이서휘가 바라보니 두 명 모두 나이가 젊고 얼굴이 기이하게 보일 정도로 흡사했다. 두 사람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학사를 일으켜 세우더니 아무 말 없이 이서휘를 노려봤다.
무언가 느낌이 싸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바라볼수록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이서휘는 또 다른 고수들의 기도를 느끼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면서 거리를 재는 한편, 좌우를 살피면서 말했다.
“나와라…….”
“네 놈이 이서휘로구나.”
“드디어 만났군. 백도맹 주변에 기웃거리고 있었다니, 뜻밖이야.”
두 명의 중년인이 어두운 밤길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서휘를 반가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싸늘한 말투로 대꾸했다.
“초면에 반가운 척 하지마라.”
“허허……. 듣던 대로야.”
“이런 군림맹의 애송이가 묵연(默然)이를 죽였다니 믿을 수가 없군.”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 묵연마가(默然魔家)의 좌우사자들인가?”
이서휘가 자신들의 정체를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묵연마가의 좌사자 사현통(斯玄通)과 우사자 두사평(竇思平)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기가 막힌 놈이로구나.”
“내가 말했지 않나? 보통이 아닐 거라고. 묵연이만 당한 게 아닐세.”
묵연마가의 좌우사자들이 학사를 부축하고 있는 청면인과 적면인에게 싸늘한 말투로 하대(下待)했다.
“데리고 먼저 가라.”
“이놈 목을 선물로 가져가겠다고 이르고.”
그러자 청면인이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저 자……, 강합니다.”
“그래서? 너희가 감히 우리와 손발을 맞춰보겠다는 것이냐?”
적면인이 청면인의 어깨를 붙잡으며 대꾸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청면인이 그제야 정중하게 말했다.
“두 장로님, 그럼 먼저 가 있겠습니다.”
“그래야지.”
이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이서휘가 묵연마가의 좌우사자를 물끄러미 노려봤다.
무려 마가의 좌우사자들이다.
마인들의 정체도 궁금했으나, 장로들을 처리하는 것도 중요했다. 더군다나 묵연마가의 장로 두 명은 이서휘를 얕보고 있다는 게 표정에서 드러났다. 그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네놈들 표정이 가관이로구나. 그러하다면…….’
이서휘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어찌하여 일월마가에 붙었는가?”
“네 녀석의 말투가 실로 거만하구나.”
이서휘가 백야검을 쥐고 두 명의 장로를 노려보면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면서 말을 내뱉었다.
“일월마가가 너희를 챙겨줄 것 같으냐……? 마졸로 부리다가 언제든 토사구팽당할 것이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달라붙었느냐?”
“네놈이 이제 훈계 질을 하는구나.”
그 말에 이서휘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우이독경(牛耳讀經)이로다.”
이서휘가 놀리자 그 순간에 눈썹이 잔뜩 치켜 올라간 두 마리의 성난 소가 이서휘에게 돌진했다.
☆ ☆ ☆
묵연마가의 좌사자 사현통(斯玄通)과 우사자 두사평(竇思平). 두 장로는 그간 말을 잘 듣지 않은 묵연마존에게 불만이 많았으나 한편으론 묵연마존을 믿고 있었다.
무공도 심계도 뛰어났기 때문에 묵연마가를 이끌고 다른 마존들과 경쟁을 펼친다면 십마가(十魔家)의 위치를 굳건하게 다져나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서휘만 아니었다면.]
[묵연마존이 이서휘만 찾아가지 않았다면.]
[이서휘의 얼굴만 보고 온다는 묵연마존을 끝까지 말릴 수만 있었더라면.]
두 장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림맹으로 떠난 묵연마존은 결국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었다. 사현통과 두사평은 일월마가로 투신하기에 앞서 이서휘의 목을 자르는 것이 묵연마존에 대한 미련을 끊어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서휘는 마음이 씁쓸했다.
일월마존도 사람을 모으는 일면을 갖췄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른 마가의 장로가 하필 일월마가로 투신하다니…….’
이서휘의 전생에 마존(魔尊)으로 활약하던 마도의 고수는 없었다. 심지어 마가(魔家)라는 말도 들린 적이 없었다. 두 장로들에게 토사구팽당할 것이라 말한 이서휘의 말은 진실을 담고 있었으나 이미 묵연마존의 복수만을 꿈꾸고 있는 두 사람이 이서휘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 ☆ ☆
이서휘는 두 사람과 맞붙자마자 쌍검으로 상대했다.
잠시 평범하게 초식을 겨루던 이서휘는 이미 두 장로를 어떻게 죽일 것인지 전략을 세운 상태였다.
그 전략은 사실 음흉했다.
‘너희가 나설 무대를 만들어주마.’
이서휘는 일부러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두 장로의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고 청각을 시끄럽게 자극했다. 이서휘는 마도와 상대할 때 계략의 음흉함을 따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보다 더 한 계략도 이서휘는 얼마든지 펼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탓하지 마라. 나를 만난 게 너희의 불운이니…….’
일월마가가 지원을 보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서휘는 두 장로를 빠르게 처리하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사현통(斯玄通)과 두사평(竇思平)은 기가 막혔다.
이서휘가 쌍검을 휘두르면서 자신들의 초식을 모조리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 더군다나 때때로 이서휘가 검무(劍舞)를 펼치듯 움직이면서 쌍검을 부딪쳐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챙챙챙챙챙! 쩌어어엉―――!
두 장로의 표정이 기가 막히다 못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펼치는 초식의 매끄러움과 내공의 깊이가 감탄스러울 지경이어서 순식간에 사십여 초를 겨루자 슬슬 초조해졌기 때문. 이서휘가 일월마가를 걱정하듯이 두 장로도 백도맹의 지원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서휘에게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때문에 물러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현통이 검을 내지르면서 사제인 두사평에게 말했다.
“빨리 죽이세.”
“그럽시다. 보통이 아니오.”
두사평이 직도에 내공을 가득 실어 후려칠 때마다 이서휘의 쌍검이 궤적을 미리 읽고 교묘하게 튕겨내고 있었다.
두 장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손과 발을 맞췄던 사이라 이서휘에게 쉽게 당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서휘가 갑자기 부담스러움을 느낀 것처럼 땅을 박차고 전신을 꼿꼿이 세운 채로 귀신처럼 뒤로 물러나자, 두사평과 사현통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두 장로가 빠르게 밀려오자 이서휘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백야검을 휘둘러 두 장로의 발밑에 암연심검의 파를 쏟아냈다.
쐐애애앵― 투드드드득―
이서휘가 내보낸 검기가 땅을 움푹 파이게 하면서 돌덩이와 먼지를 피어오르게 만들자 두 장로가 즉시 검풍(劍風)과 장력을 동시에 내질러 시야를 확보했다.
후우우우웅!
파라라라락 소리와 함께 품(品)자 형태로 선 세 사람의 바깥으로 기파가 뻗어나가기 시작하자 삽시간에 일대가 요란해졌다.
이서휘는 일부러 느닷없이 검막을 뿌려 두 장로의 시야를 가리고, 성검으로 또다시 바닥을 찍었다.
콰아아아아앙! 소리와 함께 돌덩이와 흙무더기가 피어올랐다.
사현통(斯玄通)과 두사평(竇思平)이 짜증을 내면서 소리쳤다.
“제기랄!”
“침착해라. 잡스러운 기술일 뿐이다.”
이서휘가 또다시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나면서 쌍검을 교차해 두 개의 검기를 강맹하게 뱉어냈다.
쐐애애애앵! 쐐애애애앵!
사현통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검기를 튕겨냈다.
콰아아아앙――!
두사평은 아예 공중으로 높게 솟구쳐 검기를 피하는 동시에 좌장에서 장력을 쏟아냈다.
파바바바박――!
두사평의 장력이 이서휘가 있던 자리에 쏟아졌으나 이서휘는 어느새 모습을 감춘 상태.
스스슥―
이서휘는 암행표로 신형을 움직이더니 두사평의 등 뒤에 불쑥 나타나서 백야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떠엉― 소리와 함께 두사평이 직도로 튕겨내자, 동시에 사현통의 검이 뻗어 나왔다.
까앙!
이서휘는 성검으로 받아치자마자 쌍검에 내공을 잔뜩 주입해 두 사람을 튕겨냈다.
떠―엉!
‘어?’
두사평과 사현통의 양 손이 부르르 떨리면서 밀려났다.
그 틈에 이서휘가 희한한 행동을 했다. 재빠르게 성검을 납검하고 허리춤에서 좌수를 뻗어 묵연마존에게 뺏은 철선을 쥐었던 것.
두사평이 철선을 알아보고 고함을 내질렀다.
“아……. 마존의 철선을 네가!”
“알아보는구나.”
묵연마존이 들고 있던 철선을 두 장로가 모를 리가 없었다. 장로들이 분노했다고 느낄 찰나에 이서휘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 나와 두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흐흐흐.”
짤막한 웃음을 내뱉으면서도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면서 검풍을 뿌려대던 이서휘가 또다시 요란하게 돌덩이와 먼지가 풀풀 솟구치게 만들었다.
후드드드드득―
이서휘는 그 먼지 너머를 꿰뚫어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좌상단에서 우하단으로 그으면서 암연심검의 파를 날렸다. 이서휘가 날린 검기가 비스듬하게 날아가 두 장로에게 쏟아졌다.
파―앙! 파―앙!
먼지 속에서 좌우사자들이 이서휘의 검기를 튕겨냈다.
그 사이에 이서휘는 상대를 농락하듯이 공중으로 솟구쳐 굵직한 나무를 박차고 다녔다. 순식간에 나뭇가지들이 날리고 후드득 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잠시, 공중을 거닐던 이서휘가 검풍을 휘날리면서 두 사람의 뒤에 불쑥 내려섰다.
이서휘의 대응이 실로 괴상하다고 두 장로가 느꼈을 때였다.
매번 물러나던 이서휘가 느닷없이 두 장로에게 과감하게 달려들었다.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자 자연스럽게 바람이 실렸다.
휘이이익!
두사평이 서둘러 직도를 내지르자, 이서휘가 묵직한 철선으로 맞받아쳤다.
철컹―!
철선이 직도를 물자, 사현통 검이 동시에 뻗어 나왔다. 이서휘가 사현통의 검을 백야검에 떠엉 소리를 내면서 맞붙게 하더니 느닷없이 검사를 휘감았다.
쏴아아아아아―
백야검의 검병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 검사가 휘몰아치면서 검봉으로 나아가자, 사현통이 두 눈을 부릅뜨고 내공을 주입해 막아냈다.
이서휘는 두사평의 직도를 부러뜨리기 위해 철선에도 내공을 주입하고 있었다.
이서휘의 내공이 두 사람에게 쏟아지고 있었으나, 두사평과 사현통은 땀을 가득 흘리면서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버티면 이긴다. 버텨라!’
이서휘가 단 한 순간만이라도 방심하면 각각 일장을 내질러 이서휘를 죽일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것. 그것을 알았기에 이서휘는 두 사람이 양손으로 내공을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하게 내공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서휘는 양 손으로 내공을 내보내는 그 순간에 놀랍게도 침착하게 말을 내뱉었다.
“자……, 끝내자.”
그 순간.
이서휘의 내공에 저항하던 두 장로의 머리 위에서 기척을 죽인 두 사람이 그야말로 은밀(隱密)하고 위대(偉大)한 잠행술로 소리 없이 떨어졌다.
이어서 푸욱―! 하는 소리와 스슥―! 하는 소리가 동시에 이어졌다. 도이, 도삼의 쌍비수와 직도가 사현통(斯玄通)과 두사평(竇思平)의 목덜미를 갈랐던 것.
“컥!”
“크흑!”
도이와 도삼이 내지른 단 일격에 두 장로의 목덜미에서 피 분수가 쏟아졌다.
푸우우우욱―!
이서휘는 싸늘한 표정으로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백야검을 납검하면서 두 장로를 바라봤다.
이서휘는 도이와 도삼이 나설 수 있도록 일부러 두 장로의 청각과 시야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악한 행동…….
이서휘가 정정당당하게 두 사람을 상대로 승부를 내려면 더 많은 공력을 쏟아 부어야 했을 터. 하지만 도삼과 도이가 잠행으로 따라오고 있는 마당에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서휘는 도둑 형제를 믿고 판을 깔아뒀다.
그들이 이동할 수 있는 경로로 먼저 움직여 나무를 흔들고 먼지를 날리고 검풍을 휘날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공 싸움…….
도둑 형제들의 장기를 살린 잠행술에 이은 일격(一擊).
도이와 도삼이 피를 털어내며 이서휘의 좌우에 서서 경악으로 물든 두 장로의 표정을 내려다봤다.
도삼이 말했다.
“마무리할까요? 가만둬도 죽겠지만 빨리 보내주는 게…….”
그 말에 이서휘가 먼저 백야검을 휘둘러 두 사람의 숨통을 동시에 끊었다.
이서휘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가자.”
그때, 도이가 아무 말 없이 백운산의 어둠 한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이서휘와 도삼도 잠시 어둠이 짙게 깔린 백운산을 바라봤다.
이서휘가 어둠 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구나. 일단, 돌아가자.”
“네.”
세 사람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으나 백운산의 어둠 속에 감돌던 불길함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도이와 도삼이 말없이 이서휘를 따라 단향객잔(丹響客棧)으로 향했다. 단우혁과 백류혼의 승부가 어찌 됐는지도 실로 궁금했기 때문에 세 사람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 ☆ ☆
이서휘가 사라진 곳에서 잠시 후 반백의 머리를 뒤로 넘겨 이마를 드러낸 싸늘한 표정의 남자가 등장했다.
지난날 군림맹에서 남궁위에게 도전했던 주양위(朱亮威)의 사제, 간천(簡天)이었다.
이서휘에게 덤볐다가 시체로 변한 묵연마가의 두 장로들처럼 일월마가에 투신해 한 자리라도 얻어 보려는 것일까? 모를 일이었다.
어느새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더욱 깊어지고 머리카락은 전보다 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불을 뿜는 것 같은 안광은 지난날 주양위와 비슷해 보일 정도로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더군다나 간천은 사형인 주양위가 죽은 이후로 그가 즐겨 입던 의복과 머리 모양까지 흉내를 내고 있었다.
간천이 숨통이 끊어진 사현통(斯玄通)과 두사평(竇思平)을 내려다보다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생각에 잠겼다. 실은 이서휘의 요란한 움직임 때문에 간천 역시 모습을 숨기고 혈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간천까지 나섰다면 이서휘는 그야말로 위험했을 것이다. 이서휘야 몸을 피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도이와 도삼은 목숨을 잃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간천은 여전히 방황하는 칼날이었다.
분노와 살의가 머리에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동안 수련했던 무공 덕분인지 얼어붙은 호수와 같은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실로 묘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마존들을 죽이고 있는 이서휘를 살려서 마교 교주를 죽이게 할 것인가…….
아니면 일월마존과 함께 마교 교주를 죽일 것인가…….
검마는 광인에 가까웠기에 무슨 일을 하든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때문에 간천은 여전히 제 마음대로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저울질 하고 있었다.
세상은 백도와 마도로 나뉘어 전쟁을 치르는 데 이 간천이라는 남자는 홀로 마교 교주를 어떻게 죽일 것인지만 궁리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생각이 특이한 남자였다.
애초에 사형인 주양위와 죽이 맞아 평생을 함께 보내면서 주양위가 하자는 대로 따르면서 살았던 간천이었다. 주양위가 죽은 이 시점에서는 고삐가 풀린 살수가 되어 마교 교주를 노리고 있었다.
잠시 죽은 자들을 내려다보던 간천이 품에서 화골산을 꺼내 사현통(斯玄通)과 두사평(竇思平)의 시신에 떨어뜨리면서 중얼거렸다.
“일단, 일월(日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봐야겠구나.”
간천은 이미 한 차례 헛걸음을 했었다. 일월마존(日月魔尊)이 어디론가 사라져서 쉬이 만날 수가 없었던 것. 하지만 누군가가 간천을 찾아내어 일월마존의 복귀를 알렸다. 일월마존이 머무는 곳으로 찾아가던 길에 이서휘의 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던 셈.
간천이 벽운장으로 향하면서 미친 사람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서휘냐, 위극신이냐.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