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29화 (29/43)

<6장. 백룡지회>

이서휘는 기어코 단우혁과 백류혼, 도이와 도삼을 데리고 백도맹으로 향하고 있었다.

송무진은 흑도맹에 보고를 하고 움직여야했기에 여정에서 빠진 상황이었다. 다만 흑도맹에서 허락하면 모습을 감추고 방문해보겠다는 언질만 남긴 상태였다.

군림맹의 유백은 이서휘의 백도맹 방문을 허락하고, 자신은 군림맹으로 되돌아가고 있었고, 도이와 도삼이야 이서휘를 따라서라면 그대로 지옥 입구까지는 함께 가줄 충신들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단우혁은 이서휘의 화술에 넘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백도맹으로 향하고 있었고, 반면에 백류혼은 애초에 백도맹에 볼 일이 있었는지 잠자코 따라나선 형국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아직은 청협문과 백검문의 후계자라는 점에서 운신의 폭이 넓었다.

그나저나 광산에서 남양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

그 때문에 이서휘는 여정을 서두르지 않았다. 단우혁과 백류혼이 부상에서 회복하길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이서휘는 네 사람에게 산해진미를 매일 맛볼 수 있도록 돈을 항상 넉넉하게 썼다. 지난 날, 마가(魔家)가 장악하고 있던 표국에 쌓아둔 전표의 액수가 실로 어마어마했기 때문. 더군다나 군림맹에서 전공포상으로 받았던 돈도 아직 꽤 많이 남아 있어서 갑부(甲富)라 불려도 될 정도였다.

이서휘는 마치 식도락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돈을 아끼지 않고 네 사람에게 좋은 음식과 편한 잠자리를 제공했다. 그 사이에 체력을 먼저 회복한 단우혁과 백류혼은 때때로 객잔에 조용히 머무르면서 운기조식으로 내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여정은 점점 길어졌지만 단우혁과 백류혼의 혈색은 정상적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단우혁과 백류혼은 세세한 것까지 챙겨주는 이서휘가 내심 고마웠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몸이 낫자마자 이서휘가 도둑 형제들과 합심하여 두 사람을 이리저리 놀리기 시작해 어느새 다섯 명은 여정 중에 수없이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서휘의 말에 맞장구치는 도이와 도삼도 가관이었다.

처음에는 단우혁과 백류혼을 내심 어려워하던 두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이서휘가 두 사람을 놀릴 때마다 도이와 도삼이 한술 더 뜨고 있었다.

이서휘야 도둑 형제들의 빈정거림 합공에 익숙한 상태였지만 단우혁은 특히 도이의 빈정거림에 발끈하기가 수차례. 한 번은 이서휘에게 몰래 다가와 도이 좀 혼내도 되겠냐고 묻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서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도이에게 단우혁의 말을 전하곤 했다.

“도이야, 여기 단 공자가 너를 좀 혼내고 싶으시단다.”

그럴 때면 도이가 콧방귀를 끼면서 대꾸했다.

“진짜 부상만 아니었으면 한번 상대해드리는 건데 다친 사람 때릴 수도 없고. 하!”

“뭐 인마?”

“인마는 무슨 몸이나 잘 추스리쇼.”

이럴 때마다 이서휘가 정신을 집중해 웃음을 참아내고 있었다.

아직 도이와 도삼은 단우혁과 백류혼의 실력을 몰라서 저러는 것이었다.

씩씩대던 단우혁이 며칠 후 어느 객잔에서 상처를 회복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겠노라고 선언을 했다. 부상에서 완벽하게 회복한 다음에 도이를 흠씬 두들겨 팰 생각이었던 것.

그러다 보니 걱정되는 것은 이서휘였다.

도이와 도삼은 어느새 이서휘가 가르치는 제자들이나 다름이 없어서 두 형제가 당하는 것을 마냥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문에 단우혁과 백류혼이 방에 틀어박혀 운기조식을 하는 동안, 이서휘는 도둑 형제를 데리고 그야말로 맹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훈련은 다름 아닌 비무였다.

이서휘는 객잔에서 백야검으로 목검을 하나 깎은 다음에 공터에 나와 두 사람을 상대했다. 처음에는 이서휘가 목검을 쥐고 혹독하게 때리기 시작하자 기분이 상한 두 사람이었으나 이서휘가 자신들을 대하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하자 도둑 형제들도 깨닫는 바가 적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이서휘에게 맞아가면서 혹독하게 무공을 수련했다.

도둑 형제들은 이서휘가 전생에 검제(劍帝)라 불렸던 사실을 모른다. 검제에게 매일매일 맞아가면서 수련을 하는 것도 도둑 형제들에겐 큰 기연이라 할 수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도둑 형제들의 실전 경험이 더 풍부해지고 있었다.

☆ ☆ ☆

이서휘가 목검을 쥐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도이, 도삼. 시작하자.”

그 말에 도이와 도삼이 쌍비수와 직도를 쥐고 일어섰다. 어느새 세 사람이 범상치 않은 무공 실력을 지니고 객잔 뒤편에서 비무를 한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 구경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구경하지 말라는 식으로 몇 번 사람들을 돌려보냈으나 이제는 아예 객잔의 명물이 된 것처럼 소문이 퍼져 나가 근방의 사람들과 무림인들이 잔뜩 몰려들어 통제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오늘도 목검을 쥔 자가 두 명을 상대하는군.]

[세 사람 모두 보통 실력이 아니더라고.]

[백도맹으로 향한다던데…… 백룡지회(白龍之會)라도 참가하려나?]

[시작하니 얌전히 보세. 떠들면 저번처럼 누가 나와서 성질을 그냥 부리더라고…….]

이서휘가 목검을 쥐고 도이와 도삼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래 두 사람은 살수(殺手)나 다름없는 자들이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뒷심이 부족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일부러 내공을 주입한 목검으로 상대하면서 비무가 길어지도록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선공은 도삼이었다.

직도를 빠르게 내밀던 도삼이 이서휘의 반격을 예상하고 깊게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자 도이가 중간에 개입해 혹시나 있을 이서휘의 공격을 차단하고, 도삼이 빠른 속도로 이서휘의 뒤로 돌아가 직도를 무섭게 내질렀다.

이서휘는 도이와 도삼이 괜찮은 합공(合攻)을 펼치자 속으로는 흡족해했으나 반격은 그야말로 매서웠다.

도이의 쌍비수를 튕겨내던 이서휘가 보지도 않고 도삼의 직도를 좌각으로 후려친 다음에 내공을 주입한 목검으로 하단을 크게 쓸었다.

매서운 검풍(劍風)이 휘날렸다.

후우우우우웅!

도둑 형제들이 신형을 솟구치자 이서휘가 직선형의 검풍을 도이에게 내지르고, 불쑥 솟구쳐서 도삼의 정수리를 향해 목검을 내려쳤다.

파앙!

도이가 침착하게 쌍비수를 교차하더니 검풍을 튕겨내고, 도삼은 직도의 날을 비틀어 이서휘의 목검을 두 동강 낼 생각으로 빠르게 휘둘렀다.

하지만 이서휘는 직도의 날이 비틀어지는 순간, 쥐고 있던 목검도 함께 비틀어 튕겨내고 달려드는 도이의 쌍수를 공중제비로 피하자마자 도이의 어깨를 가격하고 순식간에 반대편으로 내려섰다.

빡― 하는 소리가 터지는 순간에 도이가 앞으로 휘청였다. 하지만 어느새 균형을 잡은 도이가 이를 악물고 신형을 되돌려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도이, 침착해라.”

이서휘는 또 다시 도이가 흥분한 것을 깨닫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후에 도삼의 직도를 피하면서 목검으로 도삼의 배를 가격했다.

“커헉.”

이어서 이서휘는 일어나려는 도이의 머리통을 목검으로 내려쳤다. 도이는 인상을 쓸 뿐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서휘가 내려친 것이 진검이었으면 두 사람 모두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도이와 도삼이 밀려드는 고통 때문에 양손으로 머리와 배를 붙잡고 잠시 바닥에서 오징어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이서휘가 일부러 강하게 때린 터라 고통이 만만치 않았던 것.

비무가 이런 식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하나 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사람들의 말이 도둑 형제들의 귀에 꽂히고 있었다.

[진짜 매섭게 대하네. 사형제들인가?]

[계속 덤비는 두 사람도 대단하군.]

[근데 아무리 봐도 어느 문파인지 도통 모르겠군.]

[그러게 말이야. 셋 다 무공이 제각각이라서 말이지.]

사람들이 물러나자 이서휘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머리와 배를 비비고 있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많이 늘었다.”

도이가 평소와 다르게 힘없는 말투로 말했다.

“모르겠소. 늘었는지…….”

도삼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습니다. 맨날 이렇게 끝이 나니까.”

그 말에 이서휘가 빙긋 웃었다.

“두 사람이 왜 늘었는지 얘기해주지. 내가 너희와 겨루면 겨룰수록 내공을 더 많이 쓰게 되거든. 너희는 매번 결과가 이래서 실망이겠지만 실력이 늘어가는 모습은 오히려 내가 더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걱정할 것 없다.”

“그럼 다행이고.”

“그렇습니까?”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의 합이 괜찮아.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장단점을 꿰고 있어. 그나저나 너희는 이제 큰일이다.”

“왜요?”

이서휘가 히죽 웃으면서 객잔에서 걸어 나오는 단우혁을 보며 말했다.

“봐라. 저 벼르고 있던 녀석이 부상에서 거의 회복한 거 같구나. 어찌 상대할 것이냐?”

도이가 콧방귀를 꼈다.

“흥, 뭐 대주보다 약하니까.”

단우혁이 도이의 말을 들었는지 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도이,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아직 나는 이 대주한테 패배한 적이 없어. 백류혼이 졌지. 아, 경공은 한 번 졌었군. 어쨌든 비무는 아니었으니까.”

“시끄러워.”

백류혼이 백연검을 쥐고 뒤늦게 나오고 있었다.

도이와 도삼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큰소리를 쳐놨지만 단우혁과 백류혼이 심상치 않은 고수라는 것은 도둑 형제들도 잘 알고 있었다.

단우혁이 청룡도를 어깨에 걸친 자세로 도둑 형제를 바라봤다.

“어이, 도둑 형제들. 한 번 붙어볼까 이제?”

도이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설마 우리 둘을 모두 상대하려는 건 아니겠지?”

도삼도 일어나면서 맞장구쳤다.

“이거 조금 기분이 상하는데?”

하지만 잠시 후 도둑 형제는 둘이 한꺼번에 덤볐다가 단우혁의 청룡도에 패해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단우혁이 이서휘처럼 목검을 들지 않았다는 게 유일하게 위안거리랄까.

도이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 대주를 상대하느라 오늘은 좀 지쳐 있었다.”

도삼이 다시 맞장구를 쳤다.

“연속 비무는 힘들지. 암, 그렇고말고. 단 공자의 대도(大刀)가 너무 무거웠어.”

두 사람의 넉살에 그제야 단우혁과 백류혼도 웃음을 터트렸다. 도이와 도삼의 성격에 대해 확실히 알았기 때문.

하지만 그때 도이가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뭐 여기 있는 네 명 모두 이 대주한테 지니까 다들 동급이라 칩시다. 우리 넷은 이제 동급이오.”

“뭔 개소리냐?”

단우혁이 싸늘하게 내뱉자 도이가 대꾸했다.

“그럼 아니야?”

결국 이서휘가 나섰다.

“그만들 해라. 그나저나 아까 구경하던 자가 백룡지회(白龍之會)라 하던데 뭔지 아는가?”

도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룡지회(白龍之會)는 백도맹이 주최하는 후기지수 시합이죠. 우승하면 말 그대로 백도맹의 승룡회(勝龍會)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집니다.”

“후기지수 시합이라 수준이 낮을 거 같은데?”

이서휘가 모르는 척 다시 되묻자, 단우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준이 낮겠지. 도이나 도삼 정도면 출전할 만하겠군.”

도둑 형제들이 발끈했다.

“장난해?”

“백룡지회(白龍之會)를 어찌 무시하십니까? 구파를 제외한 고수들이 공식적인 행보를 밟아 백도맹의 고위직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대회입니다.”

이서휘가 도삼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다.

“역시 대도(大盜)의 자질을 갖췄어. 그러고 보니 백도맹을 한 번 털려고 알아본 적이 있었구만? 비무의 수준이 높아 참가를 포기했던 것이고.”

이서휘가 정확하게 짚자, 도이가 크게 감탄했다.

“이 대주, 똑똑한데?”

도이의 어처구니없는 말투에 또 다시 단우혁과 백류혼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서휘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애초에 관심이 없고. 도이나 도삼이 거기에 출전해서 명성이나 얻었으면 좋겠다. 우승하긴 어렵겠지만.”

그 말에 백류혼이 말했다.

“이 대주.”

“왜?”

“백룡지회는 명성을 날리고자 하는 자들의 각축장이야. 백도맹은 늘 이것을 이용해왔고. 누군가가 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실리와 명분을 모두 챙기겠다는 뜻이야. 우승을 하면 대다수 백도맹으로 들어가게 돼. 들어가서 알게 되겠지. 구파의 높은 벽을 말이야. 무공이 높다고 백도맹의 고위직에 올라설 수는 없으니까. 도삼이 말한 승룡회 출신의 맹주는 그야말로 옛날 일이지. 하지만 위명을 얻고 싶은 자들에겐 백룡지회만큼 달콤한 유혹이 없네. 자네는 군림맹이라 참가하기 꺼려지겠지만 나는 본래 참가할 생각이 있었네.”

“그런가? 군림맹이 어때서. 고작 무공의 고하를 따지는 것 이외에 의미가 있겠는가? 차라리 그냥…….”

이서휘가 말을 하다 멈추자 네 사람이 동시에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차라리 그냥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아, 대주님은 이럴 때가 가장 답답해!”

“빨리 말 해.”

“일 다 안 보고 뒷간에서 나올 때 기분이 마치 지금과 같았지.”

마지막으로 도이까지 투덜대자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천하제일을 가리는 대회라면 나갈 생각이 있네.”

그 말에 이서휘를 제외한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하!”

같이 웃던 도삼이 뜻 모를 말을 내뱉었다.

“뭐 안 될 것도 없죠.”

“그게 무슨 말이냐?”

이서휘의 물음에 이번에는 백류혼이 대꾸했다.

“백도맹이 쉬워 보이겠지만 이런 데선 아주 머리가 비상해. 백룡지회 우승자는 의례적으로 맹주에게 도전하네.”

“정말인가?”

“더 들어 보게. 의례적이란 말이지. 이놈들도 머리를 자주 굴리거든.”

백류혼의 말이 이어지자 사람들이 귀를 쫑긋했다. 물론 이서휘는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잠자코 백류혼의 말을 경청하고 있을 뿐이었다.

백류혼의 말에 따르면 백도맹도 음험한 구석이 있었다. 백류혼의 말이 이어졌다.

“백룡지회 우승자가 맹주에게 도전을 해도 백도맹의 누군가가 나서서 자네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니, 내가 먼저 상대해주지…….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일세.”

“뭐야? 그걸 의례적으로 한단 말인가? 결국 백룡지회 우승자는 맹주에게 도전을 못한단 말인가?”

단우혁이 묻자 백류혼의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은 아니고. 백룡지회가 백도맹에 들어가고 싶은 자들의 비무라면 그 다음부터가 진짜 당대의 고수들이 등장하는 비무지. 백룡지회 우승자를 시작으로 백도맹뿐만 아니라 맹주에게 도전하고 싶은 자들이 서너 차례 나선다네. 그래봤자 대부분 구파의 고수들에게 꺾이기 마련. 물론 구파의 고수를 모두 꺾으면 맹주가 등장하겠지만 말이야. 백도맹이 무서운 것은 중진 고수들이 무척 두텁다는 점일세. 절대로 맹주까지 나서게 만들지 않는다네.”

도삼이 말했다.

“약아 빠졌구나.”

“백도맹으로서는 어쩔 수 없네. 맹주가 일일이 다 상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쨌든 천하제일이란 호칭에 가장 근접한 자가 아닌가?”

백류혼의 말에 이서휘가 피식 웃었다.

“우습군. 백도맹주를 꺾은들 천하제일이라 할 수는 없어. 군림맹주, 흑도맹주만 해도 백도맹주의 밑이 아닐 터. 또한 드넓은 무림에 숨은 고수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상징적인 것이지. 그렇게 증명하고 싶으면 그들이 와서 백룡지회 이후에 벌어지는 비무에 도전하면 그만이네. 하지만 백도맹은 끊임없이 고수들을 내보내 도전자를 지치게 하겠지. 겨루지 않겠다는 전략으로 백도맹은 항상 상징적인 천하제일인을 보유하게 된 셈이야. 뭐 백도 세력에게 국한된 이야기겠지만.”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나는 분위기를 살피다가 때를 봐서 그럼 후반 비무전에 한 번 도전하겠네.”

그 말에 이서휘를 제외한 자들이 모두 놀랐다. 구파의 장문인도 가끔 등장하는 후반 비무전이었기 때문.

“진심인가?”

단우혁의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를 살펴보고 결정하겠네.”

이서휘는 왠지 일월마가나 다른 마가가 백룡지회를 어떻게든 이용하지 않을까 하고 추측하고 있었다.

☆ ☆ ☆

남양에 가까이 갈수록 백도맹으로 향하는 행렬이 줄을 이뤘다. 이서휘가 예상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저 백도맹 근처에서 일월마가의 움직임을 살피려고 했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몰려드는 군웅들 때문에 이서휘 일행은 묘한 흥분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단우혁과 백류혼은 아직 명성을 날리지 못한 열혈남아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러고 보니 이서휘의 전생에서는 단우혁과 백류혼이 점차 무림에 이름을 알리면서 활약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서휘는 두 눈을 잃고 방황하던 시기였으니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이서휘가 말했다.

“사람이 정말 많이 몰리는군.”

그때 도삼과 도이의 눈이 커졌다. 그 시선을 따라 이서휘가 바라보니 과연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남원으로 향하는 여인 문파의 행렬이었다.

이서휘가 백류혼에게 물었다.

“혹시…… 매잠파(梅岑派)의 여인들인가?”

“맞네.”

“처음 보는군.”

행렬이 무척 당당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와 열을 맞춰 이서휘 일행을 지나갔다. 장로로 보이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과연 검이라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까 싶은 가녀린 여인들이었다.

도이와 도삼이 하도 뚫어지게 쳐다보자 매잠파의 한 여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서휘 일행을 노려보면서 지나갔다.

도삼이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뭐가?”

“매잠파는 얼굴 보고 뽑나 봐. 다들 괜찮은데?”

그때 매잠파의 누군가가 도삼의 말을 들었는지 풉 소리를 냈다가 사저의 꾸지람을 듣고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갔다.

이서휘도 매잠파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고 있었다. 매잠파는 훗날 극제(戟帝) 소자성이 이끄는 벽천회에 합류하는 문파였다. 절강의 보타산(普陀山)에서 시작된 문파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세월이 흘러 여인들로만 제자를 받고 있었다.

절강의 매잠파까지 왔을 정도로 다양한 지역에서 백도 세력에게 이름을 알리려는 무림인들이 속속 몰려오고 있었다.

위명(威名), 명성(名聲), 자부심, 승부욕과 출세욕이 남양으로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몰려든 사람들에게 다양한 물건을 팔기 위해 먼 길을 걸어온 상인들과 무학의 뜻을 둔 사람들까지 있어 백도맹 주변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남양에 도착해 숙소를 구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들어가는 곳마다 사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

이서휘는 잠시 생각하다가 남양에서 제일 유명한 객잔이 어디인지 물어 이동했다. 아예 가장 비싼 숙소를 찾아갔던 것. 예상대로 아직 방이 남아 있어 이서휘가 값을 치르고 들어가 짐을 풀었다.

“하필 백룡지회 기간에 백도맹에 오게 되다니.”

도이와 도삼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감탄사를 연발했다. 방이 한 두 개가 아니었고 중앙에는 모여서 식사를 할 수 있는 큼직한 원형 탁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오히려 다섯 명이 사용하기엔 과하게 넓은 장소였다. 사람도 구경할 겸, 다섯이 객잔 일 층에 내려가자 그야말로 각지에서 온 무림인들이 떠들썩하게 백룡지회에 대한 것을 떠들고 있었다.

[올 해는 누가 우승할 거 같은가?]

[당연히 화산의 이재곤(李才滾)이나 곤륜의 구범천(具釩天) 소협이겠지.]

[무당의 손빈(孫臏)은 어때?]

[손빈도 있었군. 삼파전이네.]

[셋 중 하나가 이기고 맹주에게 도전하는 의식을 시작하겠군.]

[맞아. 다른 곳에서 아무리 몰려와봤자 망신만 당할 것이야.]

그 말에 이서휘와 단우혁, 백류혼이 서로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단우혁과 백류혼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본래 세 사람 다 백룡지회에 참가할 수 있는 나이다. 백도맹이 서른 미만의 고수만 참여하도록 권하고 있었기 때문. 더군다나 구파의 제자들 중에서 문파의 기수가 되지 못하거나 백도맹에서 특별한 직위를 갖지 않은 자들도 참가가 허용되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다 승룡회에 들어가려는 목적과 위명을 알리고 싶다는 욕망이 뒤엉켜 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백류혼이 이서휘에게 말했다.

“자네 정말 백룡지회에 관심이 없나?”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없네. 말한 그대로야. 도이나 도삼이 나가서 경험을 쌓았으면 좋겠는데.”

이서휘가 그리 말하자 백류혼이 단우혁을 보며 말했다.

“단우혁, 자네는?”

잠시 고민하던 단우혁이 놀랄 만한 얘기를 꺼냈다.

“하, 거참……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말이지. 어쨌든 내가 나가면 백류혼 자네와 결승전에서 만나겠군.”

그때였다.

갑자기 이서휘의 탁자 주변에서 묘한 정적이 흘렀다. 어쩐지 사람들이 전부 백류혼과 단우혁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 그때 이서휘 일행 근처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무림인 한 명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자 그것을 신호로 이서휘 주변에 있던 자들이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와하하하하.”

“하하하하! 들었나?”

“하아…… 이래서 백룡지회가 재미있다니까.”

“그러게 말일세.”

“잠시만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아니라니까.”

사람들이 이서휘 일행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자 이서휘도 그만 웃음이 나와 껄껄대고 웃었다.

“단우혁, 표정 좀 봐라. 하하하하하.”

잠시 탁자에서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던 단우혁이 백류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나간다. 그 백룡지회.”

그때 술이 좀 들어간 이십 후반의 무림인 한 명이 이서휘 일행을 바라보며 경고했다.

“이봐. 나가든 말든 상관은 안 하겠는데 말은 조심해야겠군. 두 사람이 결승에서 붙겠다니……. 표정들을 보아 하니 농담은 아닌 거 같고. 기가 막히는군. 백도맹이 무슨 동네 무관인줄 아는가?”

이서휘가 씨익 웃으면서 사악한 말을 내뱉었다.

“단우혁, 참아라.”

일부러 크게 말한 이서휘다. 참으라는 말은 단우혁을 열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방금 설교를 늘어놨던 남자를 열받게 하는 말이었다.

“안 참으면 어떻게 할 것인데? 지난 해 백룡지회에서 네 번을 이겼던…….”

남자가 자기자랑을 늘어놓으려고 하자 단우혁이 갑자기 내공을 잔뜩 주입해 호통을 내질렀다.

“닥쳐!”

순간 단우혁이 내지른 기합이 마치 기파가 퍼져나가는 것처럼 객잔 일층을 강타했다. 객잔 전체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단우혁이 벌떡 일어나 객잔 전체를 위압적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청협문의 단우혁이다. 실력을 확인하고 싶으면 백룡지회가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확인시켜주마.”

단우혁의 거침없는 언행에 이서휘, 백류혼, 도삼이 갑자기 박장대소를 하며 단우혁을 끌어 앉혔다.

“그만 좀 해라. 아, 진짜 성깔머리 하고는…….”

“단 공자님, 그러다 정말 싸우시겠소. 부상에서 회복한 지 얼마나 되셨다고.”

“자제해라, 단우혁.”

도이가 심드렁한 얼굴로 단우혁을 빈정거렸다.

“이야, 우리 단 공자. 무림인이네, 무림인이야.”

단우혁이 도이를 보며 말했다.

“너는 그 말투 좀 어떻게 안 되겠느냐?”

“말투가 왜? 내가 당신 부하도 아니고.”

“됐다, 인마.”

“나도 됐소.”

이서휘가 나서서 말렸다.

“그만 좀 해라. 한 잔씩 하자.”

그때였다.

객잔 구석에서 누군가가 내공을 실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협문의 단우혁이라면 백룡지회 전에 겨뤄도 될 만한 상대로군.”

사람들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내자 저마다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곤륜의 구범천(具釩天)이다.”

“곤륜파가 있었군.”

구범천은 곤륜파 소속이었지만 백도맹에 머무르지 않고 있었다. 곤륜파에서 백룡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이서휘 일행처럼 객잔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것. 지난 백룡지회에선 준우승에 그쳤던 구범천이었다.

이서휘도 구범천을 바라봤다.

‘대단한 자인가? 내가 활동하던 시절엔 이름을 듣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면 백도맹에도 꽤 많은 고수를 보유했을텐데 어찌된 노릇인지 이서휘를 비롯한 사패들이 천마교에 저항하고 있을 무렵엔 거의 다 궤멸된 상태였다.

구범천이 일어나서 곤륜파의 무인들을 데리고 이서휘 앞에 다가와 말했다.

“곤륜의 구범천이네. 자신감 넘치는 태도, 그야 말로 마음에 드는군. 어떤가? 백룡지회의 수준을 한 번 확인해보는 것이.”

이서휘와 단우혁, 그리고 백류혼이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백도맹이 그야말로 재미있는 곳이었구나.’

이서휘와 백류혼이 단우혁을 바라보자, 단우혁이 청룡도를 쥐고 일어나며 말했다.

“청협문의 단우혁이네. 곤륜이라니 이거 대단한 영광이로군. 나가지.”

말과 함께 단우혁과 구범천이 객잔 밖으로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그러자 이서휘를 제외한 일행들이 동시에 일어나 단우혁을 따라나가다 말고 앉아 있는 이서휘를 향해 물었다.

“안 나가십니까?”

그 말에 이서휘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관심 없다.”

“왜요?”

그 말에 이서휘가 좋은 생각이 떠올라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탁자 위에 탕 소리가 나도록 은자 하나를 올려놓았다.

“단우혁이 이긴다. 자, 나와 승부 내기를 할 사람 없소?”

이서휘가 술병을 하나 탁자 중앙에 옮기면서 뒤따라 나가려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자, 단우혁이 이길 것이라 생각하면 좌측에 돈을 거시오. 곤륜의 구범천이 이길 것이라 생각하면 우측에 돈을 거시오.”

“참나 누가 좌측에 걸겠나?”

누군가의 말에 이서휘가 씨익 웃으면서 은자 위에 전표를 한 장 올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더 걸지. 은자 오천 냥의 전표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우측에 돈을 걸어도 오천 냥은 넘지 않을 터. 내가 지면 돈을 건 사람들이 알아서 오천 냥을 분배하시오.”

“은자 오천 냥?”

이서휘는 심리전의 달인이다. 사람들이 전표를 보고 경악으로 물든 시점에 슬그머니 일어나면서 손을 뻗었다.

“뭐 없으면 말고……. 곤륜의 구범천이 우승 후보가 아니었나보군.”

“이거 웃기는 사람들이네.”

나가려던 곤륜파의 사람들이 되돌아 와서 우측에 탕 소리가 나도록 은자들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객잔에 있는 노름꾼들이 몰려들어서 우측에 동전과 은자를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러자 이서휘가 제지하면서 말했다.

“은자만 받겠소. 너무 번잡해.”

그래도 우측에 은자가 쏟아졌다. 그것을 바라보던 이서휘가 도삼에게 말했다.

“계산해라. 오천 냥이 넘으면 내가 전표를 더 내려놓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객잔의 문이 활짝 열리자 이서휘 일행이 아예 탁자를 들고 관전할 수 있는 곳으로 나갔다. 그 사이 우측에 계속 은자가 쏟아지고 있었다. 도이와 도삼의 눈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서휘가 도이, 도삼, 백류혼에게 말했다.

“이야, 오늘 남양에서 돈 좀 벌겠는데?”

“그렇게 자신이 있으십니까?”

도삼의 말에 이서휘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도이, 도삼, 백류혼이 경악할 정도로 재수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내가 너무 강한 것이지 단우혁이 약한 것이 절대 아니다.”

이서휘의 말에 세 사람이 재수없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붙잡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상에서 회복한 단우혁이 청룡도를 쥔 모습을 바라보며 이서휘가 입꼬리를 올렸다.

‘단우혁, 사패의 힘을 보여줘라.’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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