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일월마가>
백도맹 분타로 돌아간 이서휘는 난장판이 벌어진 현장에서 단우혁과 백류혼에게 잔뜩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어딜 갔다가 지금 오는 것이냐! 자칫하면 다 죽을 뻔했다!”
그 말에 이서휘가 부상당한 몸으로 검과 도를 쥐고 나온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했다. 여기로 오려는 마가의 수뇌부를 좀 살펴보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맞붙어서 심연마존이라는 놈이 죽었다.”
“뭐라고?”
“다 몰려왔으면 내가 분전했어도 막기 힘들었을 것이다. 차차 이야기 해주마.”
이서휘는 잠시 백도맹 분타를 돌아봤다. 살펴보니 어느새 먼저 도착한 검림의 일원들이 피해 복구를 돕고 있었다.
‘그래도 검림이 가장 먼저 달려왔구나.’
그때 도삼이 쪼르르 달려왔다.
“대주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사람 모아서 급히 왔더니 갑자기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도이는?”
“아직 안 보입니다.”
“알았다.”
이서휘는 검림에게 부탁해 하룻밤을 분타에서 머물도록 하고 주변을 돌아보다가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이서휘는 궁금한 게 많아서 복구를 지휘하는 백협단주 담가막(潭嘉嗼)에게 백도맹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백도맹에 등장했던 간자들의 처리는 어찌 했는지, 어느 마가와 맞붙었는지, 백도맹 내부의 문제는 없는지 등등.
이서휘는 담가막을 무조건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위극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로 백도맹에 대한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그렇게 이서휘는 유백, 단우혁, 백류혼이 부상에서 회복할 때까지 함께 백도맹 분타에 머무르다가 뜻밖의 인물과 조우했다.
흑도맹으로 갔던 도이가 저녁 무렵에 흑도맹에서 ‘지원’을 보낸 단 한 명의 인물을 데리고 왔던 것.
다름 아닌 명왕대주(明王隊主) 송무진(宋武振)이었다.
이서휘가 화들짝 놀라면서 양팔을 뻗어 송무진을 반겼다.
“송 대주!”
이서휘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다가오자 송무진이 씨익 웃었다.
“이 대주, 무사했군. 내가 너무 늦었나?”
백도맹 분타 안에 백도의 무인들이 즐비한데도 송무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서휘도 송무진의 여유로움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뭐, 연합이 된 마당에 별 일은 없겠지만 송무진은 그야말로 거리낌이 없구나.’
물론 백도맹도 송무진의 정체를 쉽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아직 송무진의 명성이 무림 전역에 떨칠 시기가 아니었고, 그저 단우혁과 백류혼처럼 이서휘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친구라 여겼던 것.
그나저나 송무진이 백도맹 분타에 도착하자 이서휘는 속으로 장난기가 발동됐다.
“어찌 혼자 오셨소?”
“이 대주, 자네가 있다 길래 급히 왔네. 수하들을 끌고 오면 백도맹이 더 놀랄 거 같아서 말이지.”
“하하하하.”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송무진을 붙잡고 안으로 데려갔다.
“먼 길 와줘서 고맙소이다. 자자, 내가 소개해줄 사람이 많소. 아니다. 이 친구들이 어느 정도 부상에서 회복했으니 술이나 한 잔 하러 갑시다.”
그 말에 송무진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술도 못 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던 송무진이 무너진 분타 건물의 지붕과 곳곳의 혈흔을 바라보며 말했다.
“꽤 거친 싸움이었나보군.”
이서휘가 탁자에서 세 사람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캬, 이런 인연이 맺어지다니 재미있구나.’
근처 객잔에서 이서휘의 앞에 전생의 도왕, 검왕, 흑도맹주가 앉아 있었다.
이서휘는 단우혁과 백류혼의 반응이 무척 궁금했다. 그리고 송무진이 두 사람을 어찌 바라보는지도 눈여겨보고 있었다.
송무진이 먼저 덤덤한 말투로 자신을 소개했다.
“흑도맹 송무진이오.”
“뭐라고? 흑도맹?”
단우혁이 듣자마자 인상을 그었다. 그러자 이서휘가 대꾸했다.
“연합을 성사시켰다 하지 않았나. 분타로 지원을 온 흑도맹의 송무진 대주일세.”
“흑도맹이라…….”
백류혼마저 떫은 표정을 짓자 송무진이 빙긋 웃었다.
“왜들 그러시오? 흑도의 남자와는 술을 마시지 않을 생각이신가?”
“술이야 얼마든지 마셔주지. 하지만 내가 부상을 입은 몸이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오. 우리가 술만 나누기엔 무언가 아쉬울 것 같은데 말이지.”
그 말에 송무진이 웃음을 흘렸다.
“아쉽다? 나야 말로 아쉽군.”
성질이 과격한 단우혁이 먼저 송무진을 보고 무작정 시비를 걸려고 하자 이서휘가 단호하게 끊었다.
“이러자고 세 사람을 만나게 한 게 아닐세. 오늘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네.”
이서휘는 세 사람을 모아놓고 그간 이서휘가 죽였던 마존에 대한 이야기와 검마, 사왕 등을 설명했다. 그런 후에 이서휘는 본론을 꺼냈다.
“죽여야 할 사람이 있네. 아니, 먼저 찾아내야겠지. 이 자가 어디 있는지.”
이서휘가 술자리에서 농담 한 마디 하지 않은 채로 심각하게 말을 이어 나가자 그제야 술자리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누군가?”
단우혁이 묻자 이서휘가 혈륜마제에게 들었던 내용을 꺼냈다.
“위극신.”
“위극신이 누구인가?”
“지금 주시해야 할 마가는 일단 검마가와 일월마가. 그 중에 일월마가의 움직임이 전혀 포착되지 않고 있네. 내 추측으로는 백도맹 주변에 있거나 백도 세력에 잠입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네. 때문에 자네들은 나와 함께 백도맹으로 이동해 위극신이라는 남자를 찾아 죽이세. 그 자가 바로 일월마존으로 추정되는 남자일세.”
백류혼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존이 백도맹에 있다고? 그걸 어찌 확신하나?”
“예감이야. 다른 마존들도 일월마존의 행방을 모르는 눈치더군. 군림맹과 구화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마존 중에서도 없었거든.”
그 말에 단우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교의 총본산을 찾아내서 먼저 치지 않고 어째서 위극신이라는 놈을 먼저 찾아 죽이자는 말인가? 그 자가 어째서 위험하다는 것이지?”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건 물 밑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일이야. 총본산을 찾아 대규모 병력을 보내는 것은 맹이 해야 할 일이고 우리는 도우면 되네. 하지만 마존을 찾아 죽이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서휘는 세 사람을 납득시키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송무진은 분타로 돌아가 보고를 한 후에 따로 출발하겠다는 의견을 남겼다.
이서휘가 평소와 다르게 열변을 토하자 세 사람은 어느새 자존심 싸움을 하느라 굳어졌던 분위기를 풀고 이서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세 사람이 귀를 기울이자 자신이 그 동안에 마가와 겨뤘던 이야기를 실감 나게 풀어놓고 있었다. 특히 사왕(四王)들의 무공 수위를 설명할 때는 저마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세 사람은 지금 당장 이서휘와 겨뤄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서휘가 고전했다는 사왕의 무위가 더더욱 걱정이 되었던 것.
그렇게 이서휘는 세 사람의 머리에 사왕과 위극신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면서 술자리를 밤늦게까지 이어 나가고 있었다.
☆ ☆ ☆
하남의 남양(南陽)에 위치한 백도맹.
그 백도맹에서 굳게 닫혀 있던 하서문(下西門)이 오랜만에 열렸다. 백도맹의 무인들은 출입하지 않는 문이었다.
철옥(鐵獄)에 갇혔다가 형기를 마치고 나가는 자들이 이용하는 문이었는데 일부러 성인 남자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높이가 무척 낮았다.
백도맹에서는 그래서 하서문이라 부르지 않고 종종 개구멍이라 불렀다. 그 개구멍으로 무척 오랜만에 사람들이 고개를 한 번씩 숙이면서 나오고 있었다.
이른바 무림인들에게 중양절(重陽節)의 대사면(大赦免)이라 불리는 사건이었는데 실상은 철옥에 갇혀 있던 중죄인을 대부분 처형시키고, 죄질이 가벼운 잡범들은 다소 너그럽게 사면하여 일시에 내보낸 사건이었다.
“철옥을 폐지하고 철옥에서 일하던 무인들을 무력 조직으로 분산 배치하겠다. 남양 일대에서 발견한 수상한 자는 즉결 처리하고 체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실로 서슬이 퍼런 명령이 내려지고 철옥에 관련된 무인들은 무력 조직으로 다시 올라갔다. 또한 일부 철옥 관리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로 백도맹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
간자가 발견되었던 조직을 통폐합시키면서 이런저런 진통을 겪고 있었으나 누가 봐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처리방식은 아니었다.
백도맹의 혼란을 뒤로 하고 잡범으로 분류되었던 사람들이 하서문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도박을 하다 잡혀간 자들은 형이나 아버지에게 두드려 맞기 시작했고 어느 노모는 아들을 붙잡고 한참을 울고 있었다.
지은 죄에 비해 억울할 정도로 철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자들이 많았다.
특히 사마외도로 분류되었던 무림인들은 대다수 철옥에서 처형되어 하서문으로 빠져 나오는 자들이 없었다.
기이한 풍경이었다.
그때 하서문에서 훤칠한 공자 한 명이 걸어 나오자 마침 대기하고 있던 가솔(家率)들이 환영식을 펼치듯이 나란히 서서 공자의 귀환을 축하했다.
남양에서 제법 풍류공자로 이름을 떨치던 벽운장(壁雲莊)의 젊은 장주 곽철명(郭哲明)이었다.
곽철명은 이십 대 청년으로 부녀자를 희롱하는 현장에서 백도맹의 무인에게 즉시 체포되어 무려 일 년이나 철옥에 갇혀 있던 남자였다.
“공자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벽운장의 식객으로 알려졌으나 실은 곽철명이 요청하는 무엇이든 공급하고 있는 삼십 대의 무인이 곽철명을 반겼다.
곽철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 형, 덕분에 편하게 지냈소.”
“별말씀을.”
그때, 하서문에서 마지막 출소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십 대의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 허름한 옷에 봇짐 하나를 달랑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얼굴에 윤이 나는 곽철명과는 달리 먹고 마시는 게 시원치 않았는지 얼굴과 몸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청년이 두리번거리자 허리가 잔뜩 구부러진 노파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호구야!”
호구라 불린 청년이 씨익 웃었다.
“할머니.”
“이놈아!”
노파는 무어라 혼을 내려다 말을 잇지 못하고 호구라는 청년의 얼굴과 목을 연신 쓰다듬었다. 어찌나 쓰다듬는지 호구라는 청년은 물론이고 바라보는 자들마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철명이 씨익 웃으면서 청년을 불렀다.
“호구야.”
“네, 곽 형.”
둘은 아는 사이였다.
죄인들을 일차적으로 분류할 때 곽철명(郭哲明)과 이호구(李糊口)는 정방에 머무르면서 서로 통성명을 나눴던 것.
그 후로는 방이 갈라져 만나지 못했다가 대사면이 행해진 날에서야 만나게 됐던 것.
가진 부는 극명하게 차이가 날 정도였지만 두 사람은 나이도 외모도 흡사해 어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은 곽철명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곽철명은 가노에게 무언가를 받은 다음에 이호구를 불렀다.
“내가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라고 그랬지?”
“곽 형, 정말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어허, 자꾸 이렇게 날 상스러운 사람으로 만들 생각인가? 이러면 나 섭섭하네. 자, 받게.”
곽철명이 이호구에게 은자를 건넸다. 철옥의 동기에게 건네는 돈 치고는 무척 과한 액수였다.
곽철명의 말이 이어졌다.
“가서 할머니 잘 모시고. 내 말 했지? 마땅히 할 일이 없으면 반드시 벽운장으로 찾아오라고. 그리고 반드시 개명하게. 아무리 자네 조부님이 가난을 걱정하여 지은 이름이라 하지만 호구가 대체 뭔가? 차라리 호구(虎口, 호랑이 입)가 낫겠네. 반드시 이름부터 고치라고. 그리하면 운이 탄탄대로일 게야. 앞으로!”
곽철명은 걱정이 되는지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사람은 이름을 잘 지어야 해. 내 이름을 봐. 철명(哲明), 얼마나 밝은 이름인가?”
“그렇습니다.”
자꾸 곽철명의 말이 길어지자 벽운장의 사람들이 와서 곽철명을 끌어당겼다.
“공자님, 이만 가시지요. 이 백도맹 근처로는 다시 오지 말자 해놓고 뭐 이리 오래 계십니까? 어이, 자네도 공자님 말씀대로 해. 일 없으면 언제든 찾아오고 알았나?”
이호구가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래. 볼 때마다 동생 생각이 나서 말이야.”
곽철명이 이호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씨익 웃었다. 이호구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곽철명은 이호구의 표정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은 헤어질 때도 대조적이었다.
곽철명은 벽운장의 사람들을 이끌고 떠들썩하게 인근에서 유명한 객잔으로 들어가고 이호구는 노파와 함께 국수집에 들어가 조용히 국수를 시켜 먹었다.
이호구는 탁자에 놓인 은자를 바라보며 묘한 한숨을 내쉬었다. 노파가 은자를 바라보더니 이호구에게 말했다.
“이제 뭘 할 셈이야? 저 젊은 공자의 말대로 벽운장이라는 곳에 가볼 셈이냐?”
“아직 생각 중입니다. 공부도 많이 밀렸고.”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공부를 할 생각이야? 일이나 해라. 일이나, 자고로 밥 벌어먹는 데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최고다.”
“예.”
이호구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곽철명은 객잔에서 가솔들과 함께 거하게 한 잔 마신 다음에 공급책인 무인을 불러 조용히 물었다.
“공손 형, 지금 빠져서 한 명만 구해 오시오. 얌전한 처자였으면 좋겠군. 나는 슬슬 벽운장으로 가 있겠소. 그리고 조만간 이호구가 찾아올 수 있으니 수하들에게 말해 청소 좀 해놓으시오.”
“알겠습니다. 먼저 가 계십시오.”
곽철명은 무인이 빠져 나가자 오랜만에 여인과 보낼 밤을 생각하면서 설렌 마음을 감주치 못하고 있었다. 또한, 조만간 찾아올 이호구를 통해서는 철옥에 갇혀 있느라 수련을 멈췄던 무공을 다듬을 생각이었다.
벽운장은 백도맹에서 멀지 않은 구연산(究連山)에 위치한 산장(山莊)이었다.
이호구(李糊口)는 주변 경치를 감상하면서 벽운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발 앞에 지나가는 벌레를 발견하곤 보폭을 크게 하여 지나갔다. 걷던 와중에 만나는 이름 모를 꽃 앞에서는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기를 수차례.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호구는 벽운장을 찾아 가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일전에도 가봤던 곳이었으니까.
곽철명이 분명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
빨리 가자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오랜만에 바라보는 구연산의 정취에 빠져 발걸음이 느긋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맑은 공기를 마시니 저절로 어깨가 펴지고 탁했던 몸 안의 기운이 시원하게 배출되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어느새 벽운장 앞에 도착한 이호구는 잠시 벽운장 전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장이 높아 정문이 닫혀 있으면 그야말로 작은 요새처럼 보이는 산장이었다.
이호구는 정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한 손을 등 뒤로 보내고, 다른 손을 마저 보낸 다음에 뒷짐을 졌다.
이호구는 유람을 온 것처럼 홀로 벽운장에 들어가 누군가 공을 들여 만들어 놓은 장원에서 당귀(當歸)와 작약(芍藥)을 바라봤다. 작약은 적작약과 백작약이 뒤섞여 있었다.
그때 벽운장의 무인이 한 명이 꽃을 구경하는 이호구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호통을 내질렀다.
“웬 놈이냐!”
무인의 호통에 안에서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가뜩이나 오늘은 곽철명이 복귀하면서 여인을 한 명 납치할 생각이라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몰려나온 사람 중에서 누군가가 허탈한 말을 내뱉었다.
“자네는 이호구가 아닌가? 난 또 누구라고.”
“이호구? 공자님이 기다리는 사람 말인가? 하하, 들어오게.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군.”
그 말에 이호구는 십여 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들은 여기에 당귀와 작약이 왜 심어져 있는지 아는가?”
“뭐? 자네?”
이호구가 말을 이어 나갔다.
“곽철명이 이것을 잘 활용 했는지 모르겠군. 생혈분공(生血噴功)을 사용하다 보면 피가 엉클어지기 마련이야. 적작약을 먹으면 도움이 되지. 또한 무턱대고 납치하는 여인마다 바로 취할 것이 아니라 당귀를 먼저 며칠 복용케 한 다음에 취하는 것이 정법(定法)일세.”
“그게 무슨 말이냐?”
벽운장의 곽철명이 굳은 얼굴로 나와서 이호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곽철명이 말했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이호구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로 뒷짐을 지고 다시 벽운장을 나가려는 것처럼 천천히 걸어갔다.
곽철명은 이호구가 도망가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싸늘하게 명을 내렸다.
“가서 잡아와. 무슨 개소리를 내뱉은 건지 직접 고문하겠다.”
십여 명이 우르르 달려 나갔다.
그때였다.
등을 돌리고 있는 이호구의 좌우에 청면인(靑面人)과 적면인(赤面人)이 소리 없이 내려섰다. 얼굴이 무척 기괴했다. 멀리서 보면 가면을 쓴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피부의 색 자체가 청색과 적색을 띠고 있었다.
청면인이 이호구에게 자색의 피풍의를 입히며 낮은 어조로 말했다.
“어찌 할까요.”
“곽철명을 제외하고.”
“명을 받듭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벽운장의 무인들은 청면인과 적면인을 보자마자 대적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았다. 그래도 수는 자신들이 많으니 어쩔 수 없이 병기를 꼬나 쥐고 달려들었다.
벽운장의 입구에서 산세를 바라보는 이호구의 등 뒤로 무언가가 자꾸 부러지는 소리가 들였다.
누군가가 비명을 내지르려다가 입이 막혔는지 “흡.”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정리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그 사이에 곽철명은 콧방귀를 끼고 있었다. 자신의 수하들도 곽철명이 익히고 있는 무공의 대단함을 잘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적면인과 청면인이 수하들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도 아직은 여유가 흘러 넘쳤다.
곽철명이 말했다.
“호구야,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냐? 네 놈의 정체가 무엇이야? 왜 일부러 철옥에 갇혀 있었던 거지?”
그 말에 적면인이 냉소를 머금고 곽철명에게 다가갔다.
곽철명이 싸늘한 눈빛으로 경고했다.
“서라.”
적면인이 콧방귀를 끼면서 다가오자 곽철명의 손이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가 바람을 가르면서 적면인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갔다.
“음?”
적면인은 생혈분공을 오성까지 성취해 사람의 몸에 닿는 순간 피부와 근육을 녹일 수 있게 된 곽철명의 손을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붙잡은 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뺨을 후려쳤다.
쫘악 소리와 함께 곽철명의 고개가 돌아가자 적면인이 말했다.
“특별한 명이 있을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도록.”
적면인이 내공을 주입해 곽철명의 어깨를 누르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곽철명의 무릎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곽철명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때 이호구가 벽운장 아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늦는구나.”
그 말에 청면인이 조용히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이호구가 수하들을 기다리다가 다시 자세를 돌리자 벽운장 아래에서 범상치 않은 고수들이 경공을 펼치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저마다 복장이 다양했다.
마치 이서휘에게 검림이 모여드는 것과 흡사했다.
도사, 승려, 상인, 기녀, 화공(畫工, 그림 그리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 사공(沙工), 숙수, 사냥꾼, 백정, 학사(學士)까지. 그밖에도 직업이 없는 거지, 탕자(蕩子), 취객 등 그 구성이 실로 다양했다.
과장해서 말하면 남양(南陽) 지역에 존재하는 다양한 직업군에서 대표자를 보낸 것처럼 고르게 등장하고 있었다.
일월마가(日月魔家)라는 울타리만 있을 뿐 저마다 각자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던 자들이었다. 물론 당장 올 수 있는 사람들만 모인 것이었다.
그런데 다들 빈손이 아니었다. 이 자들은 마치 벽운장에 와봤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어와 이호구에게 인사를 건네고 장원에 연회를 펼칠 때 사용하는 길쭉한 탁자에 준비해 온 선물을 잔뜩 내려놓았다.
술과 음식을 선물로 가져온 자도 있고.
내공과 관련된 단약과 각종 영약도 있었다.
한 사냥꾼은 직접 어깨에 지고 온 커다란 맷돼지를 장원 안쪽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유명한 객잔에서 숙수로 일하던 자가 다가와 능숙하게 가죽을 벗겨 나가기 시작했다.
일부는 선물만 올려놓고 사라지는 자들도 있었고 일부는 탁자의 말석에서부터 자리를 채웠다.
그렇게 벽운장에서 기묘한 연회가 열렸다.
축제나 다름이 없었다.
그 축제의 이방인은 어느새 곽철명이 유일했다.
이호구는 기다란 식탁의 상석에 앉아 있었고 적면인이 곽철명을 데리고 와 무릎을 꿇게 했다.
이호구가 말했다.
“철명아 궁금한 게 많을 테니 몇 가지 물어 보아라.”
곽철명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이호구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내가 알고 있는 이호구가 맞나?’
혼란스러웠다. 얼굴이 변한 것 같기도 하고, 똑같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표정이 과거와 달랐다.
곽철명이 알고 있던 그 이호구는 확실히 아니었던 셈이었다.
곽철명이 아무 말을 못하자 이호구가 말했다.
“생분혈공(生血噴功)은 쓸모가 있더냐? 재미가 좋았을 것이다.”
“뭐라고?”
“네가 생분혈공을 얻어 무공이 강해지는 속도가 기이하게 빨라지고, 그리하여 이 벽운장을 장악하고, 이곳에 숨어 생분혈공의 경지를 깊이 가다듬다가 일정 기간 피를 섭취하지 않을 경우에 부작용은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 널 철옥으로 집어넣은 것은 바로 나다. 모두 내가 한 짓이야.”
곽철명은 말이 없었다. 그저 이호구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이호구가 말했다.
“네가 얻은 기연, 네가 얻은 무공, 함께 다니던 사귀(四鬼)들 또한 내가 준 것이다.”
“생혈분공은 분명 내가 우연히 혈교(血敎)의 후예라 자처하는 스승님을 만나…….”
이호구가 곽철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일…… 우연이라는 게 얼마나 있겠느냐? 내 수하들이 너를 계속 지켜보며 도와줬다. 네가 꾸준히 생혈분공으로 몸 안에 자혈옥(紫血玉)을 쌓을 수 있도록 말이야. 그리 하지 않았다면 네 목숨은 벌써 몇 번이고 없어졌을 것이야. 이런 것이 어찌 다 우연이겠느냐?”
이호구가 손을 내뻗어 곽철명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감탄사를 내질렀다.
“보면 볼수록 감탄스럽구나. 나와 비슷한 기질을 가진 자를 찾아 자혈옥을 쌓게 만들다 보니 가끔 너처럼 내 외모와 흡사한 자들이 나타난다.”
이호구가 곽철명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호구가 적면인에게 말했다.
“자혈옥을 뽑을 터이니 데려가 준비해 놔라.”
“알겠습니다.”
적면인이 곽철명의 혈도를 제압한 다음에 마치 물건을 옮기듯이 들고 가자 곽철명이 비명을 질렀다.
살려달라는 비명에서 시작해 복수를 할 것이라는 말도 잠시 이어졌다가 결국 다시 살려달라는 말을 길게 내뱉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처녀들의 피를 취할 때 사용하던 창고로 끌려가고 있었다.
이호구, 아니 이제는 일월마존이라 불러야 할 터.
일월마존의 수하들이 기다란 탁자에 서열대로 자리를 잡자 벽운장의 입구에서 가장 뒤늦게 노파가 등장했다.
올 사람이 다 모였다고 판단하자 일월마존이 입을 열었다.
“다들 오랜만이군.”
“일월마존(日月魔尊)을 뵙습니다.”
“광야(狂夜)가 빠졌구나.”
그 말에 누군가가 대꾸했다.
“달포 전에 죽었습니다.”
일월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다른 마존들은 근황이 어떠한가?”
“괴패, 풍마, 검마, 심연마가 남았습니다.”
이들은 아직 심연마존이 검마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일월마존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적게 남았군. 그래. 이탈자는 있었나?”
그 말에 누군가가 대꾸했다.
“번뇌마가(煩惱魔家)의 간천 장로, 묵연마가(默然魔家)의 좌우사자, 화마가(火魔家)의 구양휘 장로가 찾아왔었습니다.”
“그런가? 당분간 여기 있을 것이니 다시 찾아오라 이르게.”
“알겠습니다.”
“교주님의 호출도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어찌 대답할까요?”
그 말에 일월마존이 씨익 웃었다.
“한 번은 가야겠지. 지금은 아니다.”
“알겠습니다.”
수하들의 분위기가 일순간 서늘해졌다. 일월마존의 심중을 잘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 한 번 정도는 인사를 하러 간다는 것인지, 아니면 교주를 죽이러 간다는 것인지 표현이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일월마존이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자네들을 봤는데 내 이야기도 해야겠지.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괜찮은 심법(心法)을 하나 찾았네.”
일월마존의 말에 수하들이 합창을 하듯이 동시에 외쳤다.
“감축드립니다!”
형식적인 말인지라 일월마존도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그러다가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내뱉었다.
“일월신공(日月神功)과 혈옥마공(血玉魔功), 그리고 백도맹의 보고에서 얻어낸 심법을 조화시켜 무공을 하나로 다듬었네.”
“이름을 무어라 정하셨습니까?”
“백도에게 멸문된 혈교(血敎)와 장백파(長白派)의 무공을 묶었는데 이를 일월(日月)이라 부를 수는 없는 법, 일월의 변화는 곧 하늘을 뜻하니 천마공(天魔功)이라 이름을 지었네.”
“실로 마땅한 이름입니다.”
대다수가 천마공의 이름이 옳다고 말하는데 중간에 있던 누군가가 흥에 겨워 한마디를 보탰다.
“마땅히 천마신공(天魔神功)이라 부르셔야 합니다.”
그의 말에 잠시 긴장감이 감돌자 일월마존이 시큰둥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쓸데없는 사족 달지 말게.”
그 말에 수하들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모를 웃음을 터트렸다. 일월마존도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들 잘 듣게.”
“네.”
“마존들이 이렇게 많이 죽었다면 위협적인 상대가 있다는 뜻. 시기를 앞당겨야겠으니 뿌려둔 혈옥귀체(血玉鬼體)와 청옥귀체(靑玉鬼體)를 전부 수거해오게. 나는 이곳에서 당분간 곽철명(郭哲明)으로 있을 생각이네. 알겠나?”
“명을 받들겠습니다.”
“오늘은 잘 쉬게나.”
일월마존은 천천히 일어나 수하들을 뒤로 하고 뒷짐을 쥔 자세로 천천히 자혈옥(紫血玉)을 회수하러 혈옥귀체가 된 곽철명에게 다가갔다.
곽철명은 지금까지 대체 몇 명을 죽여 흡수한 피로 자혈옥을 만들어냈을까? 또한 무림 곳곳에 곽철명 같은 살인마는 대체 몇 명이나 있는 것일까?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기연, 사라진 혈마의 마공을 얻어내자 마치 달라진 인생을 사는 것처럼 기쁨과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마공을 익힐수록 피에 굶주리기 시작했고, 살인을 저지르고 피를 취했다. 그럴 때마다 더 강해졌다.
하지만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포식자들을 잡아먹는 포식자…….
악 위에 군림하는 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일월마존이 창고 문을 연 다음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곽철명을 바라보다가 매일 먹는 저녁을 먹겠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곽철명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