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27화 (27/43)

<4장. 마도(魔道)>

이서휘가 백도맹 분타에 머무르면서 부상 입은 군림맹의 무인들을 살펴보며 수습에 나서고 있을 무렵…….

외팔이가 된 염악마제는 괴패마존과 풍마존의 거점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남을 지나 호북으로 향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죽은 자의 장포를 벗겨내어 걸친 채로 걷고 있었다.

염악마제가 말을 탄 사내를 죽이고, 음식을 팔던 자를 죽이고, 또다시 말을 탄 사내를 죽였을 때는 이미 며칠이 흘러 있었다.

염악마제가 동정호에 도착했을 때는 심연마가(深淵魔家)의 배가 출렁이는 강가에 즐비했다.

염악마제는 극진한 호위를 받으며 배에 올라탔다.

동정호 일대를 암중에서 지배하고 있는 심연마존(深淵魔尊)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괴패마존과 풍마존의 생사는 아직 알 수 없었고, 부상을 입은 채로 다른 마존들을 찾아가기엔 무언가 속이 꺼림칙했다.

때문에 염악마제는 어렸을 때부터 지켜봤던 심연마존을 찾아가고 있었다.

본래는 심연마존의 소극적인 움직임을 문책해야 했으나, 부상을 당한 몸이었기 때문에 교주의 전갈만 남기고 상처를 치료할 생각이었다.

염악마제를 태운 배가 안개를 뚫고 지나갔다. 안개를 살피던 염악마제가 말했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 군산(君山)으로 가지 않고.”

군산(君山). 동정호 중앙에 있는 섬이자 산(山)이었다.

뱃사공이 대답했다.

“마존께서 뱃놀이를 하고 계십니다.”

“이런 때에 뱃놀이라니…….”

잠시 후 가지각색의 배가 잔뜩 늘어선 광경이 이어졌다. 안개가 자욱해 희끄무레한 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안개 낀 호수에서 뱃놀이라니…….’

뱃사공이 이리저리 뱃머리를 조절해 나아가자 새카만 배를 좌우에 거느린 거대한 물체가 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새카만 배의 정체는 심연마존의 배를 호위하는 전선(戰船)이었다.

그나저나 심연마존의 배는 모양 자체가 기괴했다. 동정호 군산에 등장한다는 황금 거북이와 비슷한 모양이랄까.

어찌 저것이 배일 수 있을까.

마치 고래라 불리는 것보다 더 거대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배 위에 누각과 같은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뱃사공이 내공을 실어 외쳤다.

“마제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에 떠 있던 배 위에서 폭죽을 쏘아 올렸다. 마치 염악마제를 환영하는 축제로 변한 것처럼 장대한 환영식이 열렸다.

뱃사공이 배를 대자 갈고리가 내려오더니 배를 통째로 들고 올라갔다.

염악마제는 도중에 훌쩍 솟구쳐서 드넓은 갑판 위에 내려섰다.

☆ ☆ ☆

누각의 꼭대기에서 서책을 읽고 있던 심연마존이 수하들의 보고를 받았다.

“마제께서 오셨습니다.”

심연마존이 서책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나이는 스물 후반이었으나 마존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맑은 피부에 명문세가의 공자로 자라난 것처럼 수심이 없는 편안한 표정의 사내였다.

시비들이 조용히 다가와 용포(龍袍)를 입혔다.

심연마존은 용포(龍袍)를 입혀주는 시비 한 명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면서 뺨을 두들겨줬다. 그러자 시비가 고개를 숙이며 쑥스러워했다.

심연마존이 갑판으로 향하면서 말했다.

“마제를 뵈러 가자.”

그러자 심연마가의 좌우사자가 모습을 드러내며 뒤를 따랐다. 세 명이 신형을 움직이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수하들이 서열에 따라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더니 소리 없이 뒤를 따랐다.

갑판으로 나오던 심연마존이 염악마제를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양팔을 벌리면서 말했다.

“형님!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

염악마제는 심연마존의 거리낌이 없는 호칭에 인상을 찌푸렸으나 과히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어찌하여 아직도 나를 형님이라 부르느냐?”

심연마존이 씨익 웃으면서 불쑥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좌우사자를 비롯해 배 안에 있던 자들이 기겁을 하며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심연마존이 정중하게 말했다.

“심연이 총본산의 수호사왕(守護四王) 염악마제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심연마존이 허리를 펴자 그제야 물결이 치듯이 서열에 따라 수하들이 일어섰다. 소리 없이 정연한 모습이 섬뜩할 지경이었다.

심연마존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교주님은 강녕(康寧)하시지요?”

염악마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심연마존이 말을 이었다.

“교주님이 강녕하시니 저희의 복입니다. 한데, 이곳에 계시지 말고 팔부터 치료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산(下山)아. 이리 나와서 살펴보아라.”

“네.”

하산이라는 중년인이 뒤편에서 허리를 숙이면서 나와 염악마제에게 앞에서 납작 엎드렸다.

“소인이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하산이라 불리는 의원입니다.”

“보아라.”

하산은 허리를 펴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가 염악마제의 팔을 잠시 살펴본 후에 물러나면서 말을 꺼냈다.

“지혈을 잘하셨습니다. 간단하게 소독하고 금창약을 발라 깨끗한 천으로 감싸놓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심연마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내를 하겠다는 듯이 누각 쪽으로 팔을 뻗었다.

“들어오시지요. 상처가 심하신데 술을 하셔도 괜찮겠습니까?”

“별일 있겠느냐. 목이 마르는구나.”

염악마제는 하산이 팔을 소독하는 와중에 마주 보고 있는 심연마존을 바라보며 왼손으로 술잔을 들이켰다. 하산을 제외하고 주변에 머무르는 자들이 없었다.

심연마존이 염악마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찌하여 이런 중상을 입으셨습니까?”

염악마제가 씁쓸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서휘라고 들어보았느냐?”

“예. 또 그놈입니까? 다섯이 죽었다 하여 걱정이 많았습니다만 동정의 일이 얼마 전에 정리되어 쉬이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정리할 일이 무엇이 있다고.”

“바닥에서 시작하다 보니 일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교주님이 하명하신 대로 별다른 주목은 받지 않았습니다. 늦어진 것은 제 역량의 부족입니다.”

심연마존이 고개를 숙이자 염악마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교주님이 보자 하신다. 수하들에게 맡기고 총본산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심연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사자에게 맡기고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본래 뱃놀이를 하는 취미가 있었느냐?”

염악마제의 말에 심연마존이 씨익 웃었다.

“하다 보니 종종 즐기게 되었습니다. 옛 서책에 제법 뱃놀이에 대한 것이 많이 적혀 있어 흥이 날 때마다 흉내 좀 내고 있었습니다.”

“한가롭구나.”

염악마제가 은근히 질책하듯이 말하자 심연마존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검성이 죽은 모양입니다.”

“그래. 일을 앞당겨도 되겠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산이와 너뿐이니 말을 편하게 하여라.”

심연마존이 그제야 편한 말투로 대꾸했다.

“네, 형님.”

☆ ☆ ☆

다음 날 저녁까지 배 위에서 연회가 열렸다.

염악마제의 노고를 위로하는 연회였다.

염악마제는 전날부터 꼬박 날을 샜다가 저녁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염악마제가 잠이 들자 동정호 전체가 잠에 빠진 것처럼 잠잠해졌다.

다음날 이른 아침.

내공이 어느 정도 회복된 염악마제가 눈을 뜨고 갑판 위로 나갔다.

뱃머리에서 심연마존이 홀로 서서 동정호의 물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형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졌구나.”

“다행입니다. 여기 오셔서 동정호의 풍경 좀 보십시오. 저녁엔 고즈넉해서 연등을 띄워놓습니다만 아침엔 제법 활기찬 풍경입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동정호를 바라봤다.

마침 내리쬐기 시작한 햇살에 동정호의 물결이 보기 좋게 반짝였다.

심연마존이 출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형님,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렇구나.”

“경쟁자도 어느새 반은 죽었군요. 형님은 화아(火兒)에게 거는 기대가 크셨을 텐데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실력이지. 누굴 탓하겠느냐.”

심연마존이 눈썹을 위로 올리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었다.

“공력은 좀 회복하셨습니까?”

염악마제가 무어라 대꾸를 하려는데 심연마존이 자세를 돌려 천천히 누각으로 걸어갔다.

누각 입구에서 갑작스레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좌우로 나뉘었다.

심연마존이 수룡이 전각된 의자에 앉아 염악마제를 바라봤다.

염악마제가 그 작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하는 짓이냐?”

심연마존이 턱을 괸 자세로 말했다.

“왜 오셨습니까?”

염악마제는 평생 웃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괴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보니 심연마가 전체가 반역도(反逆徒)였구나. 교주님의 말씀이 옳았다.”

그 말에 심연마존이 옆에 있던 시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줘 봐라.”

심연마존의 말에 정적이 감돌았다.

잠시 후 시비를 통해 서책을 받아든 심연마존이 뱃놀이에 대한 부분을 읽기 시작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사는 게 영 재미가 없구나.”

염악마제는 심연마존이 책을 읽기 시작하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 놈이 교주님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구나.”

염악마제가 코웃음을 내뱉더니 심연마가의 수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신철호, 박연후, 주홍성, 척무정, 장인수, 안곤 장로, 능가빈 장로, 암사단주 철아행, 그 외 암당(暗黨)의 무리들은 들어라.”

염악마제의 말에 이름이 호명된 자들이 갑판 중앙에 모였다. 그 수가 제법 많았다.

심지어 심연마존과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수뇌부들까지 염악마제 쪽으로 이동했다.

그 모습에 서책의 뱃놀이 부분을 읽던 심연마존이 고개를 들어 불쾌한 얼굴로 갑판 중앙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염악마제의 명이 떨어졌다.

“호명된 자들은 심연마가를 멸하라. 나도 나설 것이다.”

그 말에 심연마존이 서책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외쳤다.

“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네?”

염악마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안곤 장로에게 말했다.

“교주님이 내게 판단을 맡기신 일이다. 시행토록 하라.”

심연마존은 염악마제가 자신의 말을 또 무시하자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늙은이 새끼들 하는 일이라곤…… 어쩜 저렇게 매번 비슷한지.”

심연마존이 갑판 위에 있는 간자들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야 이 개새끼들아―!”

☆ ☆ ☆

심연마존이 불쾌한 얼굴로 염악마제에게 호명된 자들을 향해 말했다.

“물에 들어가 있어.”

그 말에 갑판 중앙에 모였던 자들이 풍덩풍덩 소리를 내면서 동정호에 몸을 던졌다. 다른 명이 떨어질 때까지 고개만 겨우 내밀고 있었다.

바람이 한차례 서늘하게 불어오고 다시 괴이한 정적이 이어졌다.

염악마제가 할 말을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잠시 서 있자 심연마존이 손가락으로 염악마제를 가리키며 말했다.

“뭡니까 이게……? 예? 팔 하나 잃고 와서 무슨 수호사왕(守護四王) 노릇이냐고요. 부끄럽습니다. 지난 정을 생각해 해명이나 더 들어봅시다. 어찌된 겁니까? 이서휘가 아무리 강해도, 형님이 아무리 방심을 했어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염악마제는 평생 이런 꾸지람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내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자신이 어찌 팔 하나가 없다고 하여 이런 대접을 받는단 말인가.

염악마제는 씁쓸한 표정으로 심연마존의 목이나 잘라서 총본산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자 심연마존이 할 말 해보라는 듯이 양손을 뻗었다.

“어서요. 들어나 봅시다.”

“심연아.”

심연마존이 불쑥 호통을 내질렀다.

“시끄러워!”

심연마존이 양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하도 어처구니없는 행동이라 염악마제마저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염악마제가 말했다.

“심연아 미쳤느냐?”

심연마존이 손을 내리더니 읽고 있던 서책을 북북 찢어서 강물에 던져 버리고 찢어진 종이쪼가리로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심연마존의 배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던 전선에서 불을 뿜었다.

천둥치는 소리가 울리면서 대포와 화포가 염악마제에게 쏟아졌다. 불길과 굉음이 멈추자 심연마존의 뒤편에서 심연마가의 무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무작정 염악마제에게 달려들었다.

퍼버버버벅, 퍼벅, 퍽!

순식간에 비명 소리와 뼈 부러지는 소리, 무언가 터지는 끔찍한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오는데도 심연마가의 수하들은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와 전선에 늘어서 있는 화포에서 나온 연기가 어우러졌다. 이어서 풍덩풍덩 소리가 들리면서 심연마가의 무인들이 강물에 빠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구경하던 심연마존이 손짓을 하자 스슥 소리와 함께 내려선 좌우사자가 뱃머리에서 버티고 있는 염악마제에게 달려들면서 쌍장을 휘둘렀다.

퍼억, 퍼억! 퍽! 퍽! 퍽!

그때 거한의 역사가 염악마제의 몸통을 붙잡고 그대로 강물로 빠져 들었다. 그러자 이미 강물 위에 고개만 내놓고 있던 간자들이 염악마제에게 달려들어 물속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거대한 대어를 맨손으로 잡는 것처럼 물속에서 사투가 벌어졌다. 이어서 끊임없이 풍덩풍덩 소리가 들리면서 크고 작은 배에서 심연마가의 무인들이 뛰어내렸다.

그 와중에 수공(水攻)을 익힌 무인들이 마치 익숙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밧줄과 돌덩이를 쥐고 뛰어들고 있었다.

거품이 일어나고 군데군데서 핏물이 자욱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부글부글――

어느새 뱃머리로 걸어와 이리저리 살펴보던 심연마존.

숨을 참지 못한 수하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잠시 후에 최측근인 좌우사자들도 고개를 내밀었다.

수하들이 하나둘씩 배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젖은 몸으로 심연마존의 배로 올라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제 동정호가 잠잠해졌다.

심연마존이 무표정한 얼굴로 잠잠해진 수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귀에 넣었던 것을 던지며 말을 내뱉었다.

“……형님, 여기가 물이 깊습니다.”

대답하는 자 없고, 동정호의 물결만이 무심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심연마가(深淵魔家)의 심연마존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자였다.

심계가 깊고 장악력이 좋았다.

심리를 이용할 줄 알았다. 그렇게 심연마존이라는 어부에게 낚여 동정호 밑에 가라앉은 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심연마가에 파고든 간자? 심연마존에겐 재미있는 여흥이었다.

마침 간자들이 하나둘 적발되어 동정호 밑바닥에 가라앉자 심연마존도 크게 낙심한 상태였다. 간자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자 마치 교주와의 계략 싸움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데에서 지루함이 왔던 것. 더군다나 공포에 질린 수하들은 새롭게 간자가 되라는 유혹을 받자마자 조용히 심연마가의 좌우사자를 찾아가 보고했다.

간자들이 줄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연마존은 내내 교주를 염두에 두고 여흥을 즐겼다.

‘누가 더 공포스럽게 군림할 수 있느냐? 교주일까. 나일까.’

간자가 그대로 염악마제에게 달라붙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 전선의 대포에 찢겨 나갔을 테니까.

“물에 들어가 있어.”

그 말을 하자마자 간자들이 물에 빠졌다. 심연마존의 명을 수행하면서 마교 교주를 단번에 배신한 셈이었다. 심연마존은 풍덩풍덩 소리에 크게 흡족했다. 한편으로는 어쩜 이렇게 인자한 우두머리가 있을까? 하며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심연마존이 염악마제를 죽인 이후에 수하들을 모아 말을 남겼다.

“이서휘가 대단하긴 한가 보구나. 교주님을 보필하는 수호사왕인 염악마제를 쓰러뜨리다니.”

심연마존의 말을 이해하고 장로 한 명이 대답했다.

“뜻을 받들겠습니다.”

“무슨 뜻을 받든단 말이냐? 사실이 그러한데.”

“그렇습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이제 심연마가는 염악마제의 복수에 나서야겠다. 공적으로는 마교의 사왕이며 사적으로는 나를 어렸을 때부터 돌봐주신 형님이시다. 교주님의 은혜를 입은 십존(十尊)의 일원인 내가 마제의 죽음을 목격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노라. 전원, 이서휘를 칠 준비를 하라. 동정호를 나서야겠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서휘의 목을 베어 우리 존경하는 교주님에게 가져다 드려야겠구나. 하하하하핫!”

심연마존 홀로 웃음을 터트리자 분위기가 요상했다. 심연마존이 누각으로 들어가자 심연마존의 배를 중심으로 빽빽하게 늘어서 있던 배들이 움직이면서 동정호의 물결이 사납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심연마존의 명을 받은 누군가가 내공을 실어 선창했다.

[이서휘의 목을 베자!]

그러자 빽빽하게 이어지는 배에 있던 수하들이 합창했다.

[이서휘의 목을 베자!]

다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선창과 합창이 이어졌다.

[염악마제의 복수를!]

[염악마제의 복수를!]

심연마가의 배들이 안개를 뚫으면서 지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목적지는 일단 백도맹 분타였다.

심연마존은 염악마제를 위로한답시고 주연(酒宴)을 열어, 염악마제로부터 백도맹 분타에서 벌어진 일을 상세하게 전해 들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이미 괴패마가와 풍마가의 연합 공격으로 백도맹 분타의 피해도 막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연마존은 두 마가(魔家)가 극심한 피해를 입으면서 공략하려던 백도맹 분타를 밀어버린 이후에 이서휘까지 잡아 죽일 생각이었다.

심연마존은 출렁이는 물결 위에서 용포를 입혀주던 시비를 거처로 불러 알몸으로 만든 다음에 대낮부터 희롱하기 시작했다. 그 희롱은 배가 육지에 닿을 때까지 계속 되고 있었다.

☆ ☆ ☆

백도맹 분타엔 부상자가 가득했다.

백도맹과 군림맹은 물론이고 단우혁과 백류혼마저 부상을 입은 채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백도맹의 백협단주인 담가막(潭嘉嗼)도 마가의 장로들을 연달아 상대하느라 부상을 입었고, 군림맹의 유백도 그의 성격답게 몸을 사리지 않다가 막판에 누군가에게 일장을 얻어맞아 부상을 입었다.

멀쩡한 사람을 꼽으라면 도이와 도삼 정도.

나머지는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채로 백도맹 분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회복이 빠른 사람은 단연코 이서휘였다. 지닌 공력이 가장 심후하여 하루 반나절을 운기조식에 집중하자 홀로 백도맹 분타를 돌아다니면서 피해를 복구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백도맹의 무인들마저 이제는 이서휘를 친근하게 부르고 있었다.

“이 대주님, 그만 쉬십시오. 나머지는 저희가 해도 됩니다.”

“괜찮네. 그나저나 맹으로 연락을 취했는가?”

“전서구를 보냈습니다.”

“알겠네.”

백도맹의 담가막마저 이서휘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마가에게 밀리는 형국에서 이서휘의 동료들이 나타나 위기를 극복했으니까.

또한 적의 수장과 격렬하게 어우러지던 이서휘의 모습은 담가막에게도 무척 인상적인 일이었다.

그 때문에 이서휘는 아주 자연스럽게 크고 작은 일들에 끼어들어 논의를 하고 있었다.

담가막은 운기조식을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침상 위에서 보내고 있었고, 분타주인 정일곤은 가슴이 으스러져 회복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

이서휘가 백도맹 분타 일을 돕는 한편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단우혁과 백류혼도 세심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며칠 후 이서휘는 백도맹의 호북 분타에서 날아온 전서구를 담가막으로부터 받아 들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마교의 수호사왕이 군림맹의 이서휘에게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음. 마교가 군림맹을 노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됨. 군림맹으로 연락을 취하기 바람.]

이서휘는 전서구를 한참이나 붙잡고 있었다. 느낌이 왠지 모르게 싸했다.

“그놈이 수호사왕이었다니……. 당장 죽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찌 죽었지?”

어쩐지 마교의 수호사왕(守護四王) 한 명이 이서휘에게 죽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실제로는 심연마가의 합공으로 동정호 밑바닥에 가라앉지 않았던가? 하지만 무림에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무섭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마교의 간부가 군림맹의 이서휘에게 죽었다. 마교가 군림맹을 벼르고 있다. 곧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형국이다.]

누가 퍼트렸을까?

심연마가가 퍼트렸다. 심연마가가 퍼트리고, 심연마가가 복수를 하려는 형국이었다. 단순히 복수를 위해 퍼트리는 것도 아니었다. 심연마존은 마교의 자존심을 일부러 떨어뜨리고 있었다. 오히려 마교로 이 소문이 흘러가길 바라고 퍼뜨린 것이었다.

심연마존은 이 소문 하나로 마교, 군림맹, 백도맹을 뒤흔들고 있었다.

우습게도 사정을 잘 모르는 백도맹이 이서휘를 추켜세우느라 소문을 덧칠하고 있었다.

[아, 그 우두머리가 마교의 수호사왕이었군. 실제로 군림맹의 이서휘 대주와 겨루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실로 대단하더군.]

소문이 천리마보다 더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서휘가 어느새 마교의 공적이 된 느낌이었다. 또한, 이서휘라는 이름 석 자의 명성이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묵직한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백도맹에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전 무림으로 퍼진다. 백도맹은 그런 곳이었다.

이서휘는 전서구의 내용을 고민하다가 도이와 도삼을 불러들여 말했다.

“일이 이상하다.”

“뭐가 말입니까?”

“호북 분타에서 전서구가 도착했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군림맹을 친다는 소식인데 어쩐지 내가 보기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계략 같구나.”

듣고 있던 도이가 짜증을 냈다.

“대체 뭔 말이야? 알아듣게 설명 좀 해줘.”

“군림맹을 치는 것처럼 하다가 여기를 다시 친다 이 말이다.”

도이가 이해했는지 엄지를 척 올렸다.

“그렇군.”

이서휘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 사람아 우리가 또 습격당할 수 있다니까. 부상자가 이리 많은데 어찌 막아낼 것이냐? 단우혁과 백류혼도 다 낫지 않았는데. 만약 또다시 습격을 받으면 큰일이다. 부상자들을 데리고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말에 도삼이 대꾸했다.

“검림은요?”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 멀리 있는 검림에게 지원 요청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도삼이 말했다.

“백도맹과 군림맹은요?.”

“전서구야 금방 도착하겠지만 지원군이 오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이서휘는 겨우 방법을 생각해냈다.

“도삼아, 네가 일단 수고 좀 해야겠다.”

“말씀하십시오.”

“비완객잔으로 가서 서태현이라는 분에게 내가 비마표국(飛馬鏢局)과 부서전장(富署錢莊)의 검림에게 백도맹 분타로 지원해달라고 했다고 전해다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확실하진 않으나 백도맹 분타가 습격 받을 거 같다고 해다오. 전적으로 내 판단임을 알려라.”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갑니까?”

“바로 가라.”

이서휘가 도삼에게 임무를 맡기자 도이가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주, 나는?”

이서휘가 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조금 더 힘든 일을 맡길까 하는데…….”

“역시 내가 더 어려운 일을 맡게 되는군.”

도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휘는 품에서 전표 한 장을 꺼내 도이에게 넘기며 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흑도맹에 연락을 넣어라.”

도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흑도맹에?”

“광산(光山)에서 오히려 흑도맹이 가장 가깝다. 도중에 하오문을 이용해 전서구를 보내든 재량껏 해라. 그 사이에 네가 가장 가까운 흑도맹 분타로 가서 도움을 요청해도 되고.”

“왜 여기서 전서구를 보내지 않고?”

“백도맹과 흑도맹은 교류가 없으니까. 우리 군림맹이 중간 다리 역할을 하기로 했는데 자세히 설명할 겨를이 없다. 어서 출발해라.”

“알겠소.”

“내 이름 석 자는 꼭 넣어야 한다. 어떻게 연락하든…….”

“내가 바보요? 꼬치꼬치 설명하긴, 다녀오리다.”

“조심해라.”

“대주도 보중하시오.”

이서휘와 도이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서휘가 다시 완전 무장을 한 채로 분타를 거닐었다. 이서휘는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수호사왕이라는 놈이 당장 죽을 거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이서휘마저도 염악마제가 십존의 일원에게 죽었을 거라곤 예상할 수 없었다. 이서휘는 백도맹 분타의 숙소를 거닐다가 단우혁과 백류혼을 찾아갔다.

단우혁과 백류혼은 그야말로 사투(死鬪)를 벌인 흔적이 역력했다. 여기저기에 붕대를 감은 채로 침상에 앉아 운기조식만 하고 있었다. 다행히 백도맹 분타에 실력이 뛰어난 의원이 상주하고 있어 고비를 넘긴 상황.

이서휘가 등장하자 조용히 집중하고 있던 단우혁과 백류혼이 눈을 떴다.

이서휘가 말했다.

“괜찮은가?”

두 사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보면 단우혁과 백류혼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용한 일이었다.

괴패마존과 풍마존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단우혁이 들것에 실려 나가는 와중에 이서휘를 바라보며 남긴 말이 있었다.

[서휘야, 나도 지진 않았다.]

[장하다.]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으나 괴패마존도 큰 부상을 입고 마가의 장로들이 데려갔다는 것.

백류혼은 약간 상황이 달랐다.

늘 입고 다니는 백의가 핏빛으로 물든 채로 나무 위에 걸려 있는 것을 백도맹 무인들이 끌어 내렸다. 백류혼은 풍마존의 성명절기에 맞아 날아간 것까지만 기억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아직 마존들을 압도할 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조처를 취하느라 사흘이 더 흘렀는데도 두 사람은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미안한 마음이 그야말로 가득했다. 이서휘가 침상에 걸터앉아서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래도 자네 둘 덕분에 피해가 많이 줄었어. 군림맹과 백도맹이 자네들에게 빚을 진 셈이야. 살아가면서 내가 갚겠네.”

단우혁이 입소리를 내며 웃었다.

“후후. 어떻게 갚겠단 말이냐?”

백류혼도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신경쓸 것 없다. 내가 정중지와(井中之蛙,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으니. 내 탓이다.”

늘 잘난 척만 하는 백류혼이 뜻밖의 말을 꺼내자 이서휘는 더욱 마음이 씁쓸했다.

“거참…….”

이서휘는 ‘자네답지 않은 말이군.’이라고 말하려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이서휘야 백류혼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생애에서는 이런 말을 꺼낼 만큼의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그나저나 백도맹 분타가 안전한 장소는 아닐세. 자네 둘은 내일 이른 아침이라도 각각 청협과 백검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네. 나는 조금 더 여기에 있다가 군림맹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그 말에 백류혼이 말했다.

“이 대주, 또 무슨 일이 있는 겐가?”

이서휘는 속이 뜨끔했다.

‘아, 이놈이 눈치가 제법 빨랐지.’

이서휘가 일부러 덤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부상자가 많아서 말이지. 습격을 또 당하면 곤란할 것 같아 하는 말이네. 일단 여기저기에 지원을 요청한 상황일세.”

백류혼이 코웃음을 쳤다.

“흥, 빨리 좀 말하지 그랬나. 연락을 취하면 내 조부님이 문도들을 이끌고 하루면 오실 텐데.”

“그런가?”

백류혼의 조부는 당대의 검왕(劍王)이다. 그가 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백류혼은 이서휘의 표정이 무거운 것을 알아차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이라도 연락을 넣게. 백도맹과는 교류가 있어서 연락할 방법은 백도맹이 잘 알고 있을 것이네.”

“알겠네. 그럼 쉬고 있게.”

이서휘는 서둘러 나와서 백류혼이 부탁한 것을 담가막에게 전하고 분타를 돌아보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홀로 분타 앞을 거닐었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산책하듯이 뒷짐을 지고 걷던 이서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호북에서 올라오는 대로변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순간 이서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시야가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대로변 끝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설마? 벌써?’

이서휘는 백도맹 분타 건물을 바라보다가 드넓은 대로변으로 홀로 걸어갔다. 잠시 후 대로변에 오와 열을 맞춘 한 떼의 무인들이 질서정연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한데, 전부 도보(徒步)였다.

더군다나 발걸음 소리를 죽인 채로 이동하고 있었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진 터라 심연마가의 선두가 그제야 대로변에 서 있는 이서휘를 발견하고 이동을 멈췄다.

이서휘가 선두에 있는 심연마가의 좌사자와 두 눈을 마주쳤다. 심연마가의 좌사자가 고개를 내빼더니 이리저리 이서휘의 얼굴을 살펴보며 말했다.

“웬 놈이냐? 낯이 익은데?”

이서휘의 얼굴을 용모파기로 본 사람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 홀로 길을 막아선 자가 이서휘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이서휘와 심연마가가 대로변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등에 쌍검을 매달고 홀로 막아서자 심연마가는 황당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막아선 자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서휘가 문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낮게 떠 있는 달을 잠시 바라봤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이서휘를 바라보던 자들이 동시에 이서휘를 따라 달을 한 번 쳐다봤다.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달이 참 스산하구나.”

그때 이서휘는 말없이 대로변을 약간 벗어나 달빛이 내리쬐지 않는 곳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달이 낮게 떠 있고 마침 대로변 좌우에 무성한 숲이 있었기 때문에 높고 낮은 나무 사이로 달빛이 쏟아지는 곳과 어둠이 자리 잡은 곳이 이리저리 나뉘어 있었다.

이서휘가 마치 길을 비켜주겠다는 듯이 침착하게 어둠 속으로 들어가자 심연마가의 좌사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죽여라.”

명을 받은 네다섯 명이 어둠으로 들어갔다가 푹 소리가 몇 번 들리고 이내 들고 있던 병기를 바닥에 떨구면서 쨍그랑 소리를 울렸다. 하지만 어둠 속에 갔던 자들은 되돌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좌사자가 당최 보이지 않은 어둠을 향해 고개를 약간 내밀면서 말했다.

“대체 뭐 하는 것이냐? 어이…….”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이서휘는 그 사이에 다른 그림자로 발걸음을 옮겨서 심연마가의 행렬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좌사자는 막아선 자가 고수라 판단하고 내보낼 자의 수준을 더 올렸다.

“주홍성과 장인수, 가서 살펴봐라. 나머진 그대로 이동.”

“알겠습니다.”

염악마제를 물속에서 잡아 당겼던 간자들인 주홍성과 장인수가 나서고 그 뒤를 스무 명 가량이 따라나섰다.

그리고 다시 심연마가의 행렬이 이동했다.

이서휘는 스무 명이 몰려오자 심연마가 행렬이 잠시나마 그냥 이동하도록 내버려뒀다.

푹, 쨍그랑― 푹, 쨍그랑― 푹, 쨍그랑―

마치 장단을 맞추는 것처럼 단조로운 소리가 이어졌다.

심연마가 행렬이 삼십 걸음 정도를 이동했을 때 주홍성과 장인수가 데려간 자들이 모두 죽었다. 병기 부딪치는 소리도 몇 번 나지 않았는데 단말마가 여러 차례 이어졌다.

이동하던 심연마가는 뜻밖의 정적에 놀라 고개를 돌려 어둠을 주시했다.

“…….”

“뭐야? 다 죽었어?”

살아서 돌아오는 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행렬의 중간에서 누군가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하는 것이냐? 밤새 여기에 있을 것이냐?”

“죄송합니다.”

그 사이 이서휘가 행렬의 끝을 확인하면서 생각했다.

‘홀로 얼마나 막아낼 수 있을까?’

이대로 이 인원 전부를 백도맹 분타로 보낸다면 피해가 막심할 것이다. 무엇보다 단우혁과 백류혼이 이서휘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이 자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심연마가도 큰 실수를 하고 있었다.

심연마가에는 염악마제와 같은 고수가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 그저, 염악마제가 그런 큰 부상을 입었으니 이서휘도 엄청나게 큰 부상을 입었으리라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이서휘는 그때부터 묘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검일흔(一劍一痕).’

일검으로 적들의 급소에 흔적을 남기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 흔적은 피와 함께 새겨질 것이다. 죽일 생각도 없었다. 손을 내미는 자는 손을 끊을 것이고 발을 내민 자는 발을 끊을 생각이었다. 되도록 많은 적들에게 부상을 입힐 생각이었다.

이서휘가 어둠 속에서 백야검을 쥔 채로 생각했다.

‘부상당한 자는 백도맹 분타로 가도 좋다.’

적의 전력이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자가 나타날 때까지는 검기도 사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스무 명이 몰려갔는데도 어둠에서 나오지 않자 드디어 심연마가에서 병기 뽑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스릉― 스릉― 스릉― 스릉― 스릉― 스릉―

그 소리가 끊이지 않자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정말 많이도 몰려왔구나…….’

문득 아쉽다는 생각이 든 이서휘.

‘단우혁 그리고 백류혼과 함께 싸우면 더 좋았을 것을…….’

그제야 이서휘는 자신이 왜 그렇게 단우혁과 백류혼을 챙기려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

함께 싸워도 걱정이 되지 않는 동료들인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이서휘가 훨씬 강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각 도왕(刀王)과 검왕(劍王)이 될 사내들이었다.

‘도왕과 검왕, 오늘은 내가 지켜주마.’

이서휘가 백야검을 좌하단으로 늘어뜨리고 어느새 잔뜩 몰려오는 흑의인들을 바라봤다.

흑의인들이 밀려오자 마치 어둠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이서휘가 어둠 속에서 어둠을 맞이하는 형국이었다.

‘와라. 더 와라. 여기에 있다.’

이서휘가 발 한번 떼지 않은 채로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최초로 내민 누군가의 검을 보자마자 이서휘가 백야검을 내밀어 손목을 가르고, 그 궤적을 그대로 이어가 누군가의 목을 갈랐다.

팟! 푸욱!

이서휘가 휘두르는 백야검이 서서히 빨라졌다. 그 와중에 이서휘는 흑의인을 부상을 입힌 자와 아직 멀쩡한 자로 구분했다.

한데, 적을 가르면서 잠시 살펴보니 전원 같은 복장이다. 분명 마존이 섞여 있을 법한 행렬이었는데 복장을 달리한 자가 없었다.

‘어디에 있느냐?’

이서휘는 어느새 몰려든 심연마가의 무인들에게 둘러싸여 술래잡기를 하듯이 도망가고 있었다. 난잡하게 어우러지고 있는 바둑판에 뛰어든 이서휘가 검은 돌만 밟으면서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이서휘는 되도록 날아오는 병기도 쳐내지 않았다. 자신이 긋는 검의 궤적으로만 상대했다. 죽는 자가 없다 보니 끔찍한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푹! 푸욱! 핏! 푹푹푹! 푹!

“윽.”이라든가 “앗!”과 같은 짤막한 소리가 곳곳에 퍼지고 있었다. 병기를 떨구거나 뒤꿈치를 붙잡고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그렇게 이서휘가 어둠에 숨어들어 귀신처럼 돌아다녔다. 수가 너무 많다 보니 어두운 곳에서 이서휘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서휘는 그렇게 끊임없이 그림자만 찾아 다녔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달빛이 드러나는 곳은 이서휘가 일부러 암행표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이서휘는 무리하는 법 없이 천천히 적들을 도륙하면서 돌아다녔다.

이보다 기괴한 싸움도 찾기 어려울 터.

이서휘는 말 한 마디 내뱉지 않은 채로 백도맹 분타에서 멀지 않은 대로변을 누비면서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서휘를 상대하는 심연마가도 독했다.

부상을 입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고함을 치거나 호통을 내지르는 자가 없었다. 백도맹을 칠 때까지 소리를 내지 말라는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는 중이었다.

때문에 이서휘도 백도맹 분타를 치려는 놈들이 보통 수준이 아님을 깨닫고 있었다.

누군가가 행렬 중앙에서 작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좌우사자, 가라.”

결국에 오륙십 명을 내보내도 이서휘가 잡히지 않자 행렬의 선두와 후미에 있던 심연마가의 좌우사자들이 몸을 움직였다.

심연마가는 심지어 좌우사자들마저 흑의에 복면을 쓰고 있었다. 두 줄기의 신형이 선두와 후미에서 질풍처럼 다가오면서 말했다.

“우리가 상대할 테니 전부 복귀하라.”

하지만 오륙십 명 중의 반이 넘는 수가 부상을 당한 상태. 복귀하는 속도마저 늦었다.

이서휘는 범상치 않은 고수들이 다가오자 어둠 속에서 머무르고 있다가 내공을 주입해 백야검을 내밀었다.

떠엉―!

처음으로 웅혼한 내공과 내공이 맞부딪치자 심상치 않은 굉음이 발생했다. 그 순간, 이서휘의 좌측에서 바람을 가르는 장력이 쏟아졌다.

이서휘도 내공을 끌어올려 조용히 맞대응했다.

퍼어어엉!

정적이 감돌던 대로변에 장력끼리 부딪치는 굉음이 발생하고 심연마가의 우사자가 밀려났다. 이서휘는 달려든 두 사람의 내공이 심상치 않자 암행표를 써서 신형을 움직였다.

도망을 치기 시작했던 것.

타다다다닥!

좌우사자는 이서휘가 갑자기 도망치자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좌우사자가 즉시 이서휘를 쫓았다. 하지만 이서휘는 좌우사자들에게 따라잡히자마자 질풍처럼 내달려서 두 사람을 단번에 따돌렸다.

이서휘는 일부러 웃음소리를 낮게 흘렸다.

“후후.”

좌우사자들은 속도를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서휘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서휘는 좌우사자들을 떨쳐낸 다음에 갑자기 방향을 선회해 이동하기 시작한 심연마가 행렬의 후미에 다시 등장했다.

심연마가의 후미에서 누군가가 이서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뒤에서 옵니다!”

이서휘가 질풍처럼 경공을 시전하다가 공중에 솟구쳤다. 백야검을 쥐고 수직과 수평으로 빠르게 그으면서 암연심검의 파를 십자형으로 쏟아냈다.

쐐애애애애애앵! 콰아아아앙!

이서휘가 뱉어낸 검기에 난장판이 된 것처럼 소동이 벌어졌다. 막는 자, 맞은 자, 단말마를 뱉어내는 자, 베인 자, 넘어지는 자까지 가지각색이었다.

이서휘는 쉴틈을 주지 않기 위해 곧장 행렬에 뛰어들어 백야검을 휘둘렀다. 이제야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렸다.

챙챙챙챙― 쓰윽― 슥― 슥― 슥― 후욱! 푸욱!

이서휘가 백야검을 휘두르면서 행렬의 후미에서 직선으로 돌파했다. 어느새 좌우사자가 이서휘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이서휘는 자세를 낮게 유지하면서 일검일흔(一劍一痕)으로 적들의 허벅지와 종아리, 발뒤꿈치를 베면서 이동했다.

“비켜라.”

좌우사자들이 달려들자, 이서휘가 뒤를 향해 암연심검의 환을 내지르고 동시에 땅을 박차고 공중에서 회전을 하면서 대로변 옆으로 빠져 나갔다. 또다시 이서휘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자 심연마가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장로 한 명이 말했다.

“시간을 끄는 것 같습니다. 그대로 백도맹으로 가고 좌우사자분들이 상대해주시오.”

좌우사자들이 또다시 기를 쓰고 내달렸다.

이서휘는 달빛이 들지 않는 곳으로 또다시 도망가면서 경공을 뽐냈다.

세 줄기의 신형이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켰다.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서휘는 행렬의 중앙 부분으로 달려 나가 대로변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가 기가 차는지 뜻 모를 탄성을 내질렀다.

“하아아.”

그때 행렬의 중간 부분에서 누군가가 신형을 불쑥 솟구치더니 검을 휘두르면서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챙챙챙챙챙챙챙――!

두 사람은 검을 부딪치면서 동시에 생각했다.

‘강하다.’

복면인과 눈을 마주친 이서휘. 이서휘에게 달려든 복면인은 다른 자들과 현격하게 차이가 날 정도로 고강했다. 이서휘마저도 고개를 갸웃했다.

‘마존인가?’

이서휘는 심연마가에서 앞서 내보낸 두 명의 고수가 좌우사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상대하고 있는 자도 검법의 경지가 제법 높았다. 그러나 이서휘는 이 자를 잡느라 공력을 소비할 마음이 없었다.

이서휘의 목표는 되도록 많은 흑의인을 부상자로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

챙챙챙챙! 까앙!

복면인은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의 강도가 이서휘의 검에 못 미친다고 판단하자 훅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일검을 내지르더니 장력을 쏟아냈다.

이서휘가 좌장으로 응수했다.

퍼억!

이서휘의 장력에 밀려나간 복면인이 뒤로 공중제비를 돌면서 사라지더니 다시 행렬 중간으로 들어가 모습을 숨겼다. 이서휘의 눈빛이 번뜩였으나 방금 되돌아간 자는 어느새 다른 흑의인에게 둘러싸여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행렬 중간에서 방금 되돌아간 자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흘러 나왔다.

“저놈이 이서휘로구나. 시간을 끌겠다는 수작이다. 지금부터 이서휘를 무시한다. 전원, 백도맹 분타로 이동해 개미 한 마리 남기지 말고 주살하라. 좌우사자 둘만 이서휘를 상대하도록. 나머지는 이서휘가 공격해도 두 발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라.”

“존명!”

“흐흐흐.”

심연마존이 행렬 중간에서 낮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이서휘의 의도를 읽고 정확하게 그리고 섬뜩한 판단을 내렸던 것.

이서휘도 코웃음을 쳤다.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

그 순간, 심연마가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백도맹 분타로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서휘가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전속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심연마가의 행렬에 대고 암연심검의 파를 쏟아냈다.

쐐애애애애애애앵! 퍼버버버버벅!

피와 살이 튀었다.

죽어 나자빠지는 자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심연마가가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좌우사자가 달려들어서 또다시 이서휘를 붙잡았다.

챙챙챙챙챙! 스릉!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그때, 앞으로 나가던 행렬에서 흑의인 한 명이 갑자기 쓰러져서 바닥에 누웠다. 누가 봐도 이서휘의 검기에 당한 부상 때문에 쓰러진 것처럼 보였다.

흑의인이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살짝 떠서 좌우사자와 정신없이 겨루고 있는 이서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근처에 올 때까지 차가운 바닥에 누워 기다릴 생각이었다.

물론 이 흑의인은 부상을 당한 적이 없는 심연마존이었다.

심연마존은 바닥에 누워있다가 이서휘를 암살할 생각이었다.

심연마존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온갖 연기를 다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존이라면서 도무지 체통이라는 게 없었다.

설령, 체통이라는 게 있었더라도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헌신짝처럼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내였다.

수단은 그저 수단일 뿐이다.

죽이면 되는 것이다.

명예니 예법이니 도의니 하는 것은 백도가 하는 짓이었지 자신들이 신경 쓸 분야가 아니었다.

한데, 심연마존은 도저히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챙챙챙챙-! 챙챙챙-! 까앙! 후웅― 후웅―

병기 부딪치는 소리야 그렇다 쳐도 심상치 않은 바람 소리가 일었다.

‘마제가 당한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구나.’

그 때문에 이서휘가 쉽게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심연마가의 좌우사자들을 상대하면서도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연마존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젊은 놈이 어찌 저렇게 강하단 말인가? 괘씸한 놈이로군.’

일단 이서휘에게 치명상을 입혀 놓고 희롱과 고문을 하면서 궁금한 것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어서 와라!’

반면에 이서휘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고수들과 오래 겨룰 마음이 없었다. 어느 마가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은 분명 신분이 높은 장로가 확실했다. 이미 두 사람의 무공 수위는 파악했다. 더군다나 아직 마존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분타 쪽으로 합류하는 게 낫겠다.’

승부를 내려면 대체 몇 초식을 더 겨뤄야 할까?

이서휘의 수법(手法)이 노출될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백도맹 분타가 입을 피해도 커질 것이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백야검을 쥐고 두 명의 장로를 상대하다가 기회를 틈 타 암천세를 터트리고 벼락같이 신형을 움직여 대로변을 질주했다.

심연마존이 예상하던 바로 그 경로였다.

타다다다다닥!

그때, 대로변에 누워 있는 시체 한 구가 이서휘의 눈에 느닷없이 들어왔다.

‘음?’

이서휘의 감각에 남은 잔상(殘像)에는 저렇게 말끔하게 격살된 놈이 없었다. 말끔한 흑의를 바라보며, 이서휘가 묘한 위화감을 느꼈을 때 누워있던 흑의인이 강시처럼 일어나면서 검기를 쏟아냈다.

후욱―

그 순간이었다.

“하하하.”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상대를 희롱하는 것처럼 공중으로 높게 솟구쳐서 검기를 피한 후에 그대로 되돌려줬다. 백야검이 아래로 반원의 궤적을 그렸다.

쐐애애애앵!

바닥에 누워 있던 심연마존이 다급하게 구르자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두 동강이 났을 법한 검기가 바닥에 박혔다.

콰과과과곽!

깜짝 놀란 심연마존이 이서휘가 그랬던 것처럼 어둠 속으로 숨어 버리고, 이서휘가 다시 웃음을 길게 터트리면서 내려섰다.

“하하하하……! 실로 치졸하구나.”

검기의 기세로 판단하건대 숨어들어간 놈이 마존이라 판단한 이서휘가 자세를 돌려 도발의 극치를 보여줬다.

“광산에 종종 대로변에 죽은 척 하는 마견들이 있다 하더니 사실이었구나. 자네들 두 사람도 방금 지나갔던 개를 보았나?”

이서휘가 백야검을 내밀고 질문을 계속 던졌다.

“못 봤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대로변의 마교십견(魔敎十犬)이라 하면 광산에서 매우 유명한 미친개다.”

대답 대신에 좌우사자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서휘는 무리를 해서라도 마존을 이곳으로 끌어내고 싶었다.

마존이 백도맹 분타로 이동하면 더 위험했기 때문.

이서휘가 신형을 가볍게 하여 좌우사자의 공격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실로 아쉽구나. 마침 내가 지닌 개뼈다귀가 떨어졌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잠시 기다려 보거라. 뒷간에 가서 똥이라도 퍼 와야…….”

그 말에 발끈한 심연마존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이서휘의 말에 대꾸했다.

“이서휘…… 네놈의 농이 정말 지나치구나.”

심연마존이 모습을 드러내자 잠시 좌우사자들이 물러나 마존을 호위하듯 자리를 잡았다.

좌사자가 고개를 저으며 이서휘를 평가했다.

“실로 미친놈이오.”

우사자는 반대 의견이었다.

“일부러 저러는 것이외다.”

그러자 심연마존이 상황을 정리했다.

“일부러 저러는 게 맞지만 어쨌거나 미친놈이로구나.”

그 사이에 이서휘는 세 사람이 자리를 잡은 모습과 무공의 경지를 가늠하고 세 사람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마존과 좌우사자들이었구나. 핵심전력이 내 앞에 있다니……!’

이서휘는 앞서 나간 마가 세력을 힐끗 봤다. 이미 이서휘는 최선을 다해 많은 사람에게 부상을 입혀 놓았다. 백도맹 분타가 버텨주길 바랄 뿐이었다.

‘아! 이 세 명만 막아내면 가능성이 있겠다.’

마존과 두 명의 장로. 마가의 핵심 전력이다.

이서휘가 적들에게 부상을 입히고, 행렬을 지연시키고, 누워 있던 놈을 희롱하다 보니 어쩌다가 마가의 최고수 세 명이 열이 받아 이서휘를 죽이겠다고 남아 있는 형국이었다.

이서휘는 세 사람을 주시하면서 대로변을 좌우로 거닐었다.

저도 모르게 비릿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흐흐흐.”

심연마존은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이서휘에게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모욕을 받은 상황이었다.

물론 이서휘가 일부러 도발한 것이었다.

세 사람이 거리를 벌려 이서휘를 중앙에 가뒀다.

이서휘는 스스로 독 안으로 들어가, 드디어 성검을 뽑았다.

스릉―

이서휘가 쌍검을 쥔 채로 심연마가의 고수들에게 말도 안 되는 도발을 내뱉으면서 분노라는 감정에 쐐기를 박았다.

“시작하자. 가장 먼저 도망치려는 놈부터 죽여주마.”

심리전의 수준이 아니라 세 남자를 아주 미치게 만들 작정이었던 것.

심연마존이 말했다.

“서휘야, 네놈을 어찌 죽여줄까?”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지니고 있는 평정심의 수준은 이서휘보다 아래에 있었다. 심연마존은 한숨을 다시 한 번 길게 내뱉더니 고개를 숙인 채로 좌우사자에게 명했다.

“일단 양팔을 자르고 양 발을 자른 후에 아니야, 아니다. 아니라고!”

심연마존이 부르르 떨리고 있는 한 손을 치켜 올리면서 말했다.

“그냥…… 그냥…… 죽여어어어!”

“잠깐!”

이서휘가 또 다시 말을 내뱉자 심연마존이 말을 끊었다.

“닥쳐라!”

그때, 이서휘의 신형이 귀신처럼 뒤로 미끄러지면서 거리를 벌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포위망을 빠져 나왔다.

이서휘는 문득 궁금하게 여기던 것을 멍청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수호사왕은 어찌 죽었느냐?”

“그걸 네가 왜 궁금해 하는 것이냐?”

“뭐라고? 내가 죽였다고 퍼트린 것은 너희다. 말해라.”

심연마존이 좌우사자에게 명했다.

“죽여라.”

이서휘가 재빠르게 대꾸했다.

“아! 이제 보니 부상당한 상급자를 너희 손으로 죽였구나. 그렇지?”

“닥쳐라!”

우사자가 호통을 내지르면서 이서휘의 가슴을 향해 쌍장을 날리고, 좌사자의 검이 이서휘의 어깨로 밀려들었다.

이서휘는 백야검을 불쑥 내밀어 우사자가 밀려드는 순간 목이 꿰뚫리게 자리를 잡았고, 이후에 성검으로 좌사자의 검을 후려쳤다.

이어서 바람 소리와 검 부딪치는 소리가 뒤엉켰다. 성검과 백야검이 궤적을 그리면서 우사자의 장력을 상쇄시키고 좌사자의 검을 튕겨냈다.

까앙! 챙챙챙챙챙! 후웅―

그때, 이서휘는 느닷없이 등 뒤에 검막을 뿌린 다음에 전방에 쌍검을 교차시키면서 암연심검의 파를 비스듬한 십자(十字) 형으로 뿌렸다.

쐐애애애앵!

검기가 쏟아지기 전에 심연마존이 뿌린 강침이 후두두둑 소리를 내며 검막에 부딪쳤다가 땅에 떨어졌다.

좌우사자가 밀려드는 이서휘의 검기를 어렵지 않게 막아내며 굉음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앙!

그 모습을 보고 이서휘는 이 싸움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일단 무슨 생각에선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는 마존의 공력이 좌우사자에 못지않았다.

이서휘가 쌍검으로 암연심검의 환을 각각 좌우사자에게 뿌리고 등 뒤로 솟구치면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기회라 판단한 심연마존이 솟구쳤다.

그때였다.

이서휘는 날아가던 궤적을 완전히 무시하는 천근추(千斤錘)를 펼친 것처럼 지상으로 뚝 떨어졌다.

이서휘는 암행표의 묘리와 백야검에 내공을 불어넣어 만든 중검(重劍)의 묘리를 더해 수직으로 떨어졌다가, 백야검에 갈무리한 기운을 공중에 솟은 심연마존에게 내보냈다.

쐐애애앵!

심연마존은 화들짝 놀라서 검을 가로로 눕혀 이서휘의 검기를 막아내다가 한참을 밀려 나갔다.

그 사이에 이서휘는 다가오는 좌우사자를 상대하면서 또다시 정신적인 공격을 함께 펼쳤다.

“마교가 실로 대담하구나. 너희는 한줄기 양심도 없는 자들이었단 말이냐. 수호사왕은 교주의 부하일진대…….”

“닥쳐라!”

챙챙챙챙챙!

이서휘는 좌사자의 검을 튕겨내다가 성검으로 우사자의 허벅지를 베고 느닷없이 쌍검을 쥐고 신형을 회전시키면서 암연심검의 파를 대책 없이 쏟아냈다.

쐐애애애애애앵!

깜짝 놀란 좌사자가 급히 검을 들어 막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우사자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서늘한 기운이 이서휘의 등 뒤에서 밀려왔다.

이서휘가 급히 백야검을 뒤로 보내 검을 막았으나 심연마존의 좌장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퍽 소리와 함께 날아간 이서휘가 땅을 몇 차례 굴렀다가 바닥을 차고 커다란 나무가 만든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타다다다다닥…….

이서휘가 나무와 그림자 사이를 질주하며 마치 염불을 외듯이 세 사람을 질책했다.

“수호사왕은 비록 마교의 인물이었으나…… 지닌 무공의 고강함은 나도 깊이 감탄할 만한 수준이었다…….”

이서휘가 계속 떠들자 검기와 장력이 나무 사이로 쏟아지면서 애꿎은 나무가 쓰러지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서휘는 장력에 맞은 이후로 가슴이 울렁이고 있어 일부러 침착한 어조로 말을 내뱉으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다.

“수련에 정진하여 다음에 승부를 보려 했는데…… 바닥에 누워서 개처럼 물어뜯는 녀석들에게 당했다고 하니…… 실로 통탄할 일이로다.”

그때였다.

이서휘를 향해 괴패마존이 사용하던 혈고륜(血刳輪)과 흡사한 무기가 느닷없이 날아왔다.

한데 혈고륜과 모양이 비슷할 뿐 훨씬 크고 묵직했다. 이리저리 도망가던 이서휘는 자신을 노리고 정확하게 날아오는 괴상한 원형 무기에 실린 내공이 범상치 않자 깜짝 놀라서 쌍검을 교차해 검막을 뿌리면서 양팔에 가득 내공을 주입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검막이 깨지면서 이서휘의 신형이 뒤로 한참이나 날아갔다. 그 와중에 나뭇가지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신형을 비튼 이서휘가 쌍검으로 바닥을 찍으면서 내려섰다. 완전 엎드린 자세였다.

‘뭐야 이 새끼는……. 괴패의 무기와 비슷했는데’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긴장감을 느끼고 조용히 쌍검을 납검한 후에 암행술을 펼쳐 발소리와 숨소리마저 가라앉힌 후에 상황을 살폈다.

☆ ☆ ☆

이서휘는 일부러 기습을 받았던 곳을 벗어난 다음에 길을 우회하여 대로변 근처에 진입했다. 이서휘를 공격했던 묵직한 혈고륜(血刳輪)을 쥔 거한이 흑의인 셋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심연마존, 좌사자 염진광(廉震獷), 우사자 염서광(廉曙獷). 저 자의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의 말에 심연마존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실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습니다. 전서구를 받으셨지 않습니까? 염악마제께서 이서휘라는 놈에게 죽었습니다. 저희가 그 소식을 듣고 복수전을 치르려고 다른 마가를 제치고 가장 먼저 달려오지 않았습니까? 방금 도망간 녀석이 이서휘입니다. 아쉽게 되었습니다. 저희를 의심하지만 않았어도 곧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느닷없이 이게 대체 무슨…….”

심연마존이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쉬다가 좌우사자를 다그쳤다.

“자네들은 벙어리인가? 아무리 사왕(四王)님을 평소 두렵게 여겼다고 해도 말이지. 이런 오해를 받으면서도 말 한 마디 안 할 참인가? 어?”

“아, 그게 마존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여서…….”

“저희는 그저…….”

그때 구름을 벗어난 달빛이 혈고륜을 쥐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괴패마존과 확실히 느낌이 비슷했다. 얼굴에 문신이 가득하고 덩치가 비슷했으나 뿜어내는 기도는 심연마가의 세 사람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남자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사왕인가?’

이서휘가 그대로 잠시 지켜볼 것인지 아니면 몸을 빼내어 백도맹 분타로 고민할 것인지 생각하고 있을 때 거한이 손을 튕기더니 거무스름한 환약을 각각 세 사람에게 날렸다.

“먹어라. 해명은 총본산에서 듣겠다.”

심연마존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불쾌한 어조가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거리입니까? 네?”

이서휘는 마치 자신이 독약을 건넨 것처럼 흥미롭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심연마존이라 했느냐? 이제 어찌할 셈이냐.’

이서휘는 새롭게 등장한 사왕(四王)이 염악마제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심연마가의 세 남자가 저항하기 힘들 것이라 추정했다.

백도맹 분타가 약간 걱정되었으나 사왕이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반드시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사왕이 세 남자를 죽인 이후에 백도맹 분타로 간다면 이서휘가 막아야 했기 때문. 어쨌거나 사왕이 심연마가를 처리하는 것을 막을 이유는 이서휘에게 전혀 없었다.

오히려 마도(魔道)의 분열을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이서휘가 벌어지는 사태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 ☆ ☆

심연마존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찌 이서휘의 말을 듣고 교주님이 직접 선별한 마존에게 자고독(紫膏毒)을 먹이시려는 겁니까? 마존으로 선택받은 자는 자고독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교주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설마 혈륜마제(血輪魔帝)께서 교주님의 명을 어기시려는 겁니까? 총본산은 제 발로 직접 가겠습니다. 자고독은 거둬주시지요.”

심연마존의 말에 사왕(四王) 혈륜마제(血輪魔帝)가 껄껄 웃었다.

“네 놈이 큰 착각을 하는구나.”

심연마존이 갑자기 신형을 뒤로 날리면서 공중에 무언가를 쏘아 올렸다.

치이이이이익 하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퍼버버벙― 소리와 함께 수하들을 전원 회군시키는 심연마존의 명령이 전해지고 있었다.

혈륜마제는 심연마존이 하는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말했다.

“네 놈을 죽이지 않고 데려가기 위해 자고독을 준 것이다. 네가 정녕 시체 상태로 총본산에 가고 싶으냐?”

심연마존의 양쪽에 좌우사자들이 자리를 잡자, 심연마존이 콧방귀를 끼며 대꾸했다.

“그놈의 자고독은 총본산에서 제 아버지가 물리도록 드시고 계십니다. 제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자신이 있으시면 무위를 한 번 떨쳐보시지요.”

“네 놈이 화를 자초하는구나.”

혈륜마제의 말에 심연마존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 다섯이 남았습니다. 괴패와 풍아는 생사도 모른다지요. 미치광이 검마(劍魔), 종적을 감춘 놈, 그리고 제가 남았습니다. 후계 구도가 어떻게 될 거 같습니까?”

그 말에 혈륜마제가 히죽 웃으며 혈고륜을 쥐었다.

“순진한 놈.”

지켜보고 있던 이서휘는 불현듯 진동음을 느끼고 분타 쪽을 바라봤다.

심연마가의 무인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허, 그놈들 참 명령 한 번 귀신같이 잘 듣는구나.’

심연마가는 혈륜마제를 그대로 무시하고 회군 명령을 내린 심연마존의 곁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서휘는 그제야 심연마존의 말이 뇌리에 남았다.

‘종적을 감췄다는 놈이 위극신인가?’

생각할수록 아쉬운 일이었다.

이서휘는 전생의 무위를 빠르게 되찾은 상태였기 때문에 위극신을 하루라도 더 빨리 만나는 게 좋았다. 하지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다른 마존이 등장할 때까지도 위극신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쯤 되면 백도 세력 내부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해야 하는 형국이었다.

한편으로는 위극신이 무림에 등장한 시기가 왜 그렇게 늦어졌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상태였다. 당장 사왕의 무위만 하더라도 이서휘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과연 지금의 위극신이 저 사왕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또한 마교 교주라는 자가 배후에 버티고 있었으니 이서휘가 검제라는 위명(威名)을 얻을 때까지 위극신은 마교 내부에서 권력투쟁을 벌이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위극신이 이 미치광이들을 정리했던 기간이 어쩌면 무림일통을 진행한 시기보다 더 길었단 얘기로구나.’

☆ ☆ ☆

그나저나 놀랍게도 마교의 수호사왕인 혈륜마제와 심연마가가 정말로 한 판 붙을 기세였다. 이서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마도의 일이었으나 오히려 당사자들은 묘한 긴장감이 드는지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지난 날, 화마가(火魔家)도 검마(劍魔)와 이서휘를 동시에 죽이기 위해 달려들지 않았던가? 마도(魔道)가 벌이는 일은 이서휘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굉음이 터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그렇게 한 남자와 한 세력이 맞붙었다.

이서휘가 혼자 뛰어들었을 때보다 더욱 처참한 풍경이 펼쳐졌다.

지옥의 풍경이다.

혈고륜이 지나갈 때마다 신체 부위가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아!

결국에 심연마가의 좌우사자와 장로들이 동시에 달려들고 심연마존은 지켜보고 있다가 수하들 틈으로 숨어 버렸다.

또 어디선가 혈륜마제라는 사왕의 빈틈을 노릴 게 뻔했다.

혈고륜이 심연마가의 무인들을 짚단을 베는 것처럼 쉽게 두 동강을 내면서 날아다녔다. 저것을 어찌 대등한 싸움이라 할 수 있을까?

혈륜마제가 홀로 심연마가를 도륙할 기세였다.

이서휘는 혼란을 틈 타 높은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올라 아예 가부좌를 튼 채로 전장을 내려다 봤다.

그때였다.

전장에 고오(高傲)하게 이어지는 검명(劍鳴)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이서휘가 미간을 좁혔다.

‘어? 이 소리는?’

길게 이어지는 검명과 함께 누군가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박히고 있었다.

“흐흐흐…… 흐흐…….”

검마가 등장해 혈륜마제와 심연마가의 싸움을 바라보더니 푹 소리와 함께 마검을 땅에 꽂은 후, 팔짱을 끼고 불구경하듯이 싸움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때, 심연마가의 좌사자가 혈륜마제의 등에 일장을 적중시키고 물러나자 검마가 훌륭한 한 수였다는 듯 두 손을 내밀어 박수를 쳤다.

짝짝짝―

어쩐지 이서휘의 눈에는 빼빼 말랐던 검마의 몸에 살이 오른 느낌이었다. 또한 양팔에 가득했던 문신이 검마의 목까지 뻗어나가 있었다.

심연마존과 혈륜마제는 검마를 알아보고 저마다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검마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심연마존이 수하들 틈에 섞여 있다가 말을 꺼냈다.

“검마야 잘 왔구나. 마존에게 자고독을 먹이려는 혈륜마제를 함께 치자꾸나. 지금은 내가 핍박을 받고 있지만 다음 차례는 네가 될 수도 있다.”

그 말에 검마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흐흐흐, 마존에게 자고독을 먹이겠다고? 몹쓸 일이군. 몹쓸 일이야. 마존이 아니라 마졸(魔卒)이었구나.”

대체 누구에게 하는 소리일까? 검마의 말은 마교, 혈륜마제, 심연마존 모두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검마의 말에 심연마가를 파죽지세로 베어 나가던 혈륜마제가 말했다.

“검마, 방관하지 말고 염악마제를 암습한 심연마가를 쳐라.”

그 말에 또 검마가 히죽 웃었다.

“아이쿠, 심연이가 염악마제를 쓰러뜨렸단 말인가? 기이한 일이군. 기이한 일이야.”

그 말에 심연마존이 버럭 성을 냈다.

“이서휘한테 죽었다고! 몇 번을 말해야 돼! 어?”

그 말에 이번에는 검마가 껄껄 웃었다.

“아, 이서휘……. 그 자는 지금 어디 있나? 제법 무서운 친구인데…….”

그때, 검마가 주변을 섬뜩하게 둘러보며 말했다.

“이서휘! 자네 왔는가? 어디 있나? 얼굴이나 한 번 보세.”

커다란 나무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서휘가 대꾸를 하지 않자 검마가 불현 듯 자신의 마검을 붙잡아 내공을 주입했다.

마검에서 또 다시 검명이 울렸다.

우우우우우우우웅…….

검마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시끄럽다. 주변에 있는지 살펴봐라.”

그러자 마검에서 마치 귀신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비명은 마치 원형의 기파처럼 일대를 훑고 지나갔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때 지켜보고 있던 이서휘의 등에서 성검이 부르르 하고 떨리기 시작했다.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서휘는 서둘러 성검의 검병을 붙잡고 내공을 살짝 주입했다.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으나 어느새 성검의 떨림이 잦아들고 있었다.

그대로 뒀으면 성검마저 검명을 울렸으리라.

검마는 검명을 울리는 검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묘한 표정으로 다시 심연마가와 혈륜마제를 바라봤다.

어느새 심연마가는 절반이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혈륜마제에게 덤비고 있었다.

심연마존이 검마를 재촉했다.

“검마야 도와다오.”

그 말에 검마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재미있는 녀석이야. 네놈은 손 한 번 까딱하지 않으면서 내 도움을 바라느냐?”

그때, 심연마가 좌사자의 검이 뎅강 소리와 함께 부러지고 우사자의 장력이 혈륜마제의 가슴을 강타했다.

퍽! 소리와 함께 혈륜마제가 뒷걸음을 치자 심연마존이 서늘하게 말했다.

“검마, 가자!”

무리에 뒤섞여 있던 심연마존의 신형이 솟구쳐서 등장하더니 검을 좌하단으로 늘어뜨린 채로 경공을 펼치면서 다가가 혈륜마제를 공격했다.

챙챙챙챙챙챙챙!

그 순간에 탁! 소리와 함께 마검을 낚아챈 검마가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나갔다.

타다다다다닥!

심연마존의 검을 튕겨내던 혈륜마제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쥐어짜는 것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클클클…….”

혈륜마제를 가운데에 두고 동서남북에서 검마, 심연마존, 좌사자 염진광(廉震獷), 우사자 염서광(廉曙獷)이 달려드는 형국이었다.

심연마존의 검을 튕겨내던 혈륜마제가 혈고륜을 날렸다.

쐐애애앵!

심연마존이 깜짝 놀라서 공중으로 솟구치자, 혈륜마제는 심연마존을 무시하고 쌍장을 내밀어 심연마가의 좌우사자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심연마가의 좌우사자들이 피를 토하며 날아가고.

그와 동시에 솟구친 검마가 혈륜마제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 이미 혈고륜을 피하느라 공중에 떠 있던 심연마존의 배에 마검을 박아 넣었다.

푸욱―!

“커헉!”

검마는 마치 꼬챙이를 꿰듯이 심연마존의 배에 마검을 박아 넣은 채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심연마존의 비명과 검마의 웃음이 뒤섞였다.

“하하하하하―”

“마존!”

깜짝 놀란 심연마가가 몰려들어서 검마의 몸에 검을 쑤셔 박았다.

까강! 깡깡깡깡! 깡깡!

일부는 달려 들어서 검마를 떼어내느라 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서휘의 검도 박히지 않았던 검마다. 심연마가 수하들의 공격이 통할 리가 없었다.

검마가 광소를 터트리면서 마검을 두 손으로 붙잡고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오오

심연마존의 정기가 빨려나가는 것처럼 쭈글쭈글하게 변하고 어느새 등장한 혈륜마제가 손을 한 번 휘두르니 검마에게 달려든 심연마가의 무인들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다.

혈륜마제는 검마가 심연마존을 마검에 빨아들이는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다 했느냐?”

그 말에 검마가 푸악 소리와 함께 마검을 뽑아내더니 혈륜마제를 향해 말했다.

“덕분에 잘 먹었네.”

“이제 어디로 가느냐?”

검마가 마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살점과 핏물을 털어낸 다음에 혈륜마제에게 반말로 대꾸했다.

“아니지. 질문이 틀렸어. 누굴 죽이러 가냐고 물었어야지. 누가 남았나?”

지켜보고 있던 이서휘는 그 순간에 귀를 쫑긋할 수밖에 없었다.

혈륜마제의 말이 이어졌다.

“괴패, 풍아는 생사불명. 그리고 자네와 일월(日月)이 남았네.”

그 말에 검마가 대로변을 홀로 걸어가며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들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는가? 흐흐흐하하하―”

일부 독한 마음을 품은 심연마가의 무인들이 검마에게 달려들었다가 비명과 핏물을 뿌리고 대로변에 널브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검마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시체들을 발로 쳐내면서 대로변을 걸어가고 있었다.

☆ ☆ ☆

이서휘는 숨을 죽이고 혈륜마제와 검마를 번갈아 보며 침음을 흘렸다.

‘미친 새끼들, 실로 난장판이로구나.’

그나저나 이서휘는 혈륜마제의 말이 뇌리에 남았다.

‘일월(日月).’

만약 혈륜마제의 말대로 남은 마가가 일월마가(日月魔家)라면 위극신이 바로 일월마존(日月魔尊)이라는 이야기였다.

이서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이냐?’

이서휘는 그제야 신형을 멀리 내뺀 다음에 백도맹 분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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