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26화 (26/43)

<3장. 회동>

이서휘가 광산으로 출발하기 전날 밤에 수련에 매진하고 있던 화지련이 조용히 찾아왔다.

“대주님,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 와.”

이서휘가 깨끗한 천으로 백야검의 검신을 닦고 있다가 책상 한쪽에 내려놓고 화지련을 바라봤다.

“수련은?”

“방금 마치고 오는 길이에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네.”

화지련이 이서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 저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새삼 왜?”

“그냥 회동하는 거라면서요.”

“그냥 회동이긴 한데 위험할 거 같다. 놀러 가는 것이 아닌데 굳이 따라가려고 하느냐?”

이서휘가 냉정한 얼굴로 말하자 화지련이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을 나가려고 자세를 돌렸다.

“쳇, 알겠습니다.”

“잠시만.”

“네.”

“그 말 하려고 온 거야?”

“그럼요?”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이서휘가 말했다.

“지련아 네가 강해지면 되는 일이야. 그렇게 되면 귀찮아서 따라다니기 싫을 정도로 자주 데리고 다니마.”

“알겠습니다. 그런데 도삼과 제가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나요? 많이 따라잡은 거 같은데.”

이서휘가 빙긋 웃었다.

“도삼과 도이는 설령 상대가 강하더라도 도망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놈들이야. 난 많지도 않은 대원들 죽는 꼴 보기 싫다.”

이서휘의 말에 화지련이 피식 웃었다.

“죽으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후후, 말이 너무 심했나? 이렇게 얘기할게. 누가 내 대원들 건드리기만 해도.”

“해도……?”

화지련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뭘 그렇게 기대해? 내 성격에 가만히 두겠느냐?”

이서휘가 그리 말하자 화지련은 실망스러운 눈빛이었다. 화지련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럼.”

화지련이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리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녀와서 성과를 살펴볼 테니 단단히 준비하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어느새 단정하게 묶인 화지련의 뒷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침음을 내뱉었다.

“흐음, 갈수록 말을 잘 들으니 내가 더 무섭네.”

☆ ☆ ☆

다음날 도삼이 짐을 챙기면서 말했다.

“대주님.”

“왜?”

“광산에서 대규모 접전이 벌어질 거라 예상하시는 겁니까? 장비가 너무 많아요. 도이 형은 귀찮다 그래서 저만 짐이 많습니다.”

“그래. 네가 고생이다.”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고.”

그런데 이서휘가 바라보니 도삼의 짐이 정말로 많았다. 기가 막힌 이서휘가 도삼의 짐을 훑어보면서 짐을 줄여 나갔다.

“아, 이 그물은 도대체 뭐냐? 고기 잡으러 가냐?”

“이게 얼마나 유용한데요.”

“치워라. 이건 뭐야? 화포냐? 전쟁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무거우니 빼라. 이건 뭐야? 시커먼 거.”

“아아아! 그건 건들지 마십시오.”

“왜?”

“잘못 건드렸다가는 월야대 전체가 날아갑니다.”

도삼이 허풍을 떨면서 말하자 이서휘가 안색을 굳혔다.

“이거 진짜 무서운 놈들이었네.”

도삼이 자꾸 짐을 빼내려는 이서휘의 손을 치면서 말했다.

“대주님이 더 무섭소. 아, 거 좀 손 치우십시오. 이 정도는 가지고 가야 합니다. 명령만 내려주시면 백도맹 분타도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서휘가 엄지를 척 하고 올렸다.

“대단하다.”

“도도(盜道)의 길이란 멀고 험난한 것입니다. 그런데 분쟁이 예상되면 검대를 이끌고 가시는 게 낫지 않아요?”

“저 검대 인원이 광산으로 가는 것 자체가 다 돈이다. 마가의 본거지가 있다면야 군림맹 전체가 함께 이동하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는 일이고.”

“습격을 받을 수도 있는데 셋만 가자구요?”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과연 세 명일까?”

그제야 도삼과 도이는 안심했다. 지난 날에도 이서휘가 가는 곳마다 알아보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

이서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더라도 나는 마존들만 찾아내어 죽일 생각이다. 너희도 그렇게 알고 움직이도록. 싸움이 벌어지면 전황 파악을 해서 나한테 보고하는 게 너희가 할 일이야.”

“알겠습니다.”

가만히 있던 도이가 피식 웃었다.

“대주, 관우나 장비라도 된 것 같군. 적진에 들어가 장수 목을 따서 돌아올 기세네. 나는 짐이 얼마 없으니 다구(茶具)라도 준비해야겠소.”

“다구는 왜?”

도이가 경극 배우처럼 말했다.

“이 대주, 차가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오시게.”

그 말에 이서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래야지. 그럴 생각이 아니라면 내가 뭐 하러 광산까지 가겠느냐. 사자들에게 맡겨도 될 일인데.”

이서휘의 말 그대로였다.

백도맹과 군림맹이 회동을 한다.

마도에겐 달콤한 먹잇감들이 몰려 있는 현장일 터.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라고 이서휘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게 차라리 위극신이 나타나면 좋겠는데…….’

백도맹과 군림맹이 회동을 할 예정이었지만 이서휘는 광산에 머무르고 있는 검림과 회동을 할 생각이었다. 먼 길을 떠나는 만큼 이서휘의 목적은 하나가 아니었던 것.

더군다나 이서휘는 단우혁에게도 전서응을 보내 광산행을 권유한 상태였다.

이서휘가 단우혁을 끌어들이는 방법은 단순하고 효과적이었다. 잡다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간략히 다음과 같은 말을 적었다.

[광산(光山)에서 백도맹의 고수들과 만날 생각이네. 광산의 비완객잔(鐵腕客棧)에서 머무를 테니 시간이 되면 찾아 오게. 혹시 백류혼에게도 올 수 있는지 의사를 물어보도록.]

비완객잔은 백도맹 분타에서 가장 가까운 검림 세력이었다.

단우혁과 백류혼 두 사람은 아직 무림에서 명성이 드높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백도맹과의 회동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서휘는 예상했다.

사람들의 심리를 꿰고 있으니 어딘지 모르게 확실히 음흉해진 이서휘였다.

이서휘는 그렇게 다방면으로 준비를 마친 다음,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도둑 형제와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하남의 광산으로 출발했다.

☆ ☆ ☆

군림맹을 떠난 지 반 시진이 되었을 무렵, 이서휘는 뜻밖의 세력과 조우했다.

이십여 필의 말이 먼지를 일으키고 지나면서 이서휘를 노려보고 지나갔던 것.

다름 아닌 사마세가의 무리였다.

사마세가는 사마준보의 죽음을 조사하는 도중에 이서휘를 유력한 살인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서휘를 잡아 가혹한 고문을 해서라도 사마준보의 죽음을 밝혀내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

하지만 이서휘를 알아보고 싸움을 걸었다면 그야말로 사마세가가 공중분해가 됐을 터.

이서휘가 지나치는 사마세가를 보며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인피면구 쓰길 잘했구나.”

도둑 형제들이 만든 인피면구는 그야말로 수준이 높았다. 더군다나 복장도 바꾸고 일부 병기도 봇짐에 감춰둔 터라 사마세가가 감쪽같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도 사마세가가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 분쟁을 더 일으킬 마음이 없었기에 얌전히 사마세가를 스쳐 보냈다.

눈치가 빠른 도삼이 이서휘에게 말했다.

“사마세가 놈들 맞죠? 감색 장포에 흰 줄 넣고 다니는 녀석들.”

“맞다.”

“누구를 찾나 본데요? 눈에 불을 켜고 다니네. 하도 노려봐서 한마디 할까 하고 참았습니다.”

이서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날 찾고 있겠지.”

“대주님을 왜요? 또 사고 치셨어요?”

도삼의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사마준보가 살수를 자꾸 보내더구나.”

“그래서요?”

이서휘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다 죽였다.”

“와…….”

도삼과 도이가 새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여간 우리 대주님은 무섭다니까. 알다가도 모르겠어.”

도이도 한마디 거들었다.

“대주가 화나면 확실히 무섭지. 그러니까 군림맹 놈들이 화지련을 안 건드리는 것이겠지.”

도이의 말에 이서휘가 인상을 썼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모르셨소? 무서운 사람이네.”

도삼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무서운 사람이야. 대체 뭘 아는지 모르겠어. 알다가도 모를 사람.”

이서휘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자식들이 이제 날 놀리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졌어.”

이서휘의 말에 도삼과 도이가 킬킬대고 웃었다. 이서휘는 두 사람의 말을 대충 이해했으나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화지련이 자꾸 이서휘에게 마음을 쏟으려고 하자 조금씩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이서휘였다.

광산까지는 먼 여정이었다.

그래도 도이와 도삼이 하도 떠들어 대서 가는 길이 적적하지 않았다.

이서휘는 도둑 형제들이 합심해서 놀릴 때가 가장 힘들었을 뿐 그 이외의 시간에는 주로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실전에 임할 때의 마음가짐과 자신보다 고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의 대처법 등.

후발대는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서휘는 간간히 도둑 형제들에게 무공에 대한 견식을 넓혀주고 있었다. 이때만큼은 도둑 형제들도 장난을 치지 않고 얌전히 이서휘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찌 보면 묘한 관계였다.

공적으로는 상관과 부하였고 사적으로는 친구였으며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스승과 제자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이서휘는 이런 관계가 편했다.

도이가 약간 멍청한 성격이었으나 무공을 대하는 자세는 또한 나름 기민한 구석이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광산으로 향하는 여정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를 가르치면 서너 개를 깨닫는 도둑 형제들이 마치 이서휘의 제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광산 근처에 도착한 이서휘가 불쑥 말했다.

“……처음 이야기 한다만 구화산에서 마존 한 명을 더 죽였다. 아마 화마가(火魔家) 세력인 거 같구나.”

이서휘의 말에 도이와 도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혼자 다녀오셨잖아요? 근데 마존을 죽였다고요.”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됐다.”

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살인마네. 살인마여. 마교 교주는 뭐하나 몰라? 이서휘 안 잡아가고.”

이서휘가 혀를 찼다.

“넌 말을 해도 하여간. 아, 그리고 마존으로 추정되는 검마(劍魔)라는 인물을 맞닥뜨리게 되면 절대 겨루지 마라.”

“어떻게 알아봅니까?”

“누군지 알아야 겨루든가 말든가 하지.”

이서휘가 검마의 외모를 설명했다.

“양팔에 문신이 가득하고 몸이 말랐다.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거무스름한 마검을 쓰는데…… 워낙 특이해서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주의하겠습니다. 한데 대주님도 그 검마라는 자를 못 잡으셨습니까?”

도삼의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이상한 무공을 쓰더구나. 마검과 일체화된 마공이랄까. 어쨌든 내 검도 잘 박히지 않는 도검불침(刀劍不侵)의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맞붙게 되거든 도망을 가든지 아니면 검부터 부러뜨려야 할 게다.”

“알겠습니다. 주의하죠.”

“도검불침? 그런 무공도 있소? 부럽군.”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남에 들어서면 인피면구를 벗어야겠다.”

“왜요?”

“들를 곳이 있어서 그래.”

“아하, 대주님 부하들.”

도삼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도이는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왜? 그 옥의림인가 만나려고? 옥의림이 화 소저보다 예쁜가 보지?”

이서휘는 도이의 말을 무시하고 어딘가 있을 단우혁에게 욕을 했다.

“하여간 단우혁 이 새끼는 대체 말을 어떻게 하고 다닌 거냐.”

이서휘가 은근슬쩍 말을 돌리려고 하자 도이가 다시 되물었다.

“왜 말 돌려? 화 소저가 예쁘냐고, 옥의림이 예쁘냐고 왜 말을 못 해? 대주 눈에는 옥의림이 예쁘지? 한 번 만나러 갑시다.”

이서휘가 성을 버럭 냈다.

“옥의림을 왜 만나! 이미 한참 지나왔다.”

“아니! 그걸 왜 지금 말하는데!”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하는데!”

“하여간 좋은 건 다 자기가 가지려고 그래.”

도삼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두 사람의 흉을 봤다.

“거 좀 그만 좀 싸우시오. 애도 아니고 진짜…….”

세 사람은 광산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지긋지긋할 정도로 싸우고 있었다. 세 사람은 십여 일이 더 지나서야 인피면구를 벗어 던지고 비마표국(飛馬鏢局)과 부서전장(富署錢莊)에 도착해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종착지인 비완객잔(鐵腕客棧)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이서휘가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자 도이와 도삼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짐을 풀고 일 층으로 내려오던 도삼이 말했다.

“아, 진짜 대주님의 정체가 궁금하다. 이 지경이면 설명할 법도 하건만!”

도삼이 불평을 늘어놓자 도이가 빈정거렸다.

“그만해라. 신비롭고 싶다는데. 안 물어봐야 자기가 안달이 나서 나중에 설명하겠지. 내가 지켜본 대주는 그런 성격이야. 이제 복숭아고 나발이고 안 물어본다.”

이서휘가 말했다.

“후후, 오느라 고생들 했다. 오늘은 일단 마시고 먹고 쉬자.”

짐을 푸는 동안에 객잔 일 층에는 이서휘에게 대접하기 위한 산해진미가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이서휘가 자리에 앉으려는데 도이가 무슨 말을 엿들었는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드디어 대주의 정체를 알았다.”

도삼이 엄청나게 궁금하단 얼굴로 말했다.

“역시 도이 형. 아직 죽지 않았어. 뭔데?”

이서휘도 궁금하단 얼굴로 도이를 바라보자, 도이가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 사람 검림주(劍林主)야.”

이서휘도 놀란 얼굴이 되었다. 수하들이 있어 검림이 되도록 호칭에 조심하면서 이서휘에게 인사를 했던 터라 도이가 어떻게 들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도삼이 말했다.

“검림주라 근데 그게 뭔데?”

도이가 눈을 껌벅이여 대꾸했다.

“나야 모르지. 하여간 검림주야.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대주, 맞지?”

도이의 말에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하하. 그래 맞다. 그렇게만 알고 있어라. 그 말은 되도록 하지 말고.”

검림주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정체를 맞췄다는 사실만으로 도이의 기분이 흡족해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비완객잔(鐵腕客棧)에서 검림과 회동을 하고 삼 일이 지나서야 군림맹의 사자들이 도착했다.

사자들의 대표는 천라각주 유백.

군림맹도 혹시나 있을 분쟁에 대비해 고수들을 추려 사자들을 구성한 상태. 구성인원은 대부분 무공이 고강한 쌍각의 실무자들이었는데 그 뒤를 남궁, 백리, 모용, 독고 세가의 고수들이 평범한 복장을 입고 따라왔다.

검대 인원은 그대로 군림맹에 두고 세가의 고수들이 따라나선 터라 이서휘로서도 인원 구성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작 이랬어야지. 세가들의 분위기가 이제 좀 변하려나.’

이서휘도 사흘 동안 바쁘게 보냈다. 낮에는 주로 검림과 이런저런 회의를 진행했다.

마가가 백도맹 분타로 들이닥쳤을 경우 검림의 역할에 대해.

검림이 향후 이서휘를 어떻게 지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서휘는 비완객잔의 주인이자 광산 검림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서태현(徐太賢)에게 장기적인 제안도 넌지시 해둔 상태.

[그간 검림을 둘러보니 각 지역에 뿌리를 내린 토착 세력이 되었더군요. 제가 무어라 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만약 검림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군림맹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고수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보내주십시오. 제가 군림맹에서 독립된 조직을 이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또한 이 내용을 노산의 곽서명 선배나 다른 검림 세력에게도 전파해 주십시오.]

서태현이 이서휘의 의도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끌어안으려 하는구나.’

이서휘는 전생에 낭혼련주가 되어 낭인들을 이끌었다.

이번 생애에도 마찬가지.

사람을 이끌려면 무엇보다 이서휘가 스스로 힘을 먼저 갖춰야 한다. 이서휘는 무공 수위가 높아지자 이른 나이에 사람을 더 끌어모아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전생에서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인원들이 이서휘에게 모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편, 도이와 도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주로 밤에 나와서 광산과 백도맹 분타 주변을 누비고 다녔다.

이서휘가 세세하게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희끼리 이런저런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백도맹과 군림맹도 이번 회동에 준비를 많이 했지만 이서휘와 도둑 형제가 암중에서 회동을 무사히 끝마치기 위해 누구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서휘가 도둑 형제들을 보며 말했다.

“이리 와 봐. 할 말 있다.”

“말씀하십시오.”

“말하쇼.”

이서휘는 백도맹 분타로 들어가기 전에 도이, 도삼 형제의 어깨에 자신의 양팔을 뻗어 올려놓고 말했다.

“일이 어떤 식으로 어긋나든 간에 내가 바로 잡을 거다. 무리하지 말고 보중해라. 되도록 비완객잔 사람들하고 같이 움직이고.”

“…….”

“…….”

“알아들었어? 왜 대답이 없어.”

도삼이 먼저 덤덤하게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주나 무리하지 마쇼.”

이서휘가 백도맹 분타로 들어가다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을 남겼다.

“다녀오마.”

☆ ☆ ☆

백도맹 분타.

이서휘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넓은 뜰에 마련된 기다란 탁자에 백도맹과 군림맹이 나란히 앉아 논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기에 이서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말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이야기를 경청했다.

군림맹의 탁자에는 유백이 정중앙에 있었고 그 좌우로 쌍각의 실무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서휘가 둘러보니 뒤편에 군림맹 세가의 고수들이 말없이 이서휘에게 눈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백도맹에서 나온 고수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다행히 아는 사람이 그래도 두 명이나 있었다. 이서휘에게 패한 범천락과 범사량이 마침 자리에 앉은 이서휘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 이서휘는 반가운 마음에 점창파 사형제들을 향해 미소를 날렸다.

‘반갑다. 이 친구들아.’

이서휘가 미소를 짓자 점창파 사형제들이 끄응 소리를 내면서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서휘는 피식 웃은 다음에 매화가 수놓인 백의장포를 입은 중년인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백도맹과 군림맹이 각자 얼마나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지 자료를 교환합시다. 준비는 하셨소?”

천라각주 유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세가의 지원 여부에 따라 군림맹은 유동적이오.”

“그건 백도맹도 마찬가지요. 감안합시다.”

양측은 준비한 서류를 교환해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백도맹 고수들은 득의에 찬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군림맹이 우리보다 적군.]

이서휘는 사람들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백도맹의 대표로 보이는 중년인은 화산파로 추정되는 사람이었다.

그가 말했다.

“양측의 인원이 제법 많소. 마도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마도섬멸의 기치를 올리면 백도, 군림 이외에도 참가할 세력들이 많을 것이오.”

“물론 그렇겠지요.”

유백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군림맹에는 최근 마도 세력과 맞붙었던 것에 대한 기록이 제법 많소이다. 백도맹이 가지고 있는 정보와 교환해 보는 것이 좋겠소. 본거지에 대한 정보도 알려주시길 바라오.”

“이미 진전이 있었소. 의심 가는 지역으로 백협단(白俠團)를 소수정예로 조금씩 내보냈는데 특정 지역에서 소식이 계속 끊기고 있소. 백도맹이 이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치른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소.”

유백이 눈을 빛내며 두 손을 모아 백도맹의 고수들에게 예를 올렸다.

“돕지 못했던 것을 사과드리겠소. 이제 힘을 합칠 터이니 백도맹의 노고는 이 유백이 단단히 기억하고 행동하리다.”

“후후, 별말씀을. 일단 이 자료를 보시오.”

유백이 지도 한 장을 건네받아 유심히 살펴보며 말했다.

“으음, 붉게 표시된 곳이 그럼 소식이 끊긴 백협단이오?”

“그렇소.”

“뜻밖에 섬서 지역이 유력하구려.”

“지금은 그렇소이다.”

회의가 반 시진이나 이어질 무렵에야 이서휘는 백도맹의 인원 구성을 조금 파악할 수 있었다.

화산파의 고수는 백도맹의 백협단주인 담가막(潭嘉嗼).

출신이 어딘지 파악되지 않으나 백도맹 분타주로 보이는 정일곤(鄭一菎).

앞서 만났던 점창파의 범사량과 범천락까지가 백도맹이 회합에 내보낸 수뇌부들이었다. 이외에도 아직 이름을 파악하지 못한 백도맹의 고수들이 가끔씩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이서휘는 도삼이 가지고 다니던 벽력탄이 어디선가 터지는 소리를 듣고 회담 도중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린가?”

유백이 벌떡 일어난 이서휘에게 말했다.

“이 대주?”

또 다시 굉음이 터졌다.

콰아아아아앙……!

도삼은 도이와 함께 이서휘가 짐에서 빼내려고 했던 벽력탄을 땅 속에 매설했다가 마가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터트린 후에 몸을 빼내고 있었다.

이서휘가 분타 건물의 외곽 담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 수하가 터트린 벽력탄 같습니다. 각주님, 마가 세력입니다.”

유백이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뭐?”

놀란 것은 이서휘도 마찬가지.

어쩌면 이렇게 공교롭게 일이 진행되는 것일까?

이서휘는 그 순간에 싸늘한 표정으로 새삼 백도맹의 고수들을 표정을 싹 훑어봤다.

백도맹의 고수들은 젊은 청년들이 자신들을 싸늘하게 바라보자 이서휘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백협단주인 담가막(潭嘉嗼)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가 세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회담 장소가 알려졌단 말인가?”

이서휘는 담가막을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준비들 하시지요.”

그때, 뜰 안으로 불화살이 한 대 날아들었다.

휘이이이이이――

마침 담가막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는데 담가막은 아무렇지도 않게 떨어지는 화살을 낚아채더니 곧장 내공을 주입해 땅바닥에 쑤셔 넣었다. 콱 소리와 함께 화살이 땅속으로 박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데,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어느새 섬뜩하게 변해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쏴아아아아아―― 쏴아아아아아――

상공에 화살이 가득했다.

이윽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면서 화살이 소나기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백도맹과 군림맹의 고수들이 침착하게 병기를 뽑아 화살을 쳐내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둑― 투두두두두둑― 파앙! 떠엉!

이서휘도 백야검을 뽑아들고 화살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기가 차는구나.”

백도맹과 군림맹도 정예 고수들이 모인지라 상공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당할 정도로 허술한 무인은 없었다. 이번에는 도둑 형제들이 쏘아 올린 신호탄이 공중에 불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좌라라라락―

이서휘가 불꽃의 크기를 가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많은가 보군.”

이서휘는 검림에게 분타 주변에서 머무르되, 되도록 민가에 불을 지르는 놈들이나 양민을 학살하는 경우에만 나서라고 당부한 상태였다.

동원할 수 있는 비장의 수를 아껴놓은 셈.

저마다 병기를 뽑아들고 화살을 쳐내는 와중에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대청 문이 날아가고, 그 문 사이로 흑의인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백도맹 분타에서도 간부급 이하의 무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그 수가 제법 많았다.

유백이 쌍도를 움켜쥐고 이서휘에게 말했다.

“서휘야, 이거 너무 많은데? 근데 어떻게 예상한 거냐?”

이서휘가 화살을 쳐내면서 가장 먼저 진입한 흑의인의 목을 가볍게 날려 버리면서 말했다.

“저도 추측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 백도맹 분타 건물 안에 있던 집기들과 나무,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이 바람에 날려 정신없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한데 자연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잦아들자 어느새 넓은 분타 건물의 외곽 담에 흑의인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언가가 휙 날아왔다.

텅! 떼구르르――

누군가의 목이 탁자에 뒹굴었다.

이서휘가 바라보니 정문 담벼락 위에 장포를 입은 사내가 좌우에 장로들을 거느리고 쌍맹의 고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물 후반으로 추정되는 마존이 쉰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피해는?”

마가 장로 한 명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벽력탄에 삼사십은 죽은 거 같네. 부상은 더 많고.”

이서휘는 말을 내뱉는 마존을 유심히 바라봤다.

‘누구냐?’

마존이 입은 잿빛 장포의 밑단에는 흰색으로 회오리는 치는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좌우에서 대기하고 있는 장로들도 마찬가지.

그때였다.

서쪽 담벼락에서 누군가가 이서휘를 알아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서휘, 오랜만이로구나.”

그곳에 괴패마존이 낭아봉을 쥔 채로 이서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좌우에 육중한 저봉(杵棒)을 든 역사가 줄지어 있었다.

이서휘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괴패마존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괴패야, 이곳까지 어인 일이냐?”

“반가워 죽겠다는 표정이로구나.”

이서휘는 대꾸를 않고 씨익 웃다가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동쪽 담벼락을 바라봤다.

그곳에 흑색 장포를 입은 거한이 홀로 담벼락에 서서 이서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나이는 사십이나 되었을까.

눈, 코, 입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빛이 검붉었다.

이서휘의 눈에는 오히려 마존을 수행하는 장로들보다 존재감이 더 묵직한 사내였다.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하며 거한의 정체를 추측했다.

‘교주 직속의 사천왕인가…….’

이서휘는 천마 위극신이 부리던 사천왕들을 상대해봤기에 그저 존재감만으로 상대의 정체를 근접하게 추측해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격 명령이 흑포 거한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거한의 묵직한 목소리가 백도맹 분타 건물 전체에 울렸다.

“괴패, 풍아(風兒). 반 시진을 주마. 내가 내려서는 곳마다 피바다가 되어 있어야 할 게다.”

마존에게 하대를 하는 인물은 이서휘의 예상대로 마교 총단의 세력을 이끌고 있는 사왕(四王) 중 염악마제(炎惡魔帝)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 염악마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괴패마존의 세력과 풍아라 불리는 풍마존(風魔尊) 세력이 건물 안으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마가가 쳐들어올 것이라 예상했던 이서휘마저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수가 밀려들고 있었다.

이서휘는 잠시 유백 곁에 서서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마존 둘, 사천왕, 장로 넷……. 생각보다 많구나.’

연이은 패배에 쓴맛을 본 마교의 총단은 이번 습격을 위해 두 곳의 마가를 내보내고 사왕인 염악마제마저 감독관으로 내려 보낸 상태였다.

그렇게 백도맹과 군림맹이 회담 도중에 힘을 합치고 몰려온 마가 세력과 맞붙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유백과 함께 팔짱을 끼고 잠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천왕이 움직이면 이서휘가 나서야 할 것이라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

사왕 염악마제는 이서휘라는 청년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뜰 중앙에서 움직이지 않자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무언가가 긁히는 소리를 내뱉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클…… 클…… 클…….”

그때, 어디선가 단우혁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와하하하하.”

이서휘가 팔짱을 낀 채로 분타 건물의 지붕을 바라보니 단우혁이 청룡도를 쥐고 이서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와…… 기가 막히는구나. 뭐? 백도맹과 회담을 해?”

단우혁이 등장하자 마가의 수뇌부들이 백의장포를 입은 청년을 힐끗 바라봤다. 그때 장포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단우혁의 옆에 백의장포를 입은 백류혼이 내려서서 단우혁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서휘만 있을 거라며? 이게 다 뭔 난리냐?”

그때, 이서휘가 반가운 마음에 신형을 움직여 순식간에 지붕에 올라가서 단우혁과 백류혼에게 다가갔다.

“때 맞춰 잘 왔구나.”

단우혁과 백류혼이 이서휘에게 동시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닥쳐! 이 새끼야!”

“닥쳐라!”

이서휘가 히죽 웃으면서 친구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오느라 고생했다. 이 녀석들아, 반갑구나.”

이서휘는 친구들을 바라보다가 품에서 도삼이 건네준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전황을 살펴보니 검림의 지원을 받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지원이 더 올 것이다.”

단우혁과 백류혼은 이서휘를 욕하는 와중에 마가와 백도의 고수들이 격렬하게 맞붙자 한편으로는 피가 들끓고 있었다.

단우혁이 말했다.

“이 지옥으로 또 누굴 끌어들이려고 하느냐?”

이서휘가 대꾸했다.

“너희 둘이 있는데 이곳이 어찌 지옥이 되겠느냐?”

이서휘가 은근 두 사람을 추켜세웠으나 돌아오는 것은 욕지거리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서휘는 두 사람의 욕을 건성으로 들으며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이서휘가 묘한 말을 내뱉었다.

“모처럼 두 사람이 불의를 참지 못해 친구를 도우러 왔으니 내가 두 사람에게 어울리는 상대를 알려주겠네.”

어조는 침착했으나 뜻은 결국 내려가서 빨리 싸우라는 말이었다. 단우혁과 백류혼은 기분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단우혁이 말했다.

“네가 뭔데 내 상대를 골라준단 말이냐. 내가 알아서 고를 것이다. 기다려라. 살펴보는 중이니.”

백류혼도 거들었다.

“이 대주, 보면 볼수록 기가 차는구나.”

이서휘는 두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뜬금없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이서휘가 괴패마존과 풍마존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이느냐? 마가(魔家)의 후계자가 두 명 있다. 자네들은 청협과 백검의 후계자들이니 그야말로 어울리는 상대들이다.”

단우혁과 백류혼은 툴툴 거리는 와중에도 범상치 않은 기도를 내뿜고 있는 괴패마존과 풍마존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의 말이 이어졌다.

“낭아봉을 쥔 자는 괴패마존이라 한다. 우혁의 대도도 강맹하지만 괴패마존에 비하면 한 수 뒤처진다고 할 수 있지. 일전에 나도 괴패마존에게 일초 반식을 패해 물러난 적이 있다.”

이미 피가 끓고 있던 단우혁이 이서휘에게 되물었다.

“자네가 졌다고?”

어찌 이렇게 쉽게 속을 수가 있을까.

이서휘는 전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이어서 이서휘가 백류혼의 상대가 될 풍마존을 가리키며 말했다.

“풍마가(風魔家)의 후계자. 마교의 후계자 경쟁을 하는 놈이다. 풍아(風兒)아 불린다지? 일전에 저놈과 사흘밤낮에 걸쳐 이천사백삼십팔 초를 겨뤘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

백류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한심한 놈.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다니 정신이 있는 놈이냐?”

이서휘가 백류혼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들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저 둘이 자네들보다 윗길에 있는 고수들이라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단우혁과 백류혼이 버럭 성을 냈다.

“닥쳐라!”

“적당히 좀 해라. 이서휘, 알았으니까. 넌 누구를 상대하려고 여기에 있느냐?”

이서휘가 흑색 장포를 입은 우두머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내 상대는 저기 있구나.”

“뭐라고?”

저 대단한 단우혁과 백류혼도 흑색 장포의 사내를 보자마자 이곳에 무위를 뽐내는 자들을 통틀어서 가장 강한 고수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우혁은 흑색 장포의 사내를 바라보다가 이서휘에게 말했다.

“굳이 네가 상대해야겠느냐? 봐라. 움직이지도 않는데.”

백류혼도 이서휘를 빈정거렸다.

“개죽음 당할 생각이냐?”

그때, 이서휘가 진지한 표정으로 눈빛을 빛내며 두 사람을 돌아봤다.

“협을 행하는데 어찌 적이 강하다고 하여 두려워하겠는가?”

단우혁과 백류혼이 마주 보며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단우혁이 고개를 저으며 이서휘를 인정했다.

“이서휘, 내가 졌다.”

백류혼도 고개를 끄덕였다.

“몰라봐서 미안했다. 이 대협(大俠).”

이서휘가 두 손을 모으며 대꾸했다.

“과찬일세. 과찬이야.”

이서휘가 자꾸 개소리를 늘어놓자, 단우혁이 청룡도로 괴패마존을 가리키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자랑했다.

“어이, 거기 낭아봉은 듣거라.”

단우혁의 우렁찬 목소리에 담벼락 근처에 있던 괴패마존이 고개를 돌렸다. 단우혁이 말을 이었다.

“늙은이들 품에 숨어 있지 말고 나와 둘이서 사나이답게 붙어보자. 내가 청협문의 단우혁이다.”

단우혁이 괴패마존을 도발하자 좌우에 있던 장로들이 코웃음을 치며 나서려는 찰나에 괴패마존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청협문이라…….”

괴패마존이 바닥에 낭아봉을 한 번 찍은 다음에 순식간에 지붕에 올라섰다. 단우혁이 청룡도를 어깨에 걸친 자세로 괴패마존에게 걸어갔다.

“네 놈이 이서휘를 꺾었다고 아주 시건방진 표정을 하고 있구나.”

단우혁의 말에 이서휘와 승부를 못 가렸던 괴패마존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고?”

“귀가 먹었느냐!”

그 다음 말은 필요가 없었다. 단우혁이 청룡도를 휘두르면서 괴패마존에게 달려들었기 때문.

쩌어어어어엉!

두 사람 모두 육중한 무기를 들고 강맹함을 위주로한 공격을 펼치는지라 맞붙자마자 각자의 손목이 쩌릿쩌릿하게 울리고 있었다. 단우혁은 괴패마존의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속으로 이서휘를 욕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서휘!’

하지만 단우혁의 자존심이 어디선가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청룡도를 휘두르면서 무아지경에 빠져 들어 괴패마존의 낭아봉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이서휘가 단우혁의 과감한 선제공격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도왕 단우혁이로다.’

과연 단우혁은 괴패마존을 이길 수 있을까?

이서휘가 예상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면 단우혁이 들고 있는 청룡도의 날카로움이었다. 낭아봉만큼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대도(大刀)였기 때문에 승부를 가리는 도중에 단우혁이 낭아봉을 쪼갠다면 그야말로 접전이 이뤄질 것이라 예상했다. 이서휘는 단우혁이 훗날 도왕(刀王)이 될 사나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단우혁이 자신의 상대를 찾아 나서자, 이서휘가 악동 같은 얼굴로 쪼그려 앉아 있는 백류혼을 보며 말했다.

“류혼, 검이 바뀌었군.”

그러고 보니 백류혼은 이서휘를 상대하기 위해 조부에게 백연검(白燕劍)을 빌려온 상태였다. 백류혼이 고개를 끄덕이며 풍마존을 바라봤다.

“자네와 사흘밤낮을 겨룬 놈이라 그런지 나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이 대주, 자네만 노려보고 있구나.”

이서휘는 농담을 진담처럼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었고, 백류혼은 농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재주가 있었다. 이런 면에서는 두 사람 모두 능청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한편, 풍마존은 이서휘와 백류혼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신형을 움직여 지붕에 올라섰다. 풍마존은 애초에 이서휘를 상대할 생각이었던 것.

하지만 쪼그려 앉아 있던 백류혼이 백연검을 쥐고 다가오는 풍마존을 가로 막았다.

풍마존은 난생 처음 보는 얼굴 허연 애송이가 검신 폭이 다소 좁은 장검을 들고 막아서자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냐? 간이 부었구나.”

풍마존의 말에 백류혼이 백연검을 스릉 소리와 함께 뽑으며 이서휘와 풍마존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말을 내뱉었다.

“검왕(劍王)이란 별호를 이어받을 남자라고 해두지.”

순간 이서휘는 오글거림으로 인한 소름이 돋아서 저도 모르게 침음을 내뱉었다.

“흐음…… 백류혼, 이 상황에서 날 웃게 하다니.”

백류혼이 진지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끼더니 백연검을 휘둘러 백화만개(白花滿開)를 뿌리면서 풍마존과 맞붙기 시작했다.

☆ ☆ ☆

이서휘는 그렇게 풍마존을 백류혼에게 맡기고, 그제야 사천왕으로 추정하는 염악마제(炎惡魔帝)를 바라봤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염악마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도맹도 군림맹도 근처에 가지 않으려 했으며 심지어 마도 세력조차도 근처에 기웃하는 자가 없었다.

마침 단우혁과 백류혼은 지붕을 뛰어다니면서 마존들과 맞붙고 있던 터라 점점 이서휘 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가 지붕에 홀로 서서 염악마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백도맹과 군림맹은 분전을 하면서 버텨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곧 검림이 들이닥칠 것이라 예상해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서휘에겐 염악마제의 움직임이 가장 중요했다.

경험에 비춰봤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사천왕을 상대할 만한 고수는 이서휘밖에 없었기 때문.

이서휘가 사천왕으로 추정되는 사내를 보며 씨익 웃었다.

‘자, 이제 나도 슬슬 시작해볼까.’

이서휘는 엄청난 속도로 백야검을 뽑으면서 염악마제를 향해 검기를 날렸다.

쐐애애애앵! 타앙!

염악마제가 손을 휘둘러 어렵지 않게 검기를 튕겨내더니 그제야 이서휘를 바라봤다.

‘괴패가 말한 이서휘란 놈이로구나.’

염악마제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이더니 이서휘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참 놀랄 일이었다.

화산파의 담가막과 군림맹의 유백마저도 당장 염악마제에게 덤빌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또한, 염악마제 스스로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말 그대로 감독관이었기 때문.

백도의 무인들이 시체가 되는 광경을 감상하다가 마존들의 활약을 보고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마가 두 곳의 수장들이 왔으니 백도맹 분타 세력과 군림맹에서 온 몇 명의 떨거지쯤이야 금방 정리가 될 것이라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새파랗게 젊은 놈이 지붕 위에서 떠들다가 염악마제에게 검기를 날렸다.

염악마제가 신형을 날려 순식간에 이서휘 앞에 섰다.

“이서휘라 했느냐?”

이서휘가 무표정하게 염악마제를 바라봤다. 그러자 염악마제는 뜻밖에도 이서휘를 무시하고 자세를 돌려 전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감상하기 좋은 곳이로구나. 넌 잠시 살려줄 테니 밑으로 내려가거라.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듣자 하니 마존을 여럿 죽였다지? 한 번 보여다오. 네 실력을 말이다.”

그 말에 이서휘가 입꼬리를 올렸다.

‘전생과 이번 생애를 통틀어 이렇게 무시를 당하는 적도 처음인 것 같구나.’

이서휘가 염악마제와 함께 전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네는 사천왕(四天王)인가?”

이서휘는 동급(同級)의 존재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편한 말투를 사용했다. 그 기이한 말투에 염악마제가 팔짱을 낀 채로 대꾸했다.

“사천왕이라? 처음 듣는 얘기로군.”

염악마제가 씨익 웃었다. 이서휘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자신과 나란히 서서 말을 건네자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였다. 다소 밀리고 있던 백도의 세력은 바깥에서 등장한 검림이 밀려들자 어느새 다시 팽팽한 균형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염악마제는 복장이 다양한 무인들이 어디선가 몰려오자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몰려온 개미떼들이냐.”

“저것이 개미로 보이느냐? 어처구니없는 놈이로구나.”

이서휘는 염악마제보다 더 세밀하게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림의 서태현을 비롯한 고수들이 펼치는 무위가 상당했다. 이서휘는 잠시 도삼과 도이가 있는지 살펴봤으나 둘러봐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서휘는 전장이 다시 팽팽한 균형을 이루자 옆에 서 있는 염악마제의 신경을 건드렸다.

“교주는 무슨 생각으로 십마가(十魔家)를 계속 사지(死地)로 내모는가?”

이서휘가 일부러 힘을 줘서 말하자, 고수들의 귀에 똑똑하게 들리고 있었다. 염악마제는 이서휘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교의 교주를 친구 부르듯이 거론하자 황당한 낯빛으로 대꾸했다.

“뭐라고?”

이서휘가 추측했던 것을 되는대로 쏟아냈다.

“독마가 출신 교주답게 독이라도 처먹인 것이냐?”

그때, 쐐애애앵! 소리와 함께 염악마제의 품에서 육중한 철곤(鐵棍)이 뻗어 나왔다.

떠엉――!

이서휘가 백야검을 들어 철곤의 궤적을 막았다. 염악마제는 자신이 내뻗은 출수에 이서휘가 멀리 날아갈 것이라 예상했으나 이서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서휘의 입에서 계속 마교 교주에 대한 험담이 흘러나왔다.

“교주에게 전해라. 쥐새끼처럼 어딘가에 숨어서 계략을 꾸미는 짓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고.”

“죽음을…….”

기가 찬 염악마제의 철곤이 이서휘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왔다. 어느새 이서휘가 신형을 숨기자, 염악마제는 오른팔을 뒤로 내뻗으면서 뒤편에서 날아온 백야검을 튕겨냈다.

까앙!

“……재촉하는구나.”

염악마제가 시커먼 이를 드러내면서 말을 내뱉자, 이서휘의 검이 기이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쏟아졌다.

챙챙챙챙챙챙!

염악마제가 미칠듯한 속도로 뻗어오는 이서휘의 공격에 놀라며 철곤을 내질렀다가 후웅 소리와 함께 휘둘렀다. 이서휘가 두 눈을 부릅뜨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백야검을 내질러 철곤을 찍어 눌렀다.

염악마제의 눈이 그제야 커졌다.

그때 뚝― 소리가 들리더니 기다란 철곤이 두 개로 나뉘었다.

염악마제가 양손에 철곤을 쥐더니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전신을 뒤덮고 있던 장포를 날려 버렸다. 장포는 마기를 억누르고 있던 일종의 금제의(禁制衣)였다.

이서휘는 염악마제가 마기를 쏟아내자마자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 등줄기가 짜릿했다. 이서휘가 광인처럼 웃음을 터트리더니 제자리에서 암천세를 쏟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암천세의 충격에 우지끈 소리가 나면서 지붕 전체가 무너지고 염악마제와 이서휘가 건물 안으로 떨어지면서 철곤과 백야검을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이서휘와 염악마제가 대청으로 떨어졌다.

투두두둑―

무너진 지붕의 파편이 쏟아지면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먼지 사이로 이서휘와 염악마제의 눈빛이 번뜩이고, 검과 철곤이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이서휘는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염악마제를 향해 끊임없이 백야검을 휘둘렀다.

쿵― 쿵―

내공을 쏟아내고 있던 두 사람이 바닥을 밟자 대청 전체가 잠시 울렸다.

두 사람은 눈을 부딪치자마자 내공을 더 일으켰다. 이 순간만큼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야 할 상대다.’

한데, 두 사람의 내공은 이미 발현(發現)의 경지에 도달해 각자의 병기에서 뻗어나온 희뿌연 검사(劍絲)와 거무스름한 마기(魔氣)가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염악마제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이서휘의 턱에서 빠드득 소리가 불쑥 새어나왔다.

두 사람은 지붕 위에서 시작한 공방전을 대청에 내려서서 그대로 이어나갔다.

이서휘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으면서 자신의 철곤을 튕기자 염악마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마존(魔尊)들이 당할 만하다.’

염악마제는 마존들이 줄줄이 당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믿기지 않았다.

마가(魔家)의 힘으로 키워낸 후계자다. 무위는 제각각이었지만 동년배의 백도 무인이 이길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군림맹을 공략하다가 연이어 무너졌다는 소식에는 염악마제도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서휘가 검을 내지를 때마다 염악마제는 지난 소문을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보고서(報告書)대로 걸림돌이 맞았구나.’

그제야 염악마제는 지붕 위에서 자신에게 하대하듯이 말했던 이서휘의 말투를 납득하고 있었다.

폐부(肺腑)를 찔린 것처럼 씁쓸한 일이었다.

☆ ☆ ☆

이서휘는 자신이 염악마제를 오래 붙잡아 둘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백야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자신이 붙잡아 둘수록 전황이 유리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유백이 있으니까.

단우혁과 백류혼이 나섰으니까.

군림맹의 고수들이 목숨을 걸고 있을 테니까.

백도맹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곽서명이 선택한 검림주라는 말에 목숨을 걸고 이서휘를 도와주러 온 검림(劍林)이 분전하고 있을 테니까.

이서휘는 이 모든 의미를 가슴에 품고 가장 위험해 보이는 염악마제를 붙잡아 놓고 있었다.

‘제천왕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이서휘는 천마교의 수뇌부와 겨룰 때마다 검은 불길로 타오르는 마인을 상상했는데 염악마제의 모습을 바라보니 생각했던 모습과 흡사했다.

‘상상했던 것과 별다를 게 없구나.’

이서휘가 백야검을 그으며 염악마제가 내뻗는 철곤을 튕겨냈다. 동시에 염악마제의 몸에서 염천앙(炎天殃)이라는 불길이 전방으로 뻗어 나왔다.

화르르르― 화르르르 ― 화르르륵!

독마가의 교주를 보필하는 수뇌부 같은데 어쩐지 마공의 궤는 화마가(火魔家)와 흡사했다.

이서휘가 물러나면서 백야검으로 검막을 뱉어내고, 순식간에 쐐앵 소리와 함께 성검을 뽑아 또다시 검막을 겹쳐서 뿌렸다.

쏴아아아아아―

뿌연 검막에 염천앙이 폭포수처럼 쏟아지자 검막이 순식간에 녹았다. 이어서 염악마제가 철곤을 교차시켜 가슴 앞으로 내밀더니 한 덩어리의 마기가 되어 이서휘에게 날아왔다.

이서휘가 백야검과 성검을 교차시켰다가 암연심검의 파를 동시에 뱉어냈다. 하지만 밀고 들어온 염악마제는 검기를 흩어 버리면서 이서휘에게 돌진했다.

그 느낌이 묘했다.

마치 제천왕과 다시 싸우는 느낌이랄까.

암천세로 대응하는 것이 가장 좋았으나 문득 이서휘는 자신이 지쳤을 때 등장한 위극신이 떠올라 공력을 아낀 채로 방어에 나섰다.

콰아아아아앙―

이서휘가 쌍검을 교차해 막았다가 등으로 대청 벽을 부수면서 날아갔다.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구르던 이서휘가 일어난 곳은 좁게 이어지고 있는 복도였다.

이서휘가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은 채로 복도를 달렸다. 귀와 감각은 염악마제를 주시하고 있었다. 백도맹 분타의 무인들이 기거하는 숙소가 이어지는 장소였다. 이서휘는 술래잡기를 하듯이 도망 다니다가 저도 모르게 뜻모를 소리를 일부러 내뱉었다.

“하아아…….”

그 의도가 무척 사악했다.

이서휘가 어느 정도 부상을 당했는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부상을 가장하고 이서휘가 도망을 다니고 있었다. 설령 염악마제가 다른 뜻이 있어 물러나려고 했을 지라도 이런 유혹을 피하기는 쉽지 않을 터.

이서휘는 숙소를 빠져 나와 백도맹 분타 건물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염악마제는 이서휘를 발견하자마자 오른손에 쥔 철곤에 내공을 주입해 던졌다. 이서휘가 부상을 입어 도망가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염악마제로서는 적절한 행동이었다.

쐐애애애액―

염악마제는 동시에 개구리가 솟구치는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 이서휘의 머리를 향해 왼손으로 쥔 철곤을 내려쳤다.

“죽어라.”

이서휘는 날아오는 철곤을 아슬아슬하게 고갯짓으로 피한 다음에 신형을 돌리면서 백야검으로 염악마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섬뜩하게 성검을 내지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휘감긴 검사 때문에 쏴아아― 소리와 함께 성검이 뻗어 나갔다. 성검이 염악마제의 어깨에 닿으려는 찰나, 염악마제가 오른손을 뻗어 검신을 움켜쥐었다. 맨 손이 아니었는지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철컹―!

염악마제가 철곤과 우장으로 내공을 내보내며 씨익 웃었다.

“제법 간악(奸惡)한 면이 있구나.”

이서휘도 두 눈을 부릅뜨고 쌍검에 내공을 실어 내보내며 씨익 웃었다.

하지만 염악마제는 내공을 겨루면서 이서휘를 붙잡았다고 판단해 마교의 사왕(四王)으로 올라설 때 발판이 되었던 구혼마공(久魂魔功)을 일으켜 자신의 눈을 구혼마안(久魂魔眼)으로 대체했다.

츠츠츠츠츠―

이서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염악마제의 두 눈이 구혼마안(久魂魔眼)으로 바뀌면서 눈동자가 검은 색으로 뒤덮였다.

구혼마공(久魂魔功)은 심마(心魔)를 일으키는 대법(大法)이다. 염악마제는 구혼마안(久魂魔眼)을 사용할 때마다 짧은 시간 내에 백도 무인의 정신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불가(佛家)에서 항마승(降魔僧)을 키우게 된 계기가 되었던 마공이다. 보통 무림인이 막아 내려면 공력이 염악마제를 압도해야 할 터.

이서휘는 염악마제의 두 눈에서 범상치 않은 마기가 흘러나오자 서둘러 눈을 감았다. 하지만 두 눈을 감자 염악마제의 입에서 불경의 뜻을 곡해하는 묘한 암송(暗誦)이 흘러나왔다. 이서휘는 불경을 읽어본 적이 없었으니 그 뜻에 흔들릴 만한 지식도 없었다. 하지만 염악마제의 암송은 그 목소리와 어조 자체가 구혼마공이어서 눈을 감은 이서휘의 마음을 불편하게 뒤흔들고 있었다.

‘어쩌면 다시 눈을 뜨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서휘의 마음에 두려움이 밀려오자 이서휘는 다시 눈을 번쩍하고 떴다. 염악마제가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매진 두 눈으로 이서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어서 염악마제가 구혼음공(久魂音功)을 일으켜 이서휘와 자신의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소리를 삼켰다.

츠으으으―― 츠으으으―― 츠으으으――

염악마제는 이서휘가 버텨낼 때마다 구혼마공의 단계를 밟아나가면서 이서휘의 심력을 공격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서휘와 염악마제는 무(無)의 공간에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 내공을 겨뤘다.

염악마제는 이서휘의 내공을 버텨내면서 구혼마공으로 이서휘의 심마를 끌어올리기 위해 온갖 술수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순간, 염악마제가 구혼음공(久魂音功)을 조절했다.

바람이 빠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보이지 않는 틈새로 누군가의 비명이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쉬이이이익― 끄아아아아악!

쉬이이이익― 크악!

염악마제가 구혼음공(久魂音功)을 조절해서 발산하는 비명이었으나 이서휘의 귀에는 마치 동료들이 내지르는 비명처럼 들리고 있었다.

이서휘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면서 마음 또한 어지러워졌다.

‘누구냐? 누가 당했느냐? 도삼이냐? 도이가 당했느냐? 우혁이냐?’

이서휘의 마음이 비명에 일일이 대꾸하고 있었다. 이서휘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가자 염악마제가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비명 소리가 이서휘의 귀에 휘몰아쳤다. 이서휘의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만들어서 듣고 있었다.

‘버텨라. 내가 곧 갈 것이다.’

그때, 염악마제가 구혼음공(久魂音功)으로 소리를 만들어냈다.

“다 죽었다. 너만 남았구나.”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나만 남았느냐? 또 다시?”

염악마제는 ‘또 다시’라는 말에 속으로 갸웃하다가 구혼음공(久魂音功)으로 대꾸했다.

“그래. 또 다시…… 너만 남았구나.”

“어째서…….”

“다른 자들이 너보다 약해서 그런 것이다.”

“아아…… 안 된다.”

이서휘는 어느새 구혼마공에 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이를 악물었다.

“안 된다……. 그래서 내가 막으려 했었다. 막을 것이다.”

“실패했다. 이제 비명을 지르는 자도 남아 있지 않구나. 너와 나는 공력이 비슷해 내공을 거두지 않으면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로구나.”

이서휘가 마치 염악마제의 말을 따라 하듯이 중얼거렸다.

“―죽음뿐이로구나.”

하지만 이서휘는 말만 내뱉을 뿐 전혀 위축되지 않은 채로 공력을 쏟아내고 있었다.

염악마제가 속으로 혀를 찼다.

‘실로 독한 새끼로구나. 심마에 빠져도 이 모양이라니…….’

이서휘의 내공이 흐트러지는 순간에 염악마제는 충분히 상황을 압도할 수 있는 수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가 점점 더 공력을 끌어올리면서 항마승처럼 버텨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내공을 급속하게 고갈시키면서 실제로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있었다.

이서휘가 먼저 흐트러지면 염악마제의 마공이 이서휘를 찢어발길 기세였고…….

이서휘가 끝내 버텨내면 먼저 내공이 바닥난 자가 폭사할 일만 남은 형국이었다.

☆ ☆ ☆

도삼은 자꾸 앞서 나가는 도이를 붙잡으며 속삭였다.

“보중하라는데 자꾸 어디 가쇼. 대주 부하들이 많이 몰려가서 괜찮을 거요.”

“따라와 봐.”

“시체가 가득하네. 아직 반 시진은 더 싸울 거 같아.”

도이가 산등성이를 타고 점점 백도맹 분타 건물에 다가가면서 말했다.

“대주 얼굴이나 보고 가자.”

도이와 도삼이 백도맹 건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삼이 분전을 하고 있는 단우혁을 보며 중얼거렸다.

“난장판이네. 와…… 단 공자 보여?”

“피칠갑을 했네. 용케도 아직 도를 휘두르는구나. 저 사람은 누구지?”

도이가 풍마존과 맞붙은 백류혼을 가리키자 도삼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 둘 다 엄청나게 빠르네. 형, 역시 우리가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강호가 아닌가 보다. 아직은 말이야…….”

“대주가 안 보인다. 너 백도맹 날려버리겠다고 말하더니 진짜 지붕에도 벽력탄 하나 올려놓은 게냐?”

“아닌데?”

도이의 눈이 뻥 뚫린 지붕으로 향했다가 백도맹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도둑 형제가 산길을 밟으면서 백도맹 건물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도이가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대체 뭐냐?”

도삼도 목을 길게 내빼면서 검은 물체를 구경했다.

“뭐야 저거?”

“단검 줘봐라.”

도이가 겁도 없이 단검을 받아 들더니 검은 안개를 향해 내공을 주입해 던졌다.

쐐애앵― 툭―

단검이 무슨 부드러운 물체에 던졌던 것처럼 힘없이 튕겨 나왔다.

도둑 형제가 인상을 쓰며 앞으로 나갔다. 돌아서 가까이 다가가자 실체가 확실히 더 잘 보였다. 검은 색의 안개가 무언가를 삼킨 형국이었다.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이었다. 안개 속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도이와 도삼의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 찰 정도로 기괴한 장면이었다.

도이와 도삼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도이가 말했다.

“대주가 잡힌 거 아니야? 안 보였는데.”

도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찌할까? 대법(大法) 종류의 마공 같은데……. 단검이 튕겨 나올 정도라니 대체 누구랑 싸우는 거야.”

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라도 하자.”

“그래. 뭐라도 해야지. 근데 뭘 하지? 너무 붙어 있다.”

한참을 멍청한 표정으로 구경하던 도이가 무작정 산등성이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이가 앞서 달려 나가자 도삼이 화들짝 놀라면서 외쳤다.

“형! 막가지 말라고!”

도이가 달려 나가면서 쐐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훔친 칼을 움켜쥐고 신형을 솟구쳤다가 내려섰다. 동시에 도삼도 직도를 움켜쥐고 내려섰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무언가를 하려다가 멈췄다.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 자체를 후회하고 있었다.

벽력탄이 수백 개는 매설되어 있는 장소를 밟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실제로 구혼마공(久魂魔功)의 마기에 의해 대지가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조금씩 가라앉은 상태였다.

도둑 형제가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제기랄.”

도둑 형제의 눈에는 분명히 무언가 터질 것 같은 장면이었다. 도삼이 얼굴에 땀을 흘리기 시작하면서 말했다.

“형, 어쩌지? 심상치 않은데. 금방이라도 터질 거 같아.”

“…….”

도이가 굳은 자세로 잠시 지켜보다가 멍청한 말을 내뱉었다.

“안 터지는데?”

도삼은 대꾸하는 대신에 침을 삼켰다. 도삼처럼 두려워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무언가 결여된 것처럼 머리 한쪽이 빈 사나이였다.

도이가 말했다.

“쳐다보지 마라. 정신이 복잡해지는 거 같다. 이것은 마공이여!”

도이의 말에 도삼이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도이는 동생이 눈을 감자 말을 이었다.

“그대로 뒤로 조금만 물러나 있어라.”

“움직여도 돼?”

“우리랑 상관없는 대법이다. 대주와 저놈의 내공 때문에 폭발할 것처럼 보이는 것이야.”

“제기랄! 도대체 누구랑 싸우는 거야?”

“교주이거나 교주 부하인가보지.”

말을 하면서도 도삼은 뿜어 나오는 열기와 긴장감 때문에 얼굴이 땀으로 범벅되고 있었다.

한참을 쳐다봐도 두 사람의 내공이 박빙을 이루는지 별다른 징후가 벌어지지 않았다.

도삼이 말했다.

“지원을 부를까?”

“적도 같이 오면 곤란하다. 벽력탄 남았냐?”

“어쩌게?”

“줘 봐.”

도삼이 침을 삼키면서 봇짐에서 벽력탄을 꺼내 넘기자, 도이가 소매로 얼굴의 땀을 훔치고 바지춤에 손을 두어 번 닦은 후에 벽력탄을 받았다.

도이는 겁도 없이 염악마제의 뒤로 가서 강아지처럼 두 손을 움직여 땅을 조금 파낸 다음에 벽력탄을 내려놓고 돌돌 말려 있던 점화 끈을 풀면서 다시 돌아왔다.

도삼이 말했다.

“미쳤어? 대주도 날아간다고. 가장 큰 벽력탄이야.”

도이가 고개를 저었다.

“상황 보고 터트리자. 마기(魔氣)가 점점 옅어지고 있다. 화약 주머니 꺼내.”

도삼이 동전 주머니 같은 것을 건네자 도이가 다시 점화 끈 위에 화약을 조금씩 뿌리면서 돌아다녔다. 도이가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

“확실하게 해야지. 날려주마.”

도이가 도삼을 힐끗 보며 말했다.

“저 쪽으로 좀 물러나 있어.”

도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곳을 겁도 없이 누비면서 화약을 일렬로 길게 늘어뜨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이서휘를 바라볼 수 있는 장소로 물러났다가, 맨손과 직도를 이용해 구덩이를 만들어 그곳에 들어가 눈만 겨우 내놓고 상황을 지켜봤다.

도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만약에 대주가 당하는 형국이면 그냥 불을 붙여. 저놈이 나오면 백도맹이고 나발이고 다 죽게 생겼다.”

“대주님이 일부러 붙잡아 놓고 있었구나.”

“하여간 지가 무슨 검성인줄 아나. 기가 막히는구나.”

“내가 그 말 꼭 전한다.”

“꼭 전해라.”

두 사람은 그 말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묵묵하게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 ☆ ☆

이서휘는 염악마제가 만들어 낸 구혼음공(久魂音功) 때문에 환청을 들으면서 내공을 겨루고 있었다.

쉽게 당할 이서휘가 아니었으나 마음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염악마제가 뱉어내는 말에 불필요한 대꾸를 하느라 승부를 종결 짓지 못하고 있었다.

염악마제도 마찬가지.

구혼마공(久魂魔功)을 일으켜 이서휘를 붕괴시킬 수 있는 구혼전장(久魂戰場)을 조성하고 구혼음공(久魂音功)으로 이서휘의 마음을 흔든 다음에 심마(心魔)를 일으키는 구혼마안(久魂魔眼)으로 이서휘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때문에 염악마제의 내공 소비도 만만치 않았다.

본래 염악마제는 이서휘를 공략할 방법이 무척 많았다.

마안과 음공을 이용해 공포, 절망, 후회, 동료애를 건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서휘는 어찌된 노릇인지 환영(幻影)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전장 안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환영을 구분하는 눈빛이었다.

오직 음공으로 만들어낸 비명소리에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쉽게 무너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싸움을 이어나가는 와중이었다.

이서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명 소리에 누군가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어? 이 목소리는…….’

이서휘는 비명 소리를 무시하고 귀를 기울였다.

[대주― 내공― 지원― 교주― 벽력탄― 붙잡아―]

귀가 예민한 이서휘가 희마하게 들리는 소리를 애써 붙잡았다. 뜻이 분명하지 않았으나 그 의미를 놓칠 리가 없었다.

‘도이, 도삼이 주변에 있구나. 어찌 보이질 않지? 그리고 벽력탄이라니?’

굳어 있던 이서휘의 표정이 그제야 좀 풀어졌다.

‘마공으로 만든 전장인가?’

이서휘는 도이와 도삼 때문에 전술을 수정했다.

이대로 폭사하게 되면 염악마제와 함께 동귀어진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도이와 도삼까지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서휘가 전술을 수정하게 된 한마디가 있었다.

‘벽력탄을 쓰면 나까지 죽일 셈이냐.’

상황이 무척 아슬아슬했다.

이서휘는 상황을 살펴보다가 진전이 없자, 그의 성격대로 승부를 걸기 시작했다. 이미 환영 따위에 흔들릴 이서휘가 아니었으나 바라보는 주변이 지난 날 환마존에 당했던 ‘전장(戰場)’처럼 대법에 둘러싸인 것을 깨닫고 기묘한 행동을 시작했다.

‘전장 자체를 깨뜨려볼까?’

시간을 끌기도 애매한 상황.

‘가보자―. 다음 경지로―’

지난 날 이서휘는 검에 기를 갈무리하여 응축시키는 묘리를 깨우쳤다. 그 수법으로 염악마제가 만들어 놓은 마공전장 자체를 깨뜨려볼 생각이었다.

결과는 모른다.

그래도 해보고 싶었다.

도이와 도삼의 말소리가 한 가닥 희망이요, 변수였다.

이서휘가 암천세를 내보내는 묘리를 검에 쏟았다가 그대로 힘을 갈무리하자 검신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암송을 하던 염악마제의 어조가 순간 흔들리고 있었다.

이서휘는 내공을 끌어올려 끊임없이 쌍검에 휘감았다.

툭―

단전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나면서 고통이 밀려왔으나 이서휘는 멈추지 않았다.

쌍검에서 엷은 빛줄기가 뻗어 나오기 시작하면서 대법으로 형성된 전장을 뚫어내기 시작했다.

쏴아― 쏴아아아―

빛무리가 어느새 이서휘를 감싸더니 하얀 구체가 되어 마공전장을 밀어내고 있었다.

암흑 속에서 자리 잡은 빛 무리가 점점 커지는 형국이다.

이것을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할까.

써본 적이 없으니 이름도 없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이 한 수에 목숨과 운을 걸었으니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이서휘가 덤덤한 표정으로 속으로 읊조렸다.

‘암천세(暗天勢)의 다음 경지― 백야경(白夜景)이로다.’

이서휘의 자유분방함은 초식과 절기의 이름도 제멋대로 지었다. 그렇게 이서휘가 그 순간에 쌍검으로 갈무리했던 빛 무리를 터트리면서 백야경을 완성했다.

―――――!

정적이 잠시 흐르고.

폭발음이 구혼음공(久魂音功)을 삼키고 나서야 굉음으로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앙!

구혼마공(久魂魔功) 자체가 뒤흔들리면서 이서휘의 시야가 덮여 있던 막이 벗겨나간 것처럼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구혼전장(久魂戰場)이 깨진 것이다.

이서휘와 염악마제가 입고 있던 상의는 이미 너덜너덜하게 찢겨 나간 상태였으나 이서휘가 받쳐 입은 흑룡화린갑은 그대로였다.

도이와 도삼의 시야에 염악마제의 모습이 그제야 드러났다.

이서휘와 염악마제, 두 사람은 여전히 마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심마에서 빠져 나온 상태.

그때, 파지지지직 소리와 함께 도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서휘의 귀에 꽂혔다.

“형! 피해!”

‘형?’

이서휘가 쌍검을 회수해 물러나려고 했으나 염악마제의 내공 때문에 떨어지지가 않았다.

파지지지지직―

‘이 미친 새끼들!’

결국 염악마제의 뒤에서 벽력탄이 터졌다.

콰아아아아아앙!

그 순간에야 병기가 떨어지고 이서휘는 본능적으로 암천세를 쏟아냈다. 공격용이 아니라 벽력탄의 충격을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 충격 덕분에 이서휘의 몸이 숲 속으로 날아갔다.

도이와 도삼이 저도 모르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 한 걸까? 대주도 날아갔네.”

“대주한테 죽든지 저놈한테 죽든지 어쨌든 우린 죽을 거 같구나.”

“그래도 저놈 등에서 터졌으니 대주는 피해가 적을 거야. 근데 싸우던 놈은 어디 갔어?”

그때 도이와 도삼이 불쑥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도삼이 저도 모르게 풉 소리를 내면서 하늘을 바라봤다.

이서휘를 괴롭히던 상대가 아직까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심지어 공중에 한쪽 팔이 다른 궤적으로 치솟고 있었다.

그때, 도이가 무표정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도망가자.”

“왜?”

도삼이 불안한 눈빛으로 하늘 위를 바라보는데 정신없이 핏물을 뿌리면서 솟구치던 신형이 어느새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떨어지는 자의 두 눈에 섬뜩한 안광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어찌 벽력탄을 맞았는데 겨우 팔 하나를 내주고 멀쩡한 것일까.

도이와 도삼은 염악마제가 성검마저 붙잡았던 철투(鐵套)를 끼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염악마제는 벽력탄이 터지는 순간에 공력을 주입한 철투를 내밀어 벽력탄의 피해를 최소화했던 것.

도둑 형제는 마치 괴물을 목격한 것처럼 이서휘가 날아간 숲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도삼이 경공을 펼치며 말했다.

“가자!”

“왜 이리로 가는데!”

“대주님이 살려주겠지.”

“싸울까?”

“뛰자고!”

두 사람이 정신없이 달려가자 그리 크지 않은 나무가 두어 개 부러져 있고, 그보다 더 먼 곳에 이서휘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온 몸이 쑤시고 있었지만 극심한 내상은 겨우 피한 상태였다.

이서휘는 도둑 형제들이 달려오자 버럭 성을 냈다.

“거기서 그걸 터트리면 어떡해!”

그 말에 도둑 형제들이 대꾸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줘!”

이서휘가 열 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죽인데?”

도둑 형제들이 합창했다.

“네!”

그때 염악마제는 공중에서 혈도를 짚어 피를 멈추게 한 다음에 내려서더니, 곧장 도둑 형제들이 도망간 숲 속으로 경공을 펼쳤다.

이서휘는 염악마제가 외팔이가 되어 뛰어오자 기가 찰 노릇이었다. 도이와 도삼이 이서휘를 버려두고 멀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이가 미안한지 한마디를 남겼다.

“우린 보중하겠소!”

“대주님도 보중하십시오!”

염악마제는 도둑 형제들을 쫓으려다가 이서휘가 먼지를 털고 일어나자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허어, 대체 이놈은 정체가 무엇이냐.’

염악마제는 팔이 날아가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고 있었고, 이서휘 역시 지친 몸을 일으켜서 쌍검을 쥔 채로 염악마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염악마제는 팔이 끊어지고도 위엄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오히려 이서휘가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서면서 염악마제에게 말했다.

“끝장을 내자꾸나.”

염악마제가 처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 쥐새끼들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자네가 날 이길 수 있었을까?”

“힘들었겠지. 근데 어쩌라고? 일이 이렇게 됐는데.”

이서휘가 달려 들어서 백야검을 내질렀다. 그런데 내지르는 힘이 신통치 않았다. 백야경에 암천세, 그리고 충격을 막아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내공을 호신강기로 돌렸기 때문. 내지른 검 끝이 미세하게 떨릴 정도였다.

염악마제는 왼손으로 백야검을 후려치더니 신형을 돌려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 내가 물러나게 되다니…….’

염악마제의 발 끝에서 꽈앙! 소리가 들리더니 공중으로 두어 번 솟구치면서 백도맹 분타 쪽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이서휘가 숨을 두어 번 뱉은 다음에 기력을 짜내어 암연심검의 환을 내지르고 쫓아갔다.

쐐애애애앵!

공중에 떠 있던 염악마제가 신형을 한 바퀴 돌리더니 이서휘의 검기를 철투로 튕겨내고 백도맹 분타로 떨어졌다.

한데 백도맹 분타에는 시체가 즐비하고 마존 세력은 퇴각한 후였다. 군림맹과 백도맹의 고수들은 퇴각하는 마존 세력을 추적하고 있었다. 때문에 백도맹에 남아 있던 무인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염악마제에게 달려 들었다.

염악마제는 달려드는 무인의 머리통을 철투로 붙잡더니 마치 병기를 휘두르듯이 무인 몇 명에게 던진 다음에 담벼락에 올라섰다.

염악마제가 다가오는 이서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한 마디를 남겼다.

“이서휘, 다음 번엔 마교가 찾아가마.”

이서휘는 담장 밖으로 뛰어내리는 염악마제를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기다리마.”

이서휘는 염악마제가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자리에 주저 않았다.

“하아…… 이 도둑놈의 새끼들.”

이서휘가 도이와 도삼에게 욕을 하자 뒤편에서 도이와 도삼이 후다닥 달려와서 대답했다.

“대주님, 부르셨습니까? 저희가 도망간 줄 아셨겠지만 사실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대주, 고생했네. 시킬 일이라도?”

이서휘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다가 바닥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군림맹이 추적에 나섰나 본데 가서 좀 살펴봐라. 다른 마가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깊숙이 추적하는 건 좋지 않다 이르고.”

도이와 도삼이 포권을 취하면서 누워 있는 이서휘에게 대꾸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다녀오리다.”

이서휘는 겨우 고개를 들어서 백도맹 정문으로 나가는 도둑 형제들을 힐끗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충신들이네, 충신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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