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백도맹>
단우혁은 청협문과 함께 응천으로 이동하고 이서휘는 월야대와 함께 군림맹으로 복귀했다.
이서휘는 월야대와 함께 군림맹에 들어서자 왠지 모르게 들뜬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서휘가 군림맹을 둘러보며 말했다.
“무슨 일 있었느냐?”
도삼이 대꾸했다.
“글쎄요.”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하고 월야대로 향하는데 질풍검대 이건영이 이서휘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형님!”
“어, 건영아. 뭐야? 뭔데 그렇게 헐레벌떡이야.”
이건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아, 장 대주님이 부상을 당하셔서.”
이서휘가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뭐? 심각하게?”
“함께 가시죠. 질풍검대에 계십니다.”
이서휘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임무가 있었던가?”
이서휘의 말에 이건영이 땅바닥을 보면서 대꾸했다.
“백도맹이랑 비무를 하시다가 그만.”
이서휘가 걸음을 멈추고 되물었다.
“백도맹이 왔어?”
“네.”
“언제?”
“삼 일 정도 됐습니다.”
“하아.”
이서휘가 군림맹을 비운 사이에 백도맹의 사자가 도착한 것이다.
한데, 비무라니? 이서휘가 흑도맹에서 벌인 짓을 똑같이 했단 말인가?
이서휘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이건영에게 말했다.
“설명해.”
질풍검대로 가는 도중에 이건영의 설명이 이어졌다.
“백도맹에서 사자가 두 명 왔습니다. 절필여검(絶筆餘劍) 범천락(范天樂)과 절화여검(絶畵餘劍) 범사량이라는 사형제입니다.”
“뭘 자꾸 절단해? 절필이면 혹시 점창파냐?”
“그런 것 같습니다. 점창파의 신진 대표 고수라 하더군요.”
“거창하구나.”
점창파는 본래 혈도를 노리는 점창필법이 유명하다고 알려진 문파다. 한데 절필여검(絶筆餘劍)이라는 말을 써서 오히려 검법에 자부심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묘한 별호라 할 수 있었다.
절화여검(絶畵餘劍)도 마찬가지다. 서화 그리는 것을 끊으니, 검만 남았다 정도로 해석되는 별호였다. 이 역시 검에 대한 자부심을 섞인 별호라 이서휘는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가 장시우의 숙소 앞에서 말했다.
“형님, 서휘입니다.”
“어, 들어와.”
뜻밖에 목소리가 멀쩡했다. 이서휘가 월야대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 기다리게.”
“알겠습니다.”
이서휘가 들어가자 장시우가 침상에 누워 있었는데 왼쪽 허벅지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이서휘가 장시우의 표정을 보며 말했다.
“형님, 멀쩡하셨네. 걱정했구만.”
장시우도 씨익 웃었다.
“부끄럽구나.”
“언제 다치신 거요?”
“어제.”
“어쩌다 백도맹의 사자들과 비무를 했습니까?”
“뭐 협의가 끝나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가더구나.”
이서휘가 허벅지에 감긴 붕대를 살폈다. 피가 멈췄으나 붕대 사이로 핏자국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일부러 허벅지를 툭 치며 말했다.
“고생했소. 근데 왜 형님이 나선 거요?”
그 말에 장시우가 대꾸했다.
“부대주 두 명은 범천락에게 패했고, 독고마량 대주가 범사량에게 패했다. 백리풍이 부재중이라 내가 올라갔다.”
그 말에 이서휘는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돌아갔습니까?”
“아직이다. 오늘 중으로 아마 다른 대주나 수호팔검, 혹은 쌍각의 각주 한 명이 나서서 복수전을 치를 것 같다.”
그 말에 이서휘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안 될 말씀이지요.”
상대를 내보낼 때도 그에 어울리는 격이 있다.
사자로 왔다면 특작대다. 더군다나 점창파의 신진 고수라면 기껏해야 서른 초반일 터. 군림맹의 부대주들이 처음에 나섰다면 나이가 비슷할 것이다. 이서휘가 없는 사이에 군림맹이 크게 당한 셈이었다.
이서휘가 장시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보중하십시오.”
“붙을 셈이냐?”
“네.”
이서휘가 나가자 장시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봤다.
‘부끄럽구나.’
이서휘는 굳은 표정으로 장시우 대주의 숙소를 나와서 이건영에게 말했다.
“어쩌다 지신 거야? 정당한 비무였느냐?”
“그게 좀 애매했습니다. 장 대주님이 백도맹 무인의 부상을 염려하여 위축되신 모습이랄까요?”
“확실해?”
“제가 느끼기엔 그랬습니다.”
“알았어. 비무가 좀 거칠었나 보지. 건영아, 가서 질풍검대 무복 좀 가져와. 상의만.”
“네?”
이건영이 되묻자 이서휘가 말했다.
“빨리.”
“알겠습니다.”
연무장에서 어슬렁대던 월야대가 다가오자, 이서휘가 등에 매단 가죽띠를 벗고 웃통을 벗었다. 이서휘가 갑자기 웃통을 벗자 화지련이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안에 흑룡화린갑을 받쳐 입고 있었다. 이서휘는 가죽띠에 매달린 쌍검을 도삼에게 건네줬다.
이서휘가 고개를 돌린 화지련을 보며 피식 웃자 이건영과 강기찬이 달려왔다. 이건영이 무복을 건네자 이서휘가 질풍검대 무복을 걸치고 강기찬이 이서휘의 버릇을 아는지라 소매를 짧은 끈으로 묶었다.
옆에 있던 도삼이 말했다.
“대주님, 검은?”
“백야.”
도삼이 가죽띠에서 백야검을 빼내자, 이서휘가 백야검을 붙잡고 수호전으로 이동하면서 말했다.
“보고부터 하고 오겠다.”
그 말에 이건영이 대꾸했다.
“이미 다른 대주님들은 비무대 근처에 있습니다.”
“왜?”
“장 대주님이 다치셔서 분위기가 살벌해졌습니다. 사자들이 오길 기다리는 눈치입니다.”
“그럼 월야대와 너희는 비무대로 가 있어라. 나도 곧 가마.”
“알겠습니다.”
☆ ☆ ☆
이서휘가 수호전에서 남궁익현에게 예를 취했다.
“전주님, 복귀했습니다.”
“오, 이 대주. 어서 오게. 별일 없었나?”
“도중에 마가와 붙었습니다. 하루 잠깐 다녀오려던 게 그 때문에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사하니 다행이다.”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백도맹의 고수가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면서요?”
그 말에 남궁익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세가 등등하다. 독고마량이 패해서 독고가주의 심기가 아주 불편해 보이더군.”
“사자들은 젊은 고수들입니까?”
“한 명은 이십 후반이고 한 명은 서른 초반. 둘 다 특작대의 대주라 하더군. 점창파의 고수들이네.”
“그렇군요.”
이서휘와 남궁익현이 차를 마시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백도맹 사자가 온 것은 하남 광산(光山)에 위치한 백도맹 하남 분타에서 회동을 제안하기 위함이었다. 당면한 사안들을 만나서 처리하고 연합을 펼쳤을 때 체계 등을 논의하겠다는 것. 군림맹이 이를 수락했고 그 이후에 말이 오가다가 비무를 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이서휘는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묘한 웃음이 났다.
백도맹의 사자들이 벌인 일은 자신이 흑도맹으로 가서 했던 짓과 같았으니까.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사자라면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됐으니까. 범천락과 범사량도 백도맹의 대표로 온 이상 자신의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뜻 밖에도 절필여검 범천락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수호전에 등장했다.
“전주님, 범천락입니다.”
“들어오시게. 범사량 대주는 어디 가고 혼자 오는가?”
“범 사형은 잠시 군림맹을 구경하겠다고 돌아다니는 터라…….”
남궁익현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제멋대로구만.”
범천락은 남궁익현의 말에 슬며시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던 남궁익현이 이서휘를 바라보더니 굳이 대주라는 말을 강조하며 말했다.
“그래. 이 대주. 여기 백도맹의 사자와 인사나 나누시게.”
그 말에 범천락이 되물었다.
“대주라 하셨소이까?”
이서휘가 돌아보며 말했다.
“군림맹의 이서휘입니다.”
남궁익현이 이서휘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범 대주와 마찬가지로 특작대를 이끌고 있네.”
“아, 그렇습니까?”
그 말에 남궁익현이 씨익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이 대주가 흑도맹에 가서 연합을 성사시키고 돌아왔지.”
“아아, 흑도맹으로 갔다던 사자가 이 대주였군요. 이거 반갑소이다”
그제야 범천락이 눈을 빛내며 이서휘를 바라봤다.
‘어떻게 이렇게 새파란 애송이를 흑도맹으로 보냈지? 살아 돌아온 것이 용하군.’
“흑도맹은 어떠했소?”
범천락이 흥미를 보이면서 묻자 이서휘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생각보다 정중하게 대접을 받았습니다. 큰 어려움 없이 다녀왔습니다.”
범천락이 이서휘의 검을 힐끗 바라봤다.
‘애송이의 검이라 하기엔 너무 과한데?’
백야검이 보통 장검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특히 백도맹은 명검이나 유명한 병기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명검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신분이 높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 그래서 군림맹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병기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범천락이 이서휘의 백야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명검을 가지고 계시는군. 한 번 볼 수 있겠소?”
이서휘가 흔쾌히 수락했다.
“뭐 어렵겠습니까? 보십시오.”
이서휘가 백야검을 내밀자 범천락은 감탄한 눈빛으로 백야검을 구경했다. 마치 얻지 못할 미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범천락의 눈빛이 요동쳤다.
범천락이 검신을 뽑아 구경하면서 말했다.
“검명(劍名)이 무엇이오?”
“백야검이라 합니다.”
“백야검이라 실로 어울리는 이름이외다.”
하지만 범천락은 백야검을 보자마자 이서휘에겐 가당치 않은 검이라 생각했다.
범천락은 한참동안 백야검을 구경하다가 입맛을 다시면서 건넸다.
이서휘가 말했다.
“절필여검이라 불리신다지요?”
“친구들이 놀리느라 부른 것인데 그만 과한 별호가 되었소이다.”
범천락이 미소를 지었다.
점창파의 사형제들이 군림맹의 천룡검대주 독고마량과 질풍검대주 장시우를 꺾었으니 그 실력은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서휘는 여전히 표정이 덤덤했다.
백도맹의 고수라 내심 기대했던 이서휘다. 하지만 범천락의 태도는 크게 기대할 바가 못 되었다.
첫 째, 애초에 이서휘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눈치였다가 대주라는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표했다.
둘째, 그 관심은 백야검을 보고 나서야 더 높아지고 있었다.
즉 애초에 이서휘라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없는 자라는 이야기였다. 이서휘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백도맹의 수준이 이 정도라는 말인가?’
무공의 높고 낮음은 어차피 훗날에 뒤바뀌기 마련이다. 군림맹으로 온 사자가 이 정도 인물이라는 것에 이서휘는 실망했다. 더군다나 이서휘는 애초에 백도맹에 큰 호감이 없는 사람이다.
전생에서도 백도맹은 사사건건 군림맹과 다투느라 무림을 잘 이끌어나가지 못했으니까.
‘씁쓸하구나. 이 정도 사람에게 두 명의 대주가 패하다니. 그것도 시우 형님께서.’
이서휘는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수호전주 남궁익현에게 말했다.
“전주님,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서휘가 그냥 간다고 하자 당황한 것은 남궁익현이었다. 군림맹에서 이서휘와 비교할 수 있는 젊은 고수는 없다. 이서휘가 나서서 범천락을 꺾어주는 것이 군림맹이 자존심을 회복하기 딱 좋은 일이었다.
한데, 그냥 돌아가겠다니?
하지만 이서휘는 이미 묘한 분위기를 내뿜으면서 범천락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간다고 하자 범천락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 대주만 괜찮다면 마지막으로 비무를 하고 맹으로 돌아가고 싶소만. 어떠하오?”
오히려 범천락이 나서자 남궁익현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시겠소? 이 대주 어떤가?”
그 말에 이서휘가 속마음과는 달리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비무라 하시면 진검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까? 아님 목검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까?”
이서휘가 마음에도 없는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범천락이 웃음을 겨우 참으며 대꾸했다.
“아, 군림맹에는 목검으로 비무를 하는 그런 훈훈한 전통이 있었군. 몰랐소.”
그 말에 남궁익현이 되려 얼굴이 벌게지고 이서휘는 잠자코 있었다.
범천락이 말했다.
“뭐 저는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러자 이서휘가 범천락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실례지만 범 대주의 검을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그러자 범천락이 자신의 장검을 끌러서 이서휘에게 건넸다. 이서휘가 범천락의 장검을 쥐었다.
차앙!
검병을 쥐고 뽑자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제법 날카로운 검이다. 이서휘는 범천락의 검을 뽑아낸 다음에 왼손으로 쥐고 손가락에 내공을 주입해 장검을 튕겼다.
떠어어엉……!
어마어마한 내공이다.
범천락의 장검이 요동을 치듯이 움직였다.
남궁익현과 범천락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물론 남궁익현은 이서휘의 무공 수위가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알고 있던 수준과 판이하게 달라져서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휘가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게지?’
깜짝 놀라기는 범천락도 마찬가지였다. 이서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장검을 다시 범천락에게 건네주면서 솔직하게 말했다.
“좋은 검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삼십여 초를 겨루면 백야검에 부러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진검으로 비무를 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뭐라 하셨소?”
검에 대한 무시는 곧 검객에 대한 무시다.
더군다나 이서휘의 말에는 삼십여 초를 겨뤄도 자신을 꺾을 수 없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범천락은 이서휘를 무시하고 있다가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백야검이 아무리 뛰어난 명검이라 할지라도 범천락의 검을 삼십여 초만에 부러뜨릴 수는 없는 노릇.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범천락이 입을 굳게 다물고 이서휘를 노려봤다.
‘이 새끼가 도발하는 실력이 제법이로구나.’
범천락은 이서휘의 말을 되새길수록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범천락의 표정이 굳어지자, 이서휘가 덤덤하게 말했다.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검이 부러지면 범 형의 기분이 상하실 것이고 비무를 진행하기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서휘의 말은 검을 부러뜨리겠다는 해석도 되고, 심지어는 삼십여 초 만에 자신을 꺾을 수 있다는 말도 되었다. 범천락이 애써 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 대주께서 이제 보니 사람을 도발하는 수완이 제법이오. 이 검은 전대 점창파 장문인께서 아끼시던 애검(愛劍) 중 하나요. 쉽게 부러질 리가 없소.”
그 말에 이서휘가 도발신공(挑發神功)의 방점을 찍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더더욱 검을 아끼셔야 합니다.”
이서휘가 말을 내뱉고 입을 싹 다물었다. 남궁익현은 이서휘의 말투에 웃음을 꾹 참고 있고, 범천락이 굳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남궁익현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서휘가 이거 생각보다 사악한 면이 있구나. 범천락을 이렇게 당황하게 하다니.’
사실 이서휘는 범천락에게 예의를 다하려고 했다. 하지만 독심술에 일가견이 있는 이서휘다. 범천락이 백야검과 이서휘를 번갈아 볼 때의 눈빛을 이서휘는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받은 대로 되돌려 줄 뿐이다.’
더군다나 이런 인물이 군림맹의 대주를 꺾었다고 으스대고 있었으니 이서휘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범천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검이 부러질지 이 대주의 검이 부러질지 어찌 알겠소? 겨뤄보면 알게 될 일이오.”
그러자 이서휘가 뜻밖의 말을 불쑥 내뱉었다.
“사자들이 천룡검대주와 질풍검대주를 꺾으셨다지요?”
“그렇소.”
이서휘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대주들의 손님 접대 예의가 과했나보군요.”
결국에 범천락이 발끈했다.
“이 대주, 말 다 했소?”
“말은 다 했습니다. 그럼 비무는 여기가 아니라 바깥에 있는 비무단에서 합시다. 전주님, 다녀오겠습니다.”
이서휘는 마치 명령을 내리듯이 말을 하고 수호전 바깥으로 휙 나갔다.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이서휘의 행동이었다.
이서휘가 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가자 범천락의 인상이 싸늘하게 굳어서 이서휘를 따라 나섰다.
남궁익현이 이서휘의 뜻을 깨닫고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누군가가 대꾸했다.
“네, 전주님.”
남궁익현이 말했다.
“이서휘 대주가 백도맹의 사자들과 비무할 것이다. 구경하려는 자들은 비무대로 오라고 하도록.”
“알겠습니다.”
이서휘가 알아서 판을 짜버린 형국이었다. 남궁익현은 대주들이 패해 불편했던 심기를 날려버리고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범천락은 이서휘를 따라서 비무대로 향했다.
어느새 우르르 몰려 나온 군림맹의 고수들이 이서휘와 범천락의 뒤를 따라왔다.
그 모습이 가관이었다.
이서휘가 사람을 몰고 다니는 형국이다. 월야대는 이미 구경하기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질풍검대도 비무장으로 속속 도착했다.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이서휘 대주님이 백도맹과 겨루신답니다! 빨리 오세요!”
그때였다. 전날에 이미 범천락에게 패한 천룡검대주 독고마량과 부대주 독고극도 굳은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구름같이 몰려든 군림맹의 고수들.
이서휘는 몰려든 자들을 힐끗 바라본 후에 아무 말 없이 비무대로 올라갔다. 다른 대주들이 나서기 전에 이서휘가 상대할 생각이었다.
군림맹이 소란스럽자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있던 절화여검(絶畵餘劍) 범사량이 어디선가 등장했다. 범천락이 자신의 사형을 불렀다.
“사형! 이쪽으로 와서 비무나 구경 하시오. 그만 좀 돌아다니시고.”
“뭐? 또 누구랑 한단 말이냐?”
범사량의 말에 군림맹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범천락은 군림맹이 몰려들자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이미 범천락은 화룡검대주나 천룡검대주가 검대주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작대의 대주가 아무리 강해봤자 장강 이남의 수준이야 뻔하지.’
범천락은 여유가 넘쳤다.
설령 자신이 이서휘를 꺾은 다음에 쌍각의 각주가 나서서 패배한들, 백도맹의 위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리라 여겼다. 쌍각의 각주들이야말로 무림의 중진 고수라 할 수 있는 자들이었으니까.
이미 범천락과 범사량은 잃을 게 없는 상황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몰려든 군중 속에서 월야대와 질풍검대를 바라봤다.
도이는 히죽 웃으면서 범천락과 이서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고, 도삼은 이서휘를 바라보면서 엄지를 척 올리고 있었다.
화지련은 뭐 하나라도 배우겠다는 눈빛으로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어쩐지 정천은 표정을 굳힌 채로 백도맹의 사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몰려온 질풍검대는 이서휘를 바라볼 때마다 장시우 대주를 부상 입힌 범천락을 혼내주라는 듯이 저마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눈빛들이 무수히 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일일이 대꾸할 수 없는 노릇이라 이서휘가 월야대와 질풍검대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반면에 이서휘가 갑자기 빙긋 웃자, 범천락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범천락이 말했다.
“이 대주, 이제 슬슬 시작하세. 날도 어두워지는데…….”
범천락이 끝까지 하대를 해도 이서휘는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꾸했다.
“그러시죠. 군림맹의 이서휘, 백도맹 범천락 대주께 비무를 청합니다.”
“잘 부탁하네. 이 대주.”
범천락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장검을 뽑으며 요란하게 기수식을 펼쳤다. 이서휘도 범천락의 기수식을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백도맹은 모두 점창파처럼 요란한 기수식을 가지고 있나? 두 눈이 멀쩡하니 좋은 구경 참 많이 하는구나.’
범천락이 기수식을 마치면서 자세를 낮춘 다음, 검과 팔꿈치를 일직선으로 만들어 검봉으로 이서휘를 가리켰다.
반면에 이서휘는 본래 기수식과 같은 예법을 전혀 모르는 남자다. 낭인 출신이라 속된 말로 검을 거칠 게 배웠다. 그러다 두 눈을 잃은 후에는 장님에게 어울리는 검법을 익혔으니 정파의 기수식과는 참으로 거리가 먼 사내였다.
하지만 점창파의 요란한 기수식을 보자 묘한 경쟁심이 생긴 이서휘다.
충동적으로 이서휘는 이 자리에서 막 지어낸 기수식을 펼쳤다. 이서휘가 일부러 과한 동작을 펼치면서 백야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다가 절도 있게 우하단으로 늘어뜨리면서 검 끝에서 타앙! 하는 소리를 일부러 퉁겼다.
이서휘의 기수식을 지켜보던 도삼이 감탄사를 내질렀다.
“캬아아아……. 멋지십니다.”
그러자 도이가 빈정거렸다.
“멋지긴 개뿔이. 웬 허세야? 대주, 적당히 좀 합시다?”
“형은 대주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좀 고치라니까.”
“복숭아 주면 고치마.”
이서휘는 도둑 형제의 헛소리가 작렬하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이어서 이서휘와 범천락이 서로를 살피면서 원을 그렸다. 두 사람의 눈빛에 상대방의 자세와 보법, 검을 쥔 손모양 등이 담기고 있었다.
이서휘는 범천락이 선수를 펼치지 않자, 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조심.”
이서휘가 질풍처럼 일검을 내질렀다. 초식의 변화가 없는 우직한 검이다. 질풍검대에 뒤늦게 들어온 신입들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월야대주님이 종종 질풍지로로 시작한다더니 정말이었구나. 원래 질풍검대 부대주라 하셨지?]
이서휘는 질풍검대가 지켜보고 있었기에 일부러 군림유하검으로 시작했다. 범천락은 크게 눈여겨 볼만한 초식이 아닌 것 같아서 별생각 없이 이서휘의 검을 퉁겼다.
그때였다.
떠엉! 하는 소리와 함께 범천락의 손목에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다.
범천락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팔을 통해 심상치 않은 내공이 전해졌다.
‘겨우 일검을 교환했을 뿐인데…….’
이서휘는 무표정하게 군림유하검을 펼치면서 범천락에게 방어를 강요했다. 가끔 범천락이 변초를 섞어 방어하면 이서휘는 초식을 잊은 것처럼 범천락의 검을 따라다녔다.
이서휘는 범천락을 공격하면서 생각했다.
‘내가 힘들게 싸울수록 군림맹이 실망하게 된다.’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이서휘는 범천락을 백야검으로 가뒀다.
검으로 가둔다는 게 가능할까?
이서휘는 가능했다.
범천락의 의도를 파악하고, 궤적을 따라갔다.
보법을 펼치면서 도망가면 이서휘도 함께 움직였다.
범천락은 비무를 시작하자마자 초조해져서 이서휘의 요혈을 노리고 쾌검을 펼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살초를 쏟아내는 범천락. 이서휘가 보통 고수가 아님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서휘는 그 공격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점창파가 판관필로 요혈을 공격하는 수법이 유명하다더니 정말이었구나. 판관필로 펼치는 수법을 검으로 옮겼을 뿐이로다.’
이서휘의 눈에는 범천락이 펼치는 초식의 속임수, 변초, 허초, 진초가 모두 보이고 있어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대신에 이서휘는 범천락이 쾌검을 사용하자, 내공을 주입해 범천락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검을 내질렀다.
챙챙챙챙챙챙챙!
이서휘의 요혈로 쏟아지던 범천락의 검이 모조리 튕겨 나오더니 이내 이서휘의 반격이 범천락에게 쏟아졌다.
챙챙챙챙챙챙챙!
범천락의 표정에 당황함이 깃들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무표정하게 암행표까지 시전했다.
비무대에 이서휘가 일으킨 바람 한 줄기가 작은 회오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잉…….
검의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는데도 이서휘의 신형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트는 이서휘를 상대하기 위해 범천락도 다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범천락의 입에서 뜻 모를 기합 소리가 터졌다.
“하압!”
당황스러운 마음을 자신의 기세로 누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서휘는 범천락이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을 눈치챘다. 그 때문에 이서휘는 범천락의 가슴과 배를 노리고 연달아 삼검(三劍), 사검(四劍)을 벼락같이 쏟아냈다.
챙챙챙, 챙챙챙챙!
가까스로 막아낸 범천락의 손발이 점점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범천락은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있었다.
‘내가 겨우 막을 수 있을 정도로만 검을 내지르는 게 아닐까?’
구경하던 군림맹은 이서휘의 현란한 움직임에 감탄을 내지르고 있었다.
“우와아아…….”
검대주들도 황당하긴 마찬가지.
‘이 대주가 강한 건 알았는데 저 정도였나?’
이서휘는 범천락이 실수하는 순간에 범천락의 검을 아래에서 위로 후려쳐 하늘로 튕겼다.
타앙!
그 순간에 이서휘가 귀신처럼 솟구치더니 백야검으로 범천락의 검을 다시 내려쳤다.
타앙!
범천락의 검이 다시 자신의 손에 떨어졌다.
사람들이 외쳤다.
“뭐, 뭐야?”
범천락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장검을 받아들자 이서휘가 또다시 공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챙챙챙챙챙챙채―앵!
아! 이서휘는 그야말로 잔인한 남자였다.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남자였다.
아니다. 같은 편이라도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될 남자일 것이다.
저 잔인한 이서휘가 일부러 결정적인 공격을 펼치지 않고 있었다. 완급을 조절하면서 딱 범천락이 막을 수밖에 없는 공격만 펼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서휘를 보고 잔인하다 하겠지만 이서휘는 홀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군림맹이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기죽지 마라.
누가 감히 군림맹이 백도맹에 비해 약하다고 생각할 참인가?
이서휘에게 중요한 것은 군림맹의 사기였다.
이서휘의 눈이 번뜩이더니 백야검이 범천락의 왼쪽 뺨을 지나고, 연달아 오른쪽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범천락의 검이 뻗어오자 백야검을 하단으로 그으면서 튕겨내고, 단우혁의 버릇을 따라 하듯이 이서휘가 느닷없이 왼발로 비무대를 찍어 버렸다.
콰아아앙!
검기를 뿌리면 피도 함께 뿌릴 것 같아서 이서휘는 겨우 참았다.
이미 이서휘의 검이 양쪽 뺨을 훑고 지나갈 때 넋이 나가 있던 범천락은 발밑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굉음을 듣고 화들짝 놀라서 물러났다.
휘이이이익!
이서휘는 물러나는 범천락을 순식간에 따라 잡아 어깨를 나란히 하다가 왼팔을 내뻗어 범천락의 오른 어깨를 교묘하게 밀었다. 뒷걸음질로 물러나던 범천락이 와당탕 소리와 함께 비무대를 굴렀다.
이서휘가 바닥을 구르다가 멈춘 범천락에게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범 형, 괜찮습니까?”
“괜찮…….”
범천락은 말을 내뱉다말고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이서휘를 바라봤다. 이서휘는 땅바닥에 뒹구는 범천락의 검을 주운 다음에 범천락을 일으켰다.
이서휘가 검을 건네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범천락은 이서휘의 태도에 기가 막혔다. 아니, 가증스러웠다. 수호전에서는 실컷 도발을 하더니 지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승리했으니 됐다 이건가?
군림맹이 보고 있으니 이러는 건가?
범천락은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는 눈치. 이런 때에 범천락이 괜히 발끈하게 되면 점창파가 수모를 받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범천락이 잔뜩 열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졌소이다.”
범천락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고 비무대를 내려갔다.
이서휘는 비무대를 내려가는 범천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범천락은 패배한 경험이 적어 보였다. 점창파에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그와 비슷한 수준의 고수를 꺾으며 창창한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더군다나 장강 이남으로 넘어오자마자 군림맹의 부대주를 꺾었으니 그야말로 기고만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준이 다른 자와 맞붙었으니 범천락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이서휘가 시선을 돌려 범사량을 바라봤다.
‘올라와라.’
이서휘의 눈빛을 바라보던 절화여검(絶畵餘劍) 범사량이 장포를 펄럭이며 날아와 단상 위에 내려섰다. 범사량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누구시라고?”
이서휘가 대꾸했다.
“이서휘 대주요.”
이서휘는 범사량의 기도를 살폈다.
‘제법이네.’
범사량은 대주 두 명을 꺾었다. 범천락과 범사량의 수준 차이도 제법 크다는 말일 터.
범사량도 이서휘를 유심히 살펴보며 말했다.
“이서휘 대주, 점창파가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셔야겠소. 연달아 비무를 해도 괜찮겠소?”
이서휘가 장시우를 떠올리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좋습니다. 다치지 않는 선에서 해봅시다.”
그 말에 범사량이 손사래를 쳤다.
“허허, 다치지 않는 선? 범 사제를 이렇게 농락하신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놀랍구려.”
범사량이 이서휘의 작태를 잘 지적했다. 실력이 더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천락을 희롱한 것이라 범사량은 생각했다.
이서휘가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범 대주께서 천룡검대주와 질풍검대주를 꺾으셨다지요? 전 질풍검대 부대주 출신입니다. 농락이라니요?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이서휘는 점창파가 자신을 얕잡아 보는 수준에 딱 어울리게 행동했다.
때문에 범사량은 이서휘가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아아, 질풍검대주의 부상 때문에 화가 나신 모양이로군. 비무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노릇이오. 애들이 아니지 않소?”
이서휘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꾸했다.
“동감입니다. 비무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범사량이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이서휘를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건방진 새끼로구나. 사제를 꺾고 기고만장하다니. 어린 나이에 대주인 것을 보니 제법 강한가보지?’
이서휘는 범사량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백야검을 납검했다.
‘아, 이런 감정싸움도 참으로 의미 없구나.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상대해주마.’
이서휘는 범사량의 검법과 성격을 확인해서 장시우 대주가 왜 부상을 입었는지 알아낼 생각이었다. 승부는 그 다음이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범 대주, 가 봅시다.”
이서휘가 시원하게 말을 내뱉자 범사량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벼락같이 발검을 하면서 선공을 펼쳤다.
채앵!
이서휘는 범사량의 발검을 보자마자 백야검을 뽑아 대응한 다음에 성질을 내듯이 웃어 버렸다.
“하하! 놀랐습니다.”
이서휘는 뒤늦게 발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범사량의 검을 강맹하게 튕겨냈다. 하지만 확실히 범사량은 범천락에 비해 내공이 높았다.
범사량이 히죽 웃었다.
“거짓말 마시오.”
두 사람이 어우러지기 시작하더니 비무대 중앙에서 두 자루의 검이 불꽃을 일으키며 맞붙었다.
이서휘는 의외로 범사량이 강맹함을 위주로 한 검법을 펼치자 범천락의 경우처럼 똑같이 응대했다.
쾌검에는 쾌검으로.
강맹함에는 강맹함으로.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고집쟁이들이 만난 것처럼 비무대를 넓게 이용하지 않은 채로 초식을 주고받았다.
챙챙챙챙챙채…… 앵!
그러다 보니 보는 자들은 더욱 손에 땀을 쥘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장시우를 격파한 범사량이다. 군림맹의 무인들은 이서휘가 질풍검대의 부대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초조했다.
범사량은 이서휘가 자리에 우뚝 서서 대응하자 오히려 자신이 더 불편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서휘가 절묘하게 검을 튕겨내자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점창파의 검법을 제법 잘 아는 놈이었구나.’
저 혼자 딴 생각에 빠진 범사량이 아직 무림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검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챙챙챙챙챙챙!
범사량의 검이 이서휘의 눈을 향해 뻗어 나왔다가 갑자기 수직으로 뚝 떨어졌다.
이서휘는 침착하게 궤적을 읽어서 또다시 튕겨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서휘는 기분이 찝찝했다.
‘묘한 검법이네.’
이번에도 똑같았다. 범사량의 검이 이서휘의 가슴을 노리고 들어왔다가 비정상적인 궤적으로 바람을 가르며 떨어졌다.
한데, 궤적 곳곳에 살초를 숨기고 있었다.
채앵! 챙챙!
이서휘는 범사량의 초식을 두어 번 정도 더 확인하고 나서야 장시우 대주가 어째서 허벅지에 상처를 입었는지 간파하게 되었다.
‘아, 필체였구나.’
이서휘가 간파한 대로 범사량은 점창필법(點蒼筆法)의 묘리를 담은 필사검(筆寫劍)을 펼치고 있었다.
말 그대로 필체를 베낀 검이다.
이서휘는 범사량의 검을 튕겨내면서 범사량이 쥐고 있는 검을 살피고 이어서 검을 쥐고 있는 손 모양을 힐끗 바라봤다.
십여 초를 더 겨루자 이서휘는 범사량의 검법을 확실히 간파할 수 있었다.
일단 범사량이 쥐고 있는 장검의 길이가 짧은 편이었고, 검병에 올려놓은 엄지와 검지의 위치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파지법이 순식간에 변하고 있었다.
이서휘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저 기다란 판관필이었구나.’
범사량은 이서휘가 자신의 검법을 간파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필사검을 휘둘렀다. 범사량이 생각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는 이십 대의 청년이 필사검의 묘리를 이렇게 빨리 파악할 수는 없으리라 굳게 믿고 있었던 것.
하지만 이런 우연이 있을까?
파악하지 못했다고 하여 상대 못할 이서휘도 아니었으나 마침 일전에 석실에서 봤던 천(天) 자를 수없이 그리면서 스스로 필사검을 연마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 때문에 범사량의 궤적이 뜻하는 바를 기민하게 간파할 수 있었던 것.
이서휘는 무표정하게 범사량의 필사검을 튕겨냈다.
챙챙챙챙챙챙!
그 순간, 이서휘의 고민은 다음과 같았다.
시우 형님이 당했던 것을 돌려줄까? 아니면 범천락에게 했던 것처럼 망신을 줘야 할까.
그때 범사량이 필사검으로 연달아 세 번의 획을 그었다.
슉슉슉!
그때, 이서휘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분명히 공격 초식이었다. 하지만 세 번의 획이 완성한 글자는 계집 녀(女)였다.
이서휘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실력 차이도 모르고 미친 새끼가 희롱을 하고 자빠졌네.’
이서휘가 백야검에 내공을 주입해 후려쳤다. 범사량의 내공 수준이 제법인지라 이서휘도 후려치는 맛이 있었다.
까앙!
‘장검이…….’
까앙!
‘부러지고…….’
까앙!
‘피를 토해봐야…….’
까앙!
‘아! 군림맹에도 무시 못 할 자가 있구나 할 거야!’
범사량의 장검을 후려치던 이서휘가 근접 거리에서 암연심검의 파를 내뱉었다.
쐐애애애애앵!
화들짝 놀란 범사량이 내공을 끌어올려 이서휘의 검기를 막아내다가 밀려났다.
콰아아아앙!
이서휘가 빙긋 웃으며 따라갔다. 범사량이 서둘러 검을 치켜 들어 막았다.
채쟁! 챙챙챙! 까앙!
이서휘가 아무런 행동도 펼치지 않고 잠시 노려보자, 범사량이 제 풀에 놀라 훌쩍 뒤로 물러났다. 이서휘는 코웃음을 치며 범사량을 따라갔다.
‘유인할 생각이냐?’
순식간에 범사량과 이십여 초를 주고받던 이서휘는 범사량이 새 을(乙) 자와 비슷한 궤적을 긋자 백야검에 내공을 주입해 정확하게 튕겨냈다.
쩌엉!
범사량의 검이 반토막이 났다.
그 순간이었다.
범사량은 자신의 장검이 부러진 틈을 타서 기가 막힌 살초를 쏟아냈다. 날아가는 검신을 재빠르게 왼손으로 붙잡아 그대로 이서휘의 목을 노리고 그었던 것.
타악!
이서휘가 왼손의 검지와 엄지로 범사량이 내민 검신을 정확하게 붙잡았다.
‘이게 점창파의 비무란 말이냐?’
범사량은 이서휘가 검신을 붙잡자마자, 검신을 비틀었다. 출수가 그야말로 과격했다. 그제야 이서휘는 장시우 대주가 왜 부상을 입었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본래 이런 놈이었구나.’
범사량이 손목을 튕겨 부러진 검신을 이서휘를 향해 날려보내고 부러진 장검을 판관필처럼 쥐고 이서휘의 요혈을 노렸다.
슉슉슉슉슉…… 타앙!
이서휘는 궤적을 읽고 정확하게 범사량의 검을 날려버린 다음에 암행표를 시전해 벼락같이 다가가서 오른발을 후렸다.
퍽 소리와 함께 넘어지는 와중에도 범사량은 오른발을 이서휘에게 내질렀다.
부웅!
이서휘가 뒤로 물러나자 범사량이 자세를 잡아 쌍장을 휘두르면서 달려 들었다. 이서휘가 경고했다.
“검을 바꿔 오시오.”
이서휘의 왼손이 뻗어 나가서 범사량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무척 위험한 동작이었으나 그만하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범사량이 마치 금나수를 반격하듯이 손목을 뒤집더니 좌장을 쏟아냈다.
‘어?’
이서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감탄사를 내지르며 장력을 맞받아쳤다.
“하…….”
콰아아아앙!
범사량의 몸이 비무대를 청소하는 것처럼 바닥을 쓸면서 나뒹굴다가 피를 토했다. 이서휘가 다가가자 범사량은 이서휘가 공격을 더 펼치려는 줄 알고 화들짝 놀라면서 자세를 잡았다. 한데, 놀란 것은 이서휘도 마찬가지였다. 검성의 내공을 이어받은 이후로 생각보다 강맹한 장력이 뻗어나간 형국이었다.
이서휘가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적당히 좀 합시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던 범사량이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뭐라고?”
이서휘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비무에 어울리지 않는 살초를 여러번 구경했습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범천락이 올라와 범사량을 일으켰다.
지켜보던 자들은 어쩐지 통쾌한 기분 대신에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서휘의 설명대로 범사량이 연달아 살초를 전개했기 때문이다. 이서휘가 백야검을 거두고 두 손을 모아 별 의미도 없는 예를 취했다.
“백도맹 여러분, 또 뵙겠습니다.”
이서휘는 말과 함께 훌쩍 단상을 내려가 버렸다. 이서휘가 뒤도 보지 않고 월야대로 향하자 잠시 군림맹의 고수들이 뒤따르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이 대주, 더 혼내주지 그랬소?”
이서휘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아닙니다. 이 정도도 과했습니다. 못난 모습 보여 죄송하군요.”
“뭐 그런 말씀을 다 하시오.”
그때, 지나가던 독고마량 대주가 이서휘를 보며 말했다.
“이 대주, 고맙다. 잘 봤다.”
“네.”
독고마량의 뒤를 따르던 독고극이 말없이 이서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휘가 이건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건영아, 네가 장 대주님을 잘 감시해라. 부상이 덧나지 않게 말이다. 며칠 후에 또 훈련 감독하겠다고 돌아다니실 분이니.”
그 말에 이건영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몰려든 군림맹의 무인들을 향해 말했다.
“자, 이제 다들 돌아가십시오. 수호전 소속은 전주님께 잘 말씀 드리십시오.”
“잘 봤네. 이 대주. 내가 알아서 전해 드리겠네.”
“고생했네!”
“고생하셨습니다.”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월야대와 함께 숙소로 이동했다.
☆ ☆ ☆
잠시 후 무언가 저희끼리 이야기를 한참 나눈 월야대원들이 이서휘의 집무실에 몰려와 심각한 얼굴로 분위기를 잡았다. 이서휘가 몰려온 대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뭔데? 할 말 있어? 다들 몰려와서 왜 째려보는데?”
도삼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대주님이 강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백도맹의 고수들을 너무 손쉽게 이긴 거 아닌가요?”
정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이상하구나. 지련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화지련도 이서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정말 이상하네요. 마공이라도 익히셨나.”
책상에 발을 올려놓고 있던 이서휘가 귀찮은 얼굴로 월야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비무 잘 구경해놓고 갑자기 쳐들어와서 뭐가 자꾸 이상하다는 거야. 말을 똑바로 좀 해.”
이서휘의 말에 도이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 하고 내려치면서 말했다.
“고작 며칠 사이에! 그거 다 복숭아 때문 아니야? 혼자 쳐먹고 와서 이러기야? 저번부터 복숭아 주겠다고 말만 해놓고. 어? 복숭아를 먹으면 내공이 깊어진다는 얘기부터 했어야지!”
그 말에 이서휘와 대원들이 갑자기 배를 잡고 웃었다. 이서휘가 한참을 웃다가 말했다.
“아, 돌겠네. 다들 나가보시오. 다음에 얘기해 줄 테니.”
도이가 싸늘한 말투로 대꾸했다.
“못 나간다. 복숭아 내놔라.”
“도이야, 도삼아, 지련아, 정천 형. 내가 구화산으로 복숭아 먹으러 가자고 했어, 안 했어?”
이구동성으로 대꾸했다.
“했지.”
“거 봐. 했다니까. 말할 때 잘 좀 들어. 기회가 매번 오는 줄 알어? 마도 세력을 뚫고 가서 먹은 거라니까. 쉽게 갈 곳이 아니야.”
화지련이 대주실의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치사해서 진짜.”
도이와 도삼마저 이서휘를 째려보더니 나갔다. 정천이 씨익 웃으며 이서휘를 보며 두 손을 맞잡았다.
“이 대주, 축하하네. 더 강해졌길래 우리끼리 장난 한 번 쳐봤네. 나중에 얘기나 자세히 좀 들려주게나.”
정천의 말에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꼭 말씀드리지요.”
정천이 나가자 이서휘가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나중에 배 아파서 못 들으실 텐데.”
☆ ☆ ☆
다음날 이서휘는 수호전에서 백도맹 분타로 갈 인원 구성, 시기 등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했다가 월야대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대주님, 오셨습니까? 자, 오셨으니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주시죠.”
도삼의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뭐가?”
“뭐 공청석유(空靑石乳)라든가 대환단(大丸丹)이라든가 만년설삼(萬年雪蔘) 같은 거…… 아니면 구화산의 어느 절벽입니까? 갑시다!”
“절벽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절벽을 왜 가?”
그때 월야대의 연무장에서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이서휘가 시선을 옮겼다.
도이와 화지련이 맞붙고 있었다.
챙챙챙챙챙챙!
화지련은 이서휘가 검림에서 가져온 검붉은 색의 장검을 썼는데 스스로 간략하게 홍화검(紅花劍)이란 이름을 붙여서 사용하고 있었다. 홍화검은 검신의 폭이 넓고 가벼워 화지련이 사용하기에 적당했다. 이서휘가 일부러 검림의 검 중에서 화지련의 무위를 떠올리며 고른 것이었다.
반면에 도이는 두 자루의 비수를 쓴다. 한 자루는 이서휘가 건네준 청협비수, 한 자루는 이서휘가 검림에서 가져온 비수다. 도이는 협행과 거리가 멀었기에 두 자루의 비수를 싸잡아서 도도(盜刀)라 부르고 있었다. 이서휘가 물어보니 ‘훔친 칼’이라는 뜻이란다.
그렇게 화지련의 홍화검과 도이의 훔친 칼이 맞붙었다.
이서휘는 화지련의 무위가 못 본 사이에 크게 발전한 것을 보고 씨익 웃었다.
‘확실히 성장이 빠르구나. 하지만 아직 도이에겐 무리다.’
도이는 일전에 구화산에서 이서휘를 만났을 때부터 제법 강했다. 화지련이 제법 잘 버티고 있었으나 도이가 출수를 늦추고 있다는 게 이서휘의 눈에 보이고 있었다.
화지련은 일전에 이서휘와 겨룰 때 좋지 않은 버릇이 있었다. 파지법을 너무 자주 바꾸면서 검법을 펼쳤던 것. 이서휘가 살펴보니 아직도 버릇을 고치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에 도이의 실력은 나날이 고강해지고 있었다. 화지련과 비무를 해서라기보다는 정천에게 자주 패해 독기를 품은 상태였다.
이서휘는 돌아가는 꼴이 재미있어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화지련만 조금 더 강해지면 대원이 전부 부대주급 이상인데…….’
물론 검우 정천은 검대 대주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서휘에게 패해 빛이 바랬을 뿐. 그도 이서휘에게 패했던 것을 늘 떠올리며 절치부심(切齒腐心)의 마음가짐으로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잠시 그대로 주저앉아 비무를 구경하면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옥의림의 곁에는 진금구 선배가 있으니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나날이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화지련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강해져서 나중에 옥의림과 여중제일고수를 다퉜던 것일까? 월야대에 들어왔으니 내가 알고 있던 미래와는 달라질 터인데.’
이서휘의 생각대로였다.
본래 화지련은 전생에서 그녀의 사부가 죽은 이후로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지닌 성정에 기인하는데 화지련은 천하를 주유하면서 묘하게 실력을 키웠다.
군림맹에서도 그렇고 천하를 주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인이라는 사실이 강점으로 작용했던 것.
점점 명성이 퍼져서 화지련에게 흑심을 품었던 무림인들이 많아졌을 무렵에는 이미 화지련의 무공 수위가 일류는 넘나들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서휘는 화지련에게 새로 생긴 별호를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비무 귀신이라더니 제법이야.’
비무는 결국 이번에도 도이의 승리로 끝이 났다. 화지련은 이서휘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연무장 한쪽에 가서 무언가의 뚜껑을 열어 얇은 붓을 꺼내더니 서책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이서휘가 다가가서 말했다.
“지련아, 그거 뭐야?”
“네?”
“뭘 적고 있는 거야?”
화지련이 두 손으로 서책의 내용을 가리면서 말했다.
“비무 내용이요.”
“비무 내용?”
“왜 패했는지 적고 있어요. 상대의 특징이나 버릇도 적어 놓고.”
“와…….”
이서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런 것도 있었나?’
이서휘는 순수한 호기심 때문에 화지련을 보며 말했다.
“한 번 봐도 될까?”
이서휘의 말에 화지련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복숭아 주시면 생각해 볼게요. 그 전에는 안 됩니다.”
이서휘가 버럭 성을 냈다.
“아아아아! 그놈의 복숭아! 젠장! 한 번만 보자!”
화지련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싫은데?”
“반말하지 말고.”
“싫어요.”
이서휘가 화지련 앞에 주저앉아서 말했다.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게 도와주마.”
“도와줘도 안 돼요.”
이서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알았어. 뭐 내 말 듣는다고 네가 당장 도삼이나 도이에게 이길 수는 없겠지. 그래도 한 일 년 후면 어우러질 만할 것인데.”
그 말에 화지련이 침을 꿀꺽 삼켰다.
“대주님.”
“왜?”
“대원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시는 건 대주님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닌가요?”
“그렇지.”
“그럼 가르쳐 주셔야죠.”
“아, 그러니까 그 서책 좀 보자니까.”
“그럼 안으로 같이 가서 지금 제가 펼친 부분만 보세요.”
“알았다. 뭐라 적었는지 궁금해서 그런다.”
안채에 마련된 연무장에서 화지련이 서책을 내밀더니 이서휘가 다른 곳을 보지 않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했다. 이서휘는 한 손으로 서책을 받아서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지만 이서휘는 펼쳐있는 제목을 읽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도이(盜二) - 도둑놈처럼 싸우는 월야대원]
“푸하하하하.”
화지련이 경고했다.
“웃지 마세요.”
“알았다.”
이서휘가 웃음을 참으면서 도이에 대한 내용을 읽었다. 화지련의 말대로 도이와 겨룬 내용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패배. 양손에 비수를 쥐고 싸우며 동작이 날렵하다. 초식이 단순하지만 너무 빨라 대처하기 힘들다.]
[다시 패함. 비수의 움직임은 눈에 익었는데 이상한 보법을 전개했다. 눈으로 따라가기도 벅차 보법의 변화를 살펴볼 수 없었다.]
[다시 패함. 속임수에 당했다. 한 쪽 비수로 허초를 내지르고 반대편으로 허리를 노린 다음에 느닷없이 좌각이 뻗어 나왔다. 하지만 그 전보다 오래 겨뤘다.]
[다시 패함. 내 초식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을 골라서 도이의 비수가 날아왔다. 어쩐지 초식을 읽혔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서휘는 읽을수록 웃음기가 사라졌다. 화지련은 도이에게 패했던 순간의 감정과 실수, 대처 방식을 상세하게 적어가고 있었다. 때문에 아래로 내려갈수록 내용이 길어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눈으로 대충 살펴보니 열 번의 기록이 더 있었는데 모두 ‘패배’라 적혀 있었다.
이서휘는 거기까지 읽고 서책을 덮어서 화지련에게 건넸다.
“서책이 좀 특이하구나. 어디서 구한 거지?”
“사부님이 건네주신 거예요. 서역에서 구하신 서책이라 합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무했던 사람들의 내용이 여기에 다 적혀 있느냐?”
“네.”
“그럼 나도 있겠네?”
“네.”
화지련이 이서휘를 노려봤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으며 말했다.
“앉아서 얘기하자.”
화지련이 맞은편에 앉자 이서휘가 말했다.
“검 좀 줘봐.”
이서휘는 화지련이 건네는 검을 보며 말했다.
“홍화검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랬지?”
“네.”
“어울리네.”
“잘 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빨리도 말한다.”
“말하려고 했는데 바쁘셨잖아요.”
“그래.”
이서휘가 홍화검의 검병을 쥐면서 말했다.
“저번부터 말해주고 싶었던 건데 너는 파지법이 너무 자주 바뀐다. 그냥 너의 버릇이라 생각했는데…….”
말로 설명할 길이 없었기에 이서휘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 화지련의 검법을 흉내를 내면서 말을 이었다.
“네가 아까 도이를 공격할 때 이렇게 내뻗었어. 맞지?”
“네, 화개낙일(化開落日)이란 초식입니다.”
이서휘는 검을 아래로 떨어뜨리면서 반원을 그렸다.
“이렇게 펼치는 거 맞아?”
“맞습니다.”
“그럼 내 생각이 맞겠군. 너는 내지를 때와 반원을 그릴 때의 파지법이 달라지더군. 이게 안 좋은 버릇이야.”
“왜요?”
이서휘는 설명 대신에 화지련이 펼치는 화개낙일을 시전했다. 홍화검이 바람을 가르며 뻗어나갔다가 그 자리에서 궤적을 옮기면서 반원을 그렸다.
이서휘가 말했다.
“임의로 화개(化開)와 낙일(落日)로 동작을 나눠서 생각해보자. 화개를 강하게 내뻗을수록 낙일이라는 동작을 펼치기 어려웠을 거야. 너는 고집이 있어서 화개를 펼치는 순간에 파지법을 바꿔서 낙일을 완성했다. 하지만 본래는 내공을 주입해 펼쳐야 하는 초식이야. 넌 초식을 완성하겠다는 생각으로 편법을 쓰고 있는 거야. 나 같았으면 네 버릇을 간파하고 파지법이 변하는 순간에 네 검을 치든지 아니면 네 손을 노릴 거야. 어떻게 대처할래?”
이서휘의 말을 들은 화지련이 잠자코 있었다. 화지련이 생각에 빠져 있자 이서휘가 또 다시 말을 던졌다.
“도이가 과연 네 버릇을 모를까? 네 초식이 간파된 게 아니다. 파지법의 버릇이 나쁜 것을 도이가 알아차리고 계속 그 틈을 노린 거야. 물론 네가 파지법을 바꾸는 게 엄청나게 숙련된 동작으로 이어지면 초식도 네 것이 되었겠지. 한데 이것은 쉽게 말해 편법이다. 아직 네 내공으로는 네 사부님이 전해주신 초식을 올바르게 쓸 수 없다는 뜻이야.”
“그럼 어떻게 하죠?”
“파지법을 바꾸지 말란 얘기가 아니야. 나도 싸울 때는 수도 없이 바꾼다. 하지만 고려할 게 많아. 나보다 경험이 적은 네가 이런 식으로 검법을 다듬으면 나중에 크게 당할 날이 올 거다. 일단은 파지법을 바꾸는 버릇부터 버리고 네 사부님이 가르쳐주신 초식을 하나하나 다시 연습해라.”
다시 연습하라는 말은 무척 가혹한 말이었으나 화지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대주님.”
이서휘는 아예 화지련의 수련 방법 자체를 뜯어고칠 생각이었다.
“이제 당분간 비무는 줄여라. 검대 여기저기 다니면서 엄청나게 많이 비무했다면서?”
“네.”
“이미 네 버릇은 검대 전체에 다 퍼졌을 거야. 네가 한 번 이겼던 상대도 겨룰수록 점점 더 힘들어 질 거다.”
“네, 맞아요.”
“그 때문에 버릇을 고칠 때까지 비무를 중지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검법 수련은 오전이나 오후로 한정 지어라.”
“왜요?”
“사부님이 내공심법을 가르쳐줬을 텐데? 맹주님에게 도전하신 너희 사부님이시다.”
“네. 성미에 맞지 않아서.”
“힘드니까 성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 그럼 내가 정해주마. 오전에는 검법이고 점심 이후에는 저녁 먹을 때까지 개인 연공실에서 나오지 마라. 임무 때만 예외로 하고.”
“알겠습니다.”
이서휘의 말에 또다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화지련. 이서휘가 쳐다보자 갑자기 화지련이 길게 늘어뜨린 긴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목덜미를 드러냈다.
이서휘가 말했다.
“더워?”
“네.”
“그런 거 하지마.”
“뭘요?”
“머리 그거…… 손으로 잡고 하여간! 묶고 다니든지 해라.”
“알겠습니다.”
그때 도이와 도삼이 안채 연무장으로 어슬렁어슬렁 들어왔다. 도이가 이서휘와 화지련을 보며 말했다.
“후후후. 비기(秘奇) 전수는 잘 되었는가? 그리해서 날 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화 소저.”
이서휘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놀고 있네. 당분간 비무 금지다.”
“왜요?”
이서휘가 화지련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수련 성과는 내가 확인하겠다. 그 전에는 비무를 하지 말고 성과가 확인되면 도삼과 겨루도록.”
도삼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전 왜요?”
도삼의 말에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네가 도이보다 약하니까 너부터 꺾어야지.”
“아하!”
도삼이 직도의 날로 손바닥을 탕탕 두드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뭐 내가 약한 건 사실이니까. 복숭아라도 하나 먹었으면 내가 이런 무시를 안 당할 텐데. 그래도 아직 화 소저에게 질 생각은 없습니다.”
이서휘가 씨익 웃으면서 화지련에게 말했다.
“오후니까 연공실로 들어가라.”
화지련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서휘에게 예를 올리고 월야대의 연공실로 들어갔다.
이서휘가 도이와 도삼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 둘은…….”
이서휘가 무어라 말하려고 하자 도이가 말을 끊었다.
“대주, 너무 한 거 아니야? 왜 화지련만 특별대접인데. 강해졌으면 우리도 좀 가르쳐주고 그래야지.”
“너희 둘은 화지련과 좀 다르다. 방법을 생각해보마. 그건 그렇고 조만간 하남의 광산으로 떠날 생각인데 두 사람은 나와 함께 가자.”
도삼이 대꾸했다.
“하남은 갑자기 왜요?”
“광산에서 백도맹과 군림맹의 회동이 있을 예정이다. 우리 셋은 먼저 광산 주변과 백도맹 분타를 살펴보자꾸나.”
“백도맹 분타라면서요? 설마 마가 세력이 있겠습니까?”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마도라면 회동하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급습이라도 하겠지. 생각해 봐라. 백도맹과 군림맹이 직접 만나는 건 무척 오랜만이다. 급습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일을 꾸밀 게 분명해. 가능하면 사전에 봉쇄해야 한다. 아니더라도 살펴볼 필요성이 충분해.”
이서휘의 말대로 중대한 사안이었다. 도삼이 말했다.
“기왕 선발대로 가는 것이라면 인피면구를 쓰고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그럼 일단 준비 좀 해다오.”
“알겠습니다.”
“며칠 후에 출발할 거요?”
“곧 갈 거다. 지금 인선을 확정하는 과정이라.”
“알겠소.”
이서휘가 도이와 도삼을 바라보며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광산행은 준비를 철저히 해서 가자. 저번에 나한테 준 안개탄을 비롯해서 사용할 만한 장비는 싹 다 챙기도록.”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백도맹과 만나러 가는 여정 자체를 그 누구보다 더 경계하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없었던 사건인지라 어떤 변수가 생길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은신과 잠행에 능숙한 도둑 형제들과 떠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