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1장. 화마>
석실에서 며칠이나 흘렀을까.
이서휘는 스며드는 햇빛 때문에 눈을 떴다. 한바탕 긴 꿈을 꿨던 것처럼 석실의 모습이 낯설었다. 이서휘는 심지어 며칠이 흘렀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얼추 지난밤의 일이라 생각하며 검성을 떠올렸다.
“꿈은 아니겠지.”
이서휘도 검성처럼 시간을 잊은 눈치다. 그제야 이서휘는 검성이 남겨 놓은 글귀를 읽었다.
[인연이 닿는 자에게 검을 남긴다. 검성(劍聖)]
“인연…….”
이서휘의 눈길이 다시 멈춘 곳엔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검이지만 보는 순간 검성이 아끼던 검이었음을 깨달았다. 검집에 흐르는 도도한 기세와 검병의 고즈넉한 자태가 자신의 가치를 말해주고 있었다.
완성도라는 경지로 따지면 정점에 오른 검일 터.
이서휘가 조심히 검을 들어 검신을 드러내 보였다.
그러자 고즈넉한 분위기가 어느새 사라지고 아침 해를 품은 것처럼 충만하고 따스한 기운이 검신에서 흘러 나왔다. 이서휘가 검신을 이리저리 살펴보자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검신에 튕겨 나와 석벽으로 시원하게 뻗어 나갔다.
이서휘가 중얼거렸다.
“어르신, 검의 이름이라도 알려주시지 그랬습니까?”
그러자 어디선가 검성의 너털웃음이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이서휘다.
[이제는 그저 너의 검인 것을…….]
이서휘는 검의 이름을 생각하고 씨익 웃었다.
“어르신이 주셨으니 성검(聖劍)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사마(邪魔)를 상대하기 위해 사용할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어디선가 검성이 빙긋 웃는 것만 같다.
이서휘는 복장을 단정하게 하면서 가죽 띠를 조정해 백야검과 교차해 성검을 매달았다. 한데 그 위치가 좌 성검, 우 백야다. 일단 성검을 좌수로 사용하다가 익숙해지면 좌우의 위치를 바꿀 생각이었다.
이서휘는 일어나서 석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석실을 떠나면 언제 찾게 될지 몰랐으니까. 이서휘는 쌍검을 등에 매고 유엽비도를 손에 든 채로 어느덧 천(天) 자(字)가 그려진 방에 도착했다. 지난날, 방에 그려진 검의 궤적을 무리하게 따라 하다가 주화입마에 걸릴 뻔했던 기억이 났던 것. 한데 이서휘는 벽을 보자마자 고개를 갸웃했다.
“어?”
벽에 새겨진 무늬가 전과 달랐다.
한쪽 벽에는 사람 크기만 한 천 자가 하나 적혀 있었고, 그 반대쪽에는 처음 보는 검의 궤적이 그어져 있었다. 또한, 전에는 없던 구멍이 여섯 개나 뚫려 있다.
잠시 벽을 둘러보던 이서휘는 쉽사리 방에서 떠나지 못하고 감탄을 내질렀다. 저 궤적의 의미를 검제라 불렸던 이서휘가 모를 리 없었다. 보면 볼수록 이서휘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검성(劍聖) 어르신의 검(劍)이다.”
이서휘는 문득 손에 쥔 유엽비도가 불경스럽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유엽비도는 마가에서 만들어져 이서휘의 눈을 멀게 했던 대도(大盜)에게 주어졌던 병기다.
이서휘가 유엽비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별이다. 내 과거야…….”
이서휘는 방 한쪽에 뚫려 있는 공간으로 미련없이 유엽비도를 힘껏 날려 버렸다.
이서휘는 유엽비도가 사라지고 나서야 석벽에 그려진 필체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것은 검성이 평생에 걸쳐 사용하던 검의 궤적이었다. 검법에 대한 무공 비급을 남긴 게 아니라 벽에 궤적을 그려놓은 것이 무척 신기했다. 전생에는 눈을 잃었었기에 정도(正道)에서 약간 벗어난 검법을 구사했던 이서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서휘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검의 경지도 이런 게 아닐까 오랜 세월에 걸쳐 추측했었기 때문.
[궁극(窮極)에 이르면 초식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서휘가 닿지 못했던 영역.
이서휘가 더 나아가야 하는 지점.
벽의 궤적들은 그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새로웠다.
어디서 힘을 줬는가.
어디서 빠르게 뻗어 나갔는가.
마치 이서휘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오묘한 뜻이 담겨 있었다.
잠시 벽을 둘러보던 이서휘가 뜻밖의 말을 중얼거렸다.
“……서둘지 말자.”
그렇게……
벽에 그려진 궤적을 두고 검성(劍聖)과 검제(劍帝)의 대화가 시작됐다. 한 시대와 그 다음 시대가 벽을 매개(媒介)로 만나 검을 논하는 형국이었다.
큼지막한 천 자의 궤적을 세밀하게 살피던 이서휘는 그제야 저 천 자를 한 번에 쏟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못 따라 했던 것이로구나.”
이서휘는 검성이 그린 궤적을 먼저 눈에 담았다가 이어서 마음에 담았다. 그러다가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성검을 뽑아 구멍에 가져다 대었다.
저마다 깊이가 달랐다.
어떤 구멍은 검을 부드럽게 비틀면서 집어넣어야 했다.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여섯 개의 검흔이 뜻하는 바를 성검으로 따라 해본 이서휘.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머릿속에서 무궁무진한 생각과 상상력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굳이 여섯 개뿐이라…….”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편을 돌아봤다. 팔이 닿지 않는 곳에도 궤적이 그려져 있었다.
이서휘는 아예 자리에 주저앉아서 성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벽을 바라봤다.
이서휘의 눈앞에 마치 검성이 나타나서 벽에 검의 궤적을 그리는 것 같았다. 이서휘는 꼼짝도 하지 않고 반 시진을 바라보니 깨닫는 바가 조금 있었다. 그러다가 한 시진을 더 바라보니 먼저의 깨달음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롭구나. 검의 오의(奧義)라는 것은……. 사부님과 나는 틀리지 않았던 것이야. 다만 부족했을 뿐…….’
다시 두 시진이나 더 벽을 바라보던 이서휘가 탄성을 내질렀다.
“아…… 제가 깨달은 게 맞습니까?”
물어도 대답해주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서휘는 깨달음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벽을 더 바라봤다.
마치 성검과 문답을 하듯이 이서휘는 지친 기색도 내보이지 않으면서 검의 궤적을 눈으로 쫓았다.
벽에 그러진 궤적이 검을 쥔 자의 마음가짐이라 깨닫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잠시 후 벽을 바라보던 이서휘가 두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어르신, 이렇게 나아가려면 동작과 공수를 주고받는 횟수조차 줄여야 합니다. 아직 저의 실력이 미천하여 이렇게까지는 줄이지 못할 것인데…….”
그때, 이서휘는 잠시 생각을 달리하여 말을 쏟아냈다.
“……몸이 조급해지고 불안하면 검도 복잡해진다. 복잡해진 채로 이겨 나가면 더 나아갈 길을 잃는 것이다. 머무르게 되는 경지로 어찌 나아갈 수 있겠는가? 이기려고 움직이는 것과 검의 경지를 깨닫는 것은 별개의 일이니…….”
이서휘가 드디어 벽에 그려진 궤적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길을 안다고 하여 이서휘가 당장 강해지지는 않을 터.
검성은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나를 쫓으려면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을 것이라고. 그리고 이기기 위해 펼치는 검법의 복잡함을 고수한다면 검의 경지를 더 높은 곳으로 올려놓지 못할 것이라고…….]
이서휘에게는 검성이 가르침이 명확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검성의 말에 화답하듯이 이서휘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노력하겠습니다.”
이서휘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오묘한 경지다. 검성이 그려놓은 궤적은 나를 따라서 단계를 밟으라는 뜻이자, 그 길 자체를 닦다 보면 어느 순간 완성된 경지에 오를 것이라는 안내였다. 말이 쉽지 무척 어려운 길이다. 하지만 검성은 분명히 궤적으로 제시했다.
저 궤적만으로 검성(劍聖)과 검제(劍帝)가 대화를 나눈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서휘의 검성의 가르침을 속으로 되새기면서 물러 나왔다. 이서휘는 다시 석실 중앙으로 걸어 나와 검성이 새긴 글귀 아래 백야검을 뽑아 내공을 주입해 글을 적어 넣었다.
[인연이 닿는 자에게 검을 남긴다. 검성(劍聖)]
[인연이 닿아 검을 받았습니다. 검제(劍帝)]
이서휘는 검성의 필체보다 멋과 격이 떨어지는 자신의 필체를 보고 피식 웃었다.
‘나아질 것이다.’
이서휘는 석실의 입구까지 왔다가 뒤를 돌아서 마지막으로 석실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검성은 스스로 자신이 이끌던 시대의 막을 내리고 사라졌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이서휘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눈을 뜨면서 어딘가 있을 검성에게 말했다.
“제자 이서휘, 이제 가보겠습니다.”
이서휘는 검성에게 예를 올린 다음에 석실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갔다.
☆ ☆ ☆
이서휘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흐른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심지어 넓은 공터에는 누군가 겨뤘던 것처럼 이런저런 흔적이 발견되었다. 풀이 누워 있고 혈흔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서휘는 기관장치를 눌러 문을 닫고 조용히 산길을 내려갔다. 하지만 중턱에 이르렀을 때 이서휘의 눈에 낯익은 시체 한 구가 보였다.
구화산 밑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새외 무인이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이서휘는 일이 심상치 않다고 느껴 경공을 펼쳐 산길을 내려갔다.
구화산 밑으로 내려갈수록 피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비릿한 피 냄새가 산 밑에서 바람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던 것. 자연스럽게 인상이 굳어진 이서휘가 구화산 밑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봤다.
‘산에 오르기 전에는 야시장 같았었는데 이게 대체 무어란 말인가?’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것처럼 곳곳에 시커멓게 탄 목재와 바람에 흩날리는 재가 가득했다.
이서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무림인이건 상인이건 다 죽였단 말인가?”
이서휘가 구화산에 오르기 전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정파는 물론이고 정사지간의 무인들과 심지어 산길에서 봤던 새외 무인까지. 검성의 위명을 쫓아 뭐라도 하나 얻겠다고 온 무림인들이다. 혹은 몰려든 사람들에게 무공을 과시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을 터. 그뿐이 아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술과 안주를 팔려고 몰려든 상인들도 제법 많았다.
하지만 이 참혹한 광경을 보라.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 참혹한 풍경이 자세히 말해주고 있었다.
다 죽었다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시체가 쌓여 있다.
이서휘가 조금 더 걸어가자 심지어 곳곳에 기둥이 세워져 있고 이미 숨이 끊어진 사람들의 몸에 화살이 여기저기 박혀 있었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을 잡아다가 화살 표적으로 사용한 흔적들이었다.
이서휘는 이런 참혹함을 말로만 전해 들었었다.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다.
무림인들끼리 싸우고 죽인 것은 물론 이서휘도 많이 봤다. 하지만 언뜻 봐도 무공 한 번 익히지 않았을 법한 상인들이 칼에 맞아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니 이서휘의 마음이 착 가라앉고 있었다.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마가(魔家)…….”
이서휘는 참혹한 현장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으로 돌아다녔다. 이서휘가 이곳에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했을 터.
적의 수장을 이서휘가 먼저 죽였을 수도 있었다. 수가 많았다면 이서휘가 산으로 끌어들여서 접전을 펼쳤을 터. 그 사이에 구화산 밑에 있었던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구나.”
하지만 마가가 도착한 시간이 이서휘와 어긋나서 불운한 결과를 낳았다.
이서휘 홀로 이 많은 시체를 다 묻어줄 수도 없는 노릇.
그래도 무림인들이 섞여 있어서 저항이 제법 거셌던 것으로 보였다. 마가의 무인들도 군데군데 뒤섞여 죽어 있었다. 이서휘는 마가의 무인들로 보이는 자들의 복장과 병기를 세심하게 살폈다.
그때, 이서휘는 죽어있는 무인의 밑에 활이 하나 깔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독특한 활이군.”
마가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붉은빛을 띄는 장궁(長弓)이다. 활을 내려다보던 이서휘가 주변을 둘러봤다.
“흔히 볼 수 없는 활인데 이런 것을 두고 가다니…….”
이서휘는 말발굽이 잔뜩 찍혀 있는 곳을 바라보다 휑한 대로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가 잠시 군림맹으로 복귀하는 길목을 바라보던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당장 군림맹으로 돌아가겠다던 마음이 싹 사라진 상태.
이서휘가 마가가 이동한 경로로 보이는 휑한 대로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이서휘는 대로변을 잠시 천천히 걷는 와중에 검성으로부터 이어 받은 내공이 꿈틀대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때, 이서휘가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갑니다.”
이서휘가 달렸다. 오로지 속도에만 집중한 경공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서휘의 발에서 먼지가 잔뜩 피어올라 길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멈추지 않고 달리면서 두 눈은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구화산을 살육의 현장으로 바꿔 놓은 적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길 바라고 있었다.
달리는 이서휘는 먹잇감을 추적하는 한 마리 야수였다.
어지럽게 눌려 있는 말발굽의 자국과 희미하게 이어지는 피 냄새를 추적했다.
홀로 상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하지만 이서휘는 무모하게 달려 나갔다. 이서휘의 이성이 발걸음을 돌리라고 경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서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참혹하게 죽은 시신들을 봤기 때문이다.
무엇에 홀린 것일까.
분노와 뒤섞인 미안함?
거기엔 자만심도 뒤섞여 있었다.
검성의 내공을 이어 받았다.
이서휘는 검제 때의 무위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한바탕 마도 세력을 휘저어 놓을 생각이었다.
위험하다는 판단이 서면 즉각 도망칠 생각이었다.
‘빌어먹을 새끼들아…… 어디 있느냐?’
기둥에 걸려있던 시신들의 모습이 이서휘의 머리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마치 귀신들이 이서휘의 등을 미는 것처럼 이서휘의 달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복수해주마.”
잠시 후 드디어 적의 후미(後尾)가 보였다.
그 수는 대략 스무 명.
몇 명은 등에 붉은 활을 매고 있었다.
‘찾았다.’
하나, 이들이 전부는 아닐 터. 이서휘가 고개를 들어 보니 군데군데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열(戰列)이 어디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그 수가 제법 많아 보였다.
이서휘는 경공을 펼치는 도중에 불쑥 솟구쳐서 말 위로 날아갔다. 이서휘가 좌장을 내밀어 말 위의 무인을 날려버리고, 그대로 말에 올라타서 좌우를 무시하고 달려 나갔다.
두드드드드.
퍽 소리 때문에 달리던 자들이 일제히 이서휘를 돌아봤다.
이서휘의 눈이 싸늘하게 주변을 살폈다. 후미를 맡고 있던 조무래기들이라 상대할 마음도 나지 않았다. 이서휘는 입을 굳게 다물고 그대로 말에 박차를 가해 앞으로 나갔다.
그때, 이서휘에게 화살이 쏟아졌다.
하지만 활시위 튕기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이서휘가 불쑥 솟구쳐서 무인 한 명을 장력으로 날려 버리고 말을 바꿔 탔다.
동시에 이서휘가 백야검을 뽑으면서 뒤로 그었다.
쐐애애애앵!
섬뜩한 소리가 뒤편에서 이어지면서 무언가가 투두둑 소리가 들리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이서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어느새 말이 헐떡이자 이서휘는 말 등을 밟고 전방으로 솟구쳤다가 그대로 경공을 펼쳐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잠시 후 이번에는 사오십 명으로 보이는 마가의 무인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게 보였다. 적의 수장이 있으면 다 죽일 것이고 없다면 이번에도 지나칠 생각이었다.
이서휘는 아예 경공을 펼치면서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휘이이이이이익!
이서휘가 쫓는 자들은 화마가의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무인 한 명이 질풍처럼 따라오자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도 하지 못할 정도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이서휘가 백야검을 휘둘러 적들에게 피아(彼我)를 구분해줬다.
쐐애애애애앵!
이서휘가 좌에서 우로 그은 암연심검의 파가 전방에 쏟아졌다. 막는 자, 그대로 절명하는 자, 말 위에서 뛰어내리는 자들까지 가지각색의 반응이 일어났다. 그보다 더 놀란 말들이 등에 있는 무인들을 떨궈내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수가 많았으나 대부분 말을 타고 있어서 그런지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이서휘의 두 눈이 적진을 살폈다.
그때, 말 위에서 떨어진 누군가가 뿔피리를 길게 불었다.
부우우우우우!
이서휘는 뿔피리를 부는 자를 힐끗 쳐다본 다음에 죽이지도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러다 보니 살아남은 무리가 한데 뭉쳐 이서휘를 거꾸로 쫓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추적자들을 꼬리처럼 단 채로 질풍처럼 튀어 나갔다.
‘수가 많다. 우두머리만 죽인다. 이 정도 군세(郡勢)를 이끄는 자라면 마가의 장로가 있거나 십존의 일원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서휘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서휘가 계속 나아가는 도중에 대로변을 달리던 마가의 움직임이 뿔피리 소리에 회군하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달려 나가던 말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원을 그리면서 다시 이서휘에게 돌아오고 있었던 것.
뒤편에서 이서휘가 죽이지 않고 보냈던 자들이 합세해 일자 대형으로 이서휘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화마가의 수장들도 말머리를 돌린 상태. 뿔피리는 함부로 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
이서휘는 잠시 서서 먼지를 일으키면서 자신을 포위하기 시작한 적들을 바라보다가 대로변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서휘를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
동시에 이서휘도 검막을 펼치면서 백야검을 허공에 그었다.
투두두두두두둑― 투두둑― 투두두두둑―
이서휘가 또 다시 백야검으로 등 뒤에 검막을 만들자마자, 전방을 향해 암연심검의 파를 뿌렸다.
불어난 내공이 오롯이 주입된 검기였다.
기세가 맹렬하다.
촤아아아아악! 소리와 함께 물길이 갈라지듯 마인들이 상하로 나뉘었다. 비명도 함께 터졌다. 하지만 여러 명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마가는 이서휘에게 정체를 묻지 않았다.
백야검을 들고 마도를 베기 시작한 이서휘도 아무 말이 없었다.
미친 세력과 미친 남자가 만난 형국이랄까.
화살과 암기가 쏟아지고 일부는 말에서 내려 저마다 병기를 붙잡고 이서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서휘와 화마가가 맞붙었다.
마침 해가 지평선에 걸려 불그스름한 빛을 내뱉고 있었다.
이서휘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마가의 무인들을 베어 나가기 시작했다.
챙챙챙챙챙챙챙챙! 쏴아아악!
이서휘를 향해 동시에 십여 개의 병기가 일제히 쏟아졌다. 이서휘는 멀리 나가지 않고 검 하나를 밟고 움직이면서 상대방의 어깨를 넘어갔다가 백야검을 좌우로 그으면서 전진했다.
넓은 평야에 푸악! 까앙! 스스슥! 하며 병기 부딪치는 쇳소리가 합주를 이뤘다.
마가의 무인들을 베던 이서휘는 문득 사부가 떠올랐다. 사부도 이서휘처럼 문득 길에서 만난 마도 세력을 끊임없이 베었다는 얘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죽이고 또 죽이다 보니 나 자신을 잊을 정도였다.]
이서휘가 지금 그런 상황이었다.
구화산의 참상을 목격한 여파였다.
수가 너무 많은지라 이서휘의 행색도 피를 뒤집어 쓴 귀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더 죽여야 한다라는 생각과 이쯤 했으면 그만두자 라는 생각이 엉키는 순간, 뿔피리 소리와 함께 더 많은 적이 대로변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선두에 붉은 장포를 입은 사내가 좌측에 장로 한 명을 거느리고 이서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서휘가 비릿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존이로구나.”
이서휘가 적들을 죽이면서 그제야 한 마디를 내뱉었던 것. 마치 반갑다는 말투였다. 이서휘는 서너 명을 그 자리에서 베고 왼손으로 무인 한 명을 붙잡아 뒤로 던지며 내뱉었다.
“비켜라.”
비킬 리가 없었다. 이서휘는 전방을 향해 암연심검의 환을 내질러 투두두두둑 소리와 함께 길을 터버렸다. 동시에 좌우의 무인들을 밟아 나가면서 솟구쳐 공중제비를 돈 다음에 달려오는 마존을 향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이서휘가 죽여야 할 자가 두 명으로 좁혀졌다. 다른 자들은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마존과 그 마존을 수행하는 장로 한 명.
처음 보는 놈들이다.
두 명 모두 붉은 빛이 감도는 옷을 입고 있었다. 이서휘는 이 자들의 정체를 몰랐다.
단지 구화산에서 저지른 살육의 주범이 이놈들이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우연이 있을까.
이 자들은 이서휘의 전생에 검우 정천을 협공해 죽인 화마존(火魔尊) 세력이었다.
하지만 정천은 이서휘와 인연을 맺게 되어 군림맹에 머무르고 있었고, 이서휘는 구화산의 참상을 목격하고 뒤쫓다가 검우 정천이 당했던 순간과 흡사하게 화마존 세력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즉 정천이 겪었어야 할 악운(惡運)이 이서휘에게 찾아온 셈이었다.
화마존은 벽천회에 가입한 방파 몇 군데를 쓸어버리던 중 구화산으로 가라는 지령을 받아 구화산 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어서 벽천회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회군하던 참이었다. 한데, 적이 나타났다는 뿔피리 소리에 최전방에서 말머리를 돌려 왔던 것.
그런데 적이 단 한 명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화마존은 적이 한 명인 것을 보고 말을 멈춘 다음에 장로를 내보냈다.
“현 노야, 적이 한 명입니다.”
“내가 다녀오리다.”
화마가의 현고(玄考) 장로가 박도를 내밀면서 이서휘에게 달려 들었다.
까앙!
장로가 나서자 이서휘에게 달려들던 마가의 무인들이 방진으로 포위한 채로 히죽 웃으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잠시 화마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현고 장로와 이서휘가 맞붙었다.
이 자들은 현고 장로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참견하는 것을 싫어한다. 화마존마저도 나서지 않을 정도.
겨우 이십 대로 보이는 이서휘다.
화마가의 우사자인 현고 장로가 질 것이라는 상상은 아무도 하지 않고 있었다. 화마가 세력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서휘가 무표정하게 마가 장로의 박도를 튕겨냈다.
챙챙챙챙챙챙챙!
이서휘로서도 중대한 순간이다. 오히려 마존들보다 마존을 수행하는 장로들의 무위가 더 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 때문에 방심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장로를 죽인 다음에는 마존과 이서휘를 둘러싼 마가의 무인들이 동시에 공격을 펼칠 터.
그렇게 이서휘와 화마가의 현고 장로가 맞붙어서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 ☆ ☆
이서휘가 마가의 장로와 맞붙는 순간에 멀리 떨어져서 마가의 움직임을 살피던 벽천회의 무인이 있었다.
벽천회는 물론이고 절강제일(浙江第一)의 경공술을 익혔다고 알려진 강이건(姜怡乾)이라는 고수였다. 사장신보(沙場迅步)라는 경공술의 창시자로 절강에서는 그가 속한 벽천회만큼이나 유명한 무인이다.
강이건은 벽천회의 형제들을 마가가 이동하는 경로에 매복시켜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데 마가가 매복에 걸려 들기 전에 갑자기 회군을 했다. 깜짝 놀란 강이건이 나서서 질풍처럼 마가를 뒤쫓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
한데 그 모습이 실로 괴이했다.
한 청년이 마가의 노인과 맞붙고 있고, 그 둘레를 마가가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강이건의 뒤를 따라서 벽천회의 무인들이 뒤늦게 다가와 말했다.
“대체 왜 멈춘 겁니까?”
“잠시만 지켜보자.”
강이건을 따라온 무인들도 홀로 마가와 겨루고 있는 이서휘를 바라보며 헉 소리를 내뱉었다.
“뭐야? 저 새끼는. 강 대주님, 한 명입니다. 곧 죽을 테니 돌아가서 매복 작전을 그대로 펼칩시다.”
하지만 강이건은 대꾸를 않고 침묵했다. 강이건의 눈에는 정체 모를 청년의 무공 실력이 마가의 장로에 비해 약하지 않아 보였다.
“강 대주님, 여기 계속 있으면 들킨다니까요.”
그때, 강이건이 무언가 결심한 듯 말했다.
“매복하는 형제들 다 데려와. 저 청년, 강하다.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미쳤어요? 개활지(開豁地)에서 싸우면 우리도 피해가 많아요. 바위 준비하느라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그 말에 강이건이 부대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말하면 좀 쳐들어. 이 새끼야, 빨리 안 가?”
강이건이 인상을 긋자 수하들이 부대주를 끌어당겼다. 어차피 강이건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든 따르는 게 가장 속편했다.
그때 강이건이 묘한 말을 중얼거렸다.
“자성이만 오면 어떻게든 다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강이건이 다시 뒤를 돌아보자 수하들은 어느새 경공을 펼쳐 다 사라진 상태였다. 강이건이 말한 자성이란 사내가 바로 훗날 벽천회를 이끄는 남자이자 사패의 일원인 극제(戟帝) 소자성이었다. 그 소자성이 근처에 있다는 말이었다.
☆ ☆ ☆
사실 이서휘 홀로 마가에 둘러싸여 장로를 상대하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구화산 밑에서 벌어진 살육의 현장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무모한 일도 벌이지 않았을 터. 더군다나 검성으로부터 받은 내공 덕분에 이서휘의 마음 한 구석에 자만심이 깃들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수장을 죽이는 데 실패하더라도 몸을 내뺄 자신감이 있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이서휘는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주변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챙챙챙챙챙챙!
이서휘는 장로의 박도를 튕겨내면서 눈과 귀는 여전히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때문에 공수가 완벽한 상태가 아니었다. 분명히 기습을 가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이서휘는 암행표로 신경을 빠르게 움직이면서 장로를 상대했다.
화마가의 현고(玄考) 장로는 강자였다. 이서휘가 검성의 내공을 받지 못했더라면 이곳에서 참혹한 일을 겪었을 터. 장로를 죽인 다음이 문제였다. 그때, 화마존은 새파랗게 젊은 놈이 현고 장로와 겨루면서도 뒤처짐이 없자 고개를 갸웃하며 불청객의 정체를 추측했다.
‘뭐야? 이서휘라는 놈이란 말인가?’
이서휘는 마가 장로의 공수를 모두 파악했다. 남은 자들이 많았기에 적절하게 힘을 숨긴 상황. 또한, 등에 매단 성검을 아직 뽑지 않은 상태. 불의의 일격으로 승부를 짓고 화마존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예상 외로 이서휘와 현고 장로의 격전이 길어지자 현고 장로의 제자들이 화마존의 뒤에서 입을 열었다.
“마존, 개입할까요?”
그 말에 화마존이 씨익 웃으면서 현고 장로의 제자들을 돌아봤다.
“내가 가겠다.”
그때였다.
이서휘는 화마존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백야검으로 박도를 튕겨내고 소리 없이 성검을 뽑아들어 수직으로 그었다. 한데 그 속도가 백야검을 휘두를 때와 똑같았다. 현고 장로가 이서휘가 뽑아든 좌검을 바라보고 무리 없이 막겠다고 판단해 박도를 치켜 올렸다.
그 순간에 이서휘는 성검에 검사를 휘감아 박도를 두 동강 내고 동시에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백야검으로 길게 암연심검의 파를 뿌렸다.
콰아아아아앙!
부러진 박도로 겨우 막아선 장로가 날아가자, 이서휘가 훌쩍 솟아서 순식간에 화마존에게 달려들었다.
화마존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화마존이 장포를 휘날리며 양손으로 소마현화기(燒魔現火氣)를 생성해 이서휘에게 뿌렸다.
화르르르르륵!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이서휘가 백야검으로 쳐내자 굉음이 발생했다. 이서휘는 화마존이 양손에 생성한 불덩이를 보자마자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어쩐지 일전에 사류곡에서 천마에게 당했던 마공이 떠올랐기 때문. 그때도 천마가 일으킨 불덩이에 휩싸였던 이서휘다.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긴장한 상태로 마존을 향해 암천세를 전방에 쏟아냈다.
쏴아아아아아!
화마존이 화들짝 놀라면서 양손을 교차해 염화구(炎火球)라는 비기를 생성해 전방에 터트렸다. 붉은빛과 검은 마기가 교차된 원형의 구체가 암천세와 부딪치면서 굉음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그 충격에 주변에 머물고 있던 마인들의 육신이 사방팔방으로 찢겨 날아갔다.
동시에 화마존마저 충격에 튀어나가고, 이서휘는 백야검과 성검으로 검무를 펼치듯이 쌍검을 휘갈기면서 진형을 흐트러놨다.
쏴아아아아! 푸악! 푸악! 푸욱! 푹푹푹!
이서휘는 적들을 베는 도중에 좌수의 움직임이 다소 불편한 것을 느끼고 다시 성검을 납검한 후에 백야검을 들어 어느새 다가온 마가 장로와 다시 맞붙었다. 마가 장로는 어느새 수하에게 다른 박도를 넘겨받아 이서휘를 공격하고 있었다.
채앵! 챙챙챙챙!
굉음과 함께 날아갔던 화마존 역시 양손에 소마현화기(燒魔現火氣)를 일으켜 이서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대일의 접전이 벌어졌다.
이서휘는 장로와 마존의 공격을 정상적으로 받아낼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암행표에 힘을 실어 모습을 감췄다가 불쑥 장로의 뒤에 나타나서 백야검을 그었다.
쫘아아악!
이서휘의 백야검에 장로가 입고 있던 장포가 길게 찢어지면서 현고 장로의 등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동시에 마존의 장력이 날아오자 이서휘가 좌장으로 응수했다.
콰아아앙!
화마존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밀려나고, 동시에 부상을 당한 현고 장로가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이서휘를 향해 흑빛 마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꽈광!
이서휘는 전방에 검막을 뿌리자마자 백야검을 전방으로 내미는 자세로 암행표를 시전해 화마존의 허리를 베면서 이동했다.
츠츠츠츠츠!
맨손인줄 알았던 화마존이 무언가로 이서휘의 검을 튕겨내자 챙챙챙챙 소리가 울렸다.
순간 쌔앵! 하는 소리와 함께 화마존의 손등 위로 맹수의 손톱과도 같은 비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상한 무기라 이서휘의 미간이 좁혀졌다.
화마존이 양손을 좌우로 내뻗더니 화르르륵 하는 불길이 비수를 감싸고, 동시에 이서휘가 달려 들어서 화마존과 맞붙었다.
그때, 한 떼의 군마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벽천회였다.
두드드드드드드!
동시에 길이가 짧은 투창 같은 것이 허공에 날아 마가의 무인들을 노리고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푸욱, 푸욱, 까앙! 푸욱, 푸욱!
수십 개의 매우 짧은 투창이 마인들의 몸통을 뚫고 지나갔다. 절강에서 왜인들을 상대하면서 세를 불린 벽천회인지라 그 공격 방식이 군대를 방불케하는 면이 있었다.
이서휘는 아군이 왔음을 깨닫고 그대로 수직으로 솟구쳐 암연심검의 파를 가로로 뿌렸다, 그와 동시에 이서휘는 성검을 뽑으면서 수직으로 검기를 뿌렸다. 결국, 십자 모양의 검기가 이서휘의 발밑에 쏟아졌다.
굉음과 먼지가 피어오르고.
핏물과 몸통이 솟구쳤다.
이서휘를 도와주기 위해 달려들고 있던 벽천회의 무인들이 이서휘의 무위에 저마다 경악을 금치 못했을 정도. 그 사이에 이서휘는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고, 이서휘를 노리는 화마존과 장로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기회라고 판단했던 것.
그때 벽천회의 강이건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자신의 일행에서 빠져나와 검 한 자루를 들고 화마가의 장로에게 달려들었다. 강이건의 일검에 솟구치던 장로가 차마 무시하지 못하고 강이건의 검을 후려쳤다.
까아아앙! 챙챙챙!
이윽고 화마가의 장로와 강이건이 맞붙고.
공중에 솟구친 화마존이 두 개의 불줄기를 이서휘를 향해 내뿜었다.
촤아아아아아!
이서휘는 떨어지는 와중에 먼저 성검을 허공에 그어 두터운 검막을 뿌렸다. 동시에 백야검을 등 뒤로 당겼다가 암연심검의 환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그 순간에 석실 벽에서 봤던 것처럼 손목을 비틀었다.
쐐애애앵!
이서휘가 뿌린 검기가 자신의 검막을 뚫고 나가 화마존에게 쏟아졌다.
실로 미친 자의 공격이라고 할 수 있는 판단.
반면에 화마존이 쏘아 올린 불줄기는 면적이 넓어 검막에 튕겨나가며 기세를 잃었다. 그와 동시에 검막과 불길을 뚫고 나간 이서휘의 검기가 화마존의 어깨를 관통했다.
푸악!
“크윽.”
이서휘의 신형이 그대로 떨어지면서 화마존을 수직으로 그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판단한 화마존이 자신의 피해를 감수하고 양손을 맞잡으면서 염라박화(閻羅烞火)를 생성시켰다.
쏴아아아…….
화마존이 그 순간에 발휘한 기지도 빛을 발했다.
양손으로 생성한 거대한 염라박화를 터트리면서 화마존이 신형을 비틀었다.
화들짝 놀란 이서휘가 백야검과 성검을 교차해 내공을 주입해 거대한 화염 구체를 막아냈다.
굉음이 터졌다.
콰아아아아아앙!
화마존은 폭발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그 반동을 몸으로 받아내면서 몸을 비틀었던 궤적으로 날아갔다.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 공중에서 피를 뿌리면서 땅에 착지한 화마존이 이를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물었다가 달려오는 벽천회 무인의 머리통을 붙잡아 한쪽으로 집어 던졌다.
화마존은 이서휘의 방향을 확인하면서 반대편으로 경공을 펼쳐 달리면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황당했다.
지금까지 마가 세력을 대동한 마존이 대놓고 도망을 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화마존은 약하지도 않았다. 검성의 내공을 받아서 겨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제법 어우러진 마존이다.
하지만 화마존은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자마자 평야 지대에서 험난한 산으로 도망치면서 자신의 독특한 무공으로 평야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
마침 바람도 거셌다.
투두두두둑! 소리와 함께 화마존은 자신의 수하들도 신경 쓰지 않은 채로 불길을 만들어내더니 스스로 불 속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화마존은 불길을 거닐면서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날뛰는 꼴을 보니 저 녀석이 이서휘가 맞는 것 같구나. 듣던 이야기보다 더 강해졌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지?”
화마존이 전장에서 이탈하자 현고 장로를 돕고 있던 제자들을 제외하고 화마존의 사제들과 화마가의 무인들이 벽천회를 뚫어내며 화마존의 곁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수는 화마가가 많았다.
이들은 화마존이 왜 불을 질렀는지 알았기 때문에 퇴각으로 판단하고 불길을 피해 악착같이 화마존을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고 장로는 벽천회의 고수들에게 붙잡혀 몸을 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이서휘는 불길을 뚫고 화마존을 쫓으려다가 막아서는 마가의 무인들을 수십 명 베었을 때 화마존을 시야에서 놓쳐 버렸다. 이서휘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막아서는 무인을 벤 다음에 벽천회와 맞붙고 있는 마가의 장로와 그의 제자들을 바라봤다.
장로는 어떤 중년인과 불꽃을 튀기며 겨루고 있었다. 저렇게 싸우다간 언제 승부가 날지 몰라서 이서휘는 결례를 무릅쓰고 전장에 훌쩍 뛰어들었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그 말에 일검을 강하게 내려친 강이건이 자연스럽게 빠지고 이서휘가 돌진했다. 그 사이에 벽천회가 남아 있는 마가 장로의 제자들을 척살하고 장로를 포위했다. 이서휘가 포위당했을 때와 완전히 뒤바뀐 형국이었다.
☆ ☆ ☆
화마존은 들판에 잔뜩 불을 지른 다음에 깊은 산 속으로 이동하면서 어깨를 치료했다. 수하들이 몰려와 가루약을 뿌리고 지혈을 하는 동안에 누군가가 화마존에게 물었다.
“현고 장로님이…….”
화마존은 말을 내뱉은 자를 향해 오른손을 들어 염화구(炎火球)를 던졌다. 화르르륵 소리와 비명이 끔찍하게 뒤섞이자 화마존이 싸늘하게 말했다.
“땅에 묻어라.”
동시에 검과 도가 떨어져 염화구에 휩싸인 무인을 가르고 화마존의 말대로 구덩이에 묻기 시작했다.
화마존은 산등성이에서 이서휘가 있을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주삼.”
“네, 사형.”
“스승님에게 병력을 모두 이끌고 검마에게 오시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주아는 다친 자를 데리고 본거지로 돌아가라. 나는 검마(劍魔)와 합류해 이서휘를 잡아 죽여야 분이 풀리겠다.”
화마존의 말에 또 누군가가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화마존은 혀를 날름거리다가 카악 소리와 함께 핏물을 땅바닥에 뱉어 냈다.
“내가 검마를 먼저 찾아가게 될 줄이야. 이 빌어먹을 이서휘 새끼.”
☆ ☆ ☆
이서휘는 결국 거세게 저항하는 현고 장로의 오른팔을 날려 버렸다. 그 순간에 벽에 새겨놓았던 검성의 궤적을 따라해본 이서휘다.
실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장로가 내민 박도의 궤적을 읽고, 실로 아슬아슬하게 검을 교차시켜 공격을 적중시켰다. 동시에 벽천회 무인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뭐야? 저 검법은?’
이서휘도 자칫 잘못했으면 현고 장로의 박도에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었던 상황. 이서휘마저도 등줄기가 서늘해 그 다음 공격은 검기를 날려 현고 장로의 목을 날렸다.
쐐애애앵! 터엉, 텅텅텅!
높게 솟구쳤던 현고 장로의 목이 땅바닥에 구르자 이서휘는 쌍검에 묻은 피를 바닥에 뿌리고 납검한 다음에 그제야 자신을 도와준 무림인들을 돌아봤다.
“군림맹의 이서휘라 합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허어, 군림맹이셨소?”
이서휘를 지원하자고 결정한 강이건이 나서서 자신들을 소개했다.
“벽천회의 강이건이라 하오. 여기는 내 형제들이오.”
이서휘가 형제들이라는 말에 씨익 웃었다.
‘벽천회였구나.’
벽천회는 형제들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나저나 이서휘는 몰골이 흉악했다. 대체 언제부터 싸웠던 것일까. 의복 곳곳이 찢겨 있고 얼굴과 의복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강이건은 이서휘의 처절한 모습에 침을 삼키며 말했다.
“조금 더 가면 형제들이 모여 있으니 가서 좀 쉬셔야겠소. 군림맹이 여기까진 어인 일로 오신 게요?”
그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우연히 구화산에 들렸다가 그곳 사람들이 몰살된 것을 보고 적을 뒤쫓다가 그만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자자, 이야기는 가서 합시다. 다친 곳은 없소?”
이서휘가 한 손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이리저리 닦아내며 말했다.
“딱히 없습니다.”
“허어…… 이거 우리 소 대주도 그대만은 못할 것 같소만.”
“소 대주요?”
그때 이서휘와 벽천회가 이동을 하는데 멀리 한 남자가 대로변에 길쭉한 병기를 꼬나쥐고 서 있었다.
벌써 날이 어두워진 터라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발밑에 거뭇한 형체가 보였다. 사방팔방으로 도망치던 마도의 무리를 베고 있었던 것.
이서휘와 벽천회가 다가가 보니 남자의 주변에 마가의 무인들이 여럿 죽어 있었다.
강이건이 남자를 알아보고 반갑게 말을 건넸다.
“자성(孜成)아 늦었구나.”
“강 형,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 피칠갑을 한 분은 누구십니까?”
이서휘는 창을 꼬나쥔 자의 말에 저도 모르게 히죽 웃어 버렸다.
‘만났구나. 극제 소자성…….’
드디어 이서휘가 마지막 남은 사패의 일원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서휘는 창을 쥐고 있는 소자성을 향해 자신을 소개했다.
“군림맹의 이서휘라 합니다.”
그러자 소자성이 이서휘에게 뚜벅뚜벅 다가오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벽천회의 소자성(蘇孜成)이라고 합니다.”
이서휘는 그제야 자신과 함께 싸우던 소자성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단우혁에게 벽천회 좀 끌어들이라고 부탁했었는데 구화산의 일 덕분에 이서휘가 직접 만나게 된 셈이었다. 이서휘의 무공이 부족해 마가에 둘러싸인 채로 죽음을 맞이했더라면 벽천회의 만남도 없었을 터. 이서휘가 소자성을 웃음을 지으며 바라봤다.
그러자 소자성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왜 자꾸 웃으십니까? 혹시 저를 본 적이 있으신지요?”
“아, 아닙니다. 벽천회 형제분들을 언제 한 번 꼭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도움을 받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다들 어디에 머무르고 계시는지요? 군림맹의 이 아무개가 오늘 거하게 한 잔 술을 사겠습니다.”
이서휘의 말에 벽천회의 무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 ☆ ☆
이서휘와 벽천회가 만났다.
객잔으로 가서 거하게 대접하겠다는 이서휘의 말에 벽천회가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더니 이서휘를 벽천회에 소속된 적계방(績溪幇)이란 곳으로 데려갔다.
이서휘는 전생에 극제 소자성으로부터 벽천회의 기질을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형제들을 대하는 기분으로 벽천회를 대했다.
벽천회는 이서휘가 군림맹의 대주라고 하자 궁금한 게 많았는지 질문을 쏟아냈다.
마교는 어떤 자들입니까?
본거지는 파악이 되었습니까?
군림맹과 백도맹은 본래 무림맹이라 불리지 않았습니까?
거기다가 이서휘에 대한 질문까지 더해지자 이서휘는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줬다.
‘잘 됐다. 소자성도 있으니 벽천회와 확실히 연을 맺어 놓아야겠다.’
문답이 끝날 때쯤에 이서휘가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벽천회, 여러분들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이 아무개가 오늘 큰 신세를 졌습니다.”
“별말씀을. 이 대주의 무공이 대단하여 우리가 오히려 견문을 넓혔소.”
“한데 어찌 절강에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습격을 당했다는 벽천회 소속의 문파가 늘어나고 있소. 절강이 아니라 더 남쪽에서 올라온 왜구들이 아닐까 하고 여기 소 형제와 멀리 나와본 것이오. 와서 보니 왜구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소문으로만 듣던 마교의 움직임을 발견하고 매복을 준비중이었소.”
이서휘는 소자성을 보고 씨익 웃었다.
‘그랬군.’
“한데, 요새도 그렇게 왜인들이 많이 넘어옵니까?”
강이건이 대꾸했다.
“곡식이 여물 때 몰려오는 편이오. 이 자들은 할 일이 없어진 군대나 다름이 없소이다. 적게는 백 척, 많게는 오백 척까지 몰려오다 보니 절강의 문파들은 이들 때문에 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외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마교가 중원을 장악한 시점에 소자성이 벽천회를 이끌고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었지.’
소자성은 이서휘 또래였기에 왜인들에 대한 경험이 적었다. 그 때문에 왜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강이건이 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벽천회와 중원 무림과 왜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다가 전생에서 소자성의 부탁을 떠올리고 본론을 꺼냈다.
“삼도왜구(三島倭寇)가 가장 문제라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오, 이 대주가 왜구에 대해 아셨구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림맹에도 절강 출신이 제법 있지요. 중원 무림에서 마도 세력을 축출하게 되면 부족하나마 제가 동료들과 힘을 보태어 일기(壹岐), 대마(對馬), 송포(松浦)를 치는 데 힘을 더하겠습니다.”
일기, 대마, 송포라는 삼도(三島)에서 많은 왜인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 절강을 약탈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뜻밖에도 왜인에 대해 자세히 알자 벽천회의 무인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늘 왜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절강 이외의 무림인들에게 도움을 받지 못했던 벽천회다.
물론 이서휘는 전생에서 소자성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을 뿐이었다.
강이건이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이 대주가 벽천회를 도와준다면 이 대주 역시 우리의 형제나 다름이 없소. 자네들, 아니 그런가?”
강이건이 벽천회를 돌아보자 벽천회의 무인들이 저마다 술잔을 들었다.
“이 대주! 술 한 잔 받으시오!”
이서휘가 잔을 받아 들며 흡족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은혜는 제가 입었습니다. 벽천회에서 허락해주시면 앞으로 여러분들을 형제라 생각하겠습니다. 저와 연을 맺고 있는 자들은 벽천회를 만날 때마다 저를 떠올릴 것입니다.”
군림맹, 검림, 청협문까지. 이서휘의 동료는 많다. 벽천회는 이서휘가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으나 그저 형제가 한 명 생겼다는 기쁨에 웃음을 터트렸다.
“좋소. 화끈해. 마음에 들어.”
이서휘가 말했다.
“군림맹의 이 아무개가 말만 번지르르 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은 차차 보여드리겠습니다.”
실제로 이서휘는 훗날 소자성을 도와 삼도왜구를 섬멸할 생각이었다. 벽천회가 이서휘의 호언장담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한데, 소자성은 다른 의미에서 이서휘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이미 강이건으로부터 이서휘가 엄청난 고수라는 얘기를 들은 터. 소자성 역시 절강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에 묘한 경쟁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도 소자성의 성격을 아는지라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소자성과 겨룰 필요가 없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소 대주, 한 잔 합시다.”
이서휘의 말에 소자성이 자신의 잔을 들고 빙긋 웃어 보였다.
☆ ☆ ☆
담심호(淡深湖)에 자리잡은 검마의 은신처. 적계방과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그 은신처에 화마존이 등장해 검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검마는 뜰에 마련한 침상에 누워 있었다.
팔배게를 하고 누워서 화마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비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검마존(劍魔尊).
마교 교주에 의해 가장 먼저 십존(十尊)에 임명됐으나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마존이었다. 더군다나 존(尊)이라는 거창한 칭호도 이 사내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화마존이 드넓은 장원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여기 틀어박혀서 뭐하는 것이냐?”
화마존의 말에 검마는 대꾸를 않고 허리를 돌리더니 망우초를 한 모금 빨아서 하늘 위로 뿌연 연기를 뿜었다.
검마는 체격이 마른 사내였다.
피부색은 까무잡잡했고, 길게 찢어진 두 눈에 담긴 안광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시종일관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양팔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마공과 관련된 문신이 가득했고, 배와 가슴이 훤이 드러나는 가죽 옷을 하나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검마(劍魔)라면서 주변에 검 한 자루 보이지 않았다.
검마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지.”
검마는 말을 하다가 그제야 화마존의 어깨를 힐끗 바라봤다. 관통상을 입었는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검마가 화마존을 보며 씨익 웃었다.
“화아(火兒)야, 누구한테 당했느냐?”
“이서휘라고 들어봤나? 이 근처에 와있다. 벽천회와 함께.”
“벽천회는 알지만 이서휘는 금시초문이구나.”
“전령도 안 오나, 여기는?”
“오는데 내가 관심이 없어서.”
검마가 고개를 슬쩍 돌려서 누군가에게 말했다.
“이서휘에 대한 정보.”
“알겠습니다.”
화마존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체 여기서 그럼 뭐하고 있는 건데?”
화마존의 말에 검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검마의 입에서 마교의 지령이 쏟아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교주가 한 명으로 압축될 때까지 경쟁자를 죽이든 발밑에 두든 너희 마음대로 해보라고 하셨지 않나?”
“그랬지.”
그 말에 검마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기다리는 중이다.”
“미친 새끼. 일 년이 걸릴 지, 십 년이 걸릴 지 어찌 알고?”
검마는 화마존에게 욕을 들어도 표정 한번 바뀌지 않은 채로 말했다.
“어차피 누가 남을지 뻔히 보이는구나.”
검마의 말에 화마존은 표정을 굳혔다.
“네가 움직이지 않아도 다 죽을 것이라는 말이냐?”
검마는 대꾸를 않고 흑의인이 가져온 서류 묶음을 훑어보며 말했다.
“이서휘라는 놈의 정보에 번뇌, 묵연, 환아, 음마의 죽음까지 거론되어 있구나.”
“이제 좀 흥미가 생기나?”
검마가 말했다.
“멋진 새끼, 친구로 삼아야겠군.”
화마존이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너랑 할 일이 없을 것 같구나.”
화마존이 나가려고 하자 검마가 피식 웃었다.
“……가라고 허락한 적 없다.”
“뭐 이 새끼야?”
화마존이 인상을 그으며 돌아보자 검마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발끈하기는……. 가 봐라. 클클. 아, 화아야.”
“말해라.”
“이서휘는 무슨 병기를 쓰던가.”
검마에게 등을 돌린 화마존은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검(劍).”
그 말에 검마가 똑같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검(劍).”
검마는 화마존이 나가자 망우초의 불을 붙일 때 이용하던 등잔불에 이서휘와 관련된 서류를 갖다댔다.
불이 붙었다.
검마는 불이 붙은 서류를 아무렇게나 던진 다음에 망우초의 연기를 자욱하게 내뿜으면서 말했다.
“이서휘, 어디 있는지 보고해라. 세 시진 주마.”
“알겠습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대꾸하자 검마는 그대로 몸을 옆으로 비틀어 눈을 감으면서 중얼거렸다.
“세 시진 후에 깨워라.”
대화의 법칙이라도 있는 듯 그 말에는 아무도 대꾸하는 자가 없었다. 대신에 검마가 머무르는 장원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고 있었다.
☆ ☆ ☆
이서휘는 벽천회와 늦은 밤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전생에는 소자성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지만 이번 생애에는 소자성을 따라서 삼도왜구를 소탕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서휘뿐만 아니라 검림과 월야대를 이끌고 지원을 갈 생각이었기 때문.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이서휘는 벽천회에게 중원 진출을 고려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소한 강이건과 소자성만이라도 데려가고 싶었으나 첫 만남에 모든 걸 얻어낼 수 없는 노릇. 훗날 청협문의 단우혁도 벽천회와 접촉할 테니 상황을 봐서 처리할 일이었다.
어느새 고요해진 적계방.
이서휘는 잠이 오지 않아 홀로 밤바람을 맞으러 나와 상념에 잠겼다.
묘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마교와 엮일대로 엮인 느낌이다.
이제 이서휘가 마교를 찾지 않아도 알아서 마교가 이서휘를 찾아올 것만 같은 느낌. 그 때문에 벽천회와 머무르면서도 이서휘는 쉬이 잠이 들지 않았다.
‘지금부터 내가 가는 곳마다 파란(波瀾)이 일어나겠구나. 대낮의 그놈을 잡았어야 했는데.’
“이 대주, 안 주무시오?”
이서휘가 고개를 돌려보니 소자성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잠이 오지 않소. 얼마 전에 늘어지게 잤더니.”
“얼마나 주무셨길래.”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모르겠소. 돌이켜보니 며칠은 잔 듯하오.”
소자성이 고개를 갸웃하자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소 대주는 창을 쓴다 들었소. 한 번 구경할 수 있겠소?”
“창을 보시겠다는 말이오? 아님 소 아무개의 실력을 보시겠단 말이오?”
“창을 보리다.”
소자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 쪽에서 자신의 창을 들고 나왔다. 이서휘가 소자성의 창을 받아들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평범한 창이었다. 이서휘가 알고 있는 소자성의 창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창을 쓰다가 언월도로 바꾸고 다시 이서휘와 다닐 때는 정(井) 자 형으로 되어 있는 극(戟)을 사용했다.
이서휘는 창을 보자마자 소자성의 수준을 알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들이 훗날 사패라 불릴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이서휘가 창을 돌려주며 말했다.
“잘 봤소.”
소자성이 웃으며 말했다.
“이 대주, 한 번 겨뤄봅시다. 강 형의 말에 의하면 엄청난 고수라 들었소.”
이서휘가 소자성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다음에 합시다.”
극제의 또 다른 별호는 불패신극(不敗神戟)이었다. 이서휘가 살펴보니 평범한 창을 가지고 나온데다가 이제 겨우 이십 대다. 소자성은 다른 자들과 달리 대기만성형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절강에서 수많은 실전 경험이 그를 더 성장하게 할 터.
각종 기연을 얻은 이서휘가 지금 소자성을 꺾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이서휘는 소자성이 전생의 별호를 유지하길 바랐다. 백검문의 백류혼은 워낙 건방진 면이 있어서 이서휘가 응징을 했지만, 소자성에겐 패배감을 안겨주기 싫었다.
이서휘가 거부하자 소자성은 크게 실망한 눈치였다.
하지만 이서휘는 마음을 돌리지 않고 그날은 조용히 벽천회에 머물렀다.
이서휘는 다음날 아침에 벽천회와 작별을 하고 군림맹을 향해 길을 나섰다. 밤새 검림세력일람을 살펴봤으나 딱히 찾아갈 곳이 없었다. 한데, 벽천회에서 내준 말을 타고 길을 가는데 기분이 묘했다.
‘벽천회가 배웅해준다고 할 때 승낙할 걸 그랬나?’
아무도 없는 길을 보거나 가끔씩 뒤를 돌아볼 때마다 싸늘한 분위기가 주변에 감돌았다.
그때, 이서휘는 어디선가 고오(高傲)하게 이어지는 검명(劍鳴)을 들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말에서 내려 귀를 기울였다. 또 다시 기이한 소리가 들린다. 이서휘는 기가 차서 한 마디를 내뱉었다.
“환장하겠군.”
심상치 않은 검명(劍鳴)이다.
귀신의 곡성(哭聲)처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서휘의 마음이 황당함으로 물든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어쩐지 저 검명이 노골적으로 이서휘를 부르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 이서휘는 모든 것을 잊은 채로 검명을 따라 숲길로 들어갔다.
‘누구냐, 날 부르는 검(劍)은…….’
☆ ☆ ☆
이 소름 끼치는 곡성(哭聲)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서휘의 예상처럼 검명(劍鳴)이 맞을까?
이서휘는 어째서 이 기이한 울림을 검명이라 판단하고 숲길을 걷는 것일까.
만약 적이 파놓은 함정이라면 어쩌려고 하는 것일까?
이러한 이성적인 판단은 이서휘의 머리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이서휘는 무심하게 검의 부름에 응답하듯이 걸음을 옮겼다.
빽빽한 숲길을 지나자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넓은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한 남자가 이서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마(劍魔)였다.
그것도 홀로.
검마의 검은 검집째로 바닥에 꽂혀 있었는데, 검명의 정체는 검과 검마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대화를 나누는 소리 같구나.’
검마는 이서휘가 도착해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마가(魔家)의 누구냐?”
검마가 자신의 검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서휘는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마검(魔劍)……? 검마존(劍魔尊)이로구나.”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이서휘가 검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팔에 휘감겨 있는 문신.
바닥에 꽂아 놓은 검의 길이와 무늬.
이서휘는 걸음을 옮기며 주변에 다른 자가 없는지 살폈다가 다시 시선을 검마에게 옮겼다.
검마도 자신의 검에서 시선을 떼고 이서휘를 천천히 훑어보고 있었다.
등에 매달아 놓은 쌍검.
허리춤에 달린 철선.
균형 잡힌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
검마 자신만큼이나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백야검을 뽑자 은은하게 이어지던 검명이 그제야 멈췄다.
마치 검마의 검이 이서휘를 바라보느라 말을 멈춘 것 같은 분위기.
검마가 그제야 한마디를 내뱉었다.
“잘 왔다.”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마의 몸이 서서히 어둡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검마의 몸이 변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 이서휘는 곽서명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는 검마련주(劍魔聯主)에게 패한 자들이네.]
이서휘는 검마가 검을 잡을 때까지 공터를 이리저리 거닐었다.
검마의 두 눈과 표정을 보는 순간 이서휘는 묘한 예감이 들었다.
‘수도자(修道者)로구나…….’
그때, 검마가 일어나 바닥에 꽂힌 자신의 검을 뽑았다.
스릉…….
마도와 백도가 만났으나, 이 순간만큼은 예의(禮儀)가 오롯했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는 찰나…….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동시에 검을 들고 맞붙었다.
마치 서로의 검을 단 한 번에 부러뜨릴 수 있다는 듯이 강맹한 일검을 동시에 쏟아냈다.
콰아아앙!
검이 맞붙자 기질(氣質)이 전해졌다.
이어서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삼십여 초를 주고받았다.
챙챙챙챙챙! 까앙!
이서휘의 백야검보다 검마의 검이 더 무거웠다.
이서휘는 마치 철곤(鐵棍)을 때리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내공과 검법을 가늠하고 잠시 물러났다.
이어지는 공격은 검마의 몫이었다.
검마의 공격은 과감했다.
이서휘의 눈에는 허점이 있었지만, 그 허점을 상쇄할 만큼 공격이 매서웠다.
그 때문에 이서휘는 섣불리 검을 내지르지 않고 잠시 방어에 치중했다.
챙챙챙챙챙!
검마는 이서휘의 내공에 감탄했다.
‘강하구나.’
이어서 이서휘의 신중함에 감탄하고, 더 겨루었을 때는 이서휘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기를 주입했다.
촤라라라라락.
검마의 검에 이서휘가 사용하는 검사(劍絲)처럼 잿빛의 실타래가 휘감겼다.
이서휘도 표정의 변화도 없이 백야검에 검사(劍絲)를 휘감았다.
두 검이 다시 맞붙자 굉음이 발생했다.
콰아아아앙!
검마가 밀려나고, 이서휘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서휘는 서서히 몸이 달아오르면서 동작이 빨라지고 있었다.
채앵! 챙챙챙챙챙!
구화산 석실에서 봤던 가르침을 시험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에 그 오의만 마음에 담은 채로 이서휘는 편하게 검을 휘둘렀다.
챙챙챙챙챙― 까앙!
두 사람은 의외로 눈을 자주 마주쳤다.
이미 두 사람의 경지는 보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검이 나갔기 때문에 눈을 마주친 상태에서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내공은 확실히 이서휘가 더 우위에 있었다.
이서휘가 백야검을 쥐고 강맹하게 내려치기 시작하자 검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장검을 두 손으로 잡아 막아내기 시작했다.
이서휘의 눈이 커졌다.
‘양손으로 검을 쥐다니…….’
검마의 검은 일반적인 장검보다 검병의 길이가 훨씬 길었다. 검마는 양손으로 검을 쥐고 신형을 회전시키면서 이서휘의 검을 튕겨냈다.
채앵! 챙챙챙챙!
검마는 심지어 양손으로 검을 쥐고 다가왔다가, 이서휘의 검을 후려친 다음에 한 손으로 검을 쥐고 초식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이내 튕겨 나가는 자신의 검을 왼손으로 붙잡아 이서휘의 복부를 그으면서 초식을 전개했다.
검의 변화가 중원무림의 검법과는 무척 다른 방식으로 전개됐다.
이서휘가 검마의 움직임에서 느낀 감정은 단 하나.
‘어찌 이렇게 자유롭지?’
검마 역시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에 오른 자였다. 궤적에 한계를 두지 않는 움직임이랄까.
이서휘가 입을 다물고 내공을 실어 상대방의 검을 후려쳤다.
떠엉……!
검마는 이서휘의 검을 정확하게 막았다가 뒤로 물러나면서 허공을 그었다.
츠읏……!
검신처럼 얇은 검은 색의 검기가 이서휘에게 쏟아졌다.
이서휘는 검막을 먼저 뿌리고 이어서 백야검을 하단에서 상단으로 올려쳤다.
쩌적! 파앙……!
검마의 검기가 이서휘의 검막을 가르고 쇄도하자, 이서휘가 내공을 주입한 검으로 어렵지 않게 튕겨냈다.
검마가 검을 늘어뜨린 채로 공터를 거닐며 생각했다.
‘혼자 오길 잘했군.’
반면에 이서휘는 검마가 거니는 반대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겼다.
‘숨긴 게 더 있을 텐데…….’
검마의 움직임은 수비라는 게 대체로 없었다. 공격을 펼치다가 자신의 몸에 허점이 생기면 즉시 다른 공격을 펼쳤다. 한데, 평생을 그렇게 싸웠는지 공격의 연계가 자연스러웠다. 이서휘는 검마의 동작에서 빈틈을 발견해도 파고들 마음이 선뜻 들지 않고 있었다.
마치 이서휘를 유인하는 움직임이랄까?
그 때문에 이서휘는 적당히 공격하면서 검마가 다음 수를 꺼내놓길 바라고 있었다.
‘너보다 내가 남긴 수가 더 많을 것이다.’
이서휘는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 갑자기 모습을 감추고, 검마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백야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검마가 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검마는 떨어지는 백야검을 자신의 왼쪽 어깨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신의 검을 이서휘의 가슴으로 내밀었다.
꽈앙……!
이서휘의 백야검이 검마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검신이 박히지 않았다.
동시에 검마가 이서휘의 가슴을 향해 검을 내지른 형국.
느닷없이 발생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서휘는 방법이 없어 검마의 검을 왼손의 검지와 엄지로 붙잡고 백야검에 내공을 주입했다.
푸욱……!
검마의 검이 이서휘의 내공에 속도가 줄어들었다가, 그대로 이서휘의 가슴을 찔러서 날려버렸다.
이서휘의 신형이 뒤로 한참을 날아갔다. 땅에 착지하는 순간에 이서휘가 암행표로 신형을 움직인 탓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검마의 검은 이서휘의 가슴을 찔렀다. 다만 흑룡화린갑에 막혔을 뿐이다.
이서휘는 날아가는 도중에 몸을 비틀어 검기를 쏟아내고 땅에 내려섰다.
이서휘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판단한 검마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다가 이서휘의 검기를 맞고 날아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무공에 동시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서휘는 분명히 백야검으로 검마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하지만 금속성의 소리가 퍼진 이후에 살가죽만 겨우 베었을 뿐이다.
황당한 것은 검마도 마찬가지.
검마가 먼지를 털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용린갑이라도 입었느나?”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 놈은 정녕 도검불침(刀劍不侵)인 게냐?”
두 사람이 동시에 신형을 움직여 다시 맞붙었다.
순식간에 삼십여 초를 겨루면서 이서휘의 백야검이 검마를 네 차례 베었다.
까앙! 까앙! 까앙! 쓰윽――
그때마다 검마의 묵직한 검이 이서휘의 급소로 날아들었다.
화들짝 놀란 이서휘가 신형을 비틀자, 검마의 검이 이서휘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균형을 잃은 이서휘의 몸에 검마의 좌장이 쏟아졌다. 이서휘는 그 찰나에 백야검을 당겨 내공을 주입했다.
콰아아아앙!
이서휘의 몸이 공터 한 쪽으로 날아가다가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이서휘의 발이 먼저 땅에 내려섰다.
검림의 곽서명이 말한 검마련주는 도검불침(刀劍不侵)의 상태라 했었다.
‘……정말 검마련주의 후예였구나.’
이서휘는 도검불침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베고자 하면 벨 것이다.’
내공은 이서휘가 우위에 있었지만 검마의 공격이 생사를 도외시(度外視)한 움직임이라 이서휘가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순간에 더 위험한 반격에 들어왔다.
그래서 싸움이 길어지는 것일 뿐.
이서휘는 방법을 찾는 남자였다.
검마는 이서휘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벼락같이 달려들면서 검기를 쏟아냈다.
쐐애애애앵!
검기를 뿌리고 경공을 시전하는 검마.
이서휘도 동시에 암연심검의 파를 내뱉고, 검마의 이동 궤적을 찾아 검을 휘두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등 뒤에서 성검을 뽑았다.
꽈아아아앙!
이서휘의 성검이 검마의 검과 맞붙어 내공을 겨루고, 백야검은 검마의 팔에 막혀 있었다. 촤아악 소리가 나면서 검마의 옷이 찢겨나가자 거무스름한 피부에 박혀 있는 문신들이 희끄무레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검마가 발끝을 비트는 순간…….
이서휘가 성검을 밀어내고 쌍검을 휘두르면서 검마를 무자비하게 갈라놓았다.
푸앗, 핏, 푸욱, 푸욱!
검마는 이서휘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면서 양손으로 쥔 검을 마치 기둥을 뽑아 휘두르듯이 후려쳤다.
그 기세에 이서휘가 깜짝 놀라면서 쌍검을 교차해 막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앙!
검마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면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미세하게 갈라졌던 신체에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이서휘의 모습은 공터에서 사라진 상태.
검마가 검을 쥐고 고개를 갸웃했다.
‘백도(白道)의 검이 이상한 수를 쓰는구나.’
검마 자신이야말로 마교에서도 보기 드문 마공을 쓰면서, 이서휘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검마는 이서휘를 한 명의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백도 출신의 검(劍)으로 대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소리도 없이 검마의 뒤에 나타나 쌍검을 그었다.
푸욱! 푹푹푹!
검마는 이서휘의 백야검을 손으로 붙잡고, 이서휘의 팔을 끊겠다는 듯이 검을 내리쳤다.
동시에 이서휘는 좌각에 내공을 실어 검마를 밀어쳤다.
쾅!
검마가 밀려나가면서 자신의 검을 빠르게 대각선으로 그었다.
쐐애애앵!
이서휘가 성검으로 검마의 검기를 방어하고 백야검으로 암연심검의 환을 내뱉으면서 손목을 비틀었다.
콰아앙! 쐐애애애앵!
엄청난 속도의 검기를 날려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검마는 왼손을 들어 암연심검의 환을 손바닥으로 받아냈다.
파악! 하는 소리와 함께 검마의 손과 어깨가 밀려날 뿐,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한 상태.
그제야 이서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검마도 이서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검마는 자신의 특징을 알고 있는 마도인을 제외하고 이렇게 오래 겨루고 있는 백도 무인이 무척 오랜만이었다.
대부분 목이나 가슴을 내주고 동귀어진 초식을 사용하면 백도의 무인은 자신이 죽는 이유도 모르고 쓰러질 때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달랐다. 아슬아슬하게 피해 나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검마는 서서히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너 같은 놈을 찾았다.’
검마가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살짝 지었다.
반면에 이서휘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전략을 수정했다.
‘치명적인 공격은 한 번이면 된다. 그 전까지는 어울려 주마.’
이서휘는 허초를 내밀었다. 그러자 또다시 검마가 양패구상을 노리고 검을 내밀었다. 이서휘는 허초를 내보낸 것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궤적을 옮겨 성검으로 검마의 검을 누르고 백야검으로 검마의 어깨를 적중시켰다.
퍼억!
검마의 신형이 뒤로 밀렸다가 양손으로 검을 붙잡고 이서휘를 향해 수직으로 그었다.
이서휘는 검마가 암천세와 같은 비기를 펼치는 것이라 깨닫고 양손을 휘둘러 검막을 진하게 뿌리면서 쌍검을 교차했다.
콰아아아아앙! 쩌저저적!
이서휘가 충격을 입고 날아가자, 검마가 자신의 검을 양손으로 쥐고 마치 자살을 하려는 듯이 돌진했다.
그 기세에 이서휘가 공중에서 백야검을 쥐고 아무런 동작도 없이 암천세를 뿌렸다.
콰아아아앙!
이번엔 검마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이것이 어찌 고수들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보들이 겨루는 것처럼 때리고 막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암천세를 적중시키고도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날아갔던 검마가 드러누운 자세에서 이서휘를 바라보면서 입꼬리를 올렸기 때문.
이서휘는 문득 해답을 검명(劍鳴)에서 찾았다.
명확한 이유는 몰랐다.
자신이 검명을 듣고 이곳에 왔으니 검마의 몸을 베는 게 아니라 마검을 끊어서 검명을 멈추게 하는 게 맞겠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 이서휘는 표정과 의도를 모두 숨기고 다시 검마에게 걸어갔다.
☆ ☆ ☆
검마는 검마련주의 후예였다.
놀랍게도 마교 교주는 자신과 교주 자리를 다투던 검마련주의 후예를 중원으로 불러 들였다. 그에게 마교십존의 자리를 가장 먼저 보장했다. 그 뿐이 아니라 새외에 있던 검마가도 중원으로 옮길 수 있게 배려했다. 어찌 보면 마교의 십존쟁투(十尊爭鬪)는 검마가가 아무런 불리함 없이 경쟁에 참여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암중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마도 이십일가(二十一家)의 생존자들이 그제야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쟁투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
‘검마련주의 후예가 참여했다면 우리도 가능하지 않을까……?’
마교 교주는 십존을 선별하고 십가(十家)를 마치 직속 세력처럼 후원했다.
심지어 이 십가에서 후계자를 선출할 것이라는 뜻을 내비치면서…….
교주의 속셈과 계략이 음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분위기는 어느새 십가(十家)에 들지 못하면 뒤처진 세력으로 평가 받고 있었다. 마교 교주는 무공 한 번 펼치지 않은 채, 계략만으로 마가를 장악하고 있었다.
검마는 교주의 속내를 알았기에 십존쟁투에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시늉만 하는 사내였다.
그의 관심은 교주 자리가 아니라 검을 지닌 강자였을 뿐이었으니…….
☆ ☆ ☆
이서휘와 검마가 겨루고 있을 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화마존과 그의 스승인 서명응(徐冥鷹) 장로가 걷고 있었다.
그보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 화마존의 사제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화마존이 몇 걸음을 더 이동하려고 하자 서명응 장로가 제자의 어깨의 붙잡았다.
서명응 장로는 이서휘와 검마가 맞붙는 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의 무공 수위를 가늠하고 있었다. 더 이동했다가는 기척을 들킬 것이라는 게 서명응의 판단이었다.
화마존보다 서명응이 검마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검마련주의 검을 이어받은 자…….’
십존이라는 경쟁자들이 가장 신경쓰는 두 사람 중 한 명. 호락호락할 리가 없었다.
서명응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더 기다린다…….]
화마존은 스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숲 속에 퍼지고 있는 검명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당대의 마교 교주가 검마련주를 꺾지 못했다면 지금 세상은 검마가의 천하가 됐으리라. 당시 검마련주와 독마가주가 마교 교주 자리를 놓고 겨뤘던 일화는 마교에서도 전설로 회자할 만큼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싸움이었다.
무려, 도검불침(刀劍不侵)의 경지에 이른 자와 만독불침(萬毒不侵)의 경지에 이른 자의 대결이었으니까. 마치 이제 막 무공을 배운 자들이 입씨름을 벌이는 것처럼 유치한 면이 있는 대화가 오랫동안 이어졌다질 않은가.
한 사람은 새외에서, 한 사람은 중원 마도에서 불패(不敗)의 신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마존은 어렸을 때부터 저 유명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코웃음을 내뱉었다.
‘도검불침이든 만독불침이든 불(火) 앞에선 모두 평등할 것이니. 화마가(火魔家)의 시대가 올 것이다.’
화마존은 숲 속에서 귀를 기울이면서 검마를 생각했다.
검마를 이대로 살려두면 마검 때문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것이라 내다보고 있었다. 스승인 서명응 장로의 말에 따르면 검마가 사용하는 마검(魔劍)이야 말로 검마련주의 힘을 계승했다는 증거라 하지 않았던가.
이서휘가 검마와 맞붙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어부지리의 기회였다. 그 때문에 화마존은 스승의 신호를 기다리면서 굉음이 발생할 때마다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더! 거칠게 싸우거라!’
☆ ☆ ☆
이서휘와 검마는 화마존 세력에게 포위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 겨루고 있었다.
애초에 이서휘는 마가(魔家)의 음흉함을 늘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마의 눈빛에서 구도자의 분위기를 깨달은데다가 검마와 겨루는데 정신이 팔려 주변을 감시하는 감각을 서서히 줄이고 있었다.
승부를 내기 위해서는 내공을 좀 더 쏟아낼 필요가 있었다.
이서휘가 검마의 검을 노려봤다.
한데, 어처구니없게도 그 순간에 검마가 사용하는 검에서 검명이 울렸다.
두 사람이 맞붙은 와중이라 이번에는 이서휘의 귀에 확실히 들리고 있었다.
담력 하나는 천하제일의 수준인 이서휘도 그 곡성에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검명이 마치 누군가의 비명 소리 같구나…….’
이서휘는 그 소리를 듣자 더더욱 검마의 검을 분질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서휘의 눈이 번뜩이면서 쌍검이 춤을 추듯 검마를 베기 시작했다. 파훼 방법을 찾았으니 내공을 끌어올려 승부를 지을 셈이었다. 이서휘는 백야검으로 마검을 튕겨내고 성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쩌어어억!
다시 성검으로 마검을 막아내고 이번에는 백야검을 경쾌하게 휘둘러 검마의 목을 쳤다.
타아앙!
백야검이 막히자 순간 이서휘는 반탄력을 이용해 다시 몸을 회전하면서 공격을 이어나갔다.
쫘아아악! 쫘악! 까앙!
이서휘의 무차별적인 공격이 검마에게 쏟아졌다.
그때 또 다시 검명이 울렸다.
……사아아아아아알…… 려어어어어어어어…… 줘어어어어어어…….
콰아아아아아앙!
깜짝 놀란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암천세를 쏟아내자 검마의 신형이 공터 바깥까지 날아가 굵은 나무를 하나 부러뜨리고도 더 날아갔다.
이서휘가 쓰러진 검마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검에서 어찌 살려달라는 말이…….”
그 말에 검마가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들었느냐? 네가 살려줄 수 있겠느냐? 하하.”
모습을 드러낸 검마의 육신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암천세에 맞은 이후로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문신들이 어지럽게 몸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암천세의 충격만은 무시하지 못했는지 입가에 잔뜩 시뻘건 피를 묻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모습은 점점 더 끔찍해지고 있었다.
검마는 문신에서 뻗어 나오기 시작한 마기를 두르고 망설임 없이 곧장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이서휘는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검마의 검을 끊기 위해 백야검을 내밀었다.
떠어어어어엉!
이서휘는 표정을 굳힌 채로 내공을 쏟아냈다.
트트득! 소리와 함께 맞붙은 두 검이 진동음을 발생했다.
……사아아아아아알…… 려어어어어어어어…… 줘어어어어어어…….
백야검과 검마의 검이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검마는 검명을 들을수록 기분이 좋은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무뚝뚝하게 곧장 성검으로 검마의 검신을 내려쳤다.
콰앙!
검마의 마검이 곡선을 그리면서 출렁거렸다.
그 기세가 마치 백야검을 모루로 놓고 성검이라는 정으로 내려치는 꼴이었다.
검마는 이서휘가 한쪽 검으로 내공을 내보내면서, 동시에 좌수로 내려치자 기가막힐 지경이었다.
‘미친 새끼가.’
이서휘가 또 다시 성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검마가 깜짝 놀라면서 겨우 자신의 손을 내밀어 성검을 붙잡았다.
타앙!
이로써 검마의 약점에 대해 확신하게 된 이서휘.
검마가 성검을 맨 손으로 붙잡자 이서휘는 쌍검으로 찍어 누르듯이 내공을 주입해 순식간에 검마가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드드드드드드드드드…….
본래 기회를 봐서 검마의 목을 날려버리려고 했던 이서휘다.
하지만 검마의 검을 부러뜨리는 게 더 중요하리라 판단했다.
백야검과 성검으로 내공을 쏟아내자, 검마의 몸이 땅으로 조금씩 묻히고 있었다.
푸욱……!
이서휘의 눈빛도 검마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순간, 검마는 도검불침의 육신을 얻어낸 이후로 누군가의 눈빛에 처음으로 오싹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검마가 혼신의 힘을 쏟아내며 끈질기게 버티기 시작했다.
또 다시 검명이 흘렀다.
……사아아아아아알…… 려어어어어…………!
뚝.
그때였다.
마치 이서휘에게 말을 건네는 듯했던 곡성이 “살려줘”라는 말을 온전하게 내뱉지 않고 중간에 우뚝 멈췄다.
순간, 이서휘와 검마의 눈이 마주쳤다.
“……!”
말이 오가지 않았는데도 서로의 눈빛에 온갖 의미가 담겼다.
[누구의 적이냐?]
그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이서휘의 귀에 들렸다.
붉은 장포를 입은 누군가가 미칠듯한 속도로 달려오면서 염화구를 뿌리고, 공중에서도 장포를 펄럭이는 마가 장로가 소마현화기(燒魔現火氣)를 날리면서 공터에 내려섰다.
쏴아아아아아아!
화마존과 서명응이었다. 신호는 서명응이 내렸다. 정신없이 이어지던 병기 소리가 사라지자, 두 사람이 내공 대결을 펼치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
하지만 이서휘와 검마는 눈빛을 확인한 것만으로 동시에 힘을 거두고 날아오는 염화구와 소마현화기를 자신의 검으로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순식간에 등을 맞댄 이서휘와 검마.
화마존과 서명응 장로가 쉴틈을 주지 않고 두 덩이의 화마(火魔)가 되어 공터에서 날아왔다.
화르르르르르륵! 쐐애애애애앵!
이서휘가 백야검으로 검기를 날리자 서명응 장로가 공중으로 솟구쳐 소마현화기(燒魔現火氣)를 무차별적으로 난사했다.
콰콰콰콰콰콰콰과광!
검마가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웃음을 터트리면서 화마존에게 걸어갔다.
“화아야, 기다리면 알아서 거둬줄 것을 뭐가 이리 바쁜 게냐?”
화마존은 검마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공터에 서서 손짓을 했다. 그러자 동서남북 방향에서 튀어나온 화마존의 사제들이 검마에게 달려들었다.
휙!휙!휙!휙!
화마존은 검마의 입가에 묻은 피를 보고 히죽 웃고 있었다.
‘이서휘가 강하긴 하구나. 검마가 피를 다 흘리고……. 나만 힘든 게 아니었어. 개새끼 같으니라고……. 클클클.’
이서휘가 쌍검을 교차해 휘두르면서 서명응 장로의 소마현화기(燒魔現火氣)를 튕겨내며 생각했다.
‘이런 미친 새끼들……. 저희끼리 못 죽여서 안달이구나.’
타악! 소리와 함께 이서휘는 성검을 납검하고 동시에 날아오는 불덩이를 백야검으로 쳐냈다. 그 순간에 서명응 장로가 바람을 가르며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이서휘와 서명응이 맞붙었다.
꽈아아앙!
한편, 검마는 화마존의 사제들에 기습을 당해 선수를 잃은 상태. 검마는 마검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느닷없이 비명을 길게 질렀다. 화마존의 사제 네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서 날카로운 비수로 검마의 몸을 쉴 새 없이 난자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장력이 검마의 몸에 쏟아졌다.
콰앙! 콰앙! 콰앙!
이들도 검마가 불사지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격으로 끝내지 않고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푸욱! 푹! 푹푹푹푹푹! 푸욱! 푸욱! 푸악!
검마가 비명을 내지르고, 몸을 비틀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또 다시 검명이 울렸다. 한데, 이서휘와 싸울 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도오오오오…… 마아아아앙…… 가아아아아…….
화마존의 사제들이 심상치 않은 검명의 소리를 듣는 순간, 그중 한 명이 검마와 눈을 마주쳤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명을 지르던 검마가 움찔하는 화마존의 사제의 팔을 벼락같이 끌어당기더니 크게 어렵지도 않게 마검을 단전에 찔러 넣었다.
푸욱!
검마가 비명을 지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서 웃음을 질러댔다.
“……아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끄윽!”
화마존의 사제는 마검이 단전에 박히는 순간 끔찍한 고통과 함께 검명의 정체를 알았다.
그 순간부터는 배에 박힌 마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한데, 여러 사람이 말을 쏟아내고 있어 뒤죽박죽이었다.
[도망가라고, 분명, 말했을, 도망가, 또 화마가냐, 누구의 후예냐, 도망가, 검을 빼, 뺀다고 빠지던가, 아니지, 그러니까…… 도망을, 갔어야지.]
검마가 웃음을 터트리자 마검이 박힌 사제의 몸이 정기가 빨리듯이 쭈글쭈글해지면서 마검으로 무형의 기운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나머지 화마존의 사제들이 끊임없이 검마를 찌르고, 장력을 내지르고 있었다.
검마가 마검을 뽑아내자마자 뒤로 크게 돌면서 한 명의 허리를 끊어내고, 동시에 푸악! 푸악! 하는 공격을 당하면서 한 명에게 달려들어서 똑같이 단전에 마검을 쑤셔 넣었다.
푸욱!
검마가 비릿하게 웃었다.
“핫하……! 내 검 속에서 화마가의 회동이라도 열릴 기세로구나. 가서, 네 선조들에게 인사나 하려무나.”
그 작태를 지켜보던 화마존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진작 준비하고 있었던 염라박화(閻羅烞火)를 양손에 가득히 생성시켰다.
화마존이 중얼거렸다.
“화마가를 위해.”
동시에 화마존의 사제들이 무어라 외치면서 검마의 팔다리를 기를 쓰며 붙잡았다. 화마존 사제들의 몸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금방 폭발할 것처럼 보이는 형국이다. 화마존이 사제들과 함께 검마를 불태우겠다고 마음을 먹고 오른손을 휘둘렀다.
“타올라라.”
화르르르르르르르륵!
어느새 거대한 구체가 된 염라박화(閻羅烞火)가 검마에게 맹렬한 기세로 쏟아졌다.
콰아아아아앙!
검마와 화마존의 사제들이 동시에 공터 한쪽으로 날아가면서 불길에 휩싸이고…….
그 순간, 무언가를 발견한 화마존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한참이나 높은 허공에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어찌 저런 일이?’
스승의 목이었다.
화마존은 그 순간에 공중에서 날아오는 이서휘를 발견하고 나머지 염라박화(閻羅烞火)를 차마 검마에게 던지지 못하고 이서휘를 향해 쏟아냈다.
쐐애애애애애애앵!
“죽어라!”
공중에서 화마존을 향해 날아오는 이서휘.
화마존의 품에서 날아간 염라박화가 이서휘를 향해 질주했다.
그때였다.
쏴악―
화마존의 눈에 자신이 쏘아올린 염라박화가 가로로 갈라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에 이어서…….
쏴악―
염락박화가 또 다시 세로로 갈라지고…….
마치 태양을 네 조각으로 등분한 다음, 그 중앙의 틈새로 등장한 것 같은 이서휘가 하늘에서 떨어지며 백야검을 쥐고 화마존을 갈랐다.
☆ ☆ ☆
화마존의 세력에게 완벽하게 포위된 숲 속.
화마존은 궁금한 게 많았다.
자신의 성명절기인 염라박화(閻羅烞火)에 당한 검마는 살아 있을까?
스승은 어찌하여 목이 날아갔을까?
이서휘가 그렇게 강하단 말인가?
아니면 심상치 않아 보이던 이서휘의 검이 천하에서 보기 드문 명검이었기 때문일까.
궁금했다.
누군가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면한 죽음 앞에선 모든 것이 허무했다.
한줄기 빛이 이마로 떨어진다고 느꼈을 때…….
화마존은 선 자세 그대로 좌우로 나뉘어 죽음을 맞이하고 영원히 그 궁금증을 풀지 못하게 되었다.
이서휘는 성검을 납검한 상태에서 백야검을 쥐고 주변을 돌아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서휘를 향해 화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퉁퉁퉁퉁퉁퉁!
화살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활시위 튕기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타다다다다다닥!
이서휘는 검막을 뿌리고 몸을 피하면서 백야검으로 화살들을 쳐냈다. 이내 화마존의 수하들이 빼곡하게 몰려들고 있었다.
이서휘가 내공을 실어 외쳤다.
“화마존은 죽었다. 개죽음을 당하고 싶으냐!”
이서휘의 쩌렁쩌렁한 호통에 근방에 있던 나무가 투드득 소리를 내며 나뭇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투드드드드드득!
하지만 화마존 세력은 이서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 눈으로 직접 화마존의 죽음을 봐야 납득할 터였다.
그 때문에 이서휘에게 죽자사자 달려 들었다. 이서휘는 화마가의 마인들을 베기 시작하면서 검마의 위치를 살폈다.
‘검마…….’
공터 한쪽의 땅이 움푹 파여 있었다. 구덩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깊었다. 한데, 처참하게 조각이 난 마인들의 시체만 보일 뿐 검마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이서휘는 대로변을 향해 길을 뚫으면서 화마존의 수하들을 베어 나가기 시작했다.
푸욱, 푸욱, 푹푹푹푹!
수가 너무 많아서 이서휘는 일일이 죽이지 않고 말 그대로 베면서 이동했다. 뭉쳐서 몰려오는 경우에는 가차 없이 암연심검의 파를 휘둘렀다.
쐐애애애애앵!
쫘아아아아악!
그렇게 지옥도가 펼쳐졌다.
이서휘는 숲 속에서 대로변에 도착할 때까지 반 시진이나 화마가의 무인들을 베면서 이동했다.
어지간히 담력이 강한 이서휘도 정신이 지칠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를 만나도 당최 도망가는 자들이 없었다.
이서휘는 자신이 어디에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
밀려드는 화마존 세력을 베어 넘기면서 대로변을 걸었다.
나중에는 주로 적들의 팔을 끊어내거나 허벅지와 종아리를 베면서 이동했다.
이서휘가 대로변을 귀신처럼 걷고 있고, 그 뒤를 시체와 핏자국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 덕분에 대로변 중앙에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한참 후에 이서휘가 그대로 대로변에 주저앉았다. 이서휘의 뒤 편에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마인들이 가득했다.
이서휘는 백야검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여기가 바로 지옥이구나.”
☆ ☆ ☆
이서휘가 떠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염라박화가 떨어진 구덩이의 중간 지점에서 흙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때였다.
넝마가 된 시체들 틈으로 불쑥 마검이 솟구쳤다.
푹 소리와 함께 마검이 솟구쳤다가 땅에 떨어졌다.
이어서 검마의 왼팔이 땅에서 뻗어 나왔다. 연달아 검마의 오른팔이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오더니 땅을 부여잡고 힘을 쓰자, 검마의 상반신이 흙을 떨구면서 솟구쳤다. 검마는 이어서 땅을 누르면서 하반신을 뽑아냈다.
“후우우.”
검마는 염라박화가 떨어지는 순간에 화마존 사제들의 공격을 무시하고 마검으로 땅을 찍음과 동시에 두 발에 내공을 주입해 아예 땅 속으로 숨어 들어갔던 것. 검마는 이서휘가 사라질 때까지 땅 속에서 무토연시공(無吐沿屍功)으로 호흡과 기척을 없애고 있었다.
다시 땅을 밟은 검마는 이서휘의 무공 수위를 떠올렸다.
‘까다로운 녀석이다.’
무엇보다 이서휘는 마검을 노리고 있었다. 보통 무림의 장검들은 마검에 손쉽게 부러지기 마련인데 어찌 된 노릇인지 이서휘가 지닌 두 자루의 장검은 마검에 비해 손색이 없는 예리함과 강도를 갖추고 있었다.
검마가 땅바닥에 놓인 마검을 쥔 다음에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이동했다.
“이서휘, 재미있는 놈이야.”
검마는 이서휘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서로의 뜻이 정확하게 전달됐다는 점을 떠올리며 큭큭거렸다.
“위극신과 붙어도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겠구나. 이놈들을 어떻게 만나게 할까나…….”
검마가 어디론가 정처 없이 걸어가는데 마검이 스스로 검명을 쏟아냈다. 이번에는 마검 안에 갇힌 자들이 합창을 하는 것처럼 뜻이 명확했다.
……운…… 이…… 좋…… 았…… 다…….
그 말에 검마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클클, 닥쳐라. 이 새끼들아.”
☆ ☆ ☆
화마존 세력은 그야말로 이서휘에게 분쇄된 것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대신에 이서휘는 몰골이 처참했다.
휴식을 취하다가 일어난 이서휘는 피곤을 무릅쓰고 흑마를 묶어둔 객잔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서휘는 문득 달리기를 멈추고 어둠이 깔린 산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디선가 마검이 내뿜고 있는 곡성이 메아리를 치고 있었다.
‘추적해서 죽여야 하나.’
잠시 망설이던 이서휘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객잔으로 이동했다. 검마는 자신의 세력도 대동하지 않은 상태로 자신과 싸웠다. 지금 이 상태에서 검마가의 장로들과 수하들이 등장하면 이서휘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 뻔했다.
이서휘가 한참 후에 끔찍한 모습으로 객잔에 나타나자 일 층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이서휘를 바라봤다. 이서휘는 점소이에게 두둑하게 돈을 안겨주고 위층에 올라가 잠시 쉬었다. 점소이가 이서휘에게 받은 돈으로 의복을 구해오자 이서휘는 그것을 받아들고 욕탕으로 내려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서휘는 방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봤다.
“다섯이 죽었구나.”
환마, 묵연, 화마, 음마, 번뇌까지.
다섯이 더 남았다.
일전에 놓친 괴패마존.
그리고 일전을 겨뤘던 검마존.
그리고 아직 맞딱뜨리지 못한 셋이 남았다.
검마존은 생각보다 강했으나 이서휘가 알고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위극신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서휘가 회귀 이후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면서 활약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천마 위극신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뻔했다. 백도맹을 공략하는 세력 중에 위극신이 있다는 얘기였다.
위극신을 떠올리던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졸음이 몰려왔다.
무엇보다 육체와 정신 모두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곳은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잠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서휘는 문득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느끼면서 감각을 유지한 채로 선잠에 빠져 들었다.
그 와중에 이서휘가 느낀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이서휘는 두 눈을 감은 채로 잠시 옥의림을 떠올리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 ☆ ☆
한 시진 정도 잤을까.
아직 한밤중이었다.
이서휘는 객잔 일 층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잠을 깰 수밖에 없었다.
“왜 이리 시끄러워?”
가뜩이나 외롭다는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던 이서휘다. 아래층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움이 이서휘의 마음을 더 적적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심지어 노래 소리까지 들렸다. 어떤 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서휘는 노래 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청협문답가(靑俠問答歌)?”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선창했다.
[사악한 무리가 일어날 때 가장 먼저 올랐다가 가장 늦게 내려지는 깃발이 있으니 저 깃발에 적힌 두 글자가 무엇이더냐!]
[청협이로다!]
이서휘가 침상에서 일어났다.
“단우혁?”
한데 이서휘를 찾지도 않고 아래층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니 그 또한 괴상했다. 이서휘가 아래층에 내려가기 위해 주섬주섬 옷을 다시 입는데 낭랑한 목소리로 선창이 다시 이어졌다.
[군림맹의 젊은 대주로다. 동분서주 무림을 뛰어다니며 당당하지만 첫 눈에 반한 여인에겐 숙맥인 자가 누구더냐!]
이서휘는 선창을 하는 단우혁의 목소리에 얼굴이 벌게졌다. 또한, 단우혁의 선창에 누군가가 신이 나서 화답했다.
[이서휘로다!]
이서휘가 혀를 차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 새끼가.”
이서휘가 일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섰다가 저도 모르게 “어?” 소리를 내뱉었다.
단우혁은 아예 덩실덩실 몸을 괴이하게 흔들면서 부채춤을 추고 있었다. 그 주변에 청협문도들이 박수를 치면서 청협문답가를 따라 부르는 형국이다.
한데 기가 막힌 것은 그게 아니었다.
도이와 도삼이 히죽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검우 정천은 팔짱을 낀 채로 단우혁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화지련마저 못 마땅한 얼굴로 객잔 한쪽에 앉아 있었다.
이서휘가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단우혁이 부채를 차르륵 하고 휘두르면서 이서휘를 가리켰다.
“아니 이게 누군가? 상사병에 걸린 군림맹의 이서휘 대주가 아니신지?”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이서휘를 화를 내려다가 참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황당할 지경이었다. 겨우 내뱉은 말이 고작 이것이었다.
“아니, 다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월야대와 청협문이다.
이서휘가 계단에서 내려오자 도이가 빈정거렸다.
“아니? 구화산에 복숭아 먹으러 간 사람 찾으러 왔다! 뭔 복숭아를 여기까지 와서 쳐드셨어!”
도삼도 낄낄 거렸다.
“대주님, 복숭아는 드셨습니까?”
이서휘가 황당한 얼굴로 대꾸했다.
“먹었다.”
도이가 또 다시 빈정거렸다.
“잘했네. 잘했어.”
이서휘가 단우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
“글쎄다. 난 월야대를 따라 여기 왔을 뿐이다.”
그 말에 정천이 대꾸했다.
“이 대주가 구화산에 가서 소식이 없는 와중에 마도가 등장해 구화산 밑이 초토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월야대와 함께 오는 중에 청협문을 만나게 되었지. 마침 여기 소문주도 이 대주의 행방을 찾겠다고 도와서 한참을 헤매고 다녔네. 다행히 흑마를 먼저 발견했지.”
“하, 그것 참…….”
이서휘는 석실에서 며칠이나 머물러 있었다. 월야대로서는 구화산의 참변을 듣자마자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그나저나 홀로 지쳐 잠들어 있었던 이서휘다. 눈을 뜨니 친구들이 몰려와 있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서휘가 월야대가 앉은 탁자에 엉덩이를 깔자 도이가 말했다.
“한 잔 하쇼! 복숭아 먹었으니 술 한 잔 하셔야지.”
“암, 복숭아엔 술이지.”
도이와 도삼이 되도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자 그제야 이서휘는 실감이 났다.
“그래. 한 잔 줘봐라.”
안 그래도 목이 말랐던 이서휘가 술을 벌컥 들이켰다. 이서휘의 목울대가 꿀렁거리자 단우혁이 술잔을 높이 올리며 외쳤다.
“자자, 같이 한 잔 하세!”
“좋소!”
단우혁이 선창했다.
“옥의림을 위하여!”
술을 넘기던 이서휘가 푸악! 소리를 내며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도이의 얼굴에 술을 뿌렸다.
“푸웁, 켁켁……. 단우혁, 켁, 카아악! 이 새끼야!”
이서휘가 내뿜은 술을 뒤집어쓴 도이가 얼굴을 닦으며 이서휘에게 말했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얼굴에 술 벼락을 맞아야 해?”
“미안하다.”
“그게 미안한 표정이오?”
이서휘는 사레가 들려 물을 한참이나 들이키다가 서늘한 화지련의 표정을 보고 저도 모르게 물을 꿀꺽 삼켰다.
“넌 또 뭘 그렇게 노려 봐?”
“아니에요.”
이서휘가 화지련에게 시큰둥하게 말하자 도이와 도삼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혀를 쯔쯔쯔 차고 있었다.
“글러 먹었어.”
“쯔쯔쯔.”
이서휘는 애써 도둑 형제들의 말을 무시하고 화지련의 눈치를 보며 술을 마셨다. 어쨌거나 이서휘는 월야대와 청협문의 합류로 그날밤은 시끌벅적하게 술을 먹으면서 보냈다. 이미 청협문의 일부가 객잔 바깥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서휘는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가 일행들과 함께 군림맹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한데, 그 와중에도 단우혁이 때때로 이서휘를 열받게 하고 도이와 도삼이 빈정거렸다. 하지만 이서휘가 외로움을 느낄만한 틈은 전혀 없었다.
소동 끝에 흑마에 올라탄 이서휘가 단우혁과 말머리를 나란히 세우고 군림맹으로 향했다. 그 뒤로 월야대와 청협문이 두 사람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시덥지 않은 농담에 과한 웃음이 터져 나오자 이서휘도 웃음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