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재회>
이서휘가 흑마의 박차를 가하며 질주하고 있었다.
옥의림과의 인연은 이게 끝이 아닐 것이다. 이서휘는 불현듯 아른거리는 옥의림을 애써 지우고 안휘를 향해 달렸다.
어느새 날이 밝았다.
이서휘는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청협문과 흑도맹까지 연합 전선을 구축한 것은 순조롭다. 하지만…… 백도맹이 문제군.’
이서휘는 내심 백도맹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다. 백도맹은 사공이 많은 곳이다. 또한, 백도맹은 스스로 무림정파의 기둥이라 생각하는 자들이다. 무림맹의 적통은 백도맹이라 믿는 놈들이었다.
[군림맹은 무림맹에서 떨어져 나간 세력이 아닌가? 언제든 백도맹을 중심으로 다시 합쳐야 할 것이다.]
백도맹에서 대세를 이루는 의견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흑도맹보다 다루기가 어려운 면이 있었다.
이서휘가 사자로 파견됐었어도 성과를 내기 힘든 일이었을 터. 때문에 이서휘는 다른 사패로 시선을 돌릴 생각이었다.
두 곳이 남았다.
검왕(劍王)이 이끄는 백검문(白劍門).
극제(戟帝)가 이끄는 벽천회(疈天會).
두 세력을 아우르면서 동시에 마교의 거점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이서휘의 전생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어쨌든 천마 위극신이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할 터. 위극신이 후계자가 되는 순간 예측하기 힘든 마교의 ‘힘’을 이어받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분명히 마교 교주라는 자가 후계자를 고르는 이유가 있을 터. 이서휘로서는 마교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무림을 공격하도록 내버려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
며칠 후 이서휘가 안휘에 들어서자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풍경의 분위기가 반가웠다. 이서휘는 이때만 해도 단우혁을 제외한 사패의 일원과 금방 재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서휘는 바로 복귀하지 않고 일부러 청협문이 머무르고 있을 응천으로 향했다. 거점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던 것.
또한, 어쩐지 가슴 한 쪽이 허전해 옛 친구를 만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옥의림을 만나고 돌아온 마음의 여파랄까.
청협도왕 단우혁이 보고 싶었다.
‘우혁이와 술이라도 한 잔 하고 복귀해야겠다.’
이서휘는 본래 술이 약했으나 내공이 점점 깊어지고 술 마실 기회가 늘어난 터라, 때때로 술 생각이 나고 있었다.
청협문의 거점은 지난날 응천의 철호방 자리에 세웠다. 대담한 결정이다. 청협문 뿐만이 아니라 군림맹의 일부 병력도 함께 있어 그야말로 든든한 전초기지가 된 느낌이었다.
응천의 불야성(不夜城)은 여전했다. 어둑해진 밤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객잔 거리는 여전히 휘황찬란했다.
하지만 이서휘는 청협문에 가서도 단우혁을 만날 수 없었다. 되돌아 나오는데 복귀하던 청협문도들이 이서휘를 알아보고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 대주님! 소문주께서는 친구분이 찾아 오셔서 금향루로 가셨습니다. 호위를 하지 말라 하셔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아, 그런가? 내가 찾아가겠네.”
이서휘는 흑마를 청협문에 두고, 객잔 거리에서 쉽게 금향루를 찾아 들어갔다. 이서휘가 들어가서 둘러보자, 금향루의 보위 무인이 다가와 말했다.
“찾으시는 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청협문의 단우혁을 찾아 왔네만. 혹시 아는가?”
“아, 저를 따라 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이서휘는 무인을 따라 금향루의 계단을 올라 다시 안내를 받았다.
“이곳입니다. 잠시만요. 소문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모셔도 되겠습니까?”
“누군가?”
단우혁의 목소리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이서휘일세.”
“오오, 이 대주! 어서 들어오시게.”
이서휘는 별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우뚝 멈췄다. 단우혁은 혼자가 아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내가 단우혁과 마주하고 있었던 것.
이서휘의 두 눈이 커졌다.
얼굴은 비록 처음 보지만 복장과 표정만 봐도 재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사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재수가 없다? 그렇다.
이서휘가 사패의 일원 중 가장 싫어하는 사내가 이서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아, 오랜만이다. 이 새끼야.’
위아래로 새하얀 의복, 여인처럼 길게 기른 머리,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
백검문(白劍門)의 검왕(劍王), 백류혼(白瀏琿)이 앉아 있었다. 물론 당대의 검왕은 그의 조부일 터. 백류혼이 단우혁에게 물었다.
“누구신가?”
“내 친구일세. 군림맹의 이서휘 대주. 이 대주, 이리 와서 편히 앉게나.”
본래 초면이면 일어나서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게 도리다. 하지만 백류혼의 성격을 아는지라 단우혁은 이서휘를 끌어당기듯이 잡아서 자리에 일단 앉혔다.
단우혁이 밝은 얼굴로 이서휘와 백류혼을 소개했다. 하지만 이서휘는 백류혼의 반응이 어떨지 빤히 보여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단우혁이 백류혼을 가리키며 말했다.
“백검문의 백류혼이라 하네.”
이서휘가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백류혼에게 말했다.
“이서휘라 하오.”
아니나다를까, 백류혼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백류혼이오.”
그 말에 이서휘가 피식 웃었다. 이서휘가 웃으니 곧장 백류혼이 꼬집고 나섰다.
“왜 웃으시오?”
“아니외다. 여기 단 소문주를 오랜만에 봐서 반가워 웃었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백류혼, 넌 반갑지 않다는 소리나 마찬가지. 똑똑한 백류혼이 못 알아 들을 리 없었다. 백류혼은 잠시 이서휘가 하는 꼴을 지켜봤다.
‘어디 군림맹의 대주 녀석이 건방지게.’
이서휘는 백류혼의 뻔한 작태를 볼 때마다 소리를 내어 웃고 싶었으나 마땅히 웃을 기회가 없었다. 그나저나 이서휘와 백류혼에 비해서는 나름 순수한 구석이 많은 단우혁이다. 좋게 말하면 남자답고, 나쁘게 말하면 단순하달까.
이서휘와 백류혼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불편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은근히 두 사람을 추켜세웠다.
“백검문의 위명이야 이 대주가 잘 알 것이고. 그렇지? 류혼, 자네도 여기 이 대주를 특별히 눈여겨보게나. 대단한 친구니까 말이야. 청협문이 신세를 많이 졌네. 무공도 고강하고…….”
백류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휘를 바라봤다.
“무공이 고강하시다?”
그 말에 이서휘가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마음껏 웃음을 터트렸다. 이서휘가 생각했던 백류혼의 반응이 그대로 흘러 나왔기 때문.
“와하하하하하하! 과찬의 말이오.”
대체 왜 이럴까? 백류혼도 이서휘와 함께 싸웠던 사패의 일원이다. 별호는 무려 검왕이다. 그 실력은 말할 것도 없다. 이서휘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마도를 상대로 했을 때의 이야기다.
이서휘는 백류혼과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일단 성격이 부딪친다.
백류혼은 이서휘가 알고 있는 모든 무림인들 중에서 가장 뻔뻔하게 거만한 자다. 이른바 자신의 입으로 스스럼없이 자신이 천재라 주장하는 놈이다. 병적으로 남을 자주 깔보는 성격이다.
백검문이라는 깨끗한 이름이 무색할 정도.
백류혼은 그냥 태생이 그런 놈이었다.
이유는 또 있었다.
백류혼과 이서휘, 검왕과 검제라 불렸다.
뭐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그저 별호다.
검왕이라는 별호는 백류혼의 조부가 은퇴하면서 서서히 위명을 얻고 있던 백류혼이 이어 받았다. 처음에는 조부가 물려준 것이라고 평가절하 당했다가 훗날에는 백류혼이 실력으로 증명해 보였다.
훗날 이서휘가 검선과의 수련을 마치고 무림에 다시 나섰을 때는 이미 검왕이라는 칭호가 백류혼에게 가 있던 상황.
한데, 그 후에 무림에 나선 이서휘가 얻은 별호가 검제였다.
그때부터 무림에선 유치한 말싸움이 벌어졌다.
‘검왕이 강하냐, 검제가 강하냐’에서부터…….
강한 자가 ‘제’를 갖고 약한 자가 ‘왕’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당사자인 이서휘는 신경도 안 쓰는데 백류혼은 늘 기분이 찜찜했다. 그러다 보니 이서휘를 자주 도발했다.
이서휘는 대국을 살피느라 백류혼과 겨룰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나 이서휘의 기분도 늘 상해 있었다. 마치 떼를 쓰는 아이를 상대하는 기분이 자주 들었던 것. 더군다나 눈이 먼 이서휘는 비무를 잘 하지 않았다. 지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적당히 라는 게 없었기 때문. 겨루면 죽여야 했다. 때문에 백류혼이 도발할 때마다 늘 참았던 이서휘다. ‘뭐 이딴 녀석이 검왕이지?’라는 생각도 자주 했던 이서휘다.
이유는 더 있었다.
백류혼은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았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성격이다.
사패가 점점 두각을 나타냈을 때는 이미 마도의 세력이 강성했을 때다.
이서휘가 계책을 내놓으면 백류혼이 사사건건 반대했다.
사패의 우두머리는 백류혼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놈이다. 사패의 우두머리뿐일까? 백도맹과 군림맹이 쓰러진 이후에는 무림맹주처럼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만면의 웃음을 띠고 있고, 저 거만한 백류혼은 시종일관 황당한 표정으로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우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자, 술이나 한 잔 하세.”
단우혁이 잔을 채웠다. 그러자 이서휘와 백류혼이 서로를 노려보며 술을 한 잔 들이켰다.
백류혼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 대주는 백검문에 원한이 있으신가?”
“그럴 리가 있겠소? 처음 보는데.”
“근데 초면에 어찌 그렇게 눈빛이 사나운 게요?”
백류혼이 묻자, 이서휘가 대답했다.
“흑도맹에 다녀왔더니 피곤해 그렇소만.”
“흑도맹이라…….”
그 말에 단우혁이 말을 받았다.
“아, 이야기는 전해 들었네. 흑도맹은 어때? 일전에 아버님께 흑도맹에도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묻자 엄청나게 화를 내시더군. 농담이었는데 말이야.”
그 말에는 이서휘가 순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아, 흑도맹은 뭐랄까. 예측 불가한 면이 있었네. 대뜸 비무를 요청하더니 세 명을 연달아 내보내더군.”
이서휘의 말에 단우혁과 백류혼이 눈을 마주쳤다. 단우혁이 말했다.
“세 명을 다 꺾었나보군.”
“운이 좋았네. 내가 한 잔 따르지.”
이서휘답지 않게 자기 자랑이다. 이서휘가 덤덤한 표정으로 술잔을 채우자 단우혁과 백류혼은 기분이 묘했다. 단우혁이 미소를 지으며 이서휘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이 대주랑도 한 번 붙어봐야 할 텐데.’
이서휘가 흑도맹 무인을 연달아 세 번 꺾었다고 은근히 자랑하자, 백류혼도 이서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흥, 누굴 꺾었는지 어찌 알겠느냐?’
백류혼은 술이 좀 들어가자 자세가 아주 가관이었다. 거의 옆으로 눕다시피 하여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백류혼이 말했다.
“우혁아, 여자 좀 부르지?”
“그럴까?”
이서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됐네.”
그 말에 백류혼이 씨익 웃었다.
“이 대주는 왜? 남색이 취미인가? 이쪽은 남자 하나 불러주게.”
바로 어제 옥의림을 만나고 온 터라 마음이 한껏 우울해져 있던 이서휘다. 백류혼의 말을 곱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자네의 고운 머릿결을 보아 하니 남색으로 갈아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어떤가?”
이서휘도 막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백류혼도 남다른 면이 있었다. 낄낄대고 웃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양하겠네. 이 대주, 그나저나 우리도 말이나 편하게 하세.”
“그러지.”
그 사이에 단우혁이 기녀 두 명을 불러서 백류혼과 한 명씩 끼고 술을 마셨다. 백류혼이 기녀에게 이서휘를 소개하듯이 말했다.
“무공을 익히다가 영 좋지 않은 곳을 다쳐서 여인을 품을 수 없는 분이시다. 군림맹의 이서휘 대주라 하지. 봐라, 생긴 건 제법 반반한데 안타깝지 않으냐?”
실로 험한 말이라 기녀들은 웃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표정으로 이서휘의 눈치를 살폈다.
이서휘도 감탄사를 내뱉으며 백류혼을 칭찬했다.
“캬, 이런 분이 백검문의 후계자라니. 고결하다, 고결해.”
단우혁이 잠시 표정이 굳어서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하지만 뜬금없이 이서휘와 백류혼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그러자 단우혁은 그 답지 않게 화를 한 번 억누르고, 잠시 친구들의 눈치를 살폈다가 웃음에 동참했다.
“하하하하. 진짜 자네들 오늘따라 좀 이상한데. 말을 좀 막 하는군. 적당히 하게. 내 기분이 약간 상하려고 하니까 말이야.”
이서휘가 웃으면서 술잔을 채웠다.
‘아, 아쉽구나. 극제 놈도 있으면 딱 좋았을 텐데. 마음도 울적한데 시원하게 대판 붙어보고 싶구나.’
이서휘가 말했다.
“기분 상했다면 미안하네.”
대화가 이렇게 흐르자 분위기가 명확해졌다. 이서휘는 단우혁을 친구로 대했지만, 분명히 백류혼을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었다. 백류혼도 마찬가지. 단우혁은 인정하는 분위기였으나 이서휘는 말을 섞자마자 깔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불똥은 단우혁에게 튀고 있었다. 농담과 술잔이 오고 가자 점점 단우혁의 성질이 꿈틀거렸던 것. 잠시후, 이서휘와 백류혼이 하는 짓거리와 서로를 비난하는 농담을 꾹 참고 있던 단우혁이 드디어 폭발했다.
콰아아앙!
단우혁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니 술병과 잔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갔다. 기녀들이 비명을 지르자 단우혁이 싸늘하게 말했다.
“너희는 물러가라.”
기녀들이 기겁해서 후다닥 밖으로 빠져나가자, 단우혁이 이서휘와 백류혼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은 나에 대한 무례가 아닌가?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술자리가 될 거라 기대했었네만. 정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두 사람.”
이서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마치 과거의 한 장면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이서휘와 백류혼의 감정이 격해져 검이라도 뽑을 지경이 되면 늘 이렇게 단우혁이 분위기를 잡고 나섰다. 극제가 있으면 더 가관이었다. 이서휘가 돌이켜 보니 어쩐지 그리운 장면들이었다. 또한, 젊었을 때 이러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었다.
이서휘는 대꾸를 하지 않고 입소리를 내어 웃어 버렸다.
“후후후.”
백류혼은 단우혁이 화를 내도 애초에 눈 한 번 깜박할 성격이 아니었다. 손으로 옷자락에 묻은 술을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성질하고는.”
술기운이 오른 단우혁이 곁에 둔 청룡도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 새끼들이 진짜…… 맞아야 정신을 차리려나.”
그 말에 이서휘와 백류혼이 씨익 웃었다. 이서휘는 백류혼에게 다음 말을 양보했다. 이서휘가 침묵하고 있자, 백류혼이 말을 꺼냈다.
“나가세, 좁으니.”
백류혼의 말에 단우혁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백류혼이 애늙은이처럼 에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나더니 자신의 장검을 찾았다.
“어이, 이 대주. 거기.”
백류혼의 말에 이서휘가 바닥에 놓인 장검을 주워 건네줬다. 단우혁이 성난 얼굴로 나가고, 백류혼이 히죽 웃으면서 따라 나섰다. 그 작태를 지켜보던 이서휘도 기지개를 크게 편 다음에 하품을 한 번 하고 따라 나섰다.
단우혁이 앞장서서 객잔 거리를 지나 넓은 공터를 찾았다. 그 뒤를 백류혼이 쫓고 마지막엔 이서휘가 따라가며 말했다.
“그만 가시게. 이곳이 적당하군.”
세 사람 모두 술이 들어간 상태.
일단 단우혁은 단순했다.
기분이 나쁘니 때려줘야겠다.
끝이다.
백류혼은 조금 더 능글맞았다.
이서휘가 여기서 가장 약할 것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먼저 단우혁을 꺾고 남은 힘으로 이서휘를 혼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애초에 백류혼이 단우혁과 술만 마시고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어떻게든 단우혁과 우열을 가릴 생각이었던 것.
백류혼이 실실 웃으며 단우혁과 이서휘를 살피고 있었다.
한편 이서휘도 잘 됐다 싶었다.
‘건방진 녀석들.’
마침 시기도 적절하다. 시간이 더 흐르면 정황상 서로 겨루기가 힘들어진다. 특히 백류혼은 미리 밟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기루에서 탁자를 내려치는 행동으로 먼저 발끈했었던 단우혁이 말을 꺼냈다.
“친구 사이에도 예가 있어야 하는 법. 두 사람을 친구라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동생들이라 여기고 있었네.”
“웃기고 있네.”
“놀고 있네.”
이서휘와 백류혼이 동시에 빈정거렸다. 그러자 단우혁이 청룡도를 쥔 채로 말을 이었다.
“내 생각을 말해주지. 아무리 친구 사이라지만 엄연히 우리는 무림인. 우리 사이에도 서열이 명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네.”
그 말에 다시 백류혼이 코웃음을 쳤다.
“자네답지 않게 혓바닥이 길구만.”
백류혼은 말을 내뱉자마자 자신의 장검을 수평으로 들고 검신을 드러냈다.
백류혼은 먼저 단우혁을 밟아놓고, 이서휘를 혼내줄 생각이다. 물론 단우혁도 마찬가지.
이서휘는 기가 막혔다.
두 명이 아무리 훗날 사패라 추앙을 받는 인물들이라지만 현재의 이서휘와 비교할 수는 없을 터.
이서휘가 팔짱을 낀 채로 백류혼과 단우혁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두 사람, 지금 뭐하나?”
백류혼과 단우혁이 이서휘를 힐끗 보자, 이서휘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둘이 먼저 겨룬 다음에 이긴 자가 나와 겨룰 셈인가?”
백류혼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기다리고 있게.”
단우혁마저 이서휘를 무시했다.
“여기 백가 놈부터 먼저 손봐주고 다음이 이 대주 자넬세. 기다리게.”
그 말에 이서휘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놀고들 있군. 자네들 한꺼번에 덤비게. 그럼 해결될 일이야.”
이서휘는 진심이었다. 한 번에 둘을 상대하면 앞으로 백류혼과 단우혁이 자신에게 무공을 가지고 기어오를 일은 없을 터.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이이이잉…….
단우혁과 백류혼이 이서휘의 말에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하하.”
백류혼이 배를 잡고 웃었다.
“어쩐지 술을 못하는 거 같더라니.”
단우혁도 거들었다.
“무시하게. 오늘은 자네와 내가 승부를 내지. 안 그래도 기다렸던 일이었으니.”
백류혼과 단우혁이 서로를 노려보고 무시를 당한 이서휘가 침음을 흘렸다.
이서휘가 중얼거렸다.
“후회할 텐데.”
이서휘는 공터 한쪽으로 걸어가 좌선을 하는 자세로 두 사람의 작태를 눈에 담았다.
‘멍청한 녀석들, 이게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서휘는 무어라 더 말하려다가 그냥 삼켰다.
그러고 보니, 대체 언제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전생에서도 보지 못했던 일이다. 소리를 들으면서 파악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으니까.
이서휘가 기대되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대체 누가 더 강할까?’
물론 이들은 훗날의 사패다. 시간이 흐를 때마다 무공 수준이 엎치락뒤치락 할 터.
이서휘는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의 비무를 구경했다.
일단 단우혁의 도법은 익히 알고 있었다. 육중한 도를 들고 싸우는 터라 강맹 일변도라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싸울 때만큼은 단우혁도 천재적이다. 공수를 완벽하게 조절하면서 기회가 왔을 때 몰아치는 것이 단우혁의 강점이었다. 하지만 이미 함께 겨루면서 도법을 눈에 익혀 놓은 상태.
때문에 이서휘는 백류혼에게 더 관심이 있었다.
아직 조부에게 검을 물려받지 못했는지 평범한 장검을 쓰고 있었다. 십대 시절에 이미 백검문이 보유한 검법을 통달했다고 알려진 백류혼이다. 남은 경지가 내공뿐이라 서화, 바둑, 술, 음식, 여인에게 관심을 돌렸다던 남자다. 때문에 지금도 그리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연일 술을 퍼마셨는지 안색이 초췌하고 백검문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게 옷도 지저분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이서휘가 바라보는 가운데 맞붙고 있었다.
한 삼십여 초를 구경했을까.
두 사람이 현재 지닌 무위를 모두 간파한 이서휘다. 두 사람이 이서휘처럼 기연을 얻어 과거로 돌아왔다면 모를까. 지금 수준은 이서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랄까. 그 때문에 어느새 피로감을 느낀 이서휘가 가부좌를 튼 자세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지루하구나.’
잠만 들었으면 괜찮았는데 잠시 후에는 심지어 코까지 약간 골았다.
드르렁― 드르렁―
누가 봐도 두 사람의 비무가 지겨워서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갑자기 코 고는 소리가 들리자 단우혁과 백류혼의 몸에서 뜬금없이 살기가 뻗어 나왔다. 두 사람 모두 이서휘의 작태를 알고 있었던 것.
잠시 후…….
콰아아아앙!
두 사람이 무슨 절기라도 동시에 내뱉었는지 공터에 굉음이 발생했다. 졸고 있던 이서휘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다시 두 사람의 비무를 바라봤다. 근처에 구경꾼들이 몰렸으면 두 눈이 휘동그레하게 커졌을 격전이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서휘에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아, 아직은 별 게 없구나. 이 녀석들아 이러다가 나중에 송무진한테 크게 혼난다.’
잠시 지켜보던 이서휘가 하품을 늘어지게 하더니 아예 차가운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서휘가 누운 채로 중얼거렸다.
“끝나면 깨워라.”
“이 새끼가!”
“저 새끼가!”
싸움은 백류혼과 단우혁이 하고 있는데 욕설은 이서휘에게 동시에 날아갔다.
전황은 의외로 백류혼이 조금 더 유리했다. 내공과 검법의 운용이 단우혁보다 더 부드러웠다. 반면에 단우혁은 공격이 실패할 때마다 스스로 내공을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백류혼에게 당장 밀릴 정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지루해하는 이서휘와 달리 서로의 무공에 감탄하면서 비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역시 단우혁…… 견고하군. 문중에 우혁이 같은 놈만 하나 더 있었어도.’
‘백류혼……. 천재라 불릴 만하다. 겉으로는 가볍게 보이지만 무공은 전혀 다른 얘기로군. 명불허전.’
두 사람이 서로의 무공에 감탄하면서 순식간게 백여 초를 다시 주고받았다.
근데 두 사람은 백중세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면서 어쩐지 기분이 상하고 있었다. 이서휘에게 무시 받는 느낌이랄까. 당대의 젊은 고수들 중 단우혁과 백류혼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물며 그 둘이 지금 겨루고 있다. 천금을 줘도 볼 수 없는 희귀한 장면이다. 과장을 약간 섞어 말하면 역사의 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서휘가 자고 있다.
또 다시 꽈아아아앙! 소리와 함께 백류혼과 단우혁이 각자 반대 방향으로 밀려났다.
백류혼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단우혁을 바라봤다. 단우혁은 눈썹을 치켜 뜬 채로 백류혼을 노려봤다.
이제 비장의 수를 한두 개씩 남긴 두 사람이다.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을 읽으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리가 멀어진 터라 슬쩍 이서휘를 바라본 단우혁. 백류혼도 마찬가지.
백류혼이 먼저 히죽 웃더니 납검을 해버렸다. 당장 단우혁을 압도할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
반면에 단우혁은 이제 서서히 술이 깨면서 몸이 더 가벼워지고 있었다. 백류혼을 이기려면 최근 연습하고 있는 절기를 사용해야 할 터. 단우혁도 썩 내키는 상황은 아니었다.
단우혁이 청룡도를 내리고, 누워 있는 이서휘에게 말했다.
“이 대주, 일어나라.”
백류혼도 이서휘의 태도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신기한 녀석이로군. 네 놈이 우리 비무를 봤다면 깨닫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터. 네놈은 스스로 굴러 들어온 복을 찬 것이다.”
백류혼이 한껏 잘난 척을 하며 냉소를 머금었다.
그때 옆으로 누워 있던 이서휘가 일어나 두 사람의 말에 대꾸했다.
“자, 이제 선택해라. 차륜전으로 덤비겠느냐 아니면 한꺼번에 덤빌 테냐. 난 상관없다.”
또 다시 도발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상대방이 웃지 않는 농담을 반복해서 하면 기분이 상하는 법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화끈하기로 소문난 단우혁이다. 슬슬 이서휘의 말에 열이 받고 있었다.
“이 대주, 적당히 하게.”
백류혼은 이서휘를 상대할 가치가 없는 자라 생각하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머리에는 단우혁과의 비무를 곱씹고 있었다.
‘아, 거기서 조금 아까웠다. 손목을 비틀지 않고 더 찔러 넣었어야 백검결의(白劍決意)가 조금 더 효과적이었을 텐데.’
이서휘도 서서히 기가 찼다.
좋게 말하니 못 알아먹는 눈치다.
백류혼과 단우혁을 바라보며 이서휘가 말했다.
“다 보진 않았지만 초반에 십칠팔 초식을 겨룰 때쯤에 백류혼이 한 번 승기를 잡았다가 실수했지? 단우혁은 강맹한 검기를 내뱉고 나서 물러났을 때 발목이 약간 틀어져서 후속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자네가 좋아하는 순간이었을 텐데 말이야. 저번에 마가를 공격하던 그 검기를 내보내고 도약했으면 흐름이 바뀌었을 터…….”
이서휘가 말을 멈추자 그대로 정적이 감돌았다.
백류혼과 단우혁이 굳은 표정으로 이서휘를 내려다봤다.
두 사람이 대꾸를 하지 못하자 이서휘가 쐐기를 박았다.
“그렇게 굳은 표정으로 있지 말게.”
이서휘가 일어나면서 말을 이었다.
“자네들은 강해. 적수를 찾기 힘들 거야. 하지만 때로는…….”
이서휘가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단우혁과 싸울 때보다 더 싸늘해진 표정의 백류혼이 아무 말 없이 검을 뽑았다.
이서휘가 백류혼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백류혼, 와라.”
선공까지 양보하겠다는 도발에 경박스러움으로 가장하고 심연에 깔려 있는 침착함을 냉혹하게 유지하고 있던 백류혼의 감정이 공터에서 처음으로 흔들렸다.
백류혼이 처음으로 자신의 말투로 말을 이었다.
“심각한 녀석이로군.”
단우혁은 아예 말이 없었다. 이서휘가 정확하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확하게 봐놓고도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누워 버린 이서휘가 아니던가. 단우혁도 자존심이 흔들릴 정도로 싸늘해진 상태.
이서휘의 도발은 제대로 먹혔다.
단우혁이 말도 없이 공터 반대편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오른팔을 올려놓는 특이한 자세로 백류혼과 이서휘를 바라봤다.
그제야 드디어 백류혼과 이서휘가 마주 섰다.
백류혼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무표정했다. 표정을 감추니 드러나는 것은 칼로 조각한 것처럼 날카로운 외모였다.
백류혼의 본질이랄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차가운 사람이다.
사패 시절에는 이서휘만큼이나 발검이 빠른 사람이었다.
냉혹한 면이 있는 검왕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서휘가 백류혼에 대해서는 백류혼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니.
이럴 때는 끝까지 도발이다.
이서휘가 마치 악마처럼 속삭였다.
“기다리마.”
선공을 양보할 셈이다.
백류혼이 이서휘를 공터 중앙에 두고 원을 그리듯이 발을 옮겼다. 누가 봐도 제대로 할 심산이었다. 세 사람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이서휘가 백류혼의 동작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노려보며 생각했다.
‘내게 한 번 진다고 해서 검왕이 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
이서휘의 바람대로 선공은 백류혼이었다.
이서휘의 이상한 태도에 그 답지 않게 주눅이 든 백류혼이 공수를 적절히 안배한 일검을 내질렀다.
그 의도, 이서휘가 모를 리 없었다.
백야검을 발검하자마자 백류혼의 검을 튕겨낸 이서휘.
백류혼은 이서휘의 검을 튕겨내자마자 무언가 잘못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의 강함을 깨닫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걸릴까?
이 자들의 수준이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다.
찰나면 가능하다.
검을 부딪치는 그 순간이면 가능하다는 말이다.
백류혼의 검과 손으로 이어지는 느낌이 이서휘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강자였구나.’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어찌 이렇게 내공이 고강하지?’
그 와중에도 백류혼은 이길 방법을 강구했다. 조부님을 제외하고 자신을 꺾을 수 있을 자는 없으리라. 백류혼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백류혼의 장검은 이서휘의 백야검보다 약 사 푼(약 12cm)이 더 길었다. 백류혼은 장검의 길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장검을 묘하게 쥐고 있었다. 검봉이 계속 이서휘의 시선을 쫓아가고 있었다.
평소의 비무라면 적당히 임하는 백류혼이다. 하지만 이서휘가 주는 압박감은 백류혼이 승부에 몰두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이서휘는 백류혼이 남들보다 더 긴 장검을 쓴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백류혼이 길이를 숨기려는 듯이 검을 잡아도 이서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백류혼을 노려보던 이서휘가 먼저 공격을 펼쳤다.
챙챙챙챙챙!
백류혼이 검을 튕겨내자 이서휘는 잠시 백류혼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줬다. 속검을 내지르면 속검으로 대응했고 보법을 변화시키면 보법을 따라갔다.
백류혼을 짓누르는 식으로 압박을 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백류혼이 진면모를 내보일 터.
초식을 펼치면 초식을 파훼했고 검기를 내뱉으면 검막으로 튕겨내거나 백류혼이 허망해질 만큼 수월하게 피했다.
백류혼이 송무진에 비해 현저하게 약하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니었다.
벌써 서른을 넘긴 송무진이다. 그가 가진 내공과 타고난 신력은 이서휘가 기연으로 얻은 내공과 맞먹을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육중한 흑부까지…….
도끼는 무림의 정점을 찍은 고수들에겐 비교적 낯선 병기였다. 실제로 송무진이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하면 추풍낙엽처럼 쓰러질 고수들이 한둘이 아닐 터.
하지만 백류혼은 다르다.
이서휘는 백류혼이라는 인간 자체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가 고전할 이유가 없었다.
백류혼은 말 그대로 검객이다. 하지만 현재는 이서휘보다 내공의 수준이 낮다. 반면에 이서휘는 당대의 검왕인 백류혼의 조부와 견줄만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고수다.
상성은 이럴 때 하는 말이리라.
그 때문에 백류혼은 공세를 펼치면서도 마치 벽과 싸우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뭐지?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잖아.’
이서휘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신에 두 눈은 백류혼을 옭아매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검으로 말을 걸었다.
간파, 봉쇄, 압박, 파훼, 무거움, 부드러움, 견고함…….
백류혼은 이서휘의 검을 쳐내면서 이서휘가 던진 의미를 정확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챙챙챙챙챙챙챙!
간파 당했다고 판단한 순간에 검을 회수했다.
봉쇄된 것을 깨닫자마자 활로를 모색했다.
이서휘가 압박하면 변초를 섞어 물러나게 하고, 초식이 파훼되자마자 가장 견고한 초식으로 몸을 방어했다. 무거운 공격이 들어오면 슬쩍 물러나거나 검을 마주치지 않았으며, 부드러운 검초가 들어오면 자신의 힘도 적절하게 빼내어 대응했다. 강력하게 대응하면 오히려 후속 공격에 당하리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
백류혼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이서휘가 던진 검의 언어를 이해하고 반격을 가했다. 지금은 이서휘가 더 강했지만, 백류혼은 천재적인 면이 확실히 있었다.
이서휘가 백류혼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얄밉지만. 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놈이다.’
하지만 그저 이해의 영역으로만 이서휘의 검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
이서휘가 서서히 격차라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백류혼이 백야검을 후려치고 후속 공격을 펼치려는 순간 이서휘의 검이 백류혼의 시야 앞에 느닷없이 검막을 뿌렸다. 이서휘의 모습이 절묘하게 사라지자 백류혼은 귀신이 이동하는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 물러나는 시간에 공중에 솟은 이서휘가 백야검을 앞세워 밀려 들었다. 과감하다.
챙챙! 챙챙챙챙챙챙!
이서휘는 공중에서 검초를 펼쳤다. 내려서는 순간에도 공격을 펼치고, 일보를 내딛는 순간에 느닷없이 암연심검의 환을 뿌렸다.
근접한 거리다.
백류혼의 선택을 강요하는 공격이다.
막으면 이서휘의 후속 공격이 손쉽게 이어질 터.
신형을 솟구쳐 피하면 허점이 드러날 터.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이서휘가 선택을 강요하자, 백류혼은 찰나의 순간에 내공을 끌어올려 백화만개(白花滿開)라는 초식을 펼쳐 대응했다.
내공소모는 심했으나 이서휘의 검기를 튕겨내는 동시에 백류혼이 뿌려댄 하얀 색의 빛무리가 수십 개로 나뉘면서 허공을 채우다가 사라졌다.
그 모습이 마치 백화가 흩날리는 것 같았는데 방어인지 공격인지 애매한 초식이었다.
하지만 백류혼은 백화만개로 적절하게 이서휘의 시선과 이동 경로를 봉쇄했다.
이서휘는 깔끔하게 추가 공격을 포기했다. 모험을 감행할 필요가 없었던 것.
‘이건 뭐야? 참고하마.’
그 뿐이었다.
다시 이서휘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속검이다. 암행표로 신형을 급하게 움직인 이서휘가 백류혼의 양 어깨와 복부를 찔렸다가 손목을 위로 꺾어 백야검의 검봉을 수직으로 솟구쳤다.
챙챙! 스슥……!
서늘한 바람이 목 밑으로 들어오자 백류혼이 내공을 주입해 백야검을 눌렀다.
타앙……!
이서휘가 내공을 불러 넣기 전에 교묘하게 검을 빼내고 검무를 펼치듯이 온몸을 보호하면서 네다섯 걸음을 물러났다. 펄럭이는 백의를 입고 있는 백류혼이다. 물러나는 동작마저 화려해 보는 맛이 있었다. 한데 그 화려함 속에도 살기가 감춰져 있었다. 등을 돌린 자세에서 느닷없이 탁섭찰나(萚燮刹那)라는 초식으로 검기를 내뱉었다.
쐐앵!
이서휘는 백류혼의 검기가 예상 외로 위력이 떨어진 것을 보고 오히려 백야검을 치켜든 채로 백류혼의 움직임을 경계했다.
터엉!
아니나 다를까.
이서휘의 접근을 막겠다는 듯이 위력이 떨어지는 백류혼의 탁섭찰나가 빠른 속도로 쏟아졌다.
쐐애애앵! 쐐애애앵!
이서휘의 눈썹이 미간으로 좁혀지면서 침착하게 백류혼의 검기를 튕겨냈다.
마치 서로를 탐색하는 과정이 이어졌을 때…….
백류혼이 땅을 박차고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저의가 궁금한 움직임이라 이서휘가 뒤로 물러서자, 질풍처럼 다가왔던 백류혼이 허공에 장검을 그어서 이서휘 주변에 백화만개(白花滿開) 초식을 뿌렸다.
쏴아아아아아아…….
방금 전에 뿌린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백화가 난무하는 형국.
백류혼은 허공에 흩어지는 백화 사이로 자신의 몸을 숨기자마자 이서휘를 향해 탁섭찰나(萚燮刹那)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맹한 검기를 뿌렸다.
한데, 그 궤적마저 백화의 사이를 관통하는 일직선 검기였다.
쐐애애애애애앵!
하지만 이서휘의 시야를 가리고 이득을 챙기려 하다니…….
그야말로 악수(惡手)다.
이서휘는 백화 사이에 숨은 채로 바람 소리를 듣고 검기를 향해 유엽비도를 소리도 내지 않은 채로 뽑아내어 후려쳤다. 이서휘는 그 순간에 일부러 유엽비도를 놓쳤다. 내공을 적당히 주입해 튕겨내자마자 손에서 유엽비도를 떨궜던 것.
타앙……!
유엽비도가 어디론가 날아가 쨍끄랑 소리를 울리자, 백류혼의 눈에서 이채가 감돌았다.
‘용케 막았구나.’
백류혼은 이서휘의 백야검을 튕겨낸 것으로 믿고 있었다. 백류혼이 신형을 날려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이서휘를 발견하자마자 장검을 내밀었다.
‘이것으로 중상은 피하리라.’
일부러 허벅지를 노린 백류혼이다.
그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백야검이 불쑥 튀어나와 백류혼의 장검을 튕겨내고, 궤적을 옮겨 백류혼의 턱 밑에 가져다댔다.
챙챙챙챙챙챙!
수세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백류혼은 순간 기지를 발휘해 이서휘의 검을 튕겨내면서 뒷걸음을 쳤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서휘의 일검에 큰 부상을 입었을 터.
그 사이 백화가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단우혁이 두 사람의 모습을 찾아냈을 때는 이서휘가 내민 검이 백류혼을 찌를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백류혼이 쥐고 있는 검은 본래 백야검에 비해서도 강도가 부족하다. 이서휘는 백류혼을 압박하면서 검신에 검사를 휘감았다. 백류혼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뒤로 물러났다.
검사 자체가 위험한 게 아니라 검을 부딪치는 순간에 이서휘가 검사를 쏟아낼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
몰리고 있었으나 그 판단만큼은 정확했다.
하지만 이서휘를 상대로 어찌 도망갈 수 있을까?
이서휘가 전방으로 솟구치는 궤적을 그리면서 백야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까앙!
이서휘는 백류혼의 검을 부딪치자마자 내공으로 검의 각도를 조절해 휘몰아치던 검사를 암연심검의 환으로 내뱉었다.
쐐애애애앵!
그 방향이 묘하다.
백류혼의 오른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화들짝 놀란 백류혼이 고개를 비틀었으나 그의 긴 머리 일부가 검기에 잘려 흩날렸다.
이서휘가 봐준 것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이서휘가 백야검을 내리고 멀뚱히 쳐다보자 제 풀에 놀라 서너 걸음을 후퇴하던 백류혼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면서 이서휘를 바라봤다.
무어라 한마디 내뱉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패배.
이서휘가 목이나 얼굴을 노렸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도 있었던 상황.
봐준 것은 고마우나 이 치욕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백류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잘려나간 왼쪽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아 살펴봤다. 크게 흉하진 않다.
백류혼은 갑자기 머리가 아찔해졌다.
생각보다 패배의 충격이 컸던 것.
잠시 후 눈을 뜬 백류혼이 자신의 긴 머리를 움켜잡아 뒷머리 부분을 싹둑 잘라냈다. 백류혼은 잘린 머리카락을 바닥 한 쪽에 던지면서 이서휘에게 말했다.
“이 대주, 살려줘서 고맙네. 단 문주, 이 대주. 다음에 보세. 먼저 가겠네.”
백류혼은 납검을 하더니 그대로 자세를 돌려 어디론가 걸어갔다. 이서휘와 단우혁이 무어라 말을 건네기도 힘든 상황. 표정과 말투는 침착했으나 단우혁에게 문주라고 할 정도로 경황이 없어 보였다.
앉아있던 단우혁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단우혁은 피식 웃으면서 어디론가 가버린 백류혼을 놀렸다.
“머리카락은 왜 잘라?”
그 말에 이서휘가 빙긋 웃었다. 단우혁보다는 오히려 이서휘가 백류혼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목숨을 한번 내줬다는 뜻이다.
적이었으면 죽음을 맞이해도 무방했던 상황.
백류혼이 더 잘 알고 있었기에 머리카락을 뭉텅이로 잘라내어 말 대신 패배를 선언했던 것.
당최, 일반적인 성격이라 할 수 없었다.
이것을 계기로 백류혼이 얼마나 와신상담하면서 검을 수련하게 될까?
이서휘가 속으로 빙긋 웃었다.
‘미친 듯이 수련하겠구만. 백류혼, 그리 하거라. 그것이 무림의 복일 것이니.’
이서휘가 납검을 한 후에 바닥에 떨어진 유엽비도를 줍자, 단우혁이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묘한 한 수로다.”
단우혁도 유엽비도의 한 수가 승패에 쭉 이어졌다고 바라봤던 것. 이서휘는 백류혼이 걸어간 길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단우혁에게 말했다.
“백류혼은 더 강해질 것 같군.”
“캬아, 행여나 그런 말은 백류혼 앞에서 하지 말게. 내가 알기로는 백류혼의 첫 패배야. 그것도 무척 굴욕적인.”
“후후.”
한편, 단우혁과 백류혼은 이미 백중세의 무위를 펼친 바 있다. 이서휘가 단잠을 잤을 정도로 싸움이 길어졌는데도 무승부였다.
한데 단우혁이 이서휘를 꺾을 수 있을까?
단우혁이 공터에서 일어나며 생각했다.
‘아, 어렵겠구나. 하지만 피하지 않겠다.’
그때였다.
두 사람뿐이던 공터에 누군가의 욕설이 들려왔다.
“이 놈의 새끼들 하여간 술을 처먹었으면 곱게 들어가 잠이나 쳐잘 것이지. 요즘 젊은 것들은 하여간…… 야 이 녀석들아!”
대체 누굴까?
청협문의 후계자와 군림맹의 대주를 싸잡아서 욕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응천에 있었던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술에 잔뜩 취한 남자가 장검을 하나 쥐고 눈을 게슴츠레 뜨고 다가와서 또 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이서휘와 단우혁이 살펴보니 그야말로 평범한 취객, 삼류에도 못 미치는 무인이다. 단우혁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죽고 싶소?”
취객은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눈이 반쯤 잠겨 있고 몸을 가누지 못해 앞뒤좌우로 흔들렸다.
단우혁이 말했다.
“물러나라.”
취객이 단우혁의 복장을 보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아아, 이놈이 이거 청협문이로구만? 너희 문주가 단의황 맞지? 내가 어제도 너희 문주랑 인마 어? 밥 묵고 어? 객잔도 가고! 어? 다 했어 인마!”
그 말에 단우혁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내 아버님과? 그대가?”
단우혁의 말에 취객이 갑자기 딸꾹질을 했다. 그러자 단우혁이 그의 버릇대로 내공을 주입한 발로 바닥을 찍었다.
콰아아아아앙! 쩌저저적!
취객이 깜짝 놀라서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이미 표정은 핼쑥해진 상태. 언제 취했느냐는 듯이 정신이 바짝 돌아오고 있었다.
이서휘가 단우혁에게 말을 건넸다.
“베지 말게. 취객일 뿐이야.”
물론 그냥 겁만 줄 생각이었던 단우혁이다. 이서휘와 단우혁이 눈을 마주치더니 동시에 피식 웃었다. 이서휘가 덜덜 떨고 있는 취객에게 말했다.
“가시오.”
허락이 떨어지자 취객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이서휘가 단우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오늘은 그냥 헤어지기 아쉬우니 철호방에 세운 자네들 거점이나 한 번 구경시켜주게나. 거기서 술이나 한 잔 더 하세.”
“비무는?”
단우혁이 묻자 이서휘가 빙긋 웃었다.
“정녕 지금 붙고 싶은가?”
아직 이서휘에게 패하지 않은 단우혁이다. 자신과 호각지세를 이뤘던 백류혼의 패배를 똑똑히 확인한 단우혁이다.
저 거침없는 단우혁마저 패배하는 것은 죽도록 싫어하는 성격이다. 이서휘는 단우혁이 망설이자 그를 약 올리기 시작하면서 객잔 거리로 걸었다.
“도전할 기회는 다음에 주도록 하지.”
“이 새끼가 근데.”
단우혁이 발끈하자 이서휘가 다시 단우혁을 놀려댔다.
“그러게 둘이 동시에 덤비라고 할 때 덤볐어야지. 기회를 줘도 쯔쯔쯔…… 하여간 이 명문가의 후계자 놈들이란…….”
단우혁이 이서휘를 땅바닥에 패대기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이서휘가 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 나갔다. 동시에 단우혁도 이서휘를 쫓아서 경공을 펼쳤다.
단우혁이 속도를 올리자, 이서휘가 점점 더 거리를 벌리더니 심지어 내공까지 실어 말을 내뱉었다.
“우혁아, 거점까지 달리마. 따라 잡으면 내가 한 번 진 것으로 해주겠다.”
단우혁은 이서휘처럼 길게 말할 수 없어서 짤막하게 외쳤다.
“새끼가! 거기 안 서?”
그러자 이서휘는 앞서 달려 나가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무림인은…… 서열이…… 명확할…… 필요가…… 있노라…….”
한데, 이서휘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단우혁 자신과 이서휘의 격차를 뜻하는 것일 터. 쫓아가는 단우혁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이서휘는 결국 단우혁을 경공으로 압도한 후에 청협문의 거점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단우혁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서휘가 얄밉게 굴었지만 악의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기에 단우혁은 달려오는 사이에 공터에서 있었던 일을 깨끗하게 지웠다.
단우혁은 그런 남자였다.
이서휘도 마치 없었던 일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데 술잔을 들 때마다 이서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단우혁이 이서휘의 표정을 바라보다 말했다.
“이 대주,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있네.”
“뭔가? 털어놔야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서.”
“하, 이 사람……. 답답하기는.”
이서휘가 그제야 단우혁을 바라봤다. 자신과는 성격이 다르다. 통쾌하고 호탕한 면이 있는 단우혁이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자네하고 본래 이런 이야기나 하려고 온 것인데 백류혼 덕분에 말이 늦어졌군. 흑도맹으로 가는 도중에 살수들의 습격을 받았었네.”
“살수?”
단우혁은 마치 자신이 살수에게 쫓겼던 것처럼 인상을 그었다. 이서휘는 단우혁의 표정만으로도 마음 한 구석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화를 내고 있지 않은가?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꽤 많이 죽였네. 내가 알기로는 아마 십객살문이라는 놈들일 거야. 들어본 적 있는가?”
“들어 보았네. 아버님과 내가 은근히 많이 돌아다녔다는 것을 알지 않나? 덕분에 자네와도 이렇게 연을 맺게 된 것이고.”
“아마 일객이라는 놈까지 내 손에 죽었을 거야. 몇 명은 살아있겠지. 문제는 그게 아니고…… 의뢰인이라는 말이지.”
“누가 의뢰했나?”
이서휘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예상이지만 아무래도 사마준보라는 놈일세. 사마세가의 후계자일세.”
“아아! 사마세가…… 묘하군. 맹을 탈퇴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이서휘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단우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생각인가?”
그 말에 이서휘가 서늘하게 대꾸했다.
“요새 이런 생각을 하게 되네. 명확한 적보다 백도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골칫덩이들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
“허허, 위험하군. 자네는 군림맹 소속일세. 한데, 탈퇴한 세가의 후계자를 죽인다? 증거가 있었나?”
“살수들이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마라는 말은 내뱉지 않을 터.”
“그런데 어찌 그렇게 확신하나?”
“어설퍼. 내 수준을 낮게 가늠하고 보냈단 말이지. 마도 세력과는 격이 떨어지는 놈들이야. 뭐 사마준보가 아니라면 딱히 나를 노릴 사람도 없네. 놈의 눈빛을 보고 몇 마디 섞으면 알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단우혁이 침음을 내뱉었다.
“흐음, 한데 사마세가와는 무슨 일이 있었나?”
“사마세가와는 아무 일 없네. 사마준보 놈이 설치는 거지.”
“그래?”
단우혁이 눈을 빛냈다. 잠시 생각하던 단우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죽이는 게 낫겠네. 그런 놈이 세가의 후계자가 되면 나중에 자네가 더 골치 아플 게야. 군림맹과 분쟁? 흐흐, 생각해 보니 사마세가가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닌가? 녀석들은 어차피 흑도맹이나 마도 세력에 붙지도 못해. 간자 취급을 받을 테지. 만약 문제가 생기면 사마세가를 상대할 때는 내가 도와주겠네.”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단우혁을 바라봤다. 무공은 물론이고 성격마저 도(刀)와 흡사하다. 이서휘의 걱정을 단칼에 잘라내는 말이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했다.
“알겠네.”
단우혁의 의견이 옳다. 군림맹을 생각해 차일피일 미루고 참았던 일이다. 단우혁의 말대로 거꾸로 이서휘가 걱정하고 있었다. 사마세가가 걱정해야 할 일이다.
단우혁이 말했다.
“설마 혼자 쳐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표정을 보니.”
“내가 그렇게 무모한 사람은 아니야. 기습할 생각도 없네. 사마준보와 맞닥뜨리는 날에 결정할 것이니 너무 걱정 말게나. 놈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야.”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단우혁의 잔을 채워줬다.
“자네는 시원시원해서 좋아.”
이서휘는 단우혁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전생에서도 그랬으며 지금도 그렇다. 단우혁이 너무 앞서가면 신중한 이서휘가 붙잡았다. 이서휘가 너무 고민에 빠져 있으면 단우혁이 일도양단 하듯이 결정했다. 둘은 궁합이 맞았다. 때문에 이런저런 고민을 안고 단우혁을 찾아왔던 것.
이서휘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흑도맹과 연합은 잘 성사시켰네. 놀랄 일이지. 나도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갔었으니까.”
“믿기지 않더군. 과연 흑도맹이 잘 협조할까?”
“최소한 우리와 분쟁을 일으키진 않을 터. 그렇게 믿고 있네.”
단우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함께 움직일 백도 세력이 없을까?”
이서휘는 일부러 ‘극제의 벽천회’를 염두에 두고 단우혁에게 질문했다. 아니나다를까, 생각에 잠겨 있던 단우혁이 씨익 웃었다.
“내가 아는 세력 중에는…… 벽천회(疈天會)를 빨리 연합에 넣는 게 좋을 것 같군.”
이서휘가 되물었다.
“벽천회?”
단우혁이 씨익 웃었다.
“절강에서 왜인(倭人)을 막느라 결성된 연합에서 출발했다 하더군. 절강의 군소방파들은 대부분 벽천회와 연결되어 있네. 마도가 일어났으니 참여시켜야겠지.”
이서휘의 생각과 똑같다.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사악한 말을 내뱉었다.
“그래. 자네에게 맡기겠네.”
“뭐? 내가 왜? 뭘 맡겨?”
이서휘가 눈을 껌벅였다.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벽천회를 참여시킨다고. 난 벽천회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가 왜?”
단우혁이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이서휘가 또 다시 단우혁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나한테 졌으니까.”
“하아…….”
단우혁은 자신의 머리 위에 김이 모락모락 솟구치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은 채로 말을 내뱉었다.
“승부를 먼저 내자, 이서휘.”
이서휘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거절한다.”
“이 새끼가 진짜!”
“아, 소문주.”
갑자기 이서휘가 정색을 하며 말을 돌리자, 단우혁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서휘, 말 돌리지 마라.”
“혹시 목 씨 성을 쓰거나 목검에 집착하는 고수에 대해 아는 거 있는가?”
지난날, 옥의림의 사부였던 중년인은 이서휘가 차고 있던 청패옥을 알아봤었다. 이는 중년인과 청협문이 알고 있다는 증거일 터.
단우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목군자(木君子) 진금구(秦金甌) 선배를 말하는 거 같은데 그 분은 어찌 뵈었나? 무림에 선배를 아는 자가 극히 드물 것인데.”
“그런가? 복귀하다가 아주 우연히 뵙게 됐네.”
이서휘가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갑자기 단우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하!”
단우혁이 미친놈처럼 웃자, 이서휘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왜 웃나?”
“푸하하하하!”
단우혁이 배를 붙잡고 뒹굴다가 손가락으로 이서휘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 하하하! 옥의림을 봤구만?”
“뭐?”
“상사병인가? 캬아, 이서휘가 보기 드문 순정남이었구만. 나는 또 왜 갑자기 이렇게 자네가 술을 찾나 싶었네. 아주 그냥 술맛과 인생의 쓴맛이 뒤섞여서 정신을 못 차리겠지? 한 잔 받아라!”
한참을 단우혁을 놀리면서 승승장구했던 이서휘의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목 선배를 물어봤더니 갑자기 웬 옥의림 얘긴가?”
“얼굴은 왜 시뻘건데? 하하하하.”
이서휘가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대꾸했다.
“아니라니까. 그 진금구(秦金甌) 선배를 물어본 걸세.”
단우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약점을 잡아 신난 표정이다.
“그렇군. 요새 날도 좋은데 그럼 우리 함께 목군자 선배나 한 번 뵈러 갈까? 아, 성함을 얘기하는 걸 싫어하시니까. 그냥 목 아저씨나 목 선배라 부르시게. 우리 아버님도 인정한 고수였지.”
“그랬나? 범상치 않으시던데 어찌 내가 위명을 한 번도 듣지 못했을까.”
“뭐, 나는 짐작 가는 바가 있네만. 확실한 게 아니라서 자네에게 얘기하긴 어렵네. 선배에 대한 실례이기도 하고.”
“그럼 묻지 않겠네.”
단우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한 말투로 또 다시 이서휘를 놀렸다.
“옥의림, 실로 아름답지 않던가?”
또 다시 단우혁의 공격이다. 이서휘가 떫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조용히 해라.”
단우혁이 근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모처럼 뜻이 맞는 친구가 참으로 다행이로군.”
“흐음, 그 다음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단우혁.”
단우혁은 이서휘의 말을 무시하고 신이 나서 떠들었다.
“백류혼의 말대로 남색이 취미이면 어쩌나 해서 무척 큰 걱정을 했었네만. 내 걱정이 기우였군. 그래. 잘 생각했네! 옥의림 같은 여인이라면 내가 자네를 응원하겠네. 우리 이 대주, 혼인할 때가 됐지.”
단우혁이 무릎을 내려치며 말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당장 내일 가서 고백하세! 남자가 여기서 술이나 퍼마시고 이게 대체 무슨 짓거리냐는 말이지. 아니 그런가?”
이서휘가 싸늘한 얼굴로 내뱉었다.
“검을 뽑아라.”
이서휘의 말에 단우혁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거절한다. 그리고 난 도를 쓰지. 당황했군. 이 대주.”
“후우우우우…….”
이서휘는 처음으로 단우혁한테 무언가에 졌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서휘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다가 일어났다.
“아, 맹으로 복귀해야겠네. 시간이 늦었군.”
“조심히 가시게.”
“벽천회(疈天會)는 자네가 좀 신경 써줘.”
“한번 알아보겠네.”
또 다시 진중해진 두 사람이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단우혁이 바래다주겠다는 듯이 일어났다.
이서휘가 말했다.
“나오지 마시게.”
“잠시만 자네에게 줄 게 있네.”
단우혁이 품에서 청색의 통을 건넸다. 길이는 약 삼 푼에 손가락보다 약간 두툼한 크기였다. 이서휘가 말했다.
“이게 뭔가?”
“새로 만든 신호탄이야. 지니고 다니게. 뚜껑을 날려버리면, 알지?”
“고맙네.”
이서휘가 품에 넣고 돌아서자, 단우혁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며칠 푹 쉬게나.”
“그러겠네.”
“살펴 가시게. 나는 내일쯤이나 오랜만에 목 선배에게 안부 인사나 드리러…….”
걸어가던 이서휘가 걸음을 우뚝 멈추자 단우혁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등을 돌려 버렸다.
이서휘가 등을 돌린 단우혁을 때릴 수는 없는 법, 한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서휘는 군림맹으로 향하면서 목군자라는 인물을 떠올렸다.
“선배의 성함이 진금구(秦金甌)였다니……. 하필 진 씨로구나.”
이서휘의 사부인 검선의 이름이 진무결이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이서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음? 금구무결(金甌無缺)?”
이것은 마치 누가 이름을 맞춰서 지어준 것 같지 않은가. 금구무결(金甌無缺)이란 흠집이 전혀 없는 황금(黃金) 단지를 뜻했다.
“우연인가?”
우연일 리가 없었다.
이서휘는 흑마에 올라타 진금구와 옥의림을 생각하면서 군림맹으로 달렸다. 하지만 객잔 거리에 도착할 때쯤, 이서휘는 상념을 지워야했다.
어두운 밤길을 두 명의 사내가 막아섰기 때문.
말을 세운 이서휘가 두 명의 사내를 보자마자 품으로 손을 넣어 신호탄을 꺼내려다가 멈췄다.
사내 중 한 명은 다름 아닌 사마준보였기 때문.
그림자에 숨어 있다가 얼굴을 내민 사마준보가 이서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자 이서휘는 사마준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아직 그림자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사마준보가 얼굴을 드러내고 왔을 정도로 이번에는 자신이 있다는 뜻일 터.
이서휘는 한마디도 내뱉지 않은 채로 조용히 말에서 내렸다. 이서휘로서도 무척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
사마준보 옆에 있던 사내가 말했다.
“사마공자, 고작 저런 놈을 죽이겠다고 날 부른 겐가?”
이서휘는 사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수라 판단하고 철선을 손에 쥐더니 촤르륵 소리와 함께 펼쳐서 얼굴을 반쯤 가렸다.
계속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사내인지라 암기가 날아올 수도 있었기 때문.
사마준보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강해요. 일객을 아시지 않습니까? 자자, 죽이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일단 팔 하나만 잘라 주십시오.”
이서휘가 사마준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참으로 불쌍하게 사는구나.’
이서휘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서 어둠 속으로 숨었다. 너무나 공교롭다. 조금만 더 가면 객잔 거리다. 아마도 사마준보는 전서구가 미리 군림맹을 도착했다는 것을 듣고 이서휘의 복귀 시점을 예상한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당당하게 나서다니…….
이서휘가 어둠 속에서 사마준보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사내를 노려봤다.
어쩐지 이서휘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자 사마준보는 흥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사마준보가 말했다.
“서휘야.”
그때, 이서휘의 철선이 바람을 가르며 사마준보에게 날아갔다.
타앙……!
사마준보 뒤에 있던 사내가 어느새 등장해 얇은 검으로 철선을 튕겨냈다. 사마준보는 막을 수도 없는 속도. 사내가 막지 못했다면 사마준보의 목이 철선에 갈라져 날아갔을 터.
사마준보의 눈이 휘동그레지자 그제야 얼굴을 드러낸 중년인이 말했다.
“날 제대로 불렀군. 돌아가 계시오. 사마공자.”
“무슨 소립니까? 팔이나 하나 잘라 놓으시라니까요.”
그 말에 중년인이 고개를 힐끗 돌려 이서휘를 바라봤다. 그제야 이서휘가 어둠 속에서 한마디를 내뱉었다.
“못 간다. 둘 다…….”
“미친 새끼가 이 분이 누군지나 알고…….”
이서휘가 사마준보의 말을 백야검으로 끊었다.
쐐애애애앵!
콰아아아아아앙!
또 다시 중년인이 나서서 검기를 튕겨내자, 동시에 이서휘의 신형이 과감하게 앞으로 나갔다. 이서휘는 움직이면서 좌수로 유엽비도를 뽑아들고 사마준보가 데려온 중년인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고수라는 것을 판단했기에 이서휘는 시작부터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서휘와 중년인이 맞붙었다.
채앵! 챙챙챙챙!
이서휘가 좌도우검을 동시에 휘둘렀다. 굳이 유엽비도를 좌수에 쥔 것은 사마준보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때문에 이서휘는 중년인과 백야검을 부딪치면서 유엽비도를 적절하게 휘둘러 사마준보의 검을 튕겨냈다.
사마준보는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중년인과 이서휘가 엄청난 속도로 맞붙고 있어 쉽사리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던 것.
‘이서휘, 이 새끼가 이렇게 강했나?’
사마준보가 데려온 사람은 사마세가의 식객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오현중(吳顯重)이라는 중년인이었다. 그 오현중과 이서휘가 불꽃을 튀기면서 겨루고 있었다. 사마준보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장면이었다.
이서휘도 중년인의 실력을 체감하고 있었다. 변수가 생기기 전에 중년인의 검을 부러뜨려야겠다고 생각한 이서휘. 검을 맞부딪치는 와중에 검사를 휘감아 수직으로 그었다.
중년인은 이서휘의 백야검이 무언가에 휘감기는 것을 보자마자 내공을 가득 실어 백야검을 막아냈다.
떠엉……!
동시에 사마준보의 검이 이서휘의 옆구리를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이서휘가 비릿하게 웃으며 유엽비도를 내밀어 사마준보의 검을 막아냈다.
까앙……!
이서휘가 좌도우검으로 내공을 내보내며 생각했다.
‘될까?’
지난날 송무진과 겨룰 때 검사와 검기를 한 점으로 응축시키면서 내공을 갈무리했던 이서휘다. 거기에 암천세까지 쏟아냈으니 그 깨달음이 뜻하는 바는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서휘는 좌도우검에 검사를 내보내는 대신에 밀려들어오는 중년인과 사마준보의 내공을 좌도우검에 갈무리했다.
오현중과 사마준보는 이서휘가 양 측으로 밀려드는 내공을 받아내면서 얼굴이 붉어지자 기회라 판단해 끊임없이 내공을 내보냈다.
이서휘가 버티지 못하는 순간에 폭사(爆死)하리라 생각했던 것.
하지만 이서휘는 검사를 일점으로 갈무리했던 묘리로 오현중의 내공을 받아들였다가, 벼락같이 좌도에 실어 암연심검의 파를 내뱉었다.
드드드드드드득! 쐐애애앵!
부르르 하고 떨리던 유엽비도에서 오현중의 내공이 쏟아져 나와 사마준보에게 쏟아졌다.
파아아앙!
사마준보가 어떻게 당한 것인지도 모른 채로 날아갔다.
동시에 오현중이 검을 비틀어 끼이이익 소리와 함께 백야검에 자신의 검을 붙인 채로 이서휘의 팔로 떨어졌다. 하지만 오현중의 검은 백야검의 검병 부분에서 턱! 소리와 함께 멈췄다.
이서휘가 끝내 내공을 쏟아내어 오현중의 검을 붙잡아버렸던 것.
이서휘와 오현중의 눈이 마주쳤다.
검을 붙잡는 것도 떼어내는 것도 이서휘가 결정할 일이었다.
오현중의 눈이 커지자, 이서휘는 백야검을 잡아당김과 동시에 유엽비도를 수평으로 그었다.
서걱……!
유엽비도가 오현중의 목을 가르고, 이서휘의 신형도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더니 도망치기 시작한 사마준보를 향해 암연심검의 파를 쏟아냈다.
쐐애애애애앵!
백야검에서 뻗어 나간 검기가 반월 모양으로 사마준보를 쫓았다. 그때 타악! 소리가 들리더니 이서휘의 신형이 자신의 검기를 불가사의한 속도로 따라붙었다.
이서휘가 내보낸 일자형 검기가 사마준보의 허리로 날아가자, 사마준보가 급히 몸을 뒤틀어 검으로 막아냈다.
콰아아앙!
사마준보가 검을 수직으로 세운 자세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어느새 다가온 이서휘가 좌장으로 사마준보의 가슴을 강타했다.
퍽! 소리와 함께 뼈가 뚝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적막한 밤거리에 울렸다. 피를 토하고 쓰러진 사마준보가 무어라 말을 내뱉었다.
“서휘야…….”
그때 백야검이 사마준보의 복부에 꽂혔다.
“커헉……!”
이서휘는 사마준보의 턱을 잡아 오현중의 시체 쪽으로 던져 버렸다. 사마준보가 피를 흘리면서 날아가 오현중의 시체와 겹쳤을 때 이서휘가 암연심검의 환을 내보냈다. 가차 없이 쏟아지는 이서휘의 검기가 사마준보와 오현중의 시체를 꿰뚫어버리고 땅바닥에 부딪치면서 굉음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앙!
말 그대로 폭사.
그때, 어디선가 굉음 소리를 들은 늑대가 긴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이서휘는 좌도우검의 피를 털어내어 납검하고 철선을 주운 다음에 아무 말 없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흑마를 향해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불쌍한 녀석…….”
이서휘는 무표정하게 흑마에 올라타 박차를 가하면서 군림맹으로 향했다.
이서휘는 달리는 와중에 사마준보를 기억에서 지우고 목군자 진금구(秦金甌) 선배를 떠올렸다.
“어쩌면…….”
진금구 선배가 이서휘의 사부인 검선 진무결과 형제 관계가 아닐까 추측한 이서휘.
그렇다면 훗날 옥의림이 여중제일고수로 떠오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옥의림이나 화지련이나 이제 겨우 이십 초반의 나이다. 회귀한 이서휘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검왕 백류혼마저 이서휘에게 무력하게 패배했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서휘는 그 둘이 성장할 때까지 마도와의 싸움을 길게 끌 수가 없었다. 때문에 목군자는 어떻게든 다시 만나 무림으로 이끌어낼 생각이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은 예감이 들었다.
이서휘는 자신의 곁에 목군자와 검선이 있기를 바라면서 군림맹으로 향했다.
다음날 이서휘가 월야대의 연무장에 서 있자, 이서휘보다 늦게 나온 월야대원들이 깜짝 놀라면서 이서휘를 맞이했다.
“대주님!”
“대주, 이게 얼마 만이오?”
화지련을 제외한 월야대원들이 이서휘를 둘러쌌다. 이서휘를 신기한 사람 보듯이 쳐다보는 것은 물론이고 도이와 도삼은 이서휘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짜증을 버럭 냈다.
“뭐하는 짓이야?”
도이가 이서휘의 팔뚝을 쿡쿡 눌러보며 말했다.
“귀신이 아닌가 해서.”
도삼이 다가와 이서휘의 목을 손으로 비볐다. 이서휘가 도삼의 머리통을 한 대 때리며 말했다.
“뭐야? 이 자식아.”
도삼이 자신의 머리를 비비면서 말했다.
“인피면구가 아닌가 해서요.”
정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성격이 더러운 것을 보니 이 대주가 맞는 것 같군.”
이서휘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화지련은?”
이서휘의 말에 도이, 도삼, 정천이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왜 웃어?”
정천이 대꾸했다.
“화지련은 아마 검대에 있을 것이네.”
“검대?”
이서휘의 물음에 도삼이 대꾸했다.
“대주님이 없는 사이에 화 소저의 별호가 새로 생겼습니다.”
“뭔데?”
“비무 귀신이라고. 전적이 어떻더라? 삼십팔 승(勝) 이십구 패(敗)던가. 주로 대원들하고 겨루는데 화지련의 승률이 더 높더군요.”
“비무는 여기서도 충분했을 텐데?”
그 말에 정천이 히죽 웃었다.
“월야대 전적은 다 뺀 거야. 여기서는 전패했지. 기분이 나쁘다고 우연히 검대 무인과 한 번 겨뤘는데 그 뒤로는 쭉 비무를 하고 돌아다니네. 뭐 워낙 예뻐서 그런지 검대에서는 제법 잘 봐주는 모양이야.”
그 말에 이서휘가 피식 웃었다.
“화지련 답구나.”
이서휘는 이른 아침에 복귀 신고를 마치고 질풍검대와 월야대를 돌아보며 사람들과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백도맹으로 떠났던 사자는 아직 복귀하지 않은 상태라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전에 끝이 났다. 오후부터는 다시 연공실에 들어갔다. 복귀하자마자 연공실로 들어가겠다고 하자 도삼과 도이가 황당한 표정으로 이서휘를 구박했다.
“대주, 좀 적당히 하시오.”
“대주님, 너무한 거 아닙니까? 뭐, 천하제일인이라도 될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이서휘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금방 나올 거다. 오후에 검풍객잔이나 같이 가자.”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연공실에서 검기를 갈무리하는 방법을 세밀하게 다듬기 시작했다. 그 전에 도삼의 말이 떠올라 씨익 웃게 된 이서휘다.
“천하제일인이라…….”
* * *
이서휘가 군림맹에 복귀한 무렵…….
당대의 천하제일인이 구화산을 홀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천하제일인이라 주장한 적이 없던 사람이다. 일부 사람들이 천하제일인이라 추켜세웠다가, 다시 파렴치한으로 내몰았으니까.
겉으로 보면 칠십 정도 되었을까?
실제로는 백 세를 훌쩍 넘겼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노인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한데 그 바람의 힘마저 견디지 못한 머리카락 뭉텅이가 바람에 날려 쑥 빠지더니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노인은 바람에 날리는 자신의 흰머리를 보더니 어울리지 않게 욕설을 내뱉었다.
“썩을 놈의 바람…….”
그때였다.
십여 명의 노복(奴僕)들이 노인을 발견하자마자 달려와 쓰러지듯이 땅바닥에 달라붙어서 저마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 자꾸 불편하신 몸으로 어디를 가십니까?”
노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시끄럽다. 누가 여기까지 쫓아오라 하더냐?”
노인은 자신을 수발하던 노복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수명은 내가 잘 안다. 이제 구화산에 오를 터이니 열흘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으면 그대로 등선(登仙)한 줄 알거라.”
“어르신, 아직 정정하시지 않으십니까? 어찌 저희를 속이려 하십니까? 등선이라니요. 돌아가시지요, 이제.”
“관아, 중선아…… 다들 잘 듣거라. 내가 죽었다고 동내방내(洞內坊內)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그리고 아들들에게 내 유언이라고 전해.”
“아들들이라니오? 큰 아드님과 둘째 아드님이 돌아가신지도 벌써…….”
“시끄러워. 중선, 자네는 알지?”
노인이 바라보자 풍채가 그 누구보다 큰 노복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일단은…….”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비를 용서하든지 말든지 관심 없다, 이렇게 전해라.”
“기억했습니다. 그리 전하지요.”
“또 있다.”
“말씀하십시오.”
노인이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세상일을 외면하지 말라……. 이렇게 전해다오.”
“알겠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됐다, 그럼. 이제 따라오지 마라. 혼자 갈 터이니.”
“어르신! 이거라도 가지고 가십시오. 어찌 평생 함께 하신…….”
노복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장검 하나를 바쳤다.
“쓸데없는 짓을! 내가 짐승에게 당할 거 같아서 이런 걸 챙겨 온단 말이냐.”
“아닙니다.”
노인이 끌끌 웃으면서 노복이 내민 장검을 취했다.
“그래. 가지고 가마. 돌아들 가라. 장례도 치르지 말고 무림인들에게 알리지도 말아라. 번거롭다. 그리고 아직 내 죽음을 알면 좋아할 녀석들이 있으니까. 그런 즐거움은 주기 싫구나. 간다.”
그야말로 소탈함 그 자체.
노인은 사람들의 외침을 무시하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구화산을 올랐다.
잠시 후 노인은 일전에 이서휘가 찾아낸 석실에 도착해 마치 제 집인 것처럼 기관 장치를 누르고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그그그그긍!
석실의 문이 닫히자 노인은 석실의 중앙으로 걸어가면서 이리저리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어허, 손님이 들었었구나.”
노인은 쭈글쭈글한 손을 내밀어 석수를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하구나.”
잠시 후에 노인은 석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수련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월단화가 자라는 곳으로 간 노인이 잘려 있는 월단화를 보고 빙긋 웃었다.
“고얀 놈, 어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적혀 있지 않구나.”
그 다음에 노인이 찾아간 곳은 천(天)자가 잔뜩 그어진 방이었다. 노인이 좌장을 휘두르자 먼지가 날렸다. 노인은 손을 뻗어 벽에 새겨진 검의 흔적들을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무결이도 아니고 금구도 아니고 누가 왔던 게냐? 내공은 얕으나 제법이구나. 제법이야.”
한참을 벽을 바라보던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치 이서휘에게 건네는 말투였다.
“아니다. 아니지. 그렇게 억지로 하면 몸이 상했을 텐데. 내 지난날의 동작을 따라하다니, 내 탓도 있구만.”
노인은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장검을 뽑더니 아무런 기교 없이 벽에 하늘 천자를 적었다.
“천 자를 연습한 것은 천 자 안에 베는 궤적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야. 이걸 어찌 한꺼번에 쏟아내려 했느냐.”
노망이 든 것일까? 아니다. 이서휘가 쏟아낸 검의 흔적에서 이서휘의 고민을 엿본 노인이다.
노인은 한쪽 벽에다가 장검을 들고 어렵지 않게 세 번의 동작으로 구멍을 뚫어놓았다. 그 깊이와 뚫어낸 구멍의 넓이가 다 달랐다. 삼 푼, 육 푼, 구 푼의 길이였다.
“이렇게만 쓰거라. 요새 검법은 너무 복잡하단 말이지. 아니다. 너 정도면 이것도 가능하겠다.”
말과 함께 노인은 일견, 똑같아 보이는 구멍을 세 개 뚫었다. 다를 게 있다면 검신을 비틀었다는 것 뿐.
노인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것도 쓸 수 있음 쓰거라.”
노인은 말을 마치더니 한쪽 벽의 흔적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평생에 걸쳐 자주 쓰던 동작을 펼치면서 검을 그었다. 천 자를 그리면서 애써 따라했을 후배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그것은 문자가 아니라 검의 궤적 그 자체였다. 누군가 보아도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 반면에 검의 경지에 오른 자가 보면 저 흔적을 보고 한두 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노인이 중얼거렸다.
“자네는 한두 가지만 더 깨달으면 될 게야. 더 배우면 번잡해질 것이다. 줄이거라.”
노인은 갑자기 빙긋 웃으면서 두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울면서도 표정은 그야말로 편해 보였다.
감정의 표현이 그야말로 솔직했다.
노인은 다시 움푹 파인 곳으로 되돌아와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을 뜬 노인이 깜박했다는 듯이 옆에 두었던 장검으로 석실 바닥에 글자를 새겼다.
그 동작이 마치 붓을 들어 쓰는 것처럼 편했다.
“인연이 닿는 자에게 검을 남긴다. 검성(劍聖).”
노인은 검을 내려놓고 가부좌를 튼 채로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석실에 찾아 들고 있었다.
월경(月頃, 한 달가량)이 흐른 무렵에야 백도맹과의 연합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서휘는 간간히 보고를 받으며 조용히 연공실에서 수련으로 일관했다.
연합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백도맹과 군림맹의 중간 지점에서 만나 임시라도 통합 련주(聯主)를 뽑자는 전서구가 군림맹으로 도착한 상태.
이서휘는 예상했던 일이라 소식을 들을 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통합 련주라니……. 백도맹 답다.’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뽑는 느낌이 강했다. 말이 통합 련주였지 무림 맹주를 뽑자는 말이나 다름이 없으리라. 혹은 통합 련주가 필요한 게 아니라 군림맹을 밑으로 두겠다는 수작일 터. 거기까진 남궁위 맹주가 해결해야 할 일이라 이서휘는 잠자코 있었다.
다시 며칠 후에는 천뢰각주 한신을 통해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 내용이 묘했다.
“검성이 구화산에 올라 등선하셨다는 소문이 있더군. 검성을 모시던 노복들이 구화산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네.”
한신의 말을 듣고 월야대로 돌아온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화산비사를 살피게 되었다. 하지만 화산비사 어디에도 구화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묘하네. 하필 구화산으로 가셔서…… 등선을 하셨단 말인가?”
이미 화산비사를 통해 검성의 행적을 일부 알게 된 이서휘다. 그를 스쳐 지나간 여인도 제법 많았다. 검성이라는 이름을 추락시킨 추문들은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이서휘다. 본명과 신분을 밝히고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 이름들을 비롯해 추문이든 전설적인 일화든 모두 허망하게 흩어지고 남은 것은 오로지 검성이라는 별호 두 글자였다.
이서휘가 전생을 더듬었다.
‘검성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이 시점이었나?’
이서휘는 눈이 멀어 있던 시점이다. 제 앞가림도 못하던 나날이다. 그 때문에 그저 스쳐 가는 소문으로 듣고 이내 기억에서 지웠던 일이라 가물가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검성의 죽음은 무림의 시대가 바뀌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셨다는 소문도 아니고 구화산으로 오르셨다고 하니 이서휘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석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서휘다.
‘무언가 석실과 관련이 있으려나? 조용히 다녀올까.’
벌써 월경이라는 기간 동안 특별한 일 없이 수련에만 열중하던 이서휘다. 며칠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없을 터.
‘다녀오자. 수련의 성과도 확인할 겸 경공의 한계도 더 뚫어주마.’
다음날 일찍, 이서휘가 평소처럼 월야대 연무장으로 나와 도삼과 도이, 정천, 화지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 할 말 있소?”
도이가 말하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도삼아.”
“네, 대주님.”
“복숭아 먹으러 갈 테냐?”
도삼이 기가 차다는 듯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쯔쯔, 정말 세상 천지에 대주님보다 더 뜬금없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소. 그 복숭아가 대체 언제 이야기요?”
이서휘는 도삼의 말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복숭아 먹으러 갈 사람?”
정천이 대꾸했다.
“어디로 가자는 말인가?”
이서휘가 무어라 말하려고 하자 도이가 화를 버럭 냈다.
“아니,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복숭아 하나 잡수시겠다고 구화산을 간단 말이오?”
그 말에 정천마저 화들짝 놀랐다.
“복숭아를 먹으러 구화산까지 간단 말인가? 이 대주, 제정신인가?”
이서휘가 말했다.
“백도맹과 연합 일은 쌍각이 처리하고 있으니 당분간 월야대가 할 일은 없소. 말 한 필이면 충분하오. 도중에 경공을 수련한다 생각하면 금방 다녀올 터인데. 뭐 싫으면 강요하지 않겠소. 난 다녀오리다.”
이서휘가 말과 함께 다시 숙소로 들어가더니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여러 장비를 챙겨 나왔다. 복숭아 하나 먹겠다고 구화산에 간다고 하니 사람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이서휘가 아무 말 않고 있는 화지련에게 말했다.
“지련아 갈래?”
“무슨 복숭아길래 그래요?”
화지련만 제대로 된 질문을 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구화산의 정기가 응축된 복숭아지. 제천대성이 먹었을 법한 복숭아랄까? 뭐, 강요는 안 해. 왜냐하면 수련이라고 생각하고 전속력으로 다녀올 생각이니까.”
이서휘의 경공 실력은 다들 뼈저리게 알고 있다.
이서휘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복숭아를 먹고 싶으면, 그게 천길만길이라도 먹으러 간다. 그 뿐이다.”
도이가 대꾸했다.
“잘 나셨소. 원 없이 드시고 오시구려. 한 백여 개 드시고 등선한 다음에 오시오.”
수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험난한 여정이 될 터. 도이와 도삼, 정천은 계속 몸을 사리고 화지련은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이서휘가 웃으며 말했다.
“난 분명히 가자고 했다. 다녀오마.”
“조심히 다녀오시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구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서휘의 직감이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 직감이 꼭 좋게 작용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무려 천하제일인의 죽음이다.
더군다나 검성이 구화산에 올랐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검성의 유언을 누군가가 지키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목군자 진금구나 검선 진무결에게 소식을 전하는 사이에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일까.
그 누구도 자세한 사정은 모를 것이다.
어쨌든 검성에 대한 소문은 이미 중원 무림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서휘는 석실의 위치를 알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움직이고 있었지만 평소 검성의 위명을 알고 있던 무림인들도 소문을 듣고 속속 구화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뭐라도 있지 않을까.’
무림인은 희한한 인간들이다.
비정상이라고 하면 이보다 더 비정상적인 행동이 없을 터.
오히려 석실의 위치와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는 이서휘가 가장 정상적인 선택을 하고 구화산으로 떠나고 있었다. 한데, 군림맹과 구화산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드넓은 중원 무림의 고수들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릴 터.
더군다나 이서휘는 검성이 구화산에 올랐다는 한신의 말을 듣자마자 흑마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가고 있었다.
문제는 이 시기에 검성의 행보에 늘 주목하고 있던 마가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마가는 다른 목적으로 병력을 급파했다. 더군다나 마가는 이서휘의 전생에 석실 앞으로 무림인들이 모이게 하여 음모를 꾸민 적이 있었다. 이서휘의 예상과는 달리 그야말로 다양한 무림의 고수들이 검성의 행적을 찾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비급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검이라도 한 자루 남겼으면.]
검성을 이어받게 되는 것이다.
검성이라는 불빛을 따라 불나방들이 몰려 들고 있었다.
이서휘는 영문도 모른 채로 흑마를 달래면서 구화산으로 빠르게 달려 나가고 있었다.
* * *
차라리 이서휘가 소식을 늦게 접하고 훗날에 갔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서휘가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는 노릇.
밤낮없이 달려서 중간 지점에 도착했을 때 이서휘는 한 객잔에 지친 흑마를 묶어두고 월야대원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경공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서휘가 구화산에 도착했을 때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제법 늘었네?’
이서휘가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한데, 구화산 밑은 이미 세상이 달라진 것처럼 시끌벅적했다. 야시장(夜市場)이라는 말이 어울렸을 정도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객잔이 새로 생긴 것은 물론이고 일전에는 보지 못했던 잡화상이 가득했다. 과장해서 말하면 마을 하나가 통째로 생긴 느낌이랄까. 그대로 석실로 직진하려던 이서휘는 일부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객잔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이서휘는 간단하게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소?”
사십 대의 중년인이 이서휘의 행색을 위아래로 살피면서 말했다.
“어디서 오셨소?”
“양원에서 왔소.”
물론 거짓말이다. 그 말에 중년인이 대꾸했다.
“멀리서도 오셨네. 얼마 전에 검성 어르신이 구화산에 오르셨다고 하오. 시체도 못 찾았다지. 신선이 되셨다는 소문이 파다하오. 벌써 며칠 째 사람들이 구화산을 샅샅이 뒤지고 있소만 검성 어르신의 코빼기도 보이질 않소. 하지만 사람들은 떠나지 못하고 있지.”
“어째서 그렇습니까?”
“검성 어르신이 뭐라도 하나 남기지 않았을까 믿는 사람도 있고. 소문을 듣자하니 무림 고수들이 속속 몰려오고 있다고 하오. 이렇게 사람이 몰리면 어떠하겠소? 몰리다 보니 야시장이 열렸고 뭐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소? 비무 대회라도 열릴 판국이오, 지금.”
그때 바깥이 무척 소란스러웠다. 중년인은 바깥의 소음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어중이떠중이가 몰려들더니 검성 어르신에 대한 이야기는 관심을 두지 않고 어떻게 이름이라도 날려볼까 하는 무림인들도 제법 많소.”
이서휘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까? 구경 좀 해야겠군요.”
이서휘는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객잔 바깥으로 나갔다. 제법 위세가 당당한 무인이 상의를 풀어헤치고 저 옛날 장비가 들었을 법한 요란한 장창를 하나 쥐고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관서의 사정철이라 하오. 아무나 붙어 봅시다.”
딱 봐도 겨우 이류 수준의 무인. 사정철의 작태에 피식 웃는 자가 태반이었고 일부는 놀랍게도 눈치를 좀 보다가 사정철과 붙어보려는 기색이었다.
이서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실로 개판이로구나.’
하지만 그때 굉음은 구화산 쪽에서 들렸다. 이서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마저 사정철을 버려두고 소리가 난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이서휘도 신형을 날려 구화산 턱 밑으로 이동했다. 이서휘가 가보니 구화산으로 오르는 입구 앞이 대낮처럼 불이 밝혀 있고, 두 명의 무인이 각자 검과 도를 들고 맞붙고 있었다.
대체 이런 곳에 와서 맞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서휘가 바라보니 두 사람은 마치 원수를 만난 것처럼 살벌하게 겨루고 있었다. 이서휘가 구경하고 있는 사내 한 명을 붙잡고 말했다.
“뭐 저리 살벌하게 싸우는 것이오?”
구경꾼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뭐 듣자하니 여기서 원수를 만난 듯하오. 몇 마디 하지도 않고 저렇게 되어 버렸소.”
“허허. 이것 참 난장판이로군.”
이서휘가 구경하는 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니 정파는 물론이고 사파와 정사지간의 인물들도 제법 보였다. 또 면면을 살펴보면 세가의 공자, 승려, 도사는 물론이고 칠팔십은 돼 보이는 늙은 무인들도 저마다 장검 한 자루를 품고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이서휘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한 남자에게 시선을 뺏겼다.
복장이 무척 특이했다.
나이는 서른쯤 되었을까. 하의는 검은색이고, 상의는 달라붙는 잿빛이다. 한데 그 위에 갈색 빛이 나는 가죽을 걸쳤는데 길이가 무척 짧았다. 딱 봐도 중원 무림인들이 입는 의복이 아니었다. 흑발을 길러 어깨까지 늘어뜨린 터라 이서휘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자들도 가끔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군다나 팔짱을 낀 자세로 검 한 자루를 가슴에 품고 있었는데 장검마저 중원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검신이 두툼했다.
사내는 비무를 구경하다가 갑자기 알 수 없는 언어로 싸우는 자들에게 말했다.
그 순간에 장검을 쥔 자가 무슨 수를 썼는지 상대를 유인했다가 가차 없이 목을 갈라 버렸다.
사람들의 비명이 터지자, 새외(塞外) 무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어눌한 한어로 말했다.
“조심하라니까. 하하하. 멍청한 놈이다. 죽어. 죽어, 마땅하지.”
사내는 말과 함께 중앙으로 나섰다.
그러자 방금 원수를 죽인 사내가 왼손을 들어 새외 무인을 제지했다.
“이 자는 원수라 죽였을 뿐. 비무를 할 마음이 없소.”
“비무?”
새외 무인이 히죽 웃자 검게 칠한 아랫니가 드러났다.
“비무가 뭔가? 비무는 몰라. 너 그리고 나. 싸울 뿐.”
그런데 새외 무인이 고개를 돌리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어디선가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서휘가 바라보니 새외 무인의 귀에 귀걸이가 잔뜩 걸려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그곳에 몰려 있자 이서휘는 조용히 빠져 나와 구화산의 입구가 아니라 잔뜩 어둠이 깔린 구화산의 외곽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새외 무인과 검객이 맞붙었는지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저런 싸움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소란스러움이 잦아들 때까지 조용히 걷던 이서휘는 잠시 산길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앉았다.
‘사람이 더 몰려온다는 얘기가 아닌가. 늦게 왔다면 당분간 오르지도 못했을 터.’
이서휘는 정신을 집중해서 주변에서 들리는 온갖 소리를 침착하게 구별해냈다.
석실로 가는 산길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는지, 이동하는 자는 없는지 등을 가늠해 본 이서휘.
전생에는 장보도가 무림에 퍼져서 석실의 위치를 아는 자가 제법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서휘가 대도를 죽여 미리 차단했기에 마가의 일부가 아니면 석실의 위치를 아는 자가 거의 없을 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신중을 기하는 것이 옳았다. 잠시 후 이서휘는 조용히 눈을 떠 하늘을 바라봤다.
달이 구름에 가려 희미한 빛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문득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그 순간 이서휘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구화산의 석실을 향해 한 줄기 신형이 바람을 가르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순식간에 구화산의 석실 앞에 도착했다.
이서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쏟아지는 별과 구름을 벗어난 달이었다. 들리는 것은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와 가끔 불어오는 바람 소리…….
이서휘는 오랜만에 찾아온 석실 주변을 둘러봤다. 돌이켜보면 이서휘의 인생은 이곳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구화산의 기연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이서휘는 석실 앞에 도착하는 순간에 이미 누군가가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서휘는 조용히 백야검을 꺼내 석실의 기관 장치를 누르고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그그그그긍.
이서휘는 다시 석실 문을 닫고 조용히 석실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석실은 본래 무척 서늘한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의 온기가 석실 안에서 느껴졌다. 어찌 사람의 온기를 석실에서 느낄 수 있을까? 하물며 이 넓은 석실에서 어찌 사람의 온기가 전해질 수 있을까. 불가사의한 일이었으나 이서휘는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서휘는 석실의 중앙에 도착하자 온기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역시 이곳이 검성 어르신이 머물던 곳이었구나…….’
천장에서 쏟아지는 별빛 아래 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던 것.
이서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시 서서 노인을 바라봤다.
‘어찌 저렇게 편한 모습이실까?’
이서휘는 검성과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앉아 있는 검성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후배 이서휘, 검성 어르신께 이제야 인사를 드립니다.”
이서휘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잠시 검성의 넋을 기렸다.
어쩌면 이서휘의 사부였던 검선의 아버지다. 표현이 다소 애매했지만 어쨌든 이서휘에겐 사조님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이다. 이서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검성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는 자세로 잠시 앉아 있었다.
이서휘가 마치 검성에게 말을 걸듯이 입을 열었다.
“후배가 일전에 어르신의 장소를 멋대로 사용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서휘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였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검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천천히 떴다.
소스라치게 놀란 이서휘가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헉! 어, 어르신……!”
검성은 아무 말도 않고 이서휘를 잠시 바라봤다.
‘누구냐?’
검성은 그제야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우물우물 움직였다. 대체 며칠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것일까. 별안간 툭 소리가 나면서 입술이 떨어졌다. 어찌 이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검성 본인도 명확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누군가의 말소리가 무아지경의 순간을 깨뜨렸다는 사실만 느끼고 있었다.
검성이 천천히 호흡을 내뱉다가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누구라고?”
이서휘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대꾸했다.
“이서휘라 합니다.”
검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서휘. 처음 듣는 이름이로구나. 대체 며칠이나 흘렀는가?”
“네?”
검성이 언제 이곳에 들어왔는지 이서휘가 어찌 알겠는가. 이서휘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보름은 흐른 것 같군.”
달포가 흘렀다. 무아지경을 겪으며 시간조차 잊은 검성이다.
이서휘도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어 황당한 눈빛으로 검성을 바라봤다.
검성은 눈을 감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 놓았던 내공이 스스로 움직이면서 진기를 일주천하고 있었다. 검성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게 전혀 없었기에 남아 있는 진기를 마치 생명력처럼 소비하면서 잔잔하게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검성은 등선이라는 경지가 있을까 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시간조차 무의미해진 상황이었던 것.
검성도 자신의 상태가 궁금했다.
“나는 어찌 살아 있을까. 자네가 오지 않았다면 한참을 더 고생했을 게야.”
“제가 어찌…… 어르신, 살아 계셔야 합니다.”
검성의 말이 이상하니 대꾸하는 이서휘의 대답도 이상했다.
검성이 말했다.
“육신은 시간이 되었다 하는데 쌓아 놓은 게 제법 많아 이리 버텼나보다.”
“내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서휘가 물어도 검성은 희미하게 웃을 뿐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이서휘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어르신, 물을 가져다 드릴까요?”
“됐다.”
검성이 숨을 후욱 하고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혹시 금구나 무결이는 안 왔는가?”
“아…….”
대체 어찌 대답해야 할까. 검성은 마치 이서휘가 금구무결을 알고 있을 거라는 듯이 말했다.
이서휘가 대답했다.
“오지 않으셨습니다만 곧 오실 겁니다.”
“자네가 어찌 알아? 둘을 아는가?”
“진금구 선배는 한 번 뵈었고, 진무결 선배는 아직 뵙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녀석들이 아비의 성을 따르지 않았구나. 고얀 놈들이야. 아비가 그렇게 미웠더냐?”
도대체 검성의 말은 이서휘를 향하는 것인지 아들들에게 향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석실에는 검성과 이서휘뿐이었기에 이서휘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닐 겁니다. 어르신.”
검성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들어오는 방법도 가르치지 않았구나. 그 둘이 어렸을 때 무공을 가르치던 자가 제 아비였다는 사실을 알까?”
마치 인생을 회고하는 듯이 검성이 지난 일을 쏟아내자 이서휘의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기연이라 할 수 있었다. 이서휘는 전생의 인연과 화산비사 덕분에 검성의 말을 대부분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서휘가 다시 대답했다.
“아마 아실 겁니다. 두 분 모두 무림에서 위명이…….”
‘대단하다.’고 말하려다가 이서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진금구 선배만 하더라도 무림에 드러난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검선인 진무결도 마찬가지. 성까지 바꿔가면서 검성과의 관계를 밝히지 않은 두 사람이다.
검성이 한숨을 내쉬며 묘한 말을 내뱉었다.
“……이게 끝은 아닐 거다. 죽음이라는 게 말이다…….”
이서휘는 잠자코 있었다. 이서휘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과거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때문에 검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은 묘한 울림이 있었다. 그 순간, 검성이 이서휘에게 다소 충격적인 말을 꺼내 놓았다.
“자네는 죽어본 적이 있나?”
“네?”
검성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없지. 없으니 모르는 거야. 나는 이게 끝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니 자네가 좀 도와주게.”
이서휘가 검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르신이 죽는 것을 도와달라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지.’
이서휘가 대꾸를 하지 않자, 검성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날 좀 일으켜 주게. 목이 마르구나.”
“아, 네.”
이서휘가 다가가자 검성이 손을 내밀었다. 이서휘는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검성의 손을 붙잡고 검성을 부축하려 했다. 그 순간에 이서휘는 석실 안에 떠다니던 온기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검성의 눈과 이서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검성의 몸에서 쏴아아아아 하는 알 수 없는 소리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검성이 웃고 있었다.
어찌 이것이 죽어가는 자의 표정이란 말인가.
검성이 장난을 치는 악동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 육신의 흩어짐을 방해하던 놈이 있었네. 평소에는 자랑스러웠으나 갈 때가 되니 거추장스럽기 그지없구나. 반 정도 고갈됐으나 아직도 남아서 버티고 있다. 자네가 오지 않았다면 아마 달포는 더 살아있었을 게야. 기력을 좀 소진해서 자네 몸이나 씻어주겠네.”
“안 됩니다! 어…… 어르…… 신…….”
이서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맞잡은 검성의 손에서 알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도도(滔滔)하게 흘러나와 이서휘의 전신을 휘젓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검성의 몸에 쌓여 있던 내공들이 이서휘의 몸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이서휘는 급격하게 불어나는 내공을 받아들이느라 말을 내뱉을 수조차 없는 상황.
하지만 검성은 말하는 것조차 자유로웠다.
“네가 살아온 길이 잠시나마 보이는구나. 잘 닦아 왔다. 그릇이 좋아. 고생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이서휘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던 검성의 두 눈이 커졌다.
“나한테 거짓말을 한 게 있구나.”
검성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금구는 아닌 것 같고 이제 보니 무결이의 제자였구나.”
검성의 말에 이서휘의 눈도 화등잔만 해졌다.
하지만 검성은 그야말로 기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녀석아……. 내 내공이 아무런 저항 없이 네 몸으로 흘러들어 가질 않느냐. 너는 곧 내 제자나 다름없는 녀석이다. 하늘이 어찌 내게 이런 복을 내리셨단 말이더냐?”
“아…….”
이서휘는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다음 말은 차마 밖으로 나오지 않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제가 검선의 제자입니다. 맞습니다만……. 어, 어르신.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다. 이서휘는 검선이 가르쳐준 내공 심법으로 내공을 쌓았다. 그런데 검선이 외우고 있던 구결은 검성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내력을 불어 넣으며 이서휘의 몸을 살펴본 검성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검성이 잘 됐다는 듯이 내공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잘 됐구나.”
검성에게도 이것은 기연이었다. 이서휘라는 청년의 그릇은 마치 자신의 내공을 받아들이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검성의 내공이 밀려들어올 때마다 이서휘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하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이 단순한 내공이 아니라 검성을 지탱하고 있던 생명력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 그 의미를 이서휘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때였다.
환각일까.
이서휘의 눈에는 검성이 점차 투명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검성은 이서휘의 눈빛을 읽고 마치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지 않았느냐?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나도 운이 좋구나. 이렇게 아들의 제자에게 도움을 주게 되다니. 그러면 나도 부탁을 하나 하마.”
이서휘는 눈물이 차오르고 있는 눈빛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하십시오.]
검성이 이서휘에게 부탁을 전했다.
“무결이는 네가 잘 돌봐줘다오. 나 때문에 외롭게 살았을 것이다.”
한줄기 눈물을 툭 하고 흘러내린 검성이 환하게 웃으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반가웠다…… 서휘야.”
“가지 마십시오!”
밀려오던 내공이 끊기자마자 말을 내뱉은 이서휘가 황급하게 검성의 손을 꽉 붙잡았다. 하지만 검성은 그 말과 함께 쏴아아아아 하는 신비스러운 소리와 함께 빛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이서휘가 지켜보는 와중에도 무어라 말로 다시 설명할 수조차 없는 광경이었다.
이서휘를 붙잡고 있던 쭈글쭈글한 손부터 작은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검성의 몸 전체가 이내 한 줄기 빛무리가 되어 뻥 뚫린 천장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자신의 몸에 검성의 몸에 남아 있던 내공이 들어왔다는 기쁨도 전혀 느끼지 못한 채로 빛무리가 되어 사라지는 검성을 올려다봤다.
이서휘가 말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이서휘의 물음에 밤하늘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서휘는 그곳에서 뺨에 흐르던 눈물이 마를 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이서휘는 온몸이 뜨거워지고 있어 저도 모르게 주저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다른 자라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내공일 것이다.
하지만 이서휘는 결국 검성으로부터 이어진 내공 심법으로 내공을 쌓은 셈이었다. 검성의 내공을 받아들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이서휘의 육신 자체가 급격히 불어난 내공 덕분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마치 불에 휩싸인 천리마(千里馬)가 세맥을 질주하는 것처럼 돌아다니는 느낌이라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후 운기조식을 한 차례 마친 이서휘는 정수리가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 같아서 화들짝 놀라 옷을 벗어 던지고 석수로 달려가 몸을 담갔다.
치이이이이이익!
이서휘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후 몸을 일으킨 이서휘는 석벽에 흐르는 물을 받아 마시고 배가 출출해 그제야 복숭아를 서너 개 게눈 감추듯이 먹으면서 배를 채웠다.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전력으로 질주했던 이서휘다. 피로감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가 방대한 양의 내공을 받아들인 몸의 피로감도 상당했다.
이서휘는 석실의 중앙으로 걸어가서 마치 검성이 그랬던 것처럼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신체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듯이 이서휘를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트렸다. 그렇게 가장 먼저 이서휘는 자신을 잊었고, 이어서 검성처럼 시간의 흐름도 잊게 되었다. 다시 몇 번의 달이 뜨고 해가 솟을 때까지 이서휘는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의 표정만큼은 마치 아기가 잠든 것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