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목검>
이서휘가 사자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흑도맹에 머무르는 동안 군림맹으로 ‘연합성사(聯合成事)’라고 적힌 전서구가 날아갔다. 이후의 협의는 다른 인원들이 알아서 할 일. 모든 일을 이서휘가 처리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다시 완전 무장을 한 채로 흑도맹이 내어준 말에 올라타 일단은 군림맹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나름 흡족한 여정이다.
흑도가 훌륭한 점은 명확하다.
강자(强者)는 대우해준다는 것.
이서휘는 세 명의 간부를 꺾음으로써 강자라는 인식을 흑도맹에 박았다. 그 순간만큼은 이서휘가 군림맹의 대표였던 것.
성과는 더 있었다.
이서휘는 훗날의 흑도맹주 송무진과 허물없는 사이가 됐던 것.
서로 강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비무였다. 더군다나 비무를 한 날 밤에는 송무진과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회포를 풀었으니, 이서휘에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서휘는 검림세력일람을 보면서 군림맹으로 향했다. 되도록 가보지 못했던 여정으로 복귀했던 것. 쉬어가야 할 때는 검림세력을 찾아 인사라도 나눈 후에 지나쳤다.
어느 마을에는 집 한 채에 사는 가족 몇 명이 검림인 경우도 있었다. 또 드넓은 양북(亮北)이라는 도시를 지날 때는 검림이 없어 일부러 외곽 지역에 있는 허름한 객잔에 조용히 머무르다가 떠났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 무렵, 이서휘는 양곡(亮曲)이라 불리는 지역을 지나가고 있었다.
비록 임무 때문에 먼 길을 오가고 있었으나, 홀로 여행을 한다 생각하니 제법 운치가 있었다.
‘볼 수 있어 좋구나. 이렇게 유람하며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고 말이야.’
이서휘는 전생에 눈이 먼 이후로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했다. 그때는 적막함과 마주하면서 내공 심법을 수련하는 게 이서휘의 일상이었을 정도가 아니던가.
지금은 달랐다.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게 많았다.
이름도 모를 어느 산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어 구경했다가, 어느 날은 잔잔한 호수에 시선이 묶여 버려 한참을 호수 주변을 거닐면서 절경을 감상했다.
어느 날, 양곡에서 막 벗어나 아주 조용한 마을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마저 고요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장소였다. 길을 걷다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농부였고 무림인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농부들은 이서휘를 볼 때마다 길을 돌아서 피해 가거나 아예 왔던 길을 거꾸로 돌아가는 자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하긴, 이서휘의 등에는 검과 도가 매달려 있었다.
더군다나 흑도맹에서 내어준 말에 타고 있다. 보기 드물게 덩치가 큰 흑마였는데 워낙 힘이 좋고 잘 달려서 이서휘와 함께 다니고 있었다.
농부들이 아니라 평범한 무림인들이 봐도 주눅이 들었을 터.
그렇다 하더라도 이서휘는 악당이 아니다. 무림인이 아닌 자들을 괴롭힌 적도 없었다. 그래서 농부들의 두려운 눈빛을 보자, 이서휘는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흑도맹에 다녀온 뒤로 내 기도가 좀 어둡게 변한 모양이로군.’
이서휘는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여서 눈이 마주친 농부들에게 미소를 지었고, 노인들에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말을 건네는 것은 이서휘도 어색하고 어려웠다.
그때, 한 소녀가 길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발을 쫑긋 세워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서휘가 매고 있는 검에 시선이 꽂힌 소녀가 먼저 말을 붙였다.
“저, 아저씨.”
“왜?”
소녀는 무척 귀여웠다.
몇 년 후면 인근에서 소문난 미인이 될 수 있을 정도.
소녀가 대뜸 이서휘의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저씨, 무림인이죠?”
이서휘가 재미있어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무림인이 뭔데?”
소녀가 눈을 똘망똘망 뜬 채로 말을 이었다.
“사람 죽이는 사람…….”
“아, 사람 죽이는 사람이라니 어딘지 모르게 무시무시한 말이구나.”
이서휘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무림인은 맞지만 아무나 죽…… 하여간 그런데 왜?”
“아저씨! 저희 마을에도 무림인이 한 명 계셔요.”
“아, 그래? 조용한 마을인데…… 은퇴하신 분인가?”
“은퇴가 뭐죠?”
“음, 무림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
“아닌데. 종종 싸우시던데요.”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조용한 마을을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무림인이 있을 것 같은 동네는 아니다.
‘궁금하군.’
이서휘가 말했다.
“어디 계시니? 함께 인사나 드리러 갈까?”
“싸우러 가시는 거 아니죠?”
“누군지 알고 싸우러 가겠어?”
소녀가 갑자기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싸워도 안 될 걸요. 아저씨가 져요.”
“허, 그걸 네가 어찌 알아? 아저씨가 이길 수도 있을걸?”
이서휘의 말에 여자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저씨가 천하십대고수에요?”
“뭐, 뭐?”
소녀가 천하십대고수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것을 보니 누군가에게 자주 들은 말인 듯싶었다. 그제야 이서휘는 소녀를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 선배님은 어디 계시지?”
“천하십대고수죠?”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니까.”
“그럼요? 왜 오셨어요?”
어린 소녀의 말이라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이서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냥 지나가는 중에 경치가 좋아 잠시 구경하고 있었다. 마을이 평범하게 보이면서도 운치가 있구나.”
소녀에게 할 말은 아니었으나 이서휘는 느낀 그대로 말했다. 소녀는 이서휘의 말이 어쨌든 자신이 사는 마을을 칭찬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는지 반달눈이 되어 활짝 웃었다.
소녀의 미소에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어이쿠, 귀엽구나.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아, 나 아직 젊지?’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뒤통수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천하십대고수라는 말은 어디서 들은 게냐?”
“여기 오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인데요? 근데 오는 사람마다 자신이 천하십대고수래요. 근데 왔던 사람이 이미 열 명이 훌쩍 넘었는데 다들 자기가 천하십대고수라고 하니까 조금 이상하긴 했어요.”
“하하하.”
이서휘가 소녀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자, 소녀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그랬다가 대부분 우리 목 아저씨에게 넙죽 인사를 올린 다음에 돌아가거나 어떤 사람은 붕대를 여기저기 감은 다음에 저기 뒷산에 며칠이곤 누워 있다가 돌아가요.”
“뒷산에 누가 있길래?”
“목(木) 아저씨요.”
이서휘가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아저씨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
“목(木) 아저씨요? 잘 몰라요. 직접 물어보세요.”
“뒷산으로 가면 뵐 수 있을까?”
“아니요. 곡재(曲渽)로 싸우러 가셨어요.”
“곡재는 어느 쪽이냐?”
“곡재철방도 모르세요? 철방 아저씨들이 도와달라고 하셔서 가셨어요.”
“어디로 가면 되지?”
소녀가 대로변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저기로 쭉 가면 곡재예요.”
“고맙다.”
그냥 가려던 이서휘는 어쩐지 소녀의 밝은 미소와 말투가 인상에 무척 남았다. 이서휘는 품에서 전표 한 장을 꺼내려다가 마을 상태를 보니 전장도 없을 것 같아 은화를 하나 꺼내 건넸다.
“자, 선물이다.”
이서휘가 건네는 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녀가 이서휘도 깜짝 놀랄 만큼 어른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아저씨, 제가 말 몇 마디 한 거 가지고 이렇게 큰돈을 받을 수는 없어요.”
“허허, 그러냐?”
“대신에 아저씨가 혹시 무림인이라면 곡재철방으로 가셔서 목 아저씨 좀 도와주세요. 마을 아저씨가 말렸는데도 혼자 가셨거든요. 위험하다고 하셨는데.”
“알았다. 목 아저씨는 어떻게 알아보니? 들고 가신 무기라든지 외모 좀 설명해다오.”
소녀가 자신의 뒷머리를 두 손으로 쓸어 모아 쥐더니 한 손으로 쥔 채로 말했다.
“뒷머리가 이래요. 잘 생기셨어요.”
소녀의 행동이 이서휘의 눈에 무척 귀엽게 보였다. 하지만 소녀의 말에 일일이 대꾸하다가는 대화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목 아저씨를 도와주러 가마. 또 보자.”
“네, 아저씨! 죽지 마세요! 아, 이름은 알려주고 가셔야죠!”
이서휘가 말 위에서 소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서휘라 한다.”
“전 예림이라 합니다. 도와드리고 함께 오세요!”
“알겠다.”
“저희 언니가 무척 예뻐요! 저보단 아니지만요! 오실 거죠?”
“알았다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이서휘는 바로 말에 박차를 가해 곡재로 향했다. 소녀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순수한 듯하면서도 무림인들의 대화를 자주 듣고 자란 아이랄까. 더군다나 이런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 천하십대고수를 논하는 무인이라니.
‘내 이십 대 시절의 천하십대고수는 누구라 해야 할까.’
전생에는 지금 나이 때에 천하십대고수는커녕 군림맹 십대고수에도 들지 못하던 이서휘가 아니던가.
‘내 기억에 목씨 성을 가진 고수는 없었는데……. 동네 무인의 허풍이겠군.’
곡재에 도착한 이서휘가 사람들에게 물어서 곡재철방을 찾았다. 하지만 이미 곡재철방에는 불에 휩싸였는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인근 객잔과 다루도 누군가 싸운 흔적이 가득했다.
이서휘는 객잔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은, 싸움이 났지.”
“한두 명이 한 거 같지는 않은데요? 곡재철방에 무슨 일 있습니까?”
“아, 곡재철방. 그 놈들 때문이 이리 됐지. 어떤 놈들이 돈을 싸들고 와서 곡재철방을 넘기라고 했는데 철방 노인의 고집이 이만저만인가? 뭐. 곡재철방이랑 어느 날강도 같은 놈들이랑 대판 붙었네. 그러다가 누가 와서 쫓아내더구만.”
“감사합니다. 어디로 가면…….”
“저리로 갔어. 삼거리 오른쪽.”
이서휘는 말을 달려 다시 움직였다. 그냥 지날 법도 하건만 불쑥 솟구치는 예감이 이서휘의 발걸음을 옮기게 하고 있었다.
질풍처럼 말을 몰아 달리던 이서휘는 어느새 우측에 뻗어있는 평야에 시선을 옮겼다.
“어?”
적의인(赤衣人)이 제법 많았다. 저마다 다양한 병장기를 쥐고 있었는데 일자(一字) 대형을 유지하면서 점점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 자세히 보이지 않아 이서휘가 말을 몰아 언덕으로 올라가 평야의 상황을 살폈다.
“대체 몇 명이냐?”
족히 칠팔십 명은 넘는 수다. 이서휘가 언덕에 올라와 보니 반대편의 언덕, 그러니까 적의인들이 물러나는 언덕에도 이서휘처럼 평야의 상황을 내려다보는 무리가 있었다.
그때, 이서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면이라……. 마가의 냄새가 나는구나.’
가면을 쓴 두 명의 무인이 팔짱을 낀 채로 평야 아래를 내려 보다가 그 중 적면인이 이서휘에게 시선을 보냈다. 동시에 청면인이 품에서 신호탄을 쓰더니 청의인들이 좌우에서 쏟아져 나와 곡재철방의 무인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흑도맹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
이서휘는 곧장 언덕 위에서 말을 몰아 포위된 곡재철방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이서휘의 예상으로는 이 자들의 목적은 아마도 그 목 아저씨라는 고수일 것이다. 곡재철방이 목적이라면 처음부터 곡재철방을 몰살시켰을 터.
목 아저씨라는 사람을 압도적인 수로 포위하기 위해 일부러 유인한 것이 아닐까 이서휘는 예상했다.
말을 타고 돌진하던 이서휘는 이미 맞붙은 두 세력을 바라봤다.
곡재철방은 압도적으로 수가 불리한데도 엄청난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곡재철방은 적의인과 청의인들에게 원형으로 둘러싸인 형태.
이서휘는 흑마로 돌파할 수 없겠다는 판단에 그대로 말의 등을 밟고 엄청난 높이로 솟구쳤다. 그때, 공중에서 백야검을 뽑자마자 암연심검의 파를 내보내 적의인들에게 뿌렸다.
쐐애애애애애앵!
이서휘는 자신의 검기가 누구를 죽였는지 보지도 않은 채로 한 적의인의 어깨를 부숴버리듯이 밟았다가 완벽하게 포위된 곡재철방 무인들이 뭉쳐 있는 곳으로 내려섰다.
갑자기 이서휘가 난입하여 순식간에 적들을 가르고 곡재철방에 내려서자, 치열하던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서휘는 내려서자마자 목 아저씨라는 사람부터 찾았다.
‘뭐야? 목이라는 게 성씨가 아니었구나.’
한 중년인이 이 난국에 홀로 목검(木劍)을 쥐고 있었다. 한데, 표정이 가관이었다. 심드렁한 얼굴로 이서휘에게 말했다.
“자네는 뭐야?”
“네? 도와 드리러 왔습니다.”
“누가 도와 달래?”
중년인이 피식 웃더니 목검을 쥐고 적의인들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서휘가 돌아보니 전열에 있던 적의인들의 표정은 이미 공포에 질린 상태. 하지만 뒤쪽에서 다른 적의인들이 끊임없이 동료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때 중년인이 목검을 휘둘렀다.
탁! 혹은 빠각!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적들이 낙엽처럼 날아갔다.
너무 기이한 장면이라 이서휘는 바로 돕지 않고 중년인이 펼치는 무공을 잠시 지켜봤다.
‘아아! 알겠다.’
이서휘는 그제야 중년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검제 시절에 북화남옥이라는 여고수가 여중제일고수를 다퉜다. 그 중 북화가 화지련, 그리고 남옥이 옥의림이다.
이 중년인은 바로 옥의림의 스승이었다.
이서휘는 묘한 인연에 놀라면서 곡재철방의 무인들과 함께 적들을 베기 시작했다.
적들은 이미 이서휘와 목검을 든 중년인에게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이대로 반각 정도만 흘러도 대다수가 죽게 될 터.
가면인들의 판단도 똑같았다. 어느새 누군가가 뿔피리를 불어 퇴각 신호를 보냈다.
부우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울리자 적의인과 청의인들이 그제야 도망을 치기 위해 포위망을 넓혔다. 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오히려 곡재철방의 기세가 올랐다.
이서휘도 마찬가지.
‘깡그리 죽이는 게 나을 텐데.’
이서휘는 힐끗 중년인을 바라봤다. 중년인은 적들이 도망가는 데도 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서휘 혼자 쫓아가긴 힘든 터라, 잠시 후 이서휘는 고개를 갸웃하며 백야검의 피를 털어내고 납검했다.
중년인은 이서휘의 무공이 뛰어난 것을 보고 말을 툭 던졌다.
“자네.”
“네, 선배님.”
“누가 자네 선배야?”
“성함을 몰라서.”
“어디서 갑자기 뛰어든 건가?”
“아, 예림이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예림이가?”
이서휘의 말에 중년인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이서휘는 갑자기 중년인의 표정이 험악해진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곡재철방은 달랐다. 일일이 지나가면서 갑자기 난입해 도와준 이서휘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고맙군. 괜찮으면 우리 철방으로……. 아, 빌어먹을 불에 탔지. 저 개새끼들을 싹 다 잡아 죽였어야 했는데. 목 아저씨, 저놈들 쫓아가서 더 죽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누군가의 질문에 중년인은 코웃음을 쳤다.
“저놈들이 누군지, 수가 몇인지 알고 쫓으려는 건가?”
“그야 모르지만요.”
“아서라.”
“네.”
중년인은 이서휘를 힐끔 보더니 말을 툭 던졌다.
“자네도 구애(求愛)하러 왔나?”
“구애요?”
그 말에 곡재철방의 무인들이 키득키득 웃으며 이서휘를 바라봤다. 딱히 악의가 있는 웃음은 아니었다. 무언가 재미있는 장면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표정들이랄까.
‘아, 의림이를 말하는 것인가? 의림이가 이렇게 인기가 많았었나?’
이서휘는 옥의림의 얼굴을 모른다.
사류곡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어느 순간 질풍검대 시절로 돌아왔을 때 연무장에 누워 떠올렸던 여인이 바로 옥의림이다. 그녀가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목소리만 기억하고 있다.
이서휘의 코가 예민한 것을 알고 민폐를 끼칠까 하여, 분도 바르지 않았던 여인. 이서휘가 끝내 사류곡에서 결전을 벌이겠다고 결정하자, 어디론가 훌쩍 떠나갔던 그 옥의림이 보고 싶었을 뿐이다.
‘구애라니…….’
이서휘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 말에 중년인이 씨익 웃었다.
“아니라고? 제법 검을 잘 다루는 것을 보아하니 천하십대고수로 보이는데, 아닌가?”
중년인의 말에 곡재철방의 무인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중년인은 남을 놀리기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하, 이거 적응 안 되는군. 무언가 사연이 있나 보구나.’
이서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흑도맹이 내어준 거대한 흑마가 도망도 가지 않은 채로 의연하게 서서 이서휘를 맞이했다. 이서휘가 말을 쓰다듬자 곡재철방과 중년인마저 흑마를 구경하면서 감탄했다.
“이야, 대단한 녀석인데? 겁이 없는 녀석이로군.”
“대체 이런 말은 어디서 구했나?”
누군가의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흑도맹이 내어줬습니다.”
“뭐라고?”
누군가의 외침에 이어 곡재철방이 동시에 병기를 뽑아 들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반응에 이서휘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무기들 거두십시오. 전 군림맹입니다.”
“뭔 개소리냐?”
중년인마저 인상을 쓰며 이서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중년인이 덤비면 곤란할 것이라 생각한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군림맹의 사자로 흑도맹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서휘의 복장이 특이하긴 했지만 흑도맹 특유의 분위기는 나지 않고 있었다. 곡재철방이 경계를 풀지 않은 눈빛으로 물었다.
“군림맹이 왜 흑도맹으로 사자를 보낸단 말인가?”
이서휘가 대꾸했다.
“연합을 성사시켰습니다. 마도를 상대하기 위해.”
“군림맹과 흑도맹이 연합을 해? 뭐 이런 거지같은 소리가 다 있지.”
이서휘는 그저 웃을 뿐이다. 그때, 이서휘를 위아래로 살피던 중년인이 이서휘의 목에 걸린 청패옥을 보며 말했다.
“자네, 그 청패옥은 어디서 났나?”
“청협문 단 문주가 주신 선물입니다. 단 문주님을 아십니까?”
이서휘의 말에 중년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느냐고? 자네가 단 선배를 아는 게 더 이상한 일인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서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청협문 단의황이 소문주인 단우혁을 데리고 천하의 고수들을 찾아다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쨌든 청패옥 덕분에 흑도맹으로 오해를 받지는 않을 터.
중년인이 또 다시 이서휘의 허리춤에 매달린 철선을 보며 말했다.
“그건 뭔가?”
“아, 이것은…… 부채죠.”
“부채인 걸 누가 모르나? 보니까 묵철로 만든 거 같은데.”
“맞습니다. 마가(魔家)의 인물에게 뺏은 겁니다.”
말을 하고 보니 이서휘도 이상했다.
일단 자신은 군림맹이다. 한데 흑도맹이 내어준 말을 몰고 다니며, 청협문의 패옥을 목에 차고 있다. 허리에는 마존에게 뺏은 철선…… 그리고 등에는 검림이 내어준 백야검까지. 물론 검림에 대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중년인은 이서휘를 차마 내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상한 녀석이로군. 따라오게.”
“네.”
이서휘는 흑마를 한 손으로 이끌면서 중년인을 따라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
* * *
옥의림이 진검을 잡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마을 소녀의 이름이 ‘예림’이라는 것과 목검으로 고집을 피우는 스승에 이야기를 가끔 했던 것을 보니 이서휘의 추측이 맞을 터.
곡재철방은 철방을 복구하러 가고 이서휘와 중년인은 마을을 지나 중년인이 머물고 있는 은신처로 이동했다.
뒷산이라기 보다는 다소 한적한 곳에 목재로 만든 집이 한 채 있었다.
터는 꽤 넓었다.
이서휘가 둘러 보니, 중년인이 다듬고 있던 목검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고 무공을 수련하는 장소로 보이는 곳과 성인 두 사람이 감싸 안아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굵은 나무가 우측에 솟아 있었다.
이서휘는 그제야 중년인이 왜 목 아저씨라 불리는지 알았다.
집부터 시작해 각종 그릇과 책상, 의자, 식탁 등 살림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기인(奇人)이었다.
지금 이서휘가 앉은 의자도 그렇고 탁자와 맞은편에 중년인이 앉을 의자 또한 모두 나무.
집에 들어갔다 나온 중년인이 손에 들고 있는 것도 나무로 된 주전자였다.
중년인이 이서휘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면서 말했다.
“이름이 뭔가?”
“이서휘라 합니다.”
“군림맹에서는 그 뭐더라, 지위라 그러나?”
이서휘는 중년인의 말을 이해하고 바로 대꾸했다.
“아, 대주입니다.”
“대주? 높은 건가?”
“글쎄요. 대주가 많지는 않죠.”
“흐음.”
중년인은 차의 향기를 살짝 맡은 후 한 모금을 마셨다. 이서휘가 중년인을 따라서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중년인이 덤덤하게 말했다.
“독을 탔네.”
“네, 그러시군요.”
이서휘가 콧방귀도 끼지 않자 중년인이 잠시 이서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서휘는 중년인의 농에 신경 쓰지 않으며 질문을 했다.
“선배님의 성함을 듣고 싶습니다만.”
“나는 그저 목 아무개일세.”
“그럼. 목 선배라 부르겠습니다.”
“자꾸 왜 날 선배라 하는가?”
“흐음, 목 형이라 하겠습니다.”
“그래.”
이서휘는 중년인이 은거하는 곳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한데, 아이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천하십대고수들이 찾아왔었다고 하더군요.”
“자네는 천하십대고수를 아는가?”
“모릅니다.”
“왜 몰라? 한창 그런 이야기를 할 나이가 아니던가? 자네의 목표일 수도 있고.”
그 물음에 이서휘는 검제 때 생각하던 대로 말을 꺼냈다.
“십대고수라는 것은 말에 어폐가 있습니다.”
중년인은 이서휘의 말에 흥미가 느꼈는지 눈빛이 새로워졌다.
“어떤 어폐가?”
“백도맹과 군림맹만 하더라도 서로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흑도맹은 말할 것도 없지요. 넓은 무림에 강자들과 기인이사들이 많은데 이 자들이 모두 모여 우열을 가리지 않는 이상 십대고수를 추리긴 힘들죠. 무림 대회라도 열면 모를까. 사실 불가능합니다. 지난 무림 대회가 언제였는지 노인들도 모르는 눈치더군요.”
“그뿐인가?”
“우열을 가린다 하더라도 열 명의 고수들이 서열이 나뉘어 있다던가……. 이런 것도 말이 안 되지요. 상성이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제법 그럴 듯 하군. 그럼 자네 생각은?”
“천하제일과 그 천하제일을 꺾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 뿐입니다.”
중년인이 씨익 웃으며 이서휘를 다시 바라봤다.
‘이 놈 봐라?’
이서휘는 전생에 자신이 천하십대고수라 주장하던 자들을 대다수 박살 냈었다. 이서휘와 사패의 자리에 오른 고수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서휘가 천하제일이었느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사패와 우열을 가릴 시기가 아니었고 사패 외에도 고수는 제법 있었을 터. 몇 사람이 주장하는 게 아니라 무림이 인정하고 추앙하는 자가 천하제일인이라고 이서휘는 생각했다.
중년인이 말했다.
“어린데도 식견이 제법 특이해. 특이하지만 일리도 있어. 그렇다면 당대의 천하제일은 누구인가?”
그 물음에도 이서휘가 바로 대답했다.
“모릅니다.”
“왜 몰라?”
“제가 어찌 주워 들은 것으로 그 분들의 고하를 맞추겠습니까. 눈으로 본 것도 아닌데요. 떠돌아 다니는 말은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객잔에서 누군가가 천하오절이 있으며, 그 다섯이 누구누구다 하는 말을 수없이 들어봤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하는 사람마다 사람이 바뀌었고 그 중에는 일면식도 없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믿을 수가 없지요.”
“후후후.”
이서휘와 중년인이 그제야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씨익 웃었다.
천하제일인.
무림인들에게는 꿈이다.
검성이 천하제일인일까? 이서휘의 생각으로는 아니었다. 벌써 은거한 지 오래된 사람이다. 사부인 검선은? 천하제일인에 가깝다. 하지만 이서휘를 가르칠 때도 스스로 천하제일인이 아닐 것이라 밝혔던 검선이다. 흑도맹주와 군림맹주는 물론이고 백도맹주도 아니다.
물론 언젠가는 등장할 것이다.
그 생각에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중년인이 이서휘를 보며 말했다.
“왜 웃어?”
이서휘는 말을 돌렸다.
“왜 이런 곳에 계십니까?”
이서휘의 동문서답에 중년인의 우문현답이 이어졌다.
“자네는 왜 그런 곳에 있나? 세상이라도 구하려고?”
‘아…… 관망자였단 말인가.’
이서휘의 얼굴에 희미하게 실망의 빛이 서렸다. 이서휘는 관망하는 자들을 싫어한다. 때문에 중년인의 질문에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구할 수 있으면 구해야지요. 열 번, 스무 번, 백 번이라도 제게 힘이 있다면 구할 생각입니다.”
“흥, 훌륭한 청년이로군.”
이서휘는 중년인이 비꼬는 말을 하자 대꾸를 않고 독이 들었다는 차를 홀짝 마셨다. 그때 이서휘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사레에 들려 켁켁 거렸다.
예림의 손을 잡고 한 여인이 이서휘와 중년인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
이서휘가 기침을 해대자 중년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독이라도 마신 게야?”
“이서휘다!”
예림이 외쳤다. 그러자 옥의림이 동생을 나무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그럼 뭐라 그래 언니?”
옥의림은 그제야 이서휘와 눈을 마주쳤다. 옥의림이 이서휘의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도 모르겠다. 가자.”
옥의림이 목검이 꽂힌 곳으로 걸어가려는데 중년인이 말했다.
“의림아, 오늘은 손님이 있어서 어렵겠구나. 이리 와라.”
옥의림이 의아한 낯빛으로 중년인에게 다가오자, 중년인이 의자를 내줬다.
“앉아라. 마실 테냐? 예림이는?”
중년인의 말에 예림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독 있어서 싫어요.”
이서휘가 갑자기 목을 붙잡는 시늉을 하자 예림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옥의림이 동생의 팔뚝을 꼬집은 다음에 중년인이 따라주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서휘는 옥의림이 등장한 다음부터 얼굴이 붉어지고 등에 땀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보자마자 기침을 한 터라, 그 덕분에 얼굴이 빨개진 것으로 보이고 있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이서휘가 천하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던 그 옥의림이 맞았다.
한데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아름답다는 수식어도 필요 없는 미인이었다. 웬만한 남자들을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랄까.
[구애(求愛)하러 왔나?]
중년인의 말이 새삼 떠오른 이서휘다. 그러고 보니 천하십대고수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옥의림을 보러 온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벌게진 얼굴로 아무 말도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 때문에 일부러 이서휘가 겨우 입을 뗐다.
“제자입니까?”
그 말에 옥의림이 고개를 숙였고 중년인이 대답했다.
“제자네.”
그러고 또 아무 말이 없었다. 이서휘는 이어지는 침묵에 평점심을 유지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아, 이게 아니지. 뭔 정신일도냐 미친…….’
이서휘가 침음을 내뱉었다.
이서휘의 표정과 태도에 중년인이 엄청나게 재미있다는 듯이 갑자기 배를 잡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하.”
이서휘와 옥의림이 중년인을 바라보자, 중년인이 웃음을 약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이 친구, 정신력이 제법이야.”
“네?”
“보통 의림이를 처음 보면 자네보다 훨씬 당황한다네. 자네가 제법인 거지.”
이서휘가 못마땅한 얼굴로 중년인을 바라봤다.
‘이 선배가 정신력까지 운운할 것까지야. 전생에 연이 있어 당황하고 있을 뿐이라니까.’
하지만 말로 내뱉을 수 없는 이야기다. 중년인에게 미친놈 취급을 받으며 당장 쫓겨나도 무방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중년인이 말했다.
“의림아.”
“네.”
“여기는 군림맹의 이서휘라 한다.”
“네, 전 옥의림입니다.”
중년인이 말을 이었다.
“모처럼 무림인이 왔으니 의림이에겐 잘 된 일이야. 그간 성과도 볼 겸 둘이 한 번 붙어보겠느냐?”
이서휘와 옥의림이 동시에 대답했다.
“싫습니다.”
“좋습니다.”
이서휘는 싫다고 대답하고 옥의림은 좋다고 대답하면서 둘이 불현듯 눈을 마주쳤다.
이서휘와 옥의림,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가 동시에 시선을 옮겼다.
이런 만남을 원했던 게 아니다.
보고 싶어 했던 여인과 만나자마자 싸우라니…….
비무를 하면 패한 자의 마음이 상할 터. 옥의림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지금의 이서휘에겐 턱없이 부족하다. 옥의림의 마음이 다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년인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왜 싫은가? 아, 여인과는 상대하지 않겠다? 감히 여인과 나를 견주려 하느냐? 뭐 이런 건가?”
이게 대체 무슨 말투일까. 놀리는 것 같으면서도 큰 악의는 없는 말투라 묘하다.
이서휘가 대꾸했다.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이 녀석이 어디서 반말을.”
“아, 아닙니다. 하아…….”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다시 옥의림을 바라봤다.
‘의림아, 내가 어찌 너를…….’
중년인이 재차 강요하듯이 말했다.
“예림아, 가서 목검 두 자루.”
“네!”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면서 결국 승낙했다.
“알겠습니다.”
방법을 달리 하면 되리라. 이서휘는 예림이가 가져온 목검을 손에 쥐었다.
이서휘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건네받은 목검을 이리저리 살폈다. 한데, 검병과 검신의 매끄러움과 완성도가 마치 실제 명검을 쥐고 있는 느낌이었다.
‘목 형, 대단하시네.’
중년인은 무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나무로 무언가를 만드는 재주도 장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다.
이서휘는 생각에 잠겼다가 넓은 공터로 이동했다. 이서휘는 전생에 옥의림과 겨룬 적이 없다. 옥의림과 화지련이 가끔 비무를 벌일 때마다 백중세였다는 것만 들었을 뿐이다.
이서휘가 옥의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옥의림은 종종 백옥무하(白玉無瑕)라 불렸던 여인이다. 이제 스물이나 되었을까? 흰 옥에 흠이 없다는 뜻인데, 보면 볼수록 어울리는 말이었다. 저 고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서휘의 마음이 씁쓸할 정도였다. 아직 이 험난한 무림으로 나오기엔 너무 어리고 곱게만 보였던 것.
이서휘는 적당히 상대해주려던 생각을 고쳐 먹었다. 옥의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방법을 생각해냈던 것.
‘의림아, 나름 최선을 다해 상대해주마.’
이서휘가 말했다.
“준비됐습니까?”
이서휘가 묻자 옥의림이 야무진 표정으로 목검을 어깨로 당겨 수평으로 내미는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십시오.”
옥의림은 사양하지 않고 목검을 내밀었다. 두 목검이 맞붙자 듣기 좋은 타격음이 발생했다.
타타탁! 타닥!
검을 부딪치자마자 옥의림의 실력을 간파한 이서휘다. 경쾌한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이서휘는 신중하게 옥의림의 검을 튕겨내며 생각했다.
‘화지련보다 조금 나은 정도랄까? 독하게 수련하지 않으면 화지련에게 당장 따라 잡히겠군.’
어린 나이에 이 정도면 대단한 것이다.
또래라 할 수 있는 질풍검대의 설주연이나 강기찬보다도 강하다는 얘기였으니까.
하지만 이서휘가 진심을 다해 상대를 한다면 일초반식도 버틸 수 없을 터.
그만큼 격차가 심했다.
때문에 이서휘는 바쁘게 목검을 움직이면서도 치명적인 공격은 펼치지 않았다. 대신에 옥의림의 목검을 받아치면서 은근히 옥의림의 검법을 다듬어주고 있었다.
이서휘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것은 비무가 아니라 일종의 지도편달(指導鞭撻)이었다.
옥의림이 제법 매서운 공격을 펼치면 이서휘가 좋은 공격이었다는 듯이 침착하게 막았고, 허술한 공격을 펼치면 매서운 반격으로 목검을 돌려 보냈다. 허리와 다리의 자세에서 어긋난 게 보이면, 즉시 그 빈틈을 노리고 목검을 절묘한 곳으로 찔러 넣었다. 그때마다 옥의림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 이서휘의 검을 튕겨냈다.
‘임기응변은 제법이군.’
중년인의 눈에는 빤히 실력 차이가 보일 터. 그때, 마치 이서휘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이 중년인이 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허…… 귀신 같군. 좋다, 그러면!’
이서휘는 중년인의 말에 오히려 힘을 내어 옥의림의 검법을 다듬어줬다. 아마 실전 비무를 하면서 상대방의 검법을 다듬어 줄 수 있는 자는 무림에 많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옥의림에게 주어진 기연이었다. 이서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옥의림을 상대하면서 생각했다.
‘네가 더 강해졌으면 좋겠다.’
이서휘의 바람이다.
반면에 옥의림은 이서휘나 그녀의 사부님보다 무공의 경지가 낮아 시간이 좀 흐른 후에 이서휘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다. 순간 기분이 상한 옥의림이다. 그러나 자세가 흐트러지자마자 이서휘의 검이 대뜸 찔러 들어왔다.
‘정신 안 차려?’
이서휘의 검이 말을 거는 듯했다. 옥의림은 그제야 정신을 집중해 이서휘의 검을 상대했다. 그때부터 어떤 공격을 펼쳐도 이서휘가 모두 막아낼 것이라 생각하자 옥의림은 마음껏 그간 익힌 검법을 모두 펼쳐 보였다. 확실히 사부와는 무공이 달랐기 때문에 공방을 주고받을수록 깨닫는 바가 적지 않았다.
타다닥, 타다다다다닥!
옥의림은 사부에게 배웠던 검초를 모두 이서휘에게 쏟아냈다.
‘설마 이것도 막힐까?’
옥의림이 가장 자신 있는 검초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서휘의 목과 가슴을 동시에 노리면서 낙화무결(落花無缺)을 펼쳤다가 자세를 회전시키면서 양화검무(揚花劍舞)라는 초식으로 연달아 다섯 번의 공격을 퍼부었다.
이서휘는 낙화무결이 시작하자마자 옥의림의 목검을 날려버릴 수 있었으나 꾹 참은 채로 초식을 펼치게 두었다. 낙화무결은 속검으로 쳐내고, 양화검무라는 초식은 화려하기만 할 뿐 위력이 전혀 없는 터라 이서휘는 일부러 네 번을 튕겨내고 다섯 번째 찔러 들어올 때 내공을 주입해 목검을 내밀었다.
투욱……!
이서휘와 옥의림의 검이 맞붙더니 이서휘의 내공 때문에 떨어지질 않았다. 이서휘는 슬며시 내공을 주입해 목검으로 내보냈다. 옥의림은 그간 이런 비무를 해본 적이 없었는지 순간 당황한 눈빛을 내보내다가 침착하게 내공을 일으켜 저항했다. 그 순간, 옥의림의 손이 불처럼 뜨거워졌다.
‘아…… 사부님, 어떻게 해야 하죠?’
옥의림이 당황하자, 이서휘는 내공을 거둬들인 후 옥의림의 목검을 후려치고 재차 공세로 전환했다. 옥의림이 배웠던 검초를 다 쏟아냈다고 판단했던 것.
‘수세에 몰렸을 때도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
이서휘의 눈빛이 깊어졌다.
하지만 검초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타다다다닥!
옥의림이 연달아 뒷걸음을 치면서 물러났다. 이서휘는 일부러 경공을 시전해 옥의림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목검을 내질렀다. 옥의림은 눈이 어지러워지면서도 입술을 질끈 물고 이서휘의 검을 튕겨냈다. 그렇게 대여섯 번의 공격을 막아내자 불쑥 가슴이 답답해진 옥의림…….
이서휘는 옥의림의 하얀 목덜미가 울렁거리는 것을 보자마자 속도를 줄이고 미련 없이 검을 거둬 버렸다.
옥의림은 그제야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아…….”
중년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옥의림에게 말했다.
“당황하지 말고 가라 앉혀라. 비무는 끝났으니.”
이서휘와 중년인은 잠시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옥의림이 스스로 거칠어진 호흡과 진기를 가다듬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때 옥의림과 이서휘가 비무를 끝내자 지켜보고 있던 예림이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비겼어요. 우리 언니 대단하다. 아저씨, 우리 언니 강하죠? 저도 언니처럼 강해질 거예요.”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쉿.”
잠시 후 옥의림이 긴 숨을 토해내더니 마치 잠에서 깬 것처럼 몽롱한 눈으로 이서휘와 스승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그제야 중년인이 덤덤하게 말했다.
“의림아.”
“네.”
“여기 이서휘 대주가 마치 헤어졌던 연인을 대하듯이 비무를 하는구나.”
그 말에 옥의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서휘도 난감하긴 마찬가지. 중년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중년인은 이서휘를 탓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평소에 워낙 사람 놀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말투가 그런 것일 뿐. 제자와 이서휘가 함께 당황한 표정을 짓자 중년인이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구나. 그렇지?”
옥의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이 대주님, 많이 배웠습니다.”
이서휘가 목검의 검봉을 내린 채로 두 손을 맞잡아 덤덤하게 대꾸했다.
“별말씀을…….”
이서휘는 한마디를 내뱉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중년인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 놈 멀쩡하게 생겨서 은근히 숙맥이로구나.’
하지만 중년인은 오히려 그런 이서휘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이서휘에게 감사를 표했다.
“평범한 비무가 아니었네. 의림의 단점을 정확하게 간파해 혼을 내더군. 의림이도 이번 비무를 통해 느낀 바가 많을 것이네. 의림이는 내 제자이지만, 내가 자네처럼 비무를 통해 버릇까지 지적해 준 적은 없었네. 고맙다고 말해야겠군. 솔직히 말해 나도 자네에게 한 수 배웠네. 의림이를 가르칠 때 참고하겠네.”
중년인이 단 한마디도 비꼬지 않은 채로 덤덤하게 말하자 이서휘가 오히려 불편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또 ‘별말씀을…….’ 이러고 넘어가기엔 과한 칭찬이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중년인이 씨익 웃으면서 대꾸했다.
“별말씀을…….”
이서휘가 했던 말로 받아치자, 이서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어 버렸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중년인이 지는 해를 힐끗 보더니 의림과 예림에게 말했다.
“여기 이 대주랑 함께 저녁이나 먹자꾸나. 그 정도는 대접해야겠지?”
옥의림이 고개를 끄덕이자, 예림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가요!”
예림이는 자기네 집으로 가자는 것이었으나 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오늘은 내가 대접하마.”
그 말에 오히려 이서휘가 놀랐다.
‘요리까지 하시나?’
* * *
‘이렇게 아늑한 집에서 밥을 먹게 되다니.’
집 뒤 편에 마련된 주방에서 예림이가 중년인이 직접 만든 반찬을 가지고 와서 목재 식탁에 올려놓았다. 이서휘가 가끔 귀를 기울여 보니 주방에는 쇠붙이가 있는 눈치였다. 탕탕 하며 울리는 소리와 음식재료를 칼로 다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리는 완성될 때마다 예림의 손에 들려 나왔는데 처음에는 대부분 나물이었다.
잠시 후에는 모양이 제각각인 버섯 요리가 나왔고 마지막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요리를 중년인이 들고 왔다.
이서휘가 말했다.
“와, 이게 무슨 요리입니까?”
“뭐 일종의 추어탕(鰌魚湯)이랄까? 일 년에 두 번 정도 먹는 것일세.”
음식을 만드는 시간이 제법 길었는데 그 사이에 옥의림은 이서휘와 비무를 떠올리면서 자신의 실수를 되돌아보고 있느라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있었다. 이서휘는 옥의림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았기에 방해를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중년인이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자, 먹어볼까?”
이서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과 밥을 보다가 중년인에게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옥의림은 예림이를 챙기면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 때문에 대화는 주로 이서휘와 중년인의 몫이었다.
중년인이 말했다.
“군림맹과 흑도맹의 연합은 사실인가?”
“네.”
“대단한 일이로군.”
이서휘는 자신이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중년인의 말에 마치 남의 일인 양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바빠지겠어.”
표현이 묘하다. 바빠진다기보다는 죽지나 않으면 다행스러울 일이다. 이서휘는 새삼 중년인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일견, 범상치 않은 무공을 갖춘 자다. 훗날 중년인의 제자인 옥의림이 여중제일고수를 다퉜으니 중년인의 실력이야 말할 필요가 없을 터. 하지만 이서휘가 설득해도 꼼짝도 하지 않을 분위기가 느껴졌다.
더군다나 중년인이 무림으로 복귀하면 옥의림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도 없을 것이다. 인연이 닿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이서휘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마가에 노출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군림맹 인근으로 거처를 옮기시는 건 어떨까요?”
다분히 옥의림을 생각해서 건넨 말이기도 했다.
중년인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네.”
“알겠습니다.”
식사 후 옥의림 자매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이서휘는 중년인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조그만 방에 들어가 새벽녘에야 겨우 얼핏 잠이 들었다. 이서휘는 잠을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옥의림을 만났다고 하여, 이곳에 정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일이면 군림맹으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심정이 복잡했다. 이서휘는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가 아예 이른 새벽에 일어나 중년인의 집을 조용히 나섰다.
자는 줄 알았던 중년인이 어느새 따라나와 흑마의 말고삐를 쥐고 걷고 있는 이서휘에게 말했다.
“자네, 어찌 이렇게 빨리 가는가?”
이서휘가 중년인을 돌아보며 일부러 그가 싫어하는 단어를 골라 대꾸했다.
“선배님, 일어나셨군요. 갈 길이 멀어 일찍 가보려고 합니다.”
“왜? 며칠 머물다 가지.”
이제 선배라 불러도 중년인은 이서휘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서휘가 대꾸 없이 빙긋 웃자 중년인이 묘한 말을 내뱉었다.
“의림이도 고마워하는 눈치던데, 그리고 자네도 의림이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고. 나무랄 생각이 없으니 며칠 더 머무르게.”
중년인의 친근한 말투가 왠지 더 이서휘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자분 오성이 뛰어나더군요. 나중에 어디서든 만나게 되겠지요. 할 일이 있으니 잘 마무리되면 다시 인사를 드리러 오겠습니다.”
이서휘는 말을 내뱉고 중년인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이서휘가 그렇게 말하자 중년인도 말릴 수가 없었다.
“조심히 가게.”
“그럼.”
이서휘는 그제야 흑마에 올라타 조용한 마을을 지나며 풍경을 눈에 담았다.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저 평온한 집에 옥의림이 있으리라.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이다.
이서휘는 말머리를 돌리지 못하고 그곳에서 한참 동안 마을을 바라봤다.
얼마나 지켜보고 있었을까.
이서휘가 문득 말머리를 돌려 말의 박차를 가했다.
한참을 전속력으로 달리던 이서휘가 말 위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봤으니 됐다.”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