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21화 (21/43)

<2장. 흑도>

이서휘는 도둑 형제들과 끝까지 마도 세력을 추적하는 군림맹의 후미를 책임졌다. 하지만 십이역사라 불리는 거한들을 척살하고 쫓았을 때 이미 괴패마가와 환마가의 수뇌부들은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이서휘는 질풍검대에 부상자가 많은 것을 보고 장시우에게 말했다.

“형님, 복귀하시죠. 월야대가 후미에 서겠습니다.”

장시우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그 사이 검림의 세력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이서휘와 눈인사만 나누고 사라진 상태. 이들은 정체를 숨기고 살게 되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터전에 토착(土着) 무인이 되어 있었다. 묘한 세력이었다.

질풍검대는 물론이고 월야대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특히 화지련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의복도 약간 찢겨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닌 것은 이서휘도 마찬가지.

이서휘는 화지련이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은 딴소리를 내뱉었다.

“지련아, 누가 보면 너 혼자 싸운 줄 알겠다.”

그 말에 화지련이 눈을 치켜뜨며 대꾸했다.

“대주님, 남 말할 처지가 아니신데요?”

하기사 온몸에 피칠갑을 한 이서휘다. 화지련의 말에 도둑 형제들이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이서휘가 도이, 도삼을 돌아보며 말했다.

“웃어? 웃겨?”

도이와 도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대답했다.

“네.”

“웃김.”

검우 정천은 아무 말도 않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검우 정천의 행색이 가장 깨끗했다.

이서휘는 또 그 모습을 지적하고 있었다.

“정천 형은 대충 싸우셨소? 너무 멀쩡한데?”

“아닐세……. 그저 내가 강해서 그런 듯싶네.”

이서휘를 제외한 월야대가 동시에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재수 없다.”

“진짜 재수 없다.”

“저 거만함.”

정천이 코웃음을 내뱉으며 대꾸했다.

“인정할 건 해야지. 비무는 언제든 환영일세.”

그 말에 이서휘가 속으로 정천을 응원하면서 씨익 웃었다.

‘정천 형, 잘하고 계시는군.’

도이와 도삼, 화지련은 떫은 표정으로 군림맹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 * *

며칠 후 자잘한 부상에서 회복한 이서휘는 연일 회의에 불려 다니고 있었다.

군림맹, 백도맹, 흑도맹이 각각 마도와 격전을 벌였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상황.

천뢰각주 한신은 세 곳의 맹이 마도를 뿌리 뽑을 때까지 연합, 즉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시적이어도 좋다.

다만 이 시기에 세 세력이 사소한 것으로 알력(軋轢) 다툼을 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또한 각자 파악하고 있는 정보도 공유해야 한다. 종국에는 마도의 거점을 세 곳의 맹이 힘을 합쳐 분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한신의 말이었다.

이서휘가 생각하기에도 적절했다.

다만 서신 한 장을 주고받아서 해결할 일이 아닌지라 결국엔 백도맹과 흑도맹으로 누군가가 방문해 군림맹의 뜻을 전해야 했다.

왜 하필 군림맹일까?

군림맹이 두 세력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았던 세력이기 때문이다. 제갈세가와 사마세가가 이탈한 터라 두 맹에 비해 세가 약해진 군림맹이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는 오히려 중재자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세력이었다. 백도맹과 흑도맹은 서로의 자존심 때문에 절대로 손을 잡지 않을 게 분명했다.

군림맹은 양손을 뻗어 잠시라도 백도맹과 흑도맹을 붙잡을 생각이었다.

백도맹으로 가는 인선은 결정이 되었는데 흑도맹으로 가는 사자(使者)는 거의 이서휘로 좁혀지고 있었다. 또한 이서휘 스스로도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면 잘 해낼 수 있는 자가 거의 없겠다고 판단했던 것.

이서휘는 인선이 최종적으로 결정될 때까지 월야대원들에게는 말을 아꼈다. 대신에 시간이 날 때마다 오전에는 운기조식을 하고 오후에는 월야대와 비무를 여러 차례 하고 있었다.

며칠이 더 흐른 뒤, 월야대 연무장.

정천의 도발이 있던 이후로 화지련, 도이, 도삼은 이를 악물고 수련에 매진하고 있는 상태. 벌써 몇 번이나 정천에게 덤볐다가 박살이 난 세 사람이다.

때문에 이서휘는 월야대의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다.

해질 무렵이면 매번 검풍객잔에 나가서 술이나 마시면서 허송세월을 보내던 도둑 형제들이 이를 악물고 수련에 빠져 있었으니까.

본래 무공에 대한 감각이나 오성이 제법 괜찮은 두 사람이다. 자존심도 은근 강한 놈들이었다.

이서휘에게 지는 것은 하도 당한 게 많은 터라 어느새 당연한 일처럼 여기고 있었으나 정천에게 당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존심이 뭉개지는 일.

이서휘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정천은 세 사람을 각각 상대하면서 박살을 내놓고 있었다.

그 사이 이서휘가 흑도맹으로 출발하는 것이 결정되어, 이서휘가 연무장으로 도이, 도삼, 화지련을 불렀다.

“시작해볼까?”

도삼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누구랑요?”

이서휘는 백야검이 아닌 평범한 장검 한 자루를 손에 쥐고 있었다. 이서휘가 도이, 도삼, 화지련을 보며 말했다.

“이번엔 셋 다.”

도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젠장, 진짜. 너무 무시하네.”

도삼도 씁쓸한 미소를 지었고, 화지련은 늘 그렇듯이 입을 다물고 이서휘를 옆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는 씩씩대는 도둑 형제의 기세와 화지련을 물끄러미 보더니 아예 검을 한 자루 더 꺼내 쌍검을 쥐었다. 평범한 검이었으나 이서휘의 내공 덕분에 부러지진 않을 터.

세 사람이 몸을 풀기 시작하더니 도삼이 말했다.

“한데, 대주님은 왜 쌍검을 쓰십니까? 안 그래도 종종 좌도우검(左刀右劍)을 쓰셔서 궁금했는데, 그게 편하십니까?”

그랬다. 이서휘는 회귀한 이후로 종종 오른손에 검, 왼손에 도를 쓰고 있었다. 전생에 이서휘가 검제라 불렸던 것에 비하면 참으로 궁색한 모습이다.

이서휘가 덤덤하게 말했다.

“내가 약해서 쓰는 거다.”

“네?”

월야대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하자 이서휘가 알아 들을 수 있게 설명했다.

“내가 생각하는 경지에 오르면 검 한 자루를 사용할 생각이다. 지금 수준에서는 마도와 겨루기가 벅차다. 임기응변을 해야 할 때도 있고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생각에 따라 몸이 움직이질 않으니 이렇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반쯤은 거짓말이다. 두 눈을 뜨게 된 이후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을 뿐. 실제로 쌍검을 사용해보니 나름 새로운 경지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도이가 되물었다.

“습관?”

“그래. 내 경우에는 이 정도 습관은 쉽게 버릴 수 있어. 내가 좌도우검을 쓰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마라. 결국 나도 한 자루의 검을 쓸 것이니.”

도이, 도삼, 화지련은 물론이고 정천마저 이서휘보다 약하다. 한데 스스로 약하기 때문에 좌도우검을 쓴다고 하는 이서휘.

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재수 없어.”

이서휘가 킬킬대며 웃다가 쌍검을 부딪쳤다.

“더 재수 없게 해주마.”

이서휘의 말과 동시에 세 사람의 기도가 변했다. 어차피 이서휘가 강하다는 것은 세 사람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서휘가 쌍검을 쥐고 세 사람을 노려보다 말했다.

“먼저 공…….”

거기까지만 말하고 질풍처럼 튀어 나간 이서휘가 좌검으로 도삼을 찌르고, 도삼이 슬쩍 피하자 왼발을 후려 도삼을 넘어뜨렸다.

도이가 버럭 성을 내며 달려들었다.

“비겁하게!”

챙챙! 까앙!

이서휘가 우검으로 도이의 청협비수를 튕겨내다가 등을 찌르고 들어온 화지련의 검을 좌검으로 튕기고 돌아섰다. 도삼은 그제야 엉덩이를 비비면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서휘가 웃으며 빈정거렸다.

“왜들 이래? 궤도 익힌 놈들이.”

세 사람이 잔뜩 긴장한 채로 이서휘를 노려봤다. 말도 없이 중앙에 도이가, 화지련과 도삼이 거리를 벌려 이서휘를 포위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병장기를 내밀었다.

이서휘의 신형이 일보 뒤로 물러나면서 좌검을 비틀어 화지련의 검을 튕겨내고 엄청난 속도로 우검을 내질러 도삼이 화들짝 놀라 물러나게 만든 다음에 도이의 비도를 피해 솟구쳤다. 이서휘가 도이의 어깨를 밟고 넘어가자 세 사람이 동시에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서휘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세 사람의 합격을 쌍검을 휘둘러 연달아 막아냈다.

챙챙챙챙챙챙챙!

그 사이에 이서휘는 도삼의 목을 노리고, 도이의 허리를 그었다가, 불쑥 달려들어서 화지련을 어깨로 밀어 올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화지련이 날아가고, 도이와 도삼이 이서휘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챙챙챙챙! 까앙! 까앙!

도이와 도삼의 공격을 막아내던 이서휘가 쌍검에 내공을 주입해 도둑 형제들의 무기를 강맹하게 튕겨냈다. 자신들이 펼치는 공격의 궤적을 잃은 도둑 형제가 주춤거리자, 이서휘가 빠르게 달려 들어서 검신의 면으로 도이의 팔목을 후려치고, 밀려드는 도삼의 직도를 좌검으로 내리 눌렀다.

까앙!

한쪽 팔이 얼얼해진 도이가 한 손으로 청협비수를 휘두르며 이서휘에게 덤벼 들었다. 제법 서늘한 바람이 실려 쉭쉭쉭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서휘는 좌검으로 내공을 잔뜩 주입해 도삼의 직도를 계속해서 찍어 누르고 우검으로 도이의 비수를 튕겨냈다.

챙챙챙챙!

순간, 이서휘가 내공을 거두자, 도삼이 슬며시 직도를 내려놓고 곧장 허리에서 청협비수를 꺼내 이서휘의 목을 노리고 섬뜩하게 다가왔다.

이서휘가 유도한 것인데 보기 좋게 걸렸다.

“하하.”

이서휘가 좌검으로 까앙! 소리를 내면서 도삼의 청협비수를 날려 버리고 연달아 팔목을 검신으로 후려쳤다.

“악!”

도삼의 비명이 터졌다. 그때, 이서휘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도이를 슬쩍 피하면서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빡! 소리와 함께 도이가 낮은 자세로 한 바퀴를 돌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가 파앙! 소리와 함께 튕겨서 일어나더니 청협비수를 앞세워 달려들었다.

이서휘는 좌검을 거꾸로 해서 도이의 얼굴에 슬쩍 던지고, 도이가 좌검을 튕겨내자 좌수로 도이의 혈도를 짚었다.

“크윽!”

동시에 이서휘가 고개를 숙였다.

바람을 가르며 화지련의 검이 뻗어 나왔다. 이서휘는 화지련의 뒤늦은 출수에 안색을 굳혔다.

“더 빨리 왔어야지.”

충분히 이서휘를 더 몰아칠 기회가 있었는데 이서휘가 도이와 도삼을 제압한 후에 등장한 화지련이다.

이서휘는 화지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지련이 내지르는 검을 강맹하게 후려쳐서 날려 버렸다. 화지련의 손아귀가 찢어질 정도로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화지련이 분한 얼굴로 씩씩대면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 봤다.

이서휘가 말했다.

“그만! 화지련, 더 독하게 안 할래?”

이서휘는 화지련을 노려보다가 도이에게 다가갔다. 도이는 팔을 쭉 뻗은 채로 굳어 있었다.

이서휘가 도이를 보며 말했다.

“넌 어쩜 그렇게 매번 과감하느냐? 좀 참아라. 기회를 조금 더 살펴보면 안 되겠느냐?”

이서휘가 도이의 혈도를 풀어주고 팔목을 비비고 있는 도삼에게 말했다.

“넌 그 순간에 직도를 놓으면 안 됐다. 내가 내공이 더 깊다고 지레 겁을 먹고 악수를 뒀다. 내가 내공을 줄인 게 함정인 줄 몰랐느냐? 네 반응을 예상하고 그리 한 것인데, 네가 그대로 행동하더구나.”

도삼이 팔목을 비비면서 쩝 소리를 냈다.

그런 다음에 이서휘는 화지련을 노려봤다.

“아직 기본도 안 됐네. 분명 더 빨리 올 수 있었을 텐데? 손아귀 상처 나을 때까지 연공실에서 내공 수련만 해라.”

화지련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면서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잠시 월야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자, 그리고 나는 당분간 군림맹을 떠나 있을 거다. 늦게 말해 미안하다.”

“네? 저희는요?”

“어디 가시는데?”

이서휘의 표정이 그리 밝진 않았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흑도맹을 방문한다. 사자(使者) 역할로. 이런 시기에 많이 갈 필요 없다. 다들 수련에 매진하도록. 없는 사이에 검대나 쌍각을 오가는 일은 정천 형이 맡을 거다.”

이미 정천은 검대주들의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덤덤하게 월야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질풍검대로 갔다. 장시우를 비롯한 질풍검대와도 작별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

* * *

다음 날 이서휘는 군림맹이 준비한 말에 올라타 맹주의 서신을 가지고 흑도맹으로 출발했다. 사이사이 군림맹의 거점이 있는 곳에서 말을 갈아타고 이후에 호북에 접어들면 이서휘가 홀로 이동을 해야 하는 여정이다.

목적은 ‘상호 불가침’ 제의와 정보 교환.

교묘하게 동맹이라는 말은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만 공공의 적인 마도와 겨룰 때 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논의할 생각이었다.

사자(使者)의 역할이라기보다는 저 옛날 전국시대에 연횡책(連衡策)을 주장하고 다녔던 장의(張儀)처럼 ‘외교’와 관련된 일이었다.

백도맹이야 군림맹과 연합할 이유가 충분했지만 흑도맹은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

흑도맹이 군림맹의 사자에게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없을뿐더러 최악의 경우에는 사자(使者)를 죽일 수도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직접 나섰다. 군림맹의 그 어떤 고수들보다 자신의 성향이 흑도의 무인을 상대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흑도맹의 힘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연합 작전을 펼칠 수만 있다면 마도 세력이 활개를 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전략을 짜서 선제 공격을 펼 수도 있는 상황. 또한, 호북과 흑도맹에는 이서휘가 전생에 알고 지내던 자들이 있어 꽤 이른 시기에 재회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한 상태였다. 그렇게, 이서휘는 그간 얻었던 병장기를 챙긴 후에 말을 몰아 흑도맹으로 향했다.

이서휘는 환마존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을 때의 반응을 기억했다. 이미 이서휘라는 이름 석 자는 중원전도에 올라 있다는 이야기. 때문에 흑도맹으로 향하는 여정에 추적자나 살수가 붙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험난할 것이다.

하지만 마존 급의 고수가 장로를 대동하고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이서휘를 잡기 어려울 터. 고행이 예상됐지만 흑도맹과 연합을 성사시킬 수만 있다면 위험을 감수할 만한 여정이었다.

흑도맹으로 향하는 이서휘의 목적은 명확했다.

흑도맹을 끌어들인다!

어차피 이서휘의 전생에도 흑도맹은 마도를 상대로 분전했다.

결과는 전멸.

이서휘가 흑도맹을 그대로 두기 싫은 이유였다.

보고 싶은 사람도 흑도맹에 한 명 있었다.

이서휘가 사류곡에서 죽기 몇 달 전에 흑도맹을 이끌고 천마의 좌사자 세력을 분쇄하고 죽은 남자.

이서휘가 검제라 불릴 때 흑도맹을 이끌던 송무진(宋武振)이라는 사내였다.

지금 당장 협상이 결렬되어도 이서휘는 훗날 맹주에 오르는 송무진과는 안면을 트고 갈 생각이었다. 이 외에는 흑도맹의 몇 명에 대해서만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상황. 때문에 흑도맹을 방문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감히 예상할 수가 없었다.

이서휘의 짐이 제법 많았다.

일단 백야검과 유엽비도를 등에 교차시켜 매달았다. 좌우의 허리에는 청협비수와 묵연마존에게 빼앗은 철선까지.

그 뿐인가? 만약을 대비해 마도의 독약과 해약도 챙겼고, 돈도 넉넉하다. 도와 검 위에 묶어 놓은 봇짐에는 검림세력일람과 잡다한 구급약, 말린 식량, 화접자를 비롯한 각종 도구들까지. 되도록 쓰지 않는 게 좋은 비상품들까지 챙겼다.

만반의 준비를 한 이서휘는 도중에 말을 갈아탈 것이기 때문에 개의치 않고 먼지를 피워대며 질풍같이 내달렸다.

그렇게 이서휘가 군림맹을 벗어나 한 시진 정도가 흘렀을 무렵.

한 번도 쉬지 않고 내달리고 있을 때 이서휘는 말 위에서 힐끗 뒤를 돌아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이서휘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잠시 후 두드드드 소리와 함께 이서휘를 추적하는 자들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어느새 십여 필의 말이 모였다.

‘군림맹을 벗어난 지 한 시진 만에 이만큼 쫓아온다는 것은…….’

묘한 시간이었다. 군림맹의 외곽에서 드넓게 감시하고 있다가 전령이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판단해 추적이 따라붙은 게 아닐까 이서휘는 예상했다.

이서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

하지만 점점 간격이 좁혀지고 있었다.

경공이라면 이내 따돌릴 수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한 시진 내내 전속력으로 달린 말이다. 어느새 이서휘의 등 뒤에서 암기를 날릴 정도로 가깝게 다가온 추적자들이다.

이미 아득하게 너른 황야(荒野)에 접어든 이서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쫓아오는 자들의 행색(行色)을 살폈다.

저마다 제각각이다.

객잔에서 술을 마시다 나온 것 같은 취객, 학사 차림의 사내, 풍류공자처럼 차려 입은 놈과 다수의 흑의인들이었다. 그야말로 곳곳에 숨어 있다가 최근 들어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는 군림맹의 전령(傳令)들을 잡아 죽이는 놈들인 것 같았다.

이서휘가 탄 말이 점점 힘들어 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대놓고 웃으면서 말을 내뱉었다.

“후후, 예상했던 바다.”

두드드드드드……!

이어서 서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이서휘의 등을 노린 암기가 날아왔다.

휙휙휙휙!

모양도 힘도 제각각이다.

이서휘는 속도도 줄이지 않고 말의 옆 배로 자세를 한껏 낮췄다가 그대로 달렸다. 이어서 누군가 채찍이라도 붕붕 돌리는지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다가 휙!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날아왔다.

이서휘가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였다. 바람 소리가 낮게 이어지는 것을 보니 말을 노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기운이 떨어진 말이 헐떡이자, 이서휘는 주저하지 않고 말 등을 밟고 솟구쳤다.

슬쩍 봐뒀던 흑의인을 향해 날아간 이서휘가 우장을 내밀어 흑의인의 가슴을 적중시킴과 동시에 좌수로 말을 움켜잡아 순식간에 올라탔다.

어느새 적들과 나란히 달리게 된 이서휘가 쐐앵! 하는 소리와 함께 백야검을 뽑자마자 우측으로 암연심검의 파를 날렸다.

푸악! 하는 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퍼져나가면서 서너 명이 말 위에서 떨어졌다. 이서휘는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좌측으로 암연심검의 파를 내뱉었다.

쐐애애애앵!

투악, 푸악, 푸푹! 타앙! 까앙!

세 명의 흑의인들이 팔과 몸통, 얼굴을 얻어맞고 말 위에서 튕겨 나갔다. 하지만 취객과 학사 차림의 사내는 이서휘의 검기를 막아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남은 흑의인 한 명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서휘는 ‘신호탄인가?’라고 생각하자마자 암연심검의 환을 내질러 흑의인의 목을 뚫어버렸다.

이서휘는 그 순간에 갑자기 달리던 말을 세웠다. 이서휘의 엄청난 악력에 깜짝 놀란 말이 앞발을 치켜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두드드드드! 소리와 함께 잠시 앞서 나가게 된 추적자들이 방향을 틀어서 다시 이서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서휘는 말에서 내려 너른 황야를 둘러봤다. 우측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깎아 내지른 절벽이 보였다.

추적자는 세 명이 남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무공이 흑의인들보다 고강해 보이던 놈들이다. 이서휘를 싸늘하게 노려보던 학사, 취객, 풍류공자로 보이는 놈들이 말에서 솟구쳐서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말이 없는 놈들이다.

이서휘도 입을 다물었다. 대신 검으로 말했다. 셋 다 무공이 고강했다. 이서휘는 바로 어제만 해도 월야대의 도이, 도삼, 화지련과 비무를 했던 상태.

묘한 기분을 느끼며 백야검을 휘둘렀다. 내공을 적당히 실어 휘둘러도 누구 한 명 쉽게 병장기를 떨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서휘는 돌변했다.

갈 길이 멀었다.

어디서 이런 고수들이 튀어 나왔을까 하는 생각에 짜증이 몰아쳤다. 세 명이 내지르는 병장기를 튕겨내던 이서휘가 빈틈이 보일 때마다 백야검을 그었다.

챙챙챙챙챙!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사이에 이서휘의 검이 한두 번씩 불쑥 튀어 나와 반드시 한두 군데를 베고 돌아왔다.

손등, 팔목, 목, 얼굴, 가슴까지. 이서휘의 공격에 세 사람은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있었다.

세 명은 꽤 오랜 시간 함께 싸워봤는지 합격이 제법 매서웠다. 때문에 이서휘는 철통 방어를 펼치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이 미세한 공격을 조금씩 적중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반 각을 치열하게 겨뤘을 때 세 사람의 안색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옷깃 한 번 베질 못했다…….’

반면에 취객, 학사, 풍류공자는 자잘한 상처를 입고 곳곳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서휘는 여전히 무표정하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속도와 힘으로 백야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챙챙! 챙챙챙챙!

서서히 세 사람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서휘는 가차 없는 동작으로 그때부터 ‘혼란’을 섞어 마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검 한 자루를 튕겨내면서 좌수로 불쑥 유엽비도를 뽑아 취객에게 던졌다.

까앙! 소리와 함께 취객이 직도로 유엽비도를 튕겨내는 순간.

연달아 삼 검을 내지른 이서휘가 풍류공자의 가슴과 팔을 찌르고 빼면서 느닷없이 취객을 향해 암연심검의 환을 내뱉었다.

쐐애앵! 까앙!

취객의 직도가 날아갔다. 이서휘는 틈을 주지 않고 몸을 낮춰 바닥을 쓸 듯이 백야검을 휘둘렀다가 두 명이 솟구치자, 벼락같이 공중을 향해 근접한 거리에서 암연심검의 파를 뿌렸다.

콰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학사가 병장기를 든 채로 날아가고, 무기를 잃었던 취객은 무릎이 썩둑 하고 잘렸다.

비명 소리가 터지면서 풍류공자가 장검을 내질렀다. 이서휘는 상체를 비틀어 피한 다음에 백야검을 올려쳤다.

서걱……! 툭.

풍류공자의 팔이 떨어지자, 이서휘는 좌장을 내질러 풍류공자의 가슴을 적중시켰다.

퍼엉!

무릎이 잘린 취객.

이서휘의 검기를 맞고 기절한 학사.

팔이 잘린 풍류공자.

추적자들의 결말이다.

이서휘는 덤덤한 표정으로 바닥에서 유엽비도를 주워 등허리에 꽂은 후에 취객에게 다가갔다.

“괴로울 것이다.”

이서휘는 백야검을 내질러 취객의 숨을 끊어내고 도망가기 시작한 풍류공자의 등에 암연심검의 환을 내질렀다. 이서휘가 동작을 짧게 끊어 치듯이 펼치자 쌩! 하는 소리만 들리다가 풍류공자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풍류공자가 단말마를 지르고 그대로 너른 황야 한 곳에 엎어졌다.

“끄윽…… 쿨럭!”

한 모금의 피를 토해내며 정신을 차린 학사가 이서휘와 죽은 동료들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쯤 되었을까. 무척 평범하게 생긴 남자다.

이서휘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학사 앞에 서서 학사를 내려다 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서휘가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학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있었다.

이서휘가 학사를 떠보듯이 말했다.

“네 놈은 살수가 아니로구나.”

“아니외다.”

“그래. 마도도 아니고 살수도 아니로군. 그렇다면 무언가 내게 할 말이 있을 터. 바쁘니 셋을 세겠다. 하나, 둘…….”

이서휘가 무표정하게 백야검을 들자, 학사의 표정이 다급하게 변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잠시만! 있소이다. 할 말 있소이다!”

이서휘는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말들이 놀라 도망간 상태였다. 이서휘가 학사에게 말했다.

“말 잘 해라. 내겐 선택지가 많다.”

“무슨…….”

“낭떠러지와 독약 그리고 검.”

“아! 어쨌든 마도는 아닙니다. 살수도 아닙니다.”

이서휘의 눈에 이채(異彩)가 감돌았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냉정하다. 이서휘가 짧게 내뱉었다.

“그럼?”

“군림맹에서 나가는 사람 중에 이서휘라는 자를 반드시 죽여 달라고…….”

“누가?”

“그렇게만 전달 받았습니다. 저희도 의뢰를 받은 터라 자세한 내용은…….”

그렇게만 말하는 학사를 향해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독약은 아깝고 낭떠러지가…….”

거기까지 말하는데 학사가 다급하게 내뱉었다.

“십, 십랑살곡(十狼殺谷)입니다.”

“의뢰자가?”

“네.”

십랑살곡은 처음 듣는 살수단체다. 하지만 이서휘가 알고 있는 살수 단체의 이름 중에 십객살문(十客殺門)이라는 곳이 있었다. 높게 책정한 살인의뢰 비용만 받으면 이유도 묻지 않고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었다. 십인(十人) 체재(體裁)를 유지해 의뢰 대상을 다양한 방법으로 노리는 놈들이었다. 제법 악명이 자자한 단체였고 우두머리인 일객(一客)은 이서휘도 현 시점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는 고수였다.

이서휘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들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너희는 표식(表式)이로구나.”

“표식이라니요?”

이서휘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서휘가 죽인 자들이 널브러져 있다. 이서휘가 이 자들을 죽인 것을 확인하고 무공 수위와 수법 등을 가늠한 뒤에 살수를 다시 보낼 것이다.

이 자들 모두 이서휘에게 죽을 것을 미리 내다보고 보낸 것이리라.

이서휘는 자신이 죽인 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보기에도 흔적이 꽤 남아 있었다.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었다.

“십랑살곡(十狼殺谷)이라…….”

말을 내뱉던 이서휘가 황야의 저 멀리를 바라보다가 불쑥 눈동자만 학사를 향해 움직인 다음에 싸늘하게 내뱉었다.

“다음 놈들은 언제쯤 오겠느냐, 팔객(八客)아…….”

학사가 입을 반쯤 벌리고 눈동자가 흔들릴 때 이서휘의 검이 날아와 학사의 목을 날려 버렸다.

날아갔던 학사의 목이 툭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피를 털어내고 백야검을 납검한 이서휘가 코웃음을 내뱉었다.

“쓰레기 새끼들이.”

이 놈들은 아마 표식들이 맞을 것이다. 학사, 취객, 풍류공자의 무공 수위가 흑의인들에 비해 무척 높았다. 십랑살곡(十狼殺谷)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에 십객살문(十客殺門)을 떠올린 이서휘. 무공 수위로 따져 보았을 때 취객, 풍류공자, 학사가 각각 십객, 구객, 팔객쯤 되려나 생각했던 이서휘다.

살려줄 이유가 없었다.

이서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가도(街道)가 모이는 양원(揚原)으로 향했다. 양원은 호북에 접어들면 도착할 수 있는 곳으로 가도(街道)가 모인 곳이라 상권이 제법 발달되어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양원의 검림 세력을 확인하고 말도 준비할 겸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자, 이서휘는 서서히 걷는 속도를 높이다가 어느 순간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가더니 한 줄기 먼지를 일으키면서 너른 황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서휘가 사라진 황야에 정적이 감돌았다.

잠시 후 네 필의 말이 시체들이 널브러진 곳에 등장했다. 그 중 한 명이 말에서 내려 등불을 들고 시체들을 살폈다. 검에 베인 흔적과 떨어져 있는 병장기를 하나하나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이 자는 십객살문(十客殺門)의 오객(五客)이라 불리는 중년인으로 일객과 더불어 십객살문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오객이 하는 일은 주로 조사였다.

사태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척살 대상에게 누굴 보내야 할지 파악해 일객에게 보고하는 것이 오객이 맡은 일이었다.

오객은 이서휘의 무공 수위를 가늠했다.

‘심상치 않은 고수로다.’

싸움이 벌어진 곳에서 멀리 도망친 자가 없었다.

또한 대부분 일격에 죽은 시체들.

십객과 구객이 죽은 것은 이해 가나 팔객의 목마저 한쪽에 놓여 있었다. 한데, 머리가 날아간 팔객의 몸은 무릎을 꿇었다가 쓰러져 있는 자세였다.

오객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릎을 꿇리고 문초를 하다 죽였군. 한데, 이상해. 우리를 도발하는 것인가?’

흔적이 너무 노골적이다. 오객은 이서휘의 발자국을 가려내다가 양원(揚原) 방향을 쳐다봤다. 생각보다 방향이 쉽게 파악되었다. 아니, 아예 이서휘가 자신들을 불러 모으는 눈치였다. 오객이 양원 방향 바라보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건방진 새끼.”

침묵을 지키던 사람들 중에서 이객(二客)이 말했다.

“오 형, 어떻소?”

“아무래도 전부 가는 게 좋겠습니다.”

“허어, 그 정도요? 뭐, 오 형의 판단은 항상 정확했지요. 그럼 이대로 다 갔다가 처리하고 형님께 보고 합시다.”

이들이 말하는 형님이란 다름 아닌 일객(一客). 그 말에 오객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형님도 오셔야겠습니다.”

오객의 말에 세 사람의 안색이 굳었다.

“불가(不可). 따로 일이 있으신데.”

오객은 자신보다 나이가 두 살 어리지만, 무공 수위로 이객의 자리에 오른 이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이 오시지 않으면 칠 필요가 없습니다.”

“허허, 오 형.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 일의 수지가 맞지 않소. 이미 형님께서 이번 일에 나설 한계선은 나까지라 하셨소. 갑시다.”

오객이 떫은 표정으로 말했다.

“먼저들 가십시오. 저는 보고하러 가겠습니다. 그게 제가 하는 일이니…….”

오객은 말을 내뱉고 사객, 삼객, 이객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말에 올라탔다.

사객, 삼객, 이객은 씁쓸한 표정으로 떠나고, 말머리를 돌린 오객은 싸늘한 표정으로 일객에게 향하면서 욕을 내뱉었다.

‘멍청한 새끼들…….’

* * *

이서휘는 양원에 도착해 번잡한 거리에 한 번 놀라고 검림세력일람을 보다가 다시 한 번 놀랐다.

이 넓은 양원에 검림세력으로 표시된 곳은 딱 한 곳이었다.

연화객잔.

이서휘는 사람들에게 묻고 한참을 돌아다닌 후에야 양원의 외곽 한적한 곳에서 연화객잔을 찾았다.

한데, 이서휘가 객잔 안으로 들어가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객잔은 구조가 특이했다.

일 층의 넓은 곳에 원형으로 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 주변에 비단 발이 내려져 있었다.

이서휘는 자신을 알아보는 자가 없어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로 일반 손님처럼 값을 치르고 이 층에 올라가 짐을 풀었다. 그래도 검림이 운영하는 곳이라 하니 마음이 약간 편했다.

이서휘는 마음을 푹 놓지 않은 채로 한 시진 정도를 눈을 감고 있다가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눈을 떴다. 어느새 손님이 제법 몰려왔는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다.

이서휘는 목이나 축일 생각으로 백야검을 쥐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어림잡아 서른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저마다 웃고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데, 이서휘가 이 층에서 내려와도 누구 한 명 거들떠보는 자가 없었다. 오히려 입구에 있던 청년 한 명이 이서휘에게 대뜸 소리쳤다.

“어허, 어허! 어서 앉으시오!”

“거기, 빈자리 있지 않소. 거기 앉으쇼.”

다른 손님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자자, 이제 조용합시다.”

이서휘가 빨리 앉으라는 성황에 빈자리에 앉으며 침음성을 내뱉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주문을 받는 점소이도 없었다. 대신에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술병 하나가 건너오더니 이서휘의 탁자에 도착했다. 이서휘는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탁자에 있던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그때, 차르르륵 소리와 함께 무대 쪽의 비단 발이 걷혔다.

사람이 열댓 명은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무대 좌우에서 갑자기 푸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엹은 안개가 퍼져 나왔다.

이서휘는 평생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지만 들은 바가 있어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 말로만 듣던 무림비사극 같은 것인가?’

번화한 도시를 중심으로 배우(俳優)라고 자신을 칭한 자들이 과거에 있었던 무림비사를 재연하면서 돌아다니는 재연극단(再演劇團)이 있었다. 그 중 무림비사극(武林祕事劇), 백도영웅전(白道英雄傳), 정마대전(正魔大戰) 등이 제법 유명했는데 아마도 연화객잔에서는 소규모로 이러한 공연을 흉내내는 모양이었다.

이서휘는 눈을 크게 뜨고 무대를 바라봤다. 전생에는 눈이 멀었었기에 이러한 재연극을 봤던 적이 없었기 때문. 늘 누가 떠들던 얘기나 흘겨 듣다가 이내 마음이 씁쓸해졌던 이서휘다. 하지만 지금은 이서휘의 표정이 마치 어린 아이처럼 변해 있었다.

어느새 안개가 사라진 곳에 두 사람의 청년이 마주보고 있었다. 이서휘는 보자마자 웃음이 났다. 진중한 표정의 두 청년은 각각 백색 장포와 붉은 장포를 걸치고 중년인의 분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가 북을 쿵 하고 두드리며 마주 서 있는 두 사람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화산비화(華山祕話). 독마가(毒魔家)의 독왕(毒王) 편, 세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소. 쿠구구구구구구궁! 바야흐로 칠독마가의 가주와 화산의 장문인 비성(飛聖)이 마주 보게 되었는데…….]

이서휘는 눈을 껌벅였다.

‘독마가? 화산의 비성?’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백색 장포의 사내, 비성이 입을 열었다.

“……독왕(毒王). 이미 이십일가(二十一家)가 궤멸했소. 교주의 행방을 밝히고…….”

백색 장포의 사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붉은 장포의 사내, 독왕이라 불린 남자가 냉소를 머금었다.

“비성, 나더러 밝히고 어쩌라는 건가? 철옥에라도 가란 말인가? 아님 자결하라는 말인가. 자네가 내게 이럴 줄은 몰랐군. 백도맹이 우리 모두 죽여도 자네는 내게 칼을 겨눌 수 없는 사람일세.”

“이게 운명이오.”

“운명? 이게 운명이라고? 백도를 이끄는 자가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 것이 운명이라고? 하하하! 묘접독(苗蝶毒)에 중독되어 나를 찾아왔던 이십 대의 사내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 나타났을 줄이야. 아직도 그 묘족 여인이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나? 듣자 하니 아기도 있다던데 말이야. 아니면 모자를 벌써 죽여서 어딘가에 묻었나? 궁금하군, 비성. 죽기 전에 이야기나 들려주게.”

이서휘는 대사가 길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마디도 빼먹지 않고 흥미롭게 들었다. 그때, 다소 작위적으로 북 소리가 울리면서 비성의 뒤로 두 명의 배우가 등장했다.

“사형!”

“맹주님! 교주를 발견했다 합니다.”

“뭣이? 어디냐?”

“신양의 안가에 결사추마대(決死追魔隊)가 발견되어 포위 중입니다.”

그때, 해설자의 북소리와 말이 이어졌다.

[두두둥! 그 말에 비성은 독왕을 흘낏 보더니 묘한 말을 남기는데…….]

“이제 끝이 났군. 독왕은 자네들이 잡고 나는 부맹주 쪽을 지원하겠네.”

[그리하여 비성은 신양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기고…… 남겨진 자들은 독왕과 화산파의 진허진인, 그리고 백도맹의 맹호단주였던 것이다. 하지만 비성은 과연 이들이 독왕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독왕은 비성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음흉한 구석이 있던 자였으니. 아니나다를까 독왕의 얼굴엔 미소가 감돌았는데…….]

독왕이 말했다.

“자네들 맹주한테 밉보인 거 있나? 자네들더러 이 자리에서 죽으라는군. 나를 두고 가다니 말이야.”

“무슨 개소리냐!”

진허진인과 맹호단주가 검을 뽑아 들자 독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네들을 죽이지 않겠네. 비성이 나를 살렸으니 그 보답을 해야겠지…….”

[하지만 분노한 진허진인과 맹호단주의 검이 날아든다.]

설명조의 말과 함께 실제로 독왕과 진허진인이 맞붙고, 푸슝 하는 효과음과 함께 맹호단주는 검을 내지르지도 못하고 뒤로 벌렁 넘어졌다. 맹호단주는 바닥에서 누가 봐도 연기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독왕과 진허진인의 겨루는 모습은 무척 단조로웠다. 대신에 핫, 하압, 얏! 하는 소리만 입으로 내뱉고 있었다. 동작도 심히 어설펐다. 그때 독왕의 장력이 진허진인에게 적중되더니 진허진인을 연기하던 배우가 실제로 입에서 무언가를 왈칵 내뱉으면서 뒤로 쓰러졌다.

[카아, 저것은 독왕의 독문무공인 칠정독장이 아닐런지?]

독왕이 말했다.

“칠정독장(七情毒掌)에 대해서는 자네들이 신의라 불리는 놈에게 가도 어쩔 수 없을 게야.”

푸쉬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잠시 퍼졌다가 사라지자 진허진인이라는 사내가 바닥에서 일어났을 때는 어느새 얼굴에 붉은 점이 가득했다. 진허진인이 절규하며 외쳤다.

“독왕! 차라리 이곳에서 날 죽여라! 어서!”

[그렇다. 독왕은 진허진인에게 칠독 중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다는 칠정독장(七情毒掌)을 적중시키고 사라진 것. 칠정독장! 당장 죽을 수도 없을뿐더러 칠정을 느낄 때마다 고통이 심해진다는 무시무시한 독장이었으니…… 하지만 진허진인의 얼굴에 담긴 표정은 고통뿐만이 아니었다. 사형에 대한 원망과 오해가 가득 차오르고 있었는데…….]

이서휘는 그 후에도 반 시진이나 더 이어진 화산비화(華山祕話)를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과 함께 우렁차게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다소 어설픈 장면과 작위적인 대사가 있었으나 배우들의 진지한 표정만큼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타닥, 소리와 함께 불이 밝혀지고 사람들은 흡족한 얼굴로 다시 왁자지껄 떠들었다.

누군가 이서휘의 표정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사람 보시오. 아주 감탄한 기색이 역력한데? 어떻게 보셨소?”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이서휘를 뜨내기 취급을 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웃으며 말했다.

“실로 재미있군요. 처음부터 보지 못한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오오! 역시 이 친구가 뭘 좀 아는 친구야. 안 그런가?”

“그렇고 말고. 자자, 자네는 내 잔이나 한 잔 받게. 처음 보는 사람이로군.”

얼굴빛이 붉은 중년인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큰 잔을 내밀고 그곳에 술을 콸콸콸 부었다. 술이 그렇게 세지 않은 이서휘였으나 지켜보는 눈이 많은 터라, 입맛을 한 번 다신 후에 술잔을 단숨에 벌컥 들이켰다.

“컥.”

후끈거리는 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금방 이서휘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렇게 독한 술은 처음이었던 것. 중년인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이 친구 얼굴 좀 보게나! 꽤 독하지? 화산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렇게 섬서의 서봉주(西鳳酒)를 마셔야 하는 법이야.”

“아, 그렇습니까? 꽤 독하군요.”

이서휘가 벌건 얼굴로 미소를 짓자, 객잔 안의 사람들은 별일도 아닌데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게 왁자지껄 떠들면서 이서휘가 객잔 안의 사람들과 섞여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을 때였다.

독왕과 화산장문인 비성을 연기하던 두 사람이 분장을 지우고 나타나 사람들과 농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보니 두 사람은 거의 쌍둥이로 여겨질 만큼 닮아 있었다.

‘형제들이었구나.’

한데, 그 형제들이 곧장 이서휘 앞으로 오더니 포권을 취하고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도광(韜光)이라 합니다.”

“양회(養晦)라 합니다. 기억하시죠? 제가…….”

“비성!”

“하하하! 저희 형제 얼굴을 구분 못 하는 사람이 많은데 잘 보셨습니다.”

이서휘가 포권을 취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내뱉기 시작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는 노릇. 이 사람들은 당최 이서휘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때문에 이서휘는 한참을 그렇게 사람들의 이름을 듣다가 조용해지자 그제야 좌우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서휘라 합니다.”

이미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고 함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특히 도광과 양회라는 자는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 분위기가 남달랐다. 문득 이서휘는 두 사람의 이름이 특이해 고개를 갸웃했다. 도광과 양회라는 청년의 이름을 이으면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이는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뜻이 아닌가. 물론 이서휘의 예상대로 이 자들은 양원(揚原)의 검림이었다.

‘도광양회 형제들이라! 기억해야겠군.’

이서휘가 웃으며 사람들을 바라보자 객잔 안에 모였던 자들이 동시에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양원의 검림이 검림주를 뵈오.”

이서휘도 흡족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으며 대꾸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도착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현격하게 달라진 연화객잔이다.

이서휘가 말했다.

“한데, 화산비사를 다 보지 못함이 안타깝군요. 갈 길이 멀어 내일이면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바쁘셨군요. 아쉽습니다. 하나, 저희가 드리는 선물을 보시면 화산비사를 쉽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도광이 양회를 바라보자, 양회가 품에서 서책을 한 권 꺼내 이서휘에게 건네며 말했다.

“화산비사(華山祕話)는 제가 적고 있습니다. 배우들이 보는 서책이니 가져가십시오. 필사본(筆寫本)이 제법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연화객잔의 문이 열렸다.

그곳에 세 사람이 등장했다.

이서휘를 추적해서 따라온 사객, 삼객, 이객이었다.

검림은 세 사람을 객잔의 손님이겠거니 생각했으나, 이서휘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세 사람은 살기를 감추고 들어와 빈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이서휘는 ‘감추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삼의 궤도(詭道), 묵연마존의 심리전(心理戰)을 말 그대로 박살을 낸 이서휘다. 손짓과 눈빛을 살펴보고,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서휘의 눈에 띄었다.

세 사람은 무척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 표국 일을 적당한 어조로 논의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검림은 별 반응이 없었으나 모르는 자들이 들어온 터라 ‘검림’에 대한 얘기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이서휘는 도광양회 청년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간간이 세 사람이 주고받는 표국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미 술기운이 오른 이서휘다. 이서휘는 술병을 들고 일어나 대담하게 세 사람의 자리로 가서 술병을 탕 소리 내며 내려놓고 말했다.

“못 보던 형제들이로군. 한 잔 하시겠소?”

그때 이서휘의 작태를 지켜보던 중년인 한 명이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

“좋다! 호방한 친구로군. 나도 합석하면 안 되겠는가?”

이서휘가 엄지를 척 올리며 대꾸했다.

“오시오!”

“좋지! 그럴 게 아니라 우리 나란히 앉게 탁자 좀 모아보세나.”

그 말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더니 의자를 치우고 탁자를 이었다. 순식간에 객잔 안의 사람들이 화기애애하게 서로를 쳐다볼 수 있도록 자리가 배치되었다. 그 중에 술이 가장 거나하게 취한 중년인이 술을 콸콸콸 쏟아내며 잔들을 채운 후에 자신이 먼저 들고 외쳤다.

“이거 그야말로 기분이 좋은 날이로군. 이곳에는 내 형제들도 있고 모르는 영웅들도 계시지만 이 술을 함께 마시고 나면 이 정 아무개와 앞으로 친구가 되는 것이오. 자! 듭시다.”

“시원하군! 드세!”

“하하하하!”

이서휘도 얼굴이 벌겋게 되어 십객살문(十客殺門) 세 사람을 바라보며 술잔을 들었다.

“드시오! 연화객잔에 오면 서봉주(西鳳酒)를 마셔야 하는 법!”

“캬, 이 친구가 뭘 좀 아는군.”

사람들이 이서휘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서휘는 술에 취해 기분이 한껏 좋아진 티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화객잔의 검림들은 이서휘가 밝은 표정으로 술을 권하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자 기분이 흐뭇했다. 젊은 검림주라 하여 내심 걱정했던 그들이다. 하지만 기우였다. 검림 사람들은 이서휘가 마음에 쏙 들었다.

한편, 세 사람의 살수는 죽을 맛이었다.

독한 술을 마시고 작업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이 자들은 대상을 제거하는 일을 자기들끼리 작업이라 부르고 있었다. 하여간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이서휘만 권하면 정중하게 거절하겠는데 객잔 안에 있는 사람들이 뭉쳐서 “마셔라!”를 연호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독한 서봉주를 들이켰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묘한 감탄사를 길게 내뱉었다.

“오오오오오오…… 오!”

끝내 세 사람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자 마지막 “오!” 소리는 어조가 강하게 올라갔다.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술병을 들어 검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제들, 이렇게 기분 좋은 술자리에는 자고로 후래삼배(後來三杯, 술자리에서 늦게 온 사람에게 권하는 석 잔의 술)라 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고말고! 후래삼배!”

평소 술을 싫어하는 삼객의 인상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면서 대꾸했다.

“뭐요?”

누군가 호통을 내질렀다.

“어허! 뭐요, 라니!”

아무래도 이서휘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라는 것은 이미 몇 명은 눈치를 챈 상태. 하지만 다들 즐겁기 짝이 없는 악동들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객이 침착한 표정으로 삼객의 허벅지를 지그시 눌렀다. 그냥 마시라는 뜻이리라.

콸콸콸…….

세 사람은 이서휘가 내민 술잔이 마치 망망대해(茫茫大海)처럼 너르고 한없이 깊어 보였다.

술이 한 잔 들어간다.

술이 두 잔 들어간다.

평소 술을 좋아했던 사객(四客)은 저도 모르게 “캬.” 소리를 내뱉었다가 싸늘한 눈빛의 이객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모든 작태가 이서휘의 눈에 담기고 있었다. 각기 세 잔의 술을 먹인 이서휘가 말했다.

“형제들, 이 아우가 평소 자랑하던 재주가 하나 있소.”

“오, 그게 무엇인가?”

“고승들의 타심통(他心通)에 비할 바는 아니나 독신술을 제법 익혔습니다. 술자리의 여흥으로 내 여기 새로 온 형제들의 내력(來歷, 겪어 온 자취)을 한 번 맞춰볼까 합니다.”

“캬, 그거 재미있겠군. 젊은 형제가 이런 재주가 있었다니.”

이서휘는 세 사람을 마주 보고 앉은 다음, 먼저 좌우에 포권을 한 다음에 겸양을 떨었다.

“틀려도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자, 갑니다.”

이서휘는 허리춤에서 철선을 꺼내 촤르륵 소리와 함께 펼쳐서 얼굴로 치켜든 다음에 눈만 내놓았다. 이서휘의 눈빛이 세 사람을 훑었다.

이객, 삼객, 사객은 취기가 오르는 도중에 이게 대체 무슨 봉변인가 싶었다. 하지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니, 저마다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서휘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채를 탁 소리와 함께 접었다.

“어허, 세 분 모두 보통이 아니군. 자, 잠시만! 편의상 새로 오신 손님이 세 분이니 그냥 싸잡아서…… 삼객(三客)이라 부를까? 뭐 대충 그리 합시다.”

그때, 술이 약한 실제 삼객(三客)이 갑자기 딸꾹질을 한 번 했다. 이서휘의 눈이 빛났다. 중앙에 앉은 녀석이다. 이서휘가 턱을 매만지다가 말을 이었다.

“그냥 좌측부터 사객(四客), 삼객(三客), 이객(二客)이라 합시다.”

사객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하는 표정이다. 십객살문(十客殺門)에서 불리는 이름을 척척 읊어대는 이서휘다. 더군다나 순서도 정확하게 맞았다.

이서휘의 철선이 세 사람을 홀리듯이 빙글빙글 움직이다가 이서휘가 내공을 실어 손바닥에 철선을 파앙! 소리가 나도록 내려쳤다. 소리가 어마어마했다. 무공 수위를 내보인 것. 그 힘이 심상치 않은지라 검림의 눈이 일제히 커졌다.

‘오, 젊은 검림주께서 무공이 실로 고강하구나.’

놀란 것은 살수들도 마찬가지. 사객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서휘가 말했다.

“자, 사객 형은 눈에 취기가 감돌아도 때때로 입꼬리가 올라가니 평소 술을 좋아하셨고. 뭐 이 정도는 여러 형제들도 눈치를 챘을 터. 삼객 형이야 평소 술을 멀리해 혈색은 좋으나 눈동자가 자주 흔들리고 주변을 자주 살피니 얼마 전에 내상을 입었거나 성격이 예민한 편이오.”

별 말 아니다. 이서휘는 되는대로 읊고 있었다. 하지만 검림은 이서휘의 말이 무조건 맞다고 믿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호응하느라 신이 났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여기 이객 형은…… 허어, 성정은 차가워 보이나 눈빛과 자세가 바르니 심지가 제법 굵은 인물이오. 셋 중에서 무공을 논하면 이객 형이 으뜸일 것이오. 하나, 굳게 다문 입술과 서늘한 눈매를 보아하니 아랫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윗사람의 말은 의심하는 유형이라 단명(短命)할 관상(觀相)이라 할 수 있소.”

결국, 목숨 이야기가 나왔다. 세 사람의 안색이 그제야 어둡게 변했다. 이서휘는 짐짓 못 본 척하면서 말을 이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 못 된 일일까? 돌이켜보시오. 과오를 뉘우칠 수 있다면 운명이 바뀔 것이오.”

이객은 더 이상 이서휘의 말을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이객이 싸늘한 말투로 내뱉었다.

“다 했나? 남길 말이 있으면 더 해보시게.”

이객이 이서휘와 검림을 무시하는 발언을 내뱉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설마 십객살문(十客殺門)은 아직도 이 장소에 자신들의 적이 이서휘뿐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객이 자신의 무공에 대해 자신감이 철철 넘쳐서 그런 것일까. 누군가가 이객의 등을 한 대 때리려다 멈추고 말했다.

“이 사람이 농을 친 거 가지고 발끈하기는.”

그 말에 검림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그 웃음 사이로 이객이 살벌하게 내뱉었다.

“그 입들 다물라. 찢어 놓기 전에.”

“하하하…… 하하…… 하…… 아…….”

이객의 말에 웃음이 점점 잦아 들었다. 이객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오른다. 그러고 보니 세 사람이 나누던 대화는 표국에 관한 것인데 표두나 표사들이 차기엔 과한 검이 들려 있었다. 검림의 눈이 세 사람을 위아래로 훑었다. 표국에서 일한다면서 신발이 무척 깨끗하다. 마치 먼지 하나 묻기 싫어하는 자들이랄까. 때문에 이서휘의 놀리는 태도와 세 사람의 변한 기도 덕분에 검림도 어느새 세 사람이 살수라는 것을 죄다 알아차리고 있었다.

이서휘가 돌변한 이객의 태도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객잔 문으로 걸어갔다.

이서휘가 손을 뻗어 철컹 소리를 내면서 객잔 문의 빗장을 걸어 잠그며 말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사람을 만든다.”

이서휘가 돌아보며 말했다.

“살심이 가득하고 사람 목숨을 돈보다 낮게 보며 무례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지금 상황을 깨닫지 못하니 인의예지가 모두 없는 것이다.”

대답 대신 이객이 선공을 펼쳤다.

쐐앵! 하는 소리와 함께 발검을 하려는 찰나…….

십객살문(十客殺門)을 향해 검, 도, 직도, 대도, 편, 점혈수법, 장법, 지풍, 권각, 박치기, 낭심파열각 등의 독문무공이 쏟아졌다.

쐐앵! 채앵! 퍽, 휙, 콰앙, 타닥, 꽈앙, 부웅!

어느새 사객이 낭심을 붙잡고 바닥에 쓰러지고, 장력에 얻어맞은 삼객이 먹었던 술을 토해내며 날아갔다. 그 중에 이객의 반항이 가장 거셌으나 도광양회(韜光養晦) 형제들의 합격에 제압이 되었다.

이서휘는 미처 검을 뽑을 틈조차 없었다. 대신 말 한 마디를 내뱉었다.

“십객살문의 살수들이오.”

그 말에 검림이 일제히 발을 들어서 세 명을 밟기 시작했다.

다음날 이서휘는 검림과 작별했다. 이미 전날, 사객, 삼객, 이객은 수많은 사람들이 펼치는 고명한 절기(絶技)에 얻어맞아 폐인 상태에 이르러 포박을 당한 상태였다. 딱히 이서휘가 나서서 죽이는 것도 무용할 지경이었다. 특히 세 명은 낭심파열각이라는 독문무공에 맞아 차마 글로 옮겨 적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검림의 무공 수위를 살펴보니 도광양회(韜光養晦) 형제들만 나서도 제압이 가능했을 정도로 형제의 무공은 다른 자들에 비해 군계이학(群鷄二鶴)의 수준이었다.

이서휘로서는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아 잘된 일이었다.

이미 검림의 냉혹함은 확인한 터라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서휘는 연화객잔에 모인 검림의 형제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후 마차에 올라탔다.

검림은 이서휘가 한사코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부가 딸린 마차를 내줬다. 성의를 거부하기 힘들어 이서휘는 도중에 돌려보내리라 생각하고 겨우 승낙한 상황.

때문에 이서휘는 잠시 후 마차에서 화산비사를 흥미롭게 읽기 시작했다.

쌍둥이 형제 중 양회의 말에 의하면 과장이 다소 섞여 있으나 어디까지나 전해 들었던 내용을 토대로 적은 비사라 했다. 화산비사에는 배우들이 읽는 대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서책 하단에 당시의 일을 정리한 각주(脚註)가 있어 이서휘는 그 부분을 더 재미있게 읽고 있었다.

[……그 후 겨우 목숨을 부지한 진허진인은 신의의 도움으로 약 한 달간을 더 살게 되었는데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독왕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사형인 비성에 대한 증오였다.

온 무림이 추앙하는 사형도 여인에 대한 문제만큼은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진허진인은 자신이 알고 있던 이야기를 부풀려 무림맹의 원로들에게 고한다.

사형에 대한 열등감, 젊은 시절 묘접독(苗蝶毒)에 얽힌 사연을 얼핏 알고 있던 것이 뒤섞여 비성을 깎아 내린 것이다.

그렇게 진허진인은 백도 무림을 구원한 사람이나 다름없는 일세의 영웅을 한순간에 마두를 살려 보낸 변절자, 여인을 노리개로 삼았다가 버린 파렴치한 인물로 만들어 버렸다.

실제로 독왕은 그 후로 행적이 묘연했고 무림맹 내에서 비성을 견제하던 일파가 때를 맞춰 호응하니 비성으로서는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는 곧 비성의 무림 은퇴로 이어지게 되었다.]

각주를 읽을수록 이서휘의 표정이 굳어 갔다. 사부인 검선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

[묘족의 피가 내 몸에 흐른다. 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랴? 사람을 출신이나 태생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자들 중 제대로 된 인간을 보지 못했다. 서휘야 너와 나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대하지 말자꾸나.]

이서휘의 사부인 검선의 말이다.

‘설마…….’

이서휘가 이마를 부여잡으며 생각했다. 점점 사부의 말과 화산비사를 연결해보면 무언가 접점이 계속 나타나는 기분이다.

‘만에 하나라도 이 비사가 사실이고 묘족의 여인이 사부님의 어머님이라면?’

진허진인이 칠정독에 중독되어 백도맹에서 떠벌이고 다녔다면 이 비사를 아는 자들이 제법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백도맹의 치부가 드러나는 일이라 널리 퍼지진 못했을 터. 어쨌든 이 비사가 사실이라면 그 누구보다 이서휘에겐 충격적인 일이다.

전생에서 이서휘의 사부였던 검선의 친부가 어쩌면 비성(飛聖), 즉 검성(劍聖)이란 뜻이었으니까.

‘사부님은 알고 계셨을까?’

검성은 벌써 오래전부터 두문불출하여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극히 드물다. 또한 은퇴 당시에 화산파 장문인과 백도맹 맹주의 자리를 내놓은 것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만 알려졌었다.

물론 화산비화 이야기에 검선은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오직 이서휘만이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추측을 이어 나가던 이서휘는 느닷없이 등골이 서늘했다.

‘만약 이 화산비화를 검선께서 구경하셨다면…….’

치욕감을 느끼셨다면 그야말로 큰 일. 어쨌든 검림과 인연이 있으신 듯한 검선이다. 하지만 이서휘에게 검림에 대한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다.

검선(劍仙)의 선(仙)은 검으로 얻은 경지에 대한 칭호이지 이서휘의 사부가 신선이라든지 자애로워서 얻은 칭호가 아니었다. 무공과 행동, 성격이 대체로 표횰(飄忽,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양이 빠름)하여 붙여진 별호다.

출생에 대한 비밀과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참고 들을 자가 세상 천지에 누가 있겠는가? 더욱이 어머니라는 분이 아버지를 죽이려 했고,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신이 본인이라면 말이다.

‘만약에 사부님이 이 재연극을 보셨다면 작게는 화를 내셨을 테고 심기가 안 좋으셨으면 검을 뽑으셨다 하더라도 의아한 일이 아니다.’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검성(劍聖)과 검선(劍仙)…….

현 시점에서도 백도의 거물들이다.

이 비사가 사실이라면 이서휘가 알고 있는 미래처럼 두 사람이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터.

생각해보면 부모가 없는 고아나 정처 없이 떠도는 낭인들에게 무척 잘 대해줬던 사부다.

이서휘는 화산비사를 덮고 잠시 이마를 붙잡았다.

이서휘도 그렇고 사부인 검선도 분노하게 되면 거칠기 그지없는 무림인이다. 때문에 검림이 하고 있는 화산비사 이야기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이서휘는 검림주의 위치에 있다. 도광양회 형제를 설득시키거나 달래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화산비사에 이야기는 더 이상 퍼지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일식경(一食頃)이 흘렀을 무렵, 잘 가고 있던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어느새 발검하는 소리와 무언가를 튕겨내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어느새 검을 뽑아든 마부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공자님, 잠시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서휘가 마차의 문을 열고 나가보니, 오가는 사람 없는 한적한 가도 중앙에 장검 한 자루를 팔짱을 낀 자세로 품은 흑의인이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무공을 험난하게 익힌 분위기가 흘러 나왔다. 그 모습을 살펴보던 이서휘가 흑의인을 향해 편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일객?”

눈을 내리깔고 있던 흑의인의 미간이 좁혀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추종술이 제법이다. 이서휘가 가는 길마다 족족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한데, 이객 이하의 살수들이 어떤 종말을 맞이했는지 알기나 하고 온 것일까?

이서휘는 귀찮은 눈길로 일객을 훑었다.

나이는 서른 중반쯤.

체구가 작다. 머리카락은 눌려 있었는데 묘한 느낌으로 단정하다. 눈매는 일직선이 아니라 웃고 있는 것처럼 반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다. 흔한 눈이 아니었다. 하나, 이객과는 비교가 불가한 서늘함을 갖추고 있어 묘한 느낌을 주는 살수였다.

어쩌면 십객살문이라는 것은 아홉 명의 표식과 일객이라는 한 명의 살수로 이뤄진 집단이 아닐까, 이서휘는 생각했다.

일객은 말이 없었다.

대신 고개를 살짝 비틀어 이서휘를 훑어보고 있었다. 일객으로 추정되는 흑의인이 말했다.

“남길 말은?”

벌써 두 번째 듣는 말이다. 남길 말이라니? 무언가 살려달라거나 처절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눈치랄까. 더군다나 흑의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음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서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 자들을 누가 보냈는지 조심스레 추측했다.

‘아무래도 사마준보가 보낸 놈들 같은데.’

흑의인은 이서휘의 예상대로 일객(一客)이었다.

그는 이미 수십 번도 넘게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승부할 생각이었는데 어쩐지 허술해 보이는 이서휘에게선 빈틈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일객이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자 이서휘는 일객의 공격을 예감했다.

일객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살(殺).”

자신감의 표현일까.

저 자신감에 어울리는 범상치 않은 속도…….

일객의 미소가 입가에서 떨어지기 전에 발검 동작이 이어지고, 어느새 검봉이 이서휘의 신형 앞으로 다가왔다.

속검(速劍)이다.

이서휘의 가슴을 노린다.

정직한 공격이었으나 그 정직함이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빠르다.

일객은 이서휘가 어떻게 쳐내든 후속 공격을 이어나갈 심산.

일격(一擊)도 위험하지만 후속타는 더 음흉해 보였다.

이서휘는 등에서 백야검을 뽑자마자 우상단에서 좌상단으로 크게 그었다.

툭……!

일객의 검신이 두 동강이 났다. 동시에 일객은 쿵! 소리와 함께 왼발을 찍어 누르고 뒤로 물러나면서 딸각, 소리와 함께 소매에서 강침을 발사했다.

모든 동작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휘휘휙!

이서휘는 검막을 펼치지 않고 검의 궤적으로만 강침을 떨구고 일객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두 사람 모두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을 느낀다.

착각일까? 아니면 죽음의 냄새일까.

후자이리라.

일객은 사람을 무척 많이 죽여본 사내다. 틈을 주지 않고 일보를 내딛는 이서휘의 행동에 서늘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객의 눈이 이서휘를 살피려는 순간…….

이서휘는 암행표로 왼발을 찍어 누르고 오른 어깨를 내미는 동작으로 순식간에 이동해 백야검을 길게 내뻗었다. 발검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일객이 펼쳤던 동작과 흡사하다.

챙챙푹!

백야검의 궤적이 단검에 튕겼다가, 결국 원하는 궤적을 찾아 찔러 들어갔다.

내공을 주입한 백야검이다.

일객은 백야검의 궤적을 바꾸기 위해 쌍수로 한 번씩 백야검을 튕겨냈으나, 챙챙 소리를 울리던 백야검은 결국 그 궤적을 잃지 않고 뻗어 나가 그대로 일객의 목을 관통했다.

푹, 소리와 함께 일객의 눈을 부릅떴다. 이서휘가 일객의 눈을 보며 말했다.

“살(殺).”

이서휘는 검을 뽑아내어 바닥에 피를 뿌리면서 널브러진 일객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지켜보던 검림, 마부의 등이 서늘할 지경.

이서휘가 무표정하게 마부에게 돌아와 말했다.

“이제 혼자 가겠습니다. 곧 흑도맹의 영역이니 위험합니다. 말을 한 필 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마부가 내려서 마차에 딸린 말 한 필을 이서휘에게 끌러줬다. 이서휘는 말에 올라타기 전에 마부에게 말했다.

“도광양회 형제분들에게 전해주실 말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화산비사에 대한 이야기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이서휘의 얼굴에 고민이 서렸다.

“화산비사 말입니다.”

“네.”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을 해야 하나?’

“부탁이라고 전해주십시오. 들어도 고개를 갸웃할 테지만.”

“네, 검림주께서는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이서휘는 거짓말을 할 생각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실은 저 역시 어머니 쪽이 묘족, 아버님이 한족이셨습니다.”

“아…… 이거 그렇다면 보시기가 좀 불편하셨을…….”

“조금 씁쓸하긴 했습니다. 한데, 저 화산파의 비성(天飛聖) 선배께서는 무림에서 말하는 검성 어르신이 아닌지?”

“그렇습니다.”

“이 또한 무림의 선배를 깎아내릴 수 있는 일인데 검성 어르신의 귀에 이 비사가 전해지면 검림 세력 전체가 검성 어르신과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진허진인이 검성 어르신을 깎아 내린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이코…… 그런 의도로 만든 재연극은 아니었습니다만.”

“어쨌든 이야기를 적는 사람은 양회 형제이니 제 의견도 가서 잘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잘 전하겠습니다.”

이서휘는 먼저 포권을 취한 다음에 말했다.

“또 뵙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 * *

이서휘는 며칠 후 흑도맹에 도착했다.

이미 군림맹에서 떠난 전서구가 도착해 방문을 알린 상황. 그보다 뒤늦게 도착한 터라 흑도맹의 정문에서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이서휘는 흑도맹이 처음이다.

두근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 무엇보다 군림맹과 흑도맹이 만나는 것도 지난날에는 없던 사건이다. 이서휘는 흑도맹의 무인들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대충 예상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로 이서휘를 억누르고.

무공도 확인할 것이며.

말로 도발할 것이다.

어떻게든 흑도맹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터.

때문에 이서휘는 군림맹의 대표로 협상을 잘 이끌어내야 했다.

이서휘가 안내된 곳은 철호각(鐵虎閣)이라는 글자가 적힌 건물이었다. 그곳에 일다경 쯤 기다리고 있자 철호각의 안채 쪽에서 흑도맹의 무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서휘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철호각의 중앙에 서서 몰려나오는 무인들을 훑어봤다. 수가 제법 많았다. 아예 드넓은 철호각의 대청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이 몰려나오더니 끼이익 소리와 함께 대청 문까지 닫혔다.

배포가 남다른 이서휘마저도 압박감을 느낄 정도.

이서휘가 바라보니 철호각의 대청에 마련되어 있는 상석에만 자리가 비었다.

‘이놈들이 군림맹의 사자를 설마 각주 급의 인물로 응대하려는 것인가?’

군림맹 맹주의 서신을 들고 온 이서휘다.

시작부터 험난한 협상이 예상되는 상황. 잠시 후 적색 장포를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와 이서휘를 힐끗 본 다음에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어서 오시게. 군림맹이 고할 말이 있다고?”

이서휘는 저 말투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고할 말이 있다? 우리가 네놈들의 수하도 아니고.’

쉽게 발끈해서도 안 되는 상황.

이서휘는 상석에 앉은 자에게만 포권을 취한 후에 말했다.

“군림맹 이서휘라 합니다.”

품에 맹주의 서신이 있었으나, 이서휘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직 상석에 앉은 자의 이름도 듣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상석에 앉은 사십 대의 무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흑도맹 부맹주 맹지양(孟智凉)이라 하네.”

이서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모르는 자다. 대화를 해본 적도 없고 위명을 들은 바도 없다. 이서휘는 대신에 좌우를 살피면서 어딘가에 훗날의 흑도맹주 송무진(宋武振)이 있지 않을까 살폈다. 물론 얼굴은 모른다. 사용하는 무기가 특이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을 하지 않자 맹지양이 말했다.

“남궁 맹주의 서신을 가져왔다고? 맹주님이 부재중이시라 내가 대리(代理)로 나왔네. 줘보게.”

그 말에 이서휘가 빠르게 대답했다.

“외람되나, 흑도맹주님께 직접 전달하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언제 복귀하실 지 우리도 모르는데 기다릴 셈인가? 아니면 나와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 사이 이서휘가 말대꾸를 하자 흑도맹 간부들의 기도가 싸늘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협상을 하러 온 것이지만 마치 흑도맹의 무인들과 겨루고 있는 것처럼 등줄기에 짜릿한 긴장감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과연, 이서휘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서휘는 흑도맹의 자존심을 건드려 볼 생각이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기다리겠습니다.”

좌중이 술렁였다.

“허, 건방진 사자로군. 부 맹주님이 응대하시는 것도 나름 예의를 갖춘 것인데.”

“간이 부으셨구만.”

“기다리면서 뭐하시려고 그러나?”

“군림맹의 실력이나 구경하면서 기다릴까?”

흑도맹 간부들의 말이 쏟아졌다. 잠자코 듣고 있던 맹지양(孟智凉)이 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운 뒤에 말했다.

“조용히 해라. 사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다. 명이 떨어진 대로 행할 뿐.”

맹지양의 말에 다시 대청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맹지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휘에게 말했다.

“이 대주.”

이서휘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맹지양은 이미 이서휘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뒀던 것.

맹지양이 말을 이었다.

“서신은 우리 맹주님께 전달하도록 하겠네. 우리는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자네가 마도 세력과 여러 차례 겨루면서 활약을 펼쳤다지? 그 이야기나 한 번 들려주게.”

맹지양이 결코 무리하는 법 없이 정곡을 찔렀다. 이서휘는 새삼 맹지양이라는 자의 존재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는 현재 전력을 내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장기를 한 판 두는 행동이랄까요?”

“무슨 말인가, 그게. 자세히 설명해보게.”

이서휘의 말에 흑도맹 무인들의 눈과 귀가 이서휘를 향했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농락 당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서휘는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마도의 위험을 경고하고 흑도맹과 군림맹의 연합을 이끌어 낼 생각이었다.

일단은 세 치 혀로…….

그리고 그것이 부족하면 군림맹의 힘을 내보여서라도.

이서휘는 말을 내뱉으면서 어쩐지 등 뒤에 매달린 백야검이 흑도맹 강자들의 시선을 마주하면서 부르르 하고 떨리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마존(魔尊)이라 불리는 자들을 네 명 죽였습니다.”

“마존(魔尊)?”

누군가가 되물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습니다. 때로는 연합도 펼칩니다. 하지만 결국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경쟁을 계속 할 겁니다. 공을 세우거나 무림을 쳐서 얻은 공적으로 누군가에게 치하를 받으려는 느낌이랄까요.”

“누군가라면? 뭐, 마교 교주쯤 되는 인물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흑도맹 간부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마주 쳤다.

이서휘가 간부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마존은 총 열 명으로 추정됩니다. 마존의 뒤에는 마존의 출생 가문으로 보이는 마가가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좌우사자에 해당하는 마가의 장로들이 마존을 보위(保衛)하고 있지요.”

이서휘의 입에서 흑도맹이 파악하지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흑도맹 간부들의 눈이 매섭게 변하면서 정보를 총괄하는 심연각주를 노려봤다. 넌 왜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느냐는 질책의 눈빛이었다.

흑도맹 맹지양(孟智凉) 부맹주가 말했다.

“후계자 싸움을 하고 있단 말인가?”

“결론은 그렇습니다. 다만…… 그 후계자들이 공을 세우고자 하는 장소가 바로 이 곳, 무림이란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무림을 마치 무과시험(武科試驗)을 치는 장소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서휘는 일부러 흑도맹이 발끈할 만한 단어를 골랐다.

“뭐? 무과시험이라고?”

누군가 발끈해서 대꾸하자 이서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는 무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맹지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흥미롭군. 계속 해보게.”

이제 흑도맹 간부들이 집중해서 이서휘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지난날 마교와 싸운 것은 전대 백도맹입니다. 흑도와 군림에겐 마도의 규모나 본거지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 한데, 놀랍게도 그간 군림맹과 맞붙었던 네 곳의 마가(魔家)…… 묵연마가, 환마가, 번뇌마가, 명천마가의 병력은 군림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응천과 완안 지역의 기루, 대장간, 객잔 등으로 위장해 숨어 있었습니다.”

누군가 이서휘의 말에 대꾸했다.

“맞아. 우리도 그런 놈들과 분쟁이 있었지.”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저 옛날 혈교가 사용하던 마령시(魔靈屍)를 준비하는 흔적도 발견되었습니다. 만약 마교가 혈교가 사용하던 마령시 제작에 성공할 경우 수 싸움이 안 됩니다. 죽어 나가는 무림인들이 하나둘 마령시가 된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아무리 백도맹과 대립하고 있는 흑도맹이라지만 마도가 일어났을 때는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체 어떤 놈들이 시체를 이용해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서휘는 일부러 마지막 말을 할 때는 교묘하게 박력을 더했다. 듣는 자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서휘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을 유지하면서 흑도맹의 감정이 움직이길 기다렸다.

혈교의 혈겁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흑도맹이다. 이서휘의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서휘의 말이 이어졌다.

* * *

“……때문에 흑도맹은 군림맹과 차후 연합 전선을 펴야 할 것입니다.”

이서휘는 달변가였다. 이서휘의 이야기를 들은 흑도맹 간부들의 눈빛이 돌변해 있을 정도. 덕분에 홀로 흑도맹에 들어와 전혀 위축되는 모습을 내비치지 않으며 당당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이서휘의 존재감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신뢰할 만한 녀석이다.’

흑도맹 간부들의 눈에도 어느 정도의 신뢰가 깃들었던 것.

사람들의 시선이 맹지양(孟智凉)에게 향했다.

맹지양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훌륭하군.”

말이 묘하다.

군림맹의 정보력이 훌륭하다는 것인지 사자로 온 이서휘를 훌륭하다고 칭찬 하는 것인지 애매하다. 아니, 오히려 흑도맹에 대한 질책의 의미도 담겨 있는 묘한 말이었다.

맹지양이 자리에 일어나면서 말했다.

“군림맹의 사자를 정중하게 접대해라. 소홀하단 얘기가 들리면 엄히 문책하겠다. 이 대주.”

“네.”

“맹주님과 자리를 만들 테니 서신은 그때 전달하게. 오느라 여독이 쌓였을 텐데 오늘 하루는 푹 쉬고 있도록. 맹주님은 곧 복귀하실 것이네.”

맹지양…… 이서휘를 대하는 태도에 한 점 빈틈이 없었다. 이서휘가 덤덤한 얼굴로 두 손을 모아 대답했다.

“그리 하겠습니다.”

안채로 발걸음을 옮기던 맹지양은 아직도 흑도맹의 간부들이 이서휘를 사나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뭣들 하느냐? 이 녀석들이 근데…….”

맹지양은 간부들을 둘러보다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명령을 내렸다.

“송 대주!”

“네.”

이서휘의 눈이 커지면서 대답하는 사내를 돌아봤다. 맹지양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가 접대해. 예를 갖춰서. 나머진 물러가라.”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안채로 들어가는 맹지양을 향해 저마다 예를 올렸다. 잠시 후, 넓은 대청에 송 대주라 불린 남자와 이서휘만 남았다. 이서휘는 미소가 감도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송무진, 아직도 겨우 대주였단 말인가……?’

서른 초반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무표정하게 이서휘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명왕대주(明王隊主) 송무진(宋武振)이라 하오.”

이서휘와 송무진이 눈을 마주쳤다. 마도가 일어서지 않았으면 어쩌면 생사를 걸고 싸웠을 두 사람이다. 묘한 긴장감이 서릴 수밖에 없었다.

거친 자들이 모이기로 유명한 흑도맹.

패도(覇道)를 걷는 자들의 연합.

그 흑도맹의 차기 맹주 자리를 차지하는 남자, 송무진.

겉보기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거한(巨漢)일 것이라 막연히 예상했던 것도 보기 좋게 틀렸다. 이서휘와 비슷할 정도로 날렵한 몸에 피부만 약간 가무잡잡하다. 일견(一見), 이런 자가 어떻게 흑도를 다스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특징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이 남자, 무척 침착했다. 세상이 무너져도 눈 한 번 깜박하지 않을 특이한 잔잔함으로 단련되어 있는 느낌이다. 그 송무진이 말했다.

“이 대주, 갑시다. 식사는 하셨소?”

“괜찮습니다.”

“술이나 한 잔 합시다.”

“그러시죠.”

송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움직였다.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송무진이다. 이서휘는 송무진을 따라 나서면서 주변을 둘러보거나 하는 행동을 자제했다.

송무진이 길을 걸으며 말을 툭 내뱉었다.

“부맹주님을 먼저 뵌 것은 잘된 일이오.”

“그렇습니까?”

“맹주님은 특이하다오. 들어보셨소? 흑도맹에서 간부로 진급하려면 맹주님의 도를 받아내야 하오. 문제는 그 도가 워낙 거칠어서…… 광도(狂刀)의 진급심사(進級審査)라 불린다오. 맹주님께 실례되는 말이지만, 우리끼리는 늘 하는 얘기라.”

“특이하군요.”

“그렇소.”

송무진이 콧바람을 내며 말을 이었다.

“맹주님부터 만났다면 이 대주께서 본론을 말하기도 전에 비무부터 했을 것이오.”

“그렇습니까?”

이서휘가 덤덤하게 되묻자 송무진이 눈을 흘기며 쳐다봤다.

“은근 기대하셨던 눈치요?”

“그럴 리가요.”

“어쨌든 이렇게 말해주는 이유를 아시리라 믿소.”

“마음의 준비를 하란 말씀이시죠?”

“그렇소.”

송무진이 말을 하면서 안내한 곳은 고상하고 우아한 멋이 제법 있는 한적한 정자(亭子)였다. 송무진이 안내를 하며 말했다.

“배산(背山) 지역이라 이런 곳이 제법 있소. 중요한 손님들이 방문할 때 이용하는 곳이니 불편하진 않을 것이오.”

그 말에 이서휘가 둘러보니 정자 옆에 시비(侍婢)들이 돌아다니고 있고 손님이 머무를 수 있는 별채가 마련되어 있었다. 송무진은 용의주도하고 꼼꼼한 사람이었다. 부맹주가 접대를 맡길 것이라 예상한 눈치였다. 시비들마저 송무진이 손님을 데리고 오자 별다른 말도 없이 술과 간단한 안주를 정자에 나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정자에 마주보고 앉았다.

송무진은 자신의 잔에 먼저 술을 따르더니 한 모금을 마신 후에 이서휘의 잔에 술을 따랐다. 독이 없다는 뜻인데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주급의 인물이 할 행동은 아니었다. 때문에 보면 볼수록 기이한 사람이었다.

송무진이 말했다.

“한데 연합이라는 게 말처럼 쉽겠소? 백도맹, 군림맹, 흑도맹. 너무 덩치가 큰 곳이오. 적의 거점을 발견하지 않는 이상 협의할 게 많지 않을 것 같소만.”

송무진은 정중하게 말하고 있으나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묻고 있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백도맹과 종종 흑도맹의 분타가 맞붙는다지요? 다툼의 원인이 혹시 누군가의 이간질에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입니다. 세 곳이 불가침 협정을 맺거나 다툼을 줄이면 훗날 각자 세력을 이끌고 연합 전선을 펼치기가 수월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송무진이 즉시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마치 칼날이 뻗어나가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만약 흑도맹이 가장 먼저 마도 세력에게 포위되었다 칩시다. 맹주께선 도움을 요청할 분이 아니오. 이러면 군림맹은 어쩌시겠소? 물론 이 대주가 섣불리 대답할 말은 아니 오나, 내가 군림맹에 가서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 의견을 듣고 싶소.”

겉으로 협력 관계이면 뭐하느냐? 실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송무진은 연합에 대해 미리 생각한 게 있는지 질문에 막힘이 없었다.

이서휘는 지난날 사패와 연합을 짜봤기에 충분히 대답할 말이 있었다. 송무진이 보기에도 무척 자연스럽게 보이는 답변이 흘러 나왔다. 이서휘가 말했다.

“거리가 멀다고 연합이 불가하다면 저 옛날 장의가 연횡책을 성사하지 못 했겠지요. 처음은 힘들겠으나 각자의 중간 거점을 이용해 전서구나 연락망만 다듬어도 지원은 충분히 갈 수 있습니다. 마도가 아무리 강성해도 하룻밤에 맹 하나를 통째로 점령할 수는 없을 겁니다. 송 대주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흑도맹의 힘에 대해서는…….”

너희가 그렇게 약하느냐는 물음으로 이서휘는 되받아쳤다.

송무진이 처음으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좋소. 의심 섞인 질문들, 양해하시오. 나 말고도 다른 자들이 충분히 물어볼 법한 얘기들이었으니.”

“별말씀을.”

송무진도 내심 이서휘의 언행과 침착함에 감탄을 하는 중이었다. 믿고 함께 할 만한 자라는 신뢰감이 생길 정도. 평소에는 ‘군림맹 따위가…….’라고 생각했던 송무진이다.

송무진이 말했다.

“맹주님과 동석했을 때는 분위기가 한층 과격해질 것이오. 이 대주 성격이면 당황하진 않으시겠군. 이 송 아무개는 이 연합이 성사되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소. 한 잔 합시다.”

그야말로 시원한 말투다.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잔을 들었다.

‘연합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난 당신을 보고 갈 셈이었소.’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들이켰다.

그 술과 함께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의 엷은 미소가 오고 갔다.

* * *

송무진에게 접대를 받은 이서휘는 다음날 저녁에야 맹주전에서 흑도맹주와 마주할 수 있었다.

흑도맹의 맹주전.

거느리고 있는 흑도 세력에게 흑도패왕(黑道霸王)이라 불리는 남자. 흑도를 통일하는데 평생을 바쳤다고 하는 남자.

흑도맹주 맹서웅(孟誓熊)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드디어 남궁위 맹주의 서찰을 전달한 이서휘.

맹서웅은 말없이 서찰을 읽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를 들어 대충 알고 있네. 군림맹의 뜻도 알겠고.”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맹서웅은 거한이었다. 쭈욱 찢어진 두 눈에 거친 안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어 노련한 호랑이를 연상케 하는 인상이다.

맹서웅이 말을 이었다.

“함께 마도를 깨부수자 뭐 그런 말 아닌가. 길게 말할 거 있겠나?”

“그렇습니다.”

반응이 나쁘지 않은데, 라고 생각한 이서휘.

하지만 맹서웅의 다음 말은 송무진이 경고했던 그대로였다.

“한데, 군림맹이 약자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셈인가? 감히 우리와 깃발을 나란히 하겠다는 심보는 아니겠지? 조그만 군소방파나 일개 세가쯤 되는 세력이라면 우리 깃발 아래로 들어오는 것이 마땅할 터. 아니 그런가?”

송무진이 경고했듯이 맹주는 안하무인(眼下無人)인 격인 태도가 몸에 익숙한 남자.

이서휘는 일부러 길게 대꾸하지 않고 요점만 말했다.

“힘을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맹서웅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자네 검으로. 남궁위가 사자를 마구잡이로 보내진 않았을 테지. 자네의 검으로 군림맹이 허약하지 않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 말에 이서휘가 침착한 얼굴로 흑도맹의 간부들을 둘러봤다.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온 이서휘다.

물론 이서휘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하나 현 시점에서 천하제일인이 아니다.

흑도맹의 힘과 규모라면 이서휘를 제압할 수 있는 고수들이 분명 있을 터.

때문에 이서휘는 차라리 흑도맹에서 손꼽히는 강자가 나오길 바랐다. 어설프게 실력이 비슷한 자가 나와서 이서휘가 꺾어봤자 별 의미가 없을 터. 차라리 압도적인 고수와 맞붙는 게 차라리 나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속으로 갈망했다.

‘좋다. 나와라. 강자일수록 좋다.’

표정이 굳어진 이서휘가 불쑥 흑도맹 전체를 시원하게 도발했다.

“군림맹 대주 이서휘. 운이 좋아 검을 쥔 이후 아직 패배한 적이 없습니다. 흑도맹에 비무를 청하겠습니다.”

패기가 흘러 넘쳤다.

이서휘는 일부러 말에 힘을 줬다.

이서휘의 말에 온갖 따가운 시선들이 쏟아졌다.

‘네가 감히 흑도맹에 와서 불패의 전적을 자랑하느냐?’

다들 이런 눈빛이었다.

이서휘의 날카로운 눈이 흑도맹의 강자들을 하나하나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의 당당함을 마주한 흑도맹주 맹서웅(孟誓熊)이 웃었다.

“당당하군. 사자의 자격이 있다. 남궁위가 사람을 제대로 보냈군. 자, 흑도맹에서도 자네와 나이가 비슷한 자들로 내보내겠네. 안 그러면 선배가 후배를 짓밟았다 할 테니까. 안 그런가?”

이것은 자존심의 대결이다.

그 말에 이서휘가 미소를 지었다.

“상관없습니다.”

이서휘의 말에 흑도맹 간부들이 저마다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뭐 이렇게 건방진 녀석이 다 있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는 자, 당당함에 호감을 표하는 자, 무표정한 자 등 반응은 다양했다.

흑도맹주 맹서웅(孟誓熊)이 말했다.

“번잡하니 당주 이상만 남고 물러가라.”

맹주의 말에 무인들이 소리 없이 물러나자 대청에 맹주를 제외하고 열두 명이 남았다. 물론 저 중에 송무진(宋武振)은 남아 있었다. 이서휘가 남은 자들의 얼굴을 살피는데 종처럼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인이 남아 있었다. 홍일점이라 이서휘의 눈이 잠시나마 여인에게 머무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주 이상이라는 얘긴데.’

그때, 맹서웅이 일부러 직책은 부르지 않고, 이름만 호명했다.

“장예강(蔣毅剛).”

장예강이라는 자가 한 발 나오더니 맹주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명을 받듭니다.”

장예강은 이서휘에게 다가오면서 마침 좌도우검을 사용하는 이서휘와 비슷한 분위기로 등 뒤에서 쌍도(雙刀)를 꺼내 쥐었다.

“장예강이라 하오.”

이서휘는 대답 대신에 예를 취한 다음에 등 뒤에서 백야검을 뽑았다.

맹서웅(孟誓熊)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군림맹의 실력, 보겠네.”

장예강은 활달한 성격인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쌍도를 쥐고 잠시 대청을 거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운 표정이다. 어디서 이런 기회를 얻을까 하는 표정이다.

더군다나 군림맹의 대주급 인원이 불패자라고?

‘불패의 전적, 내가 깨주마.’

장예가 붙어보자는 듯이 쌍도를 부딪쳤다.

깡!

이서휘는 백야검을 쥔 오른손에 바람을 훅 불어넣었다.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긴장을 했나 보다. 검병을 쥔 손에 땀이 약간 배어 나왔다.

두 사람은 두어 번 눈을 마주치다가 검과 도를 부딪치며 말을 대신했다.

까강! 챙챙챙챙챙챙챙!

순식간에 이십여 초가 오고 갔다.

거칠고, 위험하다.

비무가 아니라 즉각 생사투의 느낌이 났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이서휘를 압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흑도맹의 오산이다.

어느새 오른손에 배어 나오던 땀이 싹 마르더니, 이서휘는 백야검을 쥐고 공세로 전환했다.

‘이곳에선 검제의 실력이 마음껏 튀어 나와도 무방하다!’

이서휘가 강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순식간에 쌍도를 튕겨 내던 이서휘가 강맹한 공격으로 장예강을 튕겨 내고 거리를 약간 벌렸다.

이서휘가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 이 순간, 이서휘의 적은 흑도맹 전체였다.

‘너희가 내 실력을 가늠하겠다고? 내가 흑도맹을 가늠할 것이다.’

이서휘의 눈에 이채가 감돌자마자 이서휘가 백야검을 내밀어 쌍도를 교차해서 막아야 할 정도로 강맹한 내공을 실었다.

까앙---! 챙챙챙, 까앙!

장예강은 백야검에 튕겨 나오는 쌍도의 궤적이 자신의 예상보다 더 흐트러지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장예강의 쌍심지가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장예강이 쌍도를 들고 춤을 추는 것처럼 물샐틈없는 방어를 펼쳤다.

하지만 이서휘는 쌍도의 궤적을 무시하고 공격하고 싶은 부분을 마음대로 공격했다. 그 사이 쌍도가 튀어나오면 이서휘의 백야검이 먼저 차단하고 후속 공격을 이어나갔다. 그 속도 자체가 쌍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공세 일변도로 장예강을 압박했다.

‘봉쇄해주마…….’

순식간에 검과 도가 교차했다.

챙챙챙챙챙챙챙챙!

장예강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격다운 공격을 펼쳐지지 못했다. 이서휘가 먼저 백야검을 내밀고 궤적을 예상해 튕겨 내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뻗어오는 쌍도를 내공으로 찍어 눌렀다.

장예강의 나이는 이제 스물 후반이나 되었을까?

각종 기연으로 얻어진 내공과 암연심법의 조화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이서휘를 압도하기엔 부족했다.

다만 쌍도의 기예가 제법인지라 버티고 있을 뿐.

흑도맹에서는 나이에 비해 충분히 강하다고 평가를 받는 장예강이다.

이십 후반의 나이에 무려 묵영당(默影隚)의 당주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흑도맹주 맹서웅이 일부러 젊은 장예강을 내보냈던 것.

하지만 이서휘를 잘 못 본 셈이다.

더군다나 이서휘는 장렬하게, 불꽃처럼 겨루기를 원할 뿐. 이곳에서 자신보다 강한 고수에게 져도 그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대는 아니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저었다.

‘흑도야, 장예강으로는 안 된다. 다음을 내놔라.’

이서휘의 백야검이 쌍도를 후려 갈기듯이 압박했다. 궤적이 단조로워도 장계강의 쌍도가 맥을 갖추지 못할 정도로 튕겨 나갔다.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도 이서휘의 백야검이 더 빨랐다. 그 사이 대여섯 번은 쌍도를 놓칠 뻔한 장예강이다. 오히려 이서휘의 입장에서는 장예강이 분전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챙챙챙! 쨍그랑!

결국엔 장예강의 도 하나가 바닥에 날아가고, 달려드는 장예강을 순간 죽일 뻔한 이서휘가 가까스로 동작을 멈추고 백야검을 비틀었다.

푸우욱!

장예강의 오른팔에 기다란 상처가 그어졌다. 장예강이 더 덤비려고 하자, 이서휘는 다른 손에 쥔 도마저 떨어뜨리고 백야검을 장예강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흑도맹주 맹서웅이 코웃음을 치며 호통을 내질렀다.

“장예강, 물러가라! 이 대주가 네 목숨을 살렸다.”

장예강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떨어진 도를 줍더니, 이를 빠드득 갈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눈을 감았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걸 지다니…….’

맹서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설마 지친 것은 아니겠지? 차륜전이라 흉을 봐도 좋다. 자네 실력을 미처 몰라 장예강을 내보냈군.”

그 말에 이서휘가 속으로 생각했다.

‘별말씀 다하시오.’

입으로 나온 말은 달랐다.

“괜찮습니다.”

“좋아. 마음에 드는군. 다음, 이자곤(李孜琨).”

“명을 받듭니다.”

흑도맹, 꽤 뻔뻔하다. 아니,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때, 삼십 대의 훤칠한 사내가 무뚝뚝한 얼굴로 나섰다.

신영당(迅影隚)의 당주, 이자곤(李孜琨).

이자곤의 손에는 일반 장검보다 검신의 폭이 좁고 얇은 검이 들려 있었다. 대신에 길이가 꽤 길었다. 속검 위주의 검법을 펼치는 자의 검일 터.

이서휘는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은 상태였으나 이자곤이라는 자의 무기를 보자마자 백야검을 등 뒤에 꼽았다.

‘이 놈이 끝이 아닐 것이다.’

이서휘가 납검하자 흑도맹 간부들의 눈이 일제히 치켜 올라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서휘는 허리춤에 매달았던 묵빛 철선(鐵扇)을 꺼내 쥐었다.

“철선?”

누군가 되묻자 맹서웅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검을 쓰지 않아도 자신이 있다 이 말인가?”

“그저 병기(兵器)일 뿐입니다.”

이서휘는 차륜전을 하는 놈들이 뭐 이런 걸 신경 쓰냐는 분위기를 풍겼다.

묵연마존의 철선은 보통 병기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서휘가 이 철선이 대단하니 조심하라고 경고할 필요도 없는 노릇.

속검으로 예상했기에 그보다 묵직한 철선으로 후려치고 때 되면 철선의 이점(利點)으로 뻔뻔하게 승리할 생각이었다.

영악한 이서휘다. 이서휘는 철선을 펼치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됐습니다.”

이자곤(李孜琨)은 철선에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이서휘는 일부러 철선의 머리 부분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이자곤이 잠시 공격을 펼치지 않고 철선을 바라보자, 이서휘는 철선을 촤르륵 소리를 내며 펼치며 공격을 예고했다.

“가겠소.”

이서휘의 선공이다. 이서휘는 말을 내뱉자마자 암행표로 신형을 번개처럼 움직여 철선을 휘둘렀다. 서늘한 바람이 이자곤의 얼굴로 불어오자, 이자곤이 급히 검을 들어 막아냈다.

순간 떠엉!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흑도맹 무인들은 철선의 강도(强度)가 보통이 아님을 깨달았다.

검을 사용하는 이서휘였지만 철선의 손잡이가 검병과 흡사했기에 철선을 운용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묵연마존이 사용했을 때보다 더 큰 위력이 발휘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자곤의 검이 묵직한 편이 아니었기에 철선의 운용이 더욱 자유로웠다.

관건은 속도.

이자곤은 검을 내지를 때마다 검 끝이 갈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환영을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두세 곳의 요혈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초식일까, 믿기 어려운 속도 때문일까.

챙챙챙챙챙챙!

이서휘의 철선과 이자곤의 검이 무척 빠르게 공격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서휘가 서서히 이자곤의 손동작과 손목을 살펴보면서 미리 대처하자 이자곤은 화려한 검초로 득을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 시작했다.

챙챙챙챙! 채앵! 까앙!

더군다나 이서휘의 철선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맹하게 이자곤의 검을 후려치니, 그때마다 이자곤의 얇은 검이 부러질 것처럼 휘어지고 있었다.

‘상성이 안 좋다.’

흑도맹은 이렇게 생각할 터.

하지만 이서휘는 그 상성을 일부러 만들어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자곤이 끝이 아니었기 때문.

이서휘가 암행표를 시전하여 철선을 휘두르자, 마치 이자곤을 세워놓고 부채춤을 추는 것 같았다.

철선에 실린 바람이 이자곤의 얼굴로 향하자, 마치 얇은 침에 맞은 것처럼 따끔할 정도.

얇은 검으로 속검을 펼치고, 검 끝의 변화로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게 이자곤의 특기였다.

하지만 이서휘의 철선은 면적이 넓었다. 변화를 담아 날아오는 공격 궤적 전체를 후려치듯 갈겨 버리니, 이자곤의 공격이 매우 궁색해지고 있었다.

이서휘의 눈이 빛났다.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이자곤의 제법 비장의 수로 감추고 있던 초식을 펼치며 이서휘를 압박하자, 이서휘는 짐짓 밀리는 듯이 무표정하게 뒷걸음을 쳤다.

이자곤이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한 순간…….

이자곤이 이서휘의 가슴을 노리고 비연고참(飛燕刳斬)을 펼쳤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드는 제비를 공중에서 가르고, 동시에 다시 한 번 벤다는 의미를 가진 초식이었다.

이서휘는 이자곤의 어깨 위치를 파악하자마자 철선을 접음과 동시에 쑥 내밀었다.

투욱! 철컹……!

이서휘는 이자곤의 검을 철선의 파검혈(破劍穴)에 물렸다.

다음 행동은 당연했다.

내공을 주입해 이서휘가 손목을 비틀었다.

깡--!

허망한 소리가 대청에 퍼지면서 이자곤의 검이 반 토막이 나자, 깜짝 놀란 이자곤이 좌장을 내밀었다.

이서휘는 일부러 철선의 이점을 사용했기에 이자곤에게 다음 공격을 양보한 셈. 다행히 받아치면 그만인 좌장이 날아오길래, 이서휘는 불쑥 내공을 끌어올린 장력으로 맞받아쳤다.

콰아아앙!

느닷없이 굉음이 터지면서 이자곤이 대청 바닥으로 날아갔다. 장력 대결에 방심할 필요는 없었다. 최선을 다해 받아치니 이서휘의 예상보다도 더 멀리 날아간 이자곤.

잠시 대청에 정적이 흘렀다.

기가 찬 눈빛이다. 괘씸하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대결할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흑도맹이 더 유명하다. 다만 철선으로 검을 부러뜨리는 것은 본 적이 없었기에 다들 황당해 하는 눈치였다.

맹서웅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장예강, 저놈 데리고 사라져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서휘에게 부상을 입고도 피를 뚝뚝 흘린 채로 비무를 구경하고 있던 장예강이다. 그제야 장예강은 피를 토해내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이자곤을 부축해 안채로 사라졌다.

장예강과 이자곤은 흑도맹에서 약한 자들이 아니다.

장예강과 이자곤은 각기 묵영당(默影隚), 신영당(迅影隚)의 당주(隚主)가 아니던가.

각기 맹서웅에게 호되게 혼나며 자리를 잡은 고수들이었는데도 다소 허망하게 패배를 맞이했다.

맹서웅의 고민이 시작됐다.

이서휘와 그나마 나이 차이가 심하지 않는 자들이 두 명이 남았다.

맹서웅이 은밀하게 키워낸 두 사람.

염라대주 한서령(韓曙逞)과 명왕대주 송무진(宋武振).

다음 시대의 흑도맹을 이끌 것이라 예상한 자들이다.

이런 곳에서 패배하면 여파가 있을 터.

맹서웅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둘 다 강하지만, 송무진이 조금 더 확실하겠군…….’

맹서웅은 평소 송무진에게 전력을 감추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비장의 수로 감춰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송무진이었다. 이서휘에게 보여주기도 싫거니와 심지어는 흑도맹의 간부들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것이 송무진의 무위였다.

‘……어쩔 수 없지.’

맹서웅이 말했다.

“송무진.”

좌중에서 뜻 모를 탄성이 터졌다. 흑도맹에서도 송무진의 무위를 궁금해 하는 자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

맹주의 말에 오히려 놀란 것은 송무진이었다. 송무진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더니 맹주를 향했다. 맹서웅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제야 송무진이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송무진이 빈손으로 나서더니 안채 쪽을 향해 말했다.

“서 부대주.”

“네, 대주님.”

“흑부(黑斧).”

그 말에 명왕대의 부대주가 거대한 도끼를 들고 나왔다. 들고 있기에는 거추장스러울 정도. 때문에 따로 명왕대의 무인이 번갈아가면서 들고 다니는 송무진의 무기였다.

이서휘는 송무진이 도끼를 쓴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송무진의 흑부(黑斧)는 이름 그대로 새카만 색의 도끼다. 보는 순간 아찔해지는 육중함이 느껴졌다.

이서휘와 체구가 비슷한 송무진이다.

‘저걸 다루겠다고?’

이서휘가 마른 웃음을 지으며 송무진을 바라봤다. 송무진은 수하에게서 흑부를 건네받아 한 손으로 가볍게 쥐더니 이서휘를 향해 물었다.

“준비 됐소?”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오.”

이서휘는 육중한 흑부를 보자마자 생각이 바뀌어 묘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흑도맹의 시선이 이서휘에게 모였다.

‘대체 왜 저러지?’

이서휘는 대청 벽으로 걸어가며 등 뒤에서 흑도맹의 시선을 느꼈다. 이서휘는 조용한 동작으로 대청 바닥에 묵빛 철선을 내려놓았다. 그뿐일까? 이제 시작이다. 이서휘는 등 뒤에 좌도우검을 매달았던 가죽띠를 벗어 내려놓았다. 이어서 청협비수를 내려놓고 다리와 옆구리에 넣어뒀던 비수까지 빼내어 내려놨다.

“무슨 무기가 그렇게 많은가?”

흑도맹 무인들의 표정들이 가관이다. 이서휘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서휘로서도 비장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거추장스러운 무기와 그 무기가 차지하던 무게도 내려놓았다.

오로지 검(劍) 한 자루를 남겼다.

송무진이라는 자에 대한 무게감만이 이서휘의 가슴에 묵직하게 담겼다.

이서휘가 검제라 불릴 때…….

송무진은 흑도맹주였다.

겨뤄본 적은 없으나 자신을 비롯한 사패에 밀리지 않는 고수 중 하나였을 터.

유엽비도, 청협비수, 철선 등은 송무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서휘는 백야검을 쥐고 다시 대청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송무진이 흑부를 쥐고 있다.

이서휘쯤 되는 경험이 있는 고수는 상대방의 기도로 경지를 파악할 수 있다.

‘송무진, 내 아래에 있는 자가 아니다.’

이서휘가 먼저 예를 취하며 말했다.

“준비 됐습니다.”

이서휘의 행동을 지켜보던 송무진은 고개를 끄덕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잠시 고민을 하는 눈치랄까.

그나저나 이서휘는 자꾸만 송무진의 흑부에 눈길이 갔다. 일견, 칠흑검보다 훨씬 무거워 보이는 중량감이 느껴진다. 더군다나 오른손으로 가볍게 쥐고 있었는데 거무튀튀한 도끼날이 반들반들한 빛을 내뿜고 있어 더 섬뜩했다.

더군다나 날이 두 개다.

큰 쪽은 전형적인 도끼날이었지만, 반대쪽의 작은 날은 갈고리처럼 되어 있어 상대방을 찍거나, 상대방의 무기를 끌어당길 수 있게끔 곡선(曲線)이 들어가 있었다.

이서휘는 무기의 모양을 읽고 마음이 더 서늘했다. 중원 무림에서 볼 수 없는 병장기다. 아예 송무진을 위해 특수 제작된 도끼일 것이다.

이서휘가 내공으로 송무진을 압도하지 않는 이상은 험난한 비무가 될 터.

그 순간, 고민을 마쳤는지 송무진의 기도가 확 변했다.

송무진의 두 눈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송무진의 목소리가 무언가에 찍어 눌린 듯이 낮게 흘러 나왔다.

“서 부대주.”

송무진은 뜬금없이 명왕대의 부대주를 불렀다. 안채에서 누군가 대답하자 송무진이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명왕단(明王丹)을 가져와.”

“알겠습니다.”

명왕단이 대체 무엇일까?

송무진의 동료 대주 한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송 대주, 뭐하는 겐가? 명왕단이라니.”

이서휘가 미간을 좁히고 송무진을 바라보고 있을 때, 명왕대 부대주가 받침대에 거무튀튀한 단약을 하나 가져왔다.

송무진이 어느새 악귀처럼 돌변한 얼굴로 말했다.

“흑도맹을 제외하고 내 흑부와 겨룬 무림인, 살려주지 않으리라 다짐했소. 내게 지면 이 명왕단을 먹으시오. 그리하면 내가 맹세를 깨리다. 명왕대의 독약이오. 해독약은 제 때 지급할 것이외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서휘의 이마에 힘줄이 꿈틀댔다.

이서휘가 반말로 대꾸했다.

“뭐라고?”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송무진은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예의를 갖춰 이서휘를 접대하던 송무진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대청에 서 있는 송무진은 흑도(黑道) 그 자체였다.

송무진이 이서휘를 보며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대주, 그냥 죽여달라 그 말인가?”

그때, 지켜보고 있던 흑도맹주 맹서웅이 입꼬리를 올렸다. 맹서웅은 송무진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다.

‘이 녀석이 이서휘의 기세를 누를 셈이로구나.’

생각해 보니, 송무진이 명왕단을 내놓은 것은 이서휘가 대처할 일이지 다른 자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시선이 다시 이서휘에게 모였다.

‘어쩔셈이냐? 군림맹의 이서휘.’

이미 이서휘의 마음은 격동(激動) 그 자체.

심리전이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이서휘를 불쾌하게 만든 다음에, 그 불쾌함을 비집고 들어와 이서휘의 평정심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이서휘가 서늘하게 웃었다.

‘싸움은 이미 시작됐구나.’

이것이 심리전이라면 그야말로 대단한 것. 하지만 심리전 따위를 걸 송무진이 아니다. 송무진은 그저 흑도의 본 모습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비무가 시작되기 전에 일부러 패기를 내보여 흑도맹을 도발한 이서휘다. 그리고 이서휘의 패기는 적절했다. 싸우기도 전에 흑도맹의 무인들을 기세로 누르는 데 성공한 셈.

하지만 생각을 거듭하던 송무진이 이서휘를 막아섰다.

‘네가 감히 흑도를 얕보려고 하느냐.’

송무진은 자신의 흑도(黑道)로 이서휘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이서휘의 얼굴이 구겨졌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송무진을 보며 ‘이 남자가 어떻게 흑도를 다스렸을까?’라는 생각으로 의구심을 가졌던 이서휘가 아니던가.

송무진을 보라!

다스렸다고? 다스리긴, 뭘 다스린단 말인가.

송무진은 흑도 전체를 짓밟아 버릴 수 있는 남자다.

송무진이 이빨을 드러내기 전에는 이 대청의 공기를 이서휘의 패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대청의 공기는 송무진의 패기에 짓눌리고 있었다.

미소를 짓고 있던 이서휘가 반격에 나섰다.

송무진에게 밀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흑도의 방식은 아니다.

이서휘의 방식으로 반격할 것이다.

이서휘는 초탈(超脫)한 마음으로 평정심을 먼저 되찾았다. 이어서 이서휘는 품에서 묵연마존에게 빼앗은 독약을 하나 꺼내 쥐고는 명왕대의 서 부대주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서휘가 받침대에 올려진 명왕단 옆에 묵연마존의 독약을 내려놓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흑도의 법을 따르겠소.”

누군가 대꾸했다.

“그것은 뭐요?”

이서휘는 마치 친구에게 얘기하듯 편하게 말을 꺼냈다.

“송 대주가 먹게 될 독약이오.”

이서휘의 뜬금없는 행동과 말에 흑도맹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후후.”

“흐흐흐.”

“으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 재미있는 사자로다!”

어쩐지 기분 좋은 웃음이다.

이서휘의 태도에는 어딘지 모르게 웃음이 터지는 능청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흑도맹의 마음에 이서휘라는 이름 석 자가 차오르고 있었다.

‘이놈 물건이로구나.’

송무진이 코웃음을 치며 개전을 선언하듯이 흑부로 이서휘를 가리켰다.

그 동작에 이서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시오.”

아직 대청에 울려 퍼졌던 웃음이 마르지도 않았건만, 이 성질 급한 두 남자는 맞붙자마자 대청에 굉음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이서휘는 이미 백야검의 검집에 내공을 불어넣고 있던 상황. 송무진이 움직이자마자 이서휘는 발검으로 응대했다.

때문에 첫 부딪침부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대청에 울렸던 것.

도저히 검과 도끼가 부딪쳐서 낸 소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기가 부딪치면서 발생한 굉음이었다.

이 자세 그대로 내공을 겨뤄도 무방할 만큼 송무진과 이서휘는 강맹한 내공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토록 단조로운 싸움은 두 사람 모두 원하지 않았다.

그그그그극―!

검과 도끼가 강도를 겨루면서 오싹한 비명을 질러댔을 때, 송무진이 이서휘를 힘으로 밀어냈다.

깡―! 휘이이익!

튕겨난 이서휘가 공중에서 인(人)의 궤적을 허공에 그려 암연심검의 파를 교차시켜 쏟아냈다.

쐐애애애앵-!

두 개의 검기가 바람을 가르며 송무진에게 쇄도했다. 대청에 쏟아지는 검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휘날리기 시작했다.

송무진은 흑부를 쥐고 월참(月斩)이라는 동작으로 시원하게 허공을 그었다.

쩌저저저저적!

그 일격에 이서휘의 검기 두 개가 자잘하게 쪼개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선수는 이서휘가 잡은 셈.

쪼개는 동작이 끝나기도 전에 파고 든 이서휘가 백야검을 내지르면서 송무진을 압박했다.

쏴아아― 위이이이이잉―.

어느새 내공을 빨아들인 백야검의 검명이 터졌다.

파아아아아앙!

백야검을 흑부로 후려 친 송무진의 짙은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송무진이 눈빛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이서휘는 무표정하게 달려 들어서 백야검을 휘둘렀다.

챙챙! 까강! 까강! 채앵!

송무진의 물샐틈 없는 방어가 펼쳐졌다. 흑부는 쌍날 도끼다. 오른손을 짧게 끊어치듯이 움직이는 것으로 이서휘의 연쇄 공격을 모조리 튕겨냈다.

챙챙챙챙챙챙챙!

이서휘는 자신의 호흡을 멈추고 속도를 더했다.

백야검과 흑부가 비명을 질러대는 것 같다.

이서휘는 더 빠르게 막아 보라는 듯이 속검을 펼쳤다. 서서히 흑도맹의 당주급은 이서휘의 동작을 읽어내기 힘들 지경이다.

하지만 송무진은 백야검의 공세를 모조리 튕겨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서휘가 이런 속도로 공세를 펼쳐낼 수 있을 것인가? 기약이 없었다.

이서휘의 몸이 가만히 있질 않았다.

상체가 낮아지고, 허리를 비틀었다.

몸을 회전하다가, 어느새 공중으로 솟았다.

검의 궤적은 몸의 움직임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다가도.

순식간에 육신(肉身)과 검(劍)이 하나가 되어 송무진에게 뻗어나갔다.

이서휘는 방어를 펼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막는 동작에서 공격이 이어졌다.

공격에서 공격이 다시 이어지고.

송무진이 방어만 펼치면, 계속 방어만 펼치라는 듯이 퍼부었다.

세찬 소나기처럼 공격을 퍼부었다.

미친 듯이 막아내는 송무진의 입술이 벌어지자 허연 이가 드러났다. 맹수가 먹이를 바라보는 표정이 이런 것일까.

‘이서휘, 더 해 봐라. 조금 더…… 더…… 더!’

어쩐지 송무진의 동작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송무진은 흑부에 내공을 주입하고 또 다시 주입했다. 그 육중한 힘만으로도 이서휘의 속검과 공격 일변도의 공세를 방해하고 있었다.

흑부에 실린 탄력(彈力)이 이서휘의 내공을 갉아먹고 있었다.

때문에 공격을 펼치던 이서휘의 마음에 한줄기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백야검이 괴로워하지는 않을까?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백야검을 걱정하고 있을 정도로 송무진의 흑부가 무겁게 대응했다.

챙챙, 채채채채챙! 챙챙챙챙챙챙챙챙챙!

송무진은 큰 날로 막았다가, 작은 날로 막는다.

손잡이로 막았다가, 어느 순간 곡선으로 휘어진 날로 백야검을 훅 하고 무섭게 당겨보는 송무진이다.

깜짝 놀란 이서휘가 백야검을 회수하자……

송무진이 빠르게 몸이 회전시키면서 뇌벽(雷劈)이란 동작을 펼쳐 흑부를 일직선으로 그었다.

막지 못 하면 이서휘는 두 동강이 난다.

몸을 움직여 피하기엔 늦었다.

흑부가 이서휘를 쪼갤 듯이 떨어진다.

이서휘가 백야검의 치켜 들어 흑부의 날을 막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앙!

이서휘가 선 자세 그대로 굉음과 함께 대청 벽으로 날아갔다.

송무진이 두 눈을 부릅뜨고 쫓아왔다.

이서휘는 좌장으로 벽을 쳐냄과 동시에 암연심검의 환을 연달아 내질렀다.

쐐애애애앵!

타앙!

허망하다.

흑부를 뚫기엔 부족하다.

송무진이 흑부를 쥔 팔꿈치를 높게 올려 흑부의 넓은 면으로 이서휘의 검기를 튕겨냈다.

방어만 하는 송무진이 아니다.

송무진의 신형이 전방으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그보다 앞서 치켜든 송무진의 흑부가 수직으로 떨어졌다.

이서휘의 머리 위에 도끼가 떨어지는 형국이다.

쩌저저저적! 콰아아아앙!

송무진의 흑부가 가차 없이 벽을 찢으면서 끝내 바닥까지 쪼개버렸다. 이서휘는 암행표로 신형을 움직여 어느새 대청 중앙으로 빠져 나온 상황. 목을 좌우로 한 번씩 꺾으며 대담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대청이 좁구나.’

이서휘는 좌장으로 대청 문을 부수듯이 밀어친 다음에 백야검을 우하단으로 늘어뜨리고 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흑부의 궤적이 커서 벽이 있는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이서휘가 백야검을 쥐고 등을 내보이며 걸어갔다.

‘와라, 송무진.’

송무진은 자신이 쪼개버린 벽과 바닥을 바라보다가 곧장 이서휘를 쫓지 않고 방금 전 이서휘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몸이 빠른 게 아니라 특이한 신법을 익힌 것으로 파악한 송무진.

‘흥, 제법 빠르구나.’

자신의 눈앞에서 이서휘가 갑자기 사라진 것 같은 착시 현상이 발생했다. 하지만 착시일 뿐이다. 송무진은 이서휘가 움직일 때 바람(風)이 지나가는 방향만큼은 읽을 수 있었다.

송무진이 대청 바깥으로 나가는 와중에 송무진의 어깨에서 우드득 소리가 흘러 나왔다. 뻐근해진 어깨의 긴장을 풀어버린 송무진이 이서휘를 따라나서며 생각했다.

‘……그 바람(風)마저 갈라주마.’

이서휘는 대청 바깥의 넓은 장소에 자리를 잡아 송무진과 함께 우르르 몰려 나오는 흑도맹의 고수들을 침착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송무진이 흑부를 쥐고 말 한마디 내뱉지 않으면서 이서휘에게 다가왔다.

이미 어둑해진 밤이다. 주변에 내걸린 등불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흑부와 백야검은 마치……

흑(黑)과 백(白)의 대결이다.

이서휘는 백야검을 중단으로 당겼다가 수직으로 세웠다.

죽고 사는 문제를 머리에서 지웠다.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한 승부욕을 마음에서 덜어냈다.

이서휘의 검(劍)이 오로지 남았다.

누가 먼저 공격할 것인가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리라.

이서휘가 무심(無心)한 검 한 자루를 송무진에게 뻗었다. 이제 더 이상 이서휘의 검은 빠르지 않았다. 더 이상 묵직하지도 않았다. 그저 손에 쥐고 휘두를 뿐이다.

이제 송무진이 마음껏 날 뛸 차례였다. 송무진은 이서휘가 무척 많은 허점을 드러내며 다가오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기회를 잡아야 할 터.

‘겨루다 죽이면 그뿐이로다.’

까앙! 챙챙챙챙챙챙! 까――앙!

흑부에 맞은 이서휘와 백야검이 깃털처럼 허공을 날아다녔다. 이서휘는 겨우 균형을 잡아가면서 흑부를 튕겨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무리하는 법이 없었다.

이서휘는 생각 끝에 방어로 전환했다.

이미 공격은 수없이 펼쳐봤던 이서휘다.

흑부를 마치 검처럼 가볍게 사용하는 송무진은 이서휘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쳐내고 있었다.

이서휘의 내공으로 쏟아낼 수 있는 검기는 흑부 앞에 효과가 없었다.

변초와 허초도 소용없었다.

송무진은 본인의 내공과 타고난 신력이 조합된 힘으로 이서휘의 손목이 얼얼해질 정도로 튕겨냈다.

때문에 이서휘는 자신을 검을 불쑥 내밀어 스스로 수세(守勢)로 전환했다.

대체 누가 이런 선택을 할까?

그리고 대체 누가 이런 형세에서 적을 이길 수 있을까.

아, 흑부가 또 다시 이서휘에게 쏟아진다.

이서휘와 송무진 사이에 달(月)이라도 걸려 있으면 그 달이 쪼개질 지경이다.

맞붙던 두 사람 사이에 또 다시 굉음이 터진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이서휘가 곡선을 살짝 그리면서 밀려나가 공중에 솟구쳤다. 이제 이서휘는 백야검을 내밀어, 자신이 튕겨나는 위치를 일부러 조정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파라라라락―!

이서휘의 옷자락이 휘날리면서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일순간, 소강 상태――.

서로 공세(攻勢)와 수세(守勢)를 교차하며 공수(攻守)의 묘미를 주고받은 두 사람이다. 하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거리가 제법 멀다.

이서휘가 불쑥 백야검을 하늘로 치켜 들었다.

‘송무진, 승부를 보자.’

이서휘가 승부수를 던졌다. 장기전을 포기하고 소모전을 선택한 이서휘. 이제부터 내공 소모가 평소보다 빠를 것이다. 송무진을 꺾기도 전에 먼저 이서휘의 내공이 바닥나면 이서휘의 몸이 쪼개지는 일만 남을 터.

쏴아아아아아아아아―――.

백야검에 정체 모를 빛무리가 발현(發現)되어 백야검을 감쌌다. 그렇게 이서휘가 내공을 쏟아내어 백야검을 검사(劍絲)로 휘감았다.

‘이 새끼가―!’

송무진의 눈썹이 꿈틀대자마자 이서휘를 향해 흑풍(黑風)이 돌진하듯 뻗어 나갔다.

꽈아아아앙!

이서휘의 몸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떨어지는 흑부를 튕겨내고 빛무리가 휘감긴 백야검으로 송무진을 압박했다.

챙챙챙챙챙챙챙!

그때부터 송무진이 이서휘의 백야검을 튕겨낼 때마다 손에 쥔 도끼 자루가 조금씩 손바닥에서 이리저리 밀려나가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도끼날이 틀어지고 있었다.

꽈드드득―! 소리와 함께 송무진이 흑부를 움켜쥐었다.

송무진이 분노(憤怒)라는 단어를 머리에 떠올린 순간, 이서휘의 정수리를 노리고 대월참(大鉞斬)을 펼쳤다.

이서휘는 흑부의 날 색깔이 변하는 것을 감지하자마자 깜짝 놀라서 검사에 휩싸인 백야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콰아아아아아앙!

두 사람이 순식간에 좌우로 밀려났다.

츠츠츠츠츠츠츠츠츠―――!

‘기어코 내가, 이것을 쓰게 만드는 구나. 이서휘.’

밀려났던 송무진이 제자리에서 흑부로 자신의 몸을 감싸듯이 두어 번을 빠르게 휘젓다가 흑천강하부(黑天降下斧)를 펼쳤다.

송무진의 모습이 거무스름하게 거대해진 흑부에 가려 모습을 감췄다.

촤아아아아아아!

저것을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할까.

허공을 좌우로 양단하는 기파(氣波)가 이서휘에게 쏟아진다. 동시에 흑도맹 간부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누군가는 이서휘를 바라봤다.

흑도와 백도를 떠나서 인간에게 품을 수 있는 당연한 감정이 바라보는 자의 눈빛에 감돌았다.

‘피해라!’

실로 얄궂은 운명이다.

여기서 지면 죽는 게 낫다.

이서휘, 이 고집불통이 죽음과 마주했다.

그 순간에 왜 하필이면……

구화산의 석실, 그 뻥 뚫려 있는 천장이 생각났을까.

찰나의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막을 수 없으면 어떠랴.

가보자…….

이번 인생도 이미 검에 걸었다…….

이서휘가 진작 백야검을 어깨 뒤로 당겨놨다. 암연심검의 환을 내뱉는 자세다. 이미 만들어냈던 검사가 검봉으로 빨려 들어가듯 뭉치면서 빛무리를 내뿜고 있었다.

이미 송무진이 쏟아낸 흑천강하부(黑天降下斧)가 코앞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말로 정의할 수 없는 검의 오의(奧義)를 깨닫는다.

그 오의를 깨닫자마자……

백야검을 휘감고 있는 검사 덩어리가 일점(一點)으로 모인다. 그 점에 암연심검 환(丸)의 위력과 속도가 더해지고……. 이어서 이 모든 것과 일체화 된 암천세(暗天勢)가…….

흑천강하부(黑天降下斧)와 맞붙었다.

[――――――――!]

두 힘이 맞붙는 순간, 굉음 대신 적막감이 흘렀다.

암천세가 모든 소리를 삼킨 순간이다.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송무진은 자신의 흑천강하부(黑天降下斧)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무어라 표현할까.

‘흑천강하부는 어디로 갔는가? 저 빛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늘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면 송무진의 대처에 박수를 쳤으리라. 송무진은 그 순간에도 흑부의 가장 넓은 면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빛무리를 막아냈다…….

……굉음은 송무진이 쥐고 있는 흑부에서 터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날아가던 송무진이 허공에서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땅에 떨어질 때쯤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몸을 홱 비틀어 흑부의 끝으로 땅을 찍으며 내려섰다. 한데, 왼손과 왼 무릎이 땅에 닿아 있었다.

‘내가 언제 무릎 한쪽을…….’

송무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이서휘를 바라봤다.

‘……!’

어느새 거뭇한 형체가 송무진 옆에 서있다.

스윽, 하고 검을 내밀면 송무진의 목이 꿰뚫리는 거리다.

송무진은 미처 무릎도 펴지 못했는데, 어느새 귀신처럼 다가온 이서휘다.

차라리 검이라도 내려치면 반격이라도 할 텐데, 빌어먹을 이서휘 새끼가 공격도 펼치지 않고 있었다.

‘패배라는 게 이렇게 허망한 것이었나?’

송무진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사이 이서휘는 수십 번의 공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내 이서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순간, 송무진의 가슴에 차오른 감정은 무엇일까.

흑부를 쥔 송무진이 저도 모르게, 무어라 말을 내뱉어야 할지를 몰라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이 내가 말을 고르고 있다니……. 치욕스럽게 이게 무슨 작태냐. 인정하자, 나답게.’

송무진은 흑부의 날을 내리고 손잡이를 쥔 채로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이 대주…… 내가…….”

송무진이 무슨 말을 꺼내도 궁색할 것이라 판단한 이서휘.

송무진이 먼저 두 손을 맞잡은 것 자체가 이서휘의 승리이리라.

이서휘는 송무진의 자존심까지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이서휘가 시원한 동작으로 더 빠르게 포권을 취한 다음에 송무진의 말을 끊었다.

“송 대주…… 우리 둘 다, 독약을 삼킬 필요는 없을 것 같소만, 어떻소?”

“뭐요?”

송무진의 표정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어느새 독약 이야기를 농으로 치부해버리는 이서휘. 지켜보던 자들이 머리가 띵할 정도로 뜬금없는 발언이었다.

이서휘가 흑도맹주 맹서웅을 돌아보며 말했다.

“맹주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 대주나 제가 독약을 먹어야겠습니까? 맹주님의 판단을 따르겠습니다.”

이 대결의 승부는 독약을 먹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몰아갔던 송무진이다. 하지만 이서휘는 두 사람 모두 먹을 필요 없다고 받아쳤다.

이서휘의 마음을 뻔히 알고 있는 맹서웅인지라 그저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 끝까지 우리에게 백도(白道)의 검을 겨누는구나.’

맹서웅은 이서휘의 말에 답하지 않고 송무진을 비롯한 수하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다들 명심하도록.”

“네, 맹주님.”

흑도맹주 맹서웅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흑도의 수하들에게 선언하듯 말을 내뱉었다.

“흑도맹은 지금 이 시간부터 군림맹과 연합하여 마도 세력을 분쇄하겠다. 이 시간 이후로 백도의 무인을 베어 연합에 금이 가게 하는 자가 있다면 내 손에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알아 들었나?”

이것은 흑도맹주의 결정이다.

이것은 흑도맹주의 선전포고이다.

흑도맹주 맹서웅의 선언에 흑도맹의 간부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했다.

“흑도패왕(黑道霸王) 휘하,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지켜보는 이서휘의 등줄기에 전율이 감돌았다.

맹서웅의 말이 이어졌다.

“송 대주.”

“네.”

“너의 패배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네가 전혀 부끄럽지 않다. 다만…….”

“네.”

“너의 복수전은 마도 세력이 분쇄될 때까지 허락지 않겠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송무진의 눈매가 저도 모르게 씰룩이고 있었다.

그제야 맹서웅은 이서휘를 바라봤다.

“이 대주.”

“네, 맹주님.”

“사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네. 내 앞으로 군림맹이 다소 못난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군림맹에 자네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겠네.”

보기 드문 극찬이다.

이서휘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실로, 과찬이십니다.”

맹서웅이 수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대주뿐만이 아니다. 이제 군림맹과 종종 전령과 사자가 오가게 될 터. 흑도맹은 앞으로 군림맹의 사자들을 정중하게 대하라. 그리고 심연각주 이하는 군림맹과 어떻게 공조할 것인지 협의하여 보고하도록. 송 대주가 못난 모습을 보였다면 오늘 이 자리가 불쾌했을 것이나 무림의 선배로서 마음이 흡족할 만큼 훌륭한 비무였다고 생각한다. 송 대주와 이 대주보다 뒤떨어지는 자들은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다들 물러가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맹서웅이 이서휘를 힐끗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편한대로 쉬다 가게나.”

“감사합니다, 맹주님.”

이서휘는 맹서웅이 휘적휘적 걸어서 사라지고 나서야 눈을 잠시 지그시 감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토록 마음을 단단히 먹었건만…… 힘들었다. 힘들었어.’

이서휘가 눈을 뜨자 어느새 덤덤한 얼굴로 돌아온 송무진이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이서휘의 속이 철렁했다.

‘아, 흑도야, 흑도야! 어쩌면 이렇게 흑도답단 말이냐.’

방금 싸워서 이서휘에게 패한 송무진이 다시 이서휘의 접대를 맡겠다고 남아 있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서휘가 웃어 버렸다.

송무진 역시 기가 막히다는 눈치다. 이미 다른 자들은 말없이 물러난 상태. 송무진이 고갯짓을 한 번 하자 명왕대의 수하들이 이서휘의 병기를 챙기러 대청으로 다시 들어갔다.

송무진이 이서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 대주, 오늘 나랑 술잔 좀 오랫동안 주고받으셔야겠소.”

이서휘가 송무진을 향해 정중하게 두 손을 맞잡았다.

“송 대주, 그 술잔…… 오늘 내가 원없이 채워 드리리다.”

어느새 서로의 나이도 신경쓰지 않고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다. 송무진이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웃더니 흑도맹주의 흉을 봤다.

“우리 맹주님 보셨소? 실로 용의주도한 분이오. 이 대주와 비무는 훗날로 미루겠소이다. 기다리고 계시오.”

이서휘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 날이 오길…… 진심으로 바라겠소이다.”

“갑시다!”

마도가 분쇄되는 날…….

강자들과의 비무는 그저 무학(武學)의 즐거움이 될 터이니…….

송무진과 나란히 걷던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씨익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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