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1장. 환마>
“우리는…….”
중년인은 이서휘를 둔덕 옆에 앉히고 자신도 편하게 앉아서 한참 동안 말을 나누고 있었다.
“검마련주(劍魔聯主)에게 패한 자들이야. 내 이름은 곽서명(郭曙明)이라고 하네.”
곽서명은 말을 내뱉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부끄러움와 씁쓸함이 공존했다.
한데, 검마련주(劍魔聯主)라니…….
이서휘가 모르는 전대의 이야기였다.
검림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검마련주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분명 심상치 않은 사건이리라. 이서휘는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잠자코 곽서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래된 일이지. 검마련주는 이상한 사람이었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면서도 우리는 여러 번 살려주더군. 정확하게는 나와 몇 명의 동료들이지. 나머지는 쓸모도 없고 재미도 없다면서 다 죽였으니까.”
“네?”
“살려준 이유가 단순했어. 재미있는 놈들이다. 말투가 아직도 기억나는군.”
실로 기이한 이야기였다.
곽서명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우리의 사명은 새외의 마도 세력인 검마련주를 죽이는 것이었네. 그 자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훤하군. 우리와 겨룰수록 재미있다는 표정을 자주 짓고 있었지. 검마련주 위양천(韋凉天). 그의 이름일세.”
하필 위 씨라는 말에 이서휘가 미간을 좁혔다.
곽서명은 이서휘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설마 들어본 적 있나?”
“아니오.”
곽서명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새외의 전대 고수인데다가 자네는 나이가 어려 들어본 적이 없을 거야. 하여간 그 위양천의 상태는 도검불침(刀劍不侵)의 경지였지.”
“도검불침이오?”
“검마의 상태가 그랬네.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해. 도검불침이 아니라 아마 마공의 일종이겠지. 어딘가 약점은 있었을 거야. 그도 누군가에게 죽었으니까.”
“네?”
“하하하. 표정 참 가관이군.”
이서휘는 곽서명의 진지한 이야기에 황당하다거나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곽서명이 이서휘의 생각을 읽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검마련주와 겨루던 시절, 마교의 잔존 세력들이 회동해서 교주를 한 명 옹립한 모양이야. 새외의 검마련주도 참석했다고 하더군. 검마련주 위양천은 그때 죽었네. 검림은 목적을 잃은 상실감과 패배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마교 교주를 찾기 위해 흩어졌네. 몇 명은 걸인이나 낭인처럼 돌아다닐 것이고. 일부는 모르겠군. 어쩌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결국 전대 고수들의 모임이란 얘기다. 들을수록 이서휘는 곽서명이 자신에게 검림주를 하라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어쩔 수 없이 이야기 도중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어찌 제가 검림주의 중책을…….”
“왜? 싫은가? 무공이 약해서 맡지 못하겠나? 나를 비롯해 내 동료들 모두가 아직 나이가 어린 자네보다는 쓸 만한 검을 휘두를 거네. 어쩌면 몇 명은 죽었을지도 모르겠네만.”
“물론…….”
“우리는 강했네. 자부심이 드높았지. 그런데도 우리는 졌어. 검림을 폐하고 검총이라 불렀지. 우리는 이곳에서 맹세를 하고 흩어졌네. 우리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검마에게 패했기 때문이 아니야. 검마련주보다 더 강한 자, 그리고 더 큰 세력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이지. 때문에 일부는 여전히 무공을 수련하거나 후계자를 찾고 있을 터.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지. 다음 검림주는 검을 모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네. 검림주는 무공으로 선출되는 자리가 아닐세. 그래도 맡지 못하겠나?”
“검을 모으는 사람.”
“그래. 저마다 역할이 다르네. 내 동료 몇 명은 자신의 무공을 전수할 후계자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네. 누군가는 여전히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마교 교주를 찾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겠지. 그 나름의 이유로. 하지만 검총에서 검림주에 대한 것은 다들 동의했지. 그들이 이 시험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고.”
이서휘는 곽서명(郭曙明)의 이야기를 듣다가 머리 한쪽이 멍해지고 있었다.
‘사부님…… 어찌 두 눈이 멀었던 저를 거둬주셨던 겁니까…….’
곽서명은 이서휘의 두 눈이 붉어지는 것을 보며 말했다.
“검총의 시험은 검림주를 찾는 것. 내 생각이 자네가 했던 말과 같네. 자네가 당대의 검을 모으게.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게. 패배하여 설령 나처럼 살아있게 된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 자리서 동료들의 검을 바라보면서 평생을 묘지기로 살아야 할 걸세.”
그 뒤에도 곽서명은 무어라 이서휘에게 한참을 말했지만 사실 이서휘는 잘 들리지 않았다.
사부를 떠올렸다가 이따금 곽서명이 했던 말이 계속 가슴에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림주는 검을 모으는 사람이다…….
무언가 세력을 이끌고 명령을 내리는 자리라면 한사코 거절을 하려고 했던 이서휘다.
한데, 검을 모으는 사람이라니…….
이런 것을 두고 숙명이라고 하는 것일까.
이서휘는 검림주 역할이 그런 것이면 얼마든지 맡을 생각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언젠가는 사부와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서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아니면 누가 그 일을 하겠는가 라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다시 살아가게 된 책임과 숙명은……
이서휘가 다시 눈을 뜬 순간에 주어진 것일 터.
이것이 바로 이서휘의 운명이었다.
* * *
군림맹 인근의 객잔 거리.
한 남자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먼 길을 오는 동안 익숙해졌는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남자가 들어선 곳은 검풍객잔.
“도둑 냄새가 나는데?”
저녁때라 객잔은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그 시끌벅적한 소란이 한 남자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잦아 들고 있었다.
객잔 이 층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도삼과 도이는 뜻 모를 정적에 고개를 돌렸다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공자님!”
도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와, 살아 계셨소? 아니, 그런데 못 본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소?”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계단으로 올라오는 남자는 이서휘였다. 행색이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더군다나 짐은 왜 그렇게 많은지. 떠돌이 봇짐 상인의 모습이었다.
이서휘가 엄살을 피며 도이와 도삼의 탁자에 합류해 앉았다.
동시에 쾅―! 소리가 이 층에 울렸다. 대체 얼마나 무거운 것을 들고 온 것일까.
평소의 행적에 이상한 점이 많은 이서휘였으나 오늘만큼은 실로 광인의 모습이었다.
도이와 도삼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침을 삼키자, 이서휘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것들이 오랜만에 보는데 인사도 안 하고. 한 잔 줘봐라.”
도삼이 냉큼 술을 한 잔 따르자 이서휘가 목이 말랐는지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도이가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무림 은퇴를 축하드리오. 늦은 나이에 상인의 꿈을 이루셨다니 감축할 일이외다.”
이서휘는 도이의 개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손을 뻗어 봇짐을 이리저리 뒤졌다. 철컹, 쨍그랑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툭, 툭 소리가 이어지기도 했다. 잠시 후 봇짐에서 천으로 둘둘 말린 병장기를 꺼낸 이서휘가 탁자를 조금 치우고 내려놓았다.
그 뜻 모를 행동에 도이가 말했다.
“안 사.”
도삼이 말했다.
“공자님 이게 대체 무슨…….”
도이가 농을 쳐도 도삼이 의아하게 쳐다봐도 이서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천을 풀었다.
“어어?”
“어?”
도삼과 도이의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무언가 더 농담을 하려던 생각이 싹 사라지고 이서휘가 천에서 꺼낸 한 자루의 직도에 시선이 고정되어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이서휘가 혼신의 힘을 다해 찾은 병장기다. 이서휘가 도삼의 무공과 기질을 생각해서 고른 것이었다.
이서휘가 서늘한 빛을 내뿜고 있는 직도를 손에 쥐며 말했다.
“도신의 폭이 좁다. 무게도 가볍고. 네가 요새 판관필을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으나 너는 본래 도를 익힌 사람. 판관필을 버리고 앞으로 이 직도를 사용해서 도법을 익혀라. 도삼, 네게 준다.”
이서휘가 진지한 눈빛으로 양손으로 받쳐 들고 있던 직도를 도삼에게 내밀었다. 도삼은 너무 당황한 지라 감사하다는 말도 내뱉지 못하고 직도를 받았다.
도삼이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자, 이서휘가 제지했다.
“나중에 이야기 하자꾸나. 오늘 좀 바쁘니까.”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이어서 봇짐에서 거친 헝겊에 말린 비수 한 자루를 꺼냈다. 도이는 줄곧 쌍수의 무기를 다뤘다. 때문에 일전에 청협비수를 주고 나서 이서휘의 마음이 약간 허전했다. 청협비수와 짝을 이룰 수 있는 비수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고른 것이었다.
이서휘가 비수를 내밀면서 말했다.
“청협비수와 손잡이는 물론이고 길이까지 비슷하더구나. 하지만 이게 조금 더 묵직하다. 때문에 내공이 너보다 우위에 있는 자와 겨룰 때는 이 비수를 오른손에 들고 싸우는 게 유리할 거다. 도이야, 네게 준다.”
도이는 침을 한 번 삼킨 후에 전에 없던 진중한 말투로 대답했다.
“고맙소. 잘 쓰겠소.”
이서휘는 봇짐을 다시 챙기더니 바로 일어났다.
“바쁘니까 나중에 이야기 하자꾸나. 먼저 가마. 아, 나 아직 안 잘렸지?”
이서휘의 말에 도삼이 황당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가끔 그놈의 전서를 정말 귀찮게도 자주 보내시더니만…… 잘릴까 걱정하셨습니까?”
“아니면 됐다.”
이서휘는 검풍객잔을 빠져 나와 월야대의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검우 정천은 오랜만에 이서휘가 등장하자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이 대주! 이게 대체!”
“정천 형. 오랜만입니다.”
“아니, 전서만 실컷 날리고 대체…….”
쿵……!
이서휘가 봇짐을 내려놓더니 유엽비도만한 짧은 검 한 자루를 꺼내 정천에게 내밀었다.
“형, 이것을 쓰십시오. 등이나 허리춤에…….”
“응? 나보고 쌍검을 쓰라고? 영 나와 맞지 않는…….”
“형의 검법은 강맹함을 위주로 합니다. 형보다 내공이 고강한 자를 만나면 고전을 면치 못할 겁니다. 검을 놓치면 그야말로 위험하고요. 연습한다 치고 지니고 다니십시오. 쓸 만한 검입니다.”
이서휘가 내민 검을 받아든 정천은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집을 뽑아보니 붉은 빛을 띈 검신이 서늘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더군다나 크기에 비해 예상외로 검이 묵직했다. 정천은 이서휘를 바라보며 넋 나간 사람처럼 대꾸했다.
“허, 잘 쓰겠네.”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월야대의 건물을 돌아가 안채 앞에 마련된 연무장으로 갔다. 이서휘의 목소리와 대화를 이미 듣고 있었는지 화지련이 오랜만에 등장한 이서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화 소저, 잘 있었나?”
“네.”
이서휘가 봇짐을 뒤지려는데 화지련이 말을 내뱉었다.
“전 다른 검을 쓸 생각이 없어요.”
그 말에 이서휘가 대뜸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건방진 소리 하지 마라. 아, 미안 내가 아직 말을 안 놨었지? 지금부터 편하게 하마.”
“네?”
이서휘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화지련을 대했다. 하긴, 이서휘의 부하다. 말이야 얼마든지 놓을 수 있었으나 데면데면한 사이라 거리를 뒀을 뿐. 한데 오랜만에 돌아온 이서휘는 마치 화지련을 꾸짖는 것처럼 말을 시원하게 이어 나갔다.
“네 검이 사부님이 쓰던 것인지 아니면 사문(師門)에 내려오는 검인지 내 알바 아니다.”
이서휘가 검붉은 빛깔에 얇은 검신을 지닌 검 한 자루를 스릉 소리와 함께 뽑아 쥐었다. 이서휘가 가볍게 쥐고 화지련을 향해 검을 내밀었다.
“쳐라.”
화지련은 대뜸 성을 내는 이서휘를 보고 기분이 나빠져서 발검과 동시에 이서휘가 들고 있는 검을 후려쳤다. 이서휘는 내공을 뺀 상태에서 화지련이 휘두르는 궤적을 보고 검신만 약간 비틀었다.
쩡―! 쨍그랑!
화지련의 검신이 부러지더니 부러진 날이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결코 이서휘의 내공에 의해 부러진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화지련도 잘 알고 있었다.
화지련이 이서휘를 바라보자 탁 소리와 함께 검집에 검을 꼽은 이서휘가 한 손으로 검을 내밀었다.
“저 부러진 검으로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으냐? 받기 싫으면 가져간다.”
이서휘는 화지련이 대답하지 않자, 왼손으로 봇짐을 등에 올린 후 뒤돌아 나가며 코웃음을 쳤다.
“흥.”
그때, 화지련이 후다닥 소리를 내면서 달려와 이서휘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대주님, 쓰겠습니다. 쓸게요! 죄송해요.”
이서휘는 화지련을 생각해 고심해서 골라 온 검이다. 여인이라 참 대하기가 힘든 면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불편하게 지낼 생각이 없었다. 도삼과 도이처럼 편하게 대할 생각이었다. 잘못을 하면 혼내기도 할 생각이었다. 또한! 화지련의 자존심 따위는 앞으로 수십 번은 더 뭉개줄 것이라 다짐하고 있었다. 얼굴만 예뻤지 실제 성격은 잡초처럼 강한 면이 있는 여인이었기 때문.
이서휘가 말했다.
“지련아.”
“네.”
이서휘가 입에서 후 소리를 냈다.
‘아…… 때릴 수도 없고.’
갑자기 성이난 이서휘가 손을 내밀어 화지련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아니고 때리는 것도 아니고 마구잡이로 엉클어뜨렸다.
“잘 해라.”
“대주님!”
이서휘는 속이 좀 시원해져서 등을 돌리고 빙긋 웃으면서 걸어 나갔다.
‘비무 때 좀 더 밟아놔야지.’
노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돌아온 이서휘는 한층 사악해진 상태였다.
이서휘는 한참 줄어든 봇짐을 들고 질풍검대를 나오면서 검림주라는 의미에 대해 되짚어 보고 있었다.
곽서명이 말한 검림주는 내가 검림주요, 라면서 위세를 떨 필요가 없는 자리였다.
이서휘가 검을 뽑는 순간 이서휘의 뜻을 따라 함께 검을 뽑을 수 있는 자들…… 그들이 모두 검림이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때로는 누군가의 검림이었고 누군가의 검림주였다. 예를 들어 장시우가 검을 뽑으면 이서휘가 함께 검을 뽑을 것이다. 이 순간에는 장시우가 검림주고 이서휘와 이서휘를 따르는 월야대는 검림이 된다.
실로 기이한 이야기.
하지만 이서휘는 이해했다.
이익이나 문파의 명예 따위에 이합집산하는 세력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서휘의 천성과 들어맞는 이야기였기 때문. 그렇게 이서휘는 자신의 검림을 만나고 다니면서 별다른 말없이 검을 건넸다. 이미 특별한 말이 필요 없는 사이기도 했다.
그렇게 질풍검대주 장시우와 부대주인 이건영에게 검을 건네고 월야대로 돌아온 이서휘는 검검풍객잔에서 돌아온 도삼과 도이에게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연공실에 접근하지 말라고 이른 뒤에 이서휘는 홀로 연공실에 들어갔다.
드디어 노산에서 얻은 이서휘의 검을 다시 살펴볼 차례였다.
오는 도중에도 몇 번 살펴봤던 검이다. 한데 이서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신의 검과 마주하고 싶었다. 아직 무언가가 들어있는 봇짐을 한 곳에 내려놓고, 등에 매달았던 검 한 자루를 손에 쥐었다.
저도 모르게 입소리가 흘러 나왔다.
“후후.”
이서휘는 노산의 곽서명(郭曙明)이 검총에서 가져온 하얀 색의 검을 건네줄 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자강검을 대신할 수 있는 명검을 얻었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던 것.
하지만…….
하얀 색의 검을 만지는 순간 이서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이서휘는 그때의 기분을 떠올리면서 백색의 검을 살폈다.
검병의 부드러운 감촉, 오른손으로 쥐었을 때의 기분, 왼손가락으로 검결을 맺었을 때 느껴지는 검신의 느낌…… 심지어 검의 무게까지……!
너무나 익숙했다.
왜 이렇게 익숙할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는 칠흑검을 두 눈으로 본 적은 없었으나 항상 만지고 느끼고 무게감을 안고 살았었으니까.
이서휘는 곽서명이 백검을 건네면서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백야검(白夜劍)이라 한다.”
설명해주지 않아도 백야검을 만지는 순간 이서휘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전율이 감돌았다.
만지는 순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백야검은 이서휘가 전생에서 사용하던 칠흑검(漆黑劍)과 함께 태어난 검이라고.
‘확실해. 같은 장인이 만든 검이다!’
곽서명으로부터 검의 내력을 듣기도 전에 알아차린 이서휘였다.
* * *
노산에서 곽서명의 이야기는 이랬다.
[사실은 이 백야검과 쌍둥이 검이라고 할 수 있는 칠흑검이 있네.]
[누가 가져갔습니까?]
[진무결. 검총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으나 그야말로 훌륭한 무위를 지닌 사람이었지. 기연을 찾아 왔고 검총의 시험을 무시하는 무위를 펼쳐서 그야말로 시원하게 칠흑검을 뽑아 갔네. 당황해서 말도 안 나오더군. 훗날 방문한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무림에서 검선(劍仙)이라는 별호를 얻었다더군. 어울리는 별호라 생각했지.]
[그렇다면 기연이?]
[기연은 자강검 뿐만이 아니야. 장보도를 찾아 온 사람, 고서에 적어 놓은 단서를 찾아 온 사람……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어쨌든 백도와 마도를 가리지 않고 기연을 찾아왔지. 백도는 검림으로 안내했고, 마도는 내가 그 자리서 죽였네. 자네가 봤던 마검들은 그런 이유로 꽂혀 있었던 것이야. 검이 늘어날 때마다 가끔 검총을 만들 때 도움을 줬던 친구들이 검의 위치를 조정해놓고 갔지. 이제는 세월이 흘러 연자도 친구도 발걸음이 끊긴 상황이었네.]
한편, 곽서명은 검선 진무결을 이렇게 평가했었다.
[옳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네. 이미 진무결이라는 사람 자체가 자신의 세상에서는 검림주였어. 검을 모으는 사람이었지. 다만 으스대는 명문정파나 백도의 세가들을 비웃는 듯한 정사지간의 느낌이 있었네. 반면에 성격은 소탈했지. 낭인이나 방랑자의 느낌이랄까……. 우리 검림은 느슨하면서도 끈끈한 면이 있는데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네. 나는 진무결을 검림의 일원이라 생각하네. 검총에서도 손꼽히던 명검을 가져갔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안 그런가?]
이서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곽서명은 사부인 검선 진무결의 성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
* * *
연공실에서 이서휘는 일부러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로 백야검을 만졌다.
마치 칠흑검을 다시 손에 쥔 것 같은 반가운 느낌이랄까.
익숙하면서 편했다.
칠흑검의 절삭력과 무게감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더 적응할 필요도 없는 이서휘의 검이었다.
잠시 후 이서휘는 백야검을 내려놓고 봇짐을 열어 곽서명이 건넨 목갑을 꺼냈다.
연공실에 들어온 이유는 조용한 곳에서 백야검과 마주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 목적은 바로 백년하수오(百年何首烏)였다.
군림맹으로 오는 길에 이미 백년하수오 세 개를 복용한 상태.
복용할 때마다 운기조식이 길게 이어져서 매우 곤란스러웠다. 때문에 이서휘는 남아 있는 두 개의 백년하수오를 그 자리서 한꺼번에 복용하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백년하수오(百年何首烏).
그 한 개의 효능은 이서휘가 취한 월단화와 남궁세가에서 내놓은 천양뇌단에 비해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무려 다섯 개를 섭취한 이서휘.
본래 내공의 조예가 낮은 사람이 분에 넘치는 영약을 섭취하면 그 효능의 오 할도 얻기 힘들다.
복용 이후가 더 중요하기 때문. 내공심법으로 영약의 효능을 단전에 담아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서휘는 그 누구보다 영약과 운기조식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전생에 이미 사부인 검선이 얻어다준 영약으로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체득했기 때문.
백년하수오는 그렇게 이서휘의 체내로 흘러 들어가 기존에 쌓아둔 내공에 녹아 들었다.
잠시 후 월단화, 천양뇌단, 백년하수오의 기운이 암연심법으로 한데 뭉쳤다가 이서휘의 단전에서 기운이 폭발하는 것처럼 터져서 세맥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서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마치 지휘자처럼 질주하는 기운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서휘는 만족스러울 때까지 연공실에 틀어박혀서 시간을 잊은 채로 암연심법에 몰두하고 있었다.
* * *
며칠 후.
이른 아침 두 필의 말이 질풍처럼 내달려 군림맹의 정문에 도착했다. 하나 같이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령은 각각.
백도 세력인 승검문(勝劍門).
일전에 군림맹 입맹을 거부당한 완안해가(完顔海家).
두 곳이었다.
방문 목적은 거의 흡사했다. 다양한 이유와 설명을 곁들였지만 요약하면 결국 도와달라는 이야기.
승검문의 요청은 이랬다.
[몽성이괴와 사파 고수들의 공격을 받아 승검문이 성지(聖地)까지 몰려 포위를 당했습니다. 군림맹의 지원을 급히 요청합니다.]
완안해가의 요청은.
[구화방과 분쟁이 발생했는데 구화방으로 본가의 소가주가 잡혀 갔습니다. 군림맹이 중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완안해가 가주 해진량.]
참으로 오묘했다.
일단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마치 검대 하나를 다 보내기도 애매한 요청. 또한 소규모 분쟁이라는 점에서 군림맹이 쉽게 도울 수 있는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먼저 승검문은 군림맹이 나서서 도와줘야 할 세력이 맞았다.
반면에 완안해가는 애매했다.
완안해가는 주변 평판이 좋지 않아, 군림맹이 입맹을 보류한 세력이었다.
그 후로 딱히 왕래가 없었으나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한데, 어찌 이렇게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지원 요청을 보냈을까?
누구라도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군림맹이 지원을 보내기 알맞은 위치에 있는 세력들이었다.
때문에 천뢰각주 한신은 수호전에 알리고, 다시 수호전에서는 쌍각의 수뇌부, 군림오검대주, 월야대주 이서휘를 호출한 상태였다. 남궁위의 명에 의해 맹에 머무르고 있는 모용, 백리, 독고세가의 가주들까지 부른 상태.
그렇게 군림맹의 수호전에서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또 중원 전역에 내보냈던 다른 전령들이 속속 도착했다. 한데, 그 보고들이 진위를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심각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첫 째, 백도맹의 간자 세력과 외부에서 침투한 인원들이 백도맹의 철옥(鐵獄)에서 죄수를 빼가느라 대규모 혈전이 벌어졌다는 소식.
둘 째, 백검문(白劍門)이 마교의 잔존 세력으로 추정되는 철마기갑대와 맞붙었다는 소식.
셋 째, 흑도맹의 산하 단체가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습격을 당했고, 분노에 찬 흑도맹주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
넷 째, 벽천회(疈天會)라는 백도 세력이 신흥 사파에게 도전을 받아 일대가 초토화되는 혈전이 벌어졌다는 소식.
때문에 승검문(勝劍門), 완안해가(完顔海家)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군림맹은 망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수준이 아니었다.
마도 세력일 것이다. 그것도 동시에 일어났다.
마치 중원 전역에 누군가 불을 지른 것처럼 도착하는 소식마다 어느 세력과 어느 세력이 맞붙었다는 이야기로 가득 차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이서휘도 황당하긴 마찬가지.
일전에는 전혀 없던 일이다.
이서휘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슬슬 시작이로구나.’
회의는 주로 천뢰각주 한신이 주도했다.
한신은 군림맹이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머무르면 백도 세력들에게 신망을 잃고 명분도 내세우지 못하는 입장이 된다고 강변하고 있었다.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세가의 가주들은 다른 세력을 돕는데 세가의 힘을 쏟기 싫은 눈치였다. 자연스럽게 군림오검대만 나눠서 지원을 가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승검문을 빨리 돕자는 것까지는 진전이 있었다. 천룡검대와 비룡검대 일부가 지원을 가기로 결정이 난 상황.
하지만 완안해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건 자체는 크지 않았는데 적의 계략일 경우 어떻게 받아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느라 회의가 길어지고 있었다.
마도는 저항하기 힘든 약소 세력들을 먼저 짓밟은 다음에 몸통을 상대할 생각인 듯싶었다.
그 동안에 곰곰이 생각을 정리한 이서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서휘는 회의 내내 별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꺼내자마자 자연스럽게 이서휘에게 시선이 모아지고 있었다.
“허락해 주시면 완안해가는 월야대와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에 남궁위가 상석에서 명을 내렸다.
“아니다. 기왕 돕는 거 질풍검대와 함께 월야대가 완안해가로 가라.”
“알겠습니다.”
* * *
한 남자가 지난날 음마존이 바라보던 것과 똑같은 중원전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지역은 군림맹의 안휘. 그리고 그 주변에 배치한 자신의 병력과 인형 말이었다. 그때 좌측에서 긴 손톱으로 슥슥 소리를 내면서 목각 인형을 깎고 있던 노인이 말했다.
“이 아이가 누구라고?”
“몇 번째 물어보십니까?”
“내가 사람 이름을 잘 못 외워서 말이지. 실은 요새 자네들 얼굴도 가물가물 해.”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쩝 소리를 냈다.
“이서휘라 합니다. 이서휘! 잊지 마십시오. 노야.”
“이 아이가 누굴 죽였다고?”
“괴패의 말로는 번뇌, 음마, 묵연이를 죽였거나 죽이는 데 관여했다고 합니다.”
“착한 녀석이로군. 네 경쟁자를 셋이나 줄여줬으니. 한데, 지금 죽일 필요가 있겠느냐?”
노야의 말에 청년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저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 좀 대충 하고 줘보십시오.”
노야가 넘긴 이서휘 인형이 청년에게 넘어갔다. 청년은 승검문과 완안해가를 번갈아 보다가 인형 말을 놓지 못하고 노야에게 물었다.
“이놈이 어디로 올까요?”
“질풍검대 출신이라며? 곧 보고가 들어올 걸세.”
그 말에 청년은 장시우라 적힌 인형 옆에 이서휘 인형을 탁 소리 나게 놓았다.
“엄청나게 궁금한데요?”
환마존(幻魔尊)이 탁자에 놓인 이서휘의 용모파기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환마존이 들고 있는 이서휘의 용모파기.
이서휘의 용모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환마존은 용모파기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젊구나 젊어! 잘 생겼고! 자색 빛을 띠는 검을 쓰는군.”
환마존은 자신의 인장을 용모파기 밑에 찍은 후에 수하에게 말했다.
“똑같이 그려서 소마비조(小魔飛鳥)에 매달아 거점으로 보내라.”
“알겠습니다.”
소마비조는 일종의 전령새로 간략한 정보를 빠르게 보낼 때 사용하는 비조였다.
잠시 후 이서휘의 용모파기를 매단 소마비조가 창공을 날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소마비조가 맹렬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그때 무척 우연하게도 소마비조를 추적하듯이 날아온 정체불명의 하얀 매가 마치 소마비조와 속도를 경쟁하듯이 따라붙고 있었다.
* * *
며칠 후 이서휘가 완안 북부 지역의 구화방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맞은편에서는 도삼과 도이가 밥을 먹고 있었다. 한데 이서휘는 두꺼운 책 한 권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연신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이 근처에선 완안청과가 가장 맛 좋은 과일을 판다는군. 건어물은 여기고…… 아니!”
“왜요? 왜요? 왜 그러십니까?”
“여기 말이다. 완안에 엄청나게 유명한 만두집이 있다고 하는구나. 완안에 생각 외로 맛집이 가득하군.”
후루룩 소리와 함께 국수를 먹던 도이가 말했다.
“관광 오셨소? 구화방 가자며.”
“가야지.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세 사람은 모두 인피면구를 착용한 상태.
월야대에서는 정천과 화지련이 질풍검대 무복으로 갈아입고 장시우와 함께 완안해가(完顔海家)로 떠났으나 도둑 형제와 이서휘는 먼저 구화방 주변에 와 있었다.
이서휘는 질풍검대와 함께 움직이다가 장시우와 논의하여 한밤중에 도둑 형제들과 이탈해 구화방 근처에 도착한 상태였다.
한데, 이서휘의 얼굴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반쪽이 울퉁불퉁했다. 복장은 짙은 회색의 무복. 등 뒤에는 백야검(白夜劍)이 묶여 있었다.
이서휘의 널리 알려진 용모파기(容貌疤記)는 이십 대의 잘생긴 얼굴에 자색 빛이 감도는 검을 들고 있는 상태.
하지만 부러진 자강검은 노산에 두고 왔고, 도삼과 도이가 인피면구를 제작해준 상태였다.
이서휘가 거리를 걸으면 웬만한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는 것도 피하고 있었다. 도삼과 도이도 오늘따라 칼자국이 많이 난 인피면구를 쓰고 있어서 세 사람은 누가 봐도 성질 더러운 사파의 무인들처럼 보이고 있었다.
이서휘는 길을 걷다가 품에서 ‘협(俠)’이라 적힌 청패옥을 꺼내 목에 걸었다. 청협문주 단의황이 이서휘에게 건네준 바로 그 패옥이다.
청협문은 이서휘가 노산에 간 사이에 응천에서 군림맹의 지원을 받아 거점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서휘는 출발하기 전에 한신에게 부탁해 청협문의 지원을 요청한 상태였다.
때문에 오히려 이서휘는 구화방보다 장시우가 향하고 있는 완안해가에서 벌어질 일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도삼도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읽었다.
“구화방의 방주는 서자홍이라는 사십 대의 무인. 듣기로 대도를 잘 다루는 고수라 한다. 구화방은 본래 기루를 운영하던…….”
그때 이서휘가 관심 없다는 듯이 건어물 가게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기다! 벌써 오징어 말린 냄새가 나는구나. 기다리고 있어라.”
“허이고, 아주 그냥 신나셨네.”
잠시 후 이서휘가 건어물을 잔뜩 사 와서 두 사람에게 나눠줬다. 이서휘가 오징어 말린 것을 뜯어서 강제로 도이에 입에 넣자, 도이가 벌컥 성을 내며 말했다.
“배부르다고!”
“성 내기는.”
이서휘는 질풍검대가 오기 전에 도둑 형제들과 구화방을 한바탕 들쑤실 생각이었다. 한데, 이서휘는 자꾸 도둑 형제들을 데리고 시장 바닥을 들쑤시고 있었다.
이서휘는 도둑 형제들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완안청과라는 과일 가게를 찾아가서 과일을 한 보따리 골랐다.
왜 사는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도삼과 도이의 표정이 점점 썩은 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대체 누구 주려고 여기서 과일을 사시는 겁니까?”
답답해진 도삼이 한 마디를 하자, 이서휘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구화방.”
“미치셨소?”
그러자 과일을 팔던 청년이 도이를 향해 성을 냈다.
“지금 완안청과의 과일을 무시하는 겁니까?”
이서휘가 대뜸 사과를 아그작 소리를 내며 씹었다.
“이 녀석들 말투가 원래 이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캬, 맛 좋은데? 너희도 하나씩 먹어봐라.”
말을 하며 이서휘가 청년에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많이 파십시오.”
“살펴 가십시오.”
도이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왜? 만두도 사러 가지.”
이서휘가 빈정대는 도이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도삼에게 말했다.
“너네 형 천재 같은데?”
그제야 무언가 눈치를 챈 도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형이 세 살 때까지는 신동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말에 이서휘가 혼자서 웃음을 터트렸다. 씹고 있던 사과가 입에서 지저분하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아이고 진짜 이것들…….”
한참을 웃으면서 길을 걷던 이서휘는 결국 만두까지 산 다음에 구화방으로 향했다.
도삼이 포장된 건어물을 옆구리에 낀 채로 말했다.
“한데, 구화방엔 그 소가주라는 놈이 있긴 할까요?”
“모르지.”
“없으면 어쩌시려고요.”
“없으면 완안해가와 함께 우리를 치려고 한 것이니 응징을 해야지.”
“캬, 셋이요?”
“무서우냐?”
도이가 그 말에 만두를 하나 입에 물고 있다가 우물우물거리면서 대꾸했다.
“무습끼는…… 다 쓰러버…… 꺼억…… 여기 만두 맛있는데? 배부른데 자꾸 들어가네.”
시답잖은 소리를 주고받던 세 사람은 결국 건어물과 만두, 과일을 들고 구화방에 도착했다.
구화방이 자리를 잡은 장원의 경계는 그 어느 때보다 삼엄했다. 과일과 건어물, 만두를 든 세 사람이 나타나자 즉시 도를 쥔 무인이 호통을 내질렀다.
“누구시오?”
그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서 방주 계신가?”
“아, 계십니다. 누구시라 할까요?”
“친구가 오랜만에 선물이나 주고 가려는데 여기 세워둘 셈인가?”
무인은 대답을 않고 바깥을 살펴보다가 급히 문을 열며 말했다.
“들어오시지요.”
무인이 서둘러 문을 닫자, 세 사람은 성큼성큼 걸어서 대청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대청 문이 닫히더니 안채로 이어지는 좌우에서 검과 도를 쥔 무인 열댓 명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서 방주로 보이는 인물이 긴장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누구냐?”
도이와 도삼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이서휘는 거침이 없었다.
이서휘가 과일 꾸러미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서 방주, 해 소가주는 어디에 있나?”
“군림맹이냐? 어찌 세 명이 왔지?”
서자홍 방주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손님 왔다고 보고해라. 한데, 세 명이다. 너희는 뭐해? 쳐라!”
서자홍 방주의 이야기를 들은 무인이 안채 쪽으로 움직이려는 순간 쐐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날아와 무인의 목을 꿰뚫었다.
푸악! 소리와 함께 무인이 바닥에 쓰러지고.
이서휘가 백야검을 쥔 채로 도둑 형제들에게 말했다.
“뭐해? 쳐라.”
“미치셨소! 진짜 셋이 쳐들어 온 거야?”
도이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두 자루의 비수를 꺼내 움직이지 시작했다.
푹푹푹푹! 챙챙!
도삼은 직도를 꺼내 휘두르자마자 누군가의 검이 서걱 소리와 함께 잘렸다. 오히려 도삼이 더 놀라는 표정으로 직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다짜고짜 서자홍에게 달려들었다.
챙 소리가 한 번 나고 쌔앵! 소리와 함께 서자홍의 대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서휘의 발이 뻗어 나가 서자홍을 날려 버려 의자에 부딪치게 만들었다.
쾅! 소리와 쿨럭 소리가 이어졌다. 이어서 달려드는 무인들을 향해 이서휘가 백야검을 긋자 투두두둑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서너 명의 목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그때였다.
구화방 바깥에서도 창칼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서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서자홍을 제압했다. 일전에 묵연마존의 품에서 얻었던 독약을 먹이고 서자홍을 꿇어앉힌 이서휘는 잠시 도둑 형제들이 싸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도이는 두 자루 비수를 미친 듯이 휘두르다가 상석에 앉아 있는 이서휘를 향해 외쳤다.
“안 도와주시오?”
그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여기만 정리하면 된다.”
그때, 대청 문이 콰앙 소리와 함께 열리더니 과일가게 청년이 들어왔다. 이어서 건어물 가게 청년이, 이어서 만두를 만들고 있던 중년인이 들어와 말도 없이 구화방의 무인들을 베기 시작했다. 열린 대청 문 사이로 저마다 복장이 다양한 상인들이 구화방의 무인들과 어우러지고 있었다.
서자홍을 앞에 꿇려 놓은 채로 너머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이서휘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허탕 쳤네. 후우…… 서자홍.”
“누구시오! 대체!”
이서휘가 서자홍에게 말을 이었다.
“서 방주, 당신이 먹은 거 매우 심각한 독약이오. 이게 얼마나 심각하냐면 무슨 독인지 나도 몰라.”
그 말에 서자홍의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만! 다들 멈춰라! 멈추라고 이 새끼들아!”
이서휘는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마도 세력을 잠시 기다렸으나 등장하는 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완안해가 주변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 차라리 이서휘가 완안해가로 가는 게 나았던 상황.
하지만 일부러 구화방 주변에 온 이서휘다. 노산의 곽서명이 건네준 검림세력일람(劍林勢力一覽)에는 의외로 구화방 주변에 더 많은 검림이 머무르고 있었다.
이서휘가 객잔에서 살펴보던 책이 바로 검림세력일람이었는데 표지에는 관광지인(觀光之人)이라 적혀 있고, 지명으로 분류된 곳에 다양한 객점, 가게, 기루, 철방, 표국 등이 설명되어 있었던 것. 다만 인원이 특정 지역에 편중되어 있었고 수년에 한 번씩 새로운 책이 나오는 터라 검림이 대체 몇 명인지는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야말로 소수의 인원들이 군데군데 넓게 퍼져 있는 점조직이었다. 구화방 근처에 검림주가 되는 인물이 한 명이 있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친구들, 친구들의 아들과 친척, 제자, 가게에서 일하던 점원들이 모두 검림이었던 셈.
이미 그 거점에는 곽서명이 보낸 하얀 새, 천리백응(千里白鷹)이 차례차례 도착하고 있었다. 거점에서는 더 다양한 방법으로 전서가 퍼지고 있었다.
구화방에 머물고 있던 검림과 도둑 형제들은 구화방을 빠르게 정리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마도 세력은 추가로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에 눈치를 챈 도삼이 빠르게 장원을 누볐으나 잡혀왔다는 소가주는 머리카락 하나 보이질 않았다.
인근 검림의 대표 후기지수로 보이는 세 명의 청년이 이서휘 앞에 다가오자, 이서휘도 씨익 웃으며 일어나 먼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더 도와드릴 건 없겠습니까?”
“저희는 완안해가로 가야겠습니다.”
“함께 갈까요?”
“아닙니다. 이곳을 정리한 후에 피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아닙니다. 가게 지킬 사람은 많습니다. 저희가 함께 가드리지요.”
그 말에 이서휘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이서휘가 도삼, 도이와 함께 먼저 나가려는데 과일가게 청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한데…… 이 구화방 말입니다. 저희가 급하게 온 터라…….”
이서휘가 고개를 돌리자 과일가게 청년이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미처 준비가 미흡했군요. 다 죽여야겠습니다.”
“허어…….”
검림의 청년은 마치 잘 훈련된 살수처럼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내가 실로 무서운 날개를 얻은 것이로구나.’
그때, 이서휘는 싸늘한 기분을 느끼고 대청을 나가 홀로 구화방의 장원 담에 훌쩍 솟아 올라섰다. 약 백여 명일까? 아니, 이백 명일까? 어디선가 몰려든 흑의인들이 까만 고리가 되어 구화방의 장원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장원 담벼락에 서서 몰려드는 흑의인을 보며 웃었다.
“반갑구나.”
누구의 수하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마도(魔道) 세력이다. 여기서 많은 병력을 묶어 놓을수록 완안해가로 빠지는 병력의 수가 적을 터. 이서휘는 담벼락 위에 서서 흑의인과 장원을 번갈아 바라봤다. 검림의 무인들은 이미 무자비하게 구화방 무인들을 척살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과일가게 청년에게 말했다.
“혹시 더 올 사람이 있습니까?”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어르신들이 곧 오실 겁니다.”
그때 담벼락에 서 있는 이서휘를 향해 온갖 암기가 쏟아졌다. 하나 이서휘가 백야검을 한 번 휘두르자, 쏴아아아 소리와 함께 생성된 검막이 암기를 튕겨냈고, 뒤늦게 도착한 암기 몇 개는 이서휘가 백야검으로 가볍게 쳐냈다.
이서휘의 흉측한 인피면구가 흑의인들을 바라봤다. 한데 표정이 그야말로 기괴했다. 본래 인피면구를 쓰고 표정을 짓는 게 어색하기도 하거니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울퉁불퉁한 피부가 뒤틀려서 그야말로 악귀처럼 보이고 있었다.
이서휘는 담벼락에서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담벼락 위에서 오락가락 하며 백야검을 쥔 채로 흑의인들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이서휘는 조무래기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상대할 만한 자들을 두 눈을 부릅뜨고 찾고 있었다.
‘우두머리가 있을 것인데…….’
흑의인들은 흉측한 얼굴의 사내가 허연 검을 쥐고 담벼락을 서성이자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데 암기를 던지면 이내 후드득 소리와 함께 떨어지고 성급한 몇 명의 무인들이 담벼락에 올랐을 때는 잘린 목부터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의 모습이 마치 백귀(白鬼)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끼기긱, 끼이이익, 끼이익 하며 수레 끄는 소리가 들렸다. 이서휘도 흑의인들도 동시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구화방을 포위한 흑의인들의 바깥 진형에 어느 노인이 수레를 끌고 오고 있었다. 한데 수레의 무게가 상당한지 수레바퀴가 땅바닥에 반쯤 박힌 채로 구화방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때문에 끼기긱 하는 소리가 울렸던 것.
그 소리에 도둑 형제들과 검림의 무인들이 이서휘가 서 있는 담벼락에 차례차례 올랐다.
도이가 말했다.
“허허, 저 노야가 노망이 드셨나?”
도이의 말에 과일가게 청년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말을 삼가시오. 내 조부님이시니…….”
이서휘도 수레를 끌고 오는 노인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기분이 묘했다.
마치 은퇴한 늙은 대장군을 보는 심정이랄까?
쭈글쭈글한 피부에 하얀 백발을 휘날리는 노인은 수레를 끌다 멈추고 담벼락에 서 있는 과일가게 청년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이놈아! 뭐가 그렇게 급해서 먼저 갔느냐!”
노인의 말과 함께 기이한 장면이 이어졌다. 마치 밭을 갈다 온 것 같은 농부들이 하나둘 등장해 노인이 끌고 온 수레에서 병장기를 하나씩 꺼내 쥐고 있었다. 그런데 병장기가 또한 제각각이었다. 검과 도의 수가 적고 농기구로 보이는 낫과 끌개에서부터 정체 모를 지팡이, 죽창, 몽둥이 등 제각각이었다.
그 모습에 흑의인 몇 명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하하하! 이건 뭐야 또.”
“어이 이보시오, 컥!”
피부가 검게 그을린 농부 한 명이 낫을 쥐고 솟구치더니 흑의인의 목을 가르고 내려섰다. 푸악! 하는 소리와 함께 시뻘건 핏물이 치솟았다. 동시에 백발노인이 과일가게 청년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손주 놈은 거기서 구경만 할 셈이냐?”
“아,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과일가게 청년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흑의인들의 무리에 뛰어 들었다. 그러자 구화방으로 지원을 왔던 검림의 무인들이 전부 담벼락에서 뛰어 내렸다. 물론 흑의인들의 수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백발노인의 호통에 젊은 무인들은 그야말로 용맹하게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이서휘도 도이와 도삼에게 말했다.
“너희도 가라. 난 지켜보다가 완안으로 빠지겠다.”
도삼은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계속 이서휘를 도우러 오자 고개를 저으며 내뱉었다.
“진짜, 공자님은 알수록 모르겠습니다.”
뛰어 내리면서 내뱉은 도삼의 말에 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동생을 따라나섰다.
“뭔 말이야? 알면 아는 거지.”
상인과 농부들이 흑의인을 공격했다.
기묘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햇빛에 그을린 피부를 가진 농부들은 그야말로 거친 무위를 펼치면서 흑의인들을 갈라놓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다시 홀로 담벼락에 남아서 수레를 끌고 온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이서휘가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자, 노인도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하지만 노인의 표정만큼은 손자를 대하듯이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때, 백발노인은 꾸불꾸불한 지팡이를 쥐고 있다가 겁도 없이 달려드는 흑의인들을 지팡이로 후려쳤다. 그럴 때마다 빠각! 소리와 함께 흑의인들의 머리통이 으깨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그대로 합류하지 않고 전장을 노려봤다.
새롭게 합류한 검림, 그리고 도둑 형제들이 흑의인들을 미친 듯이 베어 넘기고 있었다.
그 광경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림, 강하구나. 대체 누가 이렇게 키워놓은 것일까?’
드넓은 중원 무림의 일을 이서휘가 다 알 수는 없는 노릇. 어쩌면 전생에서도 검림의 일부가 낭혼련으로 들어오지 않았을까 하고 이서휘는 예상했다. 이서휘는 전장의 상황을 지켜보다가 백야검을 쥐고 백발노인이 서 있는 곳으로 뛰어 내렸다.
이서휘가 다가오자 백발노인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림주를 뵈오.”
이서휘는 노인이 또 다시 예를 갖추려는 것을 급히 말리고 말을 꺼냈다.
“선배님, 인피면구를 쓰고 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젊은 검림주께서는 별말씀을 다 하시오.”
“아무래도 저는 완안해가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쪽의 동료들이 걱정되는군요. 적들의 수뇌부가 이쪽에 없는 것을 보니…….”
“그러시구려. 여기는 걱정하지 마시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휘는 도둑 형제를 힐끗 보다가 말을 섞지 않고 그대로 빠져 나와 완안해가로 향했다. 검림이 합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는 적이 많았다. 때문에 도둑 형제들까지 데리고 가긴 무리였다.
이서휘는 달려 나가는 와중에 걸리적거리는 흑의인을 걸음도 멈추지 않고 갈라 버린 후에 속도를 더더욱 높였다.
어두운 밤길이다.
짙은 회색 무복을 입은 터라 이서휘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는 백야검이 홀로 허공을 질주하는 것처럼 스산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 * *
환마존(幻魔尊)은 괴패마존과 연합해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군림맹이 검대 하나 정도를 파견할 만한 분쟁을 일으킨 다음에 군림맹의 세력을 야금야금 갉아먹겠다는 전략이었다.
때문에 승검문에는 괴패마존이, 완안해가는 환마존이 마수(魔手)를 뻗친 상황.
때마침 환마존은 오십 여명으로 구성된 결사대(決死隊)를 군림맹의 정문으로 보낸 상황이었다.
고작 오십 여명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누구 한 명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가(魔家)의 명령은 때때로 백도를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비정상적인 면이 있었다.
[가서 죽이고 죽어라.]
이것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명령을 내리는 자도 명령을 받는 자들도 이유 따위는 묻지 않았다. 오십 여명의 마도인들은 환마존의 명령에 의해 그렇게 군림맹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이후 환마존은 완안해가와 구화방에서 군림맹 세력을 기다리고 있었다. 번뇌, 음마, 묵연이 실패한 군림맹이다. 그가 공을 세우면 강북을 공략하기 시작한 마존들과 경쟁할 수 있을 터였다.
* * *
완안해가로 달리던 이서휘.
동료를 돕겠다고 가던 도중에…….
……환마존은 완안해가와 구화방의 중간 지점에서 시시각각 보고를 받고 있었다.
완안해가의 상황은 그야말로 격전.
하지만 구화방에서는 소식이 끊겨 있었다. 때문에 환마존은 완안해가를 장로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구화방으로 가고 있었다.
‘이상하군. 설마 구화방에…….’
때문에 두 사람이 마치 운명처럼 조우하게 되었다.
공터를 가로 질러 가던 이서휘와 수하 십여 명을 끌고 대로변을 따라 구화방으로 이동하던 환마존이 동시에 경공을 멈췄던 것.
환마존은 걸음을 멈춘 이서휘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십여 명의 수하에게 명했다.
“어딘가의 첩보(諜報) 아니면 척후(斥候) 같구나. 죽여라.”
타다닷! 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환마존은 수하들에게 맡기고 서너 걸음을 옮기다가 걸음을 우뚝 멈추고 공터를 돌아봤다.
툭 하는 소리와 뚝 하며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첩보 한 명 죽이겠다고 달려든 환마존의 수하들이 별다른 공격도 펼치지 못하고 베이고 있었다.
이서휘는 환마존의 수하들을 순식간에 도륙한 다음에 공터에 서서 멀뚱히 환마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환마존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가도, 공터에 서 있는 사내는 도망칠 마음이 없어 보였다.
환마존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서휘의 표정이 달빛에 비춰 드러났다.
환마존이 바라본 이서휘의 얼굴은 마치 불 고문을 당한 것처럼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환마존이 말했다.
“네놈, 누구냐?”
이서휘는 바로 대꾸를 하지 않고 환마존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복장이 화려하다. 백색 장포에 먹물이 수놓였다. 그 모습이 마치 점박이 개를 보는 것 같았다. 하나, 이서휘는 장포의 무늬를 보고 이 자가 환법(幻法) 계열의 마공을 쓰는 자가 아닐까 예상하고 있었다. 이서휘보다 나이는 서너 살 많아 보였는데 눈매가 날카롭고 여유가 넘치는 표정이어서 이서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 새끼 마존인가? 어째서 이곳에…….’
이서휘는 마존으로 추정되는 자의 주변을 살폈다. 장로들이 있으면 급히 몸을 피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실로 기이하게도 마존은 그가 데려왔던 수하가 전부였던 듯했다.
환마존이 환도에 손을 올리면서 이서휘에게 다가갔다.
‘빨리 죽이고 구화방으로…… 아니다.’
아무리 봐도 보통 상대가 아니었다. 수하들을 베는 솜씨가 인상적이었던 것.
환마존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쩝, 운이 좋은 놈이군. 또 보자꾸나.”
환마존이 구화방을 향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이서휘의 시선과 고개가 환마존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갔다. 이서휘는 공터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환마존을 바라보다가 침묵을 깨고 내뱉었다.
“내가…….”
그때였다.
꽈광! 퍼버벙! 펑!
신호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완안해가 쪽의 상공에서 푸른빛의 섬광탄(閃光彈)이 터지고 있었다. 청협문이 도착한 듯싶었다.
걸음을 옮기던 환마존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이서휘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서휘다.”
환마존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서휘가 누군지 몰랐다면 그대로 구화방으로 갔을 터. 하지만 환마존은 급한 걸음을 멈추고 말을 내뱉었다.
“뭐라고?”
환마존의 양쪽 입꼬리가 광대까지 올라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환마존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서휘라고? 네가?”
이서휘는 반가워하는 환마존의 표정을 보고 코웃음을 내뱉었다.
“아닌 거 같으냐?”
“크하하하하.”
“후후후.”
마존 혹은 적의 우두머리를 찾고 있던 이서휘.
군림맹을 공격하는 와중에 이서휘라는 놈을 찾아 죽이려던 환마존.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웃었다. 대체 누구의 운이 좋은 것일까?
이서휘도 환마존이 혼자가 아니었다면 결코 밝히지 않았을 터. 만약 장로급의 지원이 붙는다면 더 어두운 산 속으로 들어가 혈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다행히 완안해가 쪽은 청협문이 지원을 온 상황.
때문에 이서휘가 웃었고, 환마존은 이서휘를 발견했다는 생각에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래. 네가 이서휘였구나.”
환마존은 기괴한 빛을 내뿜는 해골옥(骸骨玉)이 주렁주렁 매달린 환도(環刀)를 손에 쥐었다. 그에 맞춰 이서휘가 백야검을 쥐고 환마존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 어르신이 이서휘인 줄 알았으면 도망가야 하는 게 도리 아니겠느냐?”
“크하하하핫! 이야, 재미있는 놈이네.”
이서휘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환마존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동감이다. 실로 재미있는 밤이로구나.”
환마존(幻魔尊)과 이서휘.
기습을 펼칠 순간이 두 사람 모두에게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 모두 기습은 무용하다 결론을 지었던 것. 그렇게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상태로 공터에 섰다.
이서휘는 환마존이 들고 있는 환도(環刀)의 해골옥(骸骨玉)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보자꾸나.”
환마존은 대꾸도 하지 않고 환도를 휘둘러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까앙……! 소리와 함께 서로의 내공이 각자의 무기를 지나 팔에 전해졌다.
환마존과 이서휘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검과 도가 맞붙어 끼기긱…… 하며 눈살이 찌푸려지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수십 차례를 맞붙었다.
채앵! 챙챙챙!
환마존이 내공을 끌어올려 환도를 휘두르자, 이서휘는 좌하단에서 우상단으로 백야검을 올려쳤다.
깡! 소리와 함께 환마존의 신형이 뒤로 물러났다.
이서휘는 우하단으로 백야검을 늘어뜨리고 시선은 환마존에게 고정한 채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다시 선공은 환마존.
신형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서휘 앞에 등장해서 환도를 휘둘렀다. 바로 환법을 사용할 줄 알았더니 무척 정직하게 환도를 내밀어 이서휘의 백야검을 튕겨내고 있었다.
챙챙챙챙챙챙……!
순식간에 삼십여 초가 흐르자 환마존이 쥐고 있는 환도에서 서서히 괴이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드드득, 드득!
이서휘는 해골옥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백야검을 휘둘렀다. 환마존은 두 눈을 부릅뜨고 환도를 휘두르면서 특별한 동작도 없이 자신의 마공인 환마전장공(幻魔戰場功)의 재생마식(再生魔式)을 펼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기가 뻗어나가 무언가의 형체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
드득…… 드드드득……!
환도에 매달린 해골옥의 턱이 드드득 소리와 함께 떨릴 때마다 환마존의 몸에서 퍼져나간 검은 색의 마기가 또 다른 환마존의 모습으로 형체를 갖춰 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마존은 이서휘의 검을 무리 없이 튕겨내고 있었다.
챙챙챙챙! 소리와 드득! 하는 소리가 어우러지니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느새 환마존과 똑같이 생긴 환영이 모습을 갖추더니 스윽 하는 소리와 함께 환도를 내질렀다.
까앙!
놀랍게도 환영이 내지른 환도에도 실체와 내공이 실려 있었다.
이서휘는 환마존의 환도를 튕겨내다가 좌측에서 찔러오는 환도를 침착하게 튕겨냈다.
챙챙!
이서휘가 대뜸 암연심검의 파를 뿌렸다.
쐐애애앵! 하는 소리과 함께 검기를 내보내자마자 이서휘가 유엽비도를 빼 들고 환마존과 다시 어우러졌다.
콰앙! 소리와 함께 이서휘의 검기를 튕겨낸 환마존과 환영이 이서휘를 맞이했다. 순식간에 두 명의 환마존과 겨루게 된 이서휘. 백야검과 유엽비도를 미친 듯이 휘두르면서 공격과 방어를 이어나갔다.
이서휘의 검을 튕겨 내던 환마존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뜻 모를 탄성이 터졌다.
“하……!”
내공을 끌어올린 환마존이 환영과 함께 묵직한 환도를 동시에 내질렀다. 떠덩! 소리와 함께 이서휘 역시 내공을 주입해 두 자루의 병장기를 막아냈다.
이서휘와 환마존의 눈에서 동시에 불꽃이 튀겼다.
환마존은 이서휘의 내공을 압도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자 각각 좌수를 내뻗어 섬뜩한 지풍(指風)을 날렸다. 두 개의 지풍이 바람을 가르며 이서휘의 얼굴로 쏟아졌다.
쏴아악! 쏴아악!
순간 유엽비도와 백야검을 바닥으로 급히 내리 눌렀다가 즉각 걷어낸 이서휘가 검과 도를 교차시키면서 전방에 진한 검막을 뿌렸다.
타닥! 소리와 함께 지풍이 튕겨 나가자 “흐흐…….” 하는 웃음과 함께 환마존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서휘가 검과 도를 거두고 아무도 없는 허공에 시선을 옮기자 환마존이 미소를 지으며 땅에 내려서고 있었다. 이내 환마존의 모습을 닮은 환영도 환마존의 등 뒤에 모습을 다시 드러내고 각각의 환도에 달려 있는 해골옥이 갑자기 드드드득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환마전장공(幻魔戰場功)의 폐야마식(蔽野魔式).
좌라라라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환마존의 발밑에서 퍼져나간 검은 색의 연무가 공터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그러자 연무에 닿은 잡초들이 흐느적거리면서 땅바닥에 흐물흐물 쓰러지고 있었다.
어느새 환마존의 얼굴에 해골옥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
지켜보던 이서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숨을 들이마셨다.
‘정심(定心)…….’
이서휘의 눈이 짙게 뻗어오는 검은 연무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다. 독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숨을 내뱉은 이서휘가 환마존을 향해 튀어 나갔다.
검은 연무가 검막처럼 그저 기가 응축된 종류인지, 아니면 환법을 구성하는 요소인지 살펴봤으나 후자라 판단한 것.
이서휘는 자신이 환마존의 내공에 밀리지 않는다면 충분히 마장(魔場) 안에서 겨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서휘가 앞에서 뻗어 오는 환도를 튕겨내고 백야검을 등 뒤로 보내 검막을 생성시켰다.
까앙! 챙챙챙챙!
환법(幻法)과 정심(定心)의 대결이 숨 가쁘게 다시 이어졌다.
이서휘는 마존이라 불리는 자의 환법이 이 정도 수준에 그치지 않을 터라 예상했다. 때문에 절대 무리하는 법 없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백야검으로 전신을 보호하면서 환마존과 맞섰다.
환마존이 중얼거렸다.
“실로…… 인상적인 놈이로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해도 환마전장공(幻魔戰場功)에서 이렇게 침착하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한데 고작 자신보다 서너 살 적어 보이는 백도의 햇병아리가 환마전장공(幻魔戰場功) 안에서 섬뜩하게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챙챙! 챙챙챙챙!
이서휘의 기세가 줄어들지 않자 환도를 강하게 후려친 환마존이 물러나고 환영이 이서휘를 막아섰다. 이서휘의 검이 환영의 신체 곳곳을 가르자 푸악! 푸악! 소리와 함께 핏물을 내뿜던 환영이 끔찍한 모습으로 계속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그 사이 환마존은 환마전장공(幻魔戰場功)의 종결식인 구마강림식(九魔降臨式)을 준비했다. 어느새 환영을 갈라버린 이서휘가 암연심검의 환을 내질러 환마존의 목을 노렸다.
쐐애앵! 떠엉!
무표정한 환마존이 이서휘의 검기를 환도로 막아내더니, 이어서 아무렇지 않은 듯이 구마강림식을 이어나갔다. 환마존의 해골옥이 부르르 떨리면서 해골의 두 눈에서 흰색의 연무가 흘러 나왔다.
해골옥…….
무림 고수들을 마기에 중독시킨 다음에 그들의 정기를 빨아내어 담아 놓은 일종의 그릇이다.
환마존은 오늘 이 자리서 그간 모아뒀던 해골옥의 모든 마기를 내뱉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새끼 한 명과 싸우는데 구마강림식을 펼칠 줄이야.’
환마전장공(幻魔戰場功)의 최종 단계 구마강림식(九魔降臨式)이 펼쳐졌다.
이제 바깥에서 바라보면 환마존과 이서휘의 모습은 보이질 않을 터.
환마전장공(幻魔戰場功)이 공터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환마존의 몸에 마기가 휘몰아쳤다가 콰아아아앙! 소리와 함께 환마존의 몸에서 일곱 개의 신형이 뻗어나가 이서휘에게 쏟아졌다.
이서휘는 침착하게 백야검을 휘둘렀다. 심지어 환마전장공(幻魔戰場功) 바깥으로 빠져 나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스스슥 소리와 함께 환마존과 재생마식으로 만들어 낸 환영도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이서휘는 갑자기 늘어난 환영이 동시에 달려들자, 그 자리서 별다른 움직임도 없이 암천세를 쏟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아!
굉음과 함께 대여섯 개의 환영이 흩어졌다가 스멀스멀 다시 뭉치면서 환마존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 사이 환마존과 이서휘가 다시 맞붙었다.
어느새 모습을 갖춘 환영들이 이서휘를 포위하고 동시에 흑빛 기탄(氣彈)을 내뱉었다.
콰콰콰콰콰!
실려 있는 내공이 저마다 제각각인 기탄이 날아오자 이서휘는 등 뒤에 검막을 뿌리고 전방에는 암연심검의 파를 뿌렸다. 결국 한 군데의 공격도 허술하게 보지 않고 성실하게 막아냈던 것.
다시 환마존은 공격을 펼치면서 그제야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대체로 환마전장공(幻魔戰場功)에 갇힌 자가 일반적으로 반응하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마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환영에 흔들리지 않고 모든 공격을 방어해내고 있었다.
때문에 환마존은 잠시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서 이서휘를 지켜봤다.
환마존의 환영들도 공격을 멈춘 상태.
아홉 명의 환마존이 이서휘를 둘러싸고 노려보고 있었다. 구마강림식(九魔降臨式) 자체를 유지하느라 환마존의 기력도 급격히 떨어졌던 것.
이서휘도 마찬가지. 암천세와 검막을 연달아 펼치느라 온몸이 불처럼 달아오른 상태. 환마존이 공격을 잠시 멈추자 이서휘도 그제야 조금 숨을 돌린다는 듯이 호흡을 내뱉으면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이내 이서휘의 숨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마치 환마존의 행동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자세와 행동.
그때, 이서휘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마치 염불을 외듯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환법을 파할 때는 늘 현상(現象)을 일으킨 근본체(根本體)를 심안(心眼)으로 주시해야 하느니라…… 심안을 뜨면 눈을 잃은 것에 대해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니…….”
사부인 검선의 말이다.
이서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사부의 말을 떠올렸는데 저도 모르게 입으로 내뱉게 됐던 것. 하나, 이서휘는 흘러나오는 대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서휘는 사부의 말을 반복해 되뇌면서 일어섰다. 아예 검을 휘두르면서 내뱉고 들이마시는 호흡 사이에 사부의 말을 섞어 넣을 생각이었다.
[심안을 뜨면 눈을 잃은 것에 대해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니.]
이서휘가 ‘심안을…….’이라 내뱉으면서 백야검을 휘두르고 ‘뜨면’이라 내뱉으면서 유엽비도를 그었다.
‘잃은 것에 대해’라고 말할 때는 검과 도가 환영을 갈랐고,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니…….’라고 내뱉으면서 환영으로 돌진했다.
환영은 베일 때마다 츠츠츠 소리와 함께 다시 몸이 생성되고 있었다. 이서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염불을 외듯이 ‘심안을…….’부터 ‘것이니…….’를 반복하면서 검과 도를 휘둘렀다.
환마존은 “시끄럽다!”고 외치려다가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마치 항마승(降魔僧)과 대결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서휘는 항마승을 흉내 내는 게 아니었다. 미친 척 하는 것도 아니었다.
무척 단순하게…….
무척 냉혹하게…….
단, 한 순간의 승부를 위해…….
심리전(心理戰)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파훼법은 이미 세워진 상태.
이서휘는 단 한 순간을 위해 호흡 속에 말을 담았고, 말과 함께 검을 내질렀다.
이서휘는 알고 있었다.
환법이 시작될 때 분리되었던 환영에 가장 많은 내공이 담겨 있다는 것을.
나머지 환영은 말 그대로 분심대법이었다.
하나하나 환마존이 펼치는 공격을 하고 있었으나 본체가 공격당하는 순간에 흩어질 놈들이라고 생각했던 것. 때문에 이서휘는 환마존의 본체와 두 번째 환영만을 노리고 있었다.
서서히 이서휘의 몸이 핏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환영들이 내지른 공격에도 공력이 담겨 있었기에 파밧 하는 소리와 함께 타격을 입었던 것.
하지만 이서휘는 검을 부딪치면서 환마존의 본체 공격에만 마음을 쓰고 있었다.
환마존이 속으로 말을 삼켰다.
‘미친놈이다…….’
공력이 환마존보다 낮은 무인들이 이 환마전장공(幻魔戰場功)에 있었다면 이내 제압되어 쓰러졌을 터. 하지만 이서휘는 달랐다.
지친 기색 없이 가르고, 찌르고, 베었다.
그 와중에 이서휘 역시 베이고, 찔리고, 얻어맞고 있었다.
하지만 환마존이 내지르는 강맹한 공격은 반드시 피해내고 있었다.
그렇게 마치 이 싸움이 영원히 이어져도 지치지 않을 것처럼 이서휘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분전을 펼치고 있는 이서휘는 점점 환마존의 실체와 눈을 마주치는 횟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때문에 환마존은 가끔씩 이서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있었다.
마치 이서휘가 눈빛으로 말을 건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
이서휘는 말을 내뱉다 말고 이어지는 말을 눈빛에 담았다.
“심안을 뜨면…….”
환마존은 아예 이서휘의 말을 외울 지경이었다. 성난 환마존이 공격을 몰아쳤다. 환도에 매달린 해골옥이 이서휘의 말을 방해하려는 듯이 끊임없이 턱을 뒤흔들었다.
여러 자루의 환도가 이서휘의 몸에 쏟아졌다.
핏, 파앗, 스윽! 챙챙챙챙!
핏물이 솟구쳤다.
이서휘의 목과 손목, 허벅지까지 베이고 피가 솟구쳤다. 흑룡화린갑(黑龍火鱗甲)으로 보호하지 못하는 신체 부위에 특히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아슬아슬하다.
이서휘가 신형을 빠르게 회전시킬 때마다 여러 군데에서 흐르던 핏물이 환영들에게 날아갔다. 미친 듯이 검과 도를 휘두르던 이서휘가 중요한 급소는 모조리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이 피로 물들고 있었다. 소매와 옷자락 끝에 핏물이 흘러 내렸다.
이서휘는 그 핏물마저 흩뿌려 환마존의 환영들에게 묻히고 있었다.
도중에 이서휘의 시선이 환영과 본체를 섬뜩하게 오고 갔다.
꽈앙! 소리와 함께 뒤로 솟구친 이서휘가 공중에서 암연심검의 파를 뿌렸다.
내뱉은 검기가 반달형의 곡선을 그리며 나아갔다.
쐐애애애앵!
투두둑! 투둑! 푸악! 환영들의 몸통이 쪼개지고 팔, 다리가 솟구친다.
이서휘는 암연심검의 검기에 흩어졌다가 다시 생성되는 환영에는 자신이 뿌린 피가 묻지 않았을 것이라 예상했다.
설마 이서휘가 자신의 피를 뿌리기 위해 공격을 허용했단 말일까?
무려 아홉 개의 환도와 겨루고 있는 이서휘다. 부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부상마저 이용하는 중이었다.
소매에 흐르던 핏방울이…….
유엽비도에 실려 나간 핏줄기가…….
아홉 명의 환마존에게 튀기고 있었다. 하지만 환마전장에 의해 다시 생성된 환마존의 환영은 처음 모습 그대로다.
그야말로 미친 자의 눈과 전략이다.
이서휘는 꿰뚫어 보고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누가 백의장포에 핏물을 묻혀 놓고 있는지…….
두 놈이다.
한 놈은 소매에, 한 놈은 가슴께에 이서휘가 뿌린 피가 묻어있다. 그 사이에 동서남북에서 환도가 쏟아졌다.
솟구친 이서휘가 환도를 밟고 환영의 어깨를 밟았다가 백야검을 수직으로 그으며 내려섰다.
좌라라락! 소리와 함께 환영 하나가 양단(兩斷)되었다.
이서휘의 생각보다 때로는 손이 더 빨랐다.
이서휘의 백야검이 자신의 등을 훑고 나가자 마치 방패와 같은 검막이 생성되었다.
터더더덩!
환도 몇 자루가 부질없이 튕겨 나가고…….
그 순간 이서휘는 주시하고 있던 환마존을 향해 암연심검의 환을 내뱉었다.
쐐앵!
콰아아아앙!
막아내던 환영 하나가 그대로 폭사되듯이 흩어졌다. 동시에 좌수로 내던진 유엽비도가 곡선을 그리면서 날아갔다.
휘리리리리릭!
하지만 환마존은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이서휘가 등을 내보이고 있었던 것.
검막이 흐릿해지려는 찰나에 환마존이 환도를 내질렀다. 그때, 이서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비틀어 백야검으로 환도를 막아냈다.
떠엉!
순간 이서휘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화했다.
‘기다렸느니라…….’
환마존의 눈을 보며 이서휘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기괴한 인피면구의 표정이 악귀상(惡鬼像)처럼 변했던 것.
웃은 것이다.
환마존은 이서휘의 표정 변화를 보자마자 동공이 흔들렸다.
위급하다고 느낀 환마존.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한 이서휘.
챙챙챙! 까앙! 챙챙챙챙챙! 까앙!
환마존이 수십 걸음을 뒷걸음치고, 이서휘는 백야검을 강맹하게 휘두르면서 몰아붙였다. 후방에서 재생마식으로 생성된 환마존이 이서휘의 등 뒤로 환도를 내질렀다. 이서휘는 후방 공격을 파악하자마자 재생마식 환영의 출수를 무시하고 그대로 암연심검의 환을 내뱉었다.
쐐애애애앵! 콰앙!
떠엉!
환영이 내지른 환도가 이서휘의 등을 찔렀다. 강맹한 공격이었으나 흑룡화린갑을 뚫진 못했다.
이서휘는 환도에 얻어맞은 힘을 이용해 전방으로 귀신처럼 튀어 나가면서 백야검을 내질렀다. 연속 공격이나 다름이 없었다. 찰나에 이뤄진 추가 공격이다.
휘―익!
다급한 환마존이 오른손으로 쥔 환도를 비틀어 세워 넓은 면으로 백야검을 막았다.
하지만 서걱! 하는 허망한 소리와 함께 환도의 넓은 면을 뚫고 들어간 백야검의 검봉(劍鋒)이 그대로 환마존의 복부를 꿰뚫었다.
푸―욱!
“끄윽……!”
환마존의 처절한 후속타가 이어졌다.
환도를 손에서 떨구고 이서휘의 백야검을 왼손으로 끌어당겨 자신의 몸을 아예 이서휘 쪽으로 밀어 넣으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우장을 내질렀다.
양패구상이다.
초식이라고 할 것도 없는 악수(惡手) 중의 악수(惡手)였다.
이서휘는 백야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이 엄청난 힘에 끌려가자마자, 백야검을 가볍게 놓은 후 환마존의 머리 위로 솟구치면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때…… 바람을 가르는 환도들이 밀려들어왔다.
푸욱, 푸욱, 푸욱, 푸욱, 푸욱!
이서휘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던 환영들이 내지른 환도가 환마존의 몸에 연달아 꽂혔다.
환마존은 상황을 전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환영들을 바라봤다.
“하아…… 쿨럭!”
멀리 떨어져 있던 환영 하나는 그제야 이서휘를 찾아 무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푸악! 푸악! 푸악!
환영들은 아무런 감정이 없이 환도를 내빼더니 다시 이서휘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고 환마존은 그 자리서 털썩 하고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청협비수를 뽑아든 이서휘가 한층 기세가 떨어진 환영들을 말 그대로 터트리기 시작했다.
퍼억! 퍼억! 퍼억!
환마존은 자신의 등 뒤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궁금했다.
‘빌어먹을…….’
환마존이 힘겹게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뒤쪽 목덜미에서 무언가 서늘한 게 밀고 들어왔다.
그 순간에도 환마존의 사고(思考)는 목에 밀려든 것이 무엇인지 추측하고 있었다.
……단검인가?
환마존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세상의 빛이 작은 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아무 것도 없었다.
남아 있던 환영들은 환마존이 숨을 거두자마자 무표정하게 허공으로 흩어지고…….
이서휘는 환마존의 목에서 단도를 뽑았다. 유엽비도를 챙기고 환마존의 복부에서 백야검을 뽑았다.
이서휘는 환마존을 내려다보다가 무표정하게 검신에 잔뜩 묻은 피를 바닥에 쫘악 하고 뿌려댔다.
동시에 쩌저저저저적 하고 굉음이 울렸다.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환마전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사방이 고요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이서휘의 몸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제야 달빛이 공터를 비추고 있었음을 알게 된 이서휘.
이서휘의 시선이 사방으로 향했다.
지켜보는 자가 없는지…….
수상한 소리는 나지 않는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니, 저 멀리서 누군가의 고함 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이동하면서 싸우는 것처럼 소리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이서휘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살펴보다가 환마존의 품을 뒤졌다. 별다른 게 나오지 않자 이서휘는 환마존의 백의장포를 벗겨내어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피가 잔뜩 묻어 있는 백의장포다.
그뿐이 아니다. 환마존의 환도까지 왼손에 쥐었다.
이서휘는 그렇게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시끄러운 함성 소리가 들린다.
넓은 대로변에서 백도와 마도가 맞붙고 있었다.
이서휘는 공터를 가로 질러 움직이는 터라 양측의 세력이 한눈에 들어왔다.
백도와 마도의 눈에는 대체 이서휘가 누구로 보이고 있을까.
달빛이 내리쬐고 있으나 엄연히 어두운 밤이다.
왼손에 환도를, 오른손에 백야검을 쥔 채로 피칠갑을 하고 있는 이 사내는 환마존일까? 아니면 환마존을 죽인 사람일까.
마도와 백도가 맞붙는 중앙 지점에 어디선가 거대한 바위가 날아와 꽂혔다.
콰아아아아아앙!
굉음이 터지고 먼지가 잔뜩 피어오른다. 이어서 두드드드 소리와 함께 괴패마존이 이끄는 괴패마가의 세력이 마도 측에 추가로 합류했다. 승검문을 거의 궤멸 상태로 만든 이후에 군림맹 검대가 생각보다 많이 밀려오자 환마존과 합류하기 위해 왔던 것. 마도 측의 수가 늘어나자 잠시 오른편에 있던 질풍검대와 검림, 청협문의 세력이 주춤했다.
그 소강상태에서 벌어진 정적…….
백도와 마도의 일부가 일제히 공터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냐!”
“어?”
“누구야.”
마가의 장로들과 백도의 수뇌부들은 어둠 속에 서 있는 이서휘를 보며 저마다 소리를 내질렀다.
이서휘가 마도를 향해 환도를 흔들었다.
드드드드득! 소리가 울렸지만 아무런 마기도 내뿜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마도 전체를 도발하듯이 왼손에 쥔 환도를 하늘로 슬쩍 집어 던진 이서휘가 그대로 백야검을 휘둘러 까아앙! 소리와 함께 환도를 집어 던졌다.
휘리리리리릭!
엄청난 회전과 함께 날아간 환도가 흑의인 두세 명을 적중시켜버렸다. 그러자 환마가의 장로가 호통을 내질렀다.
“네 이놈! 환아(幻兒)는 어디 있느냐!”
또 다른 장로가 외쳤다.
“괴패, 소가주의 복수를 도와주시오!”
환아(幻兒)와 소가주(小家主). 환마존이 어릴 때 장로들이 자주 부르던 이름이리라. 그렇게 외친 두 명의 장로가 이서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또 다시 두드드드드 소리와 함께 승검문으로 파견되었던 군림맹의 검대가 대로변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포위되면 어렵다고 생각한 괴패마존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퇴각합시다. 환마가 장로들은 이성을 찾으시오.”
오히려 그 말이 더 장로들의 이성을 잃게 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다시 도발의 방점을 찍었다. 왼손으로 백의장포를 벗겨 내어 장로들을 향해 툭 던지며 말했다.
“죽었다, 이미.”
“이런 개새끼가!”
말을 내뱉은 장로와 인상이 참혹하게 일그러진 장로가 이서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서휘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와라.”
이서휘가 달려드는 두 명의 장로를 향해 암연심검의 파를 내뱉었다.
쐐애애애애앵!
그와 동시에……!
군림맹 검대주들의 검기가…….
청협문의 단우혁이 내지른 대도파랑(大刀波浪)이…….
검우 정천의 적룡파천이…….
이서휘에게 달려드는 두 명의 환마가 장로에게 동시에 쏟아졌다.
쐐애애애앵! 쏴아아악! 콰아아아! 쩌정! 쩌정!
지켜보고 있던 검림의 백발노인의 신형이 사라지고…….
콰아아아아아아앙!
장로 한 명이 서너 명에게 날아오는 검기를 튕겨내다가 끝내 단우혁이 내지른 대도파랑을 맞고 멀리 날아갔다. 그보다 더 경공이 빨랐던 장로 한 명은 이서휘의 검기를 튕겨내고 다가오다가, 어느새 등장한 검림의 백발노인이 치켜든 지팡이에 가로 막혔다.
떠엉!
그 찰나에……
이서휘의 좌우에 이서휘를 호위하듯이 도이와 도삼이 소리 없이 내려섰다.
그때 이서휘를 향해 과연 이것이 사람이 들 수 있는 크기일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바위가 날아왔다.
이서휘는 바위의 궤적을 보자마자 암연심검의 환을 내질렀다. 투악!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에 구멍이 뚫리자 이서휘가 그대로 백야검으로 암천세를 쏟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바위가 동서남북으로 쪼개지더니 공중에서 흩어졌다.
“복수를 기다려라.”
어디선가 괴패마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어서 두드드드드 소리와 함께 흑마에 올라탄 괴패마존이 낭아봉을 휘두르면서 달려 들어 장로 한 명을 낚아채 말에 태우고 사라지면서 말을 남겼다.
“퇴각한다. 십이역사(十二力士)는 후위를 맡아라.”
“존명!”
괴패마존의 명령에 의해 철갑으로 무장시킨 말에 올라탄 십이 명의 역사(力士)가 죽음을 각오한 기세로 튀어 나왔다. 역사들은 대부분 거대한 낭아봉이나 철못이 박힌 육중한 저봉(杵棒)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군림맹과 청협문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특히 괴패마존은 승검문을 성역까지 몰아놓고 궤멸하다시피 뭉개놓고 간 놈이다. 이서휘는 괴패마존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후퇴하는 마가 세력을 뒤쫓는 군림맹과 검림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그도 어느새 발걸음이 무거워져 있었다.
도삼이 말했다.
“추적할까요?”
그 말에 이서휘가 덥다는 듯이 인피면구를 뜯어냈다. 얼굴에 땀이 가득하고 입가에 피가 묻어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내가 쫓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수장을 더 잡긴 어렵겠다. 우리가 검대의 후위를 맡자.”
“알겠습니다.”
도이는 온몸에 피칠갑을 한 이서휘를 힐끗 보며 짧게 내뱉었다.
“고생했소.”
이서휘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고생 많았다.”
이서휘가 그제야 마음 편하게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