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검림>
묵연마존에게 다가가던 이서휘가 말했다.
“표국주로 위장하고 있었느냐?”
묵연마존은 겨우 일어나 앉은 자세에서 어깨에 박힌 유엽비도를 뽑아내며 말했다.
“협상…… 협…… 크악! 제기랄!”
묵연마존의 철선은 어느새 바닥 한쪽에 떨어져 있었다. 때문에 묵연마존은 자신의 어깨에서 뽑아 쥔 유엽비도를 이서휘를 향해 치켜 들며 말을 이었다.
“협상을 해보자. 너는 아직 궁금한 게 많을 터.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마. 퉤…….”
묵연마존은 말을 마치고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이서휘가 묵연마존의 앞에 다가와 쪼그려 앉아 시선의 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네가 아는 게 무엇인데?”
“내가 심은 간자들…… 경쟁자들이 심어 놓은 세력…… 경쟁자들의 정체…… 네가 알아야 할 것은 많다.”
“밀고를 하시겠다?”
묵연마존이 말했다.
“잘 생각해라. 내가 죽으면 군림맹과 네 놈을 알던 모든 자들이…….”
이서휘가 묵연마존의 말을 자르며 대꾸했다.
“군림맹은 강해졌다. 더 강해질 것이고.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크흐흐흐, 네 놈이 뭐라도 되느냐? 네 놈이 뭔데?”
이서휘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데 묵연마존이 내민 유엽비도가 이서휘의 목으로 뻗어 나왔다. 이서휘가 앉은 자세에서 청협비수로 유엽비도를 튕겨내다가 묵연마존의 팔과 심장 부위를 연달아 찔렀다.
푹푹푹! 푸욱!
이서휘는 심장을 찌르고 뽑아낸 청협비수로 곧장 묵연마존의 목 부위를 눌렀다. 툭 하고 비수의 날이 살짝 박히자, 이서휘는 그대로 묵연마존의 인피면구를 뜯어냈다.
이미 숨이 끊어진 묵연마존의 실제 얼굴은 청년이라 부르기엔 나이가 제법 있어 보였다.
이서휘가 씁쓸하게 말을 내뱉었다.
“묵연아, 협상 결렬이다.”
이서휘는 다시 청협비수를 가볍게 그어서 의복 중앙을 경쾌하게 갈랐다. 그러자 잿빛 의복 좌우에 흑색과 백색의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이서휘는 청협비수를 다시 허리춤에 꼽고 주머니를 챙긴 다음에 바닥에 놓인 유엽비도를 챙겼다.
어느새 아침 해가 쨍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이서휘는 덩그러니 놓인 철선을 주워서 오른 손에 쥐고 선풍표국으로 향했다. 왼손에는 무슨 생각에선지 묵연마존의 인피면구가 쥐어 있었다.
☆ ☆ ☆
이서휘는 객잔 몇 곳을 물어 선풍표국을 알아낸 다음에 주변을 살펴보다가 대뜸 선풍표국의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짐꾼으로 보이는 자가 서너 명 다가와 말했다.
“뉘시오?”
이서휘는 철선으로 짐꾼 한 명의 머리통을 딱 소리가 나도록 때린 후에 말했다.
“대청으로 모여라.”
짐꾼 한 명이 이서휘의 손에 들린 철선을 보더니 “네!”하고 우렁차게 대답한 다음에 후다닥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이서휘는 대청 문을 발로 힘껏 차서 열어버린 후에 하품을 하며 말했다.
“피곤한 날이구나.”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몇몇 표사들이 뜨악한 얼굴로 이서휘를 바라봤다. 이서휘가 손에 들고 있던 인피면구를 탁자 위에 던진 다음에 상석에 가서 자연스럽게 앉았다. 이서휘는 철선으로 일으킨 바람으로 얼굴을 식히면서 돌아가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에서 뺨으로 이어지는 검흔 때문에 가장 인상이 험악해 보이는 표두가 미간을 좁히며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그 표두를 잡아먹을 듯이 살기를 담아 노려봤다. 그 눈빛에 표두가 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오셨습니까? 기 표두와 정 표두를 도중에 만나셨는지요?”
이서휘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다 죽었다.”
“네?”
그때 짐꾼들이 모아온 선풍표국의 사람들이 하나둘 대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대청에 모두 모이자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이 끼이익 소리와 함께 대청 문을 닫았다. 짐꾼들은 이서휘와 감히 눈을 마주치는 자가 없었고 몇 명의 표두들이 힐끔거리며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노야들은?”
한 명이 대꾸했다.
“연락을 넣을까요?”
“됐다.”
이서휘가 철선으로 인피면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노출된 얼굴이니 다른 거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누군가가 대답하더니 인피면구를 챙겨서 품에 넣었다.
그나저나 이서휘의 목소리는 묵연마존과 다르다.
선풍표국 사람들은 묵연마존이 종종 인피면구를 바꿔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듣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서서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고 있었다.
이서휘 역시 목소리를 바꾸는 재주 따위는 배운 바가 없었다.
하지만 묵연마존의 수하들은 목소리가 달라진 것에 대해 무엄하게 질문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장로들 혹은 장로의 제자들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서휘가 묵연마존의 인피면구와 철선을 들고 있고, 상석에 앉은 태도도 한 점 어색한 부분이 없어 대부분 고개만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기 표두, 정 표두는 다 죽었고 이곳도 노출될 위험이 크다. 무거운 짐은 버리고 전표만 챙겨 오너라.”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표사 한 명이 안채로 이동했다. 그러자 얼굴에 칼자국이 난 표두가 다시 말을 꺼냈다.
“어느 세력이 오는 것입니까?”
이서휘를 쳐다보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 이서휘가 표두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대청에 모인 자들에게 싸늘하게 내뱉었다.
“너희는…… 내 본 모습을 봤으니 이 자리서 죽어 마땅하다.”
그 말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릎을 재빠르게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몇 명의 표두들도 뒤늦게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서휘가 입도 뻥긋 하지 못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포로들은?”
“아직 몇 명 남았습니다.”
또 다시 칼자국이 난 표두가 대답하자, 이서휘가 칼자국 표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네 놈이 이곳의 우두머리로구나.’
칼자국 표두가 말을 이었다.
“지금 내려가서 다 죽이고 오겠습니다.”
“너…….”
“네, 표국주님.”
“고개 들어.”
표두가 고개를 들자 이서휘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내가 내려가서 죽이라고 하더냐?”
“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네 놈 눈빛은 죄송하다는 눈빛이 아닌데?”
“저 말씀드리기 외람되지만 표국주님 목소리가 혼란스러워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실로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그때 표사 한 명이 문갑을 하나 들고 와서 이서휘에게 공손하게 내밀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분위기 또한 살벌하자, 표사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남들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이서휘가 문갑을 열자, 전표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차라락 소리와 함께 대충 훑어본 다음에 전표를 꺼내 품에 챙긴 이서휘가 말했다.
“포로들 이곳으로 데려와. 직접 죽이겠다.”
“알겠습니다.”
누군가 안채로 달려가자, 이서휘의 명령에 다시 몇 명의 표두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옆으로 돌려 서로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서휘는 잠자코 있었다.
잠시 후 대청 밑에서 철컹, 철컹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팔목에 감긴 쇠사슬이 감긴 대여섯 명의 남녀들이 대청으로 들어왔다.
낯빛들이 전부 초췌하고 창백했다.
그 중 한 명은 삼십 중반의 무인이었는데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겁도 없이 상석에 앉아 있는 이서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이게 전부냐? 왜 이리 적어.”
이서휘가 삼십 중반의 무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구냐? 저 자는.”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표두가 힐끗 확인하곤 대답했다.
“흑도맹 하진경(何殄倞)입니다.”
이서휘가 하진경을 보며 말했다.
“별호가 무엇이냐?”
그 말에 하진경이 대답 대신 카악 소리와 함께 가래를 끌어올려 퉤 하고 내뱉으며 말했다.
“혈홍귀도(血紅鬼刀)라 한다. 자신 있으면 삼십 초만 겨뤄보자꾸나.”
그 말에 표사들이 하진경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다들 조용.”
이서휘가 오히려 성을 내는 표사들을 자제시키고 말을 이었다.
“좋아. 저 자의 수갑을 풀어줘라.”
명을 거역할 분위기가 아닌지라 지하에서 포로들을 데려왔던 표사가 열쇠 꾸러미를 꺼내 하진경의 수갑을 풀어줬다. 그러자 하진경이 콧방귀를 끼며 자신의 팔목을 연신 쓰다듬었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저 포로들도 수갑을 풀어라. 그리고 다들 그만 일어나라.”
철컥 소리와 함께 포로들의 수갑이 풀릴 때마다 이서휘는 포로들의 나이와 표정을 살폈다. 스물 중반의 청년은 살기를 띤 표정으로 이서휘와 얼굴에 칼자국이 난 표두를 번갈아가며 노려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철선으로 스물 중반의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본래 이곳의 주인이냐?”
“네 놈들이 죽인 내 아버님이 주인이셨다.”
“그러하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유엽비도를 꺼내 하진경에게 휙 던졌다. 하진경이 받기 좋게 던진 터라 탁 소리와 함께 유엽비도가 하진경의 손에 절묘하게 들렸다.
하진경이 잠시 의아한 낯빛으로 이서휘를 바라보자, 이서휘가 말했다.
“혈홍귀도(血紅鬼刀), 포로들을 제외하고 다 죽여라.”
“뭐라고?”
혈홍귀도 하진경은 반문을 하면서도 손에 든 유엽비도를 꽉 쥐고 있었다. 당한 게 많았는지 유엽비도를 쥐자마자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표두와 표사들이 이서휘와 하진경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칼자국 난 표두가 이서휘에게 말했다.
“표국주 어르신, 이게 무슨…….”
그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혈홍귀도는 강하니까 너희가 전부 덤벼야 할 것이다.”
“흥! 흐하하하하!”
혈홍귀도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유엽비도로 이서휘를 가리켰다.
“이게 무슨 자신감이지? 너부터 내 도를 받아라.”
그 말에 이서휘가 콧방귀를 내뀌며 대꾸했다.
“하진경……. 네 손에 들린 게 내 도다. 방금 빌려준 것이야. 네 놈에게 준 게 아니라.”
표두들의 표정에 의혹이 감돌자 하진경은 무언가 낌새를 눈치채고 유엽비도를 휘둘러 가장 가까이에 있는 표사의 목을 날리면서 싸움을 시작했다.
표두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검을 뽑았다.
“이런 개새끼가!”
이어서 표사와 표두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들고 하진경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챙챙! 챙챙! 푸욱! 푸악!
하진경은 혈홍귀도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도법을 펼치면서 핏물을 뿜어대고 있었다. 유엽비도를 휘두를 때마다 표사와 짐꾼들은 대부분 일도를 받아내지 못하고 피를 뿌렸고 어느새 몰려든 세 명의 표두들이 하진경을 포위하고 검과 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 하진경이라는 사내…… 그야말로 거친 남자였다.
팔이 베이고 허벅지가 베이는 와중에 한 명의 표두를 발로 차서 날리고, 급히 몸을 비틀었다.
휙휙!
검과 도가 연달아 날아오자 하진경은 급히 땅을 구르면서 표두의 발목을 베고 일어나면서, 다가오는 칼자국 표두와 도를 부딪쳤다.
챙챙챙챙!
발목이 잘린 표두가 바닥에 쓰러져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하진경과 칼자국 표두가 불꽃을 튀기면서 맞붙는 와중에 기회를 엿보던 표두 한 명이 하진경의 등에 검을 내질렀다.
그 순간…….
쐐앵――!
지켜보고 있던 이서휘가 청협비수를 던져 하진경의 등을 찌르려던 표두의 목을 꿰뚫었다. 청협비수는 표두의 목을 관통해 맹렬한 기세로 뻗어나가 벽에 콱 소리가 나도록 박혔다.
하진경은 이서휘의 행동과 무위에 놀라면서도 유엽비도를 들어 칼자국 표두를 몰아붙였다.
챙챙챙챙!
그때 칼자국 표두가 검을 큰 동작으로 내려치자, 감금되는 동안에 기력이 많이 빠져 있던 하진경이 유엽비도를 놓쳤다.
쨍끄랑!
하지만 하진경은 그대로 칼자국 표두가 내지른 팔목을 붙잡고 잡아당긴 후에 함께 엉켜서 바닥으로 와당탕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금기시 되는 행동이었으나 하진경은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내였다.
하진경이 기력을 짜내어 고함을 지르자, 꽈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칼자국 표두의 팔이 반대 방향으로 꺾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진경은 칼자국 표두가 숨이 끊길 때까지 주먹을 내질렀다.
퍼버버벅! 퍼벅! 퍽! 퍽! 퍽!
이서휘가 나지막이 말했다.
“하진경, 그만해라……! 이미 죽었다.”
“허억, 허억, 허억…….”
하진경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돌아봤다. 하진경의 몸에도 대청 바닥에도 그야말로 혈홍(血紅)이 가득했다. 하진경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끝내 바닥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자들까지 숨통을 끊어 버린 후에 크게 어깨를 들썩이며 이서휘를 노려봤다.
“하아…… 하아…… 후우! 네 놈도 오너라. 이제…….”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어났다.
하진경은 저 혼자 이서휘를 경계하며, 유엽비도를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하진경을 무시하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이서휘가 품에서 전표 몇 장을 꺼내 살피다가 청년에게 넘기며 말했다.
“이 정도면 표국 하나 새롭게 세울 수 있을 거다. 받아라.”
그 말에 청년의 눈이 화들짝 커지면서 대꾸했다.
“아닙니다.”
“필요 없다고?”
청년이 침을 꿀꺽 삼키자, 이서휘가 전표를 던지듯이 청년에게 넘겼다. 이서휘가 청년에게 건넨 몇 장의 전표만 해도 청년이 삼대(三代)에 걸쳐서 표국 일을 해도 모으지 못할 큰돈일 터였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남으면 좋은 일에 써라. 아껴봤자 이런 놈들에게 또 다시 잡히면 재물이 무슨 소용이냐?”
이서휘의 말에 청년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꾸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때, 이서휘가 등 뒤에 있는 하진경에게 싸늘한 말투로 경고했다.
“하진경, 황천(黃泉) 가는 수가 있다.”
하진경이 움직이다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자, 이서휘가 청년에게 말을 이었다.
“이곳은 즉시 불태우고 멀리 떠나서 표국을 세우는 게 좋겠다. 내가 떠나면 바로 불태우도록.”
청년이 급히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가, 감사합니다!”
청년이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동생들에게 말했다.
“어서! 인사를 드리지 못하겠느냐?”
“감사합니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청년의 동생들이 그제야 허리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서휘가 그제야 하진경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내 놔.”
“흐음.”
어찌 할까 잠시 고민하던 하진경이 유엽비도를 건네며 말했다.
“한데, 자네 누군가?”
이서휘는 대꾸를 않고 유엽비도를 확 낚아챈 다음에 등에 꽂았다. 이서휘가 청협비수를 던졌던 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다들 떠날 준비해라. 그리고 하진경, 너는 이 사람들을 해할 수 있으니 내가 못 믿겠다.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와라. 조금 멀리 가서 놓아주마.”
“뭐라고?”
하진경이 인상을 그으며 대꾸하자, 청협비수를 챙긴 이서휘가 싸늘한 표정으로 하진경을 바라봤다.
“그냥 여기서 처죽고 싶으냐?”
말과 함게 이서휘가 유엽비도를 꺼내려는 듯이 팔을 뻗자, 하진경이 대꾸했다.
“아, 마침 출출하던 참인데 같이 나가세 그럼.”
이서휘가 팔을 내리고 대청 문을 열고 나가자, 청년 일행이 우르르 쫓아 나오며 말했다.
“은공, 제발 성함만이라도…….”
이서휘가 그냥 휘적휘적 걸어가자 청년이 절을 하는 것처럼 엎드린 채로 말했다.
“은공! 표국 이름이라도 지어 주십시오. 나중에 저희 표국이 보이시면 언제든 아는 척을 해주십시오. 오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표국 이름을 지어달라는 말에 이서휘도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돌려 청년과 동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낭혼(浪魂)이라 지어라. 낭혼표국.”
“낭혼이요?”
“왜? 싫으냐?”
이서휘가 전생에 만들었던 낭인 연합의 이름이 낭혼련(浪魂聯)이었다. 지금 생애에서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연합이니 누가 쓰든 상관이 없었다.
이서휘가 말을 덧붙였다.
“이제 너희는 이곳으로 오면 안 된다. 고향을 잃은 게지. 멀리 떠나서 표국을 세워라. 돌아갈 곳 없는 자가 낭인이니 낭혼표국도 틀린 말은 아니야.”
그제야 청년이 납득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반드시 낭혼표국을 은공이 어디서든 이름을 들을 수 있도록 키워 놓겠습니다.”
“그래. 기대하마.”
이서휘가 힐끗 하진경을 바라보다 표국 밖으로 휙 나갔다. 하진경은 도망을 칠까, 이서휘에게 덤빌까 고민하다가 결국 이서휘를 따라갔다.
이서휘가 빠른 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한데, 뒤쫓아 오는 하진경이 걸음을 늦출 때마다 이서휘가 귀신처럼 돌아봤다.
하진경이 쩝 소리를 내며 말했다.
“뭐라도 좀 먹고 가세. 배도 고프고 상처가 많아서 원.”
“흐음.”
이서휘가 객잔 거리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허름한 객잔 한곳으로 쑥 들어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국수 한 그릇을 국물과 건더기까지 깨끗하게 비워냈다. 하진경이 소매로 입가에 묻은 국물을 쓰윽 닦으며 말했다.
“더 먹어도 되나?”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진경이 젓가락으로 그릇을 탕탕 두들기며 점소이게 말했다.
“어이! 하나 더 가져오게.”
하진경이 괜시리 콧구멍을 한 번 벌렁거리더니 이서휘에게 말했다.
“좀 이르긴 하지만 술도 한 잔 할까?”
하진경은 마치 자기가 살 것처럼 이서휘에게 물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진경이 점소이에게 외쳤다.
“여기 가장 좋은 술로 한 병 내오게.”
하진경은 대놓고 뻔뻔한 면이 있었다.
이서휘가 피식 웃다가 말을 이었다.
“흑도맹의 당대 맹주가 누구인가?”
그 말에 하진경이 쓰읍 소리를 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근데 이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흑도맹주님이 자네 친구인가! 어? 그리고 말투가 점점……! 나이도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내가 자네 목숨을 살려 준 것으로 기억하네만.”
“뭐? 그것은 고마운 일이지!”
점소이가 가져온 술병을 냉큼 낚아채더니 하진경이 이서휘에게 술을 한 잔 따르며 말을 이었다.
“한 잔 하세!”
두 사람이 술을 들이켰다. 또 다시 국수가 나오자 하진경이 힐끗 이서휘를 보면서 후루룩 소리와 함께 면을 빨아 들였다. 젓가락을 세 번 정도 휘젓자 어느새 또 그릇이 텅텅 비어 있었다.
“꺼억…… 이제 살 것 같군.”
이서휘가 말했다.
“누구한테 잡힌 건가?”
하진경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인이었는데…….”
하진경이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서휘가 말을 이어 받았다.
“몇 초 버텼나?”
이서휘는 하진경이 펼치는 무공이 어떤 수준인지 가늠해 둔 상태. 아마도 하진경은 묵연마가의 장로에게 잡힌 것이리라 생각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하진경이 대꾸했다.
“한 팔십여 초는 겨뤘던 거 같은데 대체 어디서 그런 고수가…….”
하진경의 말을 자르면서 이서휘가 대꾸했다.
“한 삼십 초 겨뤘나보군.”
하진경은 거짓말하는 게 어설픈 성격이라 쩝 소리를 내더니 술을 또 들이켰다.
이서휘가 말했다.
“저 자들, 마교일세.”
“마교?”
하진경은 되물으면서 표정이 딱딱하게 굳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표국에 있던 놈들은 마교라 하긴 그렇고. 수뇌부들은 마교가 맞네. 맹에 가서 보고하게.”
그 말에 하진경이 대꾸했다.
“마교라……. 한데 자네는 대체 누군가?”
“그냥 자네 목숨 살려준 사람으로 생각하시게.”
이서휘가 하진경을 바라봤다.
상대는 엄연히 사파의 인물이다…….
전생에서, 흑도맹의 정예 무인들이 마교를 상대로 분전을 했었기에 이서휘가 살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흑도맹도 훗날 다른 맹처럼 사분오열(四分五裂) 했으나 그들의 저력은 마교의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대단한 면이 있었다.
하진경이 싸우는 모습만 해도 격렬하기 그지 없지 않았던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이서휘가 일어나자 하진경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보게…….”
하진경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 백도 세력인가 보군. 상관없네. 나는 빚진 것은 반드시 갚는 사람. 자네가 내 목숨을 살려준 것과 도를 빌려줘서 복수까지 하게 해준 것까지……. 이 하진경이 잊지 않겠네.”
“후후.”
이서휘가 객잔 밖으로 나가려는데 하진경이 헛기침을 하며 일어섰다.
“잠시만!”
이서휘가 고개를 돌려 대꾸했다.
“뭔가?”
하진경이 눈을 몇 번 껌벅이더니 말을 이었다.
“여기…… 계산도 좀 부탁하네.”
“후우…….”
이서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기도 애매하고 화를 내기도 실로 애매한 상황. 하긴, 이서휘가 계산을 해주지 않으면 객잔 하나쯤은 몽땅 때려 부술 수도 있는 놈이었다.
이서휘가 전표를 하나 꺼내려다 금액이 너무 커서 동전 몇 개를 탁자에 올려놓고 나갔다. 이서휘가 나가자 하진경이 급히 달려와 탁자 위에 놓인 동전을 세고 씩씩댔다.
“크으! 이런 쪼잔한 새끼…… 좀 넉넉하게 두고 가지. 전표가 수두룩하더만…….”
한편, 이서휘는 멀리 가지 않고 객잔 근처에서 잠시 있다가 하진경이 나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선풍객잔 쪽으로 가서 청년들의 돈을 갈취할 생각이면 때려잡거나 묵연마존의 품에서 취한 독약을 먹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진경이 무어라 구시렁대면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자, 이서휘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문득 이서휘가 고개를 돌려 보니 저 멀리 선풍객잔이 있는 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잘 키워내라. 낭혼표국.’
이서휘는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에 잠겼다.
‘번뇌마존, 명천이라 불리던 마존, 묵연마존까지 세 명이 죽었다. 일곱이 남았고 그 중 한 명은 낭아봉을 쓰던 괴패마존. 아직 여섯의 정체를 모르는구나. 그 중 한 명이 위극신일 터인데…….’
아무래도 이서휘의 전생에는 위극신으로 후계자가 좁혀질 때까지 암중에서 모략을 펼쳤으리라.
물론 그 모략은 대단히 효율적이었다.
이서휘가 막아내지 않았다면 가장 먼저 천뢰각주 한신이 죽었을 테고, 남궁위가 부상을 당하고, 군사회와 운룡회에 숨어 있던 간자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다녔을 터.
그뿐이 아니다.
군림맹과 가까운 응천 지역이 아예 마도 세력에게 먹혔을 터였다. 병력이 점점 늘어나 언제든 군림맹을 뒤흔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서휘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그렇다면 다른 마존들도 백도나 흑도 세력 주변에 머무르고 있다는 얘긴가?’
가능성은 충분했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군림맹이 백도 세력에게 파발을 보낸 터라 백도 세력 전체가 바짝 긴장하고 있을 터.
더군다나 하진경을 살려 보내서 흑도맹도 마교의 움직임을 살펴볼 게 분명했다.
때문에 이서휘는 군림맹의 월야대로 바로 복귀하지 않고 잠시 품에 넣어둔 양피지를 떠올렸다.
몸이 피곤했으나 이서휘는 일부러 경공을 펼쳐서 남쪽으로 내달렸다.
한 시진 후에 객잔 한 곳에 들어간 이서휘는 삼 층 안쪽의 방에 들어가 자강검이 뱉어낸 종이를 탁자에 꺼냈다.
순간 이서휘는 피식 웃음이 났다.
전생에 설령 이걸 얻었어도 눈이 온전하지 않으니 비밀을 알아낼 수 없었으리라. 때문에 이서휘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종이를 살펴봤다. 누런빛을 띠고 있어 양피지라 예상한 것이었으나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햇빝 아래에서 자세히 들여다보자 엷은 기름종이가 앞뒤로 겹쳐 있는 것이라 양피지라 보기엔 어려웠다.
크기도 손바닥 두 개를 합친 정도 밖에 되질 않았다. 이서휘가 옆면을 살펴보다가 맨 위에 덮인 기름종이를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반대편의 기름종이는 더 두꺼웠다. 그것마저 떼어내자 펄럭이는 종이 한 장에 지도와 글귀가 있었다.
[노산(崂山) 백미봉(白眉峯)의 연무동(煙霧洞)에서 연자(緣者)를 기다리노라. 그대는 검림(劍林)에 들 자격이 있다.]
이서휘가 침음성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기다린다고? 검림?”
이서휘가 전생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일이다. 그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은 일이다. 이서휘는 문득 부러진 자강검을 뽑아서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노산이라…….”
강서의 노산(崂山)일 터였다. ‘험할 노’라는 이름이 붙은 산이다. 말 그대로 험준한 산이다. 몇몇 높은 봉우리에 오르면 구름이 바다처럼 펼쳐진 것을 볼 수 있다고 들었다. 하나, 이서휘가 직접 가본 적은 없었다. 안휘를 넘어야 하니 제법 시간이 걸릴 터……. 다만 안휘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산이라 무리를 해도 될 듯싶었다.
이서휘는 자강검까지 부러진 마당에 이 유혹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도중에 군림맹으로 전서를 보내기로 하고 이서휘는 노산으로 향했다.
☆ ☆ ☆
며칠 후 이서휘는 노산 근처에 도착했다. 중간에 전서도 보내고 말도 여러 필 구입했다. 꼭 필요한 날에만 인근에서 가장 좋은 객잔에서 피로를 풀고 노산으로 다시 향했다.
이서휘는 노산에 도착하자마자 험준한 산세에 놀라고 자욱이 깔린 안개와 호수의 절경(絶景)에 다시 놀랐다. 의외로 백미봉이라는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백미폭포라는 곳이 유명했던 것. 봉이라지만 하나의 험준한 산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곳에서부터는 지도를 보면서 연무동을 찾아냈다.
연무동이라는 글씨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대신에 험준한 백미봉에 오르자 이미 운해가 짙게 깔리기 시작했고, 어느 동굴로 안개, 즉 연무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서휘는 그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자마자 저 곳이 연무동임을 알아차렸다.
이서휘가 안개에 휩싸여 연무동으로 들어갔다. 길게 이어진 동굴을 지나자 깎아 내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공터가 나왔다. 하지만 공터 안에 안개가 자욱해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말 그대로 구름으로 이뤄진 바다 가운데에 이서휘가 서 있었다.
이서휘가 그 운해의 중심에서 중얼거렸다.
“검림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그그그긍――! 소리와 함께 이서휘가 들어왔던 연무동의 입구가 닫히고 있었다.
이서휘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경공을 시전해 움직이려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검림(劍林)은 애초에 없었네. 검총(劍塚)만이 있을 뿐…….”
검총(劍塚).
검의 무덤이다.
이서휘가 침음성을 흘리는데 안개 사이로 누군가의 신형이 살짝 드러났다.
입구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 때문에 이서휘가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서휘도 기척을 놓칠 정도로 대단한 고수라는 말일까.
이서휘가 긴장한 목소리로 입구에 흐릿하게 보이는 신형을 향해 물었다.
“누구시오?”
“자네는 누구인가? 내가 머무는 곳에 멋대로 들어와서 누구냐고 묻다니 실로 건방진 사람이로군.”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서휘는 존댓말로 대꾸했다.
“군림맹의 이서휘라 합니다.”
이서휘가 자신을 밝혀도 상대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다만 연무동의 문이 닫힌 이후에 안개가 스며들지 않아 서서히 이서휘가 서 있는 곳의 정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백의장포의 중년인이 뒷짐을 지고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낯선 사람이었다.
노산의 산세가 무척 험하고 신선이 살 것 같은 분위기여서 잠시 사부님을 떠올렸던 이서휘.
하지만 저잣거리에서 낭인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부가 이런 곳에 머무를 리가 없었다.
한데 중년인의 나이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적게 보면 삼십 후반으로 보이기도 하고, 많게 보면 오십이 넘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이렇게 험한 산속에 머무르면서도 의복이 깨끗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안광마저 날카로운 중년인이었다.
중년인 역시 이서휘를 자세히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곳에 왔나?”
적의(敵意)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이서휘가 순순히 대답했다.
“쓰던 검이 부러졌는데 이 장소를 가리키는 지도가…….”
이서휘가 부러진 자강검을 꺼내자, 중년인이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연자의 방문이었군. 그 검, 줘보겠나?”
이서휘가 다가가서 자강검을 내밀자 중년인이 빙긋 웃으며 검을 받아 들었다. 중년인이 부러진 검을 뽑아서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어쩌다 부러졌나?”
“겨루다가 부러졌습니다.”
“운이 좋았군.”
“네?”
이서휘의 반문에 중년인이 대꾸를 하지 않고 부러진 자강검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부러진 검신에서 즉시 검명이 울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중년인이 말없이 자강검을 바라보고 있자, 이서휘가 말했다.
“어째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어째서라니……. 나도 몰라.”
말을 하며 중년인은 빙긋 웃었다. 이서휘가 중년인의 표정을 살폈다. 모른다기 보다는 알려줄 생각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중년인이 이서휘의 눈을 바라보다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만 좀 쳐다보게. 독심술이라도 쓰려고 그러나?”
“아, 아닙니다.”
“군림맹의 이서휘라고?”
“네, 그렇습니다.”
중년인이 동굴 입구 옆쪽에 있는 둔덕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연자를 보니 반갑군. 노산을 내려가지 않은지 오래되었어. 친구도 연자도 요새는 발길이 뜸하다네. 맡은 일이 이곳의 묘지기인지라 머무르고 있을 뿐이지. 아, 자네는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게. 내 경고했네.”
“네? 알겠습니다. 한데 묘지기라니요?”
“무덤을 지키면 묘지기지.”
이서휘는 중년인과 멍청한 문답을 서로 주고받았다. 그러는 도중에도 이서휘는 문득 뒤를 돌아볼 뻔하다가 겨우 참고 있었다. 이서휘가 중년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드넓은 천하에 수많은 기인(畸人)과 이사(異士)들이 숨어 있는 무림이라지만 검총에 묘지기라니……. 실로 기가 차는군.’
뒤를 돌아보려다 계속 자제력을 발휘하는 이서휘를 보며 중년인이 말했다.
“바깥은 어떤가?”
이서휘가 대꾸했다.
“바깥은…… 폭풍 전야랄까요? 마교가 모습을 드러내어 몇 차례 백도 세력과 맞붙었습니다. 자강검도 그때 부러진 것이고요.”
“호오…… 소란스러워지겠군.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
“마교를…….”
죽여야지요, 라고 말하려다가 말이 적절하지 않아 멈춘 이서휘.
막아야지요, 라는 말도 어색했다. 이서휘는 뻔한 질문을 받고서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이서휘의 표정을 살피던 중년인은 바깥 세상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고민이 많은가 보군. 잘 생각해서 대처하게.”
“네.”
“그나저나 모처럼 방문한 연자가 마도와 맞서 싸울 생각이라니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야. 묘지기로서 보람이 있군. 자강검이 부러져 온 것이니 이제 검총에서 검 하나를 고르게.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욕심을 부리면 심마(心魔)에 빠질 위험이 있다네.”
중년인이 마치 안내를 하듯이 손을 척 올렸다. 그제야 이서휘가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때, 이서휘는 뒤를 돌아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말 그대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광경이었다.
“검총이라더니 이건 아예 검의 바다로군요.”
“후후.”
안개가 걷힌 공터는 이서휘의 예상보다 드넓었다. 그 드넓은 곳에 실로 다양한 병장기들이 무덤을 본 뜬 것 같은 조그만 둔덕에 꽂혀 있었다. 어떤 둔덕에는 검이 꽂혀 있다가 빠졌는지 구멍만 덩그러니 뚫려 있었다.
이서휘가 빼곡하게 꽂힌 검을 향해 홀린 듯이 다가갔다.
한데 가까이 가서 살펴보자 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무림사를 관통하는 것처럼 실로 다양한 병장기들이 꽂혀 있었다. 검으로 시작해 도, 극(戟), 봉(棒), 괴(拐), 삭(朔)을 비롯하여 이서휘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무기들도 잔뜩 꽂혀 있었다. 심지어는 저 옛날 관운장이 썼을 법한 거대한 언월도도 꽂혀 있었다.
그야 말로 검의 바다! 아니, 병장기의 바다였다.
이서휘가 다양한 병장기들을 바라보다 질문을 던졌다.
“검총이라더니 온갖…….”
이서휘의 말에 중년인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모두 다 검일세. 의미 없는 이름에 불과한 것.”
이서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잠자코 시선을 돌리던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딱 봐도 마검(魔劍)으로 보이는 병장기가 꽂혀 있었던 것. 검병 부분에 해골이 전각되어 있었고 검신은 적갈색 빛을 띠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서휘의 눈에 기이한 병장기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사마외도가 쓸 법한 무기가 제법 있구나.’
왠지 모르게 이서휘는 등줄기가 서늘했다. 아무래도 기연을 찾아온 마도인들을 중년인이 죽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그나저나 병장기가 너무 많이 꽂혀 있다 보니 하나하나 살펴보던 이서휘의 눈이 순식간에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이서휘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중년인이 뒤편에서 말했다.
“고르기가 어렵나?”
중년인이 말을 건넸음에도 불구하고 이서휘는 검에 정신이 팔려 뒤늦게 대답했다.
“아, 그렇습니다.”
“천천히 고르게.”
“네.”
이서휘는 중년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잠시 눈을 껌벅이다가 병장기 사이를 지나서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일부 병장기는 검집도 없었고 어떤 병장기는 보기만 해도 섬뜩한 송곳이 잔뜩 박혀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빽빽하게 꽂혀 있는 병장기 사이를 조심조심 살피면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데 점점 앞으로 갈수록 훌륭해 보이는 병장기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색깔과 모양은 또 어찌나 다양한지…… 자세히 살펴볼수록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서휘는 문득 하나만 가져가야 하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을 부리면 심마(心魔)에 빠질 위험이 있다네.]
중년인이 분명하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서휘는 수많은 병장기를 바라보며 동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 들고 가서 나눠주고 싶군.’
이서휘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오, 검신의 폭이 넓은 장검이군. 시우 형님이 좋아하겠어. 저기 날렵하고 가벼워 보이는 검은 화지련에게 주면 좋겠군. 이야, 괜찮은 도(刀)도 많구나. 도둑 형제에게 주면 좋겠는데…….,’
아니, 아예 싹 다 들고 가서 질풍검대와 군림맹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이서휘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을 바라봤다.
다른 검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명검 두 자루가 각기 둔덕에 꽂혀 있었다.
하나는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순백색의 검이었다.
그 우측에는 강렬한 분위기를 지닌 적갈색의 검이 있었다.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세 자루의 검이었던 것 같은데…….’
가장 왼쪽의 둔덕에는 누군가 이미 검을 빼간 것처럼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한데 이서휘는 무공을 펼치지 않으면 명검이 꽂힌 둔덕에 내려서지 못할 것 같았다. 이서휘가 서 있는 곳부터 아예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검들이 빼곡했기 때문. 그 모습이 마치 이서휘를 시험하는 듯했다.
그때, 경공을 써서 솟구치려던 이서휘는 가까스로 자제하고 잠시 둔덕 주변을 살폈다.
무언가 위험이 도사리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검들의 위치도 어딘가 이상했다. 병장기를 피해 걸어가다 보니 마치 보법을 밟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아니다. 혹시 심법을 그리는 게 아닐까?’
이서휘의 숨이 잠시 거칠어졌다.
‘아니다…… 아니야…… 심법도 아니고 보법도 아니다.’
이서휘는 자신이 미혹(迷惑)에 빠졌다고 생각한 순간, 가부좌를 틀고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지켜보고 있던 중년인은 가부좌를 트는 이서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입구에서 나누던 대화부터 검총의 시험은 시작되었던 셈. 몇 마디 대화에서 이서휘의 대략적인 것을 파악한 중년인이었다.
만약에 이서휘가 사마외도의 무리였다면 중년인에게 즉각 공격을 당했을 것이다. 중년인은 이서휘를 가차 없이 죽이고 그가 지니고 있던 유엽비도와 청협비수도 검총 어딘가에 꽂아 두었을 것이다.
중년인은 그 어떤 조언도 하지 않은 채 자신도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마치 대결을 하듯이 가부좌를 틀고 침묵에 빠져 들었다.
본래 총명하고 동료애가 강한 이서휘다. 마검과 사마외도가 사용하는 병장기들이 꽂혀 있는 곳은 무심하게 잘 지나갔다. 하지만 동료들에게 검을 나눠주겠다는 생각을 할 때부터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또한 남들보다 쌓인 경험이 많았기에 명검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자승자박(自繩自縛)에 걸린 상태였다.
마음이 한껏 어지러워진 이서휘는 눈을 감은 채로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마음이 흐트러진 이유부터 찾았다. 동료를 살려야겠다는 두려움이 마음에 가득했다. 그럴만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죽어 나갔으니.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가 바뀌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이서휘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명검을 얻고 싶은 마음도 되돌아봤다.
결국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다. 벌어진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다.
이서휘 자신이 전생에서 칠흑검의 위력으로 승승장구 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명검의 가치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는가?
천마에게 패해 죽었지 않았던가.
이서휘의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시간이 대체 얼마나 흘렀는지도 가늠이 되질 않았다.
이서휘가 눈을 떴을 때는 언제 흘렸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눈물이 뺨에 말라 있었다.
여전히 이서휘의 주변이 검이 가득했다. 하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눈을 뜬 터라 더 이상 어지러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서휘가 생각했다.
‘검의 무덤…… 검이 죽어서 오는 곳. 아니다, 죽은 검이 있는 곳이다. 무얼 선택하든 마찬가지다. 겨우 검 한 자루…… 로 미래가 바뀌진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이서휘가 직접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칠흑검의 날카로움을 견딜만한 병장기는 무림에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검(名劍) 하나 얻겠다고 내가 이러고 있구나.’
검림과 검총…….
이서휘의 머리에 가득 찼던 미혹이 연무동의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이곳에 신검(神劍)이 있다 한들 이서휘가 전생에서 사용하던 칠흑검과 달라질 게 없을 듯싶었다.
이서휘가 드디어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자 중년인이 앉은 자세에서 눈을 번쩍 떴다.
“…….”
이서휘는 무심하게 검총을 바라보다가 미련 없이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이서휘가 병장기들 속에서 걸어나오는 것을 중년인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자네 뭐 하는 겐가?”
이서휘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서 있었다. 깨달음이 이서휘를 휘감고 있었다.
이서휘의 마음과 정신이 각성(覺醒)한 상태였다.
이서휘가 중년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마외도의 무리도 종종 기연을 찾아 이곳에 왔군요. 선배가 죽였습니까?”
중년인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대답하지 않겠네.”
“제가 마검을 골랐다면 역시 이곳에서 죽었겠군요.”
“후후.”
“저 멀리 둔덕에 꽂혀 있던 백색 검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가서 취하시게.”
그 말에 이서휘가 빙긋 웃었다. 이서휘가 잠시 검총을 돌아봤다. 하지만 백색 검을 가지러 갈 생각이 없는 듯한 발자국도 움직이질 않았다.
이서휘가 천천히 자세를 돌려 중년인에게 말했다.
“저는 검림(劍林)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이곳을 나가면 사마외도의 무리를 몰아내기 위해 힘을 쏟겠습니다.”
중년인은 대꾸를 하지 않고 이서휘를 위압적으로 노려봤다.
이서휘는 중년인이 보내는 눈빛을 감당했다. 더한 것도 감당할 생각이었다.
이서휘가 중년인에게 선언하듯 말을 건넸다.
“이 곳에서…….”
이서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단호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검 하나를 가질 수 있다면 당신을 선택하겠습니다.”
중년인의 고개가 갸웃했다.
“후후, 실로 재미있는 사람이로군.”
중년인은 말과 함께 뒷짐을 지고 이서휘를 무시하고 지나쳐 검총으로 걸어갔다. 중년인이 검총을 바라보는 자세에서 말을 이었다.
“나는 이곳을 지키는 묘지기일 뿐.”
그 말에 이서휘의 마음에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만약 중년인이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이서휘가 이토록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중년인은 고수였다!
이서휘의 전생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고수다.
무림이 어떻게 되든 간에 은둔자처럼 유유자적(悠悠自適)했을 사람이다.
이서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서휘가 분노를 담아 외쳤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검이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검총인 것입니다. 선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묘지기가 대체 무어란 말입니까? 대체 누가 내린 숙명이란 말입니까? 마도가 일어나 죄 없는 자들, 수많은 사람들이…….”
순간 이서휘는 마음이 울컥해져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중년인이 고수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 만나지 못했던 사람이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강자라고. 왜 이곳에서 묘지기를 자처하고 있는지는 이서휘가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서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죽은 검을 들고 나가느니 살아 있는 검(劍)을 동료로 만들겠다고.
이서휘가 감정을 추스르고 말했다.
“함께 갑시다.”
그때, 이서휘는 알 수 없었으나 중년인의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중년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중년인이 불쑥 백색장포를 휘날리면서 훌쩍 솟구치더니 이서휘가 말한 백색 검이 꽂힌 둔덕에 내려섰다. 중년인이 내공을 주입하더니 백색 검의 검병을 붙잡고 눌렀다.
그그그그그긍!
굉음과 함께 연무동의 문이 다시 열렸다. 중년인은 뽑아든 백색 검을 쥐고 꽈앙! 소리와 함께 솟구쳐서 수많은 병장기들을 지나쳐 백의장포를 휘날리며 순식간에 내려섰다.
중년인이 이서휘에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검림(劍林)에 온 것을 환영하네.”
이서휘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자, 중년인이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이었다.
“……패배한 이후 검총의 맹세로 무림에 흩어졌던 검들이 그대를 검림주(劍林主)로 모실 것이네.”
<4권에서 계속>